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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내소사]

문수봉(李楨汕) 2008. 7. 22. 03:48

[변산반도 내소사]

(2002. 3. 23-24.)


들어가는 글

'한국인이 가장 가고 싶은 곳'에 매년 수위를 달리고 있는 변산반도를 찾아간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병풍같은 변산과 잔잔한 서해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절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때묻지 않는 소박함을 가지고 있는 내소사를 둘러보았고, 풍요와 결속을 다지는 당산나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고창 선운사에서는 서정주님을 만나 뵙고, 동백꽃에 강렬한 색감에 넋이 빠지기도 했다. 폐사와 중창의 부침을 반복한 선운사는 어찌나 고단한 인간사와 어찌나 비슷한지...마지막 순례지인 고즈넉한 고찰 개암사를 바라 보며 백제인의 마지막 한의 노래를 들어 보았다.

다음 까페 '나의 문화유산답사' ( http://cafe.daum.net/71160) 소속 회원 110여 명과 변산의 문화유산을 찾아 다녔고, 그들과 함께 감동을 나누었다. 역시 '기쁨은 서로 나눌수록 커진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그 많은 인원이 척척 움직일수록 수고해 준 운영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서울에서.

하필 그날은 4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던 회사가 이전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짐을 나르고 대충 정리하고 부리나케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본 진은 이미 3시에 출발한 상태다. 따로 떨어져서 가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기차에 한 켠에 신문지 깔고 자리를 잡았다. 숨 가팠던 회사 일은 차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감동을 찾아 떠나는 순례객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무궁화호인데 새마을호 못지 않게 세련되었고, 물건 파는 수레도 그렇게 날렵해 보일 수 없다. 덜컹거리는 기차 속에서 사이다에 계란 까먹는 낭만이 사라져 못내 아쉽다.

내소사 꽃 창살

익산에서

마중 나오기로 했던 회원이 조금 늦는가보다. 막간을 이용하여 가방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다들 놀라는 표정..

안주는 차가운 순대. 나는 알콜이 한잔 들어가야 유물이 잘 보이는 이상한 성격이다..ㅋㅋㅋ 이 한잔이 서울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익산역." 예전엔 이리역 이었지.
이리역 폭파사고때 이곳에서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뛰었던 곳이 아닌가? 비록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무명의 코메디안 이주일에게는 운명이 바뀌는 행운을 거머진 것이다. 배고픈 희극배우에서 국내 최고의 코메디안 왕이 되었고, 국회의원 뺏지까지 달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돌고 도는 것..결국은 자식도 잃고 지금은 폐암에 시달리지 않는가?

익산역은 생각보다 크고 예쁘게 꾸며져 있다.

마중 나온 여진연님 비록 처음 보는 회원이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아마 온라인 상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런가? 인터넷이 그렇게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허기를 참지 못해 부안 시장통에서 식당을 간신히 찾았다. 값싸고 허름하지만 맛은 일품이다. 내가 먹은 콩나물 국밥 중에 단연 최고다.

모항의 아침

모항에서

도착해보니 전국에서 모인 회원들이 벌써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닉네임만 보고도 반갑다. 전국 각지에서 유물의 아름다움을 찾아 한곳에 집결한 것으로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저 나누는 한잔 속에 각자의 정이 쌓아간다. 이곳 출신인 '무인도'님이 무려 50만 어치나 되는 쭈꾸미를 기증했다. 싱싱한 쭈꾸미를 초장에 듬뿍 발라 한 입에 집어넣는 그 맛.. 씹으면 먹물이 톡 터지는 아련한 맛을 잊을 수은 없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회원들의 환호성들이 밤바다의 고요함에 묻혀간다. 그렇게 모항은 인간사마저 안아준다.

3시가 훌쩍 넘어서야 정을 확인이 끝났나? 그제서야 새우등처럼 허리를 구부리며 잠에 빠졌다. 모항에서 나는 이렇게 신고식을 치뤘다.

창 안에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짐을 깨운다. 눈 비비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모항의 아름다움.

시인 안도현님의 '모항가는 길'을 곰씹으며 '모호한 어감'을 가진 모항을 마음껏 사무쳐본다.
서해바다가 주는 아늑함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내소사 전나무 숲

곰소항

이 고장 별미인 백합죽을 쓸어 넣고 변산 최고의 명소 내소사로 향했다. 반도를 따라가며 몸으로 지도를 그려본다. 말로만 들었던 염전이 물을 가득 마시고 있고, 만선을 꿈꾸는 고깃배들이 듬성듬성 점을 찍고 있다. 눈 맛이 시원하다.

조금만 지나면 곰소항이 나오는데.....전국 최고의 젓갈 생산지가 아닌가? 전라도 음식 맛은 곰소항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이 좋고, 풍부하다고 한다. 2년 전 변산에 갔을 때 이곳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켰을 때가 생각난다. 그 많은 해산물에 눈이 휘둥그레 한 적이 있었지.

개인적으로 전국 최고의 짬뽕 맛을 자랑한다고 얼마나 외쳤던가?.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 과 조정래의 '아리랑'의 주무대가가 바로 변산 뒤의 김제평야이다. 일제 때 농민의 핏땀 어린 쌀이 일본으로 공출된 현장이 바로 곰소항이었기에 지금의 풍요로움 뒤엔 슬픔이 배어있다.

내소사 전나무 숲

내소사는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 괴석을 두르고 계곡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 절 집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우선 우람찬 일주문이 버티고 서있다. 절집의 소박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다. 입구 일주문의 위치가 한없이 틀어져 있다. 만약 가로수와 일직선상에 놓인다면 그 거대한 전나무 숲의 감동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마음의 먼지를 털어 내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리고 펼쳐진 전나무의 바다.. 凡人들은 그런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고개를 숙일 것이다. 아마 이런 감동을 주기 위해 일주문을 틀어놓았는지 모른다.

그저 걷는 자체로서 마음이 정화됨을 느낀다. 돌 자갈을 밟으며 흙이 주는 풍요로움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동안 왜 돈주고 '솔의 눈'이란 음료를 마셨지?
걷는 것이 이렇게 편할 줄이야...그 길이 무려 600미터라고 한다..

해암 큰스님 탑비

내소사 부도

절집 오른편에 부도밭이 놓여있다. 회원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내소사의 아름다움을 공유해본다. 소박한 절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배출된 스님도 아름다운 것을 확인했다.

내소사 조실이었던 "해안' 큰스님의 부도비에는 '海眼凡夫之碑' 라고 적혀 있다. 禪師도 아니고 大師도 아니고 범부라고 적혀있다. 절집에서 풍겨 나온 겸손은 스님에게도 영향을 미쳤나보다.

해안 스님은 이곳 부안출신으로 해박한 교리와 인간애로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당산나무

할아버지 당산나무 내소사 입구에 있는 할머니 당산


절 입구에 탐승객을 맞이하는 것이 바로 당산나무다. 호랑이와 노인으로 표현되는 산신각과 북두칠성을 믿는 칠성각이 절에 들어온 예는 있지만 이렇게 당산나무가 절 한가운데 들어온 예는 내소사가 처음이란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독경을 하며 마을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줄다리기도 하고..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까?
일주문 옆의 할머니 당산과 사찰 안에 있는 할머니 당산이 떨어져 있어 이 곳에는 함께 사진을 실어본다.

사진이나마 함께 하세요.

고려동종..조각이 아름답다.

고려동종 (보물277호)

첫 눈에 보았을 때 화성 용주사 동종과 크기와 문양이 흡사함을 느꼈다.

우리 나라 특유의 음통이 달려 있으며 용 모양이 율동적이며, 유곽과 유두의 입체감이 뚜렷하다. 가운데 당좌(종을 때리는 자리) 문양이 아름다워 종을 치기가 미안할 것 같은데... 하대에는 보상당초문이 촘촘히 새겨져 있으며, 상대에는 꽃 장식이 위로 치솟고 있어 다른 종에서 볼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봉래루는 우직한 맛이 우러난다.

봉래루

장식을 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자세히 보면 24개나 되는 기둥의 길이가 조금씩 다 다르고, 주춧돌의 크기나 높이가 제각각이다. 새서제는 이것이 '한국적 맛'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단청을 하지 않았기에 목재의 아늑함이 풍겨 나오고. 병풍처럼 둘러싸인 소래산과 어찌나 궁합이 잘 맞던지..

날아갈 듯한 '봉래루' 현판이 마지막 화룡정점을 찍는다. 이 건물은 1914년 실상사 터에서 이전해 올 때 인공적인 손길을 최소화하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고자 했기 때문이란다.

봉래루를 받치고 있는 초석..자연미가 넘친다.

대웅보전 대웅보전(보물 291호)

모든 사찰양식의 기본이지만 특히 내소사는 깊숙히 들어 갈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그 감동의 정점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때 '혜구두타'란 여승이 창건했으며. 원래 이름은 '소래사' 였다고한다. 나당연합군의 소정방이 이 절에 시주해서 만들었다는 소리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다. 나도 어디서 들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대웅보전은 인조 11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눈에는 확연히 띄지 않지만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가 감동적이다. 자연석이지만 자세히 보면 돌을 표나지 않게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인공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한 것이다.

석축

그 위에 평범한 자연석으로 주어 주춧돌을 삼았다. 이걸 '덤벙주초'라고 하지.. 어쩜 분청사기의 덤벙 기법과 느낌이 비슷한지...... 그 위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부처님 집을 올린 것이다.

자세히 보면 안 쪽은 원통형 기둥이고 모서리 쪽만 배홀림 기둥을 사용했다.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이 기둥을 잊을 수 없다. 그 완만한 곡선이 바로 우리 민족의 곡선이며 부드러움의 극치가 아닌가? 대웅전 오른쪽 측면에 걸터 앉아 한동안 멍하니 사무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옆 기둥은 세파에 시달린 노파의 굵은 주름을 간직하고 의연하게 서있다. 부처님 집을 짊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배홀림 기둥  측면 기둥

화려한 공포와 날렵한 현판 글씨

대웅전의 공포

대웅전은 팔각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답사 중 공포를 물어오는 회원이 많더군...

공포는 우리 나라 목조건축의 특징중의 하나로 처마를 안정되게 받치고 그 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기둥부터 대들보까지 �은 부재를 여러개 중첩하여 짜 맞추는데 이 곳은 공포가 매우 화려하여 외 3출목, 내 5출목으로 복잡하게 짜여 있다. 얼마나 대웅전을 만들기 위해 공력을 바쳤는지 짐작이 된다.

더구나 못 한방 박지 않고 짜 맞추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하늘로 치솟는 용조각상

공포가 4방으로 둘러져 있으며 모서리의 용 조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치솟을 것 같은 태세다. 공포 사이에는 발려진 진흙 위엔 부처님상 그려져 있는데..빛이 바래 그 형상마저 알아볼 수 없다. 그 한가운데 박혀있는 '대웅보전' 현판..공포의 기교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이 절이 간직하고 있는 '봉황 전설'을 그대로 글씨에 반영하고 있다.

살코미 반전된 처마선을 보는 즐거움도 놓쳐서는 안된다. 촘촘히 꽂혀 있는 서까래가 음양을 이루며 만들어낸 선이 바로 처마선 인 것이다. 능가산의 산세, 배홀림 기둥과 처마선의 어울림이 함께 어우러졌기에 내소사 대웅전이 아름다운 것이다.

대웅전에 안쪽에 들어서면 천정엔 화려한 단청의 꽃밭이 펼쳐진다. 삼존불 뒤의 벽화 백관음보살을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한번 지났다가 다시 오면서 눈이 마주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데....차마 내가 모시는 주님 때문에 애써 눈길을 피했다.

창살

내소사 창살

모든 것이 소박하다면 범인들은 그저 그걸로 만족했을 텐데.. 내소사는 그렇지 않다. 소박함에 화려함마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화려한 창살 덕분이다.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연꽃과 국화, 해바라기등을 가득 심어 놓은 꽃밭인 것이다. 쳐다만 보아도 꽃내음을 가득 풍긴다. 아이고... 어지러워.

원래 채색이 되었지만 비바람에 씻겨나가 오히려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 탐승객의 감동을 더해준다. 한땀 한땀 이루어낸 목공의 정성이 갸륵하게 여겨진다. 부처님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이 있는 절에 머물고 싶을 것이다.

꽃문양

요사채

요사채

회원들이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내소사의 아름다움을 정리해 본다. 소래산의 산신령만이 우리들의 정성을 내려다 볼 것이다.
요사채는 그 구조가 독특하다. 경주의 양동 민속마을의 무첨당 처럼 'ㅁ'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4개의 건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내소사는 다시 오고 싶은 절이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감동을 짊어지고 전나무 숲을 거닌다.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될 지언정 나는 뒤에 미련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적하게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절 내소사..언젠가 또 다시 그대를 볼 수 있을까?

우동리 당산

우동리 당산


내소사를 벗어나 우동리 당산에 버스가 멈춘다. 혹시 곰소항의 짬봉처럼 이곳엔 우동이 맛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둘러봐도 중국집은 없고, 평범한 논밭 사이에 당산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산이 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 전형적인 농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보면 해안 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바로 격포항이다. 세서재 말로는 물살이 격하기 때문에 '격포'라고 하는데...

실제 배를 타고 바다 쪽으로 나가면 위도라는 섬이 나온다. '위도 페리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가? 그렇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물살이 유난히 센 곳이란다.

그런 격한 파도를 이겨나가야 하고 마을사람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민간신앙이 나온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당산 문화가 꽃피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마음과 그걸 통해서 세파를 이겨나가자는 마을사람들의 결속에서 나온 것이다. 주로 줄다리기를 하며 협동심을 기르고 마을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한다고 한다.

이런 마을사람의 결속을 다지는 대동제는 일제의 눈에는 두려움으로 다가선 것이다. 당산을 중심으로 해서 꽹과리를 두드리고, 사람이 모이는 것이 체제의 위기까지 느낀 것이다. 이에 일제는 전국의 모든 당산을 베어 버리고 성황당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우동리 당산나무 옆에는 돌이 세워져 있다. 돌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돌과 나무가 합일하여 자식을 만드는데 이것은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이는 유물만 보았지 이렇게 민족의 정신이 담겨진 보이지 않는 문화에는 등한시 한 것이 아닌가 반성해본다. 비록 나무 한 그루지만 애절한 정신이 깃들었기에 다시금 쳐다보게 된다.

반계 유형원 유허지

앞산을 유심히 본다. 산 중턱에 기와집이 보인다. 바로 저곳이 반계 유형원의 유배처라고 한다. 그 앞에 흐르는 냇가가 '반계'라고 한다. 서해를 바라보며, 당산나무를 지켜보며, 반계의 청명함을 느끼며 그는 위대한 '반계수록'을 저술했을 것이다.
일정에 여유가 있으면 좀 더 가까이 가서 반계의 삶을 돌이켜 볼텐데...
아쉬움을 가지고 반도 길을 휘감아 돌아 고창으로 향한다.
선운사 동백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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