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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 그는 누구인가?]

문수봉(李楨汕) 2008. 8. 10. 05:02

소태산 대종사 그는 누구인가?

원불교사상연구원 김도공 교무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朴重彬)

 

그는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평범한 농민인 아버지

박성삼과 어머니 유정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태산은 호이며, 대종사는 일원의 진리를 크게 깨친 주세성자라는 뜻으로 제자들이 소태산을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대종사는 어릴 적 처화 그리고 진섭으로 불리던 이름을 새로이 스스로 중빈(重彬)이라 이름을 지어 사용한다. 이는 ‘거듭 빛나게 한다’는 의미로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이 밝혀주신 깨달음의 소식을 다시 이 땅에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의 탄생을 전후한 시기는 세상의 변화와 혼란이 극심한 때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 이후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도 조약을 맺고 국제외교를 하게 된다. 이후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휘말리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이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되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낀 조선은 국운이 위태로워진다.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에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 같은 국내외적인 정세와 아울러 우리나라 종교계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고유의 신앙은 미신으로 화하고, 불교는 산중에 숨어들었으며, 유교는 허례와 공론으로 형식만 남게 되고, 도교는 허망한 도술로 그림자만 남게 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숱한 박해를 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고, 동학은 농민혁명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 끝에 숨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과 새 성자에 의한 새 사상 새 종교를 더욱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소태산 대종사는 영생의 크신 서원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다.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는 대종사 성비(聖碑)에 당시 상황을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하였나니, 이것이 곧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라고 밝혔다.

 

범상치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던 대종사는 우주 자연 및 인생 즉 진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삼밭재에서 기도로 산신령을 찾아보기도 하였다. 정성스런 기도를 올렸으나 산신령을 만나지 못하자, 6년간 도사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문을 풀어줄 스승을 찾지 못하였다.

 

22세부터는 도사 만날 생각도 잊고 모든 의심을 오직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의심이 꼬리를 물고 연달아 솟으나 해결이 되지 앉자 “이 일을 장차 어찌 할꼬" 이런 한 생각에 젖어들었는데, 이 한 생각이 화두가 되었다. 이 한 생각으로 밤과 낮을 잊었으며, 말을 해도 말하는 줄을 몰랐고 음식을 먹어도 먹는 줄을 몰랐다. 이런 상태가 바로 진리, 우주와 하나되는 대 입정의 시작이었다. 이 입정은 대종사가 대각을 하기까지 이어지며 1916년 4월 28일 새벽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의 깨달음을 얻어 26세의 나이에 새부처님 소태산 대종사가 되신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대종사는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다른 종교들의 경전들을 구하여 열람하게 된다. 당시 열람한 경전은, 유교의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교의 금강경(金剛經), 선요(禪要), 불교대전(佛敎大全), 팔상록(八相錄), 선가(仙家)의 음부경(陰符經), 옥추경(玉樞經), 동학의 동경대전(東經大全), 가사(歌詞), 기독교의 구약(舊約), 신약(新約) 등이다.

대종사는 여러 경전들을 열람한 후 “서가모니 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시며,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여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 선언하였다.

 

대종사는 대각을 이룬 후 세상을 바라보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교단 창간의 기본 목표를 세우게 된다. 정신의 주체를 확립해서 물질문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자는 것 즉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참 문명세계 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대종사의 구도과정과 대각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모여들었고, 이렇게 모여든 이들과 영산방언 사업을 시작으로 백지혈인의 이적, 봉래산에서의 교법제정, 익산총부에서의 전법활동을 하다가, 원기 26년(1941, 辛巳) 1월 28일 선원 대중에게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는 게송을 내리고 원기 28년(1943 癸未) 6월1일, 열반에 들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2년 전이며 26세에 대각하고 28년간 중생을 제도하시고 53세에 열반에 든 것이다. 대종사의 열반은 일제 말기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탄압을 피하고 교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택한 열반이며, 누구나 다 수행할 수 있는 대도정법은 평범한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평범함 속의 비범한 열반의 모습이었다.

하늘처럼 부모처럼 믿고 받들던 대종사의 열반을 접한 제자들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허공 법계와 삼라만상이 다 같이 슬퍼하는 기상을 보였다.

 

그러나 대종사는 이런 점을 미리 예견하셨던 것처럼 1943년 5월16일 설법말씀에서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며, 공왕공래 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라는 설법을 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마지막 설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