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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비판 - "'박영효 가옥' 실제 주인은 친일파 민영휘", 근데, 그래서?

문수봉(李楨汕) 2017. 12. 9. 12:06

문화재청 비판 - "'박영효 가옥' 실제 주인은 친일파 민영휘", 근데,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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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늘상 하던대로 이곳저곳의 문화재청 관련 뉴스를 들여다보다 이걸 발견했다. 이걸 보고 분노 게이지가 또 올라갔다. 자꾸 흥분하면 별로 좋을 일이 없는데. 

일단 학계에서 수십년 간 통설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정정하겠다는 것은 환영한다. 물론 그 전에, 경성부 가옥/토지대장만 확인해봐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건축물의 건립 내역을 30년 넘게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건축사학 쪽에서 얼마나 문서 사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가를 깨닫고 반성하도록 해야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이들 가옥의 전래 내력을 처음으로 조사한 것은 1963년과 1977년에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과에서 작성된 "도성내 민속경관지역 조사보고서" 인데, 이 책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한심한 방법으로 조사대상 가옥들의 내력을 조사한 걸 알 수 있다. 가령 현재 서울시 민속자료 제 2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륜동 김종국 가' 의 조사내용을 보면 이런 식이었다.

집주인 김종국 (80세) 씨가 지금부터 50년 전에 수원에서 이사왔을 때부터 이 집은 지금처럼 낡아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네 사람들은 300년 전 문묘 요사의 한 부속 건물로 지어진 집이라고들 말하고 있으므로 그 축조연대는 못해도 최소 200년 이상 올라갈 수 있는 집이라 여겨진다.
 
그렇다. 건물의 내력과 건축 연대를 밝히는데 무려 '동네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이 이 조사보고서에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제 와서라도 좀 체계적으로 서울시내의 건축 문화재들에 대한 정밀 연혁조사가 필요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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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대체, '관훈동 민씨가옥'과 '옥인동 윤씨가옥'이 무슨 헛소리냐?

일단 먼저, 박영효 가옥 실제 주인이 '친일파' 민영휘라고 치면, 박영효는 친일파 아니었고?

박영효가 태극기를 창안했다는 사실만 떠올리는 모양인가본데, 박영효는 1910년에 일본 후작 작위를 받았고,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고, 1926년에는 무려 중추원 의장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1932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에 피선되기까지 했다. 민영휘에 못지않은 만만치 않은 친일 행적이 있다 이 말씀이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에서 졸지에 '관훈동 민씨 가옥'으로 이름이 바뀔 운명인 이 집. 
여기서 안채만 원래의 건물을 가져온 (그나마도 부재의 70퍼센트는 버리고 왔지만) 것이고 별당과 사랑채는 신축이다.


이 가옥이 원래 자리에 있었을 때 (현재 인사동 '경인미술관' 자리다) 촬영된 사진. 1979년 무렵의 모습.
 1977년 당시 이 집의 지정명칭은 그 때의 소유주명을 따서 '관훈동 이진승 가'였다.


문화재청과 서울시의 지정명칭 변경에 대한 변명은 이렇다.

"두 가옥의 건립자가 대한제국∼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친일파이고, 어느 한 인물이 아니라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공동 거주하였으므로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은 <관훈동 민씨 가옥>으로,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는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어이구, 그러세요?  그럼, 전국의 수많은 고택과 생가들 이름도 전부 바꾸시는 건 어떤지? 

여기도 어느 한 인물이 아니라 집안의 여러 사람들이 공동 거주한거니까 말이다. 가령 충청남도 예산의 "추사 김정희선생고택"은 '김씨 가옥'으로, 전라북도 정읍의 "전봉준선생고택"은 '전씨 가옥'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 이도저도 싫으면 1977년 당시의 지정명칭대로 '관훈동 이진승가'와 '옥인동 서용택가'라고 바꾸는 건 또 어떨까?

이건 정말 이 가옥의 옛 내력을 대중에게 은폐하려는 수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서 친일파가 살았거나 말거나, 이 집들이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지어진 서울 부잣집의 대표적인 유적이라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착각하는 사실 하나. 지금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볼 수 있는 아래의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는 가짜다.


이 집은 '옥인동 서용택가'라는 이름으로 1977년에 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관리 상태가 너무나 부실한 나머지 1997년에 문화재 지정해제되었다. 이미 1963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을 당시에도 각 방마다 하나씩 세를 놓아서 자그마치 14가구가 세들어사는 형편없는 셋집이었다.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그 집 지붕에 구멍이 나서 천막을 덮든 말든, 함석판으로 방을 둘러버리든 말든, 아무 상관도 안 하다가, 20년이 지난 뒤에 관리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해제해버리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문화재 행정인가는 모르겠다.

뭐, 나의 경우는 남양주 호평지구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회곽묘 공동묘지를, 개발업자가 "이따위 돌덩어리 몇 개는 포크레인으로 빨리빨리 파내지 뭘 호미로 긁고 앉아 있냐"고 투덜대면서 통째로 갈아엎어버리는 꼴도 고스란히 목격했다.  

문화재 지정 해제와 동시에 이 집은 철저하게 방치되기 시작했고, 이제 서울시 도심지구 재개발 계획에 따라서 조만간 헐릴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꼴의 집이 한때 서울시 지정문화재였다고는 믿지 못하겠지.

 '진짜'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의 현재 상황.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47-133번지)

그리고, 이 기사에는 소개되지 않은 또 다른 개명 사례가 있다. 이제는 '가회동 한씨 가옥'이 된,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가 그렇다. 이 집의 경우는 이상하게도 너무나 소리소문없이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정말 더 이상한 것은, 이 집은 70년대 조사당시부터 건축주의 내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그 건축주가 만만치 않은 또 다른 친일파였던 탓이었는지 여지껏 단 한번도 그 내력이 대중에게 정확히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의 가옥, '가회동 한씨가옥' (구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 정면 모습.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78번지 소재)

1977년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본 조사자는 일정기 이 건물의 일부 보수의 현장감독으로 있었던 일이 있다. 그 때 대문짝이 사이틈이 크다 하여 별로 낡지도 아니한 것을 새로 제작하여 달았는데, 그때가 1940년이었으니까 1920년대 이후의 건물로 추정하는 바이다. 이 건물은 당시에 친일파 한상룡 씨 저택이었다.

그렇다. 이 '한씨 가옥'의 '한씨'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자 한성은행의 발기인이며, 조선의 대표급 자본가로서 일제 말엽까지 수많은 '보국단체'에 가입했던 "일제하 최악의 매판자본가 (*임종국 선생의 평가)" 였던 한상룡 (1880~1947)이었다.



물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 책에서 증언을 토대로 기술한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지만, 이 집의 경우는 그 건축주의 정체를 증거하는 수많은 자료가 존재한다.

아래는 일제시대 (1912년)부터 1950년대까지 작성된 가회동 178번지의 토지대장이다. 소화 3년 (1928년) 8월 7일자로 한상룡이 이 지대의 소유권자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1940년에 출간된 한상룡 자서전 격의 책인, '창남수장 (暢楠壽章)'에도 이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사진도 실려있다. 집의 측면 모습이 담긴 아래 사진을, 바로 밑에 올려놓은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보라.


도대체 왜 이 집을 '산업은행관리가'나 '한상룡 가옥'이라 부르지 못하고,'한씨 가옥'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렇게 '민씨', '윤씨', '한씨'로 부르는 건 마치 1980년대까지 월북 작가나 예술인들의 이름을 지칭하면서 '이 모씨' 또는 '김XX'로 지칭한 것과 뭐가 다른가?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해서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노력이 아닌가?

잡설이 너무나 길어진 것 같지만, 여하튼 문화재청에서는 확실한 원칙을 세워서 문화재 지정명칭을 고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랬다 저랬다 하는 동안 학계에서는 계속 혼동만 받게 되고, 이런 부분에 관심도 없는 보통 관광객들은 더더욱 혼란스러워할 따름이다. 

부디, 헛소리 그만두고, 변명도 그만두고, 원리원칙을 확실히 세워 문화재 행정처리를 해주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