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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Ⅱ - ▣배롱나무,▣물푸레나무,▣산사나무,▣오동나부·버드나무·귀룽나무,▣회나무,▣소나무,▣자두나무,▣은행나무·전나무·능수버들,▣소나무 연리목·담쟁..

문수봉(李楨汕) 2021. 10. 13. 22:19

『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Ⅱ - ▣배롱나무,▣물푸레나무,▣산사나무,▣오동나부·버드나무·귀룽나무,▣회나무,▣소나무,▣자두나무,▣은행나무·전나무·능수버들,▣소나무 연리목·담쟁이덩굴

13분 

◆『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Ⅰhttps://blog.naver.com/ohyh45/222463858301

1.정선 『寺門脫蓑』-측백나무. 2.김정희 『歲寒圖』-잣나무. 3.이암 『花鳥猫狗圖』-애기동백. 4.정선 『老栢圖』-향나무.

5.김두량 『月夜山水圖』-참나무. 6.정선 『花江栢田』-잣나무 숲. 7.전기 『梅花草屋圖』-매화. 8.신윤복 『四時長春』-살구꽃.

9.신윤복『賞春野興』-진달래꽃. 10.신한평『화조도』-능금나무 꽃. 11.이유신『浦洞春池』-복사꽃.12.이암『花鳥狗子圖』-돌배나무 13.신윤복『井邊夜話』-철쭉·대나무. 14.이인문『牧羊吹簫』-버들. 15.조영석『나무 깎기』- 서어나무.16.신윤복『端午風情』-왕버들. 17.신윤복 『聞鐘尋寺』-느릅나무. 18.(전)이영윤의 『화조도』-치자나무·송악덜굴·소나무· 19.김후신의 『鴨雁圖』-자귀나무.

20.이인문의 『大宅雅會』 -배롱나무·상수리·등나무·소나무·참나무·전나무

◆『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36111366

21.신윤복 『少年剪紅』-배롱나무. 22.김득신 『樹下一家圖』-물푸레나무. 23.심사정 『花鳥畵』-산사나무.

24.정선『仁谷幽居圖』 -오동나무·버드나무·귀룽나무.25.강희언 『士人詩吟』-학자수 회화나무. 26.정선『慶福宮』 - 소나무.

27.신윤복 『巫女神舞』- 자두나무. 28.정선 『林川鼓巖』-은행·능수버들·전나무. 29.이인상 『劒僊圖』-소나무 연리목·담쟁이덩굴

21.신윤복의 『소년전홍(少年剪紅)』 (18C 후반~19C 전반) - 배롱나무

- 젊은 선비에게 잡힌 팔목, 그래도 싫지 않은 듯…

신윤복 ‘소년전홍(少年剪紅·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28.2x35.6㎝,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 신윤복(1758~?)의 ‘소년전홍(少年剪紅·소년이 붉은 꽃을 꺾다)’은 남녀 간의 사랑을 화폭에 담은 대표적인 풍속화다. 엉덩이를 살짝 뒤로 빼고 수줍어하는 여인은 앳된 모습이다. 긴 담뱃대를 문 젊은 선비가 팔을 약간 비틀어 잡아채고 있으나 그렇게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분위기와 어울리게 그림에는 ‘촘촘한 잎은 더욱 푸르고/ 무성한 가지에서 붉은 꽃이 떨어지네’라고 씌어 있다.

화면 왼쪽의 두 그루와 오른쪽 아래의 꼭대기 가지들만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는 지금 막 분홍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다. 가지 뻗음이나 꽃대 달림 및 꽃의 색깔 등이 독특한 배롱나무의 모습 그대로다.

화려한 여름 꽃인 배롱나무가 제철을 만난 듯 피고 있으니 때는 장마가 끝난 대체로 7월 중하순의 지금쯤이다. 가을까지 거의 백 일에 걸쳐 붉은 꽃이 핀다고 다른 이름은 백일홍나무다. 물론 꽃 하나가 백 일을 가는 것은 아니다. 가지 아래서 이어달리기로 꽃이 피어 올라가기 때문에 오랜 기간 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과 괴석의 높이로 나무의 키를 짐작해 보면 2~3m 남짓이다. 배롱나무는 5~7m까지 자랄 수 있으니 아직은 한창 크고 있는 셈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껍질이 매끄러워지며 줄기는 굽고 심하게 비틀리는데, 그림에서는 건강하고 곧게 잘 자라고 있다. 배롱나무 키가 괴석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작아진다. 경사진 땅이다.

선비가 잡아당기면 금방 여인이 안겨버릴 수 있는 위치다. 자라는 풀의 종류는 양지바른 곳이면 조금 건조한 땅에도 흔히 만나는 청사초로 짐작된다. 장마가 막 끝난 계절에서 앳된 모습의 주인공 남녀와 어린 배롱나무, 오른쪽 담 위와 바닥의 풀까지 화면 전체에는 싱싱한 젊음이 서려 있다. 심지어 괴석에 붙어 자라는 식물도 싱그럽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의도인 것 같다.

배롱나무와 괴석과 집 안에서 주로 쓰는 젊은 선비의 사방관 등으로 봐서는 권세 있는 양반가의 후원쯤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원산지로서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배롱나무는 한때 장안의 벼슬아치 저택에 심기도 했으나 근래에 기후가 매서워서 대부분 얼어 죽어 버렸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문일평의 ‘화하만필(花下漫筆)’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이 그림의 배경은 서울이 아닌 남부 지방의 어느 양반가 후원일 가능성이 크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 21.신윤복의 『소년전홍(少年剪紅)』 (18C 후반~19C 전반) - 젊은 선비에게 잡힌 팔목, 그래도 싫지 않은 듯… / 조선일보,2021. 7.30.

22.김득신의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 (18C 후반~19C 초반)‘물푸레나무’

- 여름날의 짚신 삼기와 물레질

김득신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종이에 담채, 27.5x33.0㎝,

리움미술관 소장.

기어 다니는 어린아이를 옆에 두고 근육질 사내는 짚신을 삼으며 아낙은 물레질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득신(1754∼1822)의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다. 가난한 백성이 삶을 이어가는 현장을 옆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온통 상처투성이 고목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펼쳐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준다. 누구나 품 안에 보듬어 줄 것 같은 넉넉함이 화면 가득하다. 나무 잎사귀는 잎자루를 가운데 두고 대여섯 장씩 양쪽으로 달려있다. 전형적 물푸레나무의 특징이다.

이 나무는 마을 사람들에게 보호받아온 당산나무가 아니다. 사립문 밖에서 그냥 팽개쳐진 채 자라다 세월이 흘러 고목이 되어 버린 평범한 나무다. 줄기의 울퉁불퉁하고 굽은 모습은 사내의 근육질 몸과 대비된다. 나무와 사람이 다 같이 질곡의 세월을 함께 했음을 그대로 말해준다.

썩은 구멍이 곳곳에 생겨 있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낮은 높이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가 뻗었다. 나무 아래로는 굵은 뿌리들이 드러났고 주위에는 여기저기 움돋이 싹이 돋아나 자라고 있다. 탈곡이나 도리깨질 등 농작물 수확 과정을 대부분 이 나무 밑에서 한 탓에 땅이 파이고 뿌리가 드러난 것이다.

왼쪽에 여백을 남겨 놓았지만 실제는 작은 개울이 흘렀을 것이다. 물푸레나무는 물가의 수분이 풍부한 양지 바른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오른쪽에도 오두막 생활 공간이 있을 것 같은 구도다.

물푸레나무는 수청목(水靑木)이란 한자 이름대로 어린 가지를 물에 담그면 파란 물이 우러난다. 전체적으로 그림에는 나무 잎사귀와 아낙의 치마, 머릿수건까지 푸른색이 섞여 있다. 혹시 화가가 물푸레나무의 이런 특성을 알고 푸른 물감으로 마무리한 것이 아닐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물푸레나무는 목재 자체도 질기고 잘 휘기 때문에 도리깨 같은 농기구를 만드는 데 흔히 쓰인다. 아마 아낙의 물레도 물푸레나무로 만들었을 것이다.

계절은 한여름이다. 사내는 웃통을 벗어던지고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게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보기에도 시원한 차림으로 짚신을 삼고 있다. 아낙은 긴 치마저고리에 머릿수건까지 쓰고 조선 시대 여인들의 표준 복장으로 물레질 중이다. 더위 느낌은 남녀가 마찬가지일 터인데 아낙의 처지가 안쓰럽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2.김득신의 『수하일가도(樹下一家圖)』 (18C 후반~19C 초반) - 여름날의 짚신 삼기와 물레질 / 조선일보,2021. 8. 6.

23.심사정의 『화조화(花鳥畵)』(1758)

- ‘산사나무’ 열매 익는 여름, 후투티 노래 들리는 듯

심사정, ‘화조화(花鳥畵·1758년)’, 종이에 담채, 38.5x29.0㎝, 개인소장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심사정은 산수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의 나이 52세(1758년) 때 그린 화조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잎사귀가 독특한 나무 한 그루와 점박이 열매, 그리고 머리 모양이 특별한 새 한 마리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그림에는 초여름을 뜻하는 맹하(孟夏)에 그렸다는 글귀가 있지만 배경이 된 계절은 이보다 늦은 양력 8월 중하순으로 짐작된다.

대부분의 나뭇잎은 긴 타원형의 갸름한 모양이 기본이다. 잎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얕은 톱니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림처럼 가운데의 잎맥까지 불규칙하고 깊게 파인 잎은 산사나무뿐이다.

사과나무와 가까운 친척인 산사나무 열매는 작은 구슬 크기로 모양은 사과를 닮았다. 새콤달콤하고 아삭아삭한 사과 맛이 난다. 사람이 간식으로 먹을 수 있으며 열매는 산사자(山査子)라 하여 주요 약재로 쓰인다.

‘산림경제’에는 ‘산속 곳곳에 나는데 반쯤 익어 맛이 시고 떫은 것을 채취하여 약에 넣는다.’고 했다. 약용 혹은 관상식물로서 옛사람들은 흔히 집 근처에 심고 가꾸었으니 화가에게도 친숙했을 터다.

산사나무는 5월이면 하얀 꽃이 무리지어 피어 우리의 늦봄을 한층 환하게 만들어 준다. 곧 꽃이 진 자리마다 초록 열매를 매달아 차츰 굵어진다. 여름이 짙어갈 즈음 열매는 그림처럼 옅은 주황색을 거쳐 가을이면 빨갛게 익는다. 화가는 익어가는 어느 시점을 놓치지 않았다.

열매의 윗부분에는 꽃받침 자국을 나타내는 까만 점이 5개씩 있다. 실제로 산사나무를 포함한 장미과 식물은 5개의 꽃잎과 꽃받침 흔적이 열매에 남는다. 표면에 점점이 찍힌 흰 점은 열매가 다 익어도 그대로 남는다. 잎에서 열매까지 산사나무의 독특한 특징을 화가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산사나무는 실제로 줄기에 드문드문 가시가 있는데, 그림 속에서도 가시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왼쪽으로 뻗은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는 후투티다. 머리의 깃털이 크고 길어서 산(山)자를 2~3겹 중첩시킨 듯 한 모양의 정자관이 연상된다. 후투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옛 그림에 심심찮게 등장하며, 이 그림 외에 작가의 다른 작품 ‘산조간화(山鳥看花)’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후투티는 여름 철새로 오디새라고도 부른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3.심사정의 『화조화(花鳥畵)』 (1758년) - ‘산사나무’ 열매 익는 여름, 후투티 노래 들리는 듯 / 조선일보,2021. 8. 20.

24.정선의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1755년경)

- 오동나무·버드나무·귀룽나무-인왕산 계곡,나무들 곁 아늑한 집

정선,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1755년경)’, 종이에 담채, 27.3㎝ x 27.5㎝,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중기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은 50대 초에서 여든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여 년 살던 집을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로 그려두었다. ‘인왕산 계곡에 있는 아늑한 집’이란 뜻이다. 인왕산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계곡 옆에 서향집을 짓고 겸재 자신은 서재의 문을 활짝 열어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

마당 가운데는 제법 굵은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자라고 왼쪽 담장 바로 앞에는 귀룽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오동나무 앞 어린 버드나무 밑에서 싹튼 머루는 덩굴을 뻗어 큰 버드나무에 걸쳐 있다.

서향집은 여름날 오후가 되면 햇빛이 집 안까지 깊숙이 들어온다. 건물 가까이 오동나무를 심어 햇빛 가림막을 만들었다. 오동나무는 10년이면 높이 10여m에 이를 만큼 빨리 자라고, 커다란 잎이 무성하여 해가림에 안성맞춤이다.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가운데의 버드나무다.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과의 차이점은 가지가 길게 늘어지지 않은 것이다. 옛 그림에서 능수버들과 섞여 자주 만날 수 있다. 오동나무 뒤쪽으로도 2~3그루가 더 있다. 오동나무 앞의 어린 버드나무를 포함하면 4~5그루나 된다.

다섯 그루의 버들을 심고 스스로를 오류(五柳)선생이라고 한 도연명처럼 겸재는 소박한 삶으로 멋과 풍류를 아는 선비를 꿈꾸지 않았나 싶다. 멋스럽게 버드나무에 걸쳐진 덩굴은 머루가 아니면 포도다.

둘은 잎 모양으로는 전혀 구별할 수 없으나 손이 많이 가는 포도보다는 자연적으로 잘 자라주는 머루를 심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머루 덩굴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시렁을 따로 만들어 주지 않고 버드나무에 걸쳐주었다. 더 자연스럽고 운치가 있다.

왼쪽 담장 아래에 연하게 나타낸 줄기와 밑동이 V자로 갈라진 나무는, 그림에서 명확하게 특징을 찾기는 어렵지만 필자는 귀룽나무라고 짐작한다. 지금도 인왕산이나 북악산 일대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활엽수 중 가장 먼저 잎이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이다.

5월에 무리 지어 피는 하얀 꽃도 선비의 정원수로 충분히 품격을 갖춘 셈이다. 아래쪽의 끝만 보이는 잎 넓은 나무는 진한 보라 꽃방망이를 만드는 박태기나무다. 겸재가 앉아있는 바로 앞 나무는 샛노란 꽃이 일품인 황매화로 보인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의 전통 정원에 자라던 대표적인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4.정선의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1755년경) - 오동나무·버드나무·귀룽나무-인왕산 계곡,나무들 곁 아늑한 집 / 조선일보,2021. 8. 27.

25.강희언의 『사인시음(士人詩吟) (18세기 중엽)

- 학자수 회화나무 아래 선비들 시를 읊네

강희언 ‘사인시음(士人詩吟·18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28.2×35.6㎝, 개인 소장.

선비 여섯이 큰 고목나무 아래 모여 있다. 생각나는 시를 쓰고 이를 바라보거나 엎드려 뭘 열심히 적고 있는 선비, 책 한 권을 펼쳐놓고 같이 훑어보는 두 선비, 선 채로 수염을 만지면서 생각을 가다듬는 선비 등이 화면을 구성한다.

어느 늦여름 날 가까운 친구들끼리 단출한 시회(詩會)를 열었다. 각자의 얼굴에서 서로 다른 표정이 읽히지만 모두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지금처럼 세상살이가 각박하지 않아 공부의 절박함이 덜한 탓일 것이다.

그림의 가운데 가지를 넓게 펼친 큰 나무는 옛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회화나무다. 두 아름은 족히 될 곧은 나무줄기는 햇빛에 반사된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명암 대비가 명확하다. 껍질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는 이 나무의 특징을 강조코자 한 것이다.

굵은 뿌리가 노출되어 있고, 줄기 정면에는 썩은 구멍이 보인다. 모두 고목나무의 특징이다. 나무 잎사귀 표현도 오늘날의 세밀화 수준으로 그린 듯 정확하다. 더 확대해 보면 하나의 잎 대궁을 중심에 두고 여러 개의 잎이 좌우로 나란히 붙어있다. 회화나무 잎의 본래 모양새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는 아까시나무와도 닮았다.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들어온 회화나무는 선비들 곁에 흔히 심고 가꾸던 나무다. 고위 관리들은 벼슬살이가 끝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면 마을 앞에다 회화나무부터 먼저 심었다. 궁궐에도 자라는 귀한 나무이면서 다른 이름이 학자수(學者樹, 영어로도 ‘scholar tree’)라 하므로 선비가 사는 곳임을 은근히 자랑할 수 있어서다.

창덕궁 돈화문 안 등의 궁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울의 성균관과 각 지방의 유명 서원이나 향교 등 유서 깊은 우리의 문화 유적에서 회화나무 한두 그루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림에는 배경이 생략되어 있지만 어느 양반 마을 앞에서, 당산나무 기능도 겸하는 회화나무인 것 같다. 선비들의 모임은 근사한 전용 정자 건물이 아니라도 좋다. 넉넉한 해 가림막이 되어주는 회화나무 아래라면 나무의 상징성만으로 선비의 야외 공부 장소로 충분하다.

조선 말기 강희언(1710~1784)의 작품이다. 중인 출신으로 관상감의 관리이면서 풍속화에 능한 독특한 이력의 화가다. 뒷날 붙인 이 그림 제목은 사인시음(士人詩吟)이다.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시를 읊는다’는 뜻이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5.강희언의 『사인시음(士人詩吟) (18세기 중엽)) - 학자수 회화나무 아래 선비들 시를 읊네 / 조선일보,2021. 9. 3.

26.정선, 『경복궁(慶福宮)』 (1754년경) - 궁궐 불탄 자리에 소나무 곧고 푸르러라

정선 『경복궁(慶福宮)』 ,1754년경, 비단에 담채, 16.7x18.1㎝,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은 조선 말기 다시 지을 때까지 오랫동안 거의 폐허였다. 불타고 150여 년이 지난 영조 30년(1754)경 78세의 겸재 정선은 경회루 일대를 화폭에 담는다. 그림 위쪽 빽빽한 솔숲 앞에 보이는 돌기둥은 무너진 경회루다. 곧은 줄기가 쭉쭉 뻗은 큰 소나물 40여 그루가 숲을 이룬다.

그러나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원래 휘고 구부러진 모습이다. 가까운 거리라 같은 솔 씨에서 싹이 텄을 것임에도 경복궁은 이렇게 곧은 소나무가 되었다. 경회루 뒤쪽은 땅이 깊고 소나무가 좋아하는 사질 양토에 사람 출입까지 제한되어 있으니 곧게 잘 자랄 수밖에 없다.

왼쪽 끝 연못 바로 아래 V 자로 갈라진 고목은 느티나무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이며 서화가인 이하곤의 시에 ‘…늙은 느티나무 아름드리(老槐圍)’란 구절이 있다. 그가 말한 느티나무가 그림 속의 이 나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경복궁에 큰 느티나무 고목이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괴(槐)는 회화나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림 속의 자라는 모습은 느티나무에 가깝다. 바로 옆 가지가 길게 늘어진 나무는 능수버들이다. 지금도 지대가 낮은 경회루 연못 주변에 흔하다. 바로 옆의 허름한 'ㄱ' 자 고패집은 경복궁 터를 지키는 군사들의 거처라고 한다.

고패집 담장과 잇대어 능수버들과 제법 굵은 또 다른 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잡았다. 평범한 나무 모양이라 수종을 짐작하기가 어려우나 필자는 살구나무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겸재의 친구이기도 한 문신 김시민이 숙종 35년(1709) 봄날 경복궁을 읊은 시에 ‘…연일 비바람에 살구꽃이 드물다’고 했다.

겸재 그림보다 50여 년 전의 경복궁 옛터에는 여기저기 살구나무가 많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맨 오른쪽 아래에서도 역시 경복궁 터 지킴이가 거처하는 고패집이 보인다. 비스듬히 자라는 소나무 몇 그루와 능수버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옆으로는 불타버린 근정전 일원의 건물 자재가 흩어져 있다.

나무의 자람으로 봐서, 이 그림은 광화문 쪽에서 북악산 쪽을 보고 그린 것 같다. 옛날은 경회루 연못을 따라 안 담장을 쳤고 사방에 문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래의 폐허가 된 담장 기둥 흔적은 그 남문인 경회문(慶會門)일 가능성이 높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6.정선, 『경복궁(慶福宮)』 (1754년경) - 궁궐 불탄 자리에 소나무 곧고 푸르러라 / 조선일보,2021. 9. 10.

27.신윤복의 『무녀신무(巫女神舞)』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 자두나무 집 재앙, 썩 물렀거라!

신윤복 『무녀신무(巫女神舞)』,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28.2 x 35.6㎝, 간송미술관 소장

무당이 신들린 춤을 추고 있는 무녀신무(巫女神舞)다. 장소는 여염집 마당, 널찍한 마루에는 제물을 차렸다. 초가지붕이지만 치밀하고 가지런하여 정성이 든 건물이다. 사각기둥에 서까래 일부도 각재(角材)를 썼다. 껍질만 벗긴 통나무를 쓰는 것보다 공임이 훨씬 더 든다.

생활의 여유가 조금 있는 집에서 무당을 불러다 굿판을 벌인 것이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30폭 중 일반 백성의 삶을 그린 풍속화의 백미다.

사립문을 나서면 초가집 사이 마을 길에는 돌담을 따라 나무 몇 그루가 자란다. 꽃도 열매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을까? 찾아 들어가 보자. 배곯기가 일상이던 시절, 옛날 전통 마을 길가에는 누구나 손쉽게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나무가 인기였다.

옛 과일나무의 대표는 ‘도리(桃李)’라고 하여 복사나무 자두나무로 짝을 이룬다. 그림 속 나무는 무성한 잎이나 자라는 모양새로 봐서 둘 중 하나다. 다만 복사나무는 귀신이 싫어하므로 제삿날 조상님이 찾아오실 길목인 사립문 옆에 심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두나무로 추정한다.

오늘날엔 식물학적 이름이지만 옛날에는 오얏나무라 했다. 이(李)씨 성을 나타내며 우리에게 오얏나무가 더 친숙하고 훨씬 정감이 간다. 자두나무는 어른들은 물론 신맛을 별로 개의치 않는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다.

그림 속 자두나무는 굵은 줄기 하나가 아니라 뿌리에서 싹눈이 많이 돋아 이렇게 여러 그루가 모여 자라는 모습이 된 것이다. 위쪽의 돌담 밖에도 같은 자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사이에는 돌담 길을 따라 사람 키 높이 남짓한 앵두나무가 여러 그루 무리 지어 자란다. 앵두는 뭇 과일 중 가장 일찍 익는 과일로서 자두와 함께 옛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당에는 장구를 치고 피리를 부는 악공 둘과 네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러나 가운데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만 소원이 절박한 것 같다. 바로 옆 여인은 심드렁하게 그냥 앉아 있고 노랑 저고리 입은 처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눈에 띄는 장면 하나는 초록 장옷을 걸친 젊은 여인이 앵두나무 사이에 몸을 숨긴 담 밖의 사내와 은밀하게 눈 맞춤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볼수록 정겹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7.신윤복의 『무녀신무(巫女神舞)』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 자두나무 집 재앙, 썩 물렀거라! / 조선일보,2021. 9. 24.

28(끝).정선의 『임천고암(林川鼓巖)』 (1744~46년경) 은행나무,전나무,능수버들

- 겸재 정선 산수화 속 부여 백마강의 절경

정선, ‘임천고암(林川鼓巖·1744~46년경)’, 종이에 수묵, 80×48.9㎝, 간송미술관 소장.

18세기 중엽 어느 날 양천 현령 겸재 정선은 멀리 부여 땅을 찾는다. 오늘날 세도면 반조원리에 은거하는 조카뻘 선비 정오규를 만나기 위해서다. 백마강을 낀 은거지 주변의 빼어난 경치에 반한 그는 붓을 들어 ‘임천고암(林川鼓巖)’을 그린다. 임천은 이 일대의 옛 이름이며 고암이란 북을 닮은 바위란 뜻이다.

오른쪽 백마강을 낀 절벽 위에 기품 있는 정자가 다소곳이 자리를 잡았다. 왼쪽으로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ㄱ자 집 두 채는 은거하는 선생의 살림집이다. 뒤로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이 솔숲은 지금도 그대로다. 주위를 압도하듯 우뚝 솟은 산은 토성산이다.

실제는 높이 114m에 불과한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부분적으로 과장하여 나타낸 것이다. 다른 겸재 그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토성산과 마주하는 백마강 건너에는 백제의 역사를 간직한 석성산성과 연결된 파진산이 보인다.

그림의 가운데 정자 앞마당에 3그루의 큰 나무가 화면의 중심을 잡고 서 있다. 족히 두 아름은 됨 직한 우람한 은행나무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멋스럽게 늘어진 가지가 돋보이는 능수버들 고목을 거느렸다.

모두 선비들이 즐겨 심고 가꾸던 나무들이다. 능수버들 아래에는 지팡이를 짚고 사방관에 도포를 입은 선비가 동자를 데리고 한가롭게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택의 사립문 앞에는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이 은거하는 선비의 여유로움을 더한다. 아래로 사각 연못까지 갖추고 있어서 선비의 집으로 모자람이 없다.

앞쪽 급경사 언덕에는 곧게 뻗은 전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가 계단 쪽으로 잔가지들을 아래로 드리웠다. 그림 속의 고목나무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 느티나무는 원줄기의 둘레가 두 아름 반에 이르는 큰 나무가 되어 지금도 자리를 지킨다.

이어서 8개의 계단이 보이고 절벽 아래에는 좁고 긴 나룻배 한 척이 백마강 유람을 떠날 주인을 조용히 기다린다. 절벽을 따라 띄엄띄엄 작은 나무와 덩굴식물이 늘어져 있을 뿐 가파른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270여 년 전의 이 일대가 그대로 손에 잡힐 듯하다. 안타깝게도 1990년 금강 하구 둑을 막으면서 수위가 3~4m나 올라온 탓에, 옛 풍광은 많이 변해 버렸다. 그러나 겸재의 산수화 속 풍경 중에 이 정도나마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8.정선의 『임천고암(林川鼓巖)』 (1744~46년경) - 겸재 정선 산수화 속 부여 백마강의 절경 / 조선일보,2021. 10. 1.

29.이인상의 『검선도(劒僊圖)』 (18세기 중반) -소나무 연리목·담쟁이 덩굴

- 소나무 연리목에 담은 차별없는 세상의 꿈

이인상, ‘검선도(劒僊圖·18세기 중반)’, 종이에 담채. 96.7×61.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힘차게 뻗은 소나무와 줄기를 타고 올라간 덩굴나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정면을 응시하고 앉아있는 선비의 뒤로 비스듬히 누운 또 한 그루의 소나무가 함께 화면을 구성한다. 서얼(庶孼) 출신 문인화가 이인상(1710~1760)의 검선도(劒僊圖)다. 검선은 검술에 능한 선인(仙人), 혹은 당나라의 신선을 뜻하기도 한다.

상반신을 그린 선비의 모습은 무인풍이다. 찢어진 눈매가 날카롭고 바람에 날리는 수염과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옆에는 칼 한 자루까지 세워 두었다. 오른쪽 팔소매 옆으로 몇 가닥의 덩굴나무가 나와 소나무 줄기를 감싸면서 위로 자라고 있다. 붉게 물든 가을날의 담쟁이덩굴이다.

햇빛을 좋아하여 깊은 숲속보다 야산의 소나무와 함께하기를 더 즐긴다. 빨판으로 껍질에 붙으면서 올라가다가 잔가지에 이르면 몸체를 길게 늘어트린다. 자람 길을 빌려준 어미 소나무의 솔잎을 덮어 햇빛을 막아버리는 배은망덕한 일은 하지 않겠다는 배려다.

담쟁이덩굴과 소나무는 서로의 삶에 이익을 주고받는 공생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손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남부 지방에 자라며 담쟁이덩굴과 같은 기능을 하는 늘 푸른 잎을 가진 송악도 있다. 둘 다 우리의 옛 그림에서 흔히 만나는 덩굴나무다.

화가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즐겨 그렸다. 검선도와 설송도 등 그의 대표적 그림에는 꼿꼿한 소나무와 휘어진 소나무가 서로 교차하는 X자 구도가 흔하다. 곧고 쭉 뻗은 소나무는 벼슬길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적자(嫡子) 선비로 비유하고, 자기 같은 서얼 출신은 휘어져 자라는 소나무처럼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뻗어나갈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화가가 서얼이라는 점에 비추어 자화상적인 그림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식물학적으로 두 소나무가 맞닿은 상태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세포가 합쳐져 연리목(連理木)이 된다. 서로 양분을 교환하면서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에 관한 기록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나온다. 곧은 소나무와 굽은 소나무가 붙어서 연리가 된다면, 적서의 차별 없이 함께 능력을 발휘하는 태평성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화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시 바람에 흔들려 연리가 방해받을까봐 담쟁이덩굴을 그려 넣어 둘을 단단히 묶어 주는 상징성까지 보탰다.

[출처]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읽기> -29.이인상의 『검선도(劒僊圖)』 (18세기 중반) - 소나무 연리목에 담은 차별없는 세상의 꿈 / 조선일보,2021. 10. 8.

[출처] 『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Ⅱ - ▣배롱나무,▣물푸레나무,▣산사나무,▣오동나부·버드나무·귀룽나무,▣회나무,▣소나무,▣자두나무,▣은행나무·전나무·능수버들,▣소나무 연리목·담쟁이덩굴|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