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입니다. <신기한 고묘의 수수께끼>라는 책 제목으로 2004년 5월 북경 맹문(盲文)출판사에서 만들어졌는데요, 이집트고분, 미라제작, 진시황릉, 중국 상북(湘北)지역 고분, 송(宋) 이전/후의 고분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고구려고분은 제일 마지막 8장의 신비한 고구려고분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으로 적혀있습니다. 지금까지 매체를 통해 그냥 '중국이 고구려역사를 가져가려고만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보니까 중국의 논리가 보이네요....중국을 중앙정부로 고구려를 소수민족 지방 정권으로...그리고 한민족과 고구려민족은 전혀 상관관계 없는 민족으로요...
간략히 번역해 보았습니다.
P309 “신비에 쌓인 도시 길림성 집안시” 집안시는 산수가 아름다운 변방의 작은 성으로 길림성의 대표적인 두 개의 국가역사문화명성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길림시). 집안시는 길림성의 최남부에 위치해 백두산의 남쪽 등성이와 맞닿아 있고 조선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산천이 수려하고 기후가 적당해 ‘길림소강남’이라고 불려왔다. 집안시는 유구한 역사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성이 만들어진 것만도 이미 2000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기원후 3년, 중국 고대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인 고구려가 여기에 도시를 세우고 대량의 문물과 유적을 남겨두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군인 ‘동구고묘군(洞沟古墓群)’ 과 ‘동방제일비(東方第一碑)’라 불리는 호태왕비(광개토대왕릉비)이 그 중 하나이다.
P310 신비한 고구려무덤 고구려왕국(기원전 37~기원후 668년)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의 일개 소수민족정권이다. 존재했던 705년동안 ‘국내성(현재 길림성 집안시내)’이 이 강성했던 지방 정권의 도성이었고 연이어 425년 동안 더 유지되었다. 고구려인은 사후 인체의 매장 방법을 매우 중시해서 문묘를 굉장히 호화롭고 견고하게 만들고 관리했다. 만여개에 가까운 고구려고분들로 조성된 ‘동구고묘군’이 여전히 집안시 압록강변의 평지와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국무원이 공포한 제일 국가급중점문물보호단위이다. 이 고묘 중에서 이미 몇 십 여개의 벽화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벽화의 색채가 화려하고 내용이 풍부해 ‘동북아의 돈황’ 이라고 불리고 있다. 벽화에는 복희, 여와, 신농, 사신(四神)등의 전설 속 인물과 기이한 동식물 그리고 귀족생활과 사회풍속을 반영한 예술적인 내용으로 고구려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집안시의 모든 고묘들은 일찍이 도굴당했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개별 무덤외에는 전부 문물보호부에서 봉쇄해 두고 있다.
P311 신비한 소수민족지방정권 고구려는 중국 고대 동북지대의 소수민족으로 일찍이 주(周)와 진(秦) 시대에 혼강(渾江)과 압록강 유역에서 살았고 그 조상들은 일찍이 부락상태였을 때부터 신하로서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기원전 37년, 주몽(朱蒙, 쪼우모우라고도 부른다)이 한(漢)의 현토군 관할범위에 정권을 세우고 도성은 흘승골성(紇升骨城-지금의 요녕 환인현성桓因懸城일대)에 있었다. 이를 사서에서는 고구려국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국 동북역사상에서의 한 지방 정권에 불과하다.
기원3년의 한 겨울, 고구려의 제 2대 왕인 유리명왕이 도성을 ‘산수가 깊고 험하며 지세가 농사에 적합하며 사슴과 자라가 많이 나는” 국내성으로 천도해 오늘날 길림성의 집안시가 되었다. 기원 427년,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했다. 고구려인들은 용맹하고 전쟁에 능해 여러 국왕들은 재위했을 때 동서정벌을 했다. 국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는 동북지역과 오늘날의 조선반도북부 및 카이위 중원지역을 호령하기도 했다. 또한 이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거쳐 중앙왕조(중국)의 정벌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통일되어 강해진 당(唐)이 더 이상 지방할거세력의 존재를 참지 못하고 결국 668년 조선반도남부의 신라국과 연합해 힘겨운 정벌을 통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중국 고구려문제연구의 한 권위있는 전문가의 소개에 의하면, 고구려국의 역사는 28대로 당에 의해 멸망한 후 그 민족정권과 민족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유민중에서 대다수는 강남과 중원지역으로 이주해 점점 한족(漢族)으로 유입되었고 일부분은 발해와 돌궐로 들어갔고 후에 다시 한족과 융합되었다. 오직 약 7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고구려 유민만이 신라국으로 들어갔다가 918년에 ‘고려국’이 건립될 때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에 고구려국과는 모두 아무런 전승관계가 없다. 현대의 조선반도상의 조선족과 고구려족 역시 같은 민족이 아니다.
P312 신비한 “호태왕비(好太王碑)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 19대 왕인 “국풍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風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덕담의 공덕을 기념한 비이다. 비는 하나의 커다란 자연응회암을 쪼아 만든 것으로 높이 6.9미터, 폭이 1.45미터에서 2미터에 이르는 방주형이다. 비의 사면에는 예서체의 한자비문이 새겨져 있고 모두 44행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1775자이나 비바람의 풍화작용과 침식 및 기타 원인으로 일부 문자가 상해 현재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600여자이다. 비문에는 고구려왕국의 기원과 건국신화와 전설 및 호태왕이 생전에 정벌해 영토를 넓힌 공적 및 330구의 수묘(守墓) “연호(煙戶)”의 내원과 수묘제도에 대해 적고 있다.
P313 “동방의 피라미드- 將軍塚” 집안시 동북의 용산아랫자락에 네모난 모양의 계단식 석묘가 있는데, 그 규모가 웅대하고 모양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해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부르는 묘가 있다. 이 무덤은 기원 5세기초에 만들어진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 제 20대왕인 장수왕 거연의 능묘로 1100여개의 화강석 벽돌을 이용해 만들었고 모두 7단으로 되어 있다. 묘의 높이는 12.4미터이고 저부의 면적이 997평방미터, 묘 정상의 면적이 약 270평방미터에 이른다. 묘의 사방에는 각기 3덩이의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 서 있는데 매 덩이의 무게가 15톤 이상이다. 당시의 경제발전수준과 건축수단을 고려했을 때 관련전문가들은 장군총의 제작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이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