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 10회~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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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독립신문의 변절
- 아관망명 시기 ‘정부대변지’로 창간…친일 본색 ‘정부배반지’ 둔갑
고종이 자금 지원하고 題字 부여 - 1895년 6월부터 박정양이 준비
여론 독점 ‘일제 신문’ 대항 목적 - 아관망명 성공 이후 즉각 발행
뒤늦게 합류한 서재필 “내가 창간” - ‘反淸’ ‘반러’만 주장 …‘반일’은 없어
“국방력 제한” 시대착오 논설 일관 - 독립신문 관련 ‘사실 오류’ 많아
1896년 4월 7일자 독립신문 창간호. 일제 외무성 첩보기관지였던 한성신보가 당시 유일한 신문으로 여론을 독점하고 있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최초의 한글전용 신문이다. 10개월 전인 1895년 6월부터 준비를 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국내 망명에 성공한 직후 발행했다. 정부 자금으로 창간돼 ‘정부대변지’로 출발했으나 점차 국익에 반하는 ‘정부배반지’로 변질됐다. [중앙포토]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 최초의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독립협회 창건, 외세에 대한 독립 의지를 밝힌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조성 계획 등은 모두 1896년에 일어난 일들이다. 1896년의 화두는 ‘독립’이었다. 독립신문이 그해 4월 7일, 독립협회는 7월 2일 첫선을 보였다. 이때 ‘독립’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할까.
필자의 학창 시절인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독립문이나 독립신문·독립협회의 돌림자인 독립은 ‘항일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 ‘반청(反淸) 독립’, 즉 중국에 대한 독립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마치 그동안 몰랐던 정설처럼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 게 맞을까.
‘독립’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일련의 행사는 모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국내 망명(아관망명·1896년 2월 11일)한 시기에 진행됐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갑오왜란·1894년 7월 23일) 이후 궁궐에 유폐돼 있던 고종이 아관망명을 통해 기사회생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1895년 이후 청나라는 이미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난 상태이므로 ‘반청 독립’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던 상황이었다.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기에 ‘반청 독립’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청일전쟁 이전의 과거사였다.
중국의 오랜 속박을 포함해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고종이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외세 가운데 독립문 건립 당시 상황에서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 했던 일제의 위협이 가장 강력한 현실적 폭력이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조선의 왕후를 무참히 시해한 을미왜변(1895년 10월 8일) 직후였다.
일제의 폭압성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독립신문·독립협회·독립문의 독립은 당연히 항일 독립의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이었으며 이는 곧이어 창건되는 대한제국의 성격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91~692쪽)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 대해선 잘못 알려진 사실이 너무나 많다.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독립신문 창간을 정치적·재정적으로 뒷받침한 이가 고종이었다는 사실조차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묻혀 있는 실정이다. 아관망명으로 왕권을 회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망명 성공 후 불과 두 달도 안 돼 독립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이전부터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신문 준비는 1년 전인 1895년 6월 박정양 내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6년의 화두는 ‘독립’이었다. 그해 4월 독립신문 창간, 6월 독립문 건립 결정, 7월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로 독립협회 창립 등이 이어졌다. 그해 2월 고종이 아관망명 성공 후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독립 정책’이다. 사진 속 독립문을 세운 곳이 과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터여서 ‘독립’의 의미를 ‘반청(反淸) 독립’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중앙포토]
일제 비밀자금으로 운영된 한성신보
일제 외무성의 비밀자금으로 운영되는 한성신보가 당시 유일한 신문으로 여론을 독점하고 있을 때였다. 한성신보는 단순한 신문사가 아니었다. 일제의 왕후 시해에 관련됐다.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자사 기자들을 동원·지휘하여 왕후 시해에 직접 참여했다. 한성신보는 일제 외무성 첩보기관지였던 것이다.(김문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320~344쪽)
1895년 2월 17일부터 4개 면으로 발간된 한성신보는 3개 면이 거의 한글전용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이었고 1면만 일본어였다. 친일 조선인들을 겨냥하거나 조선인의 친일화를 위한 신문이었던 것이다. 1896년 5월 말께 1911부를 발행하고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6.5.30) 신문 하나를 여러 명이 돌려 읽던 당시 관례를 고려하면 약 1만2000부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평가받는다.
소위 ‘갑오개혁’이란 이름 아래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1888년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은 근대적 신문의 정치·사회적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본인이 서울에서 민간 신문의 외양으로 내는 한성신보의 편파 보도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173쪽)
일제도 박정양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당시 도쿄아사히신문은 1895년 6월 29일 1면 ‘한국 조정의 한 기현상’이라는 제하에 ‘영어파(정동파)’가 한성신보를 누르기 위해 순국문 신문을 발행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삼국간섭으로 친일파 권력이 다소 약화된 상황을 활용해 박정양은 한성신보에 대항하기 위해 ‘한글전용 신문’을 기획했던 것이다.
아관망명 성공 직후 박정양의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고종은 ‘독립신문’이란 제자(題字)를 부여하고 정부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했다. 독립신문이 민간 신문의 외양을 취하기 위해 나중에 서재필을 등장시키지만 사실상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것이다.
그런데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본인이 독립신문을 “조선 사람의 근소한 후원을 얻어” 발행했으며 자신이 독립신문으로 명명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238쪽) 서재필은 갑신정변(1884)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가 1895년 12월 25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박정양의 한글전용 신문 계획이 추진된 지 6개월이나 지나서였다. 독립신문 계획은 서재필과 전혀 무관하게 계획됐던 것이다.
‘친미 정동파’로 분류되는 당시 박정양 정부의 우리말 신문 발간 계획은 그러나 을미왜변으로 김홍집-박정양 연립내각이 붕괴되면서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을미왜변 이후 다시 정권을 잡은 친일 개화파 내각(제4차 김홍집 내각)에서 내부대신 유길준이 서재필에게 외부협판직을 주려고 한국으로 불러들였다가 일종의 또 다른 정부대변지를 서재필과 발간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때 친일파 유길준과 서재필이 구상한 것은 영문판·한문판(韓文版)을 합본한 신문이었는데, 이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일본공사관이 그런 신문이 만들어지면 한성신보가 위축될 것을 우려해 그 계획을 폐기시켰다.(『윤치호 일기』 1896년 1월 31일, 2월 2일, 2월 4일)
그런 가운데 고종의 아관망명이 성공한 후 다시 박정양 내각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즉각 독립신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독립신문은 일본공사관에 의해 폐기된 유길준-서재필의 영·한문 계획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박정양의 한글전용 신문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다.(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119~120쪽)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독립신문 발간 계획을 유길준에게 설파해 유길준에 의해 승인되고 준비된 것인 양 거짓 서술하고 있다. 그는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좌초된 일과 박정양의 이름 자체를 숨기고 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이 자신의 창안으로 이뤄졌다고 꾸며댔다. 그런데 일찍이 독립신문 연구의 기초를 놓은 신용하는 서재필의 이 거짓말을 참말인 양 인용하며 서재필과 독립신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상)』 24~25, 28, 42쪽)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만한 오류를 우리 국사학계가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고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보니까 신용하의 연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계속 인용되면서 그 권위에 힘입어 독립신문이나 독립협회에 관한 엉뚱한 억측들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703쪽)
서재필, 박정양 부름 받고 핵심 역할
서재필은 어떻게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게 됐을까. 박정양은 한성신보가 1896년 2월 18일자 신문에서 고종을 비난하는 기사를 싣자 독립신문 창간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유길준의 신문 계획이 무산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서재필은 이때 박정양의 부름을 받고 독립신문에 참여해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고종과 아관망명정부가 미국에 귀화한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서재필)에게 정부 공금을 차관으로 제공해 미국인 제이슨이 운영하는 민간 신문 형식으로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그런데 소위 ‘갑오개혁’의 주역들을 역적으로 규정했던 고종이 ‘친일 경력’이 뚜렷한 서재필에게 중책을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박정양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까지 취득한 엘리트를 그냥 내치지 않고 어떻게든 국익을 위해 활용해보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또 미국인으로 귀화해 미국 생활을 오래 했기에 성급하게 날뛰었던 12년 전 갑신정변 때와는 성향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성신보에 맞서는 ‘정부대변지’로 창간된 취지를 살려 초기의 독립신문은 고종의 노선과 부합되는 논설을 펼치기도 했다. 초기의 영문판 논설에서는 독립문 건립 결정자가 국왕이라고 밝혀놓기도 했다. “Today we rejoice in the fact that the King has decided to erect upon the ruins of the arch outside the West Gate, a new one to be entitled Independence Arch 독립문.”(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에 있던 관문의 폐허 위에 ‘독립문’이라는 명칭의 새 관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 The Independence, June 20th, 1896. ‘Editorial’) 박정양 등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이 생존해 있던 당시에는 서재필도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친일 본색’을 드러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 ‘독립’의 의미를 ‘항일 독립’이 아니라 청일전쟁 이후 이미 현실성을 잃은 ‘반청 독립’으로 교묘하게 뒤틀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을 독립시켜준 것을 조선인들이 감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관망명 직후인 1897년 3월 말의 논설에서부터는 ‘반러 독립’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반청’과 ‘반러’를 주장하는 그에게서 ‘반일 독립’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는 고종이 강력하게 동맹을 요구했음에도 오히려 만주와 한반도를 저울질하면서 한국 내정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는데도 서재필은 반러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강병 노선 음해 뒤엔 서재필·윤치호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1884)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서재필·김옥균. 당시 ‘왜당’으로 불렸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귀화했다가 1895년 12월 귀국해 독립신문 작업에 합류했으나 친일·반러 논조로 일관하며 독립신문의 창간 취지를 변질시켰다. [중앙포토]
고종이 아관망명정부와 대한제국 시기를 통틀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강병 육성과 첨단 무력 확보였다. 이 같은 고종의 강병 노선을 음해한 것도 독립신문이었고, 그 뒤에는 언제나 서재필과 윤치호가 있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850~852쪽)
일제가 친일개화파를 앞세워 실행했던 소위 ‘개화’ 정책이란 것들에서 국방 문제는 언제나 제외됐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1894년 10월 23일 고종에게 내민 소위 ‘제2차 내정개혁’에서 조선의 군비를 “내란을 진정할 만한 병력” 수준으로 제한했다. 반(反)상식적 한군론(限軍論)이었다.(『승정원일기』 『일성록』 1894.10.23)
서재필은 이노우에의 논조를 반복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해군과 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국중에 육·해군이 조금 있어 동학이나 의병 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했으면 넉넉할지라.”(독립신문, 1897.5.25) 고종이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에게 밀지를 내려 항일 연합전쟁을 긴밀히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신문은 동학과 의병을 토비로 폄훼하고 이를 진압하는 수준의 군대면 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재필로부터 독립신문을 넘겨받은 윤치호도 한국 군대가 외적을 막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안의 도적’을 잡으려고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해 이노우에와 서재필의 반상식적 군사론을 반복하고 있다. “대한에서 양병(養兵)하기는 외국과 싸우려 함도 아니요 다만 대한 국내를 보호함이라.”(독립신문, 1898.5.24)
당시는 국망 상황이라는 점을 그때나 지금이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군사력을 늘려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증강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정상국가의 평상적 상황에서도 나오기 쉽지 않은 이 같은 궤변을 ‘근대적 공론장의 시초’ ‘민주주의와 민권운동의 기원’ ‘선구적 계몽운동’ 등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해석일까.
서재필은 ‘일제 밀정’ 의혹까지 받는 인물이다. 그런 행각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 여기저기 눈에 띈다. 1896년 페테르부르크에 파견된 민영환 특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교섭한 내용을 당시 수행통역관 윤치호로부터 전해들은 서재필은 이를 일본공사에게 ‘밀고’하고 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1897.11.17)에 ‘밀고’라고 적혀 있다.
미국공사 존 실(John M. B. Sill)이 이완용에게 러시아 장교의 교관 고빙(雇聘) 반대 행위를 그만두라고 요구한 일이 있는데 이런 사실도 서재필이 일본공사관에 알려주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897.5.25) 고종이 러시아와의 동맹을 가장 중시했던 민감한 외교전쟁 시기에 일본 측이 먼저 알아서는 안 되는 외교비밀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친일·반러 활동에 주력하면서 독립신문은 민심의 지지를 점점 잃어가다가 1899년 12월 4일 종간호를 냈다. ‘정부대변지’로 출발해서 ‘정부배반지’로 둔갑하며 아관망명정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항일독립 의지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이 신문의 종말은 초라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 반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태학사·2011), 『부왜역적 기관지 독립신문 연구』(려증동·경상대출판부·1991), 『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주진오·연세대 박사논문·1995),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한영우·서영희 외·푸른역사·2006),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친미개화파 연구』(한철호·국학자료원·1998), 『독립협회 연구(상·하)』(신용하·일조각·1976·2006), 『서재필 박사 자서전』(김도태·국학자료원·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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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쓰는 근대사> / 중앙Sunday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
- "병력 3만명, 대한제국은 아시아 2위 군사강국 이었다"
근대사법·사유재산제 도입 - 중추원 개편해 대의정치 개시
평민·천민 차별없이 등용 - 명실상부한 백성의 나라 '민국'
시장제도 창출, 상공기업 진흥 - 하야시 “공업국가 이행” 비밀보고
겐테 “서울, 아시아 1위 도시 돼”
1898년 1월 서울에 설립된 한성전기회사. 대한제국이 산업진흥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첫 전기회사다. 전차·전등 사업을 주관했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 창건돼 12년 10개월 17일 동안 존속한 국가다. 올해로 창건 120주년이 된 대한제국은 항일투쟁을 위한 국내 망명 비상국가였다. 그러나 많은 남북·좌우 사가들은 대한제국을 ‘전근대적·반동복고적 황제전제국가’로 폄하해 왔다.
이런 인식에는 군주 없는 ‘민주(인민)공화국’만을 근대국가로 보는 편향적 근대관이 깔려 있다. 그러나 공자는 “백성은 임금을 모시고 자치한다(百姓則君以自治)”고 했다. ‘임금을 이용한 백성자치국가(민주국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영국 등 많은 서구 선진국과 일본은 이렇게 군주를 이용해 근대화했다.
서양의 근대적 제도·문물은 대부분 극서(極西) 국가들이 14세기 말부터 400년간 유교문명권에서 배워간 것들이었다. 유교문명권은 12세기에 이미 ‘보편사적 근대’를 개시했었다. 19세기 말 제기된 극동의 ‘근대화’란 ‘전근대’가 아니라 보편사적 차원의 ‘낮은 근대’에서 ‘높은 근대’로의 도약이었다.
극동국가들은 극동에서 배워 근대화된 서구를 더 빨리 배워 50년 만에 ‘높은 근대’를 이루었다. 서구적 근대성의 DNA가 유교적인 까닭이다. 이는 이슬람·힌두·불교국가가 다 근대화에 실패한 것에서 반증된다.
대한제국은 유교문명의 ‘보편사적 근대’와 한국 고유의 문화유산을 발판으로 ‘높은 근대’로 도약했다. 근대국가로 올라섬과 동시에 군사강국, 경제대국으로 치솟은 것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중화론’과 ‘신(新)존왕주의’라는 고유의 철학에 입각해 창건된 사상 초유의 황제국가로서 다른 황제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독립국가였다.
한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國制)’ ‘제1편’은 ‘독립국가’(제1조)와 ‘전제정’(제2조)을 규정하고 있다. 당시 만국공법에서 ‘전제정’과 ‘군주정’은 동의어였으므로 제2조는 전래의 군주정을 ‘성문화’한 것이다. ‘제1편’이란 말은 시민권을 다룰 ‘속편’을 예고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헌법을 갖췄으므로 입헌군주국이었고,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에 따라 근대화를 추진한 고종은 정의(定義)에 따라 ‘계몽군주’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평민·천민을 차별 없이 등용한 명실상부한 백성의 나라 ‘민국(民國)’이었다. 영·정조 시대 위로부터 추구된 ‘민국’ 이념이 사회경제적 발전과 향회·민회의 발달 과정에서 아래로부터 실(實)을 얻고 대한제국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과 ‘민국’이 결합된 ‘대한민국’ 국호가 1899년부터 이미 여러 신문과 정부태환권의 도안에서 쓰이게 된다. 프랑스 외의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일본을 능가했던 한국의 신분해방 수준은 서민들의 대거 관직 진출과 광무호적에서 입증된다. 광무호적은 신분을 명기한 명치호적과 달리 아예 신분란을 두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근대사법·사유재산제 등 각종 신규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고종은 1898년 중추원을 개편해 독립협회·황국협회 회원을 의관에 임명해 대의정치를 개시했다.
군사적으로 대한제국은 ‘아시아 2위의 군사강국’이었다. 고종은 1897년 당시 1000여 명의 신식 병력밖에 없었지만, 이 병력을 교관·조교로 활용해 신식 군대를 기르고, 첨단병기들을 수입하거나 자체 제작해 무장시켰다. 1901년 총병력은 3만 명을 넘었다. 1901년 이래 국방비는 국가예산의 절반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은 병사들의 자질 면에서도 ‘군사강국’이었다. 1894년 오스트리아 작가 헤세-바르텍은 조선 병사들이 건장한 체격에 키가 1m75㎝를 넘었다고 기록하고,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도 건장하고 훤칠한 한국군의 신식 복장은 “다리가 짧은 일본군”의 복장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고 쓰고 있다.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외에 3만 명의 신식 군대를 가진 나라는 없었다. 청국의 신식 군대는 왜군과 러시아군에 연패해 소멸한 상태였다. 대한제국은 3만 군대를 배경으로 1900년 울릉도·독도를, 1903년에는 북간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함북진위대와 간도관리사 이범윤의 ‘충의대’는 북간도에 거듭 침입한 청비(淸匪)들을 격퇴하고 간도를 지켜냈다. 이로써 고종은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 영토를 확립했다.
또한 대한제국은 ‘경제대국’이었다. 대한제국은 2236개소의 신식 학교와 무관학교·군사학교를 통해 근대적 산업역군과 신식 장병들을 길렀다. 또 시장제도를 창출하고 근대적 상공기업을 진흥했고, 서울의 도시계획과 교통통신체계도 확립했다.
그리하여 몇 년 사이에 한국은 괄목할 정도로 발전했다. 1901년 겐테는 서울이 “전신·전화·전차·전기조명을 동시에 갖춤”으로써 아시아 1위의 도시가 되었다고 하면서 중국인은 인력거를 타는데 한국인은 “전차를 타고 쌩쌩 달린다”고 썼다.
프리데릭 매켄지와 호머 헐버트도 입을 모아 “깜짝 놀랄” 한국의 발전을 말했다. 심지어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도 1900년 한국이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이행해 ‘세계적 경쟁’에 들어섰다는 비밀보고에 이어 1904년 무역이 ‘현저하게’ 발달했다는 보고를 본국에 올렸다.
앵거스 매디슨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대한제국은 고속 성장해 1911년 1인당 국민소득이 815달러에 달했다. 1915년에는 1048달러에 달해 일본(1430달러) 다음의 아시아 경제대국이 되었고, 그리스·포르투갈도 앞지르고 있었다. 1918년까지 일제는 한국에 전혀 투자하지 않고 약탈만 했다. 따라서 이 성과는 대한제국의 성장 관성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이 가난해 ‘자멸’했다거나 ‘근대적’ 경제성장은 일제 때야 개시되었다는 신(新)친일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대한제국은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일제에 ‘패망’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광복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부활했다.
대한민국은 국호·국화·국기·한국군·근대기업, 심지어 ‘한정식’ 등 대한제국의 거의 모든 것을 계승했다. 따라서 민족 정통성은 대한민국에만 있다. 이런 까닭에 대한제국의 폄하는 대민민국의 부정인 것이다.
[ 황태연 동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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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변란
- 아관망명정부의 사교단체서 친일 정치단체로 … 왕권 탈취 노리다 자멸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 등 창립 취지에 맞는 활동을 초기에 펼치다 점차 변질돼 갔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반러시아·아세아주의(동양평화론) 같은 친일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사진은 독립협회 초기 독립관에서 열린 강연에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창건 직후 고종은 독립신문·독립협회의 방해 공작에 먼저 맞서야 했다. ‘독립신문의 변절’에 대해선 지난주 기사(중앙SUNDAY 11월 5일자 10~11면)에서 살펴보았다. 고종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변절은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관망명으로 한반도에서 일제의 세력이 일시 퇴조한 시기에 창립된 독립협회에 친일 개화파들이 잠입해 다시 힘을 키워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들의 준동은 대한제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무장폭동과 변란으로 치달았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에야 비로소 고종은 대한제국 창건의 본래 목적인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화 추진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었다.
독립협회를 서재필이 창립한 것처럼 서술해 놓은 역사책이 많은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독립신문을 서재필이 창간한 것이 아니었듯이 독립협회도 그렇다. 이 같은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 완전히 거꾸로 기록돼 있는 것이 우리 역사책의 실상임을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종, 독립문 모금 등 ‘독립 이벤트’ 펼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 창간, 독립문 건립과 맥을 같이하며 창립됐다. 1896년 2월 11일 아관망명이 성공한 직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고, 6월 18일께 독립문 건립을 결정했으며, 바로 그 독립문 건립을 위한 추진위원회로 7월 2일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독립문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아관망명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대거 참여해 일종의 고위직 사교클럽 성격을 띠었다. 창립식이 열린 공간도 아직 친일파로 전락하지 않은 외부대신 이완용의 외부 건물이었다.
독립의 상징을 만들어 가는 일련의 작업은 모두 아관망명정부의 ‘독립 정책’으로 추진됐던 것이다. 고종은 독립문 건립 모금 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독립 이벤트’를 통해 국민들의 항일 독립 의지를 고취하면서 대한제국 창건을 준비해 나갔다. 그 출발점이 아관망명이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국사 교과서와 대부분의 한국사 책들은 아관망명을 일제가 붙여준 명칭인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면서 매우 부끄러운 행위인 양 비하하고 있다.
독립협회도 역시 독립신문처럼 대한제국 탄생(1897.10.12)을 전후해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교단체에서 친일 정치단체로 바뀌어 갔다. 일본으로 도망간 친일파 박영효·안경수가 독립협회에 끄나풀들을 잠입시켜 반정부 운동을 부추겼다. 대한제국의 항일·친러 노선을 흔들어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박영효 일당이 정권을 재장악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단골 주장은 외세배척이었는데 그 외세는 주로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고 일본에 대해서는 시종 우호적이었다. (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76~77쪽)
독립협회는 1897년 9월부터 러시아가 한국을 삼키려 한다는 ‘공아론(恐俄論)’을 퍼트렸다. 고종이 러시아 정부에 군사·경제 동맹을 요청했으나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저울질하면서 미온적 태도를 보이던 상황이었다. 러시아의 군사교관 증파와 재정고문 파견, 한러은행 설립, 절영도 러시아 저탄장 건설 등이 당시 러시아와 관련된 현안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반러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모든 사안을 무산시켰다. 고종은 러시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러시아와의 동맹 외교를 성사시키려고 하는데 독립협회는 그런 고종의 외교 노선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며 혼선을 빚게 했다.
독립협회 창립 임원진을 보면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이 포진해 있다. 이완용은 아직 친일파로 전락하기 이전의 ‘친미 정동파’로 분류됐다. 안경수는 일본공사관에서 ‘일본당’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일제와 긴밀하게 내통하던 인물이었다. 고종은 그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안경수의 정체는 독립협회 회장 재임 중이던 1898년 7월 ‘황제양위 음모 사건’으로 드러난다. 군주 전제정 체제를 구축하려는 고종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양위 쿠데타’를 도모하다 발각돼 일본으로 도망갔다. 이후 안경수는 일본에 체류하는 박영효 휘하에서 윤효정·이규완·황철 등 수하들을 국내에 들여보내고 만민공동회에 자금을 송금해 만민공동회를 장악해 나갔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50~74쪽)
1898년 2월 28일부터 슈페예르 러시아 공사는 본국에 한국의 반러 분위기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리고 있다. “반러시아 분위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벌써 독립협회 활동 때문에 피신해 온 자가 있으며 고종황제도 피신해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무라비요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1898년 3월 3일 슈페예르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다. “최근의 여러 보고서로 보아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자신과 대한제국이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그들을 소환하겠다.”(박종효 편역,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한국국제교류재단, 2002, 378쪽)
독립협회의 압력에 밀려 정부는 3월 19일 러시아 고문과 교관을 해고했다. 독립협회의 선동으로 여론도 반러로 쏠렸고, 그런 분위기에서 고종마저 상황판단에 혼선을 보이며 일시적으로 러시아의 손을 놓았던 것이다. 일본인 사학자 와다 하루키는 당시 상황을 누가 즐기고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와의 특별한 관계는 이로써 단절되었다. 일본 공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44쪽)
독립협회, 아세아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역들. 서재필(가운데)과 윤치호(왼쪽)는 독립협회를 이끌며 친일·반러시아 논조를 확산시켰다. 이승만(오른쪽·한성감옥 수감 시절)은 배재학당에서 만난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세아주의에 경도됐으며 만민공동회 연사로 나서 반러시아 주장을 펼쳤다. 훗날 이승만은 회고록에서 간접적으로 당시의 과오를 인정했다. [중앙포토]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가 반러 운동과 함께 확산시킨 이데올로기가 소위 ‘아세아주의(동양주의)’였다. 아세아주의는 한국과 일제의 대립관계를 동양과 서양의 대립으로 바꿔치기 했다. 서재필에 이어 윤치호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이끌며 이 논리의 확장에 앞장섰다. 황인종 대 백인종의 인종주의적 대결구도 속에서 한·중·일 아세아제국이 일본을 맹주로 단결해 서양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양과 동양 간에 당장 무슨 심각한 적대적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조작해낸 생뚱맞은 이데올로기였지만 독립협회의 선동에 넘어가는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청년 시절 배제학당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만민공동회에서 극렬한 반러·친일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863~869쪽)
훗날 이승만은 당시 일본에서 들어온 박영효계 인사들이 “돈을 물 쓰듯 쓰며” 휘젓고 다녔어도 자신은 “당시에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해서 그들의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후에 그들이 (…) 한국 지도자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썼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을 비롯한 배제학당 출신 친미세력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로 묘사했다.(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 260~261쪽) 이승만이 간접적으로나마 자신과 만민공동회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반성이 없는 여타 친일 개화파와 이승만이 구분되는 대목이다.
반러 운동으로 시작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변절은 왕권을 전복하려는 변란으로 치달았다. 독립협회는 1898년 7월 3일 올린 ‘시폐(時弊) 상소’에서 상·하원 설치를 요구하면서 시폐의 근원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법령은 홍범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소위 갑오개혁 때 친일파 박영효가 주도해 만든 ‘홍범 14조’를 다시 지키라고 나선 것이다.
석달 후인 10월 7일에도 독립협회는 홍범 14조를 다시 들먹인다. 소위 홍범 14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갑오왜란) 이후 고종이 포로로 유폐된 상태에서 일제가 친일 개화파 정부를 앞세워 추진한 것으로, 그 핵심은 고종의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친일세력은 아관망명을 거치며 기사회생한 왕권을 다시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대한제국 창건 직후 1898년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와의 대결로 점철됐다. 독립신문은 논설로, 독립협회는 집회를 통해 왕권을 압박했다. 친일파가 주도권을 쥔 독립협회의 활동은 명백히 ‘친일매국운동’이었으며, 설사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하물며 당시는 국망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왕권이 항일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상황이었다.
만민공동회 폭력화, 서울 무정부 상태로
독립협회에 맞설 조직으로 고종과 근왕세력은 7월 7일 황국협회를 출범시켰다. 그동안 우리 근대사 책들은 정교·윤치호·남궁억 등 독립협회 세력의 글을 통해 황국협회를 기술해 왔다. 매우 불공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폭력화하며 서울을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간 사실에는 눈을 감고 있다.
독립협회는 황제의 인사권과 의정부의 권한을 중추원으로 이동시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고종은 ‘헌의 6조’(1898.10.29)에 그런 음모가 내포된 것인 줄 모른 채 이를 수용하는 실수를 범했다. 중추원 의관의 절반을 독립협회가 장악할 경우 국가 권력이 독립협회에 통째로 이전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이에 조병식 등 근왕세력은 이런 음모를 간파하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1898년 11월 4일 밤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부 체포 명령을 내리고 헌의 6조를 무효화함으로써 일단 한숨은 돌렸으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갔다. 근왕세력 인사들의 집을 공격하고 황국협회의 지지기반인 보부상의 사무실을 파괴했다. 12월 6일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의 빈민 1200명을 고용해 목봉을 휴대하게 하는 등 무장경비까지 시키면서 정국을 무정부 상태로 휘몰아 갔다.
이때부터 남궁억·이상재 등 독립협회 내 온건파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발길을 끊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는 계속 만민공동회를 통해 자신의 정계복귀를 요구하도록 추동했고, 결국 중추원에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포함시킨 대신(大臣) 임명 요청안을 가결시키게 했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목적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이것은 결국 독립협회가 민심으로부터 고립당해 자멸하는 변곡점이 됐다.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공사는 물론 일본공사까지 불러 만민공동회의 폭란을 진압하는 것에 대한 의향을 타진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일본공사도 자신들이 ‘폭란의 배후’로 지목당할 것을 우려해 진압에 찬성했다.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뮈텔 프랑스 주교조차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서재필과 박영효를 정부에 등용하라는 제언이 시위대들의 평판을 나빠지게 하고 군중을 이탈하게 만든 데다 결국 정부를 격분시키고 정직한 백성을 각성시켰다.”(『뮈텔 주교 일기(2)』 1898.12.27)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대적으로 변한 민심의 분노는 당시 여러 신문의 논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이 발간한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이 2월 23일 가장 먼저 만민공동회의 비행을 비판했다. 남궁억 등 독립협회 내 온건파가 관여하는 ‘황성신문’도 12월 26일 논설에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권고했다. 그리고 이승만이 한때 주필로 활동했던 ‘제국신문’도 중추원의 ‘박영효 추천’과 관련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잘못을 비판하고 나섰다.(제국신문 1898.12.28.)
민심 이반과 언론의 비판 속에 고립된 친일 과격파의 말로는 테러 행각이었다.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과 임병길·최정덕 등이 중심이 돼 근왕세력에 대한 폭탄·방화 테러를 자행했다. 고영근과 최정덕 등은 결국 1899년 6월 13일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렇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자멸의 길을 걸어갔음에도 우리 역사책들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개혁파로 설정해 놓고 ‘수구파’ 고종과 근왕세력의 탄압으로 민권·개혁운동이 실패해 아쉽다는 식으로 묘사해 놓았다. 심지어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애국계몽운동의 선구이자 독립운동의 진원지로까지 왜곡해 놓은 것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오류는 박은식(1859~1925) 같은 애국지사의 저서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에 대한 고종의 지원이나 독립협회의 친일 변질, 박영효의 배후조종 등에 대해 전혀 몰랐다. 박은식은 심지어 “일본이 우리 정부와 동의해 법을 설정하고 독립협회를 방해했다”는 식으로 완전히 잘못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고종과 근왕세력들을 ‘보수파’로 몰아 비판하고 “오직 독립당만이 신사조직에서 유래해 정신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을 최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격찬한다.
독립협회 세력에 대해서는 전술적 ‘성급함’만을 지적하고 있다.(박은식, 『한국통사』 제3편.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50~53쪽) 당시 매일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에서, 그리고 심지어 독립신문까지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거듭된 과오를 지적하고 있는데 박은식은 마치 그 시대에 살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잘못된 기술을 하고 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922~923쪽)
오류는 오늘날까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박은식 선생’이 그렇게 기록했으니까 다 맞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친일 변절을 통한 자멸에 대해서는 김용섭·주진오 등을 필두로 한 여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음에도 좀처럼 잘 고쳐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주진오·연세대 박사학위 논문·1995),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경세원·2016), 김용섭 ‘서평:신용하, 『독립협회 연구』’(『한국사연구』12·1976),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소명출판·2008), 이승만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정식·『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동아일보사·2002)
[출처] :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쓰는 근대사> / 중앙Sunday
12. 비상계엄체제와 원수부
- 경운궁 內 원수부는 계엄사령부 … 국방력 증강 이끈 최고 권력
경운궁(현재 덕수궁) 대안문(大安門·현재 大漢門)의 오른편 2층 서양식 벽돌 건물이 대한제국의 계엄사령부 역할을 했던 ‘원수부’다. 대안문은 본래 경운궁의 동문이었으나 사용이 많아지면서 정문 기능을 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고종의 행차 장면으로 보이는데, 촬영 시기는 대안문과 원수부 사이로 중화전(경운궁의 정전)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볼 때 중화전이 창건되던 1902년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발행된 『청한전시풍경사진첩(淸韓戰時風景寫眞帖)』에 수록돼 있다. [사진 박종만]
독립협회의 변란이 해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한제국은 항일 독립투쟁과 근대화 개혁을 본격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항일 독립투쟁과 근대화 개혁은 ‘원수부(元帥府)’와 ‘궁내부(宮內府)’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경복궁에 있던 의정부가 조선시대 행정의 최고기관이었다면 원수부와 궁내부는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신설된 대한제국 행정의 실무적 중심이었다. 조선과 대한제국 시대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대한제국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핵심에 해당한다.
원수부와 궁내부 둘 중에 특히 먼저 주목해야 할 기관은 원수부다. 그런데 우리 국사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궁내부는 어느 정도 서술하고 있어도 원수부는 그렇지 않다. 이름 정도 언급되거나 아예 거론조차 않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에 대한 이해의 핵심을 빼놓은 셈이다. 궁내부가 서민 출신 이용익이 중심 역할을 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전반적으로 이끌었다면, 원수부는 국방 개혁의 중심이었다.
엄밀히 말해 원수부는 국방을 담당하는 하나의 부 단위를 훨씬 넘어섰다.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라면 기존의 군부가 있었다. 그걸 뛰어넘는 ‘부서 위의 부서’로서 원수부를 창설한 것이다. 원수부는 일종의 계엄사령부 역할을 했다.
1899년 6월 2일 ‘원수부 관제’가 반포되었는데 실제는 1년 이상 준비를 거쳤다. 원수부 관제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국 체제’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1관 제1조에서 국방·용병·군사(軍事)에 관한 모든 군령권을 원수부에 귀속시켰다. 제2조는 모든 군령을 대원수가 원수를 경유해 하달한다고 규정했다. 대원수는 고종, 원수는 황태자였다. 대원수는 계엄사령관이고, 원수부는 계엄사령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3조에서는 원수부를 황궁에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일제와 친일 개화파의 마수가 미치지 않는 경운궁 망명지에 원수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군부는 원수부를 지원하는 일개 부서로 격하되었다.
대한제국은 ‘비상계엄 상태 국내 망명정부’
대한제국 대원수보(大元帥寶)’. 사실상 계엄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원수부(元帥府)’에서 계엄사령관 역할을 했던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도장. [사진 국립전주박물관]
원수부는 거듭된 관제 개정을 통해 위상이 계속 높아졌다. 1900년 3월 20일 관제 개정에서 국장의 호칭이 총장으로 바뀌었고, 원수부 총장에게 거의 ‘반(半)계엄사령관’이라 할 만한 높은 위상을 부여했다(『관보』8, 제1528호, 광무4년·1900.3.22.).
원수부 총장이 황제의 칙령을 받들어 각부 대신에게 ‘지령’할 수 있게 했고, 주임사무관(主任事務官)으로 하여금 ‘지조(知照·알려줌)’할 수 있게 했으며, 경무사·관찰사·한성부재판소 및 재판소 판사 이하 관원들에게는 직접 훈령·지령을 할 수 있게 했다. 원수부 총장의 위상은 단순한 국장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원수부가 대한제국 최고 권력기관이자 계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음을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원수부는 대한제국이 ‘비상계엄 상태의 국내 망명정부’였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법제라고 할 수 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76~678쪽).
이 같은 원수부에 왜 그동안 많은 주목을 하지 않은 것일까. 사료도 있었고 부분적으로 연구도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자체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자세가 우리 국사학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연구가 나와도 종합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국방력 강화는 대한제국 최대의 급선무였다. 러시아 교관들의 훈련을 받은 새로운 ‘시위대’를 주력으로 삼아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 1901년 무렵에는 3만 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도 창설해 1904년까지 임관한 장교가 476명에 달했다. 사진은 시위대의 훈련 장면으로 추정되는데, 장소는 동대문 부근 ‘훈련원 공원’ 자리로 보인다. [중앙포토]
원수부는 고종의 국방력 증강 계획의 정점에 해당한다. 그 이전에도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부터 최대 관심사가 국방력 강화였다. 아관망명(1896.2.11) 감행으로 왕권을 회복한 이래 대한제국 창건(1897.10.12)을 거치며 고종이 최우선으로 추진한 정책이 바로 첨단 무력의 확보였던 것이다.
경운궁의 망명지 성격을 없애기 위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당연히 국방력 강화였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서울과 지방의 강토를 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당시 용어로는 신식군대의 확보였다. 러시아에 군사교관 증파를 계속 요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러시아·프랑스·영국·미국 가운데 한 국가를 동맹으로 얻거나 이들로부터 중립노선을 인정받는 것도 최단 시일 내에 한국이 자체 무력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국방력 강화에 대해 일제와 친일 개화파는 독립협회를 앞세워 그 힘을 빼려고 했다. 국방력 강화와 약화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1898년 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국방력 증강에 대한 고종의 절실한 갈망은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한 데서 극명하게 표현됐다(『고종실록』 광무1년·1897.8.14). 광무란 ‘빛나는 무력’이란 뜻이다. 의미론적으로 ‘상무(尙武)’를 뛰어넘는 말이다. 비밀스럽게 병력을 증강하던 고종은 1898년 7월 2일부터 그 의지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주밀(綢繆·촘촘하고 빽빽)한 군비(軍備)는 국가의 최우선 급무니,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금일에는 더욱 그렇다”고 공식 선언했다(『고종실록』 광무2년·1898.7.2).
국방력 강화 방식은 신속한 병력 증강과 신식무기의 도입을 통해 이뤄졌다. 병력 증강의 중심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러시아 교관들이 새로운 ‘시위대’를 훈련시키는 일이 최우선 작업이었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시위대를 기반으로 하여 일제에 의해 오염된 기존의 친위대를 러시아 군대식으로 개편하는 일이 그 다음 작업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지방의 부대들을 러시아식으로 교육해 ‘진위대’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위대는 대한제국의 황궁과 서울을 수비하는 첨단 무력의 신식 정예군이었다. 그 위상에 걸맞게 특급대우를 받았다. 1898년 5월 반포된 봉급명세에 의하면, 시위대 정위(대위)는 79원 83전을, 부위(중위)는 56원 66전을 받았다. 이것은 가령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 담당) 정위의 봉급 34원, 부위 봉급 28원에 비하면 두 배나 많은 액수였다(서인한,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82쪽).
시위대는 1896년 10월 입국한 드미트리 바실리예비치 푸차타 대령 휘하 13명의 러시아 교관단에 의해 훈련됐다. 기존의 친위대로부터 821명을 차출해 4개 중대, 1개 대대를 조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들에게는 러시아제 최신식 베르당 소총이 지급됐다.
1897년 9월 고종은 시위대 1개 대대를 증설해 시위대를 모두 2개 대대로 증편했다. 이 시위 2대대를 훈련시킨 것도 러시아 교관단이었다. 시위대는 1년 새 정예병 2000명의 대부대로 발전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22쪽).
한국군 병력의 급성장에 놀란 것은 일제였다. 러시아 교관들부터 쫓아내려고 했다. 친일파의 소굴로 변질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왜 그렇게 반(反)러시아 집회를 지속적으로 열었는지 그 이유가 이런 데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교관단을 해임하라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극렬한 요구에 밀려 고종은 결국 1898년 3월 12일 이들을 해임했고, 러시아 교관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육성해 놓은 한국 장병들이 이제 교관과 조교가 되어 직접 사관과 신병의 훈련을 맡아 병력 증강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98년 5월 27일엔 시위 제1·2대대를 통합해 시위 제1연대로 편성하는 칙령이 반포됐다. 1898년 7월 2일에는 시위대 육군을 10개 대대(1만 명)까지 증강하고 포병 1개 중대를 창설하는 계획이 발표됐다. 대포는 회선포(미제 개틀링 기관총)와 극노백(克魯伯·독일제 크루프 대포)이었다. 이 포병 중대는 시위 제1연대에 부속됐다.
보병부대와 포병부대가 창설되고 증강되면서 많은 근대적 무기들도 러시아·프랑스·독일 등으로부터 수입됐다. 1901~1902년 무렵 한국 정규·비정규 장병들이 보유한 소총은 도합 5만 정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35쪽).
1901년 9월에는 ‘육군 피복 제조소’를 설치해 군복을 제작하는 등 군수물품과 무기의 자체 생산에도 일정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황성신문 1901.10.17 ‘잡보:皮服製所’). 1901년부터 고종은 징병제를 계속 추진했으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끝내 도입하지 못했다. 해군 창설도 전략상 보류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계속 증강된 대한제국 육군 병력은 1901년 초 통계에 잡힌 숫자를 보면 2만8833명에 달했다. 시위대(궁궐·도성수비대, 5192명), 호위대(국왕 행차 경호·735명), 친위대(4324명)를 합친 서울 중앙군 병력(1만251명)과 지방의 진위대 병력(1만8582명)을 합산한 수치다. 통계로 잡히지 않은 전국의 포군과 무관학교 생도 및 교관들을 더하면 한국군 총 병력은 3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이에 따라 군 예산도 급증했다. 1896년 전체 예산 대비 군부 예산의 비율이 21.38%였고, 이로부터 가파르게 증가해 1901년 이후에는 전체 예산의 40%에 도달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41쪽). 이 정도의 군 예산 비율이면 ‘비상계엄 군사국가’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3만 대군 배경으로 독도와 북간도 ‘행정 편입’
청나라의 신식군대는 1894~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왜군에게 연전연패해 궤멸했고, 잔여 청군은 1900년 7~10월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과 충돌해 대패하고 청비(淸匪)로 전락했다. 따라서 1900년 전후 시기에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중 일본을 제외하고 어떤 나라도 3만 명의 신식군대를 가진 나라는 없었다. 병력 수만 많아진 것이 아니었다. 전투력도 일본을 제외할 때 아시아 최강의 군사강국이라 할 만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671쪽).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군사강국이었냐고 반발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제국을 너무 우습게만 보는 것이다. 청나라의 신식군대와 세계적 군사강국 러시아의 육·해군을 다 이긴 일본군을 이기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침략적 병력이 아니라 중립국 지위를 얻기 위한 방어용이라면 3만 명이 결코 적은 군사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된 이후 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독립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전투력을 과시한 사실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텐데 오히려 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대한제국은 3만 대군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해서 1900년 독도를 울릉군에 속한 속도(屬島)로 명확하게 행정적으로 편입시켰다. 또 한국인들이 들어가 살던 북간도를 1903년 행정체제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했다. 700~1000리의 북간도를 대한제국의 근대적 영토로 확립한 것이다. 대한제국은 3000리 강토를 4000리로 늘려 광개토대왕 이래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군 함북진위대와 이범윤의 충의대(忠義隊)는 1901~1903년 북간도에 침입한 청병(淸兵)이나 청비와 싸워 연전연승함으로써 간도를 지켜냈다.
대한제국은 황제 직속의 국가정보기관도 운영했다. 이름이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다. 주로 일본 군대·경찰 및 친일파의 동향을 조사했다. 비밀기관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은 것이 거의 없어서 그 존재를 몰랐다가 1997년 무렵 이태진에 의해 ‘제국익문사 비보장정(秘報章程)’이 발굴·분석되었다. ‘통신원’으로 불린 정보원은 5종이었다. 상임통신원 16인, 보통통신원 15인, 특별통신원(외국공관·일본군사·항만시설 담당) 21인, 외국통신원 9인(도쿄 2, 오사카 1, 나가사키 1, 북경 1, 상해 1, 여순 1, 블라디보스토크 1) 등 61명 이상이었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393~402쪽).
러시아에 국가정보국이 설치된 것이 1903년 1월 21일이다. 그것도 참모본부 산하에 두고 헌병 대위가 초대 국장을 맡은 작은 규모였다(최덕규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1904~1909)’ 44쪽). 그런 것과 비교하면 고종이 1902년 6월 ‘제국익문사 비보장정’까지 제정하며 설치한 제국익문사는 매우 앞선 정보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의 시위대와 친위대, 그리고 지방의 진위대가 모두 대폭 증강됨에 따라 무관(장교)의 수요도 늘었다. 이에 따라 1898년 7월 1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옛 훈련도감 자리에 교사를 짓고 개교했다.
1898년 1회 입학 생도 200명은 1년6개월 교련을 마치고 1900년 1월 128명이 임관했다. 1900년 11월 제2회 때도 입학 생도 350명 중 거의 전원에 해당하는 348명이 임관했다(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39쪽).
이렇게 임관한 장교의 수는 1904년까지 도합 476명에 달했다. 이 장교 집단에는 단지 좋은 대우 때문에 군문(軍門)에 들어온 입신 출세자가 많았지만, 자주독립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들어온 ‘민족 장교’도 적지 않았다(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24쪽).
뜻있는 장교들은 다수가 아니었지만 그 역할은 지대했다. 1907년 한국군 해산 이후 각종 의병과 항일전쟁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에서의 혁혁한 성과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 의해 주도됐다(박성수 외, 『현대사 속의 국군』, 전쟁기념사업회, 1990, 95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군무총장 이동휘,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김좌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모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와 밀산무관학교 등 만주 소재 독립군 무관학교의 군사교관들도 대부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신흥무관학교 한 곳에서 육성된 장교의 수만 무려 8000명에 달했다.
독립군 장교 양성의 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내 각종 군관학교에서의 한국군 위탁교육을 거쳐 1940년 9월 17일 창군된 광복군으로 이어졌다. 그 맥은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로 이어졌으니,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 장교의 뿌리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건군사(建軍史)』, 2002, 48쪽).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관, 국립전주박물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2017),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한영우ㆍ경세원ㆍ2016),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서인한·혜안·2000),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임재찬·제일문화사·1992),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정보국’(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81·2014), 『현대사 속의 국군』(박성수 외·전쟁기념사업회·1990),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지복영·문학과지성사·1995)
[출처] :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쓰는 근대사> / 중앙Sunday
13. 광무개혁과 궁내부 - 1901년 서울은 이미 서양인도 감탄한 ‘근대적 대도시’
궁내부 469명 근무, 근대화 총괄 - 항일 독립전쟁·개혁 자금 확보
국공립·사립 학교 2236개 설립 - 일제 병합 후 오히려 서당이 늘어
1901년 전신·전화·전차·전기 갖춰-북경·동경·방콕 등 대도시 앞질러 -위스키·안경 등 서양 물건 유통
대한제국의 근대화 철학인 신구 절충의 구본신참론은 정궁이었던 경운궁(현재 덕수궁)에서도 확인된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정관헌·구성헌·돈덕전·중명전·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을 신설했다. 중화전 오른편에는 석어당·함녕전·준명당·즉조전 등 전통 건물이 배치됐다. 1897년 계획이 수립돼 1910년 완공된 대표적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영국인 존 레지널드 하딩이 설계했다
대한제국의 존재 이유는 항일 독립전쟁이었지만 그 전쟁도 경제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다. 고종의 개혁 철학인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에 의거한 근대화 개혁은 짧은 기간 내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당시의 근대화정책을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를 붙여 ‘광무개혁’이라 부른다. 광무개혁의 성과 또한 항일 독립전쟁만큼이나 눈부신 것이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군과 일본공사관이 들여다볼 수 없는 ‘국내 망명지’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에 새롭게 배치된 궁내부와 원수부는 광무개혁의 쌍두마차였다. 원수부가 항일 독립투쟁을 위한 국방력 강화를 지휘했다면(중앙SUNDAY 11월 19일자 참조) 이번에 살펴볼 궁내부는 근대화 개혁을 총괄했다. 근대화 사업 관련 새 기구들은 모두 궁내부에 귀속됨으로써 1903년께 궁내부는 총 인원이 469명에 달하는 방대한 부서로 자리 잡았다.
대한제국이 수행한 항일 독립전쟁과 근대화 개혁 자금은 모두 궁내부가 확보한 재원으로 충당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세수 확보와 철저한 보안이 필수적이었다. 궁내부의 재정 권한은 궁내부 내장원에 집중됐고, 고종의 최측근이자 내장원경인 이용익이 전적으로 업무를 관할했다
문화적 근대화와 학교 건립 확산
석조전 실내 중 가장 화려하고 위엄 있게 조성된 접견실. 실내 의장의 설계와 시공은 영국 메이플사가 맡았다. [사진 문화재청]
‘문화적 근대화’가 시작된 것도 대한제국 시기였다. 정부 공문서의 국문화 혹은 국한문화가 시행됐다. 순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은 ‘국문 생활’의 막을 열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한글의 기본 형태는 이 시기에 거의 완성됐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면 고종은 국문(나라의 문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고종이 태극기를 국기로 선포한 데 이어 애국가와 무궁화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국가의 상징’으로 지정됐다. 이는 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이 붐을 이루며 신설됐다. 1909년 11월 현재 대한제국의 국공립과 사립학교는 모두 2236개였다.(대한매일신보 1909.11.11. ‘잡보:학교 총수’) 그러나 학교 설립은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급격히 줄었고, 그때부터 오히려 전근대적 서당이 늘었다. 1
910년 무렵 1만6500개였던 서당은 1919년께 2만3500개로, 서당 학생 수는 14만 명에서 26만8000명으로 급증했다.(박득준, 『조선근대교육사』 213~214쪽) 대한제국 시기의 ‘교육 근대화’ 성과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됐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서울 도시개조사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주미 공사를 2년간 지냈던 한성부판윤 이채연이 ‘워싱턴DC’를 모델로 했다. 이채연은 황토현(현재 광화문 부근)~흥인문, 광통교(광교)~남대문의 도로 폭을 50척으로 하는 도로계획 법령을 공포·시행했다. 더럽고 지저분했던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 갔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경복궁 내 건청궁에 가설한 전등은 그 시점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것이었는데 1900년 4월 10일부터는 종로 거리를 시발로 서울의 모든 대로에 전기 가로등까지 켜지기 시작했다.
1896년 10월 2일에는 덕수궁~인천 사이에 시외 전화가 개통됐고, 서울시는 곧 100회선의 전화를 개설했다. 서울의 전화 개설은 알렉산더 벨이 1876년 전화를 발명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고, 동경(도쿄)의 전화 설치와 거의 동시였다.(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328~355쪽)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에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다. 사진은 1899년 5월 개통된 전차가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하는 모습.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서울의 전차 운행은 동경보다 2년, 홍콩보다 5년, 상해보다 9년, 북경보다 25년이나 빨랐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사진 서울시립대 박물관]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 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 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양 물건을 파는 상점의 품목을 보면 서양 문물은 이미 대한제국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위스키·맥주·포도주·안경·경대·시계·양산·양복·수건·모자·장갑·가죽지갑·반지·허리띠·장난감·유성기·서양악기·문방구·의자·난로·천리경·우표·철도시간표·선박시간표·우유 등 서양식료품·여행장비·직조기·재봉틀·운동기구·자전거 등을 일반인들도 구입할 수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물건은 대부분 대한제국기에 도입된 것들이다.(현광호, 『대한제국의 재조명』 232~233쪽)
오스트리아 작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본 ‘1894년 여름 서울’의 풍경은 참담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오물과 똥이 천지인 도시”였고 “서울에 밤이 찾아오면 온 천지가 깜깜하고 여기저기 겨우 희미한 불빛만 깜박거릴 뿐”이었다.(Ernst von Hesse-Wartegg, Korea 1894, 54쪽, 131~132쪽)
그러나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훨씬 순수하다.” (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고종은 서구 문물 수용에 무조건적이지도 않았지만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정척사파 대 친일개화파’의 이분법으로 한국 근대사를 서술하면서 고종과 근왕세력을 척사파 쪽에다 위치시켜 놓곤 한다. 대한제국에 대한 왜곡은 이 구도에서 비롯된다. ‘척사파=수구파’ ‘친일개화파=개혁파’로 서술하면서 고종과 근왕세력을 수구파에 배치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아관망명 후 고종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근대화 개혁을 적극화하고 가속화했다. 그는 일련의 칙유를 통해 그간 국망의 재앙을 초래한 동도서기론과 친일개화론을 둘 다 비판하고 구본신참론을 새로운 근대화 철학으로 제시했다.
“구장(舊章)을 따르면서 신규(新規)를 참작하고 민국의 편의와 관계된 것은 참작 절충해 꼭 실행하기를 힘쓴다”(『고종실록』 1896.9.24)고 했다. 또 “구규를 본으로 삼고 신식을 참작하는 것(以舊規爲本 參以新式)”이라며 “자국 법제를 버리고 일률로 타국 제도를 추종하는 것이 어찌 개혁이겠는가?”(『秘書院日記』 1897.1.20)라고 밝혀 놓았다.
붉은 벽돌과 서양식 기둥에 팔작지붕의 전통 양식이 조화를 이룬 경운궁 내 정관헌. 연희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됐다. [중앙포토]
식산흥업정책과 경제의 근대화
구본신참론은 ‘국도(國道)’와 ‘국기(國器)’를 본으로 삼되 신문물의 ‘참작’(한국화)에 의해 혁신하는 신구 절충의 개혁 철학이었다. 이는 국도와 국기를 둘 다 민족자주적으로 근대화함으로써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중도개혁 노선으로서, 개화파의 전통파괴적·반민족적 개화 지상주의를 배격하면서 동도서기론도 물리쳤다.
동도서기론은 ‘서기(西器)’는 직수입하되 ‘서도(西道)’는 무조건 배척하고 몰(沒)민족성·사대주의·반상차별·여존남비 등의 ‘동도(東道)’는 고수했기 때문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925~1014쪽)
서울의 근대적 변모는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해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제국 초기에 농상공부가 주관해 심혈을 기울인 업무는 제언(堤堰·둑) 수축을 통한 농업용 저수지 건설과 황무지 개간이었다. 동시에 양잠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농업·양잠업 진흥정책에 힘입어 농림회사들이 잇따라 창설됐다.
농림업 부문 최초의 회사는 1899년 정부 관리와 유학생 출신들이 함께 세운 ‘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였다. 합자회사라는 명칭도 이 회사가 최초다.(황성신문 1900.11.21)
이후 개간회사·목양사·양잠회사(1900), 농업회사(1901), 농광(農鑛)회사·인공잠농회사(1904) 등이 속속 등장했다. 활발하게 근대적 농업회사들이 설립됐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탈이 가혹해지면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농업·양잠업과 함께 상공업 진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상공업 교육과 기술을 보급하면서 회사 설립을 장려하고 외세 침투로부터 상공인들을 보호했다. 1896년 아관망명부터 1904년까지 9년 동안 무려 205개의 회사가 창설됐다.
금융업 11개, 농림업 16개, 제조업 18개, 광업 9개, 상업 67개, 운수업 27개, 수산업 3개, 청부토건업 14개, 기타(인쇄·출판·제약·매약·유흥업·용역업 등) 분야에서 40개였다.(전우용, 『한국 회사의 탄생』 130~137쪽)
1910년 당시 납세를 하는 공식 부문의 근대적 대기업(당시 종업원 100명 기준)은 도합 703개로 추산되고 있다. 상업·금융·공업·운수교통·토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비공식 부문의 무허가 중소기업들까지 합하면 대한제국기에 이미 수많은 기업이 거의 매일 생겨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자본의 침투로부터 국내 상업을 보호하면서 조세를 거둬 세수를 늘렸다. 내장원과 관료들은 이렇게 축적된 세수를 ‘관료자본’으로 전환시켜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신속한 자본주의화’를 열어 가고자 했다. 관료자본의 투자 활동은 은행 설립(1898년 특립제일대한은행, 1899년 대한천일은행), 철도 건설, 전기회사 설립, 연초제조회사 설립 등으로 나타났다.(이영학, ‘대한제국의 경제정책’ 48~49쪽)
대한제국 정부는 후발자본주의 국가 독일처럼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독일처럼 보호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은 외국 영사관들의 압박으로 인해 채택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기존의 상업단체들인 도고·수세회사·상무사 등의 독점권을 인가함으로써 외국자본의 시장 잠식으로부터 국내 상공업을 보호했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54~1055쪽)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인 캐나다인 프레더릭 매켄지 등은 광무개혁의 성과를 적극 인정했다.(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456쪽. Frederic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62~63쪽) 지한파 구미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던 일제 고위 관리의 발언도 주목된다.
1900년 2월 1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외무대신에게 “무릇 상업상 당국(한국)의 지위는… 단순한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들어서는 데 이르러 한두 동양 국가들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세계적 경쟁 영역에 임하고 있다”고 기밀보고를 했다.(『일본공사관기록』 1900.2.19)
1904년 10월 29일에는 “한국의 무역은 해마다 다소 소장(消長)이 있지만 발달의 추세가 현저하다”는 보고도 했다.(이태진,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150쪽)
대한제국의 경제 성장은 각종 통계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대한제국 정부의 세출예산을 보면 대한제국은 창건 9년 만에 예산이 약 4.6배나 늘었다. 경제 규모가 그만큼 늘어났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이윤상,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표:1900년 전후의 세출예산 및 군사비 규모 증가 추세’)
1990년대 이후 러시아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드러난 대한제국 수출의 증가 상황도 참고할 만하다. 대한제국의 무역 총량은 1901년 1800만 엔을 상회했고, 1904년에 곱절이 되었으며, 1910년엔 6000만 엔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의 1910년도 수출액이 1901년에 비해 무려 5.4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한국의 주요 무역 상대국은 일본·중국·러시아·미국·영국 등이었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513쪽)
오랜 세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통계의 책임을 맡았던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통계자료도 있다. 매디슨이 2012년 산출한 한·중·일 각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통계를 보면 한국 경제는 늦어도 개항 훨씬 전인 1869년 이전에 저점을 통과했고, 대한제국기 전반에 걸쳐 고도성장이 진행됐다.
매디슨 통계에 따르면 1911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815달러로 아시아 4위에 올랐다. 1915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달해 미국 치하의 필리핀(875달러)과 네덜란드 치하의 인도네시아(866달러)도 뛰어넘어 ‘아시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나타났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60~1062쪽)
1911년 1인당 국민소득 815달러로 亞 4위
1906년 이후 일제 통감부의 정책이 대한제국의 고도성장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재정고문이 부임할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령이 ‘대한시설강령’(1904년 10월 일본 각의 결정)이었는데, 여기엔 대한제국 경제를 진흥할 수 있는 그 어떤 식산흥업정책이나 개발투자계획도 들어 있지 않았다.
‘대한시설강령’ 중 경제 관련 항목은 ‘재정기관을 감독하고 정리할 것’ ‘교통·통신기관을 장악할 것’ ‘척식(拓植)을 기도할 것(한국의 영토나 미개지를 약탈해 일본인의 이주 정착을 촉진)’뿐이었다.(김운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 119쪽)
1911년의 815달러는 순수하게 대한제국의 경제 성과를 보여 주는 통계라는 얘기다. 1915년께의 1048달러도 대한제국에서 조성된 경제 도약의 여파가 이어진 결과였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5년 동안에도 일제 총독부는 아무런 식산흥업정책이나 개발 투자 없이 무단정치에 의거한 토지 약탈, 경제구조 왜곡(식민지 예속화)에만 부심했기 때문이다.
1915년 1인당 국민소득 1048달러에 도달한 한국의 생활 수준은 당시 유럽과 비교해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15년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288달러, 미국 4864달러, 프랑스 3248달러, 독일 2899달러, 오스트리아 2653달러, 이탈리아 2070달러, 스페인 2033달러, 포르투갈 1228달러(1918년에는 1150달러), 그리스 1143달러(1916년은 972달러, 1917년은 848달러)였다.
1915년 당시 한국의 생활 수준은 서유럽의 변방 국가들(포르투갈·그리스 등)과 대등하거나 곧 이 국가들을 앞지를 기세였던 것이다.(황태연,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1060~1065쪽)
자문 전문가와 기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덕수궁 대한제국역사관, 서울시립대 박물관.
참고자료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황태연·청계· 2017), 『한국 회사의 탄생』(전우용·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1), ‘대한제국의 경제정책’(이영학·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편·『대한제국의 토지제도와 근대』·혜안·2010),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고종시대의 재조명』(이태진·태학사·2000),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이태진·교수신문 편·『고종황제 역사청문회』·푸른역사·2008), 『1894~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이윤상·서울대 박사학위 논문·1996), 『대한제국의 재조명』(현광호·선인·2014), 『일본제국주의의 한국통치』(김운태·박영사·1986·1999), 『조선근대교육사』(박득준·한마당·1989)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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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 역사에서 사라진 ‘갑진왜란’… 41년 최장기 항전의 도화선
1894년 갑오왜란, 1904년 갑진왜란 - 근대사의 결정적 두 전쟁 누락
일제의 ‘평화적 합방’ 꾸미기 전략 - 한국 학계도 일제의 왜곡 반복
‘국군+민군’ 치열한 국민전쟁 전개 - 1907~11년 일제 통계만 봐도
국민군 병력 14만 명, 2만 명 전사 - 그럼에도 ‘한말 의병 투쟁’ 축소
1904년 2월 8일 오후 4시 일본 해군 제3전대가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시아의 소형 포함 ‘카레예츠호’를 어뢰로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이에 앞서 2월 6일 일제는 한국을 재침략했다. 갑진년(1904)에 일어난 이 ‘갑진왜란’은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누락됐다. 사진은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년 4월 2일자에 실린 러일전쟁 화보. [사진 명지대 LG연암문고]
대한제국(1897. 10. 12~1910. 8. 29)의 역사는 다섯 단계로 나뉜다. 창건-혼란-안정-위기-국민전쟁 시기로 세분해 볼 수 있다.
1기 창건기는 1898년 3~7월께 독립협회의 변란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를 포괄한다. 갑오왜란(1894. 7. 23) 이후 경복궁 내 포로 상태였던 고종이 아관망명(1896. 2. 11)을 통해 극적으로 왕권을 회복하여 칭제건원운동을 거쳐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대외적으로 승인을 받았던 시기다.
제2기 혼란기는 독립신문·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반러·친일 변란으로 대한제국의 존립이 도전받고 왕권이 탈취당할 뻔한 시기다. 1898년 3~7월부터 12월까지 최장 10개월의 기간이다.
제3기 안정기는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친일 변란을 진압한 1899년 초부터 1903년 12월까지 5년간이다. 3만 명 규모의 신식 군대 육성, 전차·철도·전신·전화 등 교통·통신 체계의 완비, 근대적 회사 설립 장려 정책 등 ‘광무개혁’이 이때 본격 추진됐다.
제3기까지를 지난 기사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제4기와 5기를 돌아볼 차례다.
제4기는 국가 위기로, 일제가 1904년(갑진년) 2월 6일 재침해 한반도 전역을 군사적으로 다시 점령한 시기다. 이는 ‘갑진재란’ 또는 ‘갑진왜란’으로 불려야 마땅함에도 우리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1894년의 갑오왜란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똑같은 일이 10년 만에 다시 반복됐다. 1894년의 갑오왜란·청일전쟁, 1904년의 갑진왜란·러일전쟁의 발발은 쌍둥이처럼 그 구조가 닮았다. 둘 다 한국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일제에 의해 기획되고 은폐된 전쟁이다.
조선은 갑오왜란으로 멸망했고, 대한제국은 갑진왜란으로 멸망한 것이다. 한국사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 두 차례의 왜란을 복원해야 대한제국이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극악한 ‘군사 정복’으로 멸망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7~27쪽).
갑진왜란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관통하는 장기 전쟁을 거쳐 1945년 종결됐다. 우리 민족은 고려 삼별초의 37년간 ‘항몽(抗蒙) 전쟁’보다 더 긴 41년 장기 항전을 전개했다. 갑오왜란부터 치면 51년간 하루도 쉴 새 없이 싸운 항일전쟁이다(최덕규 해제,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85쪽).
일본 군사사(軍事史) 전문가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는 갑진왜란을 ‘조선병합전쟁’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으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병합은 격심한 민족적 저항에 직면해 4년에 걸친 군사행동을 수반하게 되었다.
평화적으로 합병이 이뤄졌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이 식민지전쟁은 비밀에 부쳐져 그 군사작전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도 비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식민지화를 위한 전쟁이었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日本軍事史)』 163쪽)
후지와라는 일본인일지라도 ‘한국병합전쟁’ 또는 ‘식민지전쟁’으로 규정하며 갑진왜란의 실상을 갈파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일제가 꾸며낸 ‘평화합방의 모양새’에 속아 이 갑진왜란의 존재를 역사책에서는 물론 의식에서조차 지워버린 상태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0~31쪽).
일제는 갑진왜란 이틀 후인 2월 8일 인천의 팔미도 앞바다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는데, 이 러일전쟁도 이제 갑진왜란의 연장선에서 ‘식민지 프레임’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 다시 파악돼야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이 ‘전시(戰時) 중립’을 선언한 상태에서 기습 침략을 감행한 사실도 놓쳐선 안 된다.
당초 고종은 영구중립화를 추진했다. 1900년 8월 조병식을 일본 공사로 보내 대한제국의 영구중립화를 타진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0. 8. 20). 러시아는 고종의 이 중립국안을 지지하고 1901년 7월 한반도에서 일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러·미·일 공동 보호하의 영구중립으로 만드는 방안을 일본에 제안한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9. 20).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점유하려는 일제는 중립국안을 거부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02. 10. 10).
고종은 1903년 8월까지 영구중립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까닭에 러일전쟁은 한국의 영구중립화를 추구하는 한국·러시아와 이를 반대하는 일본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와다 하루키,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47쪽).
러일전쟁의 소문이 매일 떠돌던 1903년 중반을 넘기면서 고종은 방침을 수정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전시 중립 선언’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로선 최선의 방안이었다.
전시 중립을 선언했지만 내심 고종은 러시아가 이기길 바랐다.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래야 했고, 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러시아가 ‘전시 중립’이란 말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1903년 8월 15일자로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한·러 우호와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하면서 한·러 연합항전을 제안했다(홍웅호 편역, 『러시아문서 번역집(Ⅳ)』 62~63쪽, ‘대한제국 황제가 러시아황제에게 보낸 서신’).
러시아군이 고종의 기대대로 대한제국의 영토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우게 된다면, 고종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규군과 비정규군(의병)을 총동원해 러시아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만주와 여순 안에 진을 친 채 전쟁을 소극적으로 풀어 갔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한제국의 군사 역량을 보존해야만 했다. 러시아가 패한다면, 고종과 대한제국은 청국과 러시아를 차례로 이긴 일본군과 홀로 사생결단의 항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됐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2쪽).
고종의 전시 중립 선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국인의 적개심을 증폭시켜 항일 투쟁력을 배가시켰다. 소위 아세아주의(동양주의 혹은 동양평화론)에 속아 일본에 우호적인 한국인들까지도 중립 선언을 침해한 일본군의 무차별 한국 점령에 대해 공분하기 시작했다.
또 러시아에는 실익을, 일제에는 큰 손실을 입혔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 협상에 국제법적 구속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때 패전국 러시아가 이례적으로 전쟁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은 일본이 중립 선언 상태의 대한제국을 침입한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력은 1904년 당시 세계 4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일제의 군사력은 대한제국의 군사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국군 총 병력 3만여 명은 중립국을 유지하는 병력으로는 작은 숫자가 아니며 더욱이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으로 일제에 연합항전을 전개하는 데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는 1904년 4월 14일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불을 질러 고종의 분시(焚弑)까지 기도했다. 경운궁의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탈 정도의 대화재였다. 다행히 고종은 황실도서관으로 쓰던 수옥헌(현재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이 화재가 방화임을 알았지만 철저히 모르는 체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가 눈치챈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확히 일제의 방화임을 알린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요약집』 44쪽).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가 공개되기 전에는 이 같은 사실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왜변’이라 명명해야 하듯이 일제의 고종 분시 기도 역시 ‘갑진왜변’으로 명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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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군과 민군(의병)의 항일 연합 항전은 을사늑약 이후 본격화됐다. 사진 속 검은 제복이 국군, 무명옷 병사가 민군이다. 1906년 무렵 영국 출신 언론인 매킨지가 찍었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국군이 본격 대일 항전에 나선 것은 을사늑약(1904. 11. 17) 이후다. 고종은 러일전쟁을 관망하는 가운데 최대한 경거망동을 자제시키며 보존해 온 국군과 민군을 총동원하여 ‘국군·민군’ 일체의 전면 항쟁, 즉 국민전쟁을 개시한다(한용원,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 90~91쪽).
1905년 12월부터 고종은 거의밀지를 전국적으로 다시 하달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도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일어났다. 고종을 정점으로 국군과 민군이 독립을 위해 하나의 의군으로 합쳐진 ‘국민군’은 ‘대한독립의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운궁은 국내외 항일 독립전쟁의 지휘소였다.
갑진왜란을 빼놓은 기존의 역사책들은 갑진왜란에 대항에 전개한 처절했던 국민전쟁을 소위 ‘구한말 의병 투쟁’이라며 축소해 놓았다.
일본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4년간 국민군이 치른 전투는 총 2852회, 국민군의 병력은 총 14만1815명에 달한다(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 164쪽). 그때까지 국민군 전사자는 일제 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더라도 무려 1만7840명에 달했다(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167쪽, 표3-7).
국민군은 전국적 항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일제의 강제 병탄을 계속 지연시켰다. 일제 통감부는 한때 본국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아야 하는 궁지로 내몰렸고, 그런 책임을 묻는 비난에 밀려 이토는 통감직에서 해임됐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에 대한 ‘폭로 전쟁’도 병행했다. 고종이 1904년 극비리에 영국인 기자 출신 베델을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항일 폭로·홍보 전쟁을 벌였던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실무를 맡은 인물이 고종의 신뢰를 받던 궁내부 예식원 회계과장 백시용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까지 반일 의병전쟁의 피어린 역사를 낱낱이 기록해 국내외에 알렸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211~213쪽).

1906년부터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이전과 정반대로 뒤집혔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한국을 배신하고 일제를 지지했던 미국이 일본과 갈등에 빠지며 전쟁을 벌이려고까지 했고, 그러자 러시아와 일본이 접근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일 갈등이 심화될수록 일제는 러시아로 기울었고, 러일전쟁 패전과 1905년 이래 사회주의 혁명 열기로 인해 국내적으로 약화된 러시아가 일본의 접근을 받아들이면서 러·일 접근이 가시화되었다.
고종은 대책을 찾기 어려운 이 모순된 국제 정세의 흐름과 고투를 벌였다. 미·일 갈등은 한국의 독립 회복에 이로운 정세를 조성해 주지만, 제2차 러·일협약을 위한 러·일 접근은 일제에 한국 병탄의 길을 열어줄 공산이 큰 점에서 대한제국의 존속에 매우 해로운 정세 흐름이었다.
급속한 러·일 접근 추세에 고종이 내놓은 대응책 중 하나는 일본 내 러·일 협상파의 우두머리 이토를 러시아령 안에서 처단함으로써 러·일 외교 관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이와 연관된 거사였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337~342쪽).
고종 폐위 직후 일제는 한국군 해산까지 밀어붙였다. 대한제국 국군과 민군의 연합 항전인 국민전쟁은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일제히 본격화되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혈전을 전개했다.
이런 까닭에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은 자신이 초안하고 1940년 9월 17일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공동 명의로 발표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에서 대한제국군의 강제 해산과 동시에 시작된 대한국군의 서울 전투 개전일인 1907년 8월 1일을 광복군의 창립일로 선언했던 것이다.
자문 전문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참고자료 『갑진왜란과 국민전쟁』(황태연·청계·2017), 『日本軍事史』(후지와라 아키라·서영식 역·제이앤씨·2013), ‘고종 황제와 안중군의 하얼빈 의거’(최덕규·『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2014),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고종 황제’(이태진·『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지식산업사·2011),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 요약』(박종효 편역·한국국제교류재단·2002), 『러시아문서 번역집(Ⅳ)』(홍웅호 편역·선인·2011),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와다 하루키·제이앤씨·2011),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홍순권·서울대출판부·1994), 『고종황제와 한말 의병』(오영섭·선인·2007), 『대한민국 국군 100년사』(한용원·오름·2014), ‘광복군총사령부성립보고서’(1940)(조소앙·삼균학회 편·『조소앙선생문집(상)』·횃불사·1979)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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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통역관 23세 김병옥, 유럽 첫 춘향전 한국어 강의
[ ‘한국학 120주년’ 러시아 상트대학을 가다 ]
러, 아관망명 이후 한국에 관심 - 한국어 교사 보내달라 요청
1917년까지 20년간 가르쳐 - 고전문학 등 한류의 원형 소개
한일병합 후 침체됐다 광복 후 활기, 1956년 청산별곡 등 『고전시가문학』 발간
김병옥이 사용한 한국어 교본에 실린 춘향전과 그의 서명(왼쪽). [사진 상트대]
지난 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가로질러 핀란드만으로 향하는 네바 강의 물결은 초겨울 매서운 바람만큼 거세게 넘실댔다. 300여 년 전 절대군주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도시의 별칭은 ‘유럽으로 열린 창(窓)’이었다. 당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낙후됐던 러시아는 네바 강을 거쳐 유입된 선진 문물을 적극 흡수한 결과 알렉산드르 푸시킨,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 세계적 대문호를 배출한 문화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구글 지도를 통해 이 도시와 서울의 거리를 재 보면 6800㎞ 남짓으로 나온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416㎞) 16개가 필요한 거리다. 언뜻 보면 한국과 관련 없어 보이는 곳이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다. 유럽으로 열렸던 이 도시의 창이 19세기 말부턴 한국으로도 열렸다는 점이다. 네바 강 하구 삼각주에 자리 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하 상트대)이 그 거점이었다. 1897년 당시 23세였던 조선인 통역관 김병옥은 이곳 동양학부에서 유럽권 최초의 공식적 한국어 강의를 시작했다.
현지에서 만난 세르게이 쿠르바노프 상트대 한국학과장은 “김병옥이 1897년부터 1917년까지 20년간 이곳에서 한국어 교사로 활동한 것은 공식 문서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사 전공자인 그는 러시아 내 남아 있는 정부와 대학의 공식 문서, 신문 기사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김병옥을 포함한 러시아 내 한국인들의 삶을 추적해 왔다. 유창한 한국말로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아관망명) 이후 러시아 내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커졌다. 러시아 정부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축하 명목으로 방문한 민영환 사절단에 한국어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듬해 5월 대한제국 공사관 업무가 개시됐을 때 다시 온 통역관 김병옥이 이곳에 남아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국적에 대해선 견해가 갈린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한국인이라는 해석과 대한제국 국적을 가졌다는 의견이 반반이다. 확실한 건 그가 1899년에 52쪽짜리 한국어 문법 교재를 발간했고 1904년 마리아라는 이름의 러시아인과 결혼했다는 점이다. 1917년 이곳을 떠난 이후의 삶에 대해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김병옥은 춘향전·토생전을 비롯한 한국 고전문학과 한국지리, 명성황후 시해사건 재판 기록 등 다양한 텍스트를 활용해 러시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걸 넘어 한류의 원형이 되는 한국 문화 전반을 러시아에 소개한 것이다.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인 아나스타시아 구리예바 상트대 교수는 “김병옥과 러시아 외교관들이 17~19세기 조선에 유통된 방대한 문서들을 수집했고 이를 중심으로 교육과 연구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병옥이 가르친 춘향전이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춘향전을 새롭게 각색한 판본이라는 점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와 대학원생 제하나씨가 발표한 논문 ‘19세기 러시아에서 출판된 조선어독본 춘향전 내용 연구’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판 춘향전은 교육용 교재로 부적절한 부분이 삭제된 판본이었다. 제씨는 “같은 시기 서울 지역에서 유통된 경판본 춘향전과 비교했더니 상당 부분 달랐다. 경판본에선 춘향이 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투옥됐을 때 월매가 찾아와 왜 수청을 거절했느냐고 춘향을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김병옥 판본에선 이 부분이 월매가 사또를 찾아가 춘향의 학식이 얼마나 풍부한데 수청을 들게 하느냐고 사또를 만류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표현에 있어서도 어려운 한자어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 준 부분이 눈에 띈다. 외국인을 위한 교과서 용도로 고쳐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신문에 실린 고종 사진 과 이범진 공사 인터뷰 기사에 실린 삽화
지난 1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이하 상트대) 한국학과가 있는 동양학부 건물을 찾았다. 1727~1730년 사이에 표트르 2세가 쓸 궁전 용도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세기 중반부터 대학 건물로 사용됐다.
120년 전 조선인 통역관 김병옥이 러시아인을 상대로 한국어 강의를 시작했던 것도 바로 이 건물에서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좁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닳고 닳은 돌계단이 강의실 앞까지 이어졌다. 매일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머나먼 타국에서 모국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김병옥은 1917년 이곳을 떠났다.
이후 상트대의 한국학 연구는 암흑기를 맞는다. 러시아 내에서 일본에 병합된 국가의 말과 글을 굳이 배울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학은 일본어 전공자들이 배우는 부전공 또는 교양 과목 정도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부터다. 일본어 전공자인 알렉산드르 홀로도비치가 1947년 상트대에서 한국어 교육을 맡으면서 한국학 연구는 활기를 띠었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운 홀로도비치는 최초의 한·러 사전을 편찬했다. 1956년엔 고려가요·처용가·청산별곡·동동 등을 번역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담은 책 『한국고전시가문학』을 발간했다. 이후 제자인 아델라이다 트로체비치, 마리안나 니키티나 등 유능한 학자들이 연구를 이어받았다.
이들은 향가·삼국사기 등 한국의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번역에도 힘썼다. 장끼전·홍길동전·심청전·사씨남정기 등이 이들에 의해 러시아어로 번역됐다. 구운몽 등 인기 작품은 시중에 5만 부 이상 팔리기도 했다. 러시아 내 유일한 현역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인 아나스타시아 구리예바 상트대 교수는 “원문 텍스트, 1차 사료를 읽고 특징을 분석해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학풍이 이 시기를 거치며 확립됐다”고 설명했다.
상트대는 지난 9월 시작된 학기부터 기존 동양언어 학부 내 동남아·한국어과, 극동국가 역사학과로 나뉘어 있던 한국 관련 강좌를 모두 모아 한국학과를 개설했다.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한·러 관계에 대비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다. 교수 6명에 학생 수는 30여 명이다.
고려인인 최인나 교수가 전담하는 박경리의 토지 등 근현대 문학작품에 대한 강의도 개설됐다. 이 학과 3학년인 이바노바 이리나(22)는 “고교 시절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 갖게 되면서 한국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현대차와 롯데 등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일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학년인 나시로바 엘비라(22)는 “최근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인상 깊게 읽었다. 작품을 통해 접하는 한국 문화에 매력을 느껴 전공으로 택했다”고 설명했다.
상트대는 한국학 교육 120주년을 맞아 지난 13~14일 ‘한국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우윤근 주러시아 대사 내정자, 이규형 한러대화 조정위원장, 윤금진 한국국제교류재단 교류이사, 김현택 한국외대 부총장 등 한국 쪽 인사들과 니콜라이 크로파체프 상트대 총장 등 러시아 측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윤금진 국제교류재단 이사는 “유럽 문화권 최초로 한국어 교육을 시작한 상트대는 해외 한국학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박민제 기자 ] / 중앙 Subday
[출처] 대한제국 120주년, 다시 쓰는 근대사 [ 10회~ 회]|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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