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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성과 반격(反擊)]

문수봉(李楨汕) 2008. 7. 6. 12:09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성과 반격(反擊)]

최근 방송이나 신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우리는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잘 하고 있는데 중국측의 일방적인 역사 왜곡인가?
내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만 보는 현상이 아닌가?
이 문제를 폭 넓게 검토하고 또 우리의 대응 태세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방법인가?
뒤돌아 보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자 한다.(출처 구이넷 coo2.net)

예를 들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차분하고 내실있게 대응한다.”

“북한과 공동 대응한다.”
“강력하게 대응한다.”
“학술적 대응은 피하고 외교적으로 대응한다.”
“외교관의 직위를 격상한다.”는 등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은 없고
누구나 상식선에서 말할 수 있는 막연한 내용만 나오고 있다.

또한
신문에 발표되는 고구려사에 대한 학자들의 논지(論旨)는
고구려인의 모습, 풍습, 예술, 생활 등 사실상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은
전혀 없고 고구려인과 사회상의 부분적인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고구려 역사를 포함한 우리 고대사를 찾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역사와 관련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현상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다.

이것도 역사전쟁이니까.

피아의 상황을 확실히 파악한 다음 거기에 맞는 최선의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은 방법으로 최선의 대응책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1. 중국측 현상

(1) 역사책에 기록된 고구려사

고구려를 중심으로한 중국 고대사의 기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가운데 고구려사는 결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다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중국 역사책(25史)에 고구려는 동이국(東夷國)으로 분리되어 한족(漢族)과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위만국(衛滿國)을 멸한 다음
한(漢)과 호(胡)를 나누어(25사 「三國志」 集解 권 30 東夷 濊) 한민족(漢民族) 주변의
민족을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이라했다.
  
2) 중국 대부분의 사서(후한서, 삼국지, 송서,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사, 남사, 수서,
당서 등 )에 고구려는 동이국(東夷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또한 중국의 여러 사서(위서, 주서, 수서, 북사, 당서 등)에 고구려는 부여(夫餘)로부터
이어진 나라라하여 고구려 역사 705년과 부여 200여년을 포함한 900여 년의 역사라고
기록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이 망하고 생긴 여러 나라 중 하나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후예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4) 고구려는 漢나라를 비롯하여 수(隋), 당(唐)나라 등 한족(漢族) 국가와 수많은 전쟁을
치룬 한민족(漢民族)의 적대국(敵對國)이다.
특히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한 대표적인 나라다.
이러한 전쟁은 주로 중국의 현 수도인 베이징(北京) 주변에서 일어났으며
만리장성도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성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5)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북쪽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 를 위협하고
남으로 오(吳), 월(越)을 침공하여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 양제(隋 煬帝)의 요동 정벌이 실패�다”는
당 태종(唐 太宗)의 말을 인용 기록하였다.

중국은 항상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지역들은 중국의 산서, 하북, 산동성 등 동부지역과 양자강 이남 중국 대륙의
노란자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단제 신채호 선생도 백제와 신라가 점거한
지역으로 인정했고 여러 가지 기록과 근거가 있다.)
    
(그림) 유연제노오월의 위치


(2) 중국 사서의 변화와 역사 왜곡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 대부분의 사서에 고구려는 분명히 한족(漢族)과
적대관계를 가진 강대국의 하나였다.

이는 고구려가 존속한 700여 년 사이에 한족(漢族) 35개 나라가 흥망했다는 사실로도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들의 정책에 따라 우리 역사와 관련된 많은 기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魏書)의 고조선(단군조선) 개국 관련 내용이
현재 보유중인 「위서」에는 없다.
이는 고조선의 존재를 삭제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2) 중국 25사(史記, 漢書 등)에 조선은 위만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처럽 꾸며
고조선 약 2000년의 역사를 감추고 있다.
  
3) 「남제서」(南齊書)의 백제 항목에서 약 2페이지에 해당되는 내용을 삭제했다.
역사 왜곡의 흔적임을 바로 알 수 있다.
  
4) 최근 사서에 기록된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三皇(복희, 신농, 헌원)을 변조하여
삼조상(三祖上)이라는 이름으로 복희(伏犧) 대신 고조선 이전 국가 한웅(桓雄)시대의
통치자 중 한사람인 치우(蚩尤)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 사서에 치우는 악한(惡漢)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 중국 내에 있는
동이족(東夷族)과 묘족(苗族)을 중국 역사 안으로 흡수하기 위한 조치로 판단된다.]
  
5) 중국은 1996년에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중화(中華)문명사 5000년을 복원하는 일을 시작하여
우리 역사 한웅(桓雄)시대와 대응하는 역사로 꾸미고 있다.

또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보다 오래된
1만년의 세계 최고(最古) 문명으로 중국역사를 끌어올리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역사 桓因시대와 대응하기 위한 역사로 조작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다음 2항 한국측 현상의 국가계보 참조)

중국은 고구려 뿐 아니라 고조선, 한웅(桓雄)시대, 한인(桓因)시대의 상고사를
모두 중국 역사로 조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3) 중국인의 역사 인식 변화

이와 같이 중국은 그들의 사서를 교간할 때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서의 기록을
바꾸면서 역사에 대한 인식도 다음과 같이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 1963년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홍위병이 중심세력이 되어 고대사와 관련된  중국 내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 및 유물을 파괴해 버렸다.
과거의 역사는 공산주의 실현에 장애물이라는 이론이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1980년 이전에 고대사는 관심 밖의 일이었고 고구려사는 당연히 한국의 역사라고 분명히 하였다.
(모든 사서와 중국총리 周恩來도 인정)
  
(그림자료) 주은래 발언내용 스크린샷







2) 그러다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역사관이 달라지기 시작하여 1980년부터
90년 사이에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하여
고구려 수도가 중국 땅에 있을 때(427년 이전)는 중국 역사고,
평양으로 옮긴 후(427년)에는 한국 역사라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3) 199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역사는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을
내세워 강력한 국가사관(國家史觀)을 부르짖으면서
현 중국 영토 내에 있는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4) 그들은 드디어 2000년 이후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모든 학자들의 입을 모았고
중국 역사 교과서에 그 내용을 기술했을 뿐 아니라
중국 관영 언론들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5) 이미 수십명의 학자들이 여기에 대한 연구서와 70여 가지의 책을 발간하여
새로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을 20여 년간 기울여 왔고
고구려의 유적 및 유물을 정리하여 관광 경로로 발전시키는 등
약 3조원(중국화 200억 위안)에 가까운 거액을 투자했다고 한다.
(운영자 주 : 3조원의 의미는 하북성 탁록내 중화삼조당 건설비용, 고구려 유적정비비요 포함)

(4) 중국 동북공정의 목적

이와 같이 장기간 많은 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중국은 무엇을 얻으려고
동북공정을 실시하고 있는가? (고구려연구재단 제공)

1) 정치 사회적 안정을 기한다.

공산당의 1당 독제체제 하에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원리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인민의  사고와 생활패턴이 민주주의적으로 바뀌면서 점차 그 통제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한 중국의 중앙정부는 역사를 통하여 국민적 통합과 사회안정을
취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2) 동북지역 장악 및 역사적 명분을 축적한다.

동북 3성(省)은 역사적으로 한족(漢族)이 아닌 다른 민족이 통치해왔다는 것과
근대 청(淸)나라에 이르기 까지 한족(漢族)과는 대립적 존재였고

특히
그 지역에 대한 한국인(韓國人)의 잦은 방문으로
중국 중앙정부의 구심력(통제력) 상실을 우려하여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한민족(漢民族)의 속복 하에 있었던 지역이라 강조하고자 하고 있다.
    
3) 조선족 통제 및 한민족(韓民族) 의식을 제거한다.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다르게 언어와 습관이 동일하고
단결력이 강하며 현존하고 있는 모국(母國)에 대한 동경심이 강하기 때문에
불연이면 연방분리(聯邦分離)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있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 역사관, 민족관, 조국관의 분리 현상
∙ 조선족의 韓國行과 한국 선호의식
∙ 한국인들이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언행을 서슴치않고 있다는 등 불안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4) 소수민족의 분열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중국에 거주하는 55개 소수민족은 중국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 쉽게
분리 독립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5) 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민족(多民族)으로 이루어진 통일국가라는 개념을 깊숙이
심어주기 위해서 이미 중국의 서부지역과 남부 국경지대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동북부 지역의 확고한 영토화를 역사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5) 최근 중국측 주장 및 자세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거의 동일하다.
이미 그들은 많은 연구와 토의를 통하여 일치된 견해와 대외적으로 당당한 자세를
견지하도록 입을 맞추어 고구려 역사는 중국 소유임을 주장하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주장이다.

  
1)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선입견을 버려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고려(高麗)는 고구려 영토의 1/3을 차지했고
인민은 1/4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 영토의 2/3, 인민의 3/4이 계승되고 있다.
  
2) 역사 귀속과 현실의 계승은 다른 문제다.

고구려사는 영토와 인민의 대부분을 계승한 중국에 귀속될 수밖에 없고
발해는 고구려의 대부분을 계승했지만 결국 중국에 귀속되었다.
  
3) 고구려 민족과 문화는 중국에 가깝다.

고조선(단군조선)은 한반도에서 형성되었고 고구려는 중국대륙에서 형성되어 한반도보다
중국문화에 가까운 나라다.
  
4)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부다.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고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 등
관직을 중국측 정부가 책봉했다.
  
5) 최근에 중국은 고구려뿐 아니라 근세조선도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6) 최근 중국은 한국과 정면 충돌을 피하고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1) 중국은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반발이 강해지자 8월 23-24일,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 우다웨이(武大偉)를 파견하여 다음과 같은 양해사항이라는 구두약속을 했다.
이는 외교적으로 아무런 구속력이 없을 뿐 아니라 모두 막연하고 추상적인 약속에 불과하다.  
    
∙ 중국정부는 고구려사 문제가 중대 현안으로 대두된 데 유념하고
∙ 양국은 역사문제로 한중우호협력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정치문제화하는 것을 방지한다.
∙ 중국은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측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가며
∙ 양국 간 학술교류를 조속히 실시한다.

이 약속은 정부측은 손을 떼고 민간 차원의 추진으로 정치적 마찰을 피한다는
내용이지만 중국은 민간차윈의 일도 모두 정부의 통제하에 추진됨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는 약속임을 알 수 있다.
  
2) 8월 27일,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자칭린(買慶林)을 통하여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고구려 문제로 한중 간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우려를 표하고
양측이 다 같이 대국적 장기적 전략적인 견지에 서서 서로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우리는 충분한 지혜를 갖고 서로의 관심사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구두로 전해왔다.

중국은 이미 유적 정비를 완료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했으며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이론적 뒷받침을 하도록 계획한 일을 완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한국이 조용히 해주면 4년 후 올림필을 통하여 세계 모든 나라에 홍보하고
관광경로로 정하여 만방에 알리면 바로 중국의 목적은 달성된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아마 만족한 해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중국의 오만한 기만적 해법이라고 볼 수 있다.


2. 한국측 현상

(1) 한국인의 역사 인식과 고대사

1) 반도사관으로 우리 역사 강역(疆域)을 스스로 축소하고 있다.

한국인의 역사관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사관(國家史觀) 즉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역사의 시작이 한반도이고 한반도 역사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고구려 때 일시적으로 만주지방을 점거했다는 인식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2) 우리 고대사를 정리(整理)하지 못하고 있다.

인접국가인 중국과 인본은 그들 나름대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모두 정리하여
정사(正史)로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 뭐라해도 자기들이 정리한 역사를 보전하여 국가계보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대사 부분은 자료 결핍, 근세조선과 일본의 고의적인 역사 왜곡,
학자간 의견과 주장의 차이, 실증과 고증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고집과
부정적 시각으로 인하여 서로 싸움만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역사를 정사(正史)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은 주인없는 우리 역사를 절취하는데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3) 우리 역사를 스스로 비하(卑下)하고 있다.

우리 국민 중 많은 사람은 우리 역사를 스스로 무시하고 훼손하며 가치없는 과거사라고
비하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근거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고조선을 인정치 않은 학자도 있고,
수도권 일대에 산재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적 훼손, 일제(日帝)의 잔재라하여
조선총독부를 포함한 많은 유적의 파괴 및 철거,
독재자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동상 파괴. 국사교육을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으로 조정하는 등

역사교육의 소홀,
일부 정치인들의 과거 단절 의식 성향,
학자와 학생들이 고대사 전공을 기피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물의 훼손과
역사 비하의 실례를 들 수 있다.

4) 역사를 주체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우리 고대사에 대하여 한국 학자보다 더 많은 연구 실적을
나타내고 있고 또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들은「삼국사기」 비판을 비롯하여 중국 25사의 동이전(東夷傳)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우리 고대사의 실체를 깊이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주로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년 해방 후 최초로 발간된 이병도의 「국사대관」은 대표적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일제(日帝)의 잔재다.
그 사서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믿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우리는 고대사를 공인하는 정사(正史)가 없기 때문에
우리 고대사는 먼저 취하는 자가 주인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2) 우리 역사와 중국의 관계

우리 역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인접국가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신라 통일 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의 원병을 불러 들여 왜군을 물리쳤다.
∙ 병자호란 때 청나라 당태종에게 仁祖왕이 항복하였다.(삼전도비) 이로 인하여 중국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있다.
∙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 하여 근세조선 때 세운 비석에는 조선이 명나라의 속국이란 표시를 하였다.
∙ 1896년에 세운 독립문(獨立門)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의의가 담겨져 있다.(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자리에 세움)
∙ 근세조선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우리 민족 사상에 뿌리 깊이
박혀있어 중국은 대국(大國), 우리 나라는 소국(小國)이란 의식이 꽉 차있다.

∙ 중국과 관련된 우리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

-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분리된 나라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고조선은 중국 최초의 나라 하(夏)보다 128년 먼저 건국되었음으로
중국은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하(夏)나라 이전에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내세위
그들의 시조로 삼고  동북아시아의 최초국가라고 역사를 꾸며놓았다.

- 고조선(단군조선)은 신화(神話)의 나라고 한족(漢族)인 기자(箕子)가 통치한 나라라고 잘못알고 있다.

- 고조선이 망한 뒤 위만국(衛滿國)으로 이어져 기자에 이어 계속 중국인이 지배한 역사로 잘못알고 있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내에 세워진 漢나라 지방으로 잘못 알고 있다.

- 한자(漢字)는 중국의 문자로 진서(眞書)고 한글은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개글(諺文)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사실은 한자(漢字)는 동이문자(東夷文字)로서 우리 조상들이 사용한 글이다.


3. 대응방안

앞에 설명한 중국과 한국의 여러 가지 현상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이를 요약하면

중국은 현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國家史觀)라 규정하고
정부와 학계 공동으로 자체의 역사를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가(한인桓因, 한웅桓雄시대를 중국 역사로 찬탈)로
개국 시기를 조작하면서 고구려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중국의 한 부분으로 강역을 왜곡하고 있다.

그 첫 단계로

먼저 고구려사를 탐식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고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정리하여 세계문화재로 등재케하는 등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일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인하여 우리 역사 강역을 스스로 우리의 현 영토
안으로 축소시켜 왜소한 역사로 왜곡했을 뿐 아니라 국가계보(國家系譜)를 포함한
고대사를 학술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의 무책임한 역사 정책으로 인하여
누구나 쉽게 우리 역사를 절취할 수 있는 상태로 방치한채 안주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소유한자가 주인이다.
잃어버리거나 숨겨진 역사는 결코 내 역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바로 우리들의 잘못에 가장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고 스스로 잘못된 현상을 보완하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할 수 있는
공세적인 대응으로 맛설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우리 역사관(歷史觀)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하고
정부, 학계, 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역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하여 고대사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국가계보와 강역을 명확히 찾아내고 연구된 내용은 바로 사서로 정리하여 편찬해야한다.

그런 다음 사서의 내용을 전 국민에게 교육하고 전 세계에 홍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정부와 민간차원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의 동복공정에 맛서 싸워야한다.

그들이 돌로 치면 우리는 바위로 맛서는 과감성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세적인 대응이다.
또한 의욕만 가지고 큰소리 처도 안되고 단편적인 대응보다 종합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명확한 근거를 대고 진실하게 사실 그대로 밝혀
우리 역사를 만방에 선포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동북공정은 잘못된 계획이라”는
패배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대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첫째 : 우리 국민은 반도사관(국가사관)으로부터 민족사관(民族史觀)으로 역사관(歷史觀)을 바꿔야한다.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서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현 국토(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을 버려야한다.

다시 말하면
국토중심의 역사관에서 민족중심의 역사관으로 바꿔 최소한 고조선(단국조선) 또는
그 이전의 한웅(桓雄), 한인(桓因)을 선조(先祖)로하는 후예(後裔) 민족의 역사는  
모두 우리 역사라는 개념으로 역사적인 시대를 고대로 넓히고
강역을 한반도에서 중원대륙으로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개념부터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을 한민족(韓民族) 또는 조선족이라 부르고 있지만
이는 다분히 근세조선 이후의 국호(國號)를 따라 부른 명칭에 불과하다.

특히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말은 근세조선 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국호를 변경한 이후의 민족명칭으로 부르게 되기 때문에
중국은 이를 간파하고 우리 역사를 1945년 광복 이후부터(일제 36년을 제외하고)라는
속셈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민족이란 동일한 지역, 언어,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갖는
인간집단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지리교과서에 만주에는 만주족이 살고있다하고
역사교과서에는 만주지역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우리민족이라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고구려를 우리 조상이라해야 하는가 아니면 만주족이니까
현실적 영토개념에 따라 중국 역사라고 해야하는가.
우리 스스로 모순에 걸려있다.

앞에서 말한 민족의 정의에서 동일한 지역, 언어,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이
모두 같으면 분명히 동일한 민족이겠지만
이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기는 어느 민족이다.
누구의 후손이다.
우리 선조는 누구다하는 심리적 역사성(歷史性)과 혈통에서 민족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앞에 설명한 만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고구려 후손이다.”
또는 “단군이 우리 조상이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외국에 살고, 언어가 다르고, 습관이나 문화가 다르더라도
심리적인 동질성 또는 역사적인 관계에 따라 민족을 구별해야한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민족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단군 또는 그 이전 한웅, 한인의 후예는 모두 우리 민족이고 고조선의 후예국가는
모두 우리 역사에 속하는 나라라는 개념을 확실히 하여 국경을 초월한 민족사관을
무엇보다 먼저 정립해야한다.

둘째 : 역사학계는 고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국가계보와 강역을 정리해야한다.

우리 고대사는 만신창이(滿身瘡痍) 역사다.
학자마다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상이하여 지금까지 고대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각자의 주장이 너무 강하니까 참고할 사서의 내용에 대해서도 어떤 것은 믿고
또 어떤 것은 믿지 못한 채 고대사에 관한 정사(正史)없는
치욕속에 고구려사 피탈이라는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 없는 역사는 먼저 취하는 자가 주인일 수 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 버린 역사를 이제는 하루 속히 정리하여 찾아야 한다.

고구려 뿐 아니라 고대사를 송두리채 잃어버리기(빼앗기기) 전에 국가의 계보를 정리하고
국가별 강역을 찾아 사서의 기록으로 본존해야 한다.

이는 여러 사서에 나와 있는 한인시대(桓因時代)부터 한웅시대(桓雄時代)를 거쳐
고조선, 열국시대, 3국시대, 남북조시대, 고려, 근세조선으로 이어지는 국가계보상
고구려의 위치를 분명히하고 현 중국의 동부와 만주, 몽골, 한반도를 관장한
우리 조상들의 역사강역을 찾아 정리하고
이를 사서로 발간하여 국가가 정한 정사(正史)로 인정해야한다.

이렇게하여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원했지만
우리는 중국대륙과 만주, 한반도 모두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관장해야한다.

이 내용은
주로 사서의 기록, 인구 변화, 천문현상 기록 등 여러 가지 자료에 의존하고 있으나
역사학계는 빗살무늬 토기와 비파형동검의 분포시역 등 유물의 출토지역과 관련하여
다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과학(科學)으로 밝혀진 우리 고대사(古代史)」(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발간)에서 밝힌
국가계보 및 강역 변화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그림자료) 국가계보 대강




(그림자료) 국가강역의 변천 대강





셋째 : 정부는 고대부터 현대사까지 사서(역사책)를 새로 편찬하여 국내외에 홍보해야한다.

역사는 소유하는자가 주인이고 이를 믿는 자가 시대의 주인이다.
없는 역사를 내 소유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고 믿어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 큰 무리이다.

학자마다 제각기 주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이를 극복해야한다.
몇 개의 사서 기록이 일치하고 앞뒤 연결이 분명한 것은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여
서로 인정하고 이를 기록으로 채워 역사책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말로만 설왕설래 하는 것은 국가나 민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우선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여 고구려의 역사적 위치를 분명히 밝히고
역사책을 새로 만들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한 국가계보를 유지하고 역사의 강역을 분명하게 밝혀놓아야 한다.


넷째 :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와 민족적 자존심을 갖고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역사를 중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 홍보해야한다.

흔히 대하는 사극(史劇)에서 우리 역사는 투쟁과 질투와 시기와 음모와 미움으로 엮어진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역사라 보기쉽고 930여 회의 외침을 받아온 허약한 조상들이라고
믿게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들이 식민통치를 위하여 우리 역사를 비하시킴으로서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식 역사관을 갖도록 만든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古代)로 올라갈수록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찬란하고 대륙을 할거한 웅비(雄飛)의 역사
였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동북아시아를 지배한 역사,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는 동이(東夷)의 빛나는 역사,
공자(孔子)도 동이(東夷)에서 살고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랑스런 역사다.

다만
우리가 그 역사를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채 살아온 민족적 비극을 이제는 말끔히 씻어버리고
찬란한 역사를 우리 후손과 모든 나라에 자부심을 갖고 내놓아야한다.

이 일은 정부와 국민이 모두 일어나 국가적 차원에서 계획하고 시행해야한다.

다섯째 : 중국의 동북공정에 국민의 총역량을 집중해야한다.

우리 국민은 물 끓듯 성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좋은 점도 많지만 수천년의 역사를 대상으로 외국과 논쟁을 벌이는 일은
결코 감정이나 우격다짐으로 될 수 없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순서에 따라 최선의 방법으로 일을 차분히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대응 기관의 활동, 역사 연구 및 사서발간, 홍보활동 등으로 구분하여
계속적인 대응태세가 유지되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기관들이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연구재단, 문화관광부의 태스크포스(TF),
국회의 고구려사왜곡특별대책위원회 등이 구성되었는데
이 외에도 더 많은 연구기관, 홍보기관, 시민단체 등이 구성되어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를 위한 고대사 연구 및 사서 발간, 국민교육 및 해외 홍보, 중국과 학술 및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1) 고대사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고구려사연구재단이 설립되어 있음으로 이 기구를 연구 중심기구로 최대한 활용한다.

역사는 사서의 기록, 유적 및 유물, 풍습, 전통, 인간의 체형, 자연현상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규명하고 있지만 중국의 25사를 포함하여 수집 가능한 자료부터 활용하여 연구해야한다.

여기에는 종래의 고대 사서(한단고기桓檀古記,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대한
위서논쟁(僞書論爭) 등 부정적 사고를 버리고 폭 넓게 수용하며
사설 연구기관에서 이미 연구한 내용도 활용함으로서 연구기간을 단축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여러 사서의 다양한 기록과 이론, 학자들의 많은 주장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25사의 예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즉 사서에 주문(主文)과 주서(注書)로 구분하여 몇 개 사서 내용이 일치되거나
주장이 동일한 것은 주문(主文)으로 기록하고 기타 의견이나 주장은 주서(注書)로 포함시켜
여러 가지  견해를 모두 수용하자는 것이다.

폭 넓은 토의를 통하여 많은 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고대사 연구에는 자료 결핍, 전문가 부족 등 많은 제한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단번에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일단 완성하고 계속 보완한다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2) 사서를 어떻게 발간할 것인가?
  
사서를 발간하는 것은 사실상 연구와 병행하는 일이다.
사서는 한인(桓因)시대, 한웅(桓雄)시대, 고조선, 열국시대,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고려,
근세조선 등 시대순, 국가순으로 나누어 각각 책임팀을 구성하여 동시에
모든 사서의 편찬 작업을 추진함으로서 완료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인(桓因)시대 3000여 년의 역사는 다분히 신정시대(神政時代)로 보이지만
그 때도 인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많은 나라가 개국사를 신성시하기 위하여
신정시대로부터 역사화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서의 편집 체계를 활용성 있게 바꿔야한다.

예를 들면
현재 보유중인 「삼국사기」의 경우 국가별, 제왕별(帝王別) 연대순(年代順)으로
나열된 것을 사서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외교, 과학 등 각 분야별로 나누어
독자가 활용하기에 편리하도록 편집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미래를 설계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 만든 사서는 최대한 많은 나라와 연구기관에 배부할 수 있도록
외국어로 번역하여 이를 빠른 시일 내에 홍보하도록 준비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중국에도 많은 부수를 할당해야할 것이다.

  
(3) 국민 교육 및 해외 홍보를 어떻게할 것인가?

역사 교육은 학교 교육에 우선을 두고 모든 과정에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라 역사의 내용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교사 교육이 선행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일반인에 대한 역사 교육은 홍보매체를 총 동원하여 최단 기간내에
우리 역사의 내용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해외 홍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사서를 외국어로 번역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외국어대학교를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4) 중국과 학술 및 정치적 해결을 어떻게할 것인가?

역사와 현실은 다르다.
현재는 중국이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과거의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대국(大國)을 형성한 그들의 조상이 훌륭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고대의 한족(漢族)과 동이(東夷)족은 같은 뿌리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이를 분리하여 한족(漢族)을 동북아시아의 중심민족으로 치켜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비록 자기 영토내에 있는 역사라 할지라도 혈통과 민족적 차원에서
고구려 역사를 독점할 수 없고 모든 사서에 나와 있는 많은 기록을 존중하여 한국 역사로 인정해야한다.

또한 한국은 현실적으로 중국이 자기 영토내에 있는 역사와 유적 및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 당사국임을
인정하여 고구려 역사와 유물 및 유적을 한국인과 함께 연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정중히 요구해야한다.

또한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과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은
한웅(桓雄)시대 1500여 년과 한인(桓因)시대 3000여 년을 중국 역사로 조작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생각되는데 이 문제는 한국과 중국이 함께 연구하여 상고사(上古史)를 공유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 뿌리를 가진 형제 민족임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전쟁처럼 무모한 싸움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서의 기록을 서로 토의하고 중국과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을 양국이 공유하면서
과거를 연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중국 땅에 있는 유적을 갖어올 수도 없고 또 과거 우리 조상들의 땅이라하여 빼앗을 수도 없는 현실을
서로 인정하면서 각 각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보존하고
거기서 민족적 자존심과 민족혼을 새로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자와 정부가 해야할 중요한 과제다.

4. 결   언

우리는 다른 이웃 나라처럼 우리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고 완전한 사서를
보유하지도 못하고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른
뼈아픈 현실을 스스로 깊이 반성해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을 버리고 민족사관으로 바꾸어
역사 강역을 넓혀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 복원하고 이를 사서로 발간하여
온 국민과 다른 나라에도 알려야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가장 합당한 방향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가 어떤 역사적인 도전을 해와도 우리 사서를 굳건히 지키면서
도도하게 맞서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대응자세가 되어야한다.

정부, 역사학계, 국민이 힘을 합하여 제 각각 역할을 다하면서
국가적인 총역량을 집중해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나라의 국가계보(國家系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를 포함한 과거의 나라별 역사 강역(疆域)을 찾아
사서를 편찬한 다음 역사교과서를 새로 꾸며 모든 과정에 필수과목으로 정하여
역사를 통한 민족혼을 바로세우고 현재와 미래를 위한 거울로 활용하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바른 대응이고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