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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스캔달[11회~15회]

문수봉(李楨汕) 2017. 12. 12. 22:49

조선왕조 스캔달[11회~15회]


중종의 이혼, 고종과 역술가, 정조의 역사기록,  세종의 편애,선조의 거짓 복수,



11. 공포심에 찌든 중종, 강제이혼 당하다 

이복형 연산군 폐위 이후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돼

…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눈치보다 조강지처와 생이별, ‘천추의 한’ 남겨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공신들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조강지처를 버려야 했다. 뮤지컬에서 중종 역을 맡은 배우(왼쪽)가 열연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 중에는 남편이 왕위에서 쫓겨남에 따라 덩달아 쫓겨난 왕비도 적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이혼 당해 쫓겨난 왕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에게 이혼당한 폐비 윤씨, 중종에게 이혼당한 폐비 신씨 그리고 숙종에게 이혼당한 장희빈 등이 그랬다. 이들 중에서 윤씨와 장씨는 남편인 왕에게 미움을 받았기에 이혼당했다.

그러나 폐비 신씨는 남편 중종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이혼당해야만 했다.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신들의 강압 때문이었다. 중종반정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이른바 반정 3대장이 주도했는데 특히 박원종의 역할이 컸다.

박원종은 박중선이라는 사람의 외아들이었다. 박중선은 무과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무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세조 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해 적개공신 1등이 된 이후에도 남이 장군의 옥사 이후 책봉된 익대공신 3등과 성종의 즉위를 찬조하고 책봉된 좌리공신 3등에도 연이어 책봉됨으로써 세조 대에 형성된 훈구공신의 일원이 됐다. 게다가 그의 두 딸이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부인이 됨으로써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기도 했다. 그런 박중선의 외아들인 박원종은 아버지의 기질과 유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세조 13년인 1467년에 태어난 박원종은 연산군보다 9세 위였고 중종보다는 21세 위였다. 박원종은 9척 장신의 거구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나이였다. 실록에서는 박원종을 ‘풍자(風姿)가 아름다웠다’고 했는데 ‘모습과 자태가 멋있었다’는 뜻이다.

박원종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까지 겸비한 ‘몸짱’, ‘얼짱’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박원종은 아버지를 닮아 무술에도 재능을 보여 무과에 합격하기까지 했다. 가문·인물·무술실력 등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박원종은 성종 대와 연산군 대에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박원종이 연산군 대에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본인의 실력 이외에 누나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있었다. 박중선에게는 아들이 박원종 한 명뿐이었지만 딸은 일곱이나 됐다. 그 딸들 중에서 첫째 딸이 월산대군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이 제안대군에게 시집갔다. 혼처로만 보면 이 두 딸이 시집을 잘 간 것 같지만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특히 월산대군에게 시집간 박씨의 시집살이가 파란만장했다.

박원종의 자형(姊兄)이 되는 월산대군은 인수대비 한씨의 큰아들로 성종의 형이다. 예종이 승하한 후, 월산대군과 성종 중에서 서열대로 후계자를 골랐다면 왕이 될 사람은 월산대군이었다. 월산대군이 왕이 됐다면 부인 박씨는 왕비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동생 성종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다. 부인 박씨도 왕비가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월산대군은 부인과 함께 조심조심 여생을 보내다가 1485년(성종 20) 35세의 젊은 나이에 동생 성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누이에게 자진(自盡) 권유한 뒤 거사 일으킨 박원종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북로변에 있는 ‘망원정’은 당초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별장(희우정)으로 지었다. 이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고쳐 지으며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꿨다 


딱하게도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靑裳寡婦)가 되고만 박씨 부인에게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홀로 된 박씨 부인은 남편의 무덤 옆에 흥복사라는 절을 짓고 가끔 절에 들러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이런 박씨 부인의 인생이 1497년(연산군 3)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왕이 된 지 3년 만에 큰아들을 본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가 되는 박씨 부인에게 아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연산군의 아들을 기르던 박씨 부인에게 또 한 번 큰일이 닥쳤다. 1498년(연산군 4)에 박씨 부인의 넷째 여동생이 8세 된 딸을 남겨놓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박씨 부인은 그 여동생의 딸을 데려다가 기르기 시작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라 해도 어린 조카 두 명을 키우면서 박씨 부인은 나름대로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1503년(연산군 9)부터 연산군이 박씨 부인을 궁궐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입궁한 박씨 부인을 자주 찾았다. 어떤 때는 박씨 부인과 함께 밤을 지내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연산군과 박씨 부인을 두고 온갖 추문이 난무했다. 그런 와중에 박씨 부인의 남동생인 박원종은 승승장구했다.

박원종은 40세이던 1506년(연산 12) 6월에 종1품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종1품의 숭정대부는 정승이 받는 정1품의 숭록대부(崇祿大夫) 바로 아래 품계로서 정승급이었다. 무과 출신의 박원종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정승급의 품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누나인 박씨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실록에는 ‘박원종의 누이는 월산대군의 아내로서 연산군이 간통해 늘 궁중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특별히 박원종에게 숭정대부의 품계를 줬다’는 기록이 있다. 숭정대부를 받은 직후 박원종은 함경도 관찰사가 돼 떠났다. 박원종의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이때 박원종이 연산군에게 직언하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급하게 도모해 함경도 관찰사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7월 3일 연산군은 박씨 부인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므로 박원종에게 간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7일 후인 20일에 박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 기록만 보면 박씨 부인은 병을 앓다가 죽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실록에 ‘박원종이 분하게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삽니까? 약이나 먹고 죽으세요’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박원종은 왜 중병이 든 누나에게 약이나 먹고 죽으라는 악담을 했을까?

그것은 당시 박씨 부인을 두고 온갖 추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사람들은 박씨 부인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사실 여부를 떠나 박씨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나아가 그 때문에 별의별 소문이 돌았음을 알려준다.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진성대군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어린 성종에게 수라를 권하는 인수대비



이런 소문이 치욕스러웠던 박원종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분노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박원종이 누이에게 ‘약이나 먹고 죽으세요’라는 극단적인 악담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씨 부인이 죽은 직후 박원종은 연산군 축출에 몰두해 채 2개월도 되지 않은 9월 1일 한밤중에 거병해 성공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박원종은 과감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반면 중종은 나약하고 공포심이 많았다. 중종은 1488년(성종 19) 3월 5일에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인 연산군보다는 12세 아래였다. 중종은 7세 되던 해 초여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에 책봉됐는데 그해 연말에 부왕 성종이 승하했다.

이후 5년 동안 이복형 연산군과 함께 같은 궁궐에서 살다가 12세 때 한 살 연상의 신씨와 혼인해 출궁했다. 출궁한 지 7년 만인 19세 때 반정이 발생해 왕위에 오르게 됐다. 따라서 왕위에 오르기 전 19년 동안 중종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야 정상이다. 창업 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은 보통 즉위 이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회자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즉위하기 이전의 중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다.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겨우 두 가지 정도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중종의 공포심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특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이라고 하는 책에 전하는 이야기다. 어느 때인가 연산군은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데리고 사냥을 갔다. 사냥이 끝나자 연산군은 진성대군과 말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사냥터에서부터 궁궐까지 누가 먼저 가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하지만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연산군은 준마(駿馬)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했다. 만약 진성대군이 자신보다 늦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협박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은 진성대군을 죽일 작정이었던 듯하다.

그때 진성대군은 ‘크게 두려워(대구·大懼)’했다. 어느 정도나 두려워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 딱할 정도였다. 아마도 어쩔 줄을 모르며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보다 못한 영산군이 몰래 진성대군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말이 주상의 말보다 훨씬 빠릅니다’라고 말하고는 진성대군을 태우고 달렸다.

결국 진성대군은 연산군보다 먼저 궁궐에 도착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의 말은 모두가 진성대군을 위해 때를 맞춰 났다’고들 했다. 이 에피소드는 겉으로만 보면 진성대군이 하늘의 천명을 타고 나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물론 진성대군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진성대군은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생사를 가르는 위기 상황에서 진성대군은 ‘크게 두려워’만 할 뿐,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나갈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시 진성대군에게 공포심이 많아서였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두려움에 질리게 될 때 진성대군은 정상적인 판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두 번째 야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야사는 첫 번째 야사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중종의 나약함과 공포심을 보여준다. ‘국조기사’를 인용한 <연려실기술>은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반정군 들이닥치자 두려움에 자결하려 했는데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宣陵).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 임금(중종)이 살던 궁을 에워쌌다. 이것은 혹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놀라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머리가 이 궁으로 향하고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말꼬리가 궁으로 향하고, 말머리는 밖으로 향해 섰다면 분명 공자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알고 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소매를 잡고 굳이 말리면서 사람을 내보내 살펴보게 오게 했다. 과연 말머리가 밖을 향하고 있었다. 임금과 부인 신씨는 일찍부터 부부간의 애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때 이르러 반정공신들이 의논하기를 ‘이미 부인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딸을 왕비로 놓아두면 우리에게 무슨 보복이 올는지 모른다’ 하고는 마침내 폐비(廢妃)를 청했다. 임금이 하는 수 없이 내보내기는 했지만 별궁에 두고 매양 모화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는 꼭 말을 모화관에서 멀지 않은 그 별궁에 보내어 먹이게 했다. 그러면 신씨 부인은 흰죽을 쑤어 손수 들어서 말을 먹여 보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왕비신씨손위복위본말(王妃愼氏遜位復位本末)

반정 군사들이 집을 포위하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보낸 군사들이라 지레 짐작하고 자결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부인 신씨가 막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진성대군은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반면 부인 신씨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한 것이 된다.

특히 진성대군의 판단력 상실은 사소한 정도가 아니라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극단적인 정도였다는 점에서 그 증상이 아주 심각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진성대군은 왜 자결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역시 공포심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사람들을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고문을 가한 후에 죽였다. 실록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손바닥 뚫기(搾掌)’,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기(烙訊)’, ‘가슴살 도려내기(斮胸)’, ‘마디마디 자르기(寸斬)’, ‘뱃살 도려내기(刳腹)’, ‘뼈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고문이 전한다. 이런 고문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쭈뼛하게 만드는데 연산군 대에는 이런 고문들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다.

집을 포위한 군사들을 본 진성대군은 죽음에 더해 이처럼 무시무시한 고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고문을 받는다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이왕 죽을 판인데 끔찍한 고문까지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훨씬 좋다. 진성대군은 분명 공포에 질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야사에서 드러나는 중종의 특징은 극도의 공포에 질렸을 때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종은 절박한 상황에서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상황에 맞서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도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점은 그의 천성이기도 하고 19년간의 인생 경험에서 양성된 것일 수도 있다.

중종의 생모는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였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이후에 왕비가 됐다. 당연히 거의 모든 면에서 정현왕후 윤씨와 폐비 윤씨는 대조적이었다.

폐비 윤씨가 억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반면 정현왕후 윤씨는 부드럽고 순종적이었다. 정현왕후 윤씨는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가 부녀자의 도리를 가르치면 그대로 받들어 순종하고 어기지 않았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저항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현왕후 윤씨는 정희왕후 윤씨와 인수대비 한씨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정현왕후 윤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 중종도 부드럽고 순종적인 면이 강했다. 이런 점은 천성적이라 할 것이다.


반정공신 무서워 조강지처 버리고



성종의 아들이자 제11대 왕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 선릉과 합쳐 선정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중종의 이복형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닮아 억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제외한 성종의 유일한 적자 진성대군을 경계했다. 그런 경계심은 연산군이 점점 인심을 잃어가고 진성대군은 더욱 장성해지면서 커져갔다.

10대 후반쯤 되면서 진성대군은 늘 이복형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온 결과,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순종적인 중종은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공포심에 짓눌리게 됐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이른바 반정 3대장은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한밤중에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신수근·임사홍 등을 척살하고 연산군을 폐위시켰다. 반정 3대장에게 추대된 중종은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갑자기 왕위에 즉위했다. 중종의 부인 신씨도 남편을 따라 입궁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왕비책봉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씨는 남편이 왕이 됐으므로 당연히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9월 2일부터 신씨는 사실상 왕비로 행세했으며 또 그렇게 대접받고 있었다.

9월 3일 대신들은 중종에게 왕비책봉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중종은 ‘속히 마련해 보고하라’고 명했는데 물론 부인 신씨를 왕비로 책봉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신료들은 신씨를 왕비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반정 3대장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들은 신씨가 신수근의 딸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측근이었기에 반정 당일 척살됐던 것이다. 반정 3대장은 신씨가 왕비에 책봉된 후 친정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설까 두려워했다. 9월 9일, 반정 3대장을 위시한 조정 중신들은 신씨를 출궁할 것을 중종에게 요구했다. 그들의 강압에 의해 중종은 그날 밤으로 신씨를 출궁시켰다. 이때의 상황이 실록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박원종·유순정·성희안 (중략) 등이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대궐 안에 있습니다. 만약 신수근의 친딸이 정식으로 왕비가 된다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될 것이고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되면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사사로운 은정을 끊고 궐 밖으로 내치소서’ 했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아뢴 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지만 조강지처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모두들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이니 어쩌겠습니까? 청하건대 속히 결단하소서’ 했다.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은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논의를 따라 궐 밖으로 내치겠다’ 했다. 잠시 있다가 전교하기를, ‘하성위 정현조의 집을 속히 수리하고 청소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갈 것이다’ 했다.”-<중종실록> 권1, 1년(1506) 9월 9일조

부인 신씨를 출궁시키라는 반정 3대장의 강압에 중종이 보인 저항은 ‘조강지처’라는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것도 한 차례뿐이었다. 공포에 질린 중종은 자기 입으로 ‘조강지처’라고 했던 부인 신씨를 곧바로 출궁시켰다. 젊어 고생을 함께 한 ‘조강지처’는 유교의 이른바 칠거지악으로도 쫓아내지 못하는 특별한 부인이었다.

그런 조강지처를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눌려 쫓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겉으로는 ‘종묘사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공포와 두려움에 굴복됐다고 봐야 한다. 중종은 명색이 왕이었지만 제 부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반정공신 때문에 강제 이혼당한 신씨는 사실상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후 신씨는 인왕산 아래에서 중종을 그리며 홀로 살았다. 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했다. 


단경왕후, 사후 180여 년 후에야 복위돼

이와 관련한 전설이 이른바 ‘치마바위 전설’이다. 경복궁에 살던 중종은 신씨가 그리워질 때마다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쪽을 바라봤고 이를 알게 된 신씨는 예전에 입던 붉은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다. 이런 전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지만 이 전설 역시 중종의 나약함과 공포심을 드러낼 뿐이다.

강제 이혼당한 신씨는 홀로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씨의 억울한 사정은 중종 당시부터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켜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곤 했으나 사후 180여 년이 지난 영조 15년(1739)에야 단경왕후로 복위될 수 있었다. 만약 중종이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신씨가 억울하게 이혼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 내면의 심층에는 너나없이 나약함과 공포심이 깃들어 있다. 그런 나약함과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특히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나약함과 공포심을 극복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규경잠계지조(規敬箴誡之助)’를 제시한다. 나약함과 공포심 같은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옛 성현의 잠언과 경계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 바로 ‘규경잠계지조’다.

<대학연의> ‘규경잠계지조’에서 첫 번째로 제시한 옛 성현의 잠언과 경계는 탕왕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다.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은 자신의 목욕통에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함으로써 뛰어난 성군이 될 수 있었다.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꼭 탕왕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나약함·공포심을 비롯해 교만함·방자함·게으름·어리석음 등등의 약점을 나날이 노력해 극복하면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대학연의>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뿐더러, 설사 믿고 실천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니 슬프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2. 고종황제, 역술가에게 푹 빠지다 

자신감·결단력 부족 탓, 을미사변 이후 의존도 더 심해져

… 인간적인 노력으로 위기 극복할 생각보다 운명론에 심취 

 

고종황제는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던 탓에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고종이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

고종은 12세이던 1863년 12월 13일 왕위에 올랐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생부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고종은 23세가 되던 1874년이 돼서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친정(親政)한 지 2년째 되던 1876년 고종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힘입어 정치·외교·군사·사회·경제 등 각 방면에서 개화파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격변이 계속됐다. 고종의 광무개혁은 그 같은 시행착오를 반성하면서 추진됐다. 그런 면에서 광무개혁은 고종이 친정 이후 추진한 개화정책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광무개혁의 기본노선은 ‘구본신참(舊本新參)’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었다. 옛것을 근본하고 새것을 참조한다는 ‘구본신참’이나,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은 공히 과거와 현재의 창조적 융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본신참’이나 ‘법고창신’이 성공하려면 과거와 현재에 두루 통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서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취하는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고종은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전까지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 의지해 살았다. 12세에 왕이 됐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 후로는 흥선대원군이 10년간에 걸쳐 섭정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로는 명성황후 민씨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신정왕후 조씨,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등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고종에게 더 이상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종이 총애하는 엄 상궁은 명성황후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 스스로가 져야 했다.

이것이 두려운 고종은 결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무당이나 역술가에게 의지했다. 자신감이 약한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황제가 되기 전에도 무당이나 역술가를 좋아한 왕이었다. 그런 성향은 을미사변 이후 더욱 심해졌다. 이런 고종이라 황제가 돼서도 사기꾼들에게 어이없이 당하는 일도 있었다. <매천야록>에 이런 일화가 전한다.

“충주에 사는 성강호라는 사람이 귀신을 잘 본다고 하므로 고종이 그를 불러 명성황후의 혼령을 보여달라고 했다. 하루는 경효전에서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는데 성강호가 갑자기 계단 아래에 엎드렸다. 고종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황후의 신령이 오셔서 지금 자리에 오르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고종은 자리를 어루만지면서 대성통곡했다. 이때 성강호는 ‘그렇게 요란하게 애통해하시면 신령이 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고종은 억지로 눈물을 거뒀다. 이때부터 궁전이나 능에 일이 있으면 고종은 ‘황후가 오고 있느냐? 안 오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유명(幽明)이 달라 혹 강림하기도 하고 강림하지 않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고종은 언제나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반드시 그를 불러들였으므로 그는 1년 사이에 협판(協辦)이 됐다. 그의 문전은 항상 시장처럼 붐볐다.” -황현 <매천야록> 광무 3년 

“내 대(代)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가”


덕수궁 함녕전의 황제 거처.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뒤인 1897년부터 함녕전에서 기거했으며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을 사로잡은 역술가는 정환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과거공부를 포기한 정환덕은 어려서부터 공부한 역술로 출세할 생각을 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인사청탁을 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운궁의 전화과장이던 이재찬이 정환덕을 고종에게 추천하게 됐다. 이재찬은 정환덕을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했다. 요컨대 정환덕의 역술점괘가 잘 맞는다는 뜻이었다.

광무 5년(1901) 11월 27일 고종과 정환덕은 경운궁의 함녕전 서온돌에서 첫 대면했다. 당시 정환덕은 40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 물음은 인사차 던진 것이었다. 이어서 고종은 자신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질문했다. 그것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했고 종묘의 정문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라는 글자는 이십세(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꽉 막힌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고종의 질문은 자기 대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왕조의 생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다. 그 증거가 종묘의 정문 이름인 ‘창엽’이라는 것이었다. ‘창엽’이라는 글자에는 조선이 태조 이성계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덕을 만난 1901년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이미 509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고종은 조선의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대였다. 예언대로라면 조선왕조는 철종 대에 망했거나 아니면 고종 당대 또는 늦어도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이래의 온갖 풍파가 혹 왕조멸망의 징조는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 이후는 황태자가 계승할지 아니면 왕조가 멸망할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황제 자리를 연장하고 왕조의 운수도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이 가장 알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은 뭔가 신통한 방법이 있을까 질문했는데 정환덕은 원론적으로 대답하고 만 셈이었다.

그래도 이날의 첫만남은 고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무엇보다도 고종의 황제 운수가 1907년에 끝난다는 말 때문이었다. 고종은 11월 29일 다시 정환덕을 불러봤다. 이날 고종과 정환덕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첫날과 비슷한 대화가 오간 듯하다.

고종은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왕조의 운수를 연장할까 묻고 정환덕은 덕을 닦아야 한다느니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느니 원론만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이런 대답은 고종을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정환덕은 마지막으로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는 예언을 하고 물러났다. 


정환덕 “대한제국 운명은 1905년까지입니다”



짧게 머리를 깎고 서양식 군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왼쪽 사진)과 곤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


이날 이후 고종은 더 이상 정환덕을 부르지 않았다. 고종이 정말로 원하는 대답을 정환덕이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아예 정환덕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고종은 정환덕의 신통한 예언에 감탄했다.

해가 바뀐 광무 6년(1902) 1월 7일에 고종은 함녕전 침실에서 정환덕을 만났다. 당시 그곳에는 오직 황태자와 엄비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에 딱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고종은 운수 또는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고종은 “네가 그렇게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운수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것인가? (중략) 장래 종묘사직이 편할지 아니면 위태로울지, 국가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임금인 나도 알지 못하겠다. 이런 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명색이 황제인데도 나라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고종은 내우외환에 휩싸인 대한제국을 살릴 자신도 없었으며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도 잘 몰랐던 것이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혹 그런 내우외환이 운명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것이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운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신통한 방법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환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자신은 신기한 예언력으로 고종에게 부름받았으므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예언해야 했다. 그렇다고 망한다고 예언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정환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신의 계산으로 본다면 다가오는 광무 9년 을사 11월 갑자일에 일계(日計)가 건괘(乾卦)의 초구(初九)로 옮겨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가는 시기입니다. 초구는 하루 종일 씩씩하고 저녁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을 당해 국가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위태하고 어렵습니다. 충신과 열사가 서로 죽기를 다투며 조정과 재야가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변란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중의 법을 엄숙히 맑게 하시고 씩씩한 용단을 확고히 하시어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시고 소인을 멀리 하소서. 그렇게 하면 화란에서 벗어나 복록이 되며 꽉 막힌 운수는 가버리고 태평의 운수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정환덕 <남가몽(南柯夢)>(1905)

정환덕은 대한제국의 미래를 광무 9년(1905)까지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주역으로 본다면 그때가 건괘 초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묵은 것이 끝나고 새것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묵은 것이 끝난다는 의미는 망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듭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정환덕은 망한다고 하지 않고 잘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희망적으로 이야기했다. 



고종황제의 어차(御車)로 1903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입된 자동차다.


정환덕의 신기한 역술에 감탄한 고종은 이 말도 믿었다. 정환덕의 말대로라면 대한제국은 1905년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전환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러려면 정환덕처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후 고종은 정환덕이 하는 말은 거의 들어줬다. 그런 면에서 정환덕은 대한제국기 황제의 측근 자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자문관이 역술가였다는 점이다. 역술가의 현실 판단과 미래 비전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는 역술에 기초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의 광무개혁은 적어도 역술만큼 근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고종은 경운궁에서 어진(御眞)도 자주 그리고 사진도 자주 찍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이 제법 된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이런 어진과 사진에 드러난 고종 황제는 철저하게 전통적인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근대적인 이미지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이미지가 고종황제의 진면목일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고종은 광무 5년(1901) 11월 7일에 명령을 내려 자신의 어진을 그리게 했다. 이유는 다음해가 자신의 즉위 40주년이라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에 따라 광무 6년(1902) 2월(음력)부터 어진을 그리기 시작해 4월에 완성했다. 고종은 경운궁의 정관헌(靜觀軒)에 나가 직접 모델 역할을 했는데 그때 면복본(冕服本), 익선본(翼善本), 군복본(軍服本) 등 세 가지의 어진을 그렸다.

당시에 그려진 익선본의 어진은 현재 원광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익선본 어진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어진은 1900년쯤 그려졌는데 1902년에 그려진 어진과 유사할 것이라 생각된다. 원광대에 소장된 어진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어진 속의 고종 황제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상태로 용상에 앉아 있다.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조선시대 왕들이 평상시 근무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고종 황제가 착용한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그 형태가 조선시대 왕들의 것과 동일하다. 배경에 쓴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도 조선시대의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다.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선시대의 왕들은 제후 왕이라 붉은색이나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던 것에 비해 고종 황제는 노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점이 다르다. 색깔만 제외한다면 고종황제의 이미지는 조선시대 왕들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전통인도 근대인도 아니었던 황제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 아들 영친왕,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이렇게 그려진 어진은 전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진전(眞殿) 속에 깊숙이 비장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어진들은 고종이 황제가 돼서도 조선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상태에서 서양식 군복을 입고 가슴에는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옆구리에는 칼까지 찬 고종황제의 사진에서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찾기 어렵다. 구두를 신은 모습에서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느끼게도 된다. 이 이미지가 사진이라는 점에서도 비전통적이다.

사실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이미지 자체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후 단발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머리를 깎았는데, 대한제국 때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단발령이 반포됐을 때, 전통을 지키려는 양반유생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내 머리칼을 자를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사태를 겪었지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고종은 머리를 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광무개혁’을 추진한 고종의 근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짧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서양식 군복과 훈장도 근대문물을 상징했다.

본래 조선시대의 왕이 공식적으로 입는 전통복장은 크게 면류관과 구장복(九章服), 원유관(遠遊冠)고 강사포(絳紗袍), 익선관과 곤룡포(崑龍袍), 그리고 군복이었다. 면류관과 구장복은 신에게 제사할 때 입는 예복으로 왕의 최고 예복이었다.

그래서 대례복(大禮服)이라고도 했다. 원유관과 강사포는 면류관과 구장복보다 품격이 낮은 예복으로서 일본이나 유구에서 온 사신들을 접견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에 비해 익선관과 곤룡포는 평상시 근무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물론 군복은 군사훈련이나 대궐 밖으로 행차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 중에서 군복을 제외한 왕의 복장은 대한제국시기 때도 색상이나 일부 문양만 빼고 그대로 사용됐다. 예컨대 면류관과 구장복의 경우, 면류관에 드리우는 9줄의 류(旒)가 12류로 늘었으며 구장복에 사용된 아홉 가지 문양이 12가지 문양으로 늘어났다.

원유관과 강사포의 경우, 조선시대의 원유관은 주름을 아홉 개 잡았지만 대한제국 시기 때는 주름이 12개로 늘었다. 익선관과 곤룡포는 조선시대 청색 또는 붉은색의 곤룡포가 황색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조선시대의 제후 왕이 대한제국기의 황제로 변했음을 상징하는 것일 뿐 근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즉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나 문양은 근대문물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문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군복은 철저하게 근대화됐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군복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자도, 복장도 철저하게 서양식 군복이었다. 가슴에 붙이는 훈장도 전통시대에는 없던 근대문물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도 발에 신은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만 보면 고종황제는 전통과 단절된 근대인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의 본 모습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과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 중 어느 이미지에 가까울까? 만약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이 고종의 본 모습이라면 고종은 전혀 근대화되지 않은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사진이 고종의 본 보습이라면 고종은 철저하게 근대화된 황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고종이 추구한 본 모습이 아니었다. 고종은 완전한 전통인이 되는 것도 또 완전한 근대인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고종 자신은 전통을 계승하는 근대인이 되고자 했다. 고종은 그런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1902년 말 고종은 경운궁의 중화전에서 서양화가 조셉 드 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었다. 네지에르가 얼굴을 스케치하는 작업이 끝나자 고종은 다시 들어가 정복을 갖춰 입고 나와 용상에 앉았다.

당시 고종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는데 거기에 더해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이라고 하는 훈장을 착용했다. 고종이 전통적인 익선관과 곤룡포 위에 더한 금척대수장은 고종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이 금척대수장은 대한제국기 최고의 훈장으로서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황제가 서양식 군복을 입었을 때 착용한 훈장도 바로 금척대수장이었다.

그런데 금척대수장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았다는 금척(金尺)을 상징하는 훈장이었다. 훈장은 정 중앙의 태극을 중심으로 열십자 형태의 금척과 백색광선 그리고 오얏꽃 문양으로 조각됐다.

중앙의 태극은 하늘의 태양, 금척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은 황금 자, 백색광선은 태양 빛 그리고 오얏꽃은 전주 이씨를 상징했다. 이 훈장을 황색의 띠에 달아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에 드리웠는데 훈장은 왼쪽 허리부분에 위치했다. 또한 왼쪽 가슴에도 이 훈장을 달았다. 띠에 매단 훈장을 정장(正章), 왼쪽 가슴에 다는 훈장을 부장(副章)이라고 했다.

고종황제는 꿈속의 금척을 바탕으로 근대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다. 광무개혁의 기본노선인 ‘구본신참’ 또는 ‘법고창신’에서 ‘구본’이나 ‘법고’의 핵심은 바로 꿈속의 금척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종황제가 의지한 역술가는 또 하나의 꿈속의 금척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대학연의>는 요임금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위대한 성군 요임금이 왜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대학연의>에 의하면 요임금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극명준덕(克明俊德)’에 있었다. ‘인간 내면의 위대한 덕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것’이 ‘극명준덕’이다.

‘인간 내면의 위대한 덕성’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천명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나아가 그런 천명 앞에 떳떳해야 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 자각에서 사명감과 자신감이 가능해지고 위대한 성취도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금에 걸쳐 수많은 인간 군상이 내면의 위대한 덕성보다는 외부의 감언이설에 쉬이 기울어지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3. 기록문화 지평 넓힌 정조, 역사기록을 ‘왜곡’하다 

세손 시절 정치적 불안 상황에서 생존 위해 시작한 일기 쓰기 습관

… 불리한 부분 말소·개작으로 공식 기록의 권위와 신뢰 떨어트려 



정조는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성군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런 그도 <승정원일기>를 자신의 입맛대로 고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조가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의 방어용 성곽인 화성(華城)의 서쪽 관문인 화서문과 서북각루(왼쪽).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조는 특이한 존재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스스로 <존현각 일기>라는 개인 일기를 작성했고, 즉위 후에는 그것을 <일성록>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기록의 객체였던 국왕을 기록의 주체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조는 기록의 주체로서 기념비적인 기록문화를 여럿 남겼다. 앞의 <존현각일기>와 <일성록>을 위시해 조선왕실의 대표 의궤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조선 국왕 문집의 대표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이 그것이었다. 



이길범 화백이 2004년에 그린 정조의 어진(御眞). 정조는 생전에 세 차례 어진을 그렸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정조가 기록의 주체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세손 시절 정치적 불안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 습관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정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국왕보다도 기록의 주체성·정치성·실천성을 강조했다. 이 같은 정조의 태도는 일장일단을 가졌다. 정조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기록은 말살하기도 하고 개작하기도 함으로써 <승정원일기>같은 공식기록의 권위와 신뢰성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면에서 기록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반면 실천적 목적을 위해 개인 일기를 작성하고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면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예컨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사도세자의 구갑(舊甲)을 기념해 거행된 을묘년(1795, 정조 19)의 현륭원 행차는 정조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실천적 행사였다. 그러므로 이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기록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정조의 기록정신이 집대성됐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기록정신에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의궤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반면 정조의 개인적 입장 또는 정치적 측면이 강조되면 그 반대의 상황이 나타났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됐다. 이후 23세 때 대리청정을 함으로써 정치적 실권까지 장악했다가 24세 때 즉위했고, 재위 24년 만인 1800년에 49세 나이로 승하했다.

이 같은 정조의 49년 인생에서 크나큰 분수령은 역시 8세 때의 왕세손 책봉과 24세 때의 국왕 즉위였다. 특히 정조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왕세손 책봉과 국왕 즉위 사이에 존재하는 17년 동안은 차기 왕으로서의 준비 기간임과 동시에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던 인사들과의 갈등 기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정조는 개인 일기를 쓰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 습관이 정조의 기록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적 숙청의 정당성 부각하는 데 개인기록 이용

 

춘천시 공지천에 만들어진 주교(舟橋).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한 배 다리로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나룻배 25척을 복원해 이은 것이다. 

조선시대 원자 또는 세자의 일기는 거의가 보양청이나 시강원에서 공식적으로 기록했다. 이는 마치 국왕의 일기를 국왕 자신이 기록하지 않고 승정원이나 춘추관에서 기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나 세자 또는 국왕의 일기를 공식기관에서 기록함으로써 신뢰도를 높이려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원자·세자·국왕과 관련된 일기는 개인 일기가 아니라 공식일기인 <보양청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 등이 대표하게 됐다. 이런 전통에서 원자 또는 세자가 개인적으로 일기를 작성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원자나 세자가 개인 일기를 작성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외적인 일인데 바로 그런 예외적인 사례를 정조가 보여줬다. 정조는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어린 시절부터 직접 일기를 썼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손에 책봉된 8세부터 <존현각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세손의 처지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세손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는 세자에 책봉돼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와 격심한 갈등을 겪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33년(1757) 가을부터 살인을 하기 시작했고, 영조 34년(1758)에는 그것이 영조에게 발각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대안으로 정조를 염두에 뒀고 그 결과 정조가 8세 되던 영조 35년(1759) 2월 왕세손에 책봉했다. 이렇게 왕세손이 된 정조는 자신의 언행에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라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신변은 물론, 생부 사도세자의 신변에도 크나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훗날 정조는 자신의 일기 습관에 대해 ‘내가 춘저에 있을 때 일기를 쓰는 것이 곧 일과가 됐으므로 탁자 위에 항상 작은 책자를 비치했는데, 이는 조변(趙抃)이 매일 저녁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고했던 뜻과 같다’고 회상했다.

세손 시절의 정조는 자신의 말 한마디 또는 행동 하나라도 혹 잘못된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일기를 썼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세손 정조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할아버지 영조였다. 세손 정조는 자신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영조의 대답, 표정 등등을 곰곰이 생각해보며 영조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세손 정조는 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표출됐던 자신과 영조의 언행들을 일기에 기록하고 낮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영조의 속마음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언행을 반성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위험한 정치 상황에서 세손 정조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일기를 썼음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세손 정조의 개인 일기는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하겠다. 이런 체험으로 정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기록에 대해 정치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정조는 대리청정 시기 및 즉위 초에 기록의 정치적 측면을 크게 중요시 여겼다.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은 영조 51년(1775) 12월 7일에 공식화됐고, 그때로부터 채 3개월도 되기 전인 1776년 3월 10일에 세손은 국왕에 즉위했다.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이 공식화되기까지 정후겸·홍인한 등의 방해가 극심했는데 정조는 즉위 직후 정후겸·홍인한 등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했다. 정후겸은 정조가 즉위한 지 보름 만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고, 또 10여 일 후에는 홍인한이 여산에 유배됐다. 그리고 3개월 후 정후겸과 홍인한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치적 목적 위해 <승정원일기>도 손대


1. 정조의 장례를 치를 때 능으로 가는 당시의 행렬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 정조의 국장 과정을 담은 기록물인 <정조대왕국장의궤>에 실려 있다. 2. 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이렇게 숙청된 정후겸·홍인한은 정조의 척족(戚族)이었다. 정후겸은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의 양자였으며, 홍인한은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척족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의 숙청이 정당했음을 여러 방식으로 천명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신의 개인기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을 숙청한 직후에 <명의록(明義錄)> <속명의록(續明義錄)> <명의록언해> 등을 간행해 자신의 숙청이 정당했음을 널리 알렸다. 그런데 이들 책들의 첫머리에 실린 자료가 바로 정조가 세손시절 직접 썼던 <존현각일기>였다.

<명의록>에 실린 <존현각일기>는 영조 51년(1775) 2월 5일부터 영조 52년(1776) 2월 28일까지의 대략 1년간의 기록이다. 세손 정조가 영조 51년 12월 7일에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영조 52년 3월 5일에 영조가 승하했으며, 3월 10일에 세손 정조가 즉위했으므로 1775년 2월부터 1776년 2월까지는 세손의 대리청정과 즉위에 관련해서 정후겸·홍인한의 방해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정조는 이같이 결정적인 시기에 정후겸과 홍인한이 했다고 하는 온갖 역모 혐의를 다른 자료도 아닌 자기 자신의 개인 일기를 이용해 증명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조의 <존현각일기>는 정치적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정치적인 목표를 위해 <승정원일기>를 개작·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영조 51년(1775) 11월 20일에 있었던 영조와 홍인한의 만남에서 홍인한이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삼불필지(三不必知)’를 주장했다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이와 관련된 <승정원일기> 내용을 개작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 51년(1775) 10월 7일에 영조는 거의 1년 만에 상참(常參)을 했다. 그날 오전 8시쯤에 영조는 경희궁의 금상문(金商門)에 전좌(殿座)하고 조정 중신들을 만났다. 초겨울의 아침 날씨에 영조는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당시 영조는 이미 82세였다. 기침이 너무 심해 영조는 상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기침은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밤새껏 기침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날 영조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듯하다. 당시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던 영조는 정신이 온전할 때 후계 작업을 마무리짓고자 했다. 영조는 10월 7일 당일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는 한편 화완옹주에게도 그 뜻을 밝혔다.

세손은 자신의 입장이 있는지라 자기 입으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실록에 의하면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세손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가 대신 나서야 했다. 노년의 영조를 편안히 살게 하기 위해서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대역무도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를 늙었다고 괄시하며 세손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라고 공격하면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영조의 본심이 중요했다. 영조가 진정으로 대리청정을 원한다면 대역무도가 아니라 충신이 될 기회이기도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대리청정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당시 화완옹주가 영조의 편애를 받는다는 사실은 만천하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진정으로 원한다는 사실이 화완옹주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면 많은 사람이 믿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겠다고 서로 나설 판이었다.


왕위 후계구도가 화완옹주의 ‘입’에 달렸는데

 

 

경기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건릉(健陵).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영조의 후계구도는 화완옹주가 영조의 본심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왕의 후계구도가 일개 옹주의 입에 달렸던 적이 없었다. 오직 화완옹주만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왕위계승을 좌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화완옹주는 처음에 대리청정을 늦출 수 없다고 하며 동의했다고 한다. 영조의 진심도 그렇고 또 영조의 상태도 잘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화완옹주는 곧바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한중록>에는 ‘영조께서 대리하실 하교를 하신 후 안으로 화완옹주는 나라 큰일이니 모르노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영조의 본심이 무엇인지 자신은 모른다는 말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었다. 대리청정을 명령한 영조가 진심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괜히 충성심을 시험하려 그랬는지 화완옹주조차도 모른다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려 들지 않았다.

영조는 자신이 대리청정을 명령한 지 한 달 보름이 가깝도록 누구도 상소를 올려 대리청정을 요청하지 않자 초조해졌다. 조선시대의 정치관행으로는 누군가의 상소가 있은 후 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치과정이었다. 상소가 올라왔다는 것은 곧 양반들 사이에 그런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의 본심을 확신하지 못한 당시 양반들은 그 누구도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영조 51년(1775) 11월 20일 오전 10시쯤에 영조는 경희궁 안에 있는 집경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원로대신들을 비롯해 영의정 한익모, 좌의정 홍인한 등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자신이 노쇠해 더 이상 국정을 살필 수 없으므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사전에 미리 의견교환이 있었다면 이 문제는 금방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논의된 것은 전혀 없었다. 10월 7일 이미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령하기는 했지만 신료들은 그것이 본심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대리청정을 찬성하다간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영의정 한익모와 좌의정 홍인한을 비롯한 모든 신료는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그들은 ‘주상의 건상이 점점 좋아집니다’라며 반대했다.

당시 영조는 82세였기에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82세까지 장수한 영조가 몇 년 더 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영조가 82세라는 이유만으로 대리청정을 찬성한다면 곧 영조가 속히 죽기를 바란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주장도 가능했다. 영조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대리청정 문제를 꺼냈다면 반대하는 사람이 곧 충신이었다.

반면 82세의 영조가 진정으로 쉬고 싶어서 대리청정 문제를 꺼냈다면 찬성하는 사람이 충신이었다. 노쇠한 영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왕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영조의 본심이었다.

영조는 신료들이 자신의 본심을 모른 채 세손의 대리청정을 계속 반대하자 드디어 12월 7일 공식적으로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2월 11일에 세손 정조는 동부승지 박상건을 시켜 11월 20일자 <승정원일기>를 전부 읽게 했다.

그런데 영조의 대리청정 명령 부분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당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한 사람은 가주서(假注書) 박상집이었다. 의심이 든 세손은 ‘그때 사관으로 참석했던 자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11월 20일에 박상집과 함께 입시했던 기사관 성정진이 나서서 ‘대신이 삼불필지(三不必知) 등의 설로 대답하는 것을 신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근거로 세손 정조는 박상집에게 ‘삼불필지’ 라는 내용을 <승정원일기>에 써넣으라고 강요하였다. 하지만 박상집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승정원일기> 개작을 거부했다.


“고쳐주지 않으면 세손 사퇴하겠다”

현재 상황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시 박상집은 체포돼 문초를 받았고 <승정원일기>에는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판이나 병판도 알 필요가 없으며, 더더욱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삼불필지’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렇게 세손 정조의 강요로 개작된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정조는 그날의 대화를 자신이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11월 20일자의 <존현각일기>에는 그날의 대화 내용을 생략하고 개작된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을 수록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세손 정조는 ‘<승정원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내가 들은 것만으로 기록한다면 신중히 처신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을 따른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세손 정조는 박상집을 강압해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게 하고는 그 개작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개인 견문과 개인 일기는 삭제했는데 그 이유는 세손 정조의 해명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무조건 세손 정조는 정직하고 가주서 박상집은 부정직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에 세손 정조가 박상집을 강압해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자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개인 일기를 공적인 기록인 <일성록>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인 일기의 권위와 신뢰는 높이고 <승정원일기>의 권위와 신뢰를 추락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자신에게 불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무수히 말살했다. 정조의 기록말살은 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예컨대 사도세자가 폐서인 되던 당일의 <승정원일기> 기록이 그런 사례였다. 세손 정조는 이런 명분으로 <승정원일기>의 기록말살을 요구했다.

“<승정원일기>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모두 실려 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해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히니 신의 사사로운 마음이 애통해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 <승정원일기>가 없으면 임오년의 처분(영조 38년(1762)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처분)에 대해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국조의 전고는 모두 간첩(簡捷)에 실려 있으며 쇠 상자와 돌집에 넣어 명산에 감추어 천추 만대가 지나도 옮길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니 <승정원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승정원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처신은 오직 저위(儲位)를 손피(遜避)하고 죽을 때까지 숨어 살면서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 뿐일 것입니다.” -<영조실록> 권 127, 52년(1776) 2월 4일

세손 정조는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손에서 사퇴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 기사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영조는 결국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일 수도

만약에 세손 정조가 <승정원일기>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삭제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손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승정원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므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에서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기사는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하기보다는 혼란만 부추기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고 말살한 정조는 짧게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라 할 수 있다.

<대학연의>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 중에 ‘요순우탕문무지학(堯舜禹湯文武之學)’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무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은 즉위한 지 2일째 스승 강태공을 불러 황제(黃帝)와 전욱(顓頊)의 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강태공은 그들의 도는 단서(丹書)에 있다고 했다. 단서란 문왕의 침실 출입문에 붉은 새가 날아와 놓고 갔다고 하는 글이었다. 강태공은 그 단서를 보고 싶다면 3일간 목욕재계하라고 요구했다.

3일간 목욕재계를 끝낸 무왕이 받아본 단서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게으른 마음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기는 자는 멸하며, 의로운 마음이 욕심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고, 욕심이 의로운 마음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진정 공경하는 마음과 의로운 마음이 없다면 결국 패망의 천벌을 받을 것이란 경고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게으른 마음과 욕심에 빠져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들이 고금에 적지 않으니 두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4. 후대의 비극 부른 세종의 ‘편애’ 

마흔 나이에 이르러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영응대군

… 늦둥이 막내아들 위해 최고 성군이 혼인·이혼·재혼 등 비상식 저질러 



세종대왕은 긴 설명이 필요없는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이지만 막내아들에 대한 편애로 측근 인사 등에 다소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세종대왕 역의 배우 김상경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는 8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8대군이라 통칭됐다. 8대군 중 절반인 4명이 부왕 태종의 승하 후에야 출생했다. 세종의 즉위 후 생모 원경왕후와 부왕 태종이 연이어 승하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의 3년상이 끝나는 해부터 소헌왕후와 합방하고 다음해부터 3년간 내리 아들을 봤다. 그렇게 해서 재위 7년째인 1425년(세종 7)에 다섯째 광평대군이 태어났고, 다음해에는 여섯째 금성대군이 태어났으며, 그 다음해에는 일곱째 평원대군이 태어났다.

그런데 평원대군을 본 후 7년 동안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 사이에 세종은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원래 신빈 김씨는 공노비로 내자시(內資寺)의 여종이었다.

이런 신빈 김씨가 궁녀로 입궁하게 된 계기는 세종의 갑작스러운 즉위였다. 신빈 김씨가 13세 되던 해 세종은 22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4대 왕이 됐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세자가 아니었다. 큰형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불신을 받아 폐세자 됨으로써 세자가 됐고, 갑자기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세종의 즉위와 더불어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부왕 태종과 생모 원경왕후가 살아 있어 이들의 궁녀를 빼낼 수 없었던 데다가 폐세자 됐다고 해도 양녕대군을 모시던 궁녀들을 세종과 소헌왕후의 궁녀로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많은 궁녀가 새로 충원됐는데 그중의 한 명이 신빈 김씨였다. 처음에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의 지밀궁녀로 입궁했다. 소헌왕후가 일곱째 평원대군을 임신하던 즈음, 세종은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졌다. 그 결과 평원대군이 태어나던 비슷한 시점에서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도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그 12년 사이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 영응대군이었다. 그때가 1434년(세종 16) 4월이었다. 당시 세종은 38세였고 소헌왕후는 40세였다.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너는 15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불러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 마치 ‘눈옷’을 입은 듯하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영응대군은 40세 가까이 돼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었다. 세종은 이 영응대군의 양육을 다른 사람이 아닌 신빈 김 씨에게 맡겼다. 영응대군은 부왕 세종과 생모 소헌왕후는 물론 신빈 김 씨로부터도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영응대군 신도비에는 세종이 대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영응대군은 나면서부터 얼굴이 수려하고 품성이 총명해 세종께서 기특하게 여겨 항상 무릎 위에 앉히고 즐거워했으며 보호도 극진히 했다. 커서도 총애와 보살핌이 날로 두터워 내려주는 물건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음식이 궁궐에 들어오면 세종은 반드시 영응대군에게 나눠주고 먹기를 기다렸다가 잡수시곤 했다. 또 궁궐 밖에 행차할 때는 반드시 데리고 다녔으며, 궁궐 안에서도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에 앞서 모든 왕자들은 궁중에서 주상을 진상(進上)이라 불렀는데 명령하기를 ‘너는 15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만 진상이라 부르라’ 했으니 영응대군이 사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재액을 피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을 피접(避接)이라고 했다. 세종은 영응대군에게 조금의 이상이라도 발견되면 곧바로 피접을 보내곤 했다. 장소는 이순몽의 집이었다. 무과 출신으로 대마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이순몽을 세종은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던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당시 이순몽은 큰 부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영응대군에게 황금수레, 황금송아지 등을 선물했다. 이렇게 정이 든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수양아들로 삼기까지 했다. 영응대군은 세종, 소헌왕후에 더해 유모 신빈 김씨 그리고 수양아버지 이순몽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는 이순몽에게까지 미쳤다.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순몽을 고관대작에 임명하곤 했다. 비록 이런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이 태어난 1434년부터 1444년(세종 26) 7월 송복원의 딸 송씨를 막내며느리로 결정하기까지 10년간이 세종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 세종은 40대의 나이로 무수한 업적을 성취했다. 더불어 8대군 모두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때가 세종에게는 신체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득의의 세월이었다. 그 정점이 1444년 7월의 막내며느리 간택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영속되지는 않았다. 영응대군과 송씨 사이의 혼례 준비가 한창이던 1444년 12월에 다섯째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을 앓다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광평대군이 창진을 앓을 때 세종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지식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광평대군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젊은 아들을 잃은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통에 잠겼다. 그들 사이에 8대군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식을 잃은 슬픔은 컸다. 세종은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할 정도로 상심했다.

흉사는 몰려다니는 모양이다. 광평대군이 죽은 지한 달도 채 안 돼 이번에는 일곱째 평원대군이 1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 와중에 1445년(세종 27) 4월, 세종은 영응대군의 혼례를 거행했다. 막내며느리 송씨는 대방부부인에 책봉됐고, 안국동에 살림 집이 마련됐다.


인사까지 헝클어질 정도로 눈이 흐려지고


궁중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세종대왕.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을 연이어 잃은 세종과 소헌왕후는 몹시 상심했다. 특히 소헌왕후가 자리에 눕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세종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광평대군, 평원대군에 이어 소헌왕후와 막내아들 그리고 막내며느리마저 잘못될까 불안했던 것이다.

세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막내아들 부부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종은 유명 사찰에 환관들을 보내 불공을 드리게 했다. 그러나 광평대군이 죽은 지 1년여가 지난 1446년(세종 28) 3월에 소헌왕후는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즈음 세종은 신미 스님을 알게 됐다. 당시 신미 스님은 불자들 사이에 살아 있는 부처로 존경받던 큰스님이었다. 세종도 신미 스님을 한 번 본 후 깊이 존경하게 됐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은 영응대군의 무사안녕을 위해 불교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공공연히 ‘나는 이미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짓기도 했다. 세종은 평정심을 잃고 영응대군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했다.

이 같은 세종을 위해 김흔지라는 사람이 금으로 만든 등신불(等身佛) 세 구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하나는 세종을 위해 또 하나는 세자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영응대군을 위해서였다.

크게 감동한 세종은 김흔지를 동부승지에 임명하기까지 했다. 아무런 공로나 능력도 없이 단지 금불상을 만들어 바친 공로로 승지가 되자 사람들은 김흔지를 금불 승지 또는 등신(等身) 승지라 불렀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측근 인사까지 헝클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왕실의 관행대로 본다면 세종은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나는 1448년(세종 30) 여름쯤에 재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53세에 이른 세종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세자와 세손 때문이었다. 당시의 세자 문종은 병약했고 세자빈도 없었다. 더불어 1441년(세종 23)에 출생한 세손 단종은 8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재혼했다가 얼마 안 돼 승하한다면 세종의 왕비가 왕실의 최고어른이 돼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후계자인 문종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세종은 왕비를 새로 들이는 대신 후궁인 혜빈 양 씨를 내세웠다. 이미 세종과 혜빈 양씨 사이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세종은 혜빈 양씨에게 세손 단종의 양육을 맡겼다. 이는 세종 자신이 재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동시에 자신의 사후에 혜빈 양씨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세손 단종을 양육함과 동시에 보호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세종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소헌왕후가 승하한 1446년(세종 28) 3월 이후 3년상을 치르면서 세종의 건강은 더더욱 악화됐다. 세종은 여생을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과 보내고 싶어 했다. 아울러 죽기 전에 영응대군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보고 싶어 했다.

막내아들 위해 며느리까지 내쫓은 지존



경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 앞쪽으로 정자각이 있고 왼편에 수랏간이 있다. 

영응대군과 대방부부인 송씨는 1445년(세종 27)에 가례를 올렸으므로 1448년에는 이미 혼인 3년째였다. 하지만 막내며느리 대방부부인 송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1449년(세종 31) 6월, 세종은 막내며느리 송씨를 내쫓았다.

그 이유가 실록에는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해 내쫓기고’라고 실려 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병들었기에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쫓겨난 송씨는 친오빠 송현수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세종이 대방부부인 송씨 대신에 맞아들인 막내며느리는 춘성부부인 정씨였다. 1449년(세종 31) 6월 당시 춘성부부인 정씨는 부친 정충경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왕실의 관행에 의하면 홀어머니의 딸, 역적의 딸 그리고 악질이 있는 여성은 혼인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정씨를 막내며느리로 간택한 이유는 정씨가 효령대군 부인의 친조카였기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은 정역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효령대군 부인의 친동생인 정충경의 딸이 춘성부부인이었다. 세종은 춘성부부인 정씨를 막내며느리로 맞이함으로써 유순한 성격의 효령대군과 그 부인에게도 영응대군을 부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모두 영응대군에 대한 편애에서 나온 결과였고 그래서 당시의 관행과 상식에 맞지 않았다.

이렇게 무리하게 막내며느리 정씨를 들인 그해 겨울에 세종의 건강은 몹시 악화됐다. 당시 세종은 54세였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세종은 궁궐을 떠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 혹시라도 죽게 되면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임종을 맞겠다는 뜻에서였다. 영응대군 집에서 임종을 앞둔 세종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배필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혜공주의 배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춘성부부인 정씨의 남동생이었다. 영양위로 알려진 정종이 그 주인공이었다. 영양위를 간택하고 한 달도 되기 전인 1450년(세종 32) 2월 17일, 위대한 성군 세종은 55세의 나이로 영응대군 집에서 승하했다.

이렇게 보면 죽음을 앞둔 세종은 그 무엇보다도 세손 단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그리고 세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를 위해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고심의 결과는 세손 단종을 위해 혜빈 양씨를 내세우는 것이었고,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위해서는 신빈 김씨를 유모로 세움과 더불어 춘성부부인 정씨를 부인으로 간택한 것이었으며, 경혜공주를 위해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의 남동생인 영양위를 부마로 간택한 것이었다. 세종은 분명 이것으로 세손 단종과 경혜공주의 안전이 보장되고 또 영응대군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믿었을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세종의 승하와 더불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응대군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사실 영응대군은 첫 번째 부인 송씨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왕 세종이 송씨를 쫓아내자 속으로 불만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부왕 세종이 자신을 위해 송씨를 쫓아냈음을 알기에 참았다. 아마도 영응대군은 죽음을 앞둔 세종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을 듯하다. 즉 세종 생전에 자신의 아들딸을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재혼을 했지만 사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혼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세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세종의 3년상이 끝나고 단종이 즉위하자 영응대군은 은밀하게 첫 번째 부인 송씨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송씨가 친오빠 송현수의 집에 있었기에 영응대군은 자연 송현수의 집에 왕래하게 됐다.

그런데 영응대군과 송현수 집에 다리를 놓은 사람은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최고어른은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 세종이 영응대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았다. 또한 영응대군이 첫 번째 부인 송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았다. 사실 수양대군에게 영응대군은 막냇동생이고 송씨는 막내제수였다. 영응대군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수양대군은 본인이 친구 송현수를 찾는 척하면서 영응대군을 데리고 가서 송씨를 만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영응대군과 송씨 사이에 두 명의 딸이 태어났고, 그 소문이 한양에 널리 퍼지게 됐다.

영응대군, 부친 3년상 끝나자 전처와 재결합



 

세종대왕이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고자 부처의 일대기를 정음으로 번역해 만든 석보상절 

그러자 수양대군은 영응대군을 위해 두 발 벗고 나섰다. 송씨와 다시 재혼하고 춘성부부인 정씨와는 이혼하게 공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453년(단종 1) 11월 28일에 왕명에 의해 영응대군과 춘성부 부인의 이혼이 허락됐는데, 그 내용이 실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이조에 명령해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한 문서를 거두게 했다. 처음에 영응대군이 상호군 송복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삼았었는데, 부인이 병이 있게 되자, 세종이 이를 폐하고 다시 참판 정충경의 딸에게 장가를 들였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송씨를 잊지 못해 송씨와 잠통(潛通)하고 두 딸을 낳았기 때문에, 정씨를 폐출하고 송씨를 다시 봉해 부인으로 삼았다.”(<단종실록> 권9, 단종 1년(1453) 11월 28일)

춘성부부인 정씨는 1449년(세종 31)에 영응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므로 이혼하던 1453년(단종 1)이면 이미 혼인 4년째였다. 그동안 둘 사이에는 자녀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문제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은 아무래도 영응대군과의 관계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영응대군은 춘성부부인과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영응대군의 마음은 온통 대방부부인 송씨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혼인 4년 만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쫓겨난 춘성부 부인은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춘성부부인은 스스로를 기별부인(棄別夫人) 즉 ‘쫓겨난 부인’이라 부르며 평생을 수절하며 홀로 살았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춘성부부인의 인생을 이렇게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응대군과 함께 송현수의 집에 드나들던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했고, 그 다음해에는 송현수의 딸을 단종의 왕비로 간택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정순왕후 송씨였다. 영응대군이 혼인했다가 이혼했고 또다시 우여곡절 끝에 재혼한 대방부부인 송씨의 친조카가 바로 정순왕후 송씨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대방부부인 송씨를 통해 영응대군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순왕후를 통해 단종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수양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 왕비의 비극적 삶도 세종의 ‘편애’ 결과


이로써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고심 끝에 마련했던 모든 조치는 수포로 돌아갔다. 세손 단종을 위해 내세웠던 혜빈 양씨는 단종의 양위와 함께 숙청됐다. 영응대군의 행복을 위해 재혼시켰던 춘성부부인 정씨는 이혼당해 쫓겨났으며 영응대군의 유모였던 신빈 김씨는 세종의 승하 직후 머리를 깎고 출가해버렸다.

또한 세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를 위해 간택했던 부마 영양위 정종은 수양대군을 축출하려다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렇게 세손 단종과 경혜공주의 안전을 위해 또 영응대군의 행복을 위해 마련했던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관련됐던 사람들도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불러 온 파장에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들어간 사람이 또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였다. 송현수의 딸이자 대방부부인 송씨의 친조카인 정순왕후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단종의 왕비로 간택됐고, 그 때문에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다.

14세이던 단종 2년(1454) 봄에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 사약을 받음에 따라 폐위됐다. 갑자기 청상과부가 된 정순왕후 송씨는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과 동대문 밖에서 헤어진 후 그곳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날마다 영월을 바라보기 위해 동망봉(東望峯)에 올랐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 주지(淨業院 住持)를 자처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단종의 극락왕생을 빌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정업원을 무대로 정순왕후 송씨, 경혜공주, 춘성부부인 정씨, 신빈 김씨 등 비극적인 여인들의 여생이 전개됐다.

돌아보면 춘성부부인 정씨, 신빈 김씨, 경혜 공주, 영양위 정종 그리고 대방부부인 송씨, 정순왕후 송씨 등은 근본적으로 세종의 영응대군 편애가 불러온 존재들이었다. 편애로 눈먼 세종은 영응대군을 위해 혼인과 이혼, 재혼을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관련자 모두의 불행이었다.

<대학연의> ‘제가지요(齊家之要)’의 첫 번째 항목은 ‘중배필(重配匹)’인데, ‘배우자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는 뜻이다. ‘중배필’에서는 제일 먼저 <시경(詩經)>의 ‘관저(關雎)’라는 시를 제시했는데 이 시는 문왕과 태사(太似)의 만남을 노래한 것이었다.

공자는 ‘관저’를 논평하면서 문왕은 좋은 배우자를 구하지 못했을 때 슬퍼하기는 했지만 상심하지 않았고, 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났을 때 즐거워하긴 했지만 음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문왕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예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태사와의 만남도 예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성군 세종이 이런 이치를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편애에 눈멀어 막내아들의 혼인·이혼·재혼을 비상식적으로 치르게 됐다. ‘중배필’이라는 면에서는 성군 세종도 이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필부필부들에게 ‘중배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5. 조상묘 도굴당한 선조, 거짓으로 복수하다  

임진왜란 당시 성종과 중종의 능(陵)이 왜군에 짓밟힌 데 격분했지만, 끝내 진범 여부 확인 못한 채 도굴범 두 명 공개처형 후 왜와 화친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는 재위 후반 임진왜란과 여진족의 침입을 받는 등 외환에 시달렸다. 지난해 10월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에서 열린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에서 배우들이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였던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당시 확인된 조선의 인구 500만 명 중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략 20만 명 정도는 포로로 끌려갔다. 7년 난리 통에 희생된 300만 사망자와 20만 포로는 누군가의 부모자식이거나 형제자매였다. 생때같은 혈육을 빼앗긴 채 상처투성이가 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증오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사죄와 배상도 없이 화친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우며 국교 재개를 요구했다. 이는 상처투성이인 조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화친하지 않을 수 없던 당시 국왕 선조(宣祖)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일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이라도 받아내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만행과 협박이 무한 반복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화친을 요청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를 먼저 보내라는 요구와 함께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체포해 압송하라는 요구가 그것이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기 휘하의 병사 중 단 한 명도 조선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모든 전쟁 책임을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떠넘겼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런 사실을 공식적인 국서에 명시하고 화친을 요청한다면 이는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사후였기에 그에게서 사죄를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양국은 서로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즉 선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시인한 것은 곧 전쟁 사죄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죄할 일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선조는 이 정도의 타협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과 사죄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 입장에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 문제는 국서만큼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선릉은 성종의 능이었고 정릉은 중종의 능이었다. 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중 도굴당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과 중종의 관이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고 시체는 행방이 묘연했다. 유교 가치관에서 볼 때 시체를 파내 훼손하는 것은 살인보다 더한 만행이었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러 가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를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행군하고 있다

 성종과 중종은 선조 개인에게는 직계 조상이었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선왕이었다. 그래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은 선조에게 조상을 살해한 원수보다 더 한 원수였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국왕을 살해한 원수보다 더한 원수였다. 유교의 교주 공자는 부모를 살해한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유교 가치관이 팽배했던 당시, 선조와 조선 사람들에게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은 불구대천보다 더한 원수였다.

만약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찾아 죽이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과 화친한다면 선조는 조상의 원수도 갚지 못한 모자란 후손이자 최소한의 전쟁 배상도 받아내지 못한 무능한 국왕이란 지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일본의 화친 요청에 먼저 도굴범부터 체포해 압송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선릉과 정릉은 1592년(선조 25) 9월쯤 도굴됐다. 당시 한양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었고 선조는 의주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도 도굴 사실을 몰랐고 선조도 몰랐다.

도굴 사실이 조선군 사이에 알려진 시점은 1593년(선조 26) 4월이었다. 2월 12일의 행주대첩 이후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한양 주변에 집결했다. 의병장 김천일 역시 수도 탈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관악산에 주둔하던 중 선릉과 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천일은 상부에 급보하는 한편 특공대를 조직해 현장을 조사하게 했다. 그때 선조는 평안도 영유에 머물고 있었다. 선조가 관찰사 성영의 급보를 받고 도굴 사실을 알게 된 때는 4월 13일이었다.

선조는 3일간 애도를 표하는 한편 대신을 파견해 현장을 확인하게 했다. 아울러 “이 도적을 잊고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리가 없어지고 인륜이 무너지게 되어 장차 다시는 사람 축에 들지 못할 것은 물론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니 자애로움을 베풀어 긍휼히 여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는 탄원서를 명나라에 보냈다. 명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원수를 갚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릉과 정릉은 일본군이 주둔 중인 한양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현장 조사가 몹시 위험했다. 김천일은 자신이 신임하던 이준경이라는 장교를 중심으로 30명의 특공대를 조직했다. 길안내는 서개똥이라고 하는 병사가 맡았다.

4월 17일 오전 8시쯤 관악산을 출발한 특공대는 작전을 개시했다. 이준경은 서개똥과 이충윤을 선발대로 보내고, 본대는 은밀한 길을 골라 천천히 전진했다. 성종의 4대 후손인 이충윤은 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참가한 인물이었다. 밤 12시 즈음, 이충윤과 서개똥이 먼저 정릉에 도착했다. 소문대로 정릉은 파헤쳐져 있었다. 참담해진 이충윤은 서개똥과 함께 숨죽여 곡을 했다. 광(壙) 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충윤은 먼저 서개똥을 내려 보냈다.

광은 대략 10m 깊이로 파여 있었다. 서개똥은 부싯돌로 불을 붙여가며 광 속을 조사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뭇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관이 타고 남은 조각들이 분명했다. 광 안을 둘러보던 서개똥은 깜짝 놀랐다. 광 중앙에 시체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다.



성종의 아들이자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무덤인 정릉.


광 중앙에 시체가 있다는 서개똥의 말에 이충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시체는 중종의 시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이충윤은 일단 본대를 기다리기로 하고 서개똥을 나오게 했다. 이충윤과 서개똥이 정릉 주변을 둘러보던 차에 이준경이 도착했다.
 

선왕 유골 수습한 뒤 국장 다시 치러 


이충윤의 말을 듣고 이준경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광 안으로 들어갔다. 부싯돌로 불을 붙여가며 확인해보니 시체는 머리털과 수염이 전혀 없었고 옷은 벗겨진 상태였다. 이준경은 자신의 옷을 벗어 시체의 아래를 감싸고, 윗부분은 이충윤의 옷으로 감쌌다. 마침 서개똥이가 곡장(曲墻) 밖에서 흰 끈을 주워왔기에 그 끈으로 시체를 단단히 묶고 땅을 파서 묻은 다음 기와로 덮었다. 뒤이어 선릉으로 옮겨가 확인해보니 그곳도 파헤쳐지기는 했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선릉과 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이 조선군 사이에 퍼지면서 전의가 불타올랐다. 선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훼손한 저 야만인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세상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는 도덕적 의무감은 조선군을 더더욱 용맹하게 만들었다. 4월 19일 마침내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했다.

정릉 광 안에 시체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시체가 과연 중종의 시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중종은 1544년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1593년 당시에는 장례를 치른 지 이미 50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 세월이면 시체가 썩어 없어졌을 수도 있지만, 회격(灰隔)으로 밀봉된 왕릉의 특성상 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릉의 시체가 정말 중종이라면 이 시체를 가지고 다시 국장을 거행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시체 대신 불에 타고 남은 유골로 해야 했다.

선조는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중종을 직접 모셨던 사람들을 찾아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종친·외척·궁녀 중에서 5명이 선발됐다. 그들은 옛날 자신들이 본 중종의 모습을 회상했고 그것을 토대로 중종의 모습을 그렸다.

증언에 의하면 생전의 중종은 보통사람보다 신장은 컸지만 체중은 보통이어서 훤칠한 느낌이었으며 5㎝ 정도의 누르스름한 수염이 있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갸름했고 곰보자국이 있었다. 또한 코는 매부리코였으며 양 눈썹 사이에 녹두알만한 검은색 사마귀가 있었다. 이런 증언을 바탕으로 중종의 모습을 그려서 발견된 시체와 대조했다.

그런데 그 시체는 모발이 모두 빠졌고 콧등은 깨져 이지러졌으며, 얼굴 피부도 모두 녹아 없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수염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겨우 신장과 몸통만이 확인 가능했다. 측정 결과 신장은 150㎝ 정도였는데 이 정도는 조선시대 남자 신장으로도 작은 편이었다. 또한 남아 있는 몸통은 뚱뚱한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시체는 작고 뚱뚱한 체형이었던 것이다. 이는 마르고 훤칠하다는 중종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릉의 시체는 중종이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선조는 선릉과 정릉의 시신이 모두 불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아 있는 유골로 국장을 치르게 했다. 현장을 조사한 결과 선릉과 정릉의 광 안에는 흙색과 백색 그리고 뼈마디와 피부조각이 뒤섞인 재가 있었다. 이런 유골을 두 개의 종이 봉지로 수습했는데 큰 봉지에는 뼈마디와 피부조각 등을 수습했고, 작은 봉지에는 타고 남은 재 등을 수습했다.

선조는 1593년 가을에 성종과 중종의 국장을 다시 치렀다. 물론 시체가 없어서 불탄 유골을 가지고 국장을 치렀다. 유교 가치관으로 볼 때 성종과 중종은 두 번 죽은 셈이었다. 첫 번째는 자연사였지만 두 번째는 시체가 불타 없어지는 타살이었다. 가까운 친족이 타살됐을 때 어떻게 복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자는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기를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삼아 잠자고, 벼슬하지 않으며, 원수와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한다. 만약 원수와 시장이나 관청 같은 곳에서 만나면 무기를 챙기러 가지 않고 즉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했다. 자하가 다시 묻기를 ‘청하여 묻습니다. 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원수와는 같은 나라에서 함께 벼슬하지 않으며 임금의 명령으로 출사할 경우에는 비록 원수를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아야 한다’ 했다. 자하가 또 묻기를 ‘가르침을 청합니다. 백부나 숙부 또는 종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앞장서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본인이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면 무기를 잡고 뒤에서 도와야 한다’ 했다.”[<예기(禮記)>, 단궁]
 


도쿠가와의 국서와 도굴범 압송을 요구하고



서애(西厓)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선조는 도굴범을 찾아 죽일 때까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잠자고, 벼슬하지 않으며, 원수와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결심을 해야’ 마땅했다. 국왕 선조는 실제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항상 지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선조는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지탄을 면할 수 없었다. 군사부일체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선조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다.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려면 국력을 키워 일본을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이 사죄와 배상도 없이 전쟁 운운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국론은 둘로 갈렸다. 선조와 조정 중신들은 현실에 입각해 화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젊은 관료들은 복수를 주장하며 화친을 반대했다. 예컨대 선조는 ‘우리나라와 일본은 불행히도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일본과는 천지가 끝나도록 함께해야만 하는 관계이니, 이는 마치 음양이 마주하고 주야가 마주하는 것과 같아 한쪽을 없앨 수가 없어 어렵고도 어렵도다’라고 탄식했는데 이는 일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나오는 한탄이었다. 



일본 가라쓰(唐津)시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성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이 성에서 왜군 12만 명이 조선을 향해 출격했다


이에 비해 젊은 사관들은 ‘임진왜란으로 우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심지어 선왕의 무덤까지 도굴되는 치욕을 당했으니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원수다. 와신상담해 이 치욕을 씻지는 못하더라도 관문을 걸어 닫아 일본과는 절대로 화친할 수 없다는 의리를 보여야 하는데 지금 화친하고자 하니 복수의 의리에 크게 어긋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이 같은 젊은 관원들의 대의명분이 아무리 훌륭하고 당당해도 전쟁 재발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사관의 논평대로 ‘와신상담해 이 치욕을 씻으려면’ 무엇보다도 일본보다 강한 군사력을 양성해야 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선조는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와 도굴범 압송을 요구했던 것이다. 길고 긴 논쟁 끝에 선조가 화친의 전제조건 두 가지를 요구하는 사신을 대마도에 파견한 때는 1606년(선조 39) 8월이었다. 일본에서는 바로 다음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와 도굴범 2명을 보내왔다.


“아무런 조처 없다면 불의·불효한 일”

그런데 문제는 도굴범 2명의 진범 여부였다. 진범이 아니라면 억울한 사람을 죽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을 속이는 일이었다. 선조는 도굴범이 진범인지 아닌지를 엄중하게 조사하게 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대마도 출신의 평조윤이 도굴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평조윤이 이미 죽었다고 하며 그 대신 평조윤과 함께 도굴에 참여했다는 대마도 사람 두 명을 체포해 압송한다고 했다.

하지만 평조윤의 조카로 알려진 한 사람을 조사한 결과 그는 “조선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을 범한 절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부모형제도 없고 4∼5촌 이내의 친척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람 역시 한양에는 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이 도굴범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그들이 진범일 경우 죽인 후 종묘사직에 고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두 명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컸다. 조정 신료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첫째는 가짜 도굴범 두 명을 석방하고 화친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가짜 도굴범을 보낸 것은 신명에 대한 기만행위이자 조선에 대한 모욕행위이기에 단호히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도굴범이 비록 가짜라고 해도 대안이 없으니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고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첫 번째 주장이나 현실을 중시하는 두 번째 주장 역시 일리가 있었다. 두 주장은 타협 없이 팽팽하게 맞서며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자 선조는 이런 논리를 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의 무덤을 도굴당했다면 수천 명의 도적 모두는 응당 그 아들이 직접 베어 살을 저며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을 다 잡을 수 없게 됐고 다행히 한두 명을 잡았다면 아들 된 자는 실성해 미친 듯 뛰면서 부모의 묘에 가서 통곡하고 손수 죽여서 원수를 갚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냉소하면서 ‘이는 묘를 도굴한 괴수가 아니라 수종(隨從)한 적일 뿐이니 이들에 대해 노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고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일이요 불효한 일이 아닐 수 없다.”[<선조실록> 39년(1606) 11월16일]

선조는 일본이 압송한 도굴범이 비록 진범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인이라는 사실 자체로 도굴범이라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아울러 선조는 ‘한번 화친을 잃게 되면 사납게 무기를 잡고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까 걱정되는 것은 물론 크게는 종묘사직의 안위에 관계되고 작게는 수십 년 동안 병란(兵亂)이 계속될 것이니 그 사이의 일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라는 현실론을 제기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선조는 도굴범 두 명을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는데 그때가 1606년(선조 39) 12월이었다. 비록 진짜 도굴범은 아니지만 일본인이기에 도굴범으로 간주돼 처형됐고 이것으로 복수가 마무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는 진짜 복수가 아니라 가짜 복수였다.

어쨌든 복수를 마무리한 선조는 1607년(선조 40) 1월에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정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회답겸쇄환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하는 동시에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절이란 뜻이었다. 이 같은 사절단의 명칭으로써 선조는 자신이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고 난 후 국교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성도 노력도 부족했던 임금.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일 양국간에 평화관계가 성립돼 19세기 말까지 지속됐고, 9000여 명의 포로가 송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없지 않다. 우선 분명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비록 9000명의 포로가 송환되기는 했지만 이를 20만의 전체 포로에 비춰보면 5%도 못 되는 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만으로 화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 이후에 선조는 와신상담하며 치욕을 씻도록 노력해야 마땅했다. 오히려 선조는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 그리고 세자 광해군과의 권력투쟁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났다.

<대학연의> ‘우재지경(遇災之敬)’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비상사태 때 제왕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 옛날 오랜 가뭄이나 큰 홍수는 인간의 힘으로 맞서기 힘든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포기나 내 책임 아니라는 무대책이 아니라 그 도전을 계기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반성하고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우재지경’의 가르침이다.

기상이변이나 전쟁 같은 거대한 도전 앞에서 현실을 들먹이며 자신의 책임을 쉬이 모면하려는 지도자들이 고금에 적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