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생애] 부처님의 입멸(入滅)
남선북마(南船北馬)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말을 타고 다녔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 바쁜 교화의 나날이 지나 어느덧 그 종언(終焉)이 가까워 왔다. 사밧티성의 동원(東園) 녹자모(鹿子母) 강당(講堂)에 있으면서, 저녁 때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목욕을 끝내고 잔등을 말리며 앉아 있으니 시자(侍者) 아난다가 왔다. 그는 부처님의 잔등을 만지며 “부처님, 그 옛날에는 살결이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빛나고 있었는데, 이제는 많은 주름이 나타나고 몸이 많이 앞으로 구부려졌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젊음에는 늙음이, 건강에는 병이, 삶에는 죽음이 있음을 면할 길이 없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그것이 부처님이 78-79세에 다다렀을 무렵의 일이 아닌가 한다. 또 어떤 때에는 파세나디왕이 타다가 내버린 아름다운 차를 멀리 바라보면서 차도 시간이 가면 쓸모가 없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몸도 늙음 때문에 파괴되기 시작한다고 말하였다.
부처님의 입멸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기록은 상당수에 달한다. 그 주요한 것으로는 팔리경전의 <長 니카야>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 있고,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에 <유행경(遊行經)>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전들에 입각하여 부처님의 만년에 관한 여러 모를 엿보기로 한다.
부처님이 사밧티성으로부터 왕사성으로 돌아와서 영취산(靈鷲山)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아자타삿투왕은 밧지족의 나라를 정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앞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밧사카라(雨行)란 대신(大臣)을 시켜 부처님에게 문안(問安)을 드릴 겸 은근히 그 뜻을 타진(打診)하게 했다.
부처님은 밧사카라의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아난다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① 밧지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며 그 회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집(參集)하느냐?
② 밧지 사람들은 상하(上下)가 항상 화목(和睦)하게 같이 국사(國事)를 돌보고 있느냐?
③ 밧지 사람들은 선인(先人)이 정한 것을 깨뜨리지 않고 중시하며 그것을 함부로 고치는 일을 하지 않느냐?
④ 밧지 사람들은 장유(長幼)의 서(序)를 지켜 나이 많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느냐?
⑤ 밧지 사람들은 남녀의 별(別)이 있어 부녀자를 폭력으로 끌어내 약탈(掠奪)하는 등 불법(不法)을 행하지 않느냐?
⑥ 밧지 사람들은 국내외(國內外)의 종묘(宗廟)를 숭상(崇尙)하고 의전(儀典)을 폐(廢)하지 않고 지키고 있느냐?
⑦ 밧지 사람들은 도(道)를 존중하고 덕(德)을 경애(敬愛)하며 도인(道人)이 옴을 후(厚)하게 맞이하느냐?”
이러한 질문을 받은 아난다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은 이것은 일곱 가지 불쇠(不衰)의 법(法)이다. 이것을 지키고 있는 한 밧지족의 나라는 쇠약(衰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밧사카라가 그 말씀을 듣고 돌아간 후 부처님은 영취산으로 왕사성 안의 모든 수행승들을 다 모아 놓고 밧지 사람에 관해서 한 설법과 같은 내용의 칠불쇠법(七不衰法)을 여러 차례 설하였다고 한다.
마가다국과 밧지국과는 당연히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정세(情勢)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간신히 막고 있던 것이 빔비사라왕의 정략결혼(政略結婚)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충돌은 부처님의 말씀에 의해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세는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아자타삿투왕은 부처님이 돌아간 뒤 이 나라를 병탄(倂呑)하고 말았다.
부처님은 그 뒤 산을 내려 왕사성의 암바랏티카(菴婆羅致) 촌(村)으로 갔다가 다시 나란다로 향했다. 도중에 부처님은 기회에 따라 설법을 하면서 나란다를 거쳐 파탈리푸트라(華氏城)의 전신(前身)인 파탈리가마촌(村)으로 들어갔다. 나란다는 왕사성에서 파탈리촌(村)으로 가는 통로에 있으므로 부처님이 그곳을 지나갔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 나란다가 무슨 중요한 의의를 가진 곳이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이 나란다는 후세에 매우 중요한 불교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파탈리촌(村)은 당시 간지스강의 한 소항구(小港口)에 불과했던 것이지만 나중에 난다 왕조(王朝) 내지 마우리야 왕조 시대에는 인도 전체의 수도(首都)가 되어 번영을 이루었다. 지금의 파트나시(市)가 그곳이다.
파탈리촌(村)에 들어간 그 날은 밤늦게까지 마을 사람들에게 탐욕을 즐기고 방자(放恣)하는 것의 해를 누누이 설명하였다. 그 때 아자타삿투왕은 밧지국에 대비하기 위해 간지스강 남안(南岸)에 위치하는 이 촌락(村落)에 밧사카라(雨行)와 수닛다(須尼陀)의 두 大臣을 보내어 城市를 만들게 하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은 지세상(地勢上)으로 보아서 이 마을이 나중에 인도의 중심을 이루는 중요한 도시가 될 것을 예상하고 그 장래에 대해 경고(警告)하였다. 다음 날에는 밧사카라의 공양을 받았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은 간지스강을 건너 코티(拘利)촌, 나티카(那地迦)촌을 지나 베살리(吠舍利)로 들어갔다. 부처님은 그 곳 한정(閑靜)한 교외(郊外)에 암바팔리(菴婆波利)란 부인이 소유하는 동산에 머물렀다. 암바팔리부인은 원래 유명한 창부(娼婦)였었는데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사람이다. 경전은 암바팔리부인이 이때 처음으로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 벌써 이전에 불제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부처님은 더 나아가 페루바(竹芳)촌에 들어가 거기서 마지막 안거(安居)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촌락은 퍽 적고, 게다가 그 해는 흉년이 들어서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안거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히 타일러 각 지방으로 가서 따로따로 안거를 하도록 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한다.
“너 자신에 이겨야 한다. 좋은 것을 얻어도 좋아하지 않고, 나쁜 것을 얻어도 싫어하지 않고 식사는 다만 몸을 유지하는 것으로서, 탐(貪)을 내서는 안된다. 탐내기 때문에 생사가 끊임없는 것이므로 육신을 통제하고 자기 스스로에 이겨 적정(寂定)을 얻어야만 한다.”
이 안거 중에 부처님의 신체에는 병상(病狀)이 나타나 참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있었으나 부처님은 마음으로 이 병을 극복하고 이를 고쳤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마지막 설법을 간청하자, 석존은 이와 같이 말씀하였다.
“아난다야, 수행승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요망하는 것이냐? 나는 내외(內外)의 구별 없이 (모조리) 법을 설하였다. 온전한 사람의 교법(敎法)에는 무엇을 제자에게 숨기는 것과 같은 그런 스승의 주먹(拳)은 없다. ……
아난다야, 나는 이미 노쇠(老衰)하여 인생의 여로(旅路)를 다 겪어 나이 80이 되었다. 아난다야, 예컨대 낡은 차가 가죽끈의 덕택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바와 같이 내 차체도 가죽끈의 덕택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야, 향상코자 노력한 사람이 모든 상(相)에 마음을 둠이 없이 하나 하나의 감수작용(感受作用)을 없앰으로써 상(相)이 없는 마음의 통일에 들어가 머무를 때 그때 그의 몸은 건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이 세상에서 너 자신을 섬(島)으로 삼고 너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다른 사람을 依支處로 하지말고, 법을 섬(島)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며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고 있지 말라.”
사리풋타(舍利弗)는 이때까지 오랫동안 부처님을 따라 유행(遊行)해 왔으나, 부처님이 입적(入寂)할 시기가 점점 임박해 옴을 알고, 또 자기의 사기(死期)도 가까워 온 것을 알고 그는 부처님에게서 잠시 동안 떨어져 있을 것을 원해 자기 고향인 나라다촌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그의 노모(老母)가 살아있었다고 한다. 사리풋타는 그 노모(老母)를 뵈옵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맛을 보이고 고요히 니르바나에 들었다. 혹은 이보다 앞이라고 하고 혹은 뒤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대개 같은 시기에 목갈라나(目連)도 니르바나에 들었다. 그의 죽음은 귀한 순교(殉敎)의 죽음이었다고 전한다.
안거가 끝난 뒤 부처님은 다시 베살리(吠舍利)로 가서 차팔라 체티야(遮波羅制底)에 머물렀다. ‘체티야’란 신령(神靈)한 나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데 이는 팔리어고 산스크리트어로는 ‘챠이티야’라고 한다. 흔히 ‘묘(廟)’ 또는 ‘예당(禮堂)’이라고 한역(漢譯)되기도 하는 체티야는 석조(石造) 또는 벽돌로 된 것으로서 이런 것은 대개가 마우리야왕조(王朝)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塔婆) 모양의 것은 없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遺骨) 위에 만들어진 토총(土塚) 또는 그 위에 심어놓은 나무를 의미한다. 그 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遺骨)이나 유품(遺品) 위에 총(塚)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체티야는 스투파(塔婆)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부처님 시대에 베살리 교외(郊外)에는 큰 나무가 있어 그 나무 그늘에서 부처님과 아난다는 뜨거운 일광(日光)의 직사(直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옷을 벗어 갈게 하고 거기에 쉬면서 그가 석달 후면 니르바나에 들것을 예언하였다.
아난다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아난다야, 근심하지 말라. 설사 일겁(一劫)이라는 긴 기간 살아 있었다 할지라도 서로 만난 사람이 한번은 이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있는 모든 것의 양상(樣相)이다. 또 설령 이 육신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설해 온 묘법신(妙法身)은 언제까지나 남는 것이 아니냐.” 하고 위로하였다.
그 날 밤 부처님은 베살리 주변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가르쳤다.
“비구들아,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모든 가르침을 생각하고 외우고 닦지 않으면 안된다. 욕심을 억제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고 몸을 바르게 하고 뜻을 바르게 하고 말을 바르게 하고 분노를 버리며 탐욕을 버리고 항상 죽음에 마음을 쓰라.
마음이 사(邪)를 원하더라도 따르면 안된다. 마음이 욕심을 일으키더라도 그런 마음을 허락해서는 안된다. 마음은 사람에 따라야 하는 것이로되 사람이 마음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이 마음은 신(神)도 되고 사람도 되고 악마도 되고 귀신도 되고, 또 명오(明悟)를 열 수도 있는 것으로서 모든 것은 다 이 마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을 바로하여 도(道)를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를 행하는 자만이 세상에서 안온(安穩)을 얻는 것이다. 비구들아, 나는 지금 너희들을 위해 이 세상의 종말(終末)에 이르기까지 고독(苦毒)의 나무를 변화시켜 감로(甘露)의 열매를 맺도록 하려고 원한다. 너희들은 이 법(法) 안에서 서로 화목하고 서로 존경하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우유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 비구들아, 나는 스스로 이 법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였다. 이 법은 오래 너희들의 스승이 되어 너희들을 해탈의 경지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나는 이 삼월(三月)을 지나 니르바나에 들어갈 것이다.”
비구들은 부처님의 입열반(入涅槃)이 가까운 것을 듣고 비탄에 젖어 오체(五體)를 땅에 던지고 명열(鳴咽)하는 자마저 있었다. 부처님은 생(生)있는 자가 사(死)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부처님은 그리고 베살리의 릿차비(離車) 사람들에게도 작별을 고하고 반다가마(捷茶)촌, 핫티가마(授手)촌, 암바가마(菴婆羅)촌, 잠부가마(閻浮)촌을 지나 보가나가(負伽)市에 들어가 가는 곳마다 어디에서나 비구들에게 법을 설하고 파바(波婆)로 나아가, 그 교외에 살고 있던 대장장이 춘다(淳陀)의 숲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춘다의 집에서 공양을 받았는데 그 음식물 중에 전단수(▩檀樹)의 버섯이 있어 이것을 먹고 복통(腹痛)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처님은 쿠시나라(拘尸那羅)로 갔다.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에게 그와 같이 병(病)을 얻게끔 하였으나 이것이 인간세계에 있어서 부처님에게 드린 음식의 마지막 것이다.
도중에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웃옷을 벗어 깔게하고 쉬면서 물을 구해 마산 다음 풋투사(福貴)라는 사람에게 법을 설하여 옷의 공양을 받았다. 그는 다시 더 나아가 카쿳타(拘孫)강에 이르러 여기서 목욕(沐浴)을 하고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때 자기가 바친 음식 때문에 병들게 된 것을 슬퍼하여 따라온 춘다를 위로하기도 했다. 부처님은 몇 번씩이나 쉬면서 히라냐바티(凞連)강을 건너 쿠시나라(拘尸那羅 또는 쿠시나가라)의 우파밧타바(恕跋單)란 이름의 사라(沙羅)나무의 숲으로 들어갔다. 아난다가 그 사라(沙羅)의 쌍수(雙樹)가 나란히 서 있는 그 사이에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부처님을 모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잠자리였던 것이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서쪽을 향하여 바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깔고 발은 포개고 고요히 누웠다. 모든 천인(天人)들이 나무 위에 나타나 천상의 꽃들을 뿌리며 공양하였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이것은 참말로 부처님을 공양하는 길이 아니다. 참된 공양은 정법(正法)을 닦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가 부처님의 명(命)을 받들어 쿠시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이 입멸할 시간이 온 것을 알렸다. 그리고 부처님은 울며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수밧다(須跋陀)라는 한 외도의 수도자가 꼭 부처님을 만나겠다고 야단하는 것을 아난다가 안된다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수밧다를 불러 인견(引見)하고 법을 설하여 마지막 제자로 삼았다. 제도해야 할 모든 사람들을 다 제도하고 난 부처님은 조용히 때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 날 밤, 달은 밝고 바람도 없으며 숲속은 적연(寂然)히 소리도 없다. 천지가 다 대사(大師)의 입열반(入涅槃)을 슬퍼 우는 듯하였다. 부처님은 다시 입을 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내가 죽은 후 스승이 없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말한 법(法)과 율(律)이 너희들의 스승이다.너희들이 만약 마음에 무슨 의심이 있으면 묻는 것이 좋다. 후일에 내가 있을 때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일이 있으면 안된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고 질문하는 이가 없었다. 부처님은 두 번 세 번 거듭 재촉하였으나 그래도 묻는 이가 없었다. 아난다가 사람들을 대신하여 “부처님, 우리들은 깊이 삼보를 믿어 도를 의심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아옵니다” 하고 말했다.
“이 법에는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다 갖추어져 있다.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에 있어서 이미 제도할만했던 모든 사람들을 다 제도했고 아직 구제되지 않은 자도 구제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어 놓았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아끼며 이 법을 전해가면 여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존재하여 멸망치 않으리라.”
말을 끝내고 부처님은 고요히 소리 없는 숲속에서 대열반(大涅槃)에 들었다. 그것은 인도력(印度曆)으로 둘째 달 베사카(毘舍▩月)의 15일 만월(滿月) 날 아침이었다고 적혀 있다.
석가/이기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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