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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Ⅶ- ①보빙사-최초방미사절단②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미국인들③한미간의 '국서 제정식'④한글은 자주독립의 바로미터⑤

문수봉(李楨汕) 2021. 10. 20. 22:54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Ⅶ- ①보빙사-최초방미사절단②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미국인들③한미간의 '국서 제정식'④한글은 자주독립의 바로미터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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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 Ⅵ-- 목차

32. 조선의 명운을 짊어진 최초의 방미 사절단 - 푸드 공사의 노심초사와 일본의 냉대

33. 머리부터 발끝까지···미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것-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워싱톤으로 떠나기 까지

34. 한미간의 '국서 제정식' -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최초로 등장한 한글

35. 한글은 자주 독립의 바로미터 - 1883년 뉴욕 헤럴드지에 대서특필 된 한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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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Ⅰ https://blog.naver.com/ohyh45/221570060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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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조선의 명운을 짊어진 최초의 방미 사절단

- 푸드 공사의 노심초사와 일본의 냉대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2년 5월 한미 수교가 이루어진 후 내가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부산 땅(1882.6.7)과 원산항(6.9)을 들른 후 시베리아에서 조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그 해 8월께였을 것이오. 그로부터 꼭 1년 후 이번에는 그 조선인들이 미국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소.

역사상 최초의 방미사절이 아라빅호라는 4천톤급 증기선에 올라 망망대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지요. 보름 정도의 항해 끝에 그들은 9월의 두 번째 날 미국 땅을 밟을 것이오. 그들을 조선 사람들은 '보빙사 報聘使'라고 부르더군요. 난해한 명칭이지만 지금도 한국 역사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겠지요.

미국이 조선에 특명전권공사(오늘날의 대사)를 보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내는 사절이라는 뜻인 듯싶소.

미국인들은 그들을 'Corean Embassy'라고 불렀지요. 여기에서 'Embassy' '사절' 혹은 '사절단'을 지칭하지요. 아무튼 나는 그들을 보빙사라 부르지 않고 '조선 사절단Corean Embasssy'이라 부르겠소.

사절단의 구성을 보면 희한한 면이 있소. 다국적, 다민족, 다언어족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오. 총 11명 중에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이 3명이나 끼어 있었지요. 외국인의 면면부터 보기로 합시다.

-로우엘( Percival Lowell/魯越, 1855-1916): 사절단에서의 직위-외교참찬관 및 고문

Foreign Secretary and Counsellor

-오례당(吳禮堂): 중국어 통역

-미야오카(宮岡恒次郞): 로우웰의 통역비서

로우웰은 당시 동경에 거주하는 중이었는데 조선 사절단이 일본을 들렀을 때 빙햄 주일 미국 공사가 사절단의 안내자로 그를 천거했습니다. 로웰은 쟁쟁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하바드 총장을 25년간이나 지낸 애버트(Abbott Lawrence Lowell)가 그의 동생입니다. 로우웰이 없었더라면 사절단은 참으로 난감했을 겁니다.

로우웰은 열정적으로 사절단을 도왔고 그 인연으로 사절단과 함께 돌아와 조선에서 겨울 한 철을 보내게 됩니다. 그 경험을 담아 펴낸 책이 바로 <Chosu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죠. '모닝 캄'이라는 용어의 원주인이 로우웰인 셈이지요.

돈 많고 팔자 좋고 낭만적이었던 로우웰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천문학에 빠졌지요. 그는 사비를 쏟아부어 아리조나주에 천문대를 세웠습니다. 늘 밤하늘을 관찰했죠. 말년에 X-행성이라는 '제 9의 행성'의 존재를 탐색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요.

그가 떠난 지 14년이 지나서야 그 떠돌이별이 발견되었죠. 한국인 여러분이 학창 시절에 외웠을 '명왕성'이 바로 그 별이지요.

두 번째 외국인인 오례당(吳禮堂)은 중국인인데 조선의 외교 통상을 장악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중국에서 조선 세관에 데려온 사람이지요. 미국 유학생 출신이어서 영어에 능통합니다. 로우웰의 개인 비서 미야오카도 영어에 능통하구요. 그러니까 외국인들은 모두 언어소통을 위해 참여시킨 것이지요. 물론 로우웰은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지만요.

이제 조선 사절의 면면을 볼까요?

민영익 1860-1914, 23세, 전권대신

홍영식 1856-1884, 27세, 전권부대신

서광범 1857-1897, 26세, 종사관

유길준 1856-1914, 27세, 수행원

최경석 ?-1886, 수행원

변수 1861-1891, 22세, 수행원

고영철, 현흥택 : 수행원

보다시피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었지요. 나는 그 당시 27살로 홍영식, 유길준과 동갑내기였지요. 전권대신 민영익은 23세의 약관이었지만 권세로 치면 조선 천지에서 으뜸이었지요.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민씨 일가의 황태자격이었지요.

민왕후의 조카였고 또 그의 누이 동생이 왕세자비이기도 했구요. 그는 중국과 일본 방문으로 해외 경험도 쌓았지요. 부대신 홍영식은 당시 외교부서의 책임자였고 부친은 영의정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음은 서광범인데, 그의 집안은 명신 충신을 다수 배출한 대표적인 명문가입니다. 무엇보다도 서광범 자신이 인감됨이나 사명감 그리고 능력과 성품에 있어서 보기 드문 인물이었지요. 일본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견문한 바 있구요.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사람입니다.

이들 면면을 보면 방미사절단을 고종 임금이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그만큼 기대도 컸지요. 만일 이들이 귀국 후 합심하여 개혁에 나섰더라면 틀림없이 조선은 동양 제1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이들이 미국을 방문하고 있을 때만 해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지요. 머지 않아 전혀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모른 채. 이들의 모습을 불러내 볼까요? 내가 찍었던 사진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 해 1883년 미국에서 찍은 것인데 지금은 지리협회에 소장되어 있는가 봅니다.

▲ 보빙사 최초의 방미사절단 ⓒ 미지리협회

▲ 조지 포크 손글씨 Prince Min Yong Ik Minister Plenipotenciary ⓒ 미지리협회

 

위 사진의 아래에 적힌 손글씨는 물론 내가 쓴 것이지요. 앞줄만 보면 맨 왼쪽이 서광범, 그 다음 오른쪽이 민영익, 그 다음은 홍영식, 맨 오른쪽은 로우웰이지요. 여기엔 중국인 오례당과 일본인 미야오카는 빠져 있군요. 내가 들어간 사진도 한 장 있습니다.

▲ 조지 포크 조지 포크와 보빙사 ⓒ 미지리협회

 

이 두 사진은 보다시피 촬영장소가 동일하군요. 아마 1883년 9월 뉴욕에서 아더 대통령 예방 행사 전후에 찍은 게 아닌지. 앞면의 왼쪽은 민영익, 오른쪽은 홍영식입니다.

뒷 줄을 보면 맨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차례로 메이슨(Theodore B. Mason)해군대위, 로우웰, 그리고 해군 소위였던 나 조지 포크이군요. 메이슨 대위와 나는 사절단의 미국내 여행을 돕기 위해 임명된 영접관(의전관)이었습니다.

이제 약간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사절단이 조선을 떠나는 시공간으로 가봅니다. 사절단은 7월 16일 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미국 함정 모노카시Monocacy호에 올랐습니. 사절단이 미 함정으로 나가사키까지 가게 된 것은 푸트공사의 배려였습니다.

원래 푸트공사는 사절단을 모노카시호로 요코하마/동경까지 갈수 있도록 섭외해 놓았었는데 뜻밖에도 나가사키에 이르러 사절단이 사양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상선으로 갈아 타고 요코하마/동경으로 갔지요.

최초의 역사적인 방미 사절단이 성공하기를 가장 노심초사했던 미국인은 푸트 공사였습니다. 그는 본국의 국무장관, 주일 공사 및 아시아 함대 제독 나아가 자신의 미국 지인들에게 부지런히 연락하여 사절단을 부디 잘 대해달라고 구구절절이 요청했습니다.

한편 7월 17일 요코하마/ 동경에 도착한 사절단은 근 1개월간 동경에 체류하면서 빙햄 주일 미국공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로우웰과 그의 비서가 사절단에 합류한 것이지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절단에 냉랭하였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때문에 사절단은 한 달 동안 여관방에서 두문불출하다시피 하였지요. 푸트 공사는 그런 일본정부의 태도를 속좁고 편협하다(narrow and shortsighted)고 비판했지요.

사절단은 9월 2일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하여 통관절차를 밟는데...

[출처] : 김선흥 오마이뉴스 기자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 - 32.조선의 명운을 짊어진 최초의 방미 사절단 - 푸드 공사의 노심초사와 일본의 냉대 / 오마이뉴스, 2021. 6. 29.

33.머리부터 발끝까지···미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것

-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워싱톤으로 떠나기 까지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149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가 발견한 지 390년 쯤 후인 1883년 9월 2일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발을 디뎠지만 조선인들은 샌프란시스코에 첫 발을 디뎠지요. 만일 그때 조선인들이 옛날 콜럼버스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어떤 광경이 벌어졌을까요?

콜럼버스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기도를 하고 성호를 긋고 섬에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땅을 스페인 영토로 선포한 거였지요.

그 섬은 원주민들이 대대로 과나하니(Guanahani)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콜럼버스에게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지요. 만일 조선선비들이 콜럼버스를 따라 했더라면 '샌프란시스코' 같은 건 무시해버리고 그곳을 '이순신항'이나 '신제물포' 같은 이름을 새로 붙였을까요?

두 경우가 전혀 다른 맥락속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이런 의문 자체가 넌센스이지만, 어떤 경우가 되었든 염치를 아는 조선 선비들이 콜럼버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았겠지요.

하지만 1883년 9월 2일(일요일) 조선인들이 단군이래 처음으로 미국땅과 그 사람들을 발견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발견'이 우리 서양인만의 전유물은 아닐테니까요. 이제 조선인들이 미국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또 거꾸로 미국인들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되살려 보려 합니다.

열명이 넘는 조선사절단이 샌프란시크코에 입항했을 때에 그들은 세관 통과를 걱정했을 겁니다. 사절단의 주요 인물들은 해외 여행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꽤 많은 수하물을 가져갔지요.

각자 몇 벌씩의 옷을 가져갔고 먹과 벼루, 종이, 부채 같은 것도 가져갔고 도자기와 홍삼 같은 것도 가져갔으니까요. 통관이 까다롭지 않을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다면 그건 기우였습니다. 자유통과의 특혜를 받았으니까요.

얼마 전에 프릴링하이젠(Frelinghuyesen) 국무장관이 재무장관에게 조선 사절단에 대하여 최고의 예우로써 무관세통관조치를 요청했고, 그에 따라 재무장관이 샌프란시스코 세관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었지요.

항구에는 육군 소장 스코필드(John M. Schofield) 장군이 영접을 나와 안내했습니다. 조선사절단은 자신들을 이처럼 정중히 대해주는 미국인들에게 감사하면서 시내 숙소로 향했지요. 멋진 집들, 시가전차, 남녀가 밝은 표정으로 걷는 모습, 화려한 상가 등 여러 풍물을 보며 조선인들은 눈을 크게 떴습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광경은 호텔이었습니다. 지은 지 8년 된 9층짜리로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머어마한 규모의 팰리스(Palace Hotel)이었습니다. 우아한 장식이나 화려한 가구도 놀라왔지만 호텔 접견실에 멋지게 옷을 차려입은 남녀가 앉아서 천연덕스럽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야말로 놀라웠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 1875년 신축, ⓒ 공개된 이미지

 

조선인들이 미국인에 놀랐다면 우리 미국인들도 조선인들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패션 때문이었죠.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환성 그 자체였습니다. 모자부터 신기했습니다. 대나무대를 비단실과 말총으로 촘촘히 엮어짠 것인데 하늘이 비치는 투명체였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본 사람이 있다면 또한 번 놀랐을 겁니다. 마치 젤리 깡톨처럼 생긴 탕건이라는 것이 있고 그 안에 또 호박琥珀이 달린 망건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망건안에는 상투라는 것이 틀어져 있었으니까요.

의상이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겉에는 흰색 비단 두루마기를 자르르 걸치고 있었죠. 조선인들은 그걸 도포라고 불렀지요. 아닌 게 아니라 딱 도인 패션이죠. 발목에는 대님을 매고 버선을 신고 있었고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중국풍이었습니다.

공식행사때나 방문객을 맞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의상을 차려 입습니다, 사모관대 차림의 관복이었지요. 최고급 비단 옷으로 청.홍.백.흑의 색깔과 그림이 예술 그 자체였지요. 조선인의 패션은 가는 곳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하지만 유력한 미국인들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조선과 조선인들에게 관심을 쏟는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제적 실리였지요. 구체적으로 통상, 자원, 이권이었지요. 미국의 경제인과 위정자들은 조선의 최고 실력자들로 구성된 사절단의 방미를 황금의 기회로 여겼지요.

사절단을 정중히 대하고 환대를 한 것은 물론 그런 배경에서였습니다. 사절단에 대한 기사가 처음 나온 것은 9월 5일자 아닌가 싶군요. 신문을 같이 볼까요?

▲ 보빙사보도 인디아나폴리스 1883년 9월 5일자 ⓒ 미국 의회도서관

한글로 번역해 보면,

조선 사절단 접수

칼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9월 4일-조선 사절단이 오늘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방문을 받았다. 시장은 그들에게 샌프란시스코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했다.
그 후 한 시간이 지난 뒤에 스코필드(Schofield)장군(육군 소장) 일행이 방문했고 이어서 상공회의소와 무역위위원회 대표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기관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사절단 대표는 흔쾌히 응락하면서 나라의 근간인 상업분야의 대표들이 초청해 주니 더없이 기쁘다고 대답했다. 공식 환영회는 목요일 오후에 개최될 것이다.(끝)

9월 4일 사절단의 일정을 보면, 샌프란시스코의 관광 명소인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 골든 게이트 파크와 금문교를 방문했지요. 다음 날은 프레시디오(Presidio) 육군기지를 방문했는데 사령관 스코필드 소장의 영접으로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군의장대를 사열했지요.

그때 뜻밖에도 지휘관이 민영익에게 대포를 한번 발사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민영익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포를 발사했지요.

그 다음날 오후 2시에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를 방문했는데 의외로 큰 환영회였습니다. 약 300명의 상공인이 모인 가운데 리셉션이 열린 것입니다. 서로 연설을 하고 건배를 하고 덕담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잘해 보자고 다짐을 나누었죠.

리셉션이 끝난 후 사절단은 유니온 철공소를 비롯한 산업시설을 시찰하였지요. 사절단은 9월 7일 금요일 오전에 샌프란시스코 바틀레트(Bartlett) 시장을 예방하고 고별인사를 건넨 후 기차로 워싱턴으로 향했지요.

조선인들에 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미국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9월 6일자 한 일간지가 그 일단을 말해주지요. 기사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 보빙사 기사 실버스테이트지 1883년 9월 6일자, ⓒ 미국의회도서관

 

번역해 보면,

조선사절단

조선사절단이 며칠 전에 홍콩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그들 민족으로서는 최초의 미국방문이다. 그들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내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것이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에 이곳을 통과할 것이다. 그들은 젊고 키가 크고 잘 생겼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몽골족이며 외모로는 일본인을 닮았고 의상으로는 중국인을 닮았는데 언어는 중일 두 나라와 다르다(끝).

이제 그들이 워싱턴에 도착하면 나 조지 포크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출처] : 김선흥 오마이뉴스 기자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 - 33.머리부터 발끝까지···미국인들이 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것-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워싱톤으로 떠나기 까지 / 오마이뉴스, 2021. 7. 20.

34.한미간의 '국서 제정식' -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최초로 등장한 한글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 조지 포크가 미국에서 조선사절단과 동행하면서 가장 잊지 못할 이벤트는 '국서 제정식'이었지요. 여기에서 '국서'라 함은 고종 임금의 친서로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사신에 대한 신임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두 통의 문서인 셈이지요.

1883년 9월 18일. 나는 그날 무척 바빴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을 쓰면서 안내와 조언을 해야 했고 통역까지 해야 했으며 취재 경쟁에 돌입한 현지 신문과도 접촉해야 했으니까요. 의전, 통역, 언론을 내가 다 관여했다는 말이지요.

뉴욕 중심가에 소재한 호텔 3층(미국 대통령과 민영익의 객실이 인접)의 민영익 방에서 우리는 그날 아침 10시 반 경에 만났습니다. 최종적으로 행사 세부 사항을 점검한 뒤에 우리는 방을 나와 행사장이 마련된 1층의 대접견실을 향해 이동하였지요. 접견실 앞쪽에 부속된 대기실에 입장한 것은 11시 쯤이었습니다.

대기실과 접견실은 중간에 여닫을 수 있는 칸막이 문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나는 사절단을 대기실로 안내 한 뒤에 잽싼 걸음으로 맞은 편에 서 있는 대통령의 뒤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 여닫이 칸막이 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요. 한미 양측의 사람들은 이제 한눈에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지요.

아더 대통령은 접견실 정중앙에 서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국무장관 프릴링휘젠(Frelinghuysen), 왼쪽에는 국무부 제1 차관보 데이비스(Davis), 국무부 관리 존 츄(John Chew)가 서 있었고 뒷줄에는 대통령 수행비서 필립스(Phillips), 메이슨 대위와 나 조지 포크 그리고 몇 명의 관리들이 도열했지요.

조선 사절단은 일렬 종대로 대기실에 입장하였는데 맨 앞에 민영익전권대신, 그 뒤로 이어서 서열에 따라, 홍영식부대신, 서광범종사관과 로웰 서기관, 그 뒤로 유길준, 변수가 따르고 맨 마지막에는 무관으로 보이는 고영철이 붙었습니다.

사절단 일행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더 대통령은 놀란 눈으로 "아..." 하면서 짧은 탄성을 발했습니다.

사절단의 의상이 전체적으로 황홀하고도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지요.

 

▲ 보빙사의 큰 절 보빙사가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함 ⓒ 공개된 이미지

헌데, 조선인들이 칸막이 문지방에 이르렀을 때 전혀 예기치 않은 광경이 연출되었어요. 전권대신 민영익이 눈짓을 하자 일령 종대의 대형이 순간적으로 일렬 횡대로 변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다음 민영익이 무언가 짧게 지시를 하자 그에 따라 모두 동시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큰 절을 하는 거였습니다. 바닥에 댄 이마를 한참 후에 들어 올린 그들은 서서히 허리를 편 후 문지방을 넘어 우리쪽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 순간 미국 대통령은 허리를 깊이 굽혔습니다. 원래 미국 대통령은 예나 지금이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니, 대통령 뿐이 아니고 우리 미국인들은 다 그렇죠. 대통령이 허리를 깊이 굽힌 장면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언론에서는 "아더 대톨령이 허리를 비상하게 낮게 숙여 절을 했다 President then made an unusually low bow"고 보도하기도 했었지요(New York Daily Tribune 1883.9.19).

아더 대통령이 허리를 펴자 국무장관이 앞으로 나와 민영익을 대통령에게 소개했습니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자 서로 악수를 교환하였고 이어서 양측의 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물흐르듯 상견례가 끝나자 민영익이 매우 진지하고 낭낭한 목소리로 공식 인사말을 한국어로 낭독했습니다.

민영익은 인사말에서 양국 인민의 영원한 우호를 기대한다고 한다고 하면서 말미에 "받들어 온 국서 두 봉封의 하나는 우리 대군주께옵서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답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신에 대한 전권빙거全權憑據(신임장)이온 바 삼가 이를 바칩니다"라는 말로 끝맺었습니다.

아더 대통령은 조선의 '국서'를 정중히 받은 후 온화한 표정으로 답사를 했습니다. 그는 '대조선Tah Chosun'의 국왕과 정부 대표로 오신 전권대신과 부대신을 따듯히 환영한다고 말하고 나서

"우리는 아름다운 조선 반도와 섬들, 산물과 산업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미국이 독립국이 되었을 때의 미국 인구의 두 배가 넘습니다. 우리 두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대양은 이제 증기선의 발달에 힘입어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 대로가 되었습니다, 조선은 우리의 이웃이지요"라고 덕담을 하였습니다.

나아가 대통령은

"우리 공화국은 국력, 부와 자원에 아쉬움이 없는 관계로, 과거 역사가 말해주듯이, 타국민을 지배하거나 타국 영토를 취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우호관계와 호혜적 통상을 통해 상호 이익을 나누고자 할 따름입니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은 미국의 농업 기술, 교육 및 법률 체제가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거로 기대한다고 언급하였지요.

아더 대통령의 환영사는 전체적으로 사려깊고 우호적이었을 뿐 아니라 양국간 실질 협력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조선을 '대조선'이라 언급하고 '이웃나라'로 표현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에 종속되지 않는 자주독립국가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조선을 침략하거나 지배하려는 염사가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인들이 늘 품고 있는 외침에 대한 우려를 불식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통역은 <한국어-일본어-영어/영어-일본어-한국어>방식으로 이중 통역이 이루어졌지요.

미국 대통령의 답사가 끝나자 두 나라 대표들은 악수를 교환하였습니다. 사절단은 물러나와 국무장관, 메이슨 대위 그리고 나 조지 포크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헌데, 또 한 번의 예기치 않은 광경이 돌발했지요. 접견실 문지방을 넘어서 몇 발짝을 떼었는데 갑자기 조선 사절이 되돌아 서는 게 아니겠어요?

다시 이마를 땅에 댄 채 아까 입장했을 때와 같은 큰 절을 되풀이 하더군요. 조선 사절단으로서는 정중한 예를 다한 것이었죠. 그 광경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냉소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당시 우리 미국인들은 냉소하지 않았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을 뿐이지요.

어쨌든 한미간의 최초의 외교 이벤트인 '국서 제정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행사는 국제 무대에서 벌어진 조선 최초의 근대적 외교 이벤트로서 그 의미가 컸을 뿐 아니라 한글이 최초로 국제무대에 당당히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지요.

그 날짜 '뉴욕 타임스'는 한글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며 "차 상자와 같은 알파벳 문자로서 몇 개의 자모를 합쳐서 한 개의 단어를 구성한다. 세로로 쓰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고 보도했고, 중국 글이나 일본 글과 전혀 다른 독창적인 문자라고 짚었습니다.

또한 한국어에 대해서는 그 발음이 이탈리아어처럼 매우 음악적이라고 소개하면서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아는 유럽인은 단 두 사람 뿐"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더욱 괄목할 일은 다음날짜 '뉴욕 헤럴드'(9.19)가 조선의 국서 한글본을 독점 보도하였다는 사실이지요.

 

▲ 민영익 인사말 한글 미대통령에게 한 민영익 인사말 1883.9.19일자 신문 ⓒ 공개된 이미지

 

▲ 보빙사 신임장 한글본 민영익이 제출한 한글본, 원본은 한문 ⓒ 공개된 이미지

 

그런데 한국인 여러분, 세계무대에 최초로 한글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사건의 의미를 음미해 본 적이 있나요? 당시 미국인들에게 놀란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 조선 고유의 의상과 모자 패션이었지만 미국인들의 안목을 넓혀준 것은 한글이었습니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존재는 한민족이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민족임을 단적으로 웅변해주었기 때문이지요. 한글 국서는 한 마디로 최초의 한글 외교문서였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한글의 역사 뿐 아니라 한국의 외교사 더 나아가 문화사에 있었서 기념비적인 일이라 여겨집니다.

헌데, 의문이 있습니다. 이 쾌거는 누구의 아이디어였는가? 누가 주장하여 관철시켰는가? 한글문은 과연 누가 작성하였는가? 즉, 누구의 필체인가? 언제 어디에서 썼는가? 왜 한국의 학자들은 이런 의문에 도전하지 않는가? 왜 아무런 정보도 없는가?

마땅히 이 문제를 풀어야하지 않을까요? 오래 궁리한 끝에 나는 몇 개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다음에 제시해 보겠습니다.

[출처] : 김선흥 오마이뉴스 기자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 - 34.한미간의 '국서 제정식' -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최초로 등장한 한글 까지 / 오마이뉴스, 2021. 9. 30.

35. 한글은 자주 독립의 바로비터 - 1883년 뉴욕 헤럴드지에 대서특필 된 한글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이런 질문으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 싶군요. 한국인의 문화적, 정신적 자주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를 꼭 하나 든다면 무엇일까요? 나는 한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독립정신과 한글 존중은 정비례의 함수관계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초로 조선의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엔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은 몹시 천시되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했기 때문에 1883년 9월 19일자 '뉴욕 헤럴드' 지에 대서 특필된 한글 문서가 지니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거예요. 먼저 미국 신문에 소개된 한글 문서 실물을 찬찬히 살펴 보도록 합시다.

 

▲ 미 언론에 최초로 보도된 한글 문서 왼쪽 문서는 사절단에 대한 고종의 신임장,

오른 쪽은 전권 대신 민영익의 미 대톨령에 대한 인사말 ⓒ 공개된 이미지

 

왼쪽 문서는 고종 임금이 파견한 사절단에 대한 신임장이고, 오른쪽은 전권 대신 민영익이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행한 인사말입니다. 이 두 문서와 영문 번역본에 담긴 용어 중에 주목을 요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조선을 '대조선'이라 칭하고 영어로는 'Tah Chosun'라 표기한 점을 먼저 들 수 있겠습니다. 종래 '조선'은 영어로 'Chosen'이라 표기했는데 이는 물론 일본식 발음입니다. 1882년에 체결된 조미조약 영문본을 보면, 조선이 'Chosen'이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일본식 이름이 한국의 조약문(영문)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번엔 미국정부와 언론이 일제히 한국을 조선어식으로 'Tah Chosun', 조선인을 'Corean' 혹은 'Chosunese'로 표기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미관계의 첫걸음에서 조선이 비로소 제 이름을 찾고 대외 종속을 벗어나는 역사를 썼던 것이지요.

조선을 '대조선'으로 칭하는 한편 미국은 '대아미리가합중국'이라 호칭하였습니다. 조선의 임금은 '대군주'라 자칭하고 미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대 백니쇠쳔덕'이라 호칭했습니다. '백니쇠쳔덕'은 한자로는 '伯理璽天德'인데 'PRESIDENT프데지던트'의 발음을 따서 옮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을 'GTREAT(대) PRESIDENT(백니쇠쳔덕)'라 부른 셈이지요. 이로써 양국 국가명과 원수의 호칭이 대등하면서도 상호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신임장의 말미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개국 사백구십이년 뉵월 심이일(개국開國 492년 6월 12일)"

예전의 조미조약에서는 청국의 '光緖광서' 연호와 개국연호를 병기했는데, 이번에는 청나라 연호를 과감히 버리고 조선의 개국연호만을 사용한 것이지요. 이는 조선이 청나라에 대한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명실상부한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었음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미국 언론을 통해 조선이 한글이라는 독창적이고도 우수한 문자를 창제한 문화국가임을 과시한 점이 최대의 쾌거였다고 해야겠지요. 조선 사절단으로서는 정작 모국에서는 천시당하고 있는 한글에 대해 미국인들이 놀라워 한다는 사실에 신선한 자극과 자긍심을 느꼈겠지요.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아의 재발견이라 할까요?

당시 수행원으로 참여했던 유길준이 훗날 한국에서 한글 운동의 선구자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겁니다. 유길준은 외쳤지요.

"읽을 지어다. 우리 글을 읽을 지어다. 우리 대한 동포여,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예로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특유한 문자가 있어서 그 사상과 의지를 성음聲音으로 발표하고 기록으로 4천여의 성상을 통과하여 역사의 진실을 지키고 습관의 실정을 증명하도다."

그렇다면 이 뜻 깊은 최초의 한글본 국서는 과연 누가 작성했을까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으므로 우리 스스로 탐색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위의 두 문서를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필체가 동일하며 유려합니다. 따라서 많이 써 본, 한 사람의 글씨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사절단 중에서 한글에 능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먼저 전권대신(正使) 민영익(閔泳翊)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왕가의 일원이었습니다. 민비의 조카였고 누이동생이 세자빈이었습니다. 왕실의 여인들은 한글로 소통했습니다. 민영익도 한글로 그들과 소통했음이 분명하구요. 민비는 외교관의 부인들에게도 한글 편지를 보내곤 했지요(아래).

 

▲ 민중전의 한글 초청장 미국공사 부인에게 보낸 민중전의 한글 초청장(1894.2.24) ⓒ 공개된 이미지

 

흥미로운 일은 궁중에서 다수의 공식 문서가 한글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지요. 몇몇 실례를 보겠습니다.

 

▲ 세자빈 후보자 명단 1882년(고종 19)세자빈 후보자 명단, 최종적으로 민영익의 누이가 선정된다.

책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10쪽 촬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모두 1882년의 왕실 한글 문서로서 민영익의 여동생인 세자빈과 관련된 문건들입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민영익은 늘 한글을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아울러 그 자신이 한글을 유려하게 썼습니다. 훗날 조선에서 그와 나는 한글로 편지를 주고 받았지요. 민영익이 나 조지 포크에게 보냈던 편지 하나를 볼까요?

▲ 민영익의 한글 편지 George Foulk 미국대리공사에게 보낸 민영익의 한글 편지(1885).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18쪽 촬영. ⓒ 단국대학교출판부

 

이 편지의 첫머리를 현대어로 옮기면 '미국대리공사 복구씨'인데 여기에서 '복구'는 바로 내 이름 '포크Foulk'의 한글식 이름입니다. 한자로는 福久(복구)라고 했지요. 민영익의 한글 편지 하나를 더 보겠습니다. 아래는 1887년 알렌 미국 참찬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 민영익의 한글 편지 알렌 참찬관에게 보낸 민영익의 한글 편지(1887.음력 10.170),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128쪽 촬영.ⓒ 단국대학교출판부

 

민영익의 서화는 조선에서 명성이 자자했지요. 보다시피 한글도 매우 유려하게 썼지요. 그렇다면 한글본 국서를 쓴 사람은 민영익이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글본 국서와 민영익의 한글을 자세히 대조해 보면 필체가 서로 다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글 국서의 주인공이 서광범이라고 판단합니다. 서광범과 나는 한글을 주고 받았습니다. 비록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글씨체를 나는 기억합니다. 또한 당시 서광범은 사절단에서 서열이 세 번째로서 문서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사절단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지요.

한글 문서를 미 대통령에게 전달한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그에게서 나왔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서광범이라면 모를까, 그런 평지 돌출적인 일을 아무나 생각해 낼 수는 없었을테니까요.

<한글의 세계화 역사>를 쓴다면 당연히 1883년 9월 방미 사절단의 한글 국서 제정 사건이 한 페이지를 장식해야 할 거예요. 당시 한글 초보를 배우고 있던 나 조지 포크는 뉴욕 헤럴드지에 한글이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고 묘한 감동을 느꼈지요.

우리는 다음날 보스턴을 방문했습니다.

[출처] : 김선흥 오마이뉴스 기자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 - 35. 한글은 자주 독립의 바로비터 - 1883년 뉴욕 헤럴드지에 대서특필 된 한글 / 오마이뉴스, 2021. 10. 14.

[출처] 『미 군인 조지 포크는 끝까지 조선 편든 조선의 의인이었다』Ⅶ- ①보빙사-최초방미사절단②조선인들을 보고 놀란 미국인들③한미간의 '국서 제정식'④한글은 자주독립의 바로미터⑤|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