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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 만 km 대장정Ⅰ[ 1회~10회]

문수봉(李楨汕) 2017. 12. 28. 20:24

'코리안 루트' 만 km 대장정Ⅰ[ 1회~10회]




1. 바이칼에서 단군을 만나다

- 샤먼이 암송하는 영웅 게세르 서사시에서 단군신화와의 유사성 발견 




모녀샤먼 바위(일명 부르한 바위)가 보이는 바이칼의 여명. <김문석 기자>
 

7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항공편으로 바이칼을 향해 날아올랐다. 세 시간 남짓 비행했을까,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선잠을 깼다. 바이칼 호수가 장관으로 펼쳐졌다.

봉우사상연구소 정재승 소장이 호수에 대해 즉석 강연을 펼쳤다. 이르쿠츠크대 고고학과 스비닌 교수가 레스토랑의 냅킨 위에 바이칼 주변 종족 분포도를 그려 선물할 정도로 정 소장은 현지인들에게 명망 있는 바이칼 전문가다.  

엷은 옥빛의 바이칼 호수는 하늘색을 닮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호수를 감싸 안았다. 푸른 호수와 호수를 닮은 푸른 하늘은 수평선과 같이 희미한 경계선도 없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호수 인근 부리야트인들은 샤머니즘의 최고 신성을 ‘영원한 푸른 하늘’로 이해하고, 호수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비행기는 최고신의 가슴 속에 있고, 신성은 경계를 모른 채 푸른 바이칼 호수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르쿠츠크 공항에 착륙하기도 전에 노크도 없이 바이칼 신들의 세계로 불쑥 들어온 것이다. 

 

부리야트 샤먼 발렌친이 바이칼 호수 안의 알혼섬에서 평소의 레퍼토리를 버리고 ‘게세르 신화’ 를 암송했다. <김문석 기자>
 

신들의 세계로 가다

이르쿠츠크 공항에는 필자의 친구인 이르쿠츠크외국어대학 박근우 교수가 나와 있었다. 박 교수는 답사팀의 일정을 준비했고, 도착에서 출발까지 함께 고생했다. 첫 날 향토박물관 답사, 이르쿠츠크공대 고대 기술 연구소 고고학자들과 미팅이 있었고, 다음 날 우스치오르다의 부리야트민족박물관에서 샤먼 톨랴가 재현하는 사습놀이인 수르하르반 축제를 견문한 뒤 샤먼 마하와 인터뷰를 하고 나서 곧장 알혼섬으로 갔다.

엘란치 인근의 선착장 엠에르에스에서 바지선을 타고 바이칼의 인당수로 불리는 물길을 넘어 알혼에 올랐다.

숙소로 정한 니키타 민박센터에는 샤먼 발렌친이 전날 미리 섬에 들어와서 우리를 기다렸다. 민박센터 주인 니키타씨가 손수 일행을 맞고 한국말로 환영 인사를 했다.

답사팀은 짐을 숙소에 던져두고 곧장 모녀샤먼 바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섬의 중턱 부분에 판을 깔고 발렌친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황금빛으로 저물던 햇살이 먹구름에 가렸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발렌친의 공연은 계속되었다. 비가 와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미 다른 손님들과의 행사에서 약주를 한잔 걸쳐서일까, 발렌친은 뜻밖의 궤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연출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신들께 고한 뒤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십사 하고 청을 드리고, 의식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일정한 시점마다 소옥(so-ok, 뜻대로 이루소서)이라는 주문을 구경꾼들에게 외치게 할 것으로 기대하며 판을 지켜보던 필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명색이 이야기 사냥꾼이고 샤머니즘 전문가라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끝까지 있었지만, 가슴 속은 방망이질쳤고, 긴장감이 온몸 가득 퍼졌다.  

발렌친은 평소의 레퍼토리를 버리고, 샤머니즘의 신화인 ‘게세르’를 난데없이 암송하기 시작했다. 시작 부분을 들으면서 발렌친의 게세르가 불라가트-에히리트인들에게 전해져오는 ‘아바이 게세르’ 판본임을 짐작했지만 발렌친의 입에서 나오는 서사시의 내용이 단군신화와 고스란히 오버랩되는 모습을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세르 암송이 단군신화에 스토리를 입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필자에게만 그런 것인가? 바이칼에서 단군을 만나다니…. 그것도 한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바이칼 샤먼의 세치 혀를 통해서 말이다. 

알혼섬, 발렌친 그리고 단군

공연이 파한 뒤 나이가 열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이 운전하는 러시아산 ‘라다’ 자동차를 타고 뭍으로 나가려는 발렌친을 붙잡았다. 대뜸 한반도의 단군신화를 아는지 물었다. 알고 있었다. 발렌친 본인도 이야기 얼개의 유사성에 무척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몽골의 게세르 연구자인 담딩수렝의 저서를 언급하면서 게세르 신화의 이동경로가 티베트쭻몽골쭻부리야트라고 말하고, 단군신화도 게세르신화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발렌친은 울란우데의 부리야트국립대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은 인텔리 샤먼이다. 그래도 근거가 없는 전파론과 영향설을 주장하는 것은 온당한 학자나 샤먼의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스비닌 이르쿠츠크대 교수가 정재승 소장에게 냅킨에 그려준 바이칼호 주변 종족 분포도 


막 공연을 마친 발렌친을 붙들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였다. 빗줄기도 세졌고, 발렌친도 지쳐 있었다.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대부분 이미 필자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해서 아쉽지만 헤어졌다. 발렌친의 게세르 서사를 통해 단군이 바이칼에 나타난 사실은 밤늦게까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통나무 숙소의 2층 베란다에서 자정을 넘기며 정리 회의를 하면서, 단군과 게세르 신화 그리고 바이칼의 관련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가 되었다. 신화 비교에 대한 답사팀의 관심이 의외로 뜨거웠고, 경향신문 취재팀 신동호 단장과 이기환 선임기자는 단군과 게세르의 조합이 기삿감으로 적당한 것 같다고 추임새를 놓았다.

몽골-티베트-바이칼 부리야트를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의 영웅신화인 게세르와 한반도의 단군신화의 관계’ 그리고 ‘단군신화에 대한 상식화된 오해들’을 살펴보는 객관적인 입장의 접근은 필자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주제였다.

‘객관적인 접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신화의 세계에서는 현실세계의 객관성이 오히려 주관적인 입장일 수도 있어 ‘객관’, ‘보편’ 혹은 ‘논리’라는 말과 신화의 연결이 어색할 수 있다.

그냥 편한 마음으로 단군신화에 대해 신화화된 오해들을 살펴보고, 게세르 신화와의 관련성을 말하면 족하다.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상식화된 오해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단군신화가 실린 일연선사의 ‘삼국유사’ 와 부리야트공화국 수도 울란우데 부리야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아바이게세르’ 판본.


 

① 단군신화는 건국신화다. 
② 단군신화는 무속(샤머니즘) 신화이고 단군은 샤먼이다.
③ 농경사회의 신화이다. 즉 우사·풍백 등을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④ 단일민족의 신화로 이해한다. 즉 곰족으로 대표되는 우리 조상으로 이해한다.
⑤ 일연선사의 위작으로 이해한다. 

단군신화를 건국신화로 보는 견해는 상식인 것처럼 널리 퍼져 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며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다음과 같이 프롤로그와 3부작으로 텍스트를 쪼개어보자.

① 프롤로그 | 하늘 신의 세계, 환웅이 지상 강림하는 사유
② 제1부 | 신시(神市)시대-홍익인간과 제세이화의 실현
③ 제2부 | 아사달에서의 개국과 단군왕검 통치기 
④ 제3부 | 제국의 쇠퇴

단군신화에 대한 오해들

우리가 보통 건국신화라고 말할 때는 위의 1부와 2부의 조각을 인용하고, 건국이념을 프롤로그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단군의 신비한 탄생과 웅녀의 출신 성분을 놓고서 ‘곰족=조선=현재의 한반도’로 연결되는 국가의 탄생을 다루는 설명은 나름대로 논리적이기도 하고 부분적인 진실을 드러내기도 해서 단군신화에는 건국신화의 모티브가 잠재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일연선사가 채록한 신화 텍스트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부만 발췌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문학 작품의 성격을 따져보는 과정에서 작품 전체가 아닌 일부만 떼어내어 전체를 규정하는 일이 정당성을 인정받기는 어렵다.  



이르쿠츠크 공대 고대기술연구소 고고학자들과 미팅하는 필자(왼쪽에서 세 번째). 


프롤로그에서 제3부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 단군신화의 요점을 건국신화로 하기에 주저하게 된다. 건국이념 제시(프롤로그), 신들의 지상제국 건설(제1부), 단군조선의 창업과 유지(제2부), 제국의 종말(제3부)의 모티브가 줄줄이 나온다. 제국의 건설은 부분이고, 제국의 흥과 망을 포괄하는 조선제국 흥망사를 일연선사가 기록한 것이다. 건국신화가 아닌 제국 흥망사인 것이다.

 단군이 제국 멸망 이후 숨을 거두거나 하늘로 복귀하지 않고 아사달 땅인 장단경의 숲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진술은 절망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제국 멸망사와 제국의 존재를 후대에 전해주고 멸망한 제국이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산신령이나 칠성각 그리고 미술사학자 박용숙 교수의 ‘숲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출처] :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특별기획> / 뉴스메이커 제746호.2007.10.23.  




바이칼호 주변은 우리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수많은 소수민족이 태어나 터 잡고 살았던 곳이다. 호수 주변에 서식하는 3500여종의 동·식물 가운데 자생종만 87%일 정도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 ‘러시아의 갈라파고스’ 라고도 불린다. 우리를 비롯해 일본, 아메리카 인디언 등 많은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득히 먼 조상들의 ‘유전자’ 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다. <사진 김문석 기자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서쪽 삼좌점(三座店)에서 치(雉)가 촘촘하게 배치된 거대한 석성이 3년전 댐 공사중에 발견됐다. 기원전 24~1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성은 국가 단위의 조직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규모와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축성법과 닮은 이 석성을 쌓을 만한 국가조직은 고조선 말고는 찾기 어렵다. 경향신문 탐사단이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아직 국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이 석성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김문석 기자 

[출처] 주간 경향 뉴스메이커 745호 커버스토리, 2007, 10.16.




2. 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 단일종족 신화 논리는 역사를 축소… ‘단군-게세르 계열’로 안목을 넓혀야 


 


부리야트인들이 게세르가 알려진 후 1000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 1991년 이를 기념하여 셀렝게 강변 언덕에서 기념전을 열었다. <신동호 기자> 



“우사, 풍백, 운사, 세오가 환웅을 보필하는 사신(四神)으로 설정되고, 태초의 혼돈 속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투쟁이 현무, 백호, 청룡, 주작의 전투 장면으로 묘사된다. 농경사회의 상징으로 알려진 우사와 풍백이 실제로는 전쟁의 신이었고, 현무, 백호로 변신하여 지상의 악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연출인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보는 시각의 일부다. 물론 ‘태왕사신기’에서 단군신화를 족조신화로 축소하며, 단일 종족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한 역사 왜곡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고조선에서 분화한 다양한 종족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가 농경이라는 상식화된 추론이 실제로는 막연한 추정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북방신화인 ‘게세르’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단군신화의 얼개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단순히 연출자 개인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어렵다.   


단군조선 사회체제 접근 신중해야 

프롤로그와 제1, 2부를 비교해보자. 게세르 신화에서는 신화 텍스트가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늘 세계의 회의, 하늘신 게세르의 지상 파견, 지상의 조화 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군신화에서도, 지상세계의 문제와 백성들의 도탄을 목격한 환웅이 환인의 허락을 얻은 뒤 우사, 풍백, 운사를 비롯한 전쟁신 혹은 최첨단 신무기를 갖추고 하늘용사 3000명과 함께 지상강림한다.

 이후 신시로 불리는 하늘 신의 직접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지상에서 인간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들을 제압한 뒤 지상과 우주의 조화를 복원한다. 이렇게 보면 두 신화가 닮은꼴이 아닌가? ‘불함문화론’에서 단군신화와 몽골계 부리야트인의 게세르 서사시를 유사한 내용이라고 한 육당 최남선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주곡’이라는 표현을 농경사회의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으나 단군신화가 유목에 가까운 북방 종족들의 신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면, 조금 더 조심스러운 시각으로 단군조선의 사회경제 체제를 논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에 농경을 상징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 전체가 농업경제를 기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단군 초상. 일연이 채록한 단군신화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쩌면,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흔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정주민 이데올로기가 첨가된 편견일 수 있다. 유목세계에 존재하는 닮은꼴 신화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바람’이나 ‘비’, ‘주곡’의 요소를 농경사회의 모티프로 추론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단군조선의 경제 기반을 농경에 연결하는 시도는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한반도의 거주자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범하지 않는 평화 지향의 정주민, 백의민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

단군신화를 농경사회의 정착 과정으로 설명하는 통설과 함께 여인으로 변한 웅녀를 두고서 곰족을 부각시키며 단군조선을 곰족의 국가로 해석하는 주장 역시 절반쯤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말일까? 서울대 강정원 교수는 ‘북아시아 곰 관련 의례와 관념 체계’(비교민속학회 발표문, 2007)라는 논문에서 이 같은 상식의 우상을 부분적으로 허문다.

곰 관련 샤머니즘 제의를 시베리아에서 찾기 어렵고, 곰 제의와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이 의문스러워서 단군신화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주장이다.

이 말은 역으로 샤머니즘과 곰 토템 사이에 역사적인 관련성이 크지 않음을 인정하면 단군신화를 샤머니즘 신화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시베리아 곰 의례 관련 대표적인 연구자라 할 수 있는 한스-요하힘 파프로트의 저서 ‘퉁구스족의 곰 의례‘(태학사, 2007)에는 샤머니즘과 곰을 직접 연결시키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자. 웅녀는 자신의 의지로 삼칠일간의 혹독한 수련을 통해 자신이 속했던 곰족의 행태와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곰족의 종족 이데올로기에서 홍익인간과 제세이화를 이념으로 하는 하늘세계의 보편적인 이념을 수용하는 존재로 전이한 것으로 말이다.

웅녀는 하늘 세계 이념을 공유하고 개별 종족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지향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인간이 된 웅녀에게 곰족이나 호족은 자랑스러운 혈통이 아니라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교화 대상이다. 단군신화가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라는 좁은 범주가 아니라 고대의 제국 형성과 소멸 과정을 담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종족 복합사회 성격 간과 말아야 

신화 텍스트를 살펴보면,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다 웅녀의 자식이거나 혹은 단군의 직접적인 후손인 것도 아니다. 단군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곰족, 호족을 비롯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한 무리들을 인간으로 교화시켜 보편과 인간을 지향하는 다종족 이념사회인 고대 조선제국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한반도와 북방 거주자들은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순혈 이데올로기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았음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단군신화를 한민족 혹은 단일민족의 족조신화 혹은 건국신화로 보는 시각은 단군신화가 다종족 복합사회의 성격을 가진 제국의 신화인 점을 간과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에 대한 기억을 해체하며 조선의 영역과 범위를 축소하는 왜소한 접근이다.

단군을 단일종족의 족조신화나 건국신화로 주장하는 논리는 자신의 역사를 축소하는 논리를 생산해온 것이다. 신화 텍스트 속의 조선은 다종족, 다문화를 인정하고 이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을 공동가치로 지향하는 동아시아 고대 제국의 원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신화 연구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연구에서 출발해야 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이칼 샤먼 발렌친은 게세르 신화와 닮은꼴인 단군신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제 단군과 게세르의 닮은꼴 이야기가 탄생된 경위를 따져봐야 한다. 바이칼 샤먼인 발렌친뿐 아니라 다수의 몽골계 연구자들이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몽골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 2〉는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의 예다. 담딩수렝은 동북아시아의 특이한 영웅 서사시인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모티프가 ‘티베트→몽골→바이칼 지역 부리야트’의 방향으로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전파론을 주장했고, 발렌친을 비롯한 일단의 연구자들은 몽골인들의 게세르 이야기가 주변 지역 거주자들의 장가르 서사시, 마아다이카라, 단군신화와 같은 유사한 신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영향설을 펴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세계에서 기원설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다. 비교 연구를 통해 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기원을 밝히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전파의 방향을 논하는 것조차 객관적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군신화 채록이 500여 년 앞서 

‘게세르 판본 연구’(비교민속학, 2007)에서 필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전파설의 말단에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가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신화 공간을 간직하고 있는 고본이고, 육당이 몽골이나 티베트가 아닌 부리야트 게세르 신화를 단군신화와 연결했던 사실을 보면 전파의 경로 추적은 지난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부리야트역사발물관에 전시된 출판 연도로는 가장 오래된 부리야트어 게세르 판본. <신동호 기자> 



게세르 계열 이야기의 발생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야기 채록 시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문헌에 의한 고증은 이야기의 존재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기 때문이다.

북방민족들에게서 전해오는 게세르 신화들 가운데 가장 이른 채록본으로는 ‘1716년 베이징 판본’을 손꼽을 수 있다. 만주족의 족조신화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를 타고 몽골의 게세르 서사시가 베이징에서 1716년 목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된다.

 ‘1716년 베이징 판본’ 채록 이전에 티베트 지역에서 이미 1600년대 초에 게세르 계열의 서사시가 존재했고, 채록되었다는 보고가 있지만, 실제로 티베트 고본은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판본을 찾을 길이 없다.

1830년대에 몽골어로 기록된 ‘링 게세르(Geser of Ling) 판본’을 티베트 고본의 몽골어 번역본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어 티베트 고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화적인 시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부리야트 게세르 판본들 역시 그 각본들의 수가 100여 개가 넘지만 대부분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채록된 것이다.

알타이의 ‘마아다이카라’와 칼묵인들의 ‘장가르’ 역시 18세기 이후 채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3세기에 일연선사가 기록한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이야기 계열에서 가장 오래된 채록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단군신화를 채록한 이후 무려 5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게세르 신화와 서사시들이 몽골 등지에서 채록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단군을 게세르 계열 이야기로 설명하기보다, 게세르 이야기들을 단군신화 계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고고학적인 사실뿐 아니라 신화적인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해서 전파론과 영향설의 잣대로 해석하는 방법론이 과연 옳은가? 게세르 계열의 이야기를 ‘단군-게세르 계열’로 부르는 것이 마땅해보인다. 

13세기는 몽골제국이 성립하는 단계이며 한반도가 몽골에 무릎을 꿇고,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의 일본열도 공략 시도가 있던 격변의 시기였고, 이를 감안하여 단군신화를 일연선사에 의한 위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국난에 직면해서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화 활용 전략이 구사된다는 설명인데, 국난을 초래한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계 신화를 모방해서 한반도의 신화를 창작했다는 주장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일연선사는 단군신화가 본인의 창작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의 채록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오늘날 단군신화와 유사한 얼개를 가진 신화적인 서사들이 동북아시아의 각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명칭을 가지고 발견되는 것을 보면, 유사한 이야기들이 일연 이전에도 지역과 종족에 따라 독특한 판본 형태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파 방향이야 확인할 길이 없으나, 단군신화는 ‘단군-게세르 계열 이야기’들의 존재를 13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헌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 [특별기획]  /뉴스메이커, 제747호,2007.10.30. 




3. 바이칼 원주민 문화는 어디로 갔나?

-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 전통은 간 데 없고 러시아 주류문화 일색으로 변모

 
탈치 야외 목조민속박물관.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동호 기자>
 
알혼 섬에는 대도시에서 보기 힘든 통나무집 바냐가 있다. 러시아식 사우나인 바냐 이용법은 필자의 전공이나 마찬가지다. 2년 전 이르쿠츠크외국어대 박근우 교수가 찾아낸 바이칼 호숫가의 바냐에서 정재승 소장과 함께 바이칼식 사우나를 하며 꼬박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그날 밤, 바이칼에는 평소보다 열 배나 커 보이는 보름달이 떴다. 물위에 비친 달빛은 한 줄기 은빛 카펫처럼 반짝이며 호수를 가로질러 사우나까지 연결되었다. 어디엔가 몸만 숨기면 누구나 나무꾼이 되고, 금방이라도 선녀가 목욕하러 내려올 듯한 분위기였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답사단이 알혼 섬에서 하룻밤 묵은 후지르 마을의 통나무집. 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통나무집 바냐를 즐길 수 있다. <신동호 기자>
 
바이칼의 호리도리 나무꾼과 하늘 신 쿠르부스탄의 셋째 딸인 백조 공주의 연애담이 언제라도 재현될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었고, 이방인들은 바이칼의 보름달, 달빛 길, 바냐에 매혹되었다. 무릉도원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정 소장은 바이칼의 무릉도원을 ‘반야만월’이라고 불렀고, 박 교수는 바냐의 보름달을 반야만월로 해석한 그의 재치에 감탄했다.

바냐를 100% 즐기는 법이 있다. 우선 주먹만한 자갈이 가득 담긴 페치카를 자작나무·통나무 장작으로 두세 시간 달군다. 그 다음 사우나 도크에 들어가 자갈 페치카 위에 계속 물을 부으며 온도를 거의 100도 가까이 올리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바냐에서 뜨겁게 몸을 달구고, 뜨거워진 나무 판에 누운 다음 싸리비처럼 생긴 회초리 베닉으로 온 몸을 마구 두드리면 러시아식 사우나는 절정에 이른다. 용감한 사람들은 데워진 몸이 식기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이칼 물에 뛰어든다.

뜨거운 증기가 가득한 사우나에서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 고깔모자를 쓰면 더 좋다. 조금 아쉬움이 남으면 뜨거운 물을 베닉에 적셔서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지긋하게 눌러주면 뜸의 효과를 내는 훌륭한 마무리가 된다.
전신에 베닉 세례를 받는 김문석 기자와 시미즈 교수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알혼 밤하늘에 가득했고, 윤명철 교수는 베닉을 더 세게 내리쳐달라고 주문하며 싸리나무 회초리가 몸에 떨어질 때마다 기합을 외쳤다. 그 덕분에 필자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알혼 여행을 마치고 밤늦게 이르쿠츠크로 돌아올 때는 야성에서 문명 세계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들판에 연필로 줄을 그어놓은 듯한 어둑한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불빛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극작가 체호프가 사할린 여행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르쿠츠크를 보고서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실감났다. 거친 타이가와 황량한 스텝이 끝없이 이어지고, 길을 따라 도열한 자작나무가 바람에 따라 물결치듯 몸을 뒤척이는 시베리아 황야 한가운데서 러시아정교회와 유럽문명을 보았으니 체호프의 감격이 어떠하였을지 짐작된다.

시내 곳곳에는 문필가의 동상과 연극극장과 오페라, 영화관, 대학들이 들어서 있다. 인구 60만 남짓한 소도시에 대학이 무려 20개나 된다. 드라마센터와 레퍼토리 극단까지 있다. 레닌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밤필로프와 현대 산문의 대가 라스푸틴을 비롯한 다수의 소비에트 예술가들이 수도를 마다하고 이르쿠츠크에 살기를 고집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

푸슈킨과 동시대인들이었던 문인재사들이 유형수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와서 건설한 이상향이 이르쿠츠크가 아니던가. 제카브리스트 박물관에는 정치범이 되어 유랑했던 남정네들을 따라 시베리아에 온 여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반기를 든 12월 당원인 제카브리스트 혁명가들이 차르정부 전복에 실패한 뒤 검거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언도받았다. 광산지대인 치타를 비롯한 노역장에서 형기를 마친 러시아 인텔리겐차들이 하나둘 약속이나 한 듯이 모여서 독특한 문화를 일군 곳이 바로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에는 12월당 혁명가들의 반항하는 지성과 자유로운 영혼이 서려 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바이칼호수  


 
정재승 소장이 바이칼 호수에 발을 담갔다. 한여름인데도 물 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물이 차갑다. <신동호 기자>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이기환 선임기자 일행을 박근우 교수와 함께 레나 강 상류의 고대 암각화 단지인 카축 취재를 위해 떠나보내고 필자는 신동호 단장 팀에 묻어 바이칼 인근의 어촌인 리스트비양카로 출발했다. 취재할 곳이 많아 답사팀을 두 개로 나눠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필자는 몇 해 전의 답사에서 카축 암각화 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강강술래, 우주인의 이미지, 고대 용의 모습, 마소가 끄는 고대 전차, 다양한 동식물, 샤먼의식으로 추정되는 광경 등이 선명한 암각화단지가 무려 1.2㎞에 걸쳐 펼쳐져 있는 장관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러시아작가연맹 소속 시인 예브게니 할아버지가 카축 암각화단지의 공식 명칭인 ‘시슈킨스크 문화재’의 관리인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카축에는 AD 700년에서 BC 6000년 사이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들이 어울려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편년은 고고학자들의 몫이다.

리스트비앙카 방문팀은 바이칼에 유람 온 관광객들이 한 번쯤 찾는 바이칼호수박물관에 들러 십 년쯤 공부해야 알 만한 내용을 단 한시간 만에 상세하게 학습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서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배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길목의 샤먼바위를 돌아볼 예정이었는데, 예약한 배가 나타나지 않았다. 빡빡하던 일정에 예기치 않은 공백이 생겼다.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두어 시간 남짓한 호사였지만, 얼른 바이칼에 발목을 담근 다음 햇볕으로 따끈해진 호숫가 바위에 올라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일광욕 모드로 들어갔다
 



알혼 섬과 바이칼의 역사와 현황을 소개한 후지르 마을의 민속박물관 내부. <김문석 기자>


 

문득 고향인 부산 앞바다가 눈앞에 삼삼했다. 아기자기한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있는 해운대와 광안리에 가고 싶었다. 다들 바이칼의 풍광을 칭송하지만 필자에게는 해운대가 바이칼보다 못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바위에 눕기 전 바이칼 명물이라는 훈제 생선 ‘오물(Omul)’을 먹을 때도 자갈치의 싱싱한 회가 간절했고, 투박하면서도 간드러지는 경상도 사투리가 귀에 맴돌았다.

해운대와 다른 바이칼의 진면목은 물속에 발을 담그면 비로소 알게 된다. 한여름인데도 물속에 10여 초 남짓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바이칼 호수는 차갑다. 물에서 한기가 인다. 중앙아시아의 내륙오지 천산산맥 자락의 해발 2000m 고지에 있는 이식쿨 호수와 바이칼은 여러모로 닮았다.

이식쿨은 키르기즈 말로 ‘따뜻한 호수’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만년설이 녹아내린 것처럼 차다. 중앙아시아 소설가 칭기스 아이트마토프는 ‘따뜻한 호수’라는 이름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대비는 신화적인 상징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신화 생성 과정을 다룬 소설 ‘하얀 배’를 이식쿨 배경으로 썼다.

바이칼 역시 ‘불이 멈춘 곳’이라는 뜻을 가졌으면서 한여름에 발을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것을 보면 여행객이 눈을 뜨고서도 볼 수 없는 신화와 설화들이 호수 주변에 가득 서려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바이칼 할아버지와 앙가라 공주 그리고 예니세이 왕자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를 닮은 호리도리 이야기, 게르만인들의 지그프리드 왕자와 닮은꼴인 황금복사뼈 알탄샤가이 전설 등 현지인 이야기꾼이 보따리를 풀면 바이칼의 이야기 세계는 멈출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고유 언어 사라지고 의식주도 변화 

바이칼 호수 유람을 마치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오는 길에 탈치 야외 목조박물관에 들렀다. 용인 민속촌과 비슷한 곳인데, 전시품들만 가득하고 사람 사는 냄새는 우리의 민속촌과 비교해서 덜하다. 이르쿠츠크 인근에 있던 옛날 가옥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박물관을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에 진출하기 전에는 원주민들이 주인이었는데도, 건물들은 대부분 러시아식 목조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에벵키와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건축물이 탈치의 남쪽과 북쪽 변경에 몇 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탈치 박물관은 시베리아의 역사를 보여주면서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오늘날의 바이칼 지역 문화를 에벵키나 부리야트를 비롯한 원주민 문화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바이칼 문화가 소수 종족 시베리아인들의 문화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막연한 추정이거나 선입견이라는 게 더 정답에 가깝다.

실제로 현지에 와서 보면 원주민의 문화 전통은 간 데 없고, 주류 문화가 러시아 일색이다. 이 글 앞부분에 시간 순으로 열거된 체험들도 사실 러시아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신들의 고향 알혼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통나무 주택도 러시아식이고 여행자의 피로를 풀게 해준 사우나 바냐 역시 러시아 전통이다. 음식, 의복, 교통수단, 언어 등 그 어디에서도 원주민 문화를 찾기 어렵다.  

원주민 문화는 인디언보호구역처럼 일정한 지역에 한정된 문화재와 유물유구, 연극배우처럼 공연을 하는 샤먼과의 인터뷰에서 찾아보는 것이 고작이다.

 고대 유물인 암각화의 관리자도 러시아 시인이었고, 이르쿠츠크 공대의 고고학자들도 대부분 러시아인들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소수 종족 현지인들도 대부분 종족 고유의 말을 잊은 채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살고 있었다. 대도시뿐 아니라 농촌지역에도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는다.

말없이 흐르는 앙가라 강은 과거를 기억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소비에트가 폐업하던 시절의 인구조사를 인용한 포사이드의 저서 ‘시베리아의 제종족’에는 시베리아 주민의 수가 2100만 정도이고, 그 가운데 95%가 러시아를 포함한 슬라브인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원주민들의 수가 정말 미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시베리아를 두고 소수 종족 문화가 꽃피고 전통이 숨쉬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낭만적인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시베리아 문화를 러시아 문화와 시베리아 고유문화가 만난 하이브리드 형태로 보는 연구자들은 직접 시베리아를 견문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시베리아 문화를 복합적이라고 추정하는 연구자들은 전체 인구의 5% 남짓한 시베리아 원주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원주민의 문화만 떼어놓고 보면 잡종문화다. 원주민들은 고유 언어를 버리고 러시아어를 택했다. 주거와 의복을 러시아식으로 바꾸었고, 음식과 연애 방식마저 러시아풍을 따라간다.

샤먼들의 의식에조차 러시아식 사고와 원주민 사고가 복합되어 있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는 러시아인 커뮤니티의 주류 문화는 원주민 문화를 배제한 러시아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시베리아를 개척한 초기 러시아 이민자들을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의 옛 사람(Starye Sibiryaki)’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텅 빈 시베리아에 들어와 문명을 일군 주인들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의 과거와 원주민의 문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출처]: 양민종/ 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 [특별기획]  /뉴스메이커, 제748호,2007.11.6. 




4. 바이칼에 샤머니즘을 허하라
- 부리야트공화국 인류 최초 공식종교로 인정… 소수종족 샤머니즘문화 부활 선도 

 


동부리야트 샤먼학교의 승급 심사 의식. 1년에 한 번씩 샤먼의 영험을 점검하고 품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3일 밤낮 동안 치른다. <김문석 기자> 

지난 호에서 말한 것처럼 시베리아의 주인은 누가 뭐라 해도 러시아인들이다. 인구를 보면 러시아인을 포함하는 슬라브계 백인들이 주민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건축과 복식, 공연과 예술, 심지어 음식과 놀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화가 넘쳐난다.

군소 언어들은 일상 생활에서 퇴장한 지 오래이며, 연구실이나 박물관에서 명맥을 이어간다. 알타이-투바-사하야쿠트-부리야트와 같이 소수종족의 자치가 허용되는 자치공화국에서도 러시아어가 공식어이며 동시에 일상어다. 서부리야트의 샤먼 마하, 샤먼 톨랴, 샤먼 발렌친도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캄차카의 이텔멘 종족의 말과 같이 구사자가 전무하고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흔해서 언어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것만 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와 문화의 상실과 더불어 조상 대대로 시베리아에서 살아온 원주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인으로 동화되거나 사회의 주변부가 되었다.

오죽하면 박노자 교수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북방열도 분쟁을 주인을 몰아낸 ‘도둑들의 장물 다툼’이라고 비난했겠는가. 쿠릴열도 토박이인 아이누는 이제 ‘북방열도’에는 거의 거주하지 않는다. 아이누는 자신들의 고토에서 소외된 후 홋카이도와 연해주 일대로 뿔뿔이 흩어졌고, 개체수도 적어서 독립적으로 사회를 구성할 만큼 인구를 모으기도 힘들다.
 


사간 모린, 백마호텔로 가다 

원주민 문화의 배경 위에 건설한 러시아 시베리아 문명 세계를 견문하면서 소수종족 토착민들의 생활상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점은 답사팀에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필자는 이르쿠츠크대의 박근우 교수가 7월 15일 울란우데에 도착한 후 여정을 풀 호텔 이름이 ‘사강 마린’이라고 귀띔해줄 때만 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프랑스 소설가 ‘사강’과 바다의 이미지를 주는 ‘마린’이 결합한 정도를 떠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정차하는 울란우데역 인근의 호텔 이름은 ‘사강 마린(Sagang Marine)’이 아니라 ‘사간 모린(Sagan Morin)’이었다. 연애담을 즐겨 썼던 프랑스 소설가의 이름이 아니라 ‘흰 말’을 뜻하는 부리야트 원주민 말이었던 것이다. 자음 ‘n’을 ‘ng’로, 강세가 없는 모음 ‘o’를 ‘a’로 읽는 러시아어식 발음에 익숙한 사람들이 사간 모린을 사강 마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호텔 명패에 소수종족 단어가 걸려 있는 것은 범상치 않은 징조였다. 오랜 세월 시베리아를 유람하면서도 원주민 말로 된 호텔에 묵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필자는 여행을 하면서 주로 민박에서 지냈기 때문에 호텔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경우는 없어 호텔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지역 명칭’이나 ‘회사의 상호’ 그리고 구소련 시절의 국영 여행사인 ‘인투리스트(Intourist)’를 붙인 정도가 필자가 기억하는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호텔이다.

게다가 호텔 프런트에서 일하는 처녀들은 자신들을 에히리트-불라가트 종족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흰색 말의 로고와 함께 유목민의 문양들로 장식한 호텔 안내문에는 울란우데의 역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백마’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7월 16일 울란우데 사회과학원을 방문했다. 울란우데 소재 샤먼센터 텡게리 소속 샤먼인 이고리 선생이 사회과학원 일정에 함께 했다. 전날 텡게리 소속 샤먼인 츠드포프 선생과 함께 울란우데 역에 나와 필자 일행을 맞았던 이고리 선생은 샤먼 승급심사에 참여하는 일로 바쁜데도 사회과학원에 나타났다.


일 년에 한 차례씩 샤먼들의 영험을 점검하고 품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치르는데, 마침 답사팀이 방문했을 때 그와 같은 의식이 진행 중이었다.  

샤먼 이고리 선생과 사회과학원 견문
 



부리야트공화국 보리스 바자로프 사회과학원 원장(오른쪽)이 답사단의 인터뷰에 응한 뒤 책자와 자료를 증정했다. 바자로프 원장 뒤가 필자. <김문석 기자> 



이고리 선생은 사회과학원 원장부터 복도를 지나치는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마당발이기 때문에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 사회과학원에서는 원장이 직접 답사팀의 인터뷰에 응했고, 최근 사회과학원에서 발행한 중요 도서를 답사팀에게 선물로 주었다.


원장은 사회과학원 소속 고고학자 한 분을 답사팀에 합류시켜 흉노 관련 유적을 답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필자는 이와 같은 환대의 이면에는 마당발 샤먼 이고리 선생의 인간관계가 깔려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회과학원 내의 고고유물 전시 박물관에서는 8000년 전의 신석기 유물들과 종족 이동경로에 대한 설명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한민족이나 부리야트인과 같은 종족 구분 없이 같은 인격체로서 신석기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종족의 분화는 그 이후에 시차를 두고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회과학원을 방문한 후 ‘사간 모린’ 백마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이고리 선생은 샤머니즘과 관련한 최근 문헌 한 꾸러미를 필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는 울란우데에 도착한 첫 날 주요한 박물관을 모두 돌아보았고, 다음 날 오전, 울란우데에서 북방으로 80㎞ 정도 떨어진 지점에 형성된 러시아 구교도들의 민속을 확인했다. 오후에는 사회과학원에서 고고학자와 원장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저녁식사도 건너뛴 채 주채혁 교수와 두세 시간 승용차를 타고 양가 마을 답사 일정을 소화했다.  

체력이 거의 바닥날 만한 데도 자정을 넘기도록 그다지 피곤한 줄 몰랐다. 대순진리회에서 운영하는 연해주 한국농장에 들러 그곳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고, 선물로 꿀까지 받았는데, 매일 두세 스푼씩 벌꿀을 차에 타서 먹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한반도의 토속 전통 종교들에 대한 편견이 원래부터 없었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대순에서 행하는 색다른 봉사 방법을 확인하고 무척 기뻤다. 만주 일대와 연해주의 넓은 땅이 미래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일 뿐 아니라 두개로 쪼개진 한반도 사람들이 서로 상생하는 농업 모델을 창출하는 토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연해주 일대를 다시 방문하여 대순의 연해주 개척 모델에 대해 상세하게 취재한 다음 그 성과와 가능성을 점검하고 싶다. 



울란우데 북쪽에 자리잡은 발쇼에 쿠레나는 17세기 종교 박해에 시달린 구교도들이 이주해 세운 마을이다. 이들이 300년 이상 지켜온 민속을 답사단에게 선보였다. <김문석 기자> 



성지등록법, 종교간 갈등 예방  

좌우당간, 벌꿀 차 덕분에 밤중에도 생생한 정신으로 이고리 선생이 필자의 손에 쥐어준 자료를 정리하는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취합한 자료들 가운데 묘한 제목의 법령 두 개를 발견했다. 처음의 것은 ‘부리야트공화국 영역 내의 종교 활동에 관한 법’(이하 종교활동법)이었고, 두 번째는 ‘특별보호가 필요한 성지 등록법’(이하 성지등록법)이었다.


두 법은 1997년과 2001년에 부리야트공화국 의회인 나로드니 후랄(Narodnyi Khural)에서 연이어 제정한 샤머니즘 관련 법률이었다. 종교활동법은 인류 사회의 역사상 최초로 샤머니즘을 기성종교 가운데 하나로 공식 인정하고 포교권, 의식 집전권, 신앙 생활권을 합법화한 조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리야트공화국에서는 러시아정교(구교 포함), 불교, 가톨릭을 합법적인 기성 종교로 인정해왔으나 종교활동법에 따라 샤머니즘을 포함하는 4대 종교를 기성종교로 합법화했다.


종교활동법의 제정으로 부리야트공화국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샤머니즘의 부활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고, 투바공화국과 사하야쿠트공화국을 비롯해 샤머니즘의 전통을 가진 소수종족 공화국들이 적극적인 샤머니즘문화의 복원을 유도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답사단이 묵은 울란우데의 사간 모린 호텔. 사간 모린은 부리야트어로 ‘흰 말’ 이라는 뜻이다. <신동호 기자> 

2001년에 제정한 성지등록법은 1997년 샤머니즘의 합법화 조치 이후 기존 종교단체와 샤먼들 사이에서 종교의식을 치르는 장소를 둘러싼 다툼과 갈등이 잦고, 러시아정교 신도들이 자신들의 거주지 인근에서 샤먼의식의 집전을 물리적으로 막는 경우도 발행하여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인 것으로 보인다.

법률에 따르면, 샤먼들이 의식을 치르기 전에 의식집전 예정 장소를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성지’로 관청에 등록해야 한다.

샤머니즘의 합법화와 종교적인 측면에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법률의 존재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시베리아의 여타 지역에서와 달리 울란우데 중심의 동부리야트 지역에서는 샤머니즘이 부활하는 과정이 매우 특이하다.

구소련이 해체된 이후 1990년대 초반, 부리야트공화국 사회의 파워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중량급 인사들이 줄지어 스스로 샤먼이라고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하는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부리야트 공화국 국립도서관장을 지내고 문화부 장관직을 수행하던 하라예프, 울란우데 문화대학 교수 스테파노바, 부리야트 사회과학원 연구원 츠비크자포바 등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스스로 샤먼이라고 선언했다.

소수종족 문화에 대한 탄압과 샤머니즘 박해 등에 가위눌렸던 전통문화가 소비에트가 해체하면서 부활하기 시작했는데, 부리야트공화국에서는 전통 부활의 견인 역할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지도층 인사의 샤머니즘과 관련한 고백은 자연스럽게 ‘샤머니즘의 부활’이라는 화두로 사회 전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이후 1993년 울란우데에는 ‘울려 퍼지는 북소리’라는 뜻인 샤먼협회 ‘헤세 헨게레그’가 조직되었고, 헤세 헨게레그는 1999년 ‘샤먼 협회’라는 뜻인 ‘보오 무르겔’로 재조직되어 기성종교로 문화부에 등록했다.

2000년대에 들면서 샤먼센터 텡게리와 샤먼센터 루사트 등이 문화부에 종교단체로 등록하면서 현재 부리야트공화국에는 샤먼 관련 공인 단체가 세 개로 늘어났다.  

오늘날의 부리야트 샤먼들은 잔혹한 희생제의나 의뢰인을 속이는 혹세무민의 의식을 펼치기보다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을 펼치며, 전통 의료행위와 심리 상담 치료를 병행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샤먼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인텔리 계층으로 진입하고, 적극적으로 저술 활동을 펼치고 대중교육에 나서기도 하는 것이 오늘 날 바이칼 샤먼들의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간 모린’에서 한밤중에 들여다보는 샤머니즘 관련 법조문들은 ‘바이칼에 샤머니즘을 허하라’고 외치는 듯하다.
​[출처] : 양민종<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주간 경향 뉴스메이커 749호, 2007. 11,13.

 


5. 동북아 북방문명의 젖줄, 아무르
- 강줄기 따라 수많은 문화·유적 분포… 중류 ‘평저 융기문 토기’ 한반도서도 출토


아무르 강 유역 유적 분포도

나는 아무르 강을 보면 ‘아, 물이다’라는 말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모스크바에 유학할 때 누군가가 우스갯소리로 ‘아무르’라는 명칭이 이주 한인들이 너무 힘들고 목이 마를 때 그 강물을 보고 “아, 물이다”라고 말한 연유로 생겨났다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다.

아무르 강 하류의 니브흐인들은 그 강을 다-무르, 즉 큰 강이라고 불렀고, 더 하류 쪽의 에벤크(에벵키)인들은 이를 차용하여 아마르 혹은 아무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 러시아인들이 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아무르 강이 되었다. 아무르 강은 그 물 흐르는 것이 검은 용과 같다 하여 흑룡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이칼 동쪽의 실카 강과 아르군 강이 합류하면서 시작하는 아무르 강은 동쪽으로 흘러 아무르 주와 하바로프스크 주를 지나 타타르 해협으로 흘러나간다. 아무르 강은 전체 길이가 2824㎞로, 상류·중류·하류로 크게 구분된다.

실카 강과 아르군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제야 강 하구까지, 즉 블라고베시첸스크 시까지가 상류, 이곳에서 우수리 강까지, 즉 하바로프스크 시까지가 중류, 그리고 이곳에서 동해의 타타르 해협까지가 하류다.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교통로 

아무르 강 유역에는 석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나나이족을 비롯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도 이 강을 따라 살고 있다.  

아무르 강은 동북아시아 북방지역의 교통로이자 젖줄과도 같았다. 사시사철 동북아시아의 북방을 동서로 연결했으며, 또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풍부한 음식물을 제공해주었다. 여름이면 배를 타고 아무르 강과 그 지류를 따라 아주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겨울이면 폭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넓은 빙판길을 사람들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한반도와,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가 일본과 각각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무르 강과 그 지류에는 동해의 타타르 해협에서 올라오는 연어로 인해 강이 물고기로 넘쳐났다. 이곳의 주민들은 여름 한철의 연어 잡이로 겨울을 준비했다. 연어는 이곳 주민들의 주식이었고, 의복과 신발을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잡았다. 아무르 강에는 철갑상어도 많이 서식한다. 주변의 산악지역에는 곰과 사슴 등 수많은 동물도 서식한다. 그 때문에 아무르 강 유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신석기시대에 아무르 강 중류와 하류에는 수많은 고고학 문화가 발전했다. 하류 지역에서는 이미 1만3000년 전에 토기를 사용했다. 가샤 유적에서 출토한 이 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이른 토기 중의 하나다.


더 하류로 가면 수추 섬 유적이 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3년 동안 러시아와 공동 발굴조사를 한 유적이다. 길이가 약 400m에 불과한 자그마한 이 섬에서는 신석기시대 전 기간의 주거지가 약 120여 기 확인되었다.  

이 섬 안에는 환호가 있어 사람과 영혼이 거주하는 지역이 서로 구분되어 있으며, 주거지에서는 토기와 석기는 물론이고 사람 형상과 동물 형상을 한 다량의 토우도 출토되었다.


토기 중에는 번개무늬 토기가 있는데, 6000~7000년 전의 토기에 지금 우리가 쇠 울타리, 베개, 담장의 그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꼭 같은 모양의 번개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유적은 풍부한 유구와 화려한 출토 유물 덕분에 ‘아무르의 미케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코리안 루트 상에 분포한 대표적인 암각화인 레나강 상류 카축의 암각화(사진|김문석기자)와 아무르 강 유역 시카치-얄랸 암각화(사진|정석배교수), 그리고 울산시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왼쪽부터)


발해, 중·상류까지 진출 주장도 

또한 아무르 강 하류 지역에는 ‘아무르의 비너스’라고 불리는 토우도 있으며, 토기에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도 있다. 나나이인들이 사는 시카치-알랸 마을 주변에는 암각화 유적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새긴 것과 사슴과 같은 동물의 형상을 새긴 바위들이 아무르 강변을 따라 수없이 널려 있다.  

나나이인들은 이 암각화를 매우 신성하게 여긴다. 태초에 사람이 3명 있었다. 그들은 카도라는 남자와 쥴치라는 여자를 만들고, 나중에 마밀쥐라는 처녀를 만들었다. 카도는 하늘에 해가 3개 있어 너무 뜨거워 살 수가 없다면서 2개의 해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

이를 기념하여 마밀쥐가 암석에 그림을 그렸고, 쥴치가 이제 사람들이 내 남편이 2개의 해를 죽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나나이인들은 이 신화의 내용대로 시카치-알랸 암각화를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르 강 유역에서 발굴한 세칭 ‘아무르의 비너스’(왼쪽)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3000년 전) 토기의 조각들. |정석배 교수


아무르 강 중류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노보페트로브카 유적이 있는데, 평저 융기문 토기와 돌날로 만든 석기가 특징을 이룬다. 비슷한 평저 융기문 토기가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많이 출토된다. 강원도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 그리고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런 유형의 신석기문화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바이칼 지역이나 중국의 중원문화권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에 이미 환(環)만주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년 전에 러시아의 한 고고학자는 발해가 아무르 강 중류의 제야 강 지역까지 진출했고, 어쩌면 더 서쪽으로 아무르 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내용의 박사학위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이곳은 발해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이 그린 발해의 강역도 범위를 많이 벗어나는 지역이다. 그 개요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3~4세기부터 7~8세기까지 아무르 강 유역에는 대체로 소흥안령-부레야 산맥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과 동쪽이라는 두 개의 큰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서쪽은 지금의 블라고베쉔스크 시가 위치하는 제야 강 너머까지의 저지대에 미하일로브카 문화가 존속했고, 동쪽에는 하바로프스크 시를 중심으로 하는 아무르 강 중·하류 지역에 나이펠드 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나이펠드 문화는 아무르 강의 지류인 제1송화강과 우수리 강의 저지대에 분포하는 중국 지역의 동인문화를 포괄한다.  

이 두 지역은 유물의 양상이 서로 다르다. 서쪽의 미하일로브카 문화에는 장란형의 동체가 있는 호형 토기와 구상의 동체에 목이 있는 병형 토기가 많은데, 모두 격자타날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수제다. 나이펠드 문화에는 동체가 길쭉한 화병형과 심발형 계통의 토기가 많으며, 모두 어깨 부문에 침선문과 다치구 압인문이 시문되어 있다.

모두 수제다. 그 외에도 물레에서 보완 손질을 한 구연이 나팔 모양으로 크게 벌어진 화병형 토기가 있는데 역시 어깨 부분이 침선과 다치구 압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미하일로브카 문화에는 보이지 않는 환옥과 은고리가 결합된 귀고리가 많다



아무르 강 수추 섬은 풍부한 유구와 화려한 출토 유물로 인해 ‘아무르의 미케네’라고 불린다. 한반도와도 연결되는 가장 오래된 번개무늬토기(왼쪽)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수추 섬에서 발굴한 석환과 곰상


서쪽 8세기 문화에 고구려 토기 등장

여기에서 미하일로브카 문화는 사료에 나오는 몽골어계의 실위고, 나이펠드 문화는 퉁구스어계의 흑수말갈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 의견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서기 8세기쯤에 이곳의 정치적 양상이 바뀌는데, 발해의 건국과 관련한 사건이 그것이다. 

8세기쯤 발해의 건국과 함께 아무르 강의 동쪽 지역에 거주하던 흑수말갈이 발해의 압박을 받고 서쪽으로, 그러니까 실위의 미하일로브카 문화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로 인해 아무르 강 서쪽 지역에는 8세기쯤부터 나이펠드 문화의 요소가 확인된다.

한편, 조금 후에 그러니까 서기 8세기 중엽 이후에 아무르 강 서쪽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는데 바로 트로이츠코예 문화다. 이 문화는 말갈계의 수제 토기와 고구려계의 윤제토기를 함께 보이고 있다.  

말갈계 토기는 어깨 부분에 볼록한 융기대가 장식되어 있고, 간혹 동체가 격자타날로 장식되기도 하였다. 어깨 부분의 융기대는 실위의 미하일로브카 문화와 흑수말갈의 나이펠드 문화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던 요소다.  

바로 이 문화를 그 러시아 고고학자는 발해의 문화로 파악한다. 실제로 크로이츠코예 문화에 보이는 어깨가 융기대로 장식된 수제 토기와 고구려계의 윤제 토기는 연해주 지역에서도 확인되며, 그 외에도 철제 창이나 찰갑, 대도, ‘단검’ 등은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발굴 조사한 연해주의 체르냐치노 5 발해고분 유적에서 나온 것과 동일하다. 발해의 영역 연구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연구 결과라 하겠다. 

아무르는 흐른다. 그 물길을 따라 도처에 유적이 분포하고, 전설과 신화가 잠들어 있다. 오래전에는 한반도의 것과 매우 유사한 토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던 흑수말갈과 실위의 실체가 성큼 다가왔고, 그에 따라 발해도 점차 그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 아무르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이제 그것들에 관심을 가질 때다. 더욱이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우리가 이 지역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출처] :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특별기획>/ 뉴스메이커 750호2007.11.20.


 

 6. 시베리아 대륙 동토의 문명들

 - 신석기시대부터 뛰어난 문화 태생… 청동기문명 한반도·만주 등에 파급


레나 강 살류 카축 지역의 쉬시킨스키 암각화

시베리아는 동쪽의 야블로노브이 산맥과 스타노브이 산맥에서 서쪽의 우랄 산맥까지다. 시베리아에는 3개의 큰 강이 흐른다. 모두 사얀-알타이 산맥과 같은 남쪽의 큰 산맥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레나 강, 예니세이 강, 그리고 오비 강이 그것이다.

시베리아는 추운 곳이다. 겨울에는 정말 춥다. 1월 평균 온도가 남시베리아는 -16℃, 야쿠치아는 -48℃다. 그러나 여름에는 따뜻하다. 봄이면 땅속은 얼어 있어도, 땅 위는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여름이면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일광욕도 한다.  

예니세이 중·상류 선사문화 발달 



 

북방유라시아 문화 유적 분포 


한반도는 시베리아와 많이 떨어져 있고 기후도 판이하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시베리아가 우리와 많은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왜 그럴까.  

시베리아의 남쪽 지대는 유목 문화권에 속했다. 예를 들면, 기원전 7~3세기의 선(先)흉노-스키타이 시대에 알타이 지역에는 파지릭 문화가,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는 타가르 문화가 각각 분포했다. 이 두 문화에는 소위 스키타이 3요소라는 모든 문화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 흑해 북안 우크라이나 지역의 본원적인 스키타이 문화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에는 동쪽의 오르도스 지역 모경구 문화도 포함되고, 그 문화 요소들은 중국 하북성 북부 지방에까지 확인된다. 고조선은 이곳에서 유목민들과 국경을 접했을 것이니 그 문화 요소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에 널리 보이는 아키나크 모양의 마제석검은 바로 유목민의 문화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베리아와 관련이 있다고 할 때는 사실 그 넓은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파악하기가 힘든 때가 있다. 시베리아는 넓고, 지역마다 문화가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바이칼 유역의 세로보 문화를, 청동기시대에는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의 카라수크 문화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초기 철기시대에는 타가르 문화나 파지릭 문화를 거론하기도 한다. 우리가 스키타이 문화라고 한 것은 사실 헤로도투스가 말한 흑해 북안의 그 스키타이가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사카 문화,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 그리고 예니세이 강 유역의 타가르 문화였으며, 가깝게는 오로도스 지역의 모경구 문화였다.  

시베리아에서는 예니세이 중·상류 지역이 가장 발달된 면모의 선사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미누신스크 분지가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화가 발달했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는 타스민 문화, 아파나시예보 문화, 오쿠네보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카라수크 문화, 타가르 문화가 일부 공존하기도 하면서 차례로 등장했다.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예니세이 강과 레나 강 상류 사이에 자리 잡은 말타 유적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매머드의 상아로 만든 여인상과 새(鳥)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시베리아에는 또한 암각화 유적이 수없이 분포한다.

예니세이 강 유역에는 바야르 암각화와 쉬쉬카 암각화가 있다. 특히 바야르 암각화에는 소도 그려져 있고, 천막도 그려져 있고, 또 솥도 그려져 있다. 구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그림이 있다.

 암각화는 레나 강 유역에도 많다. 카축 암각화와 나린얄가 암각화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강변을 따라 나 있으며, 암벽에 동물을 새기기도 하고 그리기도 했다.  

시베리아 청동기문화 몽골서도 확인 


'말타의 비너스',안드로노보 문화 토기, 아파나시예보 문화 토기(오른쪽부터 시계방향).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에는 사람의 형상을 새긴 선돌과 계란 모양의 돌이 있다. 이 선돌에는 사람의 얼굴만 새긴 것도 있지만 몸의 일부를 함께 새긴 것도 적지 않다. 둥근 눈이 2개 혹은 3개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로 광선이 뻗어나가기도 하고, 쇠뿔이 솟아나 있기도 하다. 머리 위에 배가 표현된 경우도 있다. 이 인면(人面)은 마스크-가면을 표현했을 것인데, 때로는 우주인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인면과 함께 동심원과 사각형이 합쳐진 듯한 기하문양도 있다.


하나의 선돌에 인면 3개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어, 천계와 지계, 그리고 하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면 석상의 주변에서 말 뼈와 새 뼈 등이 발굴됐다. 모닥불 흔적도 있는데, 불과 연기, 증기를 통해 신과 영령들에게 음식을 대접한 유적으로 해석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를 연 것은 기원전 3000년 중엽~2000년 초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다. 이 문화는 미누신스크 분지를 중심으로 하지만 관련 유적들이 동쪽으로 몽골에서까지 확인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주변 타이가와 삼림초원지대에서는 아직 석기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아파나시예보 문화인들은 청동으로 칼, 송곳, 장신구 등을 만들어 사용했고, 금과 은도 알고 있었다. 토기는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한 것이 많았으며, 향로도 만들어 썼다. 무덤은 토광에 적석을 하고 둘레에는 호석을 두른 것이었다.


신석기시대 타스민 문화인들이 남긴 석상에 황소를 새기기도 했다. 이들은 사냥과 어로 이외에 소와 양, 말을 사육했다. 목축에 종사한 것이었다. 예니세이 강 중·상류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그 유물이 청동기시대 초기의 일반적인 양상이므로, 자생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이는 사얀-알타이 지역에 천연 동광석이 풍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베리아 지역은 이후 오쿠네보 문화 단계를 거쳐 안드로노보 문화와 카라수크 문화로 넘어간다. 안드로노보 문화는 그 중심 지역이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이기 때문에 시베리아와는 약간 무관한 느낌을 주기도 하나, 예니세이 강 유역도 이 문화권에 포함됐다.


안도로노보 문화 자체는 기원전 17세기에 시작됐지만, 예니세이 강 유역의 안드로노보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14~12세기로 편년된다. 안드로노보 문화는 번개무늬 토기가 가장 큰 특징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7000년 전의 아무르 강 유역 토기와 신석기시대 후기 연해주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 토기에도 그와 꼭 같은 번개무늬가 새겨져 있다. 아랄 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신석기-청동기시대에 동일한 문양 모티브를 사용한 것이다. 

기원전 14/13~8세기의 카라수크 문화는 광대한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서쪽으로 멀리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남서쪽으로 카자흐스탄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중국 북방 지역과 동북3성, 한반도 그리고 연해주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똑같은 청동손칼 한반도에서도 출토 




나린얄가 암각화를 조사하는 탐사단

이 문화의 석관묘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석관묘의 기원으로 오래전부터 논의됐다. 청동 단검과 손칼, 멍에 모양의 청동기, 물갈퀴 모양과 연주형의 청동 장신구, 동포 등 수많은 청동기가 제작 사용됐다.

그중에서 산양과 사슴뿔 모양의 손잡이 끝 부분 장식이 있는 단검과 손칼은 몽골과 중국 북방 지역, 그리고 심지어는 은허에서조차 발견됐다. 방울 모양의 손잡이 장식이 있는 단검은 중국 북방 지역에 널리 확인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손칼이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평북 용천 신암리 유적에서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유역의 것과 꼭 같은 청동 손칼이 출토되었다. 비파형동검보다 더 이른 시기의 청동 유물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청동 유물 중의 하나다. 카라수크의 손칼은 연해주에도 보인다.

 이 시기 북방유라시아 대륙은 그야말로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카라수크 문화라는 강풍이 휩쓸고 있었고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연해주와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그 시작이 시베리아 예니세이 강 유역의 카라수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연해주와 한반도의 이른 시기 청동유물은 많은 부분 카라수크 문화와 공통성을 띤다. 앞의 청동 손칼이 그러하고, 청동기시대 전기의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이 그러하다.  

시베리아의 바람은 이후 초기 철기시대인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에서 더욱 세차게 불었다. 남시베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동물 양식과 같은 문화 요소들이 서쪽로는 카르파트 산맥에까지 이르고, 동쪽으로는 하북성 북부지역까지 도달하여 북방유라시아 대륙을 소위 ‘스키타이 문화’로 뒤덮었다.

나는 기원전 7~3세기의 이 문화권을 모두 통칭하여 ‘선흉노-스키타이 세계’라고 부른다. 이 시기 고조선은 카라수크 문화에 뒤이어 바로 선흉노-스키타이 세계와 인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 고조선을 대표로 하는 ‘환(環)만주문화권’은 비파형 동검이라는 독특한 청동단검 문화를 창조했지만, 역시 서쪽의 유목민 문화 요소를 전혀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베리아는 동서 길이가 약 7000㎞, 남북 길이가 약 3500㎞, 면적이 약 1000만㎢로 정말로 엄청난 크기다. 크기만큼 시공에 따른 문화 양상 또한 지극히 다양했다. 신석기시대부터 뛰어난 문화를 태생시킨 시베리아 대륙은 계속해서 새로운 문명을 태동했으며, 그 영향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북방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포괄할 정도였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그리고 연해주도 그 시베리아의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출처] :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특별기획>/ 뉴스메이커 751호2007.11.27




7. 이나바의 하얀 토끼’ 고향은 고구려
- 언어학적으로 토끼와 관련된 고구려 언어가 사할린·홋카이도 지역에 영향


고대 한국어의 어근을 추적하면 고구려의 영향력이 동해를 지중해 삼아 훗카이도, 사할린의 고아시아족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한 종족 집단의 문화적 유산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속에 보존돼 있다. 유전학에서 DNA의 역할은 언어학에서 단어의 어근과 비슷하다.

내가 한국인의 기원을 추적하는 24일간의 답사 여행에 참가한 목적은 이른바 ‘코리안 루트’ 주변에 남아 있는 한국어의 ‘언어 유전자’를 찾는 것이었다. 역사적 유물과 유적은 사라질 수도 있지만 단어 어근은 그 언어를 여전히 사용하는 한 계속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 세계 곳곳서 내려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토끼 이야기'에서 토끼는 트릭스터이자 메신저다. '이나바의 하얀 토끼'도 동해를 건너 고구려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열도에 알린 메신저였다


고대 한국어의 어근들을 포함한 알타이어 어근들의 목록을 완전하게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중국에 있는 만주-퉁구스들은 더는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빠른 속도로 중국에 동화해가고 있다. 그보다는 덜하지만 내몽골인들 역시 중국에 동화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고대 한국어의 어근을 찾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믿는다면, 언어도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이동하고 교류하면서 분화한 결과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프리카처럼 먼 곳의 언어 속에서도 우리 동아시아와 연결되는 언어 코드가 숨어 있을 수 있다. 한국어의 유전자를 찾는 일을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서부 아프리카의 깊숙한 내륙에 위치한 북부 나이지리아의 여러 마을에서도 채집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퍼진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이솝 우화가 사하라 사막을 거쳐 내려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의 경로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즉 원래의 아프리카 이야기가 사하라 사막을 타고 올라가 지중해 세계로 전해져서 그리스의 이솝이 기록으로 남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토끼는 하나의 트릭스터(trickster, 속임수나 장난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적 형상)다. 토끼는 상대방을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어 놀리고 조롱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결국 토끼의 이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상황에 빠지게 한다.

토끼는 경기 상대인 거북이를 조롱하지만, 도중에 잠을 너무 많이 자 결국 거북이에게 지고 만다. 이솝은 분명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라는, 혹은 자신의 능력에 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토끼의 트릭스터 성격은 ‘이나바의 하얀 토끼(因幡の白うさぎ)’라는 일본 이야기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화 범주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에 모신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 神)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나바(因幡), 혹은 인슈(因州)는 사닌도(山陰道)의 고대 지방 8개 중 하나이며, 돗토리 현(鳥取縣) 동부 지방의 옛 지명이다.

‘이나바의 하얀 토끼’는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했다. 자기의 고향 땅 고구려를 방문하기 위해 고구려의 동지중해(동해)를 건너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와니자메(鰐鮫)라고 불리는 무서운 상어들을 모아놓고 그 등을 건너 뛰어 가려고 한줄로 늘어 놓으려는 꾀를 부렸다. 그러나 상어들이 그 꾀를 알아채고 토끼를 잡아 털과 가죽을 모두 벗겨버리고 만다.

바닷가에 발가벗겨진(赤裸, あかはだか, aka-hadaka, 발가벗다, 알몸뚱이) 채 있는 토끼를 발견한 오오쿠니누시노카미가 토끼를 도와주었다. 오오쿠니누시노카미는 기키 신화(記紀神話, 서기 712년 백제 귀족인 오오노야수아마로(大野安麻呂)가 편집한 ‘코지키(古事記)’ ‘キ’와 720년 쓰여진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나오는 주요 신 중 하나다.  

아무르강 길략족 언어서도 발견 

오오쿠니누시노카미는 고구려 출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신은 아시하라 노 나카투쿠니(葦原あしはらの中つ )라는 나라를 세웠고, 나중에 왕위를 물려주고 이즈모타이샤로 은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부리야트공화국 울란우데 부근 부교도 마을의 민속 공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미키 마우스나 도널드 덕 같은 동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영어를 알건 모르건 이 단어들에 포함돼 있는 ‘마우스(mouse)’와 ‘덕(duck)’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강력한 나라의 문화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먼 지역에까지 급속히 퍼져가는 것이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어(Swahili)로 ‘책(book)’은 ‘키타부(kitabu)’인데, 서아프리카 하우사어(Hausa)로는 ‘리타피(littaafi)’이다. 이것들은 원래 아랍어 ‘kitaabu(-n)’나 아랍어 정관사 ‘al-(the)’을 갖고 있는 ‘al-kitaab’에서 온 것이다.

물론 ‘책(The Book)’이란 모슬렘에게는 성서인 코란(the holy book, al-Qur’an)을 뜻하는 것이다. ‘al-kitaab’는 모로코 아랍어(Moroccan Arabic)로 ‘ilktaab’인데, 서부 아프리카에서 ‘*liktaaf’로 바뀌었으며, 그것들은 오늘날의 현대 하우사어(Modern Hausa)와 많은 다른 북부 나이지리아의 언어에서 ‘littaafi’로 남아 있다.

우리의 불쌍한 ‘이나바의 하얀 토끼’는 일본어로 ‘이나바노 시로 우사기’다. ‘토끼(hare, rabbit)’란 단어는 고대 및 현대 일본어로 ‘兎· うさぎ?おさぎ usag-i < osag-i’다. 고구려어로 ‘토끼’는 ‘烏斯含 *osag-am’이다.

한국어 ‘토끼<톳기 thoski’에서 ‘-oski’부분은 고구려어 및 일본어와 유사하지만, 중국어 ‘[ 토]tho-’가 그 앞에 붙어 있어서 중국어-한국어 합성어(Chinese-Korean compound)가 만들어졌다. 

규슈 대학의 이타바시(板橋義三) 교수에 따르면, 토끼와 관련한 이 고구려어 단어는 니브흐어(Nivh)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이 니브흐어는 아무르 강 하류에 사는 길략족(Gilyak) 사람들의 언어인데, 이들은 토끼를 ‘오스크(osk)’라고 하며, 그로부터 사할린과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족(Ainu) 사람들의 언어로 ‘오스케(oske, 兎)’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고구려의 지중해를 건너 남쪽의 이즈모(出雲)로부터 북쪽의 사할린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윤명철 교수가 보여준 통일신라와 발해(서기 698년~926년) 지도(우리 역사지도, 2006년)는 이런 상황을 매우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나바의 하얀 토끼’와 ‘토끼와 달’에 관한 어린이 동요가 있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兎, 兎, 何見て跳ねる?  
十五夜お月樣見て跳ねる.
(토끼야, 토끼야, 무얼 보고 높이 뛰니?  
둥근 보름달 보고 높이 뛰지.)

프랑스에도 ‘Au clair de la lune, mon ami piero’(달빛 아래 나의 친구 피에로)란 동요가 있다. 영어의 ‘lunatic(머리가 좀 돈)’은 프랑스어 ‘la lune(달)’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낮의 더운 날씨가 지나고 보름날 밤의 시원한 달빛 아래 인간은 모두 낭만적으로 바뀐 것이다.

토끼가 뛰어오르면, 아이들은 춤추기 시작한다. 젊은 연인들은 들떠서 서로 꼭 껴안는다. 피에로(어릿광대)의 성격은 ‘우스운(comic)’ 것이기도 하고 또 ‘슬픈(sad)’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토끼의 트릭스터적 성격은 피에로의 성격과 다소 유사하기도 하다. 
城에 해당하는 일본어 한국어에 기원 

대보름 십오야(十五夜)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하다. 하지만 왜 달에서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것일까. 언어학적으로 그 해답을 풀어보기로 하자. 일본어로 ‘떡방아 찧기’와 ‘보름달’은 발음이 거의 똑같다. 즉 ‘모치 투키(餠搗もちつき, 떡을 침)’와 ‘모치 두키(望月もちづき, 보름달)’다. 보름달 ‘모치 두키’ 안에 토끼의 형상이 있다고 상상해보면, 그 모습은 마치 떡방아 찧는 ‘모치 투키’의 모습인 것이다.  

한국어로 ‘보름(달)’은 일본어로 ‘모치(두키)’다. 그래서 ‘떡은 ‘모치(餠, もち)’다. 이 두 한국어 단어의 어두자음 ‘p-’는 고조선어(Old Chosun)에서 기원한 것이며, 그 고조선어는 고구려어에서 ‘m-’으로 바뀌었다가 앞에서 말한 2개의 일본어 단어 형태로 남은 것이다.

일본에는 한국식으로 지은 성과 요새들이 남아 있다. 내가 예전에 산책을 다니던 후쿠오카 현(福岡縣)에 있는 오오노조우 성(大野城)은 전형적인 조선식 산성이다. ‘성(castle)’이나 ‘요새(fort)’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3개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어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중 하나가 고대 일본어 サシ(sas-i <*cas-i, ‘니혼쇼키’ 神功紀 五年 등)다. 이것의 한국어 형태는 자시라(cas-ira, ‘月印釋譜’ 第一六)와 잣(cas, ‘訓蒙字會’ 八)이다. 이렇게 볼 때 아이누어(Ainu) 형태인 チャシ(cas-i)는 일본어를 거쳐 온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서 직접 차용해온 것임에 틀림없다.

아프리카에서 토끼는 트릭스터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가 오는지, 그리고 무슨 일이 닥쳐오는지를 빨리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전달자(messenger), 혹은 예고자(harbinger)로 알려져 있다. 토끼는 고구려의 지중해를 건너서 다가오는 고구려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조몽시대 사람들과 아이누족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가면서 한국식 성과 요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은 새로운 지배자가 진출해 세운 중요한 기지로, 새로운 문명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고구려 제국이 사라지고 100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고구려어에서 기원한 이야기와 단어들은 옛 영토와 그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들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고구려 제국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 본문 내용 ‘떡은 ‘모치(餠, もち)’ 다.에서 떡은 뒤 ‘모치(餠, もち)’ 앞에 아래그림이 들어간다

[출처] :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특별기획>/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 752호, 2007. 12. 04.




8.한국어의 유전자를 찾아서
- 어웡크족·다구르족 언어에서 고대 한국어와 고구려 언어 흔적 발견


대흥안령 지역에는 어웡크족, 오룬춘족, 다구르족 등 여러 몽골로이드계 소수민족의 언어가 남아 있다

우리는 흑룡강성과 대흥안령 지역의 여행을 계속했다. 2007년 7월 21일 우리는 하일라얼(Haila’er)에 있는 어웡크(鄂溫克, Owongku, 혹은 에웽키, 에벵키)족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나는 그 박물관의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어웡크어로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런 연습을 하는 까닭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원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언어가 아직 살아 있는지 구어체 언어를 내 귀로 직접 듣기 위한 것이다. 그 젊은 어웡크 여성은 1~5까지 셀 줄 알았으며, 모르는 나머지는 휴대전화로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소수종족 언어와 문화 존폐 위기



다구르민족박문관에 전시된 사진(위)과 모리다와 시내에서 열린 다구르족 행사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킨다

이틀 후인 23일 우리는 알리사(Alisa)에 있는 오룬춘(鄂倫春, Orunchun)족 박물관을 방문했다. 거기서 나는 한 젊은 여성 직원에게서 역시 오룬춘어 숫자 1~10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숫자 세기가 어렵자 자기 친구에게 달려가 조그만 오룬춘어 어휘 책자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 책자에 있는 숫자들을 그대로 읽었으며, 발음은 그 책자에 나와 있는 간단한 표기보다 훨씬 나았다. 분명 언어가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인 24일 우리는 다우얼(達斡爾, Dawoer, 혹은 다구르, 다후르) 민족 문화 공원과 박물관을 방문했다. 모리다와 다우얼 자치구(Molidawa Dawoer Autono-mous County)의 장이라는 한 노인이 나에게 다우얼어 숫자 1~10을 말해주었다. 그는 숫자 세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으며, 중간에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고 10 이상의 숫자를 셌다.

현장에서 이런 자료들을 분석해보다가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즉 몽골어와 퉁구스어 양자의 원래 파열음 체제(plosive systems)에서 유성/무성 대응(the voiced/voiceless contrast)은 대체로 북부 중국어 파열음 체제의 대기음/비대기음 대응(the aspirated/non-aspirated contrast)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몽골어에서 d:t 대응을 가진 4 dorb: 5 tap가 다우얼어에서는 t:th 대응을 가진

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그 80대 노인이 말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지난 100년에 걸쳐 채집한 모든 언어학적 자료들은 비교 자료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의 깊게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은 다수 민족의 합중국 

이제 에벵키족이나 다구르족 아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외국 학자들이 쓴 책과 논문들을 찾아봐야 할 시점이 다가온 것 같다. 만일 이 민족 언어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면, 민족 집단과 그 문화는 곧 사라질 것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다구르족 노인 아르다합씨는 다구르어로 1~10까지 어렵지 않게 말했다


이 언어들에는 먼 옛날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해온 흔적과 고구려 제국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역시 모두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나는 26살 때 내가 자란 곳을 떠나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였다. 아프리카의 밤은 어두웠지만, 검은 아프리카인들은 어두운 밤보다 검었고, 오로지 눈의 흰자위와 웃을 때 보이는 이만 하얄 뿐이었다. 과거 500년 간의 아프리카 역사는 그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노예 무역과 식민 통치로 파괴됐다.


대흥안령 지역 소수민족 박물관 또는 기념관의 동상들. 다구르족, 어웡크족, 오룬춘족 전사의 모습이다(위부터)

아프리카 민담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친절하게 대해도 불친절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하지만 타인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을 즐거이 하면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온 아프리카인들은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과거 식민 지배를 한 서구제국 팀들을 격파했다. 한국인의 ‘할 수 있다’ 정신이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자신들의 과거 영광을 일깨울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제 그들의 신체적 역량은 스포츠와 같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500년 동안 아시아 역시 어두운 역사를 가졌지만, 아프리카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볼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족감(自足感)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은 아시아인에게로 유전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이래로 한국에는 조선이라는 하나의 왕조가 있어왔으며, 중국에는 명(明)과 청(淸)이라는 두 왕조가, 그리고 소아시아에는 투르크족의 오토만 제국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듣고 유럽의 지식 계층들은 놀라워 했다.

유럽인들이 침입해오기 전에 아프리카 역사는 밝고 평화로웠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는 이집트 문명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을 때 종말에 이르렀다. 이집트는 동방으로부터 힉소스(Hyksos)라고 불리는 기마민족의 침입을 받은 짧은 기간(BC 1670~1570) 외에는 거의 3000년 동안 어두운 시기를 겪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그리고 수메르인을 제외한 모든 민족 집단이 셈어계(Semitic) 민족이었던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중국에서는 한민족(漢民族)과 알타이어계 민족 집단들이 거의 교대로(송, 원, 명, 청) 지배해왔다.  

커다란 혼란기(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 하나로 통일된 평화로운 시대(진, 한)가 이어졌다. 알타이어계, 한족(漢族)계, 그리고 다른 계열 문화들이 하나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오고(5호16국), 그 혼란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그렇게 중국은 한족계(당, 송)나 아니면 알타이어계(요, 금, 원)에 의해서 다시 통합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EU가 유럽인 국가들의 연합인 것처럼, 현대 중국은 56개 소수 민족 집단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몽골로이드 여러 민족 집단의 합중국(合衆國)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동적인 알타이어계 민족들은 창조적이지만, 정적인 한족계 민족은 알타이어계의 모든 것을 부수어 삼켜버리고 있다. 한족들은 북동부 중국에 있는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 역사가 한족 역사라는 잘못된 주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국 전체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민족들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북동부 중국의 역사는 몽골로이드 합중국의 고구려와 만주-퉁구스어계의 역사다. 

황하문명은 몽골로이드 문명 

중국 문명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그 문자 전통에 있다. 이집트 신성문자가 이집트 문명의 기초적 요소였듯이, 중국어 글자는 역시 중국 문명의 기본이다. 이 두 글자 모두 상형문자이므로, 일(日, sun), 구(口, mouth), 목(目, eye), 인(人, person) 같은 비슷한 형태의 문자가 많다.

그러나 상·하 이집트가 BC 2850년에 통일된 직후 이집트 신성문자가 만들어졌고, 반면에 가장 오래된 중국어 글자인 갑골문자는 BC 1300년쯤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집트 신성문자는 중국어 글자보다 1500년 이상 오래 되었다.

이런 시간적인 차이는 이집트의 필기 체제나 그 기본구조가 중국이나 고조선을 포함한 기타 알타이어계 지역들에 도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갑골문자를 최초로 만든 사람이 꼭 중국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본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연대가 BC 5000년대까지 올라가는 내몽골에 있는 홍산문화 지역과 기타 고고학 유적지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연대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오랜 연대와 비교되는 것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계, 시노-티베트어계, 남아시아어계(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계, 그리고 몽골로이드들이 사용하는 기타 어족의 조상들이 모두 이 오랜 문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역은 또한 고조선의 영역이기도 하면서 발해만과 서해(황해)와 마주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형구 교수와 함께 그곳 바다를 ‘고조선의 지중해’라고 부른다.

이것은 중국 본토 서쪽까지 포함하는 일명 황하 문명이 분명 순전한 중국인 문명이 아니라, 고조선인들을 포함한 알타이어계 민족들이 한족과 기타 몽골로이드 민족들과 함께 만든 몽골로이드 문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출처] :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특별기획> /주간경향,뉴스메이커 제753호.2007.12.11.



 




9.단군은 수달임금, 주몽은 산달 사냥꾼 - ‘獸祖’와 ‘유목’코드로 한민족 태반사 읽기
… 조선·고구려는 순록유목 생태생업문화권 소산  


중국 내몽골자치구 훌룬부이르시에 위치한 훌룬호. 훌룬-부이르 자매의 슬픈 전설을 담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필자의 이번 역사 유적 답사길은 다른 대원들과 다른 구석이 있다. 특히 바이칼 호반과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유목사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미 1990년 초반부터 이제까지 십수 년을 오간 탐사 길이어서 그렇다.

어떤 부분은 초행길 독자들과 답사 현장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느낌마저 든다. 답사 일기를 되씹어가며 나름대로 재확인해 대원들과 더불어 정리하는 일이어서다. 역사를 쓰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여기저기 얽힌 절절한 추억들을 더듬어보는 계기도 되었다.
어쩌다 60대 중반을 넘긴 이 나이까지 사서 이 고생을 하고 다니나 하는 서러운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 길을 오가노라면 의사로, 또는 전기공학도로, 생명공학도나 철학도로 이 험한 역사 탐험길을 내닫는 엉뚱한 이들을 종종 만난다.

필자는 그래도 명색이 사학도라 그런대로 자기를 달랠 제 이야기를 나름대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쩌다 순록한테 홀려, 어이타 수달이나 산달이라는 별명을 가진 너구리에게 이끌려 이 험로를 내가 이렇게 오래 헤매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문제를 잡으면 집요하게 놓지 못하는 고집스러움 때문일 뿐이었던가 보다.  

너구리-맥’ ‘수달-예’라는 견해  



훌룬호 남쪽 몽골공화국 접경지대에 있는 부이르호. 훌룬은 암수달, 부이르는 숫수달을 뜻한다. <김문석 기자> 

코리안 루트 답사길에서는 7월 21일 부이르호반에서 부이르라는 남동생과 훌룬이라는 누이에 얽힌 전설을 현지 주민에게서 취재하면서 이야기가 비롯됐다. 훌룬호와 부이르호에 관한 이야기인데, 둘이 다 수달이지만 부이르는 숫수달이고 훌룬은 암수달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 방은 서울의 어린이대공원 앞 세종대 역사학과 연구실이지만, 실은 이는 28년 만의 복귀일 뿐 나는 그간 20여 년을 춘천에 귀양살이하듯 해직당해 내려가 살다가, 동국여지승람에 ‘본래 맥국’이라는 기록이 있을 만큼 산달(山獺)인 맥(貊)-너구리를 비롯한 각종 짐승들이 많았던 왕년의 산짐승 천국에서 숨쉬고 살면서 산달인 맥의 나라와 그리고 이와 상대되는 동해변 강릉의 수달(水獺)인 예(濊)의 나라와 첫 인연을 맺었다. 



조선과 고구려는 '뿔'을 상징으로 하는 순록과 '날개-깃털'을 상징으로 하는 새의 결합형 순록유목 생태생업 문화권의 소산이다. 대흥안령 지역 선비족이 사용했던 머리 장식. <김문석 기자>
 
전공이 몽골사인 데다가 마침 1990년대에 들어 북방 사회주의권이 개방되고 이어서 비행기가 오가고 인터넷망이 연결되면서 틈만 나면 수시로 지금까지 특히 바이칼-몽골-훌룬부이르 일대를 드나들거나 또는 한두 해 체류하며 더 머나먼 시베리아 귀양지에서 모든 잡념을 끊고 그 뿌리를 캐는 데만 전념하게 됐다.

1980년 해직교수의 색다른 기구한 인생유전이 맺어낸 결실이랄까. 나는 지금 다시 세종대 사학과에 복직해 정년 9개월을 남겨두고 이 글을 정리하고 있다.

시베리아-만주지대에서 고원지대를 대표하는 짐승이 산달인 너구리-‘맥’이라면 저습지대를 상징하는 짐승은 수달인 부이르-‘예’라는 것이 내몽골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아르다자브 교수의 견해다. 지금 부이르 호반에서 현지인에게 다시 확인하고 있지만 부이르는 전설상으로 숫수달의 뜻을 갖는 이름이다.

숫수달이 암수달보다 더 모피(Fur)가 좋아서 사냥감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Buir’의 ‘B’와 ‘R’자가 탈락하면서 ‘예(濊)’자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는 2003년 정월에 실제로 눈이 내리는 춘천 맥국 유허비 언저리를 현지 답사한 다음에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예’계와 ‘맥’계는 역사적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왔다며 실례를 들어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예컨대 맥계인 거란(遼)이 서니 예계인 여진(金)이 일어나 이를 멸망시키고, 이 여진을 다시 맥계인 몽골(元)이 정복해 지배하다가 결국은 예계인 만주(淸)제국에게 아주 거의 철저히 멸망당했다는 것이지요.

저습지대 종족 예족과 고원지대 종족 맥계가 치열하게 공방사를 펼쳐온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변 강릉의 예국 유적과 산중의 짐승왕국 춘천의 맥국 유적이 상존한다는 시각의, 집요한 천착이 이제 아주 긴박하게 요청되고 있는 셈이지요. ‘예’라는 수달(水獺)과 ‘맥’이라는 산달(山獺)이 통일되면 ‘예맥’(濊貊)=달달(獺獺: Tatar)이 된다고 보는 이도 있어요.”

단군조선의 단(檀)이 예맥국” 

나는 이 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달=타타르는 단단(檀檀)으로 한문으로 음사(音寫)되기도 해서 실은 단군조선의 단(檀)이 수달과 산달, 곧 예와 맥이 통합된 예맥국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문명화한 백(白)타타르가 ‘배달’로 불렸음직도 하지만, 선비족 단석괴(檀石槐)라는 칸도 있고 중국인명사전에는 단씨 성을 가진 인물이 십수 명이나 등재돼 있어요.

실은 동북아 고대사에 이름을 남긴 맥궁(貊弓)이나 단궁(檀弓)이 모두 맥족이나 단족이 만든 명궁이지, 근래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 해모수가 아들 주몽에게 ‘이는 박달나무로 만든 활인데…’ 하고 비장한 어조로 말하며 남겨주는 박달나무 활이 전혀 아니지요.

 맥궁이 맥나무로 만든 활이 아니듯이 단궁 또한 결코 단나무로 만든 활이 아닙니다. 맥나무란 본래 없고 박달나무로 좋은 활을 만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궁이나 맥궁이 실은 모두 예맥=달달=타타르=단단족이 만들어낸 명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맥은 별명이 산달이니까요. 맥적은 물론 맥족이 만들어 먹던 적(炙)=불고기지요. 맥은 산달이라 시베리아 고원지대 타이가에서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시달리다가 자연 발화로 만들어진 산짐승의 불고기에서 비롯한 듯하고요.

저습지대 예는 불씨가 구하기 힘들고 추워서 날고기를 주로 먹다 보니 육회나 물고기 회(膾)를 후세에 전해내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맥국 유적지가 있는 춘천의 불고기가 맛이 있고 예국 유적지가 있는 강릉의 회가 별미로 손꼽힙니다. 둘을 합하면 회자(膾炙)지요. 인구(人口)에 회자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는 동북아 고대의 별미 중의 별미인 특별 요리로 유명했지요.

본래 중국에서 비롯된 라면을 일본이 위생적으로 가공해 근래에 수출했고, 여기에 한국인의 맛내기 솜씨가 가미돼 한국 라면이 되었는데, 이 한국 라면이 베이징, 울란바토르,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는 물론 미국 식당가까지 들어가 라면 맛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역시 전통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실감하게 됐어요.

 수달과 산달 사냥꾼들인 조선과 맥족 고구려가 창조해낸 맛의 천국인 셈이지요. 이런 맥락으로 미루어 저는 ‘단군(檀君)은 수달임금, 주몽(朱蒙)은 너구리 사냥꾼’이라고 강변하고 있지요!”

순록치기가 기마양치기로 발전  



예맥족의 예는 숫수달(아래) <한국수달연구센터 한성용 소장 제공> 맥은 너구리에서 유래했다.<우르몽골훌룬부이르대학 황학문 교수 제공
 
실은 나는 1999년 가을부터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에 한 해 동안 상주하며 이런 사실을 현지에서 직접 조사 연구해 국내에 보고했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맥에 관한 이런 답사 보고가 주목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2005년 3월 23일에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객원교수로 와 있는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의 박인주(朴仁珠) 조선족 교수가 “대·소흥안령에 별명이 산달(山獺)인 맥(貊)이라고 불리는 ‘너구리’-내몽골어 ‘엘벵쿠’가 지금도 적지 않이 뛰어 놀고 있다”고 관계 학회에 공식 보고를 하고 나서다.

 그러나 그래도 언론은 꿈쩍도 않다가 2007년 봄에 내 책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에 이 내용이 등재되어 서울발 연합뉴스를 타고서야 다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현지 답사길 가기보다 더 어려운 험로였다.

마침 국내 유일의 수달 전문가인 한성용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적인 차원의 ‘수달연구센터’가 춘천 언저리에 있는 화천에 세워졌는데, 이를 계기로 자잘한 밥그릇 겨루기식 연구를 지양하고 역사 정보가 전파를 타고 빛의 속도로 세계 각지를 오가는 IT지구 마을시대답게 과감히 시베리아-몽골에 그 문호를 열어 예맥의 맥=너구리 연구도 동물학적인 접근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베리아라는 세계 최대의 숲의 바다를 태반으로 그 창세기를 써온 종족들이 짐승을 조상으로 삼는 수조(獸祖)전설을 거의 100% 공유하고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예(숫수달:Buir=夫餘)-맥(너구리:Elbenku)-조선(순록치기:Chaatang)-고[구]려(순록:Qori)-발해(渤海:늑대의 토템語: Booqai)-솔롱고스(黃 :누렁 족제비:Solongo의 복수형)라는 종족 또는 나라 이름이 이미 한민족 스키토·시베리안 기원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조선과 고구려-몽골 국명이 그러하듯이 이들은 순록치기가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기마 양치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기틀을 마련하는 것 같다.  

조선과 고구려는 ‘뿔’을 상징으로 하는 순록과 ‘날개-깃털’을 상징으로 하는 새의 결합형 순록유목 생태생업문화권의 소산이다. 말은 그 이후의 후래적인 요소다. 그래서 스키타이인들은 뿔이 없는 말에게까지 황금 순록의 뿔 탈을 씌우려 한 것이다.

황소(뿔)와 백조(깃털)의 결혼 이야기로 내용이 구성된 순록치기 코리족 시조 탄생 설화가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적시(摘示)하고 있다. 역사 드라마로 동북아가 온통 술렁이는 듯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한국과 중국의 그것들을 번갈아보면서 내가 아주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다.  

툰드라, 타이가, 스텝과 농경지대를 두루 오갈 수 있는 힘센 동물이 각력(角力)을 자랑하는 황소였을 것이다. 순록치기 붉은 악마 치우(蚩尤)는 그걸 타고 툰드라-타이가-스텝-농경지대를 누볐으리라. 대규모 양치기 수단으로 철제 재갈을 말에게 물려 말을 타기 이전까지는 순록치기가 순록유목권을 벗어나면 힘센 황소를 주로 탔음은 물론이다.

한인(漢人)들의 그것과 다른 조선-고구려의 문무관복의 장식 치장들이 이를 잘 입증한다고 달리는 차 속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씨름도 뿔힘 겨루기인 각저(角抵)요, 우두(牛頭)머리도 ‘뿔의 칸’인 각간(角干)-이벌찬(伊伐:Eber飡)이다. 뿔 달린 도깨비의 요술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많다. 솟대는 새의 깃털로 상징된다. 기마 양유목의 모태인 순록유목태반에서 조선-고구려가 이미 배태됐다는 것이다.

그 호칭 자체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상상과 추리의 나래를 펼치는 나날들을 탐사길에서 보내면서 7월 말엔 어느새 답사의 종착역, 몽골 스텝의 바람이 거센 스텝인 대흥안령 남부 홍산 문화권에 들어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출처] :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특별기획>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754호.2007.12.18. 



10. 웅녀와 호녀의 ‘사랑싸움’ 이야기 

-툰드라 지역 순록치기 곰 토템족의 사냥꾼 범토템족 정복사 




단군신화도 순록유목 태반사의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 훌룬부이르 대초원의 양 유목. <김문석 기자> 


코리안 루트 탐사에서 단(檀)족 군장들인 단군의 족적을 추적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한반도 사관에 고착된 우리의 시각과 시야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으니 단군도 한반도에서 경영형 부농으로 입신한 인물쯤으로 상정하고 한민족의 창세기를 서술해내는 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군이 기원전 2000~ 3000년 전에도 고온다습한 태평양 중 한반도에서만 농사를 지어먹고 산 청동기인이라고 못박아놓아야 주체적이라며 안심하는 경향은 여전한 것 같다.

5000~60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은 많게든 적게든 움직이게 마련이다. 생업이 유목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튀어나온 광대뼈며 째진 눈과 염소 수염, 그리고 성형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콧날이 거의 서지 않았던 많은 납작코 유형은 오랜 툰드라 생활사를 겪지 않고는 한반도나 발해 연안에서만 설계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신체 유형을 디자인해준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 태반사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 순록치기 천하 . 



시베리아 전도. 순록 유목 문화권인 오비·예니세이·레나 강은 북극해로 흐르고, 몽골고원에서 발원한 케룰렌강은 아무르 강과 연결돼 태평양으로 흐른다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만주의 북쪽에 있는 사하의 툰드라와 삼림 툰드라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대만주 권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하고, 순록의 먹이인 이끼(蘚)가 눈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른 식량 생산업과는 달리 본격적인 유목의 태초라 할 특수 목축인 순록 유목이 극북지역에서 대규모로 먼저 이루어졌다.
그곳은 너무 추워서 호랑이도 양도 거북이도 못 산다. 숫수달인 ‘부이르(Buir)’-예(濊)도 산달인 ‘너구리’-맥(貊)도 못 사는 그 동토지대에서 순록치기의 천하가 이미 신석기시대 이래로 경영돼왔다는 사실은 지금의 한반도 한국인이 보기에는 참으로 기상천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니세이 강의 ‘예니세이’는 원주민의 이름이다. 레나 강의 ‘레나’는 원주민어로 ‘큰 물’이라는 뜻이며 대만주권과 대사하권을 남북으로 가르는 장대한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아무르 강으로 흘러든 제야 강의 ‘제야’는 에벵키어로 ‘칼날’이라는 뜻이다. ‘아무르’는 에벵키 청년의 이름이다.
이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흥안령에서 흐르는 눈 강과 백두산에서 기원하는 송화 강이 칭기즈칸이 마시고 자란 케룰렌 강을 발원지로 하는 아무르 강으로 유입해 마침내 한반도의 동해-태평양으로 흘러든다는 지리적 초보 지식을 익힌 이는 또 얼마나 될까. 케룰렌 강에서 종이배를 띄우면 한국의 동남해안 삼척이나 부산에도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2005년에 사하를 답사해 관계 정보들을 수집하고 나서는, 2006년 여름엔 마침내 툰드라~수림 툰드라 지역인 한디가 압기다 에벤족 순록 유목지를 답사하며 아주 놀라운 체험을 했다. 7월 11일에 연해주에서 출발해 스타노보이 산록을 돌아 바이칼 호수에 오는 동안 그간의 북극권 답사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리해 이야기들을 나눠보았지만, 코리안루트 탐사대원들과 함께는 그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바이칼호 알혼섬의 부르칸 바위에 코리족 족조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것은, 순록이라는 뜻인 ‘코리(槁離)’의 유라시아 최대 유목지대가 앙가라 강을 통해 예니세이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와 전에는 물길이 열려 있는 흔적이 보이는 카축 일대를 통해 레나 강으로 이어지는 지대 사이의 북극해권이기 때문이다.
고원 건조지대 바이칼 호수면에 비친 따가운 햇볕이 반사돼 천상의 구름을 소멸시키기 때문에 거대한 호수지대이면서도 건조하고 하늘이 유난히 맑아 이곳에 제천단이 많이 세워지고 천문 관측이 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어느 천문기상학자의 견해가 새삼 생각난다. 

수분 친화적 토템족 정착 성공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의 전설이 서린 바이칼호 알혼 섬의 부르한 바위. <김문석 기자>

 

IT, BT 시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세계 각지의 관계 정보를 충분히 소화하는 터전 위에 과학 언어로 그 순록 유목 태반사를 본격적으로 복원하는 차원에서 해독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떤 생태에서 뭘 해 먹고 살아왔느냐에 관한 엄밀한 논증 과정을 거쳐 논리 정연하게 사람 생명 살이 얘기로 다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 ‘게놈’에 주목하며 조선 태반사를 복원해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랄 산맥 중에 대통령이 집정하고 쿠마(錦: 熊) 강이 흐르는 ‘고미’ 공화국-곰 나라-이 있다. 요즈음도 일부 투르크계 종족이 살고 있지만 고대에는 주로 황인종이 원주민으로 살았는데 그 신화 내용이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박물관에는 아예 아기를 안은 청동 곰녀상까지 진열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민족 동류 루트 답사를 이끌고 있는 김영우 교수의 조언이다.

박정학 치우학회장은 환인에 대해 황의돈·송석하 소장본 ‘삼국유사’ 및 1902년 도쿄대 발행 활자본 등에는 분명히 모두 ‘환국(桓國)’으로 쓰여 있는데 1921년 교토대학의 영인본에만 ‘환인(桓因)’으로 되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환웅은 환인의 아들이 아니라 북방 몽골로이드의 호칭 관행을 따라 환국(Khan ulus)의 서자라는 관직을 가진 칸(桓: Khan) 바아타르(雄: Baatar)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같은 동굴에 사는 웅녀와 호녀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함은, 식량 생산 기원지인 서아시아에서 알타이 산을 넘어 사얀 산맥을 타고 동래한 선진 환웅족이 곰 토템족과 범 토템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식량 생산 단계로 진입하려는 경쟁을 벌였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이들이 식량 채집자 사냥꾼만으로가 아니라 좀 더 편안하게 사람답게 사는 식량 생산자 순록치기가 되는 길을 모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실은 전래하는 단군의 영정대로라면 그 긴 수염은 혹한지대인 극북의 몽골로이드의 것일 수 없고 따라서 그 혈통에는 당시의 선진 서아시아인적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동굴 근거지 쟁탈전서 곰토템족 승리 



 

다마스커스 박물관의 아기를 안은 곰녀상 


마늘과 쑥을 먹고 햇빛을 안 보고 100일간 견디기를, 사냥꾼의 식량 채집 단계에서 순록치기의 식량 생산 단계로 나아가는 시련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본 것으로 풀이해볼 수는 없을까. 물고기도 잡아먹는 수분 친연적인 곰 토템족이 이와 유사한 북극 생태 환경에 익숙한 순록을 유목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극의 혹한 생태 속에서 못 견디고 덜 수분 친연적인 범 토템족이 이에 적응해내지 못하는 과정을 설화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나라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곧 그 생업을 지칭해 ‘순록치기의 나라’라고 했음을 말해준다.

실은 웅녀 전설도 2000년대 지식 산업 시대에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레나 강 북극해권에는 호랑이는 추워서 못 살고 곰은 잘 사는데 특수 목축인 유목의 경우에 순한 순록의 유목이 먼저 시작되고, 아무르 강 태평양권 몽골 스텝에서는 북극권에서 역시 추워서 못 사는 양의 유목이 사나운 말을 타고나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다.


말은 금속 재갈을 물려야 탈 수 있으므로 청동기~철기시대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했다. 레나 강 북극해 권에서 유목 생산을 먼저 시작한 곰 토템족은 힘이 넘쳐 아무르 강 태평양 권으로 진출하게 됐는데, 여기서 호랑이 토템 부족과 대흥안령 북부 선비족의 갈선동이나 고구려 집안(輯安)의 국동대혈(國東大穴)과 같은 동굴 근거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연히 선진 곰 토템족이 범 토템족을 내쫓고 동굴을 독점해 살면서 환국의 서자 벼슬아치인 환웅과 결혼해 곰녀의 자손들을 낳게 됐는데, 그게 칸의 혈통을 타고난 알탄우룩(Altan urug: 黃金氏族=‘해’겨레)-천손족인 순록치기 한(韓: Khan) 민족일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짐승과 달리 사람으로 다시 나게 된 것은 당연히 생명 생산과 사육의 원리를 터득해 식량 채집 단계에서 식량 생산 단계라는 생명 주관 과학 누리로 진입하면서다. 그래서 엔 베 아바예프 투바대학 교수는 “순록을 상징하는 젖을 주는 암사슴(Sugan-Soyon, 鮮)이라는 낱말에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본다. 웅녀는 환웅과 결혼해 사람 곧 ‘순록치기’-선인(鮮人)을 낳았던 터다”라고 말한다.  

나는 일찍이 현지 답사 중에 이런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파이호(巴爾虎)로 음역되는 바르쿠족은 호랑이 토템일 가능성이 있다. ‘바르(Bar)’가 몽골어로 범-호랑이인데 ‘쿠’는 ‘~을 가진’이란 뜻이므로 그런 가능성이 높다.


한자 음역에 ‘호(虎)’자가 든 것도 음역(音譯)과 의역(意譯)을 동시에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한인(漢人)들의 음사(音寫) 전통으로 보아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예컨대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음역하고 고려를 멋진 2개의 뿔이 달린 사슴이란 고려(高麗)로 음역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실제로 바르쿠진 분지를 따라 내려오며 범내, 범바위, 범고개와 범골과 같은 호랑이 관계 지명이 많은데 바르쿠족 원주민들과 함께 하는 구체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답사 중에 7월 17일에 놀랍게도 셀렝게 강변 샤먼산 게세르 100년 기념비 앞에서 현지 원주민에게 1905년에 마지막 호랑이가 총살되었다는 정보를 확보해 마침내 이를 입증할 수 있었다. 금번 답사가 이룩한 작은 기념비적 업적이라 하겠다. 그 결과 이런 유목형 몽골의 여(女)단군-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 탄생 설화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비사’에 실린, 코릴라르타이(순록치기: Qorichi 부족들)의 메르겐(麻立干: Mergen)과 바르쿠진 고아가 결혼해 몽골 여시조 알랑 고아를 낳는 이 탄생 설화는 실은, ‘코리(馴鹿)치’-순록치기가 돼 식량 생산 단계에 든 레나 강 북극해권의 선진 곰 토템족이 아직 식량 채집 단계에 머물러 있는 아무르 강 태평양권의 수렵민 후진 호랑이 토템족을 정복하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정녕 이 몽골 여시조 탄생 설화는 단군 탄생 설화의 유목형 전개라고 하겠다. 
 [출처] :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특별기획> /주간경향 뉴스메이커 제755호.2007.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