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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Ⅳ (북한편②)

문수봉(李楨汕) 2017. 12. 15. 23:48

『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Ⅳ (북한편②)


평성 안국사 (寺)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청룡산()에 있는 조선시대 사찰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학동 봉린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503년(고구려 문자왕 12)에 지은 사찰이라 전해진다. 1419년(조선 세종 1)에 중창하고, 1654년(효종 5)과 1785년(정조 9)에 중수하였다. 옛날에는 봉린사()라고 불렀으며, 사찰 주변에서 고구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왓조각이 발견되어 창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원래는 암자 두엇을 거느리던 큰 규모의 절이었다고 하는데 현재 경내에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와 9층석탑이 남아 있다. 중앙 진입로 왼쪽의 탑 위쪽 태평루를 지나 마당 안쪽에 대웅보전이 있고 마당 서쪽에 요사채, 대웅보전 동쪽에 주필대가 있다. 전체적으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동중정형’ 가람배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대웅보전은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17.04m), 측면 4칸(13.2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으로,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불전 중 유일한 중층건물이다. 전면 5칸 중 좌우 협칸보다 중앙 3칸의 각 칸을 넓게 하고 전면에 좁은 쪽마루를 두었다. 가구는 고주를 이용한 위층 7량, 전체 9량가의 구조이다. 또한 대웅전의 공포는 두공의 2단 첨차 부분에 대각선 방향으로 보조 제궁을 교차한 것이 특징이다.

보통 대웅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불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게 일반적이지만 안국사의 대웅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불단 위에는 삼층으로 된 매우 날렵한 형태의 닫집을 설치했다. 이 닫집은 그 규모도 크고 여러 가지 조각을 다듬은 솜씨가 정교해 보인다. 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구성하였다. 내부의 공포와 공포 사이, 귀공포에서 첨차가 서로 교차하는 부위에는 ‘가릉빈가’ 조각을 장식했다. 전면 창호는 2짝씩의 꽃살창을 달고 화려한 금단청을 입혔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이 7.7m나 되는 큰 기둥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그림은 그 필치가 힘차 보인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태평루는 정면 5칸(14.25m), 측면 3칸(6.8m)의 합각지붕을 이은 단층건물이다. 가운데 칸에는 통로를 내고 어칸 좌우에 중방 높이로 마루를 깔아 누각처럼 보인다. 태평루 앞에는 9층탑이 있다. 그 조성양식이 고려 중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이 사각형 탑은 높이 6.23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차례줄임을 크게 주지 않고 옥개석의 높이를 높여 전체적으로 위로 솟은 듯 날렵하다. 당시 석탑 조성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탑이다. 주필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잠시 머물렀다 하여 지은 부속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툇마루이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문화유적의 하나인 안국사는 건물 전체에서 아름답고 우수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건물의 규모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균형미가 뛰어나서 조선 중기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안국사에서 그리 멀지 않는 절골에는 수많은 부도가 있어서 당시 이 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전면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전면

대웅전은 2층 전각으로 북한에서 현존하는 2층 형태의 절 건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정면 두공 및 헌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측면 두공 및 헌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문비



평성 안국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함님 고원 양천사(梁寺)

함경남도 고원군 영천리반룡산()에 있는 절로 753년(경덕왕 12)에 창건되었다. 당시에는 원통전 안에 소불상()이 있었고, 그 앞에 만세루와 서쪽에 극락전이 있었다. 그 뒤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677년(숙종 3)에 중창하였다.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정해진 후에는 석왕사()의 말사였다. 1950년 6.25 때 파괴되었으나, 전쟁 뒤에 복구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만세루 등이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1677년에 중창된 것이다. 특히 만세루는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다락집 형태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목조 조각과 단청이 뛰어나다.


함님 고원 양천사(梁寺) 만세루 전면

 


함님 고원 양천사(梁寺) 만세루 내부


함님 고원 양천사(梁寺) 만세루 외부 두공 및 헌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원군 낙천리에 있는 반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753년(신라 경덕왕 11)에 처음 세운 것을 후에 여러 차례 재건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극락전·만세루가 남아 있다. 

대웅전은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11.6m), 측면 3칸(7.35m)으로 세운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덤벙 주초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1636년(인조 13)에 다시 세우고 1708년(숙종 34)과 1758년(영조 34)에 수리했다. 공포는 바깥 5포, 안 7포로 하면서 6가지의 공포를 다양하게 배열하여 건물 4면의 미관을 잘 조화시켰다. 정면 공포에는 봉황머리를 새겼고 모서리 기둥에는 머리를 길게 내민 용을 붙였다.

오른쪽 공포 사이 벽에는 6장면으로 된 단청 그림을 그렸다.

첫째 장면은 큰 소나무 밑에서 젊은 남자가 거문고를 타는데 그 오른쪽 하늘에는 학이 날고 있으며,

둘째 장면은 한 남자가 외금강 구룡폭포와 비슷한 폭포를 바라보고 있으며,

셋째 장면은 여러 사람이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있다.

넷째 장면은 세 사람이 층암절벽의 경치를 구경하고,

다섯째와 여섯째 장면은 백발노인을 앞에 세우고 여러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산천을 구경하는 장면을 그렸다. 정면의 액방, 공포 사이 벽에는 부처와 용, 봉황, 보상화무늬, 연꽃, 수련, 학, 범, 귀면, 구름 등이 그려져 있다.

불단 위에는 아()자형의 물림닫집이 매달려 있다. 내부 천장은 소란천장과 빗천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빗천장의 중간에는 연꽃봉오리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좌우 측면의 빗천장에는 복숭아를 쟁반에 받쳐든 두 선인()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악사와 무인()들을 그린 무락도()의 필치가 매우 힘있고 생동감 넘쳐 보인다.

정면 가운데 칸의 문짝 4개에는 문살 대신 꽃무늬를 새겼다. 단청은 아름다운 비단무늬를 표현하여, 크고 작은 원형·삼각형·육각형 등 기하학적 무늬들을 연속 반복한 금단청으로 마감했다.

만세루는 정면 5칸(19.4m), 측면 3칸(10.5m)으로 새긴 7량 구조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1729년(영조 5)에 세웠다. 경사진 지형의 특성에 따라 전면은 중층이고, 후면은 단층으로 처리되었다. 흘림기둥 위에 4익공 외목도리식 공포를 얹었다.

기둥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밑은 돌로, 위는 나무로 만들었다. 화려한 모로단청을 하고 액방, 도리, 대들보를 비롯한 여러 곳에 용, 호랑이, 사자, 보상화무늬, 매화, 연꽃과 수련꽃, 소나무, 학, 매, 귀면 등의 단청 그림을 가득 그렸다. 천장에는 구름무늬, 폭포, 사슴 등이 그려져 있다. 현재 북한 지역에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깊은 산속에 있어 주변 풍광이 좋고 앞쪽으로 용흥강과 덕지강이 마치 백포()처럼 펼쳐져 장관이다. 수준 높은 건축 예술을 보여주는 한민족의 문화유산으로서 특히 사찰 단청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사찰이다. 《조선고적도보()》에 1920년대 말에 촬영된 사진자료가 남아 있다.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梁寺 大雄殿) 정면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梁寺 大雄殿) 문비 일부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梁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함님 고원 양천사 대웅전 (梁寺 大雄殿) 내부 두공 및 천장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높은 장대석 기단 위에 자연 초석이 덤벙 주초 방식으로 놓였다.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으로 세워졌다. 주간의 너비가 주고보다 훨씬 넓어 주심포계 건축과 같이 안정된 느낌을 준다. 공포장식으로 보아 조선 중,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 유점사 (寺)


금강산 유점사 (寺) 전경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에 있었던 절로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다. 사지()에 따르면 원래 이 절은 서기 4년(유리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53불()의 연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민지()의 기문()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인도 사위성()의 사람들은 생전에 부처님을 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금을 모아 53구의 불상을 조성한 뒤 이를 배에 태우고 바다에 띄우면서 유연국토()에 갈 것을 발원하였다.

이 배는 신룡()에 의하여 바다를 항해하다가 월지국()에 닿았는데, 왕이 이 불상들을 공경하여 전당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전각이 타버렸다. 왕이 다시 전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수고하지 말라.” 하고 만류하므로 이 53불을 다시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이 배는 90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다니다가 신라의 안창현() 포구에 닿았다. 현관() 노춘(椿)이 나가 보니 불상들은 없고 바닷가의 나뭇잎이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이에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는데, 흰 개가 나타나서 앞장을 서서 따라갔더니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못가에 53불이 있었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 찾아가서 그 땅에 절을 짓고 유점사라 하였다. 광복 전까지 53불 중 3불이 없어지고 50불이 남아 있었다.

창건 이후 1168년(의종 22)에는 자순()과 혜쌍()이 왕실의 시주로 당우 500여 칸을 중건하였고, 1213년(강종 2)에는 강종이 백은() 1,000냥을 대선사 익장()에게 보내어 중수하도록 하였으며, 1284년(충렬왕 10)에는 행전()이 시주를 얻어서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1295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1408년(태종 8)에는 효령 대군이 태종에게 아뢰어 백금 2만 냥을 얻어서 건물 3,000칸을 중건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신의()·성료() 등이 중건하였으며, 1595년 (선조 28) 유정()이 인목대비가 하사한 내탕금()으로 중건하였다.

1636년(인조 14) 화재로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백금 2,000냥으로 중창하였으며, 1759년(영조 35) 불에 타자 북한치영()의 승병대장 보감()이 와서 10년의 공사 끝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53불을 안치한 능인전(殿)을 비롯하여 수월당()·연화사()·제일선원()·반룡당()·의화당()·서래각(西) 등 6전(殿) 3당() 3루()가 있다. 이들은 1882년(고종 19)의 대화재 뒤 우은()이 중창하였고, 근대의 대선사 대운()이 중수한 것이다.

이 중 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은 연화사인데, 이곳은 만일회()를 열던 법회장소였다고 한다. 31본산 시대에 이 절은 산내·산외 말사 60개의 절을 관장하였던 금강산 제일의 가람이었다.

이 밖에 중요문화재로는 『보살계첩 』과 「보문품」이 있다. 나옹화상이 스승인 지공()에게서 받은 『보살계첩』은 가로 약 7㎝, 세로 약 10㎝ 크기의 감색 장지에 금니()로 쓴 것을 책으로 묶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이 계문의 말미에 있는 ‘지공’이라는 수결과 산스크리트 게송() 등은 모두 지공의 친필이어서 귀중한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은자 「보문품」은 왕후가 서궁(西)에 유폐당하고 영창대군이 참변을 당하였을 때 슬하에 남은 외동딸을 위해서 불보살의 보호를 받으려는 간곡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을 필사한 것이다 

금강산 유점사 (寺) 전경

외금강 은선대구역의 룡천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유점사는 금강산의 절간들 가운데서 가장 컸으며 1911년 이후에는 강원도 안에 60여 개의 말사(작은 절)를 가진 본사였었다. 9세기경에 처음 세워진 이후 12세기 중엽에는 500여간, 15세기 초에는 3,000간을 가진 큰 규모의 절간으로 확장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오다가 1882년에 모든 건물이 불탔는데 1883~1884년에 다시 크게 재건되였다.

유점사에는 중심건물인 능인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룡음루, 산영루, 련화사, 수월당, 대향각, 령산전, 십왕전, 삼성각, 호지문, 의화당, 범종각, 보타전 등 6전7각2문3루와 기타 20여 종의 부속건물들과 돌등, 9층탑, 53존불상조각, 종 등이 있었다. 유점사에는 건축예술적으로 가치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특히 능인전의 바깥 9포, 안 15포로 짜올린 두공은 우리나라 중세건물 가운데서 가장 높고 화려한 것이였다.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寺 (能仁殿)  전면


일제강점기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로, 신라 초기 남해왕 때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1408년(태종 8) 효령대군이 금 2만냥을 들여 3,000여 칸으로 중건하였다. 경내에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많아 '유점사'가 되었다고 한다.  

유점사는 외금강 효운동 계곡에 세운 금강산 4대 사찰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금강산 제일의 대찰이었다. 당시 이 절에는 우리나라 중세 건물 중에서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혔으며 53불을 안치한 능인전(殿), 수월당, 연화사, 제일선원, 반룡당(), 의화당(), 서래각(西) 등 6전 3당 3루가 있었다.

또 창건설화를 간직한 53불상, 패엽경, 나옹 혜근이 스승인 지공()으로부터 받은 «보살계첩()»과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보문품», 신라 남해왕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향로와 비취옥배, 나옹선사의 가사 장삼 등 수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절에는 까마귀가 쪼는 곳을 팠더니 샘물이 솟았다는 창건 설화가 전하는데, 이 전설을 증명하듯 실제로 유점사에는 오탁수()라는 샘물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지금은 조선 세조 때 조성된 13층 석탑과 묘향산 보현사로 옮긴 동종()이 보존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이 이곳에서 승병을 지휘하였다.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寺 (能仁殿) 외부 두공 및 헌


금강산 유점사 능인전 (寺 (能仁殿) 내부 두공 및  천정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전경


강원도 회양군 장양면 장연리금강산 장경봉()에 있었던 절.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551년(양원왕 7)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왕명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 때 비로전을 짓고 비로자나 철불()을 봉안했으며, 대장경을 절에 보관했고 오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773년(혜공왕 9)진표율사()가 중수하였고, 946년(정종 1)에 왕의 태후 신명왕후()와 황보왕후()가 각각 『금강경』과 『법화경』을 금니로 사경()해서 비로전에 봉안하였다. 970년(광종 21) 화재로 불타 버린 뒤 12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982년(성종 2) 선사 회정()이 함열현 등에서 토지 1,050결()을 보시받아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씨()는 고려인으로서, 황제와 태자를 위해 금 1,000정()과 공인들을 보내서 굉변()의 감독 아래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고 새로운 누각을 건립하게 했는데, 지극한 정성과 뛰어난 솜씨는 금강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1392년(공양왕 4)에는 홍예교()와 절의 사적비가 큰 비로 무너졌다. 1459년(세조 5) 세조가 행차하여 대웅전을 중수하게 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성종 8) 화재로 전소됨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받아 일청()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2) 다시 불타 버리자 1545년(인종 1)일청이 다시 중건하였다. 그 뒤 1708년(숙종 34)귀옥()이 무게 3,000근의 대종을 조성하였다. 1728년(영조 4)묘현()이 중창하였고, 1791년(정조 15) 순상() 윤사국()이 전() 5,000관을 내어 중수하였다.

1842년(헌종 8) 부원군 조만영()이 금 2,500관을 보시하여 새로 300여 칸을 증축하고, 밭 40여 석을 시주하였다. 1863년(철종 14) 호조판서 김병기()가 주상하여 공명첩()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재산 중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게 하였다.

김병기는 1864년에도 3,000냥을 시주해서 불상·불화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봉안하였다. 이 절은 입구에서부터 일주문()·운성문()을 거쳐 만천교()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숲 사이로 만수정()이 있고 그 안에는 ‘금강산장안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의 오른쪽으로는 대향각(), 왼쪽으로는 극락전,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곳에는 본전인 대웅전이 있다. 1945년 이전까지는 6전(殿)·7각()·1문()을 가졌으나 그 규모는 옛날에 비해 축소된 것이고, 부속 암자로 장경암()·안양암()·지장암()·영원암() 등을 가진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

문화재로는 기황후가 중창할 때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53불, 1만 5000불 등이 봉안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대법당 왼쪽의 지성전()에 봉안된 나한상은 비범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황후 당시의 것인지 그 후대의 것인지는 단정 짓기 곤란하다.

부속 암자 중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 지점에 있는데 고려 성종 때 회정이 창건한 곳이며, 이후 회도()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이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원암은 신라 때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은 곳이다.

부근의 옥초대()는 영원조사가 일심으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반듯한 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고 하여 책상바위라고 이름 붙여졌다.




금강산 장안사 (長安寺) 전경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長安寺 大雄殿) 잔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長安寺 大雄殿) 두공 및 헌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長安寺 大雄殿) 외진 천장 및 두공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長安寺 大雄殿) 내부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長安寺 大雄殿) 내부 


1951년 불타기 전까지 장안사에는 대웅보전, 사성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비로전, 어향각, 대향각, 소향각, 해광전, 극락전, 법왕루, 신선루, 만수정, 은주문, 종각, 산신각, 반야각 등 6전 7각 2루 2문과 그 밖에 10여 동의 건물들이 처마를 맞대고 장중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안사는 대웅보전과 사성전을 각각 중심축으로 한 두개 구역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에는 맨 앞에 신선문이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좌우에 각각 한채씩의 건물이 배치되여 있었다. 맨 앞에 법왕문이 있는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건물배치도 이와 비슷하였다.

절간건축에서 2개의 축을 정하고 두채의 2층건물(대웅보전, 사성전)과 두채의 다락건물(신선루, 법왕루)을 각각 남북으로 쌍 지어놓은 것은 장안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이였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2층건물인 대웅보전과 사성전은 모양과 짜임새에서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기적특징을 보여주는 훌륭한 건물이었다.

여러 건물 가운데서도 2층건물들인 대웅보전과 사성전은 모양과 짜임새에서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기적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건물이였다.

 대웅보전은 앞면 5간(2층은 3간), 옆면 3간(2층은 2간)의 건물로서 두공은 1층에서 안팎이 모두 7포, 2층에서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렸다. 밖으로는 휘여 내민 꽃가지산미를 붙이고 안으로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첨차모양으로 짜올려 간결하고 치밀한 조각솜씨를 발휘하였다.


특히 건물 안 뒤쪽 안기둥 4개 사이를 벽체로 막아 넓은 불단을 만들고 그 우에 2층으로 된 요란한 닫집을 드리워 놓았는데 리조 후기의 특징을 잘 드러내였다. 아래층 안에 세운 10개의 기둥은 곧추 올라간 2층바깥기둥을 겸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안은 층이 갈라지지 않은 통간이였지만 바깥은 아래, 웃층으로 갈라져 있었다. 가볍게 휘여진 지붕의 룡마루, 박공마루, 추녀마루와 처마선들로 하여 대웅보전은 더욱 부드럽고 맵시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전면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하층 외부 두공 


또한 사성전(5간×4간)은 대웅보전이 수직적 요소가 강조된 데 비하여 기둥높이를 낮추어 수평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여 있었다.

두공은 1층에서 안팎이 모두 5포로, 2층에서는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렸는데 바깥산미는 대웅보전보다 짧게 아래로 처지게 하면서 널직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안에 있는 10개의 기둥은 웃층까지 곧추 올려세웠는데 밖에서는 웃층의 기둥이 보이지 않게 하고 액방과 평판방, 두공만을 보이게 한 것이 대웅보전과 달랐다.

 지붕도 1층에서는 겹처마로, 2층에서는 홑처마로 처리하여 서로 대조적인 효과를 표현하였었다. 이러한 짜임새들은 건물들의 특징으로 되여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하층 내부 두공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내진천장 및 보개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불단 일부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보개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외진 두공 및 천장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외진천장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내진천장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금강산 장안사 사성전(長安寺 四聖殿) 두관 채색 문양



영변 천주사 (寺)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의 동남쪽에 있는 절로 ​ 1684년(숙종 10) 창건하였으며, 1722년(경종 2) 중수하였다. 진달래가 온산을 덮는 봄철에는 약산동대와 천주사가 꽃구름 속에 떠 있는듯하다 하여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불리어왔다.

이 절에서 약 30m 동북쪽 기슭에 있는 철옹성축성비에 따르면, 1684년 옛 성을 고치는 공사를 하면서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殿)을 비롯하여 천주루(), 요사채 등이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10.28m), 측면 2칸(6. 95m)이며, 10개의 기둥 위에 바깥쪽 7포, 안쪽 11포의 두공을 얹고 날아갈듯 한 합각지붕을 올렸다. 10개의 기둥 사이 거리와 30개의 두공 사이 거리를 모두 같이한 것이 특색이며, 다른 건물과는 달리 넓이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높아 주위의 경사지대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광전에 입힌 금단청은 이 시기의 우리나라 금단청을 대표하는 훌륭한 것이다. 보광전 맞은편에 있는 천주루는 가운데 다락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복도로 연결된 두 채의 다락집이 앞으로 내밀어 날개처럼 설치되어 있는데, 동쪽 다락에는 향일헌(), 서쪽 다락에는 망월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천주루에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다락 앞에 놓여 있으며, 이 다락집 뒤로는 단층집들이 잇달아 있어서 마치 옛 관청건물과 같은 느낌을 준다. 천주루를 이렇게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왕이 영변으로 피난을 왔는데 숙소가 마땅하지 않아 불편을 느낀 일이 있어, 영변부사가 왕이 만일 다시 영변으로 오게 되면 숙소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변 천주사 보광전 (寺 普光殿)  전면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남쪽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 중앙에 천주루를 놓고 양쪽에 회랑으로 연결된 망월루와 향일헌이 날개처럼 달려 있으며 그 뒤로 긴 요사가 있다. 천주루의 형태는 사찰 건물보다는 궁전이나 관아의 누정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초석은 장대석을 이용하였으며, 계자각 난간을 둘러 누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변 천주사 천주루 (寺 天柱樓)전면




금강산 표훈사(寺)



금강산 표훈사(寺) 전경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금강산 만폭동()에 있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일제강점기 31본산이 지정된 때에는 유점사()의 말사였다. 금강산은 법기보살()의 주처()로서 표훈사의 동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는 법기진신()이라 일컬어지며, 이 절이 금강산 법기신앙()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598년(진평왕 20)에 관륵()이 융운()과 함께 창건하였으며, 675년(문무왕 15) 표훈()·능인()·신림() 등이 중창 신림사라 하였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내금강 만폭동, 내금강 어귀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4km 거리에 있으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 원나라 영종()과 태후·태자 등이 시주하여 크게 중창하고, 지정() 연호가 새겨진 은문동로()와 향합() 등을 하사하였으며, 이 절을 중심으로 각종 법회와 반승() 등을 베풀었다.


또한, 1408년(태종 8)과 1427년(세종 9), 1432년에 창성()·백언() 등 명나라의 사신들이 금강산 유람 도중 이곳에 와서 반승회()를 개최하였다.


1424년 예조의 조사에 의하면 이 절은 승려 150명이 거주하였던 대찰이었으며, 나라에서도 기존의 밭 210결()에 90결을 더 내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중건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절의 본당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반야보전(殿)이라 하였으며, 그 안에 『화엄경』의 법기보살 장륙상()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불상을 법당 정면으로 모시지 않고 동쪽에 있는 법기진신봉으로 향하도록 안치하는 특수한 관례를 적용하였다. 또한 절 뒤의 법기봉에 대한 고유한 제사의식도 행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그 절차와 시기 등에 대해 밝힐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존 당우로는 반야보전을 비롯해서 영산전·어실각()·산신각·능파루()·판도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원나라 황실의 하사물 외에도 몽산화상()의 가사()와 나옹화상()의 사리(), 야보전 앞에 53불을 모신 철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절 부근에는 경순왕비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돈도암()과 신라시대의 탑이 있는 신림암(), 서산대사가 창건하였던 백화암지()가 있다. 또 절 안의 수충영각()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하여 고려 말의 명승 지공()과 나옹의 진영()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표훈사의 가람배치는 마당의 7층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이 담을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는 사동중정형()의 산지가람형이다. 7층석탑을 중심으로 본전인 반야보전과 입구인 능파루가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마주 보고,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이 양쪽에 나란하게 있으며,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극락전터와 명월당터가 있다. 또 능파루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는 요사채인 판도방()과 어실각이 있다.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영산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으로 5량구조의 맞배지붕집이다. 전체적인 단청은 금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능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누각건물이다.

이밖에도 중심영역의 북동쪽에 칠성각이 있고 서남쪽에 어실각이 있다. 어실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다포계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일반적인 사당건축 형식으로 지어졌으나, 단청이 화려하다. 1796년(조선 정조 20) 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쪽의 법기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주봉들이 사방을 둘러 일대 경관을 이루고 있는 깊은 산골짜기의 반듯한 절터에 있는 사찰이다. 반야보전을 비롯한 건물들의 조성기법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절정을 보여주며, 단청이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술을 대표한다.



금강산 표훈사(寺) 전경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 般若寶殿) 정면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표훈사 반야보전(表訓寺般若寶殿)는 표훈사의 중심건물이며 높이 1m 정도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앞면 3칸(14.1m), 옆면 3칸(9.4m)으로 되어있다. 또 바깥 7포, 안 9포의 두공을 복잡하게 짜올렸으며, 합각지붕에 금단청을 하였다.


기둥은 위가 약간 홀쭉하게 오므라든 두리기둥이고 네 모서리 두공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내밀게 하였다. 전체의 균형이 잘 잡혀 굵직하고 힘차 무게가 있으면서도 섬세하고 화려한 꾸밈새를 자랑한다.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 般若寶殿비화협간 4종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 般若寶殿비화협간 4종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 般若寶殿비화협간 4종



금강산 표훈사 반야보전 ( 般若寶殿비화협간 4종

 


성천 향풍사 


성천 향풍사 향풍루 전면

성천 향풍사 향풍루  두공 및 천장


성천 향풍사 보광전( 普光殿) 정면


성천 향풍사 보광전 외부 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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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Ⅲ (북한편①) 사찰.서원 / 고적사적지

2017. 12. 14.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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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로 본 우리나라 사찰의 옛 모습 Ⅲ (북한편①)




개성 관음사 (寺)


황해북도 개성시 박연리 천마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로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25호로 변경되었다. 박연리 대흥산성 북문에서 약 1km 정도 거리의 천마산 기슭에 있다.

970년(고려 광종 21) 법인국사() 탄문()이 처음 세우고, 1393년(조선 태조 1)에 크게 확장하였다. 1477년(성종 8)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1646년(인조 23)에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다.

경내에는 현재 대웅전·승방·칠층석탑·관음굴이 남아 있다. 승방 중앙에 난 문으로 들어가면, 마당 안쪽에 대웅전이 있고 그 서쪽에 7층석탑, 북쪽으로 관음굴이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을 쌓아올린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정면 3칸(8.4m), 측면 3칸(6.61m)의 겹처마를 댄 다포계 우진각지붕집이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였고, 모서리기둥에 귀솟음과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공포 장식은 외부는 쇠서형으로 비교적 길게 뽑고 내부는 교두형()과 운공형()으로 처리하여 운공 위에 연꽃 봉오리를 장식했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장식했다. 창호는 꽃살문으로 달았는데, 특히 화병에 담긴 연꽃을 동판에 새긴 후면창호는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내부에는 중층 닫집을 설치하고 그 아래 불단을 놓았다. 천장에 학, 봉황 조각으로 장식하고 안팎을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승방은 정면 4칸(10.7m), 서쪽 측면 4칸, 동쪽 측면 2칸의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문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7층석탑은 높이는 약 4.7m로, 고려 때 조성되었다. 단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쪽대기에 상륜을 장식한 석탑이다.

대웅전 뒤쪽에 있는 관음굴은 관음사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현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4호로 지정된 대리석관음보살상이 2구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평양시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공포와 내부 장식 등 조선 중기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는 태종이 이 절에서 수륙재를 열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운나라는 소년이 손재주가 너무 좋아 관음사 대웅전 꽃살문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자 자신을 왼손을 잘라 버리고는 손 잘린 자신의 모습을 살문에 조각해 놓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손 잘린 운나의 모습이 대웅전 꽃살문에 남아 있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전면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중간 문비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뒷면 중간 문비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개성 관음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두공



영번 보현사 (寺)



영번 보현사 (寺) 전경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지금의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있는 절로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40호. 31본산제도()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21개 군의 절을 관장했던 본산 중 하나이다.


수행처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춘 지리적 여건뿐 아니라 조선시대 구국()의 선봉장이었던 서산대사(西)의 입적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절은 968년(광종 19)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이름난 고승으로부터 화엄교관()을 전해받고 1028년(현종 19) 연주산에 들어가 살았던 탐밀()과 그의 제자 굉확()이 모여드는 학승()들을 수용할 절을 짓기 위해, 기존의 보현사 동남쪽 100여 보 되는 장소에 243칸의 정사()를 이룩함에 따라 보현사는 묘향산을 대표하는 절이 되었다.

절을 크게 일으킨 탐밀과 굉확이 죽은 뒤에도 제자들이 절을 계속 증축하였으며, 1067년(문종 21)에 문종은 땅과 밭을 하사하였다. 1160년(의종 14) 10월 12일 왕은 이 절에 행차하여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30근의 은병() 10개를 만들게 하였는데, 각각에 다섯 가지 향()과 다섯 가지 약을 담아서 불전()에 바쳤다.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보현사는 그 뒤 다섯 번의 중창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1096년(숙종 1)에는 달보()가 재창하였고,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이 3창하였으며, 1449년(세종 31)에는 해정()이 4창하였다.

1634년(인조 12) 화재로 건물들이 불타자 명조()와 각성()이 중창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9월에 다시 실화()하여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4년 동안에 걸쳐 남파()·향악() 등이 여섯번째로 중창하였다.

『조선불교통사』의 기록 외에도 1216년(고종 3) 9월에 여진족이 묘향사에 들어와서 이 절을 불태워버림에 따라 중창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1218년 거란의 적병을 토벌했던 김양경()의 시에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보현사는 한창 중수중이었는데 그 규모는 300여 칸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 1818년(순조 18) 이 절에 머물고 있던 한월()에 의하여 개금불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이곳에 있던 석가여래상과 양대보살상()·십육나한상()의 채색이 모두 퇴색되어, 미타존상()과 대웅전의 석가여래상·양대보살상을 개금()하고 십육나한상에는 개채()하였다.


1912년 12월 23일 보현사는 ‘선교양종대본산묘향산보현사()’라는 공식 절 이름 아래 30본산 중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1912년 당시 당우로는 대웅전·명부전(殿)·심검당()·수월당()·명월당()·진상전(殿)·동림헌()·만수각()·관음전·대장전(殿)·영산전(殿)·극락전·사리각()·수충사()·팔도십육종도규정문(, )·팔만대장경보존고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호국승장 휴정()의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유물로는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7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구층탑과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 144호로 지정된 묘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탑이 있다. 또 유적 중 석가여래사리부도비()에는 사리봉안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 자장()에 의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었던 석가여래사리가 1592년 왜병의 침입으로 인하여 해를 입게 되자 사명당()이 금강산으로 사리를 봉안해왔다. 이에 휴정은 금강산이 바다 가까이에 있어 적국과 가깝다는 이유를 들어 그 중 1함()은 묘향산에 봉안하고 1함은 통도사로 되돌려 보냈다.

그 까닭은 적이 노리는 것이 사리보다는 금은보화에 있고 또 자장의 뜻이 본래 통도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불사리()는 통도사와 보현사에 분안()되었다. 이 비문은 서산대사가 지은 뒤 손수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 때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어 의승()의 궐기를 독려했던 초대 승군대장 휴정의 사리부도와, 묘향산을 중심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보현사에서 입적한 원준()의 석종(), 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은 언기()의 석종과 비문, 풍담대사비()·영암대사석종비()·월저대사비() 등이 있다.

보현사의 말사는 일제강점기에 총 112개가 있었다. 이 중 산내말사()는 안심사()·내원암()·보윤암()·화장암()·법왕대()·상원암()·축성전(殿)·불영대()·내보현암()·불지암()·보발암()·금강굴()·삼성대()·설령대()·하비로암()·보월사()·남정암()·계조암()·일출암()·백운암()·신흥암()·은봉암() 등 24개 사암()이 있었다.

보현사의 산외말사()의 수반지()는 양화사(, )이며, 양화사의 산내말사는 상운암()·화장암()·원적암()·내원암()·축성전(殿) 등이다.


영번 보현사 조계문 전면

 

영번 보현사 조계문 외부 두공 

 


영번 보현사 만세루 (萬歲樓) 전경


  

영번 보현사 만세루 (萬歲樓) 천장 

 

영번 보현사 만세루 (萬歲樓) 외부 두공


 

영번 보현사 (寺) 만세루 상세

 

영번 보현사 대웅전 (大雄殿) 정면



영번 보현사 대웅전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영번 보현사 대웅전 (大雄殿) 정면 문비

 

영번 보현사 대웅전 (大雄殿) 내부 


영번 보현사 대웅전 (大雄殿) 내부 두공 및 천장


영번 보현사 수월당 전면 ()


 

영번 보현사 수월당 전면 상세 ()


 

영번 보현사 불영암 (普寺 佛影庵) 정면


영번 보현사 불영암 (普寺 佛影庵) 외부 두공

 

 
영번 보현사 (寺) 칠성각 및 상원암 전면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현사의 암자로, 묘향산의 대표적인 봉우리 중 하나인 법왕봉 남쪽 산중턱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폭포 구경이 장관이라는 정자 인호대()가 마주 바라보이는 해발 565m의 커다란 바위 위에 있는데, 원래는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전한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단청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기에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상원암은 1580년(조선 선조 13)에 다시 짓고 1794년(정조 18)에 크게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용후각, 그리고 물이 나오는 샘을 보호하는 수각인 불유각 등이 있다.

본전은 정면 5칸(11.06m), 측면 2칸(5.7m)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여 앞면의 총길이는 23.78m이다.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본채 정면에는 긴 툇마루를 놓았는데, 좌우의 툇기둥만 세우고 중간 기둥들을 생략하여 전체를 개방하고 있는데 그 주칸이 무려 11m에 이른다. 부속채 전면에도 툇마루를 설치하고, 화려한 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따라서 상원암의 툇마루에 서면 묘향산의 전망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칠성각은 1칸 규모의 다포계 합각집이다. 구조형식은 5량구조이며, 기둥 위에 외5포, 내9포의 화려한 두공을 짜 올리고 겹처마 합각지붕을 이었다. 처마 밑은 빈틈없이 공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공포장식은 연봉형으로 초각하였다. 단칸 규모이므로 대들보는 생략하고 도리를 이용하여 지붕가구를 만들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칠성각은 그 자리에 있던 노목 한 그루를 베어 지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기둥의 굵기가 38-75㎝로 다양하다. 단청은 화려한 금모로단청으로 장식하였다. 건립 시기는 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본전의 5칸이나 되는 긴 길이를 기둥도 없이 액방으로만 지지할 수 있도록 하중을 분산한 빼어난 건축술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상원암은 예로부터 묘향산의 으뜸가는 암자라고 하여 향산제일암()으로 불렸는데, 앞뜰에 서 있는 늙은 보리수가 그 연륜을 말해준다. 



영변 보현사 수충사 ()전면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에 조선 중기의 승려 휴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우. 휴정은 교()와 선()을 겸한 명승으로 임진왜란 때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규합하여 평양과 서울 수복에 공을 세웠고, 그 뒤 묘향산 원적암()에 은거하였다.


휴정이 죽은 뒤 그의 문도들에 의하여 영정이 봉안되어오다가, 1787년(정조 11)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에 그를 제향하는 표충사()가 건립된 것을 계기로 이 곳 승려들의 발의에 의하여 묘향산의 암자 옆에도 사묘()를 세우게 하고 화상을 옮겨 봉안하게 한 것이다.

1794년 평안도관찰사 이병모()의 요청에 따라 조정에서는 수충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그리고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지내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전()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승려로서 이를 운영하게 하였다.

본래 국가유공자에 대한 포상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승려를 제향하는 사우임에도 불구하고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단행된 서원과 사우철폐책에서 제외되어 그대로 존속하였다.




영변 서운사 (寺)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약산 제일봉에 있는 절로​ 1345년(충목왕 1)에 창건되었다. 약산 서운사비에는 이 절의 불상을 개금()할 때 불상 속에서 나온 글에 1345년 이 절을 처음 세웠다는 것이 씌어 있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인데, 1678년(숙종 4), 1756년(영조 32)에 중수한 것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웅전과 백화전(殿)·응진전(殿)·청운당() 등 여러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과 청운당만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1682년 섭청루라는 다락건물도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 대웅전 가까이 있는 한 길이 넘는 돌과 절 부근에 있는 주춧돌들은 바로 그 다락건물에 썼던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의 안팎에는 다른 절에서 보기 드문 매우 화려한 장식을 하였는데, 두공은 안팎이 모두 5포로서 두공은 용머리와 봉황머리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대들보 높이에 낮게 소란반자를 대었는데, 네 모서리에 비천()을 조각하여놓았으며, 그밖에 봉황새·연꽃봉오리 등도 새겨놓았다.


특히, 대웅전의 금단청은 우리나라 단청미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세 면벽에는 여러 가지 내용의 그림을, 두공 사이 벽에는 오백나한()을 그려놓았다.

대웅전 옆에 있는 청운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두리기둥이 뱃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며 앞면만 단익공에 겹처마로 꾸몄다.




영변 서운사 (寺) 전경




영변 서운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전경

서운사 대웅전 3면 벽에는 여러 가지 불화가 장식되었으며, 공포 사이 벽에는 오백나한도를 그려 놓았다. 또한 외부 판벽에도 용·사천왕·보살·반야용선도 등 여러 가지 별화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7.61m), 측면 2칸(5.01m)인 규모가 작은 겹처마합각집이다. 다른 건물에 비해 정면 공포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건물 내부는 대들보 높이에 낮게 천장을 댔는데,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중앙 불단에 삼존불을 봉안하고, 그 위에 쌍아자형() 닫집을 설치하였다. 빗천장에는 운룡()을 장식하였으며, 네 모서리에는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모서리 공포에도 봉황과 함께 가릉빈가를 장식해 놓았다.




영변 서운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우측면 두공


영변 서운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뒷면 두공


영변 석왕사(寺) 



영변 석왕사(寺)  전경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사기리설봉산()에 있는 절로 31본산 제도가 실시되던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무학대사()의 해몽을 듣고 왕이 될 것을 기도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석왕사의 창건이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해 이능화()는 다만 숭불호법()을 부회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로는 1377년(우왕 3)에 이성계가 정몽주()·이화() 등과 함께 청주(: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에 갔을 때 해양(: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 광적사()가 병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대장경() 1부와 불상 및 법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남운()을 보내 이들을 보완한 뒤 석왕사에 봉안하고, 오랫동안 임금을 축수()하고 나라의 복을 빌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젊은 시절에 석왕사에서 가까운 설봉산 귀주사()에서 독서를 하고 지낸 사실과 이성계와 무학에 얽힌 설화 등으로 미루어 석왕사의 창건은 이성계와 매우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성계가 석왕사로 대장경을 옮긴 1377년 이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산대사(西)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殿)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진헐당()·인지료()·용비루() 등을 지었다. 왕이 된 뒤에는 거찰()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 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흥복루()·범종루()·용비루()·조계문() 등을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웅전·응진전·팔상전·명부전·해장전(殿)·극락전·석왕사()·인지료·신한각()·운한각()·천서각()·만춘각()·백련당()·진헐당·심검당()·수군당(

보명전(殿)·연빈관()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영변 석왕사(寺) 호지문 전면

석왕사는 『동국여지승람(輿)』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여지도서(輿)』에는 “부 서쪽 4리 설봉산에 있으며 태조가 잠저()할 시에 신승인 무학()이 석왕의 꿈을 꾸어 석왕사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왕사는 고려 말에 창건된 후 조선 태조 때에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응진당, 명부전, 나한전, 대장전, 수군당, 천진당, 용비루, 황매당, 종루 등 50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세워졌던 큰 사찰이었다. 석왕사호지문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전후에 복구하였다.


석왕사 호지문은 1392년(태조 1)에 석왕사 대웅전 앞에 세워진 문이다. 호지문은 정면 3칸(10.2m), 측면 2칸(5.06m)이며, 박공지붕을 이은 5포식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넓게 하여 문길로 사용하였고, 좌우측 칸은 벽으로 막아 그 안에 사천왕상을 두었다. 단청은 간략하게 묘사한 모루단청으로 장식되어 있다.


석왕사 호지문의 두공은 포의 수, 짧고 간결하게 다듬은 제공, 첨차의 밑면가공 등에서 1386년에 지은 석왕사 응진당의 두공과 거의 같은 것으로서 초기 다포()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석왕사 호지문은 응진당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로서 고려 말∼조선 초기 사찰 건축 양식과 건축술을 연구하는데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북한의 국보급 제176호로 보존·관리되고 있다.


 

영변 석왕사(寺) 호지문 외부 두공

 

영변 석왕사(寺) 호지문 외부 두공

 

영변 석왕사 용비루 (龍飛樓) 전변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절. 고려 말인 1386년에 처음으로 웅진전이 세워지고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50여 채나 넘는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석왕사로 부르게 된 역사적 유래는 조선 시조왕 이성계가 이곳을 지나다가 유숙하던 어느 날 하룻밤 꿈에 석가래 3개를 가로지고 누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이곳에 살던 중이 앞으로 왕이 될 꿈으로 해석해 주었다 하여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에 이곳 절 이름을 왕이 될 꿈을 해석해 준 중이 있는 절이란 의미에서 해석 ‘석()’, 임금 ‘왕()’, 절 ‘사()’ 이 세 글자를 써서 석왕사로 이름을 부르게 하였고 그 절터까지 직접 잡아주었다고 한다.

석왕사는 동쪽으로 트인 깊은 골짜기에 남향한 두 개의 기본 구성축을 이루면서 건물들이 지형에 맞게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위쪽의 건축군은 웅진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아래쪽의 것은 대웅전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석왕사로 들어가는 첫 문은 불이문이다. 불이문은 석왕사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건너놓은 무지개모양의 돌다리 위에 세운 아담한 다리집으로서 1751년에 세운 것이다.

조계문은 석왕사의 두 번째 문이다. 지금의 것은 1783년에 개축한 것이다. 불이문은 4각돌기둥을 좌우에 하나씩 놓고 그 위에 흘림식나무기둥을 세운 다음 커다란 합각지붕을 올린 것으로서 바깥 7포, 안 9포로 짜올린 두공은 일주문의 특색을 돋우어준다. 천장은 한칸짜리건물이나 소란반자와 빗반자를 댔으며 봉황, 용, 비천 등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조계문을 지나면 서쪽방향으로 합각지붕의 날씬한 2층다락인 설성동루가 있다. 석왕사의 중심구역에 이르러 아래중심축 북쪽 깊숙이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웅전은 1731년에 개축한 것으로서 석왕사의 중심건물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18.6m), 측면 3칸(11.1m)에 바깥 9포, 안 11포의 겹처마합각지붕건물이었다. 제공 밑에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고 위에는 용대가리조각을 하였으며 대웅전 안의 포는 집안높이에 어울리게 장식적으로 두단을 덧붙여 마치 13포로 보이게 하였다. 이 건물에는 화려한 금단청을 입히고 문살들에 기하학적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건물전체가 화려한 조형예술품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대웅전 안에는 부처를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9개의 부처가 놓여 있었다. 대웅전 앞에는 호지문이 서있었고 그앞에 영월루가 남향하여 서 있었다. 그리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만궁당, 서쪽에 심검당이 마주서고 만궁당쪽으로 무상당, 홍복당, 설성동루가 있었으며 심검당에 연이어 해장원, 팔상전, 명부전, 보명당, 문학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석왕사의 윗쪽 중심축 북쪽에 이 절간의 기본 건물의 하나였던 웅진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 말기의 건물을 대표하는 웅진전은 비교적 높이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15.77m), 측면 2칸(6.4m)에 안팎 5포의 긴 박공집이었다. 두공의 제공은 비교적 짧게 하고 안에는 중보높이에 소란반자를 높이 댔으며 전반적으로 화려한 단청이 입혀져 있었다.

웅진전 안에는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500나한상이 놓여 있었다. 웅진전 앞에는 용비루와 인지료가 가지런히 서 있다. 석왕사는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50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던 큰 절이었는데, 지난 6 · 25전쟁시기 폭격으로 불이문, 조계문, 설성동루, 용비루, 인지료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석왕사건물들이 타버렸다.

 

영변 석왕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 대웅전은 1731년에 개축한 것으로서 석왕사의 중심건물이었다. 대웅전은 정면 5칸(18.6m), 측면 3칸(11.1m)에 바깥 9포, 안 11포의 겹처마합각지붕건물이었다. 제공 밑에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하고 위에는 용대가리조각을 하였으며 대웅전 안의 포는 집안높이에 어울리게 장식적으로 두단을 덧붙여 마치 13포로 보이게 하였다.

이 건물에는 화려한 금단청을 입히고 문살들에 기하학적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건물전체가 화려한 조형예술품처럼 단장되어 있었다. 대웅전 안에는 부처를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9개의 부처가 놓여 있었다

 


영변 석왕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전면 두공 


 


영변 석왕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뒷면 두공 

 

영변 석왕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영변 석왕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두공



사리원 성불사 (寺)


사리원 성불사 (寺) 전경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리원시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898년(신라 효공왕 2)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1375년(고려 우왕 2)에 나옹왕사()가 중창했다. 이때는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했는데, 특히 성불사를 비롯하여 부속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1569년(조선 선조 3)에 설숭()이 중수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1751년(영조 27)에 찬훈대사()가 다시 중수하였다. 그러다가 l924년 주지승 보담()이 또 한 번 중수했다. 현재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성불사가 자리잡은 곳은 '산줄기가 흘러내려 분지를 이룬 형세'이고 아울러 이 산은 한국의 서쪽을 지키는 관문의 형상이기 때문에 '정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선에 의하면 정방산()은 '진호()의 땅'이어서 이곳에 성불사라는 절을 짓고 승려들의 거처로 삼았다.

배치는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이 4방향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식이다. 청풍루를 통하여 절마당으로 들어서면 주불전인 극락전이 마주 보고 있고 동쪽에는 응진전, 서쪽에는 운하당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명부전은 응진전 남쪽에 놓여 있고, 극락전 뒤쪽에 산신각이 있다. 현재 극락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은 원래 명부전 앞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극락전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처음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전후에 복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정형적인 주심포계 형식이다. 꽃문양으로 창호를 꾸미고 금단청과 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 14)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에서 이어진 석축 위에 다시 기단을 놓아 전면에서는 마치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정면 주칸은 거의 같고, 측면에서는 중앙 칸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중앙 칸보다 짧다. 바닥에는 전돌을 깔고 녹색 계통의 모로단청으로 마감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2익공 겹처마 맞배집으로, 전퇴에 마루를 깔아 개방하였다. 청풍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익공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에 통로가 있는 누각이다.

일제강점기의 사찰령() 반포 때 31본산의 하나로 꼽혔다. 《조선불교통사》에 창건과 중건의 내력이 전한다.



성불사 배치도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정면


극락전은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중수된 고려 말기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공포를 짜 올린 배집 건물이다.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5년에 옛 모습 그대로 고쳐 지었다.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정면 문비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측면 세부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배소 두공

 


성불사 극락전 (殿) 평면도

 


성불사 극락전 (殿) 횡단면도


성불사 극락전(殿)  상세도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측면 세부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측면 세부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측면 세부


사리원 성불사 극락전 (殿)) 측면 세부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殿) 정면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 정방리(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북도 봉산군 정방리)성불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불전.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 14)에 건립되고 1530년(중종 25)에 중수된 건물로 고려 시기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함께 오백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인 다포계() 단층 맞배지붕건물이다. 배흘림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이 위에 안팎 모두 1출목()인 간결한 포작()을 짰다.


바깥두리기둥[]에 교두형() 첨차를 놓고 공간포()를 짜올려 다포계 형식을 취한 반면, 내부 고주() 위에는 굽받침이 있는 곡주두(), 곡소로[], 단면이 쌍S자 모양인 첨차() 등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고려 말기의 절충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부로 나온 첨차의 쇠서[]는 끝 부분이 둔하게 잘려 있고 아래쪽으로 쳐져 있으며, 첨차에서와 같이 공안( : 건축물에서 구멍·총혈 등의 총칭)을 깊이 파내는 등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보의 단면은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는 항아리 모양이며,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 마루도리 밑에는 파련()을 새긴 부재와 포()를 섞어서 만든 대공()을 세웠다. 또 마루보 위에 ㅅ자 모양 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 가운데 오래된 법식()을 따른 귀중한 예이다.

한편, 일제침략기에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묵서명()에 의하면, 1327년(충숙왕 14)에 처음 지어 1530년(중종 25) 에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불사 내의 극락전과 함께 한국 목조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殿) 내부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 (殿) 측면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殿) 외부 두공



금강산 신계사 (寺)



금강산 신계사 (寺) 전경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로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의 보운()이 519년(법흥왕 6)에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진 않다.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힌다.

원래 이름은 신라의 신() 자를 따서 신계사()라 하였으나, 뒤에 귀신 신() 자의 신계사로 바뀌었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신계사의 절터 계곡인 신계천에는 해마다 많은 연어가 올라와 사람들이 이 연어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보운이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신통력을 발휘해 연어떼가 계곡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신계사의 신() 자가 신()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여지도서》고성군조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신계사는 11개의 전각을 거느린 큰 절이었다.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동쪽에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있고 서쪽에 나한전, 어실각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남쪽에 만세루 좌·우에 향로전과 최승전 그리고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6·25전쟁 때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삼층석탑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2004년 11월 대한불교조계종과 현대아산(주), 북한측 조선불교도연맹이 공동으로 대웅전을 복원하였다. 명부전을 비롯한 나머지 11개 전각도 2007년 10월에 복원 완료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어칸이 협칸보다 넓다.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북한의 조선시대 말기 사찰건축을 대표한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2층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위 기단의 각 면석 양쪽 끝에 우주와 한 개의 탱주가 있고, 옥개석받침이 4단구성으로 되어 있다. 금강산의 정양사 삼층탑, 장연사 삼층탑과 함께 “금강산의 세 옛 탑”으로 불리는 탑으로 다른 탑들과 비슷하면서도 일부 다른 점도 지니고 있다. 

근현대의 고승인 석두()·효봉()·한암() 등을 배출한 이름난 절이다. 절 주위가 온통 울창한 노송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필봉·관음연봉·세존봉·집선봉 등 외금강의 절경을 사방에 거느리고 있어 영험한 사찰로 꼽힌다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1​,400년 전의 돌탑을 가진 신계사는 외금강 신계천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계사는 뒤에 관음련봉줄기인 붓끝같이 뾰족한 문필봉과 앞의 구름을 끼고 아슬아슬하게 솟아있는 세존봉, 채하봉, 집선봉 등과 잘 어울렸다.

광복 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아름다운 외금강에서도 절승경개를 이루는 이곳에 자리잡은 신계사를 외금강박물관(《금강산특수박물관》, 《신계사특수박물관》이라고도 함)으로 꾸리고 인민들이 그 우수한 건축술과 유물들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51)년 모두 불타버렸다. 신계사는 519년에 처음 세운 후 여러 차례 다시 짓고 34차례나 보수하였었다. 전쟁 전까지 있던 건물은 대부분 1597년에 세운 것이였다.

신계사는 대웅전과 만세루를 통하는 남북중심축이 설정되고 뒤의 대웅전구역과 앞의 만세루구역으로 나누어 건물들이 배치되여 있었다. 대웅전구역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앞에는 3층 돌탑이 놓이고 동쪽에는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는 라한전(령산전), 어실각이 일정한 사이를 두고 배치되여 있었다. 만세루구역에는 만세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향로전과 부속건물이, 서쪽에는 최승진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여 있었다.

이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서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조선시대 말기의 사찰건축을 대표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12.45m), 측면 3칸 (7.54m)의 겹처마합각지붕을 이고, 바깥 9포, 안 13포의 높은 두공을 짜올린 포식 건물이다.

기둥 위에는 안팎을 관통한 용틀임조각을 놓고 그 위에 두공을 짜올렸는데 첨차는 꽃가지형이다. 길게 휘여내민 쇠서형 살미들과 그 위에 활짝 핀 연꽃과 꽃봉우리를 엇바꾸어 가며 덧붙였다. 안쪽의 제공도 연꽃봉오리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하였는데 층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건물 전체의 품격을 부여하는 대웅전의 화려한 두공은 조각장식의 원숙함에 있어 같은 형태의 두공인 표훈사 반야보전의 것을 능가하고 유점사 능인보전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이 건물의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신계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서 대웅전은 앞면 3간(12.45m), 옆면 3간(7.54m)의 중심건물이였다. 특히 대웅전은 주위의 수려한 자연풍치와의 융합, 섬세하게 다듬어진 꽃무늬문짝, 살아 움직이듯이 생동하게 조각된 룡조각장식, 규칙성있게 높이 짜올린 두공, 꽃밭처럼 꾸민 천정의 내부공간, 류선형으로 보기 좋게 표현한 지붕물매와 처마선, 화려한 비단무늬단청 등으로 하여 16세기의 훌륭한 건축술과 조각기교를 자랑하였었다.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외부 두공 및 헌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내부 두공 


황해 벽성 신광사 (寺)

황해도 벽성군 서석면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 북숭산에 있었던 절로 일제강점기에는 패엽사()의 말사였다.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삼국유사』에 923년(태조 6) 입조사(使) 윤질()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 뒤 현종은 1026년(현종 17) 이 절에 행행(: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하였고, 1053년(문종 7) 9월에는 왕이 이 절에 이르러 나한재()를 개설하고 제왕()과 재추()·시신()을 향연하였다.

또한, 1102년(숙종 7) 10월에는 왕이 이 절에 들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가 그의 원찰()로 중건하였기 때문이다.


순제는 일찍이 서해의 대청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때 그는 서해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속에 이상한 기운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가 보았더니, 수풀 속에 한 부처님이 있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등극()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하였다.


그 뒤 그가 환궁등극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꿈을 깬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중국의 재력을 기울여 이 절을 중창하였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 송골아()가 이끄는 37인의 공장()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과 밀직부사 이수산()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 동쪽에는 누()와 재료(),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와 그 앞에 석탑(), 서쪽에는 나한전(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을 봉안한 해장전(殿)·중문()·종루()·양진당()·영마전(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335년 8월에는 충숙왕이 이 절에 들러 축수를 하였다. 그리고 이 절은 일찍이 화재를 만난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 과객이 이 절에 머물고 있을 때 누의 남쪽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처음 절을 지을 때 남산()에 석옹()을 묻어 물을 저장함으로써 화재를 막았다.

이제 그 석옹이 기울어져 물이 새고 있으니, 몇 년 지나지 않아 절에 화재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1677년 4월 5일에 화재를 만났다. 이 때의 화재로 전우와 불상 및 승방 등이 모두 탔다.

다음해에 보광전(殿)·설법전(殿)·약사전(殿)·시왕전(殿)·만세루()·승료() 등을 중건하고, 다시 27년이 지난 1705년에 이르러 나한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가 있다.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 벽성 신광사  보광전 (殿)  측면


황해 벽성 신광사 (寺) 보광전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寺)



황해 연탄 심원사 전경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덕우리자비산()에 있는 절. 일제강점기에는 성불사()의 수석 말사이었다.신라 말에 국사 도선()이 창건하였다. 1709년(숙종 35)에 세운 「심원사비」에 의하면, 고려 말에는 절이 많이 퇴락하였으나 1374년(우왕 즉위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이색()이 황폐된 절과 부근의 지세가 군사적으로 요새지인 점을 착안하여 절을 중건하고 성을 쌓게 하였고, 중국의 유명한 화가 오도자()가 그린 관음도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완공하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 조선 숙종 때 이색의 12대손인 이여택()이 황주목사가 되어 이 절을 살펴보니 이색 이후에 네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여전히 퇴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므로 이색의 뜻을 상기하여 승려들과 함께 희사금을 모아서 수년 후에 본전(殿) 및 부속건물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들은 대부분 이때에 중건된 300여 년 전의 건물이다. 1573년(선조 6)에는 계묵()이 중수하였고, 1574년에 53불을 봉안하였다. 이 절 부근에는 돌로 쌓은 남점행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이 부근에는 강선대()와 묵대사영필() 등이 있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칠성각·향로각·청풍루가 있다. 청풍루는 고려의 건축 양식을 간직하고 있어 현재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외부  우 두공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정면 문비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두공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천정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내부


황해 연탄 심원사  대웅전 (寺 大雄殿)  불단


심원사 보광전은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덕양리(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심원사에 있는 고려 말기의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배흘림을 두었고, 바깥두리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안팎 모두 3출목()인 공포()를 짜 올렸다. 그러나 다른 다포계 건물과는 달리 기둥 중심에 공포를 그대로 맞추지 않고 측면 귀기둥 위에서부터 같은 간격으로 분할, 배열하였다.

귀공포 위에는 원숭이 모양의 조각을 세워 추녀를 받치고 있어서 특이한데, 강화도 전등사의 대웅전에도 이러한 장식이 있다.

첨차는 메뚜기머리 모양이며 공안( : 건축물에서 구멍·총혈 등의 총칭)을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첨차의 끝은 몽똑하게 밑으로 처져 있어 다포계 초기의 수법을 보여 준다.

공포 위 한대( : 귀기둥 위에서 도리에 45° 각도로 건 쇠서)와 보뺄목[ : 기둥을 뚫고 나온 보의 끝머리]도 3분두() 형식으로 다듬었다. 마룻보 위에는 기둥대공과 ‘’자 대공을 겸하도록 간결하게 짰다.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바닥은 마루를 깔고 불단()을 놓았다. 보광전은 문살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는데, 정면의 문들은 가운뎃칸에 모란과 연꽃을 뚫어 새겨 꽃살문을, 양 옆칸에는 격자무늬를 뚫어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단청은 18세기에 다시 칠하였으나, 아직도 일부에는 고래단청이 남아 있어 은은하고 무게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은 1374년(공민왕 23)에 건립되었는데, 그 시기에 지어진 석왕사()의 호지문()·응진전(殿),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 등과 양식적으로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