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추경』,『어진』,『호산청일기』,『징비록』,『임하필기』,『월정만필』,
『』,『』,『』,『』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Ⅰ http://blog.naver.com/ohyh45/220963177781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Ⅱ https://blog.naver.com/ohyh45/221046663165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Ⅳ http://blog.naver.com/ohyh45/221208438065
31. 사도세자를 미치게 한 도교의 주문 '옥추경'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혜경궁은 그의 저서 '한중록'에서 "후인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누가 그 사건을 나만큼 잘 알까"라면서 "사도세자가 병환으로 천성을 잃어 스스로 하는 일을 몰랐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한 일에 어찌 터럭만 한 과실조차 있다 할 것인가"라고 밝힌다.
'한중록'은 혜경궁이 61세부터 72세까지 쓴 '나의 일생' '내 남편 사도세자' '친청을 위한 변명' 등 세 차례에 걸친 회고가 합쳐진 책이다. 글은 친정 식구 또는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집필됐다. 책은 혜경궁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뒤돌아보고 비판하고 분석한다.
1762년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사건)의 단초가 된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아들을 호학군주로 키우려던 영조의 과욕이 불러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혜경궁은 다른 요인도 제시한다. 세자는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는 유희를 더 즐기고 활쏘기, 칼 쓰기, 기예에 집중했다. 그림 그리기로 날을 보냈고 딱딱한 경전을 멀리하고 기도나 주문서, 잡서를 좋아했다.
세자의 병환은 종이에 물이 젖어 번져 나가듯 깊어져 갔다. 영조에게 문안 인사하는 것도 드물어지고 수업을 못하는 날도 많아졌다. 영조의 질책도 더 잦아지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두려움은 공포의 수준이 됐다. 영조도 편집증 환자였다. 사람을 한 번 미워하면 집요하게 싫어했다.
세자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희한한 병도 앓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 입기를 고통스러워하는 강박증이다. 혜경궁은 "옷을 한 번 입으려면 열 벌이나 20~30벌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며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을 위하여 불태우기도 했다"고 했다. 1759년과 1760년 사이에 군복을 지어 없앤 비단이 몇 상자인줄 모른다고 했다.
마음을 의지했던 정성왕후, 인원왕후가 같은 해 승하하자 세자의 증상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 해 6월 화증이 더하여 사람 죽이기를 시작했다. 내시 김한채를 죽여서 그 머리를 잘라 들고 다니면서 내인들에게 둘러보였다. 혜경궁은 "내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흉하고 놀랍기 이를 것이 있으리요"라고 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때 짐승이라도 죽여야 화가 삭았다. 혜경궁은 "하루는 전하께서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세자를 직접 찾아 한 일을 바로 아뢰라고 다그쳤다"고 했다. 세자는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이거나 해야 마음이 낫더이다"라며 "상감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하오이다"라고 실토했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조선 후기의 문신 박하원이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온다. 그 숫자는 놀랍게도 100명이 넘는다. 책에는 "영조가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100여 명에 이르며 (불로 달군 쇠로 지져 죽이는) 낙형이 참혹했다고 발표했다"고 쓰여 있다.
세자는 궁궐 내인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으면 무차별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혜경궁은 "내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른 다음에도 가까이 하시니 뉘 좋아하리오"라고 기술했다. 1757년 9월에는 인원왕후 침방 내인 빙애를 데려다가 방을 꾸며 살게 했다.
사도세자는 병세가 악화되던 1761년 귀인 박씨도 죽였다. 1761년 정월 세자는 궁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갑아 입다가 의대증이 발발했다. 이때 옷 시중을 귀인 박씨가 들고 있었다. 세자는 귀인 박씨를 마구 때린 뒤 그냥 궁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세자는 1762년 윤 5월 13일 아버지의 명령을 뒤주에 갇힌 지 7일 만인 윤 5월 20일에 사망한다. 혜경궁은 "오후 3시쯤 폭우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세자가 천둥을 두려워하시니 이 무렵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혜경궁 홍씨(1735~1815)=영조 11년 태어나 손자인 순조 15년 81세로 사망했다. 대표적 노론 명문가인 남양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홍봉한이다. 10세 때 동갑인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정조를 포함해 2남2녀를 뒀다. 남편이 뒤주에 죽을 때는 28세였다. 사도세자 사후 영조의 배려로 궁에서 살았으며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 칭호를 받았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32. 1900년 역대 임금 초상화가 불타다... 망연자실한 고종의 지시는?
▲ 어진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영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900년(광무 4) 10월 한밤중에 경운궁(덕수궁)에 화재가 발생해 선원전이 소실됐다. 선원전은 역대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을 모셔두던 건물이다.
선원전이 불타면서 이곳에 있던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헌종의 아버지), 헌종 등 7대의 영정이 함께 화마에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효종이 심양에서 입고 있던 홍전 및 마고자, 역대 임금들의 필적 등 옛 자취들이 모두 화재의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재의 원인은 실화나 방화는 아니었다. 사고의 전말을 보고받은 고종황제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온 신하들에게 "향을 올리지 않았고 또한 진전(眞殿, 어진을 모신 건물)에 어찌 잡스러운 사람이 왕래를 했겠느냐"라며 "갑자기 동북 변두리에서 불이 하늘로 치솟더니 삽시간에 불길이 전각에까지 번져서 끌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말로 미뤄 산불이나 민가에서 일어난 불이 바람을 타고 대궐로 번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황제는 "마음 졸이며 당황하던 중에 매우 중요한 임금님의 영정을 미처 꺼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1901년 발간된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 의궤는 조선 최후의 영정모사도감의궤다. 조선 전기 어진들은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임금이 떠난 서울도성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이어진다.
조선 중기 문신 이기는 "피란 가는 임금의 수레가 성문을 막 나섰고 왜적은 도성에 들어오기도 전에 성 안 사람들은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던 창고를 탈취했다. 그로도 모자라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세 궁궐과 6부, 크고 작은 관청에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 한 달이 넘도록 화재가 이어졌다"며 "백성들의 마음은 흉적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다"고 참담함을 전했다. 궁궐이 전소되고 그 안에 있던 세종대왕 등 조선 전기 임금들의 초상화도 전부 없어졌다.
다만, 태조 사당인 경주 집경전, 영흥 준원전, 전주 경기전에 보관한 태조 어진 3건과 세조 사당인 광릉 봉선사 봉선전에 봉안된 세조 어진 1건만 전해졌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어진과 진전 제도의 정비가 본격화됐다.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은 어진을 실제 임금처럼 떠받들었다. 선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의례를 지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군신 간의 위계질서를 재확인하려고 했다.
영·정조 대에 와서 매우 빈번하게 어진을 그린다. 영조 대에 도감을 둬 주기적으로 어진을 도사했으며 정조 대에도 규장각을 통해 어진을 그리게 했다.
고종은 선원전 화재 이후 도감(都監, 임시관아)을 설치해 선원전을 중건하고 영정을 모사(模寫)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도록 명했다.
고종은 "역대 임금들의 전해 내려오던 자취가 오늘에 이르러 모두 잿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오직 나의 덕이 부족하고 조상을 받들고 효성에 힘을 쏟지 못하여 이런 화재 사건이 있게 되었으니 망극하고 애통한 심정은 더욱 절실하다"면서 조칙을 통해 "영정을 이모하는 일과 건물을 중건하는 일은 매우 경건하고 중요한 일인 만큼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며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된다. 공사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은 절대로 안일하게 허송세월하지 말고 온 정성을 다해 공사를 감독하여 어서 빨리 완성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도감의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의정부 의정(정승) 윤용선이 맡았으며 영정모사는 1900년 12월 본격 착수됐다. 7대 임금의 영정 제작에는 소요비용 110만1960냥, 기간만 9개월이 넘는 유례없는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화원(왕실 화가)도 40명 넘게 동원됐다.
화원은 각기 역할이 다 달랐다. 그들의 역할은 주관(主管), 동참(同參), 수종(隨從)으로 나뉘었다. 주관화사는 비단에 선을 긋는 작업을 하며 그들이 형체를 그리고 나면 동참화사는 채색과정을 담당한다. 수종화사는 그 외의 잡일을 수행했다.
영정모사도감의궤에 참여했던 대표적 주관화사로는 박용기, 박용훈 형제와 조석진, 채용신을 들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영조 어진은 조석진과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이와 함께 영정 제작 전 과정을 담은 기록물을 펴냈는데 이 책이 바로 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의궤는 여러 영정의궤 중에서 가장 정제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진전중건과 함께 동시에 진행된 영정모사와 관련된 각종 의례와 절차, 그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의장과 물품에 대한 내용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조선왕조 어진 모사의 마지막 표준 지침서인 셈이다.
의궤는 총 7질을 발간해 규장각, 시강원, 선원전, 비서원, 의정부, 장례원, 강화사고에 각각 1질씩 나눠 보관했다. 이 가운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총 4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총 2질을 갖고 있다. 강화사고본은 일본이 가져가 국내청에 보관하다가 2011년 되돌려줘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태조 어진을 그리기 위해 조정에서 관리들을 파견해 함경남도 준원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을 경운궁 흥덕전으로 모셔왔다. 그 과정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행렬은 호위단과 군악대를 갖춰 대규모로 꾸려졌고 또한 어진이 가는 도로와 교량을 정비했으며 길 위에는 황토를 깔았다.
이런 경우 과거에는 대개 하급 관리들이 경유지에서 음식과 술을 대접받아 민폐를 끼치는 가렴주구로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빈번했다. 고종은 이 같은 행위를 철저하게 금지하고 특별히 모든 비용은 도감에서 수요를 파악해 내리도록 했다.
숙종과 순조 어진은 영희전에서, 영조는 냉천정에서, 정조와 문조, 헌종은 평락정에서 각각 가져와 그렸다. 영희전은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 등 6명의 어진을 모셨던 전각으로, 서울중부경찰서 자리에 있었다. 냉천정은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 내 건물이며 평락정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사당 내 건물이다. 어진이 도착할 때마다 황제가 친히 나가 극진한 예로 맞았다.
고종이 이처럼 역대 선조의 어진 제작에 공을 들인 이유는 뭘까. 고종은 3년 전인 1897년 10월 12일 황제대관식을 올리고 대한제국을 공식 선포했다. 하지만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였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었다.
이 와중에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모조리 화재로 소실된 것이었다. 화재사고 소식을 접한 고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이처럼 큰 사태가 없었다"고 망연자실했다.
고종은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상징화 작업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정모사는 그 어떤 상징화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매우 엄중한 절차를 밟아 영정모사를 진행했다.
화재로 불타 버린 기존 선원전 자리는 터가 협소하다며 1901년 7월 현 덕수궁 인근 영성문 안 서쪽 땅(옛 경기여고 터)에 새로운 선원전을 지었다. 완성된 어진은 이곳으로 모두 모셨다.
▲ 세조 어진 초본(일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 선원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빈 건물이 된다. 어진들은 1907년 도성 내외로 흩어진 모든 어진을 한 곳에 보관하는 내용의 칙령에 의해 창덕궁 선원전으로 다시 옮겨지게 된 것이다. 고종이 마지막으로 모사한 7대 임금 어진과 함께 당시까지 남아있던 세조, 원종(인조의 아버지) 어진, 연잉군(영조의 왕자 시절) 초상 등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있던 어진들이 모두 창덕궁에 모였다.
창덕궁 선원전 어진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피난가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 창고에 다른 조선왕실유물과 함께 보관됐다. 그러다가 1954년 성탄절 다음날인 12월 26일 발생한 대화재로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잿더미 속에서 영조, 연잉군, 철종, 원종 어진만 겨우 수습했다. 망국의 어진이어서 그런지 그 운명이 참으로 얄궂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33.『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무수리 출신 어머니 둔 영조 출생기록 보며 감회에 젖다
"새벽 5시에 최숙의가 남자 아기씨를 생산하였습니다. 아기씨가 젖을 토하고 숨이 막히는 증세가 심해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부득이 우황과 대나무 태운 즙을 젖꼭지에 발라 삼키게 하니 진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모범적인 군주로 꼽히는 조선 21대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비상한 정치능력으로 정국을 안정시켰고 또한 사회, 경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함으로써 민심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의 시작은 미약했다. 영조의 어머니 최숙의(후일 최숙빈)는 궁중에서 가장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 최씨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7세 남짓한 어린 나이에 대궐로 들어왔다. 그녀는 숙종에게 승은을 입기까지 15년 동안 궐내에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영조는 왕자 시절 어머니를 찾아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중누비, 오목 누비, 납작 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고 최씨가 대답했다. 영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조는 어머니 말을 듣고난 후 평생 누비옷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가 노론세력의 지원으로 어렵게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모가 미천해 영조는 숙종의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가 돼야만 했다. 영빈 김씨는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의 5촌 조카였고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노론이 영조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서 왕실의 출산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원자에게 달려 있어 어느 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왕자의 탄생은 왕실과 왕실 주위 신료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조선은 왕자 중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전체 27왕 가운데 이런 원칙이 지켜진 경우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7대에 불과하다.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되지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은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닌데도 왕위에 오른 경우는 태조를 제외하고 19명이나 된다.
조선은 국왕의 혼인을 비롯해 세자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실록이나 일기, 등록, 의궤 등으로 제작한 '기록물의 왕국' 조선은 왕자의 탄생 과정까지 세세히 적었다.
대체로 출산예정일 두 달 전 왕비나 빈궁은 산실청, 후궁은 호산청을 각각 설치해 출산을 도왔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간 단위로 일기에 담았다. 이를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라고 한다. 현전하는 호산청일기는 숙빈 최씨의 영조를 포함한 세 아들 출산 과정을 서술한 '호산청일기', 고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가 영친왕을 낳는 과정을 쓴 '정유년 호산청소일기'가 있다.
영조는 숙종의 네 번째 아들이다. 세 번째 아들도 숙빈 최씨가 낳았지만 채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영조도 처음에는 젖을 소화시키지 못해 계속 토하고 숨까지 제대로 쉬지 못해 위태로웠다. 영조마저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가슴을 졸였다. 의관 김유현을 불러 우황 등을 처방하자 천만다행으로 영조의 상태가 안정을 되찾아 젖을 잘 빨고 잠도 평안하게 잤다.
숙종은 이런 김유현을 크게 신임했다. 1701년(숙종 27) 실록에서 숙종은 "나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자는 김유현뿐"이라고 했으며 말년에 건강이 크게 나빠진 후에도 "김유현이 오기를 기다려 진찰한 후에 상의해 약을 지으라"고 말할 정도였다.
최숙의는 영조를 해산한 뒤 건강했다. 하루에 화반곽탕을 7번씩 잘 먹었다. 화반곽탕은 해물을 넣어 끓인 미역국에 밥을 만 음식을 말한다. 그리고 아픈 곳 하나 없이 몸 상태도 좋았다.
출산한 지 사흘째 되는 9월 15일 길시를 택해 산모가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 최숙의는 쑥탕에 몸을 씻었고 아기씨는 매화나무뿌리, 복숭아나무뿌리, 오얏나무뿌리, 호두를 달인 물에 돼지 쓸개를 타서 목욕시켰다.
목욕하는 날 태를 씻는 세태식도 행해졌다. 태는 길한 방향에서 물을 길어와 100번 씻은 뒤 술로 다시 세척해 백자 항아리에 밀봉했다. 항아리 전면에 '강희 33년 9월 13에 최숙의방에서 해산한 남자아기씨 태'라고 썼다. 9월 18일 영조는 눈을 떠 곁눈질을 했다고 호산청일기를 적었다.
신생아의 안녕과 복을 비는 행사인 권초제(捲草祭)는 7일째 되는 19일 진시(오전 7~9시)로 정해졌다. 산실문 밖에 큰 상을 차려 그 위에 쌀, 비단, 은을 올려놓고 권초제를 주관하는 권초관이 절을 했다. 권초관은 마지막으로 해산할 때 깔았던 거적을 걷어 붉은 보자기에 싸서 권초각에 옮겨 보관했다.
천한 궁녀의 몸에서 태어나 왕세제가 되고 이복형인 경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른 행운아 영조는 그래서 생모 숙빈 최씨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다. 영조는 70세가 되던 해 이 호산청일기를 직접 열람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탄생했던 정황이 기술된 일기를 보면서 감동했다. 영조는 "아, 칠순이 되는 9월에 우연히 일기를 얻어보게 되었다. 육상궁(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가서 배알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무척 새롭구나"라고 감회에 젖었다고 승정원일기는 전한다. 영조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일기를 찾아서 보았다.
영조의 호산청일기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왕자가 태어나면 7일 동안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가 이뤄진다. 이 기간이 산모와 신생아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다. 그다음은 비교적 안심할 수 있다. 산실청도 7일이 지나면 해체했다.
호산청에 관여했던 관리나 내관, 의관·의녀, 장인 등에게는 감사의 표시로 술을 대접하는 동시에 호피, 무명 등 각종 선물을 내렸다.
조선 26대 고종의 7번째 아들 영친왕 이은은 1897년(광무 원년) 9월 25일 출생했다. 상궁 엄씨(1854~1911)가 경운궁의 숙옹재에서 영친왕을 생산했다고 '정유년 호산청소일기'는 전한다. 상궁 엄씨는 188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된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의 시중을 들다가 승은을 입어 영친왕을 임신했다.
엄씨는 8세 때 궁궐로 들어 왔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 반란군을 피해 달아나 실종된 사이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해 지밀상궁이 됐다.
1885년 32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돼 궁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고종은 같은 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 5일 만에 엄씨를 궁궐로 불러들였다. 영친왕이 태어난 다음날 일기는 "엄씨는 분만한 뒤 평안하여 화반곽탕을 세 번 들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씨도 젖을 잘 빨고 대변을 보았으며 숨도 잘 쉬고 있습니다"고 서술했다.
고종은 엄씨를 총애하는 데다 그녀가 아들까지 낳아주자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출산 3일째 되는 날 정5품 상궁에서 무려 7단계나 품계를 높여 종1품 귀인에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한다. 귀인은 왕비와 빈 다음의 내명부 세 번째 품계이다. 그리고 일기에서 그녀를 호칭할때 성을 쓰지 않고 귀인으로만 부르도록 했다.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는 전례와 동일하게 진행됐다.
엄씨는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품계가 높아졌고 나중에는 귀비에 봉해졌다. 엄 귀비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영친왕을 가진 만큼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1899년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에 막대한 액수의 시주를 해 극락보전과 독성각을 중창하고 아들의 만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34.유성룡의『징비록』-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들은 겁쟁이에 무능력자였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이 겪은 국가적 환란 중에서도 인적·물적 피해가 가장 막대했다. 사전에 무수한 침략 징조가 있었지만 조선이 무시해버려 비극을 자초한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이와 달리 조선조정은 조선반도를 침략하려는 일본의 속셈을 정확히 알았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의 보고가 상반됐지만 대비할 필요성을 정확히 인식했다.
남부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삼도의 방어를 맡겨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축조하도록 했다. 경상도에는 많은 성을 쌓고 영천, 청도, 합천,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 등지에도 병영까지 신축하거나 고치도록 했다. 그런데 모두가 너무 오랜 평화에 길들여져 있었다.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태평 시대에 당치 않게 성을 쌓느냐는 상소가 빗발쳤고 홍문관도 공사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병법의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법 등의 정비는 논의조차 못했다. 재상 유성룡은 유사시 각 향촌에서 군사를 군사 거점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법'의 폐단을 지적했다.
군사들이 모여 있더라도 지휘관이 내려오기 전 적의 공격을 받게 되면 지리멸렬하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각 지역 수령에게 군사통제권을 부여해 적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래전부터 시행해 오던 체제를 바꾸기는 힘들다"는 반론에 부딪혀 유성룡의 제안은 폐기됐다.
마지막 일본 사신인 요시토시가 조선에 왔다가 돌아간 뒤 부산포에 머물던 왜인들이 모두 사라졌다. 결국 1592년 4월 13일 왜의 대군이 부산에 들이닥쳤다.
▲ 동래부사 송상현 교지. 영조 17년(1741) 종일품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했다. 무인들이 도망가는 동안 평생 제대로 칼을 잡아본 적도 없는 문신 송상현이 적들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죽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전면에서 지휘하고 수습한 서애 유성룡이 저술한 전쟁 백서다. 임란 전 국내외 정세부터 전쟁의 실상, 전후 상황까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술한다. 한반도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19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한다. 오랜 내전으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데다 조총까지 들고있는 일본군에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국경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은 하나같이 겁쟁이에다 무능력자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경상 좌수사 박홍, 밀양부사 박진, 김해부사 서예원, 순찰사 김수는 적의 규모에 겁먹고 앞다퉈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많은 배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멀리서 왜군이 부산으로 상륙하는 것을 쳐다볼 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산포 첨사 정발은 절영도(영도)에서 사냥 도중 급히 성으로 복귀해 적을 맞다가 죽었다. 다대포 첨사였던 윤흥신은 노비 출신이었으나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평생 글만 읽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루에서 반나절 동안 고군분투하다가 왜적의 칼에 찔려 장렬하게 숨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용궁현감 우복룡은 병마절도사 소속 군사 수백 명을 반란군이라며 몰아세워 살육했다. 군사들은 병마절도사의 공문을 내보였지만 소용없었다. 우복룡은 그 공로로 안동부사 자리를 받았다.
학살당한 가족들은 원통한 사정을 울음으로 호소했다. 경상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총사령관 신립은 충주에서 적군이 근접했다고 보고하는 군관들을 "망령된 보고로 동요시킨다"며 목을 베어 죽였다. 이미 적들은 턱밑에까지 와 있었고 적의 급습에 우왕좌왕하다가 몰살당했다.
처음에는 선조도 도성을 사수하려고 했다. 각 동네 주민, 천민, 말단 관리, 의원을 끌어 모아 성첩(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지키게 했다. 도성의 성첩은 모두 3만명이었으나 동원된 인원은 7000명이었다.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모두 도망갈 궁리만 했다. 지방에서 뽑혀온 군사들도 병조에 소속은 돼 있었지만 말단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선조는 신립이 무너졌다는 전갈을 받자 4월 30일 한밤중에 도성을 빠져나갔다. 왕이 무악재 고개에 닿을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유성룡이 머리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내 커다란 창고에 불이나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오후 8시께가 돼 파주 동파역에 닿자 파주목에서 임금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했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호위병들이 주방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나중에는 임금에게 올릴 음식조차 없게 되자 파주목사와 장단 부사는 처벌을 두려워해 그대로 도주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왜군은 여주에서 한강을 건너려다 강원조방장 원호의 공격을 받아 며칠째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강원 순찰사 유영길이 그런 원호를 불러 강원도로 돌아가 버렸다. 강을 지키는 군사는 사라졌다. 적들은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에서 물살에 휩쓸려 많은 왜적이 수장됐다. 왜군은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다 건너왔다. 손쉽게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팔도도원수 김명원의 부장 신각은 양주에서 민가를 약탈하던 적병 60명의 목을 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첫 승전고였다. 상관인 김명원은 장계를 올려 "신각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무고해 신각은 참형을 당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받들던 종묘 신주를 놔두고 달아나는 일도 발생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종묘 신주를 개성 목청천에 뒀는데 왜군이 서울로 밀어닥치자 다급한 나머지 신주 챙기는 일을 모두 깜박했다. 종실의 한 사람이 울면서 "신주를 적의 수중에 둘 수는 없다"고 고했다. 사람을 개성에 보내 밤을 세워 신주를 모셔왔다.
평양에서도 강물이 왜군의 발목을 잡았다. 적이 대동강을 건너오는 동안 화살을 쏘는 전략이 먹혔다. 날이 가물어 강물이 나날이 메말라갔다. 나라에서는 재신들을 여럿으로 나눠 단군사당, 기자사당, 동명왕 사당에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야속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적군은 수심이 비교적 얕은 왕성탄 쪽으로 건너왔다. 평양성은 이미 임금과 병사, 백성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 빈 성이 있다. 성안에 식량난을 대비해 세금으로 거둔 곡식 10만석을 옮겨 놓았다. 식량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평양성이 함락되자 의주로 피난 간 선조는 다급해졌다. 중국에 사신을 연이어 파견해 사태의 위급성을 알리고 구원병을 요청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마당에 중국에 나라를 바쳐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임금이 국토의 북쪽 끝에서 중국만 쳐다보고 있는 사이 이름 없는 영웅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김제군수 정담과 해남현감 변응정은 전주로 들어오는 왜군을 맞아 웅치고개에서 결사항전했다. 우리 군사는 무기가 떨어지자 온몸으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담, 변응정과 많은 조선병사가 전사했다. 그들의 용맹함은 적도 감동시켰다. 왜장은 조선군사의 시체를 모두 한데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를 세웠다.
첩보전에서도 조선은 일본에 한참 하수였다. 왜는 조선인을 포섭해 간첩으로 활용했다. 간첩에는 군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유성룡은 가족과 함께 소 한 마리를 잡아먹은 전령 김순량을 잡아서 심문했다. 그는 "비밀 공문을 왜장에게 전달했으며 소는 그 상으로 받은 것"이라고 자백했다.
김순량은 또 "모두 40명이 넘는다. 간첩이 없는 곳은 없다. 일이 일어나는 대로 보고한다"고 실토했다. 김순량은 참하고 간첩을 모조리 색출해 잡아들였다. 간첩 활동이 중단돼 명나라 구원병이 도착한 정보는 왜적에 누설되지 않았다. 명나라 대군은 평양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은 1년여 뒤인 1593년 4월 20일 수복했다. 서울의 백성은 10분의 1만 남아 있었다. 성안이 죽은 사람과 죽은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종묘와 세 대궐, 종루, 각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은 남김 없이 재로 변해 있었다.
민가들도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명나라 본대는 물러나는 왜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적들은 느긋하게 후퇴했다. 그들의 길목에 머물던 우리 군사들 역시 적이 나타나면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1593년 6월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최경희 등이 모두 전사하고 6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으며 닭과 개마저 남은 것이 없었다.
김천일은 군사에 어두워 제멋대로였으며 서예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헐뜯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유성룡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고 비판했다.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고 이를 놓치지 않고 적들이 공격해오자 우리 병사들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촉석루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천일과 최경희는 손을 붙잡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순신을 몰아내고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은 이순신이 전략을 논의하던 운주당 건물에 첩을 데려와 거주했다. 장수들과 접촉이 없었으며 술을 좋아해 술주정이 다반사였다. 그때 적이 쳐들어왔다. 권율의 질책으로 출전했지만 허둥대다가 수많은 배와 군사를 잃었다. 남은 조선군은 거제 칠전도에 주둔하다가 다시 적의 기습을 받아 완전히 궤멸됐다.
원균은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지만 몸이 비대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유성룡은 원균이 혼자 있다가 왜군에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칠전도에서 승리한 왜는 남원을 거쳐 충청과 전라를 유린했다.
삼도수군통제사를 다시 맡은 이순신은 고도의 전략가였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은 조선 장수의 권한을 인정해주지 않았고 그의 군사들도 수령들을 욕하며 마구 때렸다. 이순신은 진린이 합류하자 큰 잔치를 베풀면서 성대하게 맞았고 전투의 공로를 진린에게 돌렸다.
진린은 매우 흡족해하며 선조에게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라고 극찬했다. 이순신은 진린과 합의해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든 잘못을 저지르면 매로 다스리기로 하면서 군기가 엄정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성룡(1542~1607)=경상도 의성 사촌리에서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566년(중종 22) 별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을 시작했으며 1568년(선조 1) 성절사(황제·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82년(선조 25) 대사헌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라 선조를 호종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전란 수습을 총괄했다. 1598년(선조 31)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된 후 고향에 은거해 저술에 힘썼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35.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임진왜란 직후 서울을 파주 교하로 옮길 뻔했다
달려드는 호랑이를 죽여 임금을 구했다면 상을 받을까, 처벌을 받을까. 조선 태종 때 벌어진 일이다. 대궐 안에 호랑이가 침범해 임금을 덮칠 뻔했다. 호위무사 김덕생이 100보 밖에서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호랑이를 즉사시켰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좌명공신 3등을 하사했다.
그런데 이튿날 조정의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간들이 임금을 향해 활을 쏜 것이라며 죄를 물어야 한다고 소동을 피웠다. 김덕생은 "솜씨가 완벽해 감히 활을 쏜 것"이라며 호랑이 그림에 100발의 화살을 쏘아 모두 명중시켰다. 하지만 그는 형벌에 처해졌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는 "세종대 와서야 김덕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고 밝힌다. 책은 경(經)·전(典)·금석(金石)·풍속·제도·고적·역사·지리·산물·서화·전적·시문 등 방대한 분야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한데 모은 잡저이다. 1871년(고종 8) 완성됐다. 한국학 분야 연구에서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임하'는 자신이 거처하던 집의 명칭이다.
인조 때 문신이면서 병자호란 때 주전파를 대표했던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1561~1637)의 후손들(장동 김씨)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담배가 선풍적으로 유행해 흡연의 폐단이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됐을 때도 이 집안에서만은 가법으로 엄격히 금지했다.
담배는 1622년(광해군 14) 왜에서 들여왔다. 김상용의 사위 장유(효종의 장인)는 애연가였다. 장인은 사위가 내뿜는 담배연기와 냄새가 지독히도 싫었다. 그래서 임금에게 주청해 '요망한' 풀이 유통되지 못하게 했다. 시중에서는 담배가 근절되기는커녕 날개 돋친 듯 거래됐다.
한편 김상용은 후금이 쳐들어오자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해 적이 성을 함락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한다. 김상용이 담배를 무척 싫어한 데다 그가 불 속에서 숨지자 그 집안에선 대대로 담배를 금기시하는 전통이 생겼던 것이다.
개고기 마니아였던 공자를 모방해 조선의 유학자들도 개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그 시대에도 개를 애지중지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판서 조상진(1740∼1820)은 반려견 사랑이 유별났다. 개가 병이 나자 의원을 불렀다.
기가 막힌 의원이 "저는 어의요"라고 하자 그제서야 공손히 돌려보냈다. 그 개가 통통하게 살이 찌자 주위에 자랑하고 다녔다. 누군가 "복날이 머지않았으니 안타깝소"라고 하자 조상진은 버럭 화를 내며 "늙은이가 아끼는 것에 대해 무슨 말이 그렇게 경박한가"라고 했다.
고려조에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서울)으로 몇 차례 이전하려고 한 적이 있지만 조선 역시 수도를 바꾸려고 했다. 전대미문의 환란인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였다. 서울이 왕기가 다해 천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비등했다. 도읍지로 집중 거론된 곳은 파주 교하지역이었다.
실록은 "서울을 교하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중대한 의논이었다"며 수도 이전이 조정의 중론으로 부각됐던 당시 상황을 소개한다. 조정에서 영향력이 컸던 이항복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광해군 2년(1610) 이항복은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난리와 수해를 피하고 백성을 위하고 중국과 통교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며 "신빙성이 막연한 말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면 솥이 깨지고 살림살이가 망가져 곤궁함만 더해 갈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나라에 덕을 쌓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게 급선무이며 그렇게 하고서도 나라가 약해지고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들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천도를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도를 교하로 바꾸는 논의는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다.
그 시절 청계천 등 도성 내 개천과 도랑에는 오물이 아무렇게 버려져 악취가 진동했다. 세종 때 이현로가 풍수설을 앞세워 명당을 물을 맑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서울에는 본래 적취물이 생기게 마련"이라는 어효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오물 투기가 근절되지 못했다.
300년이 경과한 1760년(영조 36)에야 임금이 이창의 등을 시켜 여러 관료와 백성들을 동원해 청계천을 준설했다. 사흘씩 부역을 해야 했지만 오랜 기간 쓰레기로 고통받아온 백성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어서 공사는 빠른 시일 내에 끝났다.
공사에 걸린 기간은 총 57일이며 백성 20만명, 금전 3만5000꾸러미(緡)가 소요됐다. 공사 후 나라에서는 상설기구인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했다.
전란과 잦은 화재에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개국시조의 어진을 반드시 지키려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했던 태조어진은 임진왜란 때 경기전 하인이 접어 품속에 간직해 옮겼다.
저자는 태조어진을 보면서 그 접은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왕후 영정까지 제작했다. 성종 3년(1472) 선원전에 세종비 소헌왕후와 세조, 예종 어진을 모사해 봉안했으며 중종 34년(1539)엔 정종과 정종비 정안왕후의 영정을 함께 올렸다.
선원전의 태조 영정은 26점, 성종 9점 등 수많은 어진이 그려져 선원전 안에 잔뜩 쌓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색이 바래고 먼지가 쌓여 서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져 초본과 여벌 등은 땅에 파묻었다.
25대 철종 어진(보물 제1492호)은 군복 차림이다. 애초 임금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군복을 즐겨 입었고 정조도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화성에 행차할 때 추모를 위해 군복을 착용했다. 처음에는 재상 김익이 군복 차림의 정조를 향해 "전하께선 이 어인 복장이냐"고 비꼬았다. 말을 탄 군왕은 소매통이 좁은 옷을 입어도 된다는 인식에 따라 이후엔 임금의 행차 시 군복을 으레 착용하게 됐다.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수발만 들었을까. 단명한 헌종(1827∼1849)은 그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저자는 헌종을 직접 모셨다. 헌종은 정사가 한가할 때 모시옷을 손수 세탁하는 일이 많았다.
외부에 헌종이 사치가 심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왕의 문방구가 일반 사대부와 다르지 않고 화려한 물건도 절대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이불에 비단이나 털 담요를 쓰지 않았으며 천막도 고운 비단을 멀리했다.
한 집안에서 한 명 나오기도 힘든 정승을 10명이나 배출한 걸출한 가문도 언급된다. 조선개국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심덕부(1328∼1401) 집안에서는 본인을 포함해 심온, 심회, 심연원, 심통원, 심희수, 심열종, 심기원, 심수현, 심지원 등 10대에 걸쳐 10명이 정승에 제수됐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이 세종의 장인, 여섯째 아들인 심종이 태조의 부마가 된 덕이다. 정광필(1462∼1538)은 중종 때 3정승을 모두 지냈다. 그의 집안에서는 정유길, 정창연, 정지연, 정태화,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정홍순, 정석오 등 7대 동안 10명의 정승이 나왔다.
이에 못 미치지만 좌의정 민정중(1628∼1692) 가문은 민진장, 민진원, 민응수, 민백상 등 3대에서 5명의 정승이 배출됐다. 김상용, 김상헌 집안도 이들 형제가 각각 우의정, 좌의정에 발탁된 것을 포함해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등 3대 동안 5명이 정승을 했다.
명산 금강산은 외국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권근(1352∼1409)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들 이 산을 한 번 찾아와서 구경하고 싶어한다. 더러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면서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까지 있다고 한다"고 했다. 고려말 학자인 이곡도 "금강산은 천하에서 그이름이 유명해 인도가람들까지도 찾아와 구경한다"고 했다.
'남남북녀'라는 말은 주로 북한은 여자들이 예쁘고 남한은 남자들이 잘났다는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남북은 원래 함경도의 남쪽과 북을 지칭했다. 함경도 북쪽 지방 여자들은 체구가 크고 살갗이 밝았다. 일도 잘해 한 해 2단(端)의 베를 짰다. 이렇게 짠 베로 시집갈 때는 치마를 4~5벌이나 갖추고 가마에 면포를 덮어씌운다. 일손이 절실했던 시절이니 노동생산성 높은 그녀들은 이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태 유래도 재밌다.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는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관찰사에게 갖다 바쳤다. 관찰사가 맛있게 먹고는 물고기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태씨 성의 어부가 잡았다고만 대답했다. 관찰사는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라고 부르면 되겠다고 했고 이때부터 명태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졌다. 저자는 "원산을 지나다가 명태 더미를 보았는데 한강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순우리말이라고 여겨지는 단어 중 상당수가 한자에 근거하며 출처를 알 수 없는 낱말도 부지기수다. 조선시대 벼슬아치의 높임말로 영공(令公)이라고 하고, 또한 영감(令監)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공은 당나라 곽자의(郭子儀)가 중서령(中書令)의 벼슬을 받자 곽영공(郭令公)이라고 했고 이 호칭은 곧 '존칭의 대명사'가 됐다.
조선말 영공이 영감으로 변질돼 유행했다. 어선(御膳, 임금에 진상하는 음식)을 수라(水剌)라 하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나리[進賜]라 하고 노비가 주인을 칭할 때 상전(上典)이라 하지만 역시 여러 출처에서 와전된 것들이다.
아픔을 느낄 때 부모를 찾기 마련인데 감탄사 아야(阿爺)는 아부(아비), 아미(어미)라는 한자가 변질돼 만들어졌다.
남자를 뜻하는 사내라는 단어는 고려후기 문신 이나해(李那海)와 연관 있다. 이나해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벼슬을 지냈으며 용모와 풍채가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인부(仁富), 광부(光富), 춘부(春富), 원부(元富) 등 4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모두 재상이 돼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나해의 네 아들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남자를 사나해(似那海)로 부르게 됐다.
▶이유원(1814∼1888)=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합격했으며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거쳐 고종초에 좌의정에 발탁됐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반목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개화를 주도해 1882년 전권대신 자격으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에 조인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36.윤근수의 『월정만필(月汀漫筆)』
-관비가 된 단종의 누이 그 후의 삶은 어땠을까? 월정만필이 전하는 조선초기의 사회
관비가 된 공주, 수령을 꾸짖다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광묘(光廟·세조의 묘호)가 어릴 적에 보고 말하기를 '어린애의 눈동자가 너무도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구나. 모쪼록 형제끼리 우애 있게 지내고 너의 할아버지는 본받지 말기 바란다' 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태종을 가리킨 것이다."
조선 선조때 문인인 윤근수가 집필한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수록된 내용이다.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세조는 어린 조카에게서 왕좌를 찬탈했다. 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의 핵심 공신인 이숙번(1373~1440)은 어린 세조의 얼굴에서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 없이 처단했던 태종의 비정함을 읽었던 것이다. 이숙번은 자신의 공이 큰 것을 자만하다가 탄핵을 받아 1417년 경상도 함양에 유배돼 그곳에서 죽었다.
월정만필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사(故事), 명인의 일화, 시화(詩話) 등을 수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도 상술해 이 시기 정치사회사 연구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노산왕(魯山王·단종)의 비 송씨(정순왕후)는 적몰돼 관비가 되었다. 신숙주가 공신의 여자종으로 받아내려고 왕에게 청했다. 광묘가 그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서 얼마 안 가서 궁중에서 정미수(시누이 경혜공주의 아들)를 양육하게 하였다."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는 더욱 곤란한 처지였다. 유배지에 있던 남편이 1461년 승려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된 것이다. 월정만필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경혜공주는 남편인 영양위(寧陽尉·정종)가 귀양지에서 사사된 뒤 적몰되어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이었다. 장차 관비의 일로 부리려 하니 공주는 곧장 대청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내 비록 죄가 있어 정배되었지만 어찌 수령 따위가 감히 관비의 일을 시키는가" 하여 마침내 일을 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남편이 죽었을때 경혜공주는 아들 정미수를 임신 중인 상태였다. 과연 공주와 단종의 유복자는 관노의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일단 실록은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됐고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고만 기술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공개한 해주 정씨 대종가 분재기(分財記·경혜공주의 정미수에 대한 재산상속기록)를 보면 경혜공주가 생전에 공주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남편의 처형과 함께 공주가 일시적으로 천민이 되기는 했지만 세조의 배려로 곧 풀려나 종전의 신분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봉(김시습)이 성안에 들어와서는 번번이 향교동(종로구 교동)에서 묵었다. 서거정이 찾아가면 벌렁 드러누워서 발장난을 하면서 얘기하였다. 이웃 하인들이 모두 이르기를 '김 아무가 서 정승을 예우하지 않고 이처럼 모욕을 주었으니 다음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며칠 만에 서 정승은 다시 찾아왔다."
송광사 주지 조우(祖雨)가 재상 노사신(1427∼1498)에게 글을 배웠다는 이유로 여러 번 봉변을 당했다. 하루는 조우가 "생원이 대재상을 드러내 놓고 욕을 퍼부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자 김시습이 움켜잡고 때리려고 하는 것을 주위에게서 겨우 뜯어말렸다. 조우는 수락산에 머물던 김시습을 찾아갔다가 놀림을 받았다.
"(김시습은) 종에게 밥을 지어서 (조우에게) 먹이도록 하였다. 조우가 밥을 뜰 적마다 김시습은 발로 땅 위의 먼지를 일으켜서 숟가락 위에 날아들게 하였다. 끝내는 한 숟가락의 밥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조우가 '생원은 밥을 지어서 나는 주고서 먹지 못하게 하니 무슨 생각이오'라고 하니 김시습은 '네가 노 아무개에게 글을 배웠으니 어찌 사람이냐'라고 하였다."
절의를 앞세운 영남사림들은 성종의 총애로 대거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하지만 연산군 4년(1498)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로 참혹한 화를 면치 못한다. 사초(史草)에 세조의 정권 탈취를 비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게 빌미가 됐다. 제문을 직접 쓴 탁영 김일손(1464~ 1498)은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였고 사림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다. 그런 그는 수재였고 또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탁영이 청도에서 자랐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 경상도의 향시에는 늘 장원이었다. 두 형인 준손과 기손도 탁영의 손을 빌어서 3명 모두 초시에 합격했다. 전시(殿試)의 날이 되어 탁영은 두 형의 책문만 대신 지어주고 자기의 것은 짓지 않았다. 그의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다음 과거 때 장원하려는 속셈이었다. 두 형이 모두 과거에 올랐고 준손은 1등이 되었다. 다음 과거 때 전시의 시험관이 탁영의 문장이 훌륭함을 알면서도 그를 싫어해 2등을 매겼다."
김일손은 과거에서 수석하지 못한 것을 늘 억울해 했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 역시 과거에서 차석을 했다. "남곤이 과거 방 붙은 날 동년들과 광화문 밖으로 나가는데 한 사람이 '네가 장원이 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느냐. 중국에서는 소동파가,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모두 2등이었으니 이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유감으로 생각지 말라'고 했다. 남곤이 하인을 시켜 물어보는 그 사람은 김일손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죄인들을 많이 유배 보냈다. 원말 혼란기에 중국에는 군웅들이 황제를 자처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진우량(陳友諒)은 강주(江州)에 도읍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했다.
"승은 개성에 머물러 있고 리는 청양현(靑陽縣)으로 옮겨졌다. 리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우뚝하게 뛰어났다. 중국에서 첩 40명과 흰빛 준마 40필을 거느리고 왔다. 그가 죽게 되자 첩과 말이 한두 해 사이에 연달아 죽어 없어져 결국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둘 중 명승의 후손들은 한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연안 명씨(서촉 명씨)의 시조는 명승의 아버지인 명옥진이다.
강동구 둔촌동의 지명은 고려말 충신인 둔촌 이집의 호에서 따왔다. 이집은 고려 말 과거에 급제해 정3품 판전교시사를 지냈으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광주(강동구 둔촌동)에 은둔했다. 그는 조선을 거부했지만 후손들은 조선조정에서 명문가를 일궜다.
"둔촌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맏아들 지직은 호조 참의·보문각 직제학이었다. 지직은 아들 둘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막내 아들 인손은 우의정이었다. (중략) (둔촌의 9대손) 민각은 문과에 장원하였고 지금은 제용감정(정3품 당하관)이 되었으니 9대를 연달아서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윤근수(1537~1616) = 호는 월정이고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동생이다.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했으며 중국통으로 여러 차례 중국에 가서 종계무사(宗系誣事·명나라법전인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고려의 4왕을 시해했다고 오기한 것)를 해명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요동을 왕복하면서 구원병을 요청했다. 벼슬은 종1품 판의금부사에 이르렀고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을 받았다. 성혼, 이이와 막역한 벗이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우리의 역사☆ >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몰랐던 강화 돈대 이야기 (0) | 2021.04.04 |
---|---|
▣경복궁 자경전, ▣대비의 수렴청정-정희왕후·문정왕후, ▣세조의 찬탈, ▣문종 세자빈 [궁궐가는 길Ⅴ] (0) | 2021.04.04 |
조선의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관계[한중 5000년④] (0) | 2018.02.13 |
조선의 국장이야기 (0) | 2018.02.06 |
숨쉬는 조선왕릉 (0) | 2018.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