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재발견 4.[백년의 영토분쟁]
백년의 영토 분쟁
1] 덕종 “보주성 탈환” 외치다 18세에 의문의 죽음
북한이 국보로 지정한 의주성 남문 전경. 고려 영토였던 의주(당시 지명은 보주)는 1014년부터 103년간 거란에 점령됐다. 고려는 보주를 되찾기 위해 거란과 분쟁을 거듭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07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분쟁’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같은 영토분쟁이 고려 때도 있었다. 1014년(현종5) 거란이 압록강 동쪽 고려 영토인 보주(保州·지금 義州)성을 점령한 뒤 고려가 이곳을 되찾은 건 100여 년 뒤인 1117년(예종12)이다. 거란이 보주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점만 다를 뿐 장기간에 걸친 영토분쟁이란 점에서 독도 영유권 분쟁과 다를 바 없다. 분쟁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은 뒤 그것을 끼고 동서로 성을 쌓았다. 고려는 군사를 보내 공격해 깨뜨리고자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고려사』권4 현종6(1015) 1월)
거란이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해 고려 영내로 들어와 성을 쌓은 건 1014년(현종5) 6월이다. 6개월 뒤인 1015년 1월 고려가 이 성을 공격한 것이다. 거란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거란이 쌓은 성은 압록강 서쪽의 정원성(定遠城)과 동쪽의 내원성(來遠城)이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내원성을 공격했다. 거란은 고려 영토인 보주를 점령해 내원성으로 이름을 고쳐 거란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고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백한 영토침략 행위였다.
거란이 1010년(현종1) 두 번째로 침략하자, 고려는 국왕 현종이 거란에 직접 가서 항복하겠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는다. 그러나 현종이 거란에 가지 않자, 거란은 이를 빌미로 강동 6성의 반환을 요구한다. 이마저 고려가 거부하자, 1014년 6월 거란은 보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오가는 육로의 요충지인 보주 점령은 강동 6성을 되돌려 받기 위해 군사적으로 고려를 압박하려는 거란의 선제 공세였다. 전략과 교통의 요지인 강동 6성의 지정학적 가치를 거란이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방증이다.
고려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 하구에서 안변 도련포까지 쌓은 천리장성.
거란 침입 대비해 압록강변 천리장성 축조
보주성 점령 4개월 만인 1014년 10월 거란은 제 3차 침략을 단행한다. 3개월 뒤 고려는 앞의 기록과 같이 기습적으로 보주성을 공격하다 실패한다. 3차 전쟁은 5년 뒤인 1019년 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을 물리치면서 종결된다. 그러나 고려는 보주성을 반환받지 못했다. 10년 뒤 고려는 다시 보주성을 공격한다.
“1029년(현종20) 흥요국(興遼國)이 요(거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이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문신 곽원(郭元)은 왕(현종)에게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점령한 성을 이번 기회에 공격해 빼앗기로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은 상소를 올려 불가능하다고 건의했다. 곽원은 고집을 굽히지 않고 군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 때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고려사』권94 곽원 열전).
1029년(현종20) 발해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에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을 세우자, 거란이 고려에 흥요국 진압을 위한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다. 이때 보주성 공격을 제안한 곽원은 거란이 1014년(현종5) 6월 제3차 침략을 단행했을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던 인물이다.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매파였던 것이다. 곽원은 다른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고려는 1015년(현종6) 1월에 이어 14년 만에 단행한 두 번째 보주성 탈환 전투에서도 패배한 것이다.
2년 뒤인 1031년 현종이 숨지면서 그의 맏이인 덕종(德宗·1016~1034년, 1031~1034년 재위)이 즉위한다. 그해 10월 고려는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국왕 성종(聖宗)의 장례식(이해 6월 사망)과 흥종(興宗)의 즉위식에 사신을 파견할 때 보주성 반환을 요구한다. 고려가 이같이 거란을 압박할 수 있었던 건 국제정세 변화 때문이다.
먼저, 흥요국 건국과 같은 발해 부흥운동 직후 거란 성종이 숨지고, 부마 필제(匹梯)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거란의 어수선하고 불안한 정세가 작용했다. 고려는 이를 틈타 보주성을 반환받으려 했던 것이다. 다음, 당시 고려는 덕종의 장인 왕가도(王可道)가 정국을 주도했다.
왕가도는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한 매파였다. 매파와 비둘기파를 적절하게 이용해 정국을 주도하던 현종이 죽자, 매파인 왕가도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이해(1031년) 11월 거란 성종의 장례식에 참석한 고려 사신이 귀국한다.
“(사신) 김행공(金行恭)이 귀국하여 ‘거란이 우리 고려의 요구를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평장사 서눌(徐訥) 등 29명은 ‘사신 파견을 중단하자’고 했다. 반면 중추사 황보유의(皇甫兪義) 등 33인은 ‘거란과의 단교는 결국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폐단을 가져다 줄 것이니, 거란과의 관계를 유지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좋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덕종은 서눌과 왕가도의 의견에 따라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죽은 거란 성종 연호만 사용하기로 했다.” (『고려사절요』 권3 덕종 즉위년(1031) 11월)
거란이 보주성 반환을 거부하자 고려는 새로 즉위한 흥종의 연호 사용을 거부한 것이다. 거란의 새 국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고려는 이듬해인 1032년(덕종1) 정월 거란 사신의 입국도 거부한다. 거란과 외교관계까지 단절한 것이다.
고려는 이어 삭주(보주 인근), 영인진(함경도 영흥), 파천현(함경도 안변) 등지에 성곽을 쌓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 이 조치의 연장이 1033년(덕종2) 시작된 압록강 하구에서 함경도 안변 도련포까지의 천리장성 축조다(1044년 완성).
덕종, 강경파 장인 사망 넉 달 뒤 같은 운명
덕종이 즉위 4년 만에 숨지자 상황은 급변한다. 전왕의 동생 정종(靖宗고려 제10대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035년 거란은 외교관계의 재개를 요구한다. 여러 차례 교섭 끝에 1039년(정종4) 두 나라는 보주 문제에 타협하고, 8년간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선왕(성종)의 유지(遺志)를 거스를 수 없다는 구실로 거란은 보주성 반환을 여전히 거부했다. 대신 이곳에 고려인의 농경과 정착을 허용한다. 보주성을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고려가 농민의 경작과 정착권을 획득한 건 거란의 보주성 영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언제든 반환의 불씨를 살릴 근거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떻든 보주성 영유권 문제는 긴 시간을 요하는 장기 과제로 남긴 셈이 되었다. 보주성 문제가 8년 만에 타협론으로 급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신의를 지킬 수 없어 태조(왕건)가 그들을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대연림(大延琳)의 난(발해의 후신인 興遼國을 건설한 일)을 계기로 거란과의 구호(舊好)를 버리는 것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反正)하매 미처 겨를이 없었다. 덕종은 어리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경계해야 했다. 왕가도가 (거란과) 화친의 의리를 끊자는 주장은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황보유의의 주장보다 좋지 않다.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만에 최연하(崔延嘏)가 거란에 사신으로 가고, 4년에 거란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왔다. 이때부터 (고려와 거란은) 다시 화평을 유지했다.” (『고려사』 권5 정종 12년, 이제현의 정종에 대한 史評)
이제현(1287~1367년)은 정종 때의 타협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원나라와 고려의 원만한 관계를 희구한 원 간섭기 지식인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평가다. 그런데 위의 글을 읽어보면, 타협론이 나오기까지 매파를 대표한 왕가도의 단교론(斷交論)과 황보유의의 화친론(和親論)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종은 거란에 보낸 문서에서 ‘보주성 반환 주장은 전왕(덕종)이 제기한 것’이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거란과 타협한다. 즉 보주성 문제와 거란 관계의 재개는 별개라는 논리다. 정종의 즉위와 타협론의 득세 뒤에는 고려 정국 내부에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1224~1300년)는 『제왕운기』에서 “덕종은 어찌해서 (재위기간이) 4년에 그쳤는가? 봉황이 와서 태평성세를 송축하네”라고 당시 역사를 시로 읊었다. 『고려사』 등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덕종 때 강경론을 주도한 정치세력의 몰락이 덕종의 죽음을 재촉했고, 이후 정국이 안정을 되찾은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덕종의 장인으로 정국을 주도한 왕가도가 1034년(덕종3) 5월 사망하고, 덕종도 이해 9월 숨진 사실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보다 90여 년 전인 949년(定宗4) 1월 후견인 왕식렴이 죽자, 서경 천도를 추진한 정종(定宗고려 제3대 국왕)도 3개월 뒤 사망한 사실을 연상케 한다.
덕종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그의 죽음은 보주성 문제를 둘러싼 강온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였다. 즉 타협론이 등장하기까지 엄청난 정치적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의 언급 외에 확인할 기록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온건론(타협론)이 정국을 주도함에 따라, 보주성 문제는 이후 80년의 긴 시간 동안 지루한 외교전을 통해 해결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2]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
중국 단둥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북한의 위화도. 고려는 압록강 일대에 세워진 보주성을 놓고 거란과 100년 넘는 영토분쟁을 벌인 끝에 이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중앙포토]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에 쫓긴 거란이 보주성에서 철수한다. 고려는 마침내 보주성을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보주를 의주(義州)로 명칭을 고친다. 1014년 이래 103년 동안 고려가 기울인 적공(積功)이 백년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국왕 예종에게 올린 신하들의 글은 감격에 겨워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압록강의 옛 터(*보주)와 계림의 옛 땅은 멀리 선조 때부터 옷깃과 허리띠와 같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새였습니다. 중간에 거란에게 빼앗겨, 사람들은 분노했고 신(神)조차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거란과 금나라가 다투어 보주성의 향방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하늘이 금나라로 하여금 이 땅을 우리에게 헌납하도록 길을 열었고, 거란이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의 우물과 연못이 우리 땅이 되어, 세금을 매기고 농사를 지어 우리의 영토를 넓히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권14 예종 12년 3월)
압록강에서 한반도 남쪽 끝 계림의 땅까지 전부 우리 땅이라는 분명한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글의 하나다. 보주성 탈환에 인간이 아닌 신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은 수사일 뿐이다. 그 뒤엔 고려 특유의 유연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외교전략이 발휘됐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읽어야 백년 영토분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비(현종)에 이어 아들(*덕종)이 그를 이었으며, 형이 죽자 동생(*정종과 문종)이 각각 왕위를 잇는 일이 거의 80년이나 되었다. (왕조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중략) 문종은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고 일을 간소하게 하였고, 비용을 줄여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다. 큰 창고의 곡식이 썩어 문드러져,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태평성대라 불렀다.” (『고려사』 권9 문종 37년 이제현의 문종 사찬)
고려 말 역사가 이제현은 현종(顯宗:1009~1031년 재위), 덕종(德宗:1031~1034년 재위), 정종(靖宗:1034~1046년 재위), 문종(文宗:1046~1083년 재위)으로 이어지는 80년간을 고려왕조의 전성기로 쳤다. 특히 문종 때를 일컬어 고려가 가장 번성한 태평성대라 했다. 그러나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란 말이 있듯이, 전성기를 이끈 국왕 문종에게도 걱정은 있었다.
태평성대에 재개된 거란의 도발
1038년(정종 5) 거란과의 타협으로 소강상태였던 보주성 문제가 문종 때 다시 불거진 것이다. 고려가 보주성 탈환을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던 덕종 때와 달리 이번엔 거란이 보주성을 거점으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은 1055년(문종 9) 7월 고려가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항의문서에서 확인된다.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전 태후(前 太后:거란 성종의 모후)께서도 압록강을 경계로 삼게 했는데, 귀국(거란)은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 다리를 놓고 성을 설치했다. 요즘엔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증강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놀라게 했다. 황제(거란 왕)에게 보고하여 귀국이 설치한 다리와 보주성의 군사시설을 철거하여 영토를 우리에게 반환해 주기 바란다.” (『고려사』 권7)
한 해 전(1054년) 7월 거란이 보주성에 신설한 군사시설 철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1038년(정종 5) 타협을 본 보주성 문제가 거란의 군사시설 증강으로 16년 만에 다시 분쟁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듬해(1056년) 거란은 보주성 일대에서 농경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란의 도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려가 선택한 수단은 외교 전략이었다. 1071년(문종 25) 3월 고려는 송나라와 50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두 나라의 연합을 가장 꺼려 하는 거란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1004년 거란과의 영토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神宗: 1068~1085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党: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관계 재개로 군사시설 증강 같은 무력시위가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안 거란은 보주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일대에 무역장을 설치하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무역장 설치 요구는 선종(1084∼1094년 재위) 때 본격화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자, 압록강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거란은 보주의 교역권을 장악해 이익을 챙기는 한편으로 그 영유권을 영구화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가 무역장 설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거란이 각장(榷場:무역장)을 압록강 언덕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자, 이를 알아챈 고려는 중추원 부사 이안(李顔)으로 하여금 대장경을 분향하는 임무를 진 것처럼 가장하게 해 귀주(龜州)에 보냈다. 몰래 변방의 일(*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고려사』 권10)
거란의 무역장 설치 움직임에 맞서 고려가 군대를 파견한 귀주성.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였다.
1088년(선종) 2월의 일이다. 고려는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인 귀주성에 군사를 파견한다. 전쟁을 각오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어 이해 9월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무역장 철회를 요구한다.
“(압록강 양안에 각각 성을 쌓아 두 나라의 영토로 삼으라는) 994년 (거란)성종(聖宗) 교서의 먹도 마르기 전에 1014년엔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아 길을 통했습니다. (중략) 몇 차례 글을 올려 성곽의 철거를 요구했는데,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신시(新市:무역장)를 경영한다고 하니, 선조(先朝:거란 성종)의 남긴 뜻을 어기는 일이며, 소국(*고려)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옳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수 천리 길에 수레(*사신)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고 90년 동안 공물을 바친 공로가 헛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려는 선대를 이어 바깥 울타리를 지키던(*제후의 역할)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어찌 조그만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어야 합니까?” (『고려사』 권10 선종 5년(1088) 9월)
거란이 무역장 설치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고려는 제후의 의무를 버리고 원망(*전투)을 맺을지 모른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때문일까? 거란은 이해 11월 고려 사신이 귀국하는 편에 보낸 답서에서 “무역장 설치는 아직 논의 중인 사안이므로 고려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고 밝힌다. 사실상 무역장 설치 계획을 철회하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마무리된다.
전쟁 각오한 항의로 무역장 철회시켜
고려의 요구에 거란이 왜 쉽사리 응했을까? 고려는 친송 대신 친거란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고, 거란은 무역장을 포기한 맞바꿈의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급변하기 시작한 대륙의 정세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1115년 금나라 건국) 고려와 거란 양국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여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위기의식을 두 나라는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처하는 게 양국 간 영토분쟁보다 더 화급했다. 영토분쟁으로 여진족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려가 1104년(숙종 9)과 1107년(예종 2), 두 차례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정세 변화가 영토분쟁을 잠시 뒷전으로 접어두게 했던 것이다. 당시 고려가 친송 대신 친거란 정책을 편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보주성 반환의 끈을 놓지 않았다. 1115년(예종 10) 1월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곧바로 이웃 거란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거란은 이해 8월과 11월 거듭 원병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거부한다. 1116년 8월 금나라가 보주성을 공격하자, 고려는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 보주성은 원래 고려 영토란 사실을 알리고 탈환 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금나라는 고려가 직접 보주성을 탈환하라고 대답해 고려의 보주성 점령을 허용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거란과의 연합을 막으려는 금나라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려는 금나라의 이런 의도를 미리 꿰뚫고,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으로 보주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고려는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보주성을 점령한다. 이어 보주를 의주라 명칭을 고치고, 고려 영토에 편입한다.
영토분쟁이 전쟁 일보직전으로 치닫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고려는 거란과 금나라에 대해 적대정책 대신 신뢰와 화해의 외교전술을 구사했다. 즉 여진족(금나라)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외교·군사적 신뢰를 거란에 보여주는 한편으로, 거란의 군사요청을 거부해 신흥 강국 금나라를 안심시킨 것이다. 보주를 둘러싼 백년의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건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고려의 유연한 외교전략이었다.
[출처] 고려사의 재발견 4.[백년의 영토분쟁]|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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