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전도에 관한 이야기
5명의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끈 것을 계기로 붓다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게 되었다. 붓다의 45여 년에 걸치는 설법과 전도의 생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때 베나레스에 사는 부유한 젊은이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 54명이 이시파타나에 있는 붓다를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였으며 야사의 부모는 재가신자가 되었는데 야사의 어머니와 출가전의 아내가 최초의 여자 재가신자들이다. 붓다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이들의 안녕과 선과 해탈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떠나 보내 설하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비구끼리 구족계를 받고 삼보에 귀의하는 방법을 설하였다.
붓다 역시 법을 설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베나레스에서 우루벨라로 가던 도중 숲에서 놀고 있던 30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법을 가르치고 출가시켰다. 그가 우루벨라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결발외도(結髮外道) 캇사파(Kassapa) 삼 형제가 있었다. 붓다는 불의 신 아그니(Agni)를 숭배하는 브라만으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이들 삼 형제와 그들의 수행자 1000명을 모두 출가시켰으며 이들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났다.
라자가하에 도착한 붓다는 숩파팃타사원 근처에 있는 야자나무 숲에서 머물렀다. 이 소식을 들은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Bimbisara)는 12만의 바라문들을 이끌고 붓다를 찾아와 법을 설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들은 붓다의 설법을 들은 후 모두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왕은 붓다에게 비구들의 수행을 위해 벨루바나에 있는 칼란다카니바파 동산(竹林園)을 바쳤다.
한편, 라자가하에서 만난 붓다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된 부유한 상인 수다타(Sudatta)도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밧티(舍衛城)로 붓다를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이다. 기원정사는 사실상 붓다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2대 제자인 사리풋타(Sa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ana 木蓮)의 출가였다. 그때 라자가하에 머물며 청정한 수행을 하고 있던 행각사문(行脚沙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불가지론자인 산자야 벨랏티풋타(Sanjaya Velatthiputta)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사리풋타는 붓다의 제자 앗사지(Assaji)가 라자가하로 탁발하러 가는 것을 보고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그를 따라가 그의 스승이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설하는지를 물었다.
앗사지는 그의 스승 붓다가 설한 내용을 사리풋타에게 설했는데 이를 듣고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자신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던 250명을 데리고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붓다는 캇사파의 수행자 1000명과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수행자 250명과 더불어 모두 1250명의 아라한(阿羅漢)과 함께 머물게 되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귀의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붓다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붓다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되었던 사리풋타는 갑자기 죽었으며 목갈라나는 바라문에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붓다가 입멸하기 며칠 전에 죽었다. 그들의 죽음은 붓다에게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다는 이후로도 자신의 출신지인 카필라밧투, 마가다국의 라자가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밧티, 말라국, 바지국 그리고 코삼비국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출신계급에 상관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불교 교단 내에서는 출신계급이 완전히 무시되는 평등주의를 실천했으며 출가한 순서에 따라 출가자의 상하가 정해졌다. 그는 또한 서로 배타적인 다른 사문들도 불교로 많이 귀의케 하고 그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의 신자로서 부유한 사람들은 불교 교단에 많은 정사(精舍)를 기부함으로써 불교의 세력을 확장시키는데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전도과정에서 붓다는 자신의 아들인 라훌라, 사촌인 아난다(Ananda 阿難)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그리고 불교의 가장 사악한 반역자인 동시에 붓다의 사촌동생인 데바닷타(Devadatta)를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아난다의 청원에 의해 붓다의 이모이자 양모(養母)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를 출가시킴으로써 최초로 비구니가 교단에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bhiksu 比丘)와 비구니(bhiksuni 比丘尼), 우바새(upasaka 優婆塞)와 우바이(upasika 優婆夷)로 구성되는 불교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완성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계율과 법은 대부분 붓다의 생존시에 붓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5명의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끈 것을 계기로 붓다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게 되었다. 붓다의 45여 년에 걸치는 설법과 전도의 생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때 베나레스에 사는 부유한 젊은이인 야사(Yasa)와 그의 친구 54명이 이시파타나에 있는 붓다를 찾아와 그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였으며 야사의 부모는 재가신자가 되었는데 야사의 어머니와 출가전의 아내가 최초의 여자 재가신자들이다. 붓다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많은 이들의 안녕과 선과 해탈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여러 방향으로 떠나 보내 설하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비구끼리 구족계를 받고 삼보에 귀의하는 방법을 설하였다.
붓다 역시 법을 설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베나레스에서 우루벨라로 가던 도중 숲에서 놀고 있던 30명의 부유한 젊은이들에게 법을 가르치고 출가시켰다. 그가 우루벨라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결발외도(結髮外道) 캇사파(Kassapa) 삼 형제가 있었다. 붓다는 불의 신 아그니(Agni)를 숭배하는 브라만으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이들 삼 형제와 그들의 수행자 1000명을 모두 출가시켰으며 이들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났다.
라자가하에 도착한 붓다는 숩파팃타사원 근처에 있는 야자나무 숲에서 머물렀다. 이 소식을 들은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Bimbisara)는 12만의 바라문들을 이끌고 붓다를 찾아와 법을 설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들은 붓다의 설법을 들은 후 모두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왕은 붓다에게 비구들의 수행을 위해 벨루바나에 있는 칼란다카니바파 동산(竹林園)을 바쳤다.
한편, 라자가하에서 만난 붓다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된 부유한 상인 수다타(Sudatta)도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밧티(舍衛城)로 붓다를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이다. 기원정사는 사실상 붓다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2대 제자인 사리풋타(Sariputta 舍利弗)와 목갈라나(Moggallana 木蓮)의 출가였다. 그때 라자가하에 머물며 청정한 수행을 하고 있던 행각사문(行脚沙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불가지론자인 산자야 벨랏티풋타(Sanjaya Velatthiputta)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사리풋타는 붓다의 제자 앗사지(Assaji)가 라자가하로 탁발하러 가는 것을 보고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그를 따라가 그의 스승이 누구이며 그가 무엇을 설하는지를 물었다.
앗사지는 그의 스승 붓다가 설한 내용을 사리풋타에게 설했는데 이를 듣고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자신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던 250명을 데리고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붓다는 캇사파의 수행자 1000명과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수행자 250명과 더불어 모두 1250명의 아라한(阿羅漢)과 함께 머물게 되었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귀의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붓다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붓다의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되었던 사리풋타는 갑자기 죽었으며 목갈라나는 바라문에게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붓다가 입멸하기 며칠 전에 죽었다. 그들의 죽음은 붓다에게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다는 이후로도 자신의 출신지인 카필라밧투, 마가다국의 라자가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밧티, 말라국, 바지국 그리고 코삼비국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출신계급에 상관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불교 교단 내에서는 출신계급이 완전히 무시되는 평등주의를 실천했으며 출가한 순서에 따라 출가자의 상하가 정해졌다. 그는 또한 서로 배타적인 다른 사문들도 불교로 많이 귀의케 하고 그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의 신자로서 부유한 사람들은 불교 교단에 많은 정사(精舍)를 기부함으로써 불교의 세력을 확장시키는데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전도과정에서 붓다는 자신의 아들인 라훌라, 사촌인 아난다(Ananda 阿難)와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그리고 불교의 가장 사악한 반역자인 동시에 붓다의 사촌동생인 데바닷타(Devadatta)를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아난다의 청원에 의해 붓다의 이모이자 양모(養母)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를 출가시킴으로써 최초로 비구니가 교단에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bhiksu 比丘)와 비구니(bhiksuni 比丘尼), 우바새(upasaka 優婆塞)와 우바이(upasika 優婆夷)로 구성되는 불교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완성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계율과 법은 대부분 붓다의 생존시에 붓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 ![]() ![]() |
'☆종교와영의세계☆ > ♡불교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가모니의 생애(기원정사에서의 설법)] (0) | 2008.10.10 |
---|---|
[석가모니의 생애(부처님의 교화활동-왕사성)] (0) | 2008.10.10 |
[석가모니의 생애(비구니교단의 성립)] (0) | 2008.10.10 |
[석가모니의 생애(앙굴리마라의 교화)] (0) | 2008.10.10 |
[석가모니의 생애(이복동생 난타의 귀의)] (0) | 2008.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