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의 보훈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 가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매헌 윤봉길 의사-
분당선 ‘양재시민의 숲’ 역 5번 출구로 나오니 길 건너 푸른 기와지붕건물이 보입니다. 녹음(綠陰)이 가득한 ‘시민의 숲’을 따라 잠시 걷자, 오늘의 목적지인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은 윤봉길의사의 삶과 업적을 올바르게 알리고자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1988년 12월 1일, 국민들의 성금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뜻을 기리기 위해 국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더욱 뜻 깊은 것 같습니다.
▲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 역 5번출구로 나오면 파란 기와지붕 건물이 바로 보인다.
▲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의 모습
기념관의 1층에 들어서니, 태극기를 뒤로한 윤봉길 의사의 흉상과 전신동상이 있었습니다. 늠름한 동상의 모습에서 조국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자, 그럼 윤봉길의사의 이야기와 함께 전시관을 살펴볼까요?
▲ 윤봉길 의사의 흉상.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를 기리며 헌화할 수 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전신 동상.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포토존으로 꾸며져 있어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음.)
윤봉길 의사는 23세의 나이에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결의를 품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931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 그는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살신구국’의 뜻을 밝혔습니다. 당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위성국인 ‘만주국’을 세우는 등 한반도를 넘어 대륙을 침략하려는 야욕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윤봉길의사는 김구 선생과 의열투쟁의 방안을 찾던 중,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축하행사와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열린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이에 윤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후 김구 선생과 함께 의거 결행의 만전을 도모하였습니다.
마침내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는 김구 선생과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김구선생과 회중시계를 교환하였습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어제 6원을 주고 산 시계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제 것하고 바꾸십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 후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이 시계를 받은 김구 선생은 죽음 앞에서도 태연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답하며 역사적 거사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마지막 모습과 김구선생과 교환한 회중시계.
윤봉길 의사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아 일왕 생일 겸 상해사변 승전 축하 기념식이 있을 상해의 홍구 공원에 입장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국가 제창이 끝날 무렵 물통형 폭탄을 경축식장의 단상 위로 투척하였습니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일제의 수뇌부들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의거를 성공시켰고,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알렸습니다.
▲ 윤봉길의사가 투척했던 물병형 폭탄의 모형.
매헌 윤봉길 기념관 1층의 유물전시실에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교환한 시계와 물병폭탄의 모형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 안경집, 지갑 등 윤봉길 의사가 사용했던 물건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민족계몽과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민중이 깨어나 나라가 부강해지면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윤 의사는 망명길에 오르기 전 1928년, 부흥원을 세워 농촌 개혁을 실시해 갔고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습니다.
기념관의 2층에는 ‘윤봉길의사 새 책 도서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공휴일과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10시에서 18시까지 운영하며 1인 2권을 1주일간 대출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는다면, 윤봉길 의사의 뜻과 정신을 기리고 따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윤봉길의사 새 책 도서관의 모습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후 1945년 9월 2일, 일본은 미국의 전함인 미주리 호(USS Missouri)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였습니다. 이 때 일제를 대표하여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중광규’ 외상은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 당시 단상에서 폭탄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죠. 일제가 몰락하는 순간에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부상당한 그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이 더욱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을 예고하는 폭죽이자, 일제의 패망을 예고하는 전주곡이 아니었을까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뜻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피 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걸대나
피 끓는 청년 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 가나
피 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 자는가
동천에 서색은 점점 밝아 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윤봉길, ‘청년 제군에게’-
출처: http://mpva.tistory.com/4735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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