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생애
유교의 개조(開祖)이자 동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는 성이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후세에서 그를 공자라고 통칭하나 자(子)라는 말은 당시에는 선생과 같은 남자에 대한 존칭이었다.
공자는 주(周) 영왕(靈王) 22년(B. 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魯)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나라의 대부(大夫)로 무용(武勇)을 떨친 바 있는 숙량흘(叔梁紇)이며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맹인이었으며 춤추는 여자였거나 무당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무사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했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공자는 아버지와는 달리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에 기울었다. [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 ] 고 한 것은 그가 문화적 전승자로서의 길을 내디뎠음을 후일에 밝힌 것이다. 특히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禮)를 중시했고 예(禮)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다. <사기(史記)>에 공자가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 것은 사실여부와는 다른 뜻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어려서 자기는 천했으므로 잡일에 능통하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고 한 말이 있듯이 일찍이 그는 잘 태어나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일찍이 누구에게 어떠한 학문을 배웠는지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공자는 노에서 태어났고 노나라가 주(周)의 전통을 바로 이어받은 나라였으므로 주의 문화를 정통(正統)으로 삼고 이를 이어받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특히 주문화의 창설자 주공달(周公旦)을 존경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20세 경에 결혼한 공자는 장자 이(鯉, 자는 伯魚)를 낳았으나 공자보다 일찍 죽었다. 공자의 까다로운 성격을 견디지 못해 부인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기타 상세한 가정사정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30에 사회에 나섰다(三十而立) ] 고 한 공자 앞에 전개된 중국사회는 바야흐로 춘추(春秋)의 난맥상이 두드러졌던 때다. 공자의 조국 노나라에서도 삼환(三桓)이라고 하는 신흥 세도가(孟孫氏, 叔孫氏, 季孫氏)들이 노의 황실을 누르고 전횡(專橫)하고 있었다. 더욱이 노의 군주 소공(昭公)이 이들을 치려다가 도리어 패하고 제(齊)로 망명을 했고 칠 년의 망명생활 끝에 그가 객사하자 임금 없는 노나라의 실권은 계손씨를 중심한 삼환씨(三桓氏)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신하(臣下)의 명분을 엄격히 밝히는 공자는 참다못해 소공(昭公)의 뒤를 쫓아 제(薺)로 갔다.(B. C 517) 제에 가서 어떻게 지냈고 또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논어>에 보면 제의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명분과 자기의 자리를 지킬 것을 밝힌 말이 있다. 또 공자가 제에 있는 동안 옛날의 순(舜)임금의 음악 소(韶)에 도취되었다는 기록도 <논어>에 있다.
한편 노나라에서는 객사한 소공의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실권은 삼환씨가 잡았고 그 중에서도 계손씨의 가신(家臣)인 양호(陽虎)가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삼환씨가 지나치게 횡포를 부리는 양호를 실각시키고 제에서 돌아온 공자를 발탁해 썼다. 공자는 52세(B. C 501)에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결코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 협곡(夾谷)이라는 곳에서 열린 제와 노의 국제회담에서 제나라의 책략을 분쇄하고 노의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 공자는 대사구(大司寇)라고 하는 최고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 원래 공자는 신흥 세도가들에 의한 무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하극상(下剋上)을 반대했다. 따라서 공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고 노나라의 임금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다. 한때는 공자의 노력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즉 공자의 제안에 동의한 숙손씨와 계손씨는 스스로 자기들의 성벽을 부수고 병력을 해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손씨는 반격을 해왔고 마침내 공자를 내쫓고 말았다. 이에 공자의 정치적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자는 나이 56세(B. C 497)에 모국인 노를 떠나 약 14년간을 두고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즉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진(陳)을 찾았고 다시 위와 진을 거쳐 채(蔡)와 초(楚)로 갔다. 그간에 세 차례 노에 돌아오기도 했으나 그의 방랑의 여정은 <상가(喪家)의 개>같이 불행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수난까지 당했던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환태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만한 박해를 받았다. 또 광(匡)이라는 지방에서는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욕을 본 일도 있었다. 또 진(陳)과 채(蔡)에서는 먹을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기도 했다. 공자는 그의 이상인 인(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덕 있는 임금을 만나 그를 도와 천하를 바로잡고자 했다. 즉 바른 의미에서의 정치참여를 갈망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정치적 포부는 달성되지 못했고 현실개혁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 미래를 짊어질 엘리트 즉 지식인들의 양성과 아울러 저술(著述)에 뜻을 굳히고 그의 나이 69세(B. C 484)에 다시 노(魯)로 돌아왔다.
현실참여와 정치개혁에 실패한 공자였으나 교육과 학문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수천 명의 제자들이 운집했고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인재들이 속출했다. 공자는 참다운 인식(知)과 인류애(仁)와 불굴의 실천(勇)을 군자의 삼달덕(三達德)으로 가르쳤다. 특히 그는 하(夏), 은(殷), 주(周)의 문화전통의 집대성이라 할 시(詩), 서(書), 예(禮), 악(樂)및 역(易)을 재정리 재평가하여 정식 커리큘럼으로 채택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전통문화의 계승과 신문화의 창조를 이룩했던 것이다.
공자는 노 애공(哀公) 16년(B. C 479) 74세로 서거했다. 따라서 그가 학문과 교육에 전적으로 몰두한 시기는 길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을 학문적 이상의 구현을 실천적으로 추구해 온 공자는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학문의 개조(開祖)이고 도덕 윤리의 계발자이고 덕치, 교화의 선각자이고 또 학교 교육의 창시자이며 문화전통의 계승과 신문화 창조의 표본이기도 했다. 더욱이 [ 70에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규범을 넘어서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고 했듯이 심술(心術)에 의한 내외일치(內外一致)를 달성한 성인이었다.
공자의 사상
① 인(仁)
인(仁)은「논어」전편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은 110자이고 인(仁)을 노한 절은 59절이다. 이를 통하여 보면 공자는 언제나 인(仁)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仁)에 대해 일정한 개념 규정이 없음이 또한 특색이다. 공자는 인(仁)을 묻는 제자들에 대해 그 사람됨과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서 구체적인 답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인(仁)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인(仁)을 안다는 것은 실제적인 체험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점을 「논어」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공자의 인(仁)설에는 몇 가지 기본 이념이 관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⑴ 대친(對親)의 인(仁)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난다. 효제(孝悌)라고 하는 것은 그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여기서 주공이 말하고 있는 〈인(仁)〉이란 어버이를 섬기고 그 뜻을 받드는 애친(愛親)의 관념이다. 인(仁)은 일찍이 중국에서 종족 혈연관계와 결부되어 나타났던 개념이다. 즉, 인(仁)은 〈애친(愛親)〉을 뜻한다. 그래서 〈애친(愛親)을 일러 인(仁)이라 한다〉고 하였다. 인간애의 시발점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천륜에서 비롯된다. 부모는 자식을 조건 없이 사랑하고 키운다. 이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효(孝)다. 즉, 인(仁)이란 부모와 자식 형제만에 형성되는 자연스런 대친(對親)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 관념이 고대 중국의 종법 사회를 유지 발전시켰던 것으로 공자는 종법사회의 이와 같은 애친(愛親)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인(仁)을 효행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⑵ 대인(對人)의 인(仁)
“번자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 가로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종법사회의 대친(對親) 관념으로만 묶어 두지 않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을 사랑하는 도덕관념으로 발전시켰다. 공자의 새로움은 여기에 있다 혈연적 친분 관계 속의 인(仁)을 보다 넓은 인간 사회의 도덕률로 확대한 것이다. 애인(愛人)은 곧 애중(愛衆)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애중(愛衆)의 방법으로서 충서(忠恕)를 가르친다. 충서(忠恕)는 그 시대에 공자가 제기한 새로운 개념이다. 자기를 극진히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극진히 하는 것이 충(忠)이고 이것은 또한 인(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이다. 아울러 충(忠)은 마음의 자각을 뜻하고, 서(恕)는 그와 같은 경지에서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니 자연히 여기에서 자아의 주체성도 확립됨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을 헤아리고 또한 그 마음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 서이다. 충서(忠恕)를 통해 인(仁)은 한층 구체성을 갖게 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도덕적 관계로 연결짓게 하는 핵심을 이룬다. 바로 자각인 동시에 이타적 관계가 충서(忠恕)를 통한 도덕적 관계인 것이다.
(3) 대기(對己)의 인(仁)
인(仁)은 자신을 주체로 하여 펼쳐지는 삶의 행위이다. 공자는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흔이 되어서야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온종일 배불리 먹기만 하고, 한 가지도 마음 쓰는 게 없다면 곤란하다.”
인(仁)은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있어야 인(仁)이 있다. 마음이 있다함은 무엇인가? 공자는 이를 극기(克己)라 하였다. 자기를 이긴다는 극기(克己)는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고, 예(禮)로 돌아간다는 복례(復禮)는 바름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사심을 이기고 바른 예(禮)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인(仁)을 행하는 도리인 것이다. 사욕에 따르지 않고 예(禮)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바른 이치에 따라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며, 역시 올바름을 구하려는 의지의 방향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있어서 극기(克己)하여 복례(復禮)함이 인(仁)이라면 인(仁)은 예(禮)의 심적 기초가 되고 예(禮)는 인(仁)의 행위적 절도가 될 것이다. 사심을 제거하는 극기(克己)가 공심의 체현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복례(復禮)의 예(禮)는 인심을 기초로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仁)을 실천하는 행위로 위인이라고 전제할 때는 행위의 표준 절도로서의 예(禮)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은 향외적으로는 ‘애(愛)’이고 향내적으로는 ‘극기(克己)’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禮)와 인(仁)은 표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할 때 예(禮)는 규범. 인(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禮)는 규범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요청하고, 인(仁)은 마음이라는 점에서 그 정당성을 밑받침할 또 다른 도덕 개념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주어지는 것이 의(義)이다.
② 의(義)
“군자는 의(義)로서 바탕을 삼고 예(禮)로써 이를 행하며 겸손으로 이를 나타내고 믿음으로써 이를 이룩한다. 이것이 군자이다.”
공자가 추구한 이상적 인간이 군자라면 그 군자의 자질을 의에 바탕을 두고 예(禮)로써 이를 실천한다 할 때 공자 사상의 중의 정신이 어떠한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仁)이 나에게서 말미암아 親,家,社會,國家로 확산되는 마음의 원리라면 의(義)는 이 원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길이란 마땅히 해야 할 당위를 말한다 그리고 ‘옳음’을 지칭한다. 공자에 있어서 의(義)는 마땅함, 옳음, 정당, 도리 등으로 해석된다. 공자가 〈군자는 세상일에 대하여 꼭 그래야 할 것도 없고 안 그래야 할 것도 없다. 의(義)에 따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의(義)가 옳고 그름의 표준이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는 군자가 의(義)를 바탕으로 삼고 예(禮)로써 이를 행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의(義)가 예(禮)의 바탕임을 뜻한다. 따라서 예(禮)가 의(義)를 잃을 때는 예(禮)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의(義)에 합치되면 행하여도 좋을 예(禮)이고, 그렇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비례(非禮)일 것이다. 그렇다면 의(義)는 어디에 뿌리 하는가?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도 다른 마음이 아닌 애인(愛人)하고 극기(克己)하는 공심의 인(仁) 그 마음인 것이다. 사람에게 인(仁)이 없으면 의(義)는 생각할 수 없고, 의(義)가 없다면 예(禮)는 성립되지 않는다. 극기(克己)는 의(義)를 세움이고 복례(復禮)는 의(義)로 예(禮)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공자 학에서 예(禮)는 의(義)에 의하여 정당성을 갖고 의는 인(仁)에 의하여 발현된다. 또한, 인(仁)은 예(禮)를 통하여 규범화되고 의(義)를 통하여 보편타당성을 가지게 되며 도덕원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③ 공자의 정치사상: 정명(正名)사상과 덕치사상
⑴ 정명(正名)사상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제나라 임금이 정치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 윗사람이 윗사람다우면 아랫사람은 목숨을 다해 윗사람을 섬기는 법이다.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말에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 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을 正名思想이라고 하며, [자로]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로의 대화에 잘 드러나 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명분을 바로 잡겠다."
"선생님은 사정에 너무 어두우십니다. 어째서 명분 같은 것부터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
"거칠구나,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할 수 없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 질 수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문화가 일어날 수 없고, 문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맞을 수 없고, 형벌이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데가 없다."
그의 정명사상은 명분을 바로잡고 신분질서의 확립을 통해 정치적 무질서를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위정자는 백성들에게 예치와 인정을 베풀어 그들을 심복케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덕치주의는 법가계열의 권력 지상주의와 냉혹한 인간 조종술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군주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인식되었다. 그가 끝내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대 위정자들의 이와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⑵ 덕치(德治)사상
공자의 정치관은 이른바 덕치주의(德治主義) 또는 예치주의(禮治主義)의 입장이다. 덕치주의(德治主義)란 법치주의(法治主義)의 반대 개념으로, 양자의 차이를 공자는 “인도하기를 정(政)으로 하고 제지하기를 형(形)으로써 하면 백성들이 죄짓는 것은 면하나 부끄러워함이 없다. 인도하기를 덕(德)으로써 하고 제지하기를 예(禮)로써 하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한 바르게 된다.”고 말했다. 정치로 인민을 교화하고 법률로 인민을 다스리려는 것이 법치주의인 데 비해, 도덕으로 인민을 교화하고 예로 인민이 자연스럽게 질서 있는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덕치주의이다.
공자의 덕치주의는 우선 개인의 양심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개인의 도덕적 자각을 의지 점으로 삼고 있다. 지배자의 쪽도, 고자가 “그 몸이 올바를 때는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 몸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명령한다고 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듯이, 명령을 내리는 정치가 자신의 덕성이 높지 않을 때 그 명령이 인민의 복종을 얻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공자는 “덕으로써 하는 정치란 비유하건대 북극성이 가운데에 있고 뭇별 들이 이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즉, 지배자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물이라면 대중은 그를 좇아 올바른 길로 따라갈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시한 덕치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논해 보기로 하자. 공자가 제시한 덕치에서 또 다른 것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다.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위정자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세습 귀족의 전제정치 대신 가장 유덕(遺德)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중국의 정치가 세습되는 특권 계층에 의해 독점되었던 데에 반해서 공자는 도덕성과 능력을 우선시 함으로써 평등의 의미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학문적 수양을 쌓기 위한 교육을 아무나 받을 수 없었던 점에 미루어 이러한 평등은 교육 기회의 균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분명 공자가 백성의 편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의 무지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고 대중에게 정치를 맡길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모든 백성에게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가장 훌륭한 정치는 백성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공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데, 이것은 단순히 복리만을 목표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폭군들도 자신이 백성의 복리를 위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자비로써 다스린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그 중에는 그것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있다. 공자가 말하는 백성의 복리 증진이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과는 다르다. 섭공이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선정(善政)을 베풀면 가까이 있는 자는 행복하게 되고, 멀리 있는 자는 찾아온다”고 하였으며, 또 타국의 백성도 진정으로 선정(善政)이 행해진다는 것을 들으면 그 치하(治下)에서 살기를 열망하여 “자식들을 등에 업고 달려온다”고 말한 적도 있다. 요컨대 이런 말은 정치의 선부(善否)를 판단하는 사람은 백성뿐이며, 그밖에는 누구도 아니라는 것이다. 백성 자신의 눈으로 보아 선정(善政)이라고 판단할 때만이 그들이 행복해 질 수 있다.
공자는 유덕하고 능력 있는 사람[君子]가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하여 공자는 (군자(君子)에 의한)예치(禮治)와 덕치(德治)를 내세웠던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통치자란 수신(修身)을 통한 도덕적 인격 완성을 한 사람이어야 함과 동시에 백성의 신망을 얻은 인물이어야 했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선정이란 백성이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성의 신망을 중시하는 경향은 공자 정치 사상의 민본주의(民本主義)와 직결된다. 모든 정치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생각이 백성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공자의 개인의 인격적 존중과 이 민본주의를 함께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공자의 생각이 현대의 민주주의(民主主義)와 어떤 유사성을 갖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비록 공자의 생각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라는 민주주의의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힘들지만 상당 부분 현대의 민주주의 정신과 유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④ 공자의 교육사상:
공자의 교육목표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실천적”이라는 말은 좁게 이해될 수도 있고 넓게 이해될 수도 있다. 좁게 이해하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결과 직접적으로 실제의 생활에 반영되어 어떤 유용성이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배워 관직을 얻는다던가 기술을 익혀 직업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는 국가나 사회가 필요로 하는 관리나 기술자를 양성하여 충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넓게 이해하면 고도로 이념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요구와는 무관하게 고답적인 이론이나 사상을 배우고 거기에 전념함으로써 고매한 인격을 갖추어 구체적인 현실에 초연함을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을 영위하고나 사회적 제도를 운영하는 원리에 관심을 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 이론이나 사상은 그 자체에 가치 혹은 목적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 보다 나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직접적 혹은 간접적 수단이나 방법이 된다는 것으로 수용될 뿐이다. 공자의 교육이 “실천적”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것이다.
공자가 교육의 사회적 목적을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와 같이 기술적으로 유능한 관료를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하는 “교육받은 인간”의 모습, 즉 군자로서의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물론 인을 소유한 인간이지만 더욱 완전하게 표현하면 지혜(知)와 인의(仁)와 용기(勇)의 덕을 균형 있게 갖춘 사람이다.(헌문 30)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의 과업, 즉 학문(文)을 닦고 실천(行)을 중시하며 충의(忠)를 다하고 신의(信)를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술이 24) 그러나 공자가 그러한 덕목과 과업을 교육적으로 중시한 것은 그것들이 개인으로서 성공적인 정치적 생애를 살 수 있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교육을 받은 군자들이 통치에 종사할 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학자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양인으로서 정치에 종사할 지도자를 기르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가 일차적으로 가르치고자 한 것은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집안에 들면 효도하고(入則孝),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에게 공손히 정의(情誼)를 다하며(出則弟), 근신하여 신의를 지키고, 넓게 여러 사람을 사랑하며,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학이 6)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전적으로 비형식적인 것이었다. 물론, 수업이나 시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상대로 하여 대화하였고 때로는 질문을 하고 생각할 문제를 던져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가 가르치는 방법은 대상에 따라서 달랐다.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상에 따라서 다르다.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옳은 것을 배웠으면 곧 행하여야 합니까?”고 물은 즉, 공자는 “부모와 형제가 계신데 왜 여쭈어 보지 않고 행할 것인가?”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염유(苒有)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공자는 “들은 대로 어서 행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염유가 무엇을 행하고자 할 때 언제나 주저함이 있고 자로는 오히려 행함에 지나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자는 잘못에 벌하거나 무엇을 강제하기보다는 옳게 행동하도록 자극하고 권유하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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