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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報恩 法住寺]의 어제와 오늘

문수봉(李楨汕) 2017. 12. 18. 16:22

보은 법주사 [ ]의 어제와 오늘


 

1. 창건


553년(진흥왕 14)에 의신()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라 하였다. 그 뒤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를 위하여 인왕경회()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殿)에 배향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상환암()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2. 중창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유정()이 팔상전을 중건하였다. 1624년(인조 2)에도 벽암()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 수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쳤다.


1851년(철종 2) 영의정 권돈인()의 주선으로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1872년(고종 9)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67년 태전()이 중수하였으며,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 중수가 있었다. 그 뒤 1990년 청동미륵상을 중수하고 그 좌대 아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당우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殿)·명부전(殿)·원통보전(殿)·약사전(殿)·천왕문()·금강문()·능인전(殿)·진영각()·사리각()·염화실()·삼성각()·응향각()·진해당()·궁현당()·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① 대웅보전 보물 제 915호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이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포식() 중층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殿)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법신()인 비로자나불(), 좌측에 보신()인 노사나불(), 우측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른다.


② 팔상전 (捌相殿) -국보 제55호

팔상전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나라에 님아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목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세웠고, 776년에 병진()이 중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재건하였다.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 34층은 앞옆면 3,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에는 8폭의 팔상탱화() 앞쪽으로 나한상()을 3열로 배치하고, 중앙에는 본존불을 봉안하였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③ 능인전 (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32호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 능인전(能仁殿)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며, 건물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다면 통도사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불상이 조성되지 않아도 되며, 또한 이곳이 16나한을 모신 나한전(羅漢殿)이라면 그곳에는 비로자나불(毘盧舍羅佛)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는 16나한의 상이 모셔져 있어 현재로서는 건물 당초의 성격을 추정할 수 없다.


능인(能仁)’이라 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하며, 능히 사바세계(온갖 괴로움을 참아 견뎌야 한다는 뜻에서 감인(堪忍)세계라 말하기도 한다)의 온갖 괴로움을 참아낼 뿐 아니라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을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교화력을 갖춘 분, 곧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 건물 안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능인전(能仁殿)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전면 3, 측면 2칸의 작은 건물로 이익공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규모는 29.32이다. 건물의 뒤편에는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이 있으며 건물의 전면 담장 밖에는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가 옮겨져 있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건물의 기단석 및 기둥 등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으며, 팔상전(국보 제55), 대웅보전(보물 제915), 원통보전(보물 제916),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능인전은 사리탑의 계단을 오르는 곳에 위치한 아담한 전각으로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500나한을 안치하였다. 이 전각은 1624년에 벽암이 중창한 건물로서 건평이 16평이다

④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 91호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 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이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다.


⑤ 일주문과 금강문


일주문은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西)’이라는 현판이 있다.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건물 좌우에는 낮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중앙의 어칸은 통로로 쓰이고, 양쪽 어칸은 통로로 쓰이고 양쪽 어칸에는 1974년에 조성된  금강역사상() 2이와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⑥사천왕문(四天王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 신라 진흥왕 14(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하였다. 법주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⑦ 진영각과 사리각(舍利閣)


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서, 일명 선희궁원당()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까닭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사용하던 원당()이었기 때문이다.

내부 중앙에 개산시조() 의신과 전법초조() 태고화상()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함월()·명찰()·정준()·장신()·도홍()·홍민()·지영()·영린()·진하()·탄응()·석상()·금오()·명일()·보흔()·충은()·법영() 등 모두 24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를 적은 세존사리비()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립()을 옮겨오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⑧ 염화실(拈華室)과 응향각(凝香閣)


염화실과 응향각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에 부속된 것이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⑨ 용화보전


이 절에 있었던 유지()로는 용화보전(殿)이 있다. 이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殿)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 160t을 들여서 1989년 사월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점안()되었다.


⑨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웅보전 왼쪽 명부전 오른쪽에 있다. 내부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 일광월광보살 등을 그린 칠성탱,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그린 독성탱,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을 그린 산신탱이 있다. 이 불화들은 모두 1991년에 조성된 것이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⑪ 궁현당(窮玄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 법주사 궁현당은 원래 법주사 선당(禪堂)으로 중수(重修)된 건물이다. 현존하는 상량문에 의하면, 궁현당 선당은 숭정기원사임자년(崇禎紀元四壬子年)’ 즉 조선 철종 3(1852)에 퇴락된 기존 건물을 철거한 뒤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상량문에는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을 알 수 있다.


궁현당은 팔상전(국보 제55) 우측에 위치하며, 건물의 형태가 원래는 정면 4, 측면 4칸인 남향의 자형(字形) 건물이었으나 정면 14, 측면 3칸 구조의 동향 건물이 자 모양으로 연결된 형태인 건물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1998년도에 크게 보수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383이다. 조선고적도보 사진에서도 ()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두 건물을 자 모양으로 연결한 형태의 이 건물은 상량문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의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다


2. 문화재와 산내 암자


이 절의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비롯하여 국보 제64호인 보은 법주사 석련지(), 보물 제15호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물 제216호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상(), 보물 제848호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보물 제1259호인 법주사 괘불탱, 보물 제1417호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등이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는 제16호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을 비롯하여 제4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제70호인 보은 법주사 석조(), 제71호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제79호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미륵대불 앞에 위치하는 석조희견보살입상은 향로를 머리에 이고 굳건히 서 있는데 향불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진표나 영심 등이 대성()의 수기를 얻기 위하여 개인의 일신을 아끼지 않던 법상종 특유의 신앙형태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의미심장한 걸작이다. 즉,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하므로 머리의 뜨거움, 손의 뜨거움을 잊고 일심으로 향로를 받드는 모습이다.


또한 자정국존비는 1314년(충숙왕 1)에 세운 것이며, 절에 이르는 길가에는 세조의 어련()이 지나갈 때 길을 비켰다는 정이품송(, 천연기념물 제103호)이 있다.


현존하는 산내 암자로는 수정암()·복천암()·중사자암()·여적암()·탈골암()·상환암()·상고암(), 근래에 중건된 동암() 등이 있다.



1. ​조계종 - 제 5교구

2. 33관음성지 - 제 6호

3. 적멸보궁 있음

4. 사적 제503호​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창건년도/창건자 :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산1-1번지


문화재 :


구분

종목

명칭

구분

1

국보  제5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확인

2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확인

3

국보  제64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

확인

4

보물  제15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확인

5

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확인

6

보물  제848호

보은 법주사 신법 천문도 병풍

미확인-위치파악 못함

7

보물  제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확인

8

보물  제916호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확인

9

보물  제1259호

법주사괘불탱

별도 보관-미확인

10

보물  제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확인

11

보물  제1361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확인

12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철솥

확인

13

보물  제1416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미확인-복천암에 있음

14

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확인

15

보물  제1418호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미확인-복천암에 있음

16

보물  제1858호

보은 법주사 동종

확인못함

17

사적  제503호

보은 법주사

확인

18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

보은 순조 태실

미확인-태봉산 산봉우리에 있음

19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확인

20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확인

21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보은 법주사 석조

확인

22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확인

23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보은 법주사 자정국존비

확인-사진에 담지 못함

24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0호

보은 속리산 금강골 쌍탑

미확인-금강골에 있음

25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보은 법주사 석옹

미확인-위치 파악 못함

26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보은 법주사 능인전

확인

27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확인

28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보은 법주사 궁현당

확인-사진에 담지 못함

29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보은 법주사 가경구년명 철종

미확인-위치파악 못함

30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7호

보은 중사자암 동종

미확인-중사자암에 있음

31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보은 법주사 선조대왕 어필 병풍

미확인-위치파악 못함

32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보은 법주사 주서무일편 병풍

미확인-위치파악 못함

 




법주사 전각배치도


법주사 배치도

 


속리산 법주사 俗離山 法住寺)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번지에 있다.법주사(法住寺)가 있는 속리산(俗離山, 일명 九峯山, 光明山, 彌智山, 紫霞山 등)은 우리나라 팔경(八景)의 하나로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승지(景勝地)이다. 


사원(寺院)의 동쪽에는 속리산의 주봉(主峯)인 천황봉(天皇峯, 해발 1,058m)이 솟아있고 북쪽에는 묘봉(妙峯), 관음봉(觀音峯), 문장대(文藏臺), 비로봉(毘盧峯) 등 아름다운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하고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眞表律師)와 영심사(永深師)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하는 법주사에는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보물 제15호), 석연지(石蓮池, 국보 제64호), 석조(石槽), 기단석(基壇石) 등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이 현존하고 있다.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오리(五里) 숲 속의 계류(溪流)를 따라 한동안 올라가면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쓴 일주문(一住門)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수림(樹林) 속을 330m 정도 오르면 관음봉에서 발원(發源)한 맑은 계류가 절 동쪽을 감싸고 돌아 금강문(金剛門) 앞으로 흐른다.


이 계류의 수정교(水晶橋)를 건너면 금강문 동편에는 탈골(脫骨), 복천(福泉), 중사자암(中獅子庵)을 거쳐 문장대로 가는 등산로가 있고 서편에는 수정암(水晶庵)을 지나 여적암(汝寂庵)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중건한 사천왕문(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집)이 있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5층목조탑파(五層 木造塔婆) 건물인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 55호)이 있다.

높이가 약 22.7m(상륜부 포함)인 팔상전의 평면은 정방형으로 초층과 2층은 정?측면 5칸이며 3?4 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상륜부(相輪部)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어 매우 장엄하다.  


이 팔상전은 1968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上梁文)과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견된 탑지명(塔誌名)에 의하면 조선 인조 4년 (1626년)에 상량하고 숙종 16년(1690)에 이중창(二重唱), 경종 4년(1724년)에 삼중창(三重唱)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팔상전 내부에는 중간에 네 고주(四高柱, 일명 四天主)를 중심으로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일생을 8폭의 그림으로 나타낸 석가팔상도(釋迦八相圖, 1897년 作)가 봉안되어 있다.팔상전 동쪽에는 종각(鐘閣)이 있고 서쪽에는 보호각 속에 석연지, 사천왕석등, 공양상(供養像)이 팔상전의 동서 중심축 선상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本堂)이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의 장엄품(莊嚴品)으로 극락세계의 연지(蓮池)를 상징하여 조각한 것이라 한다. 이 석연지의 둘레는 6.65m이고 높이는 1.95m인데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위의 석연지는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이다.


높이 3.9m의 사천왕석등은 8면 화사석(畵舍石)에 네 개의 화창이 있고 화창사이의 4면에는 웅대하고 장대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향로(香爐)와 같은 물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공양상(供養廂, 喜見?薩像)은 굳건한 발과 위로 뻗고 있는 팔에서 강인한 의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천왕석등을 중심으로 동쪽(팔상전측)에 석연지, 서쪽에 공양상이 배치되어 있다. 탑(팔상전), 석연지, 석등, 공양상, 청동미륵대불(옛 용화전 터) 순으로 배치한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배치는 제공양 가운데 법공양구(法供養具)를 상징한 것으로 최고의 공양의식이다. 불교의 법공양 중 으뜸인 향(香), 등(燈), 차(茶), 공양을 한꺼번에 배치한 특이한 양식이다.


이 석조물 서편의 옛 용화전 터에는 1989년에 점안(點眼)한 높이 33m인 청동미륵대불이 팔상전을 향하여 서 있다.


팔상전 북쪽으로는 높이 3.3m의 쌍사자석등과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남북 중심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쌍사자석등을 지나서 있는 석축단 위에는 동측에 극락전(極樂殿)이 있고 서측에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다. 이 두 건물은 남북중심축을 기준으로 동?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동쪽의 극락전은 맞배집이고 관음보살을 봉안한 동쪽의 원통보전(일명 觀音殿)은 사모집으로 대비현상을 잘 보여준다.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중건한 대웅전은 2층 팔작지붕으로 1층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이며 높이가 약 19m이다. 위층에 비하여 아래층의 높이가 훨씬 낮아서 탑파(塔婆)와 비슷한 비례를 보이는 대웅전에는 법신(法身), 불신(佛身), 보신(報身)의 삼존불(三尊佛)을 봉안하고 있다.


울창한 수림속의 산중에 있는 이 사원(寺苑)의 가람배치는 특이하다. 사원의 남북 중심축선에는 남쪽으로부터 금강문, 천왕문, 팔상전(木塔), 쌍사자석등, 대웅보전을 배치한 일탑식평지가람(一塔式平地伽藍)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동측은 요사(察舍), 강원(講院), 선원(禪院)등을 배치한 생활 및 강학(講學) 공간이다. 서쪽공간은 팔상전의 동서 중심축 선상에서 동쪽으로부터 팔상전, 석연지, 석등, 공양상, 미륵불상을 배치한 미륵신앙공간이다.
이 사원(寺苑)은 남북축과 동서축이 직교(直交)하는 중앙일탑식(中央一塔式) 직교축형(直交軸型)으로 배치된 특이한 가람을 볼 수 있다

 




법주사의 옛 모습 조선고적도보






  법주사전경(法住寺全景) - 조선고적도보​


법주사찰간지주(法住寺刹竿支柱) - 조선고적도보​


법주사석련지(法住寺石蓮池) - 조선고적도보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치를 지니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 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의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깍아서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아랫부분에 11cm의 구멍이 있어 실제로 물을 담아두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모퉁이 부분 일부의 손상 흔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법주사석련지구난(法住寺石蓮池勾欄)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희귀한 석조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신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법주사석조(法住寺石造)-조선고적도보



법주사마애양각미륵보살상(法住寺磨崖陽刻彌勒菩薩像)-조선고적도보



법주사세존사리장탑(法住寺世尊舍利藏塔)-조선고적도보



​법주사철부(法住寺鐵釜) - 조선고적도보



법주사천왕문정면(法住寺天王門正面)-조선고적도보



법주사천왕문외부두공 및 헌(法住寺天王門外部斗공 및 軒)-조선고적도보



법주사팔상전전면(法住寺捌相殿前面)-조선고적도보



법주사팔상전배면(法住寺捌相殿背面)-조선고적도보



법주사팔상전상부(法住寺捌相殿上部)-조선고적도보



법주사팔상전외부두공 및 헌(法住寺捌相殿外部斗공 및 軒)-조선고적도보



법주사팔상전동석등(法住寺捌相殿東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쌍사석등(法住寺雙獅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쌍사석등(法住寺雙獅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쌍사석등(法住寺雙獅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염화실전석등(法住寺拈華室前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조선고적도보



 법주사사천왕석등조각(法住寺四天王石燈彫刻)-조선고적도보



법주사대웅전전면(法住寺大雄殿前面)-조선고적도보



법주사대웅전외부두공 및 헌(法住寺大雄殿外部斗? 및 軒)-조선고적도보​




법주사대웅전내부두공(法住寺大雄殿內部斗?)-조선고적도보



법주사대웅전내부(法住寺大雄殿內部)-조선고적도보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조선고적도보



. 법주사자정국존비탁본(法住寺慈淨國尊碑拓本)-조선고적도보


법주사석옹(法住寺石瓮)-조선고적도보



법주사 팔상전 복원 준공식 1969. 10. 8.


법주사 미륵불상 김복진, 시멘트, 높이 33m.


1940년. 김복진이 조영하다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제자들이 완성한 당시의 시멘트제 법주사 미륵불상.

1963년 보수 후의 시멘트제 미륵불상.


법주사(法住寺) 오늘의 모습



법주사의 일주문 

 

 

'호서제일가람' 법주사의 일주문

  



 

옆에는 '법주사'의 '부도군'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 비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67호)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67호)

 

이 비는 1666년(현종 7년)에 세운 것으로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3cm, 너비 65cm이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이다.


비문의 내요은 속리산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있는데 내용은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데 세숫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쳤다.

이상히 여긴 태종이 유명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도사가 대답하되 동국(한국) 명산에 큰 거북이의 형상이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많은 당나라 재물을 동국으로 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거북모습의 물형을 없애라 하였다. 사람을 파견하여 곳곳을 찾다가 마침내 속리산 수정봉에 있는 돌거북을 발견하고 그 목을 자르고 돌거북 등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 5월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성군이 썼다.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cm, 폭 110cm, 두께 35cm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 후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출처-법주사 안내문]



'금강문'



'금강문'

사찰 진입로의 금강문은 1970년대에 재건된 것들이다. 형식은 이전의 것들과 같다 하더라도 목조 기술의 퇴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다. 


 


'금강문' 내부


 

'금강문' 내부

 

 

왼쪽방향으로'당간지주', '석연지', '적멸보궁-세존사리탑', '마애여래', '수정암'이 위치해 있어요

 

 

보은 법주사 당간지주


 철당간과 당간 지주


​당간이란 찰 또는 찰주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을 사찰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누는 고려 목종 7년(1006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는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년) 국가 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으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 이곳 철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출처-법주사 안내문]

 


법주사괘불탱 (法住寺掛佛幀) 보물 제 1259호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쓰이는 대형불화를 말하며, 이 불화는 보살 형태의 단독상을 화면 전체에 꽉 차게 그려 넣은 것이다. 

보살상은 양 손으로 꽃가지를 받치고 서 있는 모습으로 상체를 크게 묘사한 반면 하체는 짧게 나타냈다. 머리에는 산(山) 모양의 화려한 장식이 달린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싼 옷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광배(光背)는 머리 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여 큼직하게 그렸다.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 구름무늬 등을 그려 공간을 채우고 있는데 옷의 화려한 무늬들과 어우러져 부처님 세계의 정경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광배 위쪽으로는 구름이 감싸고 있고 화면의 가장 윗부분은 흰 광선이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걸쳐져 있다.

전체적인 비례가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묵중하고 중후한 느낌을 보여주며 다양한 문양과 장식, 밝고 선명한 원색과 중간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참여한 많은 인물들과 함께 법주사 창건 배경과 당시의 불교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 64호)



 

보은 법주사 석련지(法住寺 石蓮池 국보 제 64호)


 법주사 천왕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극락세계를 뜻하여 사찰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석련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는데, 현재는 균열되어 철제 꺾쇠로 연결해 놓았다.

입구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 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는데,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화려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법주사 안내문]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절제된 화려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련지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하다.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95m, 둘레 6.65m에 이르는  커다란 반구형의 돌을 깎아 연못을 만들어 올려 놓은 이 석연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작품이며 석조물 전체에 꽃, 구름, 난초, 덩굴 등의 무늬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희귀한 석조조형물이다.


8각의 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 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신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련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둥둥 뜬 듯한 모습을 표현한 걸작품이다. 전체적인 조형 수법은 기발한 착상에 의한 것이며 특히 동자주(난간의 짧은 기둥)의 형태는 불국사 다보탑의 석난간 동자주와 유사하다.



보은 법주사 석조(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0호)

석조는 높이 1.3m, 길이 4.46m, 너비 2.4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 성덕왕(聖德王) 1(720)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의 일반형인 장방형 석조로서 능인전(能仁殿)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바닥부터 윗부분에 이르기 까지 수직의 벽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의 벽체에는 아무런 무의 장식이 없이 단조로운 형태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는 모를 깍아서 모각이 없게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내고 있다.

벽체의 두께고 다르게 하여 긴쪽은 23cm 짧은 쪽은 34Cm 두께를 조정하여 수리적인 비레와 균형을 읾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리고 저면 남벽에는 너비 11cm의 원공(圓孔)이 시설되어 실제 용구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모서리 일각에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완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법주사에 3,000승도가 살았을 당시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법주사에 있는 목조건물은 1624(인조 2)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중창한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것이지만, 이 석조는 신라 성덕왕 때 중수 당시 조성된 것이다.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법주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가 새롭게 고쳐 지었으며 그 뒤로 진표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법주사 경내에 있는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불상의 머리는 바위에 새긴 것들에서는 보기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촘촘하게 새겼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기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반듯하면서 넓은데 비해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면을 보여준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다.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이다. [츨처-문화재청]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되는 마애상

 


수정암 가는길에 있는 '부도군'


 

수정암 가는길에 있는 '부도군'




 


능인전  현판이 걸려 있을 때 모습


1624년에 중창된 건물로 뒤쪽에 세존의 사리탑이 있어 원래는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의 역할을 한 건물이지만 현재는 불상과 16제자상을 봉안해 영산전 또는 나한전의 기능을 갖는다. 



보은 법주사 능인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현재는 '적멸보궁'으로 승격시켜 놓았어요 (기존 적멸보궁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음)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신 곳으로 능인이란 부처님을 가리키는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널리 이로움을 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 졌다.


이 곳에서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또 좌우로는 각각 8구씩 도합 16나한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목조와가 이며 건평은 약 8.9평이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과 비

이 사리탑은 1362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중 법주사에 행차하여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1기를 옮겨와 봉납하기 위해 세원진 사리탑이라 전한다. 이 탑은 8각을 기본 형태로 하여 상, 중, 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기단부와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 그리고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간략한 상륜부로 구성된 팔각원당형의 사리탑으로 높이는 3.5m에 이르고 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공민왕 11(1362)에 만든 것으로 전한다


이러한 형식의 사리탑은 고려말기 ~ 조선초기 승탑에서 유행한 형식으로 탑신의 몸체가 공 모양으로 바뀌고 지붕은 처마 끝이 둔중해지며 지붕 위로 경사도 날로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이러한 특증은 조선시대 사리탑에서 더욱 두르려 진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장탑((法住寺世尊舍利藏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보은 법주사 철솥 (法住寺 鐵鑊-鐵釜) - 보물  제1413호


보물 제1413.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보은 법주사 철솥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보은 법주사 철솥 (法住寺鐵釜) - 보물  제1413호


 

보은 법주사 철솥 (法住寺鐵釜) - 보물  제1413호

금강문 가까이 보호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는 조사가 뒤편의 석옹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3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첱솥은 법주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의 두께 10cm에 무게는 20톤에 달한다. 큰 사발형상을 하고 있는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법주사에 전하여 오는 말로는 법주사가 한창 번성하여 3,000 승도가 운집하여 있을 때 장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연대, 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주철로 주조된 해영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이 건물은 절을 지키는 사청왕상을 모시고 있는 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웠으며, 혜공왕 12년(776)에 중창하고, 조선 인조 2년(1624)과 고종 34년(1897), 197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 이 때에 사천왕상도 다시 고쳤다.


사천왕은 사방을 지켜주며, 국가를 수호하는 네신디다. 수미산 사천왕전에 머무는데. 동방의 지국천왕, 남방의 증장천왕, 서방의 광목천왕, 북방의 다문천왕을 말한다.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면서 불법을 믿고자 하는 중생을 수호한다고 한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가운데칸만 넓고 양옆칸은 모두 좁고 높아 전체적으로 전면 3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교묘한 칸살이는 일반성을 유지하되 특수한 의도를 달성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결과이다. 가운데 3칸에는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두 끝칸에는 작은 판창을 달았다. 이것은 현재와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는 증거가 되지만 구체적으로 예전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사천왕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사천왕상  천왕문 안에 양쪽으로 2구씩 자리하고 있다. 첫번째는 지국천왕.
 


사천왕상  천왕문 안에 양쪽으로 2구씩 자리하고 있다. 세번째는 증장천왕,

사천왕상  천왕문 안에 양쪽으로 2구씩 자리하고 있다. 두번째는 광목천왕,


사천왕상  천왕문 안에 양쪽으로 2구씩 자리하고 있다. 네번째는 다문천왕 

보은 법주사 사천왕문 사천왕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사천왕문'을 지나 동영상 촬영~​


 


팔상전 입면도




팔상전 1층 평면도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 34층은 앞옆면 3,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팔상전 내부의 불상과 불화 

5층탑 내부 중심칸 사방에 벽을 치고 한 면에 2장씩의 팔상도를 걸었다. 각면 불단에는 중심불과 오백나한상들을 배열하였다. 석가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를 모시는 팔상전의 공간에 영산전 혹은 나한전의 기능까지 혼합한 것이다. 


팔상전 내부 공간 




팔상전 내부 공간 


목탑의 장점은 내부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3층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트여 중심칸 주위를 순회할 수 있는 내부를 가진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청동 미륵 대불'


'청동 미륵 대불'



'청동 미륵 대불'



'청동 미륵 대불'


'청동미륵대불' 조성 기념비와 탑


 

'팔상전동석등'

 

'법종각'


'법종'  


 '종무소'


 

'한국삼십삼관음성지'-제 6호 법주사 인증패 


 


 

팔상전과 쌍사자 석등


쌍사자 석등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法住寺 雙獅子石燈 : 국보  제5호)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석등이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으며 ​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기며, 현재 남아있는 사자조각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통일신라 성덕왕 19(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통일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약사전'과 '염화실전석등'



'약사전' 내부



'약사전' 내부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내부에는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 1361호)이 있다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이래 776년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도 2년(1624년)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다. 이 후 수차례에 중수를 거쳤으며 2010년 전체를 해체 보수하였다.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주존불로 모시고 있는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건물 안에는 높이 3m의 보물 제 1361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이다. 지붕은 중아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인데 흔치않은 양식으로 불국사의 비로전과 법주사 원통보전 만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법주사 안내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전경


기단의 석조 수법으로 보아 팔상전과 같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1624년 벽암 선사 때 중건되었다. 정면 3칸 8.63미터, 측면 3칸 8.2미터 규모로 거의 정시각형에 가까우며 지붕의 형태는 사모지붕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돌로 만든 절병통을 올려 놓았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원통보전의 현판


원통보전 목조 관세음보살 좌상 보물 제 1361호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腹甲)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중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2,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원통보전의 포작 

 

기둥 위에 수평으로 얹은 평방이 있으면서도 기둥 위에만 포작을 쌓아 올린 주심포 형식이다. 포작은 내외 3출목의 규모이며 지붕은 홑서까래만 배열된 간략한 형식이다.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측면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

보살상은 전체높이 213c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 뒷편의 석조부재들

 

'사천왕석등'과 '대웅보전'

법주사 대웅보전은 옛 기록에는 대웅대광명전으로 남아 있는 전면 7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이다. 2층 건물을 이루기 위해 내부에 2열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한 구성이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 15호)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 재위) 대에 진표유라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이 3.9m에 이르는 대형 석등으로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석등이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 시기는 신라 불교미술이 꽃피워진 8세기 중기 이후로 짐작된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내부에는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1360호)가 봉안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 건립하여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고쳐지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버린 후 인조 2년(1624)에 벽암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적이 402.80m2, 높이가 약 19m에 이르는 대규모 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3개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이 건물과 같은 수법의 건물로 금산사 미륵전이 있다.


​내부에는 높이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보물 1360호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출처-법주사 안내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의 포작


대웅보전은 기둥 사이에도 포작이 있는 다포계 건물로 아래층은 2출목, 위층은 3출목의 서로 다른 포작을 갖는다. 포작의 모양도 위층은 곡선형, 아래층은 직선형이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 측면


대웅보전 소조 비로자나 삼존불 좌상  보물 제 1360호

법주사의 본당인 대웅전에 모셔진 이 3구의 거대한 불상은 흙으로 빚어 낸 작품으로 앉아 있는 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준다.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이다.


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손 모양과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옷 차림법이 마치 판에 박은 듯한 양식 특징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동안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한 이 불상은, 조형성이 탄탄하여 임진왜란 후의 새로운 조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緣起文)에 의하면, 조선 인조 4(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조선 영조 23(1747)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초반의 불상연구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사천왕탱화(좌측)                                     노사나불 후불탱화 

비로자나불 후불탱화
 


석가모니불 후불탱화                                  사천왕탱화(우측)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후불도 (報恩 法住寺 大雄寶殿 後佛圖)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이 탱화는 법주사 대웅보전 소조삼불좌상(보물제1360호) 후불정화로 모시고 있는 그림이다. 명문에 의하면 錦湖堂 若效가 제작한 것으로 제작연대는 1897년 전후인 것으로 추측된다.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후면에 각 1점씩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사천왕탱화 2폭이 분리되어 걸려 있으며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기록이 남아있다.

법주사 대웅보전의 높은 불단 위에 봉안된 소조삼존불좌상의 후면 벽에 걸려 있는 5폭의 후불탱화이다. 본존인 비로자나불도, 좌우협시인 아미타불도 2폭, 그리고 삼존불상 좌우 양쪽에 사천왕도 2폭 등 모두 5폭으로 상태가 양호하다.

? 法住寺 大雄寶殿 後佛圖 가운데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1897년에 그려진 향우측의〈阿彌陀佛圖〉와 〈四天王圖〉중 東方天王과 南方天王이다. 이 불화를 그린 이는 奉化인데, 錦湖堂 若效가 같은 해 법주사에 그려 봉안한 〈八相圖〉의 각 장면에 등장하는 如來尊像과 기본형이 일치하며, 특히 陰影法과 渲染法을 병용한 서운의 채색 표현방식이 동일하다.

? 1917년에 그려진 불화는〈毘盧遮那佛圖〉이다. 이 불화는 錦湖堂 若效의 제자인 普應堂 文性을 비롯하여 永星夢華·蓮庵敬仁·孝庵在讚·佛尊 梵華竺林이 그린 것으로 불·보살 각 존상 안면의 양감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음영법, 어색한 그림자 표현 등에 文性 및 그 문도들의 화법이 잘 반영되어 있다.

? 1925년에 그려진 불화는 향좌측〈阿彌陀佛圖〉와〈四天王圖〉중 西方天王과 北方天王이다. 이 두 폭은 강원도에서 화업을 시작하여 경기일대를 비롯, 전국을 돌며 불화를 그린 개성이 강한 화사 古山堂 竺演의 작품이다.〈四天王圖〉와〈阿彌陀佛圖〉상단 권속들의 안면이 용주사와 전등사〈神衆圖〉를 비롯하여 古山堂 竺演의 여타불화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음영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불화는 2006년 보수하면서 특히 푸른 청색을 많이 쓰고 가칠하여서 원래의 고풍스러운 맛이 많이 없어져 보인다.

法住寺 大雄寶殿 後佛圖 일괄은 각각 제작시기가 다른데다가 근대화사로서 명성을 알렸으며, 최근 근대불교회화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세 화사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근대 불화계의 일부 畵師들에게 크게 선호되었던 서양화법 수용과 그에 따른 표현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재료는 면포이다.

조성연대 및 화사는 다음과 같다.
? 비로자나불도〈中央〉: 大正6년(1917년), 普應堂 文性
? 아미타불도〈向左〉 : 佛紀2952년(1928년), 古山 竺演
? 아미타불도〈向右〉 : 建陽2년(1897년), 奉化
? 사천왕도 〈向左〉 : 佛紀2952년(1928년), 古山 竺演

? 사천왕도 〈向右〉 : 建陽2년(1897년), 奉化

法住寺 大雄寶殿 後佛圖 및 법주사 경내 전각들의 後佛圖가 錦湖堂 若效와 그 門徒들에 의해 제작된 사실은 이미 불화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근대에 해당하지만 제작화사들의 높은 인지도와 문화재·학술연구대상으로서의 가치 또한 격상하고 있다.


법주사 동종(法住寺 銅鍾) 보물 제1858.

법주사 동종은 1636년에 조성된 종으로 단룡과 음통을 갖춘 용뉴, 종견과 종구의 상대와 하대, 상대 아래 연곽을 사방에 두고 9개씩의 연뢰를 배치한 전형적인 한국 전통양식을 따른 범종이다.


특히 상대 위로 높이 솟아 오른 입상화문대의 각 연판마다 불화상이 표현되어 매우 이례적인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특징은 유사한 시기에 만들어진 남원 대복사 동종(1635)에서도 확인된다. 상대에는 뇌문과 하대에는 연화당초문을 유려하게 시문하였고 연곽과 연곽 사이의 종신 상부에는 연꽃을 지물로 든 보살입상을 번갈아 가며 4구 배치하였다. 종신 중단에 둘러진 두 줄의 횡선을 둘렀고 연곽 아래쪽에는 위패형 장식을 첨가하였다.


보은 법주사 동종은 17세기 전반 승장계 종들인 죽창정우신원원응 작 삼막사 동종, 정우신원작 영원사 동종과 무량사 동종, 정우신원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쌍계사 동종과 같은 계열의 종으로서 조선후기 범종양식 뿐 아니라 17세기 승장계 범종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법주사 가경구년명 철종(法住寺 嘉慶九年銘 鐵鍾)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 법주사 범종은 조선 순조 4(1804) 7월에 대시주 1명과 15명의 일반시주자의 시주를 받아 4천근의 동으로 제작된 청동종이다. 종신(鐘身) 하단에는 嘉慶九年甲子七月日大法住寺大鐘重四千斤이라는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고, 시주자와 당시의 주지(住持), 만든 이 등이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조선 후기의 종이다.


크기는 높이 212.5cm, 종신부 상단 지름 82cm, 종신부 하단 지름 140 cm인 대형 철종이다. 종신의 전체 선은 둔중한 편으로 양각의 횡선이 3줄 둘러져 종신을 크게 구획하고 있고 용뉴()가 쌍룡으로 된 것이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에는 연판무늬와 당초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상단에는 범자문양과 비천상이 중단에는 유곽과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종신(鐘身) 아랫단에는『중수(重修)주지(住持)진하(震河)도감(都監)동수(東秀)감사(監事)봉협(奉協)야장(冶匠)임화순(林化順)무입화후이팔육오병진팔월일(无入火后二八六五丙辰八月日)성수천추(聖壽千秋)국기만세(國紀萬歲), 가경구년갑자칠월일대법주사대종중사천근(嘉慶九年甲子七月日大法住寺大鐘重四千斤)』이라는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통해 조선 후기에 제작된 종(鐘)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당시 시주자와 주지(住持), 제작자 등 다양한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종은 2004년 충북 유형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

조선시대의 범종으로 종신의 문양이 약하게 표현되는 등 주조기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나 특히 명문(銘文)이 있어 시주자, 당시의 주지, 제작자, 제작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사찰명이 새겨져 있는 등 보존가치가 높다.



법주사 석옹(法住寺 石瓮)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 법주사에 있는 돌항아리 형태의 석조물.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법주사 3천여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말로는 법주사 경내에 석옹이 하나 더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원래 법주사 주방 근처에 있었는데 현재는 경내 총지선원(摠持禪院) 왼쪽 40m 정도 떨어진 곳에 묻혀 있으며, 20001222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깊이 225, 윗부분의 바깥지름 180, 안쪽지름 85정도이다. 석옹은 몸체를 중심으로 상하 항아리 모양의 돌을 3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두 개의 돌을 항아리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고, 가운데 몸체 부분은 3040크기의 돌을 둥그스름하게 가공하여 45장을 둥글게 이은 것이다.


일부 깨진 부분이 있으며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땅 속에 묻힌 석옹 주위에는 건물의 주춧돌과 지대석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석재(石材)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원래는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형태의 돌항아리는 다른 지방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저장시설이다. 이러한 희귀한 사찰 유물을 통하여 큰 규모의 사찰에서 생활하는 승려들의 소소한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대웅보전 왼편의'​진영각'

최근에 지은 건물로 건축적인 품격은 논할 바 못 되나 역대 조사와 강사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진영각 내부에 봉안된 조사 영탱


시방 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있고 없다는 것이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한데 /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

 (透出十方昇 無無無亦無 個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

덕숭산맥 아래 / 무늬없는 인을 지금 전하노라 /

보월은 계수나무 아래 내리고 /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나네.

 (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명부전'과 '삼성각'

대웅보전 동쪽에 청동 미륵불 불사와 함께 조성된 전각군이다. 



'명부전'



 '명부전' 내부


'삼성각'


 

'삼성각' 내부

 

'삼성각'에서 바라본 사찰전경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원당이란 특정 개인의 사당과 같은 성격의 건물로 조선 영조 41년(1765)에 후궁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의 전면 우측에 위치한 이 건물은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65년경 조선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희궁 원당으로 조영되었다고 한다.

그 뒤 법주사와 관련이 있는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비워진 상태이다. 법주사에서는 () 조사각(祖師閣)’으로 불리고 있다.


조사각으로 사용할 때에는 중앙 좌우로 개산시조(開山始祖) 의신선사(義信禪師)와 전법초조(傳法初祖) 태고선사(太古禪師)의 영상(影像)이 있었고 좌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분의 영정(影幀)을 비롯해 세홍(世弘)함월(函月)명찰(明察)정준(靜俊)장신(莊信)도홍(道弘)홍민(弘玟)지영(智榮)영인(玲璘)진하(震河)탄응(坦應)석상(石霜)금오(金烏)명일(冥一)보흔(普欣)충은(衝恩)법영(法英) 등 모두 스물 한 분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모셔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면 3, 측면 3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경내의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사당이나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유교적 건축형식이다. 기단과 사각초석은 규격화되어 있고 정다듬으로 마감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42.99이다. 건물 내부 앞부분에는 한 쌍의 사각기둥이 있으며, 익공형식과 주심포형식이 혼용된 이른바 주심포식구조이고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사당 건축의 외형을 지녔다. 영쌍창 형식의 창문을 두었으며, 전면 담장은 와편과 둥근 돌들을 이용해 여러 가지 길상무늬와 별무늬를 장식화 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민화풍의 담장 장식이 잘 보존된 예이다.

이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찰 내의 유교적 건축물로 한때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위패를 모셨던 건축물을 법주사와 관련이 있는 역대 큰 스님들의 초상을 모셔 두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건물로 비교적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복천암

복천암 수암 화상탑(法住寺 福泉庵 秀庵和尙塔) 보물 제1416.

법주사 복천암 동쪽 약 200m 지점에 구축된 평평한 대지에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데 옥개석은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에 비하여 간략한 편이나 세부 수법은 두 탑이 비슷하다.

 

이 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秀庵和尙塔이라 하였고, 중대석에 成化十六年 八月日立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탑의 주인공과 조성년대를 알게 하는 점이다. 즉 성종 11(1480)에 조성되었으며, 수암화상은 복천암과 관계된 조선초기의 고승으로 짐작된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은 고려시대 팔각원당형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탑으로서 조형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주인공의 존명과 조성 연대를 탑에 직접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탑의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복천암 학조 등곡 화상탑 (法住寺 福泉庵 學祖和尙塔) 보물 제1418.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법주사 복천암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탑이다. 이 탑은 주인공의 존명과 건립년대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탑의 형태는 팔각원당형의 고려 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탑신이 구형(球形)인 점이 크게 다르다.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正德九年 甲戌五月 日立그리고 學祖燈谷 和尙塔이란 명문이 있어 조선 중종9(1514)의 건립임을 알게 한다.

학조화상은 성종 19(1488)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건립 연대와 주인공의 존명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탑은 탑비가 부족하여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희귀하나 이 탑은 고려 탑을 계승한 조선 초기 탑양식을 알게 함과 동시에 다른 탑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법주사 자정국존비(法住寺 慈淨國尊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9.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이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다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다.




벽암 대사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

법주사의 절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벽암대사의 행적을 적고 있다. 벽암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이며, 벽암은 그의 호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는 8도도총섭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키었다. 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승려 수천 명을 모집하여, 호남의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버리므로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인조 24(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들어가 지내다가, 현종 1(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는 널찍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이 얹은 모습이다. 조선 현종 5(1664)에 세운 것으로,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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