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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문수봉(李楨汕) 2021. 3. 28. 08:02

답사 정보

『세상을 잇는 다리』 Ⅵ [형교⑵] - ①조동철교, ②탄금대교, ③승일교, ④무영대교,

ohyh45 2021. 3. 2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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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Ⅵ [형교⑵조동철교·탄금대교·승일교·무영대교·진도대교]···목차

 

35. 태백선 조동철교(鳥洞鐵橋)와 사북항쟁 - 극단을 견디는 다리 기관사들에겐 공포의 구간

36. 가야 12부족 소리가 살아 울려펴지는 탄금대교(彈琴大橋)- 야경에 감추어진 1500년의 슬픔

37. 민족 분단의 상흔이 남아 있는 승일교 - 이것 좀 봐···북한이 시작해서 남한이 완성한 다리

38. 심오한 지혜와 학문 요람에 노인 무영대교 - 전남 무안과 영암을 잇는 이 다리리가 상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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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Ⅰ [징검다리·노둣길·섶다리] https://blog.naver.com/ohyh45/222130331639

『세상을 잇는 다리』 Ⅱ [외나무다리·농다리·널다리] https://blog.naver.com/ohyh45/222131295590

『세상을 잇는 다리』 Ⅲ [널돌다리·무지개다리] https://blog.naver.com/ohyh45/222131949676

『세상을 잇는 다리』 Ⅳ [누각다리·정조가 건넌다리·뜬다리부두] https://blog.naver.com/ohyh45/222199812324

『세상을 잇는 다리』 Ⅴ [형교⑴-판문점 다리·한강의 대교들] https://blog.naver.com/ohyh45/222251617703

『세상을 잇는 다리』 Ⅵ [형교⑵-조동철교·승일교·탄금대교·무영대교]https://blog.naver.com/ohyh45/222288009148

35. 태백선 조동철교(鳥洞鐵橋)와 사북항쟁

- 극단을 견디는 다리 기관사들에겐 공포의 구간

살면서 제일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배려다. 다리는 등을 굽혀 그 위를 지나는 모든 것을 배려한다. 제 몸을 내리누르는 모든 압박을 견뎌낸다. 다리 중 가장 배려심이 많은 게 라멘교다.

상·하부구조를 일체형으로 만들어, 다리가 넘어지지 않는 한 낙교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장점으로 도로나 철로를 횡단하는 곳에 주로 설치한다. 그래서 다른 시설물을 돕고 배려하는 다리라 부른다.

특이한 라멘교

▲ 조동철교 모습 ⓒ 이영천

높이가 다른 3 × 3 라멘교를 이어 만든 특이한 모양새의 철교다. 철도 등반한계구배를 적용해, 열차가 천천히 달린다. 기관사들에겐 공포의 구간이기도 하다. 다리 상판과 보, 교각 등을 전부 일체형으로 지은 국내 유일의 라멘교는 석탄 화물 등 무거운 물건을 싣고 다녀야하는 태백선 화물철도의 특성상 엄청난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를 해야했다.

그런데 태백선을 짓는 시절은 별다른 기술이 없었던고로 이런 특이한 라멘철교를 만들게 된 것이다.원래 똬리굴로 경사를 극복하던 곳이라 예미 - 조동의 태백선 직선 구간은 대한민국 철도에서 가장 경사가 가파른 30‰(퍼밀: Per Mil)이다.

강원도 정선 신동읍에 있는 철도교다. 태백선 예미역과 조동역 사이 지방도 421호선을 횡단한다. 높은 건물을 짓듯, 두 겹 교각과 수평재 입체배열로 상판을 지지하고 있다. 속이 비어 있는 직육면체 기본단위 가로3칸 × 세로3칸 라멘교를, 단단한 지반 위에 연이어 세웠다.

총 6개 라멘교를 이어 붙여 상부에 레일을 깔았다. 멀리서 보면 직육면체 텅 빈 뼈대만 남은, 3층짜리 큰 집들 기둥이 연속해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조동철교(鳥洞鐵橋)는 1966년에 만들었다. 함백을 거치치 않고 예미에서 조동을 직선으로 잇기 위한 조치다. 경사도 30‰(Per Mil)이다.

철도에서 사용하는 구배(勾配, 수평을 기준으로 한 경사도)는 19‰을 넘지 않도록 설계한다. 열차 바퀴와 레일 마찰계수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19‰을 넘게 되면 열차가 자칫 미끄러질 수 있어, 이를 방지하려는 조치다.

태백선 조동철교(鳥洞鐵橋 : Jodongcheolgyo(Railway Bridge)

태백선이 지나는 조동철교 다리 위를 느리게 기차가 지나고 있다. 열차 등반 한계구배 때문이다.ⓒ이영천

 

기술적으로 30‰은 부득이한 경우에 해당하며 열차 등반 한계구배다. 이 구간을 운행하는 모든 열차는 속도를 최대한 줄이며, 기관사들에겐 공포의 구간이기도 하다. 태백선과 나란히 달리는 함백선, 함백역과 조동역 구간은 이런 경사를 극복하기 위해 똬리굴(Loop식 철도)로 통과한다. 이 점을 상기하면 30‰이라는 구배에 대해 이해가 쉬워진다.

석탄을 위한 철길

연탄에 대한 추억과 에피소드는 차고 넘칠 정도다. 시인 안도현은 '너에게 묻는다'는 단 3행 짧은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한다. '넌 다른 사람에게 언제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느냐' 묻는다.

혼신의 힘을 다하고 하얗게 재가 되어 본 적이 있느냐, 시는 묻는다. 하찮게 보이는 연탄재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뜨거운 삶을 살아 냈다는 생각이다.

연탄을 흔히 구공탄(통상 19개로'십구공탄'이라 부름)이라 부른다. 석탄을 가공해 만든다. 영월, 정선, 태백, 삼척은 우리나라 대표적 석탄 산지다. 태백선은 제천에서 영월, 영월에서 함백, 함백에서 황지, 황지에서 고한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철도다. 석탄과 석회석을 실어 나를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하루 수만 톤 석탄을 실어 날랐다.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엔 에너지가 절대 부족이다. 이에 눈 돌린 곳이 강원도 석탄이다. 화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석탄이 필요했다. 이런 필요로 곳곳에 광산이 개발된다. 강원도와 충청도 대천, 경상도 문경, 전라도 화순에서 석탄이 생산된다. 그 중 강원도는 전국 생산량의 80%을 감당해 낸다.

태백선은 이렇듯 국가에너지 충족이라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철도다. 조동역에서 자미원역, 민둥산역을 지나면 사북역이 나오고 이어 고한역이 나온다. 우리나라 석탄탄광을 대표하던 '동원탄좌'가 있던 곳이다. 동원탄좌개발(주)라는 악덕기업이 소유한 탄좌다.

검은 사슴

▲ 갱도 모형

사북 석탄박물관 체험장에 만들어진 갱도 모형이다. 지보공을 통나무로 만들어 늘 붕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실제 노동환경은 사진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이영천

 

흔히 '막장'이란 말을 사용한다. '인생 갈 데까지 간 사람이나 혹은 그런 행위'를 비유하는 말이다. 본래 뜻은 '갱도 막다른 곳'으로 석탄 캐는 탄부의 소중한 일터다. 작업환경은 무척 열악하다. 갱도 안은 높은 온도에 먼지투성이다. 가스가 누출되어 언제 중독될지 모른다. 지보공은 통나무로 만들어 위험하기 그지없다.

갱도가 무너지면 꼼짝없이 갇혀, 목숨을 잃게 될 위험에도 항시 노출되어 있다. 먼지투성이 막장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 먼지와 탄가루로 '진폐증'에 걸리기도 한다. 이런 최악의 노동환경에서 일을 한다. 장시간 가혹한 노동 조건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족의 생계를 지켜낼 담보 없는 위험에 한 생과 온 몸을 내맡긴 꼴이다.

광부 가족들 삶도 무척 열악하다. 사택(舍宅)이라는 곳도 얼기설기 바람을 막아내는 수준에 불과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에선 비가 새는 일은 일상이다. 8평에 딸린 방 둘, 부엌 하나 공간에 많은 가족이 기대어 산다. 화장실이나 세면장은 공동이다.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선 긴 줄을 서야만 한다.

상수도 공급도 형편없다. 씻지도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기도 한다. 빨래를 맘껏 널 수도, 푸른 하늘을 보는 것도 쉽지 않다. 고지대 탄광은 물류수송도 여의치 않아 물가가 굉장히 비싸다. 쥐꼬리 봉급은 받자마자 공판장이나 술집 외상값으로 사라져 버린다. 공판장 운영자도 사장 친인척이다. 총체적인 수탈구조다.

 

▲ 사북 석탄박물관 석탄박물관에 그려진 광부 모습이다.

사진은 웃는 모습이나, 노동환경이나 임금, 생활여건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2020년 12월 박물관은 코로나19로 폐쇄 중이다. ⓒ 이영천

소설가 한강 장편소설 <검은 사슴> 공간 배경이 탄광이다. 깊은 갱도 안에 사는 검은 사슴은 항상 빛을 갈구한다. 자기 보물 같은 뿔과 이빨을 내어주고서라도 빛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빛을 희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이다. 검은 사슴은, 검은 탄을 밥으로 삼아야 하는 광부들 모습 그대로다. 탄광촌은 블랙홀 같은 곳이다. 비인간화의 막장이었다.

회사의 횡포

동원탄좌는 사북과 고한에 걸쳐 있는 우리나라 최대 단일 탄좌다. 1980년엔 동원탄좌와 부수적인 소규모 탄좌를 합해 5000여 광부가 년 160만t, 우리나라 석탄생산량의 11%를 차지할 정도다. 하지만 임금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1970년대 내내 저임금에 시달린다. 1980년 당시 4인 가구 최저임금이 월 24만 원이다. 하지만 탄부들 월평균임금은 15만 5천원에 불과하다. 거기에 고용도 불안정하다. 관리자 눈에 들지 못한다면, 언제 건 일터를 잃을 수 있는 고용구조다.

사북역

태백선 사북역이다.석탄이 주연료로 사용될 때 이곳을 통해 하루 수만톤 탄이 실려 나갔다ⓒ이영천

 

설상가상이다. 회사는 일명 국토개발대라는 전과자 집단과 지역 불량배들을 앞세워, 어용노조를 만들어낸다. 노조위원장을 대의원이 뽑는 간선제를 유지한다.

해마다 임금협상 때만 되면, 3∼4개월 전부터 수당 등을 조정해 광부들 임금을 깎아 내린다. 임금인상률을 눈속임하기 위해서다. 이런 방법으로 10% 이상 임금이 인상된다 해도, 실질 인상률은 4∼5%에 불과하다.

어용노조는 광부 복지개선이나 임금인상, 작업환경개선보다 회사 측 주장에 동조하기 바쁘다. 노조대의원 선출시기가 되면 막대한 돈이 뿌려진다. 선출된 대의원을 어용노조위원장이 전국 관광지로 끌고 다닌다. 엄청난 향응이 제공된다. 수일동안 이곳저곳 끌고 다니다, 선거 날이 되면 탄광 앞에 내려준다.

광부들 분노는 극에 달한다. 이제 더 이상 참고 있으면서 눈감고 앉아서 빛을 갈구하지 않는다. 오직 싸움이 있을 뿐이다. 1980년은 18년 유신독재가 막을 내린 직후다. 그동안 억눌린 폭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매우 드높았다.

1978년 일어난 '2차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자립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정부는 석탄산업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민연료로 자리 잡은 연탄가격을 억누를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이는 광부들 임금인상억제라는 극약처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광부들 요구는 다르다. 동원탄좌의 경우 40% 임금인상을 요구한다. 그마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어용노조 직무대리였던 전 노조위원장 이재기는, 회사 요구안 20%를 독단적으로 수용한다. 광부들이 반발한다.

사북노동항쟁

▲ 사북항쟁 당시 모습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착취와 가난에 시달리던 광부들을 회사는 어용노조를 앞세워 임금인상 억제 및 속임수와, 비민주적인 노조 운영을 획책한다. 이에 광부들이 항쟁에 나선다. ⓒ 정선군청

 

1980년 4월 16일 광부들은 어용노조퇴진과 임금인상 40%, 노조직선제 등을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간다. 4월 18일 항의집회에서 경찰은, 4월 21일에 예정된 집회를 약속하며 해산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21일엔 집회를 불허한다. 수백 명 광부들이 탄좌 사무실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인다.

경찰은 당초 약속을 어기고, 시위에 나선 광부들을 촬영하여 시위주동자를 색출하려는 증거채집에 나선다. 이에 흥분한 광부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차를 타고 달아나려 한다. 몇몇 광부들이 바닥에 드러누워 도주하려는 차량을 가로막는다. 경찰은 그 중 한 광부를 치여 상해를 입히고 도주해 버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광부들이 이성을 잃는다. 여기에 가족이 가세한다. 시위대는 어느새 6000명으로 불어났다. 인구 3만의 도시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시위에 참가한 꼴이다. 그만큼 탄좌의 착취가 심했다는 반증이다. 시위대가 사북 주요 관공서를 점령한다. 경찰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사북은 해방구다. 그러나 도심에선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공동체 질서가 정연하다. 이재기 위원장은 어딘가로 도망치고 없다. 다만, 그의 부인이 광부가족들 손에 이끌려 탄좌 사무실 근처 전봇대에 묶인다.

언론은 이 모습만을 대서특필한다. 질서가 깨어진 무정부상태라 호도한다. 광부들을 폭도로 몰아세운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구언론은 영혼이 없다. 진실 호도에 바빴고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없다. 언론이 아니었다.

▲ 사북항쟁 당시 모습

인구 3만 도시에서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항쟁에 나선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항쟁을 이어간다.ⓒ 정선군청

 

4월 24일까지 진압 나온 강원도경 경찰과 극한 대치가 이뤄진다. 투석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돌에 맞은 경찰 1명이 사망한다. 경찰과 광부, 가족 등 160여 명이 부상을 입는다.

이재기와 노조위원장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광부 이원갑의 중재로 24일 시위는 진정된다. 11개 조항의 타협안이 제시되어 몇 차례 협상 끝에 타결된다.

하지만 권력 실세로 부상하던 집단은 신군부다. 사태가 진정된 후 '합동수사단'을 꾸려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시킨다. 정선경찰서에선 무지막지하고 치욕스러운 고문이 자행된다. 신군부는 비인간화의 상징이다.

이들 81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소요죄와 폭행죄로 2∼3년 실형을 살았다. 많은 아픔과 설움만을 남긴 채 사북항쟁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폐광의 그늘

사북·고한은 석탄산업 몰락의 상징이다. 나라는 이곳을 배려한다 했다. 그 명목으로 도박과 레저 시설이 들어선다. '강원랜드와 하이원리조트'다. 이 시설이 이곳에 어떤 활력을 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역을 어떻게 다시 살려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오히려 순박한 지역 인심과 문화를 알량한 푼돈으로 망쳐버린 것은 아닌지. 허풍선이마냥 잔뜩 바람만 불어넣고, 돈은 뒤에서 다른 족속들이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수직갱도 승강기

사북 동원탄좌에서 사용하던 수직갱도 승강기다. 지금은 탄좌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남아 있다. 수직갱도가 있었다는 것은 탄 생산량이 그 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횡갱도에 비해 시설비가 비싸, 잘 설치하지 않는다. ⓒ 이영천

 

털털거리는 태백선 열차는 무심하다. 높은 산들로 막힌 하늘은 좁기만 하다. 손바닥 하나로 가려지는 사북 하늘이다. 도박과 레저라는 새하얀 손바닥으로 사북 하늘을 가리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이 하늘을 영원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동철교는 라멘교다. 라멘교는 배려하는 다리다. '배려'라는 단어에 가슴 시린 지역이다. 사북·고한을 꿰뚫고 지나가는 지장천엔 오늘도 검은 물이 핏물처럼 흐르고 있다.

[출처] : 이영천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세상을 잇는 다리> - 35. 태백선 조동철교와 사북항쟁 - 극단을 견디는 다리 기관사들에겐 공포의 구간 / 오마이뉴스, 2021. 2. 1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19343&SRS_CD=0000013029

36.가야 12부족 소리가 살아 울려펴지는 탄금대교(彈琴大橋)

- 충주호의 아름다운 야경에 감추어진 1500년의 슬픔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진동에 의해 생긴 파동으로, 높고 낮음(음계)과 길고 짧음(음조), 맑음과 탁함(음색), 진폭의 크고 작음(세기)이 어우러져 만들어낸다. 이 파동이 공기와 같은 매질을 통해 퍼져 나간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리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 소리에 쉬이 반응할까? 음악처럼 익숙하고 친근한 소리다. 특히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 자체로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처럼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어떤 소리든 듣는다.

이는 곧 살아있음의 다른 표현으로, 존재하는 모든 삶이 소리 안에 담겨 있다. 소리를 자연의 순리에 맞게 배열하면 음악이 된다.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 그 자체가 곧 음악이다.

탄금대 쪽에서 본 탄금대교와 금가대교

탄금대교와 금가대교(우륵대교)가 교차되어 배치됨

탄금대교 모습 3경간 중로식 닐센로제 아치교다. 충주시 칠금동과 중앙탑면을 연결하는 다리다

하부 시공 완료후 상부 가설 전과 완공후 모습

충주호에는 탄금대에서 울려오는 가야의 소리를 닮은 멋진 3경간 아치교가 있다. 아치 틀은 넘실거리는 충주호 물결을 닮았다. 물결은 1500년 전 스러져간 가야의 소리다.

금가대교(우륵대교)와 탄금대교 야경

탄금대교 야경

무너져 가는 가야 12부족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성립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문명이 변천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쇠는 국가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였고, 이를 통한 무기 발달은 영토 확장의 기본이었다. 한반도 주변에서는 고조선과 부여, 옥저와 동예, 삼한이 청동기를 받아들인다.

이들이 멸망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병립하면서 서로의 영토를 빼앗고 빼앗기는 시대가 된다. 유물과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이중 가야의 철기가 가장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여섯 나라 12개 부족 연맹체 형태로,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달하지 못하고 결국 신라에 흡수되어 버린다.

우륵이 살던 때는 야만의 시대였다. 가야는 쇠락하고 신라가 흥기하고 있었다. 신라는 가야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중심에는 가야의 철로 만든 무기가 있었다. 무기는 이웃한 상대방의 군사적 약점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형태로 발달되어 간다. 그 속에서 군사들은 물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는다.

가야 각 나라 관료들은 서로 연대하여 신라에 대항하지 못했고, 가야 여러 고을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린다. 이 와중에 가야의 철을 생산하는 대장장이는, 가야 쇠로 만든 무기를 신라와 밀거래한다.

 

▲ 가야금 가야금은 오동나무 판에 공명 통을 만들고, 그 위에 줄 받침 기러기발 12개를 얹는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소리의 높고 낮음 순으로 배열하여 만든다. ⓒ 문화재청

왕이 죽으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왕과 함께 순장시킨다. 엄청난 양(量)의 쇠가 왕의 무덤 속에 같이 묻힌다. 왕의 무덤이 만들어지면 제사장은 나라에서 최고로 뛰어난 악사를 불러 왕의 넋을 위로하고, 천기(天氣)의 흐름을 진정시킨다.

악사는 우륵이고, 위로는 그의 몫이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나가는 고을들을 지켜내지 못한 왕은, 우륵에게 가야 12부족과 그 고을의 모든 소리를 금(琴)에 담아내라 명한다.

12부족 소리를 담아내는 우륵

우륵은 무너져 내린 고을을 돌아다니며, 가야의 옛 금(琴)을 들고 각 고을의 소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소리는 이미 무너져 내린 고을과 함께 소멸해 없어져 버렸다. 무기로 변한 야만과 욕망으로써 쇠가 앞서서 고을을 무너뜨리면, 소리는 그 쇠가 짓밟고 간 길을 따라갔다. 소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왕이 무덤 속으로 들어갔고, 가야 왕자마저 신라로 도망쳐 버린다. 가야는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쇠를 만드는 기술자들도 점차 신라에 몸을 의탁한다. 12현의 금(琴)은 가야 12부족의 소리다.

우륵은 혼신의 힘을 다한다. 늘 무너져 내린 넋을 위로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금(琴)을 만든 우륵도, 그 금(琴)을 들고 신라로 들어가야만 했다. 제자 니문(尼文)과 함께였다.

 

▲ 가야금 산조 연주장면 "가얏고"라 부르는 악기로, 개량된 가야금은 줄의 숫자를 변형시켜 각종 악을 연주한다. 사진은 부산에서 만든 산조를 단체로 연주하는 장면이다.ⓒ 문화재청

 

한수유역으로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직접 우륵을 불러 12현 금(琴)의 소리를 듣는다. 정복자의 권위와 승리의 위용을 금(琴)의 소리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륵은 12현의 금(琴)은 다 무너져 내려 사라져버린 가야 12부족의 소리임을 확인시킨다. 그 소리에는 어떤 회한이나 노여움도 없다. 사라져는 갔으나, 신라의 모습으로 남아 살아가야만 하는 가야 백성들이 내는 '침묵의 소리'였다.

탄금대의 기암 절벽에 신립장군이 순국했다는 열두대

▲ 탄금정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주벌판에서 대패한 신립 장군이 몸을 던져 자결한 곳이 탄금대다. 탄금정에 서면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 문화재청

 

진흥왕은 우륵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며, 신라 젊은 악공들로 하여금 가야의 금(琴) 소리를 익히게 한다. 충주 '탄금대(彈琴臺)'다. 이렇게 12고을의 소리를 담은 가야의 금(琴)은, 신라에서 침묵으로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치 신라로 투항하여 진골의 품계를 이어간 김유신 집안처럼 말이다.

소리는 1500년을 살아남아

금(琴)은 나무 판에 공명 통을 만들고, 그 위에 줄 받침 기러기발 12개를 얹는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소리의 높고 낮음(음계) 순으로 배열한다. 오른 손으로는 줄을 튕기며 맑고 탁함(음색)을 조절하고, 왼손으로는 줄 받침 안쪽의 줄을 누르거나 들어 올려 소리의 길고 짧음(음조)과 진폭의 크고 작음(세기)을 어루만지면서 연주하는 악기다.

튕기는 오른손에서 나는 소리는 스러져간 가야 고을 자연의 소리다. 왼손으로 조절하는 소리는, 각 고을에서 살았고 신라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백성의 소리다. 가야의 금(琴)이다. 가야 12고을 자연의 소리와 사람들과 축생(畜生)들의 생멸을 한 악기의 울림통 안에 온전하게 가둬놓고, 소리가 그리울 때마다 튕기고 조여서 꺼내 듣는다.

1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소리를 통해 야만의 시대에 생멸해간 가야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사라져 버린 1500년 전 가야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노래하고 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가야 백성들의 소리를 내는 가야금이다. 그들의 노래다.

 

▲ 탄금대교 모습 옛 탄금대교가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2013년 이전 모습이다.

멀리 충주시가지가 보이고, 남한강가 절벽으로 이뤄진 탄금대 모습이 수려하다. ⓒ 문화재청

우륵이 그 시대를 살다간 가야 사람들의 소리를 모으고 간직한 곳이 탄금대다. 이곳에서 진흥왕의 명령으로 신라 악사들을 가르친다. 신라 악사들은 망한 가야의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2곡을 5곡으로 줄여버린다. 가야의 곡이 음란하다는 명분이다. 우륵은 개의치 않았다.

가야의 소리처럼 넘실거리는 아치곡선, 탄금대교

▲ 탄금대교 3경간 아치 중로식 닐센로제 아치다.

74m-125m-74m 규모의 아치가 연속되어 있다. 폭 21m에 580m 길이다. 아치 틀을 연속하여 이어 붙이고, 곡면 하단에 교각을 세워 거치했다. 아치 틀 바닥에서 약간 띄워 올려 보강 형을 거치해 중로식 아치교가 되었다. ⓒ 이영천

 

충주시 칠금동과 중앙탑면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탄금대 인근이다. 다리 이름이 탄금대교(彈琴大橋)다. 탄금대교와 엇갈린 곳에선 엑스트라-도즈드교인 우륵대교가 지나고 있다. 탄금대교는 3경간 중로식 닐센로제아치다. 74m-125m-74m 규모의 아치가 연속되어 있다. 폭 21m에 580m 길이다.

3경간을 구성하는 아치 틀(Rib)을 곡면으로 연속하여 이어 붙여 연결하고, 곡면 하단에 교각을 세워 거치했다. 아치 틀의 맨바닥에서 약간 띄워 올려 보강형(補剛桁, stiffening girder, 아치교나 현수교 등에서 교량 전체 또는 상부 강성을 보충하기 위해 설치하는 벤딩 강성이 있는 거더)을 거치해 중로식 아치교가 되었다.

▲ 탄금대교 경관조명 ⓒ 충주시청

아치 틀에 경관조명을 달아 충주호의 물에 비친 야경은, 우륵이 타는 구슬픈 가야금 소리를 연상시킨다.

 

3경간 아치가 마치 충주호의 물결을 닮았다. 넘실대는 충주호 물결은 가야의 소리, 가야금 가락이다. 아치 틀엔 경관조명(경치를 밝게 비춰 주는 야간 형형색색의 조명)을 달았다. 밤에 충주호의 물 위에 비친 야경은, 마치 우륵이 타는 구슬픈 가야금 소리가 퍼져나가는 형상이다. 1500년을 살아낸 속 깊은 울음소리를 닮았다.

색을 달리하면서 변하는 조명은, 가야 백성들의 울부짖음처럼 흔들거린다. 짙푸른 충주호는 탄금대교 아치모양으로 출렁거린다. 퍼렇게 멍이 든 남한강은 우륵의 울음과, 침묵으로 신라를 맞이한 가야 백성들의 통곡 소리를 껴안고 있다. 탄금대교 연속되는 유려한 아치곡선은, 이들을 달래는 진혼(鎭魂) 무(舞)처럼 보인다.

[출처] : 이영천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세상을 잇는 다리> - 36.가야 12부족 소리가 살아 울려펴지는 탄금대교(彈琴大橋)- 충주호의 아름다운 야경에 감추어진 1500년의 슬픔 / 오마이뉴스, 2021. 2. 2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1373&SRS_CD=0000013029

37.민족 분단의 상흔이 남아 있는 승일교(昇日橋)

- 이것 좀 봐···북한이 시작해서 남한이 완성한 다리

▲ 나란한 세개 다리 먼 곳에서 부터 승일교,

한탄대교 상행선, 한탄대교 하행선이 연달아 서있다. 양 가장자리 둘은 철근콘크리트 상로식 역 로제아치고, 가운데 붉은 아치는 중로식 강재 로제아치다. ⓒ 이영천

 

강원도 철원 한탄강에 아치교 3개가 나란히 한곳에 서 있다. 철원 명소인 고석정(孤石亭) 인근이다. 하나는 승일교(昇日橋), 나머지 둘은 상·하행선으로 나눠진 한탄대교(漢灘大橋)다.

동송읍과 갈말읍을 잇는 지방도 463호선이다. 승일교와 한탄대교 하행선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상로식 역 로제아치, 한탄대교 상행선은 강재(鋼材)로 지은 중로식 2힌지 로제아치다.

한탄대교 상행선 중로식 강재 아치는 길이 166.8m, 폭 9,5m로 1999년에 지방도 선형개설 때, 하행선 상로식 철근콘크리트 아치는 길이 166.8m, 폭 12m로 2015년(2019년 준공)에 지방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만들어진다. 두 다리 길이가 같은 이유는, 한탄강의 특이한 형성과정과 지형 때문이다.

한탄강은 용암과 물 그리고 시간이 빚어낸 절벽으로 이뤄진 강이다. 화산활동이 일어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지질학적 형상이 다 담겨있다. 한탄강은 '은하수처럼 큰 여울'을 한자로 바꿔 부른 이름이다.

은하수는 漢(은하수 한)으로, 큰 여울은 灘(여울 탄)을 썼다. 혹자는 궁예가 태봉(泰封)이란 나라를 세웠으나 왕건에게 빼앗긴 한이 서렸다 해서, 혹은 남북분단을 탄식하는 상징으로, '恨歎(한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민족분단

▲ 철원 노동당사

1948년 남북에 시차를 두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민족은 분단된다. 분단의 상징인 철원 노동당사 전경이다. ⓒ 이영천

 

1948년에 시차를 두고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민족은 분단된다. 1945년 2월 4일∼11일까지 열린 '얄타회담'에서, 일본패망 시 한반도 관리에 대해 처음 논의한다.

소련은 이 회담에서, 사할린과 쿠릴열도 영토 획득은 물론 러일전쟁 이전 러시아가 만주일대에서 장악하고 있던 경제·군사적 이권을 되찾아가는 성과를 얻는다. 짧은 기간 대(對)일본전에 참전한 대가다. 이 대가에 대한 협약은 회담에서 비밀리에 체결된다.

얄타회담 직후, 유럽에선 소련이 점령한 폴란드에 공산화(1945. 3)가 이뤄진다. 이를 목도한 미국이 다급해진다. 소련 참전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긴박한 전황이 이어지자,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제지할 방안에 몰두한다. 이에 그어진 선이 북위 38°선이다.

38선을 획정한 것은 미국 3부(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논의 과정이라 알려져 있다. 그해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항복한다는 의사를 밝힌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맡기로 한 것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38선을 경계로 양측 군대가 한반도를 접수한다. 남쪽에는 '미군정청'이, 북쪽에는 '인민위원회'가 세워진다. 모스코바 삼상회의와 여러 번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다.

한반도에선 좌우익의 대결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패권을 놓고 다툰다. 핵무기가 시차를 두고 서로의 손에 쥐어진다. 그 대리전장이 한반도였다. 냉전의 서막이다. 전범국가가 아닌 피해국가 당한 억울함이다.

북한이 먼저 공사를 시작한 승일교

한국전쟁 전까지 철원은 38선 이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한 땅이다. 이에 북한 정권은 한탄강을 건너는 다리를 구상한다.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장으로 일하던 김명여씨를 설계책임자로 임명하여 다리공사를 시작한다.

1948년 8월로, 한탄교(漢灘橋)라는 이름으로 착공된다. 공사는 현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대내리·문혜리를 연결하는 구간이다. 지역주민들이 동원된다. 성인 남성의 경우, 매월 20일 이상 공사에 참여해야만 했다. 사회주의식 동원 체제다.

공사는 동송읍 쪽 교대와, 교대에서 10m 폭의 제외지 통로역할을 하는 교각을 완성한다. 그 상부는 말굽 모양 아치를 달았다. 또한 한탄강 한가운데에 교각을 세웠다. 장흥리 방향에서 철근콘크리트로 상로식 2열의 긴 역 로제아치를 만든다. 한탄강 중간까지 완성된다.

▲ 승일교 북측 북한이 만든 승일교 북측 모습이다.

한쌍 아치 위에 겹으로 현수재 7개를 세워, 양쪽에 부드럽고 앙증 맞은 아치형하 8칸을 구성하였다.

 

이 구간은 2열 아치 위 양쪽에 상판을 떠받치는 기둥 7개씩을 세워 각 8칸의 작은 모양 아치 형하(桁下)를 만든다. 한 쌍의 로제아치는 수평재를 걸어 이어 붙인다. 큰 아치 위에 좁고 길쭉한 아치가 올려진 형상이 만들어 진다. 다소 촘촘하나 앙증맞은 아치다.

이때 한국전쟁이 터진다. 공사는 중단된다. 철원은 김화, 평강과 더불어 '철의 삼각지대'라 불리는 곳이다.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민간인들 무덤이 된 곳이다.

모양을 달리해 남한이 완성 시키고

전쟁 와중이던 1952년 미 79공병대가 갈말읍 쪽 교대와 교각을 완성하고 방치해 둔다. 1953년 7월 전쟁을 멈추고 휴전이 이뤄진다. 철원은 주인이 바뀌어, 이제 대한민국 땅이다. 다리 나머지 부분의 공사는 1958년 5월 우리 군대에 의해 시작된다. 62공병대가 착수하여 그해 12월에 나머지 아치부분과 제외지 통로역할을 하는 말굽아치를 완성시킨다.

▲ 승일교 남측 남한이 만든 승일교 남측 모습이다.

한쌍 아치 위에 겹으로 현수재 3개를 세워, 양쪽에 약간 넓은 말굽모양 아치형하 4칸을 구성하였다

 

우리 공병대가 완성한 상로식 2열 역 로제아치는, 각각의 아치 위 양쪽에 상판을 떠받치는 기둥 3개씩을 세워, 각 4칸의 말굽모양 아치 형하를 만든다. 역시 아치 위에 좁고 긴 아치가 서있는 모양을 하였으나, 북한이 만든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둘은 닮았으나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 다름은 남북분단의 상징이나 전쟁 상흔처럼 여겨지고, 또 그렇게 보여진다. 낙인 아닌 낙인이 되어 버렸다.

승일교는 총길이 120m에 높이 35m, 폭 8m로 만들었다. 역 로제교이나, 상판으로 거더를 따로 올린 방식은 아니다. 라멘교처럼 아치와 현수기둥, 상판을 일체화 시켜 만들었다.

이 방식은 구(舊) 소련에서 차용한 공법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 공사하던 사진을 보면 이를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공방법은 형하에 아치형 지보공을 만들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를 타설한, 지보공 공법을 활용하였다. 이 역시 옛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두 얼굴의 승일교

하나의 강을 건너는 하나의 다리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시차를 두고 정부를 수립하면서 분단되었 듯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닮은 듯 다른, 우리 자화상 같은 다리다. ⓒ 이영천

 

이 다리 '승일'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이곳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는 말은 '김일성이 시작했다 해서 金日成(김일성)의 日(일)과, 이승만이 완성했다 해서 李承晩(이승만)의 承(승)을 합해 承日橋(승일교)라 부른다'는 설이 하나다.

또 하나는 '김일성을 이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勝日橋(승일교)라 부른다는 설이 다른 하나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설로 굳어진 것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북으로 납북되어 행방이 묘연한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기린다는 뜻'에서 지어진 '昇日橋(승일교)'란 이름이다.

▲ 승일교 전경 다리 이름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박승일 장군에서 연유한다.

분단을 슬퍼하는 한탄강의 다른 뜻 처럼 다리도 강 이름을 닮았다. ⓒ 이영천

승일교 전경 동송읍에서 갈말읍 방향 "승일공원" 쪽 모습이다. 높이 35 m 웅장한 아치를 그려냈다.

 

찢겨진 땅 철원

철원은 궁예의 고장이기도 하다. 궁예는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워, 도읍을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긴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 도읍지가, 철원읍 홍원리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한탄강 지류인 대교천 상류다. 군사분계선이 옛 궁성 한가운데를 동서로 지난다.

일제가 경원선 철도를 만들면서, 이 궁성 남북을 질러 가른다. 사방으로 갈기갈기 찢기었다. 전쟁 전에 발굴된 국보급 석탑이 전쟁과 함께 사라지기도 한다.

한반도 배꼽이라 부르는 철원은, 드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내륙 너른 분지다. 물산이 풍부하다. 한 나라 도읍으로 손색없는 배후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철원은 분단의 상징이다. 땅 한 가운데를 동서로 잘라 남북으로 갈라 세웠다.

전쟁 후 옛 철원 땅 약 40%가 북한에 속했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땅이다. 북한에서 발원해 남으로 흐르는 한탄강이, 파주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북한에서부터 강화바다까지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다. 흐르는 강물은 절대 나뉘지 않는다.

승일교는 곱게 늙어 품위와 고즈넉한 멋을 한껏 뽐내는 중후한 노신사 같다. 그러나 찡그린 얼굴이다. 다리엔 갈라섬의 아픔과 서로의 차이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분단의 다리다. 두 얼굴로 나뉜 민족의 아픔이 절절하게 읽혀진다.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네 할아버지를 생각게 하는 다리다.

그 옆에 할아버지를 닮은 듯 다른 매무새의 한탄대교가 쌍으로 서있다. 마치 철부지 손자가 때때옷을 뽐내는 모양새다. 찡그린 승일교가 웃는 낯빛으로 이젠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우리는 남북을 잇는 어떤 다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탄대교

▲ 승일교와 한탄대교 중후한 노신사 같은 승일교 옆으로, 때때옷을 입은 어린 손자가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연상된다. 붉은 한탄대교 상행선과, 승일교를 닮은 하행선 모습이 이질적이다. ⓒ 이영천

[출처] : 이영천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세상을 잇는 다리> - 37.민족 분단의 상흔이 남아 있는 승일교 - 이것 좀 봐···북한이 시작해서 남한이 완성한 다리 / 오마이뉴스, 2021. 3. 1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3079&SRS_CD=0000013029

38.심오한 지혜와 학문 요람에 노인 무영대교(務靈大橋)

- 전남 무안과 영암을 잇는 이 다리리가 상징하는 것

엑스트라-도즈드(ED)교는 1980년대 일반화된 기술이다. 가장 젊은 다리다. 형교 경간을 늘이기 위해 사장교(斜張橋) 기술과 공법을 빌려 쓴 융·복합형 다리다. 사장교보다는 연속보의 형교(桁橋)에 가깝다.

▲ 무영대교 연속 5주탑 엑스트라-도즈드교인 무영대교 모습이다.

남으로 흐르는 영산강을 빗각으로 건너, 무안 일로읍과 영암 학산면을 잇는 다리다.ⓒ 이영천

무영대교(務靈大橋) 야경

초기 원안 설계에선 2경간 닐센아치교+소수주형 판형교로 계획됐지만 설계 검토 중 경제성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안 설계 중에서 4개 주경간을 갖는 엑스트라도즈드교가 최종 채택되었다.

이후 남악의 오룡산을 상징하도록 5개의 1면 주탑을 적용했고 국내 최초로 5개의 주탑이 연속적으로 연결된 ED교가 되었다. 주변의 저형 산세와의 조화를 위해 교량 높이를 낮게 설계했다.

무영대교는 1면식 연속 5주탑 ED교다. 전남 무안 일로읍과 영암 학산면을 잇는 다리다. 곡류하는 영산강을 빗각으로 횡단한다. 무안(務安)과 영암(靈巖)에서 각 한 글자씩 가져와 '무영(務靈)' 대교라 이름 지었다. 연속 주탑을 채용한 ED교론 우리나라 최초다.

주탑 간 경간은 165m, 양 끝은 교대에서 100m로 총길이 860m다. 주탑 5개가 연속되어, 보여지는 모습에선 형교 연속보가 잘 느껴지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얼핏 보아선 작은 사장교 주탑 5개가 연속하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초의선사, 차(茶)를 철학의 경지로

▲ 초의선사 태생지 무안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자락에 있는 초의선사 태생지다. ⓒ 이영천

선사는 시·서·화에 두루 능한 달인삼절(達人三絶)로 추앙받는다. 사진 중앙 왼편에 선사 동상이 살짝 보인다.

 

일로읍에서 가까운 삼향읍 왕산리 봉수산 자락은 '초의(艸衣)선사' 태생지다. 시대의 천재이자 대선사라 칭송받는 초의는, 살아서 호남팔고(湖南八高)로 추앙받는다.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한 달인삼절(達人三絶)이기도 하다.

향기로운 우리 차(茶)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 세운다. 중국 〈다경요채〉를 초록, 차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다신전(茶神傳)〉을 쓴다. 이 책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풍토와 기후에 맞게 쓴 글(頌)을 추가해 〈동다송(東茶頌)〉을 짓는다.

우리 차를 찬하는 노래이자 서사이며, 철학서다. 차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차의 효능과 얽힌 이야기, 생산지, 보관과 품질, 사용하는 물, 차 만드는 법 등을 고루 담아낸다.

초의는 차를 통해 하나의 그윽한 철학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일여(一如)의 미(美)'라 했다. '禪茶一如(선다일여)'다. 선과 차가 하나로 귀결된다 했다. 참선을 모르면 은은한 다향(茶香)의 맛도 모른다. 차 맛을 제대로 알려면 참선을 통해 깊은 수행의 경계에 들어야한다. 차로 마음을 씻어내어, 고요히 생각에 잠기는 선(禪)의 경지에 이른다.

이는 곧 삶과 죽음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귀결되는 '生死一如(생사일여)'의 세계관이다.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고해(苦海)의 바다다. 죽음의 길도 다르지 않다. 생사가 결코 다른 길이 아닌, 하나의 과정 안에 놓여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합일에 이르렀다. 이는 중생들 삶과 연결되어 있다. 중생의 고통을 같이하는 길이다. 차의 깊은 맛과 향이, 삶과 죽음을 올곧게 규정하는 길이 되어 준다. 오묘하고 심오한 철학의 경지다.

시대의 천재들과 함께

강진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20대 때 만난다. 다산의 오랜 지기다. 다산은 물론 자제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그의 초당에서 백성들 삶을 바꿀 일들을 고심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현실에 적용시킨다.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에서 신음하는 중생을 벗으로 삼는다. 중생과 같이 하는 일은, 관세음보살처럼 천개의 손과 눈을 갖는 일이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도 필생의 벗이다.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나, 10년 전후로 세상과 하직한다. 추사는 귀족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학문에서는 무척 오만하고 콧대가 세다. 따라서 사방이 적이다.

하지만 초의는 달랐다. 추사를 만난 초기에는 굳이 맞서 대적하지 않는다. 추사의 고집과 오만, 당당함을 다 품고 안아 준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인가? 추사는 초의의 깊은 학문을 알아본다.

권력에서 멀어져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 간다. 귀양길에도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대표적인 피해자다. 대체로 추사의 태도가 그러했다.

▲ 초의선사 태생지 홍매화

추사가 초의선사를 노래한 게송(偈頌) 마지막 구절에 ‘봄바람 한 소식에 온갖 꽃이 피어(春風百花放), 밝고 밝음이 오늘에 이르렀구려.(明明到如今)’라고 노래한 풍경에 어울리듯, 선사 태생지에 2월 홍매화가 한창이다.

 

초의는 이런 추사를 격의 없는 벗으로 대해 준다. 추사 적거지 대정으로 가, 같이 생활하기도 한다. 추사는 초의에게 수시로 향기로운 차를 보내 달라 떼를 쓴다. 하지만 선(禪)에 대한 논쟁이 붙으면, 둘의 쟁론은 끝이 날 줄 모르곤 했다.

남종화(南宗畵) 대가 소치(小癡)와 초의

남종화 대가로 알려진 소치 허련(許鍊)이 초의 제자다. 진도에서 나고 자란 소치가 그림공부를 하고 싶어 초의를 찾는다. 초의는 남도 명문가인 해남윤씨 그림책을 빌어다 공부시킨다.

윤선도와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 집안이다. 소치는 그림에는 재주가 있으나, 서권기(書卷氣,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가 부족해 보인다.

이에 경학과 선(禪)을 초의가 손수 가르친다. 그림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소치를 추사에게 보내 그림과 글씨를 동시에 공부시킨다. 추사는 초의의 뜻을 정확하게 읽어낸다.

소치에게 추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소치라는 호(號)도 추사가 지어준다. 소치는 이렇게 하여, 우리 그림에 큰 획을 그은 대 화가가 되었다.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一枝菴)

▲ 태생지에 본 떠 재현된 일지암 (一枝菴)

해남 대흥사에 있는 일지암을 본 떠, 태생지에 재현해 놓았다. ‘풀 옷’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검소함과 간결함, 선사의 깊은 삶의 자세 까지 배어 있는 암자다.ⓒ 이영천

초의(艸衣)는 '풀 옷'의 다른 이름이다. 선사는 평생을 헤진 옷을 입고 살았다. 검소함의 일면을 넘어, 삶 자체가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一枝菴)은 초의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초라한 작은 오두막이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0년대 복원한다. 다도(茶道)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성지(聖地)같은 곳이다.

왕인박사, 일본으로

무영대교가 지나는 영산강 건너 영암은, 왕인(王仁)박사 고장이다. 월출산 북서측 군서면 동(東)구림리가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박사는 이곳 월출산 책 굴(冊 屈)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왕인박사 유적지

신령스런 산, 월출산을 뒤로 보인다. 왕인박사는 유적지가 있는 곳 인근 책굴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로 출입이 통제되어,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없어 안타깝다.ⓒ 이영천

왕인박사 동상과 왕인박사 기념관인 영월관

4세기 말∼5세기 초 백제 문화는 매우 융성했다. 일본(倭)은 백제에 의존하는 처지로, 뛰어난 학자를 보내줄 것을 간절하고 끈질기게 요청한다. 태자 '전지(腆支)'가 일본으로 간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친교 및 동맹사절 임무를 겸한다.

일본 태자 스승이나, 볼모신세다(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辛王條 : 六年(397년)夏五月王與倭國結好以太子腆支爲質). 전지 태자가 현인이자 대학자인 아직기(阿直岐)라는 설(說)도 있다.

백제 아신왕이 병들어 위급에 처한다. 백제는 태자를 데려와야 한다. 그래야 왕권이 안정되고 나라가 평안해진다. 따라서 일본이 백제 태자를 순순히 내어줄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이른 학자가 필요하다.

일본 응신(應神)천황은 애가 탄다. 태자 전지는 왕인박사를 추천하고, 왕인박사는 이를 수락한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뜻을 이해하고, 왕인박사는 도일(渡日)을 결심한다.

일본을 개명(開明)시키다

왕인박사는 영암 군서면 서(西)구림리 상대포에서 도공(陶工), 와공(瓦工), 야공(冶工, 대장장이) 등 기술자 45명과 함께 범선 5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상대포에서 학산천으로 나와 북으로 영암천에 이른다.

다시 서쪽으로 나와 무영대교가 지나는 영산강을 따라 남쪽으로 빠져 서해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 왕인박사가 떠난 상대포

영암 군서면 서구림리에 위치한 상대포다. 이곳에서 각 분야 기술자 45명과 함께 범선 5척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미개한 왜(倭)를 일깨워 준 시작점이다. ⓒ 이영천

경사(經史, 사서오경 등 유교의 가르침을 적은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문학, 음양오행, 번역서, 의학서, 복서(卜筮, 길흉을 점침) 등을 싣고 간다. 이로써 일본이 눈을 뜬다. 각종 문물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왕인박사 일행의 도착으로, 미개한 일본이 드디어 문자를 깨치기 시작한다. 특히 한자(漢字)의 전래는, 일본에겐 혁명적인 일이다.

일본은 왕인박사 일행이 들고 온 문물로 인해 눈부시게 발달하고, 6세기 중반 백제 성왕이 전해 준 불교 전래로 이윽고 고대국가로써 틀을 잡게 된다. 비로소 '아스카문화(飛鳥文化)'가 시작된다. 왕인박사가 가져간 문물이, 궁극에선 일본의 아스카문화 원류(源流)가 되었다.

영산강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선진 백제문물이 그들의 눈과 입, 머리와 옷으로 변화했다. 일본이 가까스로 야만을 벗어났다. 왕인박사 선조는 멸망한 한(漢)나라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說)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중·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가문이다.

일본의 메시아

한반도에서 3국 대립시기를 전후, 왜로 건너가 일본화한 '도래인(渡來人, 4∼7세기 주로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없었다면, 일본 고대문화가 발원할 수 있었을까?

도래인은 혹시 한반도에서 밀려난 세력은 아니었을까? 일본인 머릿속에 도래인이 심어놓은 한반도를 향한 끊임없는 도발 DNA가, 그들 무의식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무영대교

연속 5주탑 엑스트라-도즈드교 연속 5주탑이, 백제 오경박사(五經博士)인 왕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읽혀진다.ⓒ 이영천

 

왕인박사는 일본에게 어쩌면 메시아(구세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밝혀주었고, 그들의 아둔한 머리를 깨뜨려 주었으며, 벌거벗은 맨몸에 옷을 입혀 준 존재였다. 영산(靈山) 월출산의 왕인박사 '책 굴'에선, 지금도 지혜의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왕인박사의 밝은 생각이 오늘도 동북아시아에 밝은 빛을 보내고 있다. 오경박사(五經博士) 왕인을 상징하는 것인가? 다섯 개 우뚝 솟은 무영대교 주탑이, 영산강 물길을 가로 지른다. 이 물길을 타고 바다를 건너갔을 깊은 지혜가, 그 위용을 늠름하게 드리우고 있다.

[출처] : 이영천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세상을 잇는 다리> - 38.심오한 지혜와 학문 요람에 노인 무영대교 - 전남 무안과 영암을 잇는 이 다리리가 상징하는 것 / 오마이뉴스, 2021. 3. 1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4969&SRS_CD=000001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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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상을 잇는 다리』 Ⅵ [형교⑵] - ①조동철교, ②탄금대교, ③승일교, ④무영대교,|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