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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스캔달[16회~20회]

문수봉(李楨汕) 2017. 12. 12. 22:45

조선왕조 스캔달[16회~20회]


포로된 두왕자, 바보 제안대군, 조카에 도전한 흥안군,적군을 맹신한 개화파, 



16. 포로가 된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임진왜란 초기 파천 결정 후 근왕병 모집하는 과정에서 ‘관심 밖’의 두 아들 골라

… 악조건 속에서 선전했으나 왜군에 포로로 잡힌 뒤 1년 동안 볼모 신세 면치 못해 



임진왜란 중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한 데다 선조의 무책임이 더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따른다. 서울 용산구 소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임진왜란 전시물. 조선 해군이 왜군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나 한양 사람들은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명장으로 소문난 신립 장군과 이일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1592년(선조 25) 4월 21일에 선조가 받은 이일 장군의 보고서에 “오늘날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으니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선조는 은밀히 미투리 등 피란 물품을 준비했다. 또한 언제라도 쓸 수 있게 말을 대령하게 했다. 혹시 필요할 경우 파천(播遷)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이와 함께 궁궐 밖에 살던 자녀와 사위, 며느리들을 불러들였다.

선조의 자녀들이 입궁하면서 파천 소문이 퍼져나갔다. 설상가상 상주 전투에서 이일 장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27일 한양에 알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도성 밖으로 나가는 피란 행렬이 줄을 이었다. 반면에 병력 자원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역시 은밀하게 파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파천 소문을 막지는 못했다. 조정 신료와 종친들은 파천 소문에 분개하며 결사 항전을 부르짖었다. 결국 선조는 “종묘와 사직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며 파천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야 했다.

그러나 파천 소문 자체가 인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대신들은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세울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28일에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됐다. 이 조치로 인심이 조금 안정되는 듯했지만 충주 전투에서 신립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29일 저녁에 전해지면서 한양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날 한밤중에 파천이 결정되면서 선조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셔와 파천 행렬에 동참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왕자들을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파천 반대론을 누르기 위한 조치였다.


이혼과 힘 합쳐 육군 최초의 승리에 기여한 임해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 장수들의 황금가면 


당시 선조의 아들 7명 중에서 2명은 미성년이었다. 따라서 세자 광해군을 제외한다면 4명의 왕자들을 모두 파견해 근왕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만 각각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게 했다. 반면 세자 광해군은 물론 이미 성년이 된 신성군과 정원군도 자신을 수행하게 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임해군은 선조의 큰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심을 많이 잃어 친동생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이런 상황에서 두 형제를 함께 데리고 파천한다면 그들 사이에 알력이 커질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두 형제를 떼어 임해군에게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면 선조에게는 일석이조였다. 첫째는 두 형제의 알력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 간의 경쟁심을 이용해 근왕병 모집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의 경우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실적이 아주 탁월하다면 세자를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선조와 떨어져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은 21세로 명실상부한 성년이었음에 비해 순화군은 13세에 불과한 나이였다. 반면 선조를 수행하게 된 신성군은 15세였고 정원군은 13세였다. 세자 광해군은 18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의 순화군이 15세의 신성군을 제치고 근왕병 모집에 나서게 된 이유는 선조의 편애 때문이었다.

선조는 후궁 중에서 숙의 김씨를 가장 총애했다. 당연히 아들들 중에서는 숙의 김씨 소생인 신성군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선조가 임진왜란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룬 가장 큰 이유는 신성군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왕비의 아들도 아니고 후궁 소생 중 첫째도 아니어서 그렇게 못했다. 선조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신성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부득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다.

선조는 신성군으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만약의 경우에 세자 광해군을 대신하게 할 생각이었다. 신성군의 친동생인 정원군 역시 숙의 김씨 소생이었기에 선조를 수행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된 임해군이나 순화군은 상대적으로 선조의 관심 밖에 있던 왕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와 강원도에 왕자를 파견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파천 길에 오른 선조의 1차 목적지는 개성 아니면 평양이었다. 당연히 선조가 파천하게 될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왕자들이 앞장서 근왕병을 모집할 필요는 없었다. 반면 함경도와 강원도는 태조 이성계가 태어나 활약하던 곳으로 조선 왕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의 최정예 병력으로 손꼽히는 6진의 기마대가 소재한 곳이기도 했다.

4월 30일 새벽, 임해군은 창덕궁을 떠나 함경도로 향했다. 조금 앞서서 순화군도 강원도로 갔다. 5월 1일 경기 포천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우연히 순화군을 만났는데 다시 길을 나눠 북으로 향했다.

5월 3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한 임해군은 그곳에서 왜적이 이미 춘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화와 춘천은 하루 일정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임해군은 즉시 북으로 길을 재촉해 5일에는 철령을 넘어 함경도의 안변에 도착했고, 이어 9일에는 원산 주변에 있는 덕원에 도착했다.

임해군은 그곳으로 함경도 감사와 군사령관들을 소집했다. 이에 호응해 북청에 주둔하던 남병사 이혼이 4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왔다. 이 병력이 당시 조선 관군 중에서는 최정예 병력이었다. 임해군은 그중에서 200명을 선발해 선조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전쟁터로 가게 했다.

남병사 이혼은 관군과 힘을 합쳐 경기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70여 명의 왜적을 참수한 이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육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이외에도 임해군은 함경도 주민들의 항전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말을 무상으로 지급하고, 세금을 대폭 감면했다. 임해군의 근왕병 모집 활동은 비록 몇몇 부작용 예컨대 강제적 물자 수탈이나 불법적 노동력 징발 등을 야기하긴 했지만 현실적인 성과도 내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평양의 선조는 물론 덕원의 임해군 역시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할 각오를 하고 의주로 갔고, 임해군은 마천령을 넘어 함경북도의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당시 순화군은 임해군과 함께 있었다.


함경도인들, 두 왕자를 잡아 왜장에게 내주다

임진강을 건넌 왜적은 황해도 평산에 이르러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로 각각 길을 나눠 침략했다. 함경도로 쳐들어간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 황해도 곡산을 경유한 가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함경도로 쳐들어갔다. 당시 남병사 이혼은 왜적의 침입로를 철령으로 예상하고 강원도 회양에 주둔했다. 하지만 그곳은 황해도 곡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가토는 무인지경을 달리듯 함경도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6월 17일, 가토는 안변에 도착했다. 가토는 병력을 나눠 일부는 안변에서 흡곡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했다. 반면 자신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진출한 뒤 북청, 단천을 지나 계속 북진하면서 왕자들을 추격했다.

북병사 한극함은 마천령에서 가토를 막으려 했으나 대패했다. 그 전투가 7월 18~19일 이틀간 전개된 함경북도 성진의 해정창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함경도의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은 일거에 와해됐다. 이런 상황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은 또다시 경성에서 회령으로 퇴각했다가 7월 23일에 회령 사람 국경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왕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니 회령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을 잡아 적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함경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됐다. 당초 가등청정이 고개를 넘어 왕자 일행을 끝까지 추격하니 왕자가 경성으로 도망했다. 북병사 한극함이 마천령에서 항거해 싸웠으나 해정창이 왜군에 차단당하자 군사들이 패해 도망했다. 왕자가 진로를 바꿔 회령부로 들어갔는데 적병이 가까이 추격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회령의 토병(土兵)이 이미 모반해 거짓으로 성을 지키겠다고 청하면서 스스로 문의 자물쇠를 간수하여 나가지 못하게 했다. 국경인이 마침내 객사를 포위하고 두 왕자 및 부인·여종·노비 등과 재상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그들의 가솔을 잡아 모두 결박하고 마치 기물을 쌓아놓듯 한 칸 방에 가뒀다.”[<선조수정실록> 25년(1592년 7월 1일)]

이에 앞선 6월 11일, 선조가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자 함경도에는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여기에 해정창 전투의 패배 소식이 더해지고 또 임해군과 순화군의 회령 도피 소식이 더해지자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 역시 명나라에 망명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나루 인근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의 전경.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이곳을 거쳐 피란을 갔다. 


실록에 의하면 회령에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적이 가까이 추적했다는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행동이 의심을 불러왔다. 회령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는 것은 사실상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는 것인데 결국 망명하려 했다는 뜻이었다.

사실 해정창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을 향해 갈 때부터 망명할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경도 사람들은 왕자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꼈고, 그랬기에 왕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사실을 일일이 써 붙여 가토에게 알렸다. 이런 사실에서 보면 해정창에서 패배한 이후 선조는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도 함경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은 국경인은 이 사실을 가토에게 알렸다. 회령에 가토가 들어왔을 때 왕자 등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가토는 “이 사람들은 바로 너희 국왕의 친아들과 조정 대신들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곤욕을 주는가?”라며 결박을 풀게 했다. 이후 가토는 6진 지역을 모두 접수하고 9월 초에 안변으로 철군했다.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안변으로 끌려갔다.

그때 가토는 돗자리로 싼 가마를 만들어 왕자들을 옮겼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밤이 되면 방문을 새끼로 얽어 묶었으며 수많은 보초병을 세우고 밤새 불을 밝혔다.

한편 7월이 되어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 뒤이어 7월 17일에는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이끄는 3500명의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공격했다. 비록 이 공격은 실패했지만 조만간 명나라 군대 10만이 출병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진 반면 왜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가토를 비롯한 대부분의 왜장은 명나라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가토는 조선 땅을 분할함으로써 일단 조선과 화친했다가 장기적으로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이용하려고 했다.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받아내자는 계산이었다.

이 같은 협상안은 무엇보다도 명나라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만약 대동강과 한강 사이를 절충지대로 하고, 대동강 이북은 조선이 한강 이남은 일본이 점유한다면 명나라가 합의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명은 마지못해 전쟁에 참전했지만 확전을 원치는 않았다. 다만 일본군이 명나라의 영토로 침입할까 우려했다.

그러므로 일본군이 한강 이남에 머물겠다고 하면 명나라는 굳이 반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설혹 조선이 반대하더라도 명나라가 밀어붙이면 협상은 관철될 수 있었다. 게다가 왕자들까지 풀어주겠다고 하면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가토는 포로로 잡은 이홍업에게 자신의 협상안을 주어 선조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여기에 더해 왕자들의 편지는 물론 수행 대신들의 편지도 보냈다. 가토의 협상안과 왕자들의 편지가 선조에게 전해진 때는 10월 19일이었다.

당연히 조정 중신들은 가토의 협상안을 결사 반대했다. 선조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조는 협상안을 가져온 이홍업을 사형시킴으로써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명나라에도 강력한 반대 의지를 알렸다.

조선군과 왜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1592년 12월 26일에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군의 전투 양상은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1593년 1월 8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을 공격해 탈환했다. 이여송은 그 여세를 몰아 개성을 탈환했고 1월 24일에는 서울 근교의 벽제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왜적을 얕보던 이여송은 벽제역에서 유인술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놀란 이여송은 평양까지 후퇴하고 더 이상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나라에서는 임해군과 순화군 석방에 총력을 기울였다. 두 왕자를 송환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왜군과 협상하자고 하면 선조가 결사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다



임진왜란 당시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퇴시킨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재현행사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1393년 2월 20일, 명나라 사신 풍중영은 안변에서 가토와 만나 강화회담을 가졌다. “명나라 사신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가토의 말에 풍중영은 “조선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기에 특별히 강화해 어려움을 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내가 명나라 사신과 회담하는데 조선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없습니다”라며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조선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풍중영과 단둘이 하루 종일 회담했는데 그 자리에 참여한 조선 사람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가토는 자신이 이전부터 주장하던 내용 즉 두 왕자를 돌려보내는 대신 대동강 이남지역 또는 한강 이남지역을 내놓으라 요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풍중영과의 회담 후 가토는 통역으로 따라온 최우에게 사람을 보내 “조선은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물었다. 최우는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므로 땅을 할양하고 화친하는 등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토는 “국왕이 전하는 서찰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최우는 없다고 답했다. 그 후 가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로 보면 가토는 화친의 전제조건으로 영토 할양을 약속받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풍중영은 먼저 왕자들부터 송환하라고 주장했고, 가토는 “이미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에게 보고했기에 마음대로 풀어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이어 선조 역시 영토 할양에 관해 어떤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을 확인한 가토는 회담을 결렬시켰다. 그 대신 한양에서 강화회담을 재개키로 했다.

그날 저녁 최우는 가토에게 부탁해 왕자들을 만났다. 최우와 인사를 나누고 잠시 대화하던 왕자들은 한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지금 강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분명 바다를 건너야 할 텐데 너희들이 비용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마련해 올리겠다고 답한 최우는 백금 30냥과 명주 20필을 올렸다.

이런 대화로 보면 당시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으로 끌려갈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토는 자신의 협상 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왕자들을 일본으로 잡아가겠다고 크게 소문냈던 듯하다. 물론 임해군과 순화군이 앞장서서 가토의 협상안을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가토에게 끌려 한양으로 왔고 같은 집에 머물렀다. 그때 한양에는 먹을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군은 물론 왕자들 역시 먹을 것이 없어 굶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재개됐다. 가토는 이전과 같은 요구를 했고,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후(戰後) 나라 사정을 더욱 악화시킨 왕의 ‘무책임’



19세기 중기에 간행된 일본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 장군


강화 회담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명과 일본 사이에는 일종의 묵인이 형성됐다. 즉 일본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가고, 그 대가로 명은 일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묵인이었다. 4월 19일,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해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갔다. 그때 임해군과 순화군은 부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명군은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명나라는 일본의 남해안 지역 점유를 묵인했고, 일본은 명나라 군대의 조선 주둔을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영토 할양을 통한 화친이라는 가토의 협상안이 관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묵인의 증표로 임해군과 순화군이 명군에 송환됐다. 그때가 1393년 7월. 포로로 잡힌 지 1년 만이었다.

선조의 입장에서 왕자들의 송환은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을 조선으로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선조는 영토 할양을 공인하거나 묵인하는 그 어떤 상황도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해야 마땅했다. 그러자면 영토 할양 묵인의 증표로 송환된 두 왕자를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처단해야 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지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두 왕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처단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두 왕자를 수행했던 신료들만 가혹하게 처벌했다. 선조는 자신과 왕자들은 전쟁 책임을 조금도 지지 않을 것임을 공언한 셈이었다. 이런 선조가 명나라 장수들에게 왜군을 몰아내달라 요구했을 때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을까? 국력도 약하고 의지도 약한 왕의 투정 정도로 무시되지는 않았을까?

실제로 명나라는 선조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이나 일본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자칫 왜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지속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조선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은 정유재란(1597, 선조 30)에서 조선이 승리함으로써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남해안 지역 점유가 몇 년간이나 지속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였다. 그것에 더해 선조의 무책임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연의> ‘덕형선후지분(德刑先後之分)’에서는 형벌에 비해 인덕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상이전형(象以典刑)’이라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상이전형’이란 ‘마치 하늘의 별처럼 이치에 맞게 형벌을 씀’이라는 의미다. ‘상이전형’을 남에게는 엄격하게 요구하고 자신에겐 관대하게 적용한다면 그는 어진 군자가 아니요, 좋은 지도자도 아닐 것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7. 조선의 ‘바보왕자’ 제안대군 

예종 승하 후 왕위계승 1순위 원자였으나 사촌형인 자을산군에게 밀려 왕자로 격하돼

… 성 불능 탓에 부인과 합방할 수 없게 되자 이혼-재혼-이혼-재혼 반복하는 불운도 겪어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내려다본 창경궁의 야경. 가운데 자리한 ‘홍화문’은 창경궁이 창건되던 해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16년(광해군8)에 재건됐다


자고로 음식과 남녀의 성은 인간의 욕망 중에서도 가장 큰 욕망이다. 인간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고 남녀관계가 없으면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고대의 어떤 철학자는 식욕과 색욕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갈파(喝破)했다.

그런데 어떤 인간은 색욕에 무관심하기도 하다. 호기심 많은 역사가에게 이런 인간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그랬다면 더더욱 연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성현이 1504년(연산군 10)에 쓴 <용재총화>에는 그 당시 색욕에 무관심해 유명인사가 된 남자 3명이 등장한다. 제안대군, 한경지 그리고 김자고의 아들이 그 주인공이다.

예종의 원자로서 수많은 미인을 거느렸던 제안대군은 늘 부인은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부인과 마주앉지도 않았고,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지 역시 부인은 물론 여종과 상종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열 살 무렵에 김수말의 여식과 혼례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에는 예종의 독살설과 관련한 내용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김자고의 아들은 남녀의 일도 모르고 숙맥도 구분 못하는 바보였다고 한다. 이를 걱정한 김자고가 어느 날 남녀의 일을 잘 아는 여자종을 곱게 단장해 아들에게 들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아들은 침상 밑으로 도망해 들어갔고, 이후로는 곱게 단장한 여자만 봐도 울며 도망쳤다고 한다.

요컨대 제안대군, 한경지 그리고 김자고의 아들 3명은 남녀의 일도 모르는 바보 중의 ‘상바보’로 당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셈이다. 그들 3명의 남자가 왜 그리 됐는지는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제안대군이다. 그는 예종의 원자로서 왕이 될 뻔했던 인물이다. 그런 제안대군이 어쩌다가 색욕에 무관심하게 돼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더 나아가 <용재총화>에까지 실리게 됐을까?

1469년(예종 1) 11월 28일,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원자였던 제안대군은 겨우 4세였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왕위계승의 서열 1순위는 당연히 원자였다. 그러나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 윤씨는 원자를 너무 어리다고 하며 그 대신 13세의 자을산군을 후계 왕으로 지명했다. 사촌형인 자을산군이 성종이 됨으로써 제안대군은 원자에서 왕자로 격하됐다.

4세의 제안대군은 아직 어렸기에 궁에서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와 함께 살았다. 그렇지만 어린 제안대군을 키운 사람은 유모 금음물(今音勿)이라는 여성이었다. 제안대군의 성품과 기질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 유모였다. 그래서 제안대군에게 유모는 명실상부 제2의 어머니라 할만 했다.

당시의 궁중 관행대로 제안대군은 10세 전후로 혼인해 궁중을 나갔다. 부인은 김수말의 딸이었고 비슷한 또래였다. 살림 집은 한양 동부의 성균관 부근이었다. 그때 유모 금음물 역시 제안대군을 따라 나갔다. 제안대군이나 부인 김씨는 아직 어렸기에 살림살이는 유모가 주관했다.

그런데 제안대군의 유모가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안대군이 어리다는 사실 이외에 안순왕후 한씨의 신임이 더 컸다. 당시 궁궐의 유모는 대비가 뽑는 것이 관행이었고, 대비는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여성을 유모로 들여 자녀를 키웠다. 그러다가 자녀가 혼인해 나가면 유모를 딸려 내보내 살림살이를 돌보게 하는 한편 어떻게 사는지도 수시로 보고하게 했다.

제안대군의 유모 금음물은 보통 여성이 아니었다. 제안대군이 태어났을 때는 예종의 원자로서 차기 왕위가 보장된 처지였다. 그래서 정희대비는 유능한 여성을 유모로 들이기 위해 널리 물색했다.

그 결과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가 특별히 금음물을 유모로 뽑아 올렸다. 분명 지성과 성품 모든 면에서 차기 왕의 유모로 손색이 없었기에 선택됐을 것이다. 이런 금음물은 혼인한 제안대군에게 제2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무서운 감독자이기도 했다. 


합방 앞두고 부인과 이혼하는 왕자



종묘 정전에서 봉행된 세계무형유산 종묘제례에서 종묘제례악 악장과 일무(佾舞)가 연행(演行)되고 있다. 왕과 왕비에게 지내던 제사인 종묘제례는조선왕조의 매우 중요한 행사로 ‘종 묘대제’라고도 한다.


제안대군이 13세 되던 해 여름, 부인 김씨는 피서차 외가로 갔다가 더위 병에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다리를 저는 후유증이 남았다. 제안대군이 14세 되던 해에도 부인 김씨의 후유증은 완쾌되지 않았다.

그런데 왕실의 관행상 부인들은 15세쯤에 성인식을 치르고 합방을 했다. 제안대군은 비록 10세 전후로 혼인하기는 했지만 14세가 될 때까지 합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왕실 어른들은 제안대군이 15세 가까이 되자 부인 김씨의 성인식을 준비하는 한편 합방 준비도 했다.

특히 제안대군의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는 하루라도 속히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자주 궁녀를 보내 며느리 김씨 즉 제안대군 부인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때 며느리 김씨의 상태를 궁녀에게 전하는 역할은 당연히 제안대군의 유모가 맡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제안대군의 유모는 김씨의 후유증이 심해 걷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자주 기절한다고 과장해 알렸다. 요컨대 며느리 김씨가 사람구실을 할 수 없어 성인식도 불가능하고 합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즈음 제안대군은 부인을 심각하게 미워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제안대군은 누군가의 부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부인 김씨는 언제나 죽을 것인가?”라며 몹시 부러워했다고 한다.

제안대군에게 미움 받는 며느리 김씨가 사람구실까지 못하는 상태라고 전해들은 정희대왕대비는 즉시 이혼을 명령했다. 조선시대 칠거지악 중의 하나가 악질(惡疾) 즉 심각한 병이었는데 그것을 핑계로 김씨를 쫓아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씨의 외할아버지는 중간에서 유모가 거짓말을 해서 그렇지 후유증은 다 치료됐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에 따라 제안대군은 합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이혼하게 됐다. 그렇다면 제안대군은 왜 그토록 부인을 미워했을까? 또 유모는 왜 중간에서 거짓말을 했으며, 정희대왕대비는 왜 그 말을 듣자마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이혼시켰을까?

우선 합방에 대한 제안대군의 두려움이 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합방을 앞둔 14세의 제안대군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그 이유는 말 못할 사정 때문이었다. 여러 기록을 두루 살펴보면, 제안대군은 어려서부터 “부인은 더러워서 가까이할 수 없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자신의 병 때문이었음이 확실하다.

제안대군의 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성 불능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성 불능에 시달리던 제안대군은 자신의 병을 공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합방할 수도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음직하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잘 아는 유모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제안대군이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음이 분명하다. 더위 병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김씨는 그렇지 않아도 여자에 관심이 없는 제안대군에게 더더욱 매력이 없어 보였을 듯하다. 이런 김씨와는 도저히 합방도 되지 않고 자녀 생산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유모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좀 더 매력적인 여성을 제안대군의 부인으로 맞게 하려고 했음직하다.

어쩌면 제안대군의 생모인 안순대비 한씨는 유모를 통해 대군의 상태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모를 통해 김씨와는 합방도 어렵고 자녀 생산도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야기를 정희대왕대비에게 했을 듯하다.

이렇게 보면 안순대비 한씨와 정희대왕대비는 유모와 마찬가지로 하루라도 속히 손자를 보고 싶은 욕심에서 김씨를 쫓아냈다고 생각된다. 성종 10년(1479) 12월 21일자의 실록기사에 의하면 성종은 김씨의 외할아버지에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곧 대왕대비의 명령이다. 경이 처음 혼인할 때 오래 묵은 병이 있다고 알렸다면 좋았을 텐데 말을 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경의 실수”라고 해 이혼 책임을 김씨의 외할아버지에게 돌렸지만, 실제 이혼 책임은 제안대군에게 있었다. 



재혼 1년여 만에 전처와 재결합 추진하고

 


인기리에 방영됐던 JTBC 사극 <인수대비>. 조선 초기인 세조~연산군 대의 이야기를 사실(史實)에 근거해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쨌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안대군이 이혼한다고 하자 양반 관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나라의 모범이 돼야 할 대군이 분명한 이유 없이 이혼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성종은 정희대비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제안대군은 장안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후 이혼함으로써 합방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재혼을 막지는 못했다. 생모 안순대비 한씨는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에 재혼을 서둘렀다. 그 결과 박씨라고 하는 여성이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왔다. 그 시점은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할 때 제안대군이 15세 되던 해 가을이나 아니면 16세 되던 해 봄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혼한 제안대군은 여전히 박씨와도 합방하지 않았다. 손자를 기다리는 안순대비 한씨는 수시로 며느리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아이를 재촉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며느리 박씨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아이를 갖고 싶어도 하늘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사정도 모르면서 자신만 채근하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 박 씨는 점점 정이 떨어졌고, 정이 떨어지는 만큼 말투나 행동도 거칠어졌다.

하지만 시어머니에게 어찌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 있으랴? 며느리 박씨는 아이를 갖기 위해 제안대군을 몰아붙였을 터인데 이것이 제안대군의 분노를 불러왔다. 미움이 치솟은 제안대군은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부인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본다면 제안대군은 분명 타고난 바보이거나 아니면 위장된 바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안대군은 17세 되던 해 봄부터 갑자기 이혼한 부인을 찾기 시작했다. 재혼한 지 겨우 1년여 지난 시점인데 아마도 부인 박씨로부터 모진 채근을 당하다 그렇게 됐을 듯하다.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를 돌파구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는 편안함이다.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10세에 혼인해 14세까지 4년을 부부로 살았다. 비록 합방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여성이 전처 김씨였다.

둘째는 미안함이다. 제안대군은 자신의 말 못할 사정으로 김씨가 쫓겨났음을 내심 미안해 했을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잘 아는 김씨가 만약 자신을 받아준다면 제안대군은 합방의 공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성종 13년(1482) 1월 14일,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씨는 친정으로 돌아가 살고 있었다. 침방으로 들어간 제안대군은 전처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제안대군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그런 자신을 받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김씨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을 듯하다.

김씨의 입장에서는 성 불능인 제안대군과 다시 합치는 것이 분명 비극이기는 하나, 이혼당하고 친정집에서 홀로 살다 죽는 것보다는 낫을 것이라 판단했을 듯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제안대군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사람을 보내 김씨를 맞이해 갔다. 이 결과 제안대군은 졸지에 부인 2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비록 후처인 박씨에게 이 사실을 숨겼지만 소문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소문이 퍼지고 퍼져 사헌부에까지 알려졌다.

성종 13년(1482) 5월 6일, 사헌부에서는 제안대군 사건을 조사하라 요구했다. 성종은 제안대군이 이혼한 전처와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조선시대에 한 남성이 처첩을 거느리는 것은 용인됐지만, 부인 2명을 거느리는 것은 분명 불법이었다.

제안대군이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면 먼저 성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처와 결합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제안대군은 그런 절차도 없었다. 성종의 명령에 따라 조사가 진행됐고 모든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뒤이어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전처 김 씨는 다시 친정으로 쫓겨났다. 그때가 5월 19일이었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마도 제안대군은 자신이 전처와 재결합한 일을 부인 박씨가 밀고했다고 의심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애가 닳은 사람은 생모 안순대비 한씨가 아니라 오히려 유모 금음물이었다. 유모는 제안대군의 상태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다. 냉정히 따지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책임은 제안대군에게 있었다.

그러나 제안대군을 자기자식처럼 사랑하는 유모는 철저하게 대군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부인 박씨가 조금만 더 여성스럽게 군다면 대군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가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부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유모는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를 쫓아내기 위해 끔찍한 음모를 꾸몄다.

성종 13년 6월 11일, 유모 금음물은 성종에게 밀서를 올렸다.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가 수많은 여종과 동침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동성애를 부정한 행위이자 끔찍한 범죄로 간주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제안대군의 부인이 동성애를 벌였다는 밀서가 들어오자 성종은 깜짝 놀랐다.



후처 박씨, 동성애자로 몰려 조사받는데



창경궁에 있는 성종태실비. 조선시대에는 왕자의 탯줄을 도자기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묻었다. 일제가 성종태실을 궁으로 옮긴 뒤 창경궁으로 격하시켰다

 

성종의 명령에 따라 승정원의 형방승지가 사건을 조사하게 됐다. 먼저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 그리고 부인과 동성애를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여종들이 체포되었다. 형방승지는 먼저 내은금이라는 여종을 조사했는데 내은금은 “부인과 5월부터 동침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뒤이어 금음덕이라는 여종도 부인과 동침했다고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동침 현장을 유모 금음물과 다른 여종들에게 들키기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제안대군 부인 박씨가 동성애를 벌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성종은 정희대왕대비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정희대왕대비는 자세하게 조사해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성종은 승전색 환관에게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제일 먼저 부인 박씨를 조사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날 밤, 제가 자려고 하는데 둔가미라는 여종이 갑자기 들어와 동침하자고 졸랐지만, 저는 ‘내가 비록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명색이 주인인데 네가 어떻게 동침하자고 한단 말이냐?’ 하며 거절하자 둔가미는 물러가서 금음덕이하고 잤습니다. 또 어느 날 밤, 내은금이라고 하는 여종이 들어와 저와 같이 자자고 하므로 이 또한 제가 꾸짖어 물리쳤더니 물러가서 평상 밑에 앉았다가 제가 잠들기를 기다려 몰래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유모 금음물이 녹덕이라는 여종을 데리고 등불을 밝히고 들어와서는 ‘양반이 저 모양인가? 더럽다, 더러워’ 했습니다. 그때 저는 날이 이미 새벽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꾸중하는 줄로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성종실록>13년 6월 16일)

위의 내용에 의하면 부인 박씨는 주체적으로 동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종들에게 동침당했다. 만약 박씨의 주장이 옳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여종들을 들여보내 동침하게 하고 그 현장을 덮친 것이 분명했다. 사건이 의심스럽다고 생각된 성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했다.

여종들을 조사한 결과 배후자는 유모 금음물로 밝혀졌다. 마침내 금음물을 조사하자 그녀는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와 다시 합하고자 하므로 제가 내은금 등으로 하여금 부인과 동침하게 하여 그 악행을 들추고자 그랬습니다”라고 실토했다. 요컨대 부인 박씨를 쫓아내기 위해 동성애자로 조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제안대군 유모의 자작극으로 결론이 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모가 부인을 모함했다는 사건 자체가 한양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나아가 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제안대군의 유모 금음물은 생각하기에 따라 충신이기도 하고 역적이기도 했다. 즉 제안대군을 위해 이런 악역까지 자행했다고 하면 금음물은 충신이었다. 반면 제안대군의 부인 박씨는 유모에게도 주인인데 그런 주인을 모함하고 고발까지 했다는 것은 크나큰 반역이었다. 금음물을 충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처와 재결합하는 것으로 ‘사건’ 마무리돼


​그런데 문제는 제안대군의 개입 여부였다. 만약 제안대군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면 금음물은 충신일뿐더러 무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음물은 시켜서 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했는지에 대해여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면 금음물 스스로 알아서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종은 이런저런 정상을 참작해 금음물을 변방의 관비로 보내버렸다. 또한 유모의 지시를 받고 박씨의 방으로 들어갔던 여종들은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에 유배하도록 했다. 비록 지시를 받고 한 짓이기는 해도 주인을 모함에 빠뜨린 것은 크나큰 반역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부인 박씨였다. 박씨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제안대군은 부인 박씨와 살아야 하고 전처인 김씨와는 헤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판결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부인 박씨는 시어머니인 안순대비 한씨에게 불순종했다는 죄목으로 이혼당했다. 사실 이것은 핑계이고 제안대군이 죽어도 박씨와는 살지 않겠다고 해서 이렇게 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부인 박씨만 억울하게 이혼당한 셈이었다.

이어서 성종은 제안대군에게 다시 장가들 것을 명령하고 부인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지금 듣건대 신을 위하여 여자를 고른다고 하시니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전처인 김씨와 재결합하겠다고 했다.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토록 홀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같은 제안대군의 고집에 결국 성종도 굴복했다. 이 결과 제안대군은 전처 김씨와 다시 살게 됐고, 그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실록에 실렸다.

돌아보면 제안대군 사건이 그토록 커지고 나아가 역사화되기까지 한 이유는 대군의 어리석음에 더해 유모의 어리석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유모 금음물은 제안대군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얼핏 충성으로 보이는 그런 행동이 결국에는 제안대군을 조선시대 최고의 바보왕자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대학연의> ‘섬사망상지정(憸邪罔上之情)’에는 간신이 윗사람을 어떻게 망치는지가 언급돼 있다. 이에 의하면 간신의 공통점은 윗사람의 뜻을 무조건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간신은 처음에는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간신은 끝내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윗사람을 영원한 바보나 영원한 악당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면에서 간신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만 하고 싶어하는 윗사람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8. 조카(인조)의 왕권에 도전한 삼촌(흥안군)  


인조반정 성공 후 모든 결실 능양군파가 독점하면서 명분파의 불만 폭발해

… ‘이괄의 난’으로 알려진 역모사건의 본질은 반정주역들 간의 ‘후계왕’ 다툼



광해군 때 건축된 궁궐로 조선 후기 정치활동의 주무대였으나 일제 강점기 때 헐렸다가 복원된 경희궁. 사적 271호로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위치해 있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300년 이상 ‘생존’했다. 이 기간 중 수많은 정변이 일어났지만 그중 압권은 단연 인조반정이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거사해 성공한 반정세력은 1910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절대주의(朱子絶對主義)를 내세운 이들의 이념과 노선이 조선후기의 국가이념과 국가노선을 강력하게 규제했다는 점에서 인조반정의 역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인조반정에 참여할 주역들이 확정된 시점은 거사 한 달 전인 1623년 2월이었다. 그런데 반정 주역들은 광해군을 타도한다는 점에는 합의했지만 다른 점에는 그러지 못했다. 가장 큰 이견은 다음 왕으로 누구를 추대하는가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반정 주역들은 명분파와 능양군파로 나뉘었다. 양쪽 모두에 일장일단이 있었다. 우선 명분파는 광해군을 타도한 뒤 후계왕은 유교명분에 따라 광해군과 같은 항렬(行列), 즉 선조의 아들들 중에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분에서 앞서는 주장이었다.

생전의 선조에게는 왕비소생의 대군 1명과 후궁소생의 왕자군 13명 등 총 1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1623년 2월 당시까지의 생존자는 광해군을 위시해 왕자군(群) 7명 등 총 8명이었다. 생존한 왕자군 7명 중에서는 36세의 인성군이 최고 연장자였다. 따라서 광해군을 축출한다면 왕자군 7명 중에서 최고연장자인 인성군을 추대하든가 아니면 그 아래에서 추대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파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아직 인성군의 내락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반정 주역들이 합의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없다는 것이 명분파의 입장이었다. 이 같은 명분파의 대표자는 이괄과 김원량이었다.

반면 능양군파는 이미 능양군이 반정에 적극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 능양군을 추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623년 당시 29세의 능양군은 거금의 재산을 풀어 거사자금에 충당했으며, 주요 반정 참여자들을 만나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능양군에게 ‘대권’ 기울면서 생긴 불행의 싹



사극 <화정>에서 광해군.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에 책봉됐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자리를 위협받았고, 등극한 지 16년 만에 폐위됐다.


그러나 능양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였기에 명분에서 크게 밀렸다. 능양군은 선조의 왕자군 13명 중에서 다섯째인 정원군의 큰아들이었다. 이런 능양군이 광해군 타도 후 왕이 된다면 수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었다. 우선 선조의 아들들, 즉 능양군의 삼촌이 되는 7명의 왕자군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복잡했다. 능양군보다 항렬이 앞서는 이들이 불만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조의 손자로서 능양군과 같은 항렬이 되는 사람도 수십 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도 쉽지 않았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최고 연장자인 인성군을 추대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이 명분파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능양군파는 아직 인성군과 접촉이 없지만 능양군은 적극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들어 반대했다. 이 같은 능양군파의 대표자는 김류·이귀·신경진·김자점·최명길 등이었다.

이에 따라 거사 이전부터 명분파와 능양군파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2년째 되던 해, 이귀는 반정 전에 명분파와 능양군파가 어떻게 대립했는지를 회고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귀가 말하기를 “광해군을 몰아내기로 결의했던 처음부터 이괄과 김원량은 인성군에게 뜻을 뒀습니다. 반정하기 직전에 우리들이 최명길의 집에 모여 회의했는데 김원량은 반드시 이괄을 대장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때 이흥립이 회의 자리에 와서 김원량에게 말하기를 ‘나가서 능양군을 한 번 만나보시라’ 했습니다. 그러자 김원량은 발끈하며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이에 김류가 또 권유하기를 ‘가서 능양군을 한 번 만나보시라’ 했더니, 김원량은 또 발끈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반정하던 당일에 김류가 무슨 일로 늦게 도착했는데 그때 이괄이 이미 대장이 돼 김류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김원량 또한 그날 거사하는 자리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괄과 김원량이 인성군에게 뜻을 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했다.[<인조실록> 2년(1624) 12월 6일]

1623년 당시 반정주역들 중 최고령자는 67세의 이귀였다. 따라서 나이 순으로 하면 반정 대장은 이귀가 맡아야 했다. 하지만 이귀는 “이러한 때 대장은 나 같은 늙은이는 할 수 없소. 영공(令公, 김류)은 본래 대장 물망이 있어 병사들을 제압할 수 있으니 영공이 대장을 하는 것이 좋겠소”라며 김류에게 양보했다. 김류가 대장을 맡으면 왕으로 추대되는 사람은 자연히 능양군이었다.

그래서 김원량은 김류를 대장으로 추천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던 것이다. 그 대신 김원량은 이괄을 대장으로 추천했다. 그래야 반정이 성공한 이후 인성군을 추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주역들 중 대다수는 능양군을 지지했다.

이 결과 반정 대장은 이괄 대신 김류로 결정됐다. 거사 일은 1623년 3월 12일 밤 2경으로 잡혔다. 이 시각에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일시에 궁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잡은 후 능양군을 후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괄은 아들 이전 그리고 군관 20여 명과 함께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홍제원에 도착했다. 뒤이어 능양군·이귀·김자점 등도 각각 수백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하지만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는 약속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주력군이 되기로 한 장단부사 이서의 병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장유가 와서 알리기를 반정 사실이 노출돼 고발됐다고 했다. 반정군은 크게 동요했다. 누구보다 능양군이 불안해했다.

능양군은 그곳에 명분파의 대표자인 김원량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미심쩍었다. 혹 인성군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려고 사라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다. 만약 김원량이 반정 주력군인 장단부사 이서와 결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초조해진 능양군은 장단부사 이서를 만나기 위해 연서역으로 달려갔고, 남은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뒤에 남은 이귀는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괄을 대장으로 추천했다. 


반정 성공 후 찬밥 신세로 전락한 명분파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의 아버지 박정의 인조반정 공신교서 


그런데 그 시각에 김류는 집에 있었다. 홍제원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김류는 반정 사실이 고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포자기했다. 김류는 집에 머무르며 잡혀가기를 기다렸다. 바로 그때 심기원과 원두표가 달려와 말하기를 “이미 이렇게 된 판국에 왕의 체포 명령을 어찌 근심하며 의금부 도사를 어찌 두려워한단 말입니까?”라며 가자고 재촉했다. 생각이 바뀐 김류는 집을 나와 모화관으로 갔고, 그곳에서 전령을 홍제원에 보내 모두 자신이 있는 곳으로 집결하라 명령했다.

당연히 이괄이 크게 반발했다. 약속시간에 나타나지도 않은 김류는 대장 자격이 없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전령을 보내 대장 행세를 하는 것이 이괄에게는 참을 수 없었다. 이괄은 김류를 목 베어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귀는 이런 이괄을 달래고 달래 모화관으로 가서 합류하게 했다. 다시 대장은 김류 차지였다.

이날 반정은 성공했지만 이괄은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괄은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라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날 이후 이괄과 김류의 갈등은 격화되기만 했다. 그것은 크게 보면 명분파와 능양군파의 갈등이기도 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반정 이후의 결실을 능양군파가 독점하면서 더욱 격화됐다. 병조판서를 위시해 고위관직은 모조리 능양군파가 독식했던 것이다. 당연히 명분파의 불만이 고조됐다. 특이 이괄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인조반정 이후 이괄 이상으로 불만을 품은 사람은 흥안군이라는 왕자였다. 흥안군은 선조의 후궁인 온빈 한씨의 장남으로 이름은 제(瑅)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능양군과 비슷했다. 그래서 능양군에 대한 경쟁의식이 더욱 강했다.

흥안군은 조카뻘인 능양군이 제멋대로 왕이 된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명분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자기가 능양군보다 뒤질 것이 없었다. 흥안군은 대략 2000명 정도의 군사를 동원한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에 고무됐다.

이 정도 군사는 몇몇 실력자만 포섭하면 충분히 동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흥안군은 마치 능양군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풀어가며 무사들과 결탁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흥안군 주변으로 불평·불만세력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모인 대표자는 윤인발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자였으며 이괄의 아들인 이전과 친구였다. 양반체제에 불만이 많던 윤인발은 인조반정에도 불만이 많았다. 예컨대 윤인발은 “지금 주상은 여러 왕자 중 연장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왕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으로 본다면 윤인발은 근본적으로 김원량·이괄 같은 명분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 윤인발은 인성군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인성군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가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모른 체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런 인성군에게 실망한 윤인발은 흥안군에게 접근했다. “지금 주상은 여러 왕자 중 연장자도 아니면서 스스로 왕이 됐다”는 윤인발의 비판은 바로 흥안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흥안군은 인성군과 달리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영변으로 좌천된 이괄의 분노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 별서 유기비(別墅 遺基碑) 비각. 인조가 반정 전에 살았던 곳을 기념해 세웠다 


인조반정은 조선후기 최대의 정변답게 수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반정 이후 사형된 사람이 80여 명이었고, 귀양 간 사람이 250여 명, 파직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이들을 합하면 440여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 시대 15년을 떠받들던 실력자들이었다. 이들이 일시에 숙청되면서 그 공백을 반정세력들이 메웠다. 이는 반정세력들에게는 크나큰 기회였지만 숙청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친인척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피해이자 원한이었다.

흥안군과 윤인발은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포섭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반정주역들에게 낱낱이 밀고 되고 있었다. 반정 주역들은 의심스런 사람들에게 첩자를 접근시켜 정보를 빼내곤 했다. 이렇게 비밀 첩자를 운용한 대표인물은 이귀와 김원량이었다. 이귀를 위해 충성한 대표적인 첩자는 최홍성이라는 사람이었고 김원량에게 충성한 대표적인 첩자는 성철이라는 사람이었다.

1623년 7월쯤 이귀는 최홍성을 통해 흥안군이 무사들과 결탁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귀는 인조에게 “흥안군 이제에게는 해괴한 일이 많습니다. 주상께서 항상 편전에 자주 불러 엄하게 경계를 내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흥안군이 흉악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수 있고 또 친친(親親)의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이런 충고로 본다면 반정 성공 이후 인조는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사실 그러기에는 인조 스스로 매우 민망한 일이었다. 스스로 나서서 왕이 된 인조가 삼촌들을 만나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껏해야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런 것이 불편한 인조는 아예 삼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귀는 비록 불편하더라도 흥안군을 비롯한 삼촌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도 하고 정도 쌓으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조는 그런 충고를 무시했고 흥안군과 윤인발의 음모는 지속됐다.

8월 7일 이후 그들의 음모는 더욱 구체화됐다. 이날 이괄은 평안도의 부원수가 돼 영변으로 좌천됐다. 이괄이 영변으로 출발하던 날, 인조는 이괄을 달래기 위해 직접 모화관까지 전송했다.

하지만 이괄의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신경진이 이괄의 손을 잡으면서 “영감이 이번에 가는 길은 우리들도 모두 한 번은 거쳐야 할 길이니 영감 다음에는 내가 대신 가겠소”라며 위로했다. 그러나 이괄은 “나를 내쫓아 보내는 것이니 영감은 나를 속이지 마시오”라며 화를 벌컥 냈다. 이렇게 불만이 극에 달한 이괄에게 1만5000여 정예 병력이 맡겨졌기에 이병력만 이용해도 인조를 축출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흥안군의 역모 반신반의했던 인조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의 영은사.


 윤인발은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 와중에 음모가 너무 노출됐고 결국에는 10월 1일 이시언이 고변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흥안군을 위시해 윤인발·이괄·이전·황현·이유림 등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역모 내용은 이미 첩자들을 통해 이귀와 김원량에게 전달된 상황이었다. 다만 이 정보를 놓고 이귀와 김원량은 다르게 반응했다. 결론적으로 이귀는 흥안군의 역모를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김원량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괄과 이전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괄을 반정에 참여시킨 사람은 김원량이었다. 김장생의 제자이자 정경세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원량은 반정 당시 36세로 서인과 남인 모두에게 깊은 신망이 있었다. 그래서 반정 주역 사이에서도 김원량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김원량에게 이괄은 5촌 외숙이었다. 김원량이 뛰어난 학자로 이름나자 이괄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전을 김원량에게 맡겼다. 그래서 김원량은 인조반정 10년 전부터 이전을 가르쳤다. 비록 김원량에게 이전은 혈연으로는 6촌 동생이었지만 학연으로는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이런 이전을 김원량은 누구보다 신임했다.

이전을 반정에 끌어들인 사람도 김원량이었고, 그 이전을 매개로 이괄을 가담시킨 사람도 김원량이었다. 그런 김원량에게 이괄과 이전이 역모를 꾸민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김원량은 다른 사람들이 역모를 꾸미면서 반정 세력들을 이간시키기 위해 이괄을 이용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인조 역시 흥안군이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지 겨우 반년 만에 삼촌 흥안군이 역모를 꾸민 것이 사실이라면 인조 자신에게 치명적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과 함께 어머니를 내쫓고 형제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패륜아 광해군을 처단하겠다는 기치로 인조반정을 일으켰는데 만약 흥안군이 역모를 꾸몄다면 그 흥안군을 죽여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나머지 삼촌 6명도 살려두기 어려웠다. 나아가 5촌 당숙들 그리고 4촌 형제들도 모조리 죽여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인조 자신이 광해군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아니 더 흉악한 왕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인조는 흥안군에 대한 조사도 못하게 했고 나아가 인성군 등에 대한 조사도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나머지 사람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윤인발은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척했던 것이다. 얼마나 감쪽같았던지 가족들도 모두 윤인발이 죽은 줄 알고 장례까지 치렀다. 인조가 흥인군에 대한 조사를 금지하고, 김원량 역시 이괄의 역모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윤인발까지 강도를 만나 살해됐다고 하자 고변은 흐지부지됐다.

그 사이 윤인발은 영변으로 내려가 이괄을 만났다. 뒤이어 이괄의 아들 이전은 1623년 12월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영변에 왔다. 기록에 의하면 이괄과 윤인발 사이에는 부자지간 같은 정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윤인발은 이괄 그리고 이전과 늘 귓속말을 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했다고도 한다. 이로 보면 이괄이 8월에 영변으로 간 후, 뒤이어 10월에 윤인발이 오고 또 12월에 이전이 왔고, 세 사람은 한통속이 돼 음모를 꾸몄다고 하겠다.

그런 그들에게 흥안군은 계속해서 편지와 선물 등을 보냈다. 예컨대 흥안군은 윤인발에게 밀서가 적힌 달빛 전복(戰服)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편지와 선물을 이용해 한양의 흥안군과 영변의 윤인발은 1624년 1월을 거사일로 정하고 음모를 구체화했다. 결국 1624년 1월 21일 한밤중에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승승장구하며 한양으로 쳐들어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이괄이 어떤 작전을 펼지 걱정이었다. 당시 예상되는 이괄의 작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한양을 점령한 후 그 기세 그대로 인조를 추격해 생포하는 작전이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작전이었다. 반란의 성패는 뭐니뭐니해도 왕을 잡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작전을 쓸까 걱정이었다.

둘째는 명나라 또는 청나라와 결탁하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괄의 반란은 내전수준을 넘어 국제전으로 확대될 여지가 많았다. 이 또한 방어하는 입장에서 몹시 걱정되는 작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마지막은 한양을 점령한 후 인조 대신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그대로 눌러앉는 작전이었다. 이는 얼핏 성공한 듯도 하지만 반란군 측에서 보면 후환이 남는 작전이었다. 반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인조가 안전지대로 피신한 후 반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에 가장 좋은 작전이었다. 


하루 만에 막 내린 ‘영화(榮華)’




위의 세 가지 작전 중에서 어떤 작전을 쓸지는 이괄에게 달렸다. 이괄은 마지막 셋째 작전을 썼다. 2월 8일 오전에 이괄의 군대는 한양 가까이 접근했다. 이에 놀란 인조는 8일 오후에 부랴부랴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 흥안군은 인조를 따라 피난하는 척하다가 이괄에게로 갔다.

9일 오전쯤 이괄과 만난 흥안군은 약속대로 인조 대신에 국왕이 됐다. 그날 저녁 이괄은 한양에 군사를 보내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새 임금이 즉위했다”고 선포했다. 그 다음날 이괄이 한양에 입성할 때 관청의 서리들은 의관을 갖추고 영접했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아 영접했다. 이괄은 경복궁에 주둔했고, 흥안군이 국왕으로서 조정 관료들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는 이날 하루뿐이었다. 다음날 이괄은 서대문 밖의 관군과 싸우다 패배했다. 그날 밤 한양을 탈출했던 이괄은 13일 저녁 이천에서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흥안군 역시 한양을 탈출했다가 16일에 체포돼 돈화문 앞에서 사형 당했다.

이괄의 난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깊이 보면 반정주역들 간의 후계왕 다툼이 원인이었다. 그 다툼은 사실 인조의 정치력에 따라 미연에 수습될 수도 있었다. 후계왕 다툼은 결국 선조의 후손들이 관련된 문제이고, 그것은 인조의 입장에서는 집안사람들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 ‘제왕위치지서(帝王爲治之序)’에서는 “친친(親親)을 강조한다. 친인척을 친인척으로 친히 하는 것이 ‘친친’이다. 친인척을 친인척으로 친히 하지 않을 때 그들은 분개하고 거꾸로 친인척 이상으로 친히 하면 그들은 교만방자해진다. 이런 당연한 도리를 아는 것이 좋은 지도자의 기본 덕목이라 할 것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9. 박영효의 ‘맹신’이 비극적 결말 불렀다 


문중 큰어른 박규수 도움으로 철종의 유일 혈육이었던 영혜옹주 남편으로 간택된 ‘신데렐라’

… 아내와 사별 후 김옥균·이동인 등과 가까워지면서 개화파로 부상했으나 일본만 믿다 갑신정변 실패



철종의 사위가 되는 행운을 누렸던 박영효. 그는 젊은 시절에 특히 눈이 잘생긴 미남이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개화기의 친일 혁명가를 대표한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돌이켜볼 때 박영효의 인생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이다. 우선 부마(駙馬)의 신분을 갖고도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했다는 점이 그렇다.

조선시대 부마는 관행상 정치활동이 금지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박영효가 개화기의 친일 혁명가가 됐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부마라고 하는 신분을 감안하면 박영효는 당연히 보수파의 대표가 돼야 하는데 반대로 개화파의 대표가 됐다는 사실도 매우 특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박영효의 인생은 역설적으로 부마라고 하는 그의 신분에서 도출됐다.

박영효는 철종 12년(1861) 수원에서 출생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본래 가난해 수원 시장에서 신발을 팔았다고 한다. 박영효에게는 위로 형 둘이 있었는데 큰형이 12세 위의 박영교였다.

박영효는 용모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특히 눈이 예뻤다고 한다. 가난한 박원양의 셋째 아들 박영효가 개화기의 유명인사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고종 9년(1872) 2월 영혜옹주의 부마로 간택된 사건이었다. 당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박영효가 간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중의 큰어른 박규수가 음양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간택 당시 영혜옹주는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생전의 철종에게는 아들 다섯과 딸 여섯 등 총 11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모두 요절하고 영혜옹주만 생존했다. 그 영혜옹주가 무사히 자라나자 왕실에서는 혼례를 거창하게 치름으로써 철종의 혼령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 행운의 주인공으로 박영효가 당첨된 것이었는데 간택 당시 박영효는 12세였고 영혜옹주는 두 살 많은 14세였다.

고종 9년 4월에 혼례가 거행됨으로써 박영효는 수원의 누추한 집에서 한양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금릉위궁 또는 금릉위방으로 불린 그의 집에는 수많은 하인과 궁녀들이 있었기에 박영효에게는 명실상부한 궁궐이라 할 만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가족들도 박영효를 핑계로 한양으로 이사했다. 박영효는 부마에 간택됨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일거에 역전시킨 ‘남자 신데렐라’라 할 만했다.

하지만 박영효의 행운은 짧기만 했다. 혼인 3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병사했기 때문이다. 금릉위라는 어마어마한 이름 아래 가려진 12세의 어린 박영효에게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부마이기에 재혼할 수 없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부마에게 시집간 공주나 옹주가 죽을 경우 재혼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짧았던 행운, 혼인 3개월 만에 아내와 사별

 


개화기 친일 혁명가인 박영효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일본을 맹신한 탓에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터뜨리도록 한 폭약을 묻어둔 경복궁 인정전

이런 상황에서 12세의 박영효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영혜옹주의 장례를 치르고 명복을 빌어주는 일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론의 질타를 피할 길이 없었다.

영혜옹주의 3년상이 끝났을 때 박영효는 15세였다. 그때 박영효는 영혜옹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주 절에 다녔다. 자연스럽게 박영효는 불교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박영효는 마치 화석이 된 사람처럼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은 급변하고 있었다. 박영효가 15세 되던 해, 일본은 운요호(雲楊號) 사건을 일으켰고 그 다음해에는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수천 년간 동북아를 세계의 전부로 알고 살아오던 조선은 이제 거친 세계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렇지만 박영효는 그런 현실과 아무런 관계없이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다.

이런 박영효를 딱하게 여긴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큰형 박영교였다. 당시 박영교는 김옥균과 함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 김옥균과 박영교에게 조선은 미몽에 빠진 후진국에 지나지 않았다. 부마의 재혼을 금지하고 나아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 역시 조선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미몽 중의 하나였다.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미몽들을 하나하나 깨부수어야만 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오래된 미몽을 깨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박영효의 큰형 박영교 자신이 나서서 부마의 재혼금지와 정치활동 금지를 비판한다면 그 주장은 근대적이라 찬양받기보다는 권력에 환장한 자의 억지 주장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박영교는 친구 김옥균에게 이 문제를 논의했다. 김옥균 역시 박영교의 주장에 적극 찬성이었다. 사실 김옥균 입장에서 부마인 박영효를 포섭한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했다.

우선 왕실 안에 강력한 지지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한 박영효에게 왕실 어른들 특히 왕실 여성들은 남다른 동정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래서 박영효만 포섭하면 왕실 여성들의 지원, 나아가 고종의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박영효만 포섭하면 강력한 재정후원과 함께 비밀 아지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부마 박영효의 재산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부마가 되면 최소한 천석꾼이었다. 당연히 부마 박영효는 천석꾼 이상의 재산가였다.

게다가 궁방(宮房)으로 불린 부마의 거처는 일종의 궁궐로 간주돼 비밀이 보장됐다. 그 외 여러 면에서도 개화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박영효를 포섭해야 했다. 박영효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김옥균에게 이렇게 포섭됐다.

“김옥균과 내가 먼저 사귄 것은 불교 토론으로요. 김옥균은 불교를 잘해서 불교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것이 재미가 나서 김옥균과 친하게 됐소. 나의 큰형(박영교)이 김옥균과 사귀라고 해서 사귀게 됐지만, 그때 김옥균은 27세, 나는 17세였소.”(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 1931)

박영효가 17세 되던 해는 고종 14년(1877)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지 딱 1년 만이었다. 그때는 영혜옹주의 3년상이 끝난 지도 2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박영효는 불교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박영효가 불교를 통해 자신의 암담한 미래를 위로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유교문화와 정치문화에서 부마 박영효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무엇인가 하면 오히려 큰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박영효는 불교를 통해 영혜옹주의 명복을 비는 한편 자신의 삶을 반추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자신이 무슨 인연으로 부마가 되었는지, 또 무슨 인연으로 영혜옹주가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나아가 살아남은 자신은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을 불교식으로 생각하며 위로받았을 것이다.


불교에 심취하면서 싹튼 개혁사상

 

 

압구정(狎鷗亭)의 마지막 소유자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였다. 오른쪽 사진은 1961년 압구정 근처에서 한강변을 바라본 모습. 합성한 왼쪽 사진은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최근 모습으로 멀리 성수대교와 고층빌딩이 보인다


당연히 그런 박영효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불교가 유효했다. 김옥균 자신도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김옥균은 박영효에게 접근하면서 불교의 일반적인 인과론을 이야기했을 듯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해석하면서 박영효를 개화운동으로 끌어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인과론은 생각하기에 따라 사람을 현실 순응적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현실 개혁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만약 현실이 과거의 업보라는 측면을 강조하게 되면 현실 순응적이 될 것이지만, 현실의 인연을 바꿈으로써 미래의 업보를 바꾼다는 측면을 강조하게 되면 현실 개혁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영효는 불교 토론이 ‘재미가 나서’ 김옥균과 친하게 됐다고 했다. 이로 보면 박영효는 분명 김옥균이 이야기한 불교의 어떤 내용에 크게 재미를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 내용은 아무래도 현실의 인연을 적극적으로 바꿈으로써 미래의 업보를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현실의 인연을 적극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사실상 산송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박영효에게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나아가 현실인연의 개혁이 박영효 개인의 미래 업보뿐만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업보까지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개화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당시 불교계에도 이 같은 생각을 한 스님이 있었다. 이동인이라는 스님이 그였다. 그에게 조선의 정치 상황 그리고 조선의 불교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는 급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위정척사를 고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조선개국부터 탄압을 받아 쇠락할 대로 쇠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정부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불교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즉 일본정부는 조선에 일본불교를 퍼뜨림으로써 친일세력과 친일여론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일본정부의 방침에 부응해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의 오촌원심(奧村圓心)이 부산으로 건너와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877년 9월이었다.

한일관계사에서 오촌의 포교활동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원래 일본불교는 538년 백제를 통해 전래됐다. 그랬던 일본불교가 1339년이 지난 후에 거꾸로 조선에 포교하게 됐으니 문화교류라는 면에서 보면 완전한 역전이었다.

오촌이 개설한 부산의 포교당은 일본인 신자들뿐만 아니라 조선인 신자들로 성황이었고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오촌의 부산 포교당은 부산을 넘어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경기도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1878년에 이르러서는 이동인도 오촌의 부산 포교당 소문을 들었다. 


김옥균의 영향 받아 혁명가로 변신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 서재필·김옥균

그 당시 이동인은 서울의 봉원사 스님으로 있으면서 유대치를 매개로 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되었다. 이동인은 유대치와 의논한 후 직접 오촌의 부산 포교당으로 갔다. 일본불교의 현황과 더불어 일본의 근대문명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인이 오촌의 부산 포교당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878년 6월쯤이었다. 그 뒤에 반년에 걸쳐 이동인은 수시로 오촌의 부산 포교당을 방문했다. 그러다가 이동인은 연말쯤 부산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일본불교의 현황과 일본의 근대문명에 대한 기초조사를 마쳤기 때문일 듯하다.

다시 이동인이 오촌의 부산 포교당에 나타난 것은 반년이 지난 1879년 6월이었다. 그때 이동인은 오촌에게 일본 유학을 부탁했다. 말이 일본 유학이지 실제는 밀항이었다. 일본의 근대문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이동인의 밀항을 뒤에서 후원한 사람은 바로 박영효였다. 이와 관련해 오촌의 <조선포교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동인은 본래 승려인데 항상 나라와 호법(護法)을 걱정하는 지사였다. 최근 조선의 국운은 쇠퇴하고 종교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혁명당(박영효·김옥균) 등이 국가의 쇠퇴한 운명에 분개해 크게 쇄신하려고 했다. 또한 이동인도 뜻을 같이하였으므로 박영효·김옥균 등이 이동인을 불러들여 중용하게 됐다. 따라서 열국의 공법 등을 알기 위해 우리 종문에 들어와 일본에 가려 했다. 이동인은 박영효로부터 받은 순금봉(純金棒) 4개(길이 2촌 남짓, 둘레 1 남짓)를 나에게 보여주며 이것으로 여비에 써달라며 건네줬다.”(오촌원심, <조선포교일지> 1879년 6월)

위에 따르면 1878년 연말 부산을 떠난 이동인은 서울로 가서 박영효·김옥균 등과 의기투합했음이 분명하다. 박영효가 김옥균에게 포섭된 때가 1877년이었음을 고려하면 겨우 1년여 만에 박영효는 혁명가로 변신했던 셈이다. 그것도 이동인의 일본 밀항에 필요한 자금을 후원할 정도의 열렬한 혁명가로 변신했던 셈이다. 이는 분명 김옥균의 개화사상에 완전히 공감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879년 9월에 부산을 출발한 이동인은 일본 경도의 동본원사(東本願寺)로 가서 7개월에 걸쳐 일본어와 일본불교를 공부했다. 1800년 4월 동본원사에서 수계식을 마친 이동인은 동경의 천야별원(淺野別院)으로 갔는데 이곳은 조선통신사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이동인은 승려로 활약하며 일본의 정객은 물론 서양 각국의 외교관들과도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는 대담하고 솔직한 발언으로 사람들을 경악시키곤 했다. 예컨대 이동인은 당시의 주일 영국공사 사토를 만나 “조선의 현 정부를 쓸어버려야 합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이런 발언으로 보면 이동인은 분명 대담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주의 깊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대담함이 이동인으로 하여금 승려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개화운동에 투신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일본에 밀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편 이동인은 일본과 서양의 근대문물과 관련된 각종 서적을 구입해 김옥균에게 보냈다. 이런 서적을 읽으면서 박영효는 더더욱 열렬한 개화파가 됐다.
 

국가기밀 누설한 이동인의 경솔함 


고종황제가 덕수궁 정관헌에서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장면을 재현한 모습


그런데 마침 이 시기에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동경에 와서 천야별원에 묵게 됐다. 당시 일본의 화방의질(花房義質) 공사는 수신사 김홍집에게 인천 개항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김홍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화방의질은 이동인을 일본 사람인 척 꾸며 김홍집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는 만약 이동인의 신분이 노출되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국법으로 보면 이동인은 밀항자였고, 당시 조선의 밀항자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그때 이동인은 “제가 일본에 와서 국은에 보답하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고자 결심해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감내하고자 합니다. 원하건대 김 수신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이동인은 목숨을 걸고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힌 후 김홍집과 담판하겠다고 자청한 것이었다. 이에 화방의질은 이동인의 용기에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김홍집을 만난 이동인은 일본 옷을 입고 조선어로 말했다. 당연히 김홍집은 수상쩍게 여겨 이동인의 정체를 자세하게 물었다. 이동인은 바짝 다가앉아서 작년에 자신이 밀항한 일, 공부한 일, 사람들을 만난 일 등을 자세히 설명한 후, 자신은 다른 뜻은 없고 단지 조선을 문명개화로 이끌고 싶으며 이참에 김홍집이 화방의질의 말을 받아들여 잘 주선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열성을 다해 말했다.

김홍집은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오호! 이런 기인남아가 있어서 국은에 보답하는구나” 하며 감탄했다. 아마도 김홍집은 불쌍한 조선을 위해 부처님이 예비한 인물이 바로 이동인이라 생각했을 듯하다. 김홍집은 이동인을 깊이 신뢰하게 됐다.

이동인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한 김홍집은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이동인은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김홍집을 뒤이어 귀국하게 됐다. 1800년 9월 28일,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오촌의 원산 포교당을 방문해 귀국보고를 했다. 1879년 9월에 부산을 출발한 후 1년 만이었다.

서울로 간 이동인은 김홍집의 추천을 받아 민영익의 사랑방에 기거하게 됐으며 나아가 고종과도 면담했다. 민영익과 고종 역시 이동인을 깊이 신뢰하게 됐다. 물론 이동인 뒤에는 박영효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있었다.

이동인을 만난 직후, 고종은 주일 청국 공사 하여장에게 미국과의 수호 주선을 부탁하기 위해 이동인을 밀사로 발탁해 일본에 파견했다. 이동인은 고종을 한번 만났을 뿐인데 이런 중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이는 그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했을 뿐만 아니라 민영익·김홍집·박영효·김옥균 등이 적극 추천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런 중책을 맡게 된 이동인은 서울에서의 기본 준비를 마치자마자 원산의 오촌에게 달려갔다. 그의 협조를 얻어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동인은 밀사였기에 공식적으로 도일할 수 없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이동인이 오촌의 협조를 구한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동인이 국가기밀을 시시콜콜 오촌에게 알렸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오촌은 비록 종교의 탈을 쓰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고 포교활동을 하는 어용 종교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동인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에게 아낌없는 후의를 베푼 이유는 단순한 종교적 자비심만은 아니었다. 그는 궁극적으로 조선에서의 일본 영향력을 극대화하려는 일본 정부의 정책을 불교의 이름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오촌에게 이동인이 국가기밀을 시시콜콜 누설한 것은 분명 경솔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동인이 오촌에게 누설한 기밀은 그대로 일본 영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에 보고됐다. 이에 따라 고종의 개화정책은 말 그대로 일본정부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이동인의 이 같은 경솔함은 일본을 일방적으로 믿었기에 나타났을 것이다. 미몽에 빠진 조국에 대한 절망감, 그에 반비례한 오촌 등 일본 불자들의 호의, 그리고 자신이 직접 1년간 겪어본 일본의 현실 등이 일본을 일방적으로 신뢰하게 만들었을 듯하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일방적인 신뢰는 이동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개화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유대치를 위시해 박영효·김옥균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다.

 

외세 의존의 결말은 ‘새드 엔딩(Sad Ending)’



고종황제의 어진


예컨대 유대치는 이동인의 소개를 받아 직접 오촌의 원산 포교당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유대치는 오촌에게 온갖 이야기를 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과 그 정치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등 당시 개화파가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을 듯하다. 이 역시 일본에 대한 일방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박영효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박영효는 이동인을 통해 오촌에게 여우 털로 만든 조끼를 선물했는데 그때 “이 조끼는 작년에 만든 것으로 1년 동안 내가 입었지만 이런 헌 옷을 선물로 하는 것은 대단히 결례이겠지만 실은 귀승(貴僧)이 한국을 위해 여러 가지로 배려해줘 장래 한층 더 구호(舊好)를 따뜻하게 하려 하는 것이니 나쁘게 생각지 말고 받아주시어 이 옷을 입고 추위를 견뎌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여기에 언급된 말 그대로 당시 박영효는 개화파에 대한 오촌의 호의를 진정한 배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일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박영효·김옥균 등은 갑신정변을 구상하게 됐다.

돌아보면 박영효·김옥균 그리고 이동인은 신라시대의 이차돈을 연상시킨다. 마치 이차돈이 나라를 개명(開明)하기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았듯, 그들 역시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이차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외세에 대한 일방적인 신뢰와 의지다. 이차돈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다가 순교했다. 반면 박영효·김옥균 그리고 이동인은 일본을 일방적으로 신뢰하고 행동하다가 실패했다.

<대학연의>에는 ‘치사지경(治事之敬)’이라는 항목이 있다. 일을 도모함에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지금이 일을 도모할 때가 맞는지 또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맞는지 신중하게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하다가는 오히려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경고가 ‘치사지경’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20. 갑신정변 주역들의 오판  - ‘적군’을 믿었던 예견된 실패 


박영효·서광범·홍영식·유대치 등 지휘부, 자금부터 전략까지 전적으로 일본에 의지… 김옥균이 맹신한 고토 쇼지로는 일본 위해 조선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 핵심세력




민영익 일행이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한 사진. 기념앨범을 들고 있는 이가 서광범,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이 박용하다. 이외에도 유길준·홍영식· 김옥균 등이 있다 

 1881년 3월에 이동인이 암살되자 박영효·김옥균·서광범·민영익 등이 개화정책의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1882년 7월에 함께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겉으로는 임오군란의 사후처리 및 일본의 실상 파악을 위해서였지만 내막은 이동인이 추진하던 정책 즉 일본정부의 도움으로 차관과 무기를 도입하려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근대화된 일본을 둘러보면서 그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박영효는 “나의 일평생을 지배하는 기본 관념은 바로 이때 받은 충동으로 나온 것이니 훗날 개혁의 헛된 희생만 되고 만 것도 이 충동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요, 500년 종사에 천고의 유한을 품게 했음도 모두 이때 뿌린 씨로서이다”라고 회상했다.

1882년 한성판윤으로 개혁정책 추진, 1883년 광수유수로 수어청 병력 양성 그리고 1884년의 갑신정변 참여와 일본 망명, 1894년의 귀국과 개혁추진, 제2차 망명 등 박영효의 인생을 대표하는 굵직한 사건들은 이때의 충격으로 빚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1882년 박영효·김옥균 등의 일본 방문은 이동인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긴 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다. 처음에 박영효와 김옥균 등은 이동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정부로부터 차관과 무기를 도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 오라는 등 까다롭게 굴었다. 막후 실무를 담당했던 김옥균은 일본의 재야학자로 영향력이 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쿠자와는 유력한 재야 정치인 고토 쇼지로(後藤象次郞)를 소개했다.

김옥균은 고토를 만난 후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 중에 “조선이 독립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치와 외교를 자수자강(自修自强)한 다음의 일인데 지금 정부의 인물로는 절대 자수자강할 수 없으므로, 왕권을 위태롭게 하고 권세를 탐하며 구차하게 세월만 보내는 무리들을 한 번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언급이 있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은 민태호로 대표되는 보수파 일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책이 있는데 첫째는 국왕의 밀칙(密勅)을 받아 평화적으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국왕의 밀의(密意)에 의뢰하여 힘으로 하는 것이다. 만약 평화적으로 한다면 조선인을 모두 쓸 수 있지만 무력을 써야 한다면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을 고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내용에서 당시 김옥균은 보수파 일소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얼굴’ 중 한쪽밖에 보지 못했던 김옥균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남아 있는 우정국.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해 일어난 갑신정변의 시발지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김옥균이 고토를 만난 이후 조선개혁의 후원자로 일본의 정부가 아닌 일본의 민간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편지 내용 중 “각하가 지금은 비록 정부의 관직을 맡고 있지 않지만, 내일이나 모레라도 뜻하지 않게 관직을 맡을지 알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나와 맹약한 것은 곧 허공(虛空)”이라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내용으로 본다면 김옥균은 고토와 맹약을 맺었고, 그 내용은 일본의 민간을 대표하는 고토로부터 도움을 받아 조선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옥균은 왜 고토를 조선독립의 후원자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당시 일본의 정치현실에 대한 판단에서 나왔을 듯하다. 1881년 10월 메이지(明治) 천황은 앞으로 10년 후 즉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겠다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민간에서는 국회 개설에 대비한 정당운동이 활발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정당은 고토가 주도하는 자유당이었다. 이 자유당의 맹약 1조는 ‘우리 당은 우리 일본 인민의 자유를 확충하고 권리를 신장·보존하고자 하는 자들이 서로 모여 조직했다’는 내용인데 이는 당시 동북아 전체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내용이었다.

이처럼 선진적인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고토라면 진정으로 조선독립을 후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김옥균에게 생겼을 것이다. 고토에게 보낸 편지에는 “각하와 내가 결합한 의기(義氣)는 즉 공생공사(共生共死) 4글자뿐입니다”라는 내용도 있는데 이는 김옥균과 고토가 생사를 초월한 의기로 맹약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정도로 김옥균이 고토를 신뢰했음도 보여준다.

하지만 고토가 주도하는 자유당의 뿌리는 정한론(征韓論)에 있었다. 1873년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접수하지 않음을 빌미로 일본의 국위선양을 위해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론이 정한론이었다. 이런 점에서 1882년 당시의 자유당은 동북아 최고의 민주주의 정당임과 동시에 일본 최고의 극우 정당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자유당을 주도하는 고토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옥균은 근대민주주의 정치가라는 하나의 얼굴만을 보고 고토에게 의뢰하고자 했을 것이다.

더구나 김옥균이 구상한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 중에서 폭력적인 방법은 거의 전적으로 고용 일본인에게 의뢰해야 하므로 이것이 진정 조선독립에 합당한 방법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고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 나라의 일을 개혁하고자 하면서 왜 다른 나라 사람을 쓴단 말인가? 했는데 이것은 내가 설명할 수 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조선의 벌래 같은 인물(朝鮮蠢蠕之物)들과는 진실로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옥균을 만난 고토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고토는 조선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자신이 조선의 고문(顧問)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옥균이 귀국해 뭔가 일을 일으키면 그것을 핑계로 고토가 자금과 무력을 가지고 조선에 와서 고문이 되겠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전권을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옥균은 고토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옥균은 장차 대군주의 밀칙을 받아 각하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이로 보면 김옥균은 고토를 고문으로 초빙하는 문제에 긍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옥균이 만약의 사태를 일으키고, 뒤이어 고토가 100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들을 가지고 조선에 와서 고문이 되면 사실상 그 후의 주도권은 고토가 장악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이를 모를리 없는 김옥균이었지만 고토의 선의를 깊이 믿었기에 밀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1882년 11월 박영효는 김옥균에 앞서 귀국했다. 한 달 후 한성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박문국을 설치해 한국 사상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했고, 치도국을 설치해 도로정비에 힘썼는데 이는 김옥균이 구상한 개혁 중 평화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박영효의 평화적인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영효는 도로정비에 따른 민가철거 문제로 민원이 발생해 3월에 한성판윤에서 쫓겨나 광주(廣州) 유수로 좌천됐다.

실망한 박영효는 다른 대안을 구상했다. 바로 무력정변이었다.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밀려나던 즈음 김옥균이 귀국했다. 그 당시 김옥균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고종의 국채 위임장만 가져오면 3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언질을 일본 고위관료들로부터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야 정치인 고토와 밀약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좌천된 후 ‘대안’으로 무력정변 구상한 박영효

 


김옥균은 개화당을 조직해 양반 신분제도와 문벌의 폐지 등 개혁정책을 주창하면서 청나라·국내 수구파와 대립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됐다. 왼쪽은 한국비림박물관에 입비된 김옥균의 필적 


그 당시 조선정부의 1년 예산이 150만 엔 정도였으므로, 300만 엔은 2년 예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받든지 아니면 고토로부터 100만 엔의 차관을 받든지 어느 쪽이든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이 가능성을 믿고 김옥균은 고종의 국채 위임장을 받아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때가 1883년 5월이었다. 박영효는 바로 이 자금을 이용해 광주에서 쿠데타군을 기르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박영효는 다음과 같은 회상을 남겼다.

“나는 다행히 광주 유수가 수어사를 겸직하므로 병권을 가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후일의 계책을 위해 군사를 양성할 터이니, 김옥균은 모집된 채권 중에서 몇 만금을 군자금으로 밀송해주기로 단단히 서로 약속하고 나는 광주 유수로, 김옥균은 일본으로 각기 헤어졌다. 기다리는 군자금은 아니 오고 곤궁한 중에 겨우 1000여 명의 병사를 교련하니 당시 일본 사관학교 출신인 신석모와 나팔수 이은돌은 나의 수족과 같은 심복으로 일본식 교련에 진력하던,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렁저렁 1년이 지나매 광주 유수의 정병 양성이 이상하게도 민씨 일파에게 위험하게 보여 민비의 말 한마디로 나는 곧 면직되고 내가 양성한 일본식 군병은 곧 경성으로 징발돼 전영(前營)과 후영(後營)에 속해 전영사(前營使) 한규직과 후영사(後營使) 윤태준의 영솔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박영효, <갑신정변> ‘신민’, 1926)

박영효가 유수로 임명된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와의 대결구도가 강화되면서 남한산성은 한양의 배후 기지로 중요시됐다. 남한산성 주변의 병력을 중심으로 조선후기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설치됐고 광주 유수가 수어사를 겸임했다. 박영효는 바로 이 수어청의 병력을 쿠데타군으로 양성하려 했던 것이다.


심혈 기울여 양성한 병력, 민씨 척족 손아귀로

 


3·1절 97주년을 맞은 올해 광복회 광주·전남지부가 ‘태극기 특별기획전’을 광주 광역시청에서 열고 미공개 사진을 대거 공개했다. 1885년 고종황제의 어가 행렬이 종로 거리를 지나는 모습


박영효가 하필 1000명의 병력을 양성하려 한 이유는 쿠데타 성공을 위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 병력이 필요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의 주력군은 좌영 600명, 우영 600명 합해 1200명 정도였다. 박영효의 회고에 의하면 이 1200명 중에서 정복 군인은 40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800명은 사복잡졸이었다. 이는 국가재정이 넉넉지 못해 400명만 정규 군인으로 채용하고 나머지는 비정규 군인으로 채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쿠데다가 성공하려면 한양의 1200명 병력을 제압할 수 있는 병력을 길러야 했다. 그러려면 최소한 1000명의 수는 돼야 하고 그것도 훈련과 장비 및 정신력에서 앞서야 했다. 이런 계산에서 박영효는 1000명의 정예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 일본에서 최신 군사교육을 받은 신석모와 이은돌에게 군사훈련을 맡겼다. 1881년 9월에 신석모는 일본육군 호산학교(戶山學校)에 입학했고, 이은돌은 일본육군 교련단(敎鍊團)에 입학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들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육군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박영효는 일본에 갔을 때 조선의 빠른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유학생을 보내야 함을 절감했다. 그와 함께 조선 자체에서도 정예병력을 길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박영효는 귀국할 때 신석모와 이은돌을 데리고 왔는데 광수 유수로 가면서 또다시 그들을 교관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둘째, 수어청의 병력 중 상당수를 정규 병력으로 양성하고자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중앙정부의 병력 중에서 정규 병력은 400명 남짓 됐다. 이 병력의 전투력이 강할 리 없었다. 정부에서 중앙군을 이렇게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궁극적으로 부족한 국가재정 때문이었다. 돈이 없는데 무슨 수로 정규 병력을 늘린단 말인가?

이런 상황은 지방으로 가면 더하면 더했지 나을 리 없었다. 즉 광주 유수 박영효가 1000명의 정예 병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정규 병력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여기에 필요한 돈을 김옥균이 일본에서 밀송하겠다고 약속했기에 박영효는 그 약속을 믿고 대략 500명 정도의 정규 병력을 양성했다.

이는 정예병력 양성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당시 살기 어려운 수많은 젊은이가 ‘입에 풀칠을 하고자’ 수어청 병력에 응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재정을 곤란하게 하는 주범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동안 박영효는 군사 훈련에 필요한 자금을 개인적으로 융통했을 듯

하다. 물론 김옥균이 밀송하기로 한 몇만 금의 군자금을 믿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간 김옥균은 차관을 얻으려 동분서주했지만 연말이 되도록 소득이 없었다.

그 사이 박영효는 점점 더 곤경에 빠져들었다. 그의 회상에서 나타나듯 박영효는 목이 빠지게 군자금을 기다리면서 ‘곤궁한 중’에 1000명의 병사를 교련시켰다. 체면 때문에 ‘곤궁한 중’이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제는 돈 문제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을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한 실망감도 커지고 신변에 대한 위기감도 커졌다. 결국 1883년 연말 박영효는 광주 유수에서 면직됐고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1000병력은 민씨 척족(戚族)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변란 계획은 점차 구체화돼가는데…


 

일본 개화기 계몽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엔화 1만 엔 권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의 단점으로 모략과 덕의가 부족함을 들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으로 “조선 사람은 단결돼야 일을 하지 않소? 믿을 수 있어야 일을 하지 않소? 돈이 있어야 일을 하지 않소?”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덕의가 부족하다는 것은 반드시 군자금을 밀송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무책임하게도 1년 가까이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모략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군자금을 마련해 밀송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아마도 박영효는 그때 약속대로 군자금만 밀송됐다면 1000명의 정예 병력이 양성됐을 것이고, 그 병력이 있었다면 갑신정변이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회한에서 이런 말을 했을 듯하다.

광주 유수에서 면직된 후 박영효는 크게 절망해 미국으로 떠날 생각까지 했다. 아마도 김옥균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신변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하지만 주변 지인들과 일본 공사관의 만류로 미국 외유는 단념했다. 그러던 중 1883년 5월 26일에 김옥균이 귀국했다.

김옥균이 목도한 조선의 현실은 출국 때인 1년 전보다 더욱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화파 동지로 굳게 믿었던 민영익이 보수파의 수령이 돼 있었다. 그간 민영익은 개화파 사람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눈 터라 그들의 작전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 유수에서 좌천된 박영효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암중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이런 현실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고토와 밀약한 ‘대사를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대사란 무엇일까? 김옥균이 귀국하고 석 달쯤 지나 고토의 측근이자 후쿠자와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이 한양에 들어왔다. 그가 고토와 후쿠자와의 밀지를 김옥균에게 전하고 뭔가 일을 꾸몄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노우에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김옥균 씨는 근래 경성 북악산 중턱에 새로 별장을 지었다. 그 신축이 끝나자 한가위 보름달을 감상한다고 하면서 박영효·홍영식·서광범 세 사람과 나 그리고 유대치를 초대해서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가 다가올 변란의 중요한 회합이 됐던 것으로 구체적 계획을 세워본 것은 이 회합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나는 북악의 회합이 끝나자마자 김옥균·박영효 두 사람의 부탁도 있었으므로 곧바로 선생(후쿠자와 유키치)께 보고했다.”[이노우에 가쿠고로, <정상각오랑자기연보(井上角五郞自記年譜)>]

이 글에 따르면 박영효·김옥균·서광범·홍영식·유대치 그리고 이노우에가 북악산의 김옥균 집에 모인 시점은 1884년 8월 15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다가올 변란의 구체적 계획이 세워졌다는 것인데 이로 미뤄보면 그 이전에 박영효·김옥균·서광범·홍영식·유대치 사이에 이와 관련된 논의와 합의가 있었음이 분명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노우에과 함께 변란의 구체적 계획을 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8월 15일에 논의한 변란의 구체적 계획이란 무엇일까?


독립하겠다면서 외세에 의존했던 개화파의 말로 



시모노세키항(港) 입구의 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미다지는 메이지유신 이후 아카마 신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옥균의 <갑신일록> 10월 1일 (양력 10월 31일) 기록에 의하면 이날 김옥균은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난 후 박영효·서광범·홍영식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그때 홍영식이 “그렇다면 지난날 일본 사람을 고용하려던 계획 또한 있으나마나 하게 됐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일본 사람을 고용하려던 계획’에 대해 김옥균은 “우리들이 한번 거사하기로 한 뜻은 이미 전에 결정했다. 일본 용사 수십 명을 얻기 위해 지난달에 사람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는 주석을 붙였다. 이로 보면 박영효와 김옥균 등이 구상한 ‘대사’는 일본인 자객 수십 명을 불러들여 자신들의 정적을 암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전은 기왕의 작전 즉 남한산성의 병사 1000명을 훈련시켜 이 무력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작전보다 훨씬 외세 의존적이었다. 기왕의 작전은 일본에서 오직 군자금만 빌려 쓰는 것이었지만, 나중의 작전은 군자금은 물론 자객 그리고 고문까지 모두 빌려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개혁의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야 할 것 역시 예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의 거사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조선 자체에서 자객들을 모집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생각에서 박영효는 조선 출신의 자객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포섭 대상은 아무래도 믿을 만한 측근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체포된 일본 유학 사관생도 출신인 신중모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박영효의 명령에 따라 9월부터 이인종·이규완·최은동·윤경순·고영석 등과 어울렸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박영효 또는 김옥균의 최측근이자 무술로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예컨대 이인종은 박영효의 가인(家人)이었고, 이규완은 박영효의 겸종(傔從)으로 둘 다 최측근이었다. 고영석은 김옥균의 상노(床奴)였다.

박영효는 이들을 매개로 힘이 세고 무술이 뛰어난 장사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경순과 윤계완 형제였다. 이규완의 회상에 의하면 윤경순은 특히 날래고 용맹해 달아나는 개를 쫓아가서 한 번 걷어차면 그 개가 공중으로 수십 장을 올라가고 또 그 개가 내려올 즈음에 한 번 다시 차면 그 개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거꾸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규완 역시 태껸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이렇게 박영효에게 포섭된 장사는 이규완을 비롯해 윤경순·윤계완 형제 그리고 최은동·황용택 등 30명 정도 됐다. 박영효는 이들을 이용해 정적을 암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1884년 9월 30일(양력 10월 30일)에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부임하면서 일본 공사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돌아보면 박영효와 김옥균이 무력정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일본에 더 의존하게 됐다. 처음에는 군자금만 의존하려 했지만 다음에는 군자금과 동지 그리고 고문까지 의존하려 했고 마지막은 아예 일본 공사관에 의존하려 했다. 처음 시작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독립심이었으나 그것이 갈수록 일본에 의존하는 의타심(依他心)으로 변질됐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는 ‘조존성찰지공(操存省察之功)’이라는 항목이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서 초심을 잃지 말아야 공을 이룰 수 있다는 이 말은 대사를 앞둔 많은 사람에게 예나 지금이나 귀감이라 할 만하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