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대한민국♡

『두 朴 대통령 부녀가 사랑한 慶州·文化財 이야기』- ▣두 ‘박통’이 사랑한 경주▣광화문 현판▣충무공▣경주국책사업▣경주 망가뜨리는 박근혜정부 ▣‘박통’에게 특별한 경주▣김정..

문수봉(李楨汕) 2021. 11. 10. 22:39

『두 朴 대통령 부녀가 사랑한 慶州·文化財 이야기』- ▣두 ‘박통’이 사랑한 경주▣광화문 현판▣충무공▣경주국책사업▣경주 망가뜨리는 박근혜정부 ▣‘박통’에게 특별한 경주▣김정기 박사

  54분 

◆『두 朴 대통령 부녀가 사랑한 경주와 문화재 이야기』···목차

①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②광화문 현판이 ‘박정희 글씨’였다고?. ③충무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④두 ‘박통’이 추진한 경주 국책사업. ⑤세계유산 경주를 망가뜨리는 박근혜 정부. ⑥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

⑦박정희 황당 지시“왕성 터에 호텔 지으라”. ⑧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⑨경주 복원 지휘한 김정기박사

1. 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할 만큼 문화재가 각광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자 문화재계는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숭례문 부실 복구로 물거품이 되었다.

집권 4년차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문화재 현장을 최소한 세 번 찾았다. 2013년 5월4일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기념식, 지난해 9월7일 경주 월성 발굴 현장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 3월18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했다. 물론 세 차례 방문을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문화재에 유별나게 애착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박 대통령만큼 문화재 현장 방문 기록을 남긴 이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첫 방문지인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식의 경우, 어떤 대통령이라도 참석했을 행사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두기는 힘들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는 국가적 사고였던 만큼 복구 완공을 기념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복구된 숭례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준 내상(內傷)은 적지 않은 듯하다. 떠들썩하게 복구를 완료했다고 발표한 직후, 전통 방식으로 재현했다는 숭례문의 단청이 벗겨지고 만 것이다. 더욱이 단청을 재생한 방법 역시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곧이어 드러났다.

이는 결국 단청뿐 아니라 숭례문 복구공사 자체가 총체적으로 엉터리였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숭례문을 넘어 한국의 문화재 현장 전반이 부실 덩어리로 간주되는 상황까지 확대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해(2013년) 11월11일, “숭례문 부실 복구를 포함해 문화재 보수 사업의 관리 부실 등과 관련한 문화재 행정 전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밝히라”고 지시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단지 ‘언제나 있는 일’ 정도로 봐서는 안 된다. 시점이나 경로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서유럽 순방에서 막 돌아와 공식 일정도 잡지 않은 상황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을 통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 ‘특별 지시’를 전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파한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의 어조도 매우 강경했다.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문화재 복원·관리 문제가) 원전 비리 못지않게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원전 비리 커넥션이나 그로 인한 문제점 못지않게 굉장히 심각하게 이 사안을 보신 것 같다.”

발언 그대로만 보면, 문화재 비리를 당시에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원전 비리에 견준 이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인지, 아니면 이정현 수석인지 애매하기는 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그 발언의 장본인인지에 상관없이, 그 이후 진행된 경과를 보면 문화재 계통의 비리는 원전 비리만큼 취급을 받았다. 경찰과 감사원이 대대적인 문화재 비리 수사·감사에 착수하면서 문화재계는 그야말로 쑤셔놓은 벌집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과 문화재계의 관계는 출발부터 심상치 않았다. 사실 문화재계는 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문이다.

문화재계에 대통령 박근혜의 등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문화재계에도 다양한 정치 성향의 인물과 흐름이 있기 때문에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변에 ‘박정희의 재림’이라는 기대가 짙게 깔려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였나? 독재자, 경제발전의 역군 등 그를 지칭하는 상징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재계에서 그는, ‘단군 이래 그랬던 적이 없었다’고 표현될 만큼 문화재가 각광받는 시대를 연출한 대통령이었다.

문화재계는, 그런 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데다 실제로 아버지를 따라서 경주 등 여러 문화재 현장을 다니기도 했던 박근혜 ‘신임 대통령’에게 그 아버지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특히 숭례문 복구 완공 기념 행사장에 노란색 한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박근혜 대통령의 당시 모습은 문화재계가 또 다른 박정희로 반길 만한 풍모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화재계의 기대가 숭례문 부실 사업의 폭로와 그 여파인 수사 확대로 인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박정희의 재림’을 기대했던 문화재계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실제로 문화재계를 원전 비리급 인사가 득실거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이후 행보를 보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은 한동안 문화재 쪽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4개월여 만에 문화재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지난해 9월 경주 월성 발굴지였다. 박 대통령의 행보가 그동안 원전 비리급 집단으로 비친 문화재계에 대한 사면복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속내가 어떠하든, 박 대통령의 경주 월성 발굴 현장 방문 자체는 문화재계에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비로소 완연한 ‘박정희의 재림’으로 보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이는 오직 박정희 전 대통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였다. 더욱이 그 많은 발굴 현장 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지극정성을 기울였던 경주를 그 딸이 다시 밟은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조사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세부 과제 중 하나다. 경주를 ‘역사문화 창조도시’로 조성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는 경주 현장에서 “전통문화 자원이 문화 융성을 견인하는 핵심 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은 ‘역사도시 경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에 가속페달을 밟아준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만 독자들께, 대한민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고고학 발굴 현장을 찾은 두 번째 사건이 지난해 9월 경주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두 대통령이 공교롭게도 부녀간이라는 것도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째 문화재 현장 방문은, 올해 3월18일 현충사 참배였다. 아산 경찰대학에서 열린 경찰대학생·간부후보생 합동 임용식에 참석한 뒤, 청와대 참모진을 대동하고 이순신 장군 사당인 현충사를 참배했다. 방명록에는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번영과 평화의 기틀을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일을 두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 참배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사이버 테러 등으로 안보 현실이 엄중한 상황에서 조국 수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국민의 단합된 국가안보 의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현충사가 어떤 곳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충(忠)하는 ‘국민’의 이상형으로 이순신을 발견해내면서 이곳을 추모 시설로 재단장했다. 이런 곳을 그의 딸이 찾았다. 대통령 박근혜에게 아버지 박정희의 짙은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는 지적을, 우리는 현충사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1. 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 시사IN,2016. 7. 29.

2.광화문 현판이 ‘박정희 글씨’였다고?

광화문 한글 현판 교체를 두고 정국이 뜨거웠던 적이 있다. 그 현판 글씨의 주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정희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문화재 현장 곳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화문은 조선왕조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이다. 지금 시민들이 보는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된 그 모습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해체·이전되는 수난을 겪었다.

1968년에 복원되긴 했으나 옛 모습과 상이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 데다 위치도 달랐다. 결국 2006년 12월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착수되어 2010년 광복절에 문을 열었다. 참여정부가 착공해서 이명박 정부 당시 완공된 것이다.

이 광화문은 2층 문루 상단 중앙에 ‘光化門(광화문)’이라는 한자 현판을 달았다. 이 대문 하나를 만들어 세우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발생했다. 개중 굵직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모두 현판 문제로 직결된다. 하나는, 현판을 한글과 한자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쟁투였다. 다른 하나는, 우여곡절 끝에 내건 한자 현판(光化門)이 이내 갈라지는 바람에 일어난 부실 복원 논란이었다.

문화재 복원 원칙에 따른다면,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달아서는 안 된다. 광화문의 ‘복원’을 표방한 이상, 처음 모습 그대로 한자 현판을 걸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글 사랑과 한글 전용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광화문’이라는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문화재청 역시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른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한글 현판 문제가 왜 유독 광화문에만 불거졌을까? 문화재 담당 기자로서 그 논쟁을 목도한 나로서도 이 점이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그럴 만한 곡절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복원 이전 엉뚱한 자리에 임시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둔 광화문의 현판에 하필 박정희 친필이 한글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은 조선 말 고종 당시 재건되었지만, 한국전쟁 때 석조 기단 상부의 목조건물인 문루(門樓)가 불타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68년에는 기단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상부의 문루를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 복원했다.

속된 말로 ‘짝퉁 광화문’이다. 하지만 광화문의 상징성 때문인지,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한글로 썼다. 당시 한글 전용 바람이 퍽 거셌는데, 이런 시대 분위기와 한글 현판이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0년에 복원된 광화문과 관련해서도, ‘사대주의 청산’이라는 슬로건 아래 한자 현판을 떼어버리고 그 자리에 한글 간판을 달아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된 빌미 역시 박정희의 한글 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글씨가 하필 박정희 친필이라는 점 역시 ‘논쟁’을 엉뚱한 국면으로 몰아넣는 데 한몫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 시절이었다.

이 논쟁에는, 걸출한 문화재 이야기꾼인 미술사학자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등장한다. 유 청장은 광화문의 한글 현판, 더욱 세심하게는 아마도 박정희 친필 한글 현판의 존속을 주장하는 당시 야당(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과 일전을 벌였다.

그 논쟁 파트너는 공교롭게도 유 청장과 서울대 67학번 동기로 40년 지기라는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나중에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2005년 1월, 문화재위원회는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글씨를 집자(集字:정조가 쓴 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해서 광화문 현판에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같은 달 27일, 김형오 당시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유홍준 청장에 대한 공개서한을 게시하면서 두 사람의 논쟁이 개시된다.

김형오 의원은 이날 서한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승자에 의한 역사 파괴는 막아야 한다”라면서 박정희 한글 친필을 정조의 글씨로 교체할 방침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광화문을 새로 축조한 것도 아니고 원형대로 복구한 것도 아닌데 유독 현판을 왜 바꾸려 하는지 국민들은 선뜻 이해를 못하는 것 같다. (…)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대로 중앙의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광화문 현판을 갑작스럽게 바꿔치기하려는 의도에 대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아가 김형오 의원은 교체되는 한자가 하필 정조의 글씨라는 사실에서도 문제를 찾아냈다.

“유 청장이 노무현 대통령을 정조에 비유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일부의 주장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

김 의원은 사실상 광화문 현판 교체에 대해 ‘참여정부의 박정희 유산 청산 운동의 일환’이라는 의구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덧붙이건대 유홍준 청장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정조에 비유했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

“왜 하필 정조 글씨여야 하느냐”

이에 대해 유홍준 청장은 곧바로 낸 공개 답신에서 “광화문 현판 교체는 이미 1997년에 경복궁 복원 수립 과정에서 결정된 일이며 2003년에는 공청회까지 거친 사안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광화문이 경복궁의 얼굴임을 상기시키면서 “올 8·15 광복 60주년 행사가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서 열리게 될 예정이어서 (현판 교체를) 불가피하게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라고도 했다.

‘교체 대상 현판 글씨가 왜 정조의 것이어야 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안 중 하나”라고 답변했다. 문화재청은 고궁의 품격에 적합한 현판을 위해 현역 대표 서예가로부터 글씨를 받거나, 조선왕조의 대표적 서예가의 글씨 혹은 어필(御筆:임금의 글씨)에서 집자하는 세 가지 방법을 놓고 고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현판을 둘러싼 두 사람의 이런 공방이 진행되는 와중에 유홍준 청장은 또 한 번 설화를 입게 된다. 김형오 의원에 대한 답신 가운데 현충사가 있는 충남 아산 지역사회를 격노시킬 구절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관리하고 있는 아산 현충사, 이곳은 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저는 이곳을 손보거나 (박 전 대통령 친필인) 현판을 떼내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산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특히 아산이 지역구인 집권 열린우리당 소속 복기왕 의원이 이튿날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서 현충사는 박정희 기념관이 아니라는 반론을 펴기도 했다. 사태가 커지자 유 청장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과 멸사봉공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소중한 역사적 공간”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이전 발언에 대해 “부적절한 표현”이자 “오류”였다며 사과도 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세상을 떠난 지 37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 곳곳에, 나아가 광화문이나 현충사 같은 문화재 현장 곳곳에서도 살아 있는 신(神)으로 강림하고 있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광화문 현판이 ‘박정희 글씨’였다고? > / 시사IN,2016. 8. 10.

3.충무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충사 성역화 사업에 공을 기울였다. 본인이 직접 ‘최고 제관’으로 ‘탄신 다례식’을 집도했다. 이순신을 ‘국민의 이상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현충사를 찾았다.

유교 윤리 측면에서 볼 때, 왕조 국가와 근대 국민국가는 그 중심 가치가 판이하다. 왕조 국가의 중심 가치가 효라면, 근대 국민국가의 그것은 충이었다. 물론 이전의 왕조 국가들이 ‘효’ 못지않게 ‘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치는 표리를 이루면서 사이좋게 지내기보다 수시로 격렬하게 충돌하곤 했다. 또한 이럴 때마다 언제나 효가 승리했다. 전통 시대 이데올로그들이 ‘효는 곧 충’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한 까닭은 오히려, 충이 결코 효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충 자체만을 봐도, 국민국가 시대의 충과 근대 이전 시대의 충은 그 대상이 다르다. 왕조 국가에서 충의 대상은 왕이지, 국(國)이 아니었다. 충신은 왕을 위해 죽는다. 하지만 국민국가에서 충의 대상은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국가 혹은 국민이다.

그렇기에 국민국가는 국(國)을 위해 충을 다한 사람들에게 추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충원(顯忠院)으로 불리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 현충원은, 국민국가 대한민국이 내세우는 대표적 국가 추모시설이다.

충남 아산시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사당인 현충사(顯忠祠) 역시 또 하나의 대한민국 현충원이다. 이 사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이후 퇴락을 거듭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사 주도로 중건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한 뒤 대한민국을 본격적인 국민국가로 개조해가는 과정에서 현충원에 버금가는 추모 시설로 거듭난다.

박정희 정권의 성역화 사업을 거쳐 현충사는 1967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당초 현충사는 조선시대의 개인 사당으로, 그 규모 역시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성역화를 통해 새로 문을 연 현충사는 경내 면적만 16만3000평을 헤아린다.

또한 이순신 영정을 모신 본전을 필두로 유물관과 고택, 활터·홍살문·정려 등의 각종 시설이 화려하게 배치되었다. 이순신의 실제 모습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에 그려진 초상 같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충사에 모셔진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른바 표준 영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순신으로부터,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국민의 이상형’을 발견해내려고 했다. 이순신은 박정희를 통해 ‘시민들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국민의 모범’으로 드라마틱한 변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이순신 현창(顯彰) 사업을 벌였다. 이 사업은 2016년 현재까지도 정부 주도로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력으로 환산한 이순신의 탄생일인 4월28일, 현충사 현장에서 거행되는 ‘탄신 다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충무공 혹은 현충사가 갖는 국가 추모시설로서의 위상은 이 행사를 집도하는 최고 제관(祭官)의 면모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 시대의 최고 제관은 박 전 대통령 자신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박정희는 반드시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런 전통은 문민정부 시대에 접어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까지 이어졌다. 김영삼을 마지막으로 대통령들은 한동안 현충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순신을 기린다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비록 최고 제관 자리에서 대통령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이순신의 탄신 다례식에는 국무총리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해 헌작(獻爵)과 헌화(獻花)를 한다.

김영삼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현충사를 멀리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명박을 제외한 다른 대통령들의 경우,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는 공통점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국가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충무공은 ‘멸사봉공의 국민’을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매력적인 존재다. 그러나 현충사에는 박정희의 향이 너무도 짙게 남아 있다.

1995년을 끝으로 대통령 발길이 뚝 끊긴 현충사에 지난 3월 현직 대통령이 다시 나타났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다. 현충사가 단순히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기념관’ 같은 곳이기 때문이었을까?

김대중·노무현·이명박은 현충사 찾지 않아

지난 글에서 거론한 ‘유홍준 설화’ 역시 이런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아니었을까? 문화재청장 재임 당시 유홍준은 박정희 대통령 한글 친필인 광화문 현판을 한자로 교체하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의 와중에서 그만 엉뚱한 현충사 문제를 건드려 호된 비판을 자초했다.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과 같은 곳”이라는 표현에 따른 설화가 커지자 서둘러 봉합에 나선 그는, 마침내 잘못했다며 고개를 숙이기에 이른다. 유홍준 당시 청장이 뭇매를 맞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한다.

첫째, 누구나 알지만 차마 입에서 꺼내지 못하는 말을 해버렸다.

둘째, 박정희와 국민을 혼동했다. 적어도 외형적 차원에서 현충사는 박정희의 개인 기념관이 아니라 ‘국민의 전당’이며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짓말하지 마라’ ‘진실하라’ 등은 우리 사회의 정론이지만, 사실 진실만큼 거북하고 불편한 것도 없다. 유 청장의 발언은 그의 속내인 동시에 현충사(혹은 그곳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드리운 박정희의 그림자)를 향한 우리 사회 일각의 ‘반항심’이기도 할 것이다.

현충사는 누가 뭐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바람직한 국민의 이상형을 찾는 과정에서 그 배양처로 주목해 대대적으로 재단장한 곳이다.

이는 한편으로, 이순신과 현충사에 짙게 드리운 ‘국민’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할 책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면 언제나 이순신과 현충사가 호명되곤 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사심이 없는 삶을 산 절대의 충신, 국민의 이상으로 그려진다. 이런 이순신에게 시민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국민’ ‘국가’라는 집합명사와 추상명사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 더 나아가 요즘 각광받는 가치인 정의를 질식하게 만드는 독소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국민 혹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압과 폭력이 자행되었던가? 그 질식의 굴레에서 이순신과 현충사를 구출해야 한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3.충무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 / 시사IN,2016. 8. 17.

4.두 ‘박통’이 추진한 경주 국책사업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신라왕경 사업 마스터플랜’을 보면 2035년까지 1조5000억원을 경주에 투자할 예정이다. 그런데 사전 승인을 해야 하는 문화재위원회가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겨냥한 대한민국 ‘정신의 수도’는 경주였다. 그의 집권기에 남북한은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정통성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부문에서는, 북한이 고구려를 앞세운 데 비해 남한은 ‘신라 중심주의’로 부를 만한 사관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민족이 하나로 되는 발판을 마련한 ‘민족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7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착수한다. 신라 중심주의 사관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이 사업 결과를 통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경주가 출현했다. 이 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앞으로 차근차근 살필 것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과 더불어 경주 지역 인사들을 주축으로 추진 중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정비·복원사업 종합기본계획(이하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박정희 시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심화 버전이다. 사업 규모와 기간, 그 내용 등으로 볼 때, 부녀가 각각 착수한 과거와 현재의 두 국책사업은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케 할 만큼 닮았다.

박근혜 정권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에 따라, 신라의 천년 왕성인 월성에서는 이미 발굴이 시작되었다. 황룡사 터 인근에 대한 발굴 작업도 속도를 내는 중이다.

1975년 7월 박근혜 영애(가운데)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해 신라 금관을 보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유감스럽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 사업의 기본 계획이 확정·공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업 전담조직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이하 추진단)’은 2014년 4월 말, 국무총리 훈령을 통해 공식 출범했다. 이미 몇몇 유적지에서는 집행 단계에 들어가 있다.

추진단의 설치 목적은 ‘장기적 난제 사업으로 대통령 지방 공약인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 사업의 중앙-지방 간 협업을 통한 본격 추진’이다. 4급 단장 아래 3팀,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문화재청 6명, 경주시 4명, 그리고 문체부와 경북도에서도 각각 1명씩 파견되어 활동 중이다.

이런 추진단 구성은 여러 모로 1970년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박정희 시대의 ‘추진단’은 청와대 경제수석이 단장을 맡은 명실상부한 범정부 기구였다. 이 같은 전례와 비교해보면, 지금의 신라왕경 추진단이 약간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추진단이 수행할 ‘신라왕경 골격 복원을 통한 천년고도 경주의 정체성 회복 및 역사문화 자원의 가치 증진과 적극적 활용기반 구축’ 사업은 그 내용을 보면 결코 박정희 시대의 그것에 못지않다.

무엇보다 당초의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사업 기간이 2014~2025년도로 12개년에 달한다. 총사업비는 9450억원으로, 이 중 국비가 6615억원이며 나머지 2835억원은 지방비다. 사업 대상지의 전체 면적은 196만9400㎡(약 59만5743평)다.

박정희 시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문화재 조사·복원 및 정비를 표방하긴 했으나 사실은 보문관광단지 개발이 사업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이번 신라왕경 기본계획은 순수한 문화재 관련 사업으로 관광 부문은 빠졌다. 그런데도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을 계획이라는 점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문화재 사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이후 계획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일단 사업 종료 연도를 2025년에서 2035년으로 10년 늘렸다. 당초 사업 기간인 ‘2014~2025년’을 중단기로 묶고, ‘2026~2035년’ 10개년 계획을 추가한 것이다. 추진단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4991억원으로 예상한다.

정리하자면, 박근혜 정부는 2035년까지 1조5000억원 정도를 투입해서 경주에 “역사·문화유산의 가치 재창출을 통한 천년 역사도시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려 한다. 사실상 경주의 경관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발상이다.

이런 계획 수립과 병행해서 이미 지난해 6월에는 8개 핵심 유적에 대한 중·장기 발굴계획을 수립했다. 앞서 말한 대로 월성 일원과 황룡사 터 인근에서는 이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삐걱거림이 발생했다. 추진단에서 마련한 ‘신라왕경 사업 마스터플랜’에 문화재위원회(문화재위)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추진단의 사업 대상 지구들은 거의 전부가 ‘문화재 보호구역’이다.

이런 구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개발과 ‘현상 변경 행위’에는 문화재위원회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 추진단은 지난 5월11일, 2년에 걸쳐 야심차게 마련한 마스터플랜을 문화재위에 제출했다. 문화재위 측은 심지어 추진단의 설명을 들은 뒤 계획서 자체의 수령까지 거부하고 말았다.

1964년 문화재위 출범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문화재위가 추진단이 마련한 사업 내용을 ‘위험’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다.

2013년 10월 경북 경주시청에서 열린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 업무협약식.

문화재위원회는 사업계획서 수령 자체를 거부

그렇다면 문화재위는 과연 어떤 내용을 문제 삼았을까? 문화재위는 이 사업 추진 단계에서부터 ‘복원’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사실 신라왕경 유적을 조사하고 정비하는 사업이라면 반대할 필요가 전혀 없다.

문화재위 역시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조사·정비를 토대로 왕경 유적을 ‘복원’한다니? 문화재위원이라면 누구도 이른바 복원에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추진단은 ‘철저한 고증 연구를 통한 체계적인 발굴조사 진행 및 복원·정비사업 추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고증하고 연구한다 해도, 예컨대 이미 몽골 침략 당시 불타버린 황룡사 9층 목탑을 신라 시대 모습 그대로 다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혹 세운다 한들 그것은 21세기의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목탑에 지나지 않는다.

추진단이 내놓은 마스터플랜을 보면 곳곳에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같은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 예컨대 신라 왕궁의 별궁 터인 동궁과 월지(안압지) 권역에서는 2021~2025년도에 정전(正殿)과 편전, 중문과 회랑을 복원하겠다고 한다.

황룡사 역시 현재까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거의 모든 건물 기초 위에 강당이며 그 부속 건물, 중문과 담장은 물론이고 논란이 분분하기 짝이 없는 9층 목탑까지 만들어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런 계획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장차 경주평야 한복판에서 ‘황룡사 터’가 아니라 ‘신라 시대의 황룡사’라 자처하는 실제 사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화재위가 이런 계획들에 분노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상상의 역사도시 경주’는 이렇게 해서 일단 퇴짜를 맞았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4.두 ‘박통’이 추진한 경주 국책사업 > / 시사IN,2016. 8. 24

5.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를 망가뜨리는 박근혜 정부

박근혜 정부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경주를 역사문화유산 도시로 개발하려 한다. 이에 따라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나서자 문화재청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경주를 지탱한 힘 중 하나가 학생들의 수학여행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시작해 그 정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경주를 역사도시를 넘어 관광도시로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되었다.

이 개발계획을 통해 경주에는 비로소 보문단지가 생겨났다. 국제회의도 개최하고 골프장까지 있는 관광단지 말이다.하지만 ‘수학여행지=경주’ 등식이 깨지자 경주는 허덕이기 시작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하면서 경주는 급격히 동력을 상실했다.

파르테논과 콜로세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웃 나라 만리장성과 진시황제 병마용갱 앞에 경주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첨성대는 뒷전으로 밀렸고, 경주 시내의 무수한 신라 시대 거대 무덤들은 그보다 몇십 배 크기인 피라미드 앞에 주눅 들고 말았다.

경주는 더 이상 수학여행의 도시가 아니었다. 경주에는 암흑과도 같은 나날들이었다. 천년 왕국 신라의 도읍이라는 경주에 볼거리가 무엇이 있느냐는 지역사회의 볼멘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경주시가 주축이 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은 그렇게 누적된 불만들이 한군데로 응축되어 폭발한 결과물이었다. 앞선 글에서 소개했듯 이 계획에 따르면 향후 경주는 2035년까지 1조5000억원을 투입해 역사문화유산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경주 사람들은 이 정도 투자는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뒤에는 문화재에 짓눌린 개발 욕구 억제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려 한 경주경마장 건설계획도 보상 측면이 강했으며,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주민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해 유치를 결정한 것도 그동안 쌓인 피억압 심리의 표출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신라왕경 종합계획은 대선 공약사업 중 하나다. 이 계획 역시 경주 지역사회 여론 무마용이라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19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이 박근혜 영애(앞줄 왼쪽)와 함께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 유람선에 시승해 둘러보고 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를 통한 경주 역사문화유산도시 재생사업이 박 대통령 자신의 구상에서 나왔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주에 대한 유별난 관심이라든가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이미 진행 중인 경주 월성 발굴 현장을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직접 찾기도 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이 사업에 대한 관심이 큰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앞선 글에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재 현장에는 세 번 참석했다고 썼다. 숭례문 복구 완공식 참석과 월성 발굴 현장 방문, 아산 현충사 참배를 들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중요한 사건 하나가 빠졌다.

2013년 12월2일, 박 대통령은 안동에서 도지사의 경북도 업무보고를 받고 곧바로 헬기를 이용해 보문관광단지에 도착해 오후 1시30분 석굴암을 찾아 10여 분간 본존불을 참배하고 둘러봤다. 그해 5월에 완공한 숭례문이 부실로 복구되었다 해서 한창 전체 문화재 관리가 부실 논란을 일으킬 때였다.

석굴암 역시 대좌(臺座)에 균열이 가고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만큼 위험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석굴암을 둘러본 뒤 박근혜 대통령은 밖에서 기다리던 관람객들에게 “걱정이 돼서 왔는데 설명을 들으니까 석굴암이 생각보다는 보존에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방문은 박 대통령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문화재에 대한애착이 더 각별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일 수 있다. 문화재 애호가 유별났던 박정희의 딸이라는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적극적인 행보일 수 있다

2013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이 균열 논란을 빚은 석굴암 본존불을 둘러보았다.

한데 이 방문을 경주 지역 인사들이 지나칠 리 만무했다. 대통령을 향한 전방위 로비에 나섰다. 예컨대 경주가 지역구인 정수성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황룡사 복원과 쪽샘지구 정비 등을 건의했다. 최양식 경주시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 가족이 경주에서 찍은 사진첩을 대통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경주 지역 인사들의 움직임을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구애’라고 폄훼할 수는 없다. 그만큼 이들에게 경주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절박했으며, 그러한 관심은 곧 그들이 꿈꾸는 경주 역사도시의 건설로 가는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버금가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기본계획’이 박근혜 대통령의 석굴암 방문을 계기로 결정적인 탄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경주 지역 인사들의 건의에 박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건의 내용을 뜯어보면 대통령이 결코 반대할 수 없는 사안들이다. 황룡사를 복원하고 고(古)신라 시대 고분 밀집지역인 쪽샘지구를 정비하겠다는데 이를 어떻게 하지 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라는 직접 지시는 안 했을지 몰라도, 최소한 잘해보라는 말 정도는 했을 것이다.

문화재위원회, “복원이 아니라 역사 왜곡일 뿐”

실제로 이후 이 사업의 진행 상황을 보면 대통령의 석굴암 방문이 경주를 ‘개조’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게 했음은 분명하다. 저 종합기본계획은 정수성 의원과 최양식 시장 주도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를 주도하는 경주 지역 인사들이 그리는 경주 그림이 문화재청과 그 주변 문화재위원회(이하 문화재위)가 구상하는 경주 그림과는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수성 의원은 지금은 터만 남은 황룡사를 ‘복원’하겠다고 했다. 그 터에 가면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으니 유적의 ‘가시화’를 위해서라도 전체 높이가 80m에 달했다는 목탑도 세우고, 그 뒤쪽으로 금당도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규모로 ‘재건’하며, 이들 전면에다 내부로 통하는 남쪽 대문인 중문(中門)도 만들고, 담장도 둘러쳐서 신라 시대 황룡사라고 할 만한 품격을 갖춘 볼거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최양식 경주시장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재위가 이를 용납할 리 만무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복원이 아니라 역사 왜곡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원한 황룡사, 혹은 안압지 일대 동궁(東宮)은 21세기 상상의 역사 세트장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화재위는 경주시가 사업 추진 대상으로 삼은 경주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임을 강조한다.

세계유산의 존재 기반이 되는 세계유산협약은 유적의 진정성(authenticity)을 강조한다. 이 진정성이라는 가치로 본다면 복원하는 황룡사나 동궁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위가 복원을 포함한 경주시의 신라왕경 종합정비계획을 접수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5.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를 망가뜨리는 박근혜 정부 > / 시사IN,2016. 9. 2

6.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이 정답일까

박근혜 정부의 대규모 경주 개발 프로젝트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

정비사업’은 월성에서 시작되었다. 월성은 900년간 신라의 왕성으로 한국 고고학계의 성지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신중한 조사가 필요한 곳이다.

지금 경주는 파헤쳐지고 있다. ‘천년 왕성(王城)’이라는 월성(月城)도 마찬가지다. 기록적이라는 무더위 와중에서도 삽질은 멈출 기미가 없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하는 월성 발굴 조사 현장에 동원되는 인부만 매일 100~150명을 헤아릴 정도니, 그 발굴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월성 같은 이른바 ‘관급’ 발굴 현장에서는 하루 노임(8시간 기준)이 5만4000원이다. 인부들을 감독하는 발굴반장은 5만9000원. 굴삭기를 쓰는 데는 하루 40만원이 든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월성 현장에만 노임과 굴삭기 비용으로 하루 700만원 안팎이 지출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대규모 경주 개발 프로젝트인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라는 기관차는 이미 월성에서 기적을 울리며 선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최종 계획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역사 도시 경주를 개조하기 위한 움직임에서 월성 발굴은 여러모로 상징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월성은 한국 고고학계의 성지 같은 곳이다.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월성을 파보고 싶어 했지만, 섣불리 삽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천년 왕성이라는 역사의 무게가 막강했다.

다른 모든 유적이 발굴의 손길을 피해 가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월성만은 손 한번 타지 않은 황무지 같은 곳으로 남아 있었다. 주의해서 신중하게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사를 완료하는 데만 50년이 걸린다고 했다. 어떤 고고학도는 100년을 두고 하나씩 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4월12일 경주시 보문관광단지를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던 박근혜 대통령. 부녀 모두 경주 문화재에 관심이 컸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월성에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이라는 계획이 입안되기가 무섭게 발굴 인부를 투입해서 성지를 파헤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지하에 문화재가 분포하는 양상을 점검하는 수준의 시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2016년 8월 현재 전체 22만2528㎡에 달하는 월성 내부 구역 중 이미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뒤집고 말았다. 이 정도의 속도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같은 속도라면, 박근혜 대통령 임기 안에 ‘월성 발굴이 완료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적중할 듯하다.

도대체 이 속도전의 정체는 뭘까?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기간 문화재 전문기자로 일한 나 역시 모르겠다.

그렇다면 월성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대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조에 따르면, 이 임금 재위 “22년(서기 101)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했다. (그해)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라고 했다.

신라사 중간에 부침과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이후 월성은 신라 멸망에 이르기까지 좀 더 정확히는 900여 년간이나 굳건히 왕성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신라 천년 왕성’이라 불린다. 한마디로 월성은 천년 왕국 신라를 증언하는 지역이다.

이런 월성이기에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 역시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월성 내부에 대한 조사는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주변만 몇 군데 파보았을 뿐이다.

그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면, 일제의 병탄 직후인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는 성벽을 시범 조사한 끝에 그 하부에 있는 토층 5개를 확인했다. 또한 뼈로 만든 화살촉과 숯으로 변한 곡물, 그리고 토기 조각 등을 수습했다.

이것이 첫 조사다. 이후 박정희 시대에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확정된 이후, 1979년부터 이듬해까지 동문 터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해 그 흔적을 확인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에는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모양의 방어 시설인 해자에 대한 집중 조사를 벌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그 해자를 복원해놓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의 전부다.

지난 3월30일 공개된 경주 월성 정밀 발굴 조사 현장.

8월 현재 기준 전체 월성 구역 중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 파헤쳐졌다.

월성 개발 계획의 ‘데자뷔’

물론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려는 계획은 꾸준히 나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미술사학도 출신 유홍준 문화재청장 주도로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기로 계획한 바 있다.

2007년 2월 초, 유홍준 당시 청장은 월정교(月精橋:원효 대사가 요석 공주를 만나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 복원, 쪽샘지구(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 정비 등과 함께 월성 내부 발굴 조사를 시행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경주뿐 아니라 공주·익산 등 고대 왕국의 다른 도시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도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입안 단계에서 끝나고 말았다.

좀 더 멀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월성 발굴은 물론 복원까지 추진하려고 계획했다. 1971년 수립되어 그 이듬해 개시된 이 계획에 따르면, 월성에 대해서는

“경내 사유지를 매입하고,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를 노출시키고, 보도를 개수하고, 잔디를 심고, 주위 토성에 나무를 보식(補植)하며, 화장실을 개축하고, 궁전의 규모를 연구하여 모형을 전시하며, 남천(南川)에 석교(石橋)를 복원”하기로 했다.

나아가 “1976년 이후에 월성의 궁전 구조물을 연구하여 복원이 가능하면 복원한다”라는 방향도 확정했다.

그러나 월성 내부를 발굴 조사하고 궁전 건물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박정희 집권기에도 시도하지 못했다.

주의할 점은 박정희 시대에 제시된 월성 개조 계획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박근혜 정부의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과 겹친다는 사실이다. 우선 월성 남쪽 성벽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흐르다가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남천에 석교를 복원하기로 했는데, 이는 신라 시대의 일정교(日精橋:밤마다 연인을 찾아가는 과부 어머니를 위해 아들 칠 형제가 놓았다는 돌다리)와 월정교를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특히 월정교는 복원이 사실상 완료된 상태다. 나아가 월성 내부를 발굴하고, 장기적으로 신라 시대 궁궐을 복원한다는 발상 역시 박정희·박근혜 시대의 경주 개조 계획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 아버지가 계획만 세웠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한 월성 내부 발굴 조사와 왕궁 복원 계획을 실제로 밀어붙이고 있다. 결정적으로 부녀가 다른 점이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6.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이 정답일까 > / 시사IN,2016. 9. 8.

7.박정희의 황당 지시 “왕성 터에 호텔 지으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신정 연휴를 경주에서 보냈다. 황룡사 발굴

현장을 찾았던 그는 ‘반월성을 발굴하고 영빈관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 신라 천년 왕성에 호텔이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1979년 1월6일,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 1면에는 ‘부산·경주에서 신정 연휴 보내’라는 제목으로 1단짜리 박정희 대통령 동정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두 영애(令愛) 그리고 영식(令息) 지만 생도 등 가족과 함께 부산과 경주에서 신정 연휴를 보낸 뒤 5일 오후 상경했다.”

박정희의 신정 연휴 행적도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박 대통령은 경주에서 황룡사터 발굴 현장 분황사 석탑 등 고적을 둘러보고 보문관광단지 현장도 살펴봤다.” 그의 동선과 관련된 사진도 게재되어 있다. ‘경주코오롱호텔 쇼핑센터에 들러 기념품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 신정 연휴는 1월1~3일이었다. 적어도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박정희는 연휴 기간 이후에도 경주에 계속 머문 셈이다.

박정희의 행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다른 자료도 있다. 같은 날(1979년 1월6일) 아침에 나온 〈조선일보〉 〈경향신문〉 기사다. 이 신문들 역시 〈동아일보〉와 동일하게 1면의 같은 자리에 1단으로 대통령 소식을 전했다.

박정희가 신정 연휴 동안 “부산 동래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를 참배”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기사에는 ‘큰 영애, 지만 육사 생도’와 함께 황룡사지 출토 유물들을 살피는 장면이 사진으로 첨부되었다. 두 신문에 나온 ‘큰 영애’는 박근혜 현 대통령이다. 당시 박지만씨는 육사 생도였다.

〈매일경제신문〉 1면에도 같은 내용의 대통령 동향이 실렸다. 게재 사진은 〈경향신문〉에 실린 것과 같다. 아마 청와대 측에서 찍어 언론사에 배포했을 것이다.

경주보문단지에서 외교사절들과 다과를 나누며 담소하는 영애 박근혜.

박정희가 이 기간에 둘러봤다는 동래 충렬사는 어떤 곳인가?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군에 맞서 싸우다 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부산진첨절제사 정발(1553~ 1592) 등 전근대 부산의 호국선열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조선 시대에 세워진 뒤 퇴락 일로에 있던 충렬사 역시 박정희 시대에 대대적인 개·보수(한창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되던 1976년 이후 1978년까지)를 거쳐 재단장되었다. 순국선열을 현창하고 이를 통해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들어내고자 한 박정희의 역사관이 잘 읽히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경주에서 황룡사 발굴 현장과 분황사를 찾았다. 황룡사터 발굴 유물을 둘러보는 사진으로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황룡사 발굴 현장에서 일하다가 박정희를 영접한 바 있던 최병현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1979년 1월6일자 〈경향신문〉 1면.

“그해는 박 대통령이 시해된 1979년이라 잊을 수가 없지. VIP(대통령)가 (1978년) 12월에 황룡사 발굴 현장에 뜬다 해서 다들 긴장했지. 근데 웬걸? 12월 말이 되어도 안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김정기 (문화재연구소) 소장이고, 김동현 (황룡사 발굴) 단장이고 뭐고 대기하고 있다가 다들 서울로 철수하고 현장 사람들만 대기했지.

그러다가 신정 연휴가 되었어. 그땐 연휴가 사흘간이었잖아. (다른 동료들과 함께) 연휴 때 대기했더니 (대통령이) 내내 안 오더라고? 그러다 (1월) 3일 저녁에 ‘에이 상황 끝났다’ 하고, 성질도 나고 해서 (퇴근한 뒤) 술을 왕창 퍼마셨지.

한데 웬걸? 그 이튿날 출근했더니 아침 9시30분인가 떡하니 VIP가 현장에 들이닥친 거야. 아마 불국사 쪽 코오롱호텔에서 주무시고 황룡사로 들어오는 모양이더라고? 그해 가을인가 보문관광단지에서 아스팍(ASPAC

)인가 하는 무슨 국제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는데, 그걸 사전 점검한다고 대통령이 떴어.”

최병현 교수의 기억에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박정희가 당시 사전 점검한 국제회의는 아스팍이 아니라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였다. 그해 4월, 서울에서 열리는 PATA 제28차 총회의 워크숍이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각하 분부 말씀’에 발칵 뒤집혀

이 국제회의의 유치와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다. 유신 시대 말기인 1979년 초, 갈수록 독재로 치닫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이 험악하던 시기였다. 국제회의의 성공적 개최는 정권의 이미지 쇄신에 큰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박정희가 PATA 총회와 워크숍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1978년 12월에도 보문관광단지에 들러 단지 조성사업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국제대회 개최를 철저히 준비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보문관광단지는 PATA 워크숍이 예정되어 있던 곳이다. PATA와 이를 둘러싼 정권 차원의 관심은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 그중에서도 보문관광단지 조성 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77년 9월 불국사 경내에서 수학여행 온 남녀 학생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그런데 박정희가 다녀간 직후 경주를 발칵 뒤집는 일이 터졌다. 청와대에서 내려온 ‘대통령 각하 분부 말씀’에 느닷없이 ‘반월성을 발굴하고 영빈관을 지을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년 왕성에다가 외국인 접대용 호텔을 지으라니? 난리가 날 만한 ‘끔찍한’ 지시였다. 다시 최병현 교수의 회상이다.

“그 분부 말씀은 내가 공문서를 직접 봤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해.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어.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알아보니 경주시장 소행이었어. 당시에는 대통령이 지방을 순시하면, 경주의 관련 기관장들이 대통령을 모시고 만찬 같은 자리를 마련해. 당시 경주시장이 김창곤씨라고 기억해.

그때 두 번째로 임명직 경주시장을 하고 있을 때야. (문화재관리국 쪽의) 민현식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이 당연히 참석했지. 민 소장한테 나중에 들으니 그 만찬장에서 사달이 벌어진 거야.

김창곤 시장이 엉뚱한 소리를 잘 하거든. 대통령이 기관장들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보라고 했을 거 아냐? 한데 김창곤 시장이 그 자리에서 ‘각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는 이것도 발굴하고 저것도 발굴하기로 돼 있는데, 정작 월성은 아무런 조사도 없습니다.’ 이랬다는 거야.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경주를 다녀간 직후에 저런 지시 사항이 내려온 거야. 그때 누가 감히 박 대통령 말을 거역해?”

하지만 월성 내부를 조사하고, 그곳에 영빈관을 지으라는 ‘대통령 분부 말씀’은 결국 유야무야됐다. 신라 천년 왕성에 5성급 호텔이 들어섰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7.박정희의 황당 지시 “왕성 터에 호텔 지으라” > / 시사IN,2016. 9. 22.

8.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깔려 있었다.

활성 단층대 위에 놓인 경주는 요즘 계속된 지진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관광객도 크게 줄어든 것 같다. 온통 학생들로 들썩이던 수학여행의 계절인데도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등의 주변이 한산하다. 음식점 주인들은 한숨만 쉬고 숙박업소마다 빈 객실이 넘쳐난다. 경주를 한국의 대표 관광도시로 키우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재의 광경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일정은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인 10월24일에 경주 보문관광단지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해 4월6일 1단계 개장을 완료한 상태였던 보문단지를 다시 점검·시찰하러 간 것이다.

한국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공사에서 당시 개발이사로 재직 중이던 고 최귀남씨는 그날 대통령을 보문단지 현장에서 영접한 사람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전날 대통령이 보문단지에 뜬다는 전갈을 받은 뒤 밤차를 타고 경주에 도착해 대통령 맞을 준비를 했다.

박정희는 다음 날 오후 3시쯤 나타나 보문단지 순시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상가 단지 앞에 차를 세우고 건물 색조 하나하나, 식재된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나아가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을 때를 대비해 야외극장을 활용할 여러 가지 프로그램 개발과 쾌적한 휴양지, 다시 찾는 휴양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경주개발동우회 〈그래도 우리는 신명 바쳐 일했다〉 121쪽, 고려서적, 1998).

1973년 7월3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세 번째)이 경주 지역 유적 발굴조사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박정희는 대통령 재임 기간 툭하면 경주를 찾았기에 이 방문이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겨우 이틀 전에 보문단지를 방문한 박정희의 행적은 자신이 만들고 집착했던 작품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필연 같은 우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주를 향한 박정희의 꿈은 매우 담대한 것이었다. 천년 수도에 포진한 신라 시대 문화재를 관광산업과 접목해 죽은 도시를 재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박정희 자신이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입안했으며,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 10월26일까지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다.

이런 측면에서 경주 개발은, 박정희 정권이 집권기 내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제개발과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요한 부문이었다. 일종의 산업 육성 차원에서 경주 개발을 추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경제개발에 절실히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자는 경제 논리가 튼실하게 깔려 있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경주를 시작으로 설악산·제주도·한려수도 등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만 다른 관광지와 달리 경주 개발에는 ‘국민정서 함양’이라는 목적이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신라의 삼국 통일 정신을 본받아 남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자는 등 신라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이렇게 정권의 정치적·산업적 의지가 복잡하게 얽힌 경주 개발 계획의 중심부에 보문단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관광산업 육성 의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1970년대 후반 들어서다. 1978년 11월27일 오전 8시20분, ‘대망의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그해 100만 번째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미국 여성 바버라 존슨(당시 59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KAL 005편으로 김포공항에 들어왔다가 뜻하지 않은 환대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바버라 존슨이 실제로 1978년의 100만 번째 외국인 관광객은 아니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교통부와 관광공사가 홍보 효과 극대화를 위해 해당 항공기 승객 가운데 미국인 여성을 미리 선정해놓았다. 당시 외국 관광객 가운데 절대다수를 점하던 일본인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1979년 10월11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 보문단지에 주한 외교사절들을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2000명 외국인 손님에 긴장한 1979년 경주

이토록 ‘관광입국(觀光立國)’에 대한 열망이 거셌으니, 제28차 아시아태평양관광협회(PATA) 총회 및 제19차 워크숍(1979년 4월 중순 개최) 유치에 성공했을 때 한국 정부와 관광업계가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은 연례 국제행사인 PATA 총회를 1965년에 이미 한 차례 개최한 바 있다. 하지만 이후 관광산업을 보는 한국 측의 시각이 달라지고, PATA 총회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한국이 유치한 1979년 총회의 경우, 참가단 규모가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예상됐다.

당시까지 한국은 이 정도의 인원이 참가하는 국제회의를 단 한 번도 개최해본 적이 없었다. PATA를 준비하는 자세와 열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그것에 못지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PATA 대회의 장소는 두 군데로 확정됐다. 4월16~18일 총회는 서울에서, 4월20~21일 워크숍은 경주에서 열렸다. 경주 워크숍 장소가 바로 보문관광단지였다. 지금은 ‘육부촌’이라 불리는 경북관광공사 관할 ‘컨벤션센터’다.

물론 경주 개발 계획이 처음부터 PATA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다. PATA의 한국 개최가 확정된 것은, 경주 개발 계획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6년 4월21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5차 PATA 총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PATA는 경주 개발 계획, 특히 보문단지 조성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다. 대회를 코앞에 둔 4월6일, 보문단지가 1단계로 서둘러 부분 개장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시 사정을 회고하면서 고 최귀남 국제관광공사 개발이사는

“1979년 초순경 공정에 쫓기는 모든 관계자가 이곳저곳에서 바삐 움직이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는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당시 자욱한 먼지에 덮인 보문관광단지는, 포성이 연달아 터지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박정희는 1979년 2월6일 교통부를 연두 순시한 자리에서 ‘성공적인 PATA 회의 개최를 위해 정부 각 부처나 관광공사가 적극 협조하여 회의를 잘 치르도록 하라’고 당부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78년까지만 해도 골조 공사 단계였던 보문단지 내 컨벤션센터와 상가가 대회 직전에 완공되었다. 경주조선호텔과 경주도큐호텔도 PATA 회의 직전 문을 열 수 있었다.

4월16일부터 진행된 PATA 총회와 워크숍의 참가단 규모는 역대 최대인 43개국 2424명(국내 대표 499명 포함)에 달했다. PATA 총회 역사상 참가 인원 2000명을 최초로 넘긴 성공적 대회였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8.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 / 시사IN,2016. 10. 7.

9.경주 복원 지휘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

지난해 작고한 김정기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을 듬뿍 받은 문화재 원로 인사이다. 그는 한국 고고학 현장에 처음으로 실측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석굴암·불국사 등 주요 문화재 복원을 진두지휘했다.

지난해 8월26일 저녁 7시30분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한 주택에서 한 노인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향년 85세. 그는 ‘한국 문화재 부문의 박정희’라고 불려 마땅한 인물이었다. 철권통치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쩌면 평범한 고고학도요 고건축학자에 지나지 않을 그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노골적으로 챙길 정도였다.

그도 이 같은 박정희의 ‘애정’에 충분히 보응했다. 이 고고학도이자 고건축학도는, 10·26 이후에도 박정희를 회고할 때마다 ‘각하’라는 호칭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창산(昌山) 김정기다.

박정희만큼 논란이 많은 한국 현대사 인물이 또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박정희라는 이름만 나와도 흥분하기 일쑤다. 그런데 고고학계에서 저세상에 갈 때까지 박정희를 ‘각하’로 불렀던 김정기를 비난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어떻게 보면 좀 기이한 일이다.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미 고인이 되어 박정희를 따라갔으되, 김정기는 문자 그대로 거목(巨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문화재 현장은 없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 복원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바로 김정기다.

불국사 역시 그가 만든 ‘작품’이다. 경주 하면 떠오르는 여러 고고학 유적들, 예컨대 황룡사 터나 안압지, 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한 총책임자 역시 김정기였다.

2013년 2월14일 숭례문 복원 현장에서 김정기 박사(왼쪽)가 복원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해 2015년 8월26일 세상을 떠났다.

김정기의 손길이 미친 곳은 경주만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에 진행된 거의 모든 문화재 발굴 및 보수 현장에는 그의 땀과 피가 스며 있다. 그야말로 현대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였다.

흔히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사람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및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삼불 김원룡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김원룡은 고고학도가 아니라 미술사학도에 가깝다.

더욱이 무령왕릉을 단 하룻밤에 도굴하듯이 발굴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문화재 바닥에서 ‘고고학을 꽃피운 인물’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은 김정기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고 손보기 연세대 교수다.

무엇보다 김정기는 한국 고고학 현장에 실측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지금이야 발굴 현장이라면 실측이 기본이다. 그러나 김정기가 고고학 발굴 현장에 삽자루를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실측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누구도 실측 방법을 몰랐다.

김정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시즈오카 현의 가케가와 중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1950년 마산 공립중학교를 졸업한 김정기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공학부 건축학과에서 공부했다.

이후엔 도쿄 대학 공학부 건축사연구실 조교로 일하면서, 한국의 황룡사 터에 필적할 정도로 저명한 고대 일본의 절터 시텐노지(四天王寺) 터 발굴 현장에 종사했다.

“이 사람이 내가 늘 말하는 김정기 박사다”

1959년 김정기는 국립박물관 보급과 학예연구관으로 채용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문화재 반환 분야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오가던 황수영 동국대 총장의 눈에 띈 것이 귀국의 계기였다.

그러다가 1969년에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문화공보부 외국(外局)인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연구실(지금의 문화재청 국민문화재연구소)이라는 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을 창설하면서 김정기를 초대 실장으로 위촉한 것이다.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조사단. 가운데 흰 모자를 쓴 사람이 조사단장 김정기 박사다.

김정기의 전성기는 박정희로부터 비롯되었다. 박정희가 1971년에 수립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경주 지역 문화재 조사 정비’였고, 이 과업의 시행 주체가 바로 문화재연구실이었다. 당시 문화재연구실은 어느 정부부처보다 각광받는 기관이었다. 박정희가 김정기를 따로 만나기도 했다.

1975년 7월2일, 국립경주박물관 신관(지금의 인왕동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경주 박물관을 신축하는 계획이 확정된 것은 ‘경주개발계획 입안(1971)’ 이전인 1968년이다. 월성 남쪽 부지(1만9826평)에 본관(1815평)과 별관(500평), 성덕대왕신종을 보관하기 위한 종각 등이 들어섰다.

개관식에는 박정희와 딸 박근혜가 참석했다. 홀로 개관식 테이프를 잘랐다. 이런 행사를 마치면, 대통령이 관계자들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는데 박정희가 특별히 부른 사람이 바로 김정기였다.

정양모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아 글쎄, 이 양반(박정희)이 김정기 박사를 부르더니 그 자리서 김 박사한테 금일봉을 주는 거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야? 경주박물관 개관식 아냐? 한데도 박물관 사람들한테는 아무것도 안 주고 박물관과 관계없는 김 박사한테 금일봉을 주는데 참 기분이 그렇더라”

고 회고했다. 정양모 관장은 그때 김정기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과 애정을 체감했다고 한다.

그날 박정희는 박근혜와 함께 신관 개관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당시 경주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에 이어 한반도 최대 고분이라는 대릉원의 황남대총(황남대총은 당시 98호분으로 불렸다)이 발굴되고 있었다.

천마총에서 화려한 금관과 천마도까지 발견했으니, 황남대총에 대한 기대도 컸다. 당시 경주개발계획에서 문화재 분야 업무를 총괄한 기관은 경주개발사적관리사무소(문화재관리국 산하)였다. 그 초대 소장이자 정통 문화 관료인 고 정재훈씨는 이후 문화재관리국장을 맡게 되는데, 생전에 그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대통령이 영애(박근혜)와 함께 98호 발굴 현장에 오셔서 둘러본 일이 있었어요. 당시 발굴단장은 김정기 박사였는데, 대통령께서 영애를 보고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늘 말하는 김정기 박사가 이 사람이다.’

이 증언을 보면,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가족들과 경주 발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정기의 이름을 자주 언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정희가 이렇게 아낀 김정기가 타계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빈소로 찾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는 김정기의 업적을 기려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출처] :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9.경주 복원 지휘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 / 시사IN,2016. 10. 13.

[출처] 『두 朴 대통령 부녀가 사랑한 慶州·文化財 이야기』- ▣두 ‘박통’이 사랑한 경주▣광화문 현판▣충무공▣경주국책사업▣경주 망가뜨리는 박근혜정부 ▣‘박통’에게 특별한 경주▣김정기 박사|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