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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수(文殊)의 선택

문수봉(李楨汕) 2008. 7. 8. 14:00

[능엄경 제6권 ⑥ 문수(文殊)의 선택]

 

이때 여래께서 문수사리 법왕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제 이십오인의 배울 것이 없는 모든 보살들과 아라한들을 관찰하였다.
제각기 최초의 도(道)를 이룬 방편을 말하였는데, 모두 진실한 원통을 닦았음을 말하였고, 그들의 수행에는 실로 우열도 앞뒤의 차별도 없는 것이지만 내가 이제 아난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면 이십오의 수행에서 어느 것이 그의 근기에 적당하겠는가. 또 내가 멸도한 뒤에 이 세계의 중생들이 보살승에 들어가서 위없는 도를 구하려면 어느 방편의 문이라야 쉽게 성취할 수 있겠는가 말하여 보라.
문수사리 법왕자가 부처님의 자비하신 뜻을 받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 발에 절하고 부처님 위신력을 받아 계송으로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각해(覺海)의 성품은 맑고 고요해 뚜렷한 맑은 각(覺)이 원래 묘하네.
밝음에서 비추면 대상(所)이 생기는데,
대상이 서고보면 밝은 성품 없어지네.

 

미한 망녕에서 허공이 있게 되고
허공을 의지해서 세계가 성립되고
생각이 엉겨서 국토가 이뤄지고
깨닫고 아는 놈이 중생으로 존재하네.

허공이 저 대각 가운데서 생겼나니
그건 마치 바다에 한 물거품 같네
또 저 먼지같은 유루국(有漏國)들은 모두 저 허공에서 생긴 것일세
어찌 다시 삼계(界)가 있으리요
근원으로 돌아가서 두 성품이 없건만
돌아가는 방편에는 그 문이 여럿일세.

 

거룩한 성품은 통하지 않음이 없어
순(順)도 역(逆)도 모두 다 방편일세
초심자(初心者)가 삼매에 들어가는 건
더딤과 빠름이 같은 것이 아닐세.

 

색(色)은 생각이 맺혀서 이뤄진 티끌
그것으론 투철하게 요달(了達)할 수 없는 것
밝게 투철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으리까.

 

향(香)은 코와 만나야만 아는 것
여의면 원래로 있다고 할 게 없는 것
항상함이 아닌 그 소각(所覺)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을 수 있으리까.

 

맛(味)은 본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요컨대 그건 맛볼 때만 있는 것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접촉은 소촉(所觸)으로 밝혀지는 것
소촉이 없으면 밝힐 수가 없는 것
만남과 여윔에 성품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법(法)이란 내진(內塵)이라 하는 것인데
진(塵)을 의직해서 대상이 반드시 있는 것인데
능(能)과 소(所)는 두루 교섭함이 아니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보는 성품이 비록 밝은 것이지만
앞은 밝아도 뒤는 밝지 못하니
사유(四維)에서 하나 반이 모자라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코로 숨쉬는 건 출입으로 통하지만
교차되는 순간에는 기운이 없어
연속되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혀로 아는 것도 무단한 것이 아니어서
맛을 통해야만 깨달아서 알게 되니
맛이 없으면 아는 것도 없는 것을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몸뚱이와 접촉되는 대상은 같은지라
모두 다 뚜렷한 각관(覺觀)이 아니므로
두가지의 한계를 합칠 수가 없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지근(知根)은 난사(亂思)가 섞인 것이라
맑고 고요함을 볼 수 없으니
상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안식(眼識)은 세가지가 섞여서 된 것
근본을 따져보면 실상(實相)이 아닐세
그 자체가 애당초 결정됨이 없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마음으로 듣는 것은 십방(十方)에 통달하나
큰 인연의 힘으로 생긴 것이라
초심자는 능히 들어가지 못하나니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코에 생각을 두라함은 본래 방편이라
마음을 거두어서 머무르게 할 뿐이니
머무는 건 심소(心所)가 머무는 것이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설법은 말과 글로 희롱하는 것
먼저 깨달은 이어야 할 수 있는 일
말과 글귀는 무루(無漏)가 아니온데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계율로 몸만을 단속한다면
몸 아닌 건 단속할 바가 없으니
원래 일체에 두루함이 아닌데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신통은 본디 숙세의 인(因)이어늘
어찌 법분별(法分別)과 관계가 있으리까
념(念)의 연(緣)은 물질을 여윈 것이 아니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지대(地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굳고 걸려서 통달함이 아니니
함이 있는 것은 성성(聖性)이 아니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수대(水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상념(想念)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여여(如如)는 각관(覺觀)의 대상이 아닌데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화대(火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싫어함은 참으로 여윈 것이 아니며
초심자에게 맞는 방편도 아니어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풍대(風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동하고 고요함이 상대가 없지 않네
상대(相對)됨은 위없는 깨달음이 아니니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공대(空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혼돈은 애초부터 각(覺)이 아니니
각(覺)이 없는 것은 보리와 다르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만약 식대(識大)의 성품으로 본다면
보는 식(識)과 그것이 상주(常住) 아니며,
마음을 두는 그것이 곧 허망이니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모든 행위(行爲)는 항상함이 없는 것
념(念)하는 성품도 원래 생멸하는 것
원인과 결과는 다를 수가 없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원통을 얻으리까.

 

제가 이제 부처님께 사뢰옵니다.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셔서
여기서 교화하는 참된 교체(敎體)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있는가 하나이다.

 

항하의 모래 같은 겁 동안을
미진수(微塵數) 불국토에 드나들면서
크고 자재하신 그 신력(神力)으로
두려움 없도록 중생들에게 베푸시네.

세간의 소리를 관찰하시고
묘음(妙音)과 범음(梵音)과 해조음(海潮音)으로
세간을 편안하게 구호하시면서도
언제나 세간을 벗어나서 계시네.

 

제가 이제 부처님께 사룁는다면
관음보살 말씀과 같다 하겠나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고요하게 있을 제
십방(十方)에서 동시에 북을 친다면
열곳의 소리가 일시에 들리듯 해야
이것이 원통의 진실인가 하나이다.

 

눈으로는 막힌 것 밖을 못보고
입도 코도 역시 마찬가질세
몸은 접촉의 대상과 만나야 알고
생각은 분잡(紛雜)하여 두서가 없네.

 

담장이 막혀도 듣는 소리는
멀어도 가까워도 들을 수 있네
다른 오근(五根)으론 이럴 수 없으니
이것이 원통에 진실인가 하나이다.

 

소리의 성품은 동(動)과 정(靜)이므로
듣는 가운데 있기도 없기도 하는데
소리가 없으면 들음도 없다고 하나
실상은 듣는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닐세.

 

소리가 없을 적에 멸하지 않고
소리가 있을 적에 나지도 않아
생(生)과 멸(滅)을 모두 다 여의었으니
이것이 항상함의 진실인가 하나이다.

 

비록 꿈 속에 있을지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없지 아니해
각관(覺觀)은 사유(思惟)에서 벗어났으니
몸뚱이와 마음으론 미칠 수 없네.

 

이제 이 사바세계에서는
소리로 말을 해야 밝혀지지만
중생들이 듣는 본성을 미(迷)하여서
소리만을 따르고 흘러서 도네.

 

사특한 생각으로 떨어짐을 못 면했으니
이것이 어찌 빠져들음이 아니리만
흐름만 돌이키면 망녕됨이 없어지네.

 

아난다여 그대는 자세히 들으라
내가 이제 부처님 위신력으로
금강왕.환술같고 불가사의한
불모인 진삼매를 말씀하리라.

그대가 미진수 부처님의 일체의 비밀문을 들었더라도
욕루(欲漏)를 먼저 제거하지 않았기에
듣기만 한 것이 허물이 되었도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들으면서
왜 그 듣는 놈을 듣지는 못하는가
소리로 인하여 듣는다는 명사는 있으나
들음이란 자연으로 생긴 것이 아닐세.

들음을 돌이켜서 소리에서 벗어나면
능히 벗어난 놈을 무엇이라 이름하리
한 근(根)이 본원(本源)으로 돌아간다면
육근(六根)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

보고 듣는 것이 헛것에 가리움 같고
삼계(三界)가 온통 공화(空華)와 다름없네.
듣는 놈을 되들으면 가리움이 없어지고
티끌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뚜렷하네.

청정함이 지극하면 빛이 통달하고
고요히 비추는 건 허공을 머금었네
문득 와서 세간을 보니
마치 꿈 속의 일이로다.

마등가라는 존재도 하나의 꿈이거늘
누가 능히 그대 몸을 머물게 했나
마치 세간의 교묘한 환술사가
환술로 지어 놓은 남자와 여자일세.

비록 모든 근(根)이 움직임을 보지만
요는 하나의 고동을 트는데 있네
모든 환술은 없어지고 마네.

우리의 육근(六根)도 이와 같아서
하나의 밝은 정신이 여섯으로
나뉘었다 화합했다 하는 것이니
그 하나가 쉬어 원상을 회복한다면
여섯의 작용도 이뤄지지 않네.

한 생각에 진구(塵垢)가 소멸된다면
원명(圓明)하고 정묘(淨妙)함을 이루게 되네.
티끌이 남으면 아직도 배워야 하지만
밝음이 지극하면 그것이 곧 여래일세.

 

대중들이여,
그리고 아난다여
그대들의 그 잘못 듣는 기틀을 돌리라
듣는 놈을 돌려서 자기의 성품을 들으라
그 성품이 위없는 도를 이루나니
원통이란 실로 이와 같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미진수 부처님들의
열반의 문에 드는 한길이어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문을 통하여서 성취하셨네.

 

현재의 모든 보살들이
이법으로 원명(圓明)에 들어가고
미래의 모든 수학인(修學人)이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해야 하리
나도 또한 이법으로 증득했으니
유독 관세음보살만이 아닐세.

 

황송하옵게도
부처님께서 내게 모든 방편을 물으셨네.

모든 말겁(末劫)의 중생들과
출세간을 구하는 사람을 위하여서
열반의 마음을 성취하게 하려면
관세음의 방편이 최상인가 하네.

 

그 밖에 여러가지 방편들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경우 따라 진로(塵路)를 버리게 함이언정
얕고 깊은 근기들에게 같이 말해줄
장구한 수행법이 아니옵니다.

 

샘이 없는, 불가사의한 여래장에 절합니다.
원컨대 미래에 가피(加被)하사
이 문에 의혹 없게 하소서.

성취하기 용이한 방편이오며
아난다를 가르치기 적당하오니
말겁(末劫) 고해에 빠진 중생들
이 근(根)으로써 닦게 하여지이다.

다른 것에 뛰어난 이 원통의 진실한 핵심이
이러한가 하나이다.

 

이때 아난다와 모든 대중들이 몸과 마음이 분명하게 밝아
크게 열림을 얻고 부처님의 보리와 대열반을 보니,
마치 일이 있어서 멀리 갔던 사람이 아직 집에는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그 돌아갈 길을 환하게 나는 것과 같았다.
거기 모인 대중이, 하늘, 용 등 팔부와 배우고 있는
이승과 새로 발심한 보살들을 포함하여 그 수가
대체로 십항하사와 같았는데, 그글이 모두 본마음을 얻고,
멀리 티끌과 때를 여의고,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었으며,
성비구니는 계송을 듣고나서 아라한이 되었으며,
한량없는 중생이 모두 무등등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하였다.      -능엄경 제6권 ⑥문수의 선택에서-

 

 

이글은 이근(耳根)으로써 닦는 수행을 함으로써 가장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근으로 닦는 것이 바로 칭하이 무상사가
말하는 관음법문(觀音法門)이다.

 

반야심경에서 보는바와 같이 모든 보살들이 반야바라밀다(관음법문을 말함)

를 의지하여 닦아가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게되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마침내 끝없는 열반에 들게되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법문(소리를 관하는 법문)을 통하여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소리를 듣게 되면 미세한 업장까지도 소멸하여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걸림이 없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모든 수학인들이 수행을 할 때 가장 적당한 법문이
바로 이 법문이라고 문수보살이 말을 하였으며, 칭하이 무상사 역시

이 관음법문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법문 중 유일무이한 법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보면 이 법문은 가장 신비스러운 법문이고(시대신주)
가장 밝은 법문이며(시대명주) 위없는 법문이며(시무상주) 비길데 없는 법문
(시무등등주)이어서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이 없다(능주 일체고 진실불허)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삼계를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세상으로 돌아가려면
이 관음법문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석가여래, 노자, 장자,
예수그리스도, 밀라레빠, 까비르, 라마크리슈나 등등 모두가 이 소리를 관하는
관음법문을 수행한 것이다. 소리에 관해서는 요한복음에도 능엄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소리에 관하여 성경에서는 말씀(워드), 불교에서는 진동(바이브레이션), 힌두교에서는 소리(샤브드), 도교에서는 명불가명(이름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리칭블로그방
글쓴이 : 칭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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