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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국립 대전현충원』Ⅰ

문수봉(李楨汕) 2021. 9. 27. 22:30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국립 대전현충원』Ⅰ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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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간 100만평에 14만 안장, 2.서울현충원의 2배, 3.전국 역술가 불러모아 찾아낸 "최고의 명당", 4.대전은 보훈처,서울현충원은 국방부,

5.서울에 묻힌 김대중, 대전에 묻힌 백선엽-대전이면 홀대?, 6.현충원과 호국원 차별은 부당, 7.대전현충원 13개 묘역 첫 안장자,

8.반란군과 저항군, 친일파와 애국지사 함께 영면 - 주체사상 '대부' 황장엽도, 9.장군 8평, 사병 1 평 차별- 묘역 부족 작년말에야 똑같이 1평,

10.사병 묘역에 묻힌 채병신 월남전 한국군 사령관- 국가를 위한 죽음에 차별없어야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국립 대전현충원』Ⅱ

1.40년간 100만평에 14만 안장···일부 인사들로 갈등

-"이장하라!" 파묘 시위 연례행사 대전현충원 왜?

올해 현충일에도 국립대전현충원 입구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시위가 진행됐다. 지난 1998년 전 특무대장 김창룡이 안장될 당시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의 주도 아래 시위가 시작된 이후 23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연례행사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들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성스런 공간에서 왜 이들은 매년 집회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국립대전현충원은 어떤 공간일까? 어떤 인물들이 묻혀있을까? 여러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 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촉구 집회

제66회 현충일인 6일 오전 11시 대전현충원앞에서 광복회 대전지부 등 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행위자 묘 이장 촉구 시민대회"를 열고 있다. ⓒ 우희철

 

국립대전현충원은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국가보훈처 산하 국립묘지로 1982년부터 사병·장교·경찰관, 국가원수, 애국지사, 국가사회공헌자, 장군, 의사상자 및 순직공무원 등이 안장돼 있는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의 추모공간이자 인물로 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교육장이다.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를 보면 서울 동작동에 설립되었던 국립묘지의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르게 되자, 1974년 12월 16일 중부지역에 국립묘지를 추가로 설치하라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되기 시작했고, 1976년 4월 14일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권율정 전 대전현충원장(전 부산지방보훈청장)은 "서울 현충원이 만장이 될 것 같으니까 새로운 국립묘지가 필요했고 후보지 두 군데 중 대전이 선정됐다"고 말한다.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의 부지와 경합을 한 끝에 위치타당성과 경제성을 고려해 현 부지인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당시 충청남도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로 결정됐다.

이에 국방부는 1976년 5월 11일 지방국립묘지 설치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979년 4월 1일부터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985년 11월 13일 준공했다. 동아건설과 공영토건이 주 시공사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1985년 11월 13일자 기사를 통해 "총 1백여만평의 대지에 19만평을 묘역으로 조성, 14만여구를 안장할 수 있다. 43여만 평 대지에 5만4천여 국가유공자가 잠든 동작동 국립묘지보다 2.5배 큰 규모"라고 소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현충시설로는 현충탑, 현충문, 호국분수탑, 홍살문, 충혼당 등이 있고, 임시 안치실인 봉안관, 안장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리는 현충관, 군의 각종 전투장비를 전시하고 있는 야외전시장인 보훈장비전시장 등이 있다.

또 1667㎡ 면적의 2층 건물로 나라사랑 교육 중심의 전시가 이루어지는 보훈미래관을 현충시설로 두고 있다. 또한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보훈가족쉼터, 유족대기실, 야생화공원, 보훈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 대전현충원 현충탑

대전현충원 중앙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다가 숨진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우희철

 

국립대전현충원이 자리한 대전시 유성구 갑동 일대는 동쪽으로 지족동, 서쪽으로는 계룡산의 한 줄기를 시계(市界)로 공주시 반포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유성-삽재고개 정상간 도로인 현충원로를 경계로 하여 덕명동과 접해 있고, 반석동이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의 갑하산-신선봉 능선 사이 두리봉 아래에 현충탑이 세워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우산봉, 동쪽으로는 지족산과 왕가봉, 남쪽으로는 옥녀봉과 박산이 있어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다.

전체 면적은 330만9553㎡(99만9천평)으로 10만663기를 안장할 수 있다. 1982년 안장을 시작한 이래 2021년 4월말 현재 9만5929기(안장률 95.3%)를 안장했고 4만1281기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장 40주년이 되는 내년이면 만장이 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2019년 5월에 봉안당인 '충혼당'을 착공해 2년 만인 2021년 5월 4일 개관했다. 충혼당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9천647㎡ 규모로 유골함 4만9천기를 수용할 수 있는 봉안동과 40개 제례실, 안장식장, 휴게공간 등을 갖춰 향후 40여 년은 더 봉안이 가능해졌다.

안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1982년 8월 27일 사병이 최초로 안장되면서 묘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1985년 2월 28일부터 장교와 경찰관이 안장됐고 1986년 11월 7일 장관급 장교, 1987년 4월 6일 애국지사, 1989년 10월 23일 국가사회공헌자, 1994년 12월 6일 소방관이 각각 최초로 안장되었다.

이후 국립대전현충원은 2006년 1월 30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소관부처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었다. 2006년 10월 26일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곳에 묻혔고, 2007년 4월 26일부터 의사상자가 안장되기 시작했다.

▲ 대전현충원 묘역

대전현충원에는 군인, 경찰관, 애국지사, 국가사회공헌자, 소방관, 의사상자 등 10만여명의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2010년 4월 29일에는 천안함 46용사 합동안장식이 거행됐고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묘역,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합동묘역이 2015년 9월과 11월에 각각 조성되기도 했다. 집배원으로는 고 차선우씨가 2011년 처음으로 이곳에 묻혔고, 2014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묘역이 조성됐다. 2017년에는 장교와 사병을 통합 안장했으며, 2020년부터는 장군도 장병묘역에서 영면하기 시작했다.

갈등의 씨앗,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이 와중에 논란의 인물들이 묻히게 되면서 대전현충원은 갈등의 장소로 떠오른다. 친일반민족행위에 연루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 김창룡 전 특무대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밀정으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후로 밝혀지기도 했다.

독립군 토벌대인 만주군 상위의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 등과 일본군 중좌 출신 백홍석, 일본군 대위 출신 유재흥 이형근도 대전현충원에 있다. 최근에는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과정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대전현충원 안장은 더욱 큰 논란거리로 부상됐다.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꼽히는 유학성, 5공비리의 주역 안현태,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등도 논란의 인물들이다.

시민단체들은 이를 두고 "호국보훈의 성지라는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보수단체에서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한다.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시사한다.

대전현충원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자 호국보훈의 다양한 교육의 장으로 운영하기 위해 '열린 현충원, 밝은 현충원'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충원이 갈등과 싸움의 장에서 벗어나 진정한 호국보훈의 성지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1.40년간 100만평에 14만 안장···일부 인사들로 갈등 -"이장하라!" 파묘 시위 연례행사 대전현충원 왜? / 오마이뉴스, 2021. 7. 5.

2.서울현충원의 2배, 단일기관으로 대전서 제일 커 - 대도시의 백만평 국립묘지,어떻게 가능했나

국립대전현충원의 전체 부지는 330만9553㎡이다. 평수로는 대략 1백만 평이다. 그렇다면 1백만 평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우리가 흔히 면적을 얘기할 때 비교 대상으로 사용하는 축구장 1개의 넓이가 FIFA(국제축구연맹)에서 정한 기준으로, 가로 105m, 세로 68m로 7167m²이다. 대략 2천 평 정도니까 축구장 5백 개 정도의 면적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지금은 작고하였지만 할리우드 은막의 스타였던 그레이스 켈리 왕비로 유명한 모나코 공국의 전체 면적이 200만m²(60만평) 정도이니 한 나라의 국토 면적보다 1.6배나 큰 규모이다. 교황이 다스리는 면적 44만m²의 바티칸 시국과 비교하면 무려 7배나 넓다.

대전광역시 내에서도 단일 기관으로 이보다 넓은 부지를 가진 기관은 없다. 충남대학교의 경우 대덕캠퍼스, 보운캠퍼스, 연습림과 목장, 병원 부속 토지, 임해수련원 등을 모두 포함해도 2016년 기준 198만669m²로 현충원 부지에 비하면 3분의 2도 되지 않는다. 인근에 있는 KAIST 부지(127만5247㎡)와 합쳐야 겨우 비슷해진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대전현충원 전경

국립대전현충원의 부지면적은 331만여㎡로 축구장 5백여개를 합한 규모이다. 서울현충원보다 2배나 크다.ⓒ 우희철

 

권율정 전 대전현충원장은 지난 1976년부터 시작한 당시 부지매입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그 때, 지금 이 땅이 평당 2700원이었으니까 100만 평을 샀다고 해도 현재 서울 아파트 1채 값도 안되는 돈이에요. 군부 독재시대니까 이렇게 많은 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거죠. 지금 같으면 대한민국 어느 땅에 100만 평을 국립묘지로 조성할 수 있겠어요? 특히 이런 대도시 인근에…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현재 갑동 쪽이 평당 500만 원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1000배 내지는 1500배 오른 거예요."

'현충원' 하면 대전 지역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알려진 서울 현충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주요 인사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의 국가 원수나 귀빈들도 빠지지 않고 방문하여 참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늘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방명록에 남긴 정치인들의 한두 줄 글귀의 의미나 누구 묘소에 헌화했느냐는 것에서 정치적 의미를 따지기도 하니 이래저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장소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국전쟁 이후 여기저기 산재해 있던 순국 전몰장병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한 국군묘지로 1955년 출발하였다가 1965년에 국립묘지로 바뀌었다. 관악산 기슭 공작봉 아래 한강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형 위치에 자리잡은 서울현충원은 면적으로만 따지자면 대전현충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3만㎡(약 43만평)의 규모다.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문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라고 하는 국립서울현충원에는 5천4백여기의 순국선열이 안장되어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규모도 대전현충원이 서울현충원을 압도한다. 대전현충원에는 묘역에 9만5천여 기가 안장되어 있으며, 앞으로도 약 5천여 기의 묘역 안장이 가능하다. 서울현충원의 묘역 안장 5천4백여 기에 비하면 3배 가까이 된다.

대전현충원은 현재 추세대로라면 2022년에 만장이 될 것으로 예상돼 부족한 안장 묘역을 대신할 수 있는 납골당인 '충혼당'을 지난 5월 4일에 개관하였다. 4만9000위를 모실 수 있다.

서울현충원의 납골 안장은 2020년 12월 말 현재 애국지사 168위, 국가유공자 2위, 일반유공자 22위, 군인 2만951위, 군무원 67위, 경찰 568위 등 총 2만806위(부부 1만9337위, 단독 1614위)가 안장되어 있다. 이미 지난해 7월에 조기 만장이 되어 제2충혼당 건립을 추진 중에 있지만 현재까지 안장 능력으로만 따져도 대전현충원이 2배 가까이 크다.

다만 서울현충원에는 유골조차 찾지 못한 10만4천여명의 위패가 모셔진 위패봉안관이 있는데, 대전현충원 현충탑 안에 있는 4만1천여명의 위패가 봉안된 위패실보다 규모가 크다.

현재 서울과 대전 두 곳의 현충원 외에도 각 지역별로 경기도 이천, 충청북도 괴산, 경상북도 영천, 전라북도 임실, 경상남도 산청 등 5곳에 국립 호국원이 있다. 이중 가장 최근에 개원한 국립괴산호국원이 89만7640㎡로 가장 넓고, 국립영천호국원 36만9000㎡, 국립이천호국원 29만㎡, 국립산청호국원 25만㎡, 국립임실호국원 10만㎡의 순이다.

이 외에 서울에 있는 4.19민주묘지(9만6,837㎡), 대구의 신암선열공원(1만㎡), 광주의 5.18민주묘지(16만6734㎡), 경남 창원의 3.15민주묘지(12만8005㎡) 등 네 곳의 민주묘지 역시 국립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전쟁뿐만이 아니라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자 민주시민 교육의 생생한 현장이 되고 있다.

또한 제주 지역에 도립 공설 묘지로 운영되던 충혼묘지를 현충원 또는 호국원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으로 올해 말에는 부지면적 27만4033㎡ 규모로 완공될 전망이다. 아울러 대전현충원의 만장에 대비해 경기도 연천군에 5만기를 수용할 수 있는 93만9200㎡ 규모의 국립연천현충원이 2025년 개원을 목표로 현재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국립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립묘지 중 대전현충원의 규모는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우리나라 최대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변치 않을 전망이다. 이러한 규모는 미국의 대표 국립묘지인 258만㎡의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보다도 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미국 내에 있는 약 139개 국립묘지 중 대전현충원보다 큰 곳은 3곳이다. 최대 규모인 뉴욕 롱아일랜드에 위치한 칼버튼 국립묘지(Calverton national cemetry)는 365만㎡로, 대전현충원보다 약 3만㎡(약 1만평)가 넓다. 칼버튼 국립묘지를 비롯해 일리노이스에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국립묘지(Abraham Lincoln National Cemetery)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리버사이드 국립묘지(Riverside National Cemetery)만 대전현충원보다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의 알링턴 하우스 전경

미국의 대표 국립묘지인 알링턴 국립묘지의 면적은 258만㎡로 국립대전현충원보다 작다.ⓒ 우희철

 

대전 현충원은 단순히 부지 면적이 넓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경건하면서도 아름답게 가꾸어진 경관을 갖춰 이곳을 찾는 유족들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현충원 외곽을 둘러싼 우거진 숲과 폭신한 흙길로 조성된 총 10km의 보훈둘레길은 시민들이 부담 없이 현충원을 즐겨 찾게 만드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현충원, 호국원, 민주묘지 등 국립묘지가 현재 11곳이고 앞으로 두 곳이 더 개원하면 13곳에 이른다. 현충원에 대해 취재를 진행하다 보니 잠든 영령들의 후손이나 유족들만이 찾는 공간으로 국한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 개별적인 묘소로서가 아니라 전국의 국립묘지를 연계해 국민 누구나 즐겨 찾을 수 있는 '호국 성지 순례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1.40년간 100만평에 14만 안장···일부 인사들로 갈등 -"이장하라!" 파묘 시위 연례행사 대전현충원 왜? / 오마이뉴스, 2021. 7. 5.

3.박정희 때 전국 역술가 불러모아 찾아낸 "최고의 명당" - 2년여 조사 끝에 현 부지로 결정

"주위 산이 여길 둘러싸고 있는 꽃의 화심입니다. 그러므로 여긴 선인 독서, 신선이 책을 보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2006년 6월.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언론은 묘역의 풍수에 주목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은 현충원 중앙 현충탑에서 위쪽으로 맨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김진철 충남대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는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을 "음과 양이 합쳐져 출발하는 '선인독서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 안장 때만 대전현충원의 풍수가 회자했던 건 아니다. 대전시 유성구 갑동 산 23-1번지. 대전현충원을 소개하는 누리집을 펼치자 그림과 함께 풍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 (중략) 문필봉은 형상이 붓끝같이 되어 있어 유래한 이름이며, 우뚝 빼어난 봉우리는 불길이 이는 듯하고, 이 불빛이 성역을 두루 비추고 있는 듯하다.
이 문필봉에서 다시 솟구쳐 내려 이룬 옥녀봉은 마치 옥녀가 금반(金盤)을 대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명산인 계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과 옥녀봉을 정점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좌우 능선이 좌청룡·우백호를 이루고 있어 묘역으로 아주 이상적인 명당(明堂)자리다.

풍수지리에서 '혈'은 묫자리를 말하고, '주산'은 혈 뒤에 우뚝 속아 있는 산이다. 청룡은 혈을 왼쪽에서, 백호는 혈을 오른쪽에서 감싸주는 산줄기다. 한마디로 계룡산 옥녀봉이 혈의 뒤쪽에 있는 주산이고, 문필봉은 주산의 뒤에 있는 할아버지 산이다. 이 두 산을 정점으로 하여 펼쳐져 있는 명당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두리봉을 옥녀봉으로,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전현충원 누리집에까지 풍수를 설명한 것은 부지 선정 당시 지형·지세를 주요하게 꼽았음을 보여준다.

▲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에는 이곳을 계룡산을 태조산으로 삼은 명당자리라고 소개하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대전현충원의 시작은 1974년 12월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중부 지역에 국립묘지 추가설치를 결정했다. 1953년 서울국립현충원을 결정할 때만 해도 풍수지리를 주요하게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제 2국립묘지 결정은 달랐다.

대전현충원의 한 관계자는 "2년여 동안 여러 후보지를 올려놓고 조사를 벌였고, 1976년 4월 14일 지금의 터로 최종 결정했다" "당시 부지 선택의 주요 기준 중 하나가 풍수였다"고 말했다. 한국역술인협회 측도 "대전 국립묘지 터를 잡는 기준의 하나로 지형·지세를 따졌다"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지관들이 모였다. 한국역술인협회에 따르면 결정적 역할을 한 지관은 지창룡(1922∼1999)이다. 지창룡은 대전 국립묘지뿐만 아니라 서울현충원, 정부중앙청사의 터를 잡는 데도 기여했다.

1979년 4월 착공을 시작해 6년여 만인 1985년 11월 13일 대전현충원이 준공했다. 이날 <대전일보>의 관련 기사 상당 부분이 풍수지리에 대한 설명이다.

대전 국립묘지가 위치한 지형은 그야말로 명당자리. 예부터 국내외에 널리 알려 알려진 명산인 계룡산이 국립묘지의 태조산이며, 그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을 시조산으로 하고 주산인 옥녀봉(두리봉)을 정점으로 좌우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 소하천이 서출동류하며 조향이 동남향인 이곳은 전국 어디서나 큰 불편 없이 찾아올 수 있다.

<대전일보>는 다음날 (11월 14일) 사설에서도 "대전 묘지가 들어선 위치 또한 명당자리라는 데 풍수학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라며 그 이유를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대전일보는 1985년 11월 13일자 보도를 통해 국립묘지터가 계룡산 정기 이은 명당이라고 보도했다.ⓒ 대전일보

국립현충원이 자리한 갑동에는 갑골, 원갑동, 장자터, 맷들, 평전말, 앉은바위, 점말, 송정리, 물방아양달 등의 마을이 있었다. 맷들은 앉은 바위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매평(梅坪)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매화가 땅에 떨어지는 형국인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매들이라고 부르다가 맷들이 되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덕명동에 있는 옥녀봉에 살던 옥녀가 손수 사용했던 맷돌이 날아와서 이곳에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맷돌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맷들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앉은바위'는 맷들 서남쪽, 현충원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초기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자 공사 중일 때 왕자 이방원(뒤에 태종)이 앉아 쉬어간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물론 조선 도읍지 풍수와도 연결돼 있어 흥미롭다. 실제 현충원이 자리한 이 일대는 군인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현충원 자리인 갑동은 옛날 군인들의 갑옷을 만들던 곳이었다고 한다.

현충원 주산인 갑하산(甲下山) 능선에 올라서면 계룡산 '장군봉'이 바로 마주한다. 장군봉 아래가 '병사골'이다. '장군과 병사가 갑옷을 내려놓는 곳(甲下)'에 대전현충원이 들어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국립대전현충원의 조종산인 갑하산 신성봉 능선에서 바라본 계룡산 전경. 오른쪽 앞에 솟은 봉우리가 장군봉이다.

 

지금도 대전현충원은 풍수하는 사람들의 단골 연구주제다. 또 연구자마다 설명방식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그 결론이 명당이라는 점에서 같다.

대전현충원은 신선봉과 두리봉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산이 둘러있고, 배산임수와 사신사가 혈장을 보호하는 최고의 자리이다. (금강일보, 권태달의 풍수 이야기 중)

대전현충원은 동·서·남·북의 산세가 사신사를 갖추어 장풍국을 이루기 때문에, 명당 지기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항상 안락하게 머무는 공간이 된다. 풍수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을 이루고 있음으로 마치 어머니 품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영혼들을 포근히 감싸듯이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명당형국이다. (영남일보, 박재락의 풍수로 본 명당)

대전현충원에 국가 원수 묘역이 마련되어 있다. 최규하 대통령만이 현재 이곳에 안장되었다. 아름답고 편안한 땅이다. (월간 조선,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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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누리집에 소개된 풍수설명의 오류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두리봉'을 '옥녀봉'으로 잘못 소개

국립대전현충원은 누리집에 풍수를 "문필봉을 조종산(祖宗山)으로 옥녀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으며,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삼고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지명이 잘못 표기되어 수정이 필요하다.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한 '국토정보맵'에 따르면 조종산으로 소개한 '문필봉'은 '갑하산신성봉'의 오류이다. '문필봉'은 계룡산 관음봉과 연천봉 사이에 있는 봉우리(760m)로 대전현충원과는 거리가 멀다.

신성봉은 갑하산의 한 봉우리이지만 565m로 갑하산(469m)보다 높다. 대전시민들은 '신성봉'을 '신선봉'으로 알고 있다. 등산로상의 등산 안내 표지판이나 대전 둘레산길을 소개하는 안내 책자에는 모두 '신선봉'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국토정보맵을 보면 주산으로 소개한 '옥녀봉'은 현충원 정문 앞에 있는 유성CC의 뒷산(451.9m)이다. 현충탑 뒤의 실제 주산은 '두리봉'이다. 신성봉과 갑하산 사이의 능선에서 현충원 쪽으로 튀어나와 솟아있다.

'월간 산'이 발행한 전국명산 지도 '우산봉~도덕봉' 편에는 산 높이가 389.9m로 기록되어 있다. 대전시지(大田市誌)에 갑하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있고 이 이 봉우리들이 불상을 닯았다 하여 삼불봉(三佛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3개의 봉우리는 갑하산과 신성봉, 두리봉을 말한다.

이러한 오류는 1985년 11월 13일자 대전일보의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2면 기사에서 "계룡산이 국립묘지의 태조산이며, 그 맥을 이어받은 문필봉을 시조산으로 하고 주산인 옥녀봉을 정점으로(중략)"라고 전했다. 역시나 '신성봉'을 '문필봉'으로 '두리봉' '옥녀봉'으로 잘못 쓰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현충탑 뒤쪽에 주산인 두리봉이 있고, 두리봉 오른쪽 뒤로 조종산인 갑하산 신성봉이 우뚝하다.

[출처] : 심규상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3.박정희 떄 전국 역술가 불러모아 찾아낸 "최고의 명당" - 2년여 조사 끝에 현 부지로 결정 / 오마이뉴스, 2021. 7. 29.

4.대전현충원은 보훈처, 서울현충원은 국방부···왜? - 보훈처가 일괄 관리해야

국방부 "원래 국군묘지로 출발해 군사적 성격 강해"

보훈처 "국가 위한 희생에 보상하고 선양하는 공간"

많은 사람들은 '국립대전현충원'을 서울에 이은 '제2의 국립현충원'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소관 부처가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속인 반면, 국립대전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속이다. 도대체 왜? 같은 이름의 현충원으로 똑같은 기능을 하면서 소속이 다른 이 기형적 구조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우리나라 국립묘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답이 나온다. 국립묘지는 처음부터 군이 만들었다. 서울현충원에 가보면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군이 창설되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각 지구의 공비토벌 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였다'고 적혀있다. 국립묘지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국립묘지는 작전 수행 중 사망한 국군들을 예우하고자 군이 만든 공간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국립묘지를 만들어야 할 당위성이 생겼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국군은 13만7899명이나 되었다. 당시 각 지구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영현은 부산의 금정사와 범어사에 순국 전몰장병 영현 안치소를 설치해 봉안하여 육군병참단 묘지등록중대에서 관리하였다. 전사자의 수가 점차 증가하자 육군에서는 육군묘지 설치 문제를 논의했지만 후보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1953년 전쟁이 끝나자 9월 29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서울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이듬해 3월 1일부터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동작동 국립묘지'라는 옛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국립서울현충원은 6·25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1955년 국방부 산하에 국군묘지관리소가 만들어져 이 묘지의 관리·운영을 담당했다.

국군묘지 당시에는 군편제에 기초하여 안장 방법과 묘지규격까지 계급 신분에 기초 했었다. 국가원수가 가장 높은 위치에서 자리 잡고, 장관급 장교(장군) 휘하에 장교묘역, 사병묘역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군사묘지로 시작한 서울현충원, 안장도 계급따라

▲ 1950년대 서울현충원의 모습

1955년 4월 22일 육해공군 전몰장병 합동추도식이 열린 국립서울현충원(당시 국군묘지)의 모습이다. 정부는 이 해에 군묘지관리소를 설치했다.(사진 : 4월 23일자 경향신문 갈무리) ⓒ 경향신문

 

국군묘지로 출발했으니 안장방법에서 전과(戰果)나 공적보다는 계급 서열을 우선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5년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하면서 군인이 아닌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 안장도 가능해졌다. 1985년에는 대전국립묘지가 준공되었고 공사기간 중이던 1982년부터 안장이 시작됐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함으로써 생활 안정과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소위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국가유공자법)이 제정된 것은 지난 1984년 8월 2일. 법률 제3742호로 제정돼 86년 1월 1일에야 비로소 시행됐다. 체계적인 법률을 통해 국가유공자에 대한 법적 예우를 하게 된 것이다.

국립묘지 안치에 대한 부분은 국가유공자법에 포함돼 있지 않아 별도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이 필요했는데, 2005년 7월 29일이 되어야 겨우 제정돼 2006년 1월 30일 시행됐다.

그래서 명칭도 '국립서울현충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바뀌었고 소관부처가 국방부에서 국가보훈처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국립서울현충원'의 관리와 운영은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남는다.

국립묘지법 제17조에서는 "국립묘지를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국가보훈처장 소속으로 국립묘지관리소를 둔다"고 명시해 놓고도 "국립서울현충원을 관리·운영하기 위한 국립묘지관리소는 국방부장관 소속으로 둔다"고 단서를 달아 놓았다.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전경. ⓒ 연합뉴스

이후 각 지역별로 호국원이 생겨나고, 4.19 묘역이나 5.18묘역 등 기존의 묘역이 국립으로 승격되어 모두 보훈처가 관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울현충원'만큼은 국방부 소관으로 남아있다.

이를 두고 국방부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원래 6·25전쟁 전사자 안장을 위한 '국군묘지'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지금도 의장대 등 일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등 군사적 성격이 아주 강한 곳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1956년 제정한 '군묘지령'과 1965년에 제정한 '국립묘지령'은 오랫동안 '서울현충원'의 국방부 소관 주요 근거로 제시됐다.

'군묘지령'에 따르면 묘지에 묻힐 수 있는 자는 '군인, 사관후보생 및 군속(기타 종군자 포함)으로서 사망한 자'(제2조)로 한정했고,

'국립묘지령'(제3조)에도 '전투에 참가해 전사한 경찰관'이나 '국가 사회에 공헌한 공로가 현저한 자 중 사망한 자' 등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현역군인(무관후보생 포함), 소집중의 군인 및 군속(종군자 포함)으로 사망한 자' 등 군인을 중심으로 안장 자격을 제한했다.

때문에 국립묘지법이 제정돼 국립묘지 설치와 운영의 주체는 국가보훈처가 됐지만, 국립대전현충원만 총리실 산하 국가보훈처의 관할이 된 반면, 국립서울현충원은 아직까지 국방부 소속으로 남은 것은 그런 역사적 맥락의 산물이다.

특히 국방부는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예로 든다. 미국의 대부분 국립묘지는 보훈부 소속이지만 알링턴 국립묘지만큼은 군인들만을 안장한 묘지이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관리하고 있다며, 서울현충원도 같은 이유로 국방부 소속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미국에는 139개의 국립묘지를 설치하여 관리 중에 있는데 그 중 알링턴 국립묘지와 미 육・공군묘지(U.S. Soldiers' and Airmen's Home National Cemetery)를 국방부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머지 123곳은 보훈부(DVA) 산하 국립묘지관리처(The National Cemetery Administration)에서, 14곳은 국립공원관리소(National Park Service, Department of Interior 소속)에서 각각 관리하고 있다.

이외 미 전쟁기념물위원회(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에서 멕시코시티 미군묘지 등 해외 24곳의 묘지를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국방부 주장대로 알링턴 국립묘지는 미 국방부 소관이 맞다. 사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곳에는 군인과 군인가족, 역대 대통령에게만 안장 자격이 부여돼 실질적 군인묘지인 셈이기 때문이다. 군 소속 의장대가 있어 의식을 행하는 것도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숨진 군인들을 예우하기 위함이다.

▲ 알링턴 국립묘지 의식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군 의장대가 한 유가족의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알링턴에는 군인들만 묻혀있어 국방부에서 관리한다.ⓒ 우희창

 

보훈처 서울현충원 관리 법안 발의

하지만 서울현충원은 비록 군인묘지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독립투사를 비롯한 애국지사들도 함께 모시는 종합적인 현충시설로 기능하고 있다. 순수한 군인묘지인 알링턴 국립묘지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권율정 전 국립대전현충원장은 "의장대가 의식을 행하고 있는 이유를 들어 국방부가 관리해야 한다고 하는데, 보훈처가 한다고 해서 의례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현충원이라는 곳은 보훈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말한다.

국방부와 보훈처가 따로 관리 운영하고 있는 기형적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중이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무소속 김홍걸 의원(전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8월 '국립서울현충원' 관리·운영 주체를 국방부에서 보훈처로 변경하는 내용의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대표 발의했다.

김 의원 측은 발의안에서 "국립묘지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고,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와 유가족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국립묘지의 관리·운영 등에 관한 사무 권한을 보훈처로 일원화해야 한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되도록 해야 한다"고 개정 필요성을 소개했다. 이 법안은 현재 정무위원회에서 심사중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국방은 말 그대로 '국가를 지키는 일''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보훈'은 국가의 존립과 주권 수호를 위해 신체적 정신적 희생을 당하거나 공훈을 세운 사람에 대해 보상을 하는 '사후의 일'이다. 게다가 국가유공자에는 군인만 포함되는 게 아니므로 국립묘지 업무는 군이 아닌 국가 전체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국가보훈처를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 업무를 관장하는 국무총리 산하 중앙행정기구.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한 보훈, 제대군인 및 월남 귀순용사의 보상·보호, 군인 보험, 기타 법령이 정하는 보훈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라고 소개한다.

국방부에 대해서는 "국방에 관련된 군정 및 군령과 기타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 외부의 침략과 내란에 대하여 대비하고 평상시는 군사력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유사시 군사력을 사용하여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주요 업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국립묘지는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희생, 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하고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며 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국가가 설립하여 관리하는 묘지"라고 규정한다. 과연 어느 기관이 관리 운영해야 할까?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4.대전현충원은 보훈처, 서울현충원은 국방부···왜? - 보훈처가 일괄 관리해야 / 오마이뉴스, 2021. 7. 29.

5.서울현충원에 묻힌 김대중, 대전현충원에 묻힌 백선엽 - 똑같은 국립현충원인데 대전이면 홀대?

대통령 참석 현충일 추념식 65년간 서울에서만 62회

두 전직 대통령, 없는 자리 만들어 서울 안장 - 백선엽 장군, 대전 안장 두고 보수진영 '홀대' 주장

▲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지난 2020년 7월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 공동취재사진

 

2020년 7월 10일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별세하자, 그의 친일 이력으로 인해 현충원 안장이 온당하냐는 논란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키로 결정하자, 야권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해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대전이 아닌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그를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는 페이스북에 "백 장군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다졌던 진정한 국군의 아버지"라며 "그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라고 개탄했다. 그러자 보수진영에서는 "장군에 대한 홀대"라고 동조했다.

여기서 드는 몇 가지 생각.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소속이고, 대전현충원은 국가보훈처 소속으로 관리 운영주체가 다를 뿐이다. 국방부가 국가보훈처보다 상위 부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은 서울에 안장하면 '우대'이고, 대전에 안장하면 '홀대'라고 보는 것일까? 이러한 인식은 서울 중심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1956년 제1회 현충일 행사를 서울 동작동 당시 국군묘지에서 치른 이래 1999년까지 대통령이나 3부요인이 참석하는 현충일 추념행사는 매년 서울에서 열렸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간 중앙국립극장에서 치른 것을 제외하면 그 이전 38년 동안 서울현충원에서만 치러졌다. 그동안 '현충일=서울현충원'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국민들 마음속에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이 등식이 깨진 것은 1999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대전현충원에서 공식 추념식이 열린 것인데, 서울이 아닌 곳에서 열린 첫 번째 추념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언론사도 이 행사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 의미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문 지면에는 서울현충원 참배 풍경 사진만 무성했고, 오히려 "대통령차 경호 위한 교통통제로 고통 받았다"'독자칼럼'(동아일보 6월 10일자)이나 게재되는 형국이었다.

▲ 현충탑 분향하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6일 오전 대전 현충원에서 열린 제63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현충탑에 분향하고 있다.

 

다시 2000년부터 행사는 서울현충원에서 치러졌고 2017년까지 지속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18년이 되어서야 19년 만에 겨우 대전에서 현충일 행사가 열렸고 이후 2019년 서울, 2020년 대전, 2021년 서울로 번갈아 가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전체 66회의 추념식 가운데 세 차례만 대전에서 치러졌을 뿐, 나머지 63회는 서울에서, 그 중 58회는 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

 

▲ 1956년 이래 전체 66회의 현충일 추념식 가운데, 세 차례만 대전에서 치러졌을 뿐, 나머지 63회는 서울에서, 그 중 58회는 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 우희철

 

게다가 전직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안장도 이러한 서울 '우대', 대전 '홀대'라는 그릇된 의식의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서울현충원에 당초 마련된 국가원수묘역이 이승만 전 대통령과 영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영부인의 안장으로 모두 차버리자 2004년 대전현충원에 8기 규모의 국가원수묘역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2006년 서거한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국가원수묘역에 근접한 터를 활용해 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부지 확보를 위해 추가적으로 공사비용이 들어가는 점 등으로 인해 관계 당국이 난색을 표했으나, 당시 이 대통령이 직접 유가족 의사를 존중할 것을 지시해 성사되었다.

서울이 아닌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첫 추념식에 참석한 첫 대통령으로써 그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5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별도의 묘역을 조성해 서울현충원에 묻혔다. 부지가 없어 아예 따로 떨어진 곳에 새로 묘소를 만들어야 했다.

▲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원수묘역

근접한 터를 활용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서울현충원 누리집 사진자료), ⓒ 서울현충원

 

이렇게 두 전직 대통령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대전의 국가원수 묘역을 마다하고,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없는 자리를 만들어 유택을 마련한 것은 원칙과 질서를 무시한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백선엽 장군이 대전현충원에 묻히는 일을 가지고 '전쟁영웅을 홀대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권율정 전 대전현충원장은 "정확히 말하면 두 전직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안장은 밸런스가 잘못됐다. 서울은 더 이상 국가원수 묘역이 없었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묘역 100개도 더 만들 수 있다. 일관성에서 문제가 있었다. 많이 아쉬운 대목이다"라고 말했다.

헌정사상 첫 당대표가 된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취임 후 첫 공개 일정으로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했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들은 파격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통상적으로 여야 정치인들이 당선 첫 공식 일정으로 동작구 서울국립현충원을 참배하는 것과 차별화됐다는 것인데, 이런 행위가 '파격'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 될 날은 언제일까?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5.서울현충원에 묻힌 김대중, 대전현충원에 묻힌 백선엽 - 똑같은 국립현충원인데 대전이면 홀대? / 오마이뉴스, 2021. 7. 19.

6.사병묘역에 묻힌 장군은 있어도 호국원 가는 장군은 없다?

- 현충원과 호국원 차별하는 것은 부당

# 첫 번째 기억

1980년대 중반에 논산훈련소에서 훈련 조교로 군 복무 중이던 친구의 동생 A는 제대를 한 달여 남겨두고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 훈련병들을 인솔하여 쓰레기를 소각하던 중 불발 수류탄이 폭발한, 안타까운 사고였다.

평소 친동생처럼 여기던 사이라 대전현충원에서 치러진 안장식에 참석해 친구와 부모님을 위로하고 자연스럽게 주변 사병 묘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비석들에 새겨진 생전의 계급이며, 사망 날짜 등을 보니 20대 초반에 사망한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새삼 현충원의 의미를 되새겼던 기억이 있다.

# 두 번째 기억

몇 년 전에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지인의 장인 B가 돌아가셔서 경기 이천시 호국원에 모셨다는 얘기를 듣고 "같은 국립묘지인데 현충원과 호국원은 뭐가 다르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지인은 "장인이 월남전에 참전했고 평생 경찰이셨다는 것만 알 뿐"이라며 왜 호국원에 안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현충원이 아닌 호국원에 묻힌 것을 아쉬워했다.

사병이지만 군인으로서의 임무 수행 중에 사망한 친구 동생과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 후 평생을 경찰로 살았던 지인의 장인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과 관련해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현충원(서울·대전)과 호국원(이천·괴산·임실·영천·산청)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본다.

현충원에 묻힐 자격은?

현충원이나 호국원 모두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안장 자격이 정해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

현충원에는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등 3부요인을 비롯해 국가 고위직이나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른 인물, 순국선열, 애국지사 등이 안장될 자격이 있다. 또 국가사회 공헌자, 무공수훈자, 전·공상 군경, 순직 군인·경찰관·소방관, 의사상자 등 안장 대상이 광범위하다. 군인의 경우에는 장관급 장교(장성) 또는 20년 이상 복무한 제대자도 현충원 안장 대상이다.

호국원은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참전용사들에 대한 보훈 지원이 미비하여 이들을 위한 묘지 지원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참전용사묘지로 조성된 곳이다. 재향군인회에서 관리하다가 2006년부터 국립묘지인 호국원으로 승격되면서 국가보훈처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참전 용사로 한정되었지만 나중에는 국가유공자와 10년 이상 20년 미만 장기 복무한 제대 군인으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 현충원과 호국원의 안장 자격엔 일정한 차이가 있다. ⓒ 김영호

이러한 기준으로 앞서 등장한 사례 중 A는 순직군인으로 현충원 안장대상이었고, B는 경찰관 근무와는 상관없이 월남전 참전용사의 자격으로 호국원에 묻힐 자격이 되었던 것이다.

정리한다면 현충원의 안장 대상은 그 출발이 국군 묘지였던 만큼 전투 중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군인 또는 경찰,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며 국가 주요 인사, 순국선열, 애국지사, 국가 사회 공헌자, 의사상자 등으로 확대되어 대상은 다양한 반면에 안장 자격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

호국원은 주로 군인과 경찰에 복무하였던 사람들이 안장되므로 대상은 제한적인 반면 안장 자격은 전사나 부상이 아니더라도, 또는 특별한 전공 등이 없더라도 10년 이상 장기 복무한 경우라면 가능하기 때문에 자격 조건은 까다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충원 안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 호국원에 묻힐 것을 원한다면 가능하지만, 호국원 안장 자격이 있다고 해서 현충원에 묻힐 수는 없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는 서울과 대전 두 곳의 현충원과 이천, 괴산, 임실, 영천, 산청 등 다섯 곳의 호국원 외에도 세 곳의 민주묘지들과 신암선열공원이 있다. 민주묘지들은 창원의 3.15, 서울의 4.19, 광주의 5.18이라는 민주묘지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각각의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분들이 안장 대상이다. 대구의 신암선열공원은 독립 유공자들이 안장된 곳이다.

현충원-호국원 둘러싼 격차 논쟁

▲ 대전현충원 내에 있는 호국분수탑 전경. 뒤로 현충탑이 보인다.ⓒ 우희철

 

그렇다면 어느 곳에 안장할지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원칙적으로 유족이나 본인이 결정한다. 전사나 공무 중 사망하는 경우는 물론 안장 자격을 갖춘 분들이 돌아가시면 유족들이 연고지나 또는 유족들이 자주 찾아뵐 수 있는 곳 등을 고려해 신청할 수 있다.

신청서를 제출하면 병적 기록, 신원 조회 절차를 거쳐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범법 사실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의 하루 만에 승인이 이루어져 무리 없이 장례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면 유족들이 당황하여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갖추고도 장례 절차에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승인 심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장례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19년 7월부터는 생전에도 국립묘지 안장 대상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생전 안장심의제도'를 시행 중이기 때문에 본인, 즉 안장 대상 당사자도 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현충(顯忠)은 '충렬을 높이 드러냄, 또는 그 충렬'이며, 호국(護國)은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고 지킴'이다. 따라서 국립묘지는 '나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충렬을 높이 드러낸 분들에 대한 예우이자 보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현충원과 호국원으로 굳이 격을 나누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까지 호국원에 묻힌 장성은 한 명도 없다. 채명신 장군처럼 스스로 장군 묘역을 마다하고 사병 묘역을 택한 경우는 있지만 현충원을 마다하고 호국원에 묻힌 장성은 없다.

▲ 지난 7월 8일 제주호국원 준비개원단이 괴산호국원에서 참배하고 있다. ⓒ 국립괴산호국원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이 상하관계나 격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현충원과 호국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생전의 계급에 따라 묻히는 곳도 차별을 둔다면 진정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020년 대전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만장되어 장성들도 별도의 묘역 구분 없이 사병들과 똑같은 1평(3.3㎡) 크기의 묘에 안장되고 있다. 차제에 서열처럼 느껴지는 현충원과 호국원이라는 구분을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를 논의가 필요하다.

영어로는 현충원이나 호국원 모두 'National Cemetery'이고 앞에 지역 명칭만 달리하여 구분할 뿐이다.

[출처] : 김영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6.사병묘역에 묻힌 장군은 있어도 호국원 가는 장군은 없다? - 현충원과 호국원 차별하는 것은 부당 / 오마이뉴스, 2021. 7. 26.

7.'폭우 속 배달' 순직 집배원도, 물에 빠진 아이 구한 시민도 묻혔다

- 대전현충원 13개 묘역 첫 안장자

▲ 대전국립현충원 첫 안장자는 6.25전쟁 당시 양구에서 순직한 고 이춘원 하사를 포함해 장병 100명이었다.ⓒ 심규상

 

국립대전현충원(아래 대전현충원)은 1985년에 개장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첫 안장은 1982년 8월 27일 시작됐다. 이날 대전현충원에는 이춘원 육군하사 등 100명의 장병이 안장됐다.

그 중에서도 1호 안장자는 이춘원 하사다. 하지만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953년 2월 18일 504고지에서 순직했다는 것이 묘비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의 전부다.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같은 이름으로 5명이 있는데, 이춘원 일등중사의 전사일이 1953년 2월 18일로 동일하다. 7사단 소속으로 양구군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6.25 전쟁 당시 계급체계로 보면 하사-이등중사-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 순이었는데, 일등중사는 현재의 계급으로 '하사'이므로 동일인이다. 1934년생으로 만 19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이 하사의 출생지는 경북 경주시 산내면 감산리다. 군번은 0350554. 그는 정전 협정을 5개월 앞두고 안타깝게 숨졌다. 교전중 전사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고로 숨졌는지는 모른다.

당시 전선은 이 하사가 숨진 504고지보다 훨씬 북쪽인 가칠봉이었다. 504고지는 1951년 6~7월 중공군 대공세에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아무튼 현충원 묘비에는 '순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하사는 30년 만에 다른 99명의 장병과 함께 장병묘역에 묻혀 대전현충원 첫 안장자로 기록됐다.

국립대전현충원은 장병묘역 외에도 장군묘역, 독립유공자묘역, 국가원수묘역, 국가사회공헌자, 순직군인·경찰관·소방관, 의사상자, 독도의용수비대 묘역 등을 갖추고 있다. 묘역별 첫 안장자를 찾아 안장 순으로 정리해 보았다.

경찰 송진근, 독립유공 류장렬, 국가사회공헌 황산덕

경찰 묘역의 최초 안장자는 송진근(1985년 9월 24일 안장) 상경이다. 송진근 상경은 1985년 7월 23일 진해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 중 숨졌다. 제주해양경찰청 소속인 송진근 당시 일경은 303함에서 해상치안 업무 수행 중 갑자기 의식불명에 빠졌고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묘비 앞에는 (사)대한민국해양경찰전우회충청지회 명의로 '해양주권 수호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글이 붙어 있다.

▲ 경찰관묘역 1호 안장자는 1985년 순직한 고 송진근 상경이다. ⓒ 심규상

 

독립유공자묘역 1호 안장자는 류장렬(1878~1960, 안장일 1987년 4월 6일)이다. 그는 정미의병 당시인 1909년 전북 일대에서 수많은 의병을 이끌고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정미의병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한 후 군대를 해산하면서 생긴 대규모 의병전쟁이었다.

류 지사는 1913년에 경북 풍기에서 일제 총독부 요인과 친일파 숙청을 목표로 광복단을 조직하는 등 일경과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또 다른 독립운동 활약이 알려져 징역형이 추가돼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1호에 안장했다.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의 첫 안장자는 황산덕(1989년 10월 23일 안장, 1917~1989)이다. 그는 평안남도 양덕 출신으로 법학자, 불교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법무부장관과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하여 경북도청에 근무했다.

고등문관시험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고등관 채용시험이다. 이 시험은 해방 후에도 행정고등고시, 외무고등고시, 입법고등고시, 사법고시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대 법대·고려대 등에서의 연구, 강의를 통한 그는 형법과 법철학 분야 권위자로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회자하고 있다.

1962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역임하면서 헌법개정에 관하여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가 허위사실유포죄로 4개월간 구속된 바 있다. 소설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과 논쟁을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약력에도 1960년 국내 최초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0년 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국민훈장동백장 등 여러 훈장을 받은 경력이 있다고 소개돼 있다.

▲ 독립유공자묘역엔 류장열 지사가, 국가사회공헌묘역엔 황산덕 전 문교부장관이 각각 1호로 안장되어 있다. ⓒ 심규상

 

소방관 허귀범, 순직공무원 최덕근, 장군묘역 장창국

소방관 묘역의 1호 안장자는 허귀범(1994년 12월 6일 안장)이다. 1994년 6월 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 내쇼날플라스틱 서울공장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로 700평 규모의 창고와 창고 안에 있던 플라스틱 제품을 태워 수십억 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영등포소방서 허귀범 소방관은 마지막 화재 진압에 나섰다가 건물 천장에서 떨어진 철골 구조물에 머리를 다쳐 36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순직공무원 묘역 1호 안장자는 최덕근(1996년 10월 8일 안장)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로 근무하다 숙소인 아파트 계단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 피습당해 숨졌다. 한국 외교관이 현지에서 최초로 피살된 데다 독침에 의한 북한의 보복살인 의혹이 제기되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 당국이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한국 정부와 언론조차 미온적으로 나서면서 누구의 소행인지가 불명확한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순직공무원 묘역에는 차선우 집배원(2011년 12월 19일 안장)이 집배원 신분으로 처음 안장됐다. 그는 104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2011년 7월 27일 경기도 용인시 포곡읍에서 동료 집배원과 우편물을 배달하던 중 배수로에 휩쓸려 29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그는 배수관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들고 있던 등기우편물 8통을 동료 집배원에게 안간힘을 다해 건네주는 책임감을 발휘했다.

▲ 소방공무원묘역엔 허귀범 소방교가, 순직공무원묘역엔 최덕근 전 블라디보스톡 영사가 각각 안장1호로 누워있다.

장군묘역의 1호 안장자는 장창국 육군대장(1996년 12월 30일 안장, 1924~1996)이다. 그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 교육국장, 1951년 제5사단장 등으로 한국전쟁 당시 전장을 누볐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참모차장, 제1군, 제2군사령관, 합참의장,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브라질 대사를 거쳐 국회의원(1973년)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병과는 육군선박병으로 철도와 해상수송을 담당했다. 창씨개명에 따른 장창국의 이름은 마쓰모토 도시하루(松本敏治)였다. 그는 일본 육사를 다녔지만, 도중 광복을 맞아 친일인명사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국가원수 묘역 최규하 유일

국가원수 묘역엔 최규하 전 대통령(2006년 10월 26일 안장)이 유일하게 안장돼 있다. 최 전 대통령은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외무부 통상국장, 주일공사, 차관, 주말레이시아대사를 역임하고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79년 10.26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고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0년 8월 16일 사임했다.

그는 평생 정당에 가입한 일이 없이 직업 공무원을 하다 대통령이 된 헌정사상 최초의 국가원수로 기록돼 있다. 묘역에는 공직 재임 시기 함께 했던 비서관 일동이 세운 "40여 년 간 하루도 결근하지 않은 근면성과 책임감 청렴결백의 미덕은 국민의 표상이었다"는 추모비 내용이 눈길을 끈다.

▲ 국가원수묘역에 유일하게 안장된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소 ⓒ 심규상

 

의사상자 묘역의 첫 안장자는 채종민(2007년 4월 26일 안장) 의사자다. 의사상자는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을 말한다. 의사상자는 안장을 하지 않다가 2016년 1월 제정된 국립묘지 기본법에 '의사상자'가 대상에 포함돼 안장이 가능해졌다.

채종민(당시 36세) 의사자는 그해 7월 27일 진도군 임회면 소재 서망 해수욕장에서 물놀이 중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는 초등학생을 구하고 사망했다. 제2호 안장자는 김영민(당시 31세)으로 2016년 8월 5일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 소재 천경대 하천 부근에서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또 다른 어린이 1명을 구하려다 함께 사망했다.

[출처] : 심규상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7.'폭우 속 배달' 순직 집배원도, 물에 빠진 아이 구한 시민도 묻혔다 - 대전현충원 13개 묘역 첫 안장자 / 오마이뉴스, 2021. 8. 2.

8. 반란군과 저항군, 친일파와 애국지사 함께 영면

- 주체사상 '대부' 황장엽, 어떻게 대전현충원에 묻혔나

▲ 대전현충원에는 13곳의 묘역에 군인, 경찰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분들이 잠들어 있다. ⓒ 우희철

 

대전 현충원은 묘역만도 13곳에 이르는데 장병 묘역, 장군 묘역, 독립유공자 묘역, 국가원수 묘역,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순직공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소방관 묘역, 의사상자 묘역, 독도의용수비대 묘역,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묘역, 천안함 46용사 묘역이 있다. 전국 최대의 묘역이다. 그런 만큼 '아니 이 분이 여기에?' 하고 놀랄 만한 각계각층의 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전 현충원 둘레길을 걸어본 사람들이면 거치게 되는 국가 원수 묘역. 유일하게 최규하 전 대통령이 홀로 지키고 있다. 2004년 9월 21일, 8기까지 안장이 가능한 규모의 국가원수 묘역이 조성되었는데, 2006년 돌아가신 최규하 전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의 묘소가 유일하게 대전현충원에 있다.

군인 묘역엔 12.12 반란군과 저항군이 함께

군인 묘역(장병 묘역, 장군 묘역)엔 한국 현대사를 거쳐 온 인물들이 누워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될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그는 12.12 군사 쿠데타 때 신군부에 의해 체포돼 이등병으로 강제 전역 당한 후 대장으로 복권됐고 2002년에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예비역 대장 자격으로 안장되었다.

장태완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헌병감과 함께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한 군인이었다. 2010년에 숙환으로 숨져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반대로 신군부 세력이었던 전두환의 대통령 경호실장 안현태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유학성 전 중앙정보부장, 소준열 전 전교사 사령관, 진종채 전 2군사령관도 대전에 누워있다.

안현태는 전두환의 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구속되었고, 유학성은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으나 재판 중 사망해 공소 기각됐다. 이 둘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소준열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시위대 진압 임무를 맡기도 했다. 진종채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지휘계통상 발포 명령권자였다는 논란이 있다. 이밖에 12.12쿠데타 관련자들로는 이차군, 정동호, 우국일, 김택수, 김기택, 정도영, 송응섭, 김윤호 등이 있으며 이들도 모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장군묘역엔 12.12 신군부 쿠데타 세력과 이에 저항한 군인들이 함께 누워있다. ⓒ 우희철

5.16쿠데타 주역들도 다수 안장되어 있었다. 관련자로는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 김진위, 정명환, 김인화, 이석제, 박원빈, 강상욱 등이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이중 김동하, 최주종, 박창암은 친일 경력도 있다. 쿠데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중앙정보부장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인 이후락도 안장자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친일과 관련해 논란을 빚고 있는 군인들도 많다. 만주국군 출신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 김대식 등과 일본군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인 이형근을 비롯해 백홍석, 김창룡, 유재흥 등이 누워 있고, 최근에 숨진 백선엽 대장도 친일 논란 속에 안장되었다.

이밖에 천안함 실종자 수색 도중 숨진 한주호 준위가 잠들어 있다. 2016년 동해에서 한미연합 해상무력시위 작전에 참여해 고난도 야간 비행 임무를 수행하다 추락사고로 순직한 해군 링스 해상작전헬기 조종사 등 순직 장병 3명도 영서(永逝)해 있고, 1983년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령도 대한민국 군인의 자격으로 장교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천안함 승조원, 연평도 전사자는 독립묘역으로

군인이면서 독립묘역에 묻혀있는 군인들도 있다. 제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들은 2015년에 특별히 한 곳으로 이장해 묘역을 새로 조성했고, 46명의 천안함 승조원들은 사병 묘역 일부에 합동 안장한 후 철제 울타리를 쳐두어 별도의 묘역으로 조성했다. 행사 등이 잦아 상대적으로 찾는 인원이 많은 점을 감안한 것으로, 양 묘역 모두 추모 상징물 등이 있다.

▲ 천안함 전사자들은 별도로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 우희철

독도의용수비대 묘역도 별도로 조성돼 있다. 첫 안장자는 유원식 당시 교육대 대장으로 2014년 11월 21일 이장했으며 모두 14명의 대원이 묘역에 잠들어있다.

보통 각 군 참모총장은 1월 1일과 현충일 등에 국립서울현충원 대신 이 곳을 찾는다. 육·해·공군본부가 위치한 계룡대가 인근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경찰묘역엔 좌익과 전투하다 전사한 경찰 많아

경찰묘역은 502~513번 묘역으로 총 5천여 위가 안장되어 있고, 애국지사 묘역에는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용원 선생 등 임시정부경찰 22위와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20위가 모셔져 있다. 경찰묘역의 많은 안장자들은 해방 후 공간에서 좌익과 전투를 벌이다가, 또 6.25전쟁 당시 공비들과 교전하다가 전사한 경찰들이 많다.

경찰묘역에서 돋보이는 이는 차일혁 경무관이다. 강점기 시대에는 조선의용대에서 항일유격활동을 했고, 6.25전쟁 당시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장으로 활동했다. 토벌작전이 진행된 지리산 일대의 화엄사 등과 덕유산 일대의 선운사 등 사찰 소각 명령을 받았으나 문짝만 뜯어 소각하는 기지를 발휘해 문화재를 전화(戰火)에서 구하게 했다.

또 1953년 9월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 시절 빨치산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부대를 토벌하였는데, 그를 적장의 예를 갖추어 화장해 섬진강 변에 뿌려주기도 했다. 그는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을 수탈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했다고 한다. 1998년 화엄사 경내에는 공적비가 건립되었고 2008년 문화재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 경찰묘역에는 화엄사 등 문화재를 전화에서 구한 차일혁 경무관의 묘가 눈에 띈다. ⓒ 우희철

 

이밖에 1989년 부산의 동의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순직한 최동문 경위 등 경찰관과 전투경찰 7명도 대전현충원에 묻혀있다. 2011년 해상에서 불법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을 나포해 조사를 벌이던 중 중국 선장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이청호 경사도 안장되어 있다.

해안경비함에서 근무하다 복통으로 쓰러진 경찰을 구조해 헬기로 이송하던 중 추락해 현장에서 순직한 이유진 경장과 실종된 이병훈 기장(경감), 권범석 부기장(경감) 등 5명도 대전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반면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테러를 일삼았던 서북청년단의 중앙본부 단장을 지낸 문봉제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하여 경찰관묘역에 안장되는 등 다수의 단원들이 경찰묘역을 차지하고 있다.

생명을 구하려다 숨진 안타까운 사연 많아

2012년 1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소방관 묘역이 처음 생겼다. 그동안은 국가원수 묘역, 애국지사 묘역, 국가유공자 묘역, 군인·군무원 묘역, 경찰관 묘역, 의사상자 묘역, 일반공헌자 묘역, 외국인 묘역 등 8개 묘역으로 구분돼 있었다.

소방관 묘역 "국민들이 119를 누를 때 언제 어디서나 소방관들이 달려올 것이라는 믿음에 답하고자 365일 24시간 잠들지 못한다"는 소방관들의 고귀한 영령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소방관 묘역 맨 앞줄에는 2018년 충남 아산에서 도로 위의 개를 구조해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가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소방관 3명이 나란히 안장돼 있다.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던 소방관과 20대 예비소방관 2명의 희생은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바로 그 옆에는 2017년 강원도 강릉 석란정에서 화재 진화 중 건물 잔해에 깔려 순직한 고 이영욱 소방경과 이호현 소방교의 묘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소방경은 퇴직을 불과 1년 앞두고 있었고, 이 소방교는 임용된 지 불과 8개월 밖에 안 됐다. 2019년 독도 인근에서 환자를 수송하다가 헬리콥터가 해상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숨진 5명의 소방관도 대전현충원에 함께 누워있다.

최근 쿠팡 물류센터 화재에서 화재진압과 인명 구조를 위해 투입됐다가 순직한 경기도 광주소방서 구조대장 고 김동식 소방령도 지난달 7일 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 쿠팡물류센터 화재에서 인명구조를 위해 투입되었다가 순직한 고 김동식 소방령의 안장식이 진행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지사 잠든 곳

전국에서 가장 많은 애국지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충절의 고장으로 꼽히는 대전이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는 2021년 6월 기준 총 3277명이 잠들어 있다. 우리나라 전체 독립유공자 1만6685명(2021년 3월 기준)의 20% 가까이 된다.

서울현충원의 경우 임시정부요인 18위와 배우자 애국지사 3위를 포함해 377명의 독립유공자가 있고, 국내 최대의 독립유공자 전용 국립묘지인 국립신암선열공원(대구 소재)에는 52명의 애국선열들이 잠들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3대가 독립항쟁에 매진했던 상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가족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인 곽낙원 지사는 독립유공자묘역 771번에, 바로 옆에는 김구 선생의 장남인 김인 지사(772번)가 자리해있다. 곽낙원 지사는 독립운동가들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뒷바라지하면서 국내 및 중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 인물이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지사와 아들 김인 지사의 묘가 독립유공자 묘역에 나란히 있다.ⓒ 우희철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 나란히 안장

독립유공자 3묘역(705번)에 계신 조문기 지사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 '부민관 폭파 의거'를 거행하였으며,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지냈다. 독립유공자 4묘역(397번)의 김준엽 지사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이밖에 광복군에서 활약한 김효숙·김정숙 자매와 조옥순, 광복군사령관 지청천의 딸로 광복군에서 활약한 지복영(이버지 지청천 장군은 서울현충원 임정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30년대 사회주의계 노동운동에 헌신한 이효정, 이병희, 제주지역 최대의 여성주도 항일운동을 전개한 김옥련·부춘화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재야 민주화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은 오산학교 교사로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였다. 1970년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980년 폐간당할 때까지 10여년 간 많은 글을 발표하고 강연 등을 통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 있었는데, 2002년 건국훈장이 추서됨에 따라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되었다.

반면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며 테러를 일삼았던 서북청년단의 선우기성은 오산학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 한국영화의 개척자이자 영화 ‘아리랑’의 연출자인 나운규 감독이 독립유공자묘역에 영면해 있다.ⓒ 우희철

 

문화예술계에서는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의 개척자이자 최초의 영화 '아리랑'의 각본·감독·주연을 맡았던 나운규 감독 등이 영면해 있다. 지난 6월 충남 연기군 출신 애국지사 임우철 선생이 101세로 돌아가신 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힘으로써 생존 애국지사는 국내 16명, 국외 3명 등 총 19명만 남게 됐다.

논란의 인물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묻혀

국가사회 공헌자 묘역에는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외국인을 포함한다) 중 사망한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모셔져 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 박치기왕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안장되어 있고 최근에는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던 조오련 수영 선수의 유해가 가족묘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기도 하였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시사만화 '고바우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등 수많은 동요의 노랫말을 지은 윤석중 아동문학가가 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 전직 국무총리나 장관, 대법원장 등 고위 관리들이 다수 있다.

논란이 되는 인물로는 2010년 10월 10일 사망한 황장엽이다. 안장 자격이 없던 그를 1등급 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는데, 훈장을 먼저 받은 후에 현충원에 안장된 것이 아니라, 현충원에 안장하기 위해 훈장을 추서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또 주체사상을 창시해 독재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북한의 인권 악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단지 남한으로 넘어와서 김정일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만으로 현충원에 안장될 수는 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세월호 침몰로 숨진 교사 순직공무원 묘역에

순직공무원묘역은 군인, 경찰, 소방 공무원을 제외한 공무원의 묘역이다. 직무 수행 중 순직한 경우가 해당한다.

지난 2018년 산불진화 헬기 한강 추락 사고로 순직한 산림청 산림항공본부 소속 윤규상 검사관(정비사)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는데, 위험직무순직으로 첫 인정된 사례다. 2019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폭발 사고로 숨진 연구원은 공무원은 아니지만, 국방과학연구소법에 따라 공무원 신분이 인정돼 대전현충원 안장이 결정된 사례다. 또 순직공무원 묘역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사 수송 작전에 참여했다 순직한 철도원들도 안장돼 있다.

세월호 참사로 숨진 안산 단원고 교사들이 순직공무원 묘역에 안장된 것은 교사로서는 처음이다. 2017년 11월 고창석 교사가 안장된 이래 2018년 1월 양승진·박육근·유니나·전수영·김초원·이해봉·이지혜·김응현·최혜정 교사의 유해가 차례로 안치됐다.

이중 김초원·이지혜 교사는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3년 넘게 순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뒤늦게 순직이 인정됐다. 이들은 모두 2014년 4월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안에서 제자들을 구하다 미쳐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제자들을 구하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진 안산 단원고 교사들의 합동 안장식이 지난 2018년 1월 진행되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는 대전현충원 최연소 안장자인 변지찬(향년 8세)군이 잠들어있다. 2005년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사망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조난한 동료를 구하려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전재규 연구원 등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숨지거나 다친 분들의 사연이 의사상자 묘역에 깃들어 있다.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8. 반란군과 저항군, 친일파와 애국지사 함께 영면 - 주체사상 '대부' 황장엽, 어떻게 대전현충원에 묻혔나 / 오마이뉴스, 2021. 8. 9.

9.장군은 8평, 사병은 1 평···나라 위해 죽었는데 묘지도 차별

- 묘역 부족하자 작년말에야 장군,사병 똑같이 1평

▲ 최규하 전 대통령 묘지 전경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지 면적은 264㎡로 일반 묘지 3.3㎡의 80배에 달한다.ⓒ 우희철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지면적은 80평(264㎡)이다. 지난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고 백선엽 장군의 묘지면적은 26.4㎡(8평)이다. 지난 6월 대전현충원 소방관묘역에 안장된 김동식 구조대장(소방령)의 묘지면적은 1평(3.3㎡)이다. 김 구조대장은 쿠팡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순직했다.

국립묘지 묘지면적이 대상별로 최대 80배 이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현행법(2005년 제정)에는 남은 묘지면적이 다 채워질 때까지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의 묘지 면적이 다르게 정해져 있다.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사람은 80평(264㎡) 이내로,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장군의 직에 있었던 사람 등은 8평(26.4㎡) 이내로, 그 외의 사람은 1평(3.3㎡)으로 대상자별로 다르다. 묘지 형태도 달라서 대통령과 장군 등은 봉분이 가능한 반면 일반 사병은 평분만 가능하다.

비석 크기, 비석 단가도 계급 따라 '차별'

대통령령에 따라 비석의 크기도 다르다. 국가원수 묘비는 148×475cm, 장군은 106×186cm, 일반 사병은 55×76cm다. 최규하 전 대통령 묘지의 경우 법으로 정한 비석(148×475cm) 외에도 공직 재임 시기 함께 했던 비서관 일동이 세운 큰 규모의 추모비가 함께 서 있다.

비석 단가도 다르다. 2019년 기준으로 병사는 56만7000원, 장군은 376만6000원, 대통령은 740만 원이다. 묘 1기당 잔디 관리비는 연간 기준으로 병사 묘역은 4880원, 장군 묘역은 4만 7000원, 대통령 묘역은 458만 원이다.

묘역 배치도 차별적이다. 대전현충원 묘역 배치도를 보면 묘지 정중앙 윗쪽에 국가원수묘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장군 제1묘역과 장군 제2묘역이 있고, 사병 묘역은 가장 아래 자리잡고 있다. 특히 국가원수묘역은 별도로 유명 풍수지리학자가 현장을 답사한 뒤 선정했다고 전해진다. (묘역위치도 참조)

▲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위치도 ⓒ 국립대전현충원

 

생전 신분에 따라 묘역 위치, 묘역 넓이, 비석 크기, 묘지 형태까지 다르게 한 이 규정은 "죽음에도 등급이 있냐"는 사회적 질문을 던졌다. 생전 직위에 따라 사후 예우를 차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후 예우 차별 없애자' 법률 개정안 매번 좌절

외국은 어떨까. 미국은 모든 국립묘지에서 대통령, 장군, 장교, 병사 등 모든 안장 대상자에게 사망한 순서대로 동일하게 1.3평의 묘지를 제공하고 있다. 비석도 4인치×13인치×42인치 크기의 대리석을 제공하여 준다. 신분에 따라 별도의 매장구역도 정하지 않고 묘지 사용 순서에 따라 장소가 지정될 뿐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립묘지'를 보면 모든 안장 대상자를 동일한 묘역에 안장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주한 미8군 초대 사령관인 워커 장군도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34구역 일반 사병묘역에 안장돼 있다.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은 장군, 병사 구분 없이 묘지 면적이 1.5평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죽음은 모두 고귀하므로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평등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 나가자는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사후 예우 차별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국가보훈처는 2017년 대전현충원의 기존 장교묘역이 꽉 차자 장교·사병 묘역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 안장하기로 했다. 장교묘역과 사병묘역을 통합해 장병묘역으로 변경한 것. 대전현충원은 국립묘지를 조성한 이후 이때까지 장교묘역과 사병묘역을 안장자 신분에 따라 구분해 안장해 왔다. 또 순국선열·애국지사를 함께 안장해 오던 애국지사 묘역 명칭을 독립유공자묘역으로 변경했다.

지난 2018년 당시 김중로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립묘지의 묘 면적을 대통령부터 사병까지 대상자 모두 1평으로 제한하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자 2019년 하태경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이 같은 취지의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법 개정은 불발됐다.

와중에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1월 향후 장군, 장교, 병사 같은 계급 구분 없이 사망 순서에 따라 1기당 1평씩 배정한다고 밝혔다. 또 장군과 장병에 대해 비석 크기, 장례 방식 등에서도 예우 차이를 두지 않겠다고도 했다.

▲ 국립대전현충원 전경

국가보훈처는 계급 구분 없이 사망 순서에 따라 1기당 1평씩 배정하고 비석 크기 등에 대해 차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법 개정에 따른 것이 아닌 현실에 떠밀려 내린 조치다. 대전현충원의 한 관계자는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이 꽉 차서(850기 만장) 더는 장군 묘를 쓸 공간이 없다" "물리적으로 장군과 장병 묘역을 합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고 밝혔다. 예비역 장성은 많고, 묘를 쓸 공간은 부족해져 남은 묘지면적이 다 채워질 때까지 법률 규정이 자연스레 적용된 것이다.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 묘지면적 기존과 동일

게다가 대통령 264㎡ 이내,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의 직에 있었던 사람 등은 묘지면적이 26.4㎡ 이내로 기존과 같다. 지난 4월 오영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또다시 '사후 국립묘지 크기를 안장 대상자 모두에게 3.3㎡로 동일하게 하자'는 법률개정안을 낸 이유다.

대전현충원 묘역은 10만663기 안장 가능 면적 중 현재 95%인 9만5000여 기가 안장돼 있다. 남은 묘역을 보면 국가원수묘역 3기, 독립유공자묘역은 80여 기, 장병묘역 5000여 기가 남았다. 대전현충원은 이에 대비해 이달 초 납골식 봉안당(충혼당, 유골을 화장해 그릇에 담아 안치하는 곳)을 건립했다. 이곳에는 유골 4만9000기를 수용할 수 있다.

죽음 알리는 용어도 장군은 '서거' vs. 사병은 '사망'

죽음을 알리는 용어도 등급을 나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최규하, 백선엽 등의 묘비 뒷면에는 '서거'(逝去) 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일반 사병의 묘비에는 단순한 죽음을 뜻하는 '사망'(死亡)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물론 적과 교전을 벌이거나 전투 중 숨진 '전사'(戰死)와 공무원이 직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순직'(殉職)이라는 표현은 그 죽음의 사실 자체를 알려주는 용어이므로 문제가 없다 하겠다.

하지만 죽은 이를 기리는 애틋한 마음이 계급별로 다를 리 없다. 또 정치 지도자 등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에게만 사용한다는 '서거'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일률적으로 장군이면 '서거'이고 사병이면 '사망'이라는 계급에 따른 차별 표현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여론이다.

▲ 죽음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누구는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고, 누구는 직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장군이면 ‘서거’이고, 사병은 ‘사망’이라는 계급에 따른 차별표현은 바로 잡아야 한다.

[출처] : 심규상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9.장군은 8평, 사병은 1 평···나라 위해 죽었는데 묘지도 차별 - 묘역 부족하자 작년말에야 장군,사병 똑같이 1평 / 오마이뉴스, 2021. 8. 16.

10.채병신 월남전 한국군 사령관, 왜 사병 묘역에 묻혔나 - 국가를 위한 죽음에 차별 없어야

지난해 11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서는 고 최홍선 예비역 공군 준장의 안장식이 있었다. 새로 조성된 7묘역의 많은 장교·부사관·사병들 사이에 장성인 최 장군이 안장됐다. 국립대전현충원 장병묘역에 장군이 안장되는 첫 사례였다.

7묘역은 장군·장병 통합안장 묘역이다. 국립묘지법은 대통령(264㎡) 외에는 계급 구분 없이 모두 3.3㎡(1평) 규모 면적에 안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7묘역이 이 법에 따라 새로 조성된 묘역이다.

그의 장병묘역 안장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를 위한 죽음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되새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평의 땅에 안장되면서 다른 군인들과 평등해졌는데, 묘지의 크기만 같아진 것이 아니라 묘비에 새겨진 죽음에서도 동등해졌다.

장군묘역에 있는 묘비들에는 '서거' 혹은 '逝去'로 새겨져 있었지만 최 장군의 묘비에는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 장병 제7묘역에 안장된 최홍선 예비역 공군준장의 묘비에는 2020년 11월 3일 경기 용인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날 안장된 최 장군은 1934년 6월 26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해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에 공군사관학교 제5기로 입학했다. 1957년에 소위로 임관했으며 임관 당시 졸업식에서 공군사관학교 교장상을 수상할 정도로 동기들 가운데 실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력은 어디서도 검색되지 않는다.

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최 장군은 1974년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훈한 경력이 있다. 현행 상훈법 제15조에 의거해 수여하는 보국훈장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주며 통일장, 국선장, 천수장, 삼일장, 광복장 등 5등급으로 나뉜다.

이후 그가 언론에 잠시 등장한 것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다. 예비역 장성 74명이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할 당시에 최 장군도 그곳에 이름을 올렸다.

최 장군이 안장되기 일주일 전인 10월 27일 제2장군묘역에서는 마지막 안장식이 열렸다. 류근창 전 원호처장이자 예비역 육군 중장의 안장식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장지가 갈렸다. 제2장군묘역 묘비번호 572번으로 장군묘역은 만장이 됐다.

류 장군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 2기를 졸업했고 30사단장, 20사단장, 5군단장 등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한 후 1970∼1973년 국방부 차관, 원호처장(장관급)을 역임했다. 1979년 3월부터 1983년 4월까지 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신인 토지개발공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퇴직 후에는 충청향우회 중앙회 총재 등으로 활동했다.

▲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마지막으로 안장된 류근창 전 예비역육군 중장의 묘비.

뒷면에는 2020년 10월 24일 경기 용인 ‘서거’라고 새겨져 있다.ⓒ 우희철

 

서울현충원에는 채명신·황규만 장군이 장병묘역에

장군이 장병과 함께 묻힌 경우는 최홍선 장군이 대전현충원에서는 처음이지만 이미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그 사례가 있었다. 채명신 예비역 육군 중장이 바로 그 첫 인물이다.

초대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본인 유언에 따라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묻혔다. 2013년 11월 별세한 채 장군은 오래 전부터 베트남전 전사자들이 안장된 서울현충원의 사병(병·부사관) 묘역에 묻히길 희망해 왔다. 그의 유언은 "함께 싸웠던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였다.

당초 그의 장지는 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이 될 예정이었지만 유가족이 고인의 뜻이라며 사병묘역의 안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서울현충원은 장지가 꽉 차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론에 따라 채 장군을 사병묘역에 모셨고 장군이 사병묘역에 안장된 첫 사례가 됐다.

▲ 지난 2013년 12월 채명신 장군의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묘비제막식을 열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2020년 숨진 황규만 예비역 육군 준장도 대전현충원 장군묘역 안장 대상자였지만 70년전 전사한 동료의 묘 옆 장병묘역에 묻혔다. 그의 유언에 따라 국립 현충원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묘인 '육군 소위 김의 묘' 옆에 안장됐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사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규만은 소위로 전쟁에 투입됐다. 스무 살의 나이에 경북 안강지구 전투에서 자신의 소대를 도우러 왔다가 전사한 '김 소위'를 나무 밑에 묻고 또다시 전투에 나섰다. 황 장군은 14년 뒤인 1964년 자신이 묻고 표식을 해 두었던 그 자리에서 김 소위의 유해를 발굴해 국립묘지에 안장했고, 수소문한 끝에 26년 만에 '수영'이라는 김 소위의 이름과 그의 가족도 찾았다.

국방부는 황 장군이 생전에 김수영 소위의 곁에 묻히겠다는 뜻을 밝혀 왔고, 김 소위 유가족도 이에 동의했던 것 등을 감안해 그를 서울현충원 장병 묘역에 잠든 김 소위 옆에 안장했다.

채명신·황규만, 이 두 사람은 장군묘역을 포기하고 화장을 거쳐 서울현충원 장병묘역에 안장된 사례이며 묘지의 크기와 죽음의 등급 또한 일반 장병들과 똑같이 '1평'이었고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군이든 병사든 국가를 위해 헌신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사례를 남겼다.

지난 8월 8일 대전현충원 제7장병묘역에서는 윤용남 예비역 육군 대장의 안장식이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국군 최초의 자주국방 전략증강계획 '율곡'에 참여한 윤 전 의장은 1940년 경남 의령 출신으로 제31대 육군참모총장(1994년 12월~1996년 10월), 제27대 합참의장(1996년 10월~1998년 3월)을 거쳐 1998년 예편한 인물이다.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으며, 육군참모총장 재임 땐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대응을 지휘하기도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날은 또 한명의 장성이 장병묘역에 안장된 날로 기록됐다.

사례는 조금 다르지만 장교묘역을 마다하고 전우들과 함께 묻힌 장교들도 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 윤영하 해군 항해 소령과 천안함 피격사건 전사자 고 이창기 해군 갑판 준위가 그 인물이다. 당시에는 사병묘역과 장교묘역이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원칙대로면 장교묘역에 따로 안장되어야 하나, 참배를 용이케 하고 전우들과 함께 안장해야 좋겠다는 유족들의 바람에 따라 다른 사병 전사자와 함께 안장되었다.

▲ 지난 8일 대전현충원 제7장병묘역에서는 전 합참의장인 윤용남 예비역 육군대장의 안장식이 열렸다.

또 한명의 장성이 다른 사병들과 함께 장병묘역에 안장됐다. ⓒ 우희철

[출처] : 우희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대전현충원> - 10.채병신 월남전 한국군 사령관, 왜 사병 묘역에 묻혔나 - 국가를 위한 죽음에 차별 없어야 / 오마이뉴스, 2021. 8. 23.

[출처]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국립 대전현충원』Ⅰ|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