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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생애(기원정사에서의 설법)]

문수봉(李楨汕) 2008. 10. 10. 19:53

 [석가모니의 생애] 기원정사에서의 설법

 

부처님은 또다시 잠시 동안 왕사성에 머물러 있었다. 사위성에는 수닷타(須達多)라는 인정 많은 유명한 장자(長者)가 있었다. 그는 왕사성에 사는 어떤 장자의 친척이었다. 불쌍하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어주는 분이었기 때문에 급고독(給孤獨), ‘아나타핀디카’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상용(商用)으로 왕사성에 왔다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이미 날이 저물었으나 밤이 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캄캄한 밤중에 성문(城門)을 나가 새벽녘에 한림(寒林)이라는 묘지에서 경행(經行)하고 있던 부처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한림(寒林)은 왕사성 교외(郊外)의 남쪽에 있었던 모양이며 그곳은 왕사성 부근에 사는 고행자(苦行者)들의 수행지(修行地)였다.

부처님은 장자 수닷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전한다.
“사람은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또 맹수(猛獸)도 피한다. 뱀, 모기, 찬 비, 그리고 심한 열풍(熱風)이 불어오는 것도 피한다. 홀로 고요히 있을 수 있도록(入定禪觀), 보호와 안녕(安寧)을 주기 위해 ‘상가’에 정사를 바치는 것은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이익 됨을 보는 현명한 사람은 쾌적한 정사를 지어 거기에 다문(多聞)하신 분들을 머무르게 해야 한다.

신심(信心)으로 음식물과 의복, 좌와(坐臥)의 도구를 그들 바른 마음 가진 분들에게 드려야 한다. 그 분들은 또 이 드리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고통을 없애는 이치(理致)를 말하고 그리하여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 이치를 알아 남김없이 온전히 니르바나에 들어갈 것이다.”

수닷타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일생동안 우파사카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수닷타는 이튿날 부처님을 왕사성의 자기 숙사(宿舍)로 모셔갔다. 거기서 그는 이 해의 우기(雨期)를 부처님이 사위성에서 보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간원(懇願)하였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려면 한적한 곳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장자(長者)는 부처님에게 바칠 정사(精舍)를 건립할 결심을 하였다.


정사는 죽림정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리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아 왕복(往復)하기가 좋으며 낮에는 복잡하지 않고 밤에는 소란스럽지 않고,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숨어살기 좋은 장소가 아니면 안된다. 장자는 교외를 돌아보고 사위성 남쪽에 제타(祇陀)왕자가 가지고 있는 동산이 가장 적당한 곳임을 알았다. 제타왕자에게 곧 그 동산의 양여(讓與)를 간청해 보았으나 왕자는 쉽게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장자가 너무 열심히 청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기 위해서 왕자는 “만약 황금을 동산 일대에 깔고 쌓아올린다면 그 값으로나 줄까”하고 대답하였다.

장자는 좋아서 그냥 황금을 동산 일대에 깔기 시작하였다. 왕자도 그때에는 아주 놀라 마침내 그 동산을 양도(讓渡)하기에 이르렀다. 장자는 여기에다 부처님이 있을 곳, 제자들이 있을 방 등을 만들고 정사를 완성했다. 본래 제타왕자가 가지고 있던 동산에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건립한 정사라는 뜻에서 기원급고독정사(祇園給孤獨精舍)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위성의 원음(原音)은 사밧티(팔리어), 슈라바스티(범어)이며, 사밧타왕이 건설한 도시란 말이다. 학자들은 지금의 사헤트 마헤트가 그 유지(遺址)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위성은 서력기원전 5-6세기 경 즉 석가가 탄생한 시기를 전후하여 그 융성의 극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의 인도의 이대(二大) 중심지는 이 사위성과 왕사성이었던 것이다. 왕사성이 마가다국의 서울인데 대하여 사위성은 코살라국의 서울로서 히말라야산록 일대의 특수한 문화의 요람지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이 이대중심지를 교화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전인도의 교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전조(前兆)가 되는 것이다. 사위성의 교화는 성도(成道) 제4년 이후의 일이지만 왕사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활발히 진행되어 위로는 왕가의 주요 인물들로부터 밑으로는 도로청소부에 이르기까지 사위성 일대의 모든 주민이 거의 다 그 제자가 된 것이라고까지 한다.

부처님은 여름의 장마철 때면 즐겨 이곳에 머물렀다. 인도의 우기는 석 달 동안이나 계속된다. 이 동안에 부처님은 그 제자들과 더불어 고요한 명상의 생활을 보내며 또 제자들에 대한 교화를 해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사위성은 왕사성 다음으로 부처님이 오래 머물렀던 곳임에 틀림없다. 사위성에서 왕사성으로 가는 길은 세 개 밖에 없다. 이 세 개의 길을 통해 부처님은 두 도시(都市) 사이를 왕복하며 제자들을 교화하였던 것이다.

부처님은 사위성에 머무는 동안에 또 많은 제자들을 얻었다. 경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름을 보면 사위성 출신의 비구가 80명이나 되며 비구니가 14명, 우파사카(善男)가 19명, 우파시카(善女)가 10명이나 된다. 이 숫자는 개략(槪略)된 숫자이지만 얼마나 사위성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경도(傾倒)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중에는 당시 인도 사회의 고질(痼疾)이라고 할 카스트제도를 무시한 각계각층의 사람이 말라되어 있었다. 전기(前記)한 제자들 중에는 41명의 브라만이 들어 있었고, 11명의 크샤트리아(王族), 49명의 바이샤(平民)가 들어 있으며, 슈드라(奴隸)계급 출신도 8명이나 된다. 그밖에 경전에는 코살라국 출신의 제자라고 적힌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보통 전 인도에 걸쳐 부처님의 큰 제자로서 일흔 다섯 사람을 드는데 그 중 17명은 사위성 및 그 부근의 사람들인 것이다.


출처 :매사와법진 원문보기 글쓴이 : 法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