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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경전, ▣대비의 수렴청정-정희왕후·문정왕후, ▣세조의 찬탈, ▣문종 세자빈 [궁궐가는 길Ⅴ]

문수봉(李楨汕) 2021. 4. 4. 10:59

▣경복궁 자경전, ▣대비의 수렴청정-정희왕후·문정왕후, ▣세조의 찬탈, ▣문종 세자빈 [궁궐가는 길Ⅴ]

 

◆『궁궐가는 길』 Ⅴ [자경전·대비의 수렴청정]···목차

 

34. 경복궁 자경전 -수렴청정한 양어머니, 그 보은으로 자경전 지은 고종

35. 대비의 수렴청정-단종이 수렴청정 받았다면 세조의 찬탈 가능했을까

36. 할머니 수렴청정 첫 테이프 끊은 성종대 정희왕후

37. 직접 수렴청정 결정한 조선의 악녀 문정왕후

38. 문종 세자빈 2명 생별, 1명 사별…자선당의 비극

◆『궁궐가는 길』 을 더 보실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궁궐가는 길』 Ⅰ [경복궁·친경·친잠·조보·즉위] https://blog.naver.com/ohyh45/222063721470

『궁궐가는 길』 Ⅱ [근정전·사정전·사관·궐내각사] https://blog.naver.com/ohyh45/222064525718

『궁궐가는 길』 Ⅲ [창덕궁 궐내각사②·경회루] https://blog.naver.com/ohyh45/222091352927

『궁궐가는 길』 Ⅳ [침전권역-강녕전·교태전·왕비] https://blog.naver.com/ohyh45/222214226683

『궁궐가는 길』 Ⅴ [경복궁 자경전·수렴청정,세자빈]https://blog.naver.com/ohyh45/222291733828

https://youtu.be/r5m--zCTzsA

https://youtu.be/2je7DRNMEes

34-1.경복궁 자경전(景福宮 慈慶殿)

- 수렴청정한 양어머니, 그 보은으로 자경전 지은 고종

경복궁 자경전. 자경전은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를 위해 지은 대비전이다.

[사진 영이(Seoul, Korea) on Wikimedia Commons]

정조의 효심 자경전

교태전 아미산을 지나 건순문(建順門)을 나서면 자미당(紫薇堂)터 동쪽으로 자경전이 보인다. 자경전은 고종 4년(1867)에 지어졌으나 그 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재건된 건물이다.

 

자경전은 고종의 양어머니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를 위해 지은 대비전이다. 자경(慈慶)이란 이름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창경궁에 있던 자경전에서 비롯됐는데,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경사가 임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갖는다.

 

정조는 창경궁을 창건한 성종 못지않게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정조는 즉위한 직후 창경궁 영춘헌 일곽과 양화당 북쪽 언덕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자애로우신 어머니, 자전(慈殿)께서 오래 사시기를 기원한 집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당 경모궁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자경전을 지어드렸던 것이다. 자경전은 건너편의 경모궁과 서로 마주 보며 남편 잃은 지어미의 슬픔을 위로해드리려는 아들의 배려로 지은 집이다.

동궐도(東闕圖). 국보 제 249호,고려대학교,동아대학교 소장

조선 후기 동궐도에 보이는 창덕궁 대조전 뒤뜰의 집상전(集祥殿)은 처음에는 현종이 모후 인선왕후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집상당을 수리한 뒤 전으로 격상시켜 지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대왕대비의 처소를 동쪽에 두는 것은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한다. 한나라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가 미양궁 동쪽 장락궁에 살았는데 태후의 거처를 동조라는 별칭으로 불렀고 태후도 그렇게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왕대비나 대왕대비를 동조라 부르고 거처를 궁궐의 동쪽에 두었다.

 

왕비는 남편인 국왕이 승하하면 대비로 승격되고 처소를 새 왕비에게 내어주고 대비전으로 물러나 거처를 옮긴다. 조선시대에는 내전 영역에 왕과 왕후의 침전뿐 아니라 대비전과 세자의 공간이 구분돼 있었다.

조선 초 세조가 승하한 후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조선왕실에서 처음으로 대비가 되었다. 현재의 창덕궁 수강재(壽康齋)는 원래 창경궁에 속하던 영역으로 석복헌 동쪽에 있는 집이다. 집 이름 ‘수강’은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의미로 본래부터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상왕이나 대비가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조선 초기에 있던 수강궁은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머물던 곳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고 수강궁에서 머물다 영월로 귀양을 갔으며 세조도 수강궁에서 머물다가 승하했기 때문에 예종이 이곳에서 즉위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말년에 머물던 수강궁에 함께 있다가 세조가 승하한 뒤에도 그대로 수강궁에 머물렀으며 정희왕후의 거처는 예종의 승하 시까지 수강궁에 지속되었다.

 

그리고 성종 대에 들어 정희왕후뿐 만 아니라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 예종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등 세 분의 대비전을 위해 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성종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창경궁을 건립하게 되었다. 창경궁은 조선 후대에 동궐의 생활공간으로 확장돼 사용되었지만 애초에는 대비를 모시기 위해 지은 궁궐이었다.

 

조선 후기 동궐도에 보이는 창덕궁 대조전 뒤뜰의 집상전(集祥殿)은 처음에는 현종이 모후 인선왕후를 가까이 모시기 위해 집상당을 수리한 뒤 전으로 격상시켜 지었다. 그러나 대비인 인선왕후를 모시기에는 규모가 좁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덕궁(경희궁)의 집희전(集禧殿)을 옮겨 새로 지었다.

이후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도 집상전에서 머물렀으며 영정조 대의 대비전은 창덕궁 서편에 경복전과 수정전이 있었는데 정수왕후는 수정전에서 승하했다.

수강재는 순조 때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당시 별당으로 사용했으며 헌종 14년(1848)에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아 대왕대비의 거처로 고쳐 지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강재는 헌종의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의 어머니로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의 어린 손자가 왕위에 오르자 7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그리고 고종 대에 경복궁이 중건되자 창경궁에 있던 자경전의 이름을 빌려 신정왕후를 위한 자경전을 경복궁의 동쪽에 대비전으로 지은 것이다.

 

원래 경복궁 자경전은 여름전각 청연루(淸讌樓)와 협경당(協慶堂), 뒤쪽의 복안당(福安堂)이 복도로 연결된 구조를 가진 꽤 큰집이다. 지금은 자경전 앞마당이 탁 트여 있지만 예전에는 자경전과 협경당 사이 청연루 어간쯤에 취병(翠屛)이나 나무판자로 된 가리개를 둘러 마당을 구분한 듯하다.

취병이란 대나무로 틀을 짜 나무 덩굴을 틀어 올려 공간을 구획했던 생나무 울타리이다. 자경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만세문(萬歲門)이다.

풍양조씨의 정계 진출 연 신정왕후

드라마 '닥터 진'에서 배우 정혜선이 연기한 신정왕후. 신정왕후는 철종 8년(1857)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승하하면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다. [사진 MBC]

 

자경전의 주인 신정왕후 조씨는 순조 19년(1819), 12세에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순조 27년 원손(헌종)을 낳고 남편 효명세자가 순조의 명을 받아 대리청정한 지 3년 만에 갑자기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빈 조씨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숭되었고 신정왕후는 왕비의 반열에 올라 자연스럽게 왕대비로 존숭되었다. 아들 헌종이 즉위했지만 신정왕후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권한이 없었고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신정왕후의 지위가 높아지고 풍양 조씨의 정계 진출도 점차 두드러졌다. 헌종 7년(1841)부터 헌종이 친정을 펼치면서 조만영은 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지내며 동생 조인영, 조카 조병현 등과 함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어 조인영은 영의정에 오르고 풍양 조씨 일파가 군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헌종 15년(1849),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의 나이로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살던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철종을 불러들여 보위를 잇게 하고, 다시 수렴청정에 나섰다. 순원왕후는 이어서 인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후(철인왕후)로 간택하여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의 장을 열었고 본격적으로 풍양 조씨를 탄압했다.

철종이 즉위한 해에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이 재물을 탐하고 임금을 멸시했다는 이유로 사사되기까지 했다. 남편에 이은 아들의 죽음. 설상가상으로 친정까지 몰락 위기에 빠져들자 신정왕후는 몸을 낮추고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신정왕후는 철종 8년(1857)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승하하면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다. 그리고 6년 후(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이재황에게 익성군(翼成君)의 작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하여금 궁궐로 맞아오게 했다.

흥선군과 함께 입궐한 이재황은 대왕대비의 교서에 따라 그녀의 양자가 되어 관례를 치른 다음 12월 13일 보위에 올랐다. 신정왕후는 12세의 고종이 즉위하자 4년간 수렴청정을 하였고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과 협력하고 종친의 위상을 강화해 정국을 운영했다.

또한 대원군에 명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해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고종은 양어머니 신정왕후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자경전을 지어드렸다.

[출처] : 이향우 조각가 :<이향우의 궁궐가는 길> - 34.경복궁 자경전 -수렴청정한 양어머니, 그 보은으로 자경전 지은 고종 / 중앙일보, 더, 오래 . 2021. 1. 17.

34 -2. 경복궁 자경전(慈慶殿)과 꽃담

대비전인 자경전과 중궁전인 교태전 사이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터만 남아 있다.

경복궁 자경전 건물 배치도

자경전은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 터에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대비전으로서 중건 이후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서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자경전은 대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 건물로, 총 44칸 규모이다.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복안당이라는 침실을 두고 중앙에는 중심 건물인 자경전을 두었다. 또, 동남쪽에는 다락집인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자경전은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교태전 동쪽 자미당터에 조대비(趙大妃)신정익왕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자경전(慈慶殿)을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25년(1888)에 다시 지었다.

경복궁 내의 일상생활하는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자경전은 44칸으로서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북향에 복안당이라는 이름의 침실을 두었고 중앙에는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경전을 두었다. 동남향에는 다락집 청연루를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12칸의 협경당이 붙어 있다.

주변에는 수십 칸의 행각과 담장·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여러 가지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과 오래 사는 열 가지의 동식물 무늬를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경복궁 자경전 남쪽 행각

경복궁 자경전 서쪽 행각

자경전 앞 마당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대비를 위한 잔치를 열 수 있는 공간이다.

전면 마당 동·남·서쪽에는 각각 동행각·남행각·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좌측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우측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건물의 중심되는 곳의 평면은 교태전과 같이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을 둔 침전의 기본 형식을 갖추었다.

자경전 앞 마당과. 남행각 - 상궁.나인들이 거처하는 많은 방들로 이루어졌다.

자경전 전면(前面)을 둘러싼 동·서·남 행각은 무익공(無翼工) 3량 구조로 내정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외측벽은 두벌대의 장대석 위에 사괴석으로 아랫부분을 쌓고 그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남행각 중앙에는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이 나 있다.

행각 중앙에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이 있다. 2개의 출입문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경전의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으로 들여다본 자경전, 만세란 ‘긴 시간’을 뜻하며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이 문을 통해 자경전은 물론이고 청연루나 협경당으로 갈 수 있다.

경복궁 자경전 전경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보물809호)은 궁궐에서 대비가 거처했던 침전으로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자경전은 고종 옹립에 큰 역할을 했던 신정왕후 조대비를 위해 지은 건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관심과 정성을 들여서 지은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년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자경전 앞쪽으로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전이 있다. 원래는 상당히 많은 건물과 출입문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고, 최근에 수복방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자경전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寢房)인 복안당(福安堂)은 겨울을 위한 공간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이다. 중앙부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2칸, 전·후 툇간의 자경전은 낮시간에 거처하던 공간이고, 동남부의 다락집 청연루(淸讌樓)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동쪽의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은 시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자경전은 총 44칸 규모로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건물이다.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자경전을, 뒷편에 침실인 복안당을, 동쪽에 누마루인 청연루를 두고 있으며, 부속건물인 협경당과 여러 행각들을 두고 있다.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당시 대비를 보좌하는 많은 상궁, 나인들이 거주하는 행각들이 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을 새겨넣은 십장생굴뚝(보물810호) 등에서 흥선대원군의 세심한 정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신정왕후는 익종의 비이자, 헌종의 어머니로 고종의 옹립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조대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추존왕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조선후기 세도정치 폐해를 타파할 수 있는 인물로 큰 기대를 받았던 효명세자이다.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많이 펼쳤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조대비는 남편이었던 효명세자의 유지를 잘 받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종을 옹립하면서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주어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인물이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는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보답하여 흥선대원군은 조대비를 위한 거처를 궁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었다.

1888년 재건된 자경전(慈慶殿)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복안당(福安堂)에 온돌방을 들여 겨울용 침전으로, 동쪽 청연루(淸讌樓)에는 누마루를 설치해 여름용 거실로 삼았고, 협경당(協慶堂) 등 여러 부속시설을 연결시켰다.

뒤편담장의 십장생 굴뚝은 여러 개 온돌방의 굴뚝들을 하나로 합친 집합굴뚝이며,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동식물들을 조각하여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서편 담장에도 여러 꽃나무들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자들을 새겨 넣어, 나이 든 대비전 주인의 장수를 기원했다. <출처:문화재청>

자경전◀··· 청연루···▶ 협경당

자경전

자경전 서쪽측면의 누마루

보물 제809호. 자경전(慈慶殿)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讌樓)가 건축되었고, 연이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건축되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재건의 제2단계 조영(造營) 때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를 위하여 옛 자미당(紫薇堂) 터에 지은 연침(燕寢) 건물이다.

동행각(東行閣), 남행각(南行閣), 북행각(北行閣) 등의 부속건물과 일곽을 이루고 건립되었으나, 두 번에 걸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8년(고종 2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전각의 주평면(主平面)은 교태전(交泰殿)과 같은 침전이 이루는 기본적인 것으로,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대청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 그리고 그 측면으로 누마루를 두었으며, 이들의 앞면과 뒷면으로는 툇마루와 좁은 온돌방을 두었다.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垂舌〕 두 개를 내어 이익공(二翼工)으로 꾸몄다.

쇠서〔牛舌〕와 보머리〔樑頭〕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된 첨차(檐遮)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끝이 초각된 쇠서모양의 부재를 화반 대신 두 개씩 얹어두었다.

가구(架構)는 앞면의 퇴주(退柱)와 안쪽의 고주(高柱) 사이에는 퇴보〔退樑〕를 걸고 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높이에서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정면의 중앙 세 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나머지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며,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합각면은 전돌로 마감하였다.

전면 중앙 3칸은 전퇴(前退)를 개방하여 마루를 깔았고 기타 부분과 청연루·협경당의 외부 기둥사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설치하였다. 청연루 누마루는 높직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아 운치를 돋구었고, 후면에는 단(段)을 둔 쪽마루를 두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을 얹었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여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과 담장에는 여러가지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그 꾸밈이 매우 아름답고, 특히 북행각에 이어져 있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굴뚝은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

자경전 뒷마당. 다른 침전들과 달리 마당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툇마루를 두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자경전 후원(後園) 북쪽 담과 이어진 굴뚝에는 왕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가 베풀어졌고, 서쪽 벽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상문자가 액자처럼 조성되어 있다.

추녀마루 잡상

경복궁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인 경복궁 교태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大妃)로 승격되어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주로 사용하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자경전 현판.

대청앞의 툇마루(전퇴)는 개방되어 있고 전퇴와 대청 내부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대청의 전면, 좌·우측면과 대청 중간에는 들어열개 분합문이 있어 개폐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경복궁 자경전 천정 (景福宮 慈慶殿 天頂)

자경전 대청마루.

비교적 넓은 공간으로 연회나 모임 등을 가질 수 있는 규모이다.온돌방과 대청 사이에는 가운데만 창을 내고 위 아래는 종이를 붙인 불발기 창을 설치한 '들어열개 분합문'이 있다.

대청의 문호를 모두 개방한 모습으로 뒤면에 십장생 굴뚝이 보인다

들어열개 분합문을 올려 돌쇠에 걸면 바로 완자 장지문이 있고,

온돌방에도 중간에 장지문을 설치하고있다

청연루(淸讌樓)와 협경당

청연루(淸讌樓) 현

경복궁 자경전 청연루(景福宮 淸讌樓)

자경전 동쪽에 딸려 있는 누마루이다. 이름은 ‘맑고(淸) 한가함(讌)’ 또는 ‘조촐한(淸) 연회(讌)’라는 뜻이다

원래 세종때에 지었으나 그 때는 자미당과 나란히 있었던 누각의 모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부인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도 하고 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는 등의 활동들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고종시기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옛 자미당 터에 자경전을 크게 지으면서 청연루는 자경전의 누마루가 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자경전과 같다.

자경전 본채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남쪽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 튀어나와있으며 남향을 하고 있다.

제일 아랫부분에 1단짜리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으며 기단 윗 부분은 전돌로 깔았다. 그리고 사다리꼴 모양의 긴 화강석 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건물을 구성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3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교창을 설치하지 않고, 아래에 머름을 둔 뒤 띠살 창만 설치하였다.

기둥은 각 기둥이고, 마루 밑 동쪽 면에는 초록색 나무 문짝을 달아 협경당 마당과 연결시켰고, 북쪽 면에는 붉은 나무 문을 설치하여 자경전 동쪽 온돌방의 아궁이를 땔 수 있는 함실로 갈 수 있게 하였다.

실내 천장은 우물반자,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있고 모든 칸이 다 뚫려있어 공간을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청연루 내부

경복궁 협경당(景福宮 協慶堂)

협경당 전면은 담으로 구획하여 자경전과 구분되지만, 후면은 건물이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기단 높이와 지붕 용마루 높이를 자경전보다 낮게 하고 공포도 몰익공으로 간략하게 하여 자경전에 비해 격식을 낮추었다.

자경전 · 청연루의 동쪽에 위치한 부속 건물. 남향이다. 역사는 자경전과 같다. 이름은 ‘함께(協) 경사(慶)를 누린다’는 뜻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 총 12칸 규모로 건물 앞 쪽에 담장과 쪽문을 세워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었다. 건물 남쪽 가장자리에만 툇마루가 있고 나머지 동, 서, 북쪽에는 없으며 그 중 대청 쪽 툇마루는 밖으로 드러내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 총 2칸의 온돌방이 각각 있으며 온돌방 사이 가운데 2칸은 대청이다. 대청의 천정은 우물반자, 마루는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온돌방 내부에는 완자 장지문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각기둥이고,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공포는 쇠서 끝을 둥글린 물익공이고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놓은 뒤 그 위에 운공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취두와 용두, 3개의 잡상을 설치하여 장식하였으며 교창을 설치하지 않고, 아래에 머름을 둔 뒤 띠살 창만 설치하였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으로 쌓았고 기단 윗 부분을 전돌로 놓았다. 계단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놓았으며 주춧돌 사이를 장대석이 아닌 벽돌로 마감하였다. 동쪽 측면은 툇간 부분을 제외하고 벽과 창으로 마감하였다

자경전 동쪽편에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부속건물인 협경당(協慶堂)이 있다.

협경당 앞 마당

경복궁 자경전 협경당 (景福宮 慈慶殿 協慶堂)

협경당 현판

 

복안당(福安堂)

자경전 북서측에 있는 부속 건물. 동향이다. 이름은 ‘복(福)되고 편안(安)하다’는 뜻이다, 자경전 뒷쪽편. 돌출된 온돌방인 복안당(福安堂)을 두고 겨울용 침전으로 사용했다. 교태전과는 달리 뒷편에 정원과 툇마루를 두지 않았다.

(좌향 기준) 정면 4칸, 측면 2칸, 총 8칸짜리 건물이었고 자경전 본채 쪽으로 온돌방이 4칸, 대청이 2칸, 툇마루가 2칸이었으나 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을 더 지어서 현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총 12칸이다.

그래서 후에 지은 온돌방 부분은 기존 복안당과 양식이 조금 다르다. 지붕과 기단도 기존 복안당보다 낮고 용마루, 추녀마루, 내림마루의 마감 양식도 다르며, 원래 복안당은 공포가 있으나 새로 지은 부분은 공포가 아예 없는 민도리 양식이다.

그래도 팔작 지붕 양식과 각진 기둥, 교창을 설치한 것은 같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기존 건물과 증축 부분에 각각 1개 씩 놓았으며 주춧돌 사이를 장대석이 아닌 벽돌과 사고석으로 마감하였다.

동쪽 측면 모습은, 온돌이 있는 칸의 외벽을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벽을 둔 모습으로 마감했으며 마루(대청, 툇마루) 칸의 외벽은 전면창호를 내었다. 새로 증축한 온돌방의 경우 가장자리 칸의 외벽만 기존 복안당 온돌방 외벽처럼 만들었고 다른 한 칸의 외벽은 대청처럼 전면 창호로 되어있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서쪽 측면 모습도 동쪽과 비슷하지만 대신 모든 온돌방 외벽을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을 낸 모습인 것이 다르다. 모든 마루 칸 겉면을 전면창호에 위에 교창, 아래에 머름을 둔 모습으로 만들었다.

자경전 쪽에서 본 교태전의 꽃담

자경전 서쪽 외벽 꽃담

꽃과 나무, 문자의 문양을 복합적으로정형화하여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꾀하였다.

자경전 꽃담

3단의 사고석 위에 벽체가 있고 그 위에 기와가 올려져있는 전형적인 궁궐 담장의 모습이다. 하지만 벽체는 주황색 벽돌과 삼화토로 마감하여 따뜻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이 벽돌 색은 서울특별시에서 ‘꽃담황토색’이라 하여 '서울의 10대 대표 색' 중 하나로 꼽아 현재 서울택시의 색으로 쓰인다. 도입 초기에는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북쪽 담장을 먼저 보면, 가운데엔 사선인 만자문(卍字紋)과 귀갑문이 있고 그 사이마다 문자 모양의 벽돌이 있으며 그 위, 아래는 무시무종문이 있다.

이런 장식은 중간에 동향하고 있는 작은 쪽문에서 끝나며 이후 서쪽 방향으로 계속 길이쌓기를 한, 별 무늬없는 담장으로 쭉 이어지다가 자경전 전체 영역의 서쪽 담장에서부터 다시 보인다. 문자는 자경전 영역의 동북문 서쪽부터 나타나며 ‘성(聖)’, ‘인(人)’, ‘도(道)’, ‘리(理)’이다.

서쪽 담장 안쪽을 보면, 대각선으로 만든 무늬틀과 귀갑문틀, 그리고 문자 벽돌들의 4방을 무시무종문이 마치 감싸는 것처럼 보이게 놓았으며 각 무늬 틀 사이마다 6개의 잎을 가진 작은 꽃을 넣었다.

그리고 각 틀 사이의 벽돌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안쪽 담장의 글자는 천(千), 귀(貴), 만(萬), 수(壽)이다.

그리고 이 담장의 진수는 바로 서쪽 담장의 외벽이다. 벽체 사이마다 흰 강회로 만든 사각형의 틀을 놓고 그 틀 안에 꽃과 나비,대나무, 국화와 석류, 모란 등의 문양을 집어넣었으며, 위 아래로는 벽돌로 무시무종문을 만들어 넣었다.

장식 틀 사이사이에는 역시 벽돌로 전서체 양식의 ‘낙(樂)’, ‘강(彊)’, ‘만(萬)’, ‘년(年)’, ‘장(張)’, ‘춘(春)’자와 만자문, 그리고 귀갑문과 격자무늬를 장식해 넣었다. 또한 귀갑문의 가운데와 격자무늬 사이에는 6개의 잎을 가진 작은 꽃을 넣었다.

각 담장의 글자들을 종합하면 ‘성인도리천귀만수낙강만년장춘(聖人道理千貴萬壽樂疆萬年張春)’이다. 즉 대비가 ‘성인(聖人)의 도리(道理)를 지키고 부귀(貴)하시며 만수무강(萬壽)하시고 즐거움(樂)과 정정함(彊, 春)을 오랫동안(萬年) 누리시라(張)’는 뜻이다.

신선의 세계를 재현한 자경전 서쪽 꽃담

자경전 뒷편 꽃담의 문자 문양

●신선의 세계를 재현한 자경전 꽃담

자경전은 임금을 낳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가 기거하는 집이기에 임금과 왕실 가족들은 이곳을 신선(神仙)이 사는 작은 세상처럼 가꾸어 대비의 무병장수(無病長壽)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축수했다.

잔잔하게 무거움을 풍기면서도 한 편으로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느낌을 주는 자경전(慈慶殿)은 이러한 염원을 반영하여 신선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상징물들을 꽃담에 아름답게 조형하여 대비의 존귀함과 함께 「조선궁궐(朝鮮宮闕)의 미학(美學)」을 대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경전 꽃담은 아름다운 그림과 문자들을 천연자료를 사용하여 정교하고 멋지게 상감 하여 한국의 전통적 정신세계를 포괄하여 표현하고 있다.

짙은 황토색 벽돌과 백색의 삼화토로 치장한 서쪽 외벽의 자경전 꽃담은 안팎을 화초와 문자, 기하학적 무늬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데, 대비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태극문양과 시작도 끝도 없어 영원함을 상징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무늬를 바탕으로, 신계(神界)의 여러 상징물들을 중심에 새겨 넣어 대비의 신성(神聖)함을 표현하였다.

①꽃담 문양 (1)-월매도(月梅圖)와 봄(春)

#왼쪽 그림-혹독한 추위를 물리치고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에 보름달이 걸쳐 있고 새 한 마리가

달 속에 고고하여, 신선들의 순결함과 향취를 높였다.

#오른쪽 문자-그림 옆의 전서체(篆書體) 글자 봄 춘(春)자는 고통 끝에 봄이 열리면서 기쁨과 신선함이

함께 시작됨을 강조하고 있다.

②꽃담 문양(2)-천도(신계의 복숭아)와 베풀 장(張)

#왼쪽 그림 - 신선이 먹는 신성한 과일인 천도(天桃)를 새겨 영생불사의 신선세계를 비유하였고,

#오른쪽 문자 - 그림 옆의 글자 베풀 장(張)자는 신선의 과일을 두루 나누어 영생을 모든 이와 함께 하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③꽃담 문양(3)-모란(牡丹)꽃과 무르익을 년(年)

#왼쪽 그림 - 하늘의 향기를 상징하는 모란은 농염한 절세미인을 상기시킨다.

#오른쪽 문자 - 그림 옆의 글자 무르익을 년(年)자는 미인을 덕스럽고 복 있는 여인으로 승화시키며 모란꽃

을 더욱 짙게 만든다.

④꽃담 문양(4)-석류(石榴)와 일만 만(萬)

#왼쪽 그림 - 석류는 껍질 속에 알맹이가 가득하고 신맛이 임산부의 구미에 맞아 백자장생(百子長生)의

다산을 상징한다.

#오른쪽 문자 - 그림 옆의 글자 일만 만(萬)자는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여 자손의 번성함을 강조하고 있다.

⑤꽃담 문양(5)-꽃과 나비

#오른쪽 그림- 아름다운 꽃 속의 꿀을 찾아 모여드는 나비의 모습은 남녀의 사랑과 결합(結合)을 상징한다.

#왼쪽 문자 -그림 옆의 글자 만(卍)자는 길상과 만덕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하며 사랑과 결합을 통해 자손

이 영원히 이어짐을 강조했다.

⑥꽃담 문양(6)-국화(菊花)와 굳셀 강(疆)

#왼쪽 그림 -국화(菊花)는 고결한 품격과 높은 절개를 상징이고 늦은 서리를 견디며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아 여인의 고귀함을 나타냈다.

#오른쪽 문자 -그림 옆의 글자 굳셀 강(疆)자는 국화의 절개를 더욱 높여주어 여인의 당당함을 표현하고

있다.

⑦꽃담 문양(7)-국화와 불교 마크(길상) 만(卍)

#왼쪽 그림 - 국화와 오른쪽 문자 만(卍)자가 결합하여, 여인의 고결하고 청초함이 영원히 이어질 것임을

강조했다.

⑧꽃담 문양(8)-대나무와 즐거울 낙(樂)

#오른쪽 그림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고 곧게 뻗어나가, 예로부터 군자(君子)의 표상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대나무는 늘 푸르름을 통해 곧은 한 길을 가는 불변(不變)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왼쪽 문자 - 그림 옆의 글자 즐거울 낙(樂)자는 불변의 근본을 의미한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景福宮 慈慶殿十長生 굴뚝), 보물 제 810호

자경전 십장생 굴뚝(景福宮 慈慶殿十長生 굴뚝), 보물 제 810호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태양·산· 구름·바위·소나무· 거북·사슴·학·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해·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 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景福宮 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십장생 굴뚝 상단 문양

자경전 십장생 굴뚝 '십장생도'

 

자경전 십장생 굴뚝 '십장생도 세부'

십장생 굴뚝 하단 문양

자경전 십장생 굴뚝 모서리의 박쥐문양,

박쥐는 중국어로 복자와 성이 같아 복을 부르는 동물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35. 대비의 수렴청정-단종이 수렴청정 받았다면 세조의 찬탈 가능했을까

수렴청정은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 혹은 왕대비(王大妃)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사진 pixabay]

 

 

왕비는 왕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배우자로서 내외명부(여성의 품계)를 다스리고 왕실 안주인으로의 역할 이외에는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이렇게 왕의 뒤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왕비가 정치 전면에 나서야하는 때가 있으니 바로 왕의 승하로 차기 왕권의 승계과정에서 후계를 지목해야 하는 순간 모든 결정권을 쥐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왕비는 왕 또는 상왕이 승하하고 나면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된다. 이때 왕위계승자로 세자가 결정이 돼 있는 경우 대왕대비는 옥새를 가지고 있다가 세자에게 대보를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옥새를 전달하는 의례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왕위 계승자에게 승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왕이 승하한 시점에서 후사가 없거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비는 다음 왕위를 이을 국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선왕이 후사 없이 승하해 직계승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대비의 승계 지명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이었다.

 

다음으로 대비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은 수렴청정으로 새 국왕이 친정을 펼칠 수 있는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수렴청정은 조선시대에 미성년의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혹은 왕대비가 발을 치고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제도이자 운영방식이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 이전 왕의 어머니가 대신 정치를 하는 섭정에서 변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국왕을 도와 국정을 의논하는 대왕대비가 발을 내리고(垂簾) 그 뒤에 있기 때문에 수렴청정이라고 했다. 수렴청정은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을 줄인 용어로, 말 그대로 발을 치고 함께 정치를 듣는다는 의미다.

발을 치는 이유는 조선이 남녀 간의 내외를 엄격히 구분하였던 유교 국가였기에 아무리 왕실의 어른이라 할지라도 남자 신하들과 얼굴을 마주보고 업무를 보는 것은 내외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지할 데 없었던 단종의 비극

영월군 영모전 단종 어진 (단종의 조각을 목상으로 새겼다가, 목상이 훼손되자 그림으로 그렸다. 1926년 이모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정조명으로 그려진 단종유배지8폭화첩'월중도'의 2폭 '청령포도'

단종은 병약한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단종이 어리기는 했지만 후대에 단종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보호받은 왕들이 친정을 펼친 나이를 생각하면 단종도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역량을 키워 성년 국왕이 되었다면 무난히 국정운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나이가 15세였고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영월에 귀양 가서 사약을 받은 때가 17세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냥 나이가 어린 왕이 왕위를 운영할 수 없어 찬탈 당했다는 현실은 극복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한 시점이나 더구나 죽임을 당한 나이가 이미 청년이 되었기 때문에 누군가 곁에서 단종을 도와 성년 왕으로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단종의 비극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가설이다.

 

부왕 문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단종에게는 어머니(현덕왕후)와 할머니(소헌왕후)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어린 왕을 도와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만약 소헌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고 단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다면 세조가 조카를 내치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진 못했을 것이다.

당시 단종을 양육한 서조모 혜빈 양씨가 있었지만, 세종의 후궁으로 뒤늦게 궁에 들어와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고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들이 의정부를 중심으로 정국 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에 야망을 품은 수양대군은 조카인 어린 임금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1453)을 일으켰고 영의정에 올라 직접 단종을 대신해 정무를 관장하며 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양대군에 의해 금성대군(세종의 6남)과 측근의 궁인, 신하들마저 유배와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극도의 압박을 느낀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조선 7대 국왕 세조 어진 초본,

1927년 이당 김은호 모사본.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세조 1년(1455) 윤 6월 11일 1번째기사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다.”

 

왕 자신의 실정이나 큰 과오가 없는 상황에서 왕위를 찬탈 당했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된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사례는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그 문제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세조는 재위 내내 죽음으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학사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세조는 이 성리학적 논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으로 성종 대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어린 왕을 보호하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은 그 당위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종(정희왕후), 명종(문정왕후), 선조(인순왕후), 순조(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고종(신정왕후 조씨) 등 6명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수렴청정을 받았고, 철종(순원왕후)은 19세의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왕족으로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하였기에 순원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한 경우다.

[출처] : 이향우 조각가 :<이향우의 궁궐가는 길> - 35. 대비의 수렴청정-단종이 수렴청정 받았다면 세조의 찬탈 가능했을까 / 중앙일보, 더, 오래 . 2021. 1. 31.

36.할머니 수렴청정 첫 테이프 끊은 성종대 정희왕후

조선 왕실 최초로 수렴청정했던 세조 비 정희왕후는 성종이 13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하고 왕이 20세 되었을 때 정치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수렴청정하던 대비는 왕이 성장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때 철렴(수렴청정을 거둠) 했다.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는 것을 ‘철렴환정(撤簾還政)’이라고 하며, 철렴이라 줄여서 지칭하는데 대왕대비는 철렴 이후에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명종이 12세에 즉위하자 20세가 될 때까지 9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큰 권력을 휘둘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정희왕후도 성종이 20세 될 때까지 수렴청정했으나 큰 비난이 없었다.

성종은 15세 이후 대다수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는데,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적 체제 속에 오히려 성종이 안정적인 시기에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기다려 준 정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는 동안 성종은 생모인 소혜왕후(인수대비)에 크게 의존했는데, 정치적 성향과 지식이 뛰어난 소혜왕후의 영향력으로 분란의 소지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 '옥중화'에서 배우 김미숙이 연기한 문정왕후. [사진 MBC '옥중화' 캡처]

명종이 승하한 후 선조가 16세에 즉위했지만 왕 수업을 받지 못해 명종 비 인순왕후가 8개월간 수렴청정을 했고, 영조 비 정순왕후는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다가 왕이 15세가 되는 해부터 친정하도록 하고 철렴하였다. 정순왕후는 철렴 후에 청정을 복귀하려고 시도했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시대에는 6명의 대비가 7회에 걸쳐 수렴청정했는데, 그중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는 헌종과 철종 대 2회에 걸쳐 수렴청정했다. 조선왕조 후기에는 국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는 일이 거듭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이어졌다.

순원왕후는 손자 헌종이 8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순조 대 정순왕후의 선례를 따라 7년간의 수렴청정을 한 후 철렴했다. 그런데 다시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강화도에 있는 전계군의 아들 원범(철종)을 왕위에 올리고 3년간의 수렴청정 후 철렴했다.

그러나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후사로 정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때 고종의 나이가 12세였기에 신정왕후는 왕이 15세가 될 때까지 4년간 수렴청정했다.

 

이렇듯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 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맡았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섭정을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주로 대왕대비의 몫이었다. 이는 즉위한 어린 왕과의 사적인 관계, 곧 할머니와 손자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대왕대비는 선선대왕의 왕비로서 어린 왕을 도와 국정을 분담하고, 왕을 성장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정국을 운영한 것이다.

 

순조 대에 반포된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은 대비의 정치참여 방식과 역할, 위상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왕대비는 왕이 정무를 보는 편전에서 발을 치고 5일마다, 한 달에 6번 정도 국정을 살피는 것으로 수렴청정이 시행되었으며 중요한 사안은 수시로 청대(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를 허락했다.

 

왕과 대비가 현안에 대한 보고를 함께 들은 뒤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대비가 하교를 내리기도 했고 왕이 대비에게 뜻을 묻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렴청정의 중요한 운영 원칙은 상소는 왕에게 직접 올려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국정 운영의 주체는 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왕은 이러한 업무처리를 통해 신하와 소통하면서 정치적인 역량을 키워갈 수 있게 한 조치였다.

 

수렴청정은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거나, 나이가 어리면서 왕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시행됐다.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선조 대 인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맡았다. [사진 pixabay]

 

수렴청정할 때, 왕과 대비의 위차(位次)는 대비가 높은 자리에 앉아 존숭되었다. 왕의 위치는 조선 전기에는 대비가 중앙에, 왕은 그 서쪽에 위치하다가 19세기에는 왕이 중앙에 위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나이가 어리지만, 국정운영의 주체는 국왕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충남대 임혜련 교수는 ‘수렴청정절목’ 제정에 대해

“선조 대 이래 200년이 지나 수렴청정이 다시 행해지면서 그사이 대리청정(代理聽政.세자, 세제, 세손이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행위)의 시행과 절목 제정의 영향을 받아 (수렴청정이) 제도적으로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조선에서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 대에 시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후사로 지명해 즉위하도록 했다.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나이는 4세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너무 어렸다 하더라도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을 제치고 13세의 성종이 즉위한 것은 정희왕후가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논의한 후 의지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즉위 후 신숙주 등이 대비(大妃)에게 같이 정사를 청단(聽斷. 송사를 자세히 듣고 판단함)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복이 적어서 이러한 자식의 흉사를 당했으므로, 별궁으로 나아가 스스로 보양하려고 한다. 더구나 나는 문자(文字)를 알지 못해서 정사를 청단하기가 어려운데, 사군(嗣君)의 어머니 수빈(粹嬪)은 글도 알고 또 사리(事理)도 알고 있으니, 이를 감당할 만하다” 고 했다.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수빈 한씨(소혜왕후)가 청정할 것을 권하였으나 소혜왕후는 왕의 어머니이긴 하지만 수렴청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렴청정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희왕후가 하게 되었고, 이것이 곧 조선의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지속하였다.

정희왕후는 초기 수렴청정의 격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때 발을 설치하지 않고 신하를 면대했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조선 시대 최초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의 형식으로 국정운영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예가 되었고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에 철렴을 하며 8년간 수렴청정을 마감했다.

[출처] : 이향우 조각가 :<이향우의 궁궐가는 길> - 36.할머니 수렴청정 첫 테이프 끊은 성종대 정희왕후 / 중앙일보, 더, 오래 . 2021.2. 14.

37.직접 수렴청정 결정한 조선의 악녀 문정왕후

조선시대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정 가문을 중심으로 외척이 국정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로 발전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사진 pixabay]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중종의 차남이었던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이 12세로 즉위했다. 문정왕후는 당시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고, 명종의 모후이며 대왕대비로서 스스로 전교를 내려 직접 수렴청정을 결정했다. 명종 즉위부터 20세가 될 때까지 9년에 걸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후대에 좋지 않은 예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문정왕후 수렴청정 시 집권한 소윤 일파는 매관매직, 토지탈점, 사 무역을 통한 부를 축적하는 등 경제 비리를 저질렀다. 또한 문정왕후가 시행한 숭불 정책은 조선의 유교적 질서를 흔들었고 철렴 이후에도 정치에 관여해 그로 인한 폐단이 심했다.

인순왕후의 수렴청정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 이칸희가 연기한 인순왕후. [사진 KBS]

 

명종이 재위 22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중종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이 즉위했다. 그가 곧 선조이다. 하성군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 安氏)가 낳은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 선조는 조선에서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닌 방계승통으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당시 16세로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왕위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즉위 초반 명종 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도움으로 국정을 처리했다. 조선시대 유일하게 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한 인순왕후는 8개월 후 철렴하고 선조는 17세가 되는 이듬해부터 친정에 들어갔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정조 24년(1800)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순조 3년(1803) 12월 28일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언교를 내리고 환정했다. ‘수렴청정절목’이 순조 대에 반포되어 대비의 정치참여 방식이 체계화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제도적으로 완비된 ‘수렴청정절목’을 준수해 정국을 운영함으로써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의 공백을 메우고, 이후 친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선왕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정조연간의 정치를 되돌리는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고, 또 신유사옥을 통해 남인과 종친·외척을 탄압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순조 즉위 시 대왕대비께 수렴청정 청하다

“…대왕대비를 모시고 수렴청정의 예를 희정당에서 행하였는데,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송조(宋朝)의 선인태후(宣仁太后)) 와 국조(國朝)의 정희 성모(貞熹聖母) 의 고사에 의거하여 대왕대비가 수렴하고 함께 청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복합하여 일곱 번 청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못하여 허락하였다.

대왕대비가 적의(翟衣)를 갖추고 희정당으로 나아와서 동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고 전영(前楹:기둥 앞)에 수렴하니, 임금이 전정(殿庭: 뜰)에 나아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올린 다음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발을 드리운 바깥쪽에 서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

TV드라마 '철인왕후'에서 배우 배종옥이 연기한 순원왕후. [사진 tvN]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순원왕후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렴청정을 두 번 한 인물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왕조는 연이어 어린 왕, 혹은 왕위를 계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국왕이 즉위하면서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지속해 시행되었다. 순조가 재위 34년 만에 승하하고 8세의 세손 헌종이 즉위하자 7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그러나 다시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에는 직계로서 왕위를 이을 종친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으로 강화에 있던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元範)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헌종 15년(1849) 6월 6일 대왕대비가 이원범을 종사의 부탁으로 삼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 전계군)의 셋째 아들이다”라고 하였다.

 

철종은 순조 31년(1831)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강화도에서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의 군호도 받지 못했다.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恩彦君)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신유사옥 때 강화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은언군의 서자인 철종의 아버지 전계군(全溪君)은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양으로 불려온 철종은 헌종이 승하한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이때 철종은 19세였음에도 관례도 치르지 않았고 왕이 될 수업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순원왕후는 다시 3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은 하되 국정 사안에 대해서는 철종이 직접 하교토록 했다.

 

그러나 2대에 걸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야기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은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이 문란해졌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TV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채수빈이 연기한 신정왕후. [사진 KBS]

 

순원왕후가 승하하면서 신정왕후가 대왕대비가 되었다. 드디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신정왕후는 철종 14년(1863) 12월 8일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어전에 발을 치고 신료들과 대면한 다음 언문교서를 통해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을 철종의 후사로 정한다는 전격적인 발표를 했다.

신정왕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왕위 계승권자로 지명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철퇴를 맞았다. 고종의 나이가 12세였기에 신정왕후는 왕이 15세가 될 때까지 4년간 수렴청정했다.

 

조선시대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의 친정 가문을 중심으로 외척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세도정치로 발전했다는 비난을 피해 갈 수 없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인한 각종 폐단이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경주 김문 외척들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순원왕후가 헌종과 철종 대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를 야기했다.

신정왕후는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제공하는 빌미가 되었고, 이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난 뒤로도 대원군의 섭정이 무려 고종 10년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후 조선은 쇄국으로 외부와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점차 국력이 쇠락하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조선시대 수렴청정 체제는 국정을 운영하는 측면에서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였고 이를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어린 국왕이 성장할 때까지 국정을 도운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수렴청정은 일정 기간이 지나 왕이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판단할 때 철렴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왕권을 위협하는 불안이 없었던 점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수렴청정은 대왕대비가 어린 국왕을 도와 왕조의 체제를 유지하고 왕의 정치적 능력을 함양시킬 수 있었던 정치적 보완 제도로 정착됐던 것이다.

[출처] : 이향우 조각가 :<이향우의 궁궐가는 길> - 37.직접 수렴청정 결정한 조선의 악녀 문정왕후 / 중앙일보, 더, 오래 . 2021. 2. 28.

38.문종 세자빈 2명 생별, 1명 사별…자선당의 비극

조선시대의 왕세자의 정당으로 동궁이라 불린 건물은 경복궁의 자선당, 창덕궁의 중희당, 창경궁의 시민당이 있었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왕 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고 세자로서의 업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초기 동궁에 관한 기록으로는 태종 18년(1418) 6월 세자익위사를 따로 설치한 걸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는 왕위 계승의 제1순위에 있는 왕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왕세자의 자리는 왕비가 낳은 왕의 적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며 경칭은 저하(邸下)다. 다른 말로는 동궁(東宮), 춘궁(春宮),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이 있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東宮殿)이다. 궁궐의 동쪽에 지은 동궁(東宮)은 왕세자가 거처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왕세자의 집을 동쪽에 지은 이유는 동쪽의 개념이 봄을 상징하고 만물은 봄에 소생하기 때문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의 공간을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생명력이 가장 강한 동쪽 방위에 두어, 그 기운을 이어가게 하려 했음이다. 예를 들면 세자 책봉례를 봄에 하는 것도 생명의 기운이 작동하는 계절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동궁 권역은 세자를 제왕으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 포진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동궁에는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 세자궁에 딸린 내관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부터 조하를 받는 조당이 포함된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이나 시강 등의 강학을 받는 교육장과 세자를 위한 책고와 세자를 호의하는 시설 등이 있다.

경복궁의 동궁전은 근정전과 사정전의 동편에 있고 그 영역은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고 비현각은 세자의 집무공간이다.

동궁전 앞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春坊))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계방(桂坊))가 있어 세자를 다음 왕위를 이어갈 재목으로 키워갔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이다.

[사진 Rheo1905 on Wikimedia Commons]

집의 이름 ‘자선(資善)’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문종이 20여 년간 세자노릇을 했고 1441년에는 단종이 태어났다.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세종 23년 7월 23일 자선당에서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죽었다.

만약 현덕왕후 권씨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다면 세조의 왕위찬탈과 같은 비극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고종 25년(1888) 경복궁 중건 후에는 고종의 왕세자 순종이 자선당에서 거처했다.

 

“자선당(資善堂) 안의 행랑 전각 남쪽문은 중광문(重光門), 북쪽문은 육덕문(毓德門), 바깥 행랑 전각의 남쪽문은 이극문(貳極門)이다. 비현각(丕顯閣)의 남쪽문을 이모문(詒謨門)이다.”

 

세종은 세자 문종이 자선당에 살면서 여러 불행한 일을 겪고 더구나 세자빈이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죽자 그 다음 날 세자의 거처를 자선당으로 그대로 둘 것인지, 다른 곳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신료들과 의논했다.

 

◆세종 23년(1441) 7월 25일 3번째기사

자선당 밖에 한 궁을 따로 지어 세자를 살게 하다

임금이 승정원에게 이르기를

“궁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거처하는 궁에서 생별(生別)한 빈(嬪)이 둘이고, 사별(死別)한 빈이 하나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헐어 버려 다시 거기에 거처하지 말게 하자고 한다.

하물며 동궁(東宮)은 다른 곳에 비할 것이 아니니 진실로 헐어 버릴 수 없고, 세자가 또 궁성(宮城) 밖에 거처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궁우(宮宇)가 얕고 드러나서 거처하기에 마땅치 아니하므로, 자선당(資善堂) 밖에다 따로 한 궁(宮)을 지어서 살게 하려고 하니, 의논하여 아뢰라”하니…

 

세종 대에 처음 지었을 당시의 자선당은 고종대에 지은 자선당의 규모와는 상당 부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승화당(承華堂)과 같이 동궁영역에 있던 자선당은 세종이 신료들을 불러 정사를 논하고 가끔 마당에서 구기를 즐기던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왕세자는 자선당에서 새해 정월 초 백관들로부터 하의(賀儀)를 받고 생신 하례(賀禮)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세자 문종이 처소로 사용하던 자선당에서의 불행이 계속되자 세종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문종이 머물 처소를 따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건강이 나빠지자 세자 문종으로 하여금 대리 업무를 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자선당과 승화당은 왕이 임어하는 처소이므로 왕세자 문종이 자선당 임금의 위치에서 남면(南面)할 수 없으니, 동궁 정문에서 남면해 앉고 1품 이하는 뜰아래에서 재배(再拜)하고 세자는 답배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세종 25년 4월 20일).

그리고 왕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회 받을 집을 동문 건춘문 안에 짓고, 이름을 ‘계조당(繼照堂)’이라 불렀다. 문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계조당에서 신하들의 조참을 받고 일본국 사신을 맞이하였으며 승화당에서 정사를 보았다.

고종실록에는 이를 두고

“세종 대에 동궁의 전각으로 자선당과 승화당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임어하시므로 다시 계조당을 세우고 왕세자가 하례를 받는 전각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단종 즉위년에 문종의 뜻을 따라 계조당을 철거한 뒤 복구하지 않았다. 계조당이 대리청정 업무를 위한 왕세자의 조당으로 사용한 집으로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계조당의 용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종이 승하하자 단종은 자선당을 수리해 혼전으로 삼았다. 1개월 뒤 다시 먼저 승하한 현덕왕후의 신주를 자선당으로 옮겨와 왕과 왕후의 혼전으로 삼고 경희전(景禧殿)이라 이름 붙였다.

 

계조당 복원계획

일제시대 수탈됐던 경복궁의 자선당. [중앙포토]

 

◆ 단종 즉위년(1452) 6월 20일 2번째기사

현덕 왕후의 신주를 자선당에 옮겨 봉안하고 경희전으로 칭하게 하다

처음에 현덕 왕후(顯德王后) 혼전(魂殿)을 경희전(景禧殿)이라 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계입(啓入)하기를 “대행 대왕 반혼(返魂) 우제(虞祭) 후에 현덕 왕후의 신주를 또한 자선당(慈善堂)에 옮겨 봉안하고 인하여 경희전이라 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제란 상례 때에 장사를 치르고 곧 지내는 제사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가 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을 고종 5년(1868)에 중건하면서 자선당의 동궁 영역도 중건되었고 이때 계조당도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계조당은 여러 행사 때 왕세자가 축하를 받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891년 계조당을 변형하여 다시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궐도형이나 경복궁 평면도에 보이는 계조당은 문을 제외하고 칸의 용도를 적지 않았으며, 1907년 당시 계조당이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행각은 헐리고 없어졌다.

계조당은 신하가 왕세자에게 조하를 드리고 진찬을 여는 등 동궁의 정당(正堂)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조선 왕조의 권위와 후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를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다.

 

이처럼 고종 대의 자선당 일곽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 되었다가 자선당(資善堂:왕세자와 왕세자빈의 거처)과 비현각(丕顯閣:왕세자의 집무실) 만이 1999년 복원되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22년까지 경복궁 계조당을 복원하여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 권역의 기본 궁제를 복원할 계획이다

[출처] : 이향우 조각가 :<이향우의 궁궐가는 길> - 38.문종 세자빈 2명 생별, 1명 사별…자선당의 비극 / 중앙일보, 더, 오래 . 2021. 2. 28.

[출처] ▣경복궁 자경전, ▣대비의 수렴청정-정희왕후·문정왕후, ▣세조의 찬탈, ▣문종 세자빈 [궁궐가는 길Ⅴ]|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