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스캔달[6회~10회]
인조와 소현세자, 광해군의 처,자의 자살, 태조와 태종, 영조와 사도세자,연산군의 황음
6. 소현세자를 죽게 한 부왕 인조의 권력욕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땐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 받게 하더니 영구귀국 후에도 끊임없는 의심·견제로 결국 34세에 세상 등지게 해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끊임없는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
17세기 조선은 나라 안팎의 도전으로 몸살을 알았다. 명나라를 중심으로 안정됐던 동북아 국제질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크게 요동쳤다.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의 후금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명나라와 충돌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승자들이 열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의 후폭풍이 계속 몰아쳤다.
첫 번째 후폭풍은 이괄의 난이었다. 반정공신 중의 일원이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1624년(인조 2) 1월의 일이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3월부터 겨우 10개월 만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2월 10일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의 11번째 아들인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기까지 했다. 공주까지 파천했던 인조는 2월 22일에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괄의 난 이후에도 내우외환은 계속됐다. 1627년(인조 5) 1월에는 만주의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고, 1627년 10월에는 횡성에서 이인거의 무력 반란이 일어났다. 1628년(인조 6) 1월에 유효립의 역모사건이 있었으며 1636년(인조 14) 겨울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50일가량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1637(인조 15) 2월 8일, 소현세자는 인질이 돼 강빈·봉림대군 등과 함께 한양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했다. 당시 소현세자의 나이 26세였다. 궁궐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생활하던 세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사의 막사에서 노숙했다. 갑작스러운 잠자리의 변화 그리고 인질로 잡혀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세자는 병이 들었다.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한 세자는 한 달이 넘도록 질병에 시달렸다. 세자보다 강빈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에 배종의관 정남수는 강빈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를 보내달라고 본국에 요청해 허락받았다. 이후 세자와 강빈의 병세가 심각해질 경우 배종의관이 본국에 보고하고 처방전 및 약물을 받는 것이 관례화됐다.
“참고 또 참아야 하느니라”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 소경원
배종의관이 처음 소현세자의 병세를 본국에 보고하고 처방전과 약물을 요청한 때는 1638년(인조 16) 4월, 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세자는 산증(疝症)으로 4월 18일부터 침을 맞기 시작했는데 차도가 없자 뜸까지 떠야 했다. 이에 배종의관이 본국에 보고해 처방전과 약물을 요청했던 것이다. 보고서가 한양에 접수된 때는 5월 2일이었으므로 그 보고서는 심양에서 4월 말쯤 작성·발송됐을 것이다. 내의원 어의들은 병증에 따른 치료약을 정해 보냈다.
당시 소현세자가 앓던 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배종의관은 산증으로 진단해 태충혈(太衝血)에 침을 놓았고 대돈혈(大敦血)에 뜸을 떴다. 한양의 어의들 역시 산증으로 판단했다. 산증은 산병(疝病)이라고도 하는데, 한기가 뭉쳐서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배종의관과 한양의 어의들은 소현세자가 만주의 찬 기운으로 산증에 걸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세자의 병은 갑작스러운 산증이 아닙니다. 너무 염려해서 병든 것이 분명합니다. 국왕이 세자를 보낼 때 당부한 경계가 있어 지나치게 신경 써서 손상돼 병든 것입니다. 마음을 넉넉히 갖고 신중히 조섭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세자와 이별할 때 인조는 “힘쓰도록 하라(勉之哉), 지나치게 화를 내지 말라(勿激怒), 경솔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勿見輕)”의 세 가지를 훈계했다. 이 훈계는 결국 참고 또 참으라는 말과 같았다. 세자는 인조의 훈계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극도로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 인질로 잡혀온 세자가 자신의 처지를 극도의 인내로 감내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면에서 소현세자의 병은 의관들의 소견대로 산증일 수도 있지만 용골대의 의견대로 정신적 스트레스일 수도 있었다.
소현세자는 1637년(인조 15)부터 1645년(인조 23)까지 8년간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질병을 앓고 치료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세자가 처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자와 인조 사이의 관계가 멀어졌고 그럴수록 세자는 인조로부터 큰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청나라 사람들로부터 받는 심리적 압박도 여전했다. 세자는 인질생활 내내 병을 앓았고 증세가 심각해지면 본국에 보고해 처방전과 약재를 받아오곤 했다.
소현세자가 인질생활을 시작한 지 7년째가 되던 해인 1644년(인조 22년) 3월 청나라는 명나라의 북경을 점령했다. 당시 세자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북경까지 갔다가 다시 심양으로 돌아왔다. 중국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제는 1644년(인조 22년) 11월 1일 북경에서 황제에 등극했다. 그때 세자는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또다시 심양에서 북경으로 가야 했다.
중국대륙을 정복한 이상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아둘 필요가 없었다. 11월 11일 청나라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명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11월 20일 북경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했다. 인질이 돼 한양을 떠난 때가 1637년(인조 15년) 2월 8일이었으니, 그동안 7년하고도 반년이 더 넘은 세월이 흘렀다. 26세의 청년으로 고국을 떠났던 소현세자는 이미 33세의 장년이었다.
아들의 환향(還鄕)에 ‘불안감’ 고조
11월 20일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소현세자는 건강했다. 하지만 북경을 출발한 직후부터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길을 서두르지 못한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 1월 9일에야 심양에 도착했고 그 전후로 또 큰 병을 앓았다. 그 병은 조선에 보고해야 할 정도로 위중했다.
소현세자의 병세가 조선에 알려진 때는 1월 10일이었으므로 배종의관의 보고서는 그 이전에 작성됐을 것이다. 그것은 곧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들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세자의 병세가 배종의관의 실력으로는 고칠 수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음을 뜻한다.
배종의관이 세자의 질병 증세를 자세히 기록해 조선으로 보낸 이유는 이전처럼 본국의 어의들로 부터 처방전과 약재를 받으려는 목적에서였다. 배종의관이 보낸 보고서에 근거해 내의원에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처방전과 약재 그리고 어의를 파견했다.
그 덕분에 병세가 많이 좋아져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1월 말쯤 압록강을 건넌 세자는 도중에 다시 병이 도져 평양에 머물며 요양해야 할 정도로 악화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소현세자가 한양에 도착한 때는 2월 18일이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알게 된 시점은 1644년(인조 22) 12월 4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은 인조에게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겉으로 봐선 희소식이었지만 속으로는 의심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흉보(凶報)이기도 했다.
12월 6일 인조는 조정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청나라 칙사와 함께 오기로 해 칙사영접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인조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대하는 자신의 미묘한 심정을 드러냈다.
의례적인 인사 후 우의정 서경우가 중신들을 대표해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뜻밖의 일로서 조종의 신령이 은밀하게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니 국가의 경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은 나라의 큰 경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청나라의 이 조치는 정말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 마음은 없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한 청나라에 음모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음모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청나라가 인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혹 ‘소현세자가 친청파(親淸派)로 전향해 자신과 조선을 배신하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서경우는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인조는 “경들의 뜻도 다 그런가”라고 물었고 중신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생각이 확연히 드러났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의심하고 불안해했지만 중신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의 의심과 불안은 그 후로도 표출됐다. 12월 12일 소현세자와 청나라 사신들을 영접하기 위한 원접사 김육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김육은 “올해가 넘어가면 원손의 나이가 10세이니 입학과 혼례에 관한 일을 속히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요청했다.
조선시대 원손 또는 원자의 입학과 혼례는 세손 또는 세자로 책봉될 때 거행했다. 원손이 단지 왕의 큰손자라는 의미라면 세손은 왕위를 계승할 손자라는 의미였으므로 곧 후계자로 공포한다는 뜻이었다. 김육은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할 것을 요청한 셈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런 요청을 받은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물론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에 대한 의심과 불안에서 비롯됐다고 하겠다.
세자, 거의 다 기력을 회복했는데…
소현세자가 죽은 창경궁 내 환경전
인조의 의심과 불안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심각했다. 영구귀국 소식을 들은 이후로 인조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딱히 원인이 없었다. 이전에도 인조는 극심한 의심이나 불안 또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특별한 이유도 없이 병을 앓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심과 불안으로 인한 질병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인식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람이 아프면 사악한 기운이 들어서이거나 아니면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괴질(怪疾) 또는 사질(邪疾)이라고 했다.
인조의 건강은 1645년(인조 23)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심해졌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이 세자는 물론 인조에게도 질병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세자는 북경에서 귀국길에 오른 이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인조는 세자의 귀국 소식을 들은 이후로 한층 심해졌다.
세자의 배종의관이 조선의 어의들에게 처방을 요청하던 그 즈음, 인조는 특명으로 이형익을 불러들였다. 1645년(인조 23) 1월 4일이었다. 이후 인조는 이형익으로부터 번침(燔鍼)을 맞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이형익은 인조의 괴질 또는 사질을 전담하던 어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형익의 번침을 맞고 인조의 증세는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한양에 들어온 이후 다시 악화됐다. 2월 하순과 3월 초순에 인조는 거의 매일 이형익의 번침을 맞았다. 그만큼 인조의 의심과 불안이 컸다고 하겠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이 인조에겐 재앙이었던 셈이다.
세자에게도 영구귀국이 마냥 축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자의 한양 입성은 기쁨과 희망으로 넘쳐나야 할 금의환향이었다. 8년 가까운 인질생활을 끝내고 부모형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2월 8일 한양에 도착 직후 세자는 질병에 시달렸다. 2월 20일 약방에서는 어의들로 하여금 세자를 진찰하게 하자고 요청했다. 최득룡·유후성·박군 등 어의들이 진찰했고, 처방에 따라 소현세자는 20일부터 24일까지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 5첩을 복용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게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위산이 올라오는 증세까지 더해졌다. 24일에 세자를 진찰한 어의들은 “이런 여러 증세는 모두 가래가 콱 막혀서 생겼습니다”라고 진단했는데 ‘여독’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모영수탕 5첩을 더 처방했지만 호전되지 않았고 고열 증세는 더욱 악화됐다.
어의들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에 ‘천하제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26일에 다시 어의들이 세자를 진찰했다. 그런데 그날의 진찰에는 새로 이형익이 참여했다. 기왕의 어의들이 내린 처방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이형익이 추가로 투입된 것이었다. 그날 이형익을 비롯한 어의들은 이전의 이모영수탕 대신에 소시탕(小柴湯)을 처방해 올렸다. 이 처방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세자의 증세는 아주 호전됐다. 3월 5일에 있었던 어의들의 진찰에 따르면 세자의 증상은 3분의 2가량 치료됐다.
세자는 3월 6일부터 탕약을 복용하면서 침도 맞았다. 침은 이형익이 놓았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번침을 3차례 맞고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다. 3월 14일까지 5차례 침을 맞은 소현세자는 거의 완치됐다. 약간 열이 남아 있었지만 별로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14일부터 소현세자는 더 이상 탕약을 먹지도 않았고 침을 맞지도 않았다. 세자가 이 정도로 회복된 데는 무엇보다도 이형익의 번침이 유효했다. 15일에 인조는 세자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타락죽을 하루걸러 하루씩 동궁에 들이게 했다. 타락죽은 우유와 쌀로 만든 죽으로서, 조선시대 국왕의 대표적인 보양식이었다. 4월 16일에 세자는 주치의 박군에게 거의 나았다고 말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세자가 4월 21일부터 갑자기 오한과 한전(寒戰)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날의 한전 증세는 두어 시간 후에 없어졌고 다음날에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 본인이나 약방에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오전에 또다시 오한과 한전 증세가 나타나 한나절이나 지속됐다. 이에 약방에서는 23일에 어의 박군 등을 시켜 세자를 진찰하게 했는데 ‘학질’로 진단됐다. 어의 박군은 탕약만으로는 금방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해 24일 새벽부터 이형익의 침을 맞도록 요청했다.
비록 어의 박군 등은 ‘학질’로 진단하고 처방전도 그에 따라 내렸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지는 못했다.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다가 고열이 나타나는 증상은 학질과 유사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더해 기침과 가래까지 심각한 증상은 무엇 때문인지 몰랐던 것이다.
이런 괴질이나 사질은 이형익이 가장 잘 치료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이형익의 번침으로써 소현세자의 고열을 내리게 하려 했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는 4월 24일부터 이형익에게서 번침을 맞았다.
3월 14일부터 탕약과 침을 끊었던 세자는 4월 24일에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柴胡知母湯)을 복용했다. 아울러 이형익의 번침도 맞았다. 이전에 이형익의 번침술이 소현세자의 병을 완치했었기에 또다시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25일에 약방에서는 상한증(傷寒症)을 잘 고치기로 소문난 최득룡으로 하여금 박군과 함께 소현세자의 진찰과 치료를 담당하게 했다.
24일까지만 해도 약방에서는 세자의 증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박군 혼자에게만 진찰과 치료를 맡겼는데, 차도가 없자 다시 최득룡을 추가 투입했던 것이다. 25일에 세자는 이형익의 번침을 맞고 또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을 들었다. 그러나 증세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25일에도 한약을 복용하고 번침을 맞았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26일 오전에 세자는 어의 최득룡이 처방한 시호탕을 들었다. 그런데 시호탕을 들고난 후 세자는 더욱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약방에서는 이형익의 번침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번침을 맞은 직후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645년(인조 23) 4월 26일 정오였다. 당시 소현세자는 34세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당일, 인조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빈소로 갔다. 세자의 죽음을 보며 인조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혹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지도 모를 정적이었으니 잘 죽었다고 통쾌해했을까?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아들이 죽게 된 원인을 청나라에 돌리며 이를 갈았을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의 의심과 불안은 사라졌을 것이다.
기록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병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실제 소현세자를 병들게 하고 그래서 죽게 만든 원인은 인조 본인이었다. 젊은 소현세자가 병들어 죽은 이유는 인질생활을 하던 만주의 환경적 요인 그리고 조선과 청 사이에 끼여 양쪽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심리적 압박감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의 제공자는 바로 인조였다. 그래서 소현세자 사후에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예컨대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든 지 며칠 만에 죽었다. 그런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왔다. 검은색 천으로 세자의 얼굴을 반쪽만 가려놓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도 어느 쪽이 얼굴이고 어느 쪽이 천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세자의 얼굴색은 중독된 사람과 유사했다. 그렇지만 밖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며 임금도 또한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당시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인렬왕후 한씨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이세완이 왕비의 친척이었으므로 세자의 시체를 염습할 때 참여했는데, 그 이상한 모습을 보고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27일조)
폐탈지실의 우(愚)를 범한 왕
소현세자가 실제로 인조에 의해 독살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죽음은 병 때문이었고, 그 병은 인조 때문이었음이 확실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끝없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인조는 혹시라도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불안해했고, 그 의심과 불안이 소현세자를 병들게 했던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의심과 불안이 세자 즉 국본(國本)을 병들게 하고 나아가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국본이 병들면 그것은 곧 나라가 병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국본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불안해하지도 말아야 했다.
국본과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정국본(定國本)’이다. 국본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국본’이다. ‘정국본’과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위립지계(違立之計)’, ‘유교지법(諭敎之法)’, ‘적서지분(嫡庶之分)’, ‘폐탈지실(廢奪之失)’ 등 네 가지를 가르친다.
‘위립지계’는 법과 원칙을 어기고 거짓 국본을 세우려는 마음 자체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유교지법’은 국본을 세운 후에는 처음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며, ‘적서지분’은 군주가 후궁에게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폐탈지실’은 군주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본을 흔들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 인조가 의심과 불안으로 소현세자를 병들어 죽게 한 것은 ‘폐탈지실’의 우를 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연의>에서는 군주가 ‘폐탈지실’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재상의 충고를 따르라 가르친다.
비록 부자관계이지만 군주와 세자는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다. 그래서 의심하고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그런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나라의 여론을 대변하는 재상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폐탈지실’의 우가 반복되니 슬프고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7. 광해군의 비극, 왕비와 세자 내외 자살사건
인조반정으로 궁궐에서 쫓겨난 뒤 함께 유폐돼
… 절망적인 삶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자진(自盡)’ 선택
광해군은 재위기간(1608~1623)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비사건 등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결국 축출되고 말았다. MBC 사극 <화정>에서 광해군 역을 맡은 배우 차승원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인조반정이 거사됐다. 김류 등이 거느린 1천여 명의 반정군은 창덕궁 동쪽의 단봉문을 열고 몰려 들어갔다. 광해군이 함성 소리에 잠을 깼을 때 시위(侍衛)하던 신하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없었다.
놀란 광해군은 처자식을 챙길 겨를도 없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얼마나 급했던지 가져가던 옥새도 흘려버렸다. 궁녀 1명과 환관 1명이 광해군을 인도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궁녀는 은밀하게 숨겨둔 사다리를 찾았다. 평상시 궁녀들이 궁 밖으로 나갈 때 이용하던 사다리였다. 이 사다리를 이용해 광해군은 궁성을 넘었다. 젊은 환관에게 업힌 광해군은 궁녀의 뒤를 따라 안국신의 집에 숨어들었다. 동궁에서 잠자던 광해군 세자는 왕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자 장의동 민가로 숨어들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집에 갔을 때까지도 누가 반정을 일으켰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친척 정담수를 시켜 주모자를 알아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왕의 은신처를 밀고해버렸다. 능양군의 지시를 받고 이중로가 광해군을 체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왕은 초상난 사람의 복장으로 변장해 있었다.
그러나 이중로는 대뜸 알아보고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너는 누구냐?”는 광해군의 질문에 “신은 이천부사 이중로입니다”라고 대답한 그는 왕을 번쩍 안아 말에 태웠다. 광해군은 창덕궁의 약방에 갇혔고 세자 역시 잡혀와 도총부에 갇혔다.
광해군은 이중로에게 사로잡힐 때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하여 궁녀와 환관들을 보내주지 않고 나를 이리 박대하는가”라고 따졌다. 비록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해줘야 되지 않느냐는 항변이었다.
보고를 받은 능양군은 궁녀 한 명과 후궁 한 명을 보내주었다. 반정 당시 광해군에게는 최소한 7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중에서 광해군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후궁은 소용 임씨와 소용 정씨였는데, 정씨는 반정 당일 자살했다. 그래서 능양군은 소용 임씨를 광해군에게 보내주었다. 광해군은 소용 임씨를 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반정 당시 광해군의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는 궁 밖으로 도망치지 못했다. 수십 명의 궁녀들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창덕궁 후원의 어수당(魚水堂)으로 도망가 숨었다.
반정군은 어수당을 몇 겹으로 둘러쌌지만 난입하지는 않았다. 안에 왕실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어수당 문들 걸어 잠그고 버텼다. 반정군에게 포위된 어수당은 완전히 고립됐다. 그 안에는 먹을 것, 마실 것도 없었다. 급하게 도망해 오느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실학자 서계 박세당의 아버지인 박정에게 내려진 인조반정 공신교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나자 궁녀들은 굶주림으로 아우성쳤다. 왕비와 세자빈 역시 굶주림으로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 끝에 자수하기로 결심한 왕비는 궁녀를 시켜 문밖으로 나가 “중전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려움에 한 명도 문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한보향이라는 여인이 나가 “중전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반정군은 포위를 풀고 약간 뒤로 물러났다. 왕비 유씨는 한보향을 시켜 “주상은 이미 나라를 잃었으니 새로선 분은 누구시오”라고 묻게 했다. “선조대왕의 손자인데 누구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비는 다시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요, 부귀를 위한 것이요?”라고 묻게 했다. “종묘사직이 거의 망하게 됐기에 우리들이 새 임금을 받들어 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스스로 부귀를 위한 것이겠소”라는 대답을 들은 왕비는 “의거(義擧)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전왕의 왕비를 굶어 죽게하려는 것이요”라고 묻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능양군 즉 인조는 당장 명령을 내려 광해군·왕비·세자·세자빈 등에 대한 음식 공급을 부족함 없도록 하게 했다. 이에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사흘 만에야 배를 채울 수 있었다.
12일 한밤중에 거사해 창덕궁을 장악한 능양군은 인정전 서쪽 뜰 위에 호상(胡床)을 놓고 앉아 반정군을 지휘했다. 능양군은 유희분·이이첨·박승종 등 광해군 측근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들을 파견하는 동시에 조정 중신들을 입궐하게 했다. 아울러 김자점·이귀 등 반정 주역들을 서궁으로 보내 인목대비를 모셔오게 했다. 능양군은 인목대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서 찾은 옥새를 대비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나 서궁의 인목대비는 한밤중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혹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뺏으려 보낸 사람들은 아닌가 의심했다. “공주는 이미 죽어서 담 밑에 묻었다”고 말하며 인목대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능양군이 직접 서궁을 찾았다.
13일 저녁, 능양군은 말을 타고 창덕궁을 떠나 서궁으로 갔다. 뒤에는 남색의 작은 가마에 태워진 광해군이 따르고 있었다. 흰색의 개가죽 남바위를 쓴 광해군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서궁에 도착한 능양군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인목대비를 만난 능양군은 꿇어 엎드린 채 한참을 통곡했다.
“통곡하지 마시오. 종묘사직의 큰 경사인데 어찌 통곡을 하시오”라는 인목대비의 말에 능양군은 “큰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왔으니 신의 죄가 막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목대비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고는 “내가 기구한 운명으로 불행하게도 인륜의 큰 변고를 만났소. 역적 광해군이 선왕에게 유감을 품고 나를 원수로 여겨 나의 부모를 도륙하고 나의 친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나의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나를 별궁에 유배시켰소. 이 몸이 오랫동안 깊은 별궁 속에 처해 인간의 소식을 막연히 들을 수 없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라고 했다.
인목대비의 피맺힌 복수는 시작되고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의 묘
인목대비는 옥새를 능양군에게 전해주며 “역적 광해군 부자는 지금 어디에 뒀는가”라고 물었다. “모두 궐 안에 있습니다”라는 대답에 인목대비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요.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 동안 유폐돼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니 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라고 했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인목대비는 반드시 광해군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아무리 축출된 왕이라고 해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종반정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죽이지 않았던 전례를 들어 죽음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킨 인목대비는 “내가 상심한 지 이미 오래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했소.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용서하시오”라고 하고는 능양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이날 능양군은 서궁의 서청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다음날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서인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공포했다. 이후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을 38가지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속히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10년 전 광해군이 내세웠던 폐비 명분보다 무려 4배나 많은 죄악을 거론한 것이었다.
처음 인목대비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광해군을 국문하겠다고 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광해군을 비롯해 측근 관리들과 궁녀들 모두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아무리 대비라고 해도 남자인 광해군과 측근 관리들을 국문하는 것은 유교 윤리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인조반정 주체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인목대비는 다른 방법으로 복수하고자 했다. 3월 15일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폐세자를 극변(極邊)에 안치하고, 그들의 처 역시 각각 다른 곳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해군, 폐비 유씨, 폐세자, 폐세자빈 박씨를 각각 나눠 삼수·갑산·아오지 같은 변경(邊境)에 유배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런 뜻은 광해군을 죽이지 못하게 된 인목대비가 처자식이라도 보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뜻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하면 인정상 너무 야박하다는 문제 이외에 감시 곤란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반정 주역들은 감시 편의를 위해 가까운 섬으로 유배하고 그것도 광해군과 왕비 유씨를 함께 또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함께 유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강화도에는 광해군과 왕비 유씨를 유배하고, 교동에는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유배하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인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한편 반정이 거사된 지 8일이 되는 20일까지도 광해군은 창덕궁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인목대비는 곧바로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빈청에 내렸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역적 괴수인 폭군 혼(渾, 광해군)이 아직도 대궐 안에 있다고 한다. 천지간에 잠시도 용납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역적 괴수가 편안히 앉아 있는가? 경 등은 위로 종묘사직을 위하여 속히 처치하라. 역적 괴수가 창덕궁을 떠난 뒤에야 나는 서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길 것이다. 경 등은 나를 위하여 반드시 소홀히 하지 말라. 나는 경 등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요청한다.” [<승정원일기> 인조 원년(1623) 3월 20일]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광해군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옥좌에 올랐지만 청(후금)을 적대하다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한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서울 송파구에 세운 삼전도비(三田渡碑, 대청황제공덕비).
위의 내용 그대로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같은 궁궐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견디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속히 처치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인목대비의 명령에 의금부에서는 “자전(慈殿)의 하교가 또 이르렀으니 속히 결정을 내려 오늘 안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대장 1명을 골라서 내일 아침에 보내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재촉에 의해 3월 21일 강화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 길은 임해군이 갔던 길이기도 했고 영창대군이 갔던 길이기도 했다. 광해군은 자신이 뿌린 그대로 되돌려 받고 있었다.
3월 23일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강화도에 도착했고, 폐세자와 폐빈 박씨는 교동에 도착했다. 그들이 거처할 곳 주변으로는 가시덤불이 쳐지고 밖에는 군병들이 배치됐다. 소용 임씨 역시 광해군을 수행해 강화도에 왔다.
이에 따라 광해군, 폐비 유씨 그리고 소용 임씨는 강화도 적소(謫所)에서 함께 머물게 됐다. 아마도 적소 안에서 광해군과 소용 임씨가 같은 건물에 머물고 폐비 유씨는 다른 건물에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광해군이 원해서였을 것이다. 반정 이후 광해군은 소용 임씨에게 더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폐비 유씨에게 더 큰 서러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가시덤불로 둘러진 집에 갇히던 날, 폐비 유씨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해 위중했으며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분명 폐비 유씨는 목을 매 죽으려 했을 것이다. 그것을 함께 있던 궁녀가 발견하고 풀어줘 살아났던 것이다. 그 와중에 폐비 유씨와 궁녀가 다 같이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폐비 유씨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듯하다.
이런 마음은 폐세자와 폐빈 박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시덤불로 둘러진 집에 갇히던 날, 폐세자와 폐빈은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명목(暝目)·악수(幄手) 등 시체를 염습하는 데 쓰는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음식은 물론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나자 두 사람은 죽기 일보직전이 됐다. 때가 됐다고 생각한 폐세자와 폐빈은 함께 목을 맸지만 궁녀에게 들켜 되살아나게 됐다. 그때가 4월 10일쯤이었다.
동반자살하려다 실패한 폐세자와 폐빈은 장차 어떻게 할까 궁리했을 듯하다. 반면 감시는 더 심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거처하는 궁녀는 하루 종일 감시의 눈을 번뜩였을 것이다. 마음대로 자살도 못하게 된 폐세자와 폐빈은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탈출이었다.
마침 그 즈음 한양에서 살림살이에 쓸 가위와 인두 등을 보내왔다. 폐세자와 폐빈은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으슥한 밤이 되자 궁녀는 인두를 가지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폐세자와 폐빈은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들여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폐세자와 폐빈이 직접 땅굴 작업에 참여한 것이었다. 궁녀는 이들과의 오랜 인연으로 땅굴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때가 4월 24일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땅굴은 점점 더 길어졌다.
세자 내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런데 폐세자와 폐빈이 탈출에 성공하려면 배가 있어야 했다. 교동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폐세자와 폐빈은 감시병들의 지휘자인 별장 권채를 포섭했다. 권채의 도움으로 땅굴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권채는 배도 마련해뒀다.
드디어 5월 21일 한밤중에 땅굴이 담 밖에까지 연결됐다. 땅굴의 총 길이는 대략 20여m였다. 폐세자와 폐빈은 그날 밤에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폐세자가 은자와 쌀밥을 챙겨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궁녀가 뒤에서 밀어줬다. 폐빈은 나무 위에 올라가 상황을 주시했다. 그런데 땅굴 밖으로 나온 폐세자는 방향을 몰라 헤매다가 감시병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것을 나무 위에서 보던 폐빈은 놀라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체포된 폐세자는 다시 적소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폐빈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폐세자 역시 절망에 빠져들었다. 폐세자와 폐빈은 굶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을 굶던 폐빈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그러나 폐세자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달 여 후에 자진(自盡) 처벌을 받은 폐세자 역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그동안 폐세자는 거의 굶다시피 했으므로 사실상 굶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비록 쫓겨난 왕과 왕비라 해도 폐빈 박씨와 폐세자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듯하다. 어쨌든 큰아들이고 큰며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과 폐비는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과 폐비는 적소 안에서 개인적으로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상을 치러야 했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폐비는 글재주도 있고 재치 또한 겸비해 마음 씀씀이가 고운 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폐비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을 겪으면서 궁중생활 자체를 혐오하게 됐다. 비록 상황에 떠밀린 폐비가 광해군과 함께 인목대비를 핍박하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폐비에게는 혐오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폐비는 항상 “후생에는 다시 임금의 집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궁중에 일상화된 암투와 음모 등이 너무도 싫어서였을 것이다. 이 같은 폐비의 감성을 큰아들 폐세자가 빼 닮았다. 강화도로 끌려오던 배 위에서 폐세자는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속세의 흥망성세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라./ 나는 기꺼이 가리라, 흰 구름 사이로”
이 시에는 폐세자의 여린 감성이 유감없이 표현돼 있다. 미친 듯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폐세자는 속세의 흥망성쇠를 연상한다. 그런 그에게는 세자였던 자신의 지난날도, 부왕 광해군의 지난날도 모두 미친 듯 출렁이는 파도처럼 헛될 뿐이다. 가시덤불로 휘둘린 적소에서의 생활 역시도 잠시 지나가는 파도에 지나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 폐세자에게는 인생살이 자체가 한바탕 꿈처럼 느껴진다.
아들 내외 보낸 지 100일 만에 폐비도 자진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죽음을 알았을 때, 폐비는 죽을 결심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상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유교식으로 상을 치른다면 최소한 3년을 살아야 했지만 폐비는 유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교국가 조선의 심장인 궁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비는 불교에 심취해 대궐 안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친히 기도하며 받들어 섬겼다. 또 나무로 새기고 흙으로 빚은 불상을 여럿 만들어 사찰에 내려주기도 했다.
이런 폐비였기에 폐세자와 폐빈의 상 역시 불교식으로 치렀다. 우선 49재를 지내면서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100일째 되던 날 상을 마쳤다. 이미 죽기로 작정한 폐비 유씨는 탈상 전부터 곡기를 끊은 상태였다.
10월 8일 폐비는 강화도 적소에서 사연 많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폐세자가 목매 죽은 6월 27일부터 계산하면 101일째 되는 날이었다. 폐비의 죽음을 알리는 강화부사의 보고서가 한양에 도착한 시점은 10월 9일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폐비 유씨가 병사(病死) 했다고 기록됐지만 사실은 굶어 죽은 것이었다. 인조는 “폐비가 병으로 죽었다니 내가 매우 놀랍고 슬프다. 염습할 때 쓸 옷과 관 등의 물자를 속히 내려 보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폐비에게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는 작호도 내렸다. 남자들의 정치투쟁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어간 폐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얼핏 생각하면 광해군의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가 굶어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굴레가 있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몸으로 그런 굴레를 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폭주를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광해군 때문에 폐비가 되고 폐빈이 된 상황에서 여성인 그들이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특히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죽은 상황에서 왕비 유씨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의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목숨이라고 해도 그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목숨은 가까이로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고 더 멀리로는 조상을 너머 조물주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또는 생명에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숭경외(崇敬畏)’에 함축돼 있다.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숭경외’다. 나의 목숨을 비롯해 사람의 생명 나아가 우주만물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았다.
그런 생명이기에 자기의 것이나 남의 것이나 공경과 두려움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남의 생명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되지만 자기의 생명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진정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자기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다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금에 걸쳐 자기 생명은 물론 남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크게 슬퍼할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8. 상왕 이성계의 복수심,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다
자신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 이복동생 방번·방석 참살한 데 격분
… 신덕왕후 친족 조사의의 ‘난’ 부추겼다가 무학대사 설득에 칼 접어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반발해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유동근 분)이 측근인 조영무(오른쪽, 장항선 분), 이숙번(왼쪽, 선동혁 분)과 함께 입궐하고 있다
1398년 8월 26일 밤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태조 이성계는 권력을 잃고 상왕으로 밀려났다. 정종 1년(1399) 2월 26일 개경으로 재천도가 결정되자 한양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이사했다. 이성계의 위력에 눌려 억지로 옮겨온 그들에게 한양은 죽음의 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3월 7일 이성계도 경복궁을 나와 개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61세이던 1395년 12월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만이었다. 개경으로 되돌아갈 때 이성계는 이미 65세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가는 길에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을 지나게 되자 차마 그대로 가지 못하고 능에 올라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성계에게 재천도는 상실감에 더해 수치심을 불러왔다.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는 신생왕조의 개국시조로서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4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성계는 절대권력을 잃고 폭 삭은 노인이 돼 끌려가다시피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금의환향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꼴을 개경 시민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개경 입성 직전 이성계는 “내가 한양에 천도했다가 처자식을 잃고 오늘 환도하니 진실로 개경 사람들에게 수치스럽다. 그러므로 내가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어두울 때 해서 개경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라”고 명령했다. 3월 9일 새벽 이성계는 숨어들 듯 개경으로 들어갔다. 이런 면에서 당시의 이성계는 과거의 위풍당당하던 개국시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상실감과 수치심으로 몸부림치는 가여운 노인일 뿐이었다.
이성계의 개경 거처는 덕수궁이었는데 그 주변에 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시에는 제법 큰 절이었다. 정종 2년(1399) 8월 중순 이성계는 몰래 덕수궁을 빠져 나와 신암사로 갔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비명횡사한 방석·방번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자 이방원에게 발각돼 다시 덕수궁으로 끌려왔다. 이방원은 미안한 마음에 크게 잔치를 열었다.
술에 취하자 이성계는 “밝은 달은 주렴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구나”라고 읊었다. 한술 더 떠 “산하는 의구한데 사람은 어디 있느뇨?”라고 한 뒤 “나의 이 시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했다. 이성계는 고독하고 슬펐던 것이다. 그 고독과 슬픔은 이방원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방원이 있는 개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10월 11일 생일잔치를 치른 지 나흘째인 15일 한밤중에 이성계는 탈출하듯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불공을 드린 이성계는 오대산으로 갔다. 그곳에 머물던 11월 11일 개경에서는 마침내 세자 이방원이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양위하라고도 할 수 없고 양위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미 양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이런 언급 속에서는 무력감과 체념이 감지될 뿐이었다.
‘원수’와 ‘아들’ 사이에서 번민하는 상왕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貞陵). 능은 원래 서울 중구 정동(주한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됨)에 조성됐으나 이방원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이방원이 왕, 즉 태종이 된 후 이성계는 개경이 더더욱 싫어졌다. 이방원에 대한 미움도 같이 커졌다.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다른 곳에 살 곳을 마련하려고 했다. 태종 1년(1401) 윤 3월 1일 한양의 정릉에 행차했던 이성계는 금강산을 거쳐 안변·함흥으로 가버렸다. 안변은 이성계의 처가가 있던 곳이고 함흥은 어려서 자란 고향으로서 명실상부 이성계의 아성(牙城)이었다. 이성계는 안변과 함흥에 궁궐을 새로 짓고 눌러 살 작정이었지만 성석린에게 설득돼 다시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당시 이성계가 안변·함흥 지역에 오래도록 머물자 태종은 문안을 명분으로 사람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명분은 문안이지만 실제는 동북면의 아성을 이용해 혹 무슨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는 문안하겠다고 사람이 올 때마다 활에다 살을 매기고 쏠 듯이 위협하며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태종의 불안감은 말할 수 없이 커져갔다.
그때 이성계의 옛 친구였던 성석린이 자청해 함흥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마치 지나가는 길손처럼 가장한 성석린은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머물던 부근에 도착한 성석린은 밤에 불을 피우고 밥짓는 시늉을 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시를 보내 누군지 알아보게 했는데 그때 성석린은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이성계는 성석린이 정말로 우연히 지나는 길이라 생각하고 불러서 만나봤다. 그때 성석린이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이성계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먼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맹서했다. 그 맹서에 이성계는 성석린을 믿었고 마침내 설득돼 개경으로 되돌아오게 됐으며 성석린의 자손들은 그의 거짓 맹서대로 장님이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갈등으로 방황했다.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태종은 자신의 와병을 틈타 사랑하는 아들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아갔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 그리고 아들과 권력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은 곧바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연결됐다. 그런 미움과 복수심을 이기지 못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바로 자신이 건국한 조선왕조의 왕이기도 하고 또 아들이기도 했으며, 개경은 조선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태종과 개경을 버리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반면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과 개경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감정과 이성 사이를 방황하며 상왕 이성계는 개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고 또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곤 했다.
복수 결심하고 고향 동북면으로 가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의 수하(手下)인 조영규에게 참살된 선죽교.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안변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불당을 짓고 부처에게 기도하기도 하는 등 노력했다. 하지만 방황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상왕 이성계는 다시 개경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 그곳에 유명한 스님이 있어서 별전(別殿)을 짓고 눌러 앉으려고 했다.
이에 태종이 직접 소요산까지 찾아가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대들의 뜻은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라고 대답하고 공중에다 큰소리로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고 외쳤다.
방황하던 이성계는 아예 속세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는 외침이 그런 마음이었다. 소요산의 별전에 머물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6월 9일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로 행차했다. 소요산에 머문 지 거의 7개월 만의 일이었다.
회암사에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계(戒)를 받고 보살이 됐다.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출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태종이 문안한다는 명분으로 회암사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4개월가량 머물렀지만 방황에서 헤어나지는 못했다. 회암사로 갈 때는 출가하려던 마음이었지만 결국 태종의 방해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이성계의 방황은 마침내 미움과 복수의 감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태종 2년(1402) 10월 27일 이성계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명나라 칙사 온전(溫全)을 마중한다는 핑계로 회암사를 떠나 연천 방향으로 행차했다. 하지만 속셈은 고향 동북면으로 갈 생각이었었다. 이번에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 군대를 일으켜 태종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수상하게 생각한 태종은 경호를 명분으로 감시 병력들을 딸려서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복수를 결심한 이성계는 그 감시 병력들까지 협박해 동북면으로 데리고 갔다. 감시 병력들이 “태상왕께서 칙사를 마중한다고 하셔서 주상전하께서 저희들을 보내 시위하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깊이 먼 지방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라며 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는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른 군사들인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라며 눈물을 흘렸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아들과 군대의 배반이라 생각하며 복수심이 극에 달한 터라 이렇게 쉽사리 눈물을 보일 정도로 감정이 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시 병력들은 마지못해 동북면으로 동행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11월 4일 김화를 거쳐 11월 8일 철령을 넘고 9일에는 함흥으로 향했다. 11월 4일 김화를 출발하기에 앞서 측근 환관 함승복과 배상충을 미리 동북면으로 보내 군대를 모으게 했다.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영흥판관 김권(金綣) 등 동북면의 실력자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조사의는 바로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해 상왕 이성계 못지않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런 조사의였으므로 함승복과 배상충의 권유를 받자마자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킨 11월 5일 이후 동북면 지역은 사실상 이성계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11월 8일 상왕 이성계가 철령을 넘을 때는 자신의 왕국으로 입성한 셈이었다.
분노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를 잃고 실의에 빠진 태조 이성계(왼쪽, 김무생 분)를 그의 의제(義弟)인 퉁두란(오른쪽, 강인덕 분)과 무학대사(박병호 분)가 위로하고 있다
이른바 ‘조사의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의 내막은 이성계가 아들 태종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북면의 군대를 일으킨 것이었다. 태종은 그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성계와 태종의 군대는 동북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초반 전투는 이성계 측의 군대가 승기를 잡아나갔지만 일진일퇴의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는 점점 확대됐다. 이성계 측에는 여진족들이 가세했고 태종 측에도 후방 지원군들이 속속 가세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국이 전쟁터가 될 판이었다.
이성계가 조사의 등을 움직여 군대를 일으킨 것은 궁극적으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의 감정에서였다. 그런 면에서 이성계가 냉정하게 사후대책을 세웠을 리가 없었다. 만약 복수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 스스로도 그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68세나 된 그가 다시 왕위에 올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감정적으로는 복수를 하고 싶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결국 이성계가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설득해 복수심만 누그러뜨린다면 이성계의 군대는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함흥으로 보냈다. 그러나 함흥차사는 가기만 할 뿐 소식이 없었다.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가고난 후 소식이 없는 사람들, 함흥차사가 그들이었다. 마침내 태종은 이성계가 가장 존경하고 신임하는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이성계를 만난 무학대사는 “방원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허나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 원컨대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설득했다.
실록에 따르면 11월 28일 연산부사 우박(禹博)이 역마를 타고 개경에 와서 상왕 이성계의 귀경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연산은 지금의 평안도 영변지역인데 이성계는 함흥에서 맹산을 거쳐 평안도 영변지역까지 갔던 것이다. 물론 군대를 모으느라 그렇게 했다. 이성계는 11월 9일쯤 함흥에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9일 후인 18일에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10일 후인 28일쯤 영변에서 귀경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미움과 복수심, 운명론으로 극복하다
조사의도 이성계를 따라 군대를 이동시켰다. 11월 24일자의 <태종실록>에 의하면 그때 조사의의 군대는 맹산과 영변의 중간쯤인 덕천에 주둔해 있었다. 아마도 조사의의 군대는 11월 18일 이성계와 함께 함흥에서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이성계와 함께 영변 쪽으로 이동 중인 24일 덕천에 주둔했을 것이다. 그러던 조사의의 군대는 바로 3일 후인 27일 안주에서 청천강을 건너다가 궤멸하고 말았다.
앞뒤 정황을 보면 상왕 이성계는 26일쯤 영변에 도착한 후 무학대사에게 설득돼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것은 곧 자신이 선동해 일으킨 조사의 등의 군대를 버렸다는 의미다. 그렇게 버림받은 조사의의 군대는 27일 자멸했던 것이다.
복수하겠다고 군대까지 일으켰던 이성계가 그토록 허무하게 복수를 접은 것은 그것이 감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의 논리 정연한 설득에 복수심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무학대사의 말은 냉정히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에 의해 이성계는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살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은 다시 감정에 휘둘리고 말았다. 영변에서 평양을 거쳐 개경을 향해 가면서 감정이 솟아났던 것이다. 게다가 12월 8일 태종을 만나게 되자 그 감정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됐다. 야사에서는 상왕 이성계가 태종을 만나면서 얼마나 감정적으로 행동했는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개경의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베풀었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성난 것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을 받치는 기둥을 큰 나무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허락하고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차일 기둥을 만들었다. 태종이 태조를 만날 때 면류관에 국왕의 복장을 하고 가서 뵈었다. 태조가 태종을 바라보다가 노한 얼굴빛이 되면서 갖고 있던 활을 힘껏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에 의지해 몸을 숨기자 화살은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말하기를, ‘천명이로다’라고 했다. 이어서 옥새를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고 했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잔치를 시작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려 하는데 하륜 등이 몰래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서 잔에다 술을 따른 후 잔을 올리실 때 술잔을 직접 올리시지 마시고 마땅히 환관에게 줘서 올리소서’라고 했다. 태종이 그 말대로 해 환관이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받아서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안에서 철퇴를 찾아내 옆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고 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종 2년(1402) 12월 8일 이성계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개경을 떠난 지 만 1년 만이었다. 그 1년 동안 소요산·회암사·함흥·영변을 거치면서 온갖 곡절을 겪었다. 그 곡절들은 모두가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일어난 방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2월 8일 이후로 이성계는 더 이상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운명에 대한 순응이었다.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을 이성이 아닌 운명론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비극적 말년은 국가권력의 오용(誤用)에서 비롯돼
사실 이성계는 운명론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선을 창업하기 이전 100여 차례 이상 전투를 치르면서 이성계는 삶과 죽음, 그리고 승리와 패배가 사람의 이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다.
전쟁은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꼭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우세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성에 입각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졌다고 생각한 전투에서 이기거나 죽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살아난 것은 이성의 힘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확실한 방법은 천명 즉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성계는 태종이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왕이 된 현실을 ‘배신’과 ‘불효’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는 절대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배신’과 ‘불효’로 만들어진 현실은 처벌되고 바뀌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는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태종을 처벌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서 군대를 일으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막상 군대를 일으켰지만 뒷일을 감당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성계 자신이 왕년의 이성계가 아니었다. 왕년에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은 더 이상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68세의 노인에게 희망을 두지 않았다. 자칭타칭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말리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태종과 만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일거에 처벌하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도 말리고 꼭 될 것 같은 기회도 무산된 것은 결국 하늘이 시켰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운명이었다. 결국 하늘은 방석이 아니라 방원에게 왕위를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도정치와 패도정치의 차이를 논하는 <대학연의> ‘왕도패술지이(王道覇術之異)’에서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덕과 힘에서 찾는다. 힘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패도정치라면 덕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왕도다. 왕도정치의 핵심은 ‘보민(保民)’이고, 보민의 핵심은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르는 데 있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9.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부왕(父王) 영조의 금주령
길 가다 개미조차 밟지 못했을 만큼 마음 여렸던 어진 임금
… 그러나 소통·신뢰 부재 탓에 아들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는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성군(聖君)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오명을 남겼다. 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중연회 재현행사에 참석한 영조대왕.
정조가 지은 <행록(行錄)>에 의하면 조부(祖父)인 영조는 길을 걷다 개미가 있으면 밟지 않고 피해 갈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영조 역시 ‘내가 일찍이 차마 미물들을 밟지 못해 개미같이 하찮은 것 역시 밟지 않았고 밤 등불에 나방이 달려들면 손으로 휘저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영조는 감정이 복받치면 펑펑 울기도 했으며, 감정대로 행동하다 나중에 한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런 영조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 같은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를 빼놓고 영조의 치세 50여 년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조선 500년 동안 왕실에서는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뒤주사건은 조선왕실 최대의 비극이며 스캔들이라 할 만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무더운 여름날 8일이나 굶겨서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스캔들 이면에는 영조의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가 있었다. 이는 영조의 치세 50년을 관통했던 3대 국정지표 중 하나인 ‘계숭음(戒崇飮)’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공식적으로 선왕의 3년 국상(國喪)이 끝난 후부터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정치노선이나 정책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면 최소한 3년상 동안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조선의 21대 국왕이었던 영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영조는 이복형(異腹兄)인 경종의 독살 의혹 속에서 1724년 8월 30일 왕위에 올랐다. 이어서 영조 2년(1726) 10월 13일 새벽, 종묘에서 경종의 부묘제(祔廟祭)가 거행됨으로써 3년간의 국상이 종료됐다. 이를 기념해 영조는 자신의 3대 국정지표가 명시된 교서를 반포했는데 계붕당(戒朋黨)·계사치(戒奢侈)·계숭음(戒崇飮)이 바로 그것이었다. 붕당을 경계한다는 ‘계붕당’은 정치적 국정지표였고, 사치와 과음을 경계한다는 ‘계사치’와 ‘계숭음’은 사회적 국정 지표였다.
큰 흉년 이후 모든 술이 금지되고
사도세자의 빈(嬪)인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인 <한중록>.
선조 8년(1575)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이후 150여 년에 걸쳐 붕당 간 당쟁이 격렬하게 진행됐기에 ‘계붕당’은 당연한 국정지표였다. 이와 함께 ‘계사치’와 ‘계숭음’이 3대 국정지표에 포함된 이유는 당시의 사치와 과음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과음의 문제점을 영조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 술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진실로 광약(狂藥)이다. 옛날 대우(大禹)의 깊은 염려와 우리 열성(列聖)의 경계가 앞에서 환하고, 또한 숙종대왕의 계주윤음(戒酒綸音)이 지극하지만 오히려 구습을 고치지 못하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겼다. 아! 사람의 천성은 진실로 본래부터 착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더러 기질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변화시켜서 착해지게 하려고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기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술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는 마땅히 더 자신들을 가다듬어 깊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권10, 2년(1726) 10월 13일]
위의 내용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영조의 여린 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영조는 술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점잖던 사람이 술 때문에 엉망이 되는 것은 물론 유순하던 사람도 술 때문에 난폭해진다. 술에서 깨어난 후에는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쥐구멍을 찾지만 또다시 술을 마시고 망가진다.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불쌍한 마음으로 볼 수도 있다. 영조는 ‘구습을 고치지 못하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술 때문에 망가지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쌍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여린 마음의 소치(所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중 ‘옛날 대우의 깊은 염려’란 “옛날에 제녀(帝女)가 의적(儀狄)으로 하여금 술을 빚어 우(禹)에게 바치게 했는데 우가 마시고 달게 여겼으나 우가 의적을 멀리하고 지주(旨酒)를 끊으며 말하기를 후세에 분명 술 때문에 그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전국책(戰國策)>의 고사를 지칭한다.
여기서 우가 마셨다는 지주(旨酒)는 증류주를 의미한다. 그 이전에는 도수 낮은 발효주만 있었는데 의적이 도수 높은 증류주를 만들어 바치자 우는 이 증류주 때문에 망국의 폐해까지 생길 것이라 깊이 염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열성의 경계’는 술의 폐해를 경계한 세종의 교지를 위시해 중종의 계주윤음 등을 의미한다. 영조는 자신의 ‘계숭음’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술에 대한 대우의 깊은 염려 그리고 세종의 교지, 중종의 계주윤음, 숙종의 계주윤음 등을 들고 이를 근거로 강력한 ‘계숭음’ 정책 즉 금주령을 추진할 것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조선건국 이후 금주령은 거의 모든 국왕에 의해 추진됐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으로 확인해보면 조선의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경우 2년(1393) 12월, 3년(1394) 1월, 4년(1395) 2월, 5년(1396) 4월, 7년(1398) 5월 등 거의 매년 금주령을 공포했다. 대부분의 이유는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곡물 품귀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의 정종·태종·세종 등도 유사한 이유에서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하지만 영조 이전의 금주령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특정 상황이 해소되면 곧바로 해제되곤 하는 한시적 정책이었다. 영조도 재위 중반까지는 한시적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이런 상황이 영조 31년(1755) 가을에 큰 흉년이 들면서 확 바뀌게 됐다. 그 해 9월 8일 영조는 내년 즉 영조 32년(1756) 정월부터 모든 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금주령을 공포했다. 이런 금주령이 공포된 이유를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주상전하가 이르기를 ‘금주(禁酒)의 일이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라 경을 불렀다. 경은 일찍이 예주를 마셔봤는가? 옛사람은 아악에서 예주(醴酒)를 쓰고 속악에서 시주(時酒)를 썼다’고 했다. 호조판서 이철보가 답하기를 ‘신은 예주의 맛을 모릅니다’라고 했다. 주상전하가 이르기를 ‘예주는 냉수는 아니지만 또한 맛이 있다. 현주(玄酒)는 예주의 조상이고 예주는 시주의 조상이다. 옛날에 예락(醴酪)이 있었는데 의적이 술을 빚었다. 우가 마셔보고 달다 여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분명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의적을 멀리했다. 의적 이전에 예주가 이미 있었고 그 맛이 비록 담백하나 현주보다는 나으니 울창(鬱蒼)으로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했다. 호조판서 이철보가 답하기를 ‘예주는 오늘날의 감주이니 또한 울창으로 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 9월 10일]
영조가 금주령을 엄격하게 추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종묘 제사 때문이었다. 종묘 제사에서는 술을 쓰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술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즉위 후 30년 동안 금주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조가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해낸 것이 바로 예주였다.
금주령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는데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
예주는 감주(甘酒), 즉 단술이었다. 당시의 예주는 이름이 술이지 사실상 식혜와 유사한 음료로 색깔도 맑지 않고 냄새와 맛도 좋지 않아 맹물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영조가 현주는 예주의 조상이고 예주는 시주의 조상이라 언급한 의미가 그것이었다. 영조는 이 같은 예주를 이용해 시주를 완벽하게 금지하는 정책 즉 금주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영조는 예주가 의적의 술 발명 이전부터 있던 술이기에 오히려 고례(古禮)에 적합하며 그렇기에 종묘 제사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종묘에서 예주를 이용할 수 있다면 백성에게 엄격한 금주를 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런 확신에서 영조는 기왕의 제사·연향·호궤(犒饋)·농주(農酒) 등에서 쓰던 일체의 술을 금지하고 오로지 예주만 쓰게 했다.
영조 31년(1755) 9월에 이처럼 엄격한 금주령이 공포된 이후 처벌조항도 더욱 정비됐다. 우선 영조 32년(1756) 1월부터 금주령이 발효됨과 동시에 한양 술집의 주등(酒燈)을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 후에 섬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했다.
아울러 술을 마신 자는 잔읍의 노비로 소속시키고, 선비는 청금(靑衿)에서 삭제한 후 3차례 형신(刑訊)해 도배(島配)하고, 중서(中庶)는 수군에 충정하게 했다. 이 처벌규정이 1년 후에는 더욱 엄격해져서 금주령을 어긴 양반관료는 10년 금고(禁錮)되고, 유생은 10년간 과거응시가 금지되며, 서민과 천민은 본토에서 10년간 종이 되게 했다. 금주령의 엄격한 처벌규정은 영조 38년(1762) 9월 4일에 위반자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절정에 올랐다.
금주령을 공포한 후 영조는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관료와 백성들에게 금주령의 취지를 널리 알리려는 훈계 노력도 함께 기울였다. 예컨대 영조는 자신이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기로 결심한지 2년째가 되던 동왕(同王) 33년(1757) 10월 25일 창경궁의 명정전 월대에 나가 5부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계주윤음을 발표했다. 이어서 11월 1일에는 대소신료들에게 다시 계주윤음을 발표했다.
이 두 차례의 계주윤음은 영조가 강력한 금주를 결심한 지 만 2년이 되는 시점을 기념해 그동안 금주령 위반으로 체포된 700여 명을 석방하면서 금주령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내용이었다.
또한 영조는 금주령의 취지를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주윤음을 언해하고 나아가 예문관으로 하여금 목판으로 인쇄해 5곳의 사고·승정원·홍문관·예문관·춘방·의정부·육조·한성부·사헌부·사간원·8도·3유수부(留守府)에 배포하게 했다. 이어서 영조 34년(1758)년 9월 16일에는 영조가 직접 창경궁의 홍화문에 나가 한양의 백성들에게 금주윤음을 선포했고, 영조 38년(1762) 9월에 14일에도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을 공표했다. 어제경민음은 지난 9월 4일에 금주령 위반자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한 후에 발표된 것으로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공포됐다.
주량도 적고 술의 폐단도 잘 알았던 세자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안부하여(安否何 如)’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도의 의미다
그런데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되던 영조 32년(1756)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이던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금주령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그럴수록 영조는 금주령 위반자에 대해 점점 더 엄한 처벌규정을 내놓았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결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또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영조가 동왕(同王) 31년(1755) 9월 8일에 엄격한 금주령을 공포하던 당시 사도세자는 21세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주량이 적었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 스스로도 술의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사도세자의 <계주만필(戒酒漫筆)>에는 “관혼상제는 선왕의 법이니 공경히 현주를 쓰면 신령이 통한다네. 내가 들으니 우임금은 성인인데 한번 순주(醇酒)를 마시고 의적을 멀리했다네. 의적이 떠난 지 3천 년, 그 사이에 화란이 없을 때가 없었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영조의 금주정책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사도세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된 지만 4개월째인 영조 32년(1752) 5월 2일 오후 4시쯤, 왕은 숭문당에서 조정중신들을 접견했다. 숭문당은 영조가 거처하는 환경전과 사도세자가 공부하는 낙선당의 중간쯤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조는 숭문당에서의 접견이 끝나자 갑자기 낙선당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간 것인데 <승정원일기>에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낙선당에 갔던 영조가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신치하는 ‘보고할 때 두서가 없었다’는 것과 해정은 ‘금주하는 때 대궐 안에서 술을 빚었는데 물을 때 거짓말하며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낙선당에 간 영조가 사도세자와 관련해서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신치하와 해정이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삼경(三更)에 사도세자가 낙선당에서 조정중신들과 춘방관들을 만났고 뒤이어 그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간에 오고 간 대화가 <승정원일기>에는 삭제돼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병신년(1776, 영조 52)의 하교로 말미암아 세초했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병신년의 하교란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내용 중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한 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들을 삭제할 것’을 요청하자 영조가 허락한 하교였다. 따라서 이날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체면 먼저 생각한 아버지, 반항심을 술로 푼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서울 휘경동에 있던 능을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경기 화성으로 이장했다
사도세자가 삼경에 낙선당에서 조정중신들과 만나 무엇인가 대화한 직후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방화범이 사도세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영조는 그렇게 의심했다. 그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그날의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를 불렀을 때 세자는 얼굴도 씻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치 않았다. 영조는 혹시 사도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고 지금껏 자다 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은 백성들을 상대로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하는 중인데 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다니…. 격노한 영조는 세자가 술을 마셨는지 또 누가 술을 들였는지 책망하듯 물었다. 그때 사도세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가슴을 두드리시며 ‘네가 이 금주하는 때 술을 먹어 광패(狂悖)하게 구느냐?’라고 엄히 책망하고는 술을 들인 책임을 물어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밤중에 낙선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방에 있던 촛대가 넘어져 일어난 화재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방화한 것이라 의심했다.
사도세자를 부른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나?’ 하며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 역시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방화했다고 대꾸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불신과 불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명색이 부자간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믿지도 않았고 소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엄격한 금주령을 내린 지 4개월 만에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자 크게 상심했다. 사도세자를 직접 벌할 수 없어 대신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처벌했지만 스스로 면목이 없던 영조는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오늘날 나랏일은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할 지경이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하다’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다. 이런 하교에는 마음 여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영조는 사도세자와의 소통에 앞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크게 변했다. 이후 사도세자는 술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음하기 시작했다. 과음은 술주정과 폭력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아예 영조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래서 솟아나는 반항심을 그렇게 풀었지만 그 결과는 불신과 불통의 심화였다.
당시 사도세자는 창덕궁에서 영조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영조만 경희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자신은 그대로 창덕궁에서 살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영조가 총애하는 화완옹주를 이용했다. 영조 36년(1760) 7월 1일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아무래도 한 대궐 속에서 살 길이 없으니 웃 대궐을 보자 하거나 아무 계교로나 뫼시고 가라’고 했다.
비극으로 막을 내린 부자관계
7월 6일 영조는 중전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의 이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신료들과 논의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조는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영조는 ‘한밤중에 생각이 났다. 나는 다만 중전과 함께 경희궁으로 이어해 예전에 중전과 함께 대비를 모셨던 것처럼 몇 달 머물다 돌아오겠다’고 했다. 중전과 함께 오붓하게 지내기 위해 경희궁으로 이어한다는 명분이었다.
영조가 경희궁으로 옮겨간 후 왕과 세자 사이의 불신과 불통은 더 깊어졌다. 창덕궁에서 함께 살 때는 영조가 세자를 불시방문하기도 하는 등 접촉이 있었고 대화도 있었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옮긴 이후 그나마 그런 것도 사라졌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전혀 믿지 않았고, 그렇다고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사도세자를 더욱 악화시켰다. 영조 38년(1762)부터 사도세자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치솟을 때마다 끔찍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중록>에는 그런 끔찍한 말들이 ‘부도지설(不道之說)’, ‘불공지언(不恭之言)’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병화(病火)로 아무리(어떻게) 하려노라’ 또는 ‘협검(狹劍)하고 가 아무리 하고 오고 싶다’로 표현돼 있다. ‘협검을 하고 가, 아무리 하고 오고 싶다’는 말은 앞뒤 정황으로 볼 때 칼을 가지고 가서 영조를 찔러 죽이고 싶다는 의미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다가 마침내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입 밖으로 내뱉게 됐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영조 38년(1762) 윤(閏) 5월의 뒤주사건이었다. 그리고 5년 후인 영조 43년(1767) 1월 왕은 사연 많던 금주령을 폐지했다.
돌아보면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은 근본적으로 여린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런 금주령이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뒤주사건으로까지 치달은 이유는 불신과 불통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비극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찰민정(察民情)’이다. 국가 정책이 실제 백성에게 약이 되는지 아니면 독이 되는지를 통치자의 입장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찰민정’이고, 그래서 ‘찰민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입장을 하늘의 입장으로 공경하는 소통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통치자 중에도 ‘찰민정’을 내세우며 불통의 늪에 빠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10. 한글을 무시한 연산군, 황음무도에 빠지다
단순한 한문 숭상 수준 넘어 노골적으로 사용 금지령 내려
… 최고 권력자라도 욕망만 좇으면 결국 비참한 말로 피할 수 없어
연산군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였으나 자신의 그릇된 욕망만 좇다가 중종반정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영화 <간신>에서 연산군 역을 맡은 김강우.
한글은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됐다. 이름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가 한글이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반포 당시부터 ‘백성의 글’이라는 뜻에서 ‘언문(諺文)’ 또는 ‘언서(諺書)’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한문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한문이야말로 진정한 문자이고 한글은 천한 백성들이나 쓰는 글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한문을 진서(眞書), 한글을 언문(諺文)이라 왜곡해 썼다. 양반들에게 언문은 진짜 문자가 아닌 가짜 문자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은 주로 여성과 스님들 사이에서 유행해 ‘암클’ 또는 ‘중글’이라 불렸다. ‘암클’이란 ‘암놈들의 글’이란 뜻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여성들이 짐승으로까지 비하된 결과이며, ‘중글’ 역시 ‘중놈들의 글’이란 뜻으로 스님들에 대한 극단적인 비하가 함축돼 있었다.
이런 상항에서 언문은 ‘백성의 글’에서 ‘상글’ 즉 ‘쌍놈들의 글’로 천시돼 양반들에서는 아예 기피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사실들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 발전을 가로막은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양반들의 한문 숭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글을 탄압한 최고의 군주를 꼽으라면 단연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심정적인 면에서의 한문 숭상을 넘어 노골적으로 한글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글금지령을 둘러싼 연산군의 행태에는 연산군이 어느 정도의 폭군인지가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연산군이 한글금지령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동왕(同王) 10년(1504) 7월 10일에 있었던 투서였다. 이날 새벽 왕의 처남인 신수영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제용감에서 일하는 이규가 보내서 왔다며 서찰을 전하고 사라졌다. 신수영이 펴보니 그 안에는 언문 즉 한글로 된 세 장의 익명서가 있었다.
조선시대 익명서는 내용에 관계없이 폐기처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름을 숨긴 작자의 흉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신수영은 너무 심각한 내용이라 판단하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익명서를 본 연산군 역시 크게 놀랐다. 왕은 즉시 명령을 내려 이규에게 “네가 무슨 글을 신수영의 집에 통하였느냐”라고 묻게 했다. 이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결국 누군가가 이규를 빙자해 투서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폐기처분하고 무시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일을 크게 벌였다.
먼저 왕은 명령을 내려 도성의 각 문을 닫고, 출입을 금하게 하고는 한글 익명서를 신하들에게 내렸다. 반드시 주모자를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신하들이 받아본 익명서 3장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쓰였는데 사람 이름만 한자였다.
익명서의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적혀 있었다. 익명서 3장의 각 내용이 실록에 수록돼 있는데 핵심은 개금·덕금·고온지·조방 등 의녀들이 연산군에 대해 대역무도한 말을 했으니 엄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첫째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임금의 황음무도를 강하게 비판한 ‘한글 익명서’
연산군은 정사(政事)는 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 추구했다.
“개금(介今)·덕금(德今)·고온지(古溫知) 등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실 때, 개금이 말하기를 ‘옛 임금은 난시(亂時)일지라도 이토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우리 임금은 어떤 임금이기에 신하를 파리머리 끊듯 죽이는가? 아아! 어느 때나 이를 분별할까?’ 했고, 덕금은 말하기를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 했다. 이외에도 그들의 말이 몹시 심했으나 이루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이런 계집을 일찍이 징계해 바로잡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을 던져버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개금을 감싸려 한다’고 상언(上言)하리니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연산군일기> 권 54 10년(1504) 7월 19일]
위에 의하면 익명서에서 발언 주체는 의녀 개금과 덕금이었다. 먼저 의녀 개금이 연산군의 무차별한 신하살육을 비판했는데 이는 갑자사화에 대한 것이었다. 이어서 의녀 덕금 역시 같은 비판을 했는데 그 비판은 개금보다 훨씬 과격했다. 즉 덕금은 “주상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으랴?”라고 했는데 머지않아 왕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둘째 장의 익명서 내용은 “옛 임금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임금은 여색에 대해 분별하는 바가 없어 이제 또한 여기(女妓), 의녀, 현수(絃首, 여자 무당)들을 모두 다 조사해 궁중에 들이려 하니 우리도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이었으며, 셋째 장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폐비 윤씨의 생모인 신씨 때문이니 신씨의 친족을 몰살시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한글 익명서는 연산군의 갑자사화와 황음무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는 갑자사화 직후로 연산군은 폭주하고 있었다. 왕의 위력에 눌린 양반들은 비판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조선팔도에서 궁녀들을 마구 뽑아 들였다. 누구의 비판도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황음무도한 짓을 행하는 왕이야말로 폭군이었다. 당시 백성들에게 왕은 왕답지 못했고 그런 왕을 비판하지 못하는 양반들 역시 양반 답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백성들의 마음이 의녀 개금과 덕금의 입을 통해 드러났을 뿐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유는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런 젼차로 어린백성이 니르고져 홇베 이셔도 마참내 제뜨들 시러펴디 못할 노미 하니라’라는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까지 파괴된 시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과 사위의 묘도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글을 읽고 쓰게 된 백성들은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궁중 여성들이 한글을 이용해 자신들의 뜻을 표시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궁녀가 왕의 실정이나 궁중 안의 비행을 폭로하는 한글 익명서를 투서하거나, 왕비나 대비 등이 정치현실에 개입하는 한글 명령서를 반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할 때 정희대비와 인수대비는 한글 명령서를 이용했다. 이는 한글이 유행하면서 궁중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정치의식이 고양됐음을 알려준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이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양반은 물론 백성의 여론에도 더더욱 귀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반은 물론 백성들의 여론도 폭력적으로 억압하려고만 했다. 특히 자신의 황음무도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하려고 했다.
실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본격적으로 황음무도하게 된 계기는 정업원의 여승들을 강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연산군 9년(1503) 6월 어느 날인가, 왕은 환관 대여섯 명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갔다. 술에 취해 있던 연산군은 늙고 못생긴 비구니는 내쫓고 젊고 예쁜 비구니 7~8명만 남겨 간음했다.
당시 연산군이 간음했다고 하는 정업원의 비구니들은 사실상 선왕의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정업원은 태조 이성계 이래로 왕의 후궁들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해 여생을 보내던 절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건국 이후 정업원의 초대 주지가 된 혜빈 이씨는 공민왕의 후궁이었다. 또한 1차 왕자의 난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 즉 세자 방석의 부인 심 씨,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등도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이후에도 수많은 후궁과 왕족 여성이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정업원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쯤에 위치해 궁궐과도 가까웠으며 왕실로부터의 지원도 많았기에 후궁 또는 왕족여성들이 출가하기에 유리했다. 이런 정업원의 비구니들을 강간했으니 연산군은 가정윤리는 물론 종교윤리도 파괴한 왕이라 할만 했다.
그날 이후 연산군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9월에는 예조판서 이세좌가 양로연 중에 왕의 옷에다 술을 쏟았다는,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을 빌미로 이세좌를 유배에 처했다.
아울러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은 이세좌의 처벌을 요청하지 않았다 해 강등시켜버렸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의 시작이었다. 11월 20일에는 신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심하게 술주정을 했는데 다음날 전혀 기억하지도 못했다. 당시 연산군은 자신의 주사에 대해 몹시 자책하며 반성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도리어 시간이 흐를수록 술주정은 악화됐으며 ‘필름’도 자주 끊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연산군은 자신의 황음무도가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됐다. 연산군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환관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閉口深藏舌)/ 몸이 편안해 어디서나 굳건하리라(安身處處牢)’는 글귀가 새겨진 패를 차게 했는데, 그때가 동왕 10년(1504) 3월 13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연산군 10년(1504) 3월 20일의 한 사건을 계기로 더더욱 악화됐다. 그날 저녁 연산군은 임숭재의 집에 행차했다. 임숭재는 성종의 사위였으므로 연산군에게는 매부였다.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술대접을 하던 중 자신의 아버지 임사홍을 소개했다.
연산군을 만난 임사홍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연산군이 까닭을 묻자 임사홍은 “폐비한 일이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이는 실로 엄 숙의(淑儀)와 정 소용(昭容)이 모함하고 이세좌와 윤필상 등이 성사시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술이 잔뜩 취한 상태로 궁궐로 돌아왔다. 연산군은 곧바로 엄 숙의와 정 소용 그리고 그녀들의 아들을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인수대비에게 달려가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따지며 불손한 말을 수없이 했다. 그때는 밤 삼경(三更)이 넘은 한밤중이었다. 그날 밤 연산군의 행동은 가히 미친 짓이라 할 만했다. 다음날부터는 폐비 윤씨의 사사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이 숙청됐다. 이 사건이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한글을 탄압하는데
한국화가 우승우가 그린 연산군의 범 사냥 도(圖). 연산군은 사냥 때도 궁녀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고 기록돼 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더욱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왕은 기생은 물론 의녀, 여자 무당 등을 색출해 궁에 들였다. 이런 와중에 의녀인 개금과 덕금 등도 뽑혀 들어갈까 두려워하며 연산군을 비판했고 그것이 연산군 10년(1504) 7월 19일의 익명서 투서로 연결됐던 것이다.
연산군은 개금·덕금 등을 체포하는 한편 익명서를 투서한 범인도 꼭 색출해내려 했다. 그러기 위해 막대한 재물과 고위관직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여기에서 나아가 서울 시민들 중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소집해 한글을 쓰게 한 후 익명서 필적과 대조하기도 했다.
그래도 범인이 드러나지 않자 조선팔도에서 한글을 아는 사람들을 모두 조사해 한글 필적을 써 올리게 했다. 이와 함께 ‘언문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고, 배운 자는 쓰지 못하게 하라. 언문을 아는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만약 고하지 않는 경우 이웃 사람까지 처벌하라’는 한글금지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금지령 이후 한글을 쓰다 잡히면 참형을 당하고, 다른 사람이 한글을 쓴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으면 곤장 100대의 엄벌을 받았다. 또 한글 편지나 한글 서책을 소지하다가 적발돼도 엄중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에 따라 한글은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한글을 이용한 백성의 비판도 표면적으로 봐서는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을 억압한 연산군은 거칠 것 없이 황음무도에 빠져들었다. 연산군 10년(1504) 10월에 왕은 장악원 기생을 기왕의 150명에서 300명으로, 또 12월에는 1천 명으로 증원했다.
연산군은 장악원 기생들에게 특별히 처용무를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흥청(興淸)’과 ‘운평(運平)’이라는 이름을 작명하기도 했다. 흥청이란 ‘사예(邪穢)를 깨끗이 씻는다’는 뜻이고 운평이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흥청이란 부정한 것을 씻고 청정한 것을 부흥시키겠다는 의도이고, 운평은 그렇게 해서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의도라고 하겠다. 처음에 흥청은 300명, 운평은 700명이 정원이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입궁시켜 궁궐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흥청 2명에게 방자(房子) 1명을 주고 또 솥단지·식기·밥상·요강·거울·옷가지 등등 살림살이도 마련해줬다. 사실상 흥청은 궁중에서 생활하는 후궁 또는 궁녀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 스스로 ‘흥청이 이미 궁궐에 들어왔으니 곧 이는 궁녀이다. 앞으로 흥청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엄히 논죄하라’고 해 흥청을 궁녀로 간주했다.
흥청은 가무는 물론 얼굴과 몸매도 뛰어나야 했다. 연산군이 ‘음악이란 나쁘고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며 또한 시름을 풀기 위한 것인데, 가무만 잘하고 얼굴이 못생기면 시름을 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시름을 일으킨다’고 해 실력과 미모를 모두 요구했기 때문이다. 흥청은 장악원에서 1차 심사를 받은 후 입궁하여 다시 연산군의 심사를 받았다. 연산군은 흥청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해 심사받을 때 화장을 지운 맨얼굴로 받도록 했다.
이렇게 입궁한 흥청은 최초 300명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500여 명으로 다시 1천여 명, 2천여 명으로 폭증했다. 연산군 12년(1506) 3월 27일자 기사에는 ‘흥청 1만 명에게 지급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로 보면 연산군은 흥청을 1만 명까지 확대할 계획이었던 듯하다.
기생 남편의 머리를 잘라 은쟁반에 담은 폭군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경내에 있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무덤. 연산군이 회릉으로 추숭(追崇)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회묘로 강등됐다
연산군은 입궁한 흥청을 다시 천과흥청(天科興淸), 반천과흥청(半天科興淸), 지과흥청(地科興淸)의 세과로 나눴다. 천과흥청은 연산군과 잠자리를 함께한 흥청이고, 반천과흥청은 잠자리를 함께했지만 흡족하지 못한 흥청이며, 지과흥청은 아직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흥청이었다. 이로 보면 흥청은 사실상의 후궁 또는 예비 후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연산군은 흥청을 후궁으로 인정해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라는 관청을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두탕호청사의 의미는 ‘방탕을 막고 흥청을 보호하는 관청’이었다.
수천 명의 흥청이 갑자기 연산군의 후궁이 되면서 무수한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흥청이 처녀가 아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흥청에 뽑힌 기생들은 가무는 물론 얼굴과 몸매 모두 뛰어난 여인들이었다.
흥청은 출신으로 치면 지방의 관기 또는 한양의 관기였다. 흥청으로 뽑힐 정도의 실력과 미모를 갖춘 관기가 처녀로 혼자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흥청은 이미 남편 또는 아이가 있었다.
연산군은 흥청을 후궁화하면서 기왕의 남편 또는 애인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과도 떼어놓았다. 흥청은 근본적으로 관기이고 관기는 왕이 최종 임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연산군은 흥청이 궐밖의 옛 애인을 생각하거나 또는 몰래 출궁해 임신하는 일을 엄금했다. 흥청이 옛 애인을 그리워하면 잔인무도한 벌을 내리곤 했다. 야사에는 이런 내용이 전한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기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그 기생이 친구에게 ‘지난 밤 꿈에 예전 주인을 보았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구나’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연산군은 즉시 작은 쪽지에 무엇을 써서 밖에 내보냈다. 조금 뒤에 궁녀가 은쟁반 하나를 받들어 오자 그 기생에게 열어보게 했다. 그것은 곧 그 남편의 머리였다. 그 기생까지 아울러 죽였다.”[<연려실기술> 연산조 고사본말]
연산군은 흥청뿐만 아니라 입궁하지 않은 장악원 기생들까지도 독점하려고 했다. 흥청 이외에 장악원에서 관리한 운평·속홍·채홍·계평·흡려 등에도 각각 1천 명 내외의 기생이 소속됐으므로 이들을 모두 합하면 5천~6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흥청과 달리 입궁하지 않고 궐 밖에서 생활했다.
그런데도 연산군은 이들마저도 남편이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명했다. 결국 운평·속홍 등은 궁녀화됐던 것이다. 연산군이 이들을 궁녀화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장차 흥청으로 진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운평·속홍 등은 후궁이 될 후보자들이었던 셈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워낙 비밀을 좋아한 연산군 자신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그 어떤 내용도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운평·속홍 등은 아직 입궁해 후궁이 된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궁중잔치에 참여했다. 또 흥청 등으로부터 연산군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운평·속홍 등은 연산군의 사생활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운평·속홍 등이 자유로이 생활한다면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남편이나 친인척 또는 친구들에게 발설할 수도 있었다.
연산군은 그렇게 못하도록 운평·속홍 등이 흥청과 만나는 것을 엄금했다. 이에서 나아가 남편들과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혹 운평이나 속홍 등이 부모형제에게 연산군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가 적발되면 처참하게 죽였다. 말한 사람은 물론 들은 사람도 그렇게 죽였다.
연산군이 후궁화시킨 흥청은 2천~3천 명에 이르렀으며 궁녀화시킨 운평·속홍 등은 5천~6천 명에 이르렀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근 1만 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흥청 자체를 1만 명으로 확대시키려 했다. 이렇게 많은 기생을 후궁과 궁녀로 만들다 보니 기존의 관기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절대권력,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다
그래서 연산군은 이른바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전국에 파견해 출신에 관계없이 젊고 예쁜 여성들은 모조리 한양으로 데려와 기생으로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조선팔도의 젊고 예쁜 여인들은 모두 기생이 돼 연산군의 궁녀나 후궁이 될 판이었다.
연산군은 왕이 모든 백성과 국토의 주인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젊은 여인들을 긁어 모았다. 이런 면에서 연산군은 명실상부 한국의 5천 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절대왕권을 실현한 왕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절대왕권은 연산군 12년(1506) 9월 1일 한밤중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렸다. 폭력으로 억압되었던 양반과 백성들의 여론이 폭력으로 분출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행태는 인간이란 끝을 모르는 욕망 덩어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만 행사하며 다른 사람의 욕망을 폭력으로 누르고 말도 못하게 하다가는 패가망신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과거 동양에서 군주제가 유지되던 시절에는 제왕의 황음무도를 다루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황음지계(荒淫之戒)’를 제시한다. ‘황음무도를 경계한다’는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너무 단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 단순한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제왕은 너나없이 패가망신했던 역사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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