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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강화 돈대 이야기

문수봉(李楨汕) 2021. 4. 4. 22:21

우리가 몰랐던 강화 돈대 이야기

 

◆『우리가 몰랐던 강화 돈대 이야기』···목차

1. 우리가 몰랐던 돈대 이야기 -서구문명과 충돌… 대한민국 지켰던 ‘유산’

2. 강화 돈대에 새긴 역사 흔적-계룡돈대, 건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다

3. 천혜의 요새 돈대- 미군, 조선에 승리… 손돌목은 뚫지 못했다

4. 건평돈대와 불랑기-건평돈대에서 발굴한 서양식 화포 ‘불랑기’

5. 서양인 눈에 비친 강화 돈대-그들은 돈대를 버려진 '요새'로 알았다

6. 신미양요 뒷이야기-창과 칼, 맨주먹이 전부였던 처참한 전투

7. 살아있는 유산 강화도 돈대- 강화 돈대, 남북평화의 상징 될 수 있을까?

8. 무관심과 방치속 사라지는 '강화 돈대'

1.우리가 몰랐던 돈대 이야기 -서구문명과 충돌… 대한민국 지켰던 ‘유산’

민생과 국방 사이에서 고뇌하는 소년 왕

숙종은 고뇌했다.

‘과연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아직 병자년의 난리와 경술년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그대로인데 성역(城役)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숙종의 즉위 초기는 병자년의 호란(胡亂)이 있은 지 약 40여 년 되었던 때이다. 40년이 지났지만 양란을 겪은 조선은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국토는 피폐해졌고 땅을 잃은 백성들은 유랑민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숙종의 부왕인 현종 11~12년(1670~1671)에는 처참한 흉년이 왔다. 약 2년 간 이어진 소빙하기 기상이변이 전대미문의 경신대기근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술년(1670) 봄과 여름에는 가뭄이 들다가 곧이어 극심한 수해가 일어났고 늦여름부터는 이상저온으로 인해 우박과 서리 등의 냉해를 입었다고 한다.

 

▲강화지도에 나타난 강화도 돈대 모습 (출처=온양민속박물관)​

결국 이 두 해 동안 조선 8도에서는 모두 흉년이 들었고 여기에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더불어 신해년(1671) 겨울 추위는 매우 혹독하여 동사자까지 급증했다고 한다.

당시 피해를 추정한 연구에 따르면 경신대기근 때 사망자는 당시 인구의 11~14%인 약 140여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현종이 비망기를 내려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라고 했을까.

이렇듯 조선의 내부 사정 상 숙종 초 대규모 성역은 무리였다. 오히려 역과 세를 감하고 제도를 고쳐 민생을 보살펴도 모자랄 시기였다. 그렇지만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는 조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중원을 완전히 장악할 줄 알았던 청이 반란과 외몽골 일대의 불안정한 정세, 계속되는 남명(南明) 정권의 저항 등으로 인해 점차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영고탑(寧古塔) 회귀설 청나라 만주족이 한족에게 패해 본거지인 만주 영고탑으로 돌아갈 때 길이 험한 심양-길림 이동로가 아닌 한반도 서북지방을 경유해 갈 수밖에 없으며 이때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의견이다.

'삼번(三藩)의 난' 대만의 무역 군벌 정경(鄭經)의 침입 등에 대한 염려와 소문 등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병자년의 쓰린 기억이 담긴 축성 결정

이러한 인식의 형성에는 특히 병자년의 쓰라렸던 기억이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건국 이래 두 번의 큰 전쟁을 겪는다. 하나는 7년간 지속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차례 걸친 호란이었다.

물적 피해가 컸던 것은 임진왜란이었지만 이때에도 왕이 항복하거나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자년의 호란은 어느 때 보다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병자호란 시 청군이 상륙한 갑곶나루의 근대 사진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오랑캐라 업수이 여기던 만주족 앞에 인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금성탕지로 여겼던 강화도의 함락은 조선 전체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양반과 상민, 천민을 구분하지 않고 자행된 학살과 겁탈, 포로 사냥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청군이 이동한 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었다”

라고 기록했으며 강화도의 피해에 대해서는

“적에게 핍박을 당하여 물에 떨어져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이 전하기를 머리 수건이 물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라고 전하고 있다.

전격적인 축성 결정과 새로운 성곽 돈대

결국 즉위 초부터 거듭된 논의 끝에 숙종 4년(1678) 9월 28일 영의정 허적(許積)의 주청에 따라 보장처 강화도에 돈대 돈대란 원래 중국 요동지역에서 변경 일대에 대한 척후와 연락을 위해 만든 시설로 주변 관측이 용이한 높은 지대에 설치된 소규모 보루를 의미한다.

'축성역'이 결정되었다. 이는 더 이상 외적에 의한 침탈과 굴욕을 겪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갑곶돈대 항공사진 (출처=강화군청)​

숙종은 돈대 축성 결정 후 10월에 자신의 외척이자 병조판서 겸 수어사였던 김석주를 강화로 보내 돈대 축조 부지 등을 먼저 살피게 한 후 강도돈대설축절목(江都墩臺設築節目)을 반포하고 돈대 축성 계획의 수립을 완료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숙종 5년(1679) 2월부터 5월 말까지 본격적인 돈대 축성에 들어가게 되는데 승군 8,000여명과 어영군 4,200여명을 동원해 각 설돈처(設墩處 : 돈대 축성 대상 터)에 총 48개의 돈대를 완공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왜 돈대가 설치되었을까? 이는 돈대라는 시설의 본연적 기능과 강화의 자연‧환경적 조건, 그리고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돈대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제(城制)로 변경지역에서 척후와 경보 역할을 담당한 시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대는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강화도의 경우 조망이 좋은 곳은 대부분은 곶(串)을 이루는데 지형적으로 협소해 큰 규모의 성곽을 쌓기가 어렵다.

아울러 전후 재건과 대기근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의 성역을 진행할 경우 민생이 어려워지고 결국에는 민심이 이반의 우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화도의 방어 시설 신축은 돈대 축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대 축성장의 흉서, 정쟁의 단초가 되다

강화도 돈대 축성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은 않았다. 특히 축성장(築城場)을 배경으로 벌어진 '이유정(李有湞)의 흉서(凶書) 사건'은 정치적 파장이 컸다. 돈대 축조가 한창이던 숙종 5년 3월 8일 축성장 감독관이었던 전 수사(水使) 이우(李㒖)에게 이유정이 보낸 봉서(封書)가 전달되었다.

 

▲강화 남단의 분오리 돈대 (출처=정민섭)​

봉서 안에는 “현재 종통이 바로 서지 않아 붕당이 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므로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 이혼(李焜)을 임금으로 추대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흉서가 들어 있었다.

이는 둘째인 효종이 왕이 된 것이 잘못된 일이며 붕당과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숙종에게는 정통성이 부정 당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흉서의 내용이 효종~현종때 일어난 1,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주장과 일맥상통했다는 것이다. 결국 흉서 사건으로 주모자였던 이유정을 비롯한 그의 일족이 역모죄로 죽음을 당했고 남인을 중심으로 송시열에게 죄를 더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축성장에 날아든 편지 한 장이 당시 중앙정치에서 극렬히 맞붙고 있던 남인과 서인과의 정쟁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 완성된 돈대 340년 간 나라를 지키다

전쟁의 피해가 채 복구 되지 않았던 때에 그것도 불과 4~5년 전 기상이변과 극심한 흉년으로 대기근을 겪었던 조선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숙종 5년(1679) 5월 23일 48개의 돈대 축성을 완료하기에 이른다.

 

▲건평돈대 (출처=정민섭)​

물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강화의 돈대는 몇 몇은 폐지되고, 또 일부는 새롭게 구축되었다. 한편으로는 영조, 정조 대를 거치며 강화의 역할이 보장처에서 수도방어의 거점으로 변화함에 따라 돈대의 중요성이 낮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돈대는 다시 주목 받게 된다. 서구열강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되었고 돈대는 제국주의 세력을 막는 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의 양요(洋擾)와 운요호 사건을 겪으면서 서구문명과 접촉, 충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대한민국의 유산이 되었다.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1.우리가 몰랐던 돈대 이야기 -서구문명과 충돌… 대한민국 지켰던 ‘유산’>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3. 20.

2.강화 돈대에 새긴 역사 흔적-계룡돈대, 건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다

조선, 성돌에 글자를 새기다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시민들에게 매우 생소한 것이다. 그렇지만 각자성석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성(城)과 관련된 실물 자료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시대 수도 한양 도성의 각자성석이다.

이 각자성석은 공사 구간을 나타낸 것, 공사를 담당한 군현(郡縣) 이름을 적은 것, 도성을 수리하거나 고쳐 쌓았을 때 그 공사일자 및 책임자를 적은 것까지 다양하다. 이는 현대의 교량과 건물 등에 공사명과 기간, 감리자와 시공자를 기재한 준공표지석과 같은 것이다.​

 

▲한양도성 흥인지문-낙산 구간 각자성석 (ⓒ​한양도성박물관)​

계룡돈대에 남겨진 열다섯 자

교동과 강화를 잇는 다리가 놓이기 전 교동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통해야만 했다. 특히 썰물 때는 창후리 선착장에서 남쪽으로 망월리를 지나 황청리 앞까지 간 뒤에 북쪽의 교동도로 돌아가는 긴 갯골수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바다 위에서 홀연히 보이는 돈대가 바로 계룡돈대다. 넓은 평야와 좁은 바다길 사이 우뚝 서 있는 계룡돈대는 변경을 지키는 외로운 장수와 같은 느낌이다.

 

▲​계룡돈대 각자성석 (ⓒ​정민섭)

계룡돈대는 숙종 5년(1679)에 강화도에 쌓았던 48개 돈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돈대의 동벽 아랫부분에는 한양도성과 유사한 각자성석이 자리 잡고 있다. 거칠게 다듬어진 성돌에 투박하게 새겨진 명문(銘文)은 총 15자로 내용은 아래와 같다.

“康熙十八年四月日慶尙道軍尉御營”

새겨진 명문은 “강희 18년[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의 연호(年號), 1679년] 4월 모(某)일에 경상도 군위현(軍威縣) 어영군”이라는 정도로 해석되는데 이는 계룡돈대의 축조에 군위현의 어영군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당시 어영군이 동원된 것은 늘어난 돈대 공사 기간과 관련이 있다. 원래대로였다면 강화의 돈대는 함경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 승군(僧軍)에 의해 40일 안에 완공되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조수간만 차이로 인한 돈대 축조용 석재 운송의 어려움, 해안 저습지 일대에 자리 잡은 돈대의 지반 보강 등으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승군은 공사 시작 40여일 만에 철수하고 이를 대신해 어영군 4,262명이 투입되어 남은 공사를 마무리하기에 이른다. 이상의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계룡돈대 명문은 승군이 마무리 하지 못한 계룡돈대 공사를 군위현 어영군이 마쳤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서 바라본 계룡돈대 (ⓒ배성수)

그렇다면 왜 계룡돈대에 이 같은 명문이 새겨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광해군 때부터 성을 쌓을 때 공사시기, 감독관, 담당 군영 등을 새기게 한 것이 이어져왔다는 설과 돈대 축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4월에 새긴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완공을 기념하는 명문은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계룡돈대에 명문을 새긴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토목이나 건설 공사에서 공사실명제와 같은 의미로 돈대를 축조한 집단을 새겨 놓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초루돈대에 새겨진 이름들

계룡돈대 외에 글자가 새겨진 돈대로는 초루돈대가 있다. 초루돈대는 숙종의 마지막 재위년에 축조된 돈대이다. 명문은 초루돈대 돈문 외벽의 왼쪽 위 성돌에 새겨져 있다. 세필(細筆)로 정성들여 새긴 4열 31자의 각자는 오랜 세월의 풍파에 글자 일부가 희미해졌지만 내용은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초루돈대 각자성석(ⓒ국립문화재연구소)​

 

명문(銘文)에는 강희 59년[1720년] 4월이라는 글자가 제일 오른쪽 위치하는데 이는 초루돈대가 건립된 때를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전(前)별장 최□형, 패장(牌將) 교련관(敎鍊官) 장준영, 전(前) 사과(司果) 김□□의 이름이 연이어 새겨져 있다.

별장과 교련관은 종9품의 실무 무관직이고, 사과는 오늘날 합동참모본부와 같은 역할을 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정6품 관직이었다. 품계와 관직의 성격을 통해 짐작해 보면 아마도 초루돈대의 축조 실무는 별장이었던 최□형이 맡고, 축조에 동원된 인원의 관리‧감독은 교련관 장준영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 사과였던 김□□은 초루돈대 축조의 총괄 책임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초루돈대가 숙종 재위 후반기에 상당한 공들여 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돈대 축성의 책임자들을 정확히 남겨 축조 이후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즉 초루돈대의 각자성석은 돈대 축조 공정과 관련한 준공표지석으로 새겨졌던 것이다.

 

▲​​초루돈대 전경 (ⓒ​정민섭)​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돈대 명문 흔적

돈대 축조와 관련한 일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공적 기록물 외에도 돈대 축조의 책임자였던 병조판서 김석주의 <<식암유고>> 등 개인 기록물에서도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 칭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위정자(爲政者)의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대를 만들 때 참여했던 백성들과 실무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계룡돈대와 초루돈대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비록 소략하고 단편적이지만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은 일들을 이야기해 주는 숨겨진 기록이다.

강화도에는 총 54개의 돈대가 만들어졌다. 그중 상당수는 무너져 훼손되었거나, 방치된 채로 있으며 또 일부는 정비되거나 군사시설로 고쳐져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돈대의 각자성석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혹시라도 강화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돈대 명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2.강화 돈대에 새긴 역사 흔적-계룡돈대, 건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다>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4. 3.

3.천혜의 요새 돈대- 미군, 조선에 승리… 손돌목은 뚫지 못했다

몇 해 전 ‘명량’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었다. 영화는 1597년 일본이 조선을 재침(再侵)한 정유재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분전해 승리한 명랑대첩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영화 “명량”에서 성웅(聖雄) 이순신과 함께 가장 크게 부각된 것이 바로 울돌목이다.

울돌목은 진도와 해남반도 사이의 좁은 바닷길로 매 시각 변화하는 조류와 거센 물살로 배들이 자주 난파되었던 곳이었다. 영화에서는 이순신이 이 같은 울돌목 물길의 특성을 이용해 30배가 넘는 적들을 격멸하고 승리한 것으로 그려졌다. 영화의 흥행 때문이었을까? 종영된 뒤에는 울돌목을 찾는 사람들이 이전보다 훨씬 늘었다고 한다.

 

▲영화 명랑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한반도 4대 험조처, 강화 손돌목

 

그런데 강화도에도 울돌목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험난한 바다 길목이 있다. 바로 강화 손돌목(孫石項)이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를 흐르는 좁은 해로로 이루어진 염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갑곶강이라 불렸던 염하는 강폭이 좁고 유속이 빨라 배들이 운항하기 위험한 바닷길이었다. 그중 손돌목은 물길이 ‘∾’로 굽이치는 곳으로 시시각각 조류 흐름이 변하고 물이 회오리치는 구간이다.

여기에 목(項)을 이루는 곳 주변으로는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자칫 방심하여 뱃길을 잘못 들게 되면 좌초되어 침몰하는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하긴 얼마나 많은 배들이 이 해로를 지나다가 난파되었으면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인천 해안과 부평을 잇는 운하를 만들려 했을까?

아무튼 손돌목은 진도 울돌목, 태안 안흥량, 백령도 인당수와 더불어 대표적인 험조처(險阻處 : 길이 험해 이동하기 어려운 곳)로 인식되었다.

 

▲(좌) 염하 전경(ⓒ김보람), (우) 손돌목 전경 및 용두돈대(ⓒ정학수)​

거센 조류의 험난한 바닷길 목, 조선을 지켜

 

험조처로서 주목받던 손돌목 지역은 숙종 이후 강화 연안의 방어시설 구축에 따라 점차 군사기지로 변모했다. 그리고 1871년 손돌목은 신미양요 때 그 진가를 발휘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미양요는 ‘압도적 화력의 미군에 조선이 패배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물론 언뜻 보면 맞는 말이다. 전사자 수만 하더라도 250명 대 3명으로 압도적인 차를 보였고 손돌목돈대를 비롯한 방어기지는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비록 미군이 조선군 최후의 보루인 광성보를 점령했지만 미군의 피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군은 당시 조선 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강화를 점령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조선 침공을 위해 선단을 꾸렸던 함선 중 염하로 들어올 수 있는 배는 소형 함선인 모노카시(Monocacy)호와 팔로스(Palos)호 두 척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 함선들은 손돌목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잦은 조류의 변화, 소용돌이치는 좁은 물길, 곳곳의 암초들은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결국 강화 광성보 일대를 점령했던 미군은 함선의 지원 없이 더 이상의 작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본진으로 철수했다. 이는 손돌목 일대의 해양환경과 결합된 돈대를 미군이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좌) 신미양요 당시 용두돈대 전경(ⓒ강화군), (우) 신미양요 당시 모노카시호 모습(ⓒ강화군)​

갯벌 침입자의 발목을 잡다

하지만 강화도의 돈대는 염하와 손돌목의 험탄(險灘 : 험난한 여울)만 이용하지 않았다. 강화도 해안에 드넓게 펼쳐진 갯벌도 강화도의 방어에 있어 자연적 방어물 역할을 했다.

보통 갯벌은 모래 갯벌, 펄 갯벌, 모래 펄 갯벌 등이 있다. 이중 강화의 갯벌은 수분을 가장 많이 머금고 있는 니질(泥質 : 진흙성분)의 펄 갯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펄 갯벌은 한 번 빠지면 허벅지까지 빠져 걸어 다니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들이 물때를 맞추지 못하고 상륙하게 되면 진창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어렵게 된다. 이는 신미양요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초지진에 상륙했던 미군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에서 군화와 각반을 잃어버렸다. 또 포병대가 사용할 야포들도 갯벌에 빠져 이를 해체해 이동했어야 했다. 결국 미군은 애초에 수립했던 작전시간 보다 늘어난 48시간 동안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연환경과 결합된 강화 돈대의 특징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분오리돈대와 강화남단 갯벌(ⓒ​정민섭)​

천혜의 해양환경과 결합된 돈대

강화도에 돈대를 쌓은 지 어느덧 340년이 지났다. 강화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연이어 지어진 이 군사유적은 무심코 지나치면 그냥 일개 초소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요해처(要害處 : 군사적 요충지)에 돈대를 쌓으면서도 험탄과 저택(沮澤 : 낮고 물끼가 많은 땅)으로 대표되는 강화도 해양환경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강화의 북쪽, 동쪽 해안에 비해 남쪽과 서쪽 해안 돈대의 개수가 적고 각 돈대 간의 거리가 먼 것도 이러한 특징들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거센 물살과 회오리치는 물길을 가진 용두돈대와 넓게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는 분오리돈대에서 자연과 결합되어 있는 우리 유산 돈대를 한 번 바라보는 건 어떨까?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3.천혜의 요새 돈대- 미군, 조선에 승리… 손돌목은 뚫지 못했다>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4. 17.

4.건평돈대와 불랑기-건평돈대에서 발굴한 서양식 화포 ‘불랑기’

2009년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일대에서는 아주 특별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바로 군기시(軍器寺) 유적이다. 군기시는 조선시대 각 군영(軍營)에 지급하던 병장기 등의 무기를 개발하고 제작했던 관청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국방부 산하의 국방과학연구소 같은 곳이었다.

조사 당시 군기시 터 위로는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의 행정을 관할했던 경성부청이 위치했었다. 발굴조사는 이 경성부청 건물을 허물고 진행되었다. 철거된 부청의 잔해를 걷어내고 조금씩 땅을 파내려가자 군기시의 흔적들이 나타났다.

관아의 건물 터, 무기를 만들던 공방 터 등 군기시 유적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각종 화포와 화살촉 등 조선시대 만들어졌던 무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중 세간의 이목을 받은 유물이 있었는데 불랑기포(佛狼機砲)의 자포(子砲)였다.

불랑기는 14~15세기 유럽에서 개발된 후장식화포(後裝式火砲 : 포탄을 포신의 뒤쪽에서 장전하는 화포)로 모포(母砲)와 탄창 구실을 하는 자포로 이루어졌다. 즉 모포의 뒤편에 자포를 끼울 수 있는 포실(砲室)을 만들고 여기에 포탄과 화약을 장전한 자포를 삽입해 발사하는 화포였던 것이다.

이는 기존의 전장식화포(前裝式火砲 : 포탄과 화약을 포구(砲口)에서 장전하는 화포)와 달리 연속적으로 포탄을 발사할 수 있어 당시로는 첨단의 군사 무기였다.

 

▲군기시 유적 출토 불랑기 자포(ⓒ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주력 화포로 부각된 불랑기

조선에 불랑기포가 처음 전해진 때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521~22년 사이 광둥성(廣東省) 일원에서 포르투갈 상선과 명나라 수군의 전투과정에서 불랑기가 유입되었다는 기록과 군기시에서 발굴된 자포에 새겨진 제작연도가 1563년인 점을 보면 늦어도 16세기 중반 전후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불랑기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과 연합한 명나라 군대가 불랑기를 앞세워 왜적을 물리쳤는데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은 “불랑기를 비롯한 여러 포를 발사하니 불빛이 하늘을 치솟고 왜적들이 모두 쓰러졌다.”라고 불랑기의 우수성을 전했다.

이밖에도 비변사(備邊司)에서 왜적을 막기 위해 거북선을 만들고 여기에 불랑기를 배치해 바닷길을 끊는 계책을 올렸으며, 충청수영(忠淸水營)에 불랑기를 배치해 사용케 하는 등 불랑기는 점차 조선 무기체제의 주요 화포로 자리잡았다.

이는 병자호란 이후 100여 년 간 진행된 조선의 요해처 및 도성방어체제 정비 시에도 이어져 강화도의 진보와 돈대는 물론 정조 임금 때 새롭게 경영한 수원 화성에도 배치되기에 이른다. 불랑기는 양난(兩難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새로운 주력 화포로 거듭난 것이다.

 

▲평양성 내 모습이 담긴 기성도(ⓒ서울역사박물관)

실전 배치 장소에서 최초로 확인된 불랑기 모포

2017년 3월 말 필자는 강화도 서쪽 건평리 포구에서 멀지않은 노고산 기슭에서 인천시립박물관 발굴조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발굴 대상 유적은 건평돈대로 숙종 대 처음 쌓았던 48개 돈대 중 하나였다.

돈대는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해 곳곳의 성벽이 무너져 있었다. 조사단은 우선 돈대 안쪽에 무너져 내려 있는 성돌을 걷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은 것이 성인 머리 크기인 돌들을 일일이 들어 바깥으로 나르는 일은 수년 간 발굴현장을 누빈 발굴단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대형의 성돌은 직접 목도(두 사람이 짝이 되어 뒷덜미에 긴 막대기를 얹어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를 해 날랐으니 얼마나 힘든 발굴조사였는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발굴단이 목도로 석재를 나르는 모습(ⓒ정민섭)

아무튼 돈대 내부의 성돌을 옮기는 일이 끝나자 조사단은 돈대 내부 시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첫 조사 대상은 가장 훼손이 심했던 서남쪽 포좌였다. 서남쪽 포좌는 이미 외벽과 포좌의 위쪽 장대석(長臺石, 단면이 네모이고 길이가 긴 다듬은 성돌)이 무너진 상태였다.

조사단은 서남 포좌에 구역을 나누고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흙을 걷어 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사단의 눈앞에는 보고도 믿지 못할 유물이 나타났다. 바로 불랑기 모포였다. 사실 조사단은 많이 훼손된 건평돈대에서 보물급의 유물이 출토될 것이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 초반에 그것도 가장 훼손된 곳에서 불랑기가 출토된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힌 조사단은 불랑기 출토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혹시라도 말이 새어나가 도굴 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견 이튿날 전체 불랑기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파내려가자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불랑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사단은 불랑기에 대한 개략적인 실측과 사진촬영을 하고 유물을 곧바로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겼다. 이틀간의 숨 가빴던 불랑기 모포 발굴은 그렇게 지나갔다.

 

▲​불랑기 모포 출토 모습(ⓒ정민섭)​

 

▲​건평돈대 조사 당시 항공사진(ⓒ인천시립박물관)

강화도에 배치한 불랑기에 새겨진 글자들

박물관으로 옮긴 불랑기에는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포신에 새겨진 명문(銘文)에는 불랑기의 제작시기와 관리자, 장인 등의 실무 책임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따르면 이 불랑기포는 숙종 6년(1680)에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만들어졌다.

총괄책임은 통제사였던 전동흘(全東屹)이 맡았고 불랑기 주조 관리는 감주군관(監鑄軍官)이었던 신청(申淸) 등 3인이었으며 주조한 장인은 천수인(千守仁)이었다. 또 건평돈대 불랑기는 제작시기로 보아 강화 돈대 축조 후 김석주의 건의로 추가로 만든 것으로 파악되었다.

건평돈대 출토 불랑기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전 배치 장소에서 확인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다. <<강도지(江都誌)>>를 비롯한 조선시대 기록에는 돈대에 불랑기가 배치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돈대에서 확인된 사례는 이제까지 없었다.

아울러 전국의 박물관이 소장한 불랑기 모포 및 자포도 대부분은 출처가 불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평돈대 출토 불랑기 모포는 현재까지 전하는 다른 불랑기 모포, 자포에 비해 역사적,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출토된 불랑기에 새겨진 명문(ⓒ정민섭)

그 밖에 못 다한 이야기

돈대에 실전 배치되었던 불랑기포가 출토된 건평돈대! 발굴조사의 막바지 현장설명회 자리에는 지상파 방송을 비롯해 여러 TV뉴스와 각 신문사 보도진들이 대거 참가했다.

그리고 돈대에서 확인되었던 불랑기는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유물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돈대 내외부 조사에서 발견된 현대시기 유물이다.

녹색의 반쯤 깨진 잉크병, 탄피와 탄환클립 등 누가 보아도 근현대시기에 쓰였을 법한 것들이 왜 조선시대 강화도 서쪽 해안을 지켰던 건평돈대에서 나타났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 정확히 할 수 없다.

다만, 상상력을 조금 보태 보자면 한국전쟁 당시 건평돈대가 전투의 현장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추측일 뿐,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층층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4.건평돈대와 불랑기-건평돈대에서 발굴한 서양식 화포 ‘불랑기’>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5. 1.

5.서양인 눈에 비친 강화 돈대-그들은 돈대를 버려진 '요새'로 알았다

조선은 건국 이래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방침에 따라 국제관계를 형성했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 간 교류의 대전제이자 기본질서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천하관 즉 세계관은 중국을 중심에 놓고 설정되었다.

아울러 조선은 명나라의 사례를 쫓아 해금(海禁) 즉 바다를 통한 교역과 교류를 금지시켰다. 왜구의 침탈을 막는 이유가 되었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지배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이든 간에 해금은 조선을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런 이유로 조선은 유럽을 비롯한 서구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다.

 

▲​덕진돈대를 점령한 미군(ⓒ강화군)​​​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면서 조선과 유럽인이 조우하는 일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얀 벨테브레(Jan J. Weltevree, 1595~?)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이 동양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받아 만든 회사) 소속이었던 벨테브레는 조선에 정착해 박연(博淵)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아울러 훈련도감 관원으로서 홍이포(紅夷砲 : 명나라에서 개조한 사거리가 긴 네덜란드 화포)의 제작과 사용법을 전수했다. 이밖에도 1653년(효종 4)에는 박연과 같은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제주에 표착(漂着)해 13년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만남은 교류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난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만남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19세기 초중반에 이르러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아시아 선교를 위해 파리에 설립된 천주교 선교단체) 소속 신부들이 선교를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에 몰래 입국하였다. 그렇지만 이 또한 천주교 선교가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종교 이외의 교류 내용은 없거나 미미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 서양인 최초 강화 땅에 오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동아시아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서세동점이 시작된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본격화된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탈은 일본을 개항케 했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아직까지 문호를 열지 않은 조선까지 이어졌다. 강화도 또한 이때 처음 서양인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 1832~1903)다.

 

▲​오페르트가 본 강화의 돈대​(ⓒ집문당)​

우리는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목적으로 1868년 5월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 묘를 도굴한 인물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페르트는 조선의 역사와 인종, 지리와 인구 등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다. 상해에서 활동한 오페르트는 중국과 일본에만 관심이 있던 다른 유럽 상인들과는 달리 조선에 주목했다.

지리적 여건, 광물, 비옥한 풍토 등 그가 보기에 조선은 개항만 하면 주요한 교역 상대로서 가능성이 높았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조선인은 창의성과 기량이 많은 민족라고 보았다. 물론 이런 그의 서술은 당시 유럽인에게 팽배했던 제국주의적 시각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오페르트는 조선으로 통상 교섭을 위해 3차례에 걸쳐 항해했다. 1866년 3월 1차 항해는 정보수집 차원에서, 1866년 8월 2차 항해는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강어귀를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강화와 오페르트는 조우하게 된다. 그 어떤 외국인도 만나지 못한 강화도를 오페르트가 최초로 밟았던 것이다.

 

▲​오페르트가 타고온 엠페러호와 강화의 돈대(ⓒ집문당)​

그가 바라본 강화는 강기슭을 따라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계곡 사이 풍요로운 경작지, 수목이 울창한 언덕, 크고 작은 마을과 길게 이어진 강둑. 이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결코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러나 강화의 돈대는 오페르트에게 버려진 유산으로 인식되었다. 오페르트가 조선 항해 후 저술한 ‘금단의 나라 조선’ 에는 강화의 돈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요새의 숫자가 늘어나 거의 10분마다 하나씩 지나쳤다. 이 요새들은 사각형의 돌로 상당히 강고하게 축성되었으나 포대도 비어 있었고 파수병도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당 기간 동안 방어진지로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략)… 제임스 선장과 나는 상류 쪽으로 더 답사해 요새 하나를 정찰해 보았다. 그 요새에는 2~3명의 파수병만 있을 뿐이었다.”

오페르트가 세도정치와 군정의 문란 이로 인한 민란의 발생 등 조선사회의 혼란을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하천과 강둑에 설치된 많은 요새와 포대의 무장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대포는 병기창에서 녹슬어가고 있었다는 그의 저술에서 볼 때, 당시 조선의 군사시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19세기 처음 서양인에게 모습을 드러낸 강화의 돈대는 허물어진 요새로 묘사되었다.

낭만적인 강화도의 풍경에 빠졌던 쥐베르

오페르트와 같이 강화의 풍광을 아름답게 평가한 이는 또 있었다. 바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 장교로 참전했던 쥐베르(H. Zuber)이다. 쥐베르의 눈에 비친 강화도는 ‘독특한 정취’를 가진 곳이었다.

 

▲​강화 갑곶으로 상륙하는 프랑스군 삽화(ⓒ살림출판사)​

쥐베르는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해군에서 은퇴한 뒤에 화가로 활동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성격은 <프랑스 군인 쥐베르가 기록한 병인양요>에 나타난 강화도를 추억하는 서술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강화도에서의 즐거운 소풍들을 아주 오래 추억하리라. 날씨는 청명하고 공기 속에는 물기가 스며 있으며 찬란한 햇빛이 논밭과 숲으로 가득 쏟아져 내리는데…(이하 생략)…”

쥐베르에게 강화도는 군사적 작전 구역으로서 공간을 넘어 찬란한 햇빛과 청명한 날씨로 대변되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병인양요 같은 제국주의 침략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럽의 국가들이 처음 접촉하는 이국의 국민들에게 폭력을 드러내고 횡포한 요구를 주장하는 일이 너무 빈번하다. …(중략)…그들이 입는 피해를 감안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마치 우리에게 허락된 줄로 생각한다. …(이하 생략)”

 

▲​​강화를 떠나는 프랑스군과 조선군의 응전 삽화​(ⓒ살림출판사)​​

하지만 오페르트와는 달리 쥐베르의 눈에 비친 강화도의 돈대는 군사적인 어려움을 주는 존재로 보였다. 그는 강화외성과 더불어 축조된 돈대를 보면서 ‘고지 위에 축조한 작은 요새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어 통로를 뚫고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았다.

물론 프랑스군이 강화의 갑곶에 상륙했을 때 조선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처음 겪은 서양 근대 함선과의 전투에서 조선군 모두가 퇴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군인이 보기에도 강화의 돈대는 촘촘히 배치된 아주 잘 만들어진 요새였던 것이다.

틸톤에 눈에 비친 강화 돈대

강화도가 세 번째로 만난 서양인들에게 조선과 강화도, 강화의 돈대는 그저 정복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었던 것 같다. 1866년 대동강에서 교역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軍民)에 의해 침몰했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보복으로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한다.

 

​▲​​​신미양요 당시 파괴된 손돌목돈대​(ⓒ강화군)​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1871년 6월 10일 강화도 염하 일대에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틸톤(M. Tilton)의 <참전수기>에 따르면 ‘쓸모없는 후장식 대포 60문을 철거하고 덕진돈대의 전면과 돈대 위 성가퀴도 모두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그의 <참전수기>에서는 강화의 풍광과 돈대 등에 대한 감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틸톤의 시각은 광성보 전투에 대해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조선 요새지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았단 말이야. 조선군 수비병 몇 몇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채…(중략)… 아마 한 시간 동안에 조선군 200여 명을 죽인 것 같소. 내가 목격한 시체는 단 50구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떼죽음을 당한 시체더미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그다지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거든. ”

이처럼 틸톤에게 강화는 파괴와 정복의 대상이었고 그렇기에 <참전수기>에 나타난 강화도나 돈대의 모습은 무미건조고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조선군의 처절함과 미군의 용맹성 그리고 부하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만 나타난다. 이는 당시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제국주의, 인종주의에 경도된 틸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멜표류기(ⓒ연합뉴스)​

강화도와 돈대에 투영된 복합적 시선들

19세기 중후반 강화도와 돈대를 만난 서양인들의 시각은 이처럼 다양했다. 오페르트와 쥐베르가 조선에 대해 안타까움과 그 이면의 아름다움을 말했다면, 틸톤은 당시의 전형적인 서양인들의 사고를 대변한다.

그렇다고 해도 오페르트나 쥐베르가 제국주의적 시각이나 서구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난 인물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오페르트나 쥐베르 또한 조선이 서구열강에 비해 기술적인 부분에서 뒤쳐져 있어 언젠가 무력이 되었던 외교적인 결과가 되었든 간에 개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5.서양인 눈에 비친 강화 돈대-그들은 돈대를 버려진 '요새'로 알았다>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5. 22.

6.신미양요 뒷이야기-창과 칼, 맨주먹이 전부였던 처참한 전투

1866년 음력 7월 6일 대동강 하구인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다미면(多美面) 주영포(珠英浦) 앞에 기괴한 모습의 거대한 배가 나타났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였다. 처음 보는 서양의 이양선 앞에 평양 일대의 민심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던 그때 조선은 극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

 

▲대동강을 오르는 이양선이 그려진 서경전도 (ⓒ고려대학교박물관)​

1866년 2월과 6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교역을 요구하며 조선에 불법적으로 입경했다. 또 같은 해 7월 7일 중국으로부터 병인박해(병인박해: 1866년에 일어난 프랑스인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사건)에 대한 프랑스군의 보복원정 계획 정보가 알려졌다.​

조선 조정은 천주교도 등 수상한 자들을 체포하고 국경과 연안의 수비를 엄중히 하도록 거듭 지시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을 따라 항해해 평양부 깊숙이 들어간다.

 

▲박규수 초상화

그래도 조선의 물리적 대응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평양감사였던 박규수(朴珪壽)가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박규수는 대동강 하구에 제너럴셔먼호가 출현했을 때 용강 현령(縣令)을 보내 문정(問情 : 외국 배가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사정을 알아보는 일)을 진행했다.

또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 진입하자 평양부의 중군(中軍 : 조선시대 종2품 무관직)과 서윤(庶尹 : 조선시대 평양부의 종4품 관직)을 보내 다시금 항해의 중단을 요청하는 한편, 필요한 식량과 땔감을 지원하며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은 박규수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에 상륙하거나 함포사격을 하는 등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문정을 위해 제너럴셔먼호를 찾은 중군 이현익(李顯益)을 납치하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사태는 점점 꼬여갔고 식량과 연료가 부족했던 제너럴셔먼호는 결국 대동강을 지나는 조선 상선을 약탈한다. 또 무작위로 총을 난사해 12명의 사상자가 나기에 이른다. 결국 박규수는 평양의 군민(軍民)을 동원해 화공으로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해 선원 전원을 몰살시켰다. 제너럴셔먼호의 무리한 교역 요구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로 막을 내렸다.

미국, 조선에 대한 함포외교를 계획​

1866년 10월 병인박해를 이유로 조선의 강화를 침공한 프랑스 극동함대에 대동강에서 일어난 이양선 침몰 사건이 알려지게 된다. 병인양요 당시 통역관 및 향도 역할을 위해 강화에 온 프랑스 신부 리델(Lidel. F. C)이 조선인 천주교 신자 송운오(宋雲五)에게서 국적 미상의 이양선이 평양에서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 소식은 병인양요 직후 미국 측에 알려졌고 미국은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던 제너럴셔먼호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나가사키항에 정박 중인 미국 아시아함대 (ⓒ강화군)​

이에 따라 1867년에 군함 와추세트(Wachusett)호를 조선에 파견해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이어서 1868년에는 셰넌도어(Shenandoah)호를 파견해 생존자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조사보고서는 각기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와추세트호의 선장 슈펠트(Shufeldt. R. W)는 제너럴셔먼호가 양이(洋夷)들을 동반된 해적선으로 오인 받았고, 선원들의 도발로 인해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반면에 셰넌도어호의 책임자였던 페비거(Febiger. J. C)는 강경한 포함외교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결국 미국은 페비거의 제안에 따라 조선에 대한 함포외교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871년 주청미국공사 로우를 전권대표로 세우고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미국 아시아함대를 출발시킨다. 그날이 1871년 5월 16일이다.

영토주권의 침해인가? 평화로운 조사활동인가?

1871년 5월 19일 충청도 해미 앞바다에 도착한 아시아함대는 일주일 동안 탐측을 하면서 북상했다. 5월 26일 인천부 앞바다 작약도에 도착한 미군은 인천 지방관들과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5월 31일부터 강화도로 들어가는 해로에 대한 본격적인 탐측에 나선다.

그리고 탐측 이틀째 되던 6월 1일 손돌목 해역으로 들어온 미군은 양안(兩岸 : 강의 양쪽 언덕)의 조선군 화포 공격을 받는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의 이동로 (ⓒ강화군)​

물론 미군도 포함(砲艦)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로 바로 반격했다. 수많은 탄환과 포탄이 바다의 미국 함선 주변과 해안의 조선군 기지에 퍼부어졌다. 화력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날의 교전은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가벼운 부상자 1명뿐이었고, 조선군은 비록 포군 1명이 전사했지만 손돌목 일대의 포대는 크게 파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의 교전은 신미양요라는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단초가 된다.

미군은 손돌목에서 평화롭게 조사를 하는 자국에게 경고 없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해당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반해 조선은 손돌목이 수도 한양으로 들어오는 안보상 중요한 요지이므로 외국의 군함의 항행을 허용할 수 없어 포격을 가한 것이라 반박했다.

양측의 주장은 결코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군은 10일의 기한을 두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묵살했고 1871년 6월 10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전사자 3명 대 350명. 처참하고도 무섭도록 구슬펐던 전투

손돌목 포격 사건에 대해 조선이 끝내 사과하지 않자 미 아시아함대는 군사 행동에 나섰다. 6월 10일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모노카시호와 소형 함정 팔로스호는 650여명의 미군과 함께 염하의 초입 초지진 앞으로 진입했다.​​

 

▲신미양요 당시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강화군)​

포함 모노카시호는 초지진 일대에 무자비하게 포격을 퍼부었고 초지돈대를 비롯한 조선군의 시설들은 파괴되어 이내 미군에 점령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미군은 덕진진에 무혈로 입성하고 곧바로 조선군수비대의 최종 방어선인 광성보 일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로 비가 오듯 포탄이 쏟아졌고 압도적인 화력의 미군 함포사격은 손돌목 돈대를 완전히 파괴했다. 오죽 많은 포격이 이루어졌으면 미군 지휘관 블레이크(H. C. Blake) 중령은 “남북전쟁 당시에도 그런 좁은 장소와 짧은 시간에 그토록 치열한 포화가 집중되지는 않았다.”고 했을까?

 

▲파괴된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신 (ⓒ강화군)​

아무튼 미군은 광성보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전사자 수를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미군의 전사자가 3명인데 반해 조선군은 전사자만 249명이었다. 여기에 염하에서 익사한 시신 100여구까지 더하면 조선군의 전사자는 대략 350여명 내외로 파악된다.

어쩌면 겉보기에 조악한 무기의 조선군과 근대식 무기의 미군이 맞붙은 신미양요 전투 결과는 누가 보더라도 미군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전투의 이면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가 얼마나 처절하고 구슬펐는지 보여 준다.

신미양요를 회고한 미 해군의 슐레이(W. S. Schley) 대령은 조선군의 처절한 저항을

“소총의 탄약을 갈 여유도 없던 조선군은 창과 칼로 맞섰으며 보통 맨주먹으로 싸웠고 모래까지 뿌리면서 끝까지 항전했다.”고 묘사했다.

 

▲파괴된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신 (ⓒ강화군)​

또 다른 기록에서는 “조선군 수비대는 자신의 총에 장탄할 시간이 없었다. 낙심한 그들은 으스스한 음률로서 노래를 부르고 난간 위에 올라 용맹하게 싸웠다. 그들은 미군에게 돌멩이를 던졌고 손에 무기가 없는 자는 흙가루를 집어 던졌다.”고 전한다. 조선군을 공격하는 미군의 입장에서도 당시 전투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황만큼 비극적인 것은 염하에 몸을 던진 조선군의 존재였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 중 익사자가 100여명이나 되는 것은 광성보 함락 뒤 서양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자결한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당시 전투에서 조선군이 착용한 면갑(棉鉀 : 면으로 제작된 갑옷으로 현대의 방탄조끼 원리를 이용해 제작됨) 때문이라고도 한다. 즉 조선군이 면제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미군 포격 시 면갑에 불이 붙어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2가지 설 중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건 “100구 이상의 시체가 강 위의 여기저기에 붉은 선을 그으며 떠내려가고, 또 가라앉기도 했다”는 기록처럼 익사자들 또한 신미양요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돌아온 수(帥)자 깃발...

전투가 끝난 후 미 해병대 대위 틸톤은 수자기의 탈취를 지시했다. 그리고 함대로 돌아와 수자기를 배경으로 깃발을 탈취했던 병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진을 동봉하면서 미 해병대원들이 세 사람의 사진을 보고 키다리와 꼬마라고 놀린다고 적었다. 수자기는 그렇게 강화를 침공했던 미군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리고 136년 동안 미 해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유물이 되어 갔다.​

 

▲(좌)탈취당한 수자기, 맨 오른쪽이 틸톤대위이다. (ⓒ강화군), ​▲(우)반환된 수자기 (ⓒ강화군)​

지난 2007년 미 해군사관학교에서 소장 중이었던 광성보의 수(帥)자 깃발이 장기임대의 형식을 빌려 고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완전한 환수가 아니지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이제야 온 것이다. 그리고 수자기는 승리를 기념하는 유물이 아닌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군의 혼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었다.

현재 수자기 진품(眞品)은 강화전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고, 전시된 것은 복제본이다. 박물관 측의 설명에 따르면 복제본을 전시한 이유는 유물의 훼손과 그에 따른 미국 측의 수자기 반환 청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는 6월 10일은 신미양요가 발발한지 148주년 되는 날이다. 광성보를 돌아보고, 비록 복제품이라 할지라도 박물관에 전시된 수자기를 보면서 그날 자신을 던진 선조들을 기억해 보자. 그것이 진정한 현충(顯忠)이 아닐까?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6.신미양요 뒷이야기-창과 칼, 맨주먹이 전부였던 처참한 전투>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5. 19.

7.살아있는 유산 강화도 돈대- 강화 돈대, 남북평화의 상징 될 수 있을까?

2018년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가슴 벅찼던 한 해였다.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와 남북 대결 구도를 극복해 보려는 각고(刻苦)의 노력이 결실을 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북미정상회담의 결렬로 인해 남북관계 또한 현재 교착 상태이나 오랜만에 맞이한 평화국면은 남과 북의 교류와 협력에 대한 다양한 구상을 이끌어냈다.

특히 반만년의 역사적 시간을 공유한 남북의 역사, 문화유산 교류는 정치나 경제적인 분야보다는 수월하게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매개체로 주목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를 비롯한 여러 광역지자체들은 남북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연계한 사업을 기획하거나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중앙정부를 제외하면 현재 경기도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DMZ 세계유산 등재기반 조성 학술심포지엄 모습(ⓒ정학수)​

경기도는 지난 4월 23일 경기문화재단과 공동 주관으로 국회의원회관에서 한반도 DMZ 세계유산 등재기반 조성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사람의 출입이 통제된 DMZ의 자연 및 생태환경을 비롯해 궁예도성을 포함한 역사유산, 금강산철로와 일제강점기 건축물, 6·25전쟁 유산, 비무장지대 철책과 GP 초소 등 다양한 시기와 성격의 유산들이 세계유산으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향후 DMZ 일대의 여러 유산을 묶어 남북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복합유산 등재를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한강하구와 해안철책, 초소로 둘러싸인 강화도

그렇다면 인천은 어떨까? 인천의 경우 강화군 일원이 접경지대로서 남북이 대치해 왔던 역사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특히 강화군 북쪽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의 해안 철책과 군사시설은 70년간의 남북이 대치한 냉전의 역사가 남아있다.

실제 해안의 군부대 시설을 가보면 60~70년대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군사시설 변화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예성강 하구와 한강 하구 모습(ⓒ정민섭)

또한 철책과 초소들이 마주한 한강하구와 조강은 남북의 대치로 인해 오랜 시간 출입이 없던 곳으로 습지와 갯벌이 발달해 있다.

특히 강화를 대표하는 조류이자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 저어새도 이곳에서 서식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는 점은 한강하구가 생태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물길을 공유하고 있는 북측과의 교류협력 매개체로서 한강하구 일대의 자연 및 생태환경은 분명히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한강하구 일대 유산이 유네스코 복합유산으로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추가로 고려해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돈대이다.

다시 나라를 지키는 민통선 일대의 돈대들

340년 전 보장처 강화도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던 돈대는 갑오경장(甲午更張 : 1894~1896년 조선조정에서 추진한 일련의 개혁운동) 이후 진무영이 폐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 병탄(倂呑) 되면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갔다.

그러나 애초부터 주변의 조망이 좋아 감시하기 유리한 지점에 설치되었던 돈대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군사기지로 재활용 된다.

지금까지 강화도의 돈대는 해병대의 주둔지이자 초소로 혹은 방어진지로 이용되어 왔다. 돈대를 군사시설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사례가 나타나는 곳이 바로 초루돈대와 구등곶돈대였다.

 

▲초루돈대 내부 6.25전쟁 후 주둔 부대 막사 모습(ⓒ정민섭)​

지난 2000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수행한 초루돈대 발굴조사는 최초의 강화도 돈대에 대한 학술조사로서 의미가 있었다. 돈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쌓은 방식과 구조적 특징 등이 처음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조사단의 머리를 아프게 한 돈대의 유구(遺構 : 옛날의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잔존물)가 하나 있었다. 바로 돈대의 서쪽 포좌 앞을 지나고 있는 석벽유구였다.

처음 조사단은 이 석벽이 돈대에 주둔한 조선군이 생활했던 돈사(墩舍)의 흔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돈대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인 포좌를 가로막고 있는 석벽을 돈사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 의문은 돈대 주변의 마을을 탐문하면서 풀렸다.

이 석벽유구 위치에 과거 6·25전쟁 이후 초루돈대에 주둔했던 부대의 막사 건물이 있었다는 주민의 증언을 확인했던 것이다. 즉 초루돈대의 서쪽 포좌를 헐어 막사의 출입문으로 삼고 돈대의 포좌에 석벽을 잇대어 작은 막사를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에 이렇게 돈대의 포좌를 이용해서 막사를 만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전쟁 직후 국가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으로 인해 막사를 지을 물자가 없었기에 기존의 돈대를 활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어찌되었건 지금은 부대가 철수하여 빈 공간인 초루돈대는 전쟁 이후 나라를 지키던 병사들의 고단함이 묻어있는 곳이다.

 

▲구등곶돈대 성벽 위에 널려 있는 군화들(ⓒ정민섭)​

 

▲구등곶돈대 성문 앞에 쓰여진 해병대 구호(ⓒ정민섭)

이에 비해 구등곶돈대의 군부대 활용은 더욱 현대적이고 적극적이다. 정확히 언제 구등곶돈대가 해병대의 주둔지로 이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구둥곶소초로 불리는 해병대 부대는 돈대 안에 현대식 막사를 마련하고 바다를 면한 돈대 성벽으로 초소를 세워 놓았다.

이미 필자는 5년 전에 처음 구등곶돈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모습을 회상해 보면 먼저, 해병대 장병들이 근무를 서던 초소로 향하는 길이 돈대 성벽을 넘어 이어졌다. 또 근무 외의 장병들은 막사 옆에 마련된 벤치프레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고, 일부는 돈대 포좌 앞에 마련된 빨래 걸이에 군복을 널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돈대 위로 군화들이 늘어서 있는 장면이었다. 젖어버린 군화를 돈대의 성벽 위에 올려놓은 모습에서 해병대 장병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돈대에서 생활한 군사들이 오버랩 되는 것은 고단한 군대 생활에 대한 연민이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일 것이다.

개축되거나 사라졌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돈대의 흔적들

병사들이 생활한 막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외에도 민통선 내 돈대는 다양하게 개축되었다. 광암돈대와 불장돈대, 의두돈대, 석우돈대 등 강화의 북쪽 해안을 두르고 있는 돈대들은 완전한 원형을 갖추고 있지 않다.

돈대의 포좌를 탄약고로 개축 하거나 성벽을 크게 잘라내고 그 사이로 벙커나 전방의 북쪽을 관측하는 장비를 들여 놓은 돈대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돈대의 성벽 가운데 부분을 파내어 참호로 사용하고, 성벽의 위로 3~4m 높이의 감시 초소를 세워 놓기도 했다.

비록 원래 모습을 완벽히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대로 돈대의 성벽과 포구멍, 포좌 등을 통해서 이것들이 돈대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군부대 시설로 개축된 불장돈대 모습(ⓒ정학수)​

이에 반해 민통선 내 소우돈대나 적북돈대, 휴암돈대는 그 원형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롭게 해병대 시설로 구축되어 있다. 가까이서 보더라도 돈대의 성벽이나 주요 시설들은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돈대로 볼 수 있는 생김새만 없어진 것이지 돈대가 있었다는 흔적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적북돈대와 휴암돈대가 대표적이다. 적북돈대는 그 터가 해병대 벙커 및 초소로 완전히 개축되어 돈대의 원형은 나타나지 않는다.

 

▲군시설이 들어서 있는 적북돈대 터 모습(ⓒ정민섭)

그렇지만 벙커의 좌우측의 석축이나 벙커 뒤편으로 구축된 참호시설 벽은 돈대 성돌로 추정되는 석재를 이용해 새롭게 쌓아 놓았다. 휴암돈대 또한 해병대 초소 뒤쪽으로 돈대의 성돌을 사용해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이렇듯 개축되었거나 지금은 그 원형을 완전히 잃어버린 터에서도 돈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민통선의 돈대가 처음 축조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강화도의 방어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강화도 돈대의 새로운 가치

조금 섣부른 감은 있지만 남북관계가 앞으로 더 진전한다면 강화의 민통선 안에 있는 돈대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개축되고 원형이 바뀐 돈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유산의 원형을 잃었으니 가치가 없는 유적으로 치부해야 할까? 필자는 오랫동안 돈대를 비롯한 강화의 해양관방유적에 대한 세계유산 등재 추진 업무를 맡아 왔다.

그리고 세계유산에서 요구하는 유산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했다. 진정성이라 함은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거나 정비가 이루어졌더라도 당시의 재료와 공법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민통선의 돈대는 허물어지고 군부대에서 다시 쌓는 과정에서 원형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민통선의 돈대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앞서 얘기했던, 돈대가 처음 만들었을 때의 기능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 혹은 국방유적들은 과거의 역할이 없어지고 단순하게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아 있다.

 

▲석우돈대에서 바라본 철책과 한강하구 그리고 송악산(ⓒ정민섭)​

그러나 민통선의 돈대는 지금도 해병대의 군사시설과 결합되어 강화의 북쪽 해안을 지키는 군사적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이는 민통선의 돈대가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민통선의 돈대는 남북분단과 대결의 역사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가치가 더욱 배가 된다.

민통선의 돈대가 앞으로 어떻게 더 변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이제부터라도 강화 민통선 내 돈대의 여러 역사성과 한강하구의 생태적 가치를 어떻게 밝힐지 고민이 필요하다. 이는 인천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남북교류 사업 중 하나인 한강하구 평화기반 조성과도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7.살아있는 유산 강화도 돈대- 강화 돈대, 남북평화의 상징 될 수 있을까?>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6.12.

8. 무관심과 방치속 사라지는 '강화 돈대'(끝)

문화유산과 사유재산권​

문화재 지정은 어느 지역에서나 민원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 소유의 건물도 문화재로 지정되면 함부로 증축하거나 개축하기 어렵고 아울러 문화유산 주변으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라는 버퍼존(Buffer Zone : 문화재 보호를 위한 완충지역)이 설정되어 있어 건축행위의 제한을 비롯한 다양한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문화유산과 관련한 민원인들은 한국의 문화재보호법을 ‘악법(惡法)’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문화유산의 소재지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충된 논리가 충돌하는 현장이 되기도 한다.

 

▲공평동유적 전시관에 전시 중인 골목길과 ‘ㅁ’자 집 모습(ⓒ서울역사박물관)​

그러나 서울시 공평동유적은 위의 사례와 조금 다르다. 2010년대부터 시작된 서울 종로구 일대 재개발, 도시환경정비사업은 한양도성 안의 조선시대 유적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중 공평동유적에서는 조선시대 도로와 골목 유구, 15~16세기 신분별 집터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아울러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는 분청사기, 청화백자, 기와편 등 다양한 생활유물이 출토되어 관심을 모았다. 물론 이곳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보존과 개발논리가 충돌했다.

그렇지만 서울시는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과 시행사를 대상으로 치열한 논의 끝에 개발과정에서 확인된 유적들을 지하에 그대로 보존해 전시하고 그 위로 건축물을 올리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종로 피맛골 뒤편 센트로폴리스 빌딩에 공평동유적전시관이 만들어져 과거 분주했던 시장거리를 볼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개발과 보존이 절묘한 타협을 이룬 것이다.

개발에 밀려 원래 모습을 잃어가

강화도의 해안은 곶과 갯골이 섞여있는 비교적 복잡한 해안선이어서 풍광이 좋다. 특히 남쪽과 서쪽 해안은 해넘이를 보기 좋은 곳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동막해수욕장을 지나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안선 주변으로는 일찍부터 펜션과 대형 리조트가 즐비하게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해안에서 시작된 개발의 수요는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척후(斥候 :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와 경보(警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돈대 주변은 지대가 높고 전망이 탁 트여 경관이 빼어났기 때문에 더욱 개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분오리돈대와 장곶돈대 주변이다.​

 

▲​미루지돈대의 성문 모습(ⓒ정학수)​

 

▲​장곶돈대 그 주변 전경(ⓒ정학수)

분오리와 장곶돈대는 모두 인천시 지정 문화재로서 문화재 주변 반경 500m까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발 압력에 따른 장기적, 지속적인 민원에 의해 결국 보호구역이 대폭 축소된다.

물론 재산권은 헌법에서 인정한 권리로서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문화유적은 그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변 환경과 함께 보호되어야만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문화유산과 관련된 민원인과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유산과 그 주변 경관도 지키면서 민원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미 보호구역은 축소되었고 실제로 미루지돈대와 바로 인접해서 벌써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이런 후회를 해봐야 소용은 없다. 다만, 앞서 본 서울의 사례처럼 앞으로는 강화의 돈대도 개발과 보존의 타협점이 찾아지길 바랄 뿐이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잊혀지는 돈대들

현재까지 법적 보호를 받는 돈대는 문화재로 지정된 29개소 및 군사시설보호구역의 규제를 받고 있는 16개소 등 총 45개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법적 보호라는 울타리가 있음에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돈대들이 많다.

예를 들어 사적 제452호인 강화외성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에 포함되어 보호되고 있는 옥창, 망해, 염주, 가리산돈대 등은 지금까지 정비나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사문화환경 보전지역 중 규제가 느슨한 3, 4구역으로 지정된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사실상의 방치이다.

이들 돈대는 지금 성석(城石 : 성돌)이 모두 빠지고 뒤채움 흙더미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을지 모르지만 집중호우라도 일어난다면 유적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또 옥창돈대의 경우에는 과거 조사에서 성벽의 기단 석축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지만 농경지로 활용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가리산돈대에 남아있는 성벽 토둔의 모습(ⓒ정민섭)​

어쩌면 이들 돈대는 명목상 법적 보호의 테두리 내에 있어 다행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시급한 문제는 법적 보호 장치가 전혀 없는 돈대이다. 현재 강화도 내 돈대 중 법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돈대는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택지돈대, 동검북돈대 등을 포함해 총 9개가 있다.

이중 장자평돈대는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이를 제외하면 아직도 8개의 돈대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동검북, 양암, 송곶돈대 등은 돈대의 석축이 허물어지고 원형에서 많이 훼손되었지만 돈대의 형태와 구조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돈대의 주요 시설인 포좌와 성문의 흔적과 더불어 송곶돈대에서는 해병대가 주둔한 다수의 증거들이 산재해 있다.

이밖에도 섬암돈대와 택지돈대, 송강돈대 등은 현재 유휴지(遊休地 :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땅)이거나 경작지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얕은 토둔(土屯 : 낮은 언덕 수준의 흙더미 혹은 담) 형태로 돈대의 원형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돈대 내외부에서 자기(磁器) 및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돈대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동검북돈대의 성문 모습(ⓒ정민섭)

 

▲​​송곶돈대의 남아있는 성벽 모습(ⓒ정민섭)​

 

▲​​밭으로 쓰이고 있는 송강돈대. 토둔의 흔적이 명확히 보인다(ⓒ정민섭)​

그럼에도 지금까지 돈대 8개소는 전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왜일까? 인천시나 강화군의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돈대들이 너무 훼손이 심해 보수나 정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을까? 구체적인 이유는 필자 또한 알 수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다양한 가치와 특징을 지닌 돈대들이 쓰러져 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돈대들이 개발에 밀리고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 때문은 아닐까? 문화유산이 개발과 보존의 갈림길에서 없어진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본다면 관리되지 못하고 허물어져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강화 돈대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서울의 풍납토성은 사적이었지만 개발 논리와 무관심에 밀려 점차 파괴되어 갔다.

하지만 백제왕성의 실체가 드러나고 시민들의 관심이 꾸준해 지면서 지금은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중이다.

총 8회에 걸쳐 필자는 독자들께 강화도 돈대의 가치를 전했다. 강화의 해양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19세기 서구세력과 접촉·충돌했던 증거로서 돈대에 대한 가치도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유산으로서 또한 인천의 역사문화 남북교류의 마중물로서 돈대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이름 모를 돈대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야 앞으로도 계속될 개발과 보존의 논쟁 속에서 돈대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정민섭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연구원 <무관심과 방치속 사라지는 '강화 돈대'> / 인턴시 인터넷신문 i-View / 2019. 6.26.

[출처] 우리가 몰랐던 강화 돈대 이야기|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