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1회 ~ 5회 [김운회의 新고대사]
1.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한민족에겐 ‘오랑캐의 왕’으로 각인돼 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 )는 요나라의 1대 황제다. 10년(916~926) 재위하면서 거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마치 중국 변방 왕조의 왕 같다. 그런데 그가 이끈 민족이 한민족과 뿌리를 공유한다면 어떻게 되나. 사서는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한민족 북방 역사에서 팽개쳐져 왔다. 사진<1>은 네이멍구(內蒙古) 바린좌기(巴林左旗)에 있는 야율아보기 묘역. <2>는 묘의 안내석. <3>은 요가 고조선 옛땅에서 일어나 법통을 이었다고 기록한 요사의 기록(붉은선 안). 우실하 항공대 교수 제공
①고조선과 요나라
고조선은 BC 2000년쯤~BC 103년까지 존재한 한반도의 뿌리 국가라는 게 한민족의 지식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얘기였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우린 믿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런 믿음을 허문다. 먼지 허옇게 뒤집어쓴 역사책엔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916~1125)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다. 고조선이 오랑캐 나라로 이어졌다면 한민족은 뭐란 말인가. 한민족의 과거는 어떻게 된 걸까.
진나라(265∼419)의 정사
우리가 대표적 오랑캐로 알고 있는 동호(東胡·후일의 남부의 거란계, 북부의 몽골계를 형성)의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니(당시 조선은 오늘날 요동·요서다). 조선은 한민족의 단어 아닌가.
역시 오랑캐인 거란족의 나라 요의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이다.
요가 고조선을 승통한 것은 영역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20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이나 한족(漢族)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엔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수경 원문에는
진서에는
이젠 다른 문제, 즉 신화를 살펴보기 위해 시기를 더 거슬러서 1세기 후반의 진수의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즈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한대의 정책 서적인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李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東胡)와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출처] :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기자조선의 진실/ 중앙선데이
2.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각저총(角抵塚) 벽화. 두 장정이 씨름하는 왼쪽 구석에 작은 호랑이와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이어졌다고 주장하게 되는 유명한 벽화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토템이어서 이를 무조건 단군신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 벽화는 중국 측의 관리 소홀로 크게 훼손됐다(오른쪽 작은 사진). 김운회 교수 제공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
[출처] :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기자조선의 진실 /중앙선데이
3.최남선 “기자조선설은 중국 이민족 동화 정책의 산물”
1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箕子井田紀蹟之碑)의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전혀 증명되지 않는 내용이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 끝자인 지비(之碑)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역사 공간에서 단군과 기자는 복잡하게 얽힌다. 13세기에 급부상한 단군신화는 떠오른 속력만큼 빠르게 가라앉는다. 그 자리를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 차고앉는다. 기자는 유학으로 무장된 조선 위정자에게 정신적 절대자로 군림하며 단군에 수백 년간 설움을 안겼다.
기자는 ‘조선 성리학 이데올로기 말살’ 전략을 펴는 일제 때문에 무너졌지만 해방 뒤 유학자 사회에 의해 복권돼 절대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조’라는 단군에 천 년 가까이 싸움을 거는 기자는 누구인가.
한나라 초기의 '상서대전(尙書大傳) 기록을 보자.
“주나라 무왕은 은(殷)을 정벌한 후에 기자를 풀어 주었다.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치욕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도망했다. 무왕이 이를 듣고 그를 조선후에 봉하였다. 기자는 이미 주나라의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신하의 예가 없을 수 없어 (무왕) 13년에 내조하였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물어보았다.(“武王勝殷, 繼公子祿父, 釋箕子之囚, 箕子不忍爲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旣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武王因其朝而間鴻範” 尙書大傳 卷2 殷傅)”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2‘기자가 평양외성에 자리 잡고 정전법을 시행했음을 기념하는 비석이라는 뜻’으로 탁본을 묶어 만든 서책의 표지다. 영·정조시대 서명응이 만든 책으로 당시 명필이던 조윤정이 글로 썼다. [자료=개인 소장가, 사진=권태균]
'삼국지'에는 “옛날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8조의 법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고 사는 집이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40여세 후손인 (고)조선후(朝鮮侯) 준(准)이 왕을 칭하였다칭하였다”(“昔 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准 僭號稱王” 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고 나와 있다.
'상서대전'과 '삼국지'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사서들은 하나같이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후로 봉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해동에 국가가 있은 지 오래되었는데 기자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봉작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三國史記'年表)라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기자동래설과 관련해 먼저 살필 것은 은-기자-동이족의 관계다. 은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서(史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나라로 알려진 은의 실체를 전혀 다르게 보여준다.
'사기'에는 “은(殷)나라가 오랑캐의 나라(“殷曰夷周曰華” '史記')로 돼 있다. “(은나라 시조인) 설(契 또는 卨)의 어머니가 목욕하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고 한다('史記''殷本紀'). 은나라 스스로 “하늘이 검은 새를 보내 은나라를 낳게 하였다(“天命玄鳥降而生商” '詩經'商頌')”는 신화를 널리 보급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화는 만주족의 시조신화와 일치한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은나라가 부여와 습속이 거의 같아서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고 부여는 은나라 역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은나라 멸망 이후 잔존 세력들이 만주로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도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 '後漢書'115卷)”고 했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이며, 은의 신하 기자가 만든 ‘기자조선’ 역시 동이족의 나라라 할 수 있다.그런데 그런 은나라 신하였다는 기자는 누구인가. BC 2세기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
결국 은나라는 동이의 나라, 기자는 동이족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나라는 한민족의 나라, 기자도 한민족의 선조라는 결론으로 급격히 치닫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 않다. 우선 기자에 대한 사료를 신뢰할 수 없다. 사서들 가운데 AD 1세기에 나온 '한서(漢書)' 이전의 기록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다.
역사가 체계적으로 제대로 기록된 것은 한나라 이후이기 때문이다. '상서대전'은 BC 2세기에 편찬됐다. ‘기자동래의 사실(史實)’은 이보다 800~1000년(?) 전의 사건이다. '상서대전'은 흔히 '서경(書經)'이라 하는데 이미 소실된 것을 한 문제(文帝)가 신하를 복생(伏生)에게 보내어 복생이 구술(口述)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사기'조차도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많다. '사기'조선전'에도 기자 동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고고학적인 문제도 있다. 기자와 관련된 유물 또는 유적으로 주장되는 것들은 주로 산동반도 대릉하(大凌河) 인근에 나타난다. 1973년 대릉하에선 기후(箕侯)의 명문(銘文)이라고 주장되는 청동 예기가 출토된다. 이 ‘기후’를 ‘기자’로 보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기자묘와 유물 출토지가 수백㎞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그렇게 단정하기는 무리다. 인정한다 해도 이 예기는 ‘기자가 기껏 산동이나 대릉하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일 뿐이다.
‘기후=기자’이며 기자는 곧 (고)조선 왕이라면 이는 오히려 고조선의 일부 영역(기자 조선)이 현재의 산동반도나 베이징 인근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주나라의 기자가 한반도까지 가서 제후를 하기에는 너무 멀다. 당시 주의 세력은 요동까지도 미치지 못했다. 고대국가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유목민족도 아닌 BC 11세기께(?) 주나라가 수천㎞ 떨어진 한반도까지 미칠 힘은 없다. 그처럼 허구적이기 때문에 기자동래설은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사의 근간이 되는 삼국시대엔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문제는 고려 중기다. 북방민족적 건강성이 사라지고 문신 위주의 중화주의적 풍조가 널리 퍼지면서 기자는 날개를 폈다. 기자동래설은 부동의 사실(史實)로 용인되어 고려 숙종 7년 기자사당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1102).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는 “기자로 인하여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이는 김부식의 생각만이 아닌 그 시대 지배층들의 보편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 말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이 잠시 부각되더니 조선에 이르러선 기자 숭배의 열풍이 불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國號') 라고 썼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친한족적(親漢族的)·모화적(慕華的)이었다.
단군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다. '조선경국전'을 필두로 15세기의 '동국통감''삼국사절요''응제시주''동국세년가' 등을 거쳐, 16세기 후반 '기자지(箕子志: 윤두수)'가 편찬됐다. 조선 중기 대표 석학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紀)'를 편찬했다.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칭송을 받는 송시열은 “오로지 우리 동방은 기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고 …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이 글은 2004년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글이다. 송시열의 주장은 ‘중국의 속국인 기자조선이 한반도 역사의 출발’이라는 현대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의 주장과 일치한다.
1756년(영조 32년)엔 기자묘가 있다는 평양과 한양, 전국 각 도에 기자묘를 세워 기자를 영원히 숭배하자는 상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같은 일부 가문은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됐다.단군은 찬밥이 됐다.
조선 태종 때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보다는 서열이 낮았다. '삼국사절요(1476)'에서는 “단군이 조선을 개국했지만 기자가 오기 전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됐다”고 했다. 아예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다.
소위 기자 정통설에 대한 비판이 조선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자 관련 기록 가운데 한반도와 무관한 기록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라고 따졌다. 조선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묘가 어떻게 중국 하남성에 있느냐는 원초적 질문이지만 ‘기자 광풍’은 이런 의문을 쓸어버렸다.
극심한 ‘중화 사대주의’에 대해 만주족 국가인 청의 태조 아이신조뤄 누루하치는 “중국과 조선, 이 두 나라는 말이나 글은 다르지만 그 옷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다('滿文老''太祖' 卷13, 14)”고 개탄했다.
한족(漢族)은 주변 민족들의 선조를 한족화(漢族化)하기를 즐기는데 기자도 그 예다. 한족은 흉노의 시조 순유는 하나라 걸왕의 후손, 서융은 하나라 말기 이주민, 선비는 유웅의 후손, 왜는 오나라 태백의 후손 등이라고 했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한족은 항상 주변 종족의 선조와 한족 조보(祖譜)를 연계시켜 종조화(宗祖化)한다”고 했다.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기자가 한반도로 와 왕을 한 어떤 역사적 증거도 없다. 작은 먼지 같은 소문에 정치적 뼈와 살이 붙어서 점점 자라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천 년 이상 유학자들의 머리에 뿌리 박히고 그들의 지배와 억압을 받는 한국 민중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이다.
[출처] : 김운회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 김운회의 신고대사 / 중앙선데이
4. 사마천이 말한 고조선 도읍 왕검성은 베이징 인근
④ 중국 역사서와 고조선
도대체 기자(箕子)는 누구인가. 고대로 거스를수록 짙어지는 역사의 안개가 기자 주변엔 유난히 짙다. 기자는 동이족의 은(殷)나라와 연결되고 그가 속한 기족(箕族) 혹은 기국(杞國)은 고결한 기개로 칭송받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죽국으로 연결된다. 짙은 안갯속에서 고죽국은 또 고조선으로도 길이 뻗어 있다. 기자와 함께 걷는 역사의 벼랑은 한 걸음 잘못 디디면 천길 오해로 추락한다. 수천 년 역사에서 기자는 미로를 만들었다.
‘기우(杞憂)’는 ‘기나라[杞國]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우선 기자에 대해선 주나라 무왕이 한족인 기자를 한반도의 제후로 봉했다는 ‘기자 동래설’이 질긴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러나 민족의 선각들은 기자(箕子)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한다. 기국은 고대 한민족 국가였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단군을 태양(개)의 아들(아지)로 ‘개아지’라 불렀는데 이 말이 기자의 중국 발음인 지즈와 비슷하여 혼란을 초래했다. ‘개아지 조선’은 해씨조선(解氏朝鮮)”이라고 했다. 정인보는 “기(箕)는 우리 고유어인 검(儉)자를 한자로 나타낸 것으로 최고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니 단군왕검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안재홍은 ‘큰(한)’은 ‘크다’는 뜻이고, ‘지(치)’의 뜻은 수장·대인인데, 순 우리 고유어인 ‘크치(대수장)’를 한자로 잘못 번역한 것이 기자라고 하였다.
기족=동이족으로 보는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청 말의 저명 사가 왕셴탕(王獻唐)은 “염제 신농씨는 동이의 한 갈래인데 산둥 지역이 기원지”라고 했다. 사기에는 염제 신농씨가 은보다 훨씬 앞선 3황5제 시대의 인물로 그의 후계 치우가 구려족(동이)의 임금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중국 동북사범대의 리더산(李德山) 교수는 “기족의 원주지는 산둥으로 이 지역의 기현(箕縣), 기옥산(箕屋山), 기산(淇山), 기령(箕嶺) 등의 지명은 기족에서 따온 것이고 기족과 은 왕조는 친족 관계로 동이 계통”이라고 한다. 나아가 “기자가 타민족인 주(周) 왕조에 반발, 일부 기족을 이끌고 고죽국(孤竹國)으로 갔다”고 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되는 기록으로
이렇게 되면 은나라와 한민족의 선민족인 동이족, 기자와 은나라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은나라=기자=동이족=한민족’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계를 다르게 설명하는 기록들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 학자들은 기자가 대동강까지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사서를 들이댄다.
주나라가 중국 고대국가이므로 중국인 기자(주 무왕의 신하)가 한반도로 와서 통치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혼란을
그러나 앞의 기록은 우선
‘고구려의 옛땅 고죽에 주나라가 기자를 보내 제후로 봉했다’는 부분은 ‘기자 조선동래설’의 근거로 제시되지만 여기에도 치명적 결함이 있다.
왜냐하면 고죽은 여러 사서에서 한반도가 아니라 현재의 베이징 동남부~차오양(朝陽)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고죽성은 노룡현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孤竹城在盧龍縣南十二里,
결국 동이족 일파이자 은나라 후예인 기국(箕國)이 현재의 산둥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고대 국가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나라가 기족의 제후를 임명한 곳은 고죽이지 한반도의 기자조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자의 조선동래설’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기자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로 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권람의
기자조선으로 오인되고 있는 기국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러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번성한 나라가 된다. 고조선의 영역과 기족의 영역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겹치는 것이다. 따라서 기국이 고조선의 선민족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국을 연결 고리로 해 은나라와 고조선이 역사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대표적 고증학자인 고염무는
따라서 산둥 반도에서 차오양에 이르는 지역이 은나라 후예인 기족의 영역이었다가 뒤에 고조선 중심지가 되고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원주지이면서 동시에 모용씨(동호 후예, 요의 선민족)의 터전으로 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동이족의 역사가 은→기국→고조선·숙신→동호·선비·부여→전연(모용씨)·북위·고구려→요(거란)·고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조선 역사가 후대에 큰 혼란을 남긴 이유는 동이의 국가들이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해 남긴 기록이 없고
1973년 3월 랴오닝(遼寧)성 카쭤(喀左)현 구산(孤山)에서 한 농부가 은대의 청동 항아리, 술그릇, 솥 등을 발견했는데 술 그릇 중 하나에는 고죽(孤竹), 솥에는 기후(箕侯)라고 여겨지는 글자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기후(箕侯)=기자(箕子)이며 이는 기자조선의 산 증거’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기후=기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도 없다. 유물 출토지와 기자묘가 적어도 700㎞ 이상 떨어져 있다. 고대에 그 정도 거리는 ‘상호관계가 없다’는 의미다. 또 기후는 기족의 수장이라는 의미로 수십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기자는 주나라 무왕 때의 특정 인물이므로 ‘기후=기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예컨대 기자가 조선 태조 이성계라면, 기후는 조선 왕이라는 말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고대에 기후의 나라(기국)를 기자조선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산둥~랴오둥 지역은 고대 한국인들의 주요 이동 통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기족·기후 등의 개념과 조선·숙신(주로 이 지역에 나타나는 민족명) 등이 뒤섞여 기자조선이라는 관념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은나라 청동 유물 출토지와 고죽국의 위치가 근접해 있어 일부 사가가 ‘기후=기자’로 오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후=기자’를 증명한다기보다 은나라 후예들인 기족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것으로 족할 듯하다.
5.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1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려현 창려현은 기록에 고조선의 도읍으로 나오는 곳이다. 사기의 “위만은 왕검(王険)으로 도읍을 삼았다”라는 기록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의 서광(徐広)은 “창려현에 험독현이 있었다”, 응소(應劭)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왕검=험독’임을 설명한다. 이 지역은 현재 베이징에서 멀지 않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서 봐도 천연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발해가 보인다.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Ⅰ
고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은 신화의 세계 혹은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세계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공자의 춘추시대에 이미 뚜렷한 자취가 있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2000여 년 전 후대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뒤 잠긴 고조선의 문을 열려는 노력이 오늘 활발하다.
고려사
이것이 당시의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은 실체가 없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毛<8407>)은
고죽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전연·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BC 3세기에 편찬된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출처] :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 중앙선데이
[출처]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1회 ~ 5회 [김운회의 新고대사]|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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