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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 1만 km 대장정 Ⅱ [ 11회~17회]

문수봉(李楨汕) 2017. 12. 28. 20:15

'코리안 루트' 1만 km 대장정 Ⅱ [ 11회~17회]





11. 솔롱고스 부족과 동명성왕의 사연

- 태무진과 훌란 공주의 몸에도 솔롱 고스의 혈맥이 뛴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은 물과 목초가 풍부한 곳이다. 동명성왕으로 추정되는 고올리 칸, 칭기즈칸과 발해 공주 이야기 등의 무대이기도 한다. <김문석 기자> 



7월 21일 오후 4시께 에벵키 민족박물관에서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나로서는 17년 여를 애타게 찾던 ‘솔론’이라는 족제비과 짐승의 박제된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라 단연 특종감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이를 찾아 헤매온 현지인 성빈(成斌·70) 선생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간 서울대 이항 동물유전자은행장과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 박인주 교수(62)의 탐문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갓 박제된 동물 하나에 이렇게 매달린 것은 ‘조선’이 아침의 나라라는 전거도 전혀 없는 허황된 해석과 맞먹는,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라는 한국인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아주 긴요한 실물 자료기 때문이다.

몽골학의 거장 펠리오가 맨 먼저이를 문제로 제기했다. ‘솔롱고스’는 ‘솔롱고’의 복수로, 솔론을 잡아 모피(Fur) 시장에 팔아서 먹고사는 부족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몽골비사’에도 이런 식으로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칭기즈칸 ‘출생의 비밀’ 담긴 어원  



에벵키 민족박물관에 전시된 솔롱고스 박제. 한국인의 원류와 한·몽 관계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긴요한 실물 자료다. <김문석 기자> 



솔론은 누렁 족제비다. Baraga(바라가)가 Bar(호랑이)라는 명사에 ‘aga’가 붙어 ‘호랑이를 가진’이 되듯이, Solongo (솔롱고) 또한 Solon(솔롱)이라는 명사에 ‘go’가 붙어 ‘누런 족제비를 가진’이 된다. Solongo에 ‘s’가 붙어 복수가 되면 부족 이름도 된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원주민들은 애호(艾虎)나 황서랑(黃鼠狼)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정도로 가늘고 긴 족제비과 동물로 서식권역이 매우 넓어서 각종 생태 환경에 모두 적응 능력이 있다. 삼림, 초원(스텝), 하곡(河谷), 소택(沼澤)이나 농작물 생산지와 백성들이 사는 지대에서도 혈거(穴居)한다.

새벽이나 황혼녘에 먹이를 찾아 활동한다. 주된 먹이는 설치류 동물, 개구리류나 새의 알과 병아리 등이다. 내몽골 중동부 및 동북의 대부분 지역, 한국, 몽골과 시베리아 일대에 분포돼 있다.  

몽골에서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연원은 칭기즈칸의 ‘출생의 비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셀렝게 강 일대에 자리 잡은 메르키드족 가운데 우두이드 메르키드 톡토아베키의 아우인 예케 칠레두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약탈자는 칭기즈칸의 호적상의 아버지 예수게이이고, 약탈당한 여인은 칭기즈칸-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이다. 그는 물이 대흥안령 북서부 부이르 호수로 흘러드는 황하 강 지역의 처가에서 데릴사위로 있다가 그들의 관행에 따라 임신한 아내 후엘룬의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함께 귀가하던 길에 오논 강변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이다.

이 때문에 테무진의 생부는 예수게이가 아니라 예케 칠레두라는 것이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공인된다. 칭기즈칸이 몽골 혈통이 아니고 메르키드 핏줄이라는 얘기다. 다구르족 몽골학자 아르다잡 교수는 메르키드는 발해의 말갈(靺鞨)이라고 고증한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혈통적 소속은 발해 유민국, 곧 당시의 솔롱고스가 된다. 그런데 당시의 몽골 고원에서는 아내를 빼앗기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후에 예수게이의 호적상 아들 테무진도 20대에 예케 칠레두의 아우 칠게르 부쿠에게 아내 보르테를 뺏긴다.

당시에 약체였던 칭기즈칸은 맹렬하고도 노회한 외교로 부족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자신의 친아버지가 되는 예케 칠레두의 혈족 메르키드를 섬멸시키고 뺏긴 아내를 되찾는다. 그렇게 되돌아와서 낳은 아들이 장자 주치다.  

몽골 역사상 전설적 미인 훌란 공주  




한·몽 관계사의 첫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름투. 칭기즈칸과 발해 유민국의 훌란 공주가 총야를 지낸 이곳에 지금은 붉은 버드나무로 만든 오보(서낭당)가 서 있다 <최낙민 제공 

‘주치’란 손님이란 뜻으로 아내 자궁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로 관행상 칸 위의 승계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메르키드의 사생아’라는 치명적인 저주를 퍼붓는 가운데 소외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계승자로 선택된다. 칭기즈칸 생전의 일이다. 칭기즈칸과 그는 호적상으로는 부자 간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종형제 사이다.

 ‘몽골비사’의 관계 내용들을 간추려본 것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반렵반목의 메르키드 혈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 피가 흐르는 주치와 훌란 카툰의 아들마저도 철저히 소외시켰다.

애초부터 아예 멸족을 감행하며 제 혈통의 완벽한 부정을 통해 스텝의 온전한 순수 몽골 혈통으로 다시 나기 위해 일생을 오로지 끝없는 정복으로만 일관해야 했다. 이런 시각에서 예리하게 칭기즈칸의 일생을 천착해낸 몽골 영웅 일대기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의 불후의 창작품 ‘푸른 이리’다.

메르키드를 섬멸한 후 칭기즈칸도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했다. 더러는 딸은 자기가 갖고 어미는 아들에게 주기도 했다.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딸인 훌란 공주도 헌납됐다. 훌란 공주는 몽골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알려지고 있어 원말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려 여인이다. 당시의 솔롱고스는 발해 유민국이었고 발해는 외교문서 상에 고려로도 자칭했다.  

알려진 대로 훌란 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알탄톱치’는 놀랍게도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란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일컫는다. 차간은 ‘하얀’의 뜻으로 젖색을 상징하는 귀족 색깔이다. 즉 발해(渤海) 백왕(白王)이 되는 것이다.  

결국 훌란 공주는 발해(유민국) 공주이고, 그래서 솔롱고스(한국) 공주라고 썼음이 자명하다. 몽골인에게 메르키드-말갈은 타이가에서 활을 쏘아 사냥하고 전투하며 사는 숲속의 사람들이다. 메르겐(麻立干: Mergen)이라는 명궁수의 복수형에서 유래된 부족명으로 이족(夷族)이랄 수도 있다. 따라서 메르키드는 흥안령 북부나 스텝과 타이가가 혼재하는 셀렝게 강 일대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발해와 역사적으로 밀착 관계를 맺어왔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발해의 고급 문명을 체득하고 철의 주산지인 셀렝게 강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강력한 무력을 과시했다. 더군다나 이 지대는 솔롱고스 부족의 원주지로 알려진 곳이 아닌가. 솔론족은 바이칼 호 동쪽에서 헨티 산맥에 걸치는 지역을 원주지로 하면서 초원의 주변으로 동진하기도 하고 초기에는 주로 셀렝게 강을 타고 서진한 것으로 보인다. 훌란은 셀렝게 강과 오르홍 강의 합류지점에 살던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공주다.


근하지역은 북부여를 세운 고리국 터




몽골 도로노드 아이막 할힝골 솜온 숑크 타반 톨로고이에 있는 석인상. 현지 원주민들이 '순록치기 임금'이라는 뜻인 '고올리칸 훈촐로'로 부르는 이 석인상을 수미야바아트르 교수는 동명성왕으로 비정하고 있다. <도브도이 바야르 교수 제공 


‘알탄톱치’에서는 칭기즈칸의 본거지인 헨티 산맥 일대에서 이들을 공격하면서 ‘해뜨는 쪽’의 메르키드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쪽인데 동쪽을 쳤다고 해서 이를 오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 뜨는 쪽’이라는 관용구는, 코리족 시조 탄생 전설이 얽힌 바이칼호 알혼 섬이 이 지역 몽골로이드들의 주신을 모시는 중심지여서 그냥 따라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솔롱고스의 메르키드 부족이 헨티 산맥의 서쪽 셀렝게 강 일대에 있든 동쪽인 훌룬부이르 초원 근하(根河) 일대에 있든 그대로 ‘해뜨는’, 즉 ‘동명(東明)’이라는 형용구가 따라붙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솔론-솔롱고스의 본거지는 애초에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바이칼 호-셀렝게 강 일대에 주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21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교과서에 솔롱고스라고 찍어내기 전에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훌룬부이르 호 대만주권에서는 한국을 ‘고올리’라고만 불렀지 솔롱고스라는 호칭은 전혀 몰랐다.

7월 23일에 탐사단원들은 근하에 들어섰다. 영하 40~50℃까지도 내려가 호랑이가 못 사는, 대흥안령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근하는 ‘껀허‘로 발음되는데, ‘껀’은 물이 ‘깊다’는 군(gu:n)이 아니라 빛이 ‘밝아오다’나 물이 ‘맑아지다’라는 뜻의 게겐(gegen)이라고, 구몽문(舊蒙文)인 내려 쓴 꼬부랑 글씨로 적힌 위구르친 비칙 현지 팻말을 보고 에르덴 바타르 교수가 지적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르 가라크’-‘해 뜨는’이라고 하여, 솔롱고스라는 국명이나 종족명 앞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구와 동일한 내용의 이름이어서다.  

나는 이미 이 지역을 동명왕이 말치기 노릇을 하다가 도망 나와 동남하해서 북부여를 세운 고리(槁離: Qori=순록)국 터로 추정해본 터여서 더욱 그랬다. 껀허의 ‘껀(根)’이 ‘동명(東明)’의 뜻을 가지리라고 이전에는 미처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바이칼 동남쪽이 원주지였던 솔롱고스 부족에 붙어내린 관용구에서 비롯된 이름일 터다. 수미야 바아타르 교수가 1990년 5월에 몽골 문화사절단 통역으로 따라와 내게 건네준 첫마디가 부이르호 남쪽 호반에 선 고올리 칸 석인상이 바로 ‘솔롱고스’ 임금인 ‘동명’ 성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를 경악케 했다. 몽골 스텝엔 발도 들여놓아본 적이 없는 농경권 붙박이인 당시의 내게는 기마 양 유목민의 거리 개념이 있을 턱이 없어서다.  

실로 이때까지 필자는 바이칼 동남부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드 공주 훌란이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서 칭기즈칸에게 헌상되고 헤름투라는 곳에서 초야를 보냈다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먼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농경적 거리 관념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임을 유목 현지 답사 경력을 쌓아가며 점차로 깨달았다. 


훌란 공주가 나이도 다른 아내들보다 어려 앳되고 아름다웠겠지만, 필시 고국 또는 고향의 동족이어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해 전장에까지 늘 함께 간 것 같다. 1990년 초에 몽골에 살면서 나는 몽골 소녀들을 많이 만났다. 그녀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국 여자를 닮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너는 많이 닮고 너는 조금 닮고 넌 아주 안 닮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몇 번인가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녀들의 표정이 저마다 서로 달라지는 것을 알았다. 한국 여인을 닮았다는 게 아름답다는 말이 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훌란 공주의 전설적인 미모를 떠올렸음이리라. 많아 닮았다는 말을 들은 소녀는 나를 대하는 눈빛이 금방 달라지며 반색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온 이곳의 바르쿠족 몽골 처녀들도 그랬다.  
[출처] :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특별기획>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756호.2008.1.1. 

 


12. 불함-홍류 하느님과 유화 성모신앙

- ‘부르한’은 천손을 잉태하는 모태로 ‘모성적인 하느님’
 


대흥안령 타이가 지대의 자작나무 군락. 스키토·시베리안은 고원지대의 흰 자작나무와 저습지대의 붉은 버드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여겼다. 


7월 10일 정석배 교수팀의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지 발굴 현장을 답사하고 나서 나는 이를 다음 답사지인 바이칼 호반 톤타 유적의 그것들과 비교해 검토해보려 했다. 체르냐치노 고분군과 톤타 유적은 모두 돌로 무덤을 쓴 점에서 유사해보여서다.

그런데 7월 13일에 바이칼 호반에서 나린얄가 천제단으로 답사지가 바뀌었다. 나린얄가를 보면 톤타는 안 봐도 된다는 것이었다. 천제단 유적으로는 두 곳이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르한(Burqan)과 붉은 버드나무(紅柳) 때문이었다. 나는 일찍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비밀의 열쇠가 이 속에 숨어 있다고 보았다.   


바이칼 호 동남쪽으로 가장 길게 뻗어 있는 유명한 홍류 산맥 속 우드 강 발원지. 거기에 부르한의 원형이 제일 잘 보존돼 있다. 이는 울란우데 현지 학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정보다. 하지만 모랫길 때문에 헬리콥터를 띄워야 한다고 해서 그동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언저리만 맴돌았다.

매우 아쉬워하던 차였는데, 부이르 호수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뜻밖의 수확을 올렸다. 들개 떼들이 모여 쉬는 황량한 스텝에 멀리 점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원래는 차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길이었지만 버스 기사를 재촉해 초지로 진입해 가까이 다가갔다. 짐작했던 대로 홍류 오보(서낭당)였다. 

불함은 투르크-몽골어로 하느님 지칭 



페르시아의 신어(神魚) 카라. 에게해, 흑해와 카스피해 언저리에 분포한다. <김문석 기자> 


연해주에 여섯 번째로 발을 들여놓은 나는 ‘산해경’ 대황북경 17에 ‘불함유숙신지국(不咸有肅愼之國)’이라는 첫 기록이 있어서 ‘불함=홍류’의 원형을 숙신의 옛 땅 연해주에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2005년 겨울 답사 때 잎이 진 홍류의 가지 떼를 확인하려고 깊은 눈 속을 헤매다가 시간에 쫓겨 포기한 적도 있었다. 라즈돌로예 기차역에서 두만강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주민들의 정보만 확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불함(不咸)-부르한 신앙은 스키토·시베리안 원주민 사회에 보편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분포돼 왔다. 이는 투르크-몽골어로 하느님을 지칭하며, 이후에는 부처님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 신앙 대상이 어떤 생태권에서 어떤 원주민들이 어떤 역사 배경을 가지고 형성되었는지는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 이를테면 그 성격이 남성이나 여성 중에 어느 것에 가까운지, 함의하는 색깔이 ‘붉음’인지 ‘밝음’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탐구해본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인터넷 덕분에 2000년 초에 필자는 후진 투바에서 선교하는 이철성 목사가 현지에서 하느님을 ‘부르한’이라고 한다는 정보를 이메일로 보내줘 이내 이를 확인하게 됐다. 한성용 한국수달연구소장은 근래에 컴퓨터로 검색해서 ‘가야’라는 물고기의 분포지가 흑해 언저리고 그것이 육당 최남선이 제기하는 불함 문화 기원지와 일치함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순록과 더불어 물과 친연성을 갖는 문화권역에 소속되는 것들이어서 흥미롭다. 러시아 정교의 탄압으로 원주민의 샤머니즘이 잦아든 터전에 조용히 불붙기 시작한 알타이산의 신흥종교 ‘부르한이즘’이 금방 뇌리를 스쳤다. 육당은 이런 부르한 하느님 신앙권을 ‘불함문화권’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나름의 역사 배경을 지니는 광활한 스키토·시베리안 생태 무대에서 구체적인 발전 과정을 통해 각각 다양한 변화를 경험했겠지만, 그런대로 제 나름의 ‘맞춤형 하느님’ 개념으로 정립돼오면서 일련의 부르한 하느님 신앙권을 형성해나왔을 터다.  

이번 답사 중에 이에 관한 이야기 보따리가 줄줄이 풀려나오기 시작한 것은 물론 코리(순록)의 생태본지 무대인 북극해권으로 흐르는 장대한 두 강줄기, 즉 예니세이와 레나의 발원지라 할 바이칼 호에서다.

7월 12일에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부르한 중의 부르한을 모시는 바이칼 호 최대의 섬인 코리족 시조 탄생 설화의 무대 알혼 섬 부르한 바위에 도착했다. 부르한-하느님 바위가 자리 잡은 마을은 짐승들이 핥아먹을 염분이 바닥에 허옇게 깔린 ‘후지르’가 있는 후지르 마을이다.

스키토·시베리안 생태 무대가 다 그렇지만 바이칼 호수에서 한반도 천안 삼거리 버들공원에 이르기까지 물이 있는 곳이면 버드나무가 있고, 버드나무 떼가 있는 스텝-타이가면 대개 수렵-유목민들이 살아왔다. 버드나무 가지에는 흰색, 누런색, 그리고 붉은색이 있는데 저습지대의 붉은 가지 버드나무인 홍류 떼(Krasno talinik berba)는 고원 지대의 자작나무 떼와 함께 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됐다.  

눈이 덮인 설원의 잎이 진 홍류 떼는 복사꽃 핀 마을이나 피어오르는 불꽃을 떠올리게 하고 눈보다 더 흰 자작나무 줄기 떼들은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황금빛 햇살을 받아 타오르는 툰드라의 붉은 불길 같은 홍류 떼를 인격신화한 것이 부르한-유화(柳花) 성모일 터다.

한국에 버들아기와 같은 말이 있듯이, 버드나무는 이 지역에서도 대체로 여성을 상징한다. 고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버들꽃’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최희수 교수(연변대)는 그대로 만주인들의 ‘보드마마’ 모태회귀 신앙과 직관된다고 했다. 

‘유화’는 만주인의 ‘보드마마’와 직관  




위_훌룬부이르 대초원 한가운데서 발견한 홍류 오보, 아래_호눈(呼嫩)평원 설원의 붉은 버드나무. <김문석 기자> 

불함(不咸)을 육당이 ‘밝음’으로 해석한 것과는 달리, 같은 시대를 살다간 몽골의 거물 언어학자 에린친은 ‘몽골비사’ 초두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 관련 기사에 나오는 ‘부르한·칼둔’의 ‘칼둔’을 일종의 버드나무로 보아 ‘부르한(不咸)’을 이와 관련시킨다.

원래 시베리아 타이가에 살았던 몽골 겨레의 오보도 실은 처음에는 돌이 아닌 버드나무로 만들어서 버드나무 오보(borgasan oboo)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버드나무’ 자체를 ‘부르칸(Purkan)’이라고 하는 허저(赫哲)말 단어는 ‘부르칸’과 ‘버드나무-보드마마 신앙’이 직접 접맥될 수 있음을 웅변한다.

용왕의 딸 하백녀 유화가 그렇듯이 버드나무는 바로 물과 직관된다. 물을 뿌려주면 잘 자라는 순록의 뿔(전병태 교수 보고)이나 쌍어문의 가야 물고기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나 유화, 그리고 그 원조라 할 북부여 동명성왕의 어머니 고리(槁離)국의 시비가 그렇듯이 그들은 햇빛을 받아 천손족을 잉태한다.

추측컨대 알타이산지 파지리크의 얼음 공주 여사제도 같은 유형일 수 있다. 더 원천적으로는 옥룡이 껴묻거리로 출토되는 홍산문화 만기(BC 3500~3000) 우하량 여신 묘(廟)의 여신도 이런 장대한 스키토·시베리안의 여신-부르한 신앙과 접맥될 수 있다. 통천무(通天巫)인 여사제가 하늘의 햇빛을 받아 천손(天孫)을 잉태하면서 보드마마인 ‘부르한’으로 성육신화(成肉身化)하는 것이다.

부르한 신앙은 조선 겨레 따라 발전 


‘부르한’은 천손의 모태가 된다. 즉 ‘천손을 잉태하는 모태’로서의 ‘하느님’, 곧 ‘모성적인 하느님’이 된다. 작열하는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고대 이집트나 잉카의 태양 숭배처럼 부성적이며 공격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툰드라-타이가-스텝으로 이어져 발효 식품이 유난히 발달한 이 지역 나름의 햇살 아래서 생명을 품어 안아 마음을 삭이며 순리로 키워내는 구체적인 한 생명의 모태화한 하느님을 ‘부르한’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건조한 고원인 몽골리안루트 지역에서는 햇빛은 금빛이고 부르한 모태는 금빛을 하늘로 품어 천손인 알탄우룩(황금씨족)-김(金)씨를 잉태한다.

그래서 스키토·시베리안에게는 김씨가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손-임금 핏줄이라는 보통명사다. 물론 아쿠타도 칭기스칸도 ‘알탄우룩’(Altan urug: 황금씨족)-김씨다. 지금도 만주족 황손들은 아이신교로(愛新覺羅: 황금겨레)로도 쓰고 김씨로 표기하기도 한다.  

김알지도 당연히 그랬다. 햇빛이 여성의 육신에 내재화되어 천손을 잉태한 모태가 될 경우에는 ‘길림성야생식물지’(장춘, 1926)에서 ‘조선류’라고도 불린 홍류로 상징되는 보드마마가 되는데, 바로 이 ‘보드마마(柳母)’가 ‘부르한’인 이들의 모성 하느님이 된다. 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한 여인의 몸과 맘에 내재화해 회임한 모태로 다시 난, 모성적 사랑의 주체가 이들의 하느님일 수 있다.

따라서 이 경우의 ‘부르한’은 ‘밝음’이 아닌 ‘붉음’의 뜻을 갖는데, 그 붉음은 구체적인 생명 밖의 물리적인 불덩이와 같은 붉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 속에 내재화한 가장 붉은 사랑의 심정-곧 모성적 사랑-생생지심(生生之心)으로서의 ‘심정적 붉음’이 된다.

붉음은 무당 사제의 상징색이다. 박혁거세의 박(朴)도 ‘밝’이 아니고 ‘붉’이다. ‘붉을 혁(赫)’자로 혁거세(赫居世: 弗矩內=붉은 누리)를 누리는 사제계급의 성이어서다.

흰색은 유목민의 주식인 젖의 색깔이어서 지극히 존중은 되지만, 삶의 방편일 뿐 홍색처럼 주체 생명의 심정적 존재와 본질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서 부르한은 이들에게 굿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들에게 영원한 모태회귀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르한 하느님 신앙 전통은 순록의 주식이 나는 ‘이끼의 길’이라는 조선 겨레의 이동로를 따라 발전해왔다. 주유소가 없는 광야로는 차가 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스키토·시베리안과는 달리 조선 겨레의 주류 한민족은 한눈팔지 않고 주로 시베리아-몽골-만주-백두대간-태평양으로 진출해 ‘초원의 바다’와 ‘바다의 초원’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침략 세력의 강력한 파고에 맞서며 한반도라는 ‘산성섬 요새’를 기지로 삼아 북방 수렵유목문화의 유서 깊은 전통을 가장 순수하게 고도로 발전시켜냈다. 그 추동력의 핵심 축이 부르한이즘이라는 것을 이번 코리안루트 탐사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출처] :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특별기획>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757호.2008.1.8. 



13. 발해문명은 고대 동방의 중심이었다

-넓은 의미의 발해연안은 산동·요동·한반도를 포함한 동양의 지중해
 




요하 하류 140km에 걸쳐 있는 늪지대인 요택. 발해는 유럽의 지중해처럼 동양 문명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김문석 기자
 

경향신문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의 일원으로 요하·대릉하 일대를 탐사하게 된 것은 필자로서는 매우 연원이 깊은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1987년 들어 ‘88올림픽’을 앞두고 경색된 냉전체계가 다소 완화되어가는 분위기여서 1960년 후반부터 준비해온 북한 고고학 자료를 국내에 소개하려고 했는데, 당시 언론은 쉽게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 해 여름 ‘신동아’ 김종심 부장에게 먼저 부탁했으나 이를 소개하지 못했다. 이듬해 여름 중앙일보 이근성 부장에게 다시 부탁했다. 그래서 ‘월간중앙’ 1988년 10월호에 ‘첫 공개 북한 문화재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흑백 화보로 실었다.  

고대문화 중요한 유적·유물의 보고  




위_심양 요녕성 박문관에 전시된 금우산인 복원 모형. <김문석 기자>아래_요년성 영구현 금우산 동굴 유적 전경. <이형구 교수 >



 그런데 그해 11월 북한의 학술·문화 자료를 일부 수용하도록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자 이제는 언론에서 경쟁적으로 북한 자료를 소개하려고 들었다. 마침 경향신문과 인연이 닿아서 북한의 문화재 유산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경향신문과 협의해 북한뿐 아니라 중국 만주지방까지 아울러서 ‘한민족의 뿌리―남북한·만주 문화재 탐사―’라는 제목으로 1989년 신년호부터 매주 1회씩 전면으로 30회 연재했다.

1990년 이후에는 중국 경내 우리 역사와 관련한 문화 유적을 수십 차례 탐방하고, 2000년 이후에는 북한 역사와 관련한 문화 유적을 여러 차례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어찌 보면 중국의 요하·대릉하 일대와 한반도 고대 문화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에 뛰어든 계기를 제공한 것이 경향신문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 만에 경향신문이 다시 코리안루트 탐사에 필자를 초청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어떤 필연적인 인연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중국에서는 요하·대릉하 유역의 고대 문화를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표현했는데, 필자는 일찍이 ‘발해문명(渤海文明)’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유럽에서 지중해(地中海)를 중심으로 서양 문명이 탄생한 것처럼 동양 문명의 중심은 발해연안(渤海沿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문명, 즉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이 일어나 서양 문명의 요람이 되었듯이 발해(渤海)를 중심으로 발해 연안의 산동, 요동, 한반도를 동양 문명을 탄생시킨 하나의 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예전에 동양 문명의 중심을 황하 문명으로 보았는데, 황하도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 발해를 동양의 지중해라는 개념으로 보았다. 여기서 발해연안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山東)반도, 서부의 하북(河北)성 일대, 북부의 요녕(遼寧)성 지방, 북동부의 요동(遼東)반도와 동부의 길림(吉林)성 중남부, 그리고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한국문화 원류 밝힐 자료 다수 발견  




요동반도 금우산 동굴 유적에서 출토된 전기 구석기 시대 인류 화석 '금우산인'의 두개골. <이형구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까지 60여 년간 중국의 동북지방―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이른바 동삼성(東三省)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는 시기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고 있고, 각 시기마다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수없이 발굴 조사되었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발해연안 동북부, 중국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내몽골자치주 동남지역 포함), 길림성, 흑룡강성 지방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다.

발해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古朝鮮) 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필자는 일찍이 ‘발해연안 문명’, 즉 발해문명을 탐색하기 위해, 발해연안의 요서·요동지역, 만주지방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신석기시대 유적, 청동기시대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문헌)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를 토대로 1982년 6월 25일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원장 이종영 교수)에서 논문 초고를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은 ‘발해연안 북·동부지구(만주) 구석기 문화’라는 제목으로 1986년 ‘동방학지’ 52호에 게재되었다.  

발해연안의 요서·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는 한국 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1950년대 이후 30여 곳에서 많은 구석기시대의 문화 유적과 인류 화석(人類化石)이 발견되었다.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요동반도 영구현(營口縣, 지금의 大石橋市) 금우산(金牛山) 동굴 유적, 본계시(本溪市) 묘후산(廟後山) 동굴 유적이 있다. 이들 두 유적에서는 북경원인(北京猿人, 혹칭 北京原人)과 비교되는 곧선 사람(直立猿人)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동북아시아 구석기시대 고인류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금우산 유적에서는 전기 구석기시대(28만 년 전)의 인류 화석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금우산 인류 화석은 직립인(直立人)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금우산 직립인’ 혹은 ‘금우산인’이라고 명명했다.

 또 금우산 동굴에서는 불탄 목질과 불탄 재가 발견되었다. 금우산인 화석은 몽골 인종(蒙古人種; Mongoloid)의 고유 특징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인종을 이른바 아프리카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베이징대 뤼쭌어 교수, 1989).
 
1978년 압록강으로부터 100㎞ 정도 북쪽에 위치한 본계시 산성자촌 묘후산 동굴에서 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과 구석기가 발견되었다. 보고자(장전훙 교수)에 따르면 묘후산 유적에서 출토된 구석기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돌도끼(석부), 찍개, 긁개 등의 제작 기법과 유사하다고 한다(이형구 역, ‘묘후산’, ‘동방학지’ 64, 연세대, 1989).

발해연안의 중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릉하(大凌河) 유역의 요녕성 객좌현(喀左縣) 합자동 동굴 유적, 요동반도 묘후산 동굴 7·8층 유적, 그리고 해성현(海城縣) 선인동(仙人洞, 지금의 小孤山 동굴) 유적이 있다. 

발해연안 인류화석 한민족과 밀접  


요녕성 본계시 묘후산 유적에서


합자동 유적에서는 저부 4층에서 약 10만 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그 위 3층에서는 불탄 층이, 그 위 2층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각각 발견되었으며, 맨 위 1층에서는 신석기시대(홍산문화) 이래 청동기시대(하가점 하층문화), 서주·춘추시대 유물이 발견되어 한 동굴 안에서 계속 인류가 생활했던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예를 평양 부근의 룡곡 동굴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룡곡 유적의 아래층에서 신인 단계의 후기 구석기시대 인류화석 ‘룡곡인(龍谷人)’이, 위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각각 발견되어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진화·발전 단계를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된 현생인류(現生人類)의 신인 단계의 인류 화석은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발해연안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은 대릉하·요하·압록강·송화강·두만강(豆滿江, 圖們江)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는데, 그중 6개소에서 인류 화석이 출토되었다.

요동반도에서는 금우산 유적(위층)과 묘후산의 동동(東洞) 유적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1978년에 발굴된 압록강 하구의 요녕성 동구현(東溝縣) 전양동(前陽洞)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 전양인(前陽人)의 연대는 1만8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류가 곧 오늘날의 인류와 같은 이른바 현생인류다.  


일설에는 현생인류가 아프리카에서 퍼져나왔다고 하지만 고대 인류의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진화 과정을 원인(猿人) 단계부터 고인(古人) 단계를 거쳐 현생인류로 진화한 신인 단계, 그리고 신석기시대인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동방 인류, 즉 동이족(東夷族)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여 발해문명을 창조한다. 
 [출처] : 이형구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특별기획>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758호.2008.1.15. 




14. 한반도·만주 빗살무늬토기 동시 유행
 - 대릉하 유역 ‘사해·흥륭와’ 유적지서 출토… “신석기시대 두 지역은 동일한 문화권” 



 
8000년 전 주거지인 사해 유적에서 발굴된 용 형상의 돌무더기. 중국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에 해당한다. <김문석 기자>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이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류 최초의 혁명이다. 곧 토기에 물을 담아 집 안에서도 물을 이용하게 된 시기를 신석기시대라 하여, 석기만 사용하던 구석기시대와 구분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쯤 전에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발해연안(渤海沿岸)에는 강이 생기고 물이 모여들여 발해가 생기고 한반도 양쪽에는 서해와 동해가 생겨 오늘날과 비슷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어 쓰다가 어린이가 흙장난을 하듯이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붙이거나 띠를 만드는 따위의 덧대는 행위를 하고, 차츰 토기의 겉면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발해연안에서 이 시기가 대체로 지금으로부터 8000년 쯤 전이다.  


중국 ‘사해·흥륭와’도 발해문명권 


발해연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BC 6000년)쯤의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다. 발해연안에서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으로는 요하 하류의 발해연안 서부, 즉 황하 하류의 자산(磁山)·배리강(裴李崗) 문화, 북부의 대릉하(大凌河) 상류의 사해(査海)·흥륭와(興隆窪) 문화 그리고 신락문화, 광록도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 요동반도 압록강 하류 후와(後窪) 문화가 있다.

한반도에는 대동강 유역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 유역의 지탑리유적, 한강 유역의 암사동유적, 한반도 동북부의 서포항유적, 그리고 동해안의 양양 오산리유적,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유적 등이 있다. 이들 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기원전 6000~4000년쯤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가고,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베리아·몽골지역에서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경향신문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라는 기치 아래 탐사를 떠났다. 필자가 합류한 첫날 답사는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시 사해(査海)와 내몽골 적봉시 흥륭와(興隆窪)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중국에서는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국부적인 개념이다. 이들 문화는 요하뿐 아니라 대릉하 유역과 요동반도의 발해연안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사해·흥륭와도 대릉하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발해문명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해는 지금부터 8000년 전의 유적이다. 1982년 중국 정부가 전국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그때 발견되었다. 흥륭와는 지금은 내몽골이지만 1979년 재편되기 전까지만 해도 적봉도 요녕성이었다. 


용 형상 “중원문화의 시작은 동방” 


 
사해유지발문관에 전시된 빗살무늬토기와 옥귀고리. 한반도의 토기·옥 문화와 직접 연결된다. <김문석 기자> 


사해와 흥륭와 문화는 황하 하류 이른 시기의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다. 황하 하류의 자산·배리강 문화는 지금으로부터 8000~7000년 전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해·흥륭와지역은 1994년 전국 단위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고대 문명은 황하문명이라 부르는데, 더 넓게 보면 장강(長江) 하류, 광동성 주강(朱江) 유역, 신강성(서부) 일대, 황하 유역, 요하 유역 문명권으로 나눈다. 필자는 황하 하류와 요하 유역, 한반도의 발해연안을 포괄하여 발해문명권으로 보고자 한다.

사해 유적은 신석기시대 대표적인 문화 가운데 하나로 빗살무늬토기가 특징이다. 그 전에는 자산·배리강의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았는데, 사해와 흥륭와에서도 이른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다. 

두 번째는 옥기(玉器)였다. 중국은 옥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귀고리 장식품인 옥결( 玉 )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이 이와 똑같다(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도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의 옥결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옥결은 일본에서도 나왔다. 

세 번째는 용이다. 중국은 용 토템이고 동이족은 새 토템이다. 중국에서는 중원에서 용 신앙이 있었는데 요녕에서 용이 나왔다.
만리장성은 중화민족의 마지노선이었는데 연산산맥(만리장성) 넘어 사해에서 용이 나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사실 명나라까지는 만리장성 이동은 동이(東夷)라고 했다. 그런데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 사해에서 나오면서 이곳이 동양문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사해 유적은 요녕성 부신시 대릉하 상류 사해촌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 여신상이 세워져 있고,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 )’이라고 씌어 있다. 이곳을 중화제일촌이라고 명명한 것은 중국 최초의 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사해 유적은 주거유적 60여 기가 도시계획된 것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아주 규격화되어 있다. 방형주거지 사이에 주먹만한 할석(割石)으로 덮은 19.7m에 이르는 용의 형상이 발견되었다. 이 용의 형상은 지하 1.2m 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들어올려 지상에 같은 모양으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사해 유적의 용 형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원 문화의 시작이 중원이 아니라 동방에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해는 농업 생산 위주의 씨족 부락이었다. 용은 농경문화에서 숭배의 대상이다. 사해 유적에서 이런 용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킨 최초의 사람이 동이인(東夷人)이다. 

흥륭와 유적은 행정상으로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寶國吐鄕) 흥륭와(興隆窪)촌이다. 지리상으로는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지류인 망우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의 지표조사 때 발견된 유적으로, 1983년 발굴조사 시 170여 기의 반지하식 집자리로 구성된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되었다.  

흥륭와문화 농업경제 중심 사회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이곳에서 많은 토기와 석기, 옥기가 발굴되었다. 밑바닥이 없는 토기인 통형도관(筒形陶罐)도 나왔는데, 이는 무덤 주위를 두르는 장식으로 일종의 종교시설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나온 옥결, 돌보습 등이 특징이다.
이 유적은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10대 고고학 발견의 하나로 20세기 중국 고고학의 대발견이고, 중화 시조의 취락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곳을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향신문 답사단의 일원으로 흥륭와 유적을 찾아 감회가 새로웠다. 흥륭와는 필자가 이제까지 3번 답사를 시도했는데 두 번 실패하고 이번에 비로소 성공했다. 직접 실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흥륭와는 사해 유적으로부터 100㎞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사해와 흥륭와는 대릉하 상류다. 문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흥륭와 유적은 간혹 홍산문화의 유존이 흥륭와 문화층을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흥륭와 문화와 홍산문화의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주로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채색토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는 주로 빗살무늬 계통으로 지(之) 자형 빗살무늬와 인(人) 자형 빗살무늬, 그리고 사선 빗살무늬 및 교차형 빗살무늬 등이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늬는 지(之) 자형 빗살무늬다. 교차형 빗살무늬는 삿자리를 짜듯이 교차하면서 베푼 삿자리형 빗살무늬로,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심선문(深線紋) 빗살무늬와 매우 유사하다.

흥륭와 유적 출토의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이 가는 모래가 섞인 표면이 거친 붉은색 혹은 갈색계의 토기로, 그릇 모양은 주로 큰 독(罐)류와 단지(鉢)류 등이다. 그리고 이들 토기의 소성(燒成) 온도는 그리 높지 않고, 모두 수제다. 

흥륭와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이외에 소량의 석편석기와 타제석기 및 마제석기류의 석마봉, 석마반, 반상기 등 곡식 가공 도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밖에 낚시 바늘, 골추(骨錐) 등 어로기구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흥륭와 문화는 발해연안 서남부의 자산·배리강 문화와 마찬가지로 농업 경제 생활을 위주로 하면서 수렵 생활을 겸하는 사회로 추정된다
 



 


국내 언론에서 처음으로 답사에 성공한 흥륭와 유적에서. 필자(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두번의 실패 끝에 이번에 탐사취재단의 일원으로 비로소 이 유적을 찾게 됐다. <김문석 기자>


흥륭와 유적의 집자리에서 출토된 목탄을 이용한 C¹⁴측정 연대(미작수륜교정)는 5290±95 BC로 나왔다. 이의 나이테(수륜) 교정 연대는 기원전 6000~5000년으로 편년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연대로 발해연안 서남부 지역의 자산·배리강 문화 연대와 같은 시기다.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연안 북부의 신석기시대 문화 가운데 사해 문화와 함께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따라서 흥륭와 유적은 사해 유적과 함께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을 찾는 데 매우 귀중한 유적이다.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발생은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쯤에 출현하는 동유럽이나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앞선다. 그뿐 아니라 시베리아의 빗살무늬토기는 무늬를 새기는 방법이나 그릇 모양이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와는 계통이 서로 다르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유형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오랫동안(기원전 6000년쯤부터 2000년쯤까지) 유행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의 동질성은 민족의 동질성과도 통한다. 
 [출처] : 이형구 :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특별기획] 뉴스메이커 제759호.2008. 01.22. 




15. 발해연안의 돌무덤과 동이족 후원
-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서 돌널무덤 발견…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로 유입 추정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 유적 전경. 한반도에서 흔히 볼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석상식 석관묘가 있으며,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 유적 전경. 한반도에서 흔히 볼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석상식 석관묘가 있으며,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무덤은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신석기시대의 인류와 달리 주로 동굴 생활을 했는데, 동굴 가족의 일원이 죽으면 동굴 안의 방바닥을 파고 흙을 덮은 뒤 돌을 주워모아 주검을 덮었다. 어떤 경우에는 주검의 주위에 붉은 흙을 뿌리기도 했다. 이 같은 행위는 곧 영생을 바라는 산 자의 기도다.

신석기시대 초기에는 땅을 파서 매장한 다음 흙으로 덮는 흙무덤(토광묘)을 사용했으나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면 인간의 주검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돌을 둘러쌓아 축조했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인 동이족(東夷族)에게는 돌을 사용해 인간의 주검을 보호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이 돌무덤(석묘)이다.  


‘동이족’은 중국 측에서 보면 동방민족을 지칭하는 것이며, 항상 중국 민족과 대치했다. 동이족은 발해연안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주로 산동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지방과 한반도의 고대 민족을 일컬었다. 

동이족은 시신을 매장할 때 다른 민족과 달리 주로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돌무덤(석묘)이다. 돌무덤 중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넛널무덤(석곽묘), 돌널무덤(석관묘), 고인돌무덤(지석묘), 돌방무덤(석실묘) 등이 있다. 

‘북방전래설’과 배치되는 고고학 성과 



 


오른쪽_발해연안 돌무덤 분포도. <김문석 기자>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인 돌널무덤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땅을 파고 지하에 판자와 같은 널찍한 돌(판석)을 마치 상자 모양으로 널(관)을 짠 이른바 수립식(竪立式) 돌널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판석을 중첩하여 네 벽을 쌓고 뚜껑을 덮은 이른바 첩체식 돌널무덤이다.

돌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오랫동안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남쪽으로는 일본의 구주지방과 유구열도에까지 분포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멀리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돌무덤이 발견되어, 지금까지 한반도의 돌무덤의 기원을 청동기시대에 시베리아로부터 내려왔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한반도의 돌널무덤도 북방에서 전래되었다는 ‘북방전래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동북아와 인접한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적석총 계통인 이른바 열석묘(列石墓)와 돌널무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한·일 학계에서는 한반도 돌널무덤의 기원을 시베리아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룬 고고학적 성과는 재래의 기존 학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널무덤과 그 구조와 축조 방식이 동일한 돌널무덤 양식이 발해연안에서 널리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이들 돌널무덤이 축조된 가장 이른 시기가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83~1985년에 중국 요녕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紅山文化) 시기의 적석총 유적에서 돌널무덤을 발견하면서 비롯했다. 1908년 일본인 도리이 료죠가 처음으로 조사한 후 홍산문화는 1935년 일본 동아고고학회가 적봉시(赤峰市) 홍산후(紅山後)에서 발굴하면서 비롯했다.

 발굴 당시에는 ‘적봉제Ⅰ기문화’라고 했다가 1954년에 윤달(尹達)의 ‘중국신석기시대’에서 홍산문화라고 고쳐 불렀다. 홍산문화는 돌무덤 이외에 채도를 비롯하여 갈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세석기 및 농경 도구를 대표적인 문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분포 지역으로는 발해연안의 중국 내몽골 동남부, 요녕성 서부, 하남성 북부, 길림성 서북부 요동반도, 한반도 등이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4500년~3000년으로, 그 후에는 부하문화·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진다.  

이들 문화는 만리장성 이동 지역이다. 발해만 북쪽에 유입되는 대릉하(大凌河)는 발해연안 고대문화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강이다. 이는 곧 발해문명이 잉태한 곳이다. 또한 대릉하 유역은 고대 한국 문화는 물론 고조선 시대의 역사 전개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대릉하 유역을 탐방했다. 대릉하 유역 중·상류지역인 능원(凌源)·건평(建平)·객좌(喀左)현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홍산문화 시기의 돌무덤떼(石墓群)를 탐사하기로 했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건평현과 능원현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우하량(牛河梁) 적석총 유적이다. 

이 유적은 북경-심양-단동-부산을 잇는 철도가 지나는 곳이고, 북경-심양 고속화 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유적은 철도를 놓을 때 많이 훼손되었고, 고속화 도로를 놓을 때도 돌무지무덤의 뒷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1981년 처음으로 지표조사를 하고, 198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유적 부근에는 요녕성 고고문물연구소 우하량공작참(工作站)이 설치되어 유적 보존과 발굴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수립식 석관묘는 한반도 방식과 유사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의 석관묘를 조사하는 필자. <김문석 기자> 


우하량 적석총의 대표적 유적으로 제2지점 적석묘지가 있다. 이 제2지점 적석묘지 가운데에서도 제1호 적석총은 3단형 계단식 적석총(일종의 피라미드)을 만들어 중앙의 석곽 안에 석관이 놓여 있으며, 그 석관에서 용형옥결(일종의 곡옥)이 나왔다.
제1호 적석총 유적의 좌우로 여러 적석총이 있고, 서쪽에는 27기의 석관묘가 있다. 이들은 수립식과 첩체식이 함께 분포되어 있는데, 판석을 세워 쌓은 이른바 수립식 석관묘는 한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동기시대의 이른바 석상식(石箱式) 석관묘와 같은 묘제(墓制)다.
묘 안에는 주로 옥기가 수장되었으며, 묘 주위에서는 지(之) 자형 빗살무늬토기와 채도가 발견되고 있다. 이 주인공은 고국(古國)의 수장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단의 석축과 그 안에 돌곽(석곽)을 두고 다시 돌널을 묻은 석관묘는 고구려 적석총까지도 그대로 이어진다. 중국 길림성 집안 국내성 일대에도 계단식 적석총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서울 송파구 석촌동 한성 백제 시기의 적석총도 마찬가지로 계단식 적석총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서에서 요동을 지나 한반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도 시기와 과도 지점을 거쳐서 한반도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우하량 제2지점 1호 적석총의 동쪽에 있는 적석유구는 발견 당시 원형 적석총으로 추정했는데, 최근에는 제단(祭壇)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원형 적석유구는 최근 경남 진주시 남강유역 옥방(玉房)유적에서 발굴된 청동시대 원형 적석유구와 매우 유사하다.  

1990년대, 우하량 제2지점에서 남쪽으로 1㎞ 떨어진 구릉에서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금자탑(金字塔)이 발견되었다. 폭 60m의 사각형 기단에 7층까지 높이 10m 정도인 무덤과 전면에는 제단이 설치된 제사 유적이다. 바깥은 돌로 쌓았고, 안에는 흙으로 쌓았다. 이곳에서 통형도관을 발견했는데 아직 주요 부위는 발굴하지 않은 채로 있다. 

1982년, 대릉하유역 동산취(東山嘴) 유적의 발굴은 요녕성 경내의 홍산문화 유적에 대해 진행된 첫 번째 정식 발굴이었고, 수확도 예상 밖으로 컸다.
이 유적은 객좌현 현성 소재지(大城子鎭)에서 동남쪽으로 4㎞ 지점의 대릉하 서안 산등성이의 정 중앙은 평평하게 돌출된 대지(臺地)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남북 길이는 약 60m이고, 동서 너비는 약 40m이며, 강바닥에서 50여m 높이에 있으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돌무덤 기원은 발해연안’이 타당
 


 


우하량 제13지점 금자탑(피라미드) 전경 <이형구 교수> 



유적 내에 돌로 쌓은 석체건축유구가 일정한 분포규율을 나타내고 있다. 중심부의 북부는 사변에 돌을 쌓은 대형 방형 건축 유구의 동서 길이는 11.8m이고 남북 너비는 9.5m이다. 중심부위 남부에는 직경 3m 정도의 돌로 쌓아 만든 2기의 원권식단지(圓圈式壇址)가 있는데, 이를 제단 혹은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동산취 재단의 C¹⁴ 측정연대는 BC 3500년으로 측정된다.

최근 2001년에 내몽골자치구 동남쪽 적봉시 초모자(草帽子) 제사 유적에서 동산취 유적과 비슷한 유형의 제사 유적이 발굴되어 이번 기회에 답사해 확인하였다. 제사유적 안에는 적석총이 있고, 그 안에 석관묘가 있다. 이런 유형은 요동반도나 압록강 유역에서도 보이며, 고구려 초기무덤에도 방형 제단이 있다. 이 초모자 유적은 BC 3000년 전 유적이다.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적석총이나 동산취 적석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500쯤이고 적봉 초모자 석축 제단의 연대가 기원전 3000년쯤으로 추정되는데 이 연대는 한반도 안에서 발견되는 돌무덤이 기원전 700년쯤에 시베리아로부터 몽골·만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퍼져 내려왔다고 하는 종래의 ‘한국고고학개설’류보다 훨씬 앞서는 시기다.

그뿐 아니라 다량의 돌무덤이 발견된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C¹⁴ 측정연대가 기원전 3500년쯤으로 나오는데 반해 시베리아의 돌무덤 연대는 기원전 2500~1200년쯤으로 추정된다.

대릉하 유역 우하량 원형 적석유구의 축조 연대는 시베리아 알타이지방의 페시체르킨 로크 Ⅰ(Peshcherkin LogⅠ) 원형 적석유구보다 무려 1500년 내지 1000년이나 빠르다. 그리고 대릉하 유역은 지리적으로도 시베리아보다 가깝다. 그러므로 돌무덤의 기원을 발해연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장례를 주관하는 성소가 산상이나 사막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연해지구나 강 연안지역에 있다. 이것은 바로 고대 인류의 생활 터전이 물과 밀접한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 인류가 남긴 문화의 유산이 산악이나 사막, 한랭한 지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동방문명의 중심인 발해문명은 따뜻한 발해연안이지 추운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아니다. 
 [출처] : 이형구: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특별기회], 주간 경향, 뉴스메이커, 제760호, 2008.1.29. 



16. 한반도 청동기문화는 어디서 왔는가

 -대릉하지역 동방 최초의 청동기 창조 흔적… ‘시베리아서 전래했다’ 가설 재검토해야



 

요녕성 건평현 우하량 제13지점 금자탑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발명이 신석기시대의 토기라면 최대의 발명은 청동기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으로 고대사회의 산업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청동기라는 금속의 발명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로부터 초기 국가 형태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문화영역을 한반도에 국한하여 그 기원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많이 왜곡된 실정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동기에는 동물 무늬가 보이고 아연(Zn)이 함유되었다 하여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Karasuk) 문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인류까지도 BC 8~7세기께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베리아 기원설’은 식민사관 



 

BC 3000년쯤의 원시 청동기 제련 과정을 밝힐수 있는 토제 도가니와 풀무관 조각(작은 사진)이 발견되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이형구 교수>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특설강좌 교재를 비롯하여 여러 공간물에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연결시키고 특히 최근에 대중용으로 출판된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에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BC 10세기께 중국의 동북지역을 비롯하여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문화와 서쪽에서 퍼져오는 스키타이문화 그리고 내몽골의 오르도스문화를 조합한 이른바 미누신스크-스키타이-오르도스 복합문화와도 일부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의 빗살무늬토기는 물론 청동기까지도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는 ‘시베리아 기원설’의 계기는 일본 학자들이 마련했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처음으로 발표한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다.

 그리고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동경 및 청동기 동물 문양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했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주장은 그 자체로 식민사관이나 다름없다.  

지금쯤은 이러한 문제점을 모두 포함해서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편견이나 선입관이 없이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광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경향신문 창간 기념으로 지난해 여름 ‘코리안루트 대장정’에 올랐다.

우리가 우선 찾은 곳이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 있는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유적이다. 지난호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에서 출토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관련 유물을 우하량 공작참(工作站) 진열실에서 청동기를 제련했던 여러 토기제 공구를 확인하고 발견 현장을 답사했다.

1987년 우하량 제2지점 제4호 적석총의 정상부에 부장(附葬)된 소묘에서 동환식(銅環飾) 1점을 수습했는데 이의 감정 결과 홍동질(紅銅質)이라고 판명되었다고 한다.

동유럽·이집트 청동기시대와 비슷  


발해연안 북부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인간이 처음 발견한 금속은 붉은색의 순구리[홍동(紅銅), copper]였다. 자연계의 천연동광(天然銅鑛)을 채굴하여 1000도 이상의 높은 열을 가해 순구리를 제련한다. 순구리는 불그스름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일명 순동(純銅)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구리는 비교적 연하고 무르기 때문에 생산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1987년 우하량 제13지점의 전산자(轉山子)라고 하는 구릉의 끝자락에 서남향으로 동서, 남북 100m 정도의 대지에 직경 60m, 높이 10m 정도의 피라미드(金子塔式)의 대형 적석총이 발굴되었는데, 금자탑의 정상부에서 청동을 제련하던 도가니편이 발견되었다.

이 금자탑은 홍산문화 시기(BC 4000~3000)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청동환식이나 도가니편이 북경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 교수가 중국 최초의 청동기 유물로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아직 국제학계가 공인하기 전이라서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나 1987년 내몽골 오한기(敖漢旗) 서대(西臺)유적에서 작은 청동장식을 주조했던 토기 거푸집인 도범(陶范)이 출토되어 관심이 집중된다. 길이와 폭이 5~6㎝ 합범(合范)이다.

이 유적에서 중요한 것은 청동 제품을 만들면서 생긴 찌꺼기(슬래그)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북경과기대 한루빈 교수는 우하량에서 발견한 청동제조 도가니, 슬래그 등을 근거로 이 시대를 홍산문화 중·말기인 BC 3000~3500년으로 보았다.

기왕의 BC 2000년설보다 1000~1500년 앞선 것으로서, 동유럽이나 이집트의 청동기과 맞먹는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릉하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다.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청동제조 공구와 청동 슬래그가 출토되기 전까지는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출토한 홍동제 장식이 발해연안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물이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에서만 보이는 붉은색을 띤 홍동으로 만든 장식 2점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는 대개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초기 단계의 청동기로 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리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에서 청동 제련 덩어리 4점이 출토되었는데, C¹⁴측정 연대가 기원전 2000년쯤으로 검출되었다. 이는 대성산 유적의 홍동보다 한 단계 발전한 초기 청동기다. 청동기는 구리(Cu)를 주성분으로 주석(Sn)과 납(Pb)을 합금한 것이다.

요동반도 우가촌(牛家村) 적석총에서는 청동 화살촉, 청동 단추, 청동 고리, 청동 낚시바늘 등 소형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우가촌 유적의 C¹⁴측정연대는 BC 1500~13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동반도 남단 양두와(羊頭窪) 유적에서도 청동제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BC 15세기쯤으로 BC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한반도에서는 평북 용천군 신암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도자와 청동 단추가 대체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요녕성 객좌현 고산 북동유적에서 궈다순 전 요녕성 문화청장과 필자(오른쪽) 


BC 11세기께 은(殷)나라가 망하자 그 유민들은 연산(燕山) 산맥을 넘어 고향인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으로 돌아온다. 그때 등짐을 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청동 예기(제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예기는 씨족의 상징이다. 은나라의 예기를 발견한 대표적인 유적이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 유적이다. 그런데 100년 정도 지나자 전형적인 예기가 쓰이지 않고 현지에서 제작한 토착화한 기물들이 나온다. 은나라의 전형적인 예기가 100년 정도 지나자 새로운 생활용기로 바뀐다.  

일찍이 홍산문화를 창조했던 발해연안 북부의 동이(東夷)가 BC 17세기께 서남쪽으로 남하하여 은을 세우고, BC 11세기께 주(周)나라에 의해 망한 뒤 일부 은나라 유민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귀환한다. 객좌현 일대의 청동기를 보면 처음에는 은나라의 전형적인 예기가 나온다. 은나라 유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점차 토착세력(동이)과 함께 새로운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다.

과거 학설은 은의 기자(箕子)가 연산 산맥 동북으로 넘어온다고 믿지 않았으나 1945년 이후에는 객좌현·조양시 같은 대릉하 유역에서 많은 양의 은말 주초 청동기가 발견되고 그중에는 은나라 기자(箕子)와 관계되는 청동기도 출토되고 있어, 1970년대 후반 필자는 이를 주목하고 중국 고대 사서에 보이는 기자와 연계해서 연구한 바 있다.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는 이 시기의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주나라는 BC 771년 유왕이 죽고, BC 770년 평왕이 낙양(洛陽)으로 동천하면서 동주시대가 막을 연다. 이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전쟁의 시대가 500년 이상 이어진다. 제사 지낼 틈이 없을 정도로 전쟁이 계속 이어졌고 서서히 예기가 나오지 않게 된다. 중국의 이러한 변화가 발해연안에까지도 변하게 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시베리아보다 발해연안이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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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녕성 조양시 십이대영자 출토 발해연안식 비파형 청동단검과 기하문 다뉴문경(위부터). <김문석 기자 


그래서 이 무렵에 예기가 무기로 바뀐 대표적인 유물이 발해연안식 청동 단검이다. 이와 같은 유물로는 BC 9세기~BC 8세기께 조양시 십이대영자, 영성현 남산근 유적에서 보이는데 예기는 토착적인 실용기로 변하고, 무구와 무기가 출현한다.

100~200년 지난 뒤 발해연안식(비파형) 동검을 만든 이는 은나라 유민과 토착세력(동이)이다. 전쟁을 일삼는 시기로 예제가 무너지고 전재 위주의 사회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고대 문화 중에는 청동기시대의 채도·흑도를 비롯해서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유구석부(有溝石斧)·도작기술(稻作技術) 등 농경문화가 발해연안을 통하여 유입되었다는 설이 거의 지배적인데도 불구하고, 유독 청동기만은 시베리아에서 전래되었다고 믿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비하여 지척지간일 뿐 아니라 청동기문화가 극성하고 있는 발해연안을 피하고 하필이면 시베리아의 한대지방과 몽고지방의 고비사막을 지나 대흥안령을 넘어 발해연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 한국 청동기시대 문화의 특징을 ‘스키토-시베리언’ 계통의 동물 모양을 즐겨 쓴 점을 강조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경북 영천 어은동 출토의 동물 문양 청동 조각을 제시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뿐 아니라 스키토-시베리언 계통의 청동기 유물 중에서도 어떤 유형이 유사한지 구체적으로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해연안 청동기에 아연이 함유되었다는 보고를 본 적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동기에 ‘아연 함유 운운’하면서 시베리아 청동기에 아연이 없기 때문에 시베리아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초기 청동기 연대가 BC 3000~2000년쯤이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가 반출된 유적의 연대도 기원전 1500년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청동기문화의 연대는 BC 12~8세기의 시베리아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의 연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우리 민족과 문화를 시베리아니, 미누신스크니, 카라스크니, 스키타이니, 오르도스(Ordos)니, 몽골이니 하는, 오로지 외래적(外來的)인 요소에서 찾으려는 시각은 지난 시대의 잔영과 같은 선입견으로 보인다. 이제는 이를 청산하고 발해문명(渤海文明)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이형구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특별기획] / 뉴스메이커 제 761호 ,2008. 02. 05 


17. 홍산문화 여신상은 고대종교 유적
-동방의 신앙과 초기 문자, 한반도서 출토된 인물상도 여신 암시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이와 같은 경외사상은 곧 고대인의 종교였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행사 중 하나가 제사다. 고대인의 제사 행위로는 조상에 대한 제사, 신에 대한 제사, 하늘에 대한 제사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인간과 가장 밀접한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조상에 대한 제사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갖는 예(禮) 중에서 가장 기본으로 조상숭배사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주검을 묻는 무덤을 종교의 장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예의 전초이기도 하다



 

동방 최초의 여신상(작은사진은 복원모형)이 발견된 요녕성 건평현 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 /김문석기자 


동방에서 최초의 여신상은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 요녕성 건평현 우하량의 홍산문화 시기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소조 여신상이다. 이번 ‘코리아루트 대장정’ 탐사 중에 여신묘의 여신상을 직접 보았다.  

인간이 모시는 제사의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신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은 인간의 탄생과 안녕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모신이다. 지모신이란 ‘대모지신(大地母神)’이라고 하여 대지를 주재하는 여신을 일컫는다. 지모신 숭상은 물론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여신은 고대사회 대지와 풍년 상징 


여신은 고대 사회에서 생육을 상징할 뿐 아니라 대지를 상징하고 풍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모신이야말로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신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했고, 아버지를 하늘에 비유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모신을 제사지냄으로써 만물이 소생하고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었다. 

서요하 상류의 내몽골 적봉시 서수천 유적에서 발견된 토르소 형식의 홍산문화 시기의 소조 여인상이 있다. 그리고 요동반도 여대시 곽가촌 유적(위층)에서 출토된 소조인면에서 보이는 치켜진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의 표현도 주의해서 볼 만하다. 


한반도에서는 함경북도 청진시 농포동 유적과 옹기군 서포항 유적에서 소조 인물상이 발견되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농포동 출토 인물상은 머리 부분이 깨져 없어졌으나 가슴에 팔짱을 낀 것처럼 표현하고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를 퍼지게 만듦으로써 여신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서포항 유적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출토된 여인상은 얼굴 부분이 깨져 없어졌는데, 유방을 표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넓죽한 얼굴의 아래 부위에는 구멍을 파서 입을 표시했고 굵직한 목 선이 귀밑까지 와서 귀의 표현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리고 굵은 목이 어깨로 흐르면서 가슴의 유방을 볼록하게 표현했는데, 그 수법이 매우 희화적이다.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는 홍산문화 시기인 기원전 4000~3000년께 이와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돌널무덤과 옥기, 여신묘와 여신상 그리고 석축제단과 임부상도 동방에서 가장 오랜 종교 유적이고 신앙의 유물이며 위대한 예술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말하길 ‘옥은 돌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石之美者)’을 가르킨다고 했는데,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타산지석가이위착(他山之石可以爲錯)’이라고 하였다. ‘옥은 다른 돌로 갈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부터 옥을 완성하는 과정을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유했고, 그 완성된 옥을 군자(君子)의 다섯 가지 덕목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옥은 장식으로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매장함으로써 영생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발해 연안 사람(동이족)들은 무덤(주로 돌무덤)에 시신과 함께 옥을 매장한다


갑골은 길흉 판단하는 점복활동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옥은 중국 요녕성 부신시(阜新市) 사해(沙海) 유적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옥결(玉 )이다. 일종의 귀고리다. 이와 같은 유물은 발해연안을 위시하여 중국의 동남 연안 지구 그리고 연해주와 일본에도 분포되고 있다.

발해연안에서 출토된 옥결이 가장 이른 시기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文岩里) 유적에서 신석기시대의 옥결 한 쌍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경북 청도군 사촌리(沙村里)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옥결 1점이 반파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사해유적에서는 용의 형상이 출현하는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용의 형상이다. 옥으로 만든 용의 형상은 홍산문화 시기에 발해 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현한다. 동방 최고의 용의 형상이 화하족(華夏族)의 본향인 황하 유역의 중원 지방을 크게 벗어난 지점인 만리장성을 넘어 한민족과 가까운 동이지역에서 형상화했다.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장식은 대릉하 유역에서 서남향하여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크게 유행했다. 한편 동남향으로 내려가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도 돌무덤의 용 모양 옥장식이 출토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곡옥(曲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돌무덤에서 곡옥이 출토되는 것은 대릉하 유역의 돌무덤에서 용 모양 옥 장식이 출토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일본에서도 구주 지방과 관서 지방에서 곡옥이 출토되고 있다. 

발해 연안 인류(동이족)들은 옥을 가짐으로써 영생불멸한다는 생각과 옥을 예제화함으로써 당시 고대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 특히 용은 고대 농업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는 신탁(神託)으로 통치하던 사회다. 백성은 지혜가 출중하고 용맹한 사람의 출현을 갈망하고 그와 같은 인물을 추대하여 지도자로 뽑는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부족함이 많아,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꼭 인간을 다스리고자 할 때는 으레 한 인간에게 신령이 하강하여 그로 하여금 신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때 신탁을 위임받은 인간은 온갖 방법을 다하여 신으로 위장하고 도구를 사용해 신을 부르고 계시를 받아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해 신을 대신하여 집행한다.

갑골(甲骨)이라 함은 동물의 견갑골(肩胛骨)이나 거북이의 복갑(腹甲)의 한 면에 불을 지져 다른 한 면에 나타나는 조짐을 보고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점복활동(占卜活動)을 일컫는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갑골을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영문으로는 다같이 오라클 본즈(Oracle Bones)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종교신앙(宗敎信仰)으로, 이와 같은 행위는 고대사회에서 점복을 통하여 신을 불러들이고 신의 뜻에 따라 지배자가 지도체제나 권력 또는 권위를 장악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갑골(복골)이 출토된 유적은 발해 연안 북부지구 서요하 상류의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이다. C¹⁴측정 연대는 BP 5300±145년이다. 이후 하가점하층문화(BC 2000~1500)에서 갑골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서남향하여 은대(殷代, BC 17C~11C)에서 가장 많이 유행했다.

은상(殷商)에서는 전기에 무자갑골이 성하고, 후기에는 유자갑골(有字甲骨)이 성행한다. 이와 같은 갑골문화는 발전과 더불어 갑골문자(갑골문)가 형성되고, 마침내는 한자(漢字)로 완성되었다. 

부호문자는 한자 연구에 중요 자료 


이는 곧 종교신앙이며 바로 고대 사회의 정치다. 은상의 정치체제가 제정일치(祭政一致)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사회도 이와 같았으며, 신라 제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그 대표적인 예다. 

1980년대 초 경남 김해시 부원동(府院洞) 유적에서 삼한시대의 복골이 출토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전남 남해군 군곡리(郡谷里) 패총에서 철기시대 내지 마한시대의 복골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진한이나 마한 사회, 가야, 백제 초기 사회에서도 강력한 지배층이 이끄는 정치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문자를 대동하고 있진 않지만 갑골의 점복 재료나 방법, 점복행위 및 목적은 은나라의 갑골문화와 일치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파되어 야요이시대에 유행했다. 

문자는 고대 문명의 조건 중 하나다. 문자가 갖는 특성은 말의 기록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씨족과 씨족 간 언어의 발달과 더불어 복잡해져가는 인간관계와 증대해가는 사회활동에서 말보다 어떤 기록으로서 약속이 필요했다. 고대인들은 이와 같은 충족을 얻기 위해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거나 어떤 형태의 부호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림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예가 경북 울산 반구대 암각화다. 자연암 벽면에 호랑이·사슴·멧돼지 등 들짐승과 여러 형태의 인물이 새겨져 있는가 하면, 고래·돌고래·물개·거북이 등 바다동물과 배를 탄 어부가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당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전달방법일 뿐 아니라 사건의 기록이요, 인간의 감정을 의화화한 대서사화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기록이다.


고대 사회에서 그림보다 비교적 발전된 전달 수단으로 인간이 사물을 기억할 수 있도록 보존 역할을 하는 일종의 원시문자인 부호문자가 있다. 부호문자는 발해 연안 북구 서요하 유역의 석붕산 유적에서 발견됐다.

소하연(小河沿) 문화 시기(BC 3000~ 2000)의 토기에 새긴 12자의 부호가 확인되었으며, 원통현 단지의 기벽에서는 7자의 부호가 확인되었다. 당시 집과 주위 환경을 도식화한 원시적인 문자로 보고 있다. 연문(連文) 형태의 부호들은 마치 당시 인류의 모종의 언어가 함축된 성문(成文)처럼 보이기도 해 한문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소하연문화의 문자는 상형문자와 지사문자(指事文字, 상형문자에 기호를 덧붙인 글자로 上·下·大 등이 있다)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춘 부호문자로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부호문자는 대개 선사시대의 토기에 새긴 것이 많이 발견되는데, 요동반도나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부호를 새긴 것이 발견되었다.

[출처] : 이형구<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특별기획] / 뉴스메이커 제 762호. 2008.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