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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재발견 3.[성종,귀화인,팔관회]

문수봉(李楨汕) 2018. 2. 1. 15:43

고려사의 재발견 3.[성종,귀화인,팔관회] 

 

 

6. 성종

 

1] 인재등용 - ‘쓴소리 학자’ 최승로 재상 앉혀 국가 틀 잡다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있는 서희(942~998) 장군 부부의 묘. 그가 숨진 998년(목종 1년) 조성됐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조용철 기자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 (『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그러나 성종은 왕실 안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지는 못했다. 전왕 경종에게 아들 ‘송’(誦:성종 사후 목종으로 즉위)이 있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이 숨질 때 아들 송은 두 살에불과해 22세인 성종이 대신 즉위한 것이다.

성종은 전왕 경종과 후왕 목종의 모후의 출신지인 서경세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태조의 3비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했다. 혼인 경험이 있던 광종의 딸 문덕(文德)왕후와 재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증거다.

경종의 사촌 … 두 살짜리 조카 제치고 즉위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 즉위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선진문물제도)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사(華士:중국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서희의 흉상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재를 적재적소 배치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학자 출신 관료들이 성종에게 그렇게 건의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이어 서희는 직접 거란 진영을 찾아가 사령관 소손녕과 담판했다. 그는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데 있음을 파악하고 관계 단절의 대가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했다.

서희는 화풍을 강조한 유학자 출신의 관료집단과 달리 고려의 전통문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고려 고유의 전통문화를 당시엔 ‘토풍(土風)’ 혹은 ‘국풍(國風)’이라 했다. 서희는 국풍파의 대표격이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서희와 같은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끌어안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의 벼슬을 내렸다. 화풍을 중시한 성종은 이렇게 자신과 성향이 다른 정치인도 받아들였다.

가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훌륭한 재목이라면 발탁하여 미래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서희와 같이 거란의 침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국풍파 관료였던 이지백(李知白)은 거란의 침입 앞에서 마치 적전 분열처럼 비칠 정도로 과감하게 할지론과 성종의 화풍정책을 비판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뒤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

성종은 이지백의 말을 따랐다. 성종이 화풍을 좋아하고 사모하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이지백은 팔관회·연등회의 전통 의례를 통해 민심을 결집시키는 것이 거란의 침입을 막는 지름길로 인식했다. 화풍을 추구한 성종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 민심을 등에 업고 나온 발언이었다.

또 다른 국풍파 관료 한언공도 성종이 중국의 화폐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제동을 건다.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해 중단시킨 것이다.

 

서희·이지백·한언공은 화풍 중심의 일방적 제도 개혁의 속도를 조절할 것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고려의 전통문화인 국풍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성종은 이들의 건의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2]성종ㆍ현종의 실리외교 - 송·거란 사이 능란한 줄타기로 영토 확장

 

993년(성종12) 거란 장수 소손녕은 두 가지 이유로 고려를 정벌한다고 했다. 첫째, 신라 땅에서 일어난(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거란의 영토인 고구려 지역을 잠식했다. 둘째, 국경을 접한 거란 대신 송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고려의 서희는 첫째 이유에 대해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됐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란의 동경 땅도 고구려 땅으로 원래 우리의 영토다(고구려 계승론)”라고 반박한다. 둘째 이유에 대해서도 “고려가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건 압록강 주변을 여진족이 차지해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여진을 쫓고 그곳을 우리 영토로 인정하면 거란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압록강 영유론)”라고 답변한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70세 때인 1018년 고려를 침공한 거란 10만 대군을 이듬해 2월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뒀다.

 

소손녕의 본심은 무엇이며,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고구려 계승론’과 ‘압록강 영유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했을까? ‘고구려 계승론’에 방점을 찍어 서술했다. 통쾌하기조차 한 서희의 ‘고구려 계승론’은 민족의식을 강조한 역사교육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 인용돼 왔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 강조하면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차단한 뒤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게 소손녕의 본심, 즉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그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압록강 영유론’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고려 영토로 확정한 것이다. 고려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구려 계승론과 같은 민족의식의 경연장이 아니라 국익(國益)이 걸린 영토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영토분쟁에서 시작된다. 993년(성종12) 거란의 1차 침입에서 1019년(현종10) 강감찬의 귀주대첩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 간 전쟁의 본질 역시 영토분쟁이다.

그러나 단순한 영토분쟁은 아니다. 이 전쟁에 대해 영웅 서희와 강감찬의 활동에 초점을 둬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고려·거란 30년 전쟁은 결국 땅따먹기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영토분쟁에 휩싸인다.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晋·936~946년)을 건국한 석경당(石敬塘)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이 포함된 보하이만 이북의 연(燕)· 운(雲) 등 16개 주, 이른바 ‘연운 16주’ 지역을 거란에 양도한다.

 

송나라는 건국 후 거란에 이 영토의 반환을 요구한다. 거란이 거부하자 979년 송 태종은 거란을 치기 위해 북벌(北伐)에 나선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시작이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지역의 안정을 위해 983년(성종2)부터 압록강 일대 여진족을 정벌한다.

 

이어 985년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무너뜨린다. 이런 거란의 움직임에 대비해 고려와 송나라는 관계를 강화한다.

“연운 16주는 중국의 땅인데 오랑캐들이 차지했다. 이곳을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할 수 없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자 한다. (고려)왕은 오랫동안 중국 풍속을 사모하고 평소 밝은 계략과 충성스러운 절의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오랑캐(거란)와 국경을 접해 많은 해를 입었다. 이제 그 분함을 씻을 기회이니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오랑캐를 정벌할 것이다.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함께 도모하기 바란다. 노획한 포로와 소·양·재물 등은 모두 고려 장수와 군사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겠다.” (『고려사』 권3 성종 4년 5월)

송나라가 985년(성종4) 신료인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협공을 요청한 외교문서의 내용이다. 송나라는 그 2년 전 고려 성종을 책봉(冊封)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책봉하면서 이같이 요청했다. 책봉은 해당 국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그 나라를 품에 안으려는 외교 의례다.

즉위 후 한 번의 책봉이 관례인데, 송나라는 이후 세 차례(성종 7, 9, 11년) 더 책봉한다. 다섯 차례의 책봉은 매우 이례적이다. 거란과의 전쟁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송나라의 다급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고려는 냉정했다. 거란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에서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이지 군사동맹으로 또 다른 화를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려는 시간을 끌면서 송나라 요구를 거부한다.  

 

서울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 있던 탑과 강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 조용철 기자

 

‘천혜 요새’ 강동 6주 넘긴 거란의 패착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정안국을 정벌한 거란은 마침내 993년(성종12) 고려에 침입한다. 송나라를 고립시키고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장차 송나라와의 전쟁(1004년)에서 승리하려는 다목적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는 대가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확보한다.

고려는 이듬해(994년) 송나라에 거란의 침략을 알리고 군사동맹을 제안한다. 송나라가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고려는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6개 성을 요새화하는 등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보한다.

한편 거란은 1004년 송나라를 굴복시키고, 연운 16주 지역을 자국 영토로 확정한다. 전쟁에서 패한 송나라는 해마다 막대한 물품을 거란에 배상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러나 거란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넘겨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뒷날 거란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것이란 사실은 깨닫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곳에 설치한 6개의 군사도시인 강동 6주(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은 997년과 998년 동북(함경도)의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지름길은 강동 6주의 서북 지역을 통하는 길인데, 고려에 넘겨준 까닭에 함흥 황초령 등 북방 지역을 우회해 여진을 정벌한다. 길이 멀고 식량이 끊겨 군사와 병마가 많은 피해를 보고 정벌에도 실패한다. 강동 6주는 동북 지역 진출의 교통요지였다.

한편 압록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6주(성)를 거쳐야 한다. 고려는 이곳을 요새화하는데, 거란은 물론 뒷날 몽골군도 이 지역에서 패배해 전력이 반감됐을 만큼 강동 6주는 천혜 요새인 전략 거점이다.

압록강 하류는 산동반도-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의 길목이며, 송나라·여진·고려·거란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강동 6주(성)는 이곳의 교역을 감시·견제하는 가치를 지닌 곳이다.

강동6주가 교통·군사·경제의 중요한 거점임을 뒤늦게 알게 된 거란은 송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다. 현종 때 재연된 거란과의 전쟁은 강동 6주의 반환을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영토전쟁이다.

1010년(현종1) 11월 거란은 목종을 폐위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다. 현종은 이해 12월 남쪽으로 피란하고, 거란은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한다. 고려가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자 거란은 국왕이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조건으로 철수한다.

1012년(현종3) 6월 고려는 국왕의 병을 이유로 거란행을 거부한다. 그러자 거란은 “흥화(興化)·통주(通主)·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구주(龜州) 등 6성을 점령하겠다”며 본심을 드러낸다. 강동 6주의 반환을 관철하는 게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여러 차례 보내 6성의 반환을 요구한 데 대해 고려는 1014년(현종5) 거란 사신을 억류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거란을 압박해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막으려는 외교전술을 구사한다.

이해 10월 거란은 6성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3차 고려 침입이다. 1015년(현종6)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요충지 보주(保州·지금의 의주)를 점령한다. 보주 반환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 독도 영유권 분쟁에 비유할 만한 100년간의 긴 영토분쟁이 시작된다. 이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거란의 保州 점령으로 100년 전쟁 시작


거란의 3차 침입에 다급해진 고려는 1016년(현종7) 곽원(郭元)을 송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송나라는 고려에 거란과의 화해를 권하면서 고려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 해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질서의 명언을 역사에서 실천한 왕조의 하나는 고려다.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거란은 소배압에게 10만의 군사를 줘 고려를 공격하게 한다. 1018년(현종9) 10월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최고사령관, 강민첨(姜民瞻)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20만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평남 안주)에 주둔케 하여 마지막 결전에 대비한다. 1019년(현종10) 2월 강감찬은 마침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다.

“2월(1019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과 싸웠다. 승패가 나지 않았는데, 부하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세를 불리자 군사들이 용기를 내 싸워 거란병을 패주시켰다. 도망가는 거란병을 추격하자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사로잡은 사람과 말·낙타·갑옷·무기는 헤아릴 수 없고,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이었다.

거란이 이같이 패한 적은 이전에 없었다. 거란 왕이 소손녕(※소배압의 오기)을 꾸짖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렇게 패했다.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후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고려사』 권94 강감찬 열전)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파고(波高)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일부였다. 고려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송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거란을 견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해 실리를 챙겼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국면에선 전면전을 통해 거란을 패주시켰다. 국익을 위해 강경노선과 유화노선을 적절하게 배합한 고려의 외교군사전략은 지금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3]  '훈요십조'가 말하는 종교 이념 - 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1 중생을 안락의 세계로 이끄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 고려시대 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지만 일본 규슈에 위치한 신사인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돼 있다.[중앙포토] 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중앙포토] 3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을 강조한 훈요십조 부분.

 

불교가 고려의 ‘국교(國敎)’라는 주장(이하 불교국교설)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느냐는 의문을 풀어줄 분명한 글은 고려사 연구자인 필자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국교설은 마치 신비주의자의 주술처럼 구전돼 사학자들조차 그런 주술에 휘둘리고 있다. 역사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다.

국어사전에, 국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되고 공인된 종교’라고 나와 있다. 국민이 전부 믿어야 하고, 그 종교의 일(敎務)을 나라의 일(國務)로 취급하는 종교가 국교다.

특정 종교의 이념과 정신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 국가의 통치 이념과 원리가 돼야 국교란 지위가 부여된다는 말이다. 고려 불교국교설을 당연시한 글들 가운데 많이 인용한 근거를 꼽자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943년)다.


“6조, 내가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이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두 행사를)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면, 마땅히 금지하게 하라. 나 또한 처음부터 맹세하기를 (두 행사의) 모임 날은 국기(國忌: 국왕 등의 제사)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길 것이다. 마땅히 경건하게 행사를 치르도록 하라.”

태조 왕건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반드시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국왕과 백관이 사원에서 행사를 치른 연등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행사였다. 연등회 말고도 고려가 불교를 중시한 예는 많다. 돌아가신 왕들의 영정은 주로 사원에 모셔져 사원에서 선왕(先王)의 제사를 치렀다.

고려는 불교와 승려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僧科)를 두었다. 승려들은 승과를 통과해야 사원의 주지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왕사(王師*왕의 스승)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제도를 만들고 덕이 많은 고승(高僧)을 왕사·국사에 임명했다.

국왕은 새로 임명된 왕사와 국사에게 9번 절하며 제자의 예를 취했다. 이같이 고려시대엔 불교가 다른 어느 종교보다 중시됐고, 불교가 고려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풍수지리설도 불교만큼 고려 건국에 기여


6조에서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강조됐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불교행사다. 하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외에 다른 사상도 녹아든 행사였다. 팔관회엔 선랑(仙郞*화랑)이 용·봉황·말·코끼리를 타고 행사에 등장하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 행사의 樂隊)가 뒤따른다.

네 마리 짐승은 불가(佛家)에서 한 해 동안 인간이 행한 일들의 선악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상징이다. 사선악부는 과거 신라 화랑도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四仙)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라 이래 전통사상인 낭가(郎家) 사상을 계승한 증거다.

팔관회 첫날엔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에 참배하는 의식을 치른다. 천자를 자처한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는 제천(祭天)의례에 해당된다. 또한 고려의 관리와 송나라, 여진, 거란, 일본의 상인들은 고려 국왕에게 천자의 의례를 행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팔관회를 고구려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태조가 강조한 팔관회는 민간신앙을 포함한 전통사상, 조상 숭배 및 제천의식을 포함했다. 불교의례만 중시된 게 아니었다. 불교국교설의 또 다른 근거를 살펴보자.


“1조,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왕조 창건)은 불교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그 까닭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그 업을 닦게 하였다. 뒷날 간신이 집권하여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것을 금지하라.”

부처의 힘으로 고려왕조가 건국됐다는 훈요십조 1조는 불교국교설의 유력한 근거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왕조 건국에 도움을 준 사상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5조, 짐이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국왕은) 사중월(四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에 그곳에 가서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왕조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5조엔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도 고려 건국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조의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과 같다. 태조 왕건은 왕조 건국에 두 사상이 동일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1조에 근거한 불교국교설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국왕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오히려 1조가 작성된 취지는 승려들이 뒷날 권신(權臣)과 결탁하여 정치에 관여하거나 사원의 소유권을 빼앗는 등 불교의 폐단을 경계하는 데 있다.

또한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함으로써 신라가 멸망했다는 전제 아래 승려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정한 장소 외엔 사원을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규정한 2조 역시 같은 취지다. 불교를 언급한 훈요십조의 1조와 2조는 불교국교설의 근거가 아니라, 불교의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태조 왕건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예에 따라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각각 세워 후삼국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자 참모인 최응(崔凝)은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문덕(文德*유교 정치이념)을 닦아야 하며, 불교나 음양(*풍수지리)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충고한다.

태조 왕건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니 부처와 귀신과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이며, 난리가 진정되어 편안하게 되면 유교 정치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보한집(補閑集) 권上).

왕건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불교와 음양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교 정치이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훈요십조에도 나타난다.


“10조, 가정과 국가를 가진 자는 근심이 없을 때 조심해야 한다. 널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도 서경의 ‘무일(無逸)’ 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했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붙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 보고 살피도록 하라.”

국왕은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7조엔 “신하와 백성의 마음, 즉 민심을 얻는 방법은 신하의 비판과 충고를 듣고 백성을 때에 맞춰 부리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결국 위의 두 조항은 모두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 즉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강조한 것이다. 훈요십조에서 불교국교설은 찾을 수 없다.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문화 인정


성종 때(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수신(*불교)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유교)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사 권93 崔承老 열전)


최승로는 이렇게 “수신의 역할은 불교, 통치의 역할은 유교가 각각 맡아야 한다”면서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주장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발탁돼 관료생활을 시작한 태조의 측근문신이었다. 태조 사후(943년) 40년이 지나 그가 제기한 불교와 유교의 역할론은 태조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의 생각을 담은 훈요십조에도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풍수지리, 도교와 전통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과 종교의 다원성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성종 때 최고의 유학자인 최승로에게까지 계승되고 있었다.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였다. 고려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에도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협조를 얻어 왕조를 통치하려 했다.

옛 삼국의 근거지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한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 민심의 수습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려 했다. 태조의 그런 통치철학이 훈요십조에 담겨 있다.

  

 

4] 귀화인 수용과 천자국체제 - 인구 9%, 군인 10%가 귀화인 … 무늬만 단일민족

 

 

단군의 표준영정. 몽골 침략기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단일민족론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손이란 주장에 바탕을 뒀다. [중앙포토]

 

 고려가 건국된 지 100년이 될 무렵, 제8대 현종(顯宗·992~1031년, 1009~1031년 재위)이 즉위한다. 현종은 신라계 출신 왕족 안종(安宗)과 그 조카 헌정왕후(경종의 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국왕이다. 안종이 불륜을 범한 죄로 경남 사천에 유배되자, 현종은 유배지에서 지내다 안종이 숨지자 개경에 온다.

헌정왕후와 자매 사이인 헌애왕후는 경종의 비로서, 유명한 여걸 천추태후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모후가 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을 병약한 목종의 후사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위 계승 서열상 적자인 현종을 강제로 출가시켜 지금의 북한산 신혈사로 내친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번 현종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한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자, 공주·전주·나주로 피난을 한다. 피난 도중 국왕의 체통에 손상을 입을 정도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고려의 학문을 융성케 한 유학자 최충(崔沖)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현종을 ‘간난비운(艱難非運·죽도록 고생하고 억세게 운이 없음)’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거란의 침입을 물리쳐 붕괴 직전의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운 ‘중흥(中興)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오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현종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거란의 수군(水軍)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고려사』 권5 현종 21년(1030) 5월)
왜 현종 때부터 거란과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귀화했을까?

현종 20년인 1029년 9월, 거란 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발해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 대연림은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성종(聖宗)이 병약해(1031년 사망) 거란 조정에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흥요국을 세웠다.

거란의 불안한 정세로 그동안 거란의 지배를 받아온 발해와 거란 계통의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하기 시작한다. 발해·거란인들의 고려 이주는 발해가 멸망(926년)한 10세기 초에 시작됐지만 현종 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한다. 그런 점에서 1030년(현종 21) 이민족의 대거 귀순은 고려의 주민 구성은 물론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민족=단군 후손’ 주장이 단일민족론 근거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에 귀화한 주민과 종족은 크게 한인(漢人)과 여진·거란·발해 계통 등 네 갈래로 나뉜다.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 다음으로 많은 귀화인은 여진계 주민으로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나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던 것이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는 물론,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월·후주 등 오대 국가의 주민들이 포함돼 있다. 모두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8.5%)을 차지한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이민족이 유입된 경우는 기록상 고려 외에 달리 찾을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기로 한다.


 

서울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성전. [중앙포토]

 

고려 태조 19년(936) 9월 지금 경북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 신검(神劍)과의 마지막 후삼국 통일전쟁에 동원된 고려군은 모두 8만7500명이다.

이 가운데 ‘유금필(庾黔弼) 등이 거느린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경기병(勁騎兵) 9500명’이 포함돼 있다(『고려사』세가 태조 19년 9월조). ‘제번(諸蕃)’의 군사는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군에 편입된 여진 계통의 이민족 병사들이다. 전체 군사의 10%가 넘는다.

귀화인의 비중 문제를 떠나 고려 왕조가 다양한 종족·국가 주민들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돼온 단일민족론을 재검토할 근거가 된다. 이민족의 고려 귀화에 최초로 주목한 학자는 손진태(孫晉泰·1900년생, 납북)다.

그러나 그는 고려 시대 이민족 귀화 현상에 대해 “한민족의 혈액 중에 만주족·몽고족·한족(漢族) 등의 혈액이 흘렀으나, 오랜 역사를 지남에 따라 우리 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 피로 변화했다고 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6년, 44-45쪽).

‘단일민족론’을 주장한 최초의 학자인 손진태는 이민족의 고려 귀화를 예외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일민족론은 무엇인가? 손진태의 주장이다.

“조선사는 조선민족사로서, 유사 이래 동일 혈족(血族)·동일 지역·동일 문화를 지닌 공동 운명 속에서 공동의 민족투쟁을 무수히 감행하면서 공동의 역사생활을 했다. 이민족(異民族)의 혼혈(混血)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국민은 민족이며, 민족사가 곧 국사이다. 이 엄연한 역사 사실을 무시하고 조선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3쪽)

단일민족은 동일한 혈족(피붙이)·지역·문화를 가진 역사공동체다. 그는 혈족이 단일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봤다. 위 글에서 이민족의 혼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도 단일민족론을 제기한다(『국사와 지도이념』 1953년).

이민족 받아들이며 독자적 천하관 형성


단일민족론의 원류는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다. 이 책에 따르면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했다. 몽골의 침략을 체험한 그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 지식인들도 우리 역사에서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한다. 단일민족론은 여기에서 기원하며, 손진태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단일민족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는 896년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肅愼)·변한의 땅에서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려사』 태조 총서)

신라 쇠망기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세조와 궁예 등의 영웅들이 조선(고조선과 한사군)·숙신(말갈과 발해)·변한(한반도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왕조의 건설을 구상한 증거다. 이들 지역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어 특정 민족보다는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런 꿈이 고려 왕조의 건국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한 고려의 의지가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 왕조는 이민족 귀화인들을 다양한 층위로 편제시켜, 고려의 신민(臣民)으로 삼고 그들의 거주지를 고려의 번병(蕃屛), 즉 울타리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건 고려와 주변 종족을 중심과 주변, 즉 천자와 제후관계로 삼으려는, 종번의식(宗蕃意識)에 기초한 고려적인 천하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고려 왕조가 천자국(황제국) 체제를 갖추는 동력이 됐다. 이런 국가체제에서 ‘단일민족론’이 수용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론은 고려 왕조의 국가 성격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한말에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강조한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인식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단일민족론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문화·지역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고려 역사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 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 Sunday

 

 

5] 팔관회 - 거란 40만 대군 쳐들어오기 전날 축제 강행, 왜?

 

 

 

1010년(현종1) 10월 1일 고려는 거란의 침략 조짐을 알아차리고 강조(康兆)를 최고사령관으로 해 30만 군사를 강동 6성의 하나인 통주(通州;평북 선천)에 집결시킨다. 한편으로 그해 10월 8일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한다.

 

그러나 거란은 사신을 억류하고, 고려에 침략을 통보한다. 11월 1일 고려는 다시 사신을 보내 화의를 모색한다. 하지만 거란은이라고 통보한다. 고려가 두 차례 보낸 사신들은 결국 거란의 고려 침략을 통보받으러 간 꼴이 되었다.

 

11월 16일 거란 성종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한다. 11월 24일 고려의 30만 대군은 거란군에 참패를 당하고 최고사령관 강조는 포로가 된다. 12월 거란군이 개경에 접근하자 그달 28일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난다. 사흘 뒤인 1011년(현종2) 1월 1일 수도 개경이 점령된다. 2차 거란의 고려 침략 당시 긴박한 상황이 『고려사』에 이같이 기록돼 있다.

놀라운 사실은 40만 대군을 거느린 거란 성종이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 전인 11월 15일 현종이 개경에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것이다. 981년(성종 즉위년) “잡스럽고 번잡한 행사”란 이유로 폐지된 팔관회를 30년 만에 부활시킨 셈이다. 전쟁 전야의 긴박한 상황에서 현종은 왜 팔관회를 치렀을까? 

팔관회 행사가 폐지된 지 10여 년이 지난 993년(성종12), 고려는 거란의 1차 침략을 받았다. 조정에선 “거란에 고려의 땅을 떼어주고 항복을 하자”는 주장이 무성했다. 그러나 문신 이지백은 ‘할지론(割地論)’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후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전통행사를 행하여 민심을 결집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현종의 팔관회 부활도 그때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현종은 30년간 중단된 팔관회를 열어 민심을 결집하고,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 동맹과 신라 화랑도 정신 계승


팔관회는 원래 불교에서 재가신도가 지켜야 할 8계(戒), 즉 살생하지 않고(不殺生), 자기 물건이 아니면 갖지 않고(不與取), 음행하지 않고(不淫), 헛된 말을 하지 않고(不妄語), 음주하지 않는(不飮酒) 등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기 위한 법회였다.

 

신라 진흥왕 12년(552)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惠亮)법사가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회를 연 것이 팔관회의 첫 기록이다. 궁예도 900년 양주(지금 서울)와 견주(지금 양주)를 정벌한 뒤 팔관회를 열었다. 당시엔 불교행사였다.

고려도 건국된 해(918년) 11월 첫 팔관회를 열었으며, 성종과 원 간섭기 때 중단된 적이 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팔관회가 지속됐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946년)에서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하늘과 명산의 신령과 대천(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라고 했다. 즉 팔관회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라 한 것이다.

 

또 왕건은 “선왕들의 제삿날을 피해 군신(君臣)이 함께 즐기는 행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당시 고려의 여러 제도와 풍습을 견문한 내용을 담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서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祭天)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한 것”이라 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도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다. 팔관회는 이같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시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고려 의종은 1168년(의종22) 서경에 행차하면서 왕조 중흥을 위한 교서를 내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선풍(仙風)을 따르고 행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성행했다. 이로써 하느님과 용신(龍神)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만물이 편안하게 되었다. (중략) 근래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는 날로 옛 모습과 남긴 자취가 쇠퇴하고 있다. 지금부터 양반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자를 선가(仙家)로 미리 선택하여, 옛 모습을 따라 행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기쁘게 하라.” (『고려사』 권18)

선풍은 신라의 낭가(郎家)사상이 깃든 풍습이다.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 화랑도는 이런 낭가 사상의 풍토 아래 조직됐다. 의종은 “팔관회 행사는 이런 신라의 선풍(仙風)을 계승하는 것이며, 선풍의 쇠퇴는 곧 팔관회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했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인로(李仁老) 역시 『파한집(破閑集)』에서 같은 생각을 밝혔다.
“계림(신라의 경주)의 옛 습속에 남자 가운데 아름다운 풍모를 가진 자를 골라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 화랑으로 삼아 나라 사람들이 받들었다. 받드는 무리가 많을 경우 3000명이나 된다. (중략) 무리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 관직을 주었다. ‘사선’(四仙;영랑·술랑·남랑·안상)의 무리가 가장 뛰어났다. 고려 태조도 이를 계승하여 겨울에 팔관회를 열어 훌륭한 집안 출신 4명을 골라서 신선 옷을 입히고 궁정에서 춤을 추게 했다.”

이인로의 언급과 같이 고려 태조는 선풍을 계승한 화랑, 즉 선랑(仙郞)의 풍습을 계승하여 팔관회를 열었다. 군신동락(君臣同樂)의 팔관회는 고구려·부여·신라에서 유행하던 고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롭게 해석하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행사 모습. [김병하 화백]

 

건국 이후 왕조 멸망 때까지 꾸준히 개최

팔관회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거행되는데, 개경은 11월 15일, 서경은 10월 15일에 각각 열린다. 개경의 경우 팔관회는 국왕이 거처한 궁성에서 공식적으로 이틀에 걸쳐 행해진다.

첫째 날을 소회(小會)라 한다. 이날 국왕은 먼저 왕조 건국자인 태조의 진전(眞殿;초상화)에 배례한다. 다음엔 태자·왕족·중앙 관료들이 차례로 국왕에게 절을 올린다. 과거와 현재의 국왕에 대한 배례(拜禮)는 전통 농경(農耕)의례의 조상 숭배의식이자 제천 의례를 계승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이어서 3경, 동·서 병마사, 4도호부 8목의 수령들이 표문(表文;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을 올리고, 태자·왕족·중앙관료와 함께 국왕에게 조하(朝賀;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하례하는 것)와 헌수(獻壽;장수를 비는 뜻에서 술잔을 올리는 것)를 바친다.

 

이어 격구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선랑의 무용과 가무,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등 기악(伎樂) 공연을 한다. 국왕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차를 내리고,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

 

둘째 날을 대회(大會)라 하는데, 이날은 송나라와 거란·일본 상인과 동·서 여진(함경도·평안도 일대의 여진족)과 탐라 추장 등이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 그들이 갖고 온 토산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진다. 나머지 행사는 첫째 날과 같다.

국왕은 황제를 상징하는 의상인 황포(黃袍)를 입고, 중앙의 왕족과 관료, 지방의 수령, 외국의 상인과 추장으로부터 헌수와 조하를 받는다. 이들은 제후 자격으로 천자인 고려 국왕에게 헌수와 조하를 올린 것이다. 표문(제후가 천자에게 제출하는 문서)을 올리는 의식과 동·서 여진을 ‘동서번(東西藩)’이라 칭한 것 등이 그 예다.

‘팔관회는 국왕은 천자이며 고려는 천자국이라는 고려 특유의 천하관을 대내외에 과시한, 고려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는 의례다. 고려는 ‘외후내제(外侯內帝)’, 즉 송과 거란에 대해선 국익을 위해 제후국으로 처신하고, 국내적으론 황제(천자)국 체제를 갖춘 독특한 천하질서를 유지했다. 이틀에 걸쳐 행해지는 공연 가운데 선랑(仙郞)이 공연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선랑을 뽑는 풍습은 고려 때 사원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나라 풍속에 어릴 때 반드시 스님을 따라 글자를 익혔다. 그 가운데 면수(面首;용모와 행동거지가 빼어난 자)가 있는 자를 승속(僧俗)이 함께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했다. 선랑을 따르는 무리가 때론 천백(千百)이나 되었다. 이 풍습은 신라 때부터 유래했다.” (『고려사』 권108 민적 열전)

선랑으로 선택된 자는 이날 용(龍)·봉황(鳳)·말(馬)·코끼리(象)의 모습을 한 수레를 타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가 노래와 춤을 추면서 뒤따랐다. 용과 봉황 등 네 가지 모습의 수레를 탄 것은 매년 1회 하늘의 신(神)인 선랑이 이들 짐승을 타고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팔관회가 신라의 낭가사상과 불교가 융합된 행사임을 보여준다.

고려 왕조의 팔관회는 이렇게 고대 원시 농경 의례에서 출발한 제천의식과 신라의 선풍·불교의식 등 토착적이고 고유한 의례와 풍습을 계승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선 조선과 달리 불교·도교·유교·산신 및 조상 숭배 등 매우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다. 사상과 문화에서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공존하는 나라에선 자칫 사회가 분열돼 국가 혼란으로 이어질 우려도 생긴다.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함으로써 민심과 사회를 통합해 이런 우려를 해소하는 기능이 팔관회 행사에 녹아들어 있다. 고려 팔관회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