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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심장 서울이 목격해 온 大事件의현장Ⅴ[대한제국]

문수봉(李楨汕) 2017. 12. 9. 13:44

민족사의 심장 서울이 목격해 온 大事件의현장Ⅴ[대한제국] 사적.유적 / 고적사적지

2017. 9. 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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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의 심장 서울이 목격해 온 大事件의현장[대한제국]

-우리곁에 살아 있는 역사의 맥박과 숨결

서울에는 만만한 땅이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도 거기에는 2000년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다. 더욱이 4大門 안 곳곳에는 온갖 사건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일대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다.
원래 서울은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도시다. 서울의 역사현장을 따라가다 보면 토박이가 아닌 사람도 어느덧 진짜 서울사람이 되어 서울을 사랑하게 된다.
    
  俄館播遷과 대한제국


정동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강북 삼성병원 쪽으로 600m쯤 올라가다 예원학교를 끼고 오른편의 경사로를 접어들면 정동공원 언덕에 홀로 선 하얀 탑이 보인다. 바로 구 러시아공사관의 유적이다. 사적 제 253호인 구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고종 27년(1890년)에 건축된 벽돌조 르네상스풍의 건물로서 러시아인 사바찐이 설계했다. 을미사변 때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옮겨와서 잠시 피신했던 ‘아관파천’의 장소이기도 하며, 한국전쟁으로 파괴돼 탑만 남아 있던 부분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20여 년 전 개항 이후 조선과 국교를 맺은 나라들은 정동 안쪽이나, 정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자국의 외교관을 잇달아 개설함으로써 정동일대는 그야말로 각국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 러시아공사관이 경운궁(덕수궁) 후원인 상림원 터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하였고 규모 또한 가장 컸다.

구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자국의 양식으로 지은 최초의 공관건물이자 국내 몇 안되는 개항기 양식 벽돌조 건물로 역사적, 건축사적 의미가 매우 높은 건물이지만 신빙성 있는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고, 주변 개발로 인해 유구 또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원 모습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작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전시회를 계기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문서(배치도)가 발견되었고, 설계자 사바찐과 공사관 건물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발표됨으로써 구러시아공사관의 원 모습은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공사관은 언덕의 제일 높은 지점에 본관을 남향으로 배치하고, 남쪽 아래로 140m 떨어진 공관로(정동길)와 만나는 지점에 개선문 형태의 벽돌조 정문을 두었으며, 주위는 모두 한식 담장이 둘러져 있었다. 담장 안에는 본관 외에 한옥이 몇 채 있었으며, 본관 동북쪽 후면에는 3개의 부속 건물(호위대 막사)이 배치되었고, 그 뒤편 작은 동산 바로 아래는 북쪽 새문안길을 향해 포대벙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화강석 줄기초와 지하통로 유구가 뚜렷한 부속동은 당시 100명이 넘는 군인(러시아 해군수병)이 상주하였던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준다.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가 정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면에 출입문이 나 있다. 전체 평면은 중앙부, 동·서 날개부 등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부는 현관, 로비와 공사관의 사무공간, 좌측(서측) 날개부는 공사의 사생활 영역, 동측 날개부는 서재와 연회실, 그리고 연회실에 부속된 창고로 구성되었으며 그 북동쪽 코너에 3층의 탑이 붙어있었고 현재 이것만이 남아있다.


동남측 경계의 돌담길에서 본 구 러시아 공사관 전경
[Angus Hamilton,Coree">(1905)에 수록]


구 러시아공사관 평면 추정도


 구 러시아공사관 내의 고종 침실 

아관파천 시 고종과 세자가 1년 동안 머물렀던 방은 좌측날개부의 남쪽 방으로 추정된다. 유일한 내부사진을 보면, 한쪽 벽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용상 침대(double bed)가 놓여 있고 그 맞은편에 세자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침대(single bed)가 있으며, 침대 우측에 레이스로 장식된 출입문과 그 옆에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고 벽은 화려한 문양의 벽지로 마감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종의 침실에 붙은 북쪽 방은 상궁과 엄비가 기거하였고, 밑 심부름 하는 궁녀들은 로비와 복도의 칸을 막고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날개부의 연회실은 병풍을 쳐 각 부 대신들의 집무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고종은 오로지 신변안전을 위한 목적에서 아관파천을 선택한 것일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곧바로 친일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을 내리고, 경운궁 수리를 명하는 등 이후의 근대국가건설을 위한 구상과 준비 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성과가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로 이어진 것이다. 최근 대한제국의 재평가가 운위되면서 아관파천이 아니라 아관 망명이고 갑오개혁이 아니라 갑오왜란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구 러시아공사관터의 현재 모습
1896년 경의 러시아공사관 주변


1896년 당시 비밀통로-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진 돌담길과 작은 문의 모습.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1년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을 비밀리에 오갈 때 이용하던 돌담길과 문이 보인다. 이돈수 명지대 교수가 미국 주간지 ‘하퍼스 위클리’ 1897년 7월 24일자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해 2007년 공개했다. 사진작가 윌리엄 헨리 잭슨(1843〜1942)이 한국을 방문했던 1896년 찍은 것으로 ‘러시아공사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덕수궁과 러시아 공사관의 비밀통로 입구 현재 모습


비밀통로와 비밀통로에서 본 구 러시아 공사관

을미사변으로 국민의 對日감정이 극도로 악화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종은 강원도 原州(원주)와 충청도 洪城(홍성)에서 봉기한 의병들을 은근히 지원했다.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水兵 100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親露派(친로파) 李範晉(이범진:포도대장 李景夏의 아들) 등은 웨베르와 공모하여 1896년에 국왕을 궁궐로부터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모셨다. 이것이 俄館播遷(아관파천)이다.
 
  이때 친일내각의 총리 金弘集(김홍집) 등은 육조거리에서 난민들에게 돌멩이를 맞아 살해되고, 내부대신 兪吉濬(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어 李範晉(이범진)·李完用(이완용)의 친로내각이 조직되었다.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던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다.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다름없었다.

경무청에서 순검의 난도질로 숨지고, 시신은 육조거리에서 난민들에게
돌멩이를 맞아 참혹하게 죽은  친일내각의 총리 金弘集(김홍집)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자마자 돌연 표변하여 어제까지 자신을 보좌했던 제4차 김홍집 내각의 요인들을 열거하고 그들을 일일이 호명한 다음 이들을 역적으로 몰아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홍집은 총리대신을 네 차례나 맡았다. 그가 원해서 맡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수차례 고종에게 사의를 표명했으나 고종의 만류로 총리직을 떠나지 못했다. 특히 을미사변 후 그는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다가 용케 유길준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도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은 눈물로써 간청하여 어쩔 수 없이 4차 내각의 총리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 김홍집을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아세운 고종이었다.

김홍집은 매우 유능한 관리였다. 김홍집은 별명이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고 소문 날 정도로 매사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한 총리였다. 그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의 학식과 인품에 감탄한 일본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도 그를 총리대신에 발탁하라고 일본 정부 요인들에게 적극 천거했을 정도였다. 그는 초대 총리로서 많은 개혁을 이뤄냈다. 그는 아관파천으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렸다. 


다음은 황헌의 <매천야록>에 적힌 김홍집의 최후에 대한 기록이다.

1896년 2월 11일(음력 1895년 12월 27일) 임금(고종)이 경복궁을 나갔다. 이범진과 이윤용 등이 임금을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김홍집과 정병하를 잡아 죽였지만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달아났다.
임금은 처음부터 헌정에 묶인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더불어 아라사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 하였다. 아라사인들도 우리나라에 기반을 닦으려고 엿보다가 왜국에 선수를 빼앗기자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8월(을미사변) 이후 이범진 등이 아라사 공사관에 숨어들어 많은 뇌물을 주고 말했다. “만약 정국을 뒤엎는데 원조한다면 마땅히 온 나라가 왜국을 섬기듯 아라사의 명령을 듣겠다.” 아라사 공사가 매우 기뻐하며 그 청을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니, 인천에서 잇달아 입성했다. (……)
임금이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홍집 등의 목을 베게 했다. 이때 김홍집 등은 직방(直房)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달아나라고 권하자 탄식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를 본받아 역적이라는 이름을 얻겠는가!”
이에 그는 정병하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병하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외쳤다.
“대신인 우리를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뒤에 죽게 해 주시오”
그러자 김홍집이 돌아보며 말했다.
“어찌 말이 많은가. 나는 마땅히 죽겠네.”


김홍집 일행은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순검들에 둘러싸였다. 이때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일본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연했다.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밖에 없다.”


길을 헤치며 나서는 그를 일본 군인들이 가로막고 계속 피신을 권하자 그는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도다.”라고 호령했다. 이 말은 조선은 물론 일본인들의 가슴도 울렸던 만고의 명언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라는 어명에 살기를 띤 백성들 앞으로 나아간다.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보부상들이었다.


김홍집은 경무청 앞으로 끌려와 경관들의 칼에 난도질당해 숨졌다. 그의 시신은 ‘대역무도 김홍집’이라는 장지가 붙여지고 새끼줄로 다리를 묶여져 종로로 끌려와 보부상들의 돌팔매와 발길질로 시신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1910년 충헌(忠獻)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경향신문사 뒤 언덕에
 



러시아 공사관 1890년 완공과 정동 일대 ,1901,<The Burton Holmes Lectures>,1901.


러시아공사관의 아관파천 당시 모습



구 러시아 공사관 터의 현재 모습

 

 지금의 경향신문사 사옥 뒤쪽 언덕에 위치한 러시아공사관은 이후에도 러시아 남하정책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볼셰비키혁명 뒤에는 소련의 영사관으로 재차 개설되어 공산주의 선전본부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한동안 존속하다가 철수했는데, 6·25 사변 때 건물이 파괴되고 말았다.

 


대한제국 외교의 중심지였던 손탁호텔 전경




손탁호텔 전경 1903. 





주한 외교관들과 환담하고 있는 손탁 여사.







손탁호텔의 엣 모습





 


손탁호텔 내부



손탁호텔에서 본 서울풍경 1930년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앞에 손탁호텔 터 표자석이 보인다



웨베르가 활약하던 시기에 경성 사교계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손탁호텔이었다. 손탁은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처제였다. 손탁호텔은 러시아공사관 입구인 지금의 정동 이화여고 옆에 있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慶運宮(경운궁)과 慶熙宮(경희궁)를 잇는 虹橋(홍교)를 건설하였다.

1902년 완공,1908년경 철거,로쎄티,꼬레아 에 꼬레아니(1904)



홍교(虹橋)의 위치

우선 현재의 서대문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의 모습이다.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를 사이에 두고 돈의문이 서 있고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가 있다. 그리고 정동길을 따라 가다 예원학교 옆길로 들어서면 오르막길 윗편에 정동공원과 러시아공사관터가 자리한다. 그 일대의 지형은 주변에서 비교적 높은 곳이고 러시아공사관은 경운궁을 감시하듯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慶運宮(경운궁)과 慶熙宮(경희궁) 사이를 잇는 虹橋(홍교)를 건설하여 두 궁을 연결하고 경성역을 남대문에서 홍교 아래로 옮겨놓았다. 1889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가 개통된 이후에는 虹橋 아래로 전차가 왕래했다. 이 거대한 石造(석조) 육교는 폴란드系 러시아인의 설계로 우리나라 서양건축의 鼻祖(비조)라 할 수 있는 沈宜碩(심의석)이 시공했다.

  
  심의석은 원래 목수로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배재학당을 지을 때 서양건축 기술을 배웠다. 그는 이어 독립문·석조전·원구단 등의 건설에도 참여했다. 홍교는 韓日(한일)합병 후 서대문로를 확장하면서 헐렸다.


심의석이 참여한 대한제국기의 건축물








 

배재학당                                                                원구단과 황궁우​

   

정동교회                                                         독립문



















덕수궁 석조전


 

광화문 네거리의 고종 즉위 기념 비각근대 건축의 비조인 심의석이 참여한 근대건축 물


 심의석 (沈宜碩,1854 -1924.7.21)

 본관은 청송. 심의석은 철종기에 서울에서 태어나 정동에서 거의 모든 생애를 보낸 한학세대 건축가이다. 그는 신교육을 배울 수가 없었다.그 시대는 외세의 이해가 격돌하는 때였고 또한 기독교가 전파해 오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정동파 외국인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서구건축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에도 간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동시에 신건축의 창세대였다. 그는 도편수였으며 또한 자생적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는 목조 벽돌조 석조를 모두 다룰 수 있었으며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 한양의 개조자로서 크게 공헌했다.

 

그의 첫 번째 신건축 참여는 ‘배재학당’(1887)으로 단층 벽돌조 건물의 교사는 그가 처음 벽돌 건축에 참여한 경험을 갖게 되는 일이었다. 이어 스크랜턴이 서양식 병원인  ‘시병원’(施病院1890)을 건립하였다. 1896-1897년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의 설계에 따라 모뉴멘탈한 석조건물로서 독립문’을 시공했다. 독립협회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서대문 밖 영은문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기도 했다. 발안자는 서재필이었다. 1896년 독립기념물 건조사무를 관장할 임원이 선정되었는데 실제적인 건축책임자인 간사원은 심의석이었다.

따라서 심의석은 이미 서양인들을 통하여 서양건축술을 터득하여 학교 병원 등 각종 건축물의 신축에도 계속 참여하였다. 그 경험으로 ‘정동제일교회’의 건축에 일익을 하였다. 이 교회는 1895년 착공 1898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3층의 벽돌조 종탑이 있어 이의 건조는 건축기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 밖에 서양건축물로서 정동 ‘이화학당 본관’(1897-99) 상동교회(1900-01)가 있다.

 

반면 전통건축에의 참여로서 파고다공원내의 ‘팔각정’(1897) 조선호텔내의 ‘원구단’과 ‘황궁우’ 그리고 ‘석고단’(1901.11)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1902.9) 등이 있다. 또 그는 당시의 선각자 이채연 남궁억과 함께 서울을 개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원형극장인 ‘협율사’(1902.8)도 그에 의해 세워졌다. 그밖에 이화여고 프라이 홀 자리에 있던 ‘손탁 호텔’(1902-03), 덕수궁내의 ‘석조전’(1909) 등이 있다.

그는 한일합방 후에는 관직에도 올라 개화기 선각자 유길준과 함께 참사가 되어 참사 제도가 폐지되는 1919년까지 내부아문의 기사직에 있었다. 그는 1895년 5월 7일 판임관 6등의 內部技手로 출발하여 技師가 되었고 1896년 독립문의 ‘독립기념물 건조사무’를 관장할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승급을 계속하여 1905년 營繕司長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內部 토목과에 있으면서 칙임관의 3등의 종2품의 嘉善大夫 직위를 받는다.




 고종이 환궁할 장소로 택한 곳은 민비가 시해당한 正宮 경복궁이 아닌 慶運宮(경운궁:나중의 덕수궁)이었다. 경운궁은 영국·미국·러시아의 공사관과 이웃해 있어 우려되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처하는 데 유리한 위치였다.
 
 

 대한제국 떄 신축된 건물들



중화전 (德壽宮 中和殿)


2중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였다. 기단의 둘레는 난간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남향을 하였다.

하월대는 지대석 위에 장대석 두 벌대를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으며, 상월대는 장대석 두 벌대로 설치되었다. 상·하월대 상면에는 잘 다듬은 방형 화강석 박석을 깔았으며, 하월대 전면 좌우와 후면에는 각기 계단이 한 벌씩 놓였다. 기단 상부는 전을 깔았고 좌우에는 향로를 놓았다.


내부 중앙 후측 고주 사이에는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 천장이 마련되었다.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인데, 내진(內陣) 천장의 중심부에는 위로 쑥 들어간 감입형 천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을 조각하여 왕을 상징하였다. 전·후면 어칸에는 사분합 꽃살문, 어칸 좌우 한 칸과 양측면 남쪽 두 번째 칸에는 삼분합 꽃살문,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삼분합 꽃살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 전체에는 빛살 광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기둥머리에는 안초공을 설치하고 내4출목, 외3출목의 포작을 짜 올렸고, 그리고 주심포 사이 어칸에 3개, 나머지 칸에 2개씩 공포를 배열하였다.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는데, 고종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경운궁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재위하는 동안 정전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광무 8년(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었다.

중화전 앞뜰에는 공식적인 조정회의나 기타 국가적인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品階石)이 어도(御道)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원래 중화전 영역 주위에는 장방형으로 2칸 폭의 행랑이 둘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동남부 모퉁이의 7칸만 남아 있다.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 820호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황제의 생활공간(침전)이다. 광무 1년(1897)에 지었는데 광무 8년(1904) 수리공사 중 불에 타,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다. 더욱이 지붕 모서리 부분에 조각들(잡상)을 나열한 점은 침전 건축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특이한 구성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간결하게 장식한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다. 건물의 천장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고, 네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다.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정관헌(靜觀軒)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의 연유처(宴遊處)로 외빈을 초대해 연회를 열거나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며 음악을 감상하던 휴식처로 쓰였다고 한다. 광무4년(1900)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태조의 영정을 이곳에 잠시 봉안하면서 경운당(慶運堂)이란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한 1906년 흠문각(欽文閣)에서 고종의 어진(御眞)과 계명재(繼明齊)에서 순종의 어진을 잠시 이 건물에 봉안하기도 했다.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서양식 건축양식에 전통적인 의장(儀裝)이 절충된 외관이라 할 수 있다. 내부기둥은 인조석으로 둔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두를 바깥기둥은 목재로 화려한 코린트 양식 주두(柱頭)를 얹고 있다. 또한 바깥 기둥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李花) 문양을 양각하였고 소나무 사슴 박쥐 당초문 등을 투각한 난간을 설치하였다. 전통적인 문양(文樣)을 가미한 서양식 테라스를 둔 것이다. 

너른 홀 뒤편에는 벽돌조의 건물을 지었는데 연회를 베풀 때 다과 등 음식 등을 준비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정면 7간 측면 5간 규모로 팔작지붕 모양을 본뜬 양식 지붕을 얹고 있다.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1900년 건립된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한 건물이다. 사바틴은 1897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경복궁에 머물던 중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목격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무렵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은 그 당시 건립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한때 덕수궁을 찾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차와 음료를 팔던 ’카페’로 운영되기도 했다.


2004년 2월 6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었으나, 덕수궁(사적 제124호) 사적 지정 고시(문교부 고시 제161호, 1962. 7. 25.)에 명기된 건물이 등록되어 문화재보호법 제47조제1항에 저촉됨(덕수궁 사적 지정범위와 중복)에 따라 2008년 6월 24일 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돈덕전 (惇德殿)


돈덕전 (惇德殿) 평면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목수현(사진) 박사가 『법규유편(法規類編)』(1908)에서 찾아냈다

“2층의 순서양식 건물로 알현소 또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어 황제는 누누이 외국사신을 본전에서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돈덕전에서 순종 황제가 1907년 즉위했다. 순종은 서양식 건물에서 즉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였다.

 평면도는 순종황제 즉위식을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도면이다. 따라서 즉위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과 황제·신하의 자리 배치 등이 적혀 있다. 우동선 교수는 “남쪽으로 면한 방이 즉위식장으로 쓰였는데, 내부에는 황제의 자리인 어탑(御榻)이 있고 그 밑으로 신하들이 위계에 따라 좌우로 나뉘어 서게 돼 있다”며 “마당에 설치된 분수기(噴水器)나 악실(樂室)은 즉위식을 위한 임시 시설로 보인다”고 말했다.



평면도 남쪽 끝에 외문과 정문이 있고 영국 공사관쪽으로 길이 나 있다. 우 교수는 “지금은 덕수궁 영역과 돈덕전 영역이 합쳐져 있지만 1907년 당시엔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며 “덕수궁 담장은 열강과의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면도가 돈덕전 2층을 나타냈을 것이라 추정했다. 돈덕전은 2층 건물이나 발견된 평면도는 한 장뿐이다. 그는 “왕의 자리는 높은 곳에 있었을 것임을 감안하면 2층이 즉위식장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돈덕전(惇德殿) 은 현재 덕수궁 권역의 석조전 뒤편에 현 포덕문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는데 1901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순종황제가 이곳에서 즉위(1907)했으며 1920년대 초반에 일제강점기에 헐린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앞선 시기의 양관 건물이다. 손탁 호텔과 러시아공사관 등을 설계한 우크라이나인 기사 사바친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라우지가 기증한 대포와 기관총을 돈덕전 난간에서 친람하는 영친왕, 순종,고종,1907. 6.11.







데라우지가 기증한 대포와 기관총을 돈덕전 난간에서 친람하는 영친왕, 순종,고종,1907. 6.11.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곷 무늬가 기둥과 난간에 등에 장식된 돈덕전에  고종이 평복에 갓을 쓰고, 그 왼쪽에 황태자(순종)이 갓을 쓰고 , 맨 왼쪽에는 어린 영친왕이 함께  있다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지 마사타게(寺內正毅)가 고종에게 대포,기관총을 증정하는 사진,

1907. 6.11. 돈덕전 앞에서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무력시위로 알려진 사진은 사실과  달리 대포와 기관등을 고종황제게 증정하기 위하여 정렬한 것이다. 아래 데라우지의 일기를 보면 명확해진다


<데라우지 마사타게 일기(寺內正毅日記)> 1907년 6월 11일 (화) 비]

"10시에 하세가와 대장(長谷川 大將)과 함께 통감(統監)을 방문하다. 잠시 대담(對談) 11시반에 모두 더불어 궁중(宮中)에 이르러 황제(皇帝)께 배알(拜謁)하다. 대포(大砲) 기관총(機關銃) 기타 증품(其他 贈品)을 정진(呈進)하다. 종종(種種)의 칙어(勅語)가 있으시다. 황태자(皇太子) 영친왕(英親王)을 알현하다.

12시 궁중대신(宮中大臣)이 개최한 식사(食事)를 하다. 통감 및 나의 연설이 있었다. 오후 2시 황제 영친왕과 더불어 돈덕전(敦德殿, 惇德殿의 착오)에 출어하사 대포(大砲)를 친람(親覽)하시다.

저녁에 대장의 만찬에 참석하다. (* 11일 아침 10시에 숙소를 나서 하세가와 대장을 동반, 이토통감(伊藤統監)을 방문하고 11시 지나서까지 대담을 한 다음 다함께 궁중(宮中)에서 폐하께 배알, 여러 담화가 있었다.
 
휴대한 대포(大砲)와 더불어 기관포(機關砲) 2문(門)을 증진(贈進)할 뜻을 말해 올리다. 가납(嘉納)하시다. 파하고 돈덕전(敦德殿)에서 궁내대신(宮內大臣)이 주인(主人)되는 식사가 있었다. 식후(食後) 증진(贈進)한 대포(大砲)를 폐하 돈덕전에 출어하사 어람하시다. 통감 및 사령관을 방문, 오후 8시 하세가와 대장의 저녁식사에 초대되다. 통감과 더불어 민간인이 약간."




이 일기에서 보듯이  아관파천 사진으로 오인된 문제의 사진자료는 정확하게 말하여 1907년 6월 11일 일본 육군대신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돈덕전에서 기관포를 헌납할 당시의 장면을 담아낸 것으로, 때마침 40여일 뒤에 고종퇴위사건이 벌어지자 이와 관련된 참고 도판으로 가장 최근에 황제와 황태자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이 해외로 발송되어 마치 황제퇴위 당시의 것인양 오인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사진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고증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1978년 이후' 터무니 없게도 공연히 아관파천 당시의 것으로 둔갑하는 2차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공사관은 2층이 아닌 단층건물이었다는 점, 영친왕이 태어난 때는 아관파천이 종결된 1897년이라는 점, 그리고 사진에 보이다시피 영친왕이 저만큼이라도 성장하였다면 이것은 아관파천 당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사진 스스로가 말해주고 있는 셈인데, 왜 이러한 오류는 진작에 바로 고쳐지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이위종  3일의 특사를 보내 일제의 침탈을 호소하려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1907년7월 22일 덕수궁을 지키던 시위대가 고종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완용 등 친일대신들이 이를 먼저 감지하고 일본군 1개 대대가 대한제국 시위대를 진압하고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여 황태자에게 양위케 하여  순종황제의 즉위식을 돈덕전에서 거행화하였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오사카 매일신문 나라사키(楢崎桂園)기자는 <한국정미정변사(韓國丁未政變史)>라는 책에서 이날 일제는 황제 양위에 응하지 않는 고종과 황태자(순종)을 대신해 환관 2명을 대역으로 내세워 황제 양위식을 치렀다고 기록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 모습






대한제국 군대도 그해 8월 1일 헤산되었고 , 무장해제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여 '정미의병 항쟁의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중명전​(重明殿)

 1890년대까지 주로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1897년 궁궐을 확대하면서 궁지로 편입되었고, 현재의 중명전 자리에 서양식 전각 수옥헌(漱玉軒)을 지어 황실 도서관으로 삼았다. 1899년 준공된 옛 전각은 서양식 1층 건물이었으며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다이(J.H. Dye)가 설계하였다.

종 즉위 당시 덕수궁은 경운궁으로 불렸는데, 고종은  경복궁을 비우고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당시 경운궁의 북측 지역은 각국의 공사관과 인접하여 고종의 경운궁 환궁은 일본의 간섭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경운궁 북쪽 지역을 매입하고 궁궐에 편입한 뒤 중명전 외에도 만희당, 흠문각, 장기당, 양복당, 경효전, 환벽정 등 각종 전각을 지었다. 제일 북쪽에 위치한 환벽정은 러시아 공사관과 바로 맞닿아 있었다.고종은 확장된 덕수궁 북쪽 지역에서 경희궁 새문안길로 넘어가는 구름다리(홍교)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 구름다리는 1908년 헐렸다.

1901년 화재로 수옥헌이 전소되자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A. I. Sabatin)의 설계로 2층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1904년 4월 14일 경운궁 대화재가 일어나자 고종 황제가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기고 이름을 중명전으로 바꾸어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는 중명전 건너편의 손탁호텔을 거처로 삼고 정동 일대를 일본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은 중명전에서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다. 이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다. 

1907양 7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새롭게 즉위한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까지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중층이었던 원래의 중화전中和殿)과  뒷편의 흰색의  2층 양관이 구성헌(九成軒)이다

현재 석조전 부지에 해당한다

중화문 옆의 행각도 보이고, 중층 중화전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1902년~1904년 사이의 사진으로 보인다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덕수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구성헌은 준명당의 서북쪽 석조전의 부지에 있던 2츷 양관으로 1899년 이전 준공되어 1900년대 후반 석조전(石造殿) 건립으로 인해 철거될 때까지 황제의 알현소(謁見所) 등으로 사용되었다.

오다 세이고[小田省吾]가 1938년 저술한 《덕수궁사(德壽宮史)》 등을 통해 구성헌의 존재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건축형태나 규모, 기능 등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사료를 통한 추정이 많다. 다만 그 설계는 손탁호텔, 러시아공사관, 덕수궁 궁전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A.I. Sabatine)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구성헌은 1899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1899년 11월 고종이 이곳에서 일본 및 러시아 공사(公使)를 접견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공사 중인 석조전과 함께 찍힌 사진이 있어 그 공사 진행기간 동안에 철거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한편 구성헌은 전면 약 10.6m, 측면 약 9.7m, 건물면적 35평 정도의 소규모 2층 건물로, 남쪽으로 배치한 건물의 상하층에는 모두 아케이드로 한 발코니가 있으며, 벽돌건물에 회칠을 하고 지붕은 함석을 얹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돈덕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세관으로 사용되었고, 돈덕전이 건립된 이후에는 고종의 외국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 사진첩에 영국영사관 및 미국영사관과 함께 건물의 측면 일부가 나타나 있고, 이 건물에 “custom bldg”라는 주기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구성헌은 구한말 대한제국의 상황과 근대화를 잘 설명해주는 중요한 건물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발견된 사료가 한정되어 그 복원이 쉽지 않다. 따라서 구성헌의 복원 및 보존을 위해서는 관련 사료의 수집과 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고종은 경운궁을 正宮(정궁)으로 삼기 위해 아관파천 기간 중 궁궐의 신축공사를 진행시켰다. 중화전·함녕전·선원전·경효전·흥덕전·사성당 등 여러 전각들이 이 때 완성되었으며, 특히 중명전 정관헌·구성헌 등의 洋館(양관)들도 궁궐 안에 들어섰다.
 
  당시의 경운궁은 그후 거듭된 도시계획 등으로 축소된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1897년 2월, 고종은 러시아공관을 나와 경운궁에 移御(이어)했다.
 

경운궁 대화재와 경운궁 중건


경운궁 대화재 1904.우단의 문은 대한문 지나 금천교를 지나 중화전 회랑의 밖에 있었던 조원문

덕수궁 인화문 풍경(1900년) 

 

 이곳은 왕실 전용 어가 대기소이다. 각종 가마꾼들이 바닥에 앉아서 잠시 휴식하고 있다. 인화문은 대한문보다 웅장했으나 철거되기 전 모습. 우측에 현판이 절반만 보인다


1904년에 덕수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건물들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일각에서는 고종황제를 시해하기 위해 일본이 일부러 방화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일본군들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사진이 있어서, 가해자들이 즐거워 한다며 대한제국에서는 이를 갈았다 한다. 또한 궁궐의 화재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화제 후 고종황제대한제국 정부는 처음에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으나, 결국 경운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1906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1902년의 원래 규모보다 축소되어 복구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복구되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 중화문도 중층이었다가 낮아졌다

화제 직후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1910년 석조전이 완공될 때까지 줄곧 중명전이 고종의 침전 겸 편전(집무실)로 사용되었다. 1905년에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고, 이어 순종황제가 중명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순종은 한동안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4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상황제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준공 당시의 석조전 앞에는 연못과 거북상이 있었다


 서관이 건립되기 전의  석조전 모습, 1918년

 


돈덕전이 존재하고, 서관이 건립되기 전인 1910 준공 직후의 사진으로 보인다








석조선 내부의 옛 모습


석조선의 본관과 서관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층별 배치도



2층- 황제 침실- - 황제 서재 - - 황후 거실 - - 황후 침실- - 대한제국 황실 가계 등



1층- - 중앙홀- - 접견실- - 대식당 - - 대한제국의 선포 - - 대한제국 황제 폐현 의례 등


지층 - 고종의 근대적 개혁 - - 석조전 복원기 - - 대한제국의 신문물 등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의 중앙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의 중앙홀

  

황후의 침실과 황제의 서재


 복원 후의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의 접견실 


 복원 후의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의 접견실 


  경운궁 공사는 移御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경운궁 內의 본격적인 양식건물인 石造殿(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되어  1910년 석조전이 착공 10년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자신이 퇴위하고서도 한참 후인 망국의 시점에 즈음하여 완공되었던 것이었다. 완공 후 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고종은 석조전 2층에서 기거했다.
 


 

高宗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곳은 지금의 조선호텔

 

 당시 貞洞은 서구인들의 거주지였다. 지금 貞洞 미국대사의 관저는 당시의 미국공사관 자리다.
 
  미국공사관 자리는 고종이 미국의 선교사(北장로회 목사)이자 의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에게 하사한 토지다. 알렌은 갑신정변 때(1884) 부상한 민영익을 고친 것이 고종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알렌이 근대식 병원으로 설립한 광혜원의 엣 모습(제동 헌법재판소자리)












​연세대학교에 복원된 현재의 모습

 

 이후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廣惠院(광혜원)을 세우는 사업을 주도하는 한편 서양의술을 가르쳤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에 미국의 대리공사가 되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직후, 고종의 황제 즉위를 촉구하는 朝野(조야)의 상소가 쇄도했다. 1897년 8월, 自主國임을 표방하기 위해 연호를 光武(광무)라고 정했다. 이어 10월 초에는 회현방(지금의 소공동)의 南別宮(남별궁) 자리에 圓丘壇(원구단)을 지었다.
 


대한제국시기의 원구단 주변




일제시대의 황궁우 주변













​황궁우와 원구단 전경



조선호텔에서 본 원구단의 엣 모습





















 

​광무황제의 즉위식이 있었던 원구단의 옛 모습





현재의 원구단 전경




황궁우 삼문과 석계단




​원구단의 외삼문















황궁우와 원구단 석북








 






조선철도호텔과 황궁우 

 




원구단 자리에 들어선 일제의 조선철도호텔 옛 모습







 


​신축된 조선호텔과 황궁우의 현재  모습



 10월12일, 고종은 거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다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大韓帝國(대한제국)의 탄생이었다. 이어 11월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명성황후로 올려 국장을 거행했다.
 
  원구단은 웨스틴조선호텔 境內에 있다. 남별궁은 원래 태종의 차녀 慶貞공주가 趙大臨(조대림)에게 출가하여 살던 저택이어서 小公主宅으로 불렸다. 오늘날 이 일대를 小公洞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소공동은 일제 때 조선주차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이름을 따 長谷川町(장곡천정)이라고 했다.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의 주둔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明將 이여송이 여기서 머물렀다. 그 뒤에도 남별궁은 明, 淸의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개화기의 皇都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서울은 조선의 王都(왕도)에서 대한제국의 皇都(황도)가 됨으로써 상징적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을 皇都로 개조하기 위한 노력은 경운궁의 건설 이외에도 여러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조선 초 이래 큰 변화가 없던 서울의 도로체계가 경운궁을 중심으로 개조되었다는 점이다.
 
  즉, 경운궁을 중심점으로 북쪽으로 현재의 태평로에서 세종로로 이어져 경복궁에 이르는 길, 동쪽으로는 구리개길(현재의 을지로), 동남쪽으로는 현재의 소공로, 남쪽으로는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 등으로 방사형 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근대도시를 지향한 대한제국의 皇都 건설은 곧 일본의 침략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前 배재고 자리에서 독립신문 발간

 


독립신문 창간호



독립신문 발행



독립신문 인쇄기 세종기념관에 소장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한 서재필과 유길준


1895년 봄, 서재필은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을 지원받고 별도의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으며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하였다.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 만인 1895년12월 배를 타고 하와이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5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1895년 12월 7일, 일본 외무대신은 주한일본공사에게 신문사 창립비와 신문 제작을 위해 일본 법제국 참사관인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관리를 파견하고, 신문 창립비 1200원을 전신환으로 보냈다. 갑신정변시 개화파인 친일세력이 정부와 일본의 지원을 받고 창간항 것이었다

  

1896년 4월7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아관파천 2개월 후의 일이었다. 독립신문의 대표자는 徐載弼이었고, 부책임자는 한글학자 周時經(주시경:1876~1914)이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워싱턴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개업의로 활동하다 金弘集(김홍집) 내각에 의해 사면을 받고 10년 만에 귀국했다. 독립신문의 사옥은 지금의 기독교 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1898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 남쪽 배재공원(옛 배재학당 자리) 안에 있었다.
 


배재학당 본관 건축공사장 모습 검은 옷의 아펜젤라




독립신문이 밠행된 곳이라고 알려진 자리에 있었던 배재학당 본관,  

1887년 건축된 건물로 독립신문 창간시에는 없었다



​배재학당 자리에 남아있는 배재학당 동관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립협회의 태통지이고, 독립신문이 발행된 곳으로 알려진 배재학당 자리에  러시아 대사관과 체이스 맨하탄은행 서울지점이 신축되어 들어서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다. 이 학당은 미국 선교사 아펜셀러 목사가 1885년 3월에 설립했는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李承晩(이승만) 등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배재학당 자리에는 1984년 2월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한 뒤 체이스맨하탄은행의 서울지점 건물과 러시아대사관(신축중)이 들어서 있다.
 
  1896년 7월, 서재필을 중심으로 李商在(이상재), 尹致昊(윤치호), 李承晩이 적극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협회가 태동된 곳도 배재학당이었다. 결성 초기에는 안경수, 李完用(이완용) 등 정부 요인도 다수 참가했다. 1897년 11월, 독립협회는 청국 사신을 맞던 迎恩門(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獨立門(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慕華館(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회관을 지었다.




 


영은문의 옛 모습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과 독립문의 엣 모습 


뒤에 일진회가 사용했던 독립관 옆에 일진회 건물 위에도 앞에도 일장기가 펄럭인다



현재의 독립문


복원된 현재의 독립관 현충사로 활용되고 있다​



1898년 운종가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풍경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조선 수탈에 열 올리던 제정 러시아와 거기 빌 붙은 친러파를 규탄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조선 자주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협회가 벌인 대중집회였다.  당시 경성 시민의 약 1/17인 1만여 명이 운집해 주최측도, 러ㆍ일 등 외국 공사관 공사들도, 갓 출범한 대한제국 관료들도 놀랐다고 한다. 

그때도 보수파 : 진보파, 친러파 : 친일파, 자주파 : 외세의존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외세의존적 성격과 감성 중심의 현실인식은 보수파나 진보파나, 지도자나 민중이나 다 매 한가지였다,  100년을 넘어 계속되는 대립 갈등과  외세의 간섭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비젼을 같이하는 화합과 합리적 통합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스 민주정치가  포퓰리즘의 중우정치로 외세에 의해 망했듯이 대한제국도 그렇게 망했던 것이다



만민공동회가 열렸던 운종가의 오늘의 모습

 



  1898년 독립협회 주최로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려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이 결의되었다. 독립신문은 친로파 정부와 탐관오리를 서슴없이 비판하고,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개입을 폭로함에 따라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1898년 11월 해산당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4일자로 폐간되었다.


  
  서대문-동대문-청량리 간 電車 통행
  

우리나라에 근대적 교통수단으로 전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9년이었다. 고종은 비명에 간 명성황후(민비)의 묘가 있던 洪陵(홍릉:당시엔 청량리 천장산 언덕에 소재:1919년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141-1로 이전. 지금 홍릉동엔 묘가 없다)에 자주 행차했다. 행차 때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려 그 경비가 적지 않았다.
 



전차 개통, 1899. 5. 4(음력 4.8.) 


▲ 1899년 5월 4일에 우리 나라 최초의 전차개통식이 있었다. 서울에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일본 도쿄보다 4년가까이나 빨랐다. 이 때문에 서울의 전차개통이 동양최초였다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 영업용 전차운행이 된 때는 1895년 1월 31일이다.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의 개최를 앞두고 교토 시치조(七條)와 후시미(伏見)를 연결하는 6.6킬로미터의 노면전차선로를 부설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최초의 전차개통이었다. 서울보다는 4년이 빨랐던 셈이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전차선로가 운행되기 시작한 것은 1903년 8월 22일이었다. 도쿄에서 전차개통이 늦어진 데는 철도마차의 성행 때문이었다. 도로에 레일을 깔고 거기로 마차를 달리게 했던 철도마차는 여전히 값싸고 빠른 교통수단이었으므로 구태여 서둘러 전기철도로 전환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었다.

 

흥인지문 전차 정류장 전차 개통식에 수많은 군중들 운집햇다


1899년 음력 4 초파일 서울 장안이 온통 술렁였다. 이날 오후 3시 동대문과 흥화문 사이로 전차가 첫 선을 보였이다. 정부의 고관귀족들이 멋을 한껏 부린 채 시승했고, 갑남을녀들이 홀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철로 주변에는 군인 3백 명과 순경 250명이 행여 발생할 사고에 대비해 경계를 서는 풍경이 펼쳐졌다.

1899년 개통한 최초의 전차​


1895년 명성황후 사후, 고종 황제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청량리 홍릉을 빈번하게 행차하게 되었는데, 그때 마다 가마를 탄 많은 신하들을 거느림으로써 한번에 드는 경비가 10만원 안팎이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 보스트위 등이 고종에게 접근하여 전차를 가설하면 행차 비용도 절감되고 백성들도 편리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고종도 여기에 동감하여 한미합동으로 전기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어 1898(광무 2) 2 19일 황실에서 40만원과 35만원을 두 차례에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고, 칙명을 받은 대한제국 육군총장 이학균(李學均)과 콜브란 간에 전기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콜브란은 서울의 전차, 전등 및 전화 가설과 운영에 관한 특허권을 얻게 되자 우선 전차가설을 계획하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1898 2 17일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 25일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 궤도공사를 준공하였다.


동대문 발전소의 연기가 나오고 있다. 전차가 흥인지문을 지난다 

또한 동대문 안에 발전소 부지(현 동대문종합쇼핑센터 자리)를 선정하고 75kw 직류 600V 1, 100마력의 증기발전시설을 병행하였으며, 차량 조립도 마쳐 1899 5 4일 성대한 전차 개통식을 가졌다.

 

참고로 도시교통수단으로 노면전차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881년 독일 베를린이었으며, 동양에서는 1894년 일본 경도(京都)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 1899, 부산에 1915, 평양에 1923년 각각 전차가 개통되었다.

 

장안 한복판으로 시속 8km로 들어온 전차는 대중교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갑오경장 이래 소개된 인력거나 자전거는 전차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 40인승 두 칸으로 연결된 이 전차는 밖을 내다볼 수 있게 유리창을 달았고 내부는 방과 마루로 구성됐다.

 

전차는 개통 후 보름 동안 점검을 마친 뒤 520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오전 8시부터 오후6시까지 `땡땡`거리며 운행한 전차는 어느 골목에서나 승객이 손만 들면 태워주었다. 물론 청량리까지 엽전 닷 돈 등 구간에 따라 요금의 차등이 있었고 차장도 있었다.

경향각지에서 전차를 한번 타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 평균 승차인원이 2170(당시 서울인구는 약 2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전차 운행이 본격화 되며 노선도 늘어나 그 해 말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 다시 이듬해 1월 남대문에서 구 용산(원효로 4)까지 선로가 연장되었다처음 투입된 전차는 모두 9, 1대는 황실 전용이었다. 정차장은 없었고 사람이 손짓하면 아무데서나 멈췄다. 전차를 타기 위해 일부러 시골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를 끌다보니 전차를 타는 것도 쉽지 앉았다. 어렵사리 승차한 사람도 내릴 생각은 않고 종일 타고 다녀 전차 속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1968년 11월 29일, 전차개통 69년 6개월 12일 만에 마지막 전차가 왕십리를 떠났다. 1974년에는 서울에 지하와 지상의 전기철도가 등장하였고, 이어 부산에도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지하철’과 ‘전철’로 불린다. 1972년 태백선의 일부 구간에 산업용으로 등장한 전기기관차는 점차 널리 보급되고 있어서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는 전차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속철도 또한 전차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보신각을 지나는 전차에 승차하고 있다, 1903년 경


전차개통식 직후인 5월 26일 파고다공원 앞을 지나던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어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격분한 군중들에 의해 이렇게 전차는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바람에 일본 교토전기철도에서 데려온 운전수와 기술자들이 신변보호문제로 일제히 사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써 막 개통한 전차노선은 여러 달 동안 개점휴업상태에 들어갔다



종로통의 전차길과 전차

종로통의 전차길과 전차


서울시립박물관에 전시품으로 남아 있는 전차의 모습


  이것을 본 미국인 콜브란이 고종에게 전차의 부설을 건의했다. 이 電車(전차)사업은 황실과 콜브란 등 미국인이 50대 50으로 합작한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됨으로써 급속히 추진되었다. 동양에서는 일본 東京에 이어 두 번째로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전차 개통일은 마침 초파일이었다. 여덟 대의 전차에 내외 귀빈들을 태우고 서대문에서 동대문으로 달렸다. 그러나 개통 열흘 만에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전차가 공중의 물기를 모두 흡수해 버린 탓이라는 유언비어가 시중에 번져나갔다. 그런 판에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본 시민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일본인 운전사는 도망갔다. 전차는 방화로 불타버렸다.
 
  하지만 전차는 속도가 빠르고 편했기 때문에 서울의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았고, 채산성이 좋아지자 노선도 점차 확장되어 갔다.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운행되고, 제물포(인천)-노량진 간 京仁철도 부설공사가 시작된 1898년부터 인구 20만의 서울은 근대도시의 외양과 함께 대한제국 수도로서의 얼굴을 갖추어 간다.
 
  이 무렵,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길은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수가 있는 길로 다듬어졌다. 또한 원각사 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공원인 탑골공원이 조성되었다.

  

閔泳煥의 집은 조계사 경내에

  

조계사 경내의  민영환 집터라로 알려진 곳에 있는 민영환 동싱

민영환(閔泳煥)은 고종(高宗) 때의 대표적인 척신(戚臣)으로 자(字)는 문약(文若), 호(號)는 계정(桂庭)이다. 고종의 외가이자 처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을 배경으로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민영환은 형조판서(刑曹判書) 민겸호(閔謙鎬)의 장남으로 태어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큰아버지 민태호(閔台鎬)의 양자로 들어갔다. 생부 민겸호의 누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의 아내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고종의 어머니이며, 양부 민태호의 딸은 순종(純宗)의 왕비가 되었으니 실로 당대 제일의 척족(戚族) 가문의 일원이었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양오라버니인 민승호(閔升鎬)를 중심으로 여흥 민씨가 정국을 주도했다.  민승호가 1874년(고종 11) 폭탄이 장치된 우편물에 의해 사망하자 민규호(閔奎鎬)가 1878년 민규호가 병사한 후에는 민영환이 생부로 임오군란으로 피살된 후에는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閔泳翊)이 민씨의 영수가 되었다가  민영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하다가 1886년(고종 23) 실각하고 망명한 뒤에는 민영환이 여흥 민씨 척족의 대표주자로 정국의 주도했다.

  
민영환은 16세 때인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이듬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가문을 배경으로 이례적인 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급제 후 3년 만인 1881년(고종 18)에 정3품인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이듬해인 1882년(고종 19)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고 생부 민겸호가 살해당하자 3년상을 치르는 동안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양부 민태호까지 살해당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청나라의 간섭이 강화되고,그에 따라 국내 정치도 김홍집(金弘集),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 친청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이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는 정책을 시도하고,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다시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발탁된 민영환은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친러파의 주요인물로 부상하였다. 민영환은 경제, 기술,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했다.


내무부 산하에 설치된 전환국총판(典圜局總辦), 기기국총판(機器局摠辦),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병권을 장악하고 군사 분야의 개혁에 역할을 맡아 해방총관(海防摠管),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등을 역임한 것이다. 민영환은 양무사업의 중심에 있던 군사 관련 업무를 주로 관장하였으며, 『 천일책(千一策)』을 집필하여 주변국에 대한 경계와 부국자강을 통한 국가 기강의 확립을 강조하며 자신의 개혁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은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내무부가 폐지되자 사임한다. 갑오개혁 정권에서 고종과 민씨 세력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894년(고종 31) 12월 체포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전봉준은 공초(供招)를 받는 과정에서 민영준(閔泳駿), 고영근(高永根), 민영환 3인은 내직매관(內職賣官)하는 자들로, 이런 탐관오리들을 내쫓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거병하였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당시 세도를 떨치던 여흥 민씨의 실정(失政)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매우 컸으므로, 여흥 민씨의 대표자인 민영환이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거론된 것으로 생각된다.  

 

갑오개혁 이후 친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민영환을 비롯한 민씨 세력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민씨 세력은 이완용(李完用),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등 친미적 성향의 인물들과 연합하여, 여기에 다른 친러 인사들과 구미 외교관, 선교사까지 모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구성하고 활동했다. 정동구락부에서의 활동을 통해 민영환은 본격적으로 구미(歐美)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이후 민영환의 외교활동에 기초 자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해 청일전쟁의 승전국인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았던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반환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규합된 친미, 친러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갑오개혁 후 실세로 등장한 박영효(朴永曉)를 실각시키고 박정양(朴定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출범시켰다.
  


    
을미사변 이후 재차 친일 정권이 성립되자, 이에 반발한 명성황후계의 친미·친러 인사들은 고종을 궁 밖으로 나오게 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다. 정동구락부의 일부 인사들도 이에 호응하였으나 서리군부대신(署理軍部大臣) 어윤중의 즉각적 대처로 고종 탈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 정동구락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사되면서 친일 정권은 무너지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의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 파견하여 민영환은 4월 1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나가사키, 도쿄, 밴쿠버, 뉴욕, 런던을 거쳐 5월 20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민영환은 26일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3개월 동안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고종의 친서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러시아 각지를 순방하였다. 8월 20일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민영환은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10월 21일에 귀국하였다. 민영환은 7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세계 일주를 조선인으로서는 처음하고 여행기가 『 해천추범(海天秋帆)』를 남겼다.

  
귀국한 민영환은 바로 군부대신(軍部大臣)에 임명되어 러시아 군사 교관에 의한 군사 양성을 주관하고, 900여명의 장병에게 러시아제 무기를 제공하여 3개월간 훈련시킴으로써 장래 고종이 환궁할 경우 궁궐을 경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했다.

  
고종의 환궁이 이루어지기 전, 민영환은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서, 또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사절인 특명대사(特命大使)로도 임명된 것이다. 1897년 3월 26일 제물포에서 출발한 민영환은 먼저 러시아에 도착하여 국서와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나머지 5개 나라를 순방한 후 다시 러시아에 돌아와 주차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민영환은 러시아에 이어 영국에 도착한 후 갑자기 미국으로 가버렸다. 이러한 명령 위반 때문에 민영환은 7월 30일자로 면관(免官)되었다.

   
민영환은 두 차례의 외교 활동을 통하여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서양의 근대 문물을 흡수하고 사상의 폭을 넓혔다. 그는 상해, 일본, 캐나다, 미국 그리고 유럽을 거치면서 서양 도시의 발달을 목도하였고, 많은 근대 시설을 견학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사, 교육, 정치 체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독립신문』은 “종래의 민영환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국가 중흥의 일익을 담당할 것을 희망하였으며, 민영환은 『독립신문』과의 대담을 통해 서양 방문을 통해 “당초 꿈도 못 꿀 일을 많이 보았다”고 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민영환은 점진적이지만 실질적인 문명 진보를 추구하면서 광무개혁(光武改革)에 깊이 관여한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 민씨 세력과 친러, 친미 세력은 갑오개혁의 급진성과 외세의존성을 비판하면서 고종을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개혁사업(광무개혁)에 착수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민영환은 군사 개혁과 황권 강화를 주도하였다. 또한 민영환은 독립협회(獨立協會),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지지하면서 민중으로부터 개혁의 동력을 얻고자 하였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흥화학교를 설립하였다.


(1) 군사 개혁과 황권 강화 활동
민영환은 1899년(고종 36) 이전까지는 의정부(議政府)를 중심으로, 이후에는 궁내부(宮內府)를 중심으로 고종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개혁안을 상주했으며 그 중 군제 개편안이 채택되었다. 민영환은 친위대의 증설, 시위대(侍衛隊) 편성, 무관학교(武官學校)의 개교, 원수부(元帥府)의 설치 등 군제개혁사업을 담당하였으며, 육군 부장(副將, 오늘날의 중장에 해당)으로 원수부 회계국 국장을 맡아 군대의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민영환은 군악대 설치와 국가(國歌)제정을 주도하였으며, 황실 상징인 어기(御旗), 황태자기(睿旗), 친왕기(親王旗) 제작에 나서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전력했다. 민영환은 국가의 주권(主權)을 곧 군주권(君主權)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주 독립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에 널리 공유된 것으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민영환이 민권의 문제를 경시하였던 것은 아니다. 민영환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축하하는 만민연(萬民宴)에 참석하여 수많은 군중이 황제를 찬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았으며, 고종에게 서양의 정치 전범(典範)을 수용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영환의 태도는 황권(皇權)을 강화하면서도 중추원(中樞院)을 통해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민권 신장을 도모하는 절충적 개혁안을 마련하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2) 독립협회 후원 활동
민영환은 같은 맥락에서 독립협회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민영환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독립자강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개혁 성향의 관료들을 옹호하고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민영환의 태도는 『독립신문』으로부터는 ‘애국·애민의 정성(情性)’으로 찬양받았으나, 고종의 측근에 포진하고 있는 친러 보수 세력의 반감을 사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민영환은 모함을 받아 파면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독립협회와 대립하던 황국협회(皇國協會)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이후 독립협회가 친러 보수 세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이를 의회 설립 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자 민영환은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영환은 관민공동회에도 참여하여 헌의육조(獻議六條)를 발표할 때에는 독립협회의 회원임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협회의 활동을 후원함으로써 민영환은 황권의 강화와 함께 민권의 신장도 도모하였다. 비록 민권 신장의 수준을 두고 견해의 차이는 있었으나, 민영환은 독립협회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만민공동회가 해산당하고 고종이 황권을 더욱 강화하자 민영환은 이러한 흐름에 협력하였지만,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나갔다.

  
(3) 교육 활동
민영환은 정부의 개혁 사업에 동참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이를 실천하였다. 특히 그는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앞서 『천일책』에서도 서양의 교육제도에 관심을 보인 바 있었다. 민영환은 임병구, 한우, 정교 등과 서울 흥북문 앞 상원동에 사립학교인 흥화학교(興化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또한 교육 진흥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하여, 학문을 일으켜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주장하고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보낼 것을 역설했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친일 세력이 득세하는 상황 속에서, 민영환은 일본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고 친일 세력과 정면 대립하였다. 내부대신, 학부대신(學部大臣) 등 요직을 번갈아 맡아오던 민영환은 일본을 등에 업은 친일 각료들의 견제로 한직인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자주성을 상실하고 만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였으며, 유생과 전직 관료들은 끝없이 상소를 올리는 상소 투쟁을 개진하였다.

  
민영환은 조약이 체결될 무렵 경기도 용인에서 전실부인(前室夫人)의 묘를 이장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하였다.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와 조약 파기의 방법을 의논한 민영환은 백관(百官)과 함께 연명상소로써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대답을 받기도 전에 일본 헌병들은 소두(疏頭 : 상소 대표자) 조병세를 체포하고 백관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민영환은 스스로 소두가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두 차례 더 연명 상소를 올렸다. 끝까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영환은 죽기를 각오하고 궁중에서 머무르며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고종은 소두 이하 전원을 구속하여 문초하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민영환을 비롯한 백관들은 황명에 의해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에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된다.

  
민영환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국민을 일깨우기로 결심했다. 민영환은 머물고 있던 의관(醫官) 이완식(李完植)의 집을 나서 본가로 향해 가족들을 잠시 만난 후, 다시 돌아와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유서를 작성했다. 1905년 11월 30일 동 틀 무렵, 민영환은 하인을 밖으로 내보낸 뒤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혈죽


민영환 우국지가 자결하기 직전 서양식 명함에 쓴 유서. 독립기념관 자료중에서



민영환 국장에 모여든 백성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 홍만식(洪萬植), 이상철(李相喆) 등 관료들뿐 아니라 군졸이나 인력거꾼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사들이 잇따라 순국하였다. 고종은 민영환에 예를 다해 장례지낼 것을 명하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자결로 과오 씻고 충절 남긴 구한말 권력 실세 민영환이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때 근위병들 앞에서 러시아 군복 차림으로 긴 칼 차고 미소 짓고있다

그러나 민비를 고모로 둔 그는 17세에 벼슬길에 올라 21세에 이미 당상관이 될 만큼 권력의 단맛을 충분히 맛본 권력의 실세였다. 1890년대에 그는 민영준·민영달·민영소와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당시 정계를 쥐락펴락한 민씨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조선조 말엽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 세도정권의 공통점은 나라보다 가문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었다. 민씨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 열강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바깥에서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던 이른바 ‘태평십년(1885~1894)’이 찾아왔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때 민씨 척족의 부패는 동학 농민봉기로 곪아 터졌다.

동도대장 전봉준은 민영환을 “관직과 작위를 팔아먹는 것을 일삼던 자”로 손가락질한다. 그는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정권의 실세로 왕조의 몰락을 이끈 책임을 면키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후대 사람들이 그를 충의지사(忠義之士)로 기려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기 정권의 과오에 죽음으로 속죄한,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책임 정치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민영환이 살았던 집터는 조계사와 체신박물관(옛 우정총국 자리)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종각역에서 율곡로로 가는 우정국로 보도에 표지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있는 자택이었다는 설과 의관 이완식의 집이었다는 설로 나뉜다. 현재는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따라 자결순국 추모 조형물은 이완식의 집 터가 위치한 종로 한미빌딩 앞에 세워졌으며, 집터인 조계사 불교역사문화 기념관 앞마당에는 민영환 동상이 배치되었다.

이 동상은 1957년 건립되어 안국동 로터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돈화문 입구인 와룡동 1번지로 옮겼다가 2003년 종로거리 3.1절 재현 행사를 계기로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동상의 받침 부분에는 민영환이 순국 당시 남긴 유서가 각문되어 있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의 집터인 하나투어빌딩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의 집터는 그의 생가터에서 조계사 맞은편으로 건너 종각역방향으로 걸으면 왼쪽에 공평빌딩이 나오면 왼쪽골목으로 들어서면 양쪽에 큰 빌딩들이 나오고 바로 오른쪽의 하나투어 빌딩 자리가 이완식 집터이다. 빌딩 앞에는  백문기가 조각한 기념물이 있긴 하지만 오고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저 빌딩에 부속된 단순한 조형물로 생각하고 지나칠 만하다.

민영환 순국 집터 기념조형물

그리 크지 않은 민영환 기념물은 그가 남긴 친필 유서와 혈죽과 유품 등을 주물을 떠 만든 것으로, 그가 자결할 때 썼음 직한 단도도 기념물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후 피묻은 칼을 상청 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인 1906년 5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의 피 묻은 곳을 뚫고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민영환의 충정이 혈죽(血竹), 이른바 '절죽(節竹)'이 되어 난 것이라고들 하는데, 기념물에는 이를 말하려는 듯 대나무가 표현되어 있다. 그하단에는 유서가 조각되어있다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嗚呼,國恥民辱乃至於此,我人民將且殄滅於生存競争之中矣。夫要生者必死,期死者得生,諸公豈不諒只。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泳煥死而不死期助諸君於九泉之下,幸我同胞兄弟千萬億加奮勵,堅乃志氣勉其學問,決心戮力復我自由獨立即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鳴呼,勿少失望。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조약 강제 체결의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은 분노에 휩싸였다. 시종무관장 閔泳煥(민영환)은 2000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다음날 특진관 趙秉世(조병세)가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는 등 분사자가 잇따랐다. 민영환의 집터는 현재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境內(경내)로 들어가 있다.
 
  1906년 2월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한국통감부는 조선왕조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를 正南에서 마주보는 자리, 대한제국의 본궁 경운궁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아랫자락에 세워졌다. 지금 숭의여자대학과 리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1907년 4월20일, 고종 황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3명의 밀사를 파견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은 자신이 비준하지 않은 을사보호조약의 무효화를 거듭 꾀한 것이다. 일본은 이를 기회로 고종을 帝位(제위)에서 축출할 방침을 세웠다.
 
  1907년 7월3일, 경운궁으로 입궐한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林權助)와 통감 이토는 고종 황제에게 『그와 같은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거든 차라리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라』고 협박했다. 그때 남산에 배치된 일본군은 대포로 궁궐을 조준하고 있었다.
 
  고종은 끝까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日帝는 7월19일에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7월20일 오전 8시, 경운궁의 中和殿(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황제는 순종에 의해 황궁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경운궁에서 거처했다. 이 때부터 경운궁은 고종의 長壽(장수)를 비는 뜻에서 德壽宮(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새 황제 純宗(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서 1874년 창덕궁 관물헌에서 태어났다.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1904년 2월8일 밤, 旅順(여순)과 인천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1월2일에는 러시아의 극동 요새 여순이 함락되고, 3월10일 奉天會戰(봉천회전)에서도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군 러일전쟁 자축행사(1904년)

 

인천을 거쳐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은 명동성당 뒷편 진고개 언덕길에서 러시아 함대 격침 자축기념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있고 왼쪽 명동성당 중심으로 촬영되었다. 오른쪽 건물은 옛 계성학교 전신이다.

 


일본군 창덕궁 주합루에서 러일전쟁 자축행사(1904년)


러일 함대 격침을 자축행사 하기 위해 창덕궁 주합루에 모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창덕궁은 고종황제의 칭경예식 원유회 장소로 선정된 곳이다. 주합루 현판은 행사를 위해 철거시켰다. 백립을 쓰고 초대된 한국 대신들은 중앙에 있다. 백림을 쓰고 부축 받고 있는 자는 조병식이고, 그 옆에는 민종묵이다.

대형 태극기와 일장기 속에는 일제의 숨은 야욕이 있다. 한국 대신들을 데려다 놓고 같이 사진을 찍은 이유는 한국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왔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양 나라가 우호적인 동맹관계임을 나타내고자 태극기와 일장기를 같이 보여주고 있다.  ​
 

  이어 5월27일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東海海戰(동해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괴멸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9월5일, 러·일간에 포츠머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南만주는 물론 한반도까지 일본의 지배下에 들어가게 된다.
 
  1904년 8월에 체결된 韓日의정서에 의해 남대문 밖 용산 일대는 거대한 일본군의 군사기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韓日의정서 제4조는 일본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조항을 내세워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관은 군용지로서 용산의 300만 평을 수용하겠다고 한국정부에 통고했다.



남산에서 바라본 구 총독부 청사, 왼편으로 동본원사, 명동성당이 있음, 1930년 경 촬영

일본은 대한제국과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같은 해 12월 20일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하였다.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한 조약 내용에 따라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 및 각 이사청의 개청식을 열었다. 처음에는 광화문 육조거리의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청사를 통감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07년 2월 28일에 남산 왜성대(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8번지 일대)에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 건물로 통감부 청사를 건립하였다.






왜성대의 초기의 조선 통감부 1907.2. 완공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본은 왜성대 통감부 청사를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1910년에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증축 공사가 이루어져 ‘一’자형의 건물이 ‘口’자형으로 변형되었지만 사무 공간의 부족 현상은 해결되지 못하여 1911년에도 기존 건물과는 별도로 다시 증축 공사가 진행되었다.



중축 후의 조선통감부 청사



남산 통감부-조선총독부 터

전에는 KBS 방송국이 있었고 지금은 서울 애니매이션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 공사관 (1893년 신축 1900년경 사진)

일본공사관이 자리잡기 이전 이곳에는 조선 철종 때 문신 박영원(朴永元)이 지은 녹천정(綠泉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자 정자를 허물고 이곳에다 일본공사관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통감관저,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다.


일본공사로서 이곳에 입주한 사람 중 특기할 만한 인물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이다. 그는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기 10년 전인 1900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7년 동안 머물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일제는 남작의 작위를 내리고,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까지 이곳에 세워주었다.



남산 왜성대의 총독관저 -앞의 고목이 아래 총독관저 터 앞의 고목과 같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부터 이곳은 다시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당시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관저 2층에서 ‘병합조약’을 불법적으로 조인했다. 이 조약 체결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07년 10월 16일에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가 관저를 4일간 숙소로 이용하였다.  





치욕의 한일합방조약 조인실

1910년 8월 22일 오후 4시에 제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관저 2층에서 한일합방조약을 조인하였다. 경술국치의 장소이다.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가 경복궁 뒤편의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 왜성대 총독 관저는 1940년 11월 22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과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개편되어 개관하였다.




통감관저 터


경술국치의 치욕의 현장인 일본통감부 관저 터 표지석

 

광복 후 이곳은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철거되었다. 현재는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신영복이 쓰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과  이곳에 있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동상의 대석을 꺽꾸로 세워 놓은 것이 함께 있다.



일본군의 주둔과 용산의 병영 건설







초기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한 대관정의 정문




해당 사령부는 1904년 4월 서울 중구 소공동 대관정(大觀亭·현 웨스틴조선호텔 인근)에 주둔했다. 정문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그해 2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같은 해 4월 서울에 처음으로 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서울 중구 소공동 대관정(大觀亭)에서 촬영된 을사조약 기념사진.


대관정은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있고 한국주차군사령관의 관저이기도 하여 을사조약 축하연을 하고 한일 고관이 기념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실크햇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첫째 줄 왼쪽 다섯 째)이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다.

 


필동 남산 한옥마을에 있었던 초기의 한국주차사령부 개청 경축아취가 보인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은 1880년 공사관 수비대-->1896한국주차대-->1904년 한국주차군-->1910년 조서주차군-->1918년 조선군,1945년 제17방면군으로 확대되었다,

 


필동에 있었던  초기의 한국주차군사령부,조선헌병대사령부, 경무총감부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일본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처음에 남산 북쪽기슭 지금의 필동2가에 있다가, 1908년 10월 용산의 새로운 군사기지로 이전하였다. 필동 한옥마을 자리에 있었던 조선군 주차사령부와 조선헌병대 사령부는 1908년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용산(지금의 미군 기지 자리)으로 이전, 할 때까지는 두 사령부가 이곳을 함께 사용했다. 조선헌병대는 1919년 3·1운동을 가장 잔인하게 진압한 부대였다.  

 


용산 병영의 조선군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때 설치된 조선군주차사령부​는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된 후 조선군사령부로 개챙되었다

 


조선군사령부 터 - 한마음공원 남동쪽으로, 현재 주한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다.




​1908년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필동2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일대는 군사지대로 변모했다. 1910년 일제 강점 후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조선주차군사령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1918년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1915년 용산과 나남에 2개의 정규사단을 배치한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1개 사단을 추가했다. 1940년대에는 무려 23만명의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했다.


용산기지 북쪽  메인포스트에 있었던 조선주둔 일본군 20사단의 주력인 78연대 본부 의 옛 모습​

 


 용산병영전경



조선군 육군 창고


조선주차군용산야포병대

 



만초천 가의 일본 조선군 보병 78연대 정문 지금도 정문 돌기둥 일부가 남아있다




1910년 일제강점기 당시 군사령관 관저 전경


 

용산 조선총독 제 2 관저



용산역 1906

1899년 개통한 경인선인천역에서 시작하여 한강 이남인 노량진역까지만 운행되었으나 1900년에 한강철교가 개통하면서 용산역서울역이 함께 철도 영업을 시작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발발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용산역을 중심으로 경의선(1904년)과 경부선(1905년)을 급하게 개통시켰고, 이에 따라 용산역은 한반도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06년 건설된 용산역은 특이하게도 목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서양풍의 목조건물로 건설되었다. 철도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용산 일대에는 일본인 거주지 및 일본군 주둔지가 형성되었으며 용산은 식민지 도시로서의 형태를 갖추었다. 1923년 용산역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서울역을 증축하였으며 이후 한반도의 철도 중심지는 서울역으로 옮겨갔다.




현재의 용산역


용산 미군기지의 일본군 조선군사령부의 유산들



용산미군기지는 일제강점기 조선군사령부가 있던 일본군 병영지였다


조선 왕실 기우제 제단인 남단(南壇) 유구.


 캠프코이너 동쪽 언덕에 있는  조선 시대 왕실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인 남단(南壇) 유구이다. 돌기둥과 주춧돌로 추정되는 큰 석물이 남아 있다.




日軍 막사를 美軍이 그대로 사용. 메인포스트 남동쪽에 있는 미8군 병영 건물.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쓰던 막사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일본군 사징인 별 문양도 남아 있다(작은 사진).




보병 79연대 막사보다 뒤에 만들어진 보병 79연대 막사

로 페치카 굴뚝이 다수있는 것이 눈에 띤다-미군의 'Finance' 용도로 쓰였다



'一誠貫之' 새겨진 日포병대 국기게양대


 


용산미군기지 북쪽의 일본군 병기창고

외벽에 돌출된 지지대(버트리스)를 대어 웅장한면모를 보여준다



둔지산 기슭의 위수감옥 구한말 건물

 병감으로 환자 최수들이 있던곳이다 김구살해범 안두희가 수감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캠프 코이너 자리에 있었던 일본군 연병장- 1917년의 일본군 조선군사령부 관병식 장면,

이연병장은 1920년 일본군 야포병연대로 변경되었다. 멀리 산 기슭에 옛 선린상고 건물이 보인다


일본군 충혼비가 美 8군 전몰자 기념비 재활용


 미8군 전몰자 기념비(큰 사진).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만주사변 전몰·전사자 충혼비(작은사진)를 재활용했다. 메인포스트 나이트필드 연병장 앞에 교차로가 있고 교차로 모퉁이에는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8군 전몰자 기념비가 서 있다. 원형 7단 기단 위에 돌기둥 7개가 서 있고 한가운데에는 전몰자를 기리는 표석이 서 있다.

원래 이 기념비는 1935년 11월 일제(日帝)가 일본군 제20사단 78연대의 만주사변 전사자를 위해 세운 충혼비였다. 6·25가 끝나고 미군은 이 충혼비를 재활용해 6·25전쟁 미8군 전사자 기념비로 사용했다. 1980년 78연대 자리에 한·미연합사 청사가 들어서면서 기념비는 교차로 부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이 일본군 구조물을 재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만주사변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군대를 기리던 시설이 전몰 미군 장병 기념비로 변신한 것이다. 이렇듯 작은 기념비에도 복잡다기한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김영규 공보관은 "미군을 기리는 기념물이니 당연히 (평택으로 옮겨가는)대상"이라고 했다.



일본군 장교 숙소였던 주한미합동군군사업무단청사


나이트필드 연병장 뒤편은 한·미연합사 건물이다. 한미연합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큰 건물은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다. 일제가 지진에 대비하여 내진 설계를 하였다는  일본군 장교 숙소였던 건물이다.

건물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가결되고, 이듬해인 1946년 4월 한국신탁통치안을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을 때 소련 측 숙소로 사용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 6월 29일 미군이 철수한 후 건물은 미 군사 고문단 청사로 사용됐다. 지금은 그 후신인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이 쓰고 있다. 



만초천 가의 일본 조선군 보병 78연대 정문 아래 사진의 돌기둥이 남아있다



일본군 보병부대 78연대 정문의 돌기둥,


1906년 대한제국으로부터 구입한 땅에 일본이 군사시설을 건설한 이래 111년 만인 2017년 용산이 대한민국에 돌아온다. 100년 넘도록 용산 기지 내에 멎어 있던 역사도 함께 반환된다. 왼쪽 사진은 현 한미연합사 자리에 건설된 일본군 6사단 보병부대 정문(1908~1910년 사이 촬영)이고 오른쪽은 2016년 6월 현 한미연합사 뒤쪽 모습이다. 돌기둥(빨간 점선)과 철 난간 아래 만초천 개울이 그대로 남아 있다.


군사업무단과 연합사 사령부 사이로 만초천이 흐른다. 남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흐르는 개울이다. 구불구불한 자연 하천인 만초천은 일본이 기지를 만들면서 직선화됐다. 죽은 천(川)이었지만 2011년 서울시에서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들면서 맑은 물로 돌아왔다. 만초천을 건너 연합사 건물로 가는 다리는 일제 강점기 때 그대로다. 1908년 일제는 이곳에 6사단을 만들면서 다리와 철문을 세웠다. 정문 문기둥과 작은 옆문 문기둥, 그리고 다리는 일부 사라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100년 전과 동일하다.



메인포스트 북동쪽 위수 감옥


메인포스트 북쪽 주유소를 지나면 '위수 감옥'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헌병대 감옥이었다. 현재 위생부대로 쓰이고 있다. 미군 막사 몇 동을 제외하면 옛 건물은 일제 당시 그대로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이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재판을 받았고, 붉은 벽돌로 세운 육중한 담장에선 6·25 때 생긴 총탄 구멍을 셀 수 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동행한 미군 공보실 직원이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각인돼 있다.


사우스포스트 - 용산 삼각지에서 이태원로를 따라 국방부를 지나 이태원 쪽으로 500m만 가면 오른쪽으로 미8군 용산 기지 사우스포스트로 들어가는 게이트(문·門)가 나온다. 광활하다고 할 정도로 넓은 잔디밭에 옛 건물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기지 구획은 1906년 당시 일본의 조선 주차군(임시 주둔군)이 대한제국으로부터 부지를 구입해 기지를 건설한 이래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총독 제 2 관저와  그자리에 있는  121 병원

사우스포스트에 있는 121병원 전경(우 사진). 원래 이곳에 있던 조선 총독 관저(좌 사진)

​'미8군로(路)'를 따라 남하한 뒤 'X군단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자 121병원이 나왔다. 1960년대 초 경기도 부천에 있던 후생병원을 이곳으로 옮겨놨다. 병원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1904년 러·일전쟁 후 건축된 총독 관저는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다.

총독 관저는 1960년대 초 철거되고 그 자리에 121병원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 관저에서 뒤편 언덕에 있는 군사령부까지 지하 터널이 조성돼 있었다. 터널은 콘크리트를 부어 폐쇄한 상태다. 일본군 사령부 청사는 광복 후 미 7사단 사령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됐다.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총독 관저에서 뒤쪽 조선 군사령부까지 지하로 뚫린 터널은 아직 남아있다


  이어 일본은 남대문 밖에서 한강에 이르는 광활한 땅을 탈취하여 마음대로 경계를 정하고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당시 추밀원장)를 특파대사로 파견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11월18일 새벽 2시, 을사보호조약은 다섯 대신에 의해 서명되었으나 최고 주권자인 고종의 재가를 받지 못했다.




  西小門 시가전
 


순종 즉위 5일째인 7월24일,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丁未(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거기에는 조선 정부가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과 재정 및 중요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얻을 것 등이 규정되었다. 특히 정미7조약의 부속 각서에는 군대 해산에 관한 조항이 있었다.


軍隊 해산(1907年 8月 1日) 직후 朝鮮軍의 반란이 일어나자 朝鮮軍 남병영을 습격해 점령한 日本 軍人들. 軍隊 해산에 항거한 武力 抗爭으로 朝鮮軍측은 100여名의 戰死者와 200여名의 부상자를 냈다고 일뤼스트라시옹은 기록했다

 

軍隊解散뒤 鬪爭을 벌이다 포로가 된 朝鮮軍 兵士들 / 1907年09月07日字 프랑스 일뤼스트라시옹紙​



자결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



  1907년 8월1일, 군대해산의 명이 떨어지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성환 참령(소령)이 분노하여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했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이러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박성환의 유서는 사실상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는 해산을 거부하고 일제히 봉기했다.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남대문 전투.


  이들은 병영 주위에 경계병을 배치하고, 일본군과 결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시위대가 주둔한 南別營(남별영)은 지금의 서소문동 58-17번지 명지서소문빌딩(현재 개축공사중:동아그룹 빌딩 정문 건너편)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별영 터​ 군대새산시 시위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위는 남대문 옆의 대한상공회의소(위)과 그 뒷편의 올리브 타워 =구 명지서소문빌딩(아래)이다. 이 일대가 남별영 터이고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시위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렸던 역사의 현장이다



군대해산으로 시위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린 곳의 현재 모습 (서소문동 올리브타워(구 명지빌딩) )


  이때 이 두 대대의 병영과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0중대가 접근했으나 시위대 병사의 집중사격을 받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제10중대에게 제1연대 제1대대를 계속 공격케 하면서, 기관총 등으로 화력을 증강한 제51연대 제9중대와 공병을 투입했다.
 
  또 기관총 2정을 남대문 벽루에 고정시켜 원거리 사격으로 제9중대와 제10중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저항이 완강하여 접근이 어렵게 되자 다시 1개 중대를 더 투입했다. 교전중 일본군 제9중대장 가지오(梶原) 대위가 전사했다.  
  
  서소문동 명지빌딩 개축으로 성벽 파괴
 

 일본군은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공병 폭파조를 투입하여 시위대 병영을 폭파했다. 진지가 파괴되고 탄약마저 떨어진 시위대 병사들은 병영에 돌입한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병영에서 철수하여 성 밖으로 탈출했다. 패세를 만회하지 못하자 李忠純(이충순) 참위(소위)는 지금의 중앙일보 사옥 정문 앞에서 장렬하게 자결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25명의 사상자가 났고, 시위대는 68명이 전사하고, 104명이 부상했으며,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시위대 병사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이후 의병 투쟁이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지서소문빌딩-대한상공회의소 건물 뒤편 서소문 골목길에는 불과 수삼 년 전만 해도 조선시대의 石築(석축) 성벽이 50m쯤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명지서소문빌딩이 개축되면서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