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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인 한일청구권문제(박정권)

문수봉(李楨汕) 2008. 4. 8. 07:01

                    징용자 목숨값 담보 정치자금 챙겨 "굴욕적 회담 막후엔 만주인맥 포진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내년은 한일관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가 될 것이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압적으로

박탈한이른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또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60년

그리고 1965년 그들과 국교정상화 조약(한일협정)을 맺은 지 40년이 되는 해다.

정부 한일협정 문서 공개 '주목'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를 놓고 정치권이 논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에 대한 청구권과 경제협력 등을 규정한 협정 문서 5건의 공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2월 일제시대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외교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한일협정 문서 57건 중 5개의 문건을 공개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정부가 공개를 검토중인 문서 가운데는 한국측 협상 당시 한국측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한 발언록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때마다 65년 맺은 한일협정에 따라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이들이 한일협정 무효소송을 내거나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낼 경우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일본 정부가 북-일 수교협상에 지장을 줄 수 있다며 비공개를 요청한 문서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이 문서가 공개될 경우 한일간에 외교적 파장도 예상된다.

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뒷거래와 관련된 일련의 문건을 발굴, 언론에 공개했다. 이 문건들 가운데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한일관계의 미래' 라는 제목의 1966년 3월 18일자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한 1961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65년 사이 5년간에 걸쳐 6개의 일본기업들로부터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제공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조선인 징용, 징병, 위안부, 학도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명목으로 청구권 자금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기업들이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이 와중에 발생한 것으로, 결국 박 정권은 앞에선 청구권자금 협상을 하면서 뒤로는 이를 빌미로 비밀 정치자금을 받아 챙긴 셈이다.

공화당은 이밖에도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일 한국기업을 상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 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적었다. 이들이 돈을 건넨 창구는 당시 권력 제2인자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한일협정 체결과정의 검은 '뒷거래'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의 큰 의제 가운데 하나는 35년간 일제의 강압지배에 대한 대일 청구권 문제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 장면 정권에서는 이렇다할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와서 급진전을 보았다.

여기엔 박정희의 일제하 경험(대구사범학교, 만주 군관학교, 일본 육사 등)과 일본측 '만주 인맥'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막후에서 한일회담 성사를 도왔으며, 또 박정권 하에서 한일간 밀월외교의 연결고리 노릇을 하였다.

▲ 박정희가 만주 신경군관학교 재교시절 교장으로 있던 나구모 중장(당시 계급)

군사쿠데타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첫 외국방문지로 일본을 찾았다. 박 의장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11월 11일 저녁 도쿄 시내 일본 수상관저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만찬회가 열렸다. 양국 정상과 참모들이 마주 앉아 있는 긴 테이블 끝에 한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박 의장이 초청한 '특별손님'이었다.

공식 축배가 끝 난 후 박 의장은 술병을 들고 테이블 끝머리에 앉은 이 노인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국가원수의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 노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술을 한 잔 올렸다. 그리고는 유창한 일본어로 "교장 선생님, 건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 노인은 박정희가 2기생으로 졸업한 만주 신경군관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나구모(南雲親一郞)였다.

이날 만찬장 주빈이었던 이케다(池田) 수상은 "사은(師恩)의 미덕을 안다는 것은 우리 동양의 미덕으로, 박정희 선생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라고 박 의장에게 극도의 찬사를 바쳤다. 박 의장의 이같은 태도는 신의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후손을 자처하는 일본측 인사들로부터 커다란 호의를 이끌어 냈다.


박정희 "명치유신의 지사를 본받아..."

박 의장의 이같은 '낮춤 자세'는 다음날 있은 일본 집권 자민당 간부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어졌다. 도쿄 시내 중심가 아카사카의 한 요정에서 열린 일본 정계의 막후 실세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일본식 예법을 갖췄다. 그리고는 통치철학을 묻는 한 일본측 인사의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무 경험조차 없는 우리는 다만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건설하려는 의욕만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 메이지(明治)유신을 성공시킨 젊은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 분들을 본받아 우리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의 입에서 돌연 '명치유신의 지사'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참가한 일본측 인사들도 당황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권 기간 중 일본을 배우거나 따라잡자는 얘기를 자주 했었다.

박정희는 청와대 시절 일본 군가를 부르는 등 자주 '일본 향수'에 빠졌었다고 한다.

사진은 박정희가 60년 후반 청와대에서 말을 타는 모습.


특히 그는 청와대 시절 일본식 복장으로 말타기를 즐겼으며, 술자리에선 일본 군가와 '교육칙어'를

줄줄 낭독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일본식 교육의 결과로 '일본 향수'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시기 박정희는 앞선 일본을 배우려면 한일 국교정상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2년 10월 20일 미국 방문 길에 오르는 박정희 의장은 하루 전인 19일자로 이케다

일본 수상 앞으로 친서 한 통을 썼다. 친서 전달자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본인은 극동의 안녕평화와 자유진영의 단결이라는 견지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조속히 이룩돼야 한다는 요망이 증대해 감에 따라 양국간의 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호전된 기운이 마련되고 있음을 보고 이를 흠쾌(欽快)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와 같이 이룩된 좋은 분위기를 현재 진행중인 국교정상화 회담을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타결로 이끌도록 하는데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표현은 두루뭉수리한 것이었지만 핵심은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짓자는 것이었다.

박 의장은 김종필 부장에게 친서를 쥐어보내면서 이번엔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으라고 특명을 내렸다. 김 부장을 만난 이케다 수상은 11월 4일 유럽순방에 앞서 11월 3일자로 박 의장 앞으로 보낸 답신에서 "조속한 타결을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일본 정계의 막후거물 오노 반보쿠

일본 정계의 막후인물 한일회담을 막후에서 성공시킨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 사진은 오노가 1962년 12월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방한했을 때 박정희 의장을 만나는 장면. 왼쪽부터 박의장, 최영택 주일대표부 참사관, 오노 부총재.

이처럼 호전된 분위기 속에서 이 해

11월 12일 김종필은 오히라 일본 외상을 만나 청구권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 민간차관

1억불+α'를 골자로 한 '김-오히라

 메모'가 바로 그것이다.

 

(이동원 전 외무장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2억불이었다고 함) 김-오히라 회담을 막후에서 도운 사람은 일본 정계의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일본 자민당 부총재였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63년 11월 5일 박정희 의장(당시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은 오노 앞으로 사신(私信) 하나를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사신에서 "한일 양국 국교교섭에 관해 음양으로 배려해 주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다가오는 귀국의 총선거에서 승리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물론 이 사신에는 한 한국인 기업가에게 도움을 달라는 개인적인 부탁도 있다.

▲ 박 대통령은 오노 부총재에게 '시사(侍史)'라는 용어를 써가며 깍듯이 예우를 갖췄다. 사진은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 전용지에 1963년 11월 5일자로 오노에게 보낸 사신의 마지막 장.

그러나 당시 한국측 최고권력자인 박정희 의장이 일본 집권당 부총재인 오노에게 사신 말미에서 자신을 낮춰 '시사(侍史)'라고 지칭한 걸로 봐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달 뒤 박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사절로 방한했다가 귀국길에 "아들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흐뭇함을 느꼈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공식 외교채널이 아닌 막후인사를 통한 비밀협상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김-오히라 간에 대일 청구권 문제가 굴욕적으로 마무리 된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박 정권은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됐다. 이른바 '6.3사태'로 불리는 1964년 중반기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그것이다.

이 해 4.19를 시작으로 반대시위가 본격화 된 후 6월 3일 시위대가 급기야 청와대 입구까지 몰려가 마치 4년전의 '4.19'를 연상시켰다. 박 정권은 급기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대시위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자 박 정권은 이를 수습할 희생양이 필요했고, 결국 청구권 협상의 주역인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좀처럼 사태가 수습되지는 않자 정부는 일본측의 사죄 사절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측 외교라인은 '만주 인맥'

1965년 2월 17일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측 각료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일본 외상이었다. 그의 카운터 파트는 당시 38세의 이동원 외무장관. 이 장관은 이번엔 한국에서 회담을 열면서 일본측의 공식 사죄를 받아낼 요량이었다. 이 장관은 이같은 파격적인 전략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재가를 얻어 진행한 것이었다.

회담 당일 박 대통령은 진해 별장으로 내려가면서 이 장관에게 "정권도 회담도 무너져선 안되오, 알아서 잘 하시오!"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이날 저녁 시이나를 위해 삼청동 청운각에서 열린 만찬장에는 각 군 참모총장급 장성들도 대거 참석했었다. 이는 시이나 외상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그는 한국측의 기대에 부응해 줬다. 그는 "양국 간 오랜 역사 중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써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시이나 외상의 방한과 공식 사죄는 그저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방한을 위해 일본측 외교라인을 설득한 결과였다. 당시 일본측 외교라인은 지한파 거물인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전 수상의 인맥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인맥'으로 연결돼 있었다. 시이나 외상은 기시가 만주국 산업부 차장 시절 그 밑에서 부하로 일했다. 또 당시 수상인 사토(佐藤榮作)는 기시의 친동생이었다.

한일협정 체결로 공식 국교를 수립한 박 정권은 이후 한일간 밀월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여기에는 한일협정 체결을 막후에서 도운 일본 정계의 지한파 우익인사들과 박정희처럼 일제하 경험을 가진 한국측 인사들이 카운터 파트가 돼 다리 역할을 했다. 일본 도쿄 고등사범을 나와 만주국 관리를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14년간 총 7차 회담 개최...학생 등 반대투쟁 전개

'굴욕적' 한일회담 체결 경위


▲ 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일제 식민통치가 끝나고 이 땅에 정부가 수립된 이후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에 대해 적절한 관계정립이 필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0월 20일 첫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관계설정에 나섰다. 이로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총 7차례의 본회의를 거쳤고, 무려 14년이 걸렸다. 그 사이 정권도 두 번 바뀌었다.

한일회담은 중도에 여러 차례 고비를 겪었다. 1953년 4월 15일 개최된 2차 회담에서는 평화선 문제, 재일교포 강제퇴거 문제 등을 놓고 논란 끝에 회담이 결렬됐으며, 이어 10월 6일부터 재개된 3차 회담에서는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久保田貫一郞)의 '망언'으로 또다시 회담이 결렬됐다.

4차 회담은 1957년 예비회담을 거쳐 1958년 4월 15일 시작되었는데, 재일교포 북송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가 1960년 4·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다시 중단됐다. 그후 장면 정권이 한일회담 재개를 추진, 그 해 10월 25일 제5차 회담이 열렸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되는 곡절을 겪었다.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군사정권의 강한 의욕으로 급속히 진전돼 이듬해 11월 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회담, 대일 청구권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문제가 타협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대일청구권 협상 등을 놓고 야당과 학생들이 굴욕적 협상이라며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그러나 1965년 2월 20일 시이나 에쓰사부로(推名悅三郞) 일본 외상이 방한

기본조약에 가조인하면서 완전타결을 보았고, 그 해 6월 22일 조인식을 거쳐 12월 18일

비준서를 일본과 교환함으로써 한일협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