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릉의 유형및 새로운 비정
Ⅰ. 머리말
왕릉은 전대의 왕이 가진 권위를 이어 받은 후대의 왕이 이를 통하여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관념에 크게 축조되고, 다른 고분보다 화려하게 치장된다. 따라서 왕릉의 축조에는 많은 재원이 소요되고 당시 최고의 건축술이 동원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왕릉은 국가의 발전 수준, 즉 왕권의 강약을 측정하는 지표가 될뿐더러 그들이 가진 사후에 대한관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왕릉의 연구는 당시의 사회문화상뿐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이해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할 것이다.
신라의 왕릉에 대한 관심은 비록 18세기에 시작되었으나 19세기까지는 일부 왕릉에 대한 비정에 머물렀고, 근대적인 학문으로서 왕릉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등 일인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정인보(1955)의 괘릉과 오릉에 대한 왕릉 비정을 시작으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일부 개별 왕릉이 다시 비정되기 시작하였고(김상기 1969; 박일훈 1968; 이병도 1969; 정중환 1970; 진홍섭 1965), 강우방(1973, 1982)에 의해 신라 왕릉에 새겨진 십이지의 양식변천과 그를 통한 상대적 편년이 시도되었다.
이후 왕릉 능원에 배치된 석인상과 석수에 대한 연구(권영필 1992; 민병훈 1998; 박경원 1982; 이재중 1996)가 있었고, 강인구(1984a, 1984b, 1987,2000)와 이근직(1986, 2005, 2006, 2012)에 의해 본격적인 왕릉 비정과 의미의 파악이 시행되었다.
신라의 왕릉은 그 모습에서 아주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신라 역사 천년 동안 정치, 문화, 사상 등이 변화되면서 그에 따라 왕릉 자체도 변천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왕릉의 변천은 역으로 그러한 변화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신라 왕릉에 대한 비정에서도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지 못한 실정에 있다. 이는 우리에게 신라 왕릉이라고 할 수 있는 고분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 자료가 수집된 것이 별로 없어 일부 문헌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사료와 현재 나타난 외면적인 모습에 근거하여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호석을 포함한 능침이라 할 수 있는 봉분의 외표시설이 시기에 따라 변천하고 있음이 밝혀졌으나 그 형식에 대한 시각에서 차이가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라 왕릉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과 실제적인 조사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실정이고 마냥 그러한 방법과 완벽한 자료의 출현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찾는다든지 새로운 자료의 해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다만 좀 더 새로운 방향에서 신라 왕릉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에 여기서는 왕이 매장된 분묘 자체 이외에도 왕릉과 관련된 여러 시설물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의 관점에서 신라의 왕릉을 풀어보고자 의도하였다.
즉 이제까지 논의된 호석을 포함한 봉분 외표시설의 변화를 그 기준으로 하고 여기에 능원의 형식을 나누고 이를 덧붙여 살펴보면 좀 더 안정된 신라 왕릉의 비정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능원은 왕릉과 이를 둘러싼 여러 시설물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왕릉인 봉분을 포함한 복합형무덤건축(황시아오펀(김용성 역) 2006: 56)이라 할 수 있다. 왕릉을 왕을 매장한 무덤으로 특별히 축조한 거대한 기념물이며 왕을 신격화해서 제사를 지내는 장소(쯔데히로시(고분문화연구회 역) 2011: 21)라고 할 때, 신라 왕릉은 적어도 제례를 위한 배례공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게 된다.
그리고 가장 완성된 것은 자체 봉분의 외표를 장식하는 호석 등 의장 시설 이외에 능비와 화표석 등 왕릉을 표지하기 위한 시설, 석상을 포함한 능을 수호하기 위한 시설, 정기적이건 비정기적이건 제례를 위한 상석과 배례
공간을 포함한 시설, 이 제례를 담당하던 사원 등의 건축시설 등이 복합되어 능원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먼저 지금까지의 신라 왕릉의 비정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래도 조금이나마 산출된 고고학자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된 문헌과 왕릉의 외양에 대한 분석으로 실시된 왕릉 비정에서 중요한 속성으로 인정되었던 호석의 변화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능원의 형식을 설정하면서그 변천과정을 살펴 본 다음, 다시 이를 기반으로 문제가 되는 왕릉을 비정해보도록 한다.
여기서 논하는 신라 왕릉이란 본격적으로 왕호를 칭한 법흥왕 이후부터만 해당될 수도 있으나 이의 출현에 마립간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기에 대형의 봉토분이 발생한 적석목곽묘 축조기에 해당하는 마립간기의 마립간릉부터 그 시점을 잡도록 한다. 그리고 비록 현재 왕릉으로 지정되어 있는 전칭왕릉이지만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은 논의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Ⅱ. 신라 왕릉 비정의 문제와 검토
경주에 신라의 왕릉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모두 36기이고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남아있는 왕릉으로 전하는 것이 경남 양산시에 있는 전진성여왕릉과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경순왕릉이다. 따라서 신라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인데, 이는 신라 역대왕의 수가 56위인데 비하여 전해지는 것은 적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38기 가운데도 많은 것이 남아 있는 기록상의 위치나 시대적인 능의 형식과는
차이가 있어 의문시되고 있다. 다만 능비가 남아 있는 무열왕릉만은 확실시되고 여기에 덧붙여 기록상의 위치비정과 학계에서 논의된 시대적인 형식에 맞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흥덕왕릉, 문무왕릉, 선덕여왕릉 정도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 왕릉의 주인공이 부정되고 있는 것은 조선 영조 6년(1730)을 전후하여 그 이전에 전해 오던 10기(무열왕릉, 성덕왕릉, 헌덕왕릉, 혁거세릉, 미추이사금릉, 법흥왕릉, 진흥왕릉, 선덕왕릉, 효소왕릉)에
갑자기 17기(진덕왕릉, 일성이사금릉, 진지왕릉, 진평왕릉, 신문왕릉, 신무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헌강왕릉, 정강왕릉, 효공왕릉,지마이사금릉, 희강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아달라이사금릉)가 더해지고,
근래에 다시 9기(경덕왕릉, 원성왕릉, 남해차차웅릉, 유리이사금릉, 탈해이사금릉, 파사이사금릉, 나물마립간릉, 민애왕릉)가 더해져 전해지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편찬 이전부터 왕릉의 주인공이 불확실하였고, 그 후 억측과 구전이 사실화되어 전승되고 있는데다 해방 후 정부에서 법정지정 시에는 주인공의 고증보다는 법적 보호의 측면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강인구 2000: 427).
이러한 문제점은 일찍이 화계 유의건(1687∼1760)이 나능진안설(羅陵 眞贗設)에서 전혀 문헌에 의하지 않고 일시에 무식한 촌한의 말만 듣고 결정하였다고 개탄하고 있으며,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진흥왕릉고(眞興王陵攷)에서 왕릉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던 서악동고분군의 무열왕릉 뒤에 있는 대형분을 진흥왕릉을 비롯한 김씨의 왕릉으로 비정한 것에서도 찾을수 있다1).
왕릉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확실한 역사적인 기록의 고증과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를 연계시켜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그 성과를 가지고 신라 왕릉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의 고분은 목관묘단계(기원전∼기원 2세기 중엽), 목곽묘단계(2세기 후반∼4세기 전반), 적석목곽묘단계(4세기 후반∼6세기 전반), 석실묘단계(6세기 중엽 이후)로 정리되고 있다.
또 마립간기에 이르러서야 고대한 봉토분이 성립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므로 마립간기 이전 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료의 증가를 기다려야한다.
다만 이들 가운데 오릉(박혁거세릉, 남해차차웅릉, 유리이사금릉, 파사이사금릉)과 미추이사금릉은 안정성이 없는 것도 아니나 현재 지정된 왕릉은 모두 적석목곽이 내부주체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여 신라고분의 편년이 상향조정되거나 능의 수축, 개축 등 새로운 해석이 부가되어 증명되지 않는 한 이것들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다음 마립간기의 마립간(나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은 대능원과 그 주변에 분포하는 대형의 적석봉토분에 모셔진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 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월성의 서북쪽 황남동에서부터 전미추이사금릉을 중심으로 한 대능원을 거쳐 노동동과 노서동에는 특히 거대한 적석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을 관찰해 보면 단일분의 저경이 80m가 넘거나 그에 육박하는 것이 3기(황남대총, 봉황대, 서봉황대)이고, 대부분은 큰
것이 저경 45∼50m 사이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대형분이 월성 서북의 119호분, 전미추이사금릉, 노서동 134호분 등 3기이다. 따라서 마립간기의 왕릉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을 나물마립간릉으로 비정(이희준 2007: 113)하고 있기도 한데, 나물마립간릉에 대해 『삼국유사』 왕력에는 “占星臺西南” 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황남대총을 눌지마립간릉으로 보고 나물마립간릉은 첨성대 서남에 있는 황남동 119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김용성 2009: 85).
다음 석실단계에는 왕릉(법흥왕 이후의 왕릉)이 경주 시내의 평지를 떠나 산지로 이동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연구결과 왕릉이나 그에 버금가는 귀족의 묘로 추정되는 고분들은 특히 호석(護石)의 형태가 시기적으로 변천하고 있음이 밝혀졌으므로 이의 연구 성과와 기록의 고증을 통해 비정되어야 한다.
신라 왕릉을 비정한 견해는 대부분 단편적이었고, 전면적인 검토는 강인구(2000)와 이근직(2006, 2012)에 의해 이루어 졌다. 중고기 이후 왕의 장지 기록과 이들의 견해는 <표1>과 같다. 여기에서 마립간기를 제외한 중고기 이후의 왕릉은 강인구의 경우 18기를 비정하였고, 이근직의 경우 20기를 비정하였다. 차이점은 강인구가 현재 지정된 왕릉만을 대상으로 하여 비정하였으나, 이근직은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다른 고분이나 그 흔적
까지 포함시켜 왕릉을 비정하였다. 양자의 의견이 일치한 것은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의 초대형 고분 4기 가운데 양자 간 순서에 차이는 있으나2)
중고기의 법흥왕(514∼540)의 능, 진흥왕(540∼576)의 능, 진지왕(576∼579)의 능이 포함된 것으로 본 것과 기록과 현재 위치에 대한 고증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믿어지는 선덕여왕(632∼647)의 능, 무열왕(654∼661)의 능, 문무왕(661∼681)의 능, 흥덕왕(826∼836)의 능과 신문왕(681~692)의 능(전진평왕릉), 효소왕(692∼702)의 능(전신문왕릉) 모두 6기이다.
이외 비교적 안정된 비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괘릉으로 강인구는 신무왕릉으로 보고, 이근직은 원성왕릉으로 비정하였는데,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가 괘릉의 가까이서 출토되어 이전부터 원성왕릉으로 비정되었다(진홍섭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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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인구(2000)는 왕릉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축조된 것이고 무열왕의 직계조상이기 때문에 무열왕의 부친 김용춘의 묘가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1호를 법흥왕릉, 2호를 진흥왕릉, 3호를 진지왕릉, 4호를 김용춘의 묘로 보았으나 이근직(2006)은 아래에서 위로 축조되어 간 것으로 보고, 여기에 법흥왕비릉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4호를 법흥왕릉, 3호를 법흥왕비릉, 2호를 진흥왕릉, 1호를 진지왕릉으로 비정하였다.
이근직이 제시한 서악동고분군의 남측 사지가 영경사 혹은 애공사로 불렸던 것이라면 이를 기록의 방위와 맞출 때 그의 축조 순서가 적합하나 여기에 법흥왕비릉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보다 진흥왕비릉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구체적인 비정은 어떠하든 이곳이 법흥, 진흥, 진지왕의 능이 포함된 중고기 전기의 능원구역임은 확실한 것 같다.
<표 1> 신라 왕릉의 장지 기록과 비정안
왕 | 재위기간 | 장지기록(본:삼국사기,왕력,기이:삼국유사) | 강인구의 비정 | 이근직의 비정 |
마립간기 (나물-지증)왕릉 | 365~514 | 나물마립간-陵在占星臺西南(왕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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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법흥왕 | 514~540 (중고기~) | 葬於哀公寺北峰(본기) 陵在哀公寺北(왕력) | 서악동 1호 | 서악동 4호 |
24대 진흥왕 | 540~576 | 葬于哀公寺北峰(본기) | 서악동 2호 | 서악동 2호 |
25대 진지왕 | 576~579 | 葬于永敬寺北(본기) 陵在哀公寺北(왕력) | 서악동 3호 | 서악동 1호 |
26대 진평왕 | 579~632 | 葬于漢只(본기) | 전헌덕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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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선덕여왕 | 632~647 | 葬于狼山(본기) 葬於狼山之陽(기이) | 선덕여왕릉 | 선덕여왕릉 |
28대 진덕여왕 | 647~654 | 葬沙梁部(본기) | 전지마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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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무열왕 | 654~661 (중대~) | 葬永敬寺北(본기) 葬於哀公寺東有碑(기이) | 무열왕릉 | 무열왕릉 |
30대 문무왕 | 661~681 | 葬東海口大石上(본기) 陵在感恩寺東海中(왕력) | 문무왕릉 | 문무왕릉 |
31대 신문왕 | 681~692 | 葬狼山東(본기) | 전진평왕릉 | 전진평왕릉 |
32대 효소왕 | 692~702 | 葬于望德寺東(본기) 陵在望德寺東(왕력) | 전신문왕릉 | 전신문왕릉 |
33대 성덕왕 | 702~739 | 葬移車寺南(본기) 陵在東村南一云楊長谷(왕력) | 전정강왕릉 | 성덕왕릉 |
34대 효성왕 | 739~742 | (화장) 燒柩於法流寺南散骨東海(본기) 法流寺火葬骨散東海(왕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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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경덕왕 | 742~765 | 葬毛祇寺西岑(본기) 陵後移葬楊長谷中(왕력) | 전헌강왕릉 | 전김유신묘 |
36대 혜공왕 | 765~780 | (시해) | 전민애왕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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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선덕왕 | 780~785 (하대~) | (화장) -依佛制燒火散骨東海(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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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원성왕 | 785~799 | 擧柩燒於奉德寺南(본기) 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기이) | 전성덕왕릉 | 괘릉 |
39대 소성왕 | 799~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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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덕왕릉 |
40대 애장왕 | 800~809 | (시해) | 전민애왕릉 | |
41대 헌덕왕 | 809~826 | 葬于泉林寺北(본기) 陵在泉林村北(왕력) | 전헌덕왕릉 | |
42대 흥덕왕 | 826~836 | 合葬章和王妃之陵(본기) 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왕력) | 흥덕왕릉 | 흥덕왕릉 |
43대 희강왕 | 836~838 | 葬于蘇山(본기) | 능지탑십이지 | |
44대 민애왕 | 838~839 | 群臣以禮葬之(본기) (시해) | 구정동방형분 | |
45대 신무왕 | 839~839 | 葬于弟兄山西北(본기) | 괘릉 | 전진덕왕릉 |
46대 문성왕 | 839~857 | 葬于孔雀趾(본기) | 전헌강왕릉 | |
47대 헌안왕 | 857~861 | 葬于孔雀趾(본기) |
| 전정강왕릉? |
48대 경문왕 | 861~875 | 전경덕왕릉 | ||
49대 헌강왕 | 875~886 | 葬菩提寺東南(본기) | ||
50대 정강왕 | 886~887 | 葬菩提寺東南(본기 | ||
51대 진성여왕 | 887~897 | 葬于黃山(본기) 火葬散骨于牟梁部西岳一作未黃山(왕력) | ||
52대 효공왕 | 897~912 | 葬于獅子寺北(본기) 火葬∼骨藏于仇知提東山脇(왕력) | ||
53대 신덕왕 | 912~917 | 葬于竹城(본기) 火葬藏骨于箴峴南(왕력) | ||
54대 경명왕 | 917~924 | 葬于黃福寺北(본기) 火葬∼散骨于省等仍山西(왕력) | ||
55대 경애왕 | 924~927 | 葬南山蟹目領(본기) (시해) | 전일성왕릉 |
지금까지 이들이 왕릉의 비정에 사용한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왕력과 기이편에 실린 왕의 장지와 관련된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이다. 사용된 고고학 자료는 왕릉의 입지, 호석의 구조, 봉분의 크기, 능원석물, 왕경과의 거리 등이다.
강인구(2000: 457-458)는 왕릉의 호석을
1) 적석목곽분 호석을 이어받아 돌담식의 자연석을 쌓은 호석,
2) 치석한 블록형의 장대석으로 쌓은 것 또는 여기에 갑석(甲石)과 지대석(地臺石)을 갖추어 기단화한 것,
3) 거대한 판석으로 호석을 축조하는데 불탑과 같이 탱주와 면석을 구분한 것,
그리고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고 분구 주위에 석난간을 돌리며 능의 앞에 문무석, 사자상, 화표석, 능비 등을 배치한 것 순으로 바뀌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근직(2012: 446-455)은 <표 2>와 같이 법흥왕릉 형식, 무열왕릉 형식, 성덕왕릉 형식, 전민애왕릉 형식, 전일성왕릉 형식으로 호석을 분류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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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이근직의 신라 왕릉 호석 분류
형식 | 호석 형식 |
법흥왕릉 형식 | 높은 괴석호석(높이 3~5m)(서악동고분군 4기, 선덕여왕릉) |
무열왕릉 형식 | 1) 괴석호석에 괴석 받침석을 둔 것(무열왕릉, 전김인문묘, 전효공왕릉) |
성덕왕릉 형식 | 1) 면석과 탱석으로 조성된 호석에 받침석을 둔 것(환조 십이지신상)(성덕왕릉) 원성왕릉, 전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능지탑 십이지신상, 구정동방형분, |
전민애왕릉 형식 | 가공한 장대석 호석 (전민애왕릉,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 |
전일성왕릉 형식 | 낮은 괴석 호석(높이 30cm 내외)(전일성왕릉) |
양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강인구의 2)식과 이근직의 전민애왕릉 형식인 전정강왕릉, 전헌강왕릉, 전민애왕릉의 위치부여이다. 같은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강인구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8세기 중대의 형식으로 본 반면, 이근직은 9세기 후반 하대의 퇴화된 왕릉 형식으로 본 것이다. 양자는 대부분 이를 문헌에 근거하여 비정하였으나 마침 이 형식의 왕릉 가운데 1기가 발굴되었고, 1기의 주변이 조사되어 고고학 자료가 산출되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실상에 다가갈 수 있다.
신라의 중고기 이후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가운데 고고학 발굴을 거친 것은 전헌강왕릉(장정남 외 1995), 전신덕왕릉(박일훈 1963)과 왕릉으로 추정(이근직 2012: 406)되는 구정동방형분(有光敎一 1936)이다. 그리고 전민애왕릉의 주변이 조사되었다(정양모 외1985). 이 중 일반 고분으로 보이는 전신덕왕릉(강인구 2000: 414)을 제외한 나머지 3기의 조사현황과 그 편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헌강왕릉은 호석을 지대석 위에 갑석 없이 잘 치석한 장방형의 석재를 ‘品’자형으로 4 단으로 쌓았다3). 전격적인 발굴은 아니었으나 내부 구조가 밝혀졌고 일부 유물이 출토되었다. 매장주체부는 편수식의 횡혈식석실묘로 시상대의 배치와 그 구조가 연도의 방향은 다르지만 경주 충효리 8호분을 닮고 있다. 또 같은 형식의 구정동방형분보다는 채택한 석재에서 차이점이 있어 이들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충효리 8호분은 8세
기 전반 무렵, 구정동방형분은 8세기 후반으로 편년(東潮 1993: 131)되고 있으나 구정동 방형분의 경우 후술하다시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9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헌강왕릉에서 출토된 토기편에 시문된 인화문은 열점원문, 연속마제형문, 열점능형문, 유선형문, 연주화형문, 연속동심원문, 점반원문 등인데, 이중 연속마제형문은 최병현(2011)의 B형이고 화판문이 함께하여 늦게 보아도 최병현의 신라후기양식토기 4b기로 볼 수 있는 점에서 8세기 전엽이 하한으로 보인다.
전민애왕릉은 호석을 지대석 위에 잘 치석한 장방형의 석재를 ‘品’자형으로 3단을 쌓고 갑석을 얹은 형식이다. 호석에 부석(扶石)(받침석)을 받쳤으나 이는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에 대한 조사에서 왕릉을 축조한 이후에 매납된 골호가 발견되었다.
이 뚜껑에 ‘元和十年’이라는 기년이 적혀 있다. 원화는 중국 당 헌종(憲宗)(806~820)의 연호로 원화 십년은 815년에 해당된다(최병현 2011: 166). 그리고 봉분의 바깥에 매장한 십이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8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국립경주박물관소장품(강우방 1990: 362)과 매우 유사하여 8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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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고서에 의하면 이 왕릉의 호석은 내호석과 이에 잇대어 설치한 외호석으로 구분된다. 이로
보아 장방형으로 치석한 석재를 쌓은 호석은 내부에 할석으로 호석을 쌓고, 그 외부에 붙여 의
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치석한 석재의 호석은 봉분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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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방형분은 호석을 지대석 위에 같은 크기의 잘 치석된 장방형 석재를 3단으로 쌓고 사이사이에 탱석을 두었고, 모서리에 우주를 표현하였고, 위에 갑석을 얹은 형식이다. 고분은 신라에서는 특수하고 고려시대에 유행한 방형계의 봉분을 가진 점에서 가장 늦은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조사된 석실에서도 관찰되는데, 9세기 이후로 편년되는 장산 토우총4)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산토우총은 양수식으로 편수식인 구정동방형분의 묘실과는 다르나 시상의 받침석이 면석, 우주, 탱주로 구성된 석탑의 기단식이나 아무런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데 비해 구정동방형분의 우주가 표현된 시상 받침(석관?)에는 안상5)을 새겼고, 석실을 축조한 석재도 토우총의 것은 비록 치석하였으나 불규칙한 크기의 석재인데 비하여 구정동방형분은 정연하게 설계된 크기로 치석한 블록형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여 거의 빈틈없이 석벽이 축조되어 차이점이 있다. 따라서 구정동방형분은 일러도 9세기 중엽 이후로 흥덕왕릉보다는 늦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조사결과는 9세기 전반이 확실한 흥덕왕릉이 십이지가 새겨진 완성된 신라의 왕릉 호석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전헌덕왕릉과 전민애왕릉의 형식은 그 이전 이 형식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왕릉 호석으로 볼 수 있게 한다. 흥덕왕릉은 지대석 위에 판석의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의 위에 갑석을 얹은 형식이다.
한편 왕릉은 아니지만 왕에 버금가는 귀족의 묘로 믿어지는 용강동고분(문화재연구소1990)이 발굴되어 호석과 관련된 해석에 도움이 된다. 이 고분의 호석은 지대석 위에 탱석이 없이 판석의 면석만 돌리고 갑석을 얹은 형식이다. 이 고분은 양수식의 횡혈식석실로 내부에서 청동십이지용을 비롯한 다수의 도용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도용은 남녀 모두의 복식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보다 앞선 황성동석실분(국립경주박물관 외1993)의 도용은 남자복식은 당의 복식이고, 여자복식은 그렇지 않아 신라에서 남자의 복식이 중국식으로 바뀌는 진덕여왕 3년(649)에서 여자의 복식도 중국식으로 바뀌는 문무왕 4년(664) 사이에 제작된 것(최병현 2011: 164; 홍보식 2002: 105)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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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산토우총에서는 당의 연호 ‘大中(847~860)’이라는 기년이 원래 있었다고 하는 설에 의해
이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병현 1992).
5) 왕릉 석재에 안상문을 새긴 것은 전성덕왕릉 이후의 능전 상석 받침석에서 출현하였다. 구정
동방형분의 이 안상문은 십이지를 가진왕릉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인 전성덕왕릉 것과는
많이 다르고 늦은 형식으로 믿어지는 전경덕왕릉의 상석 안상문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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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강동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에 찍힌 연속마제형문은 단위문양이 황성동석실분의 것보다는 약간 U자형으로 말각방형화하여 늦으나 아직 이중반원점의 형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시차가 크지 않다면 7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게 된다(최병현2011: 159).
이러한 사실은 호석으로 면석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7세기 후엽, 즉 중대 초기로볼 수도 있으나 많은 점에서 의문이 일고 있다6). 그러나 용강동고분 형식의 호석도 흥덕왕릉과 같이 완성된 호석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출현한 것이지 그것의 쇠퇴형이라고볼 수만은 없다7).
즉 완성된 호석이 등장하기 이전에 다양한 호석이 등장하여 통합됨으로써 지대석, 면석, 탱석, 갑석으로 구성된 완성된 호석의 형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8). 그것은 중국 당의 묘실 내에 십이지용을 부장하는 현상이 8세기 중엽 전후에 많이 등장(秦浩 1996: 174; 網干善敎 2006: 272-273)하고 있는 것에서 방증된다.
구정동 방형분-치석면석형 호석- 신라에서는 유일하게 네모난 형태의 고분이다
한편 구정동방형분의 호석과 이근직의 전민애왕릉 형식은 비록 같이 장방형으로 잘 치석한 석재를 쌓아 호석을 마련한 것이나 차이점이 있다. 즉 전민애왕릉 형식은 장대석을 ‘品’자형으로 쌓았으나 구정동방형분은 훨씬 더 긴 장대석을 각 단 1매를 ‘日’자형으로 3단을 쌓아 흥덕왕릉을 비롯한 십이지가 새겨진 왕릉 호석의 판석면석을 대체하였다.
따라서 전민애왕릉 호석 형식을 구정동방형분과 연결시키는 것보다 앞 시기의 전신문왕릉과 연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신문왕릉의 호석은 지대석 위에 잘 치석한 장방형의 석재를 ‘品’자형으로 5단을 쌓고 위에 갑석을 얹었고, 이 호석에 치석한 사다리꼴의 부석을기댄 형식이다.
이상의 검토 결과를 종합하고 위에서 언급한 거의 확정된 왕릉에 대입하여 신라 왕릉의 호석을 포함한 봉분 외표시설의 변화를 살피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무열왕릉인 있는 서악동 고분군
무부석천석담장형 호석- 괴석을 안쪽으로 들여 쌓은 호석을 하였다
태종무열왕릉 -유부석괴석담장형 호석
서악동고분군의 천석을 사용하여 돌담식으로 호석을 한 서악동고분군과 같은 무부석괴석담장형호 석으로, 여기에 부석(扶石)을 기댄 것이 다르다. 둘레110m,높이 11m -봉분아래 자연석으로 축대처럼 쌓고 큰 돌을 드문드문 괴어 놓은 호석을 둘렸는데 지금은 괴어 놓은 큰돌만 보인다
전 헌강왕릉 - 무부석치석담장형 호석
남산 동쪽 기슭에서 동향으로 조영되었다. 봉분 직경은 15.3m, 봉분 높이는 4.2m이며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이다. 원형봉토분으로 호석은 최하단의 지대석 위에 10cm정도 들여서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정밀하게 가공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았다. 또한 발굴결과 외호석 안쪽에 할석(割石)으로 내호석을 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외호석과 내호석의 등장은 용강동 고분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와 같이 호석으로 정밀하게 가공한 장대석을 사용하여 4단으로 쌓아 올려 마련한 것은 9세기 중엽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 진덕여왕릉 이후 더 이상 전대(前代)와 같이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호화스러운 왕릉을 조영할 수 없는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전 신문왕릉 형식으로 복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받침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또한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상석은 봉분의 동쪽 1.6m 정도에 불규칙한 장대석 5매로 설치되었다. 장대석은 가장자리에 놓아서 장방형으로 만들고 내부에는 다른 석재들을 채웠다.
한편 1993년 8월에 있었던 태풍으로 봉분의 정상부분이 함몰됨에 따라 수습차원의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결과 전 헌강왕릉은 남벽 동쪽으로 연도를 낸 통일기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밝혀졌다. 현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였으며 현실벽은 비교적 큰 활석을 이용하여 위로 갈수록 내경(內頃)하는 궁륭형(穹窿形)에 가까운 형태로 최상부에는 개석으로 장대석 2매를 나란히 덮었다.
또한 석실 내에는 서벽과 연결되었으며 남북으로 놓인 시상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2매의 판석을 이용한 시상대의 크기는 길이 2.4m, 너비 0.7m이며 발견된 두침과 족좌도 각각 1점 뿐이었다. 따라서 전 헌강왕릉에는 1인이 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헌강왕의 장지에 대해서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12년조(886)에서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葬菩提寺東南)”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 왕릉은 조선 영조 6년(1730)에 이르러 경주김씨일족에 의해서 헌강왕릉으로 비정되었다.
제49대 헌강왕과 제50대 정강왕의 능은 모두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으므로 인접한 공간에 두 기의 왕릉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승되고 있는 왕릉 가운데 절터를 기준으로 그 동남쪽에 동일 공간 또는 이웃하여 남아있는 두 기의 왕릉을 찾을 수는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첫째, 왕릉이 무너져 발견되지 않았거나 사라진 경우와 둘째, 사료의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전 헌강왕릉과 전 정강왕릉은 능의 외형(外形)과 호석구조(護石構造)로 보아 공작지(孔雀址)에 장사지냈다는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이근직, 2006)
마립간기에 천석을 사용하여 돌담식으로 호석을 마련하던 것(무부석천석담장형)에서서악동고분군과 같이 괴석을 안으로 들여쌓은 호석(무부석괴석담장형), 여기에 부석(扶石)을 기댄 무열왕릉과 같은 것,
지대석을 놓고 치석한 블록형의 장대석(이하 치석으로 부름)으로 호석을 쌓은 전헌강왕릉과 같은 것(무부석치석담장형)과 여기에 부석을 기댄 전신문왕릉과 같은 것(유부석치석담장형),
흥덕왕릉과 같이 지대석 위에 치석한 판석(이하 판석으로 부름)의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을 축조하고 갑석을 얹었으며 난간을 마련한 것(판석면석형),
사적 제181호 신라신문왕릉(新羅神文王陵) - 유부석치석담장형 호석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있어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전해져,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적 제190호 전 민애왕릉(傳閔哀王陵) -높이 3.8m, 지름 12.5m이다
무덤 밑부분 바깥쪽으로 일정한 간격의 12개의 구멍이 있었다. 구멍에는 곱돌로 만든 12마리 동물의 얼굴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묻었다. 조사 당시에는 쥐·소·닭·돼지 4개만 발견되었다. 나머지는 무덤의 외부받침석이 만들어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덤 주변에서 뼈단지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란 글자가 있어 헌덕왕 7년(815)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뼈단지는 무덤이 만들어진 후에 묻힌 것으로 무덤은 815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사적 30호 흥덕왕릉 -판석면석형 호석
지대석 위에 치석한 판석(이하 판석으로 부름)의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을 축조하고 갑석을 얹었으며 난간을 마련하였다
흥덕왕릉은 -판석면석형 호석에 12지신상 탱을 배치하고 석난간을 둘렀다
이를 변화시켜 면석을 정연하게 치석한 장대석으로 바꾼 구정동방형분(치석면석형) 순으로 변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정동 방형분-치석면석형 호석- 신라에서는 유일하게 네모난 형태의 고분이다
네모난 형태의 방형분은 한 변의 길이가 9.5m, 높이는 2m이다. 모서리에는 기둥돌을 세우고 각면마다 길게 다듬은 돌을 3단씩 쌓고, 그 위로 다시 길게 다듬은 돌을 넓게 놓아 봉토의 흙이 무너져내림을 막도록 하였다. 남쪽 면의 중앙에는 무덤의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통로가 있으며 무덤의 안은 석실로 만들어졌고 그 바닥에는 관을 받치는 관대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누구의 무덤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각면에 3개씩 마련된 12지상의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무덤으로 보이며, 경주 지역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방형분으로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무덤의 구조와 아울러 신라 시대의 12지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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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용강동고분의 토기는 7세기 전반경의 것이나 출토된 십이지신상과 토용은 그 조각수법이나
복식이 성당시대 이후의 양식이고 외호석 등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보축된 것으로 본 견해
가있다(최병현 1992).
7) 용강동고분 호석은 내호석과 외호석이 접하여 있지 않고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외호석이
추가장이 완료된 후 다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큼으로 외호석의 축조와 십이지용 등의 부장이
늦을 개연성은 크다. 그러나 추가된 피장자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시차가 두 세대(반세
기) 이상은 아닐 것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설사 더 늦다하더라도 9세기로 넘어가지는 않
을 것이다. 東潮(2011)는 8세기 초 당의 朝陽 黃河路墓 십이지와 비교하여 용강동고분 십이
지를 7세기말 또는 8세기 초로 보았고, 7세기 말로 보는 견해(大塚初重編 2004)도 있다.
8)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호석에서 탱석은 그 좌우의 면석을 물고 봉부 내부로 깊숙하게 들어가 돌
못의 역할을 하였다(이근직 2006: 226). 따라서 면석만으로 구성된 호석이 먼저 등장하였고,
그러한 호석이 봉분의 압력에 의해 손괴되기 쉽기 때문에 탱석이 사용되
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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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 왕릉에는 위의 형식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두 종류가 있다. 흥덕왕릉과 같은 형식이나 탱석에 부석을 기댄 전성덕왕릉(유부석판석면석형), 흥덕왕릉과 같은 판석 면석형이나 난간이 생략된 전진덕여왕릉이다.
전 성덕왕릉 -흥덕왕릉과 같은 형식이나 탱석에 부석을 기댄 유부석판석면석형 호석디다,
사적 제 24호 진덕여왕릉 - 흥덕왕릉과 같은 판석 면석형이나 난간이 생략된 것이 다르다
이들은 모두 봉분 외표시설에 십이지를 환조하거나 부조한 것으로 그러한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전성덕왕릉, 거의 말기의 형식으로 판단되고 있는 것이 전진덕여왕릉이라는 것(강우방 1990: 375; 齋藤忠 1973:259)은 대세적이기 때문에 부석판석면석형인 전성덕왕릉은 무부석판석면석형의 앞에, 난간이 없는 형식인 전진덕여왕릉은 그 뒤에 놓을 수 있다.
Ⅲ. 신라 능원의 형식과 변천
신라 왕릉의 능원은 능침이라 할 수 있는 봉분과 그 외표시설, 이를 보호하는 시설물로 설치된 석사자, 능침에 대한 의례와 관련된 상석과 배례공간, 그 전면에 설치된 신도와 그 좌우의 관검석인과 호인상 등 의장석물, 능원의 입구를 표지하는 화표석, 능비 등이 시설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왕릉의 외표시설과 시설물
이러한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왕릉은 9세기 전반의 흥덕왕릉으로 이를 신라 능원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완성된 형태로 본다면 이를 향해 발전하는 형식과 다시 능원시설이 생략되며 쇠퇴하는 형식을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대략적인 추세와 앞에서 나눈 호석시설의 변화에 입각하여 개축의 가능성이 있는 전헌덕왕릉(강인구 2000: 467), 명확하게 형식을 설정할 수 없는 구황동왕릉지, 능지탑지, 그리고 특수한 형식인 문무왕릉을 제외한 신라 왕릉의 능원 형식을 앞의 봉분 외표시설 변화를 근간으로 하고 지금까지 논의된 입지9)와 방향, 능원시설을 포함하여 분류하면 <표 3>과 같이 7개의 형식이 설정되고 그 모식을 작성하면 <그림 1>과 같다.
그리고 앞의 호석 변화와 관련시킬 때 이 형식의 순서로 신라의 능원이 변천했다고 할 수 있다. 각 형
식에 대해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Ⅰ형식]
월성의 서북부에 분포하는 마립간기 왕족의 능묘구역이다. 대능원지구의 고분군 가운데 다른 귀족이나 일반민의 묘와 구분되는 가장 서측의 구역에 분포하는 대형의 고분은 마립간기 마립간과 그 가족의 고분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이 능원은 마립간과 그 가족의능묘가 구분되지 않고 군집을 이루며 배열된 것으로 볼 수 있어 마립간릉이 별도의 능역을 가지지 않고 그 가족묘와 함께 일정한 군집을 이루며 배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
서 평지에 조성된 능묘군집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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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라 왕릉의 입지에 대해서는 이근직(2006)이 비교적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능선형, 평
지형, 산정형, 산사면 말단부형, 산중복형으로 나누었는데, 여기서는 그의 의견을 대체로 받아
들이되 그의 산사면 말단부형 가운데 능선 말단을 삭토한 것과 자연능선을
수정 없이 그대로 이용한 것(무열왕릉, 전효공왕릉)을 구분하여 후자를 그의 평지형 가운데
산체를 배경으로 한 평지형과 함께 산지근접형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다르게 산체를
의식하지 않은 평지형만을 평지형으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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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능원의 형식 모식도
개별 마립간릉마다의 배례공간은 성립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고분군의 군집 가운데 비교적 넓은 공간이 마련된 곳도 있어 그것이 배례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월성을 기준으로 그 서북에 남에서 북으로 고분이 조성되어갔다고 한다면 그전면을 왕궁의 방향인 남쪽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왕궁 내부나 그 주변에 그 의례 공간이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계림과 첨성대 사이에서 조사된 대형건물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9)는 후대에 축조된 그러한 시설물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봉분의 외표시설은 천석으로 쌓은 호석이 전부이고 묘제는 적석목곽이다. 황남대총과 같이 부부를 합장한 표형분이 존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표 3> 신라 왕릉 능원의 분류
형 식 | 전칭왕릉 | 봉분(m)(직경×높이) | 능원시설 | 봉분 외표시설 | 입지 | 방향 |
Ⅰ형식 | 황남대총등 대능원고분 | 80×22 | 무 | 천석담장형 무 | 평지군집 | 동서장축 |
Ⅱ형식 | 서악동 4호 서악동 3호 서악동 2호 서악동 1호 | 56.1×18.1(둘레 189) 46.3×13.5(둘레 165.3) 45.7×12.2(둘레 146.4) 49.1×15.2(둘레 151.3) | 공동 배례공간 | 괴석담장형 무 | 능선군집 | 좌서조동 (왕경방향) |
Ⅲ형식 | 선덕여왕릉 전효공왕릉 | 23.4×6.8 (둘레 73.3) 21.2×5 (둘레 67.5) | 배례공간 | 괴석담장형 무 괴석담장형 괴석부석 | 능선상위 산지근접(평지) | 좌북조남 |
Ⅳ형식 | 무열왕릉 | 35.9×8.7 (둘레 112.2) | 상석,배례공간,능비, 배장분 | 괴석담장형고석부석 | 산지근접(평지) | 좌서조동 (왕경방향) |
전진평왕릉 전신문왕릉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 전민애왕릉 | 38.9×8.4(둘레 120.6) 29.3×7.5 (둘레 92.2) 15.3×4.2 (둘레 47.3) 15.5×4 (둘레 49.3) 12.5×3.8 (둘레 39) | 상석, 배례공간 상석, 배례공간 상석, 배례공간 상석, 배례공간 상석, 배례공간 | 괴석담장형 고석부석 치석담장형 치석부석 치석담장형 무 치석담장형 무 치석담장형 무 | 산지근접(평자) 산지근접(평지) 능선하위 능선하위 능선상위 | 좌동조서(왕경방향)좌북조남 좌서조동 좌서조돋 좌북조남 | |
Ⅴ형식 | 전성덕왕릉 | 14.6×4.7 (둘레 45.6) | 상석, 배례공간,석사,관검인, | 판석면석형,부석난간 | 능선말단 | 좌동조서 |
괘릉 | 22×7.5 (둘레 69.3) | 상석, 배례공간, 석사,관검인, 호인, 화표 | 판석면석형, 난간 | 좌북조남 | ||
흥덕왕릉 | 20.6×6.4 (둘레 64.6) | 상석, 배례공간, 석사,관검인,호인,화표,능비 | 판석면석형, 난간 | 조북조남 | ||
Ⅵ형식 | 전경덕왕릉 전김유신묘 | 20.9×6.1 (둘레 65.5) 15.8×5.8 (둘레 49.6) | 상석, 배례공간 | 판석면석형, 난간. | 능선중복. | 조북조남 |
Ⅶ형식 | 전진덕여왕릉 구정동방형분 | 14.2×4 (둘레 44.9) 8.9(변)×3.7 (둘레35.6) | 배례공간 | 판석면석형, 무, 치석면석형 무, | 능선중복. 능선말단 | 조북조남 |
[Ⅱ형식]<그림 1-1>
서악동고분군형 또는 왕릉군집형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고기 전기의 형식이다. 뒤에 높은 주산(선도산), 양 옆으로 약간 높은 능선을 두고 서에서 동으로 길게 뻗는 나지막한 능선 위에 군집해서 왕릉이 조성되었다. 왕족 또는 귀족의 고분은 대형의 경우 이 왕릉구를 둘러싼 동북의 약간 높은 능선에 주로 분포하고, 주변을 둘러싼 다른 능선에도 이들보다는 작은 고분이 밀집해서 분포한다.
왕릉이 분포하는 능선의 하단에 위치한 4호분과 무열왕릉의 사이에는 비교적 넓고 긴 편평한 배례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전면의 후대 무열왕릉 능원을 별도로 보면 이 배례공간은 군집된 왕릉 전체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아직 개별 왕릉의 배례공간이 마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의 외표시설은 괴석으로 쌓은 호석뿐이고 다른 능원시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분군의 남쪽에 있는 사지가 영경사 혹은 애공사(국립경주박물관 외 2008: 183; 이근직 2012: 231-239)가 있던 곳이라면 원찰격의 사찰이 인접하여 조성된 것이 된다. 이 사찰의 위치는 북위 방산의 영고릉 전면 사원, 고구려 진파리고분군 전면 정릉사, 백제 능산리고분군 우측의 능사와 유사하다.
묘제는 모두 석실묘로 추정되고 봉분은 단일원분이다. 왕릉은 월성 방향을 전면으로 한 좌서조동(座西朝東)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은 직경 45m 이상, 높이 12∼18m 정도로 마립간릉에 비해 축소된 현상을 보인다.
[Ⅲ형식]<그림 1-2>
왕경의 범위 바깥 둘레에 단독의 능원을 조성한 형식이다. 선덕여왕릉과 전효공왕릉이 이 형식에 속한다. 단독의 능원 내 봉분의 전면에는 일정한 배례공간을 두고 있다. 호석은 앞의 것과 같은 괴석담장형이다. 이중 선덕여왕릉은 현재 부석이 확인되지 않으나 전효공왕릉에서는 부석이 발견된다.
선덕여왕릉은 원래부터 부석이 없었다(이근직 2012:248)고 하나 현재의 호석에 부석으로 볼 수 있는 큰 괴석이 섞여있는 점으로 미루어 가공한 부석이 있었던 것(이병도 1969: 714)은 아니지만 괴석형의 부석이 있었고 복원 시에 변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고 이글의 논지와는 크게 관련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근직의 견해를 따라 무부석식으로 판단한다10). 선덕여왕릉은 낭산의 정상부 가까이 남쪽 능선의 상위에 축조된 것이고 전효공왕릉은 뒤의 산체를 배경으로 한 평지에 위치한 산지근접형의 입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능원의 방향은 모두 좌북조남(座北朝南)이다. 선덕여왕릉의 경우 기록의 도리천과 사천왕사 관련 기록으로 보아 특수한입지였던 것 같고, 전효공왕릉이 이 시기 입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개별 왕릉이 단독의 능원을 형성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26대 진평왕(579∼632)의 장지에 대해 ‘葬于漢只’라고 한 기록에서 이로부터임을 알 수 있으므로 중고기 후기의 형식으로 규정해도 좋을 듯하다. 만약 강인구(2000: 468)의 견해와 같이 전헌덕왕릉이 진평왕릉이고 후대에 호석과 능원시설이 개축된 것이라면 이 입지가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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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현재 복원된 선덕여왕릉의 호석은 큰 석재를 중간 중간에 두고 괴석을 쌓은 것으로 일본식 석축수법을 따르고 있다. 이 선덕여왕릉의 호석이 원래 호석과 그 부석을 이용하여 개축한 것이라면 이러한 큰 석재는 가공하지 않은 부석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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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헌덕왕릉은 현재는 좌북조남의 방향이나 원래는 소금강산을 배경으로 하고 월성방향을 전면으로 한 좌동조서(座東朝西)의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이 형식의 나머지 두 왕릉과 후대 하대 초기의 같은 봉분 외표시설 형식의 왕릉이 좌북조남의 방향을 택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선덕여왕릉의 봉분은 전대에 비해 훨씬 규모가 축소되어 직경 23.4m, 높이 6.8m이고 전효공왕릉은 이보다 작아졌는데 비해 전헌덕왕릉은 더 커서 직경 25.9m, 높이 6.3m로 서악동 왕릉들과 선덕여왕릉 사이에 들어간다.
[Ⅳ형식]<그림 1-3>
역시 왕경의 범위 바깥 가까이에 단독으로 능원을 조성한 형식으로 뒤 이은 형식을 고려하면 중대의 능원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식으로 무열왕릉을 비롯하여 신문왕릉(전진평왕릉), 효소왕릉(전신문왕릉),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 전민애왕릉을 들 수 있다. 앞의 세 왕릉에 비해서 뒤의 세 왕릉이 왕경의 범위를 더욱 벗어난 곳에 자리한다.
봉분의 전면에 배례공간 이외에 배례시설로 상석이 축조된 형식이다11). 이 중 무열왕릉은 이러한 능원시설 외에도 능비가 설치되었고, 그 전면에 확실한 배장분(전김인문묘, 김양묘)이 배치되어 있어 구분된다. 봉분의 호석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무열왕릉과 전진평왕릉은 전시기의 것과 같이 괴석담장형이나 전신문왕릉,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 전민애왕릉은 블록형으로 치석한 석재로 축조한 치석담장형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자는 모두 괴석의 부석을 기댄 형식이나 후자는 전신문왕릉만 치석한 부석이 있고 나머지는 부석이 생략되었다. 따라서 호석이 괴석담장형인 무열왕릉과 전진평왕릉을 더 앞 시기의 형식으로, 나머지 치석담장형을 뒤이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기도 하다.
입지에서 무열왕릉은 서악동 중고기 전기 왕릉(무열왕의 직계 조상)군이 있는 능선의 말단부 아래 평지에 능원을 조성한 산지근접형으로 좌서조동의 방향으로 월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전진평왕릉의 경우는 산체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평지에 산체를 배경으로 하여 축조되었으나 역시 산지근접형으로 볼 수 있고, 방향이 좌동조서로 다르나 월성방향을 전면으로 택한 점에서는 유사하다.
전신문왕릉의 경우는 입지는 전진평왕릉과 유사하나 방향은 월성방향이 아닌 좌북조남으로 구분된다. 나머지 세 왕릉은 산속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전헌강왕릉과 전정강왕릉은 능선의 비교적 하위에 좌서조동의방향을 가지나 전민애왕릉은 능선의 비교적 상위에 좌북조남의 방향을 가져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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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형식의 전민애왕릉,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에 원래 상석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본 견해(이근직 2012)가 있으나 현재 장대석으로 된 상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장대석으로 짠 받침 위에 다시 장대석을 짜 올린 전신문왕릉의 상석 형태를 감안하면상부의 석재가 없어졌을 뿐 원래 상석이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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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봉분의 크기에서 부석을 가진 세 왕릉은 직경 30m 내외 이상이나 나머지는 훨씬 축소되어 15m 내외 이하로 구분된다. 이와 같이 입지와 방향이 복잡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당의 황제릉 능원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아직 방위까지 고려되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이 시기 사찰을 왕경 주변의 평지에 조성하다가 조금 먼 곳의 산지에 조성하기 시작하는 현상(박방룡 1997: 161)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단 이 형식의 마지막 왕릉으로 볼 수 있는 좌북조남의 방향을 택한 전민애왕릉은 나중에 설명하다시피 본격적인 풍수사상의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대부분의 신라 왕릉의 방향은 좌북조남의 방향이 대세가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원찰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무열왕릉과 관련된 영경사, 문무왕릉과 관련된 감은사, 그리고 신문왕, 효소왕과 관련된 황복사지를 들 수 있다. 이 중 황복사 탑에서 출토된 사리함에서 이곳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축물은 혜공왕대 유교식 오묘제(五廟制)가 확립되기 이전 유교적 종묘와 불교식 원당(願堂)이 가미된 원찰로 신문왕, 효목태후, 효소왕을 모신 묘당(廟堂)(문경현 외 2004:122)으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7년조에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의 영에 제사한다”는 기록이 있어 실제 종묘제의 확립은 그 때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채미하 2012: 64).
어찌되었든 신문왕과 효소왕을 위한 원찰격인 건물은 왕릉의 주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릉에서 좀 떨어진 낭산의 동록을 택지하였음을 알려주어 원찰의 성격이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형식]<그림 1-4>
신라 능원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성덕왕릉, 괘릉(원성왕릉), 흥덕왕릉의 능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전 시기에 비해 왕경에서 훨씬 먼 곳에 왕릉이 축조된 특징이 있다. 따라서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이 함께 하대 전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능원시설은 완비되어 능전에 상석과 배례공간을 두었고, 능의 봉분 주변이나 배례공간 전면(괘릉)에 석사자를 배치하였고, 배례공간 좌우에 관검석인을 배치한 것(전성덕왕릉)이 있는 반면 배례공간 전면 신도 좌우에 관검석인, 호인상 각 1쌍을 배치하고 입구에 표지인 화표석을 한 쌍씩 배열(괘릉, 흥덕왕릉)하기도 했다. 흥덕왕릉에는 능비를 설치하였다.
봉분의 외표시설은 지대석 위에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을 축조하고 갑석을 얹은 판석면석형이고, 그 둘레를 돌아가며 박석을 깐 회랑을 두고 다시 석난간을 설치하여 의장하였다. 특이한 형식은 전성덕왕릉으로 호석의 탱석 바깥에 치석한 부석을 받쳤고, 다른 왕릉이 탱석에 십이지신상을 부조한 것인데 비하여 환조의 십이지신상을 회랑부에 세웠다.
입지는 중대를 연 무열왕의 능원과 유사하나 능선의 말단부를 삭토하여 능원을 조성하였다. 능원의 이러한 입지는 전대에 비하여 능원의 영역이 확대되어 효율적으로 설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즉 산체에 가깝게 왕릉을 축조하고 그 전면 지형을 많이 수정하지 않고 능원을 설치할 수 있는 이점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능원의 방향은 전성덕왕릉이 좌동조서이고 나머지는 좌북조남으로 통일되었다. 봉분의 크기는 전성덕왕릉(직경14.6m, 높이 4.7m)을 제외하면 직경 20∼22m, 높이 6∼7.5m로 두 왕릉이 거의 유사하다.
[Ⅵ형식]<그림 1-5>
신라 능원의 완성형인 흥덕왕릉형에서 능원시설을 생략해 쇠퇴해가는 과정의 형식으로 전경덕왕릉, 전김유신묘가 여기에 해당된다. Ⅴ형식인 괘릉(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을 고려할 때 그 이후인 9세기 중엽 이후의 하대 중기 왕릉 능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능원시설로는 완성형의 다른 능전석물이 설치되지 않고 상석과 배례공간만 남아 있다. 봉분 외표시설은 Ⅴ형식과 같이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의 위에 갑석을 얹은 판석 면석형이고, 회랑과 석난간으로 의장하였다. 호석의 면석에 십이지를 부조한 것도 Ⅴ형식과 같다. 봉분은 전경덕왕릉(직경 20.9m, 높이 6.1m)은 전시기의 것과 유사하나 약간 작고, 전김유신묘(직경 15.8m, 높이 5.8m)는 훨씬 축소되었다.
모두 산속의 주봉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의 중복부에 능원을 조성한 입지에서 공통점이 관찰된다. 이는 앞 시기에 비해 능원의 영역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다시 산속의 풍수에 따른 장지의 선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방향은 모두 좌북조남이다.
[Ⅶ형식]<그림 1-6>
신라 왕릉 능원의 쇠퇴형으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전진덕여왕릉과 구정동방형분이 왕릉(이근직 2012: 406-407)이라면 그 능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대 말기 경명왕을 제외한 진성여왕 이후의 왕이 대부분 화장한 것과 관련시키면 그 이전 9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한시기의 왕릉 능원으로 볼 수 있다.
능원시설로는 Ⅵ형식까지 잔존하던 상석마저 소멸되고 능전의 배례공간만 남아 있다. 그리고 봉분의 외표시설인 난간도 소멸하였다. 모두 호석의 탱석에 십이지를 부조한 것은 같다. 방향도 모두 좌북조남이다. 봉분의 크기는 전김유신묘보다도 작아졌다. 이러한 유사점도 있으나 봉분의 형태, 입지 등에서는 차이점이 많다.
먼저 호석은 전진덕여왕릉은 전시기에서 이어지는 판석면석형이나 구정동방형분은 새로운 형식인 치석면석형이고, 전자는 원분, 후자는 방분이다. 입지의 경우 전진덕여왕릉은 Ⅵ형식과 같이 산속의 주봉에서 뻗어 내리는 중복부에 축조되어 연결되나 구정동방형분은 능선의 말단을 삭토하고 조성된 Ⅴ형식의 입지를 잇고 있다.
그리고 구정동방형분은 Ⅴ형식의 능전에 설치되었던 석사자와 호인상을 우주에 부조(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외 2007: 408)하여 특이한 형식으로 인정된다.
Ⅳ. 능원으로 본 신라 왕릉의 비정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신라 왕릉 가운데, 중고기 법흥왕 이후에 해당되는 왕릉의 비정에서 가장 확실한 것으로 믿어지는 것은 비의 존재로 알 수 있는 무열왕(몰년 661)릉이고, 비교적 안정된 것은 서악동고분군에 법흥왕(몰년 540), 진흥왕(몰년 576), 진지왕(몰년 579)의 능이 있다는 사실, 도리천과 사천왕사와 관련된 기록과 입지가 맞는 선덕여왕(몰년 647)릉, 안강에 먼저 몰한 왕비와 합장하였다는 기록과 부합하며 ‘興德’이라는 글의 비편이 발견된 흥덕왕(몰년 836)릉, 낭산의 동쪽이라는 기록과 부합하는 신문왕(몰년 692)릉(전진평왕릉), 망덕사 동쪽이라는 기록과 부합하는 효소왕(몰년 702)릉(전신문왕릉), 감은사와 동해와 관련된 기록과 부합하는 문무왕(몰년 681)의 수중릉, 최치원이 찬한 숭복사비가 출토된 지점과 가까운 괘릉인 원성왕(몰년 799)릉이다. 이렇게 인정이 가능한 왕릉은 앞에서 설정한 능원의 형식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중고기 이후 중대의 전기 이전의 왕릉 비정은 진평왕릉과 진덕여왕릉을 제외하면 비교적 안정된 비정이 이루어진 셈이고, 그 이후의 왕릉은 흥덕왕릉과 원성왕릉을 제외하면 안정된 비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이렇게 비교적 안정된 비정이 이루어진 왕릉을 기준으로 하고 호석을 포함한 봉분 외표시설과 능원의 형식 등을 살피면서 소략하지만 남아 있는 기록을 참조하여 대략적인 왕릉의 비정을 시도해 보도록 하자.
먼저 능원 Ⅲ형식에 속하는 전효공왕릉은 입지만 다를 뿐 능원의 형식이 선덕여왕릉과 같고 입지는 중대를 연 무열왕릉과 같아 왕릉이라면 중고기 후기의 왕릉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형식면에서는 장지가 ‘沙梁部’로 기록된 진덕여왕(몰년 654)릉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재 고대사학계에서는 사량부의 위치를 남산 서측으로 보는 경향(이부오 2011:207)이 많으므로 그러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한편 전효공왕릉과 입지가 유사하고 괴석을 부석으로 사용한 이 형식 고분으로 전아달라왕릉을 들 수 있다. 이 고분은 뒤에 열 이은 2기의 고분(전신덕왕릉과 전경명왕릉)을 두고 가장 전면에 배치되었는데, 뒤의 두 고분은 부석이 확인되지 않아 그 형식이 다른데, 이는 연대 차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하다면 이 고분이 축조될 당시는 독립분이었을 것이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현재 고대사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사량부의 범위에 위치하기도 한다. 다만 이 고분은 크기가 직경 18m, 높이 4.2m로 선덕여왕릉보다 너무 줄어들어 의문이 된다. 따라서진덕여왕릉에 대한 비정은 앞으로 좀 더 검토되어야 한다.
이 시기의 왕릉으로 볼 수 있는 또 하나가 전헌덕왕릉이다. 왕릉은 십이지가 탱석에 새겨지고 난간을 가진 봉분 외표시설을 가졌으며 현재 경주고등학교에 보관된 능전석물이 여기서 떠내려 온 것으로 믿어지고 있어 여기의 능원형식으로는 Ⅴ형식에 해당한다.
강인구(2000: 467-468)는 이러한 봉분 외표시설과 능전석물 등이 후대 이 왕릉이 개축되면서 설치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는 이후 능전의 능원시설이 완비된 왕릉의 경우 모두 좌북조남의 방향을 택하고 있는데 비해, 이 왕릉은 원래 동쪽의 소금강산을 배경으로 하여 그 앞 평지에 조성되어 월성방향을 전면으로 택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러한 입지와 방향은 중고기와 중대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헌덕왕릉에 대한 기록에는 능의 남쪽에 ‘泉林寺’와 ‘泉林村’ 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능은 북천 북안 천변에 위치하여 항시 홍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그 남쪽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점도 그 가능성을 높여 준다12).
한편 이 왕릉은 같은 봉분 외표시설을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커 직경 25.9m, 높이 6.3m로 하대의 헌덕왕에 앞서는 원성왕릉으로 믿어지는 괘릉(22×7.5m)과 바로 뒤의 흥덕왕릉(20.6×6.4m)보다 훨씬 크고 서악동의 왕릉들과 선덕여왕릉과 비교하면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은 이 왕릉이 처음으로 단독 능원을 형성시켰고, 평지에 조성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진평왕(몰년 632)릉으로 추정할 수도 있도록 한다.다음 Ⅳ형식 능원에 해당하는 왕릉의 문제이다. 이 형식의 왕릉은 블록형의 석재를 ‘品’자형으로 쌓은 전헌강왕릉, 전정강왕릉, 전민애왕릉이다. 앞의 신문왕릉과 효소왕릉을 관련시키면 주인공은 중대 후기 왕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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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헌덕왕릉은 입지한 곳이 북천 북안변으로 당시의 다른 왕릉 입지와 차별이 있다. 또 하대
왕경의 내부에 축조된 점에서도 헌덕왕릉은 의심된다. 이곳이 계속해서 수해를 입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왕릉이 하대에 축조된 것이라면 지금과 같이 남쪽이 전면일 것인데 그
러하다면 북천이 가로막고 있어 ‘葬于泉林寺’(『삼국사기』 본기)과 ‘陵在泉林村北’(『삼국유
사』 왕력)의 ‘泉林寺’나 ‘泉林村’이 입지할 여건도 되지 않는다.
북천의 유수는 분황사 동북편의 원지를 가진 건물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8)등의 위치로
보아 그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범람의 대상은 바로 그 북안이었고, 북안지역은 현재 하안
에서 북쪽으로 100m 이상의 지점부터 방리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차순철
2011).
지금까지 이 왕릉의 주변에서 발견된 사지는 북동편의 (전)東川寺址와 남동편의 (전)林泉寺址
(국립경주박물관 외 2008)가 있는데, 후자의 경우 천변에서 수습된 석재에 근거한 것으로 더
상류 왕릉 동편의 소금강산 남쪽 말단에 존재했던 사지의 유물이 북천의 범람으로 여기로 떠내
려 온 것일 수 있다.
이는 여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탱석의 배치와 함께 하대 개축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한편 현재
남아 있는 왕릉도 북동편 홍수의 위험이 덜한 일부만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여 십이지신상도
자, 축, 인, 묘, 해상만 남아 있어 그러한 사정을 전해 준다.
그러므로 홍수에 의해 훼손된 왕릉이 하대에 개축되면서 새로운 능원으로 조성되었고, 그것이
그 후에도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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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왕 가운데 효성왕은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릉을 조성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나머지 성덕왕, 경덕왕, 효공왕이 대상이 된다. 따라서 강인구(2000: 462-463)는 『삼국유사』 왕력의 ‘楊長谷’이 성덕왕과 경덕왕의 장지와 관련하여 함께 등장하는 점에 주목하여 전정강왕릉을 성덕왕의 능으로, 전헌강왕릉을 경덕왕의 능으로, 전민애왕릉을 혜공왕의 능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앞의 두 능묘 주변에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3년에 세웠다는 성덕왕릉의 능비나 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성덕왕릉이 인정될 수 없는 형편이고 발굴된 전헌강왕릉에서 왕릉이라고 추정할만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아 두 고분 모두 7세기나 8세기의 귀족묘로 볼 수도 있다. 두 능묘의 호석에서 갑석이 생략되고 있는 점에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전민애왕릉은 산 능선의 상위에 위치하고 방향은 좌북조남이 택해진 것을 볼 수 있어 다른 중대의 능묘와는 차별성이 있다. 이는 본격적인 풍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있다.
본격적인 풍수의 도입은 신라 말 도선국사(827~898)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당의 一行(683~727)에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수학한 현초(玄超), 의림(義林), 혜일(惠日) 등이 8세기 후반 귀국하여 보급된 것으로 보는 견해(최병헌 1986)(강인구 2000: 455에서 재인용)도 있어 8세기 후반 혜공왕(몰년 780)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신라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는 왕릉의 조성에 좌북조남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택해지고 있음이 그 가능성을 높여준다. 전민애왕릉의 입지가 풍수에 부합한다면,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왕릉이 조성된 후에 매장된 것으로 믿어지는 주변에서 발굴된 골호의 연대로 보아 왕릉의 축조가 815년 이전임을 고려하면 한층 더 혜공왕의 능일 가능성이 커진다.
다음 Ⅴ형식, Ⅵ형식, Ⅶ형식의 능원을 가진 왕릉의 문제이다. 대략 하대에 해당할 터인데, 하대에 해당되는 왕릉 가운데 비교적 안정된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을 제외한 왕릉의 비정이다. 능원의 형식은 Ⅴ형식→Ⅵ형식→Ⅶ형식이고 그 순서로 변화했을 것이다.
Ⅴ형식 능원은 전성덕왕릉, Ⅵ형식 능원은 전경덕왕릉과 전김유신묘, Ⅶ형식의 능원은 전진덕여왕릉과 구정동방형분이 있다.
하대의 왕 가운데 51대 진성여왕 이후에는 경애왕(몰년 927)을 제외하면 왕의 장례기사에 화장으로 기록되었다. 경애왕의 경우도 견훤의 침입과 관련했을 때 왕릉다운 왕릉의 조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대의 시작왕인 선덕왕(몰년 785)은 기록에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하였다고 하였음으로 왕릉이 조성되지 않았고, 40대 애장왕(몰년 809)은 시해되었으며 장지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왕릉이 조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 형식의 주인은 소성왕(몰년 800), 헌덕왕(몰년 826), 희강왕(몰년 838), 민애왕(몰년 839), 신무왕(몰년 839), 문성왕(몰년 857), 헌안왕(몰년 861), 경문왕(몰년 875), 헌강왕(몰196 년 886), 정강왕(몰년 887) 등에서 찾아야 한다.
한편 이들 형식의 능원을 가진 왕릉은 대부분 십이지신상을 가진 탱석이 호석에 배치되고 있거나 십이지신상이 호석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왕릉의 비정은 십이지신상의 변화상과 함께 고려하여야한다. 그동안 십이지신상을 가진 왕릉에 대한 연구(강우방 1973; 강인구 1987; 이근직 2012; 西嶋定生 1978; 有光敎一 1936; 齋藤忠 1937)는 그 순서에 있어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종합하고 십이지신상을 고고학 형식에 대입한 연구(김용성 2012)에서는 전성덕왕릉→괘릉(원성왕릉)→흥덕왕릉·전헌덕왕릉→전경덕왕릉→전김유신묘·구황동왕릉지→전진덕여왕릉→구정동방형분의 순서가 도출되었다. 이는 여기서의 능원 형식 변천과 위배됨이 없다.
또한 십이지신상을 가진 능묘는 함께하고 있는 능원 석물인 양당개(兩襠鎧)를 걸친 관검석인을 같이 고려하면 8세기 후반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김용성 2012: 149). 이 십이지신상의 변천과정을 더하면서 Ⅴ형식 이후의 왕릉을 비정해 보도록 하자.
Ⅴ형식의 왕릉은 원성왕릉(괘릉)과 흥덕왕릉, 전성덕왕릉이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왕릉은 안정된 비정으로 볼 수 있다. 나머지 전성덕왕릉은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이 형식의 왕릉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형식이므로 원성왕의 선대 왕에 비정되어야 하고, 관검석인의 등장을 8세기 후반 이후로 보아야하기 때문에 비정할 왕이 없는 셈이다.
이 왕릉은 같은 형식의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에 비하여 능원의 석물이 소략하고 그 배치도 약간 다르다13). 따라서 왕릉이 아닌 ‘능으로 부를 수 있는 묘(號墓爲陵)’14)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대를 원성왕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원성왕이 하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점과 그가 그의 직계조상을 왕으로 추존하였으며 이전 오묘(五廟)를 바꿔 그의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포함시킨 점, 그의 아들 2인(인겸과 의영)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먼저 죽은 점 등으로 보아 이들 가운데 전성덕왕릉의 주인공이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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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성덕왕릉은 봉분의 앞에 상석과 배례공간을 두었고, 이 전체를 포함한 범위의 네 모서리에
석사자를 배치하고 그 내부에 또 관검석인 한 쌍을 배열하여 원성왕릉, 흥덕왕릉과 다른 배치
이고 축소된 모습이다. 훨씬 앞에 비를 세운 흔적인 귀부가 남아 있으나 이 비가 능비인지, 다
른 성격의 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신라의 다른 능비와는 달리 이 전성덕왕릉비는 능의 전면으로 향했을 신도의 방향과 약 11도
어긋나고(齋藤忠 937), 위치한 곳이 당시 경주 왕경에서 불국사와 울산 방향으로 가는 길옆
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다시 검토될 소지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비와 전성덕왕릉과의 거리, 그리고 그 옆에 남아있는 대형 고분인 전효소
왕릉과의 거리가 비등하고, 비가 존재하는 왕릉에서 능비는 신도의 좌측에 배열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효소왕릉의 능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를 감안하였는지 西嶋定生(1978)은 전성덕왕릉을 경덕왕릉으로 보았다. 이 비는 양식상 8
기후반(이호관 1982)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 당 황제릉 전면 배장분 가운데 묘원을 가진 회덕태자묘, 영태공주묘 등을 다른 것들과 구분
하여 號墓爲陵으로 부른다(秦浩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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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왕릉의 전면에 배치된 비는 비록 조사된 비편에서 왕릉으로 인정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으나 무시할 수 없는 자료이다. 그러므로 성덕왕릉일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왕릉의 옆에 있는 전효소왕릉이 왕릉이라면 두 기의 왕릉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이 되는데, 『삼국유사』 왕력에 동촌의 남쪽 양장곡에 함께 성덕왕릉과 경덕왕릉이 있다는 기록과 부합하는 점이 있다. 동촌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북쪽 동방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이근직 2012: 381).
이 전성덕왕릉이 성덕왕릉이라면 왕릉은 후대에 개축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갖추어졌을 것이다. 이 능원에는 석사자와 관검석인이 출현하였다. 이 석사자와 관검석인은 당 능묘의 현상을 참조하면 앞에서와 같이 8세기 후반에나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능원의 형성은 빨라도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는 등 선대왕의 추모사업이 벌어진 혜공왕대 후반기에나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이는 전성덕왕릉이 성덕왕릉이라고 하면 후대에 이 능원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십이지신상을 호석에 설치한 것도 이때라고 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이 형식 가운데 비정이 안정되었으며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늦은 흥덕왕릉은 장화왕비가 몰한 826년 무렵에 축조되었고, 흥덕왕이 10여년 후에 합장된 것(이근직 2012: 119)이기에 이 형식의 완성된 능원은 9세기 초를 중심으로 한 시기에 한정된 것임을 알려준다.
다음 Ⅵ형식과 Ⅶ형식의 능원 왕릉 주인공은 Ⅴ형식인 흥덕왕 이후의 왕에서 찾아야한다. 이중 Ⅵ형식의 전경덕왕릉과 전김유신묘, Ⅶ형식의 전진덕여왕릉은 그 입지가 산속의 중복부에 위치하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중대 이후 왕의 장지 기록에서 산이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앞의 성덕왕과 경덕왕의 ‘양장곡’을 제외하면 희강왕의 ‘蘇山’, 신무왕의 ‘弟兄山’, 문성왕과 헌안왕의 ‘孔雀址’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서 주인공을 찾는 것
이 바람직하다.
이 가운데 전김유신묘는 경덕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능원의 형식과 십이지신상의 형식에서 흥덕왕릉 이후의 것이므로 이병도(1969)의 견해를 따라 제형산에 장사하였다는 신무왕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 능에 대해서는 또 흥덕왕 때, 김유신을 흥무왕으로 추존하면서 발전된 형식으로 개축한 결과(박일훈 1968, 김상기 1969)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는데, 그러하다면 능원의 형식이나 입지 등이 흥덕왕릉과 같아야하나 그러하지 않고 더 후대의 형식인 점, 김인문의 묘비편이 서악서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서악서원 바로 뒤에 대형의 봉분 잔해로 보이는 것이 있고, 1960년대만 하더라도 거기에 석실이 있었고, 이 석재를 주민들이 갔다 썼다는 것에서 이를 김인문묘로, 전김인문묘를 김유신의 묘로 비정할 수 있는 견해(문경현 외 2004: 148-158)를 따르면 부정된다.
전김인문묘는 무열왕릉에 배장된 묘이면서도 묘비가 세워지는 등 별도의 묘원을 가지고 있어 능으로 부를 수 있는 묘가 되어 김유신의 위상과 걸맞는 점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서 김유신을 ‘金山原’에 장사하였다고 하였고, 김인문열전에서 김인문은 ‘京西原’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서악동의 선도산 아래를 경서원(서울 서쪽의 들판)으로 볼 수 있으나 금산원으로도 불렸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전김유신묘의 능원 형식과 십이지신상 형식 등은 흥덕왕릉 이후 훨씬 뒤에 해당하고 왕릉이 산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서 흥덕왕대에 개축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신무왕의 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김유신묘를 이렇게 추정하면 전경덕왕릉은 소산에 묻힌 희강왕의 능일 가능성이 커진다. 전경덕왕릉 역시 산 중복에 위치하고, 왕릉의 주변에는 다른 왕릉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능원과 호석의 형식, 그리고 십이지신상의 형식에 있어서도 전김유신묘와 유사한 시기지만 더 앞 시기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강우방(1990: 319)과 이근직(2006: 94)의 견해와 같이 구황동왕릉지, 즉 황복사지와 그 주변의 십이지를 비롯한 석물이 왕릉의 것이고 여기에 왕릉이 존재했다면 봉분의 크기(둘레 51m 내외), 상석을 가진 능원 형식(Ⅴ형식), 십이지의 형식이 평복이라는 점 등이 모두 전김유신묘와 동일한 특징을 가진 것이고 입지만 달라 유사한 시기의 왕릉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君臣以禮葬之’라고 기록하고 있어 시해를 당했으면서 왕릉이 조영된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민애왕(몰년 839)릉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나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Ⅶ형식의 오류리 전진덕여왕릉은 더 뒤의 왕릉일 것이다. 이 왕릉의 십이지신상 형식도 거의 마지막 형식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왕릉의 뒤에는 왕릉으로도 볼 수 있는 대형의 봉토분이 왕릉과 연접하여 위치하는데, 만약 뒤의 이 봉토분을 왕릉으로 본다
면 두 기의 왕릉이 한 곳에 있는 것이 되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지 기록에서 ‘孔雀址’로 함께 장지가 표기된 문성왕과 헌안왕, 또는 ‘菩提寺東南’으로 함께 장지가 표기된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15).
더 추론하여 나란한 전진덕여왕릉과 대형 봉토분 가운데 앞에 있는 전진덕여왕릉이 선축된 것이고 뒤의 봉분이 후축된 것이라면 문성왕과 헌강왕이 전진덕여왕릉의 주인공으로 좁혀지고, 진성여왕 이후 왕릉이 제대로 조영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를 문성왕의 능으로 볼 수 있다.
전진덕여왕릉이 입지한 곳은 그 지형이 북쪽의 높은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여러 갈래의 지릉이 뻗어 공작의 꼬리와 유사한데, 왕릉은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있 어 ‘공작지’라는 표현에 적합하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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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전진덕여왕릉의 북쪽에 접해 축대가 있고, 그 위에 현존 직경 12m 내외, 최고 높이 2.8m의
봉토분이 분포한다. 한편 전진덕여왕릉은 『삼국유사』 왕력에 “火葬散骨于牟梁部西岳一作
未(卉)黃山”이라한 진성여왕의 장지와 연결되나 산골하였다하였음은 왕릉을 조성하지 않았
을 가능성이 더 커 문제가 된다. 이는 양산에 남아 있는 전진성여왕릉도 실제 진성여왕릉이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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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서북에 사찰이 입지한 증거를 아직 찾을 수 없어 헌강왕의 장지 ‘보리사동남’이라는 표현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마지막으로 Ⅶ형식의 능원인 구정동방형분은 단독으로 존재하여 근거리나 함께 있어야 할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을 제외하면 경문왕의 능으로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왕릉과 능원의 형식이 앞에서 살펴 본 구정동방형분의 연대와 순조롭게 연결된다. 또한 경문왕 이 하대의 원성왕계 중에서도 새로운 출계의 왕계를 연 점에서 새로운 형식의 왕릉과 능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약간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능지탑의 십이지가 원래 왕릉의 것(강우방 1990: 326; 이근직 2012: 322)이라면 잘 치석된 장대석과 십이지가 새겨진 탱석의 구성이 구정동방형분과 유사하고, 현재 능지탑의 북쪽에 연접해 있는 방단유구를 감안하면 원래 2기의 고분이 나란하게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능지탑의 십이지는 9상(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외 2007: 181-221)이 알려져 있다.
이중 자상은 구황동왕릉지의 인상으로 추정되고 나머지 8상 가운데 술상은 자상, 해상은 술상으로 볼 수 있다(이근직 2012: 322). 8상을 자세히 살피면 묘상, 미상, 유상<그림 3-B>은 나머지 자상, 축상, 오상, 신상, 술상<그림 3-A)과는 천의자락의 표현이 더 간결하여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이들이 왕릉의 것이라면 구황동왕릉지의 것을 제외하고도 2기의 왕릉 것이 모여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자료가
되지는 못하는 상황이므로 유보하고 왕릉일 가능성만 점쳐본다16).
이렇게 신라의 왕릉을 비정하면 왕릉의 크기가 단락을 지으며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변천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즉 마립간기 왕릉에서 중고기 전기에 축소되고, 중고기 후기에 다시 축소되다가 중대의 전기인 무열왕릉에서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고, 하대가 시작되는 원성왕릉(괘릉)에서 다시 커졌다가 작아지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신라의 시대구분 인 중대와 하대의 시작 시기에 각각 왕릉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이 현상은 의미가 있을 것 16) 현재 복원된 능지탑의 북쪽에는 연접하여 방단의 유구가 남아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하고 있었다(齋藤忠 1973).
따라서 9세기 후반의 왕릉이 해체되어 다른 용도의 건축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고, 원래 두 능은 방분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두 기의 왕릉이 있었고 그것에서 해체된 십이지가 새겨진 탱석 등을 사용해 능지탑이 축조된 것이라면 두 기의 왕릉은 근접하고 있었을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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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능지탑의 십이지(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외 2007에서)
A |
자상 |
축상 |
오상 |
신상 |
술상 | ||||
B |
|
묘상 |
미상 |
유상 |
|
으로 보인다. 새로운 왕계의 출현으로 구분되는 신라사 시대 구분 전환점에서 새로운 형식의 왕릉을 통하여 출계에서 정통성이 결여된 왕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Ⅴ. 맺음말
신라의 왕릉은 봉분의 외표시설을 기준으로하고 여기에 능원에 설치된 시설, 입지 등에 의한 분류를 통하여 그 변천을 살필 수 있고, 봉분의 크기도 단락을 지으며 축소된다. 그 가운데 봉분의 외표시설이 신라 왕릉의 변천을 살피는데 가장 민감하여 그 기준이 된다.
신라 왕릉은 지금까지 비정된 것 가운데 비교적 안정적으로 인정되는 무열왕릉을 포함한 서악동 왕릉군, 선덕여왕릉, 신문왕릉(전진평왕릉), 효소왕릉(전신문왕릉), 흥덕왕릉, 괘릉(원성왕릉)에 대한 앞의 분류형식이 변화하는 양상에서 그 대략적인 변천 양상을찾을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조사된 전헌강왕릉, 전민애왕릉 등과 용강동고분, 황성동석실묘, 전신덕왕릉, 구정동방형분 등의 고고학 자료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년을 통해 분류한 각 형식의 변천상을 읽어낼 수 있다.
신라 왕릉의 변천에서 가장 민감하게 작동되는 호석은 마립간기에 천석을 사용하여 돌담식으로 호석을 마련하던 것(무부석천석담장형)에서 서악동고분군과 같이 괴석으로 호석을 쌓은 것(무부석괴석담장형), 여기에 부석(扶石)을 기댄 무열왕릉과 같은 것(유부석괴석담장형),
지대석을 놓고 치석한 블록형의 장대석으로 호석을 쌓은 전헌강왕릉과 같은 것(무부석치석담장형)과 여기에 부석을 기댄 전신문왕릉과 같은 것(유부석치석담장형), 흥덕왕릉과 같이 지대석 위에 면석과 탱석으로 구성된 호석을 축조하고 갑석을 얹었으며 난간을 마련한 것(판석면석형),
이를 변화시켜 면석을정연하게 치석한 장대석으로 바꾼 구정동방형분(치석면석형) 순으로 변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표 4> 신라 왕릉의 새로운 비정
시기 | 전칭왕릉 | 피장자(몰년) |
중고기 | 무열왕릉 뒤 서악동고분군 선덕여왕릉 | 법흥왕(540), 진흥왕(576), 진지왕(579) 진평왕(632)? 선덕여왕(647) |
중대 | 열왕릉 | 무열왕(661) 신문왕(692) 효소왕(702) 성덕왕(739)? 혜공왕(780) |
하대 | 괘릉 | 원성왕(799) 흥덕왕(836) 희강왕(838) 민애왕(839)? 신무왕(839) 문성왕(857) 경문왕(875) |
이를 기준으로 하여 능원을 7개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능원의 형식은 배례공간의 존재가 희미하며 능묘가
군집하는 마립간기의 형식(Ⅰ형식), 공동 배례공간을 가진 왕릉군집형인 중고기 전기의 형식(Ⅱ형식), 독립된 능원에 배례공간만을 가지는 중고기 후기의 형식(Ⅲ형식), 거기에 상석이 등장하는 중대의 형식(Ⅵ형식), 더하여 석사자와 석인 등 능원시설이 완비되는 하대 전기의 형식(Ⅴ형식), 상석과 배례공간만 남고 능원시설이 생략되는 하대 중기의 형식(Ⅵ형식), 상석마저 소멸하고 배례공간만 남는 진성여왕 이전 하대 후기의 형식(Ⅶ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호석과 능원의 변천과정, 그리고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신라의 왕릉은 마립간기의 대능원지구 대형분, 중고기 초기의 서악동왕릉군, 중고기 후기의 선덕여왕릉, 중대 전기의 무열왕릉, 신문왕릉, 효소왕릉, 중대 후기의 왕릉으로 전민애왕릉(혜공왕릉?), 하대 전기의 왕릉으로 원성왕릉(괘릉), 흥덕왕릉, 하대 중기 이후의 왕릉으로 전경덕왕릉(희강왕릉?), 전김유신묘(신무왕릉?), 전진덕여왕릉(문성왕릉?), 구정동방형분
(경문왕릉?)을 비정할 수 있다.
이외 전헌덕왕릉을 중고기의 진평왕릉이 흥덕왕 무렵에개축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고, 구황동 추정 왕릉지는 하대 중후기 민애왕릉의 가능성이높다. 또 전성덕왕릉은 그것이 왕릉이라면 혜공왕대에 개축된 성덕왕릉일 가능성이 있다. 이상의 신라 왕릉 비정을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이러한 결과는 일부 조사된 왕릉과 고분이 자료로 사용되었으나 대부분은 엉성한 문헌과 현재 남아 있는 왕릉의 외관에 의해 분석된 것이다. 따라서 과도한 추정도 많았을 것이고, 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시행되면 고쳐질 부분이 많을 것이다.
한편 현재 신라 왕릉 연구에서는 능원의 관점에서 중국 능묘의 능원제도와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고, 능원 형식의 변천이 담고 있는 의미의 파악도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후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신라 왕릉과 그 주변에 대한 적극적인 고고학조사를 통하여 좀 더 안정되고 명확한 신라 왕릉과 능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출처] 신라 왕릉의 유형및 새로운 비정|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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