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스캔달 [1회~5회]
-정희대비와 조두대,인수대비와 백씨, 효종과 4복,명성황후와 신령군,인복대비와 김씨
1. 정희대비가 조장한 조두대의 ‘내알(內謁)’
- 조선사 최고권력 여종의 국정농단 파노라마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엄내치’
… 권력자가 엄내치(嚴內治)에게 소홀하면 비극적 말로를 맞는다
2007년 개봉된 영화 <궁녀>의 한 장면. 보통 궁녀는 “아는 것을 말하지 말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약자였지만 여종에서 궁녀가 된 성종조 조두대는 당대의 권력실세로 군림했다
조선 제8대왕 예종 승하 후,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13세의 성종은 후계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예종의 큰아들이 아니라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 정희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했다. 대비는 처음에는 “나는 문자를 몰라 국정을 결단하기 어렵지만, 주상의 생모인 수빈(粹嬪)은 문자도 알고 사리도 알아 감당할 만하다”며 사양했지만 강청 끝에 수락했다.
이렇게 시작된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국정은 근본적으로 행정문서를 통해 운영되기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조선시대 행정문서는 한문으로 작성 되었고 그 한문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이었기에 문제는 더 심각했다.
기왕의 행정 관행으로 한다면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이렇게 시행되어야 했다. 우선 승정원에 모이는 문서를 승지들이 한글로 번역한다. 그 다음 번역 문서를 승전색 환관에게 줘서 정희대비에게 전달한다. 정희대비가 결재하거나 명령하는 한글 문서는 승전색을 통해 다시 승지들에게 전달한다. 승지들은 이 문서를 한문으로 번역해 해당 관청에 발송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정희대비는 수시로 승전색 환관과 승지들을 만나야 했다. 여성인 정희대비는 이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안으로 한문에 능숙한 측근 여성을 내세웠다. 당시 정희대비의 측근 여성 중 한문에 능숙한 여성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성종의 생모이자 정희대비의 큰며느리인 수빈 한씨였고, 다른 한 명은 조두대(曹豆大)라는 여종이었다. 큰며느리 수빈은 한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수렴청정 적격자로 추천되기까지 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희대비가 믿고 쓸 수 있는 측근은 조두대라는 여종일 수밖에 없었다.
조두대는 승전색 환관과 승지를 대신해 정희대비의 결제문과 명령문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정희대비에게 가는 행정문서는 조두대를 거쳤고, 결제문이나 명령문 역시 조두대를 거쳤다.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역할에 따라 승정원을 비롯한 궁중기구는 물론 의정부와 6조 등 중앙정부조직이 유명무실화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여종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그런 조두대가 정희대비와 함께 권력구조의 정점에 자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이었다. 나아가 조두대가 정희대비의 측근이 된 사연 역시 역사적이었다.
영순군의 몸종이었던 조두대의 입신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궁녀 조두대는 정희왕후 윤씨를 내알해 거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원래 조두대는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 8대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아들 중에서 광평대군은 다섯째였다. 세종 7년(1425)에 태어난 광평대군은 12세 되던 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해 출궁했다. 그 직후 세종은 광평대군을 무안군 이방번의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부왕 태종에게 살해당한 무안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의 미망인 왕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신씨와 함께 양모 왕씨를 모시고 살던 광평대군은 20세 되던 해 7월에 첫째 아들을 보았지만 그해 12월 창진(瘡疹)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승으로 간 광평대군도 불쌍한 인생이지만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 역시 불쌍한 팔자라 하겠다. 그러나 제3자의 이 같은 동정이 어찌 부인 신씨의 슬픔과 같으랴? 충격을 받은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핏덩이를 남기고 저승으로 떠난 아들, 그리고 핏덩이를 남기고 출가해버린 며느리를 보면서 세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 마음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세종은 손자를 살려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핏덩이 손자를 불쌍히 여긴 세종은 유모에게 명하여 안고 앞으로 나오게 한 후 친히 수복(壽福)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손자가 훗날의 영순군(永順君)이었다. 핏덩이 때부터 영순군을 돌보며 키운 사람은 사실상 유모와 몸종이었다. 영순군의 유모는 홍씨라는 여성이었고 조두대는 바로 몸종이었다. 조두대는 세종 때 영순군을 시중들기 위해 처음 입궁했다. 이후 영순군은 출궁했지만 조두대는 궁중에 남아 궁녀가 되었다. 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했기 때문이었다.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대에 걸쳐 궁녀 조두대는 영순군과 궁중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세조는 그 어느 국왕보다도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다. 부왕 세종의 유언 때문이었다. 세조는 조카 영순군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핏덩이 영순군을 길러준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정희대비는 세조 사후에 조두대를 더더욱 신임하고 중용해 국가 권력구조의 정점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한문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중용했다는 면에서 보면 실용적인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지만, 기왕의 인연을 중시했다는 면에서 보면 자비로운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기간 중 조두대의 공식 직함은 ‘전언(典言)’이었다. ‘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라는 뜻으로서 환관으로 치면 승전색(承傳色)에 해당했다. 전언 조대두는 한문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실록에 의하면 조두대는 재상 이철견의 수양녀였다. 이철견은 정희대비의 조카 즉 정희대비의 여동생 아들이었다. 이런 이철견의 수양녀인 조두대는 정희대비에게 손녀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조두대는 정희대비는 물론 인수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예컨대 인수대비의 대표작인 <내훈(內訓)>의 발문을 조두대가 썼다. “(…) 신(臣)이 가만히 살펴보니 역대의 어진 왕비는 시부모를 부지런히 섬겨 인효(仁孝)의 덕을 다했고, 자식을 엄히 키워 국가의 경사를 이룬 자가 많았지만, 직접 교훈서를 지어 훈계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조두대는 분명 역사와 고사에 두루 능통했다. 당시 궁중에서 여성의 몸으로 이 정도의 식견과 한문 실력을 가진 인물은 인수대비와 조두대 두 명뿐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희대비의 손녀 같은 딸이자 대비의 말씀까지 관장하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국왕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와도 밀접한 전언 조두대의 영향력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했다. 당연히 조두대의 영향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이처럼 비공식적인 줄을 이용해 절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내알(內謁)이었다. 말 그대로 안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알현과 청탁이 내알이다.
면포사업 독점으로 ‘재벌’이 되다
조두대는 자신의 내알, 나아가 그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이용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물론 자신은 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조카 조복중(曹福重)을 내세웠다. 천민 신분의 조복중은 고모 조두대를 배경으로 국내외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실록에는 조복중에 대하여 “본래 부상대고(富商大賈)로서 면포(綿布)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음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 입니다”라는 언급이 있다. 부상대고는 요샛말로 재벌이다. 면포를 바치는 사업을 독점적으로 하여 재벌이 되었던 것이다.
조두대는 큰돈을 시주해 영감암(靈鑑庵)을 중창하기도 했다. 영감암은 오대산 상원사 주변에 있는 암자로 고려 말에 나옹대사가 수도하기도 했지만 조선 건국 후 퇴락했다. 세조 12년(1466) 국왕의 상원사 행차에 동행했던 조두대는 영감암의 사연을 듣고 중창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또 부모의 극락왕생과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중창공사는 세조 13년 봄부터 예종 1년 가을까지 2년 반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성종 5년(1474)에는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위해 논 10섬지기를 시주했는데, 대략 1만6천 평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조두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격증하면서 온갖 구설도 격증했다. 궁중비화에는 거의 빠짐없이 조두대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6년(1475) 11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중신들이 작당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승정원 문에 붙었던 것이다. 익명서는 묻지 않고 바로 소각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름이 거론된 조정중신들은 사퇴의사를 밝혔다. 성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큰 상을 내걸어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다. 만약 주모자가 자수하면 면죄해주고, 모의에 참여한 자가 고발하면 천인은 면천하며 양인은 3품 관직을 내리고, 주모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도 같은 상을 내린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12월 10일, 승정원에 친군위 권즙의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최개지라는 사람이 누군가와 노비 소송을 벌였는데, 그 누군가가 정희대비의 친정식구와 조두대에게 뇌물을 써서 이겼고 분개한 최개지가 괴문서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권즙은 이런 내용을 친척인 박윤형으로부터 들었는데 박윤형은 최개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 고발장은 익명서 사건을 궁중 문제로 비화시켰다. 성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조정중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모자를 색출하려 한 것인데 고발장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정희대비를 겨냥하였다.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가 뇌물을 받고 노비 소송을 왜곡 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내알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익명서 사건은 주모자 색출에서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수렴청정 끝낸 후에도 조두대 비호
의금부에서는 처음에 박윤형과 최개지를 체포하여 사실여부를 조사하였다. 하지만 박윤형은 그런 말을 권즙에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최개지 역시 그런 말을 박윤형에게 한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최개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박윤형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개지와 박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는 권즙이었고, 그 말을 들은 박윤형이 최개지에게 전달 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권즙은 자신의 죄를 박윤형과 최개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먼저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의금부는 다시 권즙을 체포해 조사했지만 그는 물론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한 자가 누군지는 오리무중에 빠져들었고, 도리어 그 발언의 진위여부가 논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논란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논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논란이 거세질수록 곤란해진 사람은 오히려 정희대비였다. 궁지에 몰린 정희대비는 12월 13일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내렸다.
“처음에 주상이 어리고 대신들이 나의 수렴청정을 요청하기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매사에 조심하고 노력했는데, 지금 최개지의 말에 ‘전언 조두대가 정희대비에게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소송판결을 내렸다’는 내용까지 있다. 이것은 내가 수렴청정을 하기에 나타난 결과다. 정치는 부인의 일이 아니고 또 이제 주상이 총명하니 만기가 비록 번거롭다고 해도 어찌 결단하기 어렵겠는가?”(<성종실록> 권62, 6년 12월 13일)
정희대비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성종과 조정중신들은 만류했지만 정희대비의 강경한 고집으로 결국 철렴이 결정되었다. 성종 7년(1476) 1월 13일이었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정희대비의 불명예 퇴진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익명서의 발단은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의 국정농단으로 최개지가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하는 소송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최개지의 패소가 국정농단 때문인지 아니면 최개지 본인의 잘못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희대비가 철렴하면서 최개지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정희대비의 친정과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최개지 사건에서 국정농단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최개지 사건에 등장하는 최개지 본인을 위시하여 권즙, 박윤형 모두가 국정농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그런 말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국정농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들의 인식은 바로 당시 백성의 여론이었다.
물론 이런 여론은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를 대신하는 조두대를 곡해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조두대의 국정농단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조두대를 측근으로 두는 한 이런 여론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두대를 물리치든가 아니면 수렴청정을 그만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정희대비는 조두대를 내치는 대신 자신의 수렴청정을 포기했다.
권력의 속성상 그 맛을 본 사람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동서고금의 역사는 웅변한다. 그런데 정희대비는 자발적으로 불명예 퇴진을 택했다. 성종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조두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두대와 영순군에 대한 정희대비의 자비심은 가히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종 14년(1483)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두대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록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조두대에 대한 신임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두대는 인수대비의 강력한 신임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변처녕(邊處寧) 사건이었다.
성종 22년(1491) 겨울, 명나라 황태자가 조만간 책봉되리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進賀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성종 23년 봄에 진하 정사에 정괄, 부사에 변처녕이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의 부상대고는 북경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남겼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갈 때는 인삼을 가져다 팔아 이익을 남겼고, 올 때는 또 비단이나 고급 약재를 가져와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북경 무역을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만 가능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행이 결정되면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는 고귀지(高貴枝)와 조복중이었다. 고귀지는 정희대비의 친정인 파평 윤씨에 줄을 댄 부상대고였고, 조복중은 조두대의 조카였다.
진하 부사에 임명된 변처녕은 처음에 고귀지의 아버지 고윤량(高允良)을 수행군관 명목으로 사신 행렬에 합류시켰다. 본래 수행군관은 사신을 호위하기 위한 무관이기에 장사꾼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지의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갑자기 조복중으로 교체되었다. 당연히 고귀지는 의심했다. 조복중이 자신보다 더 많은 뇌물을 썼거나 아니면 조두대를 이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분개한 고귀지는 조복중을 찾아가 크게 따졌다. 싸움이 커져 결국 사헌부에 적발되었고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에서는 변처녕은 물론 고귀지와 조복중도 엄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서는 고귀지와 조복중을 체포해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조복중은 분명 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엉뚱한 나무들만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배후인 조두대를 처벌하지 않는 한 조복중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삼사에서는 조두대도 엄히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론의 예상대로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 후, 진하부사 변처녕은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했다. 하지만 조복중은 멀쩡했다. 진하부사는 재상급인데 그런 변처녕도 패가망신하는 마당에 천민인 조복중이 멀쩡했다는 것은 결국 조두대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에 사관은 이런 논평을 남겼다.
위 사건이 일어난 성종 23년은 이미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조두대의 내알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두대의 내알을 받아준 사람은 인수대비였다.
정희대비와 비교할 때 인수대비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정희대비는 문자를 몰랐지만 인수대비는 문자를 알았다. 또 정희대비는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수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비 사이에는 같은 점도 많았다.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같은 점은 내알을 조장했다는 사실이었다.
백씨의 내알에 빠진 인수대비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채시라. 성종의 생모였던 인수대비 역시 조두대의 내알을 막지 못했다
정희대비의 경우 내알은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문자를 모르기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아는 조두대를 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문자를 잘 알았고 수렴청정을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조두대를 측근으로 둘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인수대비는 왜 조두대를 측근에 두어 내알을 조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대비가 중용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쓰던 사람을 며느리 입장에서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와 마찬가지로 조두대에게 매우 자비로웠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이나 월산대군 그리고 손자인 연산군에게는 매정한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측근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특히 조두대와 백어리니(白於里尼)라는 두 여성에게 그러했다. 원래 백어리니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세자빈 권씨의 여종이었다. 그녀는 강선(姜善)의 부인이었으며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총명했다. 세자빈 권씨는 훗날의 경혜공주를 출산한 후 총명한 백씨를 유모로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이 역모로 몰려 죽은 후 백씨는 수양대군에게로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총명한 백씨를 큰아들에게 주었고, 그 인연으로 백씨는 훗날 성종이 되는 자산군의 유모가 되었다. 자산군은 백씨를 마치 생모처럼 존중했으며,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 역시 백씨를 극진히 신임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백씨는 성종이 즉위한 후 봉보부인(奉保夫人)의 자격으로 입궁했다. 이처럼 인수대비와 백씨의 인연은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인연 못지 않게 구구절절하다. 뿐만 아니라 정희대비가 조두대를 측근으로 중용했듯이 인수대비 역시 백씨를 측근으로 중용했다. 나아가 정희대비 사후에는 조두대 역시 측근으로 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희대비 사후에는 궁중 내알이 기왕의 조두대 한 명에서 백씨까지 더하여 두 명으로 늘었다. 당연히 궁중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은 조두대와 백씨 두 명에게 줄을 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 나왔던 변처녕과 더불어 이공(李拱)이라는 인물이었다. 이공은 세종대의 유명한 역법학자 이순지의 아들인데, 실록에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사론이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예컨대 이런 사론이 대표적이다.
“처음에 이공이 봉보부인 백씨의 조카딸을 첩으로 삼고 백씨 부부를 부모처럼 섬겼다. 순천부사가 되어서는 몰래 뇌물을 들여 백씨와 깊이 사귀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곧 승지가 되었다가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또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백씨가 아들을 장가들이던 날 이공이 백씨의 집안일을 마치 늙은 종처럼 맡아 보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다 비루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공은 권세와 이익을 달게 여겨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주목사가 되어서는 더욱 부지런히 섬겨 뇌물을 땅으로 나르고 바다로 날라 바쳤다.” [<성종실록> 207, 18년(1487) 9월 28일]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희대비나 인수대비는 조두대와 백씨에게 바다처럼 자비로웠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자비심이 공식적인 행정조직을 무력화하고 내알을 조장했으며, 성종의 치세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유교지식인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처방이 <대학연의>의 ‘엄내치(嚴內治)’였다.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것, 즉 내알을 방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엄내치’였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니, 엄내치에 소홀하여 비극에 빠진 권력자들이 헤아릴 수 없다. 일면 역사가 허망하기도 하고 일면 두렵기도 하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필자 인터뷰ㅣ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 “스캔들의 역사는 수신제가의 귀중한 반면교사”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 왕실을 “유교국가 조선의 꽃이기도 하지만 스캔들의 보물창고”라고 규정한다.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대비, 후궁, 환관, 궁녀, 무당, 스님, 양반, 군인 등 온갖 군상이 얽히고 설켜져 벌이는 스캔들의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신 교수에게 스캔들의 역사를 통해 후대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물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스캔들에 주목한 이유는?
“최고 권력 주변의 인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일으키는 스캔들은 당시의 역사는 물론 인간의 심층과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적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주변을 경계하고 자중하는 데 큰 교훈을 준다.”
스캔들을 주변부적으로 보는 역사 판단의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다. <대학연의>는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을 자세히 설명한 책인데 양반들의 필수교양 서적이었다. <대학연의>에서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 스캔들이라 생각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반면교사로 스캔들만한 것은 없다.”
조선시대 스캔들을 ‘연의’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싶다고 했는데.
“과거 동양에는 연의(演義) 전통이 있었다. 말 그대로 뜻을 넓혀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연의다. 예컨대 <삼국지>를 자세히 설명한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이다. 궁중의 온갖 인간군상이 얽혀져 벌이는 스캔들은 하나하나가 가히 <조선왕실연의(朝鮮王室衍義)>의 일부라 할만하다. 이런 왕실스캔들을 연의의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역사적 흥미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고 싶다.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콘텐트의 좋은 소재로도 활용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부른 비극
인평대군의 네 아들(4福)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교만과 방종 불러와
… 권력자 측근일수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일신(一身) 보전
최고권력자의 친인척일수록 겸손과 근신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척속(敎戚屬)’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권력자와 그 주변이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숙종이지만 4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사진은 창경궁 문정전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궐 일상 재현행사.
효종 7년(1656) 5월 12일, 승정원에 고변서가 접수됐다. 고발자는 천안군수 서변(徐忭)이었다. ‘훈련대장 이완을 비롯한 몇몇 역적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문을 홍만시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고변서가 접수된 당일, 관행대로 궁궐 안에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됐다. 의금부 도사들은 고변서에 언급된 피의자들을 체포했다. 조사 결과 서변이 들었다는 소문은 조윤석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추국청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어느 날인가 저의 매부 한정상 집에서 신부례(新婦禮)를 행했습니다. 저는 그날 풍정도감(豊呈都監)에 있다가 해 떨어진 후 그 집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씨 친척 몇 명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정선흥 역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와 자기집에서 있었던 회음(會飮)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젊은이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와 허적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야심한 시각에 승지 유도삼이 와서 망발했다고 했습니다. 정선흥이 ‘무슨 망발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젊은이는 ‘유 승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어떤 사람이 인평대군께서 여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 승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절하면서 ‘소신(小臣)의 불찰’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망발이라고 하자 유 승지는 ‘오랫동안 승지로 있어 말이 습관이 돼 그렇게 됐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이 소문으로 퍼졌는데 저는 같이 앉아서 듣기만 했습니다.” [출처: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서변등옥사추안(徐忭等獄事推案)>]
조윤석의 진술은 생각하기에 따라 무시무시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 승지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한 말이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승지가 ‘소신’이라 자칭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국왕과 왕비뿐이었다. 그런데 승지 유도삼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다. 술에 취해 그랬다고는 해도 충분히 대역부도로 몰릴 만한 발언이었다.
장소와 참석자들도 문제였다. 위의 젊은이가 언급한 자기 집이란 오정일의 집이었다. 오정일이 누구인가? 바로 인평대군의 큰처남이었다. 오정일이 자신의 집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부인 인평대군을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허적, 유도삼 등이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허적은 형조판서로서 남인의 핵심인물이었고, 유도삼은 현직 승지였다. 왜 이들이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술자리에 참여했을까? 또 왜 현직 승지는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을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모든 상황이 의혹을 낳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당시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을 장악한 이완까지 연루되었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역모를 의심하기에도 충분했다.
더구나 오정일의 아들이 왜 그런 사실을 조윤석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일부러 소문을 냈을까 하고 의심하면 온갖 추측도 가능했다. 혹 유도삼의 망발은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어떤 음모 때문에 나왔고, 그 음모를 물타기 위한 역(逆)선전 또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 하는 추측, 나아가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조윤석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저의 역시 음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조윤석은 자의대비 조씨의 친정 큰오빠인데, 만약 그가 이런 소문을 듣고 자의대비에게 알릴 경우, 자의대비의 반응에 따라 다음 단계를 음모하려는 술책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심들은 특히 서인 사이에 횡행했다. 그때 서인들 사이에는 남인이 서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인평대군과 자의대비를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 아예 남인이 인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의심 등이 횡행했다.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처가인 동복 오씨가 남인의 대표가문일 뿐만 아니라 동복 오씨의 중심인물인 오정일이 인평대군, 허적과도 빈번히 접촉했기에 이런 의심들을 불러왔다.
효종의 공평하지 못했던 사건 처리
서변의 고변은 사실상 위와 같은 서인의 의심에서 비롯됐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인평대군, 오정일 그리고 허적을 체포해 조사해야 했다. 조선시대 관행으로 한다면 추국청 조사에서 언급된 연루자는 무조건 조사해야 했기에 조윤석의 진술에 언급된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들을 체포하자는 추국청의 요청에 대해 효종은 예상외로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왕은 승지 유도삼이 술기운에 소신이라 자칭한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도리어 왕은 누군가가 서변을 사주해 고변했다고 의심했다. 인평대군을 해치고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고변했다고 의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변의 고변이 서인 일반의 의심을 대변했다면 효종의 의심은 국왕 개인의 의심일 뿐이었다. 따라서 공평한 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서변의 무고 가능성은 물론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역모 가능성도 함께 조사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왕은 그렇게 하지않았다. 왕은 서변의 고변을 무고라 단정하고 그 배후를 캐기 위해 직접 추국청에 참여해 누가 사주했는지 집요하게 추궁했다. 연이은 고문에 시달리던 서변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서변에게 소문을 전한 홍만시 역시 매를 맞다가 죽었다. 그 결과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확정됐다.
그렇다면 서변의 고변은 정말 무고였을까? 현재 상황에서 무고인지 아닌지 확인할 증거는 없다. 무고일 가능성도 있고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인평대군과 오정일도 조사했어야 하는데 효종은 독단으로 이들을 조사에 포함 시키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인평대군을 조사했다면 그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적들에게 추대됐다는 혐의만으로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인평대군은 물론 왕 자신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바로 이 점을 우려해 효종은 일방적으로 서변을 무고자로 몰았다.
여기에 반발한 대사간 유철이 추가 조사를 요구하자 오히려 왕은 그를 서변의 배후자로 지목해 국문하라 명령했다. 이에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효종은 “오늘날의 나랏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니 그대들 마음대로 해라. 내게는 단지 동생 하나가 있을 뿐인데 기어코 죽이고자 하니, 어찌 이처럼 간악하고 음흉한 자가 있단 말인가?”라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극단적으로 나오는 왕의 위력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사간 유철은 곤장을 맞은 후 귀양에 처해졌고,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마무리됐다. 인평대군을 살리기 위한 효종의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부주의한 행동으로 단명 재촉한 인평대군
경기 여주군에 있는 효종대왕릉.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짜임새 있게 조성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서변의 고변은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부주의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가 큰처남 오정일을 비롯해 허적, 유도삼 등을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행에 의하면 대군이 관료를 만나는 것은 금기시됐다. 예컨대 어느 왕자가 이언적을 사모해 찾아오자 이언적은 그날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인평대군은 현직 관료인 허적, 유도삼 등을 스스럼없이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많은 의심과 소문을 양산했다.
당시 효종이 좀 더 객관적이었더라면 인평대군은 몰라도 최소한 오정일과 허적은 조사해야 마땅했다. 서인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또 인평대군과 남인에게 최소한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종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탄압했다. 당연히 서인의 불만은 커졌고 인평대군의 불안 역시 커졌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변의 고변이 있은 지 2년 후에 인평대군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변 때문에 인평대군이 제명에 죽지 못했다고 생각한 효종은 직접 제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아아! 역적 서변의 변괴는 말하고자 하면 참혹해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 간악한 정상이 탄로났기에 극형에 처해 그 원한을 통쾌하게 풀었지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리요. 지금까지도 분노한 마음이 그때와 같이 삭아들지 않는구나. (…) 의지할 곳 없는 너의 아이들과 슬픔에 젖은 너의 처는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너는 항상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해 매번 겸허한 덕을 삼갔는데 어찌 이다지도 보답을 받지 못한단 말인가? 하늘의 도가 무상하니 창천을 우러러 길게 부르짖는다. 저승으로 갈 날이 닥쳐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내 꿈에 들어와 평생의 지극한 회포를 풀어주지 않는단 말이냐? 마치 낭랑한 너의 웃음 소리를 듣는 듯하고, 네가 문득 눈앞에 있는 듯도 하니 내 어찌 잠시라도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세월이 흘러도 애통함을 누르기 어렵구나. 세상에 남겨진 너의 아이들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고, 나 또한 실의에 차서 이 세상일에 즐거움이 없으니 비로소 만가지 인연이 이에 허사가 되었음을 알겠구나.” [<효종 어제어필, 이요치제문(李?致祭文)> 중에서]
인평대군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슬하에 4남2녀가 있었다. 4남 중 첫째 복녕군이 스무 살, 둘째 복창군이 열여덟 살, 셋째 복선군이 열두 살 그리고 막내 복평군이 열한 살 이었다. 이들은 복자 돌림이기에 통칭해 제복(諸福) 또는 4복(四福)이라 했다.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혼인했고, 복선군과 복평군은 혼전이었다.
이들 4복을 키운 여성은 윤 상궁이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윤 상궁은 인조 때 궁녀였는데 당시 궁중실세 조 귀인에게 미움을 받아 인평대군방으로 쫓겨났다. 인평대군은 바로 이 윤 상궁에게 아이들 양육을 맡겼다. 윤 상궁이 궁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역사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4복을 양육하던 윤 상궁이 어느 날 궁중에 들어왔다. 그때 세자였던 효종이 인조에게 수라를 올렸는데, 조 귀인이 은 첨자(籤子)를 뽑아 생선탕에 꽂았고 색이 변했다. 조 귀인은 “색이 변하다니 몹시 괴이합니다”라고 했다. 탕에 독약이 들었다는 뜻이었고, 세자가 인조를 독살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세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있던 윤 상궁이 “뜨거운 생선탕에 은을 담그면 색이 변합니다. 다른 생선탕으로 시험 해보소서”라고 했다. 시험 결과 과연 그랬다. 인조의 의심이 풀려 세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세자는 윤 상궁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고 왕이 되자마자 지밀상궁으로 입궁시켰다.
인평대군이 죽자 효종은 “의지할 곳 없는 네 아이들을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라 공언한 그대로 복선군과 복평군을 궁중에 들여 키웠다. 이들을 딱하게 여긴 효종은 윤 상궁에게 양육을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복선군과 복평군을 엄한 남자선생님에게 맡기기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윤 상궁은 이들을 마치 아들처럼 아끼고 돌보며 철없이 키웠다.
효종은 세자에게도 4복을 친형제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당시 세자는 훗날의 현종으로 복창군과 동갑인 열여덟 살이었다. 친형제가 없어 외로웠던 세자는 4복 중에서도 특히 복창군과 친하게 어울렸다. 복창군은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또 세자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입궁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와 혈연 이외에도 인연이 깊었다. 세자는 김육의 손녀사위였고 복창군은 김육의 외손녀사위였다. 즉 세자는 효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복창군은 김육의 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로는 동갑, 혈연으로는 4촌 그리고 혼인으로는 청풍 김씨 김육 가문의 사위였던 것이다.
복창군이 수시로 궁에 드나들고 나아가 복선군과 복평군이 궁 안에서 철없이 자라면서 무수한 소문과 의심이 난무했다. 그러나 효종이 생존한 상황에서 이런 소문과 의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효종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동정과 보호 속에서 4복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4복’의 방자함
사약(賜藥)은 고관대작이나 왕실의 지친 등이 대역죄를 지었을 때 내려진 벌이었다.
인평대군이 죽고 1년 만에 효종이 승하했다. 당장 서인 측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효종 승하 후 2개월 만에 송준길은 상소문을 올려 4복으로 인해 제기되는 각종 의혹과 불만을 공개했다. 송준길은 세종 때 광평대군의 어린 아들 영순군을 궁에 들여 양육하다가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출궁시킨 전례를 들어 복선군과 복평군을 속히 출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학덕이 뛰어난 사람을 골라 복선군과 복평군 및 복녕군과 복창군 등을 훈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종은 선왕인 효종의 유지를 들어 거절했다. 효종의 왕비 장씨 역시 선왕의 뜻이라며 4복을 감싸고돌았다.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한 사람은 대비 장씨의 측근으로 있던 윤 상궁이었다. 그녀는 4복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무조건 보호하려고만 했다.
그 결과 4복은 효종 때보다도 더 강력한 동정과 보호를 받게 됐고 여전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그들은 국법을 어기고 경기 각처를 돌아다니며 사냥과 유흥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는 사냥개의 먹이까지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을 지워 도처에서 분란이 생겼다.
이를 보다 못한 송시열이 현종 9년(1668)에 상소를 올려 4복을 단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시열과 송준길도 어쩌지 못하는 4복의 교만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현종 11년(1670)에 복녕군이 죽었지만 나머지 3복의 교만은 더욱 높아졌다. 간혹 삼사가 3복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무시됐다. 현종의 지극한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칼을 빼든 숙종의 모후 김씨
그러던 와중인 현종 15년(1674) 2월 23일에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왕비였던 장씨는 남편의 뜻을 받들어 평상시 3복을 아들처럼 대우했다. 이런 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3복은 모두 입궁해 장례에 참여했다. 3복 중의 맏이인 복창군은 대전관(代奠官)에 임명됐다. 현종 대신 왕대비의 영전에 전(奠)을 올리는 임무였다.
어느 날 현종은 왕대비의 유산을 처분하게 됐다. 그 자리에 왕대비의 아들인 현종, 딸들인 공주 그리고 아들처럼 대우받던 복창군 등도 참여했다. 왕대비의 궁녀들도 참여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여한 복창군과 왕대비의 궁녀 중 한 명인 상업(常業)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 야릇한 눈빛이 오가고 행동이 수상했던 것이다. 현종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궁궐의 치부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복창군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현종은 왕비 김씨에게 말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은밀하게 알아보게 했다. 확인 결과 복창군은 궁궐에 들어올 때마다 간절하게 상업을 찾았다. 이미 궁녀들 사이에는 상업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3복 중의 막내인 복평군과 귀례(貴禮)라고 하는 궁녀와의 추문도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의 추문은 조선시대 종친이 일으킨 추문 중에서는 최고의 추문이라 할만 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현종은 “남녀의 욕정이란 사람이 억제하기 어려운데 지금 복창군의 기색을 보니 큰 환난을 일으키겠구나”라고 근심했다.
하지만 현종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공개할 경우 복창군과 복평군의 목숨이 위험하고, 방치하자니 궁궐 기강이 엉망이 되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현종은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에 홀연 승하했다.
뒤이어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분개하고 불안해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모후인 김씨 였다. 대비가 된 김씨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복창군과 복평군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불한당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지극한 동정과 보호에 힘입어 세상 편히 살았다. 그런 그들이 궁녀를 건드려 임신까지 시켰고, 그 때문에 고민하던 남편 현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더구나 아들 숙종은 겨우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숙종의 삼촌인 복창군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단종과 수양대군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복창군 또는 그 동생인 복선군이나 복평군이 딴 마음을 품으면 어찌할 것인가? 3복 뒤에는 동복 오씨와 남인이 있었다. 궁궐 안에는 수십 년에 걸쳐 3복과 인연을 맺은 환관과 궁녀가 무수히 많았다. 이들이 합세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비 김씨가 이런 의심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처신 때문이었다. 친형제처럼 지낸 현종을 배신하고 궁녀를 건드리는 복창군과 복평군이라면, 조카인 숙종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불안에 빠진 대비 김씨는 친정아버지인 김우명을 설득해 3복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다. 김우명은 이런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 복평군 형제가 효종께 친아들과 같은 은혜를 받았고, 선왕으로부터도 친형제와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궁녀를 임신 시키기까지 한 사람을 금지하지 못한다면, 전하의 가법(家法)이 손상되는 것이 어떠할 것이며, 또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은혜를 미루어 법을 베푸시고 일찍 결단하여 적당히 처치하소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마음을 경동하여 욕심을 참고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궁궐 안이 맑아질 것이고 국가도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숙종실록> 권3, 1년(1675) 3월 12일]
끝내 화(禍)를 피하지 못한 3복
숙종의 어필(御筆)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숙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복창군과 상업 그리고 복평군과 귀례를 체포해 조사하게 했다. 그들은 늘 그렇듯 처음에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형신(刑訊) 즉 고문을 요청했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남의 말을 믿고 골육 지친을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하였으니 나는 매우 부끄러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 이렇게 억울하고 애매한 사람을 잠시도 감옥에 가둘 수 없다. 즉시 석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관행대로라면 형신이 당연한데 오히려 석방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주상이 이미 엄폐됐기에 이렇게 처분했으며, 또 처분이 꼭 주상에게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고 논평했다. 누군가가 어린 숙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석방 판결을 끌어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윤 상궁 같은 궁녀 또는 3복에 밀착된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숙종의 판결에 언급된 ‘남의 말’은 다름 아닌 김우명의 말이었다. 김우명은 대비 김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 분개한 대비 김씨는 다음날 숙종과 조정중신들의 회의장에 무단 참여해 울부짖으며 김우명의 고발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남인은 대비가 국정에 간여한다고 크게 반발했다. 대비 김씨는 자기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3복 문제로 왕과 생모, 종친과 외척, 서인과 남인이 서로 비난하며 치고 받는 소동이 전개 됐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숙종은 복창군과 복평군을 일단 유배에 처했다가 곧 석방했다. 대비 김씨의 입장 그리고 3복의 입장을 두루 반영한 처분이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철없는 행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3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궁녀 간통 사건에서 자유로웠던 복선군이 외삼촌 오정창 그리고 허적의 아들 허견 등과 어울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이 뒤따랐다. 이것은 효종 때 인평대군이 큰처남 오정일 그리고 허적과 어울리다가 고변을 당했던 사건의 판박이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사실이 있었다. 인평대군은 전과가 없었지만 3복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숙종은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사실로 인정해 이들을 사사했다. 이 와중에 복창군도 사사당하고, 복평군은 유배에 처해졌으며 남인은 모조리 쫓겨났다. 이 사건이 숙종 6년(1680)에 있었던 이른바 ‘경신대출척’이었다.
3복의 비극 그리고 경신대출척의 뿌리를 찾아보면 거기에는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워야 할 우애가 비극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3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쌍하리만큼 더 엄하게 훈육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3복은 평생에 걸쳐 윤 상궁의 일방적인 편애와 효종과 현종의 절대적인 동정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실수를 되풀이하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척속(敎戚屬)’을 제시한다.
친인척을 엄히 훈육해 겸손과 근신을 알게 하는것, 그것이 바로 ‘교척속’이다. 자손을 엄히 훈육하지 않아 교만과 방종에 빠지게 했다가 자손도 패가망신하고 스스로도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고금에 넘쳐나니 슬픈 일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3. 명성황후, 무당 신령군(神靈君)에게 미혹되다
1948년 간행된 '개벽',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 소개… ‘진짜 수호신’ 백성의 충성심 외면한 고종 부부의 비참한 말로
고종황제와 명성 황후는 일개 무녀에 미혹돼 국고까지 탕진하는 우를 범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종황제 (이진우 분)와 명성황후(이미연 분).
1948년 8월 1일 간행된 <개벽(開闢)> 제79호에서는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를 특집으로 다뤘다. 8월 15일 정부수립을 앞둔 시점에서 구한말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자는 취지였다. 이 특집에는 ‘한말 정국과 금일의 정세’, ‘독립협회는 왜 패배했나?’, ‘한일병합과 양종의 기문(奇文)’, ‘밤의 여왕 신령군(神靈君)’, ‘한말 풍운의 일타홍, 미쓰 손탁’ 등의 글이 실렸다.
그런데 다른 글들은 제목에서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들과 직결됨을 짐작할 수 있지만 ‘밤의 여왕 신령군’은 특집 취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쉬 짐작되지 않는다. 우선 밤의 여왕이라 불린 신령군이 어떤 사람인지부터가 생소하다. 게다가 ‘나라 파는 데 한몫 본 요무(妖巫)’라는 부제에서는 구한말 망국의 책임이 신령군에게도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정말로 그랬을지 의구심마저 든다.
경기 여주군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
그러나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그랬다고 단언한다. 이 글에서는 맨 처음에 “이조는 어찌하여 망했으며, 우리는 왜 식민지의 노예생활을 강제당하게 됐는가?”라고 자문하고, 그 대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가 외세의 침략정책, 둘째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 각성할 줄 모르는 이조 말엽의 실정이었는데 밤의 여왕 신령군이 실정을 대표한다고 했다.
문제의 인물 신령군이 밤의 여왕이 되고 나아가 이조 말엽의 실정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까지는 사연이 많았다. 충주 출신인 신령군은 성이 박이고 이름이 창렬(昌烈)로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시집도 가난한 농사꾼에게 갔는데 팔자가 사나워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다.
홀로 된 박씨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했다. 젊어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 살기 위해 무당이 됐다. 몸주신은 관우 장군 즉 관왕이었다. 젊고 예쁜데다 말주변까지 뛰어난 무당 박씨는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서 수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들 중에는 무당 박씨의 영험한 힘에 끌린 사람도 있었지만 얼굴과 몸매에 끌린 사람도 없지 않았기에 추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무당 박씨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충주 장호원에서 명성황후를 만났던 것이다.
1882년 6월 10일 창덕궁을 습격한 구식 군병들은 명성황후를 찾아 죽이려 했다.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도망치려던 황후는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궁녀가 입짓으로 황후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황후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틈에 끼여 있던 홍재희라는 이가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실제로 홍재희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재희는 얼른 황후를 들쳐 없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8월 보름 귀경해 귀한 자리에 오른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 군인들의 훈련 모습.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한양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충주 장호원에 사는 먼 친척 민응식 집으로 도망갔다. 그때가 6월 19일이었다. 장호원 서북쪽에는 해발 770m의 국망산(國望山)이 있고 이산의 남쪽 산발치에 민응식의 집이 있었다. 황후는 한양에서 온 양반규수처럼 변장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 때는 국망산에 올라 멀리 한양을 바라봤다.
국망산에 오른 명성황후가 한양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한양으로 되돌아갈까 열망했을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한양은 황후의 정적인 흥선대원군이 장악했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황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살아서 입궁할 수 있을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황후는 귀신의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듯하다.
당시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이 마침 무당 박씨의 단골이었다. 명성황후가 먼저 요청했는지 아니면 이 여종이 황후에게 권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여종을 통해 명성황후와 무당 박씨의 만남이 이뤄졌다. 눈치 빠른 무당 박씨는 황후를 한양에서 내려온 귀부인이라 직감했다. 당연히 무당 박씨가 황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말재주를 부렸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무당 박씨는 명성황후를 쳐다보며 “귀인의 관상이 있어 장차 큰 운이 올 것”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는 황후의 말에 무당 박씨는 “이미 말씀 올린 바와 같이 귀인의 상을 하시었고, 지금 계신 이 댁에서 바라다보이는 저 산은 국망산이라 부르며 그 방향이 서북으로 향해 서울을 넘겨다보오니 반드시 8월 보름에 서울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황후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예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국망산의 위치와 명칭을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망산은 황후가 머물던 집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이 방향은 계절로 치면 가을에 해당하고 달로 치면 7월, 8월, 9월에 해당했다. 국망산의 ‘망’은 보름을 의미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를 만나기 전 여종 신씨로부터 황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야기 중에는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본다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황후가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터이다. 이런 소망을 짐작한 무당 박씨는 대략 8월 보름에는 한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황후의 환심을 사려한 것이 틀림없다. 8월 보름이면 대략 두 달이 남았는데 한양에 돌아가길 소망하는 귀부인이 그 안에 왜 못 가겠는가? 혹 가지 못한다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또다시 희망 섞인 예언을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무당 박씨는 점이나 굿이 영험한 것 못지않게 눈치 역시 영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무당 박씨의 영험한 예언에 반한 황후는 매일 오라고 간청했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흉허물 없는 사이가 돼갔다.
‘예언’ 덕에 황후와 함께 서울로 입성한 무당
한양도(漢陽圖)에 드러난 북묘의 위치.
장호원에 머물던 명성황후는 은밀히 고종에게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겼다. 7월 8일 청나라의 오장경이 3천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남양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어 7월 13일 흥선대원군은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군병들에게 납치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7월 20일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황후가 충주 장호원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병을 파견해 황후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영의정과 제학, 승지, 한림, 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도 모두 가서 황후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경호에 필요한 청나라 군병 100명과 조선 군병 60명도 파견됐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7월 27일.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 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7월 28일 명성황후는 장호원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길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황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경호했다. 29일 용인에서 숙박한 황후는 8월 1일 한양에 입성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와 동행해 한양에 입성했다. 처음 무당 박씨는 황후가 8월 보름에 환궁한다고 예언 했지만 실제 환궁한 시점은 8월 1일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틀린 예언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입장에서 며칠 틀린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환궁한다는 예언 자체가 맞았고 날짜도 얼추 맞았다. 그런 무당 박씨를 보낸 것은 하늘의 뜻이고, 또 하늘의 뜻을 전한 무당 박씨는 수호신령이 아니겠는가? 당시 황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무당 박씨를 데려왔을 듯하다.
무당 박씨가 한양에 입성했을 때는 따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황후와 함께 궁궐에서 살았다. 황후는 남들에게 말 못할 온갖 근심걱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무당 박씨가 아픈 곳을 만져주면 고통이 씻은 듯 없어지는 듯했고, 굿을 해주면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러면서 황후의 미혹은 커져만 갔다.
한동안 궁궐에 머물던 무당 박씨는 관우 사당을 지어주면 그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궁궐에 무당이 오래 머물다 보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소문 안쪽에 관우 사당이 건설됐는데 공사는 1882년 연말에 시작돼 1884년 가을에 끝났다. 이 사당은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관왕묘 또는 북묘(北廟)라고 불렸다.
북묘는 고종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건설했다. 고종 역시 황후를 따라 무당 박씨에게 미혹됐던 것이다. 북묘 완성 후 고종은 비문을 몸소 짓기까지 했다. 비문에서 고종은 “어느 날 관우 장군이 나의 꿈속에 현몽하고 또 왕비의 꿈에도 현몽했는데 자상하게 돌봐주는 듯해 자리를 물색해 숭교방 동북쪽 모서리에 사당을 지었다”고 해 북묘를 짓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런데 1929년 간행된 <별건곤> 23호에 의하면 고종의 꿈에 관우 장군이 현몽한 시점은 임오년 봄이었다고 하며, 건장한 사람이 장검으로 고종을 해치려는 순간 관우 장군이 나타나 구해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황후 역시 똑같은 꿈을 꿨다고 한다. 이 꿈이 북묘비는 물론 <별건곤>에까지 실린 것을 보면 꽤 유명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 꿈을 통해 임오군란 직전 고종과 황후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고종과 황후는 자신들이 임오군란에서 무사히 살아난 이유를 관왕의 보호 때문이라 숭신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고종 눈앞에서 척살당한 민씨 척속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일부 무속인 사이에서 신으로 받들어지는 관우의 사당
1883년 10월 21일 고종은 북묘 완공을 축하해 참배했다. 문무백관은 물론 왕세자도 함께했다. 북묘 참배를 위해 창덕궁에서 북묘 사이에 새로 어로(御路)가 닦이기까지 했다. 고종의 북묘 참배는 <승정원일기>에 실리기까지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고종이 천막에 들어가고 잠시 후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천막 밖으로 가소서’ 하였다. 고종이 군복과 갑옷으로 바꾸어 입고 천막에서 나왔다. 찬례(贊禮)가 고종을 인도하여 정문으로 들어가 판위(版位)로 가서 북향하고 서게 하였다. 왕세자도 갑옷을 갖추고 들어와 자리로 갔다. 찬의가 ‘사배(四拜)’라고 외쳤다. 고종이 사배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사배를 행하였다. 마친 후, 찬례가 고종을 인도하여 관우 장군의 신좌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무릎을 꿇으소서’ 하였다. 고종이 무릎을 꿇었다. 도승지 이교익이 향을 받들었고, 동부승지 김낙진이 향로를 받들었다. 고종이 세 번 향을 살랐다….” [<승정원일기> 고종 20년(1883) 10월 21일]
고종의 북묘 참배는 겉으로는 관우 장군 참배였지만 실제는 무당 박씨 참배였다. 북묘의 주인이 무당 박씨였기 때문이다. 고종과 왕후는 북묘의 주인 박씨를 신령군 또는 진령군(鎭靈君)이라 불렀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호신령 또는 수호진령이라는 뜻이다. 설상가상 신령군에 대한 왕후와 고종의 미혹은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민영익 등 친청파 인사들을 일망타진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한양에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김옥균이 의지하는 일본군은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천여 명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넓은 창덕궁은 적당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종과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 김옥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 공사의 반대로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대신 경우궁으로 바꿨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친어머니인 수빈 박씨(綬嬪朴氏)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에 유리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친청파 인사들을 척살한 후 입궁하기로 계획했다.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 영국 영사, 청나라 상무위원,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과 황후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곳은 불안하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과 왕후는 창덕궁을 떠나 경우궁으로 갔다.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친청파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5일 새벽에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마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갑신정변 겪으며 ‘밤의 여왕’으로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황후는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정변임을 깨달았다. 황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5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황후를 알현했다. 그때 황후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 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과 황후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 공사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듣고 항의 했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6일 오후 고종과 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이 틈에 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북묘로 도망했다. 왕대비, 대왕대비 등도 모두 무사히 북묘에 모였다. 왕후는 고종에게 글을 보내 속히 북묘로 올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고종은 창덕궁 뒤편의 산속에서 위험에 빠져 있었다. 총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고종은 김옥균과 실랑이를 벌였다. 함께 인천으로 가자는 김옥균의 요구에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대왕대비가 가신 곳으로 가서 죽더라도 한 곳에서 죽겠다”며 버텼다.
하지만 대왕대비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기에 무작정 버틸 수도 없었다. 마침 그때 북묘로 오라는 황후의 글이 도착했던 것이다. 북묘로 가려는 고종과 막으려는 김옥균 사이에 몇 차례 더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더라도 북묘로 가겠다는 고종의 고집을 꺾지 못한 김옥균은 결국 고종을 내버려두고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갔다. 고종은 무사히 북묘에 도착해 가족들을 만났다. 황후와 고종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가족 모두가 무사히 북묘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수호 신령의 도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믿음을 고종은 북묘 비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앞서 임오년 여름에 군란이 일어나 역도가 대궐을 범하여 재앙의 기미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곧 그들이 해산되어 차례차례 사로잡아 국법으로 처벌했다. 그 후 갑신년 겨울에 또 역란이 일어나 나는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 장군 사당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역적의 세력이 커서 놀라운 일이 순간에 일어날 상황이므로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흉도는 잡히고 적병은 도망쳐 피신했던 행차가 무사히 돌아오고 종묘사직이 편안해졌다. 전후에 걸쳐 변고가 생겨 위급할 때 보이지 않게 작용하여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지난날 꿈속에서 만나 장차 자상하게 돌보아줄 듯한 일이 어찌 분명하고 크게 증험된 것이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의 말을 곧 관우 장군의 말로 숭신했다. 명색은 고종이 국왕이었지만 사실상 그 위에 신령군이 있었다. 신령군이 밤에 궁궐에 들어가 하는 말은 다음날 아침 고종의 왕명으로 공포됐다. 신령군에게 ‘밤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령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에게 빌붙으려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관대작과 건달 그리고 부인들까지 별의별 사람이 다 북묘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유인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한양에서 건달 생활을 하던 중 신령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신령군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유인이라는 사람은 귀신을 능히 부리며 풍우도 능히 일으킨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무녀에게 미혹돼 국고 탕진
호기심이 발동한 신령군은 이유인을 초대해 정말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 했다. 그러자 이유인은 “그것은 쉬운 일이나 놀라실까 두려우니 며칠간 목욕재계하신 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이 건달들을 불러 준비를 마친 이유인은 약속한 날 한밤중에 신령군을 데리고 북악산 깊은 곳으로 갔다. 이유인은 “내가 있으니 두려워 마시오”라고 말한 후 머리동이를 휘두르며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은 현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몸 전체가 청남색이고 키가 10척이나 되는 귀신이 나타났다. 뒤이어 ‘남방적제장군’을 부르니 입에서 붉은 피를 내뿜는 시뻘건 귀신이 나타나 입을 쩍 벌렸다. 혼비백산한 신령군은 귀신들을 쫓아버리라 소리쳤다. 이유인의 명령에 귀신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 귀신들은 건달들이 변장한 것인데 신령군은 진짜 귀신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유인을 자신보다 더 영험한 무당이라 생각한 신령군은 그를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명성왕후에게 뛰어난 인재이자 충성심 높은 인물이라고 추천했다. 1887년 10월 14일 이유인은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법부대신 등 고관대작을 섭렵했다.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황후를 미혹시켜 금강산 1만 2천 봉에 굿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쳐 총 1만2천 석과 12만 냥이 허비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신령이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다. 그 와중에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뿐만 아니라 1895년에 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황후의 진정한 수호신령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서구의 근대문명과 백성들의 충성심이었다. 황후가 살기 위해서는 또 고종과 조선이 살기 위해서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양해야 했다.
그러나 황후는 그보다는 신령군에게 매달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 이유를 <개벽> 제79호에 실린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자기의 살 길과 걸어갈 길을 오직 운명에만 맡겨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이라 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도술(明道術)’을 제시한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밝히 알아 미혹되지 않는 것, 그것이 ‘명도술’이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명도술’이 좋은 말임을 모르랴! 그러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인간이라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쉬 미혹되는 인간군상을 통해 ‘명도술’은 좋은 말을 넘어 어렵고도 두려운 말임을 절감해본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4. 태조 이성계, 사리(舍利) 수집에 몰두하다
조선왕조 창업 직전, 아내 강씨와 함께 심취… 태종 대에 들어 명에 보내지는 등 모두 사라져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는 사리신앙에 심취해 있었다.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이성계를 그의 5남인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왼쪽)과 2남인 정종 이방과(태민영 분)가 보살피는 장면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고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왕조가 개창됐다. 태조 3년(1394) 10월에는 한양 천도가 단행돼 한양 조선이 개시됐다. 천도 당시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등은 터만 결정된 상태라 태조는 임시 거처에서 생활했다.
궁궐과 종묘 공사는 태조 4년(1395) 9월에 마무리 됐고, 한 달 후에는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이 설치됐다. 당시 종묘 이안은 개경에 있던 종묘 신주를 한양 종묘로 옮겨 모시는 역사적인 행사였다.
10월 5일 태조는 면류관 차림으로 종묘제사를 거행했다. 유교의례에 맞춰 거창하고 웅장하게 치러진 이 행사는 신왕조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의식이었다. 새로 건설된 궁궐 역시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10월 27일 정도전은 궁궐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어 올리고, 그 외 각 건물과 문의 이름도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연침을 강녕전, 동소침을 연생전, 서소침을 경성전, 보평청을 사정전, 정전을 근정전, 정전의 문을 근정문 등으로 지었는데 이런 이름들은 모두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상징했다. 이처럼 종묘제사, 궁궐명명 등이 모두 유교식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태조가 신왕조 조선을 유교 국가로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막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신왕조 조선이 과연 유교국가인지, 또 태조는 과연 유교국가 왕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태조의 사리 수집과 사리탑 건축이었다.
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시점은 4년(1395) 12월 28일이었는데, 당시 한양은 도성 축조로 분주했다. 태조는 ‘씨 뿌릴 때가 되면 모두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적어도 다음해 3월 이전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과연 태조는 다음해 2월 28일 일꾼을 모두 돌려보냄으로써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한양건설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한양건설이 일단락되기 직전에 태조는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 개성 송림사에 보관돼 있던 불두골(佛頭骨)·불아(佛牙)·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菩提樹葉經) 등을 궁궐로 가져오라 명령했던 것이다. 왜 이 명령이 기이한가?
태조가 가져오게 한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본래 통도사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안전 보관을 위해 개성 송림사로 옮겨왔다. 이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불교 보물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졌는데, 태조는 바로 그것들을 수집하려 했던 것이다. 유교국가를 표방하는 창업군주가 다른 것도 아닌 불교 보물을 공개 수집하려 한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분신이자 영물로 알려져
이성계의 어진(御眞).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신사리를 부처님의 분신이자 신통한 영물로 신앙했다. 신라 이래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앙한 진신사리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진신사리였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때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흙으로 빚은 문수보살상을 만났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율사는 문득 잠이 들었다. 꿈에서 문수보살이 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범어로 된 노래를 불렀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이상한 스님이 나타나 “너의 나라 왕은 인도 크샤트리아 종족의 왕이고, 미리 부처님의 예언을 받았기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동쪽 오랑캐의 종족과는 같지가 않도다. 그러나 동쪽 오랑캐는 산천이 험악하고 사람 품성이 거칠어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으므로, 간혹 천신이 화를 내리는도다. 하지만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 나라 안에 머문다면 이로써 군신이 평안하고 만민이 화평하리라”는 뜻이라고 해석해줬다. 율사는 그 이상한 스님이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율사는 왜 피눈물을 흘렸을까?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수보살의 노래에 의하면 신라에서 군신이 불화하고 만민이 불행한 이유는 왕 즉, 선덕여왕은 훌륭한데 비해 사람들은 거칠고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극에서 벗어나려면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 나라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스님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율사는 신라의 비극이 계속되리라는 절망감에 피눈물을 흘렸다고 짐작된다. 그렇게 절망 상태로 오대산 태화지(太和池)를 지나던 율사에게 문득 신인(神人)이 나타나 “어째서 이곳에 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율사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신인이 율사에게 예배하고 묻기를 “당신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율사는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이어 있고 남으로 왜인에 인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략하고 왜구가 날뛰니 이것이 백성의 환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신인은 신라의 왕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하며 율사에게 속히 귀국하라고 했다.
“자기가 귀국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는 율사의 항변에 신인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열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나라가 태평해지리라고 예언했다. 아울러 자신을 위해 경주 남쪽에 절을 세우고 복을 빌어달라며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율사가 태화지에서 만난 신인은 사실 태화지의 용이었다. 그 용은 절망에 빠진 율사에게 신라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자장율사 본인과 더불어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라고 알려줬던 것이다. 자장율사 본인은 문수보살이 예언한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었고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은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는 신라 사람들을 제압할 불교 보물이었다. 황룡사 9층탑과 경주 남쪽의 절은 바로 이 같은 불교 보물을 모시기 위한 사리탑으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귀국 후 율사는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를 세우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나눠 모셨다. 이 중에서 황룡사 9층탑은 이웃나라를 제압하고 나라의 태평을 가져오기 위한 국가적 목적을 띠었다. 반면 울산 태화사는 태화지의 용을 위한 개인적 목적을 지녔다.
고려 말 사리신앙의 중심지였던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사리탑
태화사라는 절 이름 자체가 태화지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양산 통도사는 이웃나라를 제압하고 나라의 태평을 가져오기 위한 국가적 목적, 태화지의 용을 위한 개인적 목적에 더하여 이 둘을 포괄하려는 자장율사의 사명을 위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양산 통도사가 지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장율사의 사후 유품뿐만 아니라 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에 더하여 불두·불아·가사·불경 등이 모두 양산 통도사에 모셔졌다.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불두·불아·진신사리 등은 황룡사 9층탑 같은 탑이 아니라 부도 형태의 계단(戒壇)에 모셔졌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가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를 세워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모신 후부터 운수 대통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록은 자장율사 귀국을 기점으로 신라에 사리신앙이 크게 일어났으며 사리신앙의 중심지는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황룡사 9층탑은 몽고의 침입 때 소실됐고, 울산 태화사는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크게 훼손됐다. 반면 양산 통도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온전했다. 이에 따라 고려 말 사리신앙의 중심지는 단연 양산 통도사였다.
고려 말에 양산 통도사의 사리신앙이 왕실에서도 얼마나 독실했는지는 공민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361년(공민왕 10) 겨울에 홍건적이 대거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파천했다. 다음해 1월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 등의 활약으로 개경에 있던 홍건적이 격멸되자 공민왕은 안동을 떠나 개경으로 향했다. 상주를 지나 속리산을 지나던 공민왕은 속리사(俗離寺)에 들렀다. 통도사에서 옮겨온 불골(佛骨) 즉 불두와 불아 그리고 진신사리·가사 등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록이 <고려사>에 실린 것을 보면, 당시까지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 통도사 계단에 보관 돼왔다는 믿음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공민왕이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양산 통도사가 아닌 속리산 속리사에서 친견했다는 것은 이 불교 보물들이 이미 속리사에 옮겨와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고려 말의 왜구 창궐 때문일 듯하다. 이후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지만 속리사에 모셔졌던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 또다시 개성의 송림사로 옮겨졌는데 공민왕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홍건적과 왜구가 날뛰는 당시의 상황은 자장율사 당시 신라가 남북에서 침략당하던 상황과 유사했다. 그런데 신라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의 영험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 3국을 통일했다.
그렇다면 공민왕 역시 부처님 사리의 영험한 힘에 의지해 홍건적과 왜구를 극복하려 염원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염원은 공민왕 개인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증거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예컨대 조선 창업 이전의 이성계에게서도 사리신앙 흔적이 보인다.
1932년 금강산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월출봉의 한 석함(石函) 안에서 여러 종류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사리장엄구는 말 그대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장엄구인데 백자사발, 청동그릇, 라마탑형 사리기, 팔각탑형 사리기 등 여러 가지였다. 이들 사리장엄구 중에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라는 명문이 있어서 원래는 비로봉에 모셔졌다가 후에 월출봉으로 옮겨졌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사리장엄구는 1390년 봄 그리고 1391년 봄과 여름에 제작됐다. 이때는 조선이 건국되기 1~2년 전이었다. 핵심 발원자는 당시의 실력자로서 시중의 자리에 있던 이성계 그리고 그의 부인 강씨였다. 이들 사리장엄구는 종류가 다양해 여기 들어간 사리는 몇 십 과는 됐으리라 추정된다.
사리 그리고 사리장엄구에 필요한 비용은 핵심 발원자인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중심이 돼 마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1390년과 1391년 즈음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사리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리 수집에도 몰두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의 명문 중에는 “석가모니께서 입멸하신 때로부터 2400여 년이 지난 대명(大明) 홍무 24년(1391) 신미 5월 모일에, 월암(月菴) 스님이 지금의 시중 이성계 등과 함께 서원(誓願)을 내어 (사리를)금강산에 묻어뒀다가, 미륵께서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려 사람들에게 받들어 보임으로써 진정한 교화를 돕고 불도(佛道)를 함께 이루고자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이성계 등이 사리를 금강산 비로봉에 모신 이유는 미륵이 출현했을 때 공양물로 바치기 위해서였다.
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오실 미래불로 먼 훗날 인간세계로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3회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믿어지는 부처님이었다.
한국사에서 미륵불은 현실세계의 절망과 비극이 높을 때 유행하곤 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로 고통받던 우리조상들 역시 미륵불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미륵 신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미륵이 오시는 그때 구원받기 위해서는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설법에 참여할 때는 자신들의 정성을 표시할 만한 공양물 예컨대 향·옥·사리 등등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문제는 미륵이 언제 오실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약이 없기에 준비한 공양물을 오래도록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금강산 비로봉처럼 신비롭고 외진 곳이 안전한 보관처로 선호되곤 했다.
이성계 등이 발원한 사리장엄구 역시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로 준비됐고, 또 안전하게 오래 보관하기 위해 비로봉에 봉안됐던 것이다. 특이한 점은 사리장엄구의 발원자로 월암 스님, 시중 이성계 이외에 이성계의 부인 강씨, 낙랑군 부인 김씨,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흥해군 부인 배씨 등 여성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려 말 여성들이 사리신앙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태조, 세상 떠난 강씨 위해 사리탑을 짓는데
그런데 홍무 24년(1391) 5월 당시에는 이성계의 향처(鄕妻) 한씨도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한씨는 발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이성계 등이 발원한 사리장엄구가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이라면, 명단에서 빠진 향처 한씨는 참여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쁘게 해석하면 이성계와 강씨 둘만 구원받아 불국정토로 들어가고 향처 한씨와는 같이 가지 않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이성계 본인 보다는 경처(京妻) 강씨가 더 강했을 듯하다. 이는 조선창업 전에 이성계의 사랑을 경처 강씨가 독점했으며, 나아가 이성계의 사리신앙 활동 역시 경처 강씨가 좌우했고, 사리수집 활동 역시 강씨가 주도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이성계의 사리신앙이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과 연관되었다면 이성계는 가능한 더 영험한 사리를 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이용해 영험하다고 소문난 사리들을 열성적으로 수집했을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을 건국한 후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까지 확대해 수집했던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7년(1407)에 국왕이 전국에서 영험하다 소문난 사리를 모두 수집했는데 그 결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 충청도에서 45과 등 총 254과였다. 그런데 당시 상왕으로 있던 이성계 개인이 소장한 사리가 300여 과가 넘었다. 이는 그동안 이성계가 강씨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사리 수집을 한 결과일 것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열성적으로 사리를 수집하던 왕비 강씨는 1396년(태조 5)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가장 영험하다고 소문난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수집한 지 반년 만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비 강씨를 위해 한양 도성 안에 무덤을 만들었고 절도 지었다. 정릉과 흥천사가 그것이었다. 나아가 흥천사에 사리탑을 조성하기 위해 1398년(태조 7) 4월 흥천사에 행차해 사리탑의 터를 살폈고 5월에는 흥천사 북쪽에 3층의 사리탑을 세우라 명령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시작된 흥천사 사리탑은 1년 반 정도의 공사를 거쳐 정종 1년(1399) 10월에 완공됐다.
흥천사 사리탑은 흔히 볼 수 있는 석탑과는 달리 3층의 거대한 목탑이었다. 그것도 직접 안으로 들어가 예불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이어서 사리전이라고도 했다. 사리전 안에는 3층의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모셨는데, 바로 태조가 수집한 사리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진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었다.
현재 흥천사 사리전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하건대 전체적인 분위기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에 비견됐을 듯하다. 안에 모신 사리 역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부처님의 사리였다. 이에 따라 흥천사 사리전은 조선건국 직후 한양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종교성지로서 관광객과 불교신도들로 북적대는 명소가 됐다.
태조 이성계 역시 자주 흥천사 사리전에 행차해 예불했다. 태조가 상왕으로 있던 정종 2년(1400) 4월에는 상왕 자신이 예불하던 중 사리 4매가 분신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 흥천사 사리전은 태조가 세웠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리분신 기적까지 일어나는 영험한 도량이기도 했다. 훗날 세조도 사리분신으로 얻은 102개의 사리를 이곳에 모시고 그 기념으로 흥천사 종을 만들기도 했다.
흥천사의 권위를 추락시킨 태종
개성에 있는 고려 공민왕릉 전경
그러나 태조의 사리신앙은 바로 아들 태종과 손자 세종에 의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1398년 8월,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 이성계를 왕위에서 밀어냈다. 태조가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수집한 지 2년 반 만의 일이었고, 흥천사 사리전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이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흥천사 사리전에서 기적 실험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사리분신이라고 하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기적인지 아니면 사기행위인지를 실험했던 것이다.
태종은 동왕 15년(1415) 7월에 100명의 스님을 모아 흥천사 사리전에서 사리분신을 기도하게 했다. 그 정근법석에는 당대의 고승 설오를 비롯하여 유명한 스님들도 참여했다. 불교계 입장에서 본다면 최고의 영험도량에 최고의 스님들이 모인 정근법석이었다. 만약 사리분신 기적이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면 불교계에 막대한 타격이 예상됐다. 정근법석은 호조참의 김계란과 환관 노희봉이 관장했다. 법석이 시작된 지 하루 만에 사리분신 기적이 일어났다며 환관 노희봉이 분신사리 1매를 바쳤다.
실록에 의하면 정근법석을 시작한 다음날 아침에 푸른 보자기 위에 분가루같이 희고 작은 물건 네 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스님들은 “세 개는 서기(瑞氣)이고 조금 큰 것 한 개는 사리”라고 했다. 사리분신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이에 김계란은 사리 1개를 향수로 씻은 후 서기 3개와 함께 그릇에 담고 보자기로 싸서 노희봉에게 줘 태종에게 올리도록 했다. 태종은 그것이 진짜 사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늘을 먹지 않는 사람을 시켜 손으로 비벼보게 했다. 만약 진짜 사리라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가루로 부서졌다.
태종은 김계란과 노희봉을 불렀다. 먼저 김계란에게 “어찌하여 나를 속였느냐?”라고 물었다. 김계란은 “그때 여러 스님과 직접 보고 바쳤습니다. 분명 중간에 잃어버린 것일 것입니다. 또 사리라고 하는 것은 신통한 물건이어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 무상합니다. 스님들이 모두 말하기를 불결하면 곧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속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태종은 다시 노희봉에게 “네가 처음에 가지고 올때 분명 사리를 보았느냐?”라고 물었다. 노희봉은 “김계란과 스님들이 모두 분신사리라 말했고, 신도 또한 가늘고 작은 흰 물건을 봤습니다. 그것을 사리라 생각하고 받들어 올렸는데, 지금 내어 보니 과연 흰 가루였습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김계란에게 “네말이 정말이냐?” 하고 묻자 그는 “정말입니다. 감히 속이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김계란의 주장대로라면 어떤 경우이든지 상관없이 사리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태종이 본 것이 사리가 아니라 그냥 가루였다면 그것은 중간에 누군가가 바꿔치기를 했거나 아니면 불결하기 때문에 사리 스스로가 숨어버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영험함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리분신 기적을 믿지 않는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불법의 허실을 시험하고자 하여 스님들을 모아 기도하게 하였다. 또 사리를 가져왔다는 말을 듣고 근시(近侍)하는 어린 환관으로 하여금 깨끗한 곳에서 보게 하였다. 만약 그것이 정말 사리였다면 무슨 불결한 것이 있다고 도로 숨었겠는가? 너희들이 처음에 다른 물건을 가지고 와서 나를 속인 것이다. 속인 것이 드러나고 변명할 말이 궁색해지자 도리어 사리가 숨었다고 하니 정말로 속이는 것이다.” [<태종실록> 권 30, 15년 7월 23일]
허망한 결말은 제왕학이 허약했던 탓
사기당했다고 생각한 태종은 김계란과 노희봉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국문까지 하려고 했다. 임금을 속인 죄라면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대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김계란과 노희봉뿐만 아니라 정근법석에 참여한 100명의 스님도 무사할 리 없었다. 나아가 불교계 전체가 말할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결국 국문까지는 하지 않고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불교계는 타격을 면할 수 없었다.
태종의 실험으로 흥천사 사리전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설상가상 세종은 흥천사 사리전에 모셨던 불두·불아·진시사리 등을 모두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버렸다. 태조가 수집했던 300여 과의 사리 역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졌다. 그나마 껍데기만 남은 흥천사 사리전은 중종 때 유생들의 방화로 아예 없어졌다. 태조 이성계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사리는 이렇게 흔적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창업군주 태조의 사리 수집은 왜 허망한 결말로 끝났을까? 그 이유를 유학자들은 제왕학의 기본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교 제왕학은 요순이 전했다는 16자 비결에 압축돼 있다.
‘인심유위(人心唯危) 도심유미(道心唯微) 유정유일(唯精唯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심유위’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위태위태하다는 뜻이다. ‘도심유미’는 감정을 넘어 ‘도의 마음’, 즉 ‘내 안의 이성’을 찾으려 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위태한 마음을 잘 살펴서 위태함에 빠지지 말고, 잘 찾아지지 않는 내 안의 이성을 찾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핵심이다. <대학연의>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에서는 바로 이런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5. 인목대비 김씨, 재물을 탐하다
원래 친정은 큰 부자 아니었으나 입궁 후 재산 크게 불려
… 지도자는 인정·이익에 매몰되지 않는 ‘심치체(審治體)’ 지켜야
광해군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쳤지만 의모(義母)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도덕적으로 큰 결함을 남겼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배우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인목대비 김씨는 19세 되던 1602년(선조 35) 7월 13일 선조와 혼례식을 치르고 입궁했다. 당시 관행대로 친정에서 보내준 유모와 몸종이 인목대비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 아울러 친정 부모로부터 자기 몫의 재산도 상속받았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큰 부자가 아니었기에 상속 재산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입궁 후 큰 재산을 확보했다.
조선후기 왕비는 입궁 후 대략 1천 결(結) 정도의 왕실 토지를 받았다. 1결은 산출된 곡식이 지게로 약 100짐 정도 되는 규모의 토지로 평수로는 대략 5천 평, 쌀 수확량으로는 300말 정도로 추산된다. 따라서 1천 결이면 평수로 약 500만 평, 쌀 수확량으로 30만 말 정도 된다. 다만 왕비는 토지 소유권을 받는 것은 아니고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받았다.
<속대전>에 의하면 왕자나 왕녀 등에게 하사하는 궁방전(宮房田)에서 걷는 세금은 1결 당 쌀 23말을 넘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준한다면 1천 결의 토지에서 거둘 수 있는 세금은 최대 2만3천 말에 달한다. 인목대비는 입궁 후 아무리 낮춰 잡아도 매년 쌀 1천여 가마 이상을 확보한 재력가가 됐던 것이다.
인목대비의 재산은 서제소(書題所)에서 관리했는데 그곳의 최고 책임자는 차지(次知) 또는 장무(掌務)라고 했다. 인목대비가 궁 밖에 거주했다면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거처에 마련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궁 안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왕비 또는 대비의 서제소는 대체로 친정에 마련됐다. 인목대비 역시 서제소를 친정에 마련했다.
조선시대 왕비 또는 대비의 친정집은 본방(本房)·본궁(本宮)·신본궁(新本宮) 등으로 불렸다. 당시 인목대비의 친정이 명례동에 있었기에 그곳은 명례 본궁 또는 명례 신본궁 등으로 불렸다.
인목대비는 오윤남이라는 사람을 명례 본궁의 서제소 차지로 임명해 재산을 관리하게 했다. 따라서 오윤남이 차지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대비의 재산은 친정아버지 김제남 그리고 본궁차지 오윤남을 통해 관리됐다.
인목대비가 장악한 재산은 자녀를 출산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대비는 1603년(선조 36) 5월 19일 정명공주를 출산했고,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3월 6일에는 영창대군을 출산했다. 정명공주는 태어난 다음해 즉, 2세 되던 해에 공주에 책봉됐다.
조선시대 공주를 책봉하는 연령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관행적으로는 8세 전후였다. 그럼에도 정명공주가 2세 때 책봉된 것은 선조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공주에 책봉되면 대군과 마찬가지로 850결 규모의 궁방전을 받았다. 정명공주의 궁방전 역시 공주방의 서제소를 통해 관리됐는데 공주의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친정에 마련됐다. 이는 정명공주의 궁방전은 사실상 인목대비가 관리했음을 의미한다.
제안대군의 재산까지 물려받은 영창대군
인목대비가 병 치료에 관해 쓴 서한.
선조는 1608년(선조 41) 2월 1일 승하했는데 당시 영창대군은 3세에 불과한 터라 대군에 책봉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의 지극한 사랑 덕에 책봉되기 이전부터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됐다. 선조는 영창대군이 태어난 지 3개월여 만인 1606년(선조 39) 6월 15일 경중의 노비 30명, 외방의 노비 170명 합 200명과 전답 100여 결을 하사했다. 이어 다음해 3월 15일에는 경중의 노비 50명, 외방의 노비 200명 합 250명과 전답 200여 결을 하사했다. 이 재산은 소유권이 영창대군에 귀속된 명실상부한 재산이었다. 2세의 영창대군은 이미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을 확보한 재산가였다. 이 재산 역시 사실상 인목대비가 관리했다.
게다가 선조는 영창대군을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함으로써 영창대군을 상상을 뛰어넘는 재산가로 만들었다. 예종의 큰 아들인 제안대군은 평원대군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본인의 재산에 더해 평안대군의 재산까지 확보했다.
제안대군의 신도비명에 의하면 대군은 살아 있었을 때 “나는 평원대군의 후사(後嗣)가 됐으니 나 또한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성종·연산군·중종까지 4대에 걸쳐 60년 인생을 산 제안대군은 역대의 국왕으로부터 수많은 재산을 받음으로써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제안대군은 1525년(중종 20)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제안대군의 재산은 주인 없는 상태가 됐다. 원래 조선전기에는 대군의 생활비 명목으로 직전(職田)·월급·장리(長利)에 쓸 자본금 등을 지급했다. 전체적인 규모는 조선후기 대군에게 지급하는 850결과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직전과 월급, 장리 자본금 등에서 나오는 수입은 생활비를 쓰고도 많이 남으므로 재산 확대에 투자됐다. 이렇게 형성된 대군의 재산 중 직전을 제외한 부분은 사후에도 자녀에게 상속됐다. 직전 중에서 3분의 2 정도는 국가에 반납되고 나머지 3분의 1정도는 제사비용으로 사용되다가 4대가 넘으면 그것도 국가에 반납하게 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아들이 있는 경우였다.
문제는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 이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를 잇지 못하거나 혼인 전에 죽은 경우에는 국가에서 재산을 환수하고 제사 역시 국가가 맡아 치러줬다. 따라서 제안대군이 아들 없이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은 국가로 환수돼야 했지만 부인이 살아 있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제안대군의 부인은 남편 사후 4년이 지난 1529년(중종 24)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제안대군의 재산과 제사를 국가에서 환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나는 평원대군의 후사가 됐으니 나 또한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고 했던 제안대군의 말 때문에 환수되지 않았다. 이후 제안대군의 방은 수진궁(壽進宮)으로 불렸는데 재산관리는 수진궁에 설치된 서제소에서 맡았다.
수진궁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광해군일기>에 “제안대군 방에 재산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후기 수진궁에 1천 결의 토지가 소속됐던 사실을 생각하면 수진궁에 적어도 전답 1천 결 이상, 노비 수백 명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거대한 재산을 선조는 영창대군에게 줬던 것이다.
광해군의 불안감은 고조돼가고
영창대군이 형인 광해군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경기 강화군 살창리
영창대군은 6세 되던 광해군 3년(1611) 12월 26일 대군으로 봉작됐다. 당연히 대군에게 지급되는 850결 내외의 토지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영창대군은 광해군 3년 12월 당시 6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노비 450명, 전답 500여 결에 더해 제안대군의 유산 그리고 대군 궁방전까지 장악한 거대한 재산가였다. 이 재산 역시 대군방의 서제소를 통해 관리됐는데 그 서제소는 인목대비의 친정집에 마련됐다. 이 또한 영창대군의 재산을 관리한 사람은 사실상 인목대비 였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목대비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정명공주의 재산, 영창대군의 재산 그리고 수진궁의 재산 전부를 친정아버지 김제남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다. 비록 김제남 본인은 큰 재산가가 아니었지만 인목대비로부터 재산관리를 위임받으면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재산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그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노비 1천 명 이상, 전답 4천 결 이상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재산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매년 늘어나는 재산도 무시무시했다.
이런 상황이므로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재산을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했을 것은 쉬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재산이 지나치게 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영창대군의 재산이 너무 늘지 않도록 주의했어야 했다.
<태천집(苔泉集)>에 의하면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영창대군에게 창진(瘡疹)이 생기자 서경주가 김제남에게 편지를 보내 “크게 역병을 앓는 아이에게 아무혈에 침을 놓으면 죽지 않고 소경이 된다고 하니 반드시 그 법에 따라 침을 놓으십시오”라고 권했다 한다.
그때 김제남이 웃으면서 “나는 서경주를 지혜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구나. 죄도 없는 대군을 어찌 소경으로 만든단 말인가?”라며 무시했다 한다. 이는 서경주가 당시 영창대군 때문에 불안해 하는 광해군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음에 비해 김제남과 인목대비는 그렇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냥 무시했음을 암시한다.
설상가상으로 인목대비와 김제남은 영창대군을 위해 재산을 크게 늘렸다. 그것이 영창대군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실록에는 “인목대비는 재산을 모두 김제남에게 부탁해 영창대군을 위해 관리하게 했는데 김제남은 사양하지 않고 도리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이자를 불렸으며 집을 짓고 전원을 넓혀 자신의 몸을 살찌게 했다”고 실려 있다. 당연히 영창대군의 재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광해군의 불안감도 커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선조가 승하한 1608년 초까지만 해도 인목대비전(殿)의 내인들에게 매우 잘했는데, 3년 후인 1611년(광해군 3)부터 조금씩 냉랭하게 대하더니 나중에는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611년 10월 광해군의 세자가 혼인했는데 뒤이어 12월에 영창대군이 대군에 책봉되면서 세자와 대군이 본격적으로 대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세자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비록이 궁전에 열 명의 대군이 있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너와 조카지간이 아니냐? 예전에 세조께서는 단종이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렵구나. 내 반드시 영창대군을 없애고 너를 편안하게 살게 하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의 측근 궁녀인 김개시는 “영창대군의 세간이나 수진궁의 물건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야”라고 말했다 한다. 이런 말은 광해군과 측근들이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뿐만 아니라 영창대군의 막대한 재산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광해군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려면 영창대군이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이 돼야 했다. 서경주가 영창대군을 소경으로 만들자고 한 의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 살인강도사건이 역모죄로 둔갑
만약 인목대비와 김제남이 차마 영창대군을 소경으로 만들 수 없었다면 재산이라도 없애야 했다. 예컨대 광해군의 세자가 혼인할 때 영창대군의 재산을 선물 명목으로 모두 헌납하고 대군을 거지같은 왕자로 만들었다면 광해군의 불안감은 크게 해소됐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와 김제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재산을 불렸다.
인목대비와 김제남의 입장에서는 어린 영창대군이 무슨 죄가 있다고 소경을 만들거나 거지로 만들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듯하다. 게다가 영창대군의 재산은 불법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모두 정당한 절차로 얻은 것이었다. 광해군이 제대로 된 왕이라면 당연히 인목대비에게 효도해야 하고 또 영창대군과 우애로운 형제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기대하고 또 그렇게 주장했다.
이런 기대와 주장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은 광해군의 입장과 불안감을 전혀 헤아리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일방적인 기대와 주장 그리고 광해군의 일방적인 불안감은 화해되지 못한 채 비극으로 치달았다.
광해군 5년(1613) 3월 어느 날, 거금을 지닌 행상인이 조령에서 은자 수백 냥을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살인강도들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여 증거를 없앴다고 생각했지만 실수를 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춘상이라는 사람이 몰래 살인강도들의 뒤를 밟아 은신처를 알아낸 후 포도청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현장을 급습한 포졸들은 혐의자 몇 명을 체포했다. 그중에 덕남이라는 노비가 있었다. 고문이 두려웠던 그는 매를 맞기 전 아는 대로 자백했다. 그에 따르면 살인강도는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으로 그들은 모두 명문대가의 서자였다. 덕남의 진술에 따라 4월 25일 박응서가 체포됐다. 그는 당일로 “저희들은 천한 도적이 아니라 은자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했습니다”는 취지의 고변서를 올렸다. 이 고변서로 박응서는 단순 살인강도에서 모반대역 죄인으로 돌변했다.
그날 저녁 광해군은 박응서를 직접 조사했다. 박응서는 자신을 비롯한 서양갑 등이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어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서양갑을 우두머리로 해 장차 군사 300여 명을 모아 대궐을 습격해 옥새를 탈취한 후 곧바로 대비전에 나가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후 서양갑이 영의정이 되는 등 서자들이 권력을 잡으려 음모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역모 주모자는 단연 서양갑이었다.
4월 28일 체포된 서양갑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는 서양갑과 박응서의 대질심문이 있었다. 실록에 의하면 이때 앞뒤 말이 어긋난 사람은 서양갑이 아니라 박응서였다고 하는데 이는 박응서의 고변이 무고라는 의미였다.
만약 그때 광해군이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사건은 무고로 처리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됐다면 박응서는 무고죄로 사형되고 서양갑·인목대비·영창대군 등은 무혐의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광해군의 신뢰가 있어야 했다. 불행히도 광해군에게는 신뢰가 없었다. 광해군에게 의심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게 재산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했다.
대질심문 이후 며칠간 계속된 모진 고문에도 서양갑은 역모 사실이 전혀 없다며 버텼다. 그러자 광해군은 그의 생모·친형·친누나 등까지 체포하게 했다. 그의 눈앞에서 생모와 친형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려는 심산이었다.
‘덫’이 돼버린 서양갑의 ‘허위자백’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의 묘.
5월 2일 서양갑의 생모 사경(思敬)이 체포됐다. “만약 바른대로 자백하면 네 어미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광해군의 회유에 서양갑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격노한 광해군이 그의 생모를 고문하게 하자 공포에 휩싸인 그녀는 “네가 역모를 도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승복할 경우 너는 죽더라도 나는 살 것이니 어째서 승복하지 않느냐?”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서양갑은 “군사부일체거늘 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승복한단 말입니까?”라고 버텼다. 대가는 참혹했다. 서양갑은 자신의 눈앞에서 생모가 모진 고문에 몸부림치는 참상을 바라봐야 했다. 3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 하루건너 5일에 또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날 그의 생모와 친형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 하지만 모진 고문에도 서양갑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5월 6일 아침 심문을 앞둔 서양갑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별일 아닌 듯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까지 했다. 이날 몇 차례 고문을 받던 그는 갑자기 자백하겠다며 박응서와의 대질을 요구했다.
서양갑은 “박응서가 자금을 얻고자 상인을 죽였다고 했지만 그 일은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박응서 등은 김 부원군(김제남)의 집에서 은화를 많이 얻은 후 격문을 붙여 소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역모를 가장 먼저 창도(唱導) 한 사람은 바로 김 부원군이며, 역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원 역시 김제남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동안 역모의 주모자를 서양갑이라 했던 박응서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서양갑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본궁차지 오윤남과 그의 처를 끌어들였다. 광해군이 그토록 불안해하던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재산관리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서양갑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실상 김제남은 물론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양갑의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인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그 불안을 증폭시키는 영창대군의 재산을 한 번에 처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 따르면 서양갑은 생모와 친형이 자신의 눈앞에서 고문을 받고 죽던 날 저녁에 “내가 앞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어 어미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고 한다. 광해군이 자신의 어미와 형을 죽였으니 자신도 광해군의 어미와 형제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서양갑은 광해군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고문하는지 눈치챘을 듯하다. 즉 광해군은 서얼들이 단독으로 역모를 도모했다고 믿지 않고 누군가 배후가 있다고 의심했음을 눈치챘던 것이다. 이런 의심의 심연(深淵)에는 물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그리고 그들의 재산이 있었다. 이를 눈치챈 서양갑은 확실한 복수를 위해 본궁차지 오윤남과 그의 처를 끌어 들였던 것이다.
서양갑은 오윤남이 자신과 박응서의 먼 친척이라 평상시 잘 알았으며, 자신이 김제남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김제남이 동작정(銅雀亭)에 머물 때 오윤남을 통해서라고 했다. 결국 서양갑은 지난 2년 동안 오윤남을 매개로 김제남의 지휘를 받아 역모를 도모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나아가 역모를 도모하게 된 동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이렇게 진술했다.
“오윤남의 처가 늘 신에게 말하기를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보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인목대비가 이 때문에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때 만약 누군가가 구해준다면 어찌 이를 우연으로만 돌리겠습니까?’라고 하고, 또 그녀가 말하기를 ‘김 부원군은 졸렬해서 제대로 생각을 밝히지도 못한 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여러 친구와 결탁하고 만에 하나라도 이 일을 성사시킨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김 부원군께서 만약 거둬 쓰시고자 한다면 사람 얻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지금 같은 때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사귀기가 매우 쉬우니 돈만 있으면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오윤남이 말하기를 ‘김 부원군은 이름만 거창하지 실제로 비축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돈을 얻고자 하면 인목대비가 개인적으로 간직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혹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인목대비의 도량은 김 부원군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광해군일기> 권66, 5년(1613) 5월 6일]
비참한 말로(末路) 면치 못한 모자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역모의 진짜 주모자는 김제남이 아니라 인목대비였다. 오윤남의 처에 따르면 김제남은 역모에 필요한 자금도 없고 배짱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제남이 역모를 도모하게 된 것은 인목대비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갑의 진술은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도 은밀해야 할 역모를 도모하는 김제남이 서양갑을 만나보지도 않고 진행했다는 진술은 신빙성이 크지 않았다. 서양갑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오직 오윤남의 말만으로 서양갑을 믿고 역모를 도모했다면 김제남은 아주 무모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양갑은 김제남이 자신들에게 역모를 사주한 사실을 박응서도 알고 있다고 했다. 이에 광해군이 “서양갑의 말이 이러한데 너는 어찌하여 대두목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는가?”라고 심문하자 박응서는 “지금 김제남과 역모를 통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바로 신을 얽어 넣으려 끄집어낸 말입니다. 오윤남은 신과 지극히 소원한 친척인데 신이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광해군은 5월 6일 당일로 김제남·오윤남과 오윤남의 처 등을 체포해 조사했다. 서양갑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중에서 결정적인 증인은 오윤남이었다. 왜냐하면 서양갑이 김제남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김제남이 동작정에 머물 때 오윤남을 통해서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윤남은 2년 전 동작정에 왕래한 일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이미 몇 년 전 본궁차지에서 쫓겨났으며 그 후로는 동작정은 물론 김제남 집에도 출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같은 오윤남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윤남이 본궁차지였을 때는 분명 김제남의 은밀한 측근이었지만 본궁차지가 아니라면 측근일 가능성이 작았다. 오윤남 이외의 증인들도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서양갑의 주장은 거짓일 확률이 훨씬 높았다.
실제로 박응서를 비롯해 김제남·오윤남 등이 모두 서양갑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이후 광해군은 영창대군방의 차지, 수진궁의 차지 등을 체포해 고문했지만 그들 역시 모두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양갑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김제남·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당연히 영창대군의 재산은 몰수돼 광해군 차지가 됐다. 인목대비 역시 후궁으로 강등돼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유폐됐다. 이것이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아들이 어머니를 유폐했다고 하는 서궁 유폐였다.
물론 서궁 유폐를 자행한 광해군의 의심과 잔인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와 함께 광해군을 의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인목대비의 처신과 재물 욕심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자신의 친아들만 귀히 여기고 이복아들은 멀리하는 것이 친모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나라의 웃어른이라면 좀 더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어야 했다.
<대학연의>에서는 지도자가 인정과 이익에 매몰되지 않을 덕목으로 ‘심치체(審治體)’를 제시한다. 의리를 깊이 살펴 인정과 이익을 넘어서는 것, 그것이 ‘심치체’이다. ‘심치체’가 잘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이자 위인임은 고금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신병주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왕조 스캔달>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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