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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명으로 읽다』 Ⅱ - ▣사대부들의 눈물, ▣‘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 ▣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 ▣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노비제,사실과 편견 사이.

문수봉(李楨汕) 2021. 11. 14. 23:15

『조선, 문명으로 읽다』 Ⅱ - ▣사대부들의 눈물, ▣‘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 ▣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 ▣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노비제,사실과 편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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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명으로 읽다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567233502

▣오래된 미래-조선▣소가족·소농 시대▣제국과 평화 사이-조공·책봉▣실록과 사관▣억불숭유,그 반쪽의 진실▣

『조선, 문명으로 읽다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568051411

▣사대부들의 눈물 ▣‘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노비제,사실과 편견.

6. 사대부들의 눈물 - 딱딱한 도학자는 편견일 뿐…사람다움의 시작은 정(情)

조선 말기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효자 거묘 살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하는 게 조선시대 사람살이의 기본이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건너 이웃집 애 우는 소리 듣고, 몇 번인가 네가 우나 착각했나니,

지난해 너와 같은 때 태어난 아이, 어느덧 이제 벌써 말을 배운단다.

눈물 참으려 눈길을 떨구었건만 잊으려 해도 다시금 보고 싶구나.

울음소리 삼키고 컴컴한 벽 향했으니 네 어미 알까 두려웠기 때문이라.”

조선 문신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어린 자식이 죽은 ‘1월 6일’에 쓴 열 편의 시 가운데 일부다.

그가 애도한 아이 이름은 칠룡(七龍)이다. 칠(七)은 아이의 차례이고, 용(龍)은 태몽으로 용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숙종 원년(1675) 전라도 영암에 귀양 가 있을 때 낳은 아이였다. 20일 만에 죽었다니 태어난 건 12월 16일쯤이고, 그가 7월 18일에 귀양을 왔으니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그를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칠룡이를 낳았을 것이다.

같이 태어난 옆집 아이가 우는 소리에 죽은 아이를 떠올렸고, 이내 그는 눈물이 났다.

그 먹먹한 슬픔을 감추고 행여나 아내가 깰까 벽을 보고 돌아앉아 소리 죽여 울었다.

조선 말기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신랑 신부 초례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하는 게 조선시대 사람살이의 기본이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남자를 엄격한 지아비이자 아버지 혹은 절제되다 못해 경직된 도학자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장면이리라. 나 역시 그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료를 접할수록 그런 편견은 깨졌고, 오랜 기억 속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외할아버지는 사돈 동네를 가는 일을 피하셨는데, 어느 날 나를 데리고 친가 동네를 찾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의형제를 만나셨다.

외할아버지를 맞았던 그분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건 울음 때문이었다.

"좀 자주 오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 분은 잡은 손을 참 오래도 놓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의아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조선시대 마지막 세대 사람들이 보여준 만남이었다.

이성과 감정은 대립적 개념 아니다

퇴계 이황

조선시대 편지나 시를 읽다 보면 ‘왜 이 사람들 이렇게 눈물이 많아’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임금의 잘못을 눈물로 비판하고, 은혜에 눈물로 감사하고, 친구가 와서 좋아서 울고, 귀양 가니 울고,

친구나 아내가 죽으니까 울고, 자식을 앞세우고 울고, 이래서 울고 저래서 울고….

이성과 감정의 위계가 만연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이성의 하위에 놓지 않았다.

여기서 이성은 리즌(reason), 감정은 이모션(emotion)의 번역어다.

이성은 수학적 사고능력을 말하는 합리성의 영역이고, 감정은 비합리적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도 이성적으로 화를 억제하라고 훈련받았다.

화를 잘 내고 잘 우는 나는 이런 훈련에 반감이 있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남자라도 울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예기(禮記)』의 예운(禮運)편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인정(人情)이라 하는가?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혐오·욕망이니,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안다.”

좌절이나 감동에는 진한 눈물이 흘러야 하고, 억압이나 만행을 보면 화가 나야 하는 것 아닐까.

『예기』의 말처럼 희로애락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율곡 이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성과 감정이란 말 대신, 성(性)과 정(情)이라는 말을 썼다. 둘은 대립적이거나 위계가 있지 않았다. 성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신(信)을 더하였는데, 사단(四端) 또는 오성(五性)이라고 불렀다.

성과 정은 마음이라는 텅 비고 신령한 메커니즘이 통솔한다고 보았다.

조선의 웬만한 집이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맹자(孟子)』‘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단서다’라는 선언으로 인간학의 기초가 됐다.

어린아이가 기어가다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사람은 ‘저걸 어째!’라고 하며 구해준다는 것이다.

그 아이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욕할까 봐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단순한 만큼 강력했다. 공자(孔子)의 인(仁)은 맹자에게서 인간학적 논리를 갖게 된 셈이다.

성이 움직이면 정이 되는 것이다. 사단의 경우, 인의예지는 성이지만, 그 단서인 측은함·부끄러움·양보심·판단력은 정이다. 사단은 다 좋고 나쁜 데가 없는 상태(純善無惡)다.

칠정은 이와 다르다. 작용하여 상황에 맞을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쁠 때도 있는(有善有惡) 불안정한 상태다. 말이 칠정이지, 이는 정에 꼭 일곱 가지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성이 정으로 발현돼 상황에 들어맞으면 그것을 중용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발현된 정이 ‘상황에 맞지 않는(不中節)’ 경우도 있다.

예컨대 초상집에 가서 큰 소리로 떠들며 웃는다든지 하는 행동이 그것이다.

정은 사뭇 어긋나거나 과도하거나 멋대로 내달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몹쓸 짓=악’ ‘순선무악’한 성에 근거한다는 모순 같은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사단조차 ‘부중절’한 경우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주제가 ‘사단칠정 논쟁’의 배경이다.

퇴계는 이(理)와 기(氣)를 철저히 분리(兩斷)하여 사단과 칠정에 배속시킨다. (理氣는 性情의 우주론적 표현이다) 즉, 사단은 이의 작용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조금 곤혹스러운데, 이가 주재자이면서 초월자이고, 게다가 작용하는 힘=에너지이기도 하다면,

기는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퇴계는 이의 작용(發)을 주장하면서까지 세속적 욕구와 종교적 순결성을 구별하고자 하였다.

고봉 기대승

고봉과 율곡은 달랐다. 퇴계와 달리 칠정을 인간 본성 밖의 무엇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희로애락은 너무도 명백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정은 유혹이지만 발랄함이기도 하며, 때로 수렁이지만, 창의성의 원천이기도 하므로.

아마 고봉은 퇴계에게 "지나친 경건주의가 아닙니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세대 차이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이 무수히 죽어 나가던 사화(士禍)의 한복판을 살았던 퇴계와, 이제 사림들이 실력을 갖추고 새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고봉이나 율곡의 세대 차이랄까.

아무튼 뛰쳐 날뛸 수 있는 정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다.

인간은 ‘위태로운 마음을 가진 존재(人心惟危)’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마음은 언제나 미약하다.(道心惟微)’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담을 듯하다가도, 좁아지면 바늘 하나 꼽을 데가 없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다.

그래서 발동하기 전에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발현된 뒤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선현들은 생각했다.

최명길·김상헌의 담배 논쟁이 남긴 것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막 망했던 1644년, 청나라 심양에 억류됐던 김상헌·최명길·이경여는 흡연을 놓고 마음을 풀었다.

"소경(蘇卿)께서 눈 드신 지 올해로 삼 년이고, 추자(鄒子)가 봄을 돌려줌 또한 한때입니다.

물과 불은 원래부터 기제괘(旣濟卦·상호 교합) 되나니, 쓰임의 얕고 깊음 그 누가 알겠습니까?”

소경은 한나라 때 흉노에 19년 동안 억류됐던 소무(蘇武)다. 추자는 전국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인데, 북방을 따뜻하게 하여 곡식을 자라게 했다고 한다.

김상헌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골초였던 이경여와 최명길은 담배 연기를 꺼리던 김상헌에게 시로써 자신들의 담배 연기를 따뜻한 봄바람에 비유하여 흡연을 합리화했다.

백성을 고난에 빠뜨린 자괴감, 조선 지식인이 겪은 자존심의 상처, 눈앞에서 벌어지는 멸시와 추위·굶주림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장면이다. 버티며 사는 일상은 생각보다 많은 함축을 담게 마련이다.

사려 담긴 정감의 언어가 주는 격조가 험지에서 인간임을 잊지 않게 만들어줬을 것이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유학과 통하는 분자생물학

조지프 르두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란, 우리가 누구였으며(과거 자아),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거나 어떻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지(미래 자아)를 반영하는 우리 정체성에 대한 과정과 구성을 의미한다.”
조지프 르두(사진) 등 21세기 분자생물학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유학의 언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집중하거나 기억하는 것(主一無適)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지적 처리 과정(讀書)은 감정적 각성 상태(常惺惺法)를 동반한다. ‘움직이는 자아(working self)’이다.”
이처럼 분자생물학의 일련의 메커니즘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학의 배움과 같다.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직관 혹은 경험으로 이해하고 체득했음이 틀림없다.

[출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항령의 조선,문명을 읽다> - 6. 사대부들의 눈물 - 딱딱한 도학자는 편견일 뿐…사람다움의 시작은 정 /중앙일보, 2021. 6. 25.

7.‘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 “당파 싸움으로 3족·9족 멸했다”는 가짜뉴스

정조의 독살설을 다룬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1995·왼쪽).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딱딱한 도학자는 편견’이란 제목이 달린 지난달 내 글(6월 25일자)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렇게 정 많은 조선 사대부들. 당파 싸움엔 3족 9족을 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다 당파 싸움에 진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들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것은 참 미스터리외다.”

해당 칼럼 내용은, 조선사람들은 인간을 이성(理性)보다 정(情)의 존재로 이해했다, 이성을 강조하기보다 잘 울고 슬퍼하며 제때 화내는 게 중요했다는 거였다.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잘 모르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도 이 주제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고 봤다.

사례로 김수항이 밤에 일어나 죽은 아이를 슬퍼하다 아내가 깰까 해서 벽을 보고 울던 일, 병자호란 뒤 심양에 억류돼 생사를 알 수 없던 상황에서 흡연을 두고 김상헌·최명길·이경여가 주고받은 농 섞인 시를 읽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신상옥 감독의 ‘이조여인잔혹사’(1969).

실제 역사와 영화·드라마의 분별이 필요하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댓글에 나는 답글을 달았다.

“필자 오항녕입니다. ‘당파 싸움에 3족 9족을 멸하고, 고문하고,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사례’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사화)을 제외하고, 적어도 퇴율(퇴계와 율곡) 시대 이후 제가 그런 사례를 모릅니다” 라고 하고, e-메일도 알려줬다.

역사 전문가도 빠져드는 일반화 함정

댓글은 짧게 의견을 내는 공간이라 충분히 의사가 전달된다고 보기 어렵다. 한데 답글을 단 이유는 단지 칼럼의 논지와 벗어난 댓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댓글 내용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어투로 보아 점잖은 분인데, 정작 내게 반론으로 제시한 근거는 무척 선정적이었다.

언제 당파 싸움으로 3족, 9족을 멸했지? 고문은 했다. 숙종 기사사화 때 장희빈을 왕비로 앉히려고 숙종은 그에 반대하던 박태보·오두인을 처절하게 고문했고, 경종 때 김일경 등의 무고로 김창집 등 수십 명을 죽이고 귀양 보낸 신임사화가 있었다. 이때 60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300여 명이 귀양 등 엄벌을 받았다.

그러나 ‘상대방 사대부 부인과 딸을 노비와 성적 노리개’로 삼은 일은 없었다.

나는 이 분의 답변을 기다리면서, 아울러 조선시대를 보는 눈이나 태도에 대해 돌아볼 필요를 느꼈다.

몇 년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H학자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책이 현실을 재단하던 시절!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 손으로 책을 고르지 못했고, 주어진 책은 도무지 버리지 못했다. … 주자(朱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멀쩡히 자행돼서는 만만 안 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송시열의 초상

나는 저자의 이 ‘통탄’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일이 언제, 누구의 일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책 내용으로 추론컨대 호란 이후, 정조(正祖) 이전인 것은 분명하니까, 윤휴(尹鑴)에 대한 서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근사하리라 생각했다.

조선 성리학에 대해 ‘정통과 이단’의 투쟁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던 이병도나 미우라 쿠니오(三浦國雄)의 논문이 나온 이후, 송시열과 윤휴의 논쟁을 놓고 H교수와 같은 인식에 바탕을 둔 개설서 서술이 많기 때문이다.

마침 H교수가 재직하는 학교로 특강을 가게 된 나는 H교수에게 저런 사료는 어디서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료를 본 게 아니라, 그동안 사문난적 운운하는 식으로 조선사상사를 주자학-반주자학 구도로 설명하던 논문과 개설서를 참고하여 저렇게 서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내 예상대로였다.

조선시대 주자학을 둘러싸고 갈등했던 윤휴의 초상. [중앙포토]

한데 윤휴는 주자 주석과 다른 해석을 저술한 탓에 귀양을 가고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윤휴의 『중용신주(中庸新注)』로 인해 송시열이 그를 사문난적이라고 비판한 때는 효종 4년(1653)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효종 9년 송시열은 윤휴를 세자를 가르치는 선생인 자의(諮議)로 추천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숙종 때 윤휴가 우참찬으로 있다가 귀양을 간 것은 다른 이유였다.

예송 논쟁이 사화로 비화하고, 이어 조정에서는 병권을 둘러싸고 김석주 등 외척, 허적 등 권력가들이 갈등했다.

이들은 당시 다시 설치된 체찰부(국방부+안보위) 지휘권을 두고 다투었고, 숙종은 윤휴를 배제했다. 윤휴가 항의하다가 숙종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이것이 빌미가 돼 귀양을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이미 이에 대한 박사 논문도 나왔다. H교수는 “진즉 알려주지 그랬어!” 하며, 잘 알겠다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얼마 뒤 유명한 K교수에게 전화가 왔는데, 하필 같은 내용을 물었다. 나는 30분 넘게 위의 내용대로 전거와 사료를 설명했다. 사상과 학문의 경직성에서 유래한 사건이 아니라, 왕정의 메커니즘에서 이해해야 할 사건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다 듣고 난 뒤 K교수는 “어쨌든 갈라서서 서로 깐 거는 맞는 거지?” 했다. 어차피 그렇게 이해할 거 왜 물어보지?

주자-반주자, 실학-허학 이분법의 오류

조선시대 형벌·감옥 등을 그린 김윤보(1865~1938)의 『형정도첩』 일부. [중앙포토]

이 두 에피소드의 서로 다른 결과는 내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H교수와 K교수의 학문하는 태도에서 연유하기도 한다. K교수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백날 설명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러니 아직도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을 반주자학이라고 우기고, 주자학-반주자학, 허학-실학의 영양가 없는 이분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점만 지적하고 가자.

조선 역사를 학문이 아니라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주자의 주석에 손을 댔다 하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야만적 행태가 자행된 적이 없다.”

오늘은 생산적인 역사 공부를 위해 두 가지만 확인하고 가겠다.

첫째,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건에 대한 일부분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를 보여주는 역사상은 없다. 종종 ①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고 시도하거나(전체사, 총체성 또는 요즘 가끔 들리는 빅히스토리. 참고로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는 이미 1960년대 파산된 바 있다),

② 모든 것에 대해 어떤 측면을 알고자 하거나,

③ 몇몇 관심 사실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하려고 한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의 명작 『세한도』가 태어난 곳이다. [중앙포토]

안타깝게도 이 세 가지 시도는 어느 것도 실현될 수 없다.

‘한국사’ ‘조선시대사’라는 것이 어떤 시대와 영역까지 포괄하는지는 논란이 있겠으나,

그 통사·개론들은 한국·조선이라는 대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일부를 담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이러했다’는 식의 단정은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 칼럼에서 다루는 것은 ‘조선 문명’이라는 ‘어떤 역사의 어떤 주제나 소재·측면’을 내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증거를 가지고 말이다.

둘째, 요즘 포털이나 언론 기사에만 클릭수를 늘이기 위한 센세이셔널리즘이 작동하는 게 아니다.

역사 서술이나 인식에서도 선정주의가 작동한다. 그 선정주의는 ‘사이비 역사’에 수렴할수록 기승을 부린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이다. 누군가 몰래 독을 먹여 암살했다는, 혹은 암살하려고 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증거를 찾고 끼워 맞추는 서술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상업주의의 일환, 주목을 끌기 위해 만든 장치다.

한때 『영원한 제국』으로 널리 알려진 정조 독살설의 경우, 경상도 일부 남인 집안에서 전해오는 사랑방 얘기였다고 한다.

기존 연구에서도 정조의 독살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정조가 심환지와 주고받은 수백장의 편지가 발견됨으로써 독살설은 또 기각됐다.

음모와 의심이 극적 효과에는 크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선 불가피하게 이용될 수도 있겠다.

혹여, 역사와 드라마를 혼동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면 독자 여러분이 한마디 해주시기 바란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중세 유럽의 초야권은 허구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설명할 때, 근대사회의 합리성에 비해 부도덕하고 저급한 육욕과 야만적 권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초야권(初夜權)이다. 아직도 초야권을 검색하면 대부분 봉건 영주의 영지 농노에 대한 성적 수탈의 증거로 등장한다.
“세계 각지의 미개 민족에서 볼 수 있는 습속이지만, 중세 유럽에서도 영주(領主)가 농민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행사했다고 한다.”(네이버 두산백과)
그러나 이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유럽 중세에서 그러한 관습이 존재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대부분 영주의 초야권이 실제로 행사됐다는 기록이 아니라 가신의 신부 선택 등에 대한 영주의 권리 등 장원(莊園) 지배권을 보여주는 자료인데, 이는 세금 징수 방식으로 이뤄졌다.”(브리태니커 영문판)
경제외적 강제 같은 복합적 현상의 틈새로 선정성이 스며들고, 그것이 역사를 왜곡한다.
선정주의의 끝은 추하거나 타락하거나, 이다.

[출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항령의 조선,문명을 읽다> - 7.‘사이비 역사’의 선정주의- “당파 싸움으로 3족·9족 멸했다”는 가짜뉴스 /중앙일보, 2021. 7. 23.

8.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 - 조선 사람들도 훈민정음 100주년 기념했을까

조선시대 세종 때 선보인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복원품. [중앙포토]

올해는 광복절을 맞아 귀한 일이 있었다. 봉오동 전투의 지휘자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왔다. 순국한 지 78년 만이고, 연해주로 간 지 꼭 100년 만이다.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까지의 길은 강제이주라는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지난해 귀환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돌발로 연기됐다고 한다. 100주년에 맞췄으면 더 나았으려나? 부질없는 생각이다. 홍범도 장군에게 무슨 영예가 더하겠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고 구획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1546년, 명종 1년이다. 한 해 전 인종이 세상을 뜨자 곧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격돌했고, 새로운 왕 명종을 등에 업은 소윤은 윤임 등 정적뿐 아니라 송인수·이언적·권벌·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 비판 세력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사화는 권세가가 왕이나 왕실을 끼고, 공식 조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제도나 절차 외의 사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했다.

1546년을 챙긴 이유가 있다. 1546년에서 딱 100년 전인 1446년(세종28), 한글이 완성돼 반포된 해다.

요즘으로 치면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하고, 각종 이벤트가 한 해 내내 지속했을 것이다. 명종의 조선 정부에서는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았다.

한글,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보편 언어로 사용되지 않아서였을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명종 다음 임금인 선조 때 정철은 이미 입에 착착 붙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글로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가끔 시험에 나와 우리를 애먹이지 않았던가. 사화에 몰두하느라 관심이 멀어졌을 수도 있다.

100주년 기념식을 하지 않았던 아마 가장 큰 이유는 ‘100주년’이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서양 역법은 갑오년(1894년)에 도입

지난해 미국 경매에서 구입해온 조선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 [뉴스1]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부활절을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법이다. 조선 사람들은 갑오년(1894)부터 이 역법을 사용했다.

당연히 세종 때 사람들은 한글이 반포된 해를 ‘1448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세계 표준이었던 명나라 연호인 ‘정통(正統) 11년’이라고 부르거나, ‘금상(今上·지금 임금) 28년’이라고 하거나, 갑자로 ‘병인년’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연도의 호칭은 지금 더 획일적이다.

아무튼 ‘1894년’이라는 그레고리우스 역법의 채택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더 정확히 말하면 제국주의-식민지에 의한 ‘세계사’의 탄생과 관련된다.

이 무렵 우리 몸에 장착된 태양 시계는 전기에너지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밤낮의 교차에 길들여진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은 체온·혈압·소변·배설 등 적어도 150개 이상이라고 한다. 생활 환경의 변화와 생물학적 진화 사이의 괴리는 아주 오래 계속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시(時)’ 또는 ‘시각(時刻)’이라고 했다. ‘시간(時間)’ ‘타임(time)’의 번역어다.

자시(子時)라고 하면 밤 11시~새벽 1시를 말하며 자시라는 말 자체가 ‘간(間)’을 의미했다.

하루는 12시가 되고, 각각의 시는 8각(刻)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니까 하루는 12×8=96각이었고, 1각은 15분이니까, 15분 단위로 구성됐다.

러시아 연해주로 떠난 지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의 묘소.

100년이라는 숫자가 역사의 두께를 말해줄 수 있을까. [뉴스1]

출퇴근과 같이 행정의 효율성이 필요했던 관청에서는 시각이 쓸모 있었다. 하지만 하루 12시 96각이라는 구분은 대다수 농민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농업사회에서는 하루의 절차가 사회적 규약보다 농업의 리듬, 계절 주기, 일출과 일몰에 의해 규정됐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간 감각은 주기적이었다. 시간은 반복되는 단위(날짜, 계절, 출생과 사망의 순환, 규칙적인 신체적 욕구 등)로 구분됐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는 ‘위장(배꼽시계)’ 아니던가? ‘밥 먹기 전(食前)’ ‘밥 먹은 뒤(食後)’라는 시간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상상보다 강고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자연적 주기에 따라 규정되는 시간관이 선명하게 의식되는 경험은 역시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태어나서 죽는다는 사실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상반된 성격의 시간관을 제시해준다.

이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일회적인 성격의 시간이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나’라는 개체가 태어났고, 언젠가 죽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이런 시간관은 종말론과 목적론의 기저를 이룬다.

시간이 한 줄로 늘어섰다 해서 선형적이라고 한다. 2021년, 2022년 식으로….

이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두고 조선 사람들은 전혀 다른 순환의 관념, 60갑자(甲子)를 썼다.

10간, 12지의 최소공배수로 탄생한 60간지(干支)는 늘 60을 넘지 않는다. 다시 말해 60을 주기로 순환한다.

셈을 하다가 10이 넘으면 다시 엄지부터 접으며 수를 세는 어린이들처럼 조선인들은 연도를 순환하는 시간으로 파악했다. 이 60간지는 연도의 셈법이기도 했고, 인생의 단위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노동과 놀이의 순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저 늘어진 시계는 우리 몸의 리듬이 탄력을 잃고 늘어졌다는 비유일까. [중앙포토]

이 60간지에도 묘한 이중성이 있다. 먼저, 말이 60간지일 뿐 각각의 간지는 ‘1 다음에 2, 2 다음에 3’ 하는 식의 서수 관념보다 독립된 연도의 의미를 띤다.

이는 60간지의 순환을 한 번 끝내 놓고 보면 훨씬 분명해진다. ‘병자년’ ‘임진년’이 또 나온다. 이를 두고 각 연도 사이의 인과성이 약하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음으로, 인생의 60간지는 다르다. 탈 없이 지내온 인생을 축하하는 회갑(回甲)은 분명 60간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벤트다. 하지만 이때의 60간지는 무한한 순환으로 열려 있었다기보다도 무덤을 향해 닫혀 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농업사회의 주기적 시간, 절기가 포개진다. 입추와 처서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농사를 결정하는 계절의 순환은 결국 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전에 따라 좌우되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그 순환을 포착하는 타이밍이 필요했으므로 그에 부응하여 절기를 배치했다.

그곳엔 숨쉬기의 리듬감과 같은 휴식이 있다. 농번기를 마감하고 몸을 추스를 농한기가 기다리고 있다. 추수를 마치고 가을떡을 돌린다.

이듬해 씨나락 담그고 모내기를 할 때까지 서너 달은 놀아도 됐다. 묵 쒀서 먹고, 돗자리도 짜고 새끼도 꼬고, 사랑방에 모여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노동도 놀이도 자연의 역학과 리듬에서 떨어져 나와 산업·기술적으로 재배치됐다.

쉬는 날은 겨울이 아니라 토·일요일이다. 이렇게 신축년과 2021년은 표기만 다른 게 아니다.

60간자

60간자표

역사학 단위 ‘세기’는 과연 정확한가
역사학이나 철학에서 지난 시대를 설명할 때 세기(century) 단위로 구획하곤 한다.
이를 헥토-히스토리(hecto-history)라고 한다. ‘17세기 사상사’ ‘19세기 연구반’ 식으로….
마르크 블로흐는
“우리는 더는 영웅의 이름을 따서 시대를 명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척 사려 깊게 100년 단위로 각각의 시대를 셈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1년에서 시작하여 모든 역사를 그렇게 센다.
13세기의 예술, 18세기의 철학, ‘볼품없는 19세기’ 등등. 산수의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우리들 저서의 페이지 곳곳을 배회한다. 우리들 중 누가 감히 이 명백히 편리한 유혹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비판은 지금도 논문발표회 때 곧잘 등장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매우 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재주의이며, 시대착오의 오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세종대 운운’ ‘중세 운운’은 정확한가? 누가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겠다.

[출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항령의 조선,문명을 읽다> - 8.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 - 조선 사람들도 훈민정음 100주년 기념했을까 /중앙일보, 2021. 8. 20.

9,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 “노비제는 천리에 어긋나도다, 커다란 변고로다”

김홍도 『풍속도첩』중 ‘벼타작’. 보물 527호.

일꾼들은 나락을 터느라 바쁜데 자리 깔고 한잔하는 양반들은 분명 뒷담화에 오르지 않았을까. 정치적 자기의식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동방의 노비법, 개벽 이래 이런 것 없었도다.

백 대, 천 대 이르러도, 대대로 남의 노비 되네.

귀천의 형세가 억지로 정해지니,

커다란 변고로다 천리에 어긋나도다!”

조선시대 학자의 시 일부이다. 지은이는 윤봉구(尹鳳九·1681~1767).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로, 송시열의 묘지문을 썼으며 충청도에 살던 성리학자였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고,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다. 조선은 노비 반란이 없었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 일상에서, 즉 논두렁이나 주막에서 억압적이고 부당한 현실에 대해 화도 내고 험담도 했을 것이다. 원래 이렇게 작은 영역에서 정치적 자의식이 싹트는 법이다.

점차 재산축적, 양인화 소송, 국가 정책이 어우러지면서 노비는 사회적 위상을 높여갔다.

아마 이것이 반란이 없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건국 초반 천민→양인 전환 많아 - 양반 계층의 사노비 살상 금지돼
노비-주인간의 절대적 관계 없어 - ‘더 평등한 세상’ 향한 멀고 먼 길

1869년 이생원댁 사내종 월봉이 상전의 지시에 따라 18살 먹은 계집종 쪼깐을 100냥에 팔면서 작성한 문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길이 10m짜리 노비반환소송문서.

1689년 겨울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년 동안 벌어진 소송의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소송, 재산축적 등으로 위상 높아져

조선 신분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거나 양반·중인·평민·천인으로 나누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반상(班常)의 차이도 강조되는데, 시대와 지역, 그리고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편차가 있다.

오늘은 신분제 중에서 노비 정책의 흐름을 살펴본다. 노(奴)는 남자, 비(婢)는 여자를 가리킨다.

노비는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였다. 양반이나 양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외에 사회적으로 타 신분에 예속돼 있지 않았다. 노비를 서구의 노예나 농노에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예속, 채찍질, 성노리개, 매매 등 노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동정과 선정성이 어우러져 피상적으로 관찰된다.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노비의 매매 자체가 드물었다. 물론 그것이 신분의 불평등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황해도 백천군에 거주한 노비들의 가계와 신분 정보를 기록한 한글 호적문서. [중앙포토]

처음 조선시대를 공부할 때 조선 초기에 대략 30% 정도의 인구가 노비였다는 사실을 알고 의아했다.

이 수치를 근거로 누구는 “조선은 전 국민의 반 가까이를 종으로 부린 시대”라고 비난한다.

또 어떤 학자는 조선사회를 ‘노비제 사회’라고 주장한다.

노비 같은 예속민은 전쟁 포로나 대규모 약탈로 조달되는 것이 일반 역사의 경험이다.

로마시대의 노예 조달, 유럽과 미국의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납치가 대표적이다.

종종 채무, 자발적 의탁에 의해 노비가 되기도 하지만, 비율은 높지 않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는 그런 전쟁이나 약탈이 발견되지 않는다. 자국 백성이 노비인 것이다.

자국 백성을 노비 같은 예속민으로 삼는 것은 중국·유럽·아프리카 등 어느 곳이나 보인다.

일본은 16세기에 자국 백성을 노예로 수출하기도 했다.

아무튼 조선 인구의 노비 비율은 디폴트로 접근하는 게 상식에 맞다. 고려 때 인구 비율을 넘겨받은 것이리라.

고려 후기, 지배층이 산과 강을 경계로 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국가권력의 약화를 틈타고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 백성은 차라리 몸을 맡기는 예속민이 되거나,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노비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사료를 통해 충분히 확인된다.

공민왕 때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 친원 귀족 세력의 지지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추진한 개혁은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다. 전담 기구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빼앗긴 토지와 노비가 된 양민의 원상회복을 위한 관청이었다.

하지만 고려 사회는 이 개혁을 감당하지 못했고,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판을 기다려야 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조선 정부는 건국 초부터 양인화 정책을 폈다.

태종 때 사찰에서 몰수한 노비는 공노비로 전환했는데, 이들은 독자적으로 살면서 공물을 바치고 양인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여진인 등을 양인으로 선포하고, 백정을 양인화했다. 정부에서 노비 소송을 지원해서 천민이 양인 신분을 얻게 했다. 주인의 사노비 살상도 금지했다.

양천의 교차 혼인을 금지하면서 고려시대 이래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 되는 길을 막고자 했다. 이런 양인화를 추구하는 조선 정부와, 노비가 재산인 소유주 사이의 대립이라는 밀고 당기는 역정이 조선 전기의 노비제를 둘러싼 상황이었다.

중엽에 접어들어 율곡 이이는 “종모법(從母法)이 양민 여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양민이 개인의 노비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율곡이 말하는 종모법은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가 혼인하면 자식이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종모법은 이중 잣대였다. 천인 남자와 양인 여자가 혼인할 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종모법은 어느 경우나 자식이 노비가 되는 불합리한 법이었다.

노비 출신 학자 송익필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보물 1415호.

그러다 보면 양인의 숫자는 줄고 사노비가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는 군역 확보 차원에서도, 사회 융화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이는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양인이라면 자식도 양인이 돼야 한다는 원칙에서, ‘노양처종모법(奴良妻從母法)’을 주장했다. (명칭이 비슷해서 앞의 종모법과 헷갈리기도 한다)

이후 두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인 효종·현종대에 노양처종모법이 입법됐다. 이경억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주장한 것을 현종이 승인했다. 1669년(현종10)이었다. 재야의 유형원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법은, 가까이 군역을 담당할 양정(良丁)을 확대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동시에 점차 노비제를 폐지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민생과 재정 안정되며 점차 사라져

그러나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2차 예송 이후, 1678년(숙종4) 형조판서 이원정은

“종(奴)이 양녀를 처로 삼은 자는 양역(良役)을 꺼리고, 노와 주인 사이에 소송이 더욱 번거롭다”며 개정을 요청했고, 영의정 허적도 자신은 10년 전 법안에 반대했다면서 “겨우 10년 만에 그 폐단이 이와 같다. 종과 주인 사이의 사송이 어지러워 윤기(倫紀)가 무너지게 되었다”며 폐지를 주장했고, 마침내 노양처종모법은 폐기됐다.

1684년(숙종10) 우의정 남구만의 발의로 노양처종모법이 부활했으나, 1689년(숙종15) 기사사화(己巳士禍)를 겪은 뒤 다시 사라졌다. 영의정 권대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목내선, 김덕원 등은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며 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숙종 연간에 다시는 노양처종모법은 회복하지 못했다. 경종이 즉위한 뒤에도 신임사화라는 혹독한 정변을 겪으면서 논의조차 되지 못하였다. 앞서 소개한 윤봉구의 시는 이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즉위한 뒤 조문명은 “노와 양처(良妻)에게 태어난 자식이 아비의 신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더욱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꺼진 불씨를 되살렸다.

영조가 반대했으나, 양역 확보라는 정책 과제와 맞물려 1731(영조7) 법으로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대동법·균역법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이 안정되며 노비의 생활이 양인과 큰 차이가 없게 된 사회 현실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비제에 대한 이런 사상의 기조와 정책은 1801년(순조1) 납공(納貢)하던 내수사와 각 관청 노비의 양인화, 1886년 노비세습제의 폐지, 1894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노비와 주인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
노비제를 두고 성리학을 탓하는 건 일제강점기 이래 여전하다.
이영훈은 “조선 유교는 노비-주인 관계를 추가하여 실은 육륜을 창출했으니 이 점은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조선 유교의 두드러진 특질의 하나”라고 했다.
삼강오륜에 더해 ‘6륜’이 됐다는 말이다. 본문에 언급한 ‘노비와 주인은 임금과 신하와 같다’는 주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조선 사람들은 끝내 ‘노비와 주인의 관계’ ‘6륜’에 넣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주인-노비의 명분론을 뚫고 노비의 사회적·정치적 위상이 높아가고 있었고, 생각 있는 성리학자들은 그 성장을 사상과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걸핏하면 성리학만 탓하는 게으름으로는 실상에 다가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소곤거림,
인내와 억제 속에서 성장한 자기의식, 그것을 대변하는 지식층의 역할을 포착하기 어렵다.

[출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항령의 조선,문명을 읽다> -9,조선은 노비제 사회인가 - “노비제는 천리에 어긋나도다, 커다란 변고로다” /중앙일보, 2021. 9. 17.

10.노비제, 사실과 편견 사이 - 노예보다 농민에 가까워…가족구성도 평민과 비슷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1754~1822)의 ‘노상알현도(路上謁見圖)’. [사진 평양조선미술박물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양반과 상민의 모습이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칼럼(9월 17일자)에서 조선 노비제의 추이, 노비의 평민화 정책을 살펴보았다. 부모 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던 조선 전기의 정책 기조에서, 17세기가 되면서 아버지가 양인이면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자식이 양인이 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고 서술했다.

약간의 논란은 예상했지만 실제 댓글은 더 흉흉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조선을 미화한다” “조선 유학자들은 대부분 수백 명 노비를 거느리고 착취했다”는 반론이었다. 내 말에 공감해주는 분은 거의 없었다.

전쟁포로·약탈노예와 성격 판이 - 매매에 따른 가족해체 거의 없어
“노비 두느니 소작 주는 게 낫다” - 양반층과 ‘상호보험적’ 관계 이뤄

먼저 내가 그 칼럼을 잘못 썼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판을 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댓글을 쓴 독자들도 그리 독해력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주제를 다시 논의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은 그 댓글에서 중요한 함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댓글 중 누구도 노비제가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악습으로 본다는 점 말이다. 이보다 중요한 공감대가 어디 있는가.

올해 초부터 시작된 이 칼럼의 취지는 ‘식민주의=근대주의’ 프리즘을 치우고 조선을 하나의 사회, 문명으로 설명해보자는 것이었다. 여전히 기존 프리즘이 강고해서 내 칼럼이 조선을 미화한다고 보는 이가 많은 듯하다. 그래도 미화라는 말은 과하다.

“조선을 미화한다”는 댓글은 오해일 뿐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사진 한양도성박물관]

조선 초, 정부는 일천즉천(一賤卽賤) 악법을 개선하지 못했다. 이는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바다.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이 있다.

국민의 30% 이상으로 추정되는 노비 숫자를 나는 고려 후기의 연장에서 이해했는데,

그보다는 세조 때 보법(保法)으로 군역 부담이 늘고, 그 압박으로 양인이 감소한 것이 노비 증가의 원인이었다.

노비제는 이전 문명에서 넘겨받은 게 아니라 조선 정부의 정책이 만들어낸 인재(人災) 성격이 컸다.

이 악법을 깨는 시간도 적지 않게 걸렸다. 17세기 노(奴·남자)가 양인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으면 양인이 되는 법은 율곡의 제안 이후로 쳐도 150년이 걸렸고, 1669년(현종10) 첫 입법 이후에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가 60년 뒤인 1731년(영조7)에 확정돼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그래서 18세기 이후 노비제는 쇠퇴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나는 조선 사람들은 주-노 관계를 오륜에 더하여 육륜으로 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문명의 선진성을 판단하는 데 사회 구성원의 통합성, 즉 갈등의 감소가 주요 지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 』의 속편 격인 『속대전』.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리가 노비제를 살피는 이유는 생사여탈, 매매, 성노리개 등의 용어를 통해 묘사될 때 빠지기 쉬운 선정적 상상을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삶이 어떠했는지, 역사적 실상에 접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비의 발생·거주·의무에 대한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노비의 발생 과정은 존재 양태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다.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앵글로색슨 등 백인들은 당초 원주민인 인디언을 노예로 삼으려다 실패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약취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백인보다 아메리카 지리에도 밝았고 그곳 농작·수렵에도 익숙했다.

그러니 노예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그들을 노예로 삼아 봐야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인디언을 노예로 삼는 방법은 흑인 노예 경우처럼 잡아다 유럽에 파는 것이었다.

일종의 뿌리 뽑기. 같은 이유에서, 백인 노예주가 종종 오해하고 매도했던,

흑인 노예의 비굴하기까지 보였던 나약함은 천성이 아니라 뿌리 뽑힌 사회경제적 고립감 때문이었다.

조선의 노비는 전쟁 포로나 약탈 노예가 아니라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노비로 전락했다고 해서 노예처럼 부릴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비의 거주와 주인에 대한 의무를 보면 노예보다 일반 농민에 가깝다.

평민인 농민이 국가에 지던 군역과 비슷한 부담을 주인에게 지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가 더뎠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경상도 안동의 의성 김씨 집안 문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노비의 가족 구성은 평민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매매에 의한 해체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노비제는 이제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한 것이다. 물론 노비 주인이 이때 와서 착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안동 의성 김씨 집안 문서가 말하는 것

보물로 지정된 경북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의 대청마루. [사진 문화재청]

지난번 살펴보았듯이 백성의 삶을 대변하는 지식층, 즉 사류(士類)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노비들의 자기의식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이 중요했던 16세기와는 달리, 18세기에는 토지의 재화 가치가 높아졌다.

차라리 소작을 주는 게 낫지, 노비를 농사에 부리며 그 생계를 유지해주는 일이 소유주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니 노비가 도망을 쳐도 심각하기보다 시큰둥한 것이다.

“막금이가 지난번 도망갔다가 오늘 돌아왔으니 괴이한 일이다”

“덕삼이가 행랑채로 들어왔다. 덕삼이는 2일에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奴) 만세가 쌀 1말과 돼지 1마리를 보내 초하루 제사를 도왔다. 그 성의가 가상하지만 너무 지나치다.”

잘 사는 종 만세가 제수를 보태자 감사하는 말이다.

“비(婢·여자) 분이를 석전으로 보냈다. 어머니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제사를 담당하는 비를 사사로운 일에

써 큰 실례이니 매우 마음이 편치 않다.”

제사 지내는 비를 심부름 보내는 것도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미국 남부의 노예-주인 관계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상호성 인식이 평등을 향한 첫걸음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불완전하지만’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상호 보험적 또는 상호 호혜적 관계’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상호성을 평등성으로 혼동하지는 말자. 불완전한 상호성은 위계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분이든 계급이든 말이다. 그러나 상호성의 인식이야말로 평등을 향한 첫걸음이다.

언젠가 노비의 양인화 정책을 발표했더니, 그게 평등사상에 기초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을 들었다.

평등이 멀리 있는 무엇은 아닐 것이다. 노비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자각 속에 평등이 있는 것 아닐까.

그 자각의 제도화 속에서 구현되는 것 아닐까.

늘 미래는 도둑처럼 와 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점차 노비제를 없애 간 것은 조선 문명사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상 노비제에 대한 논의는 정진영·이영훈·김건태·권내현·임상혁·이정수의 논문을 참고했다.

논문은 도서관에서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역사 공부의 끝에는 평가가 있다. 우리 일기가 반성으로 끝나듯이, 사마천도 그랬고, 조선실록의 서술도 그랬다.

그러나 역사가 곧 도덕은 아니다. 역사 공부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런 다음 판단·평가한다.

그런데 “조선사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나는 그 이유가 조선사를 연구하고 설명하기 이전에 판단·평가부터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사학자 하위징아(J Huizinga)의 말마따나 역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마디 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심, 역사학계의 종사자로서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근데 고맙지만은 않은 이유도 있다. 공들인 연구 자체를 도대체 인정하지 않는 가벼운 영혼들 때문이다.

이건 미숙함과 구별된다. 미숙함은 얼마든지 일취월장할 수 있다. 그러나 가벼움은 언제나 가벼움일 뿐이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현실도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노동, 자유일까 강제일까

에릭 홈스봄
노비제에 담긴 인간의 예속과 불평등에 대한 독자들의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뜻에서 한 걸음 더 생각해보자.
지혜로운 역사가 에릭 홉스봄(E Hobsbawm·사진)조차도 『자본의 시대』에서
“농노제 폐지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전제조건이었다”
고 서술할 정도로, 임노동은 늘 ‘자유로운’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언급된다.
보유지와 공유지에서 쫓겨난 농민은 산업혁명 무렵 도시 빈민·노동자가 됐다.
공동체의 보호는 사라졌고, 내 몸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 휴일 없는 15시간 노동이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 도시의 일자리는 늘 모자랐다.
중세 농민이 부분적으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토지에 묶여 있었다면, 현대 사회의 나는 부분적으로 경제적 강제에 의해 월급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묶여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놀고 즐기고 고뇌하며 삶을 가꾸어간다. 그 인간다움의 크기, 딱 그만큼 사회는 살만한 것이 된다.

[출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오항령의 조선,문명을 읽다> - 10.노비제, 사실과 편견 사이 - 노예보다 농민에 가까워…가족구성도 평민과 비슷 /중앙일보, 202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