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Ⅱ-유성룡,광해군,최명길,정도전,세종,
6.유성룡(柳成龍) -조선의 분할을 저지한 외교 宰相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15만 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침략 명분은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참전한 명과 강화회담을 하였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다시 군대를 보냈다.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 이라고 한다.
우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칭하여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之役)’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왜구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이 조선을 정조준해서 침략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명의 참전으로 국제전이 된 ‘동아시아 7년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단순히 임진왜란이라고 명기하는 것은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왜란 진행 과정에서 조선은 소외된 채 명과 일본이 조선의 분할을 논의하는가 하면, 명은 조선을 직할통치(直轄統治)하려고 했다. 왜란은 열전 못지않게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7년의 전쟁기간 중 4년이 휴전상태였음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임진왜란을 동북아의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고, 역사적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왜란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고 선조를 설득하면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성룡이 특히 명과 일본의 조선분할 논의를 감지하여 이를 저지시킨 뛰어난 외교적 감각과 명의 조선 직할통치를 저지시킨 탁월한 ‘외교 재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성룡은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의하면 유성룡(1542~1607)은 학문은 뛰어났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는 청빈한 생활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성균관에 입교 후 1566년 문과에 급제하고 1590년 우의정을 시작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삼정승 관직을 모두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권율(權慄)과 이순신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배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민정·군정의 최고관직에서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서 각종 시무책을 제기했다.
평안도 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그는 정병을 양성하는 한편 병농일치의 원칙 아래 거주지 촌락단위로 지방군인 속오군을 편성하는 등의 군사기구 개편을 주장했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유성룡의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557년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 당대 최고의 스승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로 들어가 도산서원에서 수학했다.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한 서당을 지으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그 마음을 담아 서애를 자신의 호로 정했다고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나라에 충성한 문신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율곡 십만양병설의 진실공방
임진왜란의 원인과 결과 규명에 있어 늘 등장하는 문제는 조선의 대비부족과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다. 십만양병설은 《선조수정실록》을 비롯해 이이의 전집인 《율곡전서(全書)》 등 몇몇 사료에 기인하는데,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전쟁을 예견해 십만양병을 주장했으나 유성룡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을 초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국사학계가 인용했고 한국사에도 이 내용이 실린 후 통설이 되어 왔다.
학계에서는 양병론이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중대한 양병론 발언이 제자들의 기록에만 나오고 율곡 본인의 저서나 선조실록에는 나오지 않으며, 다만 《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의 논평 형식으로 실려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곡이 병조판서로 임명된 후 군정개혁을 촉구할 때도 십만양병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선조 때 인구는 23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거기서 10만 양병은 인구 구성비로 보나, 국가 예산 규모로 보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율곡의 양병론이 실체가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십만양병론이 처음 등장하는 《율곡행장》이 작성된 1597년에 유성룡이 영의정인 동시에 전국의 장수들을 총괄 지휘하는 도체찰사였는데 유성룡이 10만 양병을 반대했다는 허위 기록을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록에는 후대의 효종, 숙종, 영조, 정조 등 역대 임금과 대신들이 이율곡의 십만양병론을 거론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왜적이 아니라 여진족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당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사망하고 히데요시가 아직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던 시기였던 반면, 조선의 동북방 지역에서는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 큰 위기가 닥쳤던 만큼 십만양병설이 사실이라면 일본용이 아니라 동북방 여진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율곡이 십만양병론을 제기했을 때 유성룡은 부제학이었다. 당시 그는 ‘변방방위책 5개조’를 올렸으나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십만양병설에 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십만양병설은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임진왜란 10년 전의 상황으로 미루어 10년 후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십만양병을 주장했다기보다 당시 북노남왜(北虜南倭)의 안보적 위협을 감지한 이이가 조선의 안위를 위해 10만 양병을 제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침공했는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의 원인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1.도요토미의 심리적 공명심과 영웅심 등 개인의 입장을 근간으로 하는 설, 2.조선이나 명에 대한 일본의 무역과 결부된 경제적인 면을 중시하는 설, 3.일본 국내의 번주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해외원정설 등이 있다.
히데요시는 장기간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무장들이 양산되었으며 이 훈련된 무장들을 조선과 명 정벌에 동원하면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연구서들이 밝히고 있다. 영토를 넓혀 부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줄 수 있고, 국내에 두면 골칫거리인 무장들을 해외의 전쟁에서 소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을 왜구와 동일시하여 무시했지만 일본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5세기 후반부터 규슈 지방에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등을 통해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투력과 병법이 대거 축적되었고 특히 유럽에서 수입한 조총을 자체 생산하면서 일본의 군사력은 한층 증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일본을 통일하고 그 군사력을 해외로 분출한 것이 임진왜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과 같이 히데요시도 조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조선 왕국이 일본에 굴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마 도주에게 조선 정벌의 뜻을 밝히면서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복속토록 해 보라고 했다. 조선 국왕을 일본의 지역 영주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양국의 사정에 정통한 도주는 그러한 내용을 그대로 조선에 전할 수 없다고 보고 일본에서 새 장군이 탄생했으니 축하를 위한 통신사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으로 고쳐서 조선에 전달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일단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도록 설득했다.
對일본 조선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
우여곡절 끝에 1590년 선조는 서인 황윤길을 통신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일본과 교린관계를 희망한다’는 선조의 국서를 지참했는데 이 문서가 대마 도주에 의해 교린관계가 아니라 ‘공물을 바치기 위한 사절’이라고 고쳐졌다. 도주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다르게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의 국서도 위조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황윤길 일행을 ‘입공사(入貢使)’로 간주했다. 그리고 회답하는 국서에서 자기가 ‘태양의 아들’이라면서, ‘명나라를 정벌코자 하니 조선이 길을 안내해 달라’고 했다. 문서를 고치는 데 익숙해진 대마 도주는 일본의 국서를 ‘명에 조공하러 가려 하니 조선이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고 다시 고쳤다.
귀국 후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침략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담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 생각건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조짐이 없었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눈이 쥐와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도 했다.
선조에 대한 보고에서 김성일은 “윤길은 공연히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조정은 의견이 갈라졌다. 이때 유성룡은 동인이었지만 그는 전쟁이 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우인 김성일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그대 의견이 정사와 다르니, 장차 전쟁이 터지면 어찌 하려오?” 김성일은 “나 역시 왜국이 끝내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게 아니오. 윤길의 말이 하도 지나쳐서 안팎으로 민심이 혼란스러울까 진정시키려 그런 것이오”라 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정의 논의가 이러한 만큼 왜란에 대한 조선의 대비가 소홀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선조대의 국내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조 시대에 조선은 명종 때의 외척정치가 청산되고 사림정치가 시작됐는데 이황과 조식을 필두로 한 동인과 이이와 성혼 등을 필두로 한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임진왜란에 즈음해서는 파당 간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조선 조정은 변화하고 있는 주변국가 정세에 어두웠다. 특히 일본의 국내정세 변화에 대하여 무심하였고 막연한 평화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바다에 강하고 육지에 능하지 못하다는 관념에서 왜군이 상륙한 후에 격멸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선조의 요동 內附를 저지한 유성룡
명나라에 원병을 청원한 이덕형
일본군이 거침없이 북상하자 선조는 서울을 사수한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개성으로 피란을 갔다. 개성에 이르러 이항복(李恒福)은 명에 원병을 청하고자 하였으나 윤두수(尹斗壽)는 “명군이 한번 우리 경내에 들어오면 그 후의 난처한 우려는 이에 배할 것이다”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자력으로 방어하기에는 불가능한 시점에 와 있었다. 임진강 전투의 패보가 들리자 비로소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삼아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 파천시 계획은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발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빠른 속도로 북상해 평양을 함락시켰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선조는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가서 명에 내부(內附)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이항복이 동조했다. 유성룡은 압록강을 넘는 데 반대했다. “임금이 한 발짝이라도 우리 땅을 떠나면 조선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朝鮮非俄有也).” 또한, “왕이 없으면 구심점이 없어져 백성들이 돌아설 것이고, 명나라가 도우려야 도울 수 없게 된다”고 했다.
패전하는 조선군을 믿을 수 없었던 선조는 어떻게 해서든지 명에 의존하고자 했다. 유성룡은 “동북의 여러 고을이 아직 건재하고, 충의에 찬 의병이 며칠 안에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하면서 선조를 계속 설득해 요동 내부를 막았다.
윤두수는 함경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유성룡은 함경도로 가는 것도 반대했다. “지금 북도로 깊이 들어가면 왜적에게 차단되어 명군이 와도 소식이 두절됩니다. 또 왜군이 북도까지 쳐들어와 사세가 궁해지면 오랑캐의 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마땅히 서쪽으로 옮겨 명군을 맞아 중흥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함경도로 갔다가 길이 막히면 명군과의 연락이 끊기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사로잡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이때 함경도가 가토에게 점령되어 두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 유성룡의 판단이 적중했다. 함경도로 갔으면 왕이 생포되었을 것이다.
유성룡은 명의 파병을 독촉하자고 했다. 빨리 파병하지 않으면 조선군이 일본군이 되어 요동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다고 압박할 것을 주장했다. 명도 영변의 난을 맞아 몽고, 여진족과 싸우느라 지쳐 있지만 일본이 요동으로 쳐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명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유성룡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明의 참전과 脣亡齒寒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은 국세가 기울면서 영변의 난이 진행되고 요동의 북방에서는 여진의 동요가 확대되고 있었다. 1430년대 이후 내륙 아시아 변방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몽고의 알탄 칸(Altan Khan)과 만리장성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따라서 명이 조선에 출병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왜군이 서울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접한 명은 결국 참전했다. 요동의 조승훈(祖承訓) 등이 5000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자 이에 놀란 명은 송응창(宋應昌)을 총지휘관 경략(經略)으로 삼고 도독에 이여송을 임명하여 4만5000의 군대로 다시 평양성을 공격해 탈환하였다.
국내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명이 파병한 것은 조선이 명의 ‘동방 울타리’라는 인식으로 한반도가 중국에 갖는 지정학적·전략적 가치를 단순명료하게 일러주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론에 근거하고 있다.
명으로서는 조선이 일본에 떨어지면 육로로는 요동과, 해로로는 산동과 연결되는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여 그를 전진기지로 삼아 중원을 노리는 상황을 가장 우려하였다. 명의 외교관인 설번(薛藩)이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 “신이 깊이 걱정하는 바는 조선이 아니라 명의 국경입니다. 무릇 요동은 북경의 팔과 같은 곳이고,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와 같은 곳입니다. 영평은 국토를 보호하는 중요한 땅이고, 천진은 또 북경의 문입니다. 200년 동안 남쪽의 복건성과 절강성이 끊이지 않고 왜의 화를 입어 왔으나, 오직 요양과 천진에 왜구가 없었던 것은 조선이 울타리가 되어 막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왜로 하여금 조선을 한번 점거하게 한다면 영평과 천진이 먼저 그 화를 입고, 이에 북경이 놀라 진동할 것입니다”고 출병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순망치한의 논리는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 1950년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 여부를 놓고 당 지도부에서는 파병반대 주장이 많았으나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 마오는 보차상의 순망치한(輔車相依 脣亡齒寒)과 호파당위(戶破堂危) 즉, ‘대문이 무너지면 집 본채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오늘날 중국의 북한 감싸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明·日 강화회담과 소외된 조선
유성룡과 그의 아들 유진을 모신 병산서원
1593년 평양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승전한 이여송은 황제에게 승전보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 바로 북쪽인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패하고는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평양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본도 벽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서울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남쪽 해안으로 철수했다.
1592년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듬해 6월 29일 진주성 함락 이후 1597년 2월 21일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 4년 동안 전투가 없는 소강상태에 이른다. 이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명은 처음부터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일본군과의 격전을 피하고 일본과 강화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뒤 경략 송응창은 좌승지(左承旨) 홍진(洪進)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이 원병을 요청한 이후 명 조정의 의견이 처음에는 압록강만을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가, 평양까지 내려오자 평양만을 지키려 했고, 개성까지 내려오자 개성만을 지키려 했다”고 말했다.
일본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 공격 직전에 조선과는 전쟁의 뜻이 없으니 길을 트라 하였고, 임진강을 끼고 대치하고 있으면서 강화를 청했고, 그 후에도 강화회담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유키나가가 강화회담을 제의한 이유는 조선 사정에 정통한 대마도주가 그의 사위라는 점도 관련이 있을 것이나 사실은 무혈점령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명군의 총책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비롯한 병부는 “우리가 왜와 원수질 까닭이 없다. 속국이 넘어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특별히 군사를 일으켜서 서울과 평양을 수복시켜 주었다. 조선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더 이상 고된 싸움을 벌여서 이미 왜와 강화하기로 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올바른 계책이 못된다”고 황제에게 건의했다.
명은 1592년 9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으로 보내 고시니 유키나가와 회담하고 그 결과를 당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에게 알려 왔다. “왜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50일 기한으로 왜병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서 약탈하지 말 것이고, 조선군사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와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일 양국이 휴전에 합의한 것이다.
明·日 휴전을 감지한 유성룡의 君命不受論
이러한 명-일 회담에서 조선은 완전히 소외되어 어떤 내용이 오고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회담의 동향을 눈치 챈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1592년 11월 유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서장에서 “명군의 행동이 오로지 강화계책뿐인데 이것은 반드시 명 조정의 계책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은 왜적을 두려워하여, 전쟁을 그치려고만 합니다. 우리 측에선 만약 이 강화가 이루어지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치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더더욱 수습하기 어렵고, 만 가지나 될 낭패스러운 일이 앞으로 닥쳐 오게 될 것입니다. 아주 상세하고 치밀하게 대책을 강구해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잘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또한 유성룡은 “예로부터 남을 구원하는 측과 남에게 구원을 받는 측은 그 뜻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중국이 왜적을 토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중지하려는 것도 중국을 위해서 중지하려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중국이 어찌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유성룡은 명군의 후퇴를 막고 왜와 싸우도록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협상 대상은 명 제독 이여송뿐이었다. 그 윗선의 경략 송응창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전쟁 현장 가까이는 아예 오지도 않았다.
유성룡은 이여송의 진영을 방문해서 퇴병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간곡히 설명했다. 1.남쪽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명군이 갑자기 물러가면, 나라를 지킬 생각이 없어져 적군에게로 귀의하게 될 것이다. 2.우리 땅은 한 치도 적에게 넘겨줄 수 없다. 3.우리 장수와 군사들은 이제 명군이 물러나 버리면 분개해서 모두 흩어져 버릴 것이다. 4.명군이 물러가면 후방은 모두 빈다. 그 빈틈을 적이 쳐들어오면 임진강 이북 지역도 보전하지 못하고 요동은 곧바로 위협받는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여송은 이 문제가 명 황제와 조정의 결정이니 자신이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유성룡은 군명불수론을 내세워 “장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고, 진실로 지금은 이길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이 좋은 기회를 두고 어찌 수천 리 밖에서 적병과 싸우는 일을 임금께 요청해서 합니까”고 설득하면서 싸움을 재촉했다.
유성룡이 계속 남진을 주장하고 휴전회담을 반대한 것은 이대로 있으면 명과 일본에 의해 조선이 분단될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화는 명의 기본 방침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강화해야겠다는 것이 명의 기본 정책이었다. 그것을 방해하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처단하겠다는 것이 명의 기본 태도였다. 당시 명의 총병 이영(李寧)과 유격 전세정(錢世禎)은 유성룡에게 명 조정이 보낸 패문을 보여주면서 명 조정의 처분에 따라 행동할 것과 조선군에게 일본군에 보복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유성룡이 강하게 반발하자 전세정 등은 천자의 명령이니 계속 고집을 피우면 명군을 거두어 철수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오히려 심유경은 조선에 책임을 돌려 조선이 송응창의 금령(禁令)을 어겨, 나무하고 풀 베는 일본군을 습격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복수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한다고 공공연히 일본의 입장을 비호하는 형편이었다. 심유경은 당시 동남 연해지역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들에게 이른바 ‘심유경 표첩(沈惟敬 票帖)’이라는 통행증을 발급해 준 뒤, 조선에 대해 이를 소지한 일본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선분할 제의와 국서 위조
휴전을 성사시킨 심유경은 북경을 다녀와 1593년 4월 용산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시 비밀리에 만나 회담했다. 중국 사가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난해 회담에서 유키나가는 심유경에게 1.화친 2.할지 3.조선4도를 나눠 일본영토에 속하게 하고 대동강을 경계로 삼는다 4.무역은 종전대로 한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심유경이 일측과 협의한 결과 보고에도 ‘대동강을 경계로 조선을 나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유경과 유키나가가 휴전을 합의한 그 시점에 이미 대동강을 경계로 분할을 협의했고 그에 따라 일단 명군은 개경으로, 일군은 남해로 후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명 조정의 지침을 받아 온 심유경은 용산회담에서 명측의 입장을 전달했고 명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6월 두 명의 사절을 일본에 파견했다. 명의 사절은 사용재(謝用梓)와 심유경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명의 사절에게 히데요시는 7개항의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1.황제의 현숙한 여자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2.관선과 상선의 왕래를 허용한다. 3.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서약서를 쓴다. 4.조선의 8도중 4도만 조선국왕에게 주고 4개도는 일본이 갖는다. 5.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일본에 보낸다. 6.두 왕자(순화군·의화군)는 돌려보낸다. 7.조선의 대신이 위약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쓴다.
그런데 심유경 등이 명에 돌아가 회담 결과를 보고할 때는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항은 온데 간데 없고, 국서를 완전히 변조하여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내용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1596년 9월 일본에 파견된 명의 사절은 봉왕(封王)의 금인(金印)과 함께 명 황제의 칙서를 히데요시에게 전달했다. 그 칙서에는 ‘귀하를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고만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가 기다리고 있던 강화 7개항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욱 믿기 어려운 일은 북경으로 돌아온 명 사절이 진상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고 표문을 위조해서 완전히 거짓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고 사은(謝恩)하였다’고 상신하고, 심지어는 ‘일본 국왕 풍신수길이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양국의 국서가 위조되는 상황에서 화의가 성사될 리 없었다. 히데요시는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지지부진 끌던 4년여의 화의는 끝내 결렬되었다.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14만5000의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했다. 정유재란이다.
明의 分割易置를 수용한 선조와 유성룡의 저지 노력
명은 일본과 강화하면서 군사적·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 방안으로 명이 직접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을 통치하는 직할통치론(直轄統治論)이 대두되었다. “조선이 왜적을 막지 못해서 벌써부터 명에 근심을 끼치고 있습니다. 조선을 나누어서 2, 3개 지역으로 만들고, 왜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를 맡겨(分割易置), 조선을 명의 울타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명의 급사중 위학증(魏學曾)이 황제에게 건의한 것이다.
1593년 11월 명은 사신을 조선에 보내 먼저 분할역치를 실현하려 했다. 더 이상 조선을 구해 줄 수 없으니 우선 왕을 교체하고, 명이 파견한 사신 사헌(司憲)의 관찰과 판단에 따라 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사헌은 선조를 만날 때 스스로 남면(南面)하고 선조는 북면(北面)하게 했다(당시의 예법은 윗사람이 북에 앉고 아랫 사람이 남에 앉는다). 거부하면 조선왕을 만날 필요도 없이 칙서만 던져 놓고 돌아가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선조는 남면하고, 사헌은 마치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듯 했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내일 나는 곧바로 사신 앞에 왕위를 내놓는다. 오직 그만이 내가 할 일이다”고 했다. 유성룡은 고려 때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극심했던 폐해를 상기시키면서 왕위를 내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선조는 오히려 명의 관원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힘이 약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유성룡이 “명군을 계속 청원하면 지금 우리 힘으로는 군량 등 전쟁 물품을 조달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군대를 기르고 조련하는 것만이 오직 가할 따름입니다”고 하자, 선조는 “명군이 있어야만 민심이 의지할 수 있고, 명군이 있어야만 불측한 자들이 못된 죄를 꾸미고 간사한 음모를 꾀해도, 필시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전라일도의 민심이 극히 나쁜 상태에 있다”고 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결국 선조는 자신이 직접 사표를 썼다. 유성룡은 “사신 앞에서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고 선조를 설득하는 한편, 평소 잘 아는 유격장군 척금(戚今)에게 양위가 불가함을 설득해 동의를 구했다.
문제는 사헌이었다. 왕을 기어이 바꾸겠다는 역치(易置)의 열쇠는 사헌이 쥐고 있었다. 유성룡은 조정의 신료들을 모두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서서 “조선의 불행은 명을 치려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당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결국 사헌이 납득했다. 선조의 유임도 인정했다.
사헌은 조선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유성룡의 남다른 굳은 충성심과 독실한 인의는 중국의 문무백관과 장수들이 모두 기뻐해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왕은 참으로 현명한 재상을 얻었습니다”고 했다. 그리고 유성룡에게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적이 해를 끼친 것은 얼레빗과 같고, 명의 군사가 해를 끼친 것은 참빗과 같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일본군보다 명군의 착취가 더 심하다는 조선 백성들의 원성을 전한 데 대한 사헌의 반응으로 보인다.
백성에 대한 선조의 공포증과 일종의 적대의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선조는 “어디 선량한 백성이 있느냐”, “왜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변이 더 우려된다”고 하면서 이미 전쟁이 끝났음에도 명군이 더 머물러 있을 것을 요청했다.
明의 직할통치론과 조선의 병권 상실
충무공 이순신
분할역치가 수그러들자 곧 직할통치론이 대두했다. 명이 막대한 전비를 보전해 주지 못한 왕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직할통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요동 총독 손광(孫鑛)이었다. 그는 과거 원나라의 예에 따라 조선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명에서 순무(巡撫)를 파견하고 그로 하여금 조선 신료들을 전부 행성에 소속시켜 관리하고 조세징수권 등을 갖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명의 책략에 유성룡 등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선조가 이를 받아들이려 했다. 선조는 우리의 힘이 약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 이유는 명군이 있어야 불측한 자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실록에는 선조가 ‘한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 명군의 장수들을 섬기고, 심지어는 그 휘하의 편비장까지 온몸을 굽혀 정성을 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직할통치론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후 더욱 자주 거론되었다. 명의 안위를 생각하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고, 갈수록 증가하는 전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유성룡 등의 반대로 직할통치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명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왜란 초기에는 명군 지휘의 총책임을 경략(經略)에게 맡겼으나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은 형개(邢价)를 총독으로, 양호(楊鎬)를 경리로 파견했다. 급수가 시랑(侍郞)급에서 상서(尙書)급으로 오른 것이다.
양호는 부임하자마자 경리아문을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을 장악했다. 선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신료를 접견했다. 양호의 권한은 국정 전반에 미쳤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것과 유사하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 병사들까지 직접 지휘하려 하고 조선군이 세운 공은 가로채고, 허물은 조선군에게 전가하는 횡포를 부렸다.
특히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경우, 명의 수군 제독 진린(陳璘)의 견제와 횡포 때문에 일본군을 공격하고 싶어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누차 상소하여 호소하기도 하였다. 병권을 쥔 양호가 수군 지휘권을 그들 제독에게로 넘기면서 진린이 조선 수군 위에 군림하고 이순신마저도 그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자 광해군(光海君)도 양호의 명령에 따르고, 그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임진왜란은 결국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끝나게 된다. 7년의 전쟁에서 승자는 없고 모두가 패자였다. 특히 조선으로서는 그 와중에 분단의 비극을 맞을 수도 있었던 국난이었던 것이다.
유성룡은 모든 公人의 귀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 이 모든 왜란의 과정을 지휘하고 도체찰사로 직접 명군과 함께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며 분할을 저지했다. 심지어 선조의 믿기 어려운 대명 의존과 조선 불신까지 감내하면서 왜란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동인이었으나 정파에 기울어지지 않았다, 온건한 타협주의자로서 붕당정치 속에서도 화해의 길을 모색하였다. 전시에 군량을 보급할 때도 완력과 폭압을 배제하고 위로하며 타이름으로 계도하니 백성이 즐거이 따랐다. 천성의 온유함과 이러한 유화적인 태도로 인해 “대신으로서 줏대가 약하고 체통이 없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길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조정이 안일할 때에도 이순신, 권율 등 인재를 요소에 배치해 전쟁에 대비하고 왜란이 나자 명군의 참전을 유도했다. 선조의 요동 내부를 막고 의병의 궐기를 예견했다. 마치 유성룡은 전쟁의 전말을 예측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탁월한 안목과 행동력을 수반한 준비된 재상이었던 것이다.
유성룡은 신의성실하고 또한 겸손했다. 그래서 명군 지휘부를 감동시켰고, 국란 중의 문란한 정치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조선의 국권을 수호한 것도 모두 유성룡의 치적이지만 그는 이 모든 일들에 스스로를 공치사하지 않았다. ‘신기로운 공을 거두었는데도 조용하기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는 옛말은 유성룡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는 왜란이 끝나갈 무렵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탄핵을 받자 “공론(公論)은 국가의 기강(紀綱)입니다. 대신으로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공론을 받고도 돌아봄이 없이 평일처럼 태연히 앉아 국사를 본다면 조정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 이상 변명도 반론도 하지 않고 사임했다. 선조의 간곡한 유임 권유를 뿌리치고 귀향한 후 다시는 권력의 주변을 맴돌지 않았다.
태종의 종친으로 유성룡과 30년을 함께 일하고 훗날 영의정을 두 번 지낸 이원익(李元翼)은 유성룡이 사직하자 선조에게 “누구를 택해도 유성룡을 대신할 정승은 없습니다. 유성룡이야말로 오로지 청렴, 개결, 근신, 지성으로 나라를 위해 왔습니다. 그가 퇴임한 마당에 신도 이제 물러가겠습니다”고 했다. 임진왜란을 유성룡과 함께 경험한 이항복은 그가 쓴 유성룡 행장(行狀)에서 “어느 한 가지 점을 꼭 집어 이분의 높은 점이라 거명할 수가 없다”고 최대의 찬사를 표명했다. 이항복과 수어지교(水魚之交)로 유성룡의 지척에서 왜란의 현장을 함께했던 이덕형도 “유성룡을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유성룡이 탄핵받고 사임하자 이순신(李舜臣)은 실성해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며 대탄식을 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돼 유성룡이 파직되던 바로 그날 벌어진 노량대전에서 이순신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숙명적이었던 것 같다.
선조가 자신의 뜻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유성룡을 5년이나 영의정에 붙잡아 둔 것은 유성룡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사유화하지 않은 데 있다. 정파에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모든 공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징비록은 오늘도 말한다
유성룡은 사직한 후 낙향해서 《징비록(懲毖錄)》을 포함해 《진사록(辰巳錄)》 《군문등록(軍門謄錄)》 《근폭집(芹曝集)》 등을 저술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요지는 한마디로 ‘자강(自彊)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환란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힘을 길러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특히 징비록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지닌 불후의 명저이다. 그래서 징비록은 책이지만 국보(제132호)로 지정된 것도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 징비란 시경이라는 책의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 ‘미리 징계해 우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즉 우리가 겪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환란을 기록함으로써 훗날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특히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 한 사람의 정세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 둘째, 지도자가 군사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것, 셋째,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성룡은 다시는 이런 환란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했지만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의 화를 입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를 반복할 수 있다’고 했다. 신채호(申采浩)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남북분단과 한반도 주변국과의 관계, 그리고 동북아 정세 변화를 생각해 볼 때 《징비록》은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의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포럼 대표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월간조선
7. 광해군 - 외교로 부활한 패륜 군주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고 유배되었다.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 이복동생인 영창대군,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을 죽이고 결국 인목왕후까지 유폐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이다.
광해군은 사후에도 폭군(暴君),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 폐주(廢主) 등으로 매도되면서 조선 후반기 내내 ‘정치적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있었음에도 연산군과 함께 왕의 묘호(廟號·국상을 마친 뒤 붙여지는 祖나 宗)가 없고, 실록도 일기로 폄하되었으며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붙여지는 군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해군은 그러나 역사 속에서 비슷하게 기억되는 연산군과는 달랐다. 수년간 임진왜란의 현장을 누비면서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후에는 전란을 수습하고 복구하는 데 많은 공적을 남겼다.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파괴된 창덕궁과 경덕궁·인경궁을 중건하여 폐허가 된 서울을 복구했으며 왜란 때 소실된 서적들을 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이 이 시기에 쓰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後金·훗날 청)의 갈등관계에서 명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후금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끝내는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조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재조지은의 명분보다는 실리에 입각한 광해군의 자주적 외교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오히려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를 역사교과서에서는 중립외교 또는 중립 양단(양면)외교로 기술하고 있다. 중립이 외교정책 또는 안보전략이기는 하지만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구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조선으로서는 명과 청 어느 나라와도 외교를 하는 것이므로 양단외교가 광해군 외교의 특징을 잘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광해군의 외교를 지는 명과 뜨는 청 사이에서 ‘등거리 균형외교’를 전개한 것으로 개념화해 보려고 한다.
서얼의 둘째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폐주가 되는 배경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어려운 서얼의 둘째 왕자였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선조(宣祖)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 좌의정 정철 등이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를 제기했으나 선조는 자신이 총애한 인빈의 아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하고 유배를 가게 됐다. 이 일로 인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졸지에 왕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많은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서울을 떠나 파천(播遷)했던 선조는 민심을 잃고 광해군이 추앙받게 되자 심기가 불편해졌다. 광해군은 아침마다 선조의 처소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지만 선조는 그를 접견조차 하지 않았다. 선조의 태도는 분명 광해군에 대한 견제였다.
선조는 1602년에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았다. 선조가 새로이 맞이한 중전 인목왕후(仁穆王后)는 광해군보다 아홉 살 연하인데 결혼 4년 차에 아들을 낳았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파쟁이 확대됐다. 광해군이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아야 한다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이 크게 대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07년 선조가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선조는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릴 수는 없어 병석에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하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세력의 후원에 힘입어 광해군은 파란만장했던 16년의 왕세자 세월을 마감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에 결정적 공을 세운 ‘킹메이커’ 대북은 서인, 남인, 소북에 비해 그 세가 매우 미약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등에 업고 권력을 독차지한 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대북의 손을 들어주고 폐모살제까지 묵인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패륜아’가 된 것이다.
전란에서 체득한 광해군의 외교·안보 감각
광해군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세자가 없는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조선은 다급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조는 더 이상 세자책봉을 미룰 수 없었다. 결국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분조가 탄생한 것인데 분조란 ‘조정의 분소’로 조정을 둘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權攝國事)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서 평안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했다. 조선 역사에서 광해군만큼 왕궁에 기거하지 못하고 전란의 현장을 누벼야 했던 왕이나 왕세자는 없을 것 같다.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이 군량과 군수물자를 더 지원해 주도록 강압했다. 그 와중에 시달리는 것은 조선 민중이었다. 싸울 의지는 없이 장기 주둔에 들어간 명군의 민폐는 극심했고 군기가 풀어진 명군은 약탈과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군과 명군 양쪽으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민중 사이에서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한탄도 나왔다.
그러자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에게 남방으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지원업무를 총괄하라고 요구했다. 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남행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곳곳을 순행했다. 각종 세금과 노역 때문에 도망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던 상황을 파악하고 포악한 지방관들을 처벌하여 지역 민심을 위로했다.
1597년 정유재란(왜군의 2차 침략)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다시 전라·경상도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아야 했다.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로 광해군의 분조 활동이 포함되는 이유이다. 이렇게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민초들과 함께했던 분조의 활동은 광해군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또한 광해군은 지원하러 온 명군의 부패한 모습에서 기우는 명과 북방에서 일어나는 여진의 새로운 흥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전란의 현장이 동북아의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조선의 안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 후 명과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분명 그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명·청 교체기의 광해군 외교가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7년에 걸친 왜란의 현장에서 체득한 광해군의 경험과 안목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 책봉의 발목 잡고 조선을 흔드는 明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상은 확고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 조정이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1594년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명 조정에 주청(奏請)했다. 광해군이 전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워, 온 백성이 그를 추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 조정은 조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광해군이 맏이가 아니라 둘째이므로 그를 책봉하면 ‘장유(長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주청사(奏請使)가 여러 번 북경에 갔지만, 명은 오히려 광해군에게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명은 후금의 도전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조선을 명에 붙잡아두기 위해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던 왕세자 책봉 문제까지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원해 준 자신들의 재조지은을 상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위계승을 승인해 달라는 주청에 대해서도 명은 다시 차서(次序) 문제를 걸어 여전히 둘째 아들 광해군은 승인할 수 없다고 했다. 즉위한 지 1년이 돼서도 명은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조선에 보낸 문서에서도 임시로 국사를 담당하는 권서국사(權署國事) 광해군이란 호칭을 썼다.
조선의 사절이 임해군이 중풍에 걸려 왕세자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이유를 대자 명은 임해군이 왕위를 사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명의 사절이 서울로 와서 임해군을 직접 만나겠다고 우겼다. 당시 임해군은 역모 혐의를 받아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들 사절에게 은 수만 냥을 주고 위기를 넘겼다. 정치적 곤경은 넘겼지만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
드디어 1609년 명의 책봉사(冊封使)로 태감 유용(劉用)이 서울에 왔다. 태감이란 환관 또는 내시(內侍)를 말한다. 유용은 노골적으로 은을 요구했고 정식으로 책봉을 마치는 것이 급했던 광해군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으로서는 명과의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부패로 몰락해 가는 명의 모습을 확인하게 됐을 것이다.
기우는 明, 떠오르는 淸 사이에서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정세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그동안 명은 사방에서 지방 세력이 발호하고 변방에서 야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가운데 임진왜란에 파병까지 하면서 국세가 크게 기울었다. 반면 누르하치의 건주위 여진(후에 후금 건국)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와중에 누르하치는 남만주는 물론이고 동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진족의 부족을 통합했다.
명과 후금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북경으로 가던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로부터 광녕총병(廣寧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조선을 정벌하고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자’고 황제에게 건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명이 조선을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었음을 광해군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이성량은 왜란 시 조선에 파견된 명군 수장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자, 요동의 막강한 군벌(軍閥)로 조선의 내부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성량의 상주에 대한 명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조선이 비록 흠이 있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명나라를 섬겨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누르하치는 초피(貂皮)를 선물로 보내왔다. 광해군은 이들에 대해 기존의 유화책인 기미책(羈靡策)을 활용했다(‘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한다. 중국 한무제가 흉노(匈奴) 등 주변 세력을 무력이 아닌 세폐 또는 물자 지원의 방식으로 대했던 유화책이다).
광해군은 북방의 현장에서 여진의 흥기를 체득한 바 있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한편,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임진왜란의 피해가 크고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조선은 쇠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후금과 누르하치에 대해 오랑캐로 무시하던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현실적 시각에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선린 관계를 유지한다는 유연한 정책을 구사했다.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고 자강책 추진
광해군이 즉위했던 그해에 후금이 오라 및 동해지방을 공략했다. 명과 후금 관계의 변화와 조선의 주변정세를 꿰뚫어 보고 있던 광해군은 왜란 시의 전란의 경험을 토대로 전투상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견지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무엇보다 필요로 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그 기마군을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 안에서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남방으로 눈을 돌렸다.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어제의 적이었던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이지만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형세판단과 남방전략은 탁월한 것이었다. 국교 재개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을 왕래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오도록 했다.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각종 화포의 주조와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임진왜란에서의 체험이 작동한 것이다.
또한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윤근수(尹根壽), 황신(黃愼)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신료들을 비변사(備邊司)에 포진시켜 변방 관련 대책과 국제정세에 대해 협의했다. 왜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일선에서 수행했고, 명군이나 일본군 지휘부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이 조선을 침략했던 어제의 적인 일본과 전란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일본의 무기를 도입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의 명분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현대에 들어 미국은 전후 소련이 등장하자 하와이를 공격한 일본과 군사동맹을,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프랑스와 독일은 전후 유럽연합을 추진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영원한 것은 국가이익뿐이다’라는 현실주의 논리를 광해군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북방의 위기를 대처하는 데 있어 남방의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접근 또한 뛰어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明의 파병 요청과 광해군의 파병불가론
후금은 경제적 자급자족을 위해 요동지방의 비옥한 농토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명은 분명한 경계선을 정하고 여진족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금으로서는 무력침공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요동을 공격하고 무순을 점령했다.
명의 병부우시랑(국방차관)이 국서를 보내 누르하치가 공공연하게 반역을 행하였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조선의 파병을 요청했다. 명분은 왜란 시 파병한 재조지은이었다. 조선은 징병이 불가피하다는 것과 파병하면 후금과 적이 되어야 하는 문제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이 보인 반응은 신중했다. 후금은 최강의 기마군을 갖고 있어 미약한 조선군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음에도 명이 파병을 청한 것은 조선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만약에 조선이 명에 원병을 보낸다면 여진이 마땅히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할 것이므로 조선으로서는 영토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 명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비변사 신료들의 주장은 달랐다. 그들은 명이 문서에서 대의(大義)를 내세워 ‘재조지은’에 보답하라고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병력은 보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광해군은 곧 장마철이 다가오는데 대병을 동원하여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모험을 벌이려는 명군은 패전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자 광해군은 원병을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온 주체가 명의 병부와 요동도사라는 것을 문제 삼았다. 정식으로 황제가 칙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원병을 보낼 수는 없다고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광해군은 명의 병력으로 누르하치를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파병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파병을 미루면서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후금을 위무하는 국서 왕래에 그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많은 양의 모시·종이·소금 등의 물자를 지원하는 등 실질적인 유화정책을 강화했다.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는 임진왜란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잘 알기 때문에 조선이 다시 전란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명의 군사력이 후금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후금과 적이 되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으로 사료된다.
조선군 파병과 강홍립 항복의 진위논란
강홍립 등이 후금군에 투항하는 모습을 그린 김후신의 <양수(兩帥)투항도>.
그런데 북경에 갔던 성절사 윤휘가 황제 명의의 칙서를 받아왔다. 내용은 속히 원병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 조정에서 조선의 관망 태도에 불만이 커져 가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 광해군은 안팎으로 몰렸다. 파병을 거부할 명분이 없어졌다. 군대는 보내되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그리고 그간 유화해 온 후금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마침내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痛使·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한 인물이었다. 광해군은 원정군 사령관에 무장을 택하지 않고 언어에 능통한 측근을 임명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광해군은 출전하는 강홍립에게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으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작전지시를 했다. 조선의 정예병이 쓸모없이 희생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지침이다.
조선군은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강홍립은 후금군의 호위 속에 누르하치를 만났다. 조선군의 일부는 풀려났지만 최고 지휘관인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 억류되었다. 그는 억류된 와중에도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후금 내부의 정보를 광해군에게 보냈다. 그가 보낸 정보는 광해군의 형세 판단과 대외정책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런데 강홍립의 조선군이 후금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은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선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에게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와 특히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 여부이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작전지시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밀지를 내려 항복하도록 사전에 지시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광해군이 국왕 직속의 통역관 강홍립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사료에 나타난 작전지시 내용으로 미루어 명군을 위해 조선군이 궤멸하는 것을 원치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전세를 보아 후금에 투항하는 것을 용인했을 가능성은 높다. 광해군은 후금에 보여준 그간의 유화책도 고려했을 것이다.
전장에서도 강홍립 등 조선군 지휘부가 뚜렷하게 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고, 후금군에 항복한 것은 사실이며, 억류된 강홍립이 계속 정보를 보내온 것과 신료들이 강홍립을 역적으로 몰아세운 데 대해 광해군이 그를 감싸고 돈 것도 광해군의 의도된 별도 밀지가 있었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광해군의 치밀한 정보전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명과 후금이 싸우면 양자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해군은 정책 결정에 앞서 먼저 상대방과 관련된 치밀한 정보수집에 주력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으로 긴장했다. 1610년에는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하려고 이미 조선의 병마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조선과 후금이 오판에 의한 군사적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광해군은 척후(斥候)를 보내고, 첩자를 활용하여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전을 통해 대처했다.
일례로 광해군은 1611년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하세국(河世國)을 중용해서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했다. 문치(文治)에 치중한 조선의 정보전 능력은 취약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달랐다.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겪었던 체험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정보감각은 강홍립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료들은 강홍립 때문에 명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묵살했다. 광해군에게 강홍립의 정보는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오히려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주고, 가족들이 강홍립과 서신과 물자를 주고받는 것도 허락했다.
명이 재파병을 요구하려 하자 광해군은 조선이 원병을 다시 보내면 누르하치는 조선에 쳐들어올 것이니 조선이 조선 영토를 잘 지키는 것이야말로 명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계책이 된다고 명을 설득했다. 또한 광해군은 명 조정으로 자주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의 분위기를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1619년에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오히려 명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실전형 정보전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明의 요동 난민과 모문룡
1618년부터 후금이 본격적으로 명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조선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터가 된 요동에서 요민(遼民·명의 난민)들이 압록강 근처 진강으로 몰려들었다. 1619년 ‘심하 전투’ 이후에는 그 숫자가 훨씬 늘었다. 진강은 바닷길을 통해 산동성으로 갈 수 있으며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평안도에도 난민이 쇄도했다. 일부 난민은 강원도와 경기도까지 흘러들었다. 빈민들은 무리를 지어 조선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민 중에 명과 후금, 조선 사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이 있었다. 그는 1621년 심양과 요양이 후금군에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산동과 요동반도의 요민들을 규합하여 기습적으로 진강을 탈취했다. 명 황제는 병부에 모문룡을 지원하고, 수군을 그와 합세시켜 요동을 수복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배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식량과 군수물자 지원을 받아냈다.
문제는 후금이었다.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들어온 것이 후금을 크게 자극한 것이다. 요동을 공략한 후금은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으로 진군해야 되는데 그 길목에 모문룡이 나타난 것이다. 광해군은 모문룡으로 인해 조선이 병화를 입을 수 있음을 우려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자 후금과의 접촉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이 조선에 들어오자 요민들과 명군 패잔병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1621년(광해군 13) 후금의 아민(Amin·阿敏)이 모문룡을 치려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모문룡은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간신히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후금과 사단이 생길 것을 우려한 광해군은 고심 끝에 모문룡에게 육지에 머물지 말고 섬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모문룡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던 광해군은 결국 모문룡을 가도라는 섬에 밀어넣은 것이다.
광해군에게 홀대받았던 모문룡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인조와 조선의 새 정권이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도록 돕고 조선 조정에 수시로 군량을 요구했다. 지나는 상선에 세금을 거두고 공급되는 군량미도 횡령했다. 모문룡은 그러다가 결국 1629년 명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再造之恩의 허상과 병자호란의 실상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비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의 외교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1619년 광해군이 명의 재파병 요구를 끝내 회피한 것과 항복한 강홍립을 옹호한 것이 후폭풍을 몰고 왔다.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재조지은을 저버리고 오랑캐(후금)와 손을 잡은 광해군이 도마위에 올랐다. 결국 재조지은 명분이 광해군의 현실외교를 압도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상 재조지은은 반정의 명분에 불과했다. 반정의 핵심은 소수파 대북의 전횡이었고 다수의 반정 세력이 이들을 응징한 국내정변이었다. 대외정보에는 그렇게 민감하고 치밀했던 광해군은 국내정치와 국내정보에는 그다지 치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이 신뢰하던 주변 인물의 기습으로 손쉽게 무너진 것이다. 인조반정은 정치와 외교의 간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광해군은 끝내 국내정치에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반정세력은 재조지은을 반정의 명분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줄곧 친명기저를 유지했다. 얼마 후 후금(청)은 명을 격파하고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은 칭제건원(稱帝建元)한 청에 의해 정묘, 병자호란을 맞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인조반정은 국내정치에서는 성공했지만 외교에서는 실패한 것이다.
광해군이 오늘에 부활한다면?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취했던 광해군 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병자호란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그래서 광해군은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오늘날 외교로 부활해 재조명을 받고 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외교문제가 불거질 적마다 그의 외교는 부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고 G2시대가 예견되면서 두 나라에 샌드위치된 한국의 외교가 화두가 되면서 광해군 외교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광해군의 외교가 주는 교훈은 두 강대국 사이의 균형외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 전략은 치밀한 정보전과 왜란에서 안목을 쌓은 정확한 형세판단이 뒷받침하고 있다. 광해군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할까? 필자는 광해군이 현 상황을 G2의 양극 체제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중국이 양극의 한 축으로 세계 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이 갖춰졌는지 여부는 앞으로 상당기간에 걸쳐 검증이 따라야 한다고 평가할 것으로 본다.
‘지는 명, 뜨는 청’ 사이에서 성공한 광해군의 균형외교를 ‘기우는 미국, 떠오르는 중국’에 대치하여 한국외교의 모범답안으로 주장하는 일부 견해에 대해서도 광해군은 시기상조라고 말할 것 같다. 광해군 외교가 부활하는 이유만으로 현재의 상황을 오판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포럼 대표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월간조선
8. 최명길(崔鳴吉) - 事大외교로 조선을 구한 외곬 主和論者
남한산성 수어장대. 인조는 淸軍에 포위되어 50여 일간 농성하다가 결국 항복했다
조선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500년을 이어 간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장구한 조선 역사의 전개 과정에는 세종 때와 같이 찬란한 영광의 시대도 있었지만, 반대로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야 했던 암울한 국난(國難)의 시기도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그 비극적인 역사의 하나였다. 조선은 명(明)의 참전으로 국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흥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세력관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기존의 대륙세력뿐 아니라 남방의 해양세력으로부터도 생존의 문제로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번에는 북방 대륙에서 만주의 청(淸)이 일어서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해야 했다. 조선 500년 역사는 이 굴욕을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임진왜란을 일본이 아닌 왜(倭)가 일으킨 난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병자호란도 병자년에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난은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떠오른 청(淸)이 조선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무기력한 조선은 여기서 왕조의 역사를 마감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난을 단순히 호란(胡亂)으로 치부하는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조선의 조정은 옥쇄하느냐, 아니면 항복해서 생존하느냐의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하는 ‘사대외교’를 통해 조선은 끈질긴 왕조의 역사를 이어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선두에는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 있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으로부터 조선 왕조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조차도 최명길에 대해 ‘항복을 주장하여 선비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형을 가리켜 ‘지천꾸러기’라는 말도 생겨났다. 지천(遲川)은 최명길의 호이다. 지천꾸러기는 애물단지를 일컫는 말로 남에게 까닭 없이 원망이나 힐책을 듣는 사람이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어원(語源)이 최명길에서 나온 것이다.
최명길은 누구인가?
최명길의 스승 이항복
<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두워지자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시의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안정되도록 노력하였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최명길의 신도비(神道碑・정3품 이상 고관들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 두는 비)에 기록된 비문이다.
이 비문은 최명길의 자손이 썼다. 주화론(主和論)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병자호란 이후 부정되고 소인배로 폄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명길의 졸기(卒記)는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품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명길은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 실질과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을 공부하였으며, 1605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하였다고 해서 파직당한 후 10여 년 동안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스승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귀양살이를 하던 중 죽자, 1623년 서인 강경파인 김유(金踰),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성공했다.
최명길 시대의 조선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모든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양반의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으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졌다.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이념은 퇴조하고, 성리학(性理學)으로 무장된 보수적인 사림(士林)의 명분론과 예론(禮論)이 정치를 주도했다.
양명학은 현실주의를 근간으로 이상주의 논리가 주류를 이룬 송(宋)의 성리학과 대조를 이루었다. 양명학이 조선에 전해져 최명길도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는 양명학 논리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양명학을 추종하는 사대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최명길은 정묘와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국난을 맞게 되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주화론을 이끌었고 척화론(斥和論)의 대표적 인물인 김상헌(金尙憲)과 대립했다. 최명길의 주화론이 결과적으로 조선을 구했지만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인해 호란 이후에는 백성과 어린 사대부들까지도 그를 탓했던 것이다. 과연 최명길은 지천꾸러기인가?
後金의 흥기와 정묘호란
최명길의 시대에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明)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다.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세우고 남하하면서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해졌다. 패권국으로 군림하였던 명은 지고 후금이 뜨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 끼인 조선의 입지는 어려웠다. 국내적으로는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패권을 놓고 명과 후금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약소국 조선이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은 임진왜란 때에 파병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조선을 격변 속에 끌어들여 후금과 싸움을 붙이려 했고, 후금은 조선이 중립을 지키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명의 변경을 점령하자 조선은 명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광해군은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를 정확히 판단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정책을 구사해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조선은 명군과 연계하여 후금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을 내세웠다. 후금에서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태종(太宗·홍타이지)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을 정벌하려는 야심가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배후인 조선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선과 후금의 충돌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었다.
후금은 명과의 교전을 위해 극심한 물자부족 문제를 극복해야 했다. 조선의 물자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조선에서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뒤 후금으로 도망간 잔당이 조선의 실상을 고하고 모문룡을 칠 것을 종용했다. 후금의 태종은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1627년 아민(阿敏)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이때 후금군에 포로로 있던 조선 장수 강홍립(姜弘立) 등도 함께 조선으로 왔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아민의 후금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여 파죽지세로 안주·평양을 거쳐 황주에 이르렀다. 놀란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란했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斥和論 vs 主和論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조선에 강화(講和) 의사를 표시해 왔다. 명으로부터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고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전략은 청 태종이 조선 공략을 결정할 때 이미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아민은 강홍립을 통해 1.압록강 이남의 변경 지역을 떼어 줄 것 2.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3.명을 치는 데 지원군 1만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은 주전론(主戰論)을 앞세운 척화파와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로 나누어졌다. 물론 명분을 중시하는 척화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주화론자들은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때 홀로 강화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바로 최명길이었다. 그가 주화론을 펼치자 척화론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인조반정을 함께 성사시킨 이귀가 주화론을 지지함으로써 일단 강화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몇 안 되는 주화파는 최명길과 함께 명과 절교하고 후금과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후금군과 화의 교섭을 시도하였다. 이때 최명길은 후금군과 함께 온 조선 장수 강홍립과 함께 화의를 이끌어 나갔다. 결국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1.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2.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3.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4.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전쟁이 계속되고 후금군의 조선 노략이 장기화되는 것보다는 좋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화약은 비록 양국이 형제관계를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양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화파의 강화협상이 그나마 조선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대립으로 치닫는 조선과 淸의 엇박자 행로
淸 太宗. 누르하치가 세운 後金을 이어받은 그는 國號를 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이어서 후금은 내몽고의 차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고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북경 부근을 공략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세폐도 대폭 늘리고 말과 정병 3만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 측은 세폐를 감액하는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후금으로부터 명 공격에 필요한 군량 공급을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후금과 국교를 단절하고 군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게 되었다. 조선의 조정은 친명배금 정책을 주장하는 척화파가 다시 정국을 주도하면서 정묘화약을 뒤로하고 군사적 대비를 강화해 나갔다. 이제 양측은 대립하는 엇박자 행로를 걷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조문사절로 조선에 오면서 양국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君臣)관계로 격상시킬 것을 강요했다. 척화파가 주도하는 조선 조정의 강경파들은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후금과 절교할 것을 주장하자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이어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내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 조정은 격분하고 척화론자들은 주화론자인 최명길 등을 탄핵했다. 일이 꼬이자 청 태종은 조선에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淸의 稱帝建元과 조선 사대부의 동요
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유일한 황제라는 조선의 기존 인식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관념으로 보자면 만주족 후금은 분명히 오랑캐이자 금수(禽獸)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조정은 격앙되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초강경론을 펼치는 강경론자도 있었다. 김상헌은 그 같은 주장을 펴던 척화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명은 부모의 나라요 청은 부모의 원수입니다. 하물며 임진왜란 때의 은혜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잊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라도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 재조지은의 명분을 앞세운 주전론이다.
소수이지만 주화파의 의견은 달랐다. 최명길은 “화친을 맺어 국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의를 지켜 망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못해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국력은 현재 바닥나 있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합니다. 정묘년(1627)의 맹약을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고, 그동안을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비태세를 튼튼하게 한 뒤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고 설파했다. 최명길은 현실을 직시하고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펼친 것이다.
척화론과 주화론은 명분과 현실의 대립이자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이기도 했다. 특히 김상헌은 재조지은의 의리와 척화의 명분으로 주전론을 주장하는 대다수 사대부의 성리학 정서를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에 최명길은 보다 현실적인 양명학의 가치관에 의존했다. 최명길은 오랑캐가 칭제(稱帝)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하여 명을 위해 조선의 종사(宗社)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것이다.
최명길은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주장이 정론이자 원칙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당시 현실에서 원칙을 관철하려 할 경우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명분보다는 현실이 중요했고, 기울어 가는 명보다는 떠오르는 후금과 화친함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병자호란의 발발과 최명길의 시간 끌기 전략
인조는 다수인 척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금과 맺은 정묘약조를 파기하기로 결정하였다. 1636년(인조 14) 청의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친정(親征)에 나섰다. 병자호란의 시작이다. 이때 청은 침략의 명분으로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조선을 굴복시켜 후일 명과의 결전에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은 명이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하(遼河) 방면에 병력을 보내 지키게 하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하지만 조선은 청과 단교 이후의 대책이 매우 미흡했다. 청군이 침략할 경우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들어가 맞선다는 대책뿐이었다. 일전불사의 항전태세를 취했지만 힘이 뒤따르지 못했다. 심양을 출발한 청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청군의 선봉인 마부태는 의주를 우회하여 서울로 향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이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고 하자 세자빈과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급히 강화도로 피란 보냈다. 그리고 조선군은 주변의 산성에 들어가 청야작전(淸野作戰・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 등을 소각해 버리는 작전)을 폈다. 그러나 청군의 선봉인 마부태가 서울 인근에 당도하자 허를 찔린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황급히 강화도 피란길에 나섰지만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도 이미 끊겨 버렸다.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최명길이 나섰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호흡지간에 달렸는데 어찌 500명으로 적을 시험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이 홀로 달려가서 적장을 만나 거병한 까닭을 문의하면서 저들의 입경을 늦추어 보겠습니다. 신은 적장이 죽이면 죽으려니와, 서울 근교에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밖에 없으니 전하께서는 수구문을 통해 속히 입성하셔서 추이를 살피소서.”
최명길은 청군의 진영으로 마부태를 찾아가 침략의 이유를 물었다. 마부태는 보자마자 국왕을 만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이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당장은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댔다. 이렇게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무사히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오로지 화친하는 데 있습니다. 왕자와 척화 대신을 보내면 즉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마부태를 만나고 온 최명길의 전언이자 의견이었다. 척화파 일색인 조정에서 이 의견이 수렴될 리 없었다. 성 안에는 1만4000여 명의 인원이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밖에 없었다. 인조는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는 한편 명에 원병을 청했다.
청군의 선봉은 곧바로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몰려와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남북방의 구원병들이 산성으로 접근했지만 청군에게 궤멸되었다.
항복인가 玉碎인가
조선이 기대했던 명의 원병은 적은 수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곧 이어 청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 도착해 청군을 결집시켰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성 안의 주전파도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강화론이 고개를 들었다.
인조는 청군에 강화를 희망하는 문서를 보냈다. 청은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내 왔다. 청 측은 처음에는 왕세자를 내보내야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으나, 이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나중에는 척화 신료들을 묶어 보내야 한다고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파의 주모자들을 잡아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강화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 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란해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모두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이 지경에서도 남한산성에서는 척화와 주화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 주전론자들은 오랑캐의 신하가 되느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사즉생(死則生)을 주장하고, 최명길 등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했다.
김상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짐승 같은 오랑캐의 뜰에 무릎을 꿇고 부끄러움을 당한단 말이오.” 최명길은 “이미 대항할 힘이 없는데 화친을 하지 않는 건 멸망을 재촉하는 일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강화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척화 대신들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최명길은 여진족 추장을 임금처럼 여기니 마땅히 역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척화를 지지하는 상소도 빗발쳤다. “최명길의 목을 베고 김상헌을 재상으로 삼으면 군사들도 힘을 내어 싸울 것입니다.”
이런 협박 속에서도 최명길은 묵묵히 청군의 진영을 드나들며 강화 회담을 진행시켰다. 마부태가 최명길을 죽이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청의 목적은 조선의 병탄이 아니라 화의를 통해 조선을 우군으로 만들자는 데 있다는 것을 최명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백성은 죽어 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도 슬금슬금 도망쳤다. 정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판세가 여기에 이르자 남한산성의 장병들마저도 주화파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인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최명길 등 주화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최명길의 항복 문서와 김상헌의 문서 찢기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보낼 문서의 초(草)를 잡았다. 그 문서는 ‘조선 국왕은 절하고 대청국 황제께 글을 올립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었다. <소방(小方)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明)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皇極)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명과의 사대관계를 정리하고 청 황제에게 칭신사대(稱臣事大)하겠다는 조선의 국서이다.
인조는 영의정 김류(金踰)와 김상헌, 최명길과 협의했다. 김류는 최명길이 청 태종을 가리켜 황극(皇極)이라고 일컫는 것은 태종의 신하라 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니 문서를 청에 보내기 전에 우선 최명길을 문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상헌은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인가. 이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황제의 신하가 되고 백성들은 황제의 노예가 되는 것—적이 비록 성을 에워싸고 있다 하나, 아직도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니—근본에 기대어 살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드디어 김상헌은 최명길의 항복 문서를 찢는다. 그러자 최명길은 “나라에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이런 글을 찢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찢어진 문서를 다시 붙였다. 인조는 결국 항복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죽을지언정, 굴복은 있을 수 없다”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굴복은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는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두 사람의 신념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문제는 병자호란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는 망해도 의리와 명분을 지킬 것인가, 굴욕을 감내하고 나라를 구할 것인가의 선택인 것이다. 필자는 최명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대의를 지키고자 분전한 김상헌은 병자호란 이후 충절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당대의 선비들에게 추앙을 받았지만, 끝까지 나라를 구하고자 분전한 최명길은 폄하되었고 결국 변절자로 치부되어 지천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용기 있는 행동과 현실주의에 입각한 사대외교는 후대(後代)에 이르러 재조명을 받게 된다.
三田渡의 굴욕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비.
청 태종의 항복 조건은 1.조선은 청에 사대(事大)하고, 왕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2.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 3.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 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4.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5.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고 일본의 사신을 청에 내조하게 할 것 6.매년 한 번씩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청군은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인조는 항복 문서를 들고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三田渡·잠실 석촌호 부근)로 향했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후금 군사의 호령에 따라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치러야 했다.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비참했다. 이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청에 잡혀 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려 가는 등 패전국의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되었으나 조선의 왕조는 유지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청에 포로로 이끌려 갔다가 겨우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녀’라는 치욕스러운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일부 양반들은 환향녀와의 이혼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이들을 회절강(回節江・절개를 회복하는 강)에 목욕시키는 촌극도 벌어졌다.
현재 일본과의 군 위안부 문제가 심각한 한일 갈등의 전면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 침입 때 끌려간 공녀(貢女)가 있었다. 화냥녀의 아픔은 그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병자호란의 결과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남한산성 인근 잠실의 석촌호 주변 언덕에는 청 태종의 요구로 세워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남아 있다. 이 비(碑)에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 찬미한 굴욕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역사도 일그러진 우리 역사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이 비는 원래 인조가 항복했던 삼전도 터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강물에 수장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3년 일제가 다시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후 1945년 광복이 되자 이곳 주민들이 다시 땅속에 묻어 버렸는데,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다시 세워 사적 제101호로 지정한 바 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고증을 거쳐 1983년 원래 위치인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對淸 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 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이 내왕할 때 일정 한도 내에서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역시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또한 호란 때 청으로 잡혀 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 문제도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됐다. 그리하여 강화 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의 파병 요구(1639년)에 대해서는 거절했다.
이듬해 청이 명을 공격하면서 다시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임경업 등에게 병사와 무기와 식량을 주어 보냈다. 이때 최명길은 암암리에 임경업에게 “사세를 보아 가능하거든 명과 연합하여 청을 치라”고 하였다. 임경업은 청을 따라 명과 접전하다가 명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명의 몰락 직전에 최명길은 명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생각에서 ‘조선이 청과 강화한 것은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사세가 부득이하여 더 이상 명을 후원할 수 없다’는 뜻을 명측에 전하려고 했다. 문서는 요동(遼東)을 지키는 청의 군대를 피해 바닷길로 은밀하게 보내야 했다.
최명길은 독보(獨步)라는 이름의 중에게 명에 문서 전달의 임무를 맡겼는데 이 사실을 한 관리가 청에 밀고하였다. 최명길은 1642년(인조 20)에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청나라에 소환되었다.
淸의 감옥에서 만난 최명길과 김상헌
최명길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최명길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왕은 모르는 일이고 자기가 전적으로 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최명길은 다른 감옥으로 이관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상헌이 수감되어 있었다.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표가 청의 감옥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난 것이다.
최명길은 김상헌을 명분만을 내세우는 소인으로 생각했으나, 같이 구금된 상황에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그의 절의에 탄복하였다. 김상헌도 최명길을 절개 없는 인물로 보고 있었는데, 그가 목숨을 걸고 뜻을 지키는 것을 보자 주화의 뜻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가 남아 있다.
김상헌의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 문득 백년 의심이 풀리는구나(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에 최명길이 답했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서 간다오(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타국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한 것이다. 마침내 최명길은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事大외교로 조선을 구한 현실주의자
최명길의 주화론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이후 부정됐다. 최명길은 소인배로 평가절하되어 조선의 역사에서 지천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송시열(宋時烈)의 숭명배청(崇明排淸)으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장문의 김상헌 졸기(卒記) 말미에는 ‘문천상(文天祥)이 송나라 삼백 년의 정기(正氣)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문천상 뒤로는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최명길은 재조지은을 비판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인물임에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주화파의 대표주자였다는 점에서 이중적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인조반정 참여는 개인적·정치적 행동이었고, 그의 대외정책 노선은 현실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재조지은의 명분을 내세운 숭명배청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최명길은 온건적인 주화론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장 못지않은 담력과 용기를 보여준 인물임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는 위험 속에서 홀로 적진을 찾아가 계책을 세워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유사한 방법과 용단으로 병자호란의 위기 때는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적장과 담판하면서 인조와 백관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었다. 화의를 말로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거는 용기를 보였다.
외교(外交)는 대외교섭(對外交涉)으로 다른 나라와의 협상을 의미한다. 협상의 잣대는 명분이 아니라 실리여야 한다. 실리는 바로 국가이익(國家利益)을 의미한다. 외교의 영역에서 보면 주화론과 척화론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와 국민을 볼모로 타국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지키려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는 척화의 논리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명길은 외교에서 명분이라는 허상을 버리고 실리라는 실상을 추구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명길의 주화론에 입각한 사대외교는 비록 삼전도의 국치를 대가로 한 것이지만 외교의 기본인 국가이익을 수호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광해군의 균형외교, 최명길의 실리외교가 재조명받는 이유이다.
남한산성이 곧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문화적 가치가 대외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번 기회에 산성 앞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는 ‘삼전도 비(碑)’에 대해서도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비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삼전도 굴욕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안보 불감증에서 깨어나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포럼 대표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월간조선
9. 정도전(鄭道傳) - 易姓革命으로 창건한 朝鮮왕조의 설계자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건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주체이자 조선왕조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卒記)〉에 의하면 정도전이 취중에 자주 “한(漢)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의 별칭이 해동 장량(海東 張良)이 된 이유이다. 그는 조선 창건의 1등 공신이 되어 새 왕조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가 구상한 새 왕조 조선은 놀랍게도 14세기 절대왕권의 시대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정치체제로, 근대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재상(宰相)이 중심이 되는 ‘신권정치(臣權政治)’의 나라였다. 신권정치를 구상했던 정도전은 세자 책봉 문제와 사병혁파를 둘러싸고 왕권을 추구하는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의 혁명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그의 공적이 폄하되었으며 조선시대 내내 정치술수에 능한 모사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서갔던 혁명가 정도전이 오늘날에 이르러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학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민적 차원에서의 관심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TV드라마 〈정도전〉이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그러나 정도전에 대한 관심이 역성혁명과 국내적 차원의 정치적 갈등에 집중되면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국제정치적 상황과 주변국과의 외교관계에 관해서는 잘 조명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정도전의 시대는 원(元)-명(明) 교체기로 오늘날과 같이 동북아의 국제질서가 요동치는 격동기였다. 그의 역성혁명은 이러한 주변정세 변화와 맞물려 구체화되었다. 뜨는 명과 지는 원 사이에서 친명배원(親明排元)의 외교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 건국도 가능했다. 또한 조선 건국 후에는 요동정벌 계획으로 명과 외교마찰을 빚으면서 정도전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에 있던 이방원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정치와 외교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에 관해서 조명해 보는 것은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시험대에 선’ 한국 외교의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요동치는 元-明 교체기의 동아시아 정세
明 太祖 주원장.
정도전이 활약하던 14세기 후반 동북아시아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형성되는 전환기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00여 년 동안 지속되던 몽골 중심의 세계질서는 14세기 후반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원조(元朝)는 1350년대부터 중국 남부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한족(漢族)의 반란으로 인해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저물어가는 원과 떠오르는 명 사이에서 고려의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견지하면서 원이 쌍성총독부를 설치했던 함경도의 철령위(鐵嶺衛)를 되찾았다. 이러한 공민왕의 행보는 당시의 몽골제국 중심의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아직 그 세력이 소진되지 않은 친원세력에 의해 피살되면서 고려는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로 나뉘어 정치적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은 명을 건국하였으며, 원은 북쪽 몽골로 쫓겨나 북원(北元)을 세웠다. 통일정권을 구축한 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대외적으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추진하였다. 주원장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조공(朝貢)체제를 주변국에 요구, 고려는 아직 소멸하지 않은 북원과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명과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국세가 기울면서 새로운 혁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공민왕의 친명배원 외교노선을 주장해 친원파와 대립하였고, 1388년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이후에는 친명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1391년에는 북원도 멸망하면서 북방민족 몽골의 중원 지배는 끝나고 한족에 의한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1392년에는 고려도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창건되었다. 일본에서는 장기간 내란 상태였던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 모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한편 격변기였던 여말선초의 시기에 고려와 신흥 조선은 철령위와 요동(遼東), 그리고 여진족 문제를 둘러싸고 명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양국 사이에는 외교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친 여진정책을 취함으로써 북원의 잔재세력과 조선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조선도 여진에 대한 회유정책을 썼는데, 이것이 명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 초 정도전을 중심으로 국방력 강화와 요동정벌이 추진되면서 명과의 관계는 위기상황을 맞이하였고, 명 태조 주원장과 조선의 정도전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양국관계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역성혁명의 배경이 된 정도전의 유배 생활
정도전은 언제 어떻게 역성혁명을 구상하게 되었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스승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로 비슷한 연배인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설장수(偰長壽), 그리고 연하의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모두 신진 사대부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리학의 이념과 사상을 연구하면서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도 관심을 보였다. 현실주의자였던 정도전은 부패한 고려 사회를 보면서 이상적인 성선설보다는 역성혁명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맹자》는 ‘군주는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며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먹인 다음 도덕을 교육해야 인간의 선한 품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백성을 괴롭히는 불인한 군주는 쫓아내야 한다’는 역성혁명의 길도 열어놓았는데 정도전은 여기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역성혁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우선 동아시아의 시대적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만 보이던 원 제국이 저물고 새로운 나라 명이 부상하는 변화를 목격하면서 그는 말기적 현상을 보이는 고려를 타파하고 명과 같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야심 찬 혁명가의 꿈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정치, 외교적 행보를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1375년 북원의 사신이 고려에 오자 이 사신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고려 조정에서 민감한 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정도전은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조정의 실세인 친원파 이인임(李仁任)은 그동안 정도전을 밉게 보고 있던 차에 이를 기회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정도전은 4년여의 유배와 유랑살이를 통하여 걸식하기도 하고 밭갈이도 하면서 민초의 참담한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다. 유배기간 중에 ‘삼봉재(三峯齋)’를 짓고 학문과 교육에도 힘써 보았으나 권문세족들의 정도전에 대한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부를 누리는 권문세족의 횡포, 뇌물과 청탁의 줄서기로 벼슬이 오가는 부패한 정치, 국가 경영의 위기를 초래한 사원경제의 팽창, 망해가는 원을 섬기며 떠오르는 명을 배척하는 친원파의 어리석음, 노략질하는 왜구를 퇴치 못하는 한심한 국방력, 이 모든 것을 고려의 말기적 현상으로 진단했다.
군주의 부덕과 관료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일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도입과 새로운 나라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배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혁명론을 정당화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를 찾아가 역성혁명을 교감하다
역성혁명을 작정한 정도전은 1383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를 찾아간다.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성계를 직접 만나보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맹장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정도전은 부패를 척결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역성혁명을 해야겠는데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명성이 높고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이성계가 절실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의미로는 군사정변, 즉 쿠데타를 계획하고 이성계를 찾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이성계를 만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군대와 그의 뛰어난 지휘통솔에 감탄했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해박한 학문과 출중한 국가 경술을 높이 평가했다. 서로의 속내를 확인한 만남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 시 한 수를 지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면서 때가 되면 자신과 손잡고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적 과업을 이룰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은유적으로 드러냈고, 이성계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이듬해 1384년 정도전은 개혁에 뜻을 함께하는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가서 양국 간 외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우왕의 인준을 받아 귀국한 적이 있다. 이 정도전의 명 사행 행보는 그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이성계의 후원으로 복직한 이듬해이기 때문에 이성계와의 혁명에 대한 교감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정도전은 외교사절로 명을 방문하는 기회에 새로운 나라 명의 건국과 국정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으며, 명의 대신들과도 교분을 쌓는 기회로 활용했을 것이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이 된다. 실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짧은 시간에 수많은 국정체제에 관해 빈틈없는 방안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명의 건국 사례와 성균관에서의 성리학 연구가 그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375년 정도전이 귀양 가게 된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게 되는데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된다. 그는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의하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명과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친원파 권문세족이 왕의 눈과 귀를 가린다며 비판했다. 공민왕이 홍륜 등 친원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에 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실세 이인임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75년 공민왕에 이어 우왕이 즉위하자 북원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 사신 입국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는 신흥 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 친원파는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 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북원 사신의 입국을 준비하면서 사신을 맞이할 영접사로 정도전을 지목했다. 정도전은 사신 영접을 완강히 거부했다.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 가는 원나라와 가까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러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고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원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정도전은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이인임이 명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에 대해 정몽주 등 10여 명과 함께 이인임을 탄핵하기도 했다. 이 일로 정도전은 이인임에 의해 나주로 유배된 것이다.
역성혁명의 단초는 위화도 회군
1387년에는 명이 철령위를 요구하였다.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명은 고려 사신 설장수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귀국한 설장수는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명의 철령위 요구는 명도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령위 문제 이외에도 명은 고려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했다. 고려는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급기야 최영(崔瑩)을 중심으로 차제에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 등 강경파에 대해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외교로 해결하자는 주장을 폈다. 명과 전쟁을 하기에는 고려가 역부족이라는 판단이었다.
여기서 잠시 요동 문제를 살펴보자.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그간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 치열한 쟁탈 지역이었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진의 영토가 되었다가 한조(漢朝)에서는 여기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했다. 402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이 공략하였으나 격퇴되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요동은 당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698년 발해가 요동을 경략하여 200여 년간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 거란(契丹)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금, 원이 지배하였다.
원-명 교체기에 명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고려 공민왕이 1356년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면서 요동은 명과의 외교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1388년 고려는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위기 시 강경파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요동으로 떠나게 하였다.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처음 요동정벌 계획을 알리자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4불가론(四不可論)-를 들어 반대했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以小逆大) 2.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하는 것(夏月發兵) 3.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는 것(擧國遠征, 倭乘其虛) 4. 장마철에는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염병 발생의 우려가 있는 것(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그러나 최영은 공격을 지시했다. 압록강까지 진군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조민수를 회유하여 전군을 회군시킨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이인임, 염흥방,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한 후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우면서 우왕의 측근인 최영 일파도 제거하였다. 회군은 사실상 역성혁명의 단초였다. 군사정변이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결정에 정도전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이성계가 홀로 기획하여 회군을 결정했을까?
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당시 정도전은 외직인 남양부사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미 혁명을 교감하고 준비해 온 정도전과 이성계가 국가 존망이 걸린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이 맞물린 상황에서 아무런 협의 없이 회군을 강행했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이성계의 4대 불가론과 회군은 자타가 ‘해동 장량’이라고 했던 정도전이 기획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改革主義 정몽주와 開國主義 정도전의 인연과 악연
온건개혁파로 정도전과 대립한 정몽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권문세족들에게 민감한 조세제와 토지제를 개혁해 나갔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동문 정몽주 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서게 된다.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에서 특히 정몽주와 가까웠다.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를 처음으로 시도해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차이를 지적해서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함께 성균관에서 반원개혁 분위기를 바탕으로 성리학 등 폭넓은 학문을 익히던 정도전은 정몽주의 학문적 성향을 계승해서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정몽주는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정도전의 생각에 동조했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서 그리고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했다. 외교적으로도 친명배원의 노선을 함께 견지하면서 원-명 교체기의 대외관계에 대처해 나갔다.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해서도 정치적 지지에 흔들림이 없었고 위화도 회군도 지지했다.
그러던 중 1389년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음모한 사실이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정도전은 이성계를 설득해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구실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한 후 최영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다. 여기에서 개혁으로 고려를 되살려 보려고 하는 정몽주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돌이킬 수 없는 정적(政敵)관계가 되고 만다.
1390년에는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명을 공격하려 한다고 명 태조에게 밀고하는 소위 윤이(尹彞)-이초(李初) 사건이 발생했다. 정도전은 외교사절로 명에 가서 윤-이의 주장이 무고임을 밝히고 귀국한 후, 윤-이의 배후인 스승 이색 등을 처단하자고 했다. 이 사건으로 정몽주와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가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는 노래와 말을 시중에 확산시키자 정몽주의 반격은 더욱 치열해진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제거할 목적으로 그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시킨 후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강력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후광으로 정도전은 1392년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때 명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드러눕게 되자 정몽주는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실패하게 되고 정몽주는 결국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타살되고 만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인연과 악연은 제3의 인물 이방원에 의해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위화도 회군과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정도전과 이에 맞서 고려 수호의 절개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비운의 인물 정몽주, 이들은 서로 정치적 적대관계였지만 고려를 고집했던 정몽주의 성리학 세계가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을 개국했던 정도전 사상의 한 부분을 이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백년대계를 설계한 群鷄一鶴의 재상
1392년 정도전은 새 왕조 창건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했다. 공양왕을 끌어내리고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창건했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국정을 전적으로 정도전에게 맡겼다.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어 조선의 국정을 설계했다.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고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이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개경은 새 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려의 중추적 역할을 해온 귀족 계급을 허물어야 조선의 앞날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새 왕조의 도읍지로 한양이 결정된 것은 물론, 경복궁 자리와 설계에도 모두 정도전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5부 49개방(方), 경복궁의 전각, 4대문과 4소문의 이름들을 모두 그가 작명한 바 있다.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 정화도 그가 추구하는 문명개혁의 중심축이었다. 불교의 종교적 순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여 국가 재정과 민생에 미치는 역기능을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대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科田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개혁정책에 대해 점차 반발하는 세력도 늘어 갔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는 즉위 후, “중앙정부나 지방 관서, 고급 관리나 하급 관리, 그 어떤 것을 막론하고 고려 왕조에서 임명한 사람들은 하나도 파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새 왕조의 관리로 유임시켰으며, 동시에 국호를 전대로 고려라 하고 국가의 모든 법령과 제도도 고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민심의 안정을 꾀할 뿐만 아니라,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전조의 사대교린 정책을 유지하여 명에 대한 외교를 신중히 다루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태조의 즉위를 알리려고 명에 갔던 조선 사신이 가지고 온 명의 문서에는 국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정해 회보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는 역성혁명이 일어나면 국호를 개정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고 조공국의 새 왕조 국명은 명의 승인이 필요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여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명칭으로 국호를 압축했다. 조선은 민족사의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였다.
명은 조선을 선택했는데 조선이라는 국호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생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명은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을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논어(論語)》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명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임을 뜻한다고 인식하고 조선에 동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에 기초하고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대일통(大一統)의 중국사관이다. 명이 조선 국호를 동의할 때에도 같은 맥락의 사관에 기초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사관이 이고위금(以古爲今)으로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역사를 재단’하는 현재적 편의사관이라고 지적하고, 구시대적인 역사관임을 비판하고 있다.
表箋文 사건
건국 후 정도전은 조선의 안보와 관련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국방의 기본 틀을 세우고 군사제도와 병법의 개혁을 단행해 국방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공병화해 나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말에는 정규군이 거의 없어 각 귀족과 왕족들의 사병화된 군사들이 주를 이뤘는데 정도전은 이를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도전이 사병혁파를 단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국 초부터 요동정벌을 계획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1396년 조선은 명과의 외교적 분쟁에 휘말렸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에 명을 비하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고 트집 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으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으로 압송하도록 요구했다.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표전문이란 사대교린 체제에서 소국이 대국에 올리는 예문(禮文)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 표전문은 정탁이 쓰고 정도전이 감수한 것인데 왜 명의 주원장은 정도전을 지목했을까?
조선 초 정치권력 투쟁에서 정도전과 반대 입장에 있던 이방원에게는 하륜이라는 뛰어난 책략가가 있었다. 그들은 요동정벌을 내세워 사병을 혁파하려는 정도전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명과 조선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명으로 오가는 반 정도전 사신들이 정도전이 국방력을 강화해 요동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은밀히 명 측에 전달했다.
명은 여진족의 송환 문제와 관련해 조선이 명의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고려 말부터 명과 원을 오가며 요동을 경략하려 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첩보에 접하면서 차제에 이러한 문제들을 확실히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은 표전문 시비로 외교마찰을 일으켜 조선의 실권자로 부상한 정도전을 명에 압송해 붙잡아 놓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륜과 이방원에게는 표전문 사건이 정도전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정도전을 명으로 보내자는 조정 여론으로 나타나면서 하륜은 정도전의 송환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정도전은 수세에 몰렸으나 조준 등의 반대로 겨우 무산되었지만 정치적 타격을 입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명의 시비는 그 다음해에도 계속되었다.
1397년 명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문서에는 정도전을 ‘조선의 화(禍)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고 정도전을 해임하고 요동정벌을 중단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이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한때 정도전은 공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서를 꼬투리 잡아 조선 사신을 억류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까지 명에서 압박하자 이제는 조선 내에서 강한 반명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대신들도 통렬하게 명을 규탄하고 나섰다. 정도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요동정벌을 정식으로 상주하여 태조의 허락을 받아내 강력한 군권을 쥐고, 자신이 창안한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바탕으로 맹훈련을 전개했다.
여기서 정도전이 개국 후 실제로 요동정벌을 계획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정도전은 살펴본 바와 같이 일관되게 친명배원의 외교노선을 견지해 왔고, 철령위 문제에 관해서도 명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있었으며, 조선 건국과 태조의 인준을 얻기 위해 명에 대한 외교력에 집중하고 있었던 개국 초기에 정도전이 무슨 이유로 요동정벌을 계획했는지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요동정벌 계획의 실상과 허상
오히려 국내 정치적 차원에서 자신의 신권정치에 반대하는 이방원을 비롯한 왕권파 구신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요동수복과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요동정벌 계획에 관해서는 이 실록의 기록이 후술하는 바와 같이 태종 이방원의 지시로 하륜 등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그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일국의 창건을 주도한 그가 아직 새 왕조의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요동정벌을 추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뒤의 사정을 고려할 때 이방원 등 왕권정치 세력이 국내 정치적 동기에서 명과 정도전의 갈등을 촉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와중에서 1398년 명의 표전문 압박 시 조선 조정대신들의 반명 기류가 현저하게 높아지자 정도전이 이러한 분위기 반전을 기회로 삼아 사병혁파를 위해 내세웠던 요동정벌의 명분(허상)을 실제로 요동경략을 추진(실상)하여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고 미진했던 이방원 등의 사병혁파를 단행하기 위해 태조에게 건의해 요동정벌을 가시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말은 자신이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새 왕조를 건설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이방원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이성계는 호방한 기상과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재능을 갖춘 이방원을 총애했었다. 하지만 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자 실망한 이성계는 방원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끝내 방원은 혁혁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공신의 대열에서 소외되었다. 이런 차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내세워 재상들에 이어 왕족들의 사병까지 혁파하려 하자 왕권에 야심이 있는 이방원은 배수진을 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더 큰 문제는 세자 책봉 문제였다. 당초에 조정에서는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이 제시되었으나, 신덕왕후 강씨의 소망과 정도전의 후원으로 태조 이성계는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결국 세자 자리를 이복동생 방석에게 빼앗긴 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고 자신이 권좌를 차지하겠다고 결심했다.
무인년(戊寅年·1398) 마침내 이방원은 거사했다. 남은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을 찾아내 방원은 기어이 그를 살해했다. 조정을 장악한 방원은 장남 방우가 이미 사망했으므로 둘째 방과를 세자로 세웠다.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 등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각자의 입장에 따른 엇갈린 해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도전 생애의 明과 暗
조선의 개국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이 실천에 옮긴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다. 개국 초기 정도전은 신료의 권한을 강화하고 토지를 정부가 직접 관장, 배분하는 토지 공개념, 군주의 권한을 일부 축소하는 분권론에 기초한 신권정치,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등 기존의 정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구상은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근대 입헌군주제를 연상케 하는 정치체제로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발상이었다. 이 체제는 태종 이방원 집권 후 폐지되었다가 문종 때 부활되어 의정부 서사제(議政府 署事制)가 된다.
정도전은 당대 군계일학의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인으로서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과 위상에 비해 인간적인 성품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는 “(그는)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소 왜곡된 점도 없지 않으나 그의 성격과 인간 정도전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정도전을 폄하하면서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높이 치켜세웠다. 또한 태종의 아들 세종은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평가 절하되고 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또는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되기도 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도 정도전을 일컬어 ‘죽을 만한 일을 한 위인’이라고 비판했고, 정도전과 같은 이상을 견지했던 송시열(宋時烈)마저도 정도전 이름 앞에 ‘간신’이라는 말을 붙였다고 한다. 정도전의 위상이 그나마 복권된 것은 1865년 고종 때에 이르러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준 것이 고작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낮은 평가를 받아오던 정도전이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다. 정도전이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대단히 출중한 인물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도전은 성정이 과격하고 온후함이 없어 빼어난 재주에 비해 덕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반골적인 기질과 단도직입적인 언행은 늘 주변과 반목, 대립했다.
그가 현실에서 추구했던 신권정치는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萬人之下)’의 재상을 의미했다. 그는 주변과 권력을 나누거나 화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협력했던 정치적 동지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반목하는 관계가 되었다. 인간 정도전의 독주가 공인 정도전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두 얼굴의 정도전과 그의 생애를 반추해 보면서, ‘두 얼굴의 정치’-정치의 순기능과 역기능-는 오늘날에 와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포럼 대표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월간조선
10. 세종(世宗 )- 군사와 외교에도 안목이 높았던 名君
明나라, 여진족, 일본을 상대로 외교정책을 펼친 세종대왕
세종(世宗·1397~1450)은 일반적으로 문화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 배경에는 물론 안정적 통치기반을 물려준 아버지 태종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세종대의 황금시대가 열렸다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15세기 초 조선은 여전히 북으로는 여진(女眞), 남으로는 왜구(倭寇)에 시달려야 했다. 원(元)을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한 명(明)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종은 명에 대해서는 사대외교(事大外交)를 통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과 기예를 수용하여 조선의 역량을 확충하는 한편, 국방력을 강화하여 북으로는 여진을 공략해 조선의 경계를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확장했으며, 남쪽으로는 적극적인 해양진출로 왜구의 약탈을 근절시켰다.
오늘날에도 한 나라의 발전은 대외관계와 국내정치의 안정 위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국가안보에 관한 경구도 있다. 세종은 힘을 배경으로 한 전략적 외교를 전개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문화 군주의 위상 못지않게 국가안보 태세를 튼튼히 하고 대외관계를 안정시켜 조선의 외교와 안보에도 크게 기여한 군주였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사대교린 체제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몽고 제국의 중국 지배가 끝나고 원(元)-명(明) 교체가 완성되어 1391년 한족(漢族)에 의한 명조(明朝)가 출범했다. 한반도에서는 다음해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었으며,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장기간 내란상태였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1336~1392)가 끝나고 통일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북아 세 나라 모두 국내정세와 국가체제가 변화하면서 기존질서는 동요하고 국제정세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이 당면한 대외관계의 우선적 과제는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자리 잡은 명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였다.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인 사대교린 체제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외교문제였다.
국제사회에는 국가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는 중국이 주도했다. 중국은 주(周)시대로부터 황허지역이 중원(中原)이고 그 문화의 우월함은 화(華)로 중화(中華)이므로, 주변의 이민족들을 야만으로 차별화한 후, 화이(華夷)의 2분법으로 이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구분했다.
이후 진(秦)이 통일왕조를 건설하면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 특히 효(孝)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논리가 중화사상과 접목되어 새로운 가부장(家父長) 통치질서를 창출했다. 이 질서가 한무제(漢武帝)대에 제정된 황제의 연호(年號)와 정삭(定朔)의 사용, 책봉·조공과 같은 제도와 격식을 갖추어 정형화하면서 동아시아의 사대제도(事大制度)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소국들 간의 관계를 대등한 교린(交隣)관계라 하였는데 이 규범과 질서가 곧 동아시아 지역의 사대교린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책봉은 주변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를 군주로 인정하고 황제는 주변국의 왕을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군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황제의 연호와 정삭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절차에 따라 계기별로 사신을 파견 접수하고 일정한 규범에 따른 예물을 교환하는데 그 규모가 컸고 이를 조공이라 했다.
이러한 불평등한 사대관계는 작금의 주권평등(主權平等)의 국제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규범이나 지난 2000년 동안 동아시아는 이러한 가부장 사대질서가 지배하는 ‘주권차등(主權差等)의 시대’였다. 사대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대국과 소국 간에 ①책봉, 조공, 정삭, 연호 사용의 외교 형식을 통하여 ②소국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승인(오늘날의 국가승인 또는 정부승인)하고 ③소국의 왕위 결정이나 국정에 간섭하지 않으며(오늘날의 내정불간섭의 원칙) ④소국은 이중의 사대관계를 맺지 않으며 ⑤대국은 소국의 영토를 존중(오늘날의 영토불가침)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주권평등사회는 1648년 유럽 국제사회에서 체결된 협약에 따라 국민국가(nation state)를 구성원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 체제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화’해 오늘날의 전 지구적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사대교린체제는 붕괴되고 국가 간에 주권이 평등한 사회가 도래하기는 하였으나, 베스트팔렌 체제에 있어서도 과거와 다름없이 대국과 소국은 똑같이 존재하고 있으며 주권평등이 대소국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의 至誠事大 외교
세종이 즉위하면서 직면한 조선의 외교과제는 명과의 관계였다. 우선 조선과 명과의 관계를 보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4대불가론을 통해 친명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양국 간의 외교마찰로 조선 측에서는 한때 정도전을 중심으로 요동정벌 계획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명 태조 주원장과 조선에서 정도전이 죽은 후 태종대부터 조공·책봉 체제가 확립되어 사행(使行)의 횟수는 1년 3사제(使制)로 결정되었다. 세종은 선대의 대명 사대관계를 유지해 나갔으나 해결해야 할 현안은 산적해 있었다.
특히 조선으로서는 명과 불편한 외교 사안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는 처녀와 금은(金銀)의 조공 문제였다.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명은 조선에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요구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進獻)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 명에 조공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은 광산에서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다 산사태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종대에 들어서서도 명은 각종 물자의 진상을 요구했다. 물자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조선에 파견되어 온 명사(明使)들을 접대하는 데도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특히 윤봉(尹鳳)으로 대표되는 조선 출신 환관들의 횡포는 매우 심각했다. 윤봉은 명의 내시(內侍) 진헌 요구로 조선에서 차출되어 보내졌는데 황궁의 내시부 장관급인 태감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조선에 명의 사신으로 와 10여 명이나 되는 자기 형제들의 벼슬을 청탁했다. 윤봉의 청탁이 도를 넘자 조정은 이를 거부했는데 윤봉은 돌아가 조선을 헐뜯고 모함하여 세종은 명 황제로부터 자신을 나무라는 국서를 받게 되었다.
이후 세종은 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명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성사대(至誠事大)’로 명을 섬기기 시작했다. 세종은 윤봉의 요구도 적극 수용하고 윤봉의 동생 윤중부를 2품으로 승진시켜 달라는 요구까지 들어주었다. 계속 명 사신들에게 정성을 다한 결과, 명 황제로부터 “왕은 조정을 공손하게 섬기고 정성스러움이 한결같아 현왕(賢王)이라 할 만하므로 중국 조정도 왕을 앞에서나 뒤에서나 성의를 다해 임할 것이오.”(《세종실록》)라는 친서를 받았다.
세종이 명 황제에 대해 자신을 군신(君臣)의 관계로 낮춰 섬김으로써 훗날 ‘인신사대(人臣事大)’라고 평가될 정도로 저자세를 취한 데에는 그만한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세종은 우선 여러 차례 명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너무 심하니 이 조공을 면제해 주도록 요청했다. 세종의 계속된 요청에 명은 1430년(세종 12)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된 것이다.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
明과의 외교를 통해 세종은 이슬람 문물 등을 받아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장영실은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명과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자 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했다. 태종은 세종에 대해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데 항상 밤새워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독서를 금지시켰는데도 내 큰 책들을 모두 청해 가져갔다.”(《세종실록》)고 했다. 중국으로부터 구해 온 서적들도 모두 탐독해 중국의 발달된 문물을 익히 파악하고 있던 세종은 수시로 명에 사행을 보내 서적, 약재, 악기, 화약 등 조선이 필요로 하는 각종 물자들을 확보하여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토대를 마련했다.
일례로 세종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의 발명품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종이 읽은 책에는 원대로부터 고려에 반입된 서적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는 원대에 중국에 도입된 아랍의 이슬람 문명에 관한 책들과 이에 관한 정보들도 상당히 기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몽고 왕조인 원은 한족(漢族)을 피지배층으로 하고, 아랍인들을 제2계층의 신분으로 하여 행정을 그들에게 맡겼는데 당시 대몽고 제국하에 있던 이슬람권은 천문학, 수학, 과학, 건축 등이 고도로 발달했었다. 명은 원을 접수하면서 이러한 이슬람 문명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세종은 그것을 명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은 동래현(東萊縣)에 재주가 뛰어난 기술자로 이름이 난 천민(賤民) 장영실(蔣英實)을 발탁한 후 우선 명에 유학시켰다. 장영실은 중국에서 이슬람 문명의 천문학과 과학을 접할 수 있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물시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본 것을 모방한 것으로 완전자동 물시계는 아니었지만 이 공로를 인정해 세종은 그를 노비 신분에서 면제해 주고 곧 이어 정5품 벼슬을 제수했다. 이후 장영실은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해 천문관측대를 건설하고 세종 14년에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渾天儀) 등 최첨단 과학기기들을 고안해 설치했다. 이어서 세계 최초의 독자적인 발명품인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와 자동물시계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어 냈다.
세종이 명에 지성사대한 이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선이 처한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안보위협에 대처하고, 북방의 국경을 획정하는 데에는 명의 우호적 태도와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외교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대관계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대제도는 대소국이 공존하던 동아시아 구성원 상호간에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국제규범이었다. 사대제도는 외교질서로, 이것은 옳고 그름 또는 자긍과 굴욕이라는 이원적, 대립적 구도에서 평가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선린우호 관계를 맺고 안보협력을 하는 것은 전략적 외교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사대외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대의 본뜻 즉, 모화(慕華)의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마음으로부터 큰 나라에 의존하는 사대주의 외교이다. 이러한 심정적 사대는 전략적 사대와 구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종의 대명 지성사대 외교를 변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종의 지성사대는 심정적 사대가 아니라 전략적 사대 차원에서 전개하여 조선의 국익을 증진시키고 문화 르네상스를 열어 나가는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자주와 자존을 내세우는 사대주의자도 많이 있었고, 사대제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국익을 확보한 인물도 간혹 있었다. 바로 세종이 후자의 사례인 셈이다.
北虜南倭와 有備無患의 군사대비 태세
명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조선이 당면한 외교안보 과제는 북의 여진과 남의 왜구 문제였다. 여진은 본래 고구려에 속한 소수민족이었으며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에 편입되었는데 평안도 방면은 고려의 서희가 거란과의 외교담판을 통해 고려에 편입시킨 바 있었고, 두만강변의 여진은 고려 중반 윤관이 9성을 쌓아 함길도(함경도) 일대를 편입한 바 있으나 여진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여진에 돌려준 적이 있다. 이후 동북방의 여진은 금국(金國)을 세웠다가 후에 원에 귀속되었고 원말명초(元末明初)에는 다시 압록강계에서 고려와 대치하며 경계를 넘어 약탈해 온 바 있었다.
남방에서는 명과 조선 그리고 일본 간의 삼각관계에서 왜구 문제가 현안이었다. 명 태조는 중국 연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공할 것을 요구했는데 왜구의 침략이 멈추지 않자, 1380년 막부(幕府)의 장군에게 문서를 보내 왜구의 약탈행위를 책망하면서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신흥 왕조인 조선에 있어서도 대일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왜구였다. 따라서 조선의 대일관계는 왜구를 통제하여 동북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문치(文治)만큼이나 국가안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부왕 태종의 영향도 컸다. 태종은 세종에게 자주 ‘화포는 군국(軍國)의 중대사’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세종은 즉위 후 태종의 군사전략에 따라 군사대비 태세를 강화해 나갔다. 우선 군사제도를 정비했다. 조선 초기의 중앙군제는 태종이 왕권을 장악하면서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중앙군이 핵심을 이루게 되었는데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세종 5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중앙군은 수적·질적으로 증강되었다.
특히 세종은 신무기 개발에 진력했다. 당시의 첨단 신무기라면 화포(火砲), 즉 총통이었다. 최정예 총통위(銃筒衛)를 설치하여 화포·총통 기술을 혁신하였고 북방에는 오늘날의 포병부대에 해당하는 화통군, 화포군이라는 화포부대를 배치해 영토개척과 국토방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군사장비와 군사전략의 혁신을 가져왔다. 또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대규모의 침입에 대비해 유비무환의 차원에서 상설군(常設軍) 외에 현재의 예비군 제도와 같은 잡색군(雜色軍)을 만들어 국민 총동원 태세를 갖추었다.
공세적 해양 정책
국가안보와 관련해 세종시대에 특이할 점은 우리 역사에서는 최초로 일관되고 적극적인 남방으로의 해양진출 정책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병조 참의 박안신(拍案臣)이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사방(四方)으로부터 적을 맞이하는 형세’라며 수군의 강화를 제안한 데 주목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수군을 폐하고 육군을 중심으로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생각을 바꿨다. 세종은 “해적을 제어하는 데는 선군(船軍) 같은 것이 없다”(《세종실록》)는 최윤덕 등의 ‘수군중시론(水軍重視論)’을 받아들여 수세로부터 공세적인 해양진출로 선회하였다.
물론 당면한 해양정책은 수시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는 왜구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세종은 병선의 건조와 성능을 개선하는 데 지속적인 노력을 쏟았다. 해안가 천민 출신의 선박 전문가 윤득홍(尹得洪)을 발탁했다. 각국의 배 만드는 기술자도 동원해 외국선박과 우리 병선을 비교하며 개선해 나갔다. 세종은 또한 하삼도를 중심으로 각 지역의 방어에 필요한 성보(城堡)를 축조해서 왜구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후 왜구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이러한 해양정책과 함께 수군대비 태세의 결과였다. 세종은 윤득홍에게 병선(兵船)과 조운(漕運)을 관장하는 2품의 직위를 제수해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전방위 군사대비 태세로 세종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육군(16만)과 수군(5만)을 갖추고 있었다. 뜻밖의 일이지만 세종시대의 국방력이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방력을 배경으로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를 공략하는 일방, 이들에 대한 포용외교를 통해 조선의 대외관계를 안정시킬 수 있었는데 이러한 대외관계의 안정이 국내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문화적·경제적 황금기를 이룰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세종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유비무환의 경구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북방 여진에 대한 和戰 전략
세종은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마침내 여진 공략에 나섰다. 여진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평안도와 함길도 일대를 약탈해 왔는데 세종은 우선 서북방면의 압록강계부터 공략했다. 이 방면의 여진족은 태종대에는 공민왕 때 설치한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를 강계부로 승격시켜 압록강 남안(南岸)이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된 바 있었다. 세종은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삼아 이들을 정벌케 하였다. 세종은 먼저 명에 사신을 보내 압록강 북방에서의 여진 공략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외교적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 조선군은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섬멸하고 압록강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지역에 4군(四郡)을 설치했다.
압록강계를 확고히 한 세종은 두만강변의 여진을 주목했다. 이 지역은 본래 고려 윤관이 9성을 설치했으나 여진에게 돌려주었던 함길도 지역으로 1356년(공민왕 5) 고려가 원으로부터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한 데 이어 고려 말기 이성계가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워 개국 초에 조선의 영역은 이미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진의 출몰과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1410년(태종 10)에는 두만강 유역에서 조선군은 이 지역의 가장 큰 여진 부족인 우디거족(兀良哈族), 오도리족(斡朶里族)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우디거족의 내습이 잦아지고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여진의 출몰과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1425년(세종 7) 경부터 조정에서는 경계를 후퇴시키자는 의논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세종은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며 적극적인 북진책을 견지했다.
1433년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러한 여진족 사이의 내분 기회를 포착해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하여 북방개척을 과감하게 추진해 갔다. 명에 대해서는 서북면 공략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적 양해를 구했다. 그리하여 1434년(세종 16)부터 시작해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에 육진(六鎭)이 설치되었다.
세종은 사신을 명에 다시 보내 두만강 이남이 조선의 영토임을 설득해 명의 동의를 얻는 외교적 조치도 잊지 않았다. 당시의 사대질서하에서 조선의 경계는 명의 동의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명은 여진의 반발을 고려해야 하고 조선과의 국경선 설정이라는 중대한 외교적 협의과정에서 조선의 입장을 수용했는데 여기에서도 세종의 지성사대 외교가 작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은 이어 강원도와 하3도의 주민들에게 우대책을 실시하여 함길도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도 병행해 영토화를 촉진시켰다. 이 어려운 작업은 김종서의 몫이었다. 그리고 북방경계에서 약탈이 봉쇄당한 여진을 무마하기 위해 기미책(羈靡策)을 실시했다. 그들을 지속적으로 위무하면서 북방경계를 안정시켜 나갔다. 화전양면 전략의 성공사례로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대마도 정벌
세종은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했다
북방의 여진과 함께 조선이 당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안보과제는 왜구였다.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고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의 해적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일지도·송포 등 일본 서부지역 도서가 중심이었으며 조선에서는 이들을 삼도왜(三島倭)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왜구는 지방 영주들의 보호와 묵인하에 조직적으로 해적행위를 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전란에서 패배한 북구주의 무사단과 송포당(松浦黨) 등 조직무장 집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곤궁에 빠진 생계형 영세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왜구대책은 태조 이성계가 구체화했다. 태조는 해안 요처에 성을 쌓고 봉화를 설치해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 막부와 통교하여 공동으로 왜구를 통제하는 외교적 대처방안도 모색했다. 태조는 즉위 초 실정막부뿐 아니라 왜구에 영향력을 가진 서부지방의 구주 호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진압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정종과 태종도 계승해 왜구의 발호를 상당부분 통제했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에 왜구의 통제에 적극 협력하였던 대마도주가 죽고 나이 어린 아들이 도주직을 계승하자 왜구가 다시 도내의 실권을 장악하고 흉년으로 생활이 궁핍하였던 왜구의 조선 침입을 묵인하였다. 이에 1419년(세종 1)에 왜적선이 서해 연평곶에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침략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정부가 대일외교 체제를 주도적으로 정비하고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정부가 그들을 회유하는 차원에서 입국을 관대하게 열어준 결과 지금의 창원 인근의 항구 내이포(乃而浦)에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는데 1435년(세종 17)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경상도 관찰사는 “내이포에 와서 사는 왜놈 수가 계속 늘어나 수년 동안에 거의 수백 호(戶)나 되었으니, 이것은 뱀을 방안에 기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독을 마구 뿜을 날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빨리 본토로 돌려보내어 후회가 없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세종실록》)고 조정에 보고했다.
왜구에 대한 포용외교
조정 대신들이 무력을 사용해 내이포의 왜구를 축출해야 한다고 격론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 관세를 부과하는 교묘한 전략을 제시했다. “지금부터는 상선으로 운반해 온 물화(物貨)를 판매하기를 이미 마쳤다면, 즉시 돌려보내어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만약 혹시 우리 땅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곧 우리 백성과 다름이 없게 될 것이니, 반드시 모두 세금을 거두어 국용(國用)에 충당할 것이다.”(《세종실록》)
전투 대신 외교로 선회한 세종은 일본을 수시로 왕래하며 피로인((疲勞人)을 송환하고 일본인과 친교가 두터운 이예(李藝·1373~1445)를 내세워 이 문제를 일본과 교섭토록 했다. 그 결과 1438년(세종 20)에 조·일 간에 문인(文引)제도가 채택되었다. 조선으로서는 문인을 발급할 독점적인 권한을 대마도주에 부여하고 관리하게 함으로써 왜구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 일본 각지로부터의 도항왜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대마도주는 문인제도를 이용하여 각처의 사신들을 통제하고 문인발행에 대한 수수료를 받음으로써 대마도내에서의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어 세종은 대마도주에게 인정한 문인제도를 문서로 법제화하고 대마도를 매개로 하는 대일교역의 조건을 확실히 규정하기 위해 1443년(세종 25)에 이예를 다시 대마도에 파견했다. 이예는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과 협의하여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했다. 이 약정의 내용은, 첫째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하고, 둘째 대마도주는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세견선(歲遣船) 정약과 함께 승선 인원수, 체류기간 등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왜인의 횡포와 질서문란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양국의 핵심 외교사안인 교린체제와 무역체계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2개 항목만 전해져 오고 있는 계해약조는 대마도주와의 세견선과 특송선 등을 약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단순히 대마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일본과의 무역을 제도화하고 도항왜인의 규모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힘이 뒷받침하는 외교로 상대를 다스린 성공적 외교로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의 협상이론으로 본다면, 완전승리를 추구하는 게임이론이 아닌 조금씩 양보하여 윈윈(win-win)의 결과를 도출하는 상생적 협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賤人 출신으로 2품까지 오른 李藝
일본과의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한 이예.
세종의 치세에서 주목할 점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서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해시계를 발명해 과학혁명을 가져온 장영실(蔣英實), 정도전이 설계한 경복궁을 건축해 종1품에 오른 박자청(朴子靑), 해안가 출신으로 2품의 직위에 올라 병선(兵船)과 조운(漕運)을 관장했던 윤득홍(尹得洪) 등은 모두 천인 신분의 출신 배경을 갖고 있다.
대일본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2품에 오른 이예도 아전 신분의 천인 출신이었다. 이예는 학문에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지적능력과 협상력을 요구하는 외교사절로서 오늘날의 직업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대륙 중국에 집중된 당시 조선의 대외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남방의 해양국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사실상 개척한 선구자라는 점에서 그는 입지전적인 외교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세종은 그의 출신성분보다 능력과 전문성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세종은 인재를 등용하면서 적재적소에 배치한 후 지속적인 신뢰를 보임으로써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일례로 최윤덕(崔潤德·1376~1445)은 무과에 급제한 무신으로 1428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1433년 다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압록강 유역에 침입한 여진족을 다시 물리치자 우의정에 올랐다. 최윤덕은 무관이 재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사양했으나 세종은 1435년 좌의정에, 이듬해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에 임명했다. 퇴임 후에는 궤장(几杖·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늙은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하기도 했다.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문관으로 행정능력은 뛰어나지만 몸집도 작고 무예를 못해 무장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김종서의 근면함과 신중한 일처리 능력을 보고 그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 여진을 물리치고 까다로운 사민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세종은 “비록 내가 있었어도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요, 비록 김종서가 있어도 내가 없었다면 이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를 재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세종은 대일본 외교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는 이예를 시기한 대신들의 비판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세종이 71세가 된 이예에게 일본에 붙잡혀 간 피로인 석방 임무를 다시 맡기자 이예는 “성상께서 신을 늙었다 하여 보내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었으므로 죽고 사는 것은 염려하지 않습니다”(《세종실록》)고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議政府) 서사제(署事制)를 실시했다. 세종은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윤회(尹淮) 등 세 정승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를,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를, 그리고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 보도록 했다.
세종은 이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조화로운 균형을 취했다. 이들 재상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종 리더십의 白眉는 실용정신
세종의 성공적 국가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일관성과 지속성을 갖는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일까. 바로 실용(實用)정신이다. 실용은 유용성·효율성·실제성을 의미한다. 이 실용이 세종의 영민함과 근면성, 창의력과 상상력, 결단력과 실천력에 접목되어 그의 리더십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실용정신은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각인시킨 한글의 창제 이유가 바로 위민(爲民)의 유용성, 언어의 효율성, 그리고 문자의 실제성을 아우르는 실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실용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시현되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실용이 그 출발점이었다. 대명외교에서 세종은 인신(人臣)사대로 평가될 만큼 낮은 전략적 자세를 취했는데 그 대가로 북방의 영토를 명으로부터 인정받고 선진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으며 처녀와 금의 진헌을 중단시키는 실리를 챙겼다. 외교에도 실용정신이 그 바탕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에 대한 ‘힘을 겸비한 포용외교’, 그리고 대마도주와의 ‘상생 협상’도 실용에 기초하고 있다. 세종은 “은혜가 없으면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세종실록》)는 인식을 갖고 외교안보 정책을 결정했던 것이다. 세종은 시대에 앞서 이미 근대 외교의 효용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 황금시대는 세종의 실용에서 비롯되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실용주의는 근대 미국의 국가건설에 한 축을 담당하면서 국가발전의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발전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이후 정경(政經)을 분리해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에서 비롯되고 있는데, 그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실용주의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세종의 치세는 14~16세기 사이에 진행된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초기에 해당한다. 이 중세의 르네상스가 훗날 실용과 접목되어 근세 과학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지면서 중세와 근세를 이어 주고 있다. 오늘날 지구상의 문명을 주도하고 있는 서구문명의 원천인 르네상스의 초기에 지구의 반대편 동방의 조선에서 실용으로 무장된 세종의 르네상스를 찾을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의 실용은 유감스럽게도 후대에 그 명맥이 끊겼다가 정조((正祖)대에 정약용(丁若鏞)의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부활했으나 단명했다. 교조적 유교논리의 함정에 빠진 조선은 끝내 구한말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1960년대 남한에 등장한 실용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산업화는 이어 민주화를 동반했으나, 오늘날 양극화의 역풍(逆風)으로 주춤하면서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고 있는 작금의 한국에서 세종의 실용이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서희외교포럼 대표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월간조선
[출처] 인물로 본 한국외교사 Ⅱ-유성룡,광해군,최명길,정도전,세종, |작성자 ohyh45
'☆우리의 역사☆ >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Ⅳ-민영환,유길준,어윤중,명성황후,이완용,이승만 (0) | 2017.12.09 |
---|---|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Ⅲ-유정,소현세자,신숙주,김지남,오경석 (0) | 2017.12.09 |
문화재청 비판 - "'박영효 가옥' 실제 주인은 친일파 민영휘", 근데, 그래서? (0) | 2017.12.09 |
남산골 한옥마을의 만추 4.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사랑채 (0) | 2017.12.09 |
장영실발명품 장영실의 업적 (0) | 2017.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