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조선시대♡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조선 사찰(寺刹)의 옛 모습 Ⅲ[ㅈ~ㅎ]

문수봉(李楨汕) 2018. 1. 8. 11:35

『조선고적도보』로 보는 조선 사찰(寺刹)의 옛 모습 Ⅲ[ㅈ~ㅎ] 



강화 전등사 (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내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가 당시의 총섭 초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와 산성별장소()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이 관음암()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을 개금불사()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을 개금하고 명부전(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강설당()·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 등이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179호인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 2구의 귀왕(), 2구의 판관(), 2구의 녹사(), 2구의 장군(), 10구의 동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과 강원()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이 있다. 철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장사각()·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강화 전등사 ( ) 전경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殿)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강화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로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각각 동일한 길이로 분할하고 세 짝씩의 빗살문을 달았다.

좌우 측면은 벽을 치고 있으나 앞의 한 칸만은 외짝 열 개의 문이 있다. 공포()는 내부를 4출목(), 외부를 2출목 내었으며 쇠서의 형태는 가늘고 약하게 길어지고 곡률()이 심한 편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내부에는 장식적인 면이 좀 지나치게 발휘되었으며 대량()에 걸쳐 있는 충량() 끝은 용두()로 만들어져 있고, 또 화려하게 채색한 천장 주위에는 온통 극락조와 연꽃 등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불단 위의 닫집은 처마를 정자각() 모양으로 꾸미고 16포()나 되는 공포를 중첩해서 배열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부룡() ·극락조 등을 매달아놓았다.

1916년 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에는 1605년(선조 38) 불에 타버리고 1614년에 다시 불이 나 전소된 것을, 1615년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불단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외부 두공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내부 두공



강화 전등사  약사전 ( 寺 藥師殿)  측면

보물 제179호. 전등사는 강화도 삼랑성(, 일명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단층 불전으로 대웅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 석불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석불좌상은 후불탱, 현왕탱과 함께 인적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등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의 원비인 정화궁주의 원찰( :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사찰)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사고()의 수호임무를 지닌 중요한 사찰이었다. 1605년(선조 38년)과 1614년(광해군 6) 두 번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6년 동안 중건공사를 진행하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약사전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621년에 중건된 대웅전과 건축 양식이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殿殿)』에 따르면 1876년(고종 13)에 중수하고 기와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1932년, 1958년, 1968년, 1985년, 19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


약사전은 명부전과 함께 전등사에서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으로 쌓아 올리고 갑석(덮개 돌)을 올렸는데 일제강점기 사진에는 갑석이 보이지 않아 후대에 변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 내2출목() 형식이다. 초제공은 앙서형()이고, 2제공은 익공형()이며, 3제공은 운공형()이다. 주상포( : 기둥 위에 짜이는 공포)와 주간포( :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짜이는 공포)는 건물 내부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주상포는 제공을 일체형으로 초각하였으나 주간포는 제공을 조각하지 않고 교두형()으로 처리하였다.

가구 구조는 5량 형식이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 상부의 2제공 위에 걸었으며 동자주를 세워 종보와 중도리를 결구하였다. 종보 위에는 덧보를 놓고 중앙에 동자주를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충량( : 팔작지붕을 구성하기 위해 측면 기둥과 대들보에 걸치는 부재)은 자연스럽게 휜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대들보 밖으로 빠져나오는 부분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

지붕은 팔작지붕 겹처마이다. 천장은 중도리를 경계로 하여 안쪽은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바깥쪽은 빗반자로 처리하였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과 배열 방법, 가구 수법이 특색 있다. 다포계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창방( : 기둥머리 부분에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주는 부재) 위에 평방( : 다포집에서 여러 개의 포를 올리기 위해 창방 위에 덧대는 부재)을 생략하고 공포를 올렸다.

주간포는 정면에만 배열하였으며, 양 측면과 배면은 주간포 대신에 화반을 끼워 넣었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며 유사한 사례로는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이 있다. 구조적인 특징으로는 반원형의 중도리를 사용한 것과 종보 위에 덧보를 사용한 것, 종도리 하부에 장여를 설치하지 않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건물은 가구 구조, 공포의 구성과 배열 방식 등 건축수법이 특색 있다. 또한 조각과 단청이 화려하여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강화 전등사  약사전 ( 寺 藥師殿) 외부 두공

강화 정수사​ ( 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마니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639년(선덕여왕 8)회정대사()가 창건하였다. 회정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뒤 그 동쪽의 지형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삼매정수()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절을 창건하였다.

그 뒤 1426년(세종 8)함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중창한 뒤 함허는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정수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848년(헌종 14) 비구니 법진()과 만흥()이 법당을 증수하였고, 1878년(고종 15) 비구니 계흔()이 그의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한 뒤 칠성()·독성()·산신탱화() 등을 봉안하였다.

1883년 비구니 근훈()이 중수하였고, 1888년정일()이 연오()의 시주를 얻어 관음상 1위와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903년정일이 산령각()을 중건하였고, 1905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16년 불상을 개금하고 각단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대웅전을 당국의 보호건물로 편입시켰다.


당시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산령각·대방·노전(殿)·요사채 등이 있었으나, 현존 당우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만이 있다. 현존하는 중요문화재로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불상 4위와 1851년에 조성한 현왕탱()을 비롯한 탱화 7점, 『법화경』과 『은중경()』, 부도() 1기, 중종() 1구 등이 있다.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전면

보물 제161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지붕건물. 1957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1689년(숙종 15) 수리 당시에 만든 상량문에 의하면 1423년(세종 5)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원래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평면이었으나 후대에 전면 툇간을 달아내어, 현재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윗몸을 창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식() 건축이다.


공포는 기둥윗몸에서 보[] 방향으로 끝이 앙서[]로 된 헛첨차를 내어 이 위에 소로[]를 얹어 외일출목()에 소첨차()를 받치고, 다시 이 소첨차와 직교되는 살미첨차 위에 외이출목의 소첨차를 놓아 외이출목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기둥 위에 놓은 주두()의 굽면은 고려시대의 주심포식 주두에서 곡면()이었던 것과는 달리 부석사조사당()에서와 같이 사면()으로 끊기고 굽받침도 없으며, 더욱이 소첨차나 대첨차 밑면에는 연화두형(, S) 조각이 없이 초각()되어 있다.

특히, 이 건물에서는 조선 전기적인 주심포양식을 전면공포보다 후면공포에서 볼 수 있다. 후면공포는 외일출목으로 기둥윗몸에서 끝이 사면으로 끊긴 헛첨차를 내고 소로를 놓아, 주두 위에 걸친 살미첨차와 외1출목의 소첨차를 받치고 있는데, 외일출목도리의 장여는 이 소첨차가 받치는 부분에서 운두를 높게 한 것이 특색이다.

또, 주두 위에 놓인 첨차도 보통의 첨차보다 길이가 길고 더욱이 소로를 4개 놓은 것도 특색이다. 내부에는 앞뒤 평주() 위에 건 대들보 위로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내부 사면으로부터 이 우물천장까지에는 빗천장을 가설하였다.

정면 툇간 안쪽에는 창호를 달았는데 양 변간()에는 자살 창호이나, 어간()에는 꽃병으로부터 꽃이 피어 나간 모양을 조각한 꽃살창호로 되어 있다. 지붕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정면 두공 및 헌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뒷면 두공 및 헌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내부 천정 




고양 북한산 중흥사지(北漢山 重興寺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북한산에 있었던 절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가 중수하였다.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이다. 축성 당시 30여 칸에 불과한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증축하여 136칸을 만들었다.


성내에는 성문과 수문(), 장대()와 창고 등을 지키기 위한 승군()이 주둔하였다. 이 절은 승군이 주둔하였던 북한산성 안의 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상운사()·서암사(西)·태고사()·진국사() 등을 관장하였다.

왕실에서는 8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걸쳐 번갈아 의승()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 1인과 승장()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을 설치하고 승대장()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절은 승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그리고 이들 승병들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승영 당시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와 나한전(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였고,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었는데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고양 북한산 중흥사  (北漢山 重興寺) 전경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전면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외부 두공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내부



고양 북한산 중흥사 극락전 (北漢山 重興寺 殿) 정면 두공 및 헌 



고양 북한산 중흥사 (北漢山 重興寺) 전륜전 외부 두공 및 헌 



김천 직지사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황악산()에 있는 절로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418년(눌지왕 2) 아도()가 창건했다고 한다. 직지사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과, 고려 초기에 능여()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고 하였다는 설, 선종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이 중창하고 930년(경순왕 4)에 천묵()이 중수하였으며, 936년(태조 19)에 능여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의 중요 건물로는 대웅대광명전(殿)·대비로금당()·극락전·원통전(殿)·지장시왕전(殿)·응진전(殿)·설법전(殿)·선등각()·대장전(殿) 등이 있었다. 현재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대장전비에 의하면, 이 절의 대장전에 금자사경() 593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399년(정종 1)의 중건과 1488년(성종 19) 학조()의 중수가 있었으며, 1596년(선조 29) 왜병들이 불을 질러 43동의 건물 가운데 천불전(殿)·천왕문()·자하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5층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그 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하였는데, 1681년(숙종 7)에 조종저()가 쓴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의 규모가 8전(殿)·3각()·12당()·3장()·4문()에 정실()만 352칸에 달했으며, 부속 암자는 26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05년(순조 5) 이후부터 사세()가 차츰 기울기 시작하여 퇴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건에 착수하여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10동의 건물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했으며, 9동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을 비롯하여 비로전, 극락전, 응진전, 관음전, 남월료(), 명부전, 약사전, 설법전, 만덕전, 조사전, 제하당(), 명월료, 청풍료(), 사명각(),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1735년(영조 11) 태감()이 중건한 대웅전은 앞 뜰에 2개의 삼층탑이 놓여 있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기법은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의 내·외부에는 아름답고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는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다. 내부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영조 20년에 조성된 삼존불탱화(보물 670호)가 있다.

비로전은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경잠()이 경주의 옥석()으로 만든 천불상과 1852년(철종 3)에 조성한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약사여래, 1886년(고종 23)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들 천불상 가운데에는 나아상()이 있는데, 첫 눈에 이 나아상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극락전은 서전(西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은 1986년 주지 혜창 화상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59.64평으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1999년 새롭게 개원을 하여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응진전은 931년(태조 14)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탄 후 1656년(효종 7) 관음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중수 되었다. 남월료는 사중의 강당으로서 현재 직지사 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풍료는 1971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신축되었는데,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이다. 본래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금단청 건물로서 크기는 총 92.76평이다. 이 건물은 현재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명각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사명당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5세에 이 절에서 출가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그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또 범종각에는 1981년에 만든 1,600관의 범종과 법고·운판()·목어() 등이 있다.

만덕전은 일명 불교연수회관이며,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 건립된 직지사 최대의 건물이다. 넓이는 총 361.54평으로서 외부는 완전 목조건물이지만 내부 중량의 일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들보가 구성되어 있으며 기와는 동기와로 제작되었다.

설법전은 불법의 선양과 불자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한 건물로서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87년 3월부터 1992년 6월 20일에 걸쳐 3층으로 신축된 건물이다. 총 294.51평 넓이의 거대한 복합 건물로서 1층에는 식당이 있고, 2층에는 손님접대를 겸한 11개의 방이 있으며, 3층은 설법전이 있다. 이와 같은 만덕전과 설법전은 주로 직지사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이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과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과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 석조나한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96호)이 있다. 이 가운데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 양식을 반영하는 불상으로서 마멸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광배와 함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모셔서 상시 전시하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운수암()과 백련암()이 있고 현재 직지사의 말사는 62개이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殿) 전면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49년(인조 27)에 중창하고 1735년( 영조 11)에 중건했다. 정면 5층, 측면 3칸의 기와를 얹은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가구식 기단을 갖췄다.

 기단 가운데 나 있는 돌계단은 용머리조각과 호랑이 형상의 조각이 소맷돌을 장식하고 있고 그 결구법이 특이하다. 공포는 내외3출목이며 전면과 측면, 후면의 구성이 각각 다르다. 짜임새 있는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 기법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고 각 불상 뒤에는 세로 6미터의 커다란 삼존불탱화(보물 670)가 걸려 있다. 이들 불화는 1744년(영조 20)에 제작된 것으로, 짜임새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정교한 표현, 안정감 있는 색감 등 조선시대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불상을 봉안한 불단과 천장의 단청 또한 기법이 뛰어나고 색채가 화려하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 증명 : 그림이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합당한지, 또는 법대로 그려졌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스님을 일컫는 것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화원(화사, 금어, 출초, 편수 등)과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과 삼층석탑 2기(보물 606)가 있다. 직지사에서 소유 및 관리한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殿) 내부



진주 청곡사 ( 寺)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월아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879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하였는데, 월아산 남쪽 남강변으로 청학()이 날아오니 서기()가 충만하므로 이 자리에다 절을 지었다고 한다.


1380년(우왕 6)실상사()의 상총()이 중건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종()에 속하였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계행()과 극명()이 중건하였고, 1612년(광해군 4) 대웅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업경전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앞에는 높이 3m 정도의 3층 석탑 1기가 있다.

3층 석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선국사의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 전하며, 신라 말의 양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묘사한 보물 제302호로 지정된 괘불()은 1722년(경종 2)에 조성되었으며, 매우 섬세하고 채색이 좋은 작품이다.

그 밖에도 목조 제석천·대범천상은 보물 제1232호, 괘불함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범자()를 넣고 하부에 연판()을 새겼으며, 모란당초()를 전면에 은으로 입사()한 향로()가 있다.

원래 이 절의 보광명전(殿)에 있었던 것으로 1397년(태조 6)에 제조된 것이다. 진양출신인 신덕왕후()가 태조의 왕비가 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상총이 이 절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인성()하였는데, 이에 김사행() 등이 동조하여 이 향로를 만들었다고 한다


진주 청곡사(  寺 殿) 전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청곡사는 879년(헌강왕 5)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1380년(우왕 6)실상대사()가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복원하였다.

조선 말엽 포우대사()가 다시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찰 전체를 중수한 바 있다. 도선국사가 청곡사를 창건하게 된 동기는, 진주 남강변에서 청학()이 날아와 이곳에 앉으니 서기()가 충만함을 보고 절터로 정하였다고 전하여오고 있다.

사찰 입구에 있는 교량을 방학교()라고도 한다. 대웅전은 1612년(광해군 4)에 재건한 것으로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주심포() 집으로 활주[ :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를 세워 외부의 지붕 무게를 일부 받치고 있다.

대웅전에 봉안한 석가삼존상()은 1615년(광해군 7)에 조성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불상으로는 비교적 대작에 속한다.


진주 청곡사 대웅전 (  寺 殿) 외부 두공


진주 청곡사 대웅전 (  寺 殿) 내부 두공



춘천 청평사 (春川 淸平寺)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청평리에 있는 절터.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청평산문수원기비 〉에 따르면, “973년(고려 광종 24)에 당나라 선사() 영현()이 경운산() 아래에 창건하여 백암선원()이라 하였다. 1068년(문종 22)에 춘주도() 감창사(使) 이의()가 중건하여 보현원()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이자현()이 1089(의종 6)에 절을 고쳐지어 문수원()이라 개칭하고, 8암자를 새로 지었으며, 산 이름을 청평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 〉에 따르면, 1327년(충숙왕 14)에 원나라 황후가 불경과 돈 1만 꾸러미를 시주하여 그 이자로 황태자와 황자들의 복을 빌고, 그들의 생일에 스님들께 음식을 올리는 반승()을 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화상()은 이 절의 복희암()에서 주석()한 적이 있다. 김시습() 또한 이 절에 은둔하여 서향원()을 짓고 살았다. 이황()은 청평산을 지나면서 절에 들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이자현이 탐욕스러웠다는 역대의 사필()을 반박하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았던 보우()는 능인전(殿)만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짓고, 절 이름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라 하였다.

이 때 그려진 탱화가 일본 히로시마()의 고메이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대까지 남아 있던 건물은 극락전(殿)과 회전문()이 있는데, 극락전은 1947년에 불탔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화상()지안()이 거의 전부를 중건하였다. 1728년(영조 4)에 각선()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고, 1861년(철종 12)에 대웅전 즉 능인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능인전터에 요사()를 지었으나 1880년(고종 17)에 소실되어 그 해 여름에 또 중건하였다. 1900년에는 익랑() 10칸()을 지었다.

〈청평산문수원기비〉는 1914년에 극락전에 옮겨 보관해 오다가, 극락전이 소실되자 요사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이 건물이 폭격을 받자 비()도 파손 매몰되었다.

1977년에 극락보전(殿)과 삼성각()을 증건하였으며, 1979년에는 해탈문()·청평보탑()·적멸보궁()을 지었다. 1984년에 요사·청평루()·서향원을 새로 지었으며, 1988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해탈문 골짜기에는 ‘(청평선동)·(청평식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유물로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일명 공주탑)과 환적당승탑() 외에 2기의 승탑이 있고, 영지() 옆에는 오도송()이라 불리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계단이나 축대 등은 대개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이 절에는 상사뱀을 물리친 당나라 공주의 전설이 전해 온다.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전면1963 년 소실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내부대륜 및 두관 문양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외부 두공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외부 두공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배소 두공 및 천정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내부 두공 및 천장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보개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보개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천장 격간판 문양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천장 격간판 문양

양산 통도사​ (梁山 寺)



양산 통도사​ (梁山 寺) 전경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영축산()에 있는 절로 우리 나라 삼보사찰[··로 일컬이지는 세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다. 646년(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산 이름을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모양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 옛 이름은 축서산()이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에서 득도()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형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특히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은 통도사의 사격()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는 계단()을 쌓고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 득도시켰다. 이에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이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대찰이 아니고 후에 금강계단이라고 불려진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뒤 고려 초에는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사지석표(), 즉 국장생석표()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대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중요한 석조 조형으로는 금강계단 상부의 석종형부도()를 비롯하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 배례석(), 봉발대(), 그리고 국장생석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하는 유물이고 그 밖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되었다.

물론 조형상으로 가장 앞서는 석조물로는 영산전(殿)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 위의 폐탑재를 들 수 있으나, 이는 이미 파괴된 채 기단부의 사리공()만이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이 어떻게 하여 파괴되었는지 또는 최초에 건립된 사원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가람패치



통도사의 가람배치는 신라 이래의 전통 법식에서 벗어나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향하였는데. 서쪽에서부터 가람의 중심이 되는 상로전(殿)과 중로전(殿)·하로전(殿)으로 이어진다. 또, 그 서쪽 끝에 보광선원()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이 절터에는 큰 못이 있었고 이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으나 창건주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도하고, 한 마리 용을 이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도 금강계단 옆에는 구룡신지()의 자그마한 상징적 못이 있다.

먼저 동쪽에서부터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의 세 문을 통과하면 금강계단에 이르게 된다. 금강계단 앞의 목조건물인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인조 23) 우운()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 상부의 기본 형태는 자형의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정면격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殿), 북쪽은 적멸보궁()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을 대웅전이라고 하지만 남쪽 정면의 금강계단이 그 정전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건물의 바로 뒤쪽에는 통도사의 중심이 되는 금강계단 불사리탑()이 있다. 이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불사리를 세 곳에 나누어 황룡사탑·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하는 바로 불사리 계단이다. 통도사의 특징은 이 불사리 계단에 있으며 또 이로 인하여 불보사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부처의 신골()인 사리를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의미는 계단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그리고 금강계단 목조건물의 천장에 새겨진 국화와 모란꽃의 문양 또는 불단에 새겨진 조각은 주목되는 작품이다.


상로전


상로전의 법당은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殿)·명부전(殿)·삼성각()·산신각·일로향각()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서 창건한 시기는 1677년(숙종 3)이며, 내부에는 석가삼존과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후벽의 탱화를 위시하여 내외 벽화는 주목되는 불화들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로 지정된 명부전은 1369년(공민왕 18)에 창건되었고, 1760년(영조 36) 춘파()가 고쳐 지은 건물로서,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탱화를 봉안하였다.


삼성각은 고려 말의 삼화상()인 지공()·나옹()·무학()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로서, 1870년(고종 7) 영인()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현존 건물은 1935년 경봉()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건물의 내부 측면에는 산신탱()·칠성탱()을 봉안하고 있으며, 산신각은 1761년에 초창된 이래 철종대에 중수를 거친 사방 1칸의 건물이다.


중로전


중로전의 건물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관음전(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용화전(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통도사 대광명전(殿), 세존비각(), 장경각(), 해장보각(), 황화각(), 감로당(), 원통방(), 화엄전(殿), 전향각() 등을 들 수 있다.


관음전의 창건은 1725년 용암()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며, 내부에는 독존상으로 관음보살좌상을 봉안하였다. 용화전은 1369년에 창건되었으나 창건주는 미상이며, 1725년 청성()이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역시 약 2m에 달하는 미륵좌상을 봉안하였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고 있다.


세존비각은 1706년에 건립된 사바교주 석가여래 영골부도비의 비각으로서 불사리 계단에 대한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이 지었으며 중국에서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가사 등에 관한 내용과 임진왜란 당시 사리 수호에 따르는 수난의 사실들을 기재하였다. 비신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 1m이다.


장경각에 있는 목조 경판은 『능엄경()』·『기신론()』·『금강경』·『법수()』·『사집()』·『부모은중경』 등 15종이 있다.

 개산조당() 바로 뒤에 있는 해장보각은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주위에는 고려대장경 완질이 봉안되어 있다.

요사()의 중심이 되는 감로당은 창건이 1340년(충혜왕 복위 1)이나 현존 건물은 1887년(고종 24) 덕명()이 중건한 것이다. 자형 건물로서 약 86칸의 대소 방사로 이루어져 있다.


감로당과 가까운 원통방은 1341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존 건물은 감로당과 함께 탄해()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화엄전은 창건이 1368년이며, 1762년에 중건하였고, 1882년 불타서 없어진 것을 1887년 구련()이 중건하였고, 1970년 재건하였다.


하로전


하로전의 중요 건물들은 영산전·극락전·약사전(殿)·만세루()·영각()·범종각 등이 있다. 이들 건물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배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북쪽의 중심 건물과 그 좌우, 그리고 남쪽 전면에 누각을 두었다. 이러한 배치 방식은 하로전 일대의 건물군이 가장 짜임새 있게 배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곳 일대의 법당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중심 건물은 영산전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내외 벽의 벽화가 주목되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하였다. 팔상탱화는 1775년에 그린 것이며, 본존 후불탱은 1734년의 작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양식이나 구조로 볼 때 대웅전 건물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건물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1369년 성곡()이 창건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추녀의 네 귀는 활주로 받치고 있는 아담한 법당으로, 내부에는 아미타삼존을 봉안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약사전 또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동시에 창건한 아담한 맞배건물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창건이 미상이나 1644년 영숙()이 중건하였다.


역대 조사() 및 통도사 고승들의 진영을 봉안한 영각은 1705년 처학()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범종각은 2층 누각 건물로서 정면 상하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의 상하에 법고()·운판()·목어()·대종() 등 사물()을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석 예불시에 사용하는 의식용구이다.

그리고 1757년에 건립한 응향각(), 도서실인 명월료()와 금당()을 위시하여 종무소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 절의 세 문 가운데 일주문은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현판은 대원군의 필적이며, 기둥 좌우의 ‘ (불지종가 국지대찰)’은 김규진()의 글씨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된 통도사 천왕문은 사천왕을 봉안한 문으로서 사찰수호 기능을 담당하는 곳으로 목조 사천왕이 각기 특징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된 통도사 불이문은 1305년에 창건되었으며, 편액 ‘(불이문)’은 송나라 미불()의 필적이다. 건물은 매우 단조로우며, 중앙에는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를 받쳐 지붕의 무게를 유지하는 건물이다.

사찰 경내의 현존하는 석조물로는 역시 금강계단이 가장 중요하다. 통도사 창건의 이유가 바로 이 계단에 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불사리 계단이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와서는 이 계단에 얽힌 수많은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 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에 의하여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유시랑 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을 지휘할 때 부절(:왕이 하사한 )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3 ).”


이와 같은 기록이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다가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빈번히 왜구들이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는다. 즉, 이색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하여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 이득분()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정인()이, 1705년에는 성능()이 중수하였으며,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 대에 이르는 여러 차례의 중수와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단의 크기는 초층 너비 약 990㎝, 총높이 약 300㎝이며, 형태는 2중의 넓은 방단() 위에 석종()의 부도를 안치한 지극히 간단한 구조이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 경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유연한 수법이 하층보다는 월등하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대체로 통도사의 석조물은 고려 선종대를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그 대표적 조형으로는 극락전 앞의 배례석·삼층석탑, 그리고 사지경계()인 국장생석표 등이다.


(1) 배례석

배례석이란 국왕배례지석()이라는 상징적 조형물로서 신라 사찰에서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곳 배례석은 1085년(선종 2)에 조성되었다. 길이 175㎝, 너비 87㎝의 판석으로 3절되었으며, 상면에는 아름다운 연화문과 운문으로 조각되었다. 현재의 명문은 ‘’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의 위각이고 또 중간의 판석(길이 35㎝, 너비 87㎝)도 후에 보충된 것임이 최근 판명되었다.


(2) 삼층석탑

배례석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 역시 신라 말기의 양식이나 이 시대 선종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석탑으로서 전체 수법은 간략하게 조성되었으나 기단에 나타난 안상() 등 장식된 수법은 고려의 석탑으로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3) 국장생석표

통도사에서 약 2㎞ 거리의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의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 역시 고려 선종대의 사찰 경계로 알려져 있다. 이와 동일한 명문을 지닌 장생석표가 울산광역시 울주구 삼남면 상천리에서 근래 발견되었으나 상부가 단절되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의하면 이와 같은 표지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에 12장생을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형태는 목방()·석비()·석적장생() 등으로 분류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석비장생뿐이며, 이들은 고려시대 이두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금석문이다.

그 밖에 이 절에 현존하는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인 통도사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471호인 양산 통도사 봉발탑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인 통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6호인 자장율사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7호인 통도사 삼화상 진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8호인 통도사 팔금강도, 보물 제1041호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보물 제1353호 통도사 영산회상탱, 보물 제1042호인 통도사 대광명전 산신불도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9호인 대광명전 신중탱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1호인 오계수호 신장도, 보물 제757호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46, 보물 제738호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보물 제1194호와 보물 제1196호인 『묘법연화경』권2, 보물 제1195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9~10,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청동은입사향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2호인 청동은입사정병()이 있다.

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인 청동여래좌상·청동사리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인 인적() 및 동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청동여래입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9호인 양산 통도사 동종 및 종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청동시루(철부포함), 보물 제1373호 양산 통도사 금동천문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금니법화경()』,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인 『금니금강경』 등이 있다.


그 밖에 전석가여래가사()·전자장율사가사()·고려은입사동제향로()·청개와()·감로병()·육환철장()·동자상()·동탑()·화엄만다라()·육각요령()·금자병풍()·구룡병풍()·삼장서행노정기(西) 등이 있다.


산내 암자로는 극락암·비로암·자장암·백운암·축서암·취운암·수도암·사명암·옥련암·보타암·백련암·안양암·서운암 등이 있다.




양산 통도사 일주문​ (梁山 一柱門)


통도사는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사찰이라고도 한다. 통도사의 일주문은 수많은 건축물 중 처음 만나는 건물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4개의 기둥이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정면 3칸을 이루는 일주문은 맞배지붕이면서도 공포의 포작이 9개나 있을 정도로 화려하다.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는 활주가 건물 4귀에 세워진 이 일주문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으로 전해오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중건된 것이라고 한다.
부산 범어사 합천 해인사의 일주문과 함께 통도사 일주문 역시 일주문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모범 일주문이다.



양산 통도사 천왕문​ (梁山 天王門)


통도사 천왕문은 일주문을 지난 뒤 만나는 문으로 사찰의 대문에 해당한다. 중앙 어칸은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 협칸에는 각각 2구씩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1337년(충숙왕 6)에 취암대사()가 초창했다고 하나, 현재의 모습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친 후 19세기 이후 재건된 것이다


통도사 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겹처마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통도사 하로전(殿) 영역의 경계에 있는데, 석축 기단 위에 동향으로 있다. 건물의 구조는 비교적 간결한 5량 구조로 되어 있다. 공포는 2익공인데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작은 편이고, 화반()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사각 판재이다.

내부는 중앙 어칸에 통로를 내고, 좌우 협칸에는 수미산 중턱에 있다는 동서남북 네 개의 하늘, 즉 사천왕천을 다스리면서 불법()과 가람을 보호하는 거대한 목조 사천왕상()을 배치하였다. 통도사 천왕문은 단순하고 소박한 가구 구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건물로서 당시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양산 통도사 불이문​ (梁山 ) ​정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1305년(충렬왕 31)에 창건했다고 전하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세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불이문은 동향한 전면 3칸에 판문을 달아 출입하는데, 대들보 위의 상부 가구재() 구성에 특징이 있다. 즉, 대들보 위에 두꺼운 솟을합장재()를 삼각형으로 짜고, 그 부재 위에 장여를 걸쳐 중도리·하종도리·종도리를 얹어서 서까래를 받게 하였다.


이것은 고식()의 가구수법으로 매우 주목된다. ‘불이()’란 법계()의 실상()이 평등하고 피차의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이 불이문으로부터 실질적인 가람의 공간배치가 이루어진다.

이 건물의 특징은 대들보 위에 삼각형으로 솟을합장재를 짜고, 상부구조를 지지하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의 가구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양산 통도사 불이문​ (梁山 ) ​헌 및 두공




양산 통도사 대웅전​ (梁山 度寺 大雄殿) ​정면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殿戒壇)은 국보 제290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초창()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45년(인조 23)에 중건하였다. 금강계단은 초층 너비 약 9.9m, 총 높이 약 3m이다.


대웅전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 전각 내에 부처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전각 정면이 건물 후면에 있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하여 있고, 또한 불이문()을 들어섰을 때 마주보이는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양쪽을 다 강조한 특이한 구성 때문이다. 그 결과 건물의 삼면에는 방향에 따라 대웅전, 금강계단, 적멸보궁 등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지대석()을 놓고, 우주()와 탱주()를 세우고 이 사이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면석()을 끼우고, 상부에 상대갑석()을 놓아 마무리한 가구식() 기단()을 이루는데, 이는 이 대웅전의 초창 때인 신라시대의 것이라 생각된다.


기단 위에 놓은 초석 또한 일부는 주좌()를 쇠시리(나무의 모난 면을 모양지게 깎아 만든 것)한 고격()의 것이고, 일부는 막돌초석이며, 이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평방()을 놓아 공포()를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놓은 다포식()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내사출목()으로서 초제공()이나, 2제공 위에 놓인 살미첨차[]의 끝은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건실한 짜임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내부의 서측 내진()에 고주()들을 세워, 이들 고주와 동측면의 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동자 기둥을 세워 중종보[]와 종보[]를 걸었다.


그러나 전면부터 제4주열에는 2개의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었고, 또 제5주열에는 양측 모두 고주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후면 어간() 기둥과 제4주열 고주간에 충량()을 걸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층단천장을 이루면서 우물천장으로 마무리하였다. 불이문쪽과 금강계단을 향하여 이중으로 정면성을 주기 위하여 합각을 양측면 전면 세 곳에 마련하였음이 이채롭다.


금강계단은 이중의 넓은 방단() 위에 석종()의 부도를 안치하였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을, 기단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을 두었으며, 계단의 층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梁山 度寺 大雄殿) ​ 헌 및 두공





양산 통도사 대웅전​ (梁山 度寺 大雄殿) ​내부



양산 통도사 대웅전​ (梁山 度寺 大雄殿) ​ 문비 일부




양산 통도사 용화전​ (梁山 度寺 龍華殿) ​정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올렸다. 통도사는 크게 상로전(殿)·중로전(殿)·하로전(殿) 등의 3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전은 중로전의 중심 건물인 대광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1369년(공민왕 18)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하지만, 지금의 건물은 1725년(영조 1)에 청성대사()가 다시 건립한 것이다.


건물은 면석과 덮개돌을 갖춘 기단() 위에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가구()는 기둥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이다. 건물 바깥쪽 공포는 외2출목()이고, 건물 안쪽 공포는 내5출목()이다.

각 부재는 대체로 용 무늬로 장식되었고, 5출목의 안쪽 공포는 천정 높이까지 11포로 화려하게 짜올려졌으며, 건물 옆면의 가운데칸에는 문짝이달려 있어 특이하다.




양산 통도사 극락전​ (梁山 度寺  極樂殿) ​정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1369년(공민왕 18) 성곡대사()가 초창하였다고 전하며 중건연대는 알 수 없다.

전면은 빗살의 분합문(: 마루나 방 앞에 다는 큰 문)을 달았으나 측면은 솟을빗살문을 달았다. 측면에서 보아 전툇간(退)에만 출입문을 다는 것이 일반적이나 측면 어간(: 중앙 문)에도 문을 달았다.

기둥 위로 평방()을 돌리고 공간포()를 배치한 다포계양식()의 집으로, 추녀 네 귀는 활주(: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로 받쳤다.

공포는 내외2출목()을 두었으며 제공(: 첨차와 살미가 촘촘히 짜여진 것) 내외부 및 첨차()는 모두 교두형(: 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간결하게 조각되었다.

공포의 상부 부재(), 즉 살미 위에는 내·외부 모두 봉두형()을 조각하였으며, 귀공포 상부에는 용두()를 조각하였다. 내부는 층급을 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고 벽체는 모두 불화와 산수화를 채화()하였다. 전체적인 구조수법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 통도사 종루​ (梁山 度寺 鐘樓)




양산 통도사 응진전​ (梁山 度寺 應眞殿)  정면


정면 3칸, 측면 3칸의 외2출목() 주심포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1667년(숙종 3)에 지성대사()가 창건하였으나 중수연대는 알 수 없다.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고식()의 기단 위에 동향()하여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여져 주심포식을 취하고 있고, 제공()은 쇠서〔〕를 갖춘 다포식()의 모양을 하여 절충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법당 중앙에는 매우 우수한 기법으로 섬세하게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는데,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다.

응진전 내에는 삼세()의 불상을 다 모시고 주위에 십육나한()을 봉안하고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 범천()과 제석()을 같이 봉안하였다.




양산 통도사 응진전​ (梁山 度寺 應眞殿) 헌 및 두공




양산 통도사 약사전​ (梁山 度寺  藥師殿) 정면

정면 5칸, 측면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1369년(공민왕 18) 성곡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중건연대는 알 수 없다.


측면에는 공포()가 생략되었으며, 전면·후면에만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1조씩의 공간포()를 배치하였는데 공포는 내외2출목()으로 되어 있다. 외부의 쇠서[]는 앙서형[]으로 되었는데, 소첨차()의 하부는 연봉형[]으로 조각되었다.

내부 제공()과 첨차는 교두형[ : 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공포의 수법은 비교적 건실하다. 내부는 층급()을 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으며 어간() 후면에 봉안된 약사후불탱화()는 1775년(영조 51)에 조성된 것이다.



양산 통도사 약사전​ (梁山 度寺  藥師殿)  외부 두공





양산 통도사 관음전​ (梁山 度寺 觀音殿)  외부 두공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용화전 앞에 위치한 법당이다. 중로전(殿)의 중심이 되는 세 건물 중 하나로, 남북으로 나란히 놓인 통도사 대광명전(殿:경남유형문화재 94)·용화전(殿)·관음전의 세 법당 가운데 제일 남쪽에 있다.



1749년(영조 25)에 용암대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는데 그후 여러 번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며 근래에 기와를 개수하였다. 내부 우측에 관세음보살()이 있으며 후면과 좌측 벽에는
석가의 일생을 묘사한 그림을 안치하였다.



건물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기둥을 세우지 않고 앞뒤 기둥 위에 직접 대들보를 걸어 내부가 넓게 트였다. 공포는 2익공()이지만 다포식()에서 볼 수 있는 쇠서[]와 3분두()의 보뺄목[]를 갖추고 있어 익공식()과 다포식의 절충된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앞에는 통도사 석등(경남유형문화재 70)이 있다.




양산 통도사 관음전​ (梁山 度寺 觀音殿)  헌 및 두공



양산 통도사 영산전​ (梁山 度寺 靈山殿)  정면

3구역으로 나뉜 통도사의 가람 배치 가운데 하로전의 중심 건물으로, 18세기 초에 일어난 공포의 일부 변화를 보여주는 불전(殿)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716년(숙종 42)에 작성된「영산전 천왕문 양중창 단확기문(殿)」에 보면, 1713년 봄의 어느 날 밤에 영산전과 천왕문이 불에 타버렸는데, 이듬해에임간청인(), 송곡정안(), 풍암랑일(), 선암치원() 등 대선사 4명이 기부금을 모아서 33명의 목수와 15명의 화승을 동원하여 천왕문과 함께 다시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산전과 천왕문의 암막새에도 ‘강희() 53년 갑오’라는 내용이 포함된 명문이 남아 있다


통도사는 상로전(殿), 중로전(殿), 하로전(殿) 등의 3구역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남향한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불전으로,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극락보전과 약사전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만세루가 위치하여 있다.

평면은 앞면 3칸, 옆면 3칸인데, 특히앞면의 주간()이 옆면의 주간과 2:1의 비율 정도로 넓어서 평면은 길고 네모난 편이다. 건물 안은 기둥이 없는 통간()형으로 뒷면인 북쪽이 아닌 옆면인 동쪽에 별도의 내주()를 세우지 않고 옆면의 고주()에 의지하여 불단()을 조성하여 독특하다.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후불탱으로 영산회상도를 걸었다. 불단의 반대쪽인 서쪽 벽에는 견보탑품변상도()가 그려져 있는데,『법화경』「견보탑품」을 그림으로 푼국내에서 유일한 변상도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북쪽 벽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가 걸려 있다.

받침은 다듬돌을 2단으로 바른층쌓기하고서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앞면 가운데에는 소맷돌을 갖춘 계단을 두었다. 자연석을 일부 다듬은 막돌주춧돌을 사용하였고, 기둥은 모두 민흘림이 있는 둥근 기둥이다. 공포는 내외3출목의 다포식으로 앞면과 뒷면의 모든 주간()에는 공포가 3개씩 설치되었다.

 제1단∼제3단의 살미는 앙서[]형의 쇠서 위에 연꽃과 함께 연꽃 봉오리를 새겼다. 제4단 살미는 끝부분을 3번 꺾어 다듬은 삼분두()형이고, 제5단 살미는 구름 모양의 운공()형이며, 첨차는 모두 밑면 끝을 둥글게 깎은 교두()형이다.

가구는 고주가 없는 5량() 구조인데, 대들보와 종보는 모두 심하게 휜 나무를 사용하였고, 대공은 화초를 새긴 판대공() 형식이다. 천장은 층단을 넣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인데, 옆면의 박공부에는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창호는 앞면과 뒷면에만 설치하였고, 좌우 옆면은 창호가 없이 회벽으로 처리하였다. 앞면에는 모든 간()에 정자살의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가운데칸의 2짝만은 정자살을 45도로 눕힌 교살로 만들어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뒷면에는 3칸 모두 띠살로 된 2짝의 창호를 두었다


이 건물은 살미에 연꽃과 연꽃 봉오리를 새겨 조선 전기의 강직함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장식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제1단∼제5단의 살미 끝부분을 연결한 선은 아직 하나의 직선을 이루지 않아서, 조선 후기의 공포와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인 공포의 구성이 조선 전기에서 18세기 이후에 법식화()되는 과도적인 모습을 갖춘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양산 통도사 영산전​ (梁山 度寺 靈山殿)  헌 및 두공





​합천 해인사 (海印寺)


​합천 해인사 (海印寺) 전경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로 사적 제504호.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의상()의 화엄10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하였다.

신림()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 귀의()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와 인혜왕비()가 학조()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원음루()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殿)이 불타버리자 뇌음()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의 도움으로 능운()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의 협조로 설파()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의 도움으로 영월()·연월()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를 전국의 수사찰()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합천 해인사  홍하문 (川 海印寺 (紅霞門) 정면



​합천 해인사  홍하문 (川 海印寺 (紅霞門) 세부





해인사 일주문은 홍하문紅霞門이라고도 한다. 붉은 노을은 붉은 광명과 함께 부처님이 계시는 세계를 상징하기도 하고 부처님의 몸 빛깔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주문을 홍하문이라고 한 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섬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경주 불국사의 자하문도 홍하문과 통하는 이름이다.


이와 같이 일주문은 중생이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서, “처음 발심했을 때가 곧 바른 깨달음의 세계”라고 설파한 화엄경의 초발심을 나타낸다. 해인사 일주문 두 기둥에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쳤어도 항상 오늘이니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라고 쓴 주련을 걸어 놓은 것도 이러한 불국토의 세계로 나아가는 첫 번째 문으로 들어서는 마음의 영원성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심의 자세로 들어섬을 수용하는 일주문에는 문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담도 없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제13권에 나오는 해인사 일주문 사진에는 양 기둥 옆으로 날개처럼 아주 짧은 담이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담은 마치 선禪 수행의 점진적인 단계를 보여 주는 십우도의 소와 동자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경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인사 일주문의 담은 1948년 일주문 앞에 기단과 계단을 새로 조성하면서 헐려 없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도 일주문 양옆으로 낸 담을 볼 수 있는 사찰로는 구례 화엄사가 있다.


해인사 일주문 정면에는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뒤편에는 ‘해동제일도량海東第一道場’, 내부 중앙에는 ‘홍하문紅霞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정면 현판은 근대 서예의 대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의 글씨이고, 뒤편 현판은 고령 지방의 명필 박해근朴海根의 글씨이며, 홍하문은 주원영朱源榮의 글씨다.


일주문의 창건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1457년(조선 세조 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 차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수한 때가 1940년인데, 그 때 주지였던 설호雪 스님이 주관하여 도목수 이화백李花白의 솜씨로 이루어졌다. 일주문은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를 갖춘 건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짐이 돋보인다. 일주문 앞 기단 오른쪽에는 ‘불기 2975년’, 왼쪽에는 ‘무자 개축 戊子 改築’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현재는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종찰이며, 선원()·강원()·율원() 등을 갖춘 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殿)·극락전·관음전·응진전·조사전·퇴설당()·청화당()·궁현당()·구광루()·경학원()·선원·우화당·보경당·적묵당·선열당·사운당()·독성각·해탈문·봉황문()·일주문() 등이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 국보 제265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제279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 , 보물 제128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73호),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川 海印寺 殿) 정면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川 海印寺 殿) 내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1481년(성종 12) 이후 확장된 해인사의 사찰규모는 창건당시보다 웅장하였으나, 그뒤 수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거의 불타 없어지고, 현존의 건물들과 함께 대적광전 역시 조선 말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장방형 평면으로 가구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면의 주간() 크기는 비교적 크게 잡고 있어 건물의 전체형태를 보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주고 있다.

주간 크기와 기둥 높이의 비율에서 보면 조선 중기 이전의 양식과는 달리 주간비율이 큰 것이 특징이며, 이것이 건물 전체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공포()는 다포로 외2출목()·내3출목()의 구성이며, 살미첨차[]와 대첨·소첨이 짜여져 말기적인 장식부재가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가구형식은 2고주9량가()로 비교적 대형건물의 가구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고주간에 대량()을 보이고,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퇴량(退)으로 연결시켜 내부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천장의 외진()은 빗천장, 내진()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넓은 평면에서의 공간분위기가 아늑하게 처리되었다. 이 건물은 평면크기에 비하여 가구수법이나 공간분위기가 조선 말기적 건축양식을 나타내는 불교건축의 하나이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川 海印寺 殿) 내부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川 海印寺 殿) 외부 두공 및 헌


① 대적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대적광전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 법당이다. 창건 이후 건물의 자세한 내력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현 건물은 1817년(순조 17) 제월()과 성안()이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 봉안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은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으로 불린다.

본래 성주군 금당사()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지장보살·보현보살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1996년 9월에는 비로자나불상 등에서 1326년(충숙왕 1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의복, 지공()의 「문수최상승무생계법」계첩()을 비롯한 여러 유물과 불단 진단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2점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 (川 海印寺 ) 외관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川 海印寺 ) 전동 내부 전면​






​합천 해인사 장경판고 (川 海印寺 ) 후동 내부 후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川 海印寺) 측면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川 海印寺)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川 海印寺) 인본


​합천 해인사 장경각 (川 海印寺 ) 외관


유교·불교의 경전()을 적은 책이나 목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향교()나 서원 또는 불교사찰 내에 지은 건물로 향교·서원에서는 존경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은 이미 삼국시대 불교사찰 내에 지었던 경루()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큰 절에는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을 지은 예가 많다.

그러나 장경각과 같은 건물이 널리 확산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나라에서 유교를 크게 숭상한 때이다. 이때에는 전국의 군현()마다 향교가 세워지고, 또한 지방에 서원이 많이 세워졌으며 이들 향교나 서원 중 규모가 큰 곳은 대개 장경각을 갖추었다.

장경각은 책이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인 만큼 건물구성에 약간의 특징이 있다. 즉, 바닥은 마루로 하여 지면에서 어느 정도 띄우며, 벽체는 판자를 댄 이른바 판벽()으로 하고 여기에 수직의 가는 창살만 댄 간단한 창을 단다. 이것은 모두 실내에 습기가 남지 않도록 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배려한 결과이다.

합천의 해인사 대장경판고는 불교사찰 내의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대장경 목판을 보관하기 위하여 1488년(성종 19)에 지어진 이 건물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인 건물 둘로 구성되었으며, 습기를 막고 통풍이 잘 되도록 건물의 향()이나 창문 구성을 세심하게 배려한 점이 특색이다.

서울 문묘()의 존경각은 건물의 특색은 없지만 향교 내의 이런 유의 건물을 대표하는 것이며, 서원으로는 경주군옥산서원의 문집판각과 어서각, 안동군도산서원의 경장각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건물은 건물 자체의 구조도 경전을 보관하는 데 적절하도록 고안되었지만, 건물이 놓이는 위치나 지세()도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을 택하는 등 건축적으로 매우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다.


② 장경각

장경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 주는 건물이다.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 장경각은 1995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안에 소장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고려대장경판의 영인본은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전산화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합천 해인사 명부전.조사전 및 해행당 (川 海印寺殿.祖師殿. 解行堂) 외관




③ 기타 전각

명부전은 지장전(殿)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가 옛 금탑전(殿)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의 성흥사()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지금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지어졌다.

현재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65년에 자운스님께서 화주가 되어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지금의 선원 자리에 중수하였고, 그 뒤에 다시 1973년에 봉주화상이 주지로 있을 때 대장경판전을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지금의 자리인 100자 아래 지점에 새로이 옮겨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원으로 쓰이는 한편 한주 스님들의 거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관음전(殿)은 심검당()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현재 건물은 1908년 회광()이 천상궁()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현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 100여 명의 스님들이 경전을 연마하고 있다.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창건하여 역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처음에는 역대 선사의 영정만을 봉안했는데, 소조() 석가여래와 1918년에 판전 서재(西)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은 1817년에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 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 때 선객들이 드세다 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 왔다.

1967년 목조 희랑조사상을 보장전(殿)으로 사용하는 구광루로 옮기고 이듬해에 해인총림을 설치하여 영정을 모두 경학원에 봉안하고서부터는 다시 상선원으로 사용해 오다가, 현재는 방장 부속실로 사용하고 있다.

퇴설당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817년에 불에 모두 타 버리자 제월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시 1965년에 근담화상이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퇴설당은 최근까지 상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1899년에 경허 대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동수정혜결사를 실천한 장소였던 점에서 역사적인 수행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깊다. 선원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됨에 따라 현재는 총림 방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궁현당의 창건년도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쳐 현재의 건물은 1988년에 완전 복원된 건물로서 해인사 승가대학(강원)의 교사()로 사용되고 있다. 선불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합천 해인사 구광루  (川 海印寺 )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 1818년(순조 18)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도내 40명 승려의 시금()과 거창사람 김용술()이 시주하여 건립되었다.

원래는 기능상 재식시() 법요()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찰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1칸은 종고루()로 쓰이고 있다. 누 안에는 4,000근의 대종()과 지름 1.5m의 법고()가 있고, 목어()·운판( : 절에서 식사시간 등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금속판) 등도 보존되어 있다.

건물은 얕은 기단 위에 자연초석을 놓고, 층단주()를 세워 층마루를 깔았다. 상층에 기둥을 세워 익공() 선단()을 수직으로 자른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짜 도리를 올려놓고 처마를 받치게 하였다.

하층은 주간()에 판벽을 설치하고 상부는 살창으로 하였고, 동쪽으로부터 두번째 주간에는 대웅전 앞으로 통하는 각도( : 복도)를 만들어 통행하게 하였다

 

 

구광루는 1818년 감사() 김이재()의 주선으로 건립되었다. 크기는 67평으로 본래는 재식시() 법요()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사중의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 한칸은 종고루()로 사용되고 있다.

 

경학원은 경홍전(殿)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34칸이다. 1892년 민형탁()의 뜻에 의하여 범운화상이 건립하였다. 본디 왕, 왕후,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삼전위축소(殿)로 건립되었다. 그 뒤에 1946년에 이르러 환경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손수 경학원이라고 글씨를 써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고, 1968년에 지월화상이 중수하여 이듬해부터는 해행당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옮겨 모셨다가, 1975년부터 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열당은 종래에 하선원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노전실과 부방장실과 영정 안치실로 쓰이고 있다. 특별히 노전실은 응향각이라고도 하는데 응향각은 향을 사른다는 뜻이고 노전은 의식을 집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사운당의 크기는 146평으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490년 설호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중수되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중수된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임자들의 방사()로 사용되고 있다.

해탈문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817년 중건하였고, 1899년 범운대사가, 1940년 사중에서 중수하였다. 봉황문은 1817년 건립하였으며, 사천왕탱()이 안치되어 있다. 일주문은 1940년에 건립되었다.


④ 기타 문화재

이 밖에 해인사의 성보()로는 합천 해인사 길상탑(보물 제1242호), 해인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 해인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호)과 같은 지정문화재와 오백나한도()·금은자사경()·세조영정() 등이 있다.

또 상탑향로()·무공수정()·옥등잔()·진주등()·순은화병()·관욕소관()·오동향로()·순은다기()·순은향로()·순은방향로()·향로개()·요령()·감로병()·일영의()·봉촉대()·귀형촉대()·관복()·오조어필첩()·법라()·옥제조화()·금강저()·각사인()·헌종어필()·삼보인()·계첩석판()·팔상병()·33조사영병()·복수수병()·숙종어필()·화초수병()·화조오채병()·흑판복수병()·복수채병()·대화로()·금산첩()·방울·대종()·소종()·경허()친필·명문와()·향합() 등이 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선수()·희언()·각성()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천()·경남()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체정()·유기()·유일()·상언()·유안()·성여()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김정희(),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 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로 전해지는 원당암()을 비롯하여, 고불암()·고운암()·금강암()·길상암()·백련암()·보현암()·지족암()·희랑대()·국일암()·약수암()·용탑암()·삼선암()·금선암()·청량사()·홍제암()이 있다.

구례 화엄사( 寺)



구례 화엄사( 寺) 전경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중관대사()해안(, 1567~?)이 1636년(인조 14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신라 진흥왕 5, 백제 성왕 22)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이 장륙전(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8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신라 제24대 왕) 때가 아닌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다만, 8세기보다 앞선 어느 시기부터 이 터에 가람이 있었고 그것이 연기조사 대에 이르러 대가람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절은 신라 말 도선()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殿)이라 사액()하고 선교양종대가람()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낭원()·현준()·결언()·관혜() 등의 화엄학승()들이 머물렀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의 복전()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과 대립된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의천()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에 예를 표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수초()·명안()·새봉()·조관(?)·윤장()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윤눌()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 및 문수()·보현()의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가 종루()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殿)·나한전(殿)·원통전(殿)·명부전(殿)과 노전(殿)으로 사용되는 삼전(殿) 및 요사()인 원융료()·청풍당()·만월전(滿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 殿 )이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과 사사자 삼층석탑( )·노주()·동서오층석탑(西)·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이 병() 모양의 간석(竿)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에는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의 석단()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은 보물 제133호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에 해체하여 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 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 )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 선조()가 벽암선사()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 1매, 예조홍각대사첩() 1매, 겸팔도총섭첩(), 예조대선사각성첩()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 1건, 인조 하사 가사() 1령, 인조 하사 어작() 1대, 선조 어필각본()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殿)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殿) 1축, 고종(),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 1책 등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는 신라 경덕왕 때에는 81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원소암()·청련암()·적기암()·은무암()·은선암()·백련사()·도선굴()·연기암()·보적암()·내원암()·봉천암()·문수암() 등의 상당히 많은 암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을 비롯한 금정암()과 지장암() 등의 세 암자만이 있을 뿐이다.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殿), 선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562년 설응()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殿)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1959년 원응()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殿)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절 일원이 명승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례 화엄사 일주문 ( 寺) 정면



구례 화엄사 일주문 ( 寺)  헌 및 두공


화엄사 대웅전 앞 석계 좌측면 및 각황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정면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앞 석등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앞 사자탑




국보 제67호. 화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서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각황전은 대웅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이며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 건물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다보불 등 3여래()와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지적보살() 등 4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화엄사는 1636년(인조 14)에 작성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 등 여러 문헌에서 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각황전은 본래 장륙전(殿)으로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아 3층 7칸으로 건립하였으며 내부에는 화엄석경(: 화엄경 원전을 엷은 청색 돌에 새긴 것, 보물 제1040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 사경(: 후세에 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해 베낀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경내의 석조물들과 화엄석경의 글씨체도 8세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엄사와 장륙전은 8세기에 중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화엄사는 1630년(인조 8) 벽암대사가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에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699년(숙종 25)에는 벽암대사의 제자인 계파() 성능선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4년 동안 중창불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 중건되었으며 2층 7칸으로 전보다 층수가 줄어들었다. 완공 후 숙종은 자신이 직접 쓴 ‘각황보전(殿)’이라는 편액을 내려 이때부터 각황보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3여래와 4보살상을 봉안하였는데 중건 이전에는 금산사 미륵전처럼 입상()이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은 1768년(영조 44), 1847년(헌종 13), 1851년(철종 2)에 각각 중수하고, 1860년(철종 11)에는 후불탱화 3폭을 조성하여 후불벽에 걸었다. 1885년(고종 22)에 또다시 중수하였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해체·보수되었다. 1961년에 보수한 뒤 이듬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부분적인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화엄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 중심 영역으로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보제루 옆을 지나면 동·서 5층석탑이 있는 넓은 마당이 나오고 높은 석단 위에 각황전, 대웅전, 원통전 등 주요 불전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제루와 축을 이루며 남향하고, 각황전은 대웅전과 직각 방향으로 서향하고 있다. 배치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동·서 5층석탑이 대웅전과 각황전의 중심축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비켜서 있다는 것이다. 화엄사에는 2개의 주불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주불전으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보다 대웅전에 오르는 계단을 넓게 구성한 것도 높은 각황전이 먼저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웅전을 향해 시각과 동선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판단된다. 각황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마당 중앙에는 6.4m 높이의 석등(국보 제12호)이 자리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각황전은 기둥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 후기 중건하면서 기존에 있던 기단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초석은 원형 주좌를 새긴 사각형의 가공초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위·아래층 모두 내외 2출목() 구조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으로 소첨차와 대첨차가 사용되었다. 초제공과 2제공은 쇠서가 위를 향해 뻗은 앙서형()이고, 3제공은 익공()이며, 4제공은 운공()이다.


가구 구조()는 전체적으로 볼 때 3고주 9량 형식이다. 아래층 바깥 기둥열의 평주와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는 퇴보를 결구하고 퇴보 위에는 위층 변주()를 세웠다. 위층 퇴보는 아래층 퇴보와 마찬가지로 안쪽 기둥열의 고주에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는 위층 기둥과 내부 최고주(: 가장 높은 기둥)에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으며 아래쪽에는 고주를 세워 받쳤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최고주와 함께 종보를 결구하였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장은 모두 우물반자를 시설하였는데 주심도리에서 하중도리까지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현존하는 중층불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가구 구조는 아래층에서 반 칸씩 줄여 위층을 구성한 반칸물림방식으로, 조선 후기 중층건물의 구조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공간은 층의 구분 없이 통층()으로 구성하여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형 공간에는 최대한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아래층에는 사방에 많은 창호를 설치하였으며 위층은 벽체 대신에 채광창을 두었다.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1998년에 예불의 편의를 위해 마루를 설치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웅장하면서도 안정된 균형감과 엄격한 조화미를 보여주며 건축기법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내부에 봉안된 7구의 불·보살상과 후불탱화도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헌 및 두공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내부


구례 화엄사 각황전 ( 殿) ​내부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정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계단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앞 동 오층석탑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앞 서오층석탑





구례 화엄사 서탑 조각


 

보물 제299호.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화엄10찰() 중 하나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가람이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의 본사로서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대웅전은 각황전과 함께 화엄사의 주불전으로 1636년에 중건되었다.


내부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협시불로 모셨다. 불상 뒤에는 화엄사대웅전삼신불탱(殿, 보물 제1363호)이 있다


화엄사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기록을 볼 때 8세기 중후반에 창건 또는 중창된 것으로 판단된다.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에 따르면 875년(헌강왕 원년)에는 도선국사()가 1,300여 동에 이르는 건물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943년(태조 26)에는 고려왕실이 주도하여 중창불사를 하였고 인조연간(1122년~1146년)과 충선왕 때 각각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26년(세종 6)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대부분의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30년(인조 8)부터 벽암대사가 중건을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에 대웅전이 완공되었다. 대웅전은 1757년(영조 33)과 1915년에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동·서 5층석탑이 있는 넓은 마당에서 4칸으로 이루어진 높은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전의 서쪽에는 영전과 원통전이 대웅전과 일렬로 배치되어 남향하고 있고 동쪽에는 명부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은 각황전처럼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초석은 각황전과 달리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모서리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이다. 1·2·3제공은 바깥쪽 끝이 하늘로 향하는 앙서형()이고, 4·5제공은 운공형()이다. 제공은 건물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초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창호는 정면의 경우 모든 칸에 세 짝 분합문을 달고 분합문 상부에는 교창을 두었다. 양 측면의 퇴칸에는 외짝 교살문을 설치하였으며, 배면은 가운데 3칸에만 두 짝 띠살문을 달았다.


가구 구조()는 1고주 7량() 형식이다. 대들보는 앞 뒤 평기둥() 위의 5제공에 걸고 대들보 하부에는 높은 기둥을 세워 받쳤다. 중보와 종보는 각각 동자주를 세워 결구하였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추녀 하부에는 활주를 세워 받쳤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을 바깥 부분보다 한 단 높게 한 층급천장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삼신불()인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비로자나불은 불멸의 원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법신불()이라 하며, 노사나불은 보살로 있으면서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거듭한 결과 그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이기 때문에 보신불()이라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불은 현실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교화한 부처이기 때문에 화신불()이라고 한다.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중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은 일반적인 불전과 다른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과 측면은 기둥 간격이 모두 동일하게 설정되었으나 내부 기둥들은 생략되거나 위치가 조정되었다. 불단 뒤쪽에는 내부 기둥 4개를 모두 세우고 후불벽을 설치하였다.


이 기둥들은 측면 기둥열에서 뒤쪽으로 약간 물리면서 하중도리 하부에 위치하고 있다. 예불을 위해 불단 앞의 공간을 넓게 쓰면서 구조를 고려한 계획 수법이다. 그러나 불단 앞에는 측면 기둥열에 맞춰 어칸의 기둥 2개를 생략하고 기둥 2개만 세웠다. 이 기둥들은 불단의 영역을 구분함과 동시에 어칸의 대들보보다 단면 크기가 작은 대들보를 구조적으로 보강하는 기능을 한다.


화엄사 대웅전은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외관이 장중하고 내부의 장엄()도 우수하다. 불전의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되는 것, 공포의 내외 출목수가 같은 것, 불단 앞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평면형식과 구조 수법 등은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불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외부 두공 및 헌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내부 두공 및 천장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내부


구례 화엄사 대웅전 ( 寺 大殿) 천개



구례 화엄사 대웅전 및 명부전 ( 嚴寺 大雄殿 .冥府殿) 

 

구례 화엄사 응향각 및 원통전 ( 嚴寺 )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정면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상.하단 기단부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상단 기단의 자장대사상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상단 기단의 석사자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초층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 ) 앞 석등

 

​경북 경산 환성사 (慶山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팔공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835년(흥덕왕 10)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말에 불타버린 것을 그 뒤 다시 중창하였으며, 1635년(인조 13)신감대사()가 중건하였고, 1897년(광무 1)에 긍월대사()가 중창하였다. 1973년 대웅전을 해제 보수하였고, 1982년에 명부전을, 1995년에 요사인 감로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殿)·심검당()·성전암(殿)·수월관()·산령각·천태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보물 제56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고려 말 조선 초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약 1.6m 높이의 석단() 위에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이며, 1974년에 복원되었다.


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심검당은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 건물로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며, 근래에 양와()로 새로이 단장하였다.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띤 심검당은 은해사 영산전(殿)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1976년에 해체 중수되었다.

그 밖에 대웅전 앞에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과, 입구에 석주() 4개가 서있다. 석탑은 일명 연화탑이라고도 부르는데, 상층 기단부 갑석과 초층 탑신 사이에 별석()으로 된 매우 큰 괴임돌을 받친 매우 드문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석주는 예전에 있었던 일주문()의 기둥이다.『화성지()』에 의하면 이 절이 조선시대에 임고서원에 속하여 공물을 드렸는데, 숙종 때 박서봉()과 황윤중()이 여러 번 상소하여 하양향교()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북 경산 환성사 (慶山 寺) 전경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전면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외부 두공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두공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천정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慶山 殿) 불단 


 

경북 경산 환성사  심검당 (慶山 ) 전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河陽邑) 사기리(沙器里)에 있는 환성사(環城寺) 강당으로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환성사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으로 환성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전에 세우고 후에 몇 차례 고친 것으로 추정되며, 심검당() 현판에 ‘도광 4년 갑신추팔월 추파서( )’라고 쓰여 있는데 도광 4년은 1824년(순조 24)으로 창건연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장대석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외목도리를 받치는 2익공을 결구하였다. 정면의 쪽마루는 나중에 설치하였으며, 창호(창과 문)도 고쳤다.

건물 측면은 2개의 고주(평주보다 키가 큰 기둥)를 병렬시켜 대들보를 받도록 하고, 그 위에 동자형의 판대공에 솟을합장을 걸어 조선 중기 이전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 기둥을 가로로 연결하는 창방은 평주와 고주 사이에 높이를 다르게 하는데, 같은 높이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경북 경산 환성사  심검당 (慶山 ) 두공 및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