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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공의 전수와 박해의 역사]

문수봉(李楨汕) 2008. 7. 16. 03:57
법륜공 창시인 이홍지(李洪志)선생은 1992년 5월부터 1994년 말까지 중국에서 설법하고 功을 전수하는 기간에 총 53기의 전수반을 열었고, 그중 북경에서 13기나 열어서 총수의 4분의 1을 차지하였고, 전수반을 가장 많이 연 성시로 불리웠다. 전수반에 참가한 북경수련생수는 약 10,000 여명에 달하였다.

국가에서 주최하는 대형 기공활동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홍지 선생은 친히 일부 제자들을 거느리고 1992년, 1993년 두차례 북경에서 열린 동방건강박람회에 참석하였다. 이 두차례 박람회에서 법륜공은 가장 돌출하였다. 1992년 제 1차의 박람회에서 "스타공법"의 영예를 지녔고 또한 제일 처음으로 감사편지를 받았고 또 가장 많이 감사편지를 받은 공법으로 떠올랐다.

1993년 제 2차의 박람회에서 이홍지 선생은 박람회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되었고 초청에 의하여 3차례의 기공 학술보고를 열었고 매번마다 매진되었고, 또 "특별금상" 및 "환영을 받는 기공사"칭호를 받았으며 대회에서 유일한 최고상 "변연과학진보상(邊緣科學進步奬)"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북경에서 강렬한 호응을 일으켰고 법륜공을 수련하는 사람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1999년의 "4.25"사건은 결코 돌발사건이 아니며 장쩌민 등이 선전하는 것처럼 정부 소재지를 포위하는 정치적 시위도 아니다.

"4.25"사건은 96년 관영 "광명일보"가 언론횡포의 방식으로 법륜공을 공개비판하고 97년 공안부가 사전에 죄상을 정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벌인 행동, 그리고 99년 4월 허줘슈, 뤄간(羅干)등이 일으킨 천진시 공안이 수 십명 법륜공수련생을 구타, 체포한 사건이후에 발생한 일이였다. 1999년 4월 25일, 중국대륙의 법륜공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국무원 민원사무실(國務院信訪辦)에 청원하고자 모였고 서방매스컴의 보도에 의하면 하루사이에 만여명이 참여해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1999년 4월 24일 밤부터 25일 아침까지 1박1일 사이에 법륜공 수련생들은 각지로부터 잇따라 북경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사후에 추궁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국무원민원사무실에 청원하였는데 그들이 제출한 3가지 요구는 모두 개인적인 요구가 아니였다.

그리고 25일 당일로 국무원 주룽지총리가 친히 나와서 개명하게 처리하여 사건은 이미 정부와 수련자들이 공동으로 희망하는 결과를 달성하였다. 아래에 법륜공의 전파와 탄압의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간단히 서술하려 한다.

1. 법륜공의 전수

1992년 5월13일, 이홍지선생은 장춘에서 제1기법륜공 학습반을 열었다. 그리고 관영 중국기공과학연구회는 이홍지선생에게 기공사 증서를 발급하였으며 북경의 법륜공연구회에 "중국기공과학연구회 직속공법 등록증서"를 발급하였다.

1993년8월31일,중국공안부 소속 "중화견의용위기금회"(中華見義勇爲基金會)는 중국기공과학연구회에 감사편지를 보내 이홍지선생이 전국 제3기 견위용위 선진모범표창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에게 무료치료를 제공하여 준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12월27일 본 기금회는 이홍지선생에게 영예증서를 증정하였다.
1993년 이홍지선생은 북경동방건강박람회의 최고상인 "주변과학진보상"과 대회의 "특별금상"을 수상하였고 "환영받는 기공사"칭호를 받았다. 이홍지 선생의 저서 <<전법륜>>은 1995년 1월 관영 중국방송텔레비죤출판사에서 발행하였고 이듬해에 북경시 베스트 셀러중의 하나로 되었다.

2. 초기 마난(磨難)을 겪다.

1996년 6월 국무원의 목소리 "광명일보"가 법륜공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 7월 24일, 신문출판을 총괄하는 중국신문출판 총서는 전국에 통지를 내어 법륜공 출판물의 발행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1997년초, 공안부는 전국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죄증을 수집하여 법륜공을 "사교(邪敎)"로 정하려고 하였다. 전국 각지의 공안국은 충분한 조사를 거쳐 모두 "아직문제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반영하였으며 조사는 여기에서 정지되었다.

1998년 5월 말, 북경 유선TV에서는 허줘슈가 제공한 법륜공에 손상을 끼치는 프로를 내보냈다. 프로가 방영된 후 프로에서의 당사자에 대하여 잘 알고 있던 많은 수련생들은 즉시 허씨와 북경 TV방송국에 프로의 내용은 사실을 외곡하였는데 왜냐하면 사례로 제공한 당사자는 근본적으로 법륜공 수련생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다음날, 많은 수련생들은 서로 편지를 보냈거나 혹은 직접 방송국을 방문하였으며 자신이 친히 겪은 경력으로 사실의 진상을 밝혔다.

이 사건이후 방송국 영도는 이것은 방송국이 설립된 이래 가장 엄중한 한 차례의 과실이라고 말하였고 동시에 재빨리 법륜공 수련생들이 아침에 공원에서 상서로운 분위기에서 연공하고 법륜공이 그들에게 갖다준 심신건강을 향수하고 있는 프로를 내보냈다.

1998년 7월 21일 공안부는 공정(1998) 제555호 "법륜공에 대한 조사를 실시할데 대한 통보"를 발표하였다. "통지"에서는 이홍지선생이 요언사설(邪說)을 전파하고 일부 골간들은 법륜공을 이용하여 위법 범죄활동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통지에는 잇달아 각 지역의 공안과 정치보안부문에 심도있게 조사를 벌여 그들의 활동내막을 장악하고 법륜공을 이용하여 위법범죄 활동을 진행하는 증거를 발견할 것을 지시하였다. "통지"는 먼저 죄상을 정하고 후에 조사를 실시하는 절차를 밟았다. 증거를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한 대 규모의 조사에서 최종적으로 법륜공 수련생은 비록 사람은 많지만 그 어떠한 범죄사실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98년 하반년, 쵸스(喬石)를 수반으로 하는 부분적인 전국인대 퇴직 원로 간부들은 수많은 군중이 서신을 보내 공안이 불법적으로 법륜공을 연공하는 대중들을 대처하는 문제를 반영한데 근거하여 법륜공에 대하여 한 동안 상세한 조사, 연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법륜공은 국가와 인민에게 유익하고 그 어떠한 해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그 해 연말 장쩌민을 수반으로 하는 정치국에 조사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정부부문의 극소수 사람은 직접 전국 각지의 일부 신문, 라디오 방송국, TV방송국 등 선전기구를 이용하여 법륜공을 모함하고 요언을 날조하는 사건이 여전히 끊이질 않고 발생하였다. 게다가 허줘슈는 이 사건을 고의적으로 가장 민감한 "6.4"기념일 전야를 택하여 군중 속에서 극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법륜공 수련생의 사실을 밝히는 문장과 목소리는 도리어 공중매체에서 줄곧 발표되지 못하였다.

3. 천진사건

1999년 4월11일, 허줘슈는 천진교육학원의 "청소년박람"잡지에 "나는 청소년들이 법륜공을 연공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여 법륜공을 공격하였다. (주해: 허줘슈가 여기에서 발표한 문장은 1년 전 그가 관영 북경 TV에서 분쟁을 일으킬 때 사용하였던 동일한 문장이었다. 98년 북경TV사건이 발생한 후 이미 충분히 사실의 진상이 밝혀졌고 허씨의 문장은 그의 악렬한 영향으로 하여 북경시의 선전부문의 엄격한 배척을 받았다) 문장이 발표된 후 천진시의 일부 수련생들은 그 내용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며 분연히 알면서 범하였고 고의적으로 법륜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이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되어 4월18일부터 23일사이에 일부 수련생은 천진시교육학원과 관련부서에 찾아가 평화적으로 실정을 반영하였다.

4월23일, 천진시공안국은 300여명의 진압경찰을 동원하여 반영하러 온 수련생들을 구타하였고 유혈사건의 발생을 일으켰으며 45명을 체포하였다. 법륜공수련생들이 체포한 수련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천진공안은 "당신들이 북경에 가라, 북경에 가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몇 년간의 여론을 이용한 날조, 모함은 나중에 천진에서 공안경찰을 움직여 폭력을 사용하는 지경으로 발전하였으며 탄압의 승격은 수련생들을 경악케 하였다. 하여 "천진사건"의 소식은 신속히 전국수련생들 사이에로 퍼져나갔다.

4. "4.25" 국무원 신방국(國務院信訪辦)에 반영

4월 24일저녁부터 법륜공수련생들은 중앙정부에 대한 신임과 기대를 품고 자발적으로 국무원신방국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천진사건"의 공정한 해결을 촉구하였다. 4월25일,주룽지총리는 친히 법륜공수련생을 접견하였다.

북경시 해정구(海淀區)에 사는 C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4월 24일밤 7시경에 수련생들이 나에게 천진의 수련생들이 구타당하고 잡혀간 사건의 경과를 알려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일부 제자들이 국무원신방국에 청원하러 갈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갈 사람은 가도 된다고 하였다.그리하여 나는 4, 5명의 수련생들과 함께 당일 밤 8시경에 국무원 북측문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가능하게 제일 처음으로 "천진사건"에 도착한 수련생이었고 경비들은 우리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해정구의 M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25일 아침 8시15분경에 주룽지 총리일행이 국무원 정문(서문)으로부터 나와 큰 길을 건너서 청원하러온 수련생들 앞으로 온 것을 나는 보았다. 수련생속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고 주총리는 "당신들은 무슨 일로 왔습니까? 누가 보내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다. 수련생들은 "우리는 법륜공문제를 반영하러 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주총리는 "나는 당신들의 문제에 대해 회답지시를 하였습니다"고 말하였고 수련생들은 "우리는 못 받았습니다"고 답하였다. 총리는 몇 명의 대표를 선발하여 들어가 더 한층 상황을 설명하자고 제의하였고 수련생들은 분분히 손을 들었고 총리는 그 중에서 몇 명을 지명하여 국무원으로 같이 들어갔다.

5. "4.25"청원사건은 정부총리로 부터 타당한 해결을 얻었다.

4월25일 점심경에 법륜대법연구회의 리창(李昌), 왕즈원(王治文)과 기타 세명의 북경수련생이 법륜공의 대표자격으로 국무원에 들어가 정부관리들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법륜공수련생들의 세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다.

1)천진에서 체포된 법륜공수련생을 석방:
2)법륜공 수련군중들에게 느슨한 수련환경을 제공:
3)법륜공서적 출판을 허용

윤번으로 회담에 참석한 정부관리들로는 국무원신방국의 책임자, 북경시책임자와 천진시의 책임자들이었다. 밤이 되어 천진에서는 중앙지시에 따라 체포한 모든 법륜공제자들을 석방하였고 회담은 밤 9시경에 끝났다.

6. 장쩌민은 비밀 서류로 총리의 결론을 뒤 엎고 탄압을 결정하였다.

4월25일 당일밤, 장쩌민은 중공총서기의 신분으로 정치국상무위원과 기타 관련 책임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쩌민은 편지에서 "4.25청원사건"은 "막후"에서 고수가 "기획지휘"하였다고 단정하였다. (극비: 중앙판공청전보문 [1999]14호 "중공중앙판공청의 "장쩌민동지가 중앙정치국상무위원과 기타 영도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행할데 관한 통지).

6월7일, 장쩌민은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연설을 발표하여 "법륜공문제는 매우 깊은 정치적인 사회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배경이 있다"고 하였고 "1989년 정치풍파이후 (역자주: 6.4천안문사태) 발생한 가장 엄중한 한 차례의 사건"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서류는 6월13일 중공내부에서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극비: 중앙판공청전보문 [1999]30호 "중공중앙판공청의 "장쩌민동지가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시간을 다그쳐 법륜공문제를 처리, 해결할데 관한 연설"을 발행할데 관한 통지").

중공내부의 고위급 당간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의 두 비밀 서류 속에 장쩌민이 중남해사건은 "해외, 서양 국가들과 연계가 있는가? 막후에 "고수"가 기획지휘하였는가?"라는 등등 문제를 명확히 제출하였으며 개인의 권력에 대한 지나친 보호 심태가 내 비쳤고 진정한 사실 근거를 내놓치 못하는 상황 하에서 더욱더 죄를 들씌워 잘못된 탄압의 결책을 확정하였다.

법륜대법 정보센터 (Falun Dafa Info Center)의 보도에 따르면, 1999년 7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법륜공수련자들은 중국에서 이미 193명이 박해받아 사망했고 ,수 백명이 최고 18년이란 유죄판결을 선고 받았으며 50.000여명이 구치소, 노동교양소, 정신병원등 장소에 감금되었다. 장쩌민의 법륜공에 대한 완고한 탄압은 중국이 국제사회로부터 날로 거세찬 인권과 도덕의 비난을 받게 하였다.

7. 법륜공 박해의 시작

1999년 7월20일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전국범위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장쩌민은 파룬궁을 불법조직으로 선포하였다. 전국에서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사납고 맹렬한 기세로 나왔으며 이것은 많은 나이 드신 분은 30여년 전에 모택동이 발동한 문화대혁명을 생각하게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죄 없는 사람들이 국가의 적으로 몰렸고 법률이 파괴되고 인권을 유린당하였다.

1999년7월20일 새벽부터 전국범위에서의 파룬궁을 배우는 자에 대하여 체포의 서막이 열렸다. 강XX는 군대 경찰을 동원하여 하늘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노인 여자 임신부 애를 포함한 법륜공 배우는 자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탄압을 하였다. 그 당시 무장경찰 총사령부는 북경에 만 명에 달하는 무장경찰에 1급 계엄령을 내려 대기 상태로 들어가 법륜공 탄압을 대비하였다. 7월 22일 오후에 중앙TV는 민정부에서 탄압 결정을 발표하고 법륜공을 공격하는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

파룬궁을 배우는 자들은 현지의 신방부문에 가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경찰에 강제로 흩어지게 되고 구타당하고 불법적으로 체포당하고 심문을 받았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전국각지에서 박해받은 파룬궁수련생은 30여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11시 15분 그들은 탄압 명령을 받고 탄압은 시작하였다. 경찰은 우리 몇 겹으로 포위하고 분리시켜 강제로 흩어지게 하였다. 3-5명의 경찰이 한 사람을 잡아 차에 강제로 실어 우리는 사람마다 흩어지지 않으려 손에 손을 잡았다. 경찰은 많은 동수들의 머리 얼굴 다리를 때렸다. 한 북경의 동수는 얻어맞아 까무러친 상태로 차에 실려갔다. 나도 6명의 경찰에 6미터 끌려가다가 차에 실렸다. 제자들의 옷, 가방 등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서모고 라는 곳에 버렸다. 100여대의 버스는 우리를 싣고 봉대 운동장으로 갔다. 길에서 우리는 모두 한결같이 <전법륜>을 외웠으며 버스가 가는 곳곳마다 우리가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북경의 거리에서 알아들은 사람들은 손을 내밀며 "파룬궁 멋지다!"라고 하였고 보고 슬며시 웃는 사람도 있었다." (7.20참여자의 회상)

이번 탑압은 시초로부터 전부의 국가기구가 동원하였다. 7-8월 동안 30일 되지 않는 사이에 단지 "<인민일보>만 347편의 법륜공을 비판하는 문장을 발표되었고 매일 평균 10편을 넘었다 중앙TV(CCTV)과 각 성시의 TV는 매일 24시간 반복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단속 결정과 법륜공을 비방하는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중앙정부로부터 지방까지 전문적인 국가기관을 설립하여 법륜동에 대한 비판을 책임졌다. 모든 회사 기업 공장 학교 동사무소까지 사람들을 조직하여 단체로 파룬궁을 비판하는 뉴스와 프로그램을 꼭 보라는 명령이 전달하였다.

세계 각 나라의 중국대사관도 그 지역의 화인을 조직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으며 각 나라 정부에 비방하는 서류를 전달하였다. 강택민 본인도 국제적인 회담에서 파룬궁을 비판하였으며 비방 모욕하는 서류를 각 나라 원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번 진압의 대상은 중국 보통국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 구치소 강제 노동수용소 등에서 파룬궁수련자를 학대 학살하는 실질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7월 21일 하루만에 북경에 제일 큰 봉대 석경산 운동장에는 잡혀 들어온 수련자로 꽉 찼다. 정식으로 단속한 후 10일 내에 수십만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자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이용하여 북경에 상방(上訪)하였다. 북경으로 가는 모든 도로나 길이 봉쇄당하였기 때문에 그들 중에 대부분은 보행, 자전거 등 방식으로 북경에 도착하였다. 한 노인이 경찰에 잡혔을 때 그는 자기의 가방을 열어 가방에서 낡아진 신발 몇 컬레를 경찰에 보여주면서 "저는 먼 곳에서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말 한마디만 하겠어요. 파룬궁은 좋고 정부가 틀렸어요!"

그러나 중공의 상층은 사람들의 탄원을 듣지 않고 계속 탄압의 강도를 가하였다 강XX는 파룬궁을 자신의 적으로 보고 파룬궁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잔혹하게 박해하는 소식은 전국 곳곳에서 계속 전해 나왔다. 인권조직의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4년 이래 754명에 달하는 파룬궁수련자가 박해로 목숨을 잃었고 안건은 전국 30여개성 시 자치구 직할시에 분포하였고 그 안에 여자가 48% 노인26.5%다.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들의 신념을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사용된 고문 형벌은 40여종 이상 달하였으며 전국에서 불법적으로 징역을 받는 사람이 최저한도로 6000명에 달하였으며 불법적으로 강제로 노동하는 구치소에 있는 사람이 10만 명을 넘었고 수 천명이 강제로 정신 병원에 끌려 들어가 신경을 손상시키는 약물을 주사당하였다. 수 많은 파룬궁수련생들은 납치당하여 쇄뇌반에 잡혀 들어가 정신적인 시달림을 받았다. 더 많은 사람은 법을 집행하는 자의 벌과 돈을 달라는 협박을 받았다.

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잔혹한 박해에서도 폭력으로 대응하는 파룬궁수련자는 없었다. 한 여자 수련생은 집에 보내는 편지에서 "제가 여기에 있는 나날에 매일 보는 것은 경찰이 아니면 죄인 이였습니다. 경찰은 대노하여 책상을 두드리고 큰 소리로 고함지르며 제가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죄인들은 저보고 신참이라고 종일 악담을 하였으며 저 보고 습기 찬 바닥에 눕게 하였습니다. 저보고 빗물이 세는 곳에서 2일이나 잠자게 하였다. 저는 항상 사부님을 말씀을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를 잘 대하지 못할 수 있으나 우리는 남을 잘 대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당국에 제소하는 길은 막혀 버렸다. 그 후에 파룬궁을 수련생들은 사회를 향하여 자기의 방식으로 각종 진상자료를 만들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양한 형식으로 세상사람에게 알려주었다. 또 한 부분의 수련생은 천안문광장으로 향하여 걸어갔다.

마치 한 중국의 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중국역사상에서 정부와 국민간에 모순이 있을 때마다 국민이 굴복하지 않으면 폭력적인 반항이었다. 그러나 파룬궁수련생들은 잔혹한 탄압 속에서 굴복하지도 않고 폭력적인 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견지하였다.
이것은 이홍지 선생님이 말한 진 선 인이 말뿐이 아니고 진정으로 본질 상에서 수련자들을 개변하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런 변화는 다시는 외적인 힘으로 다시 변화시킬 수 없었다."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감화를 받아 眞善忍의 수련에 참여하여 들어왔다. 평화적인 행동과 방식으로 정의와 양심을 되찾았다. 2001년 11월20일 12개 나라와 지구에서 온 36명의 서양 수련자들은 천안문광장에서 평화적인 청원을 하였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법륜대법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순결하고 빛나는 문화를 체현하였다. 오늘의 사람은 사람마다 자유와 해방을 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방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법륜공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었다."

8. 장쩌민의 개인적인 질투는 진압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1999년 4월 25일, 만 명에 달하는 파룬궁을 수련생들의 북경 상방(上訪) 행위는 국제 매스컴을 놀랍게 하였다. 동년 7월 탄압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이 4.25의 사건이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많은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로 4.25상방한 당일 파룬궁수련생이 제소한 문제는 국무원 총리 주룽지의 참여로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그의 이 문제에 대한 개명하고 과단성은 세계상의 많은 주목을 이끌었으며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총리가 4.25에 대한 개명한 처리와 광대한 파룬궁수련생이 그에 대한 진정한 지지는 분명한 사실로 당권자의 강렬한 질투를 유발하였다.

4.25사건 저녁에 장쩌민은 갑자기 정치국에 편지를 써서 매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에게 편지를 주어 이것을 주제로 긴급회의를 몇 번 열었다고 한다. 회의에서 장쩌민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룽지를 "노망! 노망이야!"라고 욕하면서 공연하게 국무원 총리가 이미 결정하여 개명한 선택을 실시 중에도 불구하고 뒤집고 정부에 비이성적이고 헌법을 위반하는 개인 결정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 당시 강의 포악한 성격 앞에서 중국정부의 요원들은 겁이 들었고 침묵하였다. 이것을 본 장쩌민과 뤄간은 점점 더하여 610 조직을 빠른 시일에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회의와 공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의 태도 표시를 강요하였으며 충성을 요구하였다. 이 측면에서 다른 시각으로 보면 개인의 무서움으로 인하여 당당한 중국정부는 장쩌민의 강제적으로 개인의 의지를 행하는 과정에서 사악에 이용하고 협박을 받아서 나중에 이번 박해의 피해자로 된 것이다.

한가지 홀시할 수 없는 사실은 중국헌법과 국제인권공약에 의하면 한 부분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등기를 하지 않았어도 그 신앙도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천부인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룬궁에 대한 탄압은 완전히 장쩌민의 개인적 이유로 정부를 협박하여 따르게 한 것으로 그 탄압 선포의 시작부터 중국헌법에 위반한 것이며, 장쩌민의 개인적인 결정과 거짓말 선전의 기초에서 시작 된 것이다.

법륜공 탄압을 지시한 장쩌민은 3개월이면 법륜공을 멸망시키고 해체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탄압이 시작된지 8년이 넘도록 법륜공은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전세계 80여개 국가에 전파되었으며,
공산당의 탈당 인원은 갈수록 늘어나 공산당은 오늘날 해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