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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Ⅱ

문수봉(李楨汕) 2017. 12. 15. 23:56

『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Ⅱ




예천 용문사(醴泉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용문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에 의하면, 870년(경문왕 10)에 두운()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 하나를 캐어 그것으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태조는 후삼국을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군사를 거느리고 머문 적이 있었는데, 두운의 옛일을 생각하고 뒷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 태조는 936년(태조 19)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청석()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이 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에게 법()을 전하였다.

조응은 이 절이 퇴락해 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165년(의종 19) 제자 자엄()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로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었다.

낮에는 『금광명경()』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로 삼았다. 1179년 중건이 마무리되자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의 선승() 효순()은 『전등록()』·『능엄경()』·『인악집()』·『설두집()』·『염송()』 등을 강하도록 하였다.

그 전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를 열고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개태사()의 승통() 영치()가 강을 맡았는데, 이 법회는 1180년에 시작하여 1182년까지 계속되었다. 1478년(성종 9)소헌왕비()의 태실()을 봉안하고 다시 절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광해군 41)에는 혜명()이 제하당()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이 적묵당()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상민()·부열()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이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한 것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의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는데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대장전(殿)을 비롯하여 보광명전(殿)·응향각()·진영각()·명부전(殿)·응진전(殿)·회전문()·범종루·강원·천불전(殿)·두운암()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와 보물 제729호인 용문사교지, 보물 제989호로 지정된 1663년(현종 4)에 목각한 후불탱화() 등이 있다.



 

예천 용문사 (醴泉 龍門寺) 전경


예천 용문사 대장전 (醴泉 龍門寺 大藏殿) 전면


​용문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선사가 세운 절이다.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되었다.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어 단아함과 화려함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 (醴泉 龍門寺 大藏殿 輪藏臺)  


예천 용문사 윤장대(醴泉 龍門寺 輪藏臺)는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팔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팔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1개씩 총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팔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980.09.16. 보물 제 684호로 지정되었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醴泉 龍門寺 大藏殿) 외부 두공



청도 운문사(淸道 寺)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호거산()에 있는 절로 560년(진흥왕 21) 한 신승()이 대작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591년(진평왕 13) 원광()이 크게 중건하였다. 원광은 세속오계()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에서 귀산()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937년(태조 20)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이 중창하고 작갑사()라 하였으며, 이 때 왕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076년(문종 30)에 원응국사()학일()이 중창했으며, 1105년(숙종 10)에는 원진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0년(숙종 16)에 설송()이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현재 대웅보전·작압전(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만세루()·관음전·명부전·강원·요사채 등의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이다. 이 중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93호로 지정된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하여 보물 제316호로 지정된 원응국사비(),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 보물 제67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보물 제208호로 지정된 동호() 등이 있으며, 오백나한전 안의 나한상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2기의 3층석탑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만세루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건물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있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 북쪽에 북대암(), 동남쪽에 사리암(), 서쪽에 호거암()이 있다. 이 절은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도 유명하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殿) 정면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殿) 내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雲門面) 신원리(新院里) 운문사에 있는 정전(正殿)으로 조선 후기의 불전이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었다.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있는 운문사는 신라 때인 560년(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하였으며 608년에는 원광국사(),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가 중건하였고 고려 숙종 때 원응국사가 중창하였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에 중건한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운문사는 네번째로
사찰을 중창한 조선시대인 1718년(숙종 44)에 지은 건물로 대웅보전도 이 무렵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막돌로 쌓고 상단석()은 긴댓돌[]로 된 갑석()을 놓아 정연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정면 가운데에 잘 다듬질된 4단 계석()을 놓았다.

주춧돌은 자연석으로 그 위에 민흘림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짜맞추어 하부 가구()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주두() 위에는 주심포()를, 주간()에는 어간( : 중앙간)에 4구, 옆칸에 3구씩 공포를 짜 놓았다.

대웅보전은 목조건물로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큰 규모이고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이다. 다포계의 공포를 구성하였고,또, 측면에서는 어간에 3구, 양 옆칸에 2구씩의 포작()을 놓아 지붕의 무게를 받게 하였다. 공포의 주두는 굽을 비스듬히 깎았는데 포작은 외삼출목(), 내사출목()으로 짜여졌다.

외부 살미첨차의 마구리는 메뚜기머리 모양으로 깎아서 제법 고식()을 보이며, 내부에서도 연꽃봉오리나 복잡한 초각()을 쓰지 않고 메뚜기머리 모양으로 처리해서 안팎 모두 견실한 느낌을 준다.

내부에서 가구형식을 보면, 후불벽()을 설치한 2개의 고주()와 앞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포대공()을 얹어서 마루보를 받게 하였으며, 이 위쪽에는 귀틀을 짜서 우물천장을 마련하였다.


 단청은 금단청(靑 : 부재의 양 끝에 주된 단청을 하고 중간에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단청)으로 칠하였고,벽면에는 벽화를 그려넣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둥근 서까래에 모난 덧서까래를 붙여서 처마의 곡선을 아름답게 잡았으며 추녀 끝부분에 활주()를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게 하였다.  

가구()의 양식은 1고주() 5량가()로 천장은 네 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건물의 앞면에는 꽃살무늬를 넣은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였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간격이 넓어 5짝의 분합문이 달려 있다.맞은편 승방의 꽃살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축물이다. 


 

오대산 월정사 (寺)

오대산 월정사 ((寺) 전경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자장율사는 임시로 초암()을 얽어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머물던 3일 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 전하는 신효거사()가 이곳에 머물렀고, 범일()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가 자장율사가 휴식하던 곳을 찾아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뒤 이 암자는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는데,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암자를 다시 짓고 살면서 월정사의 사격()을 갖추었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이 중창하였고, 1833년(순조 33)에 다시 화재로 전소된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정암() 등이 중건하여 내려오다가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殿)을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1964년 탄허()가 법당인 적광전(殿)을 중창한 뒤 만화()가 꾸준히 중건하여, 현재 삼성각()·대강당·심검당()·승가학원()·범종각·용금루()·일주문·요사채·창고 등이 있다.

이 중 적광전은 남향으로 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건물이다. 전내(殿)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본존불만 모시고 협시불을 모시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중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48호인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292호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 등이 있으며, 월정사 육수관음상( )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부도 22기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월정사의 보물 및 유물들을 모아놓은 전시실 보장각()에는 팔각구층탑과 같은 모양의 축소판 목조탑이 있다.

그리고 대장경을 넣었던 경궤, 『금강경』 3권, 『범음집 』 2권, 『진언집 』 1권, 『보권문 』 1권, 『지장경 』 2권, 인도 불상, 인도 패엽경, 난초족자 2, 독성탱화 1폭, 관음보살변상도() 1폭, 신중탱화, 바라 1쌍, 조선시대 의상·기와, 고려시대 궤짝 13개, 구리거울인 무문경·파문경·쌍룡경·사룡경이 있고, 향낭·향합·수정사리병·진신사리병·은합·청동합, 청동갑옷을 쌌던 보자기, 목향 등이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 월정사 칠불보전 (寺)七佛寶殿) 전면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殿)을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오대산 월정사 칠불보전 (寺)七佛寶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혜사(永川 銀海寺)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 제 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 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 (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을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거조암 영산전(국보14호), 백흥암 극락전수미단(보물 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514호), 백흥암 극락전(보물 790호) 



영천 은헤사 (永川 銀海寺) 전경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전면


은해사 대웅전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주 불전인데, 1847년(헌종 13) 화재 이후에 건축한 건물이며, 지금의 현판은 ‘극락보전’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은 보화루 북쪽 끝 산 밑에 남행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구조는 다포계 팔작집이다.

평면 간살은 전·후면 어칸만 양 협칸보다 1척(尺)가량 넓게 잡았고, 양 측면은 등간격이다. 건물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 위에 자연석초석을 놓고 듬직한 두리기둥을 세운 뒤 벽체와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에 각 칸, 후면에 어칸 및 좌협칸, 양 측면에는 각 좌협칸에 각기 설치되어 있다. 전면 각 칸 창호는 어칸만 꽃살과 솟을살이 한 세트로 구성된 4분합들문, 양 협칸은 솟을살 3분합들문이다.

창호 형식은 분합들문형식이나 안쪽에 둔테를 달아 개폐방식도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안여닫이이다. 양 협칸 및 후면의 창호는 모두 외여닫이 굽널정자살문이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다포계 공포를 꾸며 처마 및 내부가구를 받도록 했다.

공포는 외 4출목, 내 5출목으로 화려하고, 주상포외 공간포는 전·후면 각 칸에 2조씩, 양 협칸에는 각 1조씩 배열했다. 공간포 배열에서 주목할 점은 전·후면 및 양 측면의 어칸을 제외한 각 협칸의 공간포는 해당 주간의 중앙에 배열된 것이 아니라 모두 귀포쪽으로 편재해 배열했다. 즉 귀포쪽의 과대한 지붕하중을 보다 견실히 보강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제공 형태는 외단이 1-4제공까지 앙서-하부초각-상부 연봉조각형이고, 5제공은 수서-하부 연꽃조각형, 6제공은 봉두 또는 양두로 꾸몄다. 한편 내단은 1제공은 연꽃조각 2제공은 연봉, 3제공은 연밥, 4제공은 연꽃, 5제공은 연봉, 6제공은 연밥, 7제공은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조선 후기 공포의 제공에 나타난 장식화 경향을 잘 반영한 모습이다.

내부 상부가구는 건실한 2고주 7량가이다. 대량은 후불벽 내고주에서 후퇴량과 합보로 처리하였고, 대량 위에는 양 측면에서 올라온 곡선형의 충량 2개를 눌러 얹었다. 앞쪽 충량 머리는 용두로 장식했고, 등 위에는 재차 외기중도리를 짠 뒤 주두-첨차-뜬장혀를 결구시켜 종량을 받았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고주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과 불단을 설치했다. 불단 상부에는 낙양각이 조각된 보개를 얹고 용과 운문, 극락조, 비천상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천장은 내목도리-외기중도리까지는 공포의 경사에 따라 빗반자로 처리하고, 외기중도리-종량간에는 우물반자, 내진중도리 사이에는 소란반자로 꾸몄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를 이은 팔작집이다.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내부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전경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라 하여 신라 효성왕 2년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고 있다. 거조암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전은 거조암의 본전이며,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원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다고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기법에 있어서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고쳐 지으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靈山殿)은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건물로 전체 모양은 불규칙하게 채석된 장대석과 잡석으로 축조된 높은 기단위에 선 길죽한 형태이다. 가구(架構)는 간결한 수법으로 되어 측면 중앙 칸을 형성하는 두 고주(高柱)와 그 앞뒤의 평주(平柱)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다.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평주 위의 공포에 의하여 퇴보 안 끝이 받쳐져 이것이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게 되고 출목(出目)으로 된 첨차는 퇴보 끝을 받으면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쳤다. 고주머리에는 뜬 창방(昌枋)을 돌리며 기둥 뒤에는 주두(柱頭)를 두고 포작으로 대들보 끝을 받고 끝은 중도리를 받쳤다.

대들보 중앙에는 키가 큰 제형(梯形)의 부재(不在)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을 올려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마루도리는 내반(內反)된 소슬합장으로 받쳐 지고 천장가구(天障架構)는 없이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이 건물의 세부를 보면 주두나 소누(小累)가 다포집과 같은 형태로 된 것 이외는 주심포 양식의 초기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가구이다. 평 주위에 놓인 공포 형태와 마루도리 위에 놓인 일종의 포대공(包臺工) 형태는 이 건물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첨차 밑에 겹쳐 헛초공으로 이 첨차를 받쳐 키가 큰 첨차처럼 되어 있는 것은 출목 첨차의 길이가 보통 보다 길게 나와 이를 보강하는 것으로 특이한 처리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 대들보 중앙에 놓여 일종의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은 높직한 제형주(梯形柱)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이 있다. 아래 포작의 첨차는 퇴보 끝 보머리를 거꾸로 한 것 같은 형태이고 위쪽 포작의 첨차는 역제형(逆梯形)의 판장(板狀)이다.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평면도


정면 7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집이다.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한국 건축사에서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전면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측면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우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상세도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殿) 전면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백흥암에 있는 조선 시대 불전. 은해사 백흥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백흥암의 주 불전으로 1546년(명종 1)에 건립되고 1685년(숙종 1)에 중건한 조선 전·후기 다포계의 대표적인 건축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백흥암은 은해사 서편에 위치한다. 은해사 뒷길로 900m 가량 올라가면 신일지가 나오고 여기에 세 갈래 길이 있다. 산길로 가면 태실봉·인종대왕태실, 신일지를 끼고 우측[서북쪽] 택골로 가면 운부암, 좌측[서쪽] 절골로는 백흥암·기기암·중암암으로 갈 수 있다. 백흥암은 신일지의 좌측 길인 태실봉 남쪽 기슭의 절골로 1.5㎞ 지점의 태실봉[해발 462.3m] 남사면 해발 330~345m 지점에 있다


통일 신라 시대 말에 국사 혜철()이 건립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백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인종의 태실을 팔공산에 경영하면서 이 암자를 수호 사찰로 삼고 크게 중수하고 백흥암으로 개칭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백흥암의 주 불전인 극락전은 1546년(명종 1)에 건립되고 1685년(숙종 1)에 중건한 다포계 팔작집이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이 영산전을 중수하였다. 이 절은 한때 수백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진영각()·영산전(殿)·명부전(殿)·문루인 보화루()·산신각()·선실()·원주실()·요사채 등이 있다. 특히 백흥암 극락전 내 수미단은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태실봉 남사면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 영역의 건물 배치 구성은 전면에 문루인 보화루가 한 단 낮게 있고, 그 뒤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진영각과 심검당이 마주한다. 중정 북쪽으로 한 단 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극락전이 남서향한다.

백흥암 중심 영역의 건물 배치 구성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4동 중정식() 산지 가람을 취하고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구조는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것이고, 초석은 자연석 초석이다. 극락전 전면 기단 중앙에는 소맷돌을 갖춘 석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구체부는 자연석 초석 위에 두리 기둥을 세우고 창호와 벽체로 마감했다.

창호는 전면에 각 칸, 양 측면은 좌측면 각 칸, 우측면 앞 협칸, 후면에는 양 협칸에 달았다. 전면 창호는 어칸만 상하 둔테에 정자살+솟을살을 세트로 조합한 4짝 안여닫이문이고, 양 협칸은 정자살의 3분합문이다. 좌측면 어칸에는 쌍여닫이 굽널세살문, 양 협칸 및 후면에는 각기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아 이용하고 있다. 특히 후면 어칸과 우측면 어칸, 후면 협칸의 벽은 인방과 띠장을 댄 판벽으로 마감된 것이 특징이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평방 위에 외3출목, 내3출목의 다포계 공포를 올렸다. 공간포는 전·후면에는 공히 2조씩, 양 측면에는 각 1조씩을 배열했다. 특히 공포에서 주목할 것은 내·외 출목수가 동일한 점 외에 제공 내·외단형태가 첨차와 동일한 간결한 교두형()이란 점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제공 형태는 앙서에 연꽃·연봉 조각이 첨가된 매우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양상이다.

내부 상부 가구는 1고주 후퇴 7량가이다. 대량은 전면 공포의 4제공 위에서 얹힌 뒤 내고주 상부에서 후퇴량과 합보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양 측면에서 만곡된 충량 2개가 대량과 직교해 등 위에 얹혀진다. 중대공은 대량 등 위에 주두+첨차+뜬창방 또는 원형화반+주두+뜬창방으로 받았고, 종대공은 각재의 동자대공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고, 어칸에 이주법()의 내고주에 후불벽을 만들고 앞쪽에 화려한 조각 수법이 뛰어나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불단인 수미단이 배치되어 있다. 불단 위 천장에는 보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조각 수법이 뛰어난 용이 매달려 있다. 천장은 3단의 소란 반자로 화려하게 꾸몄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은해사 백흥암은 현재 극락전·진영각·심검당·보화루·명부전·산신각·영산전·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영역의 배치 구성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4동 중정식 산지 가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1984년 7월 5일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다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조선 시대 산지 가람의 배치 구성뿐만 아니라 공포 구성, 상부 가구 등에서 조선 시대 전·후기에 걸친 시기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공포 및 내부 가구에서 장식화 경향과 새로운 구조 기법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조선 후기와 달리 고졸한 형태 및 구조 기법이 잘 남아 있는 불전이다.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殿) 불단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殿) 내부 


강화 전등사 (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내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진종사()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가 당시의 총섭 초충()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와 산성별장소()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이 관음암()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을 개금불사()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이 지장상()을 개금하고 명부전(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을 중수하고, 적묵당()·강설당()·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은 1934년 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안진호()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 등이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179호인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을 취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 2구의 귀왕(), 2구의 판관(), 2구의 녹사(), 2구의 장군(), 10구의 동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과 강원()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이 있다. 철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장사각()·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강화 전등사 ( ) 전경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殿)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강화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로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각각 동일한 길이로 분할하고 세 짝씩의 빗살문을 달았다.

좌우 측면은 벽을 치고 있으나 앞의 한 칸만은 외짝 열 개의 문이 있다. 공포()는 내부를 4출목(), 외부를 2출목 내었으며 쇠서의 형태는 가늘고 약하게 길어지고 곡률()이 심한 편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내부에는 장식적인 면이 좀 지나치게 발휘되었으며 대량()에 걸쳐 있는 충량() 끝은 용두()로 만들어져 있고, 또 화려하게 채색한 천장 주위에는 온통 극락조와 연꽃 등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불단 위의 닫집은 처마를 정자각() 모양으로 꾸미고 16포()나 되는 공포를 중첩해서 배열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부룡() ·극락조 등을 매달아놓았다.

1916년 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에는 1605년(선조 38) 불에 타버리고 1614년에 다시 불이 나 전소된 것을, 1615년에 개축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불단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외부 두공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 殿) 내부 두공



강화 전등사  약사전 ( 寺 藥師殿)  측면

 

강화 전등사  약사전 ( 寺 藥師殿) 외부 두공

강화 정수사​ ( 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마니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639년(선덕여왕 8)회정대사()가 창건하였다. 회정은 마니산의 참성단()을 참배한 뒤 그 동쪽의 지형을 보고 불제자가 가히 삼매정수()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절을 창건하였다.

그 뒤 1426년(세종 8)함허화상()이 중창하였으며, 중창한 뒤 함허는 법당 서쪽에서 맑은 물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정수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1848년(헌종 14) 비구니 법진()과 만흥()이 법당을 증수하였고, 1878년(고종 15) 비구니 계흔()이 그의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한 뒤 칠성()·독성()·산신탱화() 등을 봉안하였다.

1883년 비구니 근훈()이 중수하였고, 1888년정일()이 연오()의 시주를 얻어 관음상 1위와 후불탱화를 조성하였다. 1903년정일이 산령각()을 중건하였고, 1905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16년 불상을 개금하고 각단의 탱화를 봉안하였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대웅전을 당국의 보호건물로 편입시켰다.


당시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산령각·대방·노전(殿)·요사채 등이 있었으나, 현존 당우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만이 있다. 현존하는 중요문화재로는 아미타불을 비롯한 불상 4위와 1851년에 조성한 현왕탱()을 비롯한 탱화 7점, 『법화경』과 『은중경()』, 부도() 1기, 중종() 1구 등이 있다.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전면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정면 두공 및 헌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뒷면 두공 및 헌 



강화 정수사​ 법당 (  寺 法堂) 내부 천정 




고양 북한산 중흥사지(北漢山 重興寺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북한산에 있었던 절로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가 중수하였다.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이다. 축성 당시 30여 칸에 불과한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증축하여 136칸을 만들었다.


성내에는 성문과 수문(), 장대()와 창고 등을 지키기 위한 승군()이 주둔하였다. 이 절은 승군이 주둔하였던 북한산성 안의 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상운사()·서암사(西)·태고사()·진국사() 등을 관장하였다.

왕실에서는 8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걸쳐 번갈아 의승()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 1인과 승장()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을 설치하고 승대장()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절은 승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그리고 이들 승병들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승영 당시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누각인 만세루()와 나한전(殿)을 두었고, 동쪽에는 산신당()이 있었다고 하며, 대웅전 안에는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였고, 현재에는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


 

고양 북한산 중흥사  (北漢山 重興寺) 전경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전면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외부 두공


 

고양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北漢山 重興寺 殿) 내부



고양 북한산 중흥사 극락전 (北漢山 重興寺 殿) 정면 두공 및 헌 



고양 북한산 중흥사 (北漢山 重興寺) 전륜전 외부 두공 및 헌 



김천 직지사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황악산()에 있는 절로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418년(눌지왕 2) 아도()가 창건했다고 한다. 직지사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로 불렸다는 설과, 고려 초기에 능여()가 절을 중창할 때 절터를 측량하기 위해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기 때문에 직지사라고 하였다는 설, 선종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이 중창하고 930년(경순왕 4)에 천묵()이 중수하였으며, 936년(태조 19)에 능여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당시의 중요 건물로는 대웅대광명전(殿)·대비로금당()·극락전·원통전(殿)·지장시왕전(殿)·응진전(殿)·설법전(殿)·선등각()·대장전(殿) 등이 있었다. 현재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대장전비에 의하면, 이 절의 대장전에 금자사경() 593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399년(정종 1)의 중건과 1488년(성종 19) 학조()의 중수가 있었으며, 1596년(선조 29) 왜병들이 불을 질러 43동의 건물 가운데 천불전(殿)·천왕문()·자하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이때 법당 앞에 있던 대형 5층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그 뒤 1602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절을 중건하였는데, 1681년(숙종 7)에 조종저()가 쓴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의 규모가 8전(殿)·3각()·12당()·3장()·4문()에 정실()만 352칸에 달했으며, 부속 암자는 26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05년(순조 5) 이후부터 사세()가 차츰 기울기 시작하여 퇴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중건에 착수하여 1966년부터 1981년 10월까지 10동의 건물을 중건하고 10동을 이건했으며, 9동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을 비롯하여 비로전, 극락전, 응진전, 관음전, 남월료(), 명부전, 약사전, 설법전, 만덕전, 조사전, 제하당(), 명월료, 청풍료(), 사명각(), 범종각,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1735년(영조 11) 태감()이 중건한 대웅전은 앞 뜰에 2개의 삼층탑이 놓여 있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기법은 조선후기의 건축적 특징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의 내·외부에는 아름답고 뛰어난 기법을 보여주는 많은 벽화와 불단이 남아 있다. 내부 중앙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영조 20년에 조성된 삼존불탱화(보물 670호)가 있다.

비로전은 천불전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경잠()이 경주의 옥석()으로 만든 천불상과 1852년(철종 3)에 조성한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약사여래, 1886년(고종 23)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이들 천불상 가운데에는 나아상()이 있는데, 첫 눈에 이 나아상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극락전은 서전(西殿)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은 1986년 주지 혜창 화상에 의하여 중창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59.64평으로 비교적 큰 건물이다. 1999년 새롭게 개원을 하여 현재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응진전은 931년(태조 14) 능여 대사가 창건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모두 불탄 후 1656년(효종 7) 관음전으로 중건되었다가 뒤에 응진전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중수 되었다. 남월료는 사중의 강당으로서 현재 직지사 승가대학(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풍료는 1971년 주지 녹원에 의하여 신축되었는데, 형태는 팔작지붕이면서 귀틀을 낸 ㄱ자형이다. 본래는 7칸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5칸의 금단청 건물로서 크기는 총 92.76평이다. 이 건물은 현재 성보유물전시관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명각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 사명당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5세에 이 절에서 출가하여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한 그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또 범종각에는 1981년에 만든 1,600관의 범종과 법고·운판()·목어() 등이 있다.

만덕전은 일명 불교연수회관이며,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 건립된 직지사 최대의 건물이다. 넓이는 총 361.54평으로서 외부는 완전 목조건물이지만 내부 중량의 일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들보가 구성되어 있으며 기와는 동기와로 제작되었다.

설법전은 불법의 선양과 불자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한 건물로서 주지 녹원에 의하여 1987년 3월부터 1992년 6월 20일에 걸쳐 3층으로 신축된 건물이다. 총 294.51평 넓이의 거대한 복합 건물로서 1층에는 식당이 있고, 2층에는 손님접대를 겸한 11개의 방이 있으며, 3층은 설법전이 있다. 이와 같은 만덕전과 설법전은 주로 직지사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위해 활용되는 공간이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보물 제319호)과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과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 석조나한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296호)이 있다. 이 가운데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 양식을 반영하는 불상으로서 마멸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광배와 함께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모셔서 상시 전시하고 있다.

부속 암자로는 운수암()과 백련암()이 있고 현재 직지사의 말사는 62개이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殿) 전면


2008년 9월 3일 보물 제1576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49년(인조 27)에 중창하고 1735년( 영조 11)에 중건했다. 정면 5층, 측면 3칸의 기와를 얹은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가구식 기단을 갖췄다.

 기단 가운데 나 있는 돌계단은 용머리조각과 호랑이 형상의 조각이 소맷돌을 장식하고 있고 그 결구법이 특이하다. 공포는 내외3출목이며 전면과 측면, 후면의 구성이 각각 다르다. 짜임새 있는 가구의 구성 및 부재의 표현 기법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고 각 불상 뒤에는 세로 6미터의 커다란 삼존불탱화(보물 670)가 걸려 있다. 이들 불화는 1744년(영조 20)에 제작된 것으로, 짜임새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정교한 표현, 안정감 있는 색감 등 조선시대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불상을 봉안한 불단과 천장의 단청 또한 기법이 뛰어나고 색채가 화려하다.


대웅전 앞에는 석등과 삼층석탑 2기(보물 606)가 있다. 직지사에서 소유 및 관리한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殿) 내부



춘천 청평사 (春川 淸平寺)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청평리에 있는 절터.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청평산문수원기비 〉에 따르면, “973년(고려 광종 24)에 당나라 선사() 영현()이 경운산() 아래에 창건하여 백암선원()이라 하였다. 1068년(문종 22)에 춘주도() 감창사(使) 이의()가 중건하여 보현원()이라 하였다.


이의의 아들 이자현()이 1089(의종 6)에 절을 고쳐지어 문수원()이라 개칭하고, 8암자를 새로 지었으며, 산 이름을 청평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평산문수사시장경비 〉에 따르면, 1327년(충숙왕 14)에 원나라 황후가 불경과 돈 1만 꾸러미를 시주하여 그 이자로 황태자와 황자들의 복을 빌고, 그들의 생일에 스님들께 음식을 올리는 반승()을 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화상()은 이 절의 복희암()에서 주석()한 적이 있다. 김시습() 또한 이 절에 은둔하여 서향원()을 짓고 살았다. 이황()은 청평산을 지나면서 절에 들르지 못해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는 이자현이 탐욕스러웠다는 역대의 사필()을 반박하였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받았던 보우()는 능인전(殿)만 제외한 모든 건물을 다시 짓고, 절 이름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라 하였다.

이 때 그려진 탱화가 일본 히로시마()의 고메이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 가운데 현대까지 남아 있던 건물은 극락전(殿)과 회전문()이 있는데, 극락전은 1947년에 불탔다.

1711년(숙종 37)에 환성화상()지안()이 거의 전부를 중건하였다. 1728년(영조 4)에 각선()이 삼존불상을 조성하였고, 1861년(철종 12)에 대웅전 즉 능인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능인전터에 요사()를 지었으나 1880년(고종 17)에 소실되어 그 해 여름에 또 중건하였다. 1900년에는 익랑() 10칸()을 지었다.

〈청평산문수원기비〉는 1914년에 극락전에 옮겨 보관해 오다가, 극락전이 소실되자 요사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이 건물이 폭격을 받자 비()도 파손 매몰되었다.

1977년에 극락보전(殿)과 삼성각()을 증건하였으며, 1979년에는 해탈문()·청평보탑()·적멸보궁()을 지었다. 1984년에 요사·청평루()·서향원을 새로 지었으며, 1988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해탈문 골짜기에는 ‘(청평선동)·(청평식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유물로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일명 공주탑)과 환적당승탑() 외에 2기의 승탑이 있고, 영지() 옆에는 오도송()이라 불리는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계단이나 축대 등은 대개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이 절에는 상사뱀을 물리친 당나라 공주의 전설이 전해 온다.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전면1963 년 소실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내부대륜 및 두관 문양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외부 두공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외부 두공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배소 두공 및 천정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내부 두공 및 천장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보개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보개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천장 격간판 문양



춘천 청평사 극락전(春川 淸平寺 極樂殿) 천장 격간판 문양

​경북 경산 환성사 (慶山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팔공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835년(흥덕왕 10)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말에 불타버린 것을 그 뒤 다시 중창하였으며, 1635년(인조 13)신감대사()가 중건하였고, 1897년(광무 1)에 긍월대사()가 중창하였다. 1973년 대웅전을 해제 보수하였고, 1982년에 명부전을, 1995년에 요사인 감로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殿)·심검당()·성전암(殿)·수월관()·산령각·천태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보물 제56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고려 말 조선 초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약 1.6m 높이의 석단() 위에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이며, 1974년에 복원되었다.


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는 심검당은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 건물로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며, 근래에 양와()로 새로이 단장하였다.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띤 심검당은 은해사 영산전(殿)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1976년에 해체 중수되었다.

그 밖에 대웅전 앞에 고려시대에 조성한 석탑과, 입구에 석주() 4개가 서있다. 석탑은 일명 연화탑이라고도 부르는데, 상층 기단부 갑석과 초층 탑신 사이에 별석()으로 된 매우 큰 괴임돌을 받친 매우 드문 형태를 하고 있다.

또한 석주는 예전에 있었던 일주문()의 기둥이다.『화성지()』에 의하면 이 절이 조선시대에 임고서원에 속하여 공물을 드렸는데, 숙종 때 박서봉()과 황윤중()이 여러 번 상소하여 하양향교()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북 경산 환성사 (慶山 寺) 전경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전면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외부 두공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두공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 (慶山 殿) 내부 천정


 

경북 경산 환성사  대웅전(慶山 殿) 불단 


 

경북 경산 환성사  심검당 (慶山 ) 전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河陽邑) 사기리(沙器里)에 있는 환성사(環城寺) 강당으로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환성사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으로 환성사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 이전에 세우고 후에 몇 차례 고친 것으로 추정되며, 심검당() 현판에 ‘도광 4년 갑신추팔월 추파서( )’라고 쓰여 있는데 도광 4년은 1824년(순조 24)으로 창건연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장대석 1단의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외목도리를 받치는 2익공을 결구하였다. 정면의 쪽마루는 나중에 설치하였으며, 창호(창과 문)도 고쳤다.

건물 측면은 2개의 고주(평주보다 키가 큰 기둥)를 병렬시켜 대들보를 받도록 하고, 그 위에 동자형의 판대공에 솟을합장을 걸어 조선 중기 이전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 기둥을 가로로 연결하는 창방은 평주와 고주 사이에 높이를 다르게 하는데, 같은 높이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경북 경산 환성사  심검당 (慶山 ) 두공 및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