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 미얀마(버미족)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Śā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 탄생시대의 배경
BC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안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BC 9세기 무렵까지 베다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이 약화되고 새로운 사고가 양성되어 BC 6세기 무렵에는 새 계급이 출현했다. 비옥한 갠지스 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농산물 등의 물자가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가 성립하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의 발전은 화폐의 유통을 성행하게 했으며, 상공업자들은 각기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들은 보통 6사외도로 분류되는데, 그중에도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푸타, 유물론자인 아지타,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인 산자야, 도덕부정론자인 푸라나, 결정론자인 마칼리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탄생
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인데, 현재의 지명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북방이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남으로는 갠지스 강으로 유입하는 많은 지류가 있어서 풍부한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으며, 일종의 공화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다만 남쪽의 대국인 코살라국에 인접한 탓으로 주권은 코살라국에 종속되었지만, 자치권은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석가모니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Maya)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왕이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이 석가족 집단의 우두머리는 라자(raja:왕)라고 불렸지만, 이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의 수장(首長)이라는 직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BC 6세기 혹은 BC 5세기에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약 100년의 시차로 견해가 갈리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고, 특히 남방의 불교도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왕비와 수행원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두 도시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숲은 룸비니라는 지모신(地母神)을 받드는 곳이었으므로 출산의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신의 양팔로부터 발생했다는 〈리그베다 Rigveda〉 이래의 전승과 관련되어,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출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위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탄생 장소는 현재 룸민데이라 불리며 네팔의 영토에 속한다. BC 3세기의 유명한 아소카 왕이 그 탄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가 후대에 그곳에서 발견되어 석가모니의 출생지임이 확인되었다.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후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탓인지 사망했고, 석가모니는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에 의해 양육되었다. 생후 5일째 또는 7일째의 명명식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후대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의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탁월한 수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부족사회에 있었던 동물숭배, 특히 인도에서의 뿌리 깊은 소에 대한 숭배 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은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으므로 정반왕도 이 방면의 대가들을 불렀다.
아시타는 이 아이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든가 아니면 부처(覺者)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성장한 후의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탄생 전설은 석가족의 관심이나 의례를 고대 인도 당시의 표현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 많고, 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해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관해서는 2월 8일, 베사카 달의 후반 8일 혹은 후반 15일 등 여러 전설이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취급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4월 8일이라 하는데, 이는 번역자가 인도의 베사카 달이 음력 4월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일로 믿고 있으나, 남방의 불교도는 베사카 달의 보름날에 탄생·성도·열반이 있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베사카 제(祭)'를 성대히 시행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웨삭제'라고 함).
젊은 시절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석가모니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속하는 나라는 예속적인 국가였으며,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는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으므로,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 nikaya〉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런 경향을 지니지 않았다. 왕은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Yaśodhara)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는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판별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2가지 혼인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승자가 됨으로써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과 많은 여성들 속에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오히려 당시의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으로 각색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왕인 아버지는 호사와 안락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어도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다음에 소개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障害·惡鬼)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사문유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병·죽음·출가를 배치한 것은 시적 묘사에 지나지 않고,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교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나이에 이른 그가 노인과 병자와 장례식 혹은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이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심리학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현상이라도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람에게 심리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전설에서 늙음·병·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긴 하지만,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로 유도하려는 암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의 젊은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지만,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국에 병합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 상극의 와중에서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정을 버리고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출가 수행
그는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사문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수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수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금욕주의).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수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여,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이 사건은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나무의 신이 나타났다고 믿고서 석가모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것이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있다.
그러나 격렬한 고행으로 쇠약해져 있던 석가모니에게 이 우유죽은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중에 보드가야라고 불린 장소에서 명상에 잠겨, 드디어 "아사타 나무 아래서 깨달음(보리)을 열었다"라고 표현되는 성도(成道)의 날이 도래했다.
경전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악마를 등장시켜 그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는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이 싸움은 신화화된 선과 악의 투쟁, 즉 내적인 갈등이었다. 이 갈등의 극복으로 그는 정각(正覺)을 얻어 비로소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아사타 나무가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심중에는 설법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망설임이 오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망설임과 설법하려는 결의가 경전에서는 인도의 최고신으로 권위있는 범천이 권유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의와 아울러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또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7주간의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추구한 것은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를 거쳐 고행주의자로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양측에 분명히 인생도피의 경향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즉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현실생활에 입각한 입장에서의 해결이 중시되었다. 이는 고행을 칭찬하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종교보다도 좋은 수행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점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설법과 전도
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스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처음에는 친한 보살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Śāriputta)과 목건련(目犍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시에 그만큼의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석가모니에게 무엇보다도 비극이었던 것은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리불이 돌연히 죽고, 목건련도 바라문에게 맞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 한편 일반 신자들 중에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수다타(Sudatta)가 있었다. 특히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라자그리하에서 만난 석가모니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어 석가모니를 사바티에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수도원, 즉 정사를 세웠다.
이것이 기원정사이다. 이곳은 사실상 석가모니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설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밖에 비사카(Visakha)라는 여인이 기증한 녹모강당(鹿母講堂), 코삼비에 있는 정사로서 흔히 미음(美音)정사라고 번역되는 고시타원, 베살리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 등 많은 정사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왕이나 부유한 상인이 불교 신자로 귀의했던 점이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동시에 신자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석가모니는 어느 사문 지도자보다 일찍이 출가승들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그것을 상가(Samgha)라 한다. 흔히 말하는 승가(僧伽)가 이것이며, 불교의 교단을 가리킨다. 베나레스에서 5명의 수행자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을 때를 승가의 성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승가에는 큰 특색이 있었다. 즉 출가 이전에 속했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하루 또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자를 윗자리[上座]에 앉혔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를 법랍(法臘)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단 내부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교단에서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기존의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인데, 그것이 교단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적극적인 이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승가에서 수행자 개인은 3개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鉢盂]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되었고, 기증된 것은 모두 승가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비가 쏟아지는 계절인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그간의 생활에 대한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드디어 우기가 끝날 때면 포살(布薩 uposatha)을 실행하여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를 실행하고 새로운 의복을 분배했다. 한편 제자 아난의 진력에 의해 여성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라 불리는 불교 신도의 구성이 완결되었다.
사중이란 남성 출가자인 비구(bhikkhu),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bhikkhuni)·우바새(upasaka)·우바이(upasika)라고 재가(在家)의 남녀 신자를 말한다. 높은 이상을 내걸었던 승가의 정신은 인도의 고대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입멸
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라자그리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 왔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아난아,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의 기원어가 '등'이라는 뜻도 지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설법을 '자등명 법등명'으로 번역했다.
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죽음). 도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가 공양한 음식이 쇠약해 있는 석가모니에게 심한 설사까지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Subhadda)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어떠한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던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라로 달려온 것도 비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 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열반절로 기린다. 흔히 불멸(佛滅)의 연도라고 통칭되는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입멸(入滅) 연도에 대해서는 고래로 수많은 설이 있으나, 그것들은 남전과 북전으로 크게 양분된다. 석가모니의 탄생 연대도 이 입멸 연대로부터 역으로 계산한 것이다.
남전(南傳)에 의한 대표적인 것은 BC 543(또는 544)년 설로서, 현재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지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는 특히 학술적인 근거가 희박하나 오랫 동안 널리 통용되어온 전승이어서, 현재 한국의 불교 종단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채택하고 있다. 북전에 의한 대표적인 설은 중성점기설(衆聖點記說)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매년 율장에 점을 하나씩 계속 찍었다고 중국에 전해진 전설이다. 이에 의하면 입멸 연도는 BC 483년으로 계산된다. 일본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일본 일부에서 승인되기 시작한 것은 BC 386년 또는 BC 383년 설인데, 아소카 왕의 즉위를 불멸 116년이라고 하는 캐시미르 지방의 전승을 유력한 자료로 삼은 계산이다.
한편 아소카 왕의 출현은 불멸 후 218년이 된다고 하는, 스리랑카의 사료(史料)를 토대로 BC 486년이 불멸 연도라고 계산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불전과 논서에서 전하는 아소카 왕의 즉위 연대는 불멸 후 100~160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추정도 단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다만 연대에 무관심했던 인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만큼이나 상세하게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탄할 만하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베살리·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ona)라는 늙은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을 경모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즉 불탑(佛塔)이다.
이 불탑은 후대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가르침을 집성한 결집(結集)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자 제멋대로인 견해를 저마다 그가 설한 것인 양 내놓을 우려가 있음을 염려한 가섭은 제자들 중에서 500명의 정통 비구들을 선발하여,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교외에서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의 결집을 행했다. 아난이 암송하는 경 하나하나를 전원이 찬성함으로써 경장(經藏)이 편찬되고, 우팔리(Upali)가 암송하는 율의 조항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율장(律藏)으로 편찬되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일반적 가르침인 경과 출가자의 교단생활을 규정한 율이 정식으로 제정되었다(→ 결집, 삼장).
석가모니에 대한 당대의 평가
그는 위대한 교사요, 사람들의 조련사로서 독특한 명성을 가졌다.
코살라의 왕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던 살인자요, 악한인 앙굴리말라(Angulimala)에 대한 그의 대화와 교화는 그의 위대한 능력과 재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거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서 매혹되었으며, 반대자들은 그가 어떤 '유혹적인 속임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서는 매우 빠르게 개종했다. 이런 사실은 코살라 국왕의 논쟁으로써 석가모니를 꺾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갔던 이들이 결국에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그는 각자의 소질이나 수준에 따라 그들의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았음이 인정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도 먼 거리를 갔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자들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그들의 행복과 진보에 대해서 물었다.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는 매일 환자들의 병실을 방문했다. 언젠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방치한 병든 수행승을 돌보면서, "병든 이를 돌보는 자는 나를 시중 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개혁자로서의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오래 전에 확립되어 고수하고 있던 카스트 제도를 비난했고, 인간의 평등을 인정했다.
또 그는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 진보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형벌을 통해 죄를 억압하려는 것은 헛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므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증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전륜왕사자후경 轉輪王獅子吼經〉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바른 직업에 종사하고 진실을 말하며,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여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신뢰를 얻어 명예와 재산을 획득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을 일방적으로 획득하는 데 그치고 단지 자신의 자본으로 보존해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동시에 타인과 같이 향수케 하여 유효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광야를 여행할 때의 길동무처럼 가난한 가운데서 나눠주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라고 말하여 서로 협조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의 불교도는 국가의 문제에 관해서 국왕은 힘으로써 민중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서, 먼저 출가자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완전한 이상사회를 구축한 연후에, 그 정신적 감화를 통해 일반사회의 개혁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승가를 제정한 정신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국가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의 지도자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몇몇 경전에서 국왕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으며, 바지족의 공화제 정치를 칭찬했다고도 전한다. 불교 교단의 운영 방식에는 당시의 공화정치나 조합을 모방한 점이 있음이 인정된다.
국가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란 진리인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교사였다. 강대한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질서와 계율을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왕으로서도 인민은 물론이고 자신의 왕실에서조차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애정·존경에 기초하여 질서와 계율을 유지시켰다. 그에게는 많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는 신통력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기적). 어느 때 제자들 중의 1명이 대중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꾸짖고서 재가신도들 앞에서 신통을 행하지 말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통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가모니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종합해보면, 그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이성적인 사상체계와 생활방식으로 인간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결심했으며, 그것을 실천했던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위대한 지혜의 소유자요, 위대한 자비의 실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교단 내부의 문제까지도 그의 지시에 따라 해결했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사모하는 귀의자들에게 그의 입멸은 커다란 지표를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으라"라는 유언이 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은 더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인 석가모니 부처가 사모의 정을 품고 있던 제자들에 의해 초인간적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먼저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이미 신격화된 표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서 그는 '부처'로 불리고 '고타마'라는 인간으로서의 성(姓)은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이윽고 부처의 10가지 호칭, 즉 여래10호(如來十號)가 정해진다.
그것은 ① 완전한 인격자인 여래(如來), ② 존경해야 할 사람인 아라한 또는 응공(應供), ③ 바른 깨달음을 연 사람인 정변지(正遍知) 또는 정등각(正等覺), ④ 밝은 지혜와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인 명행족(明行足), ⑤ 행복한 사람인 선서(善逝), ⑥ 세간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인 세간해(世間解), ⑦ 최상의 사람인 무상사(無上士), ⑧ 거친 자를 제어하는 사람인 조어장부(調御丈夫), ⑨ 신들과 인간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 ⑩ 세상에서 존귀한 분인 세존(世尊)이다.
모든 것을 완수하여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부처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되기에 이르는데, 그 특징은 '32 상(相)'과 '80 종호(種好)'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인도인들이 신봉하는 신의 특징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상적인 신체적 특색을 부처에게도 적용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법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므로 그가 아무리 초인적인 취급을 받더라도 석가모니 이외에도 부처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 7인의 부처가 있었다는 과거불(過去佛) 사상이 등장했다. 부처가 신격화됨과 아울러 부처에 대한 신앙도 강조된다. 아소카 왕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 사후의 교단 지도자들은 석가모니 한 사람만이 부처이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아라한과(果)라는 경지를 얻는 것만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여 석가모니와 구별했다.
이로부터 부파 불교의 고정관념이 시작된다. 이것은 현재 남장 상좌부의 기본적 사고의 하나로 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뒤에 탑을 세움으로써 시작된 사리탑 또는 불탑에 대한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의 육신이 남긴 사리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그가 남긴 모든 것에 대한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긴 머리카락이나 가르침에도 신앙의 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경전을 사리탑에 봉안하여 신앙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 자신에게 귀의했겠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 이루어진 귀의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진리인 법이 부처의 입을 통해 설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불멸 이후의 귀의는 법 그 자체에 대한 귀의와 동일시되고, 우주의 진리는 부처 그 자체라고 간주되었다.
불탑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소위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크게 전개되어, 법신·보신·화신이라는 3신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법신(法身)이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부처의 신체라고 간주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진리, 즉 법의 영원성을 자각한 대승불교도가 부처에 대한 귀의를 표명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보신(報身)이란 부처가 되기 위해 과거에 위대한 수행을 완수한 그 보답으로 나타난 부처의 훌륭한 모습을 의미한다.
아촉불이나 아미타불 등의 구체적인 부처들은 보신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그 가능성이 번뇌에 덮여 있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사고의 발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부처가 된다고 설하는 데까지 전개된다. 또 무한한 선행을 거듭 쌓은 결과로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는 사상도 생겼는데,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끝으로 화신(化身) 또는 응신이란 부처가 중생제도를 위해 수많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현실 세계에 내려와 나타내는 신체이다. 여기에도 상좌부 계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입장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보살의 입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양측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숭배하고 있지만, 후자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기본적 명제를 제창하면서 부처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대승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사상적 발전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영원성을 구하고자 노력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전기가 집성된 것은 그가 입멸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산스크리트 계통의 것으로는 〈마하바스투 Mahavastu〉·〈랄리타비스타라 Lalitabistara〉, 마명(馬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슈바고샤(Aśvaghośa)의 〈붓다차리타 Buddhacarita〉가 있다. 중국에서 번역된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60권은 〈마하바스투〉와 유사한 점이 있어서 이의 번역이 〈불본행집경〉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근래에 이러한 견해는 오해라고 밝혀져 있다. 〈랄리타비스타라〉는 〈보요경 普曜經〉 8권과 〈방불대장엄경 方佛大莊嚴經〉 12권에 상당하며, 〈붓다차리타〉는 중국에서 〈불소행찬 佛所行讚〉으로 변역되었다.
산스크리트 원전 없이 한역(漢譯)으로만 전하는 것은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4권, 〈중허마하제경 中許摩詞帝經〉 13권, 〈불본행경 佛本行經〉 7권, 〈중본기경 中本起經〉 2권 등이다. 한편 팔리어로 쓴 전기의 집대성은 〈니다나카타 Nidanakatha〉인데, 이는 그 이전에 성립된 전기들을 하나로 조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느 것이나 후세에 집대성한 것이어서 그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 그 이전의 오래된 자료로는 단편적인 것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팔리어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 〈수타니파타〉, 〈상응부 相應部 Samyutta-nikaya〉의 〈사가타바가 Sagathavagga〉, 그리고 〈비나야 Vinaya〉, 즉 율장을 비롯하여 더욱 발전된 니카야(Nikaya) 종류, 또 한역으로는 〈아함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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