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의 발굴 이야기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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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호우- 신라 고분에 왜 고구려 청동 그릇이?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의 바닥면. /국립중앙박물관
5월 14일.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물들을 수습하기로 했다. 첫 순서는 청동 그릇. 동그란 꼭지가 달린 뚜껑부터 먼저 수습하고 이어 몸체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던 조사원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와!" 탄성을 질렀다. 그릇 바닥에 한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김 단장이 지시했다. "아직은 내색하지 마시오!" 이어 그는 백제사(史)에 밝은 공주박물관장과 함께 글자를 판독했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아, 사마왕! 무령왕이에요." 이 돌판이 바로 백제 25대 무령왕의 지석(誌石)이었던 것이다. 늘 발굴 복이 없다고 한탄했던 김 단장은 세기의 발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김 단장이 이곳을 무령왕 부부 무덤이라고 공표하자 발굴 현장은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시민들은 박수 치며 환호했고 언론사 취재 경쟁도 불붙었다. 그 와중에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청동숟가락을 외부인이 밟아 부러뜨렸다. 김 단장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하루 철야 작업으로 발굴을 끝냈다. 후에 그는 이 결정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고 무령왕릉은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그럼에도 왕릉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우리는 백제와 백제인들을 만나게 됐다. 특히 지석에는 미지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령왕이 선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 록이 틀렸다는 점, 왕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천자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이라 표현한 점, 사후 2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무덤에 안장됐다는 점 등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매지권(買地券·토지 매매 문서). 왕의 묏자리를 지신(地神)들에게 구입했음을 기록으로 남긴 것인데, 지석 위에 놓여 있던 철전 꾸러미가 바로 묏자리 구입 대금이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 서봉총 금관 - 스웨덴 황태자가 들어 올린 서봉총 금관
보물 제339호 서봉총 금관. 높이(새모양 장식 포함) 30.7㎝. /국립중앙박물관
1926년 10월 10일 일요일. 경주 노서리 129호분 발굴단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귀빈 방문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0시쯤 도착한 귀빈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와 황태자비(妃) 루이즈 마운트배튼. 황태자 부부는 차에서 내려 초가집으로 둘러싸인 발굴 현장에 들어섰다. 돌무지가 가득했고 한가운데에 나무 판재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만, 현장에선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조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판재를 제거하니 그 아래에 흰색 천이 덮여 있었고 천까지 제거하자 청명한 가을볕을 받으며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황금보관(黃金寶冠)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뿐 아니라 수행원들까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교토대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금관이 새로 나온 게 확실하죠?"라 묻자 황태자는 "정말이네요"라고 대답했다. 며칠 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금관 발굴 소식을 처음 듣자마자 황태자가 "박물관 금관을 가져다 묻어놓은 건 아니겠죠?"라고 농담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황태자는 발굴단의 요청을 받고 금관을 직접 수습해 들어 올렸다.
발굴 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황태자에게 무덤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황태자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 꼭대기에 부착된 봉황 모양 장식에서 '봉'자를 뽑아 '서봉총'이라 제안했다. 노서리 129호분은 새 이름을 갖게 됐고 1921년의 금관총, 1924년의 금령총에 이어 금관이 출토된 세 번째 신라고분으로 기록됐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
조사단에서는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황남대총을 팔 필요가 있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높은 곳' 지시로 시작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남북으로 연접된 두 무덤 중 어느 쪽이 왕릉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북쪽 무덤부터 파기로 결정했다.
1974년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마침내 목관 내부로 접근했다. 목관 범위 전체에 뒤덮인 검은 흙 사이사이로 비쳐 나오는 황금빛 광채! 조사단은 왕릉임을 직감했다. 흙을 제거하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금관, 금과 유리를 섞어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세계 각지의 여러 공방에서 정성스레 만든 명품들이 한 공간에 묻힌 것은 발굴 역사에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통상 그 이유를 둘러싸고 '글로벌 신라'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혹시 무덤 속 신라 왕비가 '못 말리는' 명품족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만 해도 금관가야의 왕족 묘역을 찾았다는 점, 묘제와 유물의 격으로 보아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으나 동복 출토 이후에는 금관가야 왕족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때 토기 조각 몇 점이 유 학예사의 눈에 스치듯 들어왔다. 교통로 공사 중 유적이 훼손되면서 토기 조각들이 드러난 것이었다. 토기는 이웃한 대나무 숲과 자그마한 건물 즉, 수성당 주위까지 펼쳐져 있었다.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꽃삽으로 바닥을 조금 긁어내자 화려한 장식이 부가된 백제 토기 조각들과 함께 지름 3㎝ 가량의 원판 모양 석제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키노시마(沖ノ島) 등 일본 제사 유적에서 종종 출토되는 미니어처였다. "아! 제사 유적이다." 바다 제사 유적의 존재가 국내 최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5월 7일. 국립전주박물관은 이 유적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에 나섰다. 3세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바다 제사의 흔적이 베일 벗듯 차례로 속살을 드러냈다. 유물 가운데 백제 토기가 가장 많았고 대가야산 토기와 철기, 왜에서 만든 토기와 미니어처 석제품과 함께 중국 남조산 도자기 몇 조각이 출토됐다.
백제 땅이던 변산반도의 절벽 위에 어떻게 백제·대가야·왜·중국 남조에서 만든 물건이 함께 묻힌 것일까? 항아 리에 담긴 대가야 유물,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 왜의 미니어처 석제품으로 보면 적어도 백제·대가야·왜 등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무덤 전체를 8조각으로 구획하고 서남쪽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곧이어 흙더미에서 자그마한 토용(土俑)이 연이어 출토되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 해 전 십이지와 토용 발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주 용강동고분에 버금가는 중요 유적임을 알았기에 안타까움도 더욱 커졌다.
이어 동북쪽 흙 속에서 완전해 보이는 토용 1점이 모습을 보였다. 흙을 제거하자 반듯하게 엎드린 여인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깨끗이 세척하니 오른쪽으로 몸을 조금 비튼 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었다. 머리는 곱게 가르마를 타 뒤에서 묶었고 소맷자락에 파묻힌 왼손으론 부끄러운 듯 입을 살짝 가렸다. 오른손엔 술병을 들었고 긴 치마 앞으로 두 발끝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조사단은 헌화가 속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떠올렸고 수로부인은 이 토용의 애칭이 됐다.
이 교수는 토용의 복식으로 보아 무덤의 조성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 주인공을 왕에 준하는 지위의 진골 귀족으로 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지증왕 3년(502년) 순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 후 사후세계에서 함께 지낼 사람들을 흙으로 빚어 묻어주게 됐다 . 이 무덤 주인도 사랑스러운 '수로부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긴 것은 아닐까?
석실분 훼손 사건을 계기로 경주 일원 유적들의 보호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0년에는 인접한 곳에서 신라 초기의 대규모 제철단지가 발굴됐다. 이 교수는 무참히 부서진 황성동석실분의 음덕 때문에 지금까지 황성동 일대에서 중요 유적이 연이어 발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9.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 도굴꾼 '無知' 덕에 살아남은 2000년 된 보물상자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길이 65㎝, 국립중앙박물관
1988년 1월 하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에 제보가 접수됐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창원 주남저수지 주변 동네 다호리에서 중요한 유물이 도굴되었다고 했다. 이건무 부장은 곧바로 이영훈 학예관, 윤광진 학예사를 대동하고 창원으로 향했다. 다호리 유적 일대는 처참했다. 유적이 분포된 논바닥 곳곳에서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발굴에 착수한 것은 1월 21일. 혹한의 추위에도 무덤 속은 질퍽거렸다. 구덩이 안에서 도굴꾼이 흘리고 간 쇠도끼, 옻칠 된 부채자루 등이 수습됐다. 조사를 이어가던 윤 학예사가 소리쳤다. "부장님! 목관이 있어요. 통나무예요." 2000년 전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목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희망을 가지고 목관 내부까지 다다랐으나 유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목관을 수습하는 날. 끈을 넣어 목관에 감고 장비를 이용해 들어 올리는 순간 무덤 속에 있던 윤 학예사의 다급한, 그러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쫙 깔렸습니다.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목관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속을 바라본 조사단원들은 감격했다. 도굴꾼은 목관 아래에 유물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목관을 내릴 때 사용한 노끈,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옻칠 목기, 제사를 지내면서 뿌려진 밤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수많은 보물이 가득 담긴 대나무 바구니였다. 이토록 보존 상태가 좋았던 것은 무덤 바닥에서 샘이 솟아 늘 촉촉한 상태 를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건무 부장은 바구니 속 유물 가운데 붓 5자루와 삭도(削刀) 1점에 주목하며 "고대사회 관리들이 문서행정을 할 때 사용하는 필수품으로 이미 2000년 전 변한(弁韓)에서 문자생활, 더 나아가 문서행정을 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라 해석했다. 이토록 소중한 유물이 하마터면 도굴꾼의 손을 탈 뻔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0. 풍납토성 우물 출토 토기류,- 풍납토성 우물 속 龍王에게 지낸 제사
풍납토성 우물 출토 토기류, 높이 18.4㎝(앞줄 중간), 한신대학교박물관
석축 너비가 120㎝밖에 되지 않았기에 한신대학교박물관 한지선 연구원이 혼자 들어가 조사를 맡았다. 6월 13일 정오 무렵 한 연구원은 돌로 쌓은 벽석 아래에서 나무로 만든 구조물과 함께 그 안에 가득 채워진 펄을 발견했다. 이 구덩이는 마침내 우물로 확정됐다.
발굴 책임을 진 권 교수는 우물의 구조와 주변 시설물을 토대로 어정(御井·왕의 우물)으로 추정했다. 더불어 토기 215점 가운데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제작한 것이 여러 점 포함돼 있고 그중 대부분에 제사 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손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5세기 초 백제 어정에서 지배층의 결속을 다지는 성스러운 물의 제사가 거행된 것은 아닐까?" 추정했다.
고대인들은 우물을 신성시했다. 우물은 사람이 '탄생'시켰지만 그 속에 용왕이 산다고 생각해 우물을 폐기할 때 정중한 제사를 지내곤 했다. 바로 풍납토성 우물 속 토기도 폐기 제사에 사용한 일종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평소 잘 관리했을 이 어정이 왜 그 시점에 이르러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4월 11일. 발굴을 시작한 지 2주를 넘긴 시점이었으나 아직 중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조사원들은 연못의 호안석축 가운데 서쪽을 노출하는 한편 연못 내부 펄을 조금씩 제거해나갔다. 오후가 되어 석축 동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서 이색적인 풍모를 지닌 금동가위 1점을 발견했다. 색깔만 조금 변했을 뿐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코올로 조심스레 세척하며 살펴보다 범상치 않은 조형미와 세공 기술에 탄성이 절로 났다. 우선 형태부터가 남달랐다. 손잡이는 좌우로 조금 벌어졌는데 마치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머리를 교차하는 형상이었다. 표면 전체에 인동당초무늬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고 물고기 알처럼 생긴 동글동글한 무늬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가위가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 )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5월 6일, 이 가위가 공개되자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신라 문물의 일본 전수를 보여주는 증거'라 대서특필됐다.
발굴 시한을 며칠 앞둔 8월 중순. 조사원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곤 숨이 멎을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 1호 건물지 서남쪽 모서리에서 발견된 10여 개 쇠솥 조각을 들어내자 지름 70㎝, 깊이 60㎝의 구덩이에 묻힌 쇠솥, 그리고 그 속에 가득 찬 통일신라 공예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쇠솥 맨 위쪽에는 길쭉한 손잡이를 갖춘 병향로(柄香爐), 다리가 셋 달린 솥, 자물통과 자물쇠, 귀면 장식 문고리가 쌓여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다양한 무늬를 유려하게 새긴 금동제품 수백 점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구덩이와 쇠솥 사이 빈 공간에서도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금동제 풍경이 19점이나 출토되었다. 모두 안압지나 황룡사지 출토품에 필적하는 보물급 문화재였다.
최종규 단장은 "불단을 장식했던 장엄구, 건물에 매달았던 풍경, 불교의식용 도구로 구성된 이 유물은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것이 땅속에 묻히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전란을 지목했다.
고고학자에게 퇴장유구의 발견이란 쉽게 찾아오기 힘든 행운이지만,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보물을 다시금 찾아내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움이란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 보물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들과 조우하며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윤 학예관은 이 무덤에서 출토된 동검이 세형동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기원전 4세기 무렵 제작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 이어 그 시기가 되면 요녕식 동검을 사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한반도적인 청동기 문화가 새롭게 개시되었고, 그때 등장한 청동거울, 작은 종모양 방울, 방패모양 청동기, 칼 손잡이모양 청동기, 둥근 뚜껑모양 청동기 등은 제사장의 소유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괴정동 유적 출토품은 그 시기의 정치적 군장이 제사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괴정동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청동기들은 한국 청동기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1976년에 일본, 1979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한국 미술 5000년 전' 출품 유물로 선정되어 해외 나들이를 했고, 당시 언론들로부터는 '국위 빛낸 민족문화의 정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2007년 5월 25일. 고령 지산동73호분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순장묘로 유명한 지산동44호분과 45호분 발굴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가야박물관이 기획한 조사였다. 조영현 대동문화재연구원장은 감회가 남달랐다. 지산동45호분 발굴에 참여한 인연으로 옛 고분 연구에 평생을 쏟아온 그였기에 지산동고분군에서 왕릉급 무덤을 발굴하게 된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발굴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엎드려 무덤 내부를 노출했고 무덤 속에서 조사를 진행할 때는 유물의 안전을 위해 바닥이 말랑말랑한 고무신을 신었다. 발굴은 당초 예정 기일을 넘겨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지름 23m, 잔존 높이 3.4m에 달하는 이 무덤은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기왕에 발굴되었던 대가야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 시점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지산동44호분에서 32개의 순장곽이 확인되었음에 비해 이 무덤에서는 겨우 1개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내부 조사 종료 후 묘광과 목곽 사이에 채워진 돌무더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3개의 순장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서쪽 순장곽에 묻힌 30대 남성의 머리에서는 금동제 관식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조 원장은 "신라 관식과 외형이 유사하며, 이러한 장식품을 소유한 순장자는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았고 무덤 주인공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라 해석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한 금속제 관은 중국 역사가들이 동이(東夷 )의 특징으로 기록한 '조우관(鳥羽冠)'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유행한 조우관이 남쪽으로 전해져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에서도 유행했음을 지산동73호분 금동제 관식이 잘 보여주었다.
지산동고분군에서는 그 밖에도 백제와 신라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녹아든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가야가 다른 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자기화하였음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15. 천마총 장니(障泥)의 『천마도』- '1500년 어둠' 견딘 기적, 신라 천마도
장니(障泥) 천마도, 국보 207호, 국립경주박물관, 길이(가로) 73.2㎝.
1971년 우연히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한국 고고학계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불러왔다. 이 발굴에 큰 관심을 보인 대통령이 신라왕릉 발굴을 직접 지시하면서 신라고분 발굴 붐이 일게 된다. 문화재관리국은 당초 길이가 120m에 달하는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지만, 자신이 없었기에 인접한 155호분을 먼저 '연습 삼아' 파보기로 했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분은 98호분보다는 작았으나 지름 47m, 높이 12.7m의 크기여서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발굴 현장을 찾아 98호분 발굴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발굴의 무게중심이 98호분 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7월 15일 금제 관식 출토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155호분은 관심을 회복했다. 열흘 후 금관이 출토되자 이 무덤은 '왕릉급'으로 지위가 격상됐고, 김원룡 서울대 교수는 지증왕릉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최고의 보물은 여전히 어두운 무덤 속에서 고고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 회화가 1500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돌무지와 흙더미로 구성된 봉분의 엄청난 무게를 견뎌낸 것은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발굴 후 그림의 색깔이 일부 퇴색했고 그림 속 동물이 천마인지 상상의 동물 기린인지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천마도는 신라인의 예술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의 명작임이 틀림없다.
임군은 반출한 유물 48점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가 4일 만에 당국에 신고했다. 현지로 급파된 문화재관리국 김기웅 전문위원과 윤근일 학예사는 신고유물 가운데 금동관과 금동신발뿐만 아니라 중국 청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긴급 발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소식은 언론에도 알려져 '무령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익산고분, 에다후나야마 고분 문화의 원류'라는 제하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고깔 모양 뼈대에 꽃봉오리 모양 장식이 부착된 입점리 금동관의 외형이 일본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품과 비슷했기에 주목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문교부는 같은 해 성탄절부터 보존 상태가 나빴던 감은사지 서쪽 석탑에 대한 해체 공사를 시작했고 감은사지 발굴을 진행한 국립박물관에 감독을 맡겼다. 탑 부재를 해체하던 중 12월 31일에 이르러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의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전장에서 보내며 나라를 지켰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도 "내가 죽으면 반드시 동해에 장사 지내라. 죽어서라도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을 것"이라 유언한 '신라 바보' 문무왕, 불법이란 큰 그릇에 부왕의 호국 의지와 자신의 효심을 담아낸 신문왕. 감은사지 발굴은 이 두 신라 왕을 전설의 숲에서 역사의 무대로 옮겨주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최씨가 안내한 곳엔 돌판을 조립해 만든 무덤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파괴된 고분일 것이라 추측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표토를 벗겨 내자 곧 길이가 2.6m나 되는 석관묘의 뚜껑돌 윤곽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 20여명과 함께 뚜껑돌을 들어 올렸다.
무덤 속에 쪼그려 앉아 꽃삽으로 연방 흙과 돌을 제거하던 김 분관장은 마침내 한 무더기의 돌화살촉과 함께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특별한' 동검을 발견했다. 그는 차분하게 발굴을 계속했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환호의 탄성을 터트렸다.
같은 해 10월 8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을 공개했다. 한병삼 고고과장은 "마제 석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은 근거가 없어졌으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라 설명했 고, 주요 언론에는 '선사고고학 최대 발견'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존재 확증' '60년 만에 무릎 꿇린 일본 학설' 등으로 대서특필됐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발굴된 동검 한 자루가 한국 고고학계가 품고 있던 고민을 일소했고, 국가사적 '부여 송국리유적'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 및 성격을 해명하는 신호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북쪽을 맡은 김규정 실장이 흙 일부를 제거하자 청자가 살짝 모습을 보였다. "고려청자?" 일순 당황했으나 곧 닭 머리 모양이 드러나 중국 남조(南朝)의 계수호(鷄首壺)임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가야 유적에서 발굴된 유일한 자기로, 월산리 M5호분이 5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기준 자료가 됐다.
조사단은 국립전주박물관에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10월 24일. 이영범 학예사는 철기를 수습했고 1년 9개월 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이 갑주에는 철기 제작에 사용되는 주요 기술이 모두 구현돼 있어 1500년 전 만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라는 소회를 밝혔다.
근래 한·일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철의 왕국' 가야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갑주 가운데 상당수, 심지어 대 가야의 왕도인 고령 출토품까지 왜(倭)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 고분 속에서 갑주가 다량 발굴됐다는 점이 근거다.
무덤 주인공의 허리 부위에서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황금 장식은 흙 속에 절반 이상 파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연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발굴 소식은 삽시간에 경주시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이튿날 한 신문에 '경주고분서 순금허리띠 발굴, 해방 후 처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자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둘러 유물을 수습, 박물관으로 옮긴 다음 흙을 말끔히 제거하니 허리띠가 아닌 황금 보검이었다.
이 보검은 '국보급' '신라 공예 문화의 정수'라는 찬탄을 한몸에 받았고 7월 25일 발굴된 천마총 금관과 쌍벽을 이루는 유물로 평가받았다. 발굴이 끝나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보검은 신라산이 아닌 서역산으로 밝혀졌다. 그에 따라 '신라 금속공예품의 지존' 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그 대신 글로벌 신라의 징표로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서역산 보검이 어떤 과정을 거쳐 머나 먼 신라까지 전해졌는지 등 계림로 보검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보검은 5~6세기 신라인들이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수용한 새로운 문물이 신라의 잠재력을 일깨워 신라인 스스로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라는 담대한 지향을 세우는 데 촉매가 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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