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적도보』로 본 서원(書院)과 사고(史庫)의 옛 모습
1. 서원(書院)
안동 도산서원 (安東 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쪽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도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도산서원 영역에 속한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영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하였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퇴계종택(宗宅)이 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퇴계는 1557년 쉰일곱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하였고,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완성하였다.
도산서당터를 찾은 기쁜 심정을 퇴계는 시 몇 편으로 남겼고, 도산서당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561년 11월에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썼다. 이 시에 붙인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는 서당 주변의 경개(景槪)를 비롯하여 퇴계가 「도산잡영」을 읊은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퇴계는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더니,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도산서당 일곽에 있는 건물로는 도산서당·농운정사·역락서재(亦樂書齋)·하고직사(下庫直舍) 등이 있는데, 모두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타 시설물과 자연 경관으로는 유정문(幽貞門)·열정(洌井)·몽천(蒙泉)·정우당(淨友塘)·절우사(節友社)·천연대(天淵臺)·운영대(雲影臺)·곡구암(谷口巖)·탁영담(濯纓潭)·반타석(盤陀石)·부용봉(芙蓉峯) 등이 있는데, 이 모든 이름들은 퇴계가 손수 붙여 성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도산서당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건물을 남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齋)'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퇴계는 서당의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작은 연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 동쪽에 몽천이란 샘을 만들었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을 쌓아 암서헌과 마주보게 하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라고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합일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선조 7) 봄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두어 걸음 나아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진도문(進道門)이다. 진도문에 이르러 올라오던 길을 돌아서서 내려다보면, 남쪽으로 낙동강 물줄기를 가둔 안동호 일대로 시야가 넓게 펼쳐진다.
도산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제향(祭享)공간을 형성하는 상덕사(尙德祠)·내삼문(內三門)·제기고(祭器庫)·주청(酒廳) 등이 있고, 강학(講學)공간을 형성하는 건물로는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동재인 박약재(博約齋)·서재인 홍의재(弘毅齋) 등이 있으며, 기타 부속 건물로는 동광명실(東光明室)·서광명실(西光明室)·장판각(藏板閣)·상고직사(上庫直舍) 등이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 임금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과 철폐된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옮겨온 서적, 그리고 퇴계의 문도(文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둔 곳이다
강학공간은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는 전교당을 중심으로,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며 엄격한 좌우 대칭의 배치를 하여 규범을 보이고 있다. 전교당은 유생들이 자기 수양과 생도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에 대청마루와 한존재(閑存齋)라고 이름 붙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임금 앞에서 쓴 것이다. 사당인 상덕사와 사당 일곽 출입문인 내삼문, 그리고 사당 주위를 두른 토담은 모두 '도산서원상덕사부정문및사주토병(陶山書院尙德司附正門及四周土屛)'이란 명칭으로 1963년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일곽 서쪽에 있는 옥진각(玉振閣)은 유물 전시관인데, 퇴계 선생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원래 예안군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속한다. 서원 일곽은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과 1970년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곳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安東 陶山書院 陶山書堂)-이황 서지처
도산서원은 경사진 곳에 자리잡아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있어 위계질서가 매우 정연한 서원이다. 서원은 본래 후학을 가르치고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므로 건물들도 그에 합당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개 서원의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앞쪽에 배움의 터인 강당을 두고 뒤쪽에 모시는 분의 사당을 두는 형식이다.
문을 들어서서 동쪽은 이황이 본래 공부하던 도산서당 구역이다. 서당 옆으로 낸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한 단 아래로 내려가서 앞으로 들어가는 것이 옳은 길이다. 도산서당은 말 그대로 세 칸집이다. 부엌칸과 살평상 반 칸은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덧붙은 칸들을 살짝 가리고 본래의 세 칸집을 떠올려보면 퇴계가 추구했던 알맞은 집의 형상을 가늠할 수 있다. 퇴계는 온돌방을 ‘완락재’(琓樂齋), 마루칸을 ‘암서헌’(巖棲軒)으로 이름 붙였다. 부엌까지 합해서 세 칸인 이 건물 이름이 ‘도산서당’(陶山書堂)이다. 작은 싸리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고 이름 붙였다.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安東 陶山書院 尙德祠)
보물 제211호. 상덕사는 이황(李滉)의 신위(神位)를 봉안한 사당으로 도산서원에서 가장 높이 위치하고 있는 배향공간(配享空間)의 중심전각이다. 1574년(선조 7)에 초창되고 1969년에 보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으로 단층 팔작기와집이다. 장방형 평면의 전면 반 칸은 툇간으로 개방하였고, 나머지 측면의 한 칸 반은 전면에만 문짝을 달았으며 3면은 벽으로 처리하여 내부를 통간(通間)으로 만들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주초를 놓고 방주(方柱)를 세운 뒤 간략한 보아지를 기둥 윗몸에서 내어 보머리를 받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 없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툇간바닥은 벽돌을 깔았으며 내부에는 우물마루 위에 돗자리를 깔았다. 또한, 상덕사를 출입하는 정문도 상덕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건물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삼문(三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막돌초석 위에 방주를 세워 민도리집 양식으로 가구(架構)를 하였다. 전면의 계단으로 문 안쪽과 높낮이가 생겨 전면기둥은 문짝을 단 측면 중앙열의 기둥들보다 한단 낮은 자리에 세워서 자연히 전면의 기둥높이가 중앙 뒤쪽의 기둥들보다 높게 되어 있다. 가구는 3량으로 대들보 위에 소로[小累]와 장여로 된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상덕사 정문의 양쪽으로 상덕사 주위를 둘러쌓은 토담은 1969년 보수공사 때 도산서원 전체의 울타리와 함께 사괴석 담장으로 모두 바뀌었다.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는 중종 때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성리학의 정통으로 밝힘으로써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호를 '회재'라 한 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취함으로써 주희의 학문을 따랐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회재의 성리학은 그 후 퇴계에게 이어진다. 회재는 1610년(광해군 2) 9월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조선조 도학(道學)의 우뚝 선 봉우리로 평가받는다.
회재의 고향은 경주 양동마을이다. 회재는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자리를 잡고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개울에 면하여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영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옥산서원이 창건되었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물을 끼고 있는 바위 다섯 곳에 각각 관어대(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臺) 중 세심대에 위치하고 있다.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옥산서원은 서향을 했는데, 동·서·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트여 있다. 서원에서 정면인 서쪽 앞으로 마주보이는 산은 무학산(舞鶴山)으로, 북쪽의 자옥산(紫玉山)에서 갈라져나온 맥이다. 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이곳을 건너면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된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의 작은 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흐르게 한 서원의 명당수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취한 것이다.
무변루는 정면 7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1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와 건물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는 듯하다.
무변루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를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공간의 트임과 막힘을 제한하는 한편, 강당 쪽으로는 창호를 달지 않고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2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무변루를 마주보고 있는 강당 건물인 구인당(求仁堂)과 그 앞 좌우의 동재와 서재가 강학공간을 이루고 있다. 구인당은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이고, 왼편과 오른편 협실은 온돌방이다. 구인당에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무변루 밖으로 멀리 무학산을 바라보면 자연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인당의 '구인(求仁)'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求)'하는 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이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의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다. 사당 담 밖 왼쪽으로는 경각(經閣)이, 오른쪽으로는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고, 서원 영역 왼쪽으로는 고직사, 포사, 문집판각 등이 있다.
옥산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정문에서 차례로 문, 누, 강당, 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루는 중심축 선상의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 고유의 영역을 구성하며 공간의 켜를 만들고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면서도 주변 자연 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 일대의 외부공간은 전체 배치의 구심점이 되어 개별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영역 사이로 스며드는 공간의 엇물림, 그리고 중첩되는 지붕선과 담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은 옥산서원 건축공간의 특성을 읽게 해준다.
경주 옥산서원 역락문 (慶州 玉山書院 亦樂門) -이이 은서처
옥산서원의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 3장의 "배워서 때떄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벗이 있어 멀리로 부터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남들이 알라주지않아도 원망치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에서 따온 것이며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의 것이다.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慶州 玉山書院 無邊樓) 정면
무변루는 정면 7칸 측면 2탄의 2층 누각으로 구조가 독특하다. 위아래 가운데 3칸은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는 반면 양쪽 1칸은 벽체를 뒁 온돌방을 마련하였으며, 그 옆에는 누마루를 두르고 부섭지붕을 얹었다. 보통 서원이 누각이 벽면을 개방하여 자연과 겨예를 허무는 점을 고려 할 때 무변루의 이러한 구조는 자연과 어느 정도 경계를 둔 셈이다.
편액도 정면 앞에 걸리지 않고 2층 대청 안쪽 벽 위에 걸려 있다. 글씨는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썼다. 편액 한편에는 소재 노수신이 추가했다고 알려진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라는 이 부기되어 '무변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편액 옆에는 '옥산서원기'가 적힌 현판이 붙혀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처음 누각의 이름은 '납청루(納淸樓)'였다고 한다. 여기서 '청(淸)'은 기를 의미하고, 기(氣)는 양(陽)을 가리키니 이 누각에 올라 맑음을 받아들여 양(陽)을 기르게 된다는 말이다.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慶州 玉山書院 無邊樓) 뒷면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慶州 玉山書院 無邊樓) 세부
무변루는 총 7칸으로 구성된 규모가 큰 2층 누각이지만 구인당 쪽에서 바라보면 5칸 건물로 보인다. 자연을 향하여 열린 구조라기 보다는 내부를 응시하는 형태다.
가운데 3칸은 아래위 모두 틔워 출입문과 대청으로 활용하고 그 양쪽 1칸씩은 벽체로 막아 아래는 아궁이 굴뚝을 설치하고 위는 온돌방이다. 그 양 끝은 누각이다. 편액이 2층 대청 안쪽 벽 위에 걸려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慶州 玉山書院 獨樂堂) 전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벼슬길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은 주택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동쪽에 낀 넓은 대지에 서남향으로, 삼문, 一자형 행랑채, 口자형 안채, 一자형 사랑채, 계정(溪亭), 어서각(御書閣), 공수간, 사당채를 세운 제택(第宅)이다. 사랑채 정면에는 '독락당'(獨樂堂) 편액이 걸려 있다
안채는 4개의 채가 서로 연이어져서 口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북쪽 채는 정면 7간 측면 1간 반으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부엌 1간, 안방 1간, 대청 2간, 건넌방 1간, 작은대청 1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쪽 채는 정면 7간, 측면 1간의 중대문간 채인데, 서쪽부터 동쪽으로 헛간 1간, 광 2간, 안중문간 1간, 온돌방 1간, 광 1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북쪽 채와 남쪽 채를 동과 서에서 이어주는 동쪽 채는 남쪽으로부터 광 3간, 사잇문간 1간으로 구성되어 건넌방 옆의 작은대청과 이어지고, 서쪽 채는 헛간 2간, 뜰아랫방 2간으로 구성되어 부엌과 연이어져 있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도리와 보로 결구한 민도리집으로, 이고주사량가구, 홑처마, 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은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서쪽에 정면 1간 측면 2간의 사랑방, 다음 정면 2간 측면 2간과 정면 1간 측면 2간이 대청인데, 이 대청의 중앙 동쪽간에는 기둥과 주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에는 이 동쪽간이 온돌방이었다고 추측된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초익공으로 결구한 익공집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앞 뒤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양봉형(樑奉形)의 소로를 짜 넣은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다시 양봉형의 대공과 솟을합장으로 종보와 결구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아산 맹씨행단의 대공, 솟을합장과 흡사하다.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이 독락당의 동쪽에는 2간 모두 2장의 판문창호를 달았는데, 중간설주가 있고, 판장문을 열면 남북으로 길게 쌓은 담장에 설치한 살창으로 집터 동쪽 아래로 흘러가는 냇물을 내려다볼 수 있다. 또 이 담장의 북쪽에 자리 잡은 계정(溪亭)은 냇물쪽의 기둥들을 냇가의 천연 암반 위에 세웠다.
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慶州 玉山書院 獨樂堂) 세부
경주 서악서원(慶州 西岳書院)
조선 명종(明宗) 16년(1561년)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처음 세웠다.
이정은 경주의 옛 신라 때의 묘역들이 몹시 황폐해진 것을 보고 개탄하며 이를 수리하고자 했고, 특히 통일 사업의 큰 공훈이 있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과 각간(角干) 김유신에 대해서는 그 무덤을 수리하는 것뿐 아니라 이들을 받드는 사당을 세우고자, 자신의 스승인 이퇴계(李退溪)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퇴계는 일개 군수의 신분으로 제왕의 사당까지 세울 필요는 없으며 각간(김유신)에 대해서만 사당을 세우되, 제향이나 묘역 관리 및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겸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퇴계의 의견을 따라 이정은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세워 김유신의 제사 및 교육을 위한 장소로 삼게 되었다. 이것이 서악정사(西岳精舍)이다.
이후 경주 유생들에 의해 홍유후 설총(薛聰)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위패(位牌)도 합사하자는 건의가 들어오자, 이정은 다시 이퇴계와 의논하여 두 사람도 함께 모시게 되었고, 이퇴계가 '서악정사'라는 친필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33년(1600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옛 터에 초사(草舍)를 다시 지어 전란을 피해 보존된 위패를 모셨다,
1602년에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처음으로 사당 중건을 시작하였고, 광해군 2년(1610년) 강당과 동재(진수재) · 서재(성경재),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새로 지었다.
인조 1년(1623년) 경주의 유학자였던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부윤 여우길(呂祐吉)을 통해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1646년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고종 10년(1873년)과 고종 19년(1882년), 고종 29년(1892년), 고종 31년(1894년)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時習堂)을 배치하고, 영귀루를 맨 앞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갖추었다.
사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시습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다. 왼편으로 진수재(進修齋)를, 오른편으로 성경재(誠敬齋)를 두었다. 영귀루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의 누각이다.
시습당에는 서원의 학칙을 기록한 《원규》와 백록동규, 《국기(國忌)》, 《서악서원중수기 완의(完議)》, 《서악서원상량문》(1610년) 등의 기판과 영귀루에 《서악서원내해중건기》, 《영귀루중건기 및 중수기》 등이 남아 있다. 이외에 부윤 구암선생비 1기가 있다.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의 제사에서 뺀 다음에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얼마 뒤,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서생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 사방에 무기와 갑옷을 갖춘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
경주 서악서원 영귀루 (西岳書院 詠歸樓) 및 북무
경주 서악서원 강당인 시습당 (西岳書院 時習堂) 및 북무
강당인 시습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지만 전퇴는 반칸규모이다. 좌우 퇴칸에는 전퇴를 개방한 뒤쪽 2칸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 평면이다. 좌측방을 진수재(進修齋)라 하고 우측방을 성경재(誠敬齋)라 하였다.
신라 삼국통일의 중심인물인 김유신 장군과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이정(1512∼1571)이 경주부윤이라는 벼슬을 지낼 때 지방 유림과 뜻을 같이하여 명종 18년(1563)에 세운 것이다.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로 세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서재를 새로 지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묘우와 교육 장소인 동시에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던 조설헌이라는 강당과, 동재·서재로 유생들의 숙식 장소로 사용하던 시습당과 절차헌,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전사청 그리고 영귀루라는 누각이 조성되어 있다. ‘서악서원’이라는 현판은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현재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주 서악서원 (西岳書院 ) 사우(祠宇) 및 내삼문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하나인 제향을 위한 곳이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인데 경주향교 대성전처럼 단아하게 생겼고 전퇴가 없으며 판비(板扉)가 달렸다. 석조기단은 부연이 있는 갑석으로 막음한 가구식이며 초석도 방형초반에 원형주좌가 있는 고식으로 되어 있다.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으로 사적 제55호.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3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영주 소수서원 명륜당 (榮州 紹修書院 明倫堂)- 강당
영주 소수서원 명륜당 (榮州 紹修書院 明倫堂)- 강당 두공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榮州 紹修書院 文成公廟)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 (榮州 紹修書院 文成公廟) 세부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사당으로, 1542년(중종 37)에 세웠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문성공(文成公) 회헌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안축(安軸),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을 배향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식 맞배지붕집으로,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 왼쪽과 뒤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전면에 툇간을 두었다. 장대석 낮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 부분에는 주두 아래에 도리 쪽으로 첨차를 두고 보 방향으로는 쇠서를 내고 안쪽으로 보아지 모양을 하여 퇴간의 보를 받쳤다.
가구는 2고주 오량(五梁)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창호는 전면에 매칸 쌍여닫이 세살문을 설치하였다. 지붕에는 모로단청을 올려 품위 있어 보이는 건물이다.
현판 글씨는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사방에 흙담을 둘러 다른 공간과의 위계를 구분하고 정면에 일각문, 오른쪽에 협문을 두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린다.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한다.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하는 안향의 초상화(국보 111),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가 안치되어 있다. 명호를 사(祠)가 아닌 묘(廟)로 지칭하는 몇 안 되는 사당 중의 하나로, 문성공묘의 격을 짐작할 수 있다.
개성 숭양서원( 開城 崧陽書院)
숭양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의 하나이다. 현재 개성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화려하게 장식하지않았지만 자연지형을 합리적으로 이용하여 므고 작은 건물들을 적적히 배치하고조화시켰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인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된다.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북한의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8호로 변경되었다. 선죽동 자남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1573년(선조 6)에 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유림세력과 협의,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선죽교 위쪽에 문충당(文忠堂)을 창건하면서 비롯되었다.
1575년에 ‘숭양(崧陽)’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1668년에 김상헌(金尙憲), 1681년에 김육(金堉)과 조익(趙翼), 1784년에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23년(순조 23)에 유수 김교근(金敎根)과 김이재(金履載)가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중건하고 사우와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0년에 우상훈(禹相勳)이 보수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강당·동재·서재·신문(神門)·고자실(庫子室)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서경덕·김상헌·김육·조익·우현보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일 만큼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었으며, 숙종·영조·고종이 개성에 행차하였을 때에는 특히 견관치제(遣官致祭)하는 은전을 받았고, 영조는 친필로 어필사액(御筆賜額)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유물로는 영조어필게액기(英祖御筆揭額記)를 비롯하여 어제시·중수기·상량문 등의 게판이 보관되어 있다. 광복 이후의 사항은 미상이다.
개성 숭양서원( 開城 崧陽書院) 전경 - 정몽주 고택
황해북도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옛 건물. 고려말에 고려의 대관료였고 유능한 군사가, 외교가였던 포은 정몽주(1337~1392년)가 살던 집터에 처음 세웠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시대인 1573년(선조 6년)에 고쳐 지은 서원이다.
여기서는 정몽주를 제사지내다가 그 후 고려 때의 시중이었던 우현보(1333~1400년)를 함께 제사지냈고 조선시대의 이름있는 학자들인 서경덕(1489~1546년), 김육(1580~1658년) 등 개성출신인물들도 아울러 제사지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숭양서원은 본래의 사명인 교육과 함께 대표적인 유교성리학자들을 내세우는 방법으로 유교를 선전 보급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1575년(선조 8년)에 조선왕은 그때까지 정몽주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이라고 불러오던 이 서원을 숭양서원이라 사액(서원의 이름을 쓴 액자를 내려보내는 것)하였으며 1864년(고종 1년)의 대대적인 서원철폐 때에도 이 서원은 그대로 남았다. 16세기말 임진왜란의 참화 속에서도 잘 보존되었는데, 지난 6 · 25전쟁시기 심히 파괴되었다.
전후에 다시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숭양서원은 자남산을 등지고 그 동남쪽 경사지에 대칭적으로 규모있게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으로 둘러막힌 담장의 앞에 난 바깥3문으로 들어서면 마당 좌우에 학생들의 합숙이었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 서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있으며 다시 그 뒤로 안3문을 지나면 사당(문충당)이 있다.
강당은 높은 기단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두공없이 지은 정면 5칸(12.79m), 측면 3칸(6.96m)의 홑처마합각집이다. 건물 안의 가운데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양편 옆칸은 앞쪽 한칸을 마루방과 이어진 퇴로 하고 그 뒤에 온돌방을 꾸렸다.
사당은 그보다 더 높은 단 위에 세운 정면 4칸(9.43m), 측면 2칸(4.83m)의 겹처마뱃집이다. 동재, 서재는 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당 앞의 좌우에는 비석 2개가 있다. 숭양서원은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형식과 건축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개성 숭양서원( 開城 崧陽書院) 외삼문
개성 숭양서원( 開城 崧陽書院) 강당
강당은 홑처마의합각지붕이며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졸한 맛이 있다
개성 숭양서원( 開城 崧陽書院) 강당 천정
개성 숭양서원 문충당 ( 開城 崧陽書院 文忠堂)
숭양서원은 처음에 문충이라는 정몽주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이라고 부르다가 1575년에 숭양서원이라는 서원이름을 받게 된 후부터 현재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장방형으로 둘러막은 담장의 앞에 난 삼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뒤에 사당이 있으며,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겹처마와 맞배지붕이다.
좌측의 방처럼 보이는 공간에 포은 선생 영정을 모신 영당이다 영정원본은 개성박물관으로 옮기고 모본을 전시하고 있다. 그 옆의 사당 공간에는 우현보,서경덕,김육,조익,김상헌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위패는 교의의 안치하고 나지막한 교탁에 백자로 빛은 향로,촛대,잔대를 진설하였다
사당집뜰 앞 양옆에는 숭양서원의 기실비와 <정몽주의 서원비>가 있다. 이 비석은 대석과 팔작지붕의 개석은 화강석으로 비신은 오석으로 조성되었는데 1811년 (순조11년)에 세운것으로 비문은 남공철이 짓고 글씨는 한용구가 전액은 김재찬이 썼다.
숭앙서원에는 포은의 유적,화상,지팡이,의상, 필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자료집에 있으나 볼수가 없다
개성 숭양서원 문충당 ( 開城 崧陽書院 文忠堂) 내부 천정
부(附)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보물 제165호. 율곡(栗谷)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에 많이 나타나는 별당과 그 평면형식을 같이 한다.
건립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고택이라고 불리는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15세기 후반에는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의 결혼제도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으로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인의 집이나 그 근처에 살고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최응현의 집은 그의 사위이자 신사임당의 외조부였던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지게 되었다.
이사온과 같이 살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는 딸이 다섯 있었는데, 둘째 딸인 신사임당은 덕수이씨 집안의 이원수와 결혼을 하였고, 넷째 딸은 안동권씨 집안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 이사온의 집을 물려받은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와 권처균(權處均)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은 묘지를 관리하는 조건으로 권처균에게 분재되었다. 이때부터 이 고택의 소유권은 안동권씨 집안의 후손들에게 물려졌다.
1938년 조선문화재보호령에 의해 국가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되다가, 1975년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와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안채와 곳간채 및 사주문이 해체되었다. 1995년오죽헌 뒤의 고택이 다시 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권씨 고택의 본래 배치는 본가 우측 대나무 숲의 가운데에 가묘가 있고 그 앞으로 오죽헌이 있는 것이다. 현재 문성사가 있는 자리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그 뒤는 소나무숲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본가는 ㅁ자형의 평면이었고 우측에 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의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 이름하였고, 5대 권진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가와는 담장으로 구분되어 별도의 영역에 자리한 오죽헌은 권씨 집안으로 물려진 고택의 일부분이며 현재 보물로 지정된 곳도 여기이다.
본가와는 다르게 동남향하고 있는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一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이곳의 온돌이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온돌의 뒤쪽 반칸은 별도로 마루를 드렸는데, 당시 다른 사대부들의 별당과 마찬가지로 책을 보관하던 서실(書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커다란 장대석을 한 층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으로 처리한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집이다. 도리는 굴도리이고 그를 운두가 낮은 장여로 받치며, 다시 그것을 주간에서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으로, 기둥에서는 첨차 위에 소로[小累]를 놓아 받치고 있다. 겹처마에 양측 면에 합각(合閣)을 형성한 팔작지붕이다.
정면에는 띠살창호를, 측면에는 골판문으로 된 덧문을 달았다. 온돌방은 벽과 천장을 모두 종이로 마감하였고, 대청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마감하였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또, 오량(五樑)집의 가구(架構)들은 모두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데,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얹고 그 위에 종보[宗樑]를 놓고, 다시 초각(草刻)한 판대공(板臺工)과 첨차로써 마루도리[宗道里]를 떠받게 하였다. 합각 밑부분에는 귀틀을 짠 뒤 우물천장을 만들어 서까래가 모여드는 것을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주택건축에서는 비교적 드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쇠서[牛舌]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으며, 첨차의 형태는 조선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죽헌은 조선 중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포를 구성하는 방식이 주심포에서 익공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포의 변화과정을 짚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오죽헌(烏竹軒)- 이이 탄생처
오죽헌(烏竹軒) 세부
오죽헌(烏竹軒) 천정
오죽헌(烏竹軒) 천정
2.사고(史庫)
사고(史庫)는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실록(實錄)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완성하여 한 질은 개경의 사관(史館)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였다.
고려 조정은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환도한 뒤에 실록을 일시적으로 불당고(佛堂庫)에 보관하다가 1274년(충렬왕 즉위) 9월, 중서성(中書省)에 사관을 두고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史官 : 춘추관의 별칭)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10)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한 것으로 보아 충주 사고가 외사고(外史庫)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내사고인 춘추관 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史庫)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정비되어 내려온 4사고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춘추관·충주·성주의 사고가 불타 버리고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만 병화를 면하였다.
전주 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보현사의 실록을 다시 영변 객사(寧邊客舍)로 옮겨 두었고, 1603년(선조 36) 5월에는 등서(謄書)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실록의 재인(再印)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나 1603년(선조 36) 7월에 인쇄에 들어가 1606년(선조 39) 4월에 인쇄가 모두 끝났다. 본래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 1질(秩)과 재인본 3질 및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었으므로 이들 실록 5질에 대한 소장처가 논의되었다. 결국 새로이 선정된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가 마련되었다.
내사고인 춘추관 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화재로 일부가 불탔고,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 때는 일부가 강화도로 소개(疎開:한 곳에 집중된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되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소개되면서 산실(散失)되었다. 외사고는 4사고로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병화에 의한 소실을 방지하는 데 진력하였다.
강화 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에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에는 다시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사고를 새로 마련하였다.
묘향산 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나 1633년(인조 11) 정월에 적상산성 안에 사고를 마련하고 수호사찰(守護寺刹)을 지었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覺華寺)가 근처에 있었고, 오대산 사고는 상원사(上院寺)와 월정사(月精寺)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다른 외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수호사찰을 두고 승려들을 머물게 해서 지키게 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에는 실록을 모두 본래의 사고에서 옮겼다.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새로 세워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에 옮겨졌다가,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규장각 도서에 있다. 적상산 사고본은 구황실 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어 내려오지만, 산질(散秩:秩이 차지 않은 책)이 많고 6·25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현재는 북한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0년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1923년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불타 없어졌다.
조선 후기 사고들의 경우, 그 건축 양식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쪽에 2층 누각식(樓閣式)의 기와집 건물 2동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보(璿源譜)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사고의 수직(守直)은 조선 전기의 경우 충주 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인, 별색호장(別色戶長) 1인, 기관(記官) 1인, 고직(庫直) 1인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어 불사(佛寺)를 사고의 수호에 정역(定役)시키는 조처가 행해졌다.
그리하여 적상산 사고에는 승군(僧軍)이 20인 내외, 정족산 사고에는 50인, 오대산 사고에는 20인 등이 배속되었으나 시기와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따라서 사고 수호는 수호사찰의 주지(住持)를 예조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 책임을 맡겼다.
조선 후기 사고들의 수호 책임을 맡은 절들을 보면,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적상산 사고는 안국사(安國寺),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가 수호사찰이었고, 이곳에 위전(位田:관아, 학교, 사원 등을 유지하기 위하여 설정된 토지)을 주어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경우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각 사고마다 참봉(參奉) 2인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하였다.
실록 등의 서책을 꺼내어 말리는 포쇄(曝曬)는 3년 1차의 규식이 있었으나 시기에 따라 기간의 장단이 있었다. 그 밖에 실록의 봉안(奉安)·고출(考出)에도 까다로운 의식 절차가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 외사고 실록들을 포쇄할 때는 춘추관의 기사관급(記事官級)이 파견되었다.
외사고에 이르면 반드시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각 앞에서 네 번 절한 다음에 사고문을 열었고, 포쇄가 끝나서 봉인(封印)을 한 뒤에는 사배(四拜)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의 각화사(覺華寺) 부근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고. 외사고(外史庫)로 1606년(선조 39)에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왜란중에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603년부터 3년 동안의 노력 끝에 실록 3질을 새로 인출하였다.
이로써 실록은 저본 1질, 신인본 3질, 초본(草本 :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 되었으며, 5질의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5사고가 정비되었다.
태백산사고는 1605년 10월 경상감사 유영순(柳永詢)이 태백산의 입봉지하(立峰之下)가 사고지(史庫址)로서 적당하다고 보고하자,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다음해 4월 사고 건축을 완성하고 신인본 1질을 봉안해 외사고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뒤 1634년(인조 12) 이 사고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자, 대교 유황(兪榥)이 그곳에서 1리쯤 떨어진 서운암(棲雲庵) 뒤에 새 사고지로서 적당한 곳이 있음을 보고했으나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태백산 중록(中麓)에 위치한 서운암 부근 현재 사고지로 이건되었다. 한편, 사고지가 있는 각화산은 태백산 줄기이기는 하지만 주봉(主峰)보다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산을 모두 태백산이라고 불렀다.
태백산사고의 건축양식은 처음에는 선원각(璿源閣)만이 방삼간(方三間) 2층의 기와집이고 다른 건물은 단층이었으나, 고종연간에 가서 실록각(實錄閣)이 2층으로 개축된 것 같다. 수호 사찰은 각화사였고, 따라서 수호총섭(守護摠攝)도 각화사의 주지가 맡았다.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의하면 태백산사고의 수호군(守護軍)은 25인이었다 하나, 시기와 자료에 따라 차이가 많다. 1905년 태백산사고의 중건비로 7,251원이 책정되기도 하였다.
1910년 일제의 주권침탈 이후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규장각도서와 함께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설치한 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 보관하다가, 1930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이장(移藏)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이 태백산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해 축쇄영인본 48책을 간행해 학계에 보급하였다. 그 뒤 태백산사고본 실록은 1985년 3월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사고(史庫)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전경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외관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선원각 및 실록각 측면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선원각 및 실록각 전면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실록각 상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실록각 궤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실록각 태조 강헌대왕 실록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영감사(靈鑑寺)에 있는 조선 오대사고의 하나인 조선 후기의 사고지(史庫址).
사적 제37호. 지정면적 827㎡. 영감사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상원사(上院寺)로 가는 도중 2㎞ 지점에서 서북쪽으로 1㎞ 가량 떨어진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물·불·바람의 삼재(三災)가 침입하지 못한다는 길지(吉地)였다고 한다. 1606년(선조 39) 건립 당시에는 실록각[實錄閣 : 일명 史閣]·선원각[璿源閣 :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전각]·별관(別館), 그리고 수호사찰(守護寺刹)로서 영감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다만 주춧돌만이 남아 있어 이곳이 사고(史庫)가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 주춧돌이 남아 있어 사고지비석(史庫址碑石)이 건립된 곳은 옛날 선원각이 있던 자리이고, 그 앞에 실록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영감사라는 절이 있다.
원래 영감사는 현재의 영감사 건물 앞 약 100m 지점에 있었는데, 6·25동란 중 1·4후퇴시 작전상 사고·선원각과 함께 불태워버려 현재는 그 터의 흔적만이 남아오다가 1960년대 후반에 옛날 실록각이 있던 자리에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거의 소실되었다.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전경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전면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사각 전면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사각 초층 내부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선원각 임자식년선원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선원각 왕자 인성군행록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왕자 인성군행록
평창 오대산 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선원각 선원계보기략
강화 정족산사고 (江華 鼎足山史庫)
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강화 정족산사고 (江華 鼎足山史庫)
강화 정족산사고 (江華 鼎足山史庫) 사각 전면
[출처] 『조선고적도보 』로 본 서원(書院)과 사고(史庫)의 옛 모습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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