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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 Ⅱ

문수봉(李楨汕) 2017. 12. 22. 15:48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 Ⅱ

 

4. 고종이 우산도를 석도로 개칭한 이유는

5. 울릉도 공도정책은 ‘방치’가 아니라 ‘수토정책’이었다

6. 독도밀약과 독도

​7. 국제사법재판소와 조용한 외교 & 독도 문제의 해법

8. 한·미방위조약과 독도​-독도 문제 원인 제공은 미국 

 

 

 

4. 고종이 우산도를 석도로 개칭한 이유는


우산도→석도(1900년)→독도(1906년경)
우산도와 석도와 독도



 

 


 모리스 쿠랑이 수집한 18세기 후반 강원도 지역을 그린 지도. 울릉도 아래에 우산도가 그려져 있다. photo 국립중앙도서관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울릉도와 죽도, 석도를 울도의 관할로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은 칙령상의 석도가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시키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은 5등으로 한다.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도 전체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한다.
   
   반면 일본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상의 석도는 울릉도에 붙어 있는 관음도 내지 울릉도 주변의 바위섬들을 총칭하는 표현으로 이 칙령은 결코 독도영유권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아니 오히려 당시 대한제국이 독도를 모르고 있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한국이 조선시대 독도의 일반적인 명칭이 우산도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시점에 우산도를 석도로 개칭하였을 리 없다며 황성신문 1899년 9월 23일자 기사를 근거로 제시한다.
   
   ‘울진의 동해에 한 섬이 있어 울릉이라 하는데, 그 부속한 6개 섬들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이 우산도, 죽도이니 대한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는 옛날 우산국이라.’
   
   대한민국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의 우산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게 일본 측 주장이다. 칙령 반포 불과 1년 전에 우산도라고 불리던 섬을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석도라고 변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 또 일본은 1906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를 근거로 칙령상의 석도는 결코 독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통감부에서 내부에 강원도 삼척군 관하 소재 울릉도에 속하는 도서와 군청이 처음 설치된 연월을 자세히 알리라 하여 답하되, 광무2년 1898년 5월 20일 울릉도감으로 설립하였다가, 광무4년 1900년 10월 25일 정부 회의를 거쳐 군수를 배치하였으니, 군청은 태하동에 두고, 이 군이 관할하는 섬은 죽도와 석도요,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 합이 200여리라고 하였다더라.’
   
   일본이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동서 60리, 남북 40리’이다.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90㎞ 거리에 위치해 있다. 황성신문 기사에 의하면 울릉도에 속하는 도서에 석도가 포함되는데, 동서 60리(24㎞)라고 되어 있으니 의당 독도는 울도군 관할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또 1907년 장지연의 ‘대한신지지’와 ‘대한전도’를 근거로 제시한다. 대한신지지에는 우산도라는 표현만 있을 뿐 석도라는 표현이 없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하여 독도의 공식 명칭이 석도로 되었다면 우산도 대신 석도라는 명칭이 쓰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 책의 부도로 삽입된 ‘대한전도’에는 독도가 아예 그려져 있지도 않다고 강조한다.
   
   또 1946년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는 ‘조선의 동쪽 끝은 동경 130도 56분 23초의 경상북도 울릉군 죽도’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여기의 죽도는 울릉도 북동쪽 2㎞ 거리의 댓섬을 가리키는 바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고종이 울릉도의 현황을 파악할 목적으로1882년 4월에 파견한 이규원과 1900년 5월에 파견한 우용정의 보고서에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
   
   고종은 조선 태종 때부터 실시된 ‘울릉도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울릉도 개척정책’을 실시하였다. 울릉도에 백성을 이주시켜 개발함으로써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울릉도 개척정책을 시행하기 전 울릉도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규원이 파견되었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반포되기 5개월 전 우용정이 파견되었다.
   
   이규원은 ‘울릉도검찰일기’, 우용정은 ‘울도기’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이규원의 보고서에는 관음도와 2㎞ 거리에 있는 죽도에 대해서는 기술되어 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기술이 전혀 없다. 오히려 성인봉에 올라 다른 섬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바다에는 한 점의 도서도 없었다.’
   
   보고서에 첨부된 ‘울릉도외도’라는 지도에는 관음도와 죽도는 그려져 있지만 독도는 그려져 있지 않다. 우용정의 ‘울도기’에도 독도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다.
   
   일본은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제시하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공포 당시 대한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1905년 독도가 일본에 편입될 당시 무주지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과 근거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독도와 관련하여 가장 풀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석도가 독도를 가리킨다는 증거만 발견되면 너무나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일절 발견되지 않고 있어 문제가 된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이 관련 자료들을 소실시켰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결국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앞으로 많은 사료 검토와 연구가 있어야 하는 부분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며 현재까지의 추론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고종은 독도의 명칭상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석도로 개칭하였다.
   
   1882년 이규원을 독도에 파견할 당시 고종은 울릉도와 독도 상황에 대해 면밀한 검토를 마친 상태였다. 이는 고종과 이규원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종실록 고종19년 1882년 4월 7일자 기록이다.
   
   ‘이규원이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이란 바로 옛날 우산국의 국도 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수십리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과 간죽이라고 합니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우산도라고도 하고 송죽도라고도 하는데 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그리고 또 송도, 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 형세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규원이 “삼가 깊이 들어가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송도와 죽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다고 하지만 송죽도 밖에 따로 송도와 죽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고 아뢰었다.’
   
   고종은 울릉도가 3개의 섬, 울릉도와 송죽도 및 우산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소위 울릉도 3군도설에 입각하여 말문을 열었다. 반면 이규원은 우산도와 울릉도는 같은 섬으로 하나이고 울릉도 외에 송죽도라는 섬이 하나 더 있다는 울릉도 2군도설에 입각하여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고종이 다시 한 번 울릉도 3군도설을 강조하며 그 형세를 잘 살펴보라고 당부한다.
   
   울릉도에 부속한 섬은 관음도와 죽도, 독도로 대별되며 나머지는 ‘바위’라고 하여 섬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관음도는 울릉도에 거의 붙어 있기 때문에 관음도를 빼버리면 울릉도, 죽도, 독도의 3군도설이 타당하다.
   
   고종은 영토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882년은 간도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고종은 이규원조차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에 혼선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보며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3000여개의 부속 도서가 있다. 이 섬들 중에는 ‘독섬’ 내지 ‘돌섬’이라고 불리는 섬들이 많은데,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한문으로 전환되면서 ‘석도(石島)’나 ‘독도(獨島)’로 표기된 예가 많다.
   
   고종은 1882년 울릉도 개척정책을 실시하면서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주로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에서는 돌을 ‘독’이라고 부른다. 석도(石島)를 순한글로 전환하면 돌섬이고 전라도 사투리로는 독섬이 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울릉도를 대나무가 많이 난다 하여 죽도(竹島·다케시마)라고 부르고, 독도는 대나무와 짝을 이루는 소나무를 차용하여 송도(松島·마쓰시마)라고 불렀다. 조선의 섬 이름과 일본의 섬 이름이 달라 혼선이 초래되고 있었다.
   
   한편 1787년 울릉도에 도착한 프랑스의 탐험가 라 페루즈는 영국 육군사관학교 교수 다줄레가 울릉도를 처음 확인했다는 이유로 울릉도를 ‘다줄레섬’이라고 명명하고 해도에 표시하였다. 1847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락(Liancourt Rocks)’이라고 명명하고 해도에 표시하게 된다.
   
   19세기 말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어 각종 서양문물들을 접하게 된다. 1896년 고종은 러시아대사관에서 1년을 지내게 된다. 소위 아관파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종이 서양의 해도를 보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서양 해도에는 독도가 리앙쿠르락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락(rocks)을 우리말로 하면 석(石)이 된다.
   
   이것이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가 석도로 기재된 경위이다.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울도군의 관할로 울릉도, 죽도, 석도가 나열된 이유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칙령에는 울도군의 관할로 ‘울릉도, 죽도, 석도’가 기재되어 있다. 1899년 황성신문에는 ‘울릉도, 우산도, 죽도’가 기재되어 있다. 여기의 죽도는 울릉도 북동해안 2㎞ 거리에 있는 죽섬(대나무섬)을 가리킨다. 죽도에는 단맛이 많이 나는 수박과 더덕, 울릉도에서만 나는 산마늘(명이)이 있고 소를 방생하여 키울 만큼 목초지가 발달해 있다. 또한 토질이 좋아 나무들이 많이 자생하는데 대나무가 특히 많다. 칙령과 황성신문을 대비하여 볼 때 ‘우산도=석도’가 될 수밖에 없다.
   
   
   2. 석도가 독도가 된 이유
   
   그럼 석도가 독도로 불리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독도가 독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1906년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를 계기로 한 것이었다. 1906년 3월 28일자 심흥택의 긴급보고서를 보자.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 바깥 바다 100여리 밖에 있는데, 3월 28일 8시쯤 기선 1척이 군내 도동항에 기항하여, 일본 관리 일행이 관사로 와서 스스로 이르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토가 되었기에 시찰차 왔다’고 하옵는 바….’
   
   당시 독도는 울릉도 현지인들 사이에서 돌섬 내지 독섬으로 불리고 있었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 문서에는 석도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흥택은 긴급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라는 표현을 썼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일본 시마네현 제3부장 진자이 요시타로가 독도를 ‘독도’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일본제국 시마네현의 산업을 권장하는 일에 종사하는 관원으로, 귀도와 우리 관할에 속하는 다케시마는 서로 가까이 있고, 또 귀도에 우리나라 사람이 체류하는 자가 많아, 만사에 걸쳐 친절한 마음을 바랍니다. 귀도를 시찰할 예정이었으면 무언가 드릴 것을 가져왔을 터인데, 이번 피난 때문에 우연히 귀도에 들르게 되어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으나, 다행히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를 증정하겠으니 받아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진자이는 다케시마를 여러 번 언급하였다. 심흥택으로서는 다케시마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 것인지 물었을 것이고 진자이는 다케시마가 독도라고 말했을 것이다. 심흥택은 이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토가 되었기에 시찰차 왔다’는 말로 인용하고 있다.
   
   그럼 진자이는 왜 다케시마를 독도라고 했을까? 그 답은 일본 해군 전함 니이타카(新高)함 1904년 9월 25일자 행동일지에 나타나 있다.
   
   ‘마쓰시마에서 리앙코르도암을 실제 가본 사람들로부터 들은 정보. 리앙코르도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국 어부들은 줄여서 량코도라고 호칭했다.’
   
   마쓰시마는 울릉도, 리앙코르도암은 리앙쿠르락, 즉 독도를 가리킨다. 진자이는 한국 사람들이 다케시마, 리앙쿠르락을 독도(獨島)라고 쓴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시마가 어느 섬이냐고 묻는 심흥택의 질문에 독도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심흥택은 독도라는 말을 들으면서 독섬, 돌섬, 석도를 떠올렸을 것이다. 심흥택은 이 보고서를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에게 보고했고, 이명래는 중앙 정부에 보고했다.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대신 이지용은 보고서를 받고 조사명령을 발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독도’라는 명칭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독도가 당연히 석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도(獨島)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도쿠시마’가 된다. 한국인들은 도쿠시마가 당연히 독섬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부대신 이지용의 지령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기사화되었고 이때부터 석도는 독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유람하는 길에 땅의 경계나 인구를 적어 가는 것은 혹 괴이쩍지 않으나, 독도를 가리켜 일본 속지라 했다니,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 이번에 받은 보고는 심히 의아하다.’
   
   
   3.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 200리’는 울릉도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1906년 황성신문 기사상의 ‘동서 60리’라는 표현은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울릉도의 동서 길이를 표현한 것이다. 울릉도는 관용적으로 ‘동서 60리, 남북 40리, 합 200리’로 표현되고 있었다. 1895년에 발간된 조선지지의 내용이다.
   
   ‘울릉도는 울진에 있으니 둘레가 200여리, 동서가 60여리요, 남북이 40여리라.’
   
   대동여지도(1861년)와 대동방여도(1858년)의 울릉도 지도에 기재된 내용 또한 동일하다.
   
   ‘동서 60여리 남북 40여리 주 200여리.’
   
   황성신문의 기사는 이러한 표현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울도군 전체의 관할 면적을 표시한 것이 아니다.
   
   
   4. 이규원은 독도에 관심을 쏟을 만한 시간이 없었고, 우용정은 일본인들의 울릉도 수탈 상황과 대책마련에 고심했을 뿐이다.
   
   일본은 울릉도를 답사하고 온 이규원과 우용정의 보고서에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당시 대한제국이 독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규원과 우용정의 보고서에 독도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이들이 울릉도에 체류한 기간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자명해진다. 이규원은 1882년 4월 30일부터 5월 6일까지 6박7일간 울릉도에 머물렀고, 우용정은 1900년 6월 1일부터 6월 5일까지 4박5일간 울릉도에 머물렀다. 당시 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로가 발달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4박 내지 6박의 일정은 결코 긴 일정이 아니다. 이규원이나 우용정은 자신들의 주 임무를 소화해내기도 바빴을 것이다.
   
   둘째, 독도는 이규원이나 우용정의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규원에게 주어진 임무는 울릉도에 읍을 설치할 수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종은 울릉도 3군도론에 입각하여 주변 섬들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이규원은 울릉도 2군도론에 경도되어 있었다. 울릉도가 울릉도와 송죽도라는 두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고종의 당부에 따라 울릉도 주변의 섬들에 대해서도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울릉도 주변에 있는 섬은 관음도와 죽도가 전부였다. 이규원은 성인봉에까지 올라 다른 섬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침 독도는 보이지 않았다. 독도는 날씨가 맑고 바람이 많은 날 보이는 섬이지 항시적으로 보이는 섬이 아니다.
   
   우용정의 임무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저지르고 있는 자원수탈 상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1900년경 일본은 자원이 풍부한 울릉도 수탈에 몰두하고 있었을 뿐 아직 독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울릉도와 죽도에서 품질 좋은 목재를 반출하고 수산물을 채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일본 측의 기록에 의하면 독도에서 전복을 채취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경의 일로 되어 있다.
   
   
   5. 장지연과 최남선의 저술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하에 작성된 것이었다.
   
   1906년 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부였던 외부(外部)가 완전히 폐지되고,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임명된다.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 정부는 완전히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했으며, 모든 업무는 통감부가 실질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1906년 2월 9일에는 대한제국에 주재하는 일본 헌병에게 군사경찰권 외에 행정 및 사법경찰권까지 부여하는 칙령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의 모든 국가 기능이 일본에 넘어가고 만다.
   
   이러한 상태에서 장지연의 ‘대한신지지’가 저술된다. 여기에 독도가 들어갈 수 있었을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후 독도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1906년 이지용의 지령문이 신문에 기사화된 이후 더 이상 독도에 관한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독도가 빠진 것은 당시 그가 독도에 대해 특별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상으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우산도가 석도로 기재되고 석도가 독도로 불리게 된 연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리하자면 독도는 전통적으로 우산도로 불리다가 1900년 석도로 개칭된 후 1906년경부터 독도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고종 황제가 우산도를 독도로 개칭한 경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 석도에 관한 다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독도영유권과 관련한 불편한 진실 중 하나이다.



5. 울릉도 공도정책은 ‘방치’가 아니라 ‘수토정책’이었다



 

 


▲ 512년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 장군 이사부 영정과 삼척 오분항에 있는 이사부 출항 기념비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한다.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일찍부터 독도를 발견하고 이용해 왔으므로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보아야 한다. 무주지 영토편입조치를 취한 것은 영유권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 태종 때 시작된 ‘울릉도 공도정책’ 때문이다. 울릉도 공도정책이란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모두 육지로 쇄환하고 울릉도를 비워두는 정책을 말한다.
   
   쇄환정책은 세종 때까지 수차의 쇄환을 거쳐 마무리된다. 이후 울릉도 공도정책은 1884년 울릉도 개척정책이 실시될 때까지 유지된다. 울릉도는 경상북도 울진 북변에서 130㎞ 떨어져 있다. 그리고 독도는 울릉도에서 90㎞ 더 떨어져 있다. 일본은 울릉도가 공도정책에 의하여 무인화되었다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는 어떠했겠느냐고 반문한다. 즉 조선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거나 설사 알았더라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울릉도와 독도 모두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조선이 울릉도 공도정책을 실시하고 있을 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울릉도 공도정책에 근거한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과연 일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박해야 하는 것일까.
   
   
   
1. 울릉도 공도정책은 울릉도를 방치한 것이 아니다. 조선은 수토(搜討)정책을 통해 울릉도를 계속 관리하였다.
   
   조선은 해금(海禁)정책을 통해 바다를 관리하였다. 당시 바다와 섬은 통제의 대상이었지 개발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울릉도 또한 왜구의 수탈을 당하고 있었다. 조정으로서는 울릉도에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는 한 관리와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해야 하는데 바닷길이 험하여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이러한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섬을 비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도정책이 울릉도를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역과 세금을 회피하기 위하여 또는 죄를 짓고 울릉도로 도망가는 백성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또 섬을 그냥 방치할 경우 오히려 왜구의 소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시찰하여 왜구들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고 만일 왜구가 있을 경우에는 이를 토벌하여 멸하였다. 이를 수토(搜討)정책이라고 한다.
   
   울릉도 태하항에 황토구미라는 지명이 있다. 조선은 3년마다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하여 섬의 현황을 살피게 하였고 파견된 수토관이 울릉도에 다녀온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울릉도 특산물인 황토와 향나무를 증거물로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황토를 파내던 언덕이 큰황토구미, 작은황토구미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수토관으로는 삼척의 영장과 월송의 만호가 번갈아 파견되었다.
   
   이때의 수토관들은 왜구 토벌보다는 세금과 부역을 피해 울릉도로 숨어 들어간 백성이 있는지 살펴 이들을 쇄환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였다. 3년마다 되풀이되는 수토정책도 시일이 흐르면서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많은 비용과 위험이 따른다는 점도 한몫하였다. 조선 중종 이후로는 수토관을 파견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울릉도로 숨어 들어가 사는 조선의 백성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금과 부역이 없는 울릉도는 이들에게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울릉도는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울릉도를 거점으로 삼아 동해안을 공략하려는 일본 수군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거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퇴로가 막힌 일본 수군 병사들이 울릉도에서 생을 마감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러다가 1693년 안용복의 1차 도일사건이 발생하고 1694년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된다. 장한상은 수토정책의 재개를 건의하고 이후 3년마다 울릉도 수토가 이루어진다. 그러다가 1884년 고종에 의하여 울릉도 개척정책이 실시된다. 이처럼 울릉도 공도정책은 결코 울릉도를 방기하는 정책이 아니었다. 조선은 수토정책을 통해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감찰하고 관리하였다.
   
   
   
2. 대마도주의 울릉도 이주 청원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바로 대마도주의 두 차례에 걸친 울릉도 이주 청원이다. 태종실록 권13 태종7년 1407년 3월조의 기록이다.
   
   ‘대마도 수호(對馬島 守護) 종정무(宗貞茂)가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가 무릉도를 청하여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叛)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로 여기므로 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경내에서는 상사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대마도주가 울릉도 이주를 청원하였으나 태종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청원은 1614년의 일이다. 광해군일기 권82 광해군6년 1614년 9월조 기록이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전일 예조의 서계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 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자못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경상 감사와 부산의 변신에게 공문을 보내 이번에 온 배에 특별히 유시하고 이 글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을 준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1614년 조선 조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와 울릉도에 왜인의 왕래를 금지하기로 하는 외교문서를 주고받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마도주가 울릉도 이주를 청원한 것이다. 조선은 당연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마도주의 두 차례에 걸친 울릉도 이주 청원은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로서 조선의 관리하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3. 해류와 바람을 이용한 조선의 항해술
   
   공도정책과 수토정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 이주하여 거주하는 조선의 백성이 있었다. 또 동해와 남해의 어부들은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와 독도에 물고기와 전복을 잡으러 다녔다. 안용복이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맞닥뜨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울릉도 인삼이 품질이 좋아 인삼을 채취하러 가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거문도 어부들이 한반도의 동서를 오가며 장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활동 범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거문도 어부들은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서해와 동해를 오가며 장사하였는데, 울릉도와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집하였다고 한다. 독도에서 강치를 잡아 그 기름으로 호롱불을 밝히고 해풍을 맞고 자란 단단한 나무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옛 사람들이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를 오갔는지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512년 신라 장군 이사부가 어떻게 우산국을 정벌할 수 있었는지, 수토관들과 거문도 어부들이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에 갈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해류와 바람을 이용하여 수토관을 파견하였다는 내용이 종종 등장하는데, 연구에 의하면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인 동한 난류가 북한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는 북한 한류와 북위 37도에서 38도 사이 울진과 삼척 앞바다에서 충돌하여 울릉도 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가게 되는데, 편서풍이 불 때 이 흐름을 이용하여 울릉도로 쉽게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5~6월 내지 10월이 최고의 적기라고 한다.
   
   고종 때 이규원과 우용정이 5월에 울릉도에 간 것도 이러한 해류를 이용한 것이었고, 505년 실직(삼척)군주가 된 이사부는 우산국 정벌을 위해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고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 울릉도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0㎞의 거리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울릉도 거주민들은 독도에 어떻게 갔을까. 1988년 7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뗏목 항해가 이루어졌다. 울릉도 삼나무로 만들어진 뗏목은 해류와 바람을 타고 72시간 만에 무사히 독도에 도착하였다. 울릉도에서 독도로의 뗏목 항해는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시도되었고 대부분 성공하였다. 이러한 뗏목 항해의 목적은 울릉도 거주민들이 독도를 상시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의 항해는 울릉도를 등지고 가기 때문에 방향을 잃을 염려가 없다고 한다.
     
   
4.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백성들에 의해 실효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울릉도가 조선 백성들에 의하여 이용되고 있었던 것에 관한 증거들을 살펴보자. 프랑스 라페루즈함대 1787년 5월 27일자 항해일지 내용이다.
   
   ‘나는 이 섬을 발견한 천문학자 르포트 다줄레의 이름을 따서 다줄레섬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이 작은 만에서 중국 배와 똑같은 모양으로 건조되고 있는 배들을 보았다.… 다줄레섬에서 불과 110㎞밖에 떨어지지 않은 육지에서 조선인 목수들이 식량을 가지고 와 여름 동안 배를 건조한 뒤 육지로 가져가 파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은 1880년 일본 군함 아마기(天城)함의 보고서이다.
   
   ‘이 섬은 일본 오키섬으로부터 북서 4분의 3, 서 약 140리, 조선 강원도 해안으로부터 약 80리, 바다에 고립하여 전체 섬이 높고 험한 원추형의 구릉이 집합하여 수목이 덮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북위 37도 22분, 동경 130도 57분, 최고산은 높이 4000척, 섬의 둘레 18리, 그 형태는 거의 반원과 유사하며,… 죽서(竹嶼)는 이 섬의 근해에서는 최대로 섬의 동해안에 떨어져 있다.… 현재 섬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140명이다. 봄여름 기간 이 섬에 와서 새로 어선을 제조하여 낡은 어선과 바꾸어 돌아간다고 한다. 이 어선들은 철류를 쓰지 않고 목재만으로 만든다고 한다.’
   
   다음은 1899년 10월 3일 다카오서기생복명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본 외무성에서 울릉도에 파견한 조사관 다카오 겐조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현재 토착민의 수는 2000여명으로 호수는 500호이며, 농부와 어부가 각각 절반으로 선박을 건조하는 목공이 있다.’
   
   다음은 울릉도 거주민들의 독도 이용과 관련된 일본의 기록이다. 1902년 10월 16일 일본 외무성 통상휘찬 제234호 제46면 한국울릉도사정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본도(本島)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작은 섬 세 개가 있다. 이를 리얀코섬이라 하며 일본인은 마쓰시마(松島)라 한다. 그곳에 다소의 전복을 산출하므로 본도에서 출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섬에 식수가 없으므로, 오랫동안 출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4~5일 후 본도에 귀항한다.’
   
   이 기록에서 본도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가 독도의 본도라는 표현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다음은 1905년 9월 3일 일본 외무성 통상휘찬 제50호에 울릉도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내용이다.
   
   ‘바다사자라고 칭하는 해수는 울릉도에서 동남 약 25리 위치에 있는 량코섬에 서식하며, 작년 무렵부터 울릉도민이 그것을 포획하기 시작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의 백성은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5. 조선은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이 독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관한 증거들을 살펴보자.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지리지 58권 울진현편에 수록된 내용이다.
   
   ‘울릉도가 있다. 현의 정동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했고, 무릉 또는 우릉이라고도 했다. 지방은 100리다.… 우산과 무릉은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이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은 현의 정동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이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고도 했는데 지방은 100리이다.’
   
   고려사지리지에 수록된 내용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은 언뜻 비슷하지만 매우 다른 내용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우산과 무릉을 별개의 두 섬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수차례의 쇄환정책을 통해 울릉도(무릉)와 독도(우산)를 구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고려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된 ‘우산’은 독도가 아닌 울릉도 인근에 있는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죽도는 울릉도에서 불과 2㎞ 거리에 있다. 죽도는 짙은 안개가 끼지 않는 한 언제든지 육안으로 보이는 섬이다. 항상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특별히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94년 장한상의 울릉도사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동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그리 높지 않고 바다 대나무가 일면에 나 있다. 비가 그쳐 안개가 갠 날 산으로 들어가 중봉에 오르면 남북의 양봉이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높이 마주 보고 있는데 이것을 삼봉이라 한다.
   
   서쪽을 바라보면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모습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바닷속에 섬 하나가 보이는데, 그 크기는 울도의 3분의 1 미만이고 300여리에 불과하다.’
   
   조선의 1리는 400m이다. 5리는 2㎞이므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섬은 지금의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바다 대나무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죽도가 왜 죽도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동쪽 바다 300여리에 있는 섬 하나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300여리는 120㎞인데, 이 정도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은 독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한상의 울릉도사적은 죽도와 독도를 구별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6. 조선은 동해 바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요도와 삼봉도 일화가 바로 그 증거이다.
   
   1425년 3차 쇄환 이후인 1430년, 함길도 함흥부에 사는 김남련이라는 사람이 요도(蓼島)에 다녀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세종은 함길도 감사에게 요도의 정확한 위치를 조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에도 양양 동쪽 바다 가운데 요도가 있다는 제보가 있었고, 1438년 무릉도순심경차관으로 4차 쇄환을 실시했던 남회가 삼척 동산현 정상에서 먼 바다에 있는 요도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이에 세종은 남회를 요도경차관으로 임명하여 요도를 찾으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세종은 동해 바다에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 제3의 섬, 요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25년 뒤 성종 시절에 이번에는 동해에 삼봉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종 원년 1470년 영안도(함경남도)에서 삼봉도로 부역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자 성종은 1472년 3월 박종원을 삼봉도경차관으로 임명하고 일본어와 여진어 통역사를 붙여 조사하게 하였다. 박종원은 그해 5월 삼봉도 수색에 나섰지만 삼봉도를 찾을 수 없었다.
   
   성종은 1479년 2차 삼봉도 수색대를 파견하였다. 수색대는 3개월 뒤 삼봉도에 갔다 왔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영안도 관찰사 이극돈의 조사로 이것이 허위보고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관련자들은 모두 극형에 처해지고 만다.
   
   당시 요도와 삼봉도를 수색하기 위해 배를 마련하고 여비를 마련하는 것은 조정의 큰 부담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극형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어쨌든 요도와 삼봉도 해프닝은 조선이 동해 2도설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즉 동해 바다에는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는 지리적 인식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일본은 요도와 삼봉도 일화를 근거로 조선이 동해에 대해 무지하였고 독도에 대한 인식이 부재 내지 희박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의 기록이다. 만기요람은 국왕의 국정운영참고서로 순조 8년 1808년에 서영보, 심상규 등이 편찬한 것이다.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이다.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다.’
   
   여지지는 1656년 유형원의 저서이다. ‘모두’라는 표현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구분하여 두 개의 섬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산은 왜가 말하는 송도다’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독도를 송도(松島·마쓰시마)라고 불렀다. 1656년에 저술된 여지지는 우산도가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 즉 독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기록한 것이다

 

 

6. 독도밀약과 독도 - 공표되지 않은 조약은 무효… 독도밀약설 내용도 한국에 유리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한 후 조약문서를 교환하는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독도밀약’이다. 독도밀약이란 1965년 한·일수교조약 체결에 앞서 체결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비밀조약으로 2007년 모 월간지에 이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에 의하면 독도밀약이 체결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수교를 성사시키기 위해 외무장관에 이동원, 주일대사에 김동조를 새로이 임명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문제는 독도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한일은행 상무로 있던 김종필의 친형 김종락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김종락은 일본으로 건너가 차기 총리감으로 지명되고 있던 고노 이치로를 만나 협의하였고, 드디어 1965년 1월 11일 서울시 성북동 범양상선 박건성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총리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 사이에 독도밀약이 체결되었다.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가 있었는데 관련 문서들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모두 소각되었다.
   
   독도밀약은 4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1조 독도는 앞으로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제2조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하는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제3조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제4조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하여 지켜 나간다.

   
   한·일 양국 정부는 독도밀약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독도밀약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2007년 당시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는 영유권과 관련하여 밀약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고, 한·일협약에 서명한 이동원 외무장관은 1965년 6월 24일 인터뷰에서 밀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독도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시종일관하다. 명백히 외상회담의 의제로도 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묵계도 없다. 발표된 이외의 비밀은 이번 조약 또는 협정에 하나도 없다.
   
   하지만 독도밀약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독도밀약이 실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행적들에 비추어볼 때 독도밀약이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밀약 제2조에 따라 이승만 라인을 포기하고 독도 인근 해역을 공동관리수역으로 지정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2년 11월 16일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밀약 제3조를 지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신한·일어업협정 회담과정에서 밀약 제2조에 따라 독도 주변수역을 중간수역에 편입시키기로 합의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합의된 내용에 따라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7월 21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직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독도를 가리켜 ‘다케시마’라고 칭하였다. 일본 요미우리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7월 9일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일정 기간 도중 후쿠다 야스오 총리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후쿠다 총리가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다케시마를 일본령으로 기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자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는 2008년 7월 15일자 요미우리신문 기사가 발단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홋카이도 도야코 정상회담이 열리는 호텔에서 후쿠다 수상과 서서 이야기할 때 우려를 표명하였다. 관계자에 의하면 수상이 “다케시마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200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하여 ‘대일 프렌들리’ 외교정책을 표명하고, 4월 일본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2008년 5월 19일 요미우리신문이 ‘중학교 사회교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가 일본의 고유영토로 명시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보도를 접한 이명박 대통령은 진상을 확인하여 사실이라면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라고 지시하였다.
   
   때마침 7월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G8 정상회담이 열렸다. 요미우리 기사에 따르면,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본에 간 이명박 대통령은 7월 9일 후쿠다 총리를 만나 교과서 해설서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대처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며칠 후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위 기사는 정식회담 직전에 후쿠다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는 취지였다.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며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후속 조치도 취해지지 않으면서 일이 확대되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당장 요미우리신문사를 상대로 정정보도를 요청하는 등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는 것이었다.
   
   급기야 당시 민주당 부대변인이었던 이재명 변호사가 국민 소송인단 1886명을 모집해 요미우리신문을 상대로 4억여원의 손해배상과 정정보도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요미우리신문의 허위보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논리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이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에게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보도는 허위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첫 번째 쟁점은 과연 이명박 대통령이 이러한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였다. 법원은 청와대 대통령실장에게 사실조회를 했고 대통령실장은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회신하였다. 한편 일본 외무성은 공보관 성명을 통해 한·일 정상이 독도 관련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사실조회 회신 결과와 일본 외무성 성명을 근거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러한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요미우리신문이 허위보도를 한 것으로 본 것이다.
   
   다음 쟁점은 요미우리신문의 허위보도에 대해 손해배상 내지 정정보도를 명해야 하는지의 문제였다. 법원은 소송단이 요미우리의 허위보도에 대한 직접 피해자에 해당하는지의 여부를 검토하였다.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되려면 기사에 직접 지명되거나 그로 인해 인격적 침해를 당해야 하는데 소송단은 직접 피해자가 아닌 2차적 또는 간접 피해자에 불과하고 명예훼손의 직접 피해자로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자까지 피해자로 판단한다면 언론의 기능을 극도로 위축시키고, 언론사가 예상치 못한 법적 책임까지 부담하게 되는 등 법적 안정성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부연하며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원고 측은 즉시 항소했다. 시민소송단은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사실조회와 일본 외무성 공보관 성명만으로는 발언 여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정상회담 회의록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하고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증인신문을 신청하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서제출명령은 소송의 직접 당사자인 원·피고 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소송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대한민국 또는 청와대에 대한 문서제출명령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고,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증인 신청 역시 사실조회 회신을 통해 이미 답변을 들었기 때문에 증인신문을 하더라도 그 내용이 변경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항소는 기각되었고 사건은 끝이 났다. 하지만 다른 사건들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면이 있다. 독도 기점 12해리를 벗어난 지역이 한·일 공동수역에 포함된 것도 사실이고, 독도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개발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독도에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답보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라.
   
   박근혜 정부와 달리 역대 정부들은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러한 태도는 독도밀약이 실재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필자는 독도밀약이 실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대한민국 정부가 독도를 가지고 일본과 거래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독도밀약이 실재할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독도밀약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도밀약에 의해 대한민국 독도영유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며 그 책임을 묻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책임을 추궁하는 문제는 차후 문제이다. 독도밀약이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 독도밀약은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
   
   독도밀약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독도밀약은 말 그대로 한·일 간의 비밀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간의 비밀조약은 국제법상 어떤 효력이 있을까.
   
    국제연합헌장 제102조 ① 이 헌장이 발효된 후 국제연합회원국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과 모든 국제협정은 가능한 한 신속히 사무국에 등록되고 사무국에 의하여 공표된다.
   
   ② 제1항의 규정에 따라 등록되지 아니한 조약과 국제협정의 당사국은 국제연합의 어떠한 기관에 대하여도 그 조약 또는 협정을 원용할 수 없다.
   
   국제연합 헌장은 1945년 6월 26일 창립 회원국 51개국 중 50개국이 서명하여 10월 24일자로 발효되었다. 헌장 제102조는 헌장이 발효된 후 국제연합 사무국에 등록되지 않고 공표되지 않은 조약은 국제연합의 어떠한 기관에 대해서도 이를 주장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1956년 국제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독도밀약은 1965년에 체결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일본은 독도밀약을 국제연합 사무국에 등록하지 않았고 공표되지 않았다. 고로 일본은 독도밀약의 존재를 주장할 수 없다. 국제사법재판소는 국제연합의 상설 재판기관이기 때문에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밀약을 증거로 제출하여 그 효력을 주장할 수 없다.
   
   국제연합 헌장 제102조는 국가 간의 비밀조약을 막기 위한 규정으로 제국주의 시절 국가 간의 비밀조약이 많은 폐해를 양산했다는 반성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국제연맹 규약에 규정되었던 것이 국제연합 헌장으로 계수된 것이다.
   
   대한제국을 비롯한 많은 약소국가들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밀조약으로 피해를 당했다. 대한제국을 둘러싼 비밀조약들은 주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우선권과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들이었다.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②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③ 위의 경우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작전을 펴고 강화(講和)도 서로의 합의에 의한다.
   
   ④ 협약의 유효기간은 5년으로 한다.
   
   1905년 8월 12일 제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된다.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인하고 협약의 적용 범위를 인도까지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1905년 7월 29일 체결된 가쓰라-태프트밀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를 인정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② 극동의 전반적인 평화 유지를 위하여 일본, 미국, 영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임을 확인한다.
   
   ③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임을 인정한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양해하에 1905년 9월 5일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
   
   ② 청국 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요동반도의 조차권과 장춘~여순 간의 철도를 일본에 위양한다.
   
   ③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할양한다.
   
   ④ 연해주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허락한다.
   
   영국·미국·러시아와의 비밀조약에 의해 정지 작업을 끝낸 일본이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제국주의 시절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체결된 비밀조약은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한 국제연맹은 이러한 비밀조약을 근절하고자 했고 이러한 취지가 국제연합 헌장에 계수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독도밀약은 국제연합에 등록되지 않은 비밀조약으로서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
   
   
   
2.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한 독도밀약은 일본에 불리한 증거일 뿐이다
   
   독도밀약이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는 점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하에서는 독도밀약의 국제법상 효력과는 상관없이 독도밀약이 가지는 의미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독도밀약 제1조는 양국 모두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상세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일본은 대한민국이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
   
   ② 대한민국은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한다.
   
   얼핏 보면 독도가 대한민국과 일본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닌 무주지(無主地) 상태라고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양국 모두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점유하에 있다는 사실이다. 독도를 대한민국이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위 ①과 ② 중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을 가질 것인지 생각해 보자. ①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하다.
   
   독도밀약 제1조는 일본이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에 다름없는 것이다. 2007년 아베 총리가 독도밀약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영토에 관한 비밀조약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한 독도밀약은 일본에 결코 유리한 증거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을 사실상 승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대한민국은 독도에 대한 점유권을 절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대한민국이 독도 점유권을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도밀약이 대한민국에 독도영유권을 승인한 것이 되듯이, 일본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승인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도밀약이 실재할 경우 일본이 어떻게 해서든 독도를 탈취하려고 호시탐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의 소설 ‘독도반환청구소송’은 남북 간 군사적 대치상황이 벌어지자 일본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이 독도를 점령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제2차 한국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일본이 독도를 강제 점령하려고 도발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 우익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단순한 감정적 또는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결코 감정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장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논리적 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의 눈은 확신에 차 있고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정치인은 정치인일 뿐 결코 연기자가 아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독도가 일본 영토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독도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하자고 끊임없이 제안하고 있다. 바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해결방법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노림수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독도 무력 침탈에 대한 명분 쌓기이다. 추후 무력에 의해 독도를 점령했을 때 이러한 제안들이 훌륭한 명분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대한민국에 외교 협상을 제안하고 나아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해결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일본이 독도를 점령한 것은 이렇게 하지 않는 한 독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 독도밀약이 실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검토 결과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독도밀약은 일본에 불리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한 독도밀약은 결코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 될 수 없다




7. 국제사법재판소와 조용한 외교 & 독도 문제의 해법

 -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 한·일 독도 전문가 끝장토론 벌이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배상금 문제에 비해 독도 문제는 상대적으로 쉽다. 전자는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과 관련되어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반면, 후자는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 논리를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독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있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승소할 수 있는 것처럼 공세적 모습을 취하는 데 반해 대한민국 정부는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패소할 수 있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도대체 왜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을 거부하는 것일까?
   
   국제사법재판소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연합의 부속기관으로 만들어졌다. 과거 국제연맹의 부속재판소였던 상설국제사법재판소가 개편된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평화궁에 설치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1991년 9월 17일 국제연합에 가입하였고 국제사법재판소의 당연 당사국이 되었다.
   
   
국제연합헌장 제93조
   
   ① 모든 국제연합 회원국은 국제사법재판소규정의 당연 당사국이 된다.
   
   국가 간의 분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재판소의 기능이기 때문에 국가만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는데 국적이 모두 달라야 하며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선출된다. 상설중재재판소가 지명한 후보자들 중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9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3년마다 재판관 5명을 재선출하게 된다. 국제사법재판소는 휴가기간을 제외하고는 상시 개정되는데 최소 9명 이상의 재판관이 출석해야 한다. 제소는 당사자 쌍방의 제소합의를 재판소에 통지하거나 당사자 일방이 서기에게 신청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재판은 강제관할권이 인정되지 않는 한 양 당사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규정 제36조
   
   ① 본 재판소의 관할은 쌍방 당사자가 재판소에 회부하는 모든 사건과 국제연합헌장 또는 조약 및 협약에서 규정한 모든 사안에 미친다.
   ② 재판소 규정의 당사국은 언제든지 동일한 의무를 수락하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음 각호에 관한 법적 분쟁에 대해 본 재판소의 강제관할을 인정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1. 조약의 해석
   2. 국제법상의 문제
   3. 국제의무 위반 사실 존재 여부
   4. 국제의무 위반에 따른 배상의 범위
   ③ 위 선언은 무조건으로 또는 수개 국가 또는 일정 국가와의 상호주의 조건 또는 기간을 정하여 할 수 있다.
   
   제36조 제3항은 강제관할권 유보조항으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이다. 대한민국은 국제연합 가입 당시 강제관할권을 유보하였다. 일본이 단독제소하더라도 재판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일본은 UN 가입 전인 1954년 당사국이 되었는데 강제관할권을 승인했었다. 판결은 다수결로 하며 공개법정에서 낭독하게 되는데, 판결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재판관은 개별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이며 상소할 수 없다. 재판관들이 자국 사건에 관여할 수 있을까?
   
   
국제사법재판소규정 제31조
   
   ① 국적재판관은 재판소에 제기된 사건에 출석할 수 있다.
   ② 국적재판관이 있는 경우 타방 당사자는 재판관 1인을 선정할 수 있다. 선정재판관은 가능한 한 제4조 및 제5조의 규정에 따라 후보자로 지명된 자 중에서 선정되어야 한다.
   ③ 국적재판관이 없는 경우 각 당사자는 전항의 규정에 따라 재판관을 선정할 수 있다.
   
   당사국과 동일한 국적을 가진 재판관을 국적재판관이라고 하는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판에 참여할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이러한 경우 형평을 위하여 국적재판관이 없는 당사국으로 하여금 1인의 재판관을 선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최근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한 분쟁해결 사례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국제사법재판소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위상이 제고되면서 사건이 증가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2002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간의 영토분쟁 판결 이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간 도서영토분쟁 사건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계류 중이다.
   
   20세기 이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된 도서영토분쟁 사건은 총 12건인데 이 중 1990년 이후에 회부된 것이 7건이다. 현재 전 세계의 도서영토분쟁 지역은 모두 29곳으로 집계되고 있다.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많은 기부를 하며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현재 일본인 오와다 히사시가 재판관으로 재직 중인데 임기는 2021년까지이다. 오와다 히사시는 일본 마사코 왕세자빈의 아버지로 2003년부터 재판관으로 활동해 왔고 재판소장을 역임하였다. 일본은 지금까지 국제사법재판소에 세 명의 재판관을 배출하였다. 상설국제사법재판소 시절에도 세 명의 재판관을 배출하였으며 국제해양법재판소에도 두 명의 재판관을 배출하였다.
   
   일본은 국제재판 경험이 전무한 대한민국에 비해 국제재판 경험이 많다. 1875년 마리아루스호 사건, 1905년 가옥세 사건, 1999년 남방참다랑어 사건 등 세 건의 국제재판을 수행한 경험이 있으며 최근에는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 남극해에서의 고래잡이 금지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일본은 이러한 재판 경험들을 통해 세계 국제법 전문가들과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2010년에 타계한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국제공법 교수였던 이언 브라운리 교수는 오랫동안 일본 외무부 법률자문으로 있었고, 같은 대학의 보건 로 교수는 남방참다랑어 분쟁 사건에서 일본 측 변호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은 대한민국에 비해 국제재판 경험이 풍부하고 국제사법재판소와의 인연도 깊다. 객관적 역량이 우리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한민국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안 되는 이유로 제시되고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국제재판에 대한 불신 논리이다. 국제재판 또한 이어령비어령 식의 약육강식 논리가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국제법이 오히려 약소국의 보호수단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으로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대한민국이 독도를 점유하고 있는 한 독도 문제를 결코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이러한 논리들이 깔려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제재판 수행능력이 일본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이나 국제재판이 강자에 유리하다는 것은 약자의 변명으로서 국제사회에서 결코 수용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일본은 어떻게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여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배알이 뒤틀린다고 맞대응하는 것은 자칫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오히려 독도영유권에 위해를 초래할 수 있다. 독도를 개발 이용하려고 할 경우 일본이 예민해지고 도발이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하다. 독도를 점유한 채 시간이 흘러갈수록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은 더욱 확고해진다. 굳이 일본을 자극하여 도발하게 할 필요가 없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조용한 외교의 요지이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조용한 외교 기조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일본의 독도 도발은 점점 더 강화되었고, 독도 수복은 일본 우익들의 정치적 목표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조용한 외교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정부가 조용한 외교를 하는 것은 뭔가 불리한 것이 있기 때문 아닐까? 외교적으로는 그렇다고 치고 독도에 어마어마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데 왜 개발하지 않는 것일까?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독도해양기지를 만들기 위해 구조물까지 만들어 두었다는데, 왜 내버려 두는 것일까? 독도밀약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 아닐까?
   
   2012년 말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로 재취임하면서 독도 도발이 거세어졌고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도 강경해지고 있다. 이것이 그동안 유지되어 온 조용한 외교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우리는 일본 위정자들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본 우익들을 결집시켜 정권을 창출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로 치부하거나 독도를 이용하여 다른 이득을 챙기기 위한 고도의 협상 전술로 이해하곤 한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민족적 감정주의를 자극하는 통치 기제로 활용하거나 협상 테이블에서의 히든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이론적 확신에 기초한 것으로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 의해 독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되었다는 논리, 1905년 무주지 편입에 의해 독도가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논리, 과거 독도가 한국에 더 가깝기 때문에 한국의 영토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오히려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는 일본에 의해 인식되고 실효 지배되고 있었는 바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들이 만들어지면서 독도수복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이론적 확신에 기초한 주장은 이론적 기초가 무너지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이론적 기반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는 독도 분쟁지역화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용한 외교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정부의 행위는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서 독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자칫 독도분쟁이 존재하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본의 도발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며 독도가 분쟁지역화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이러한 조용한 외교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단호해야 한다. 우유부단한 모습으로는 조용한 외교 전략이 먹혀들 수 없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가 분명하다는 인식하에 어떠한 협상에서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조용한 외교 전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발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민간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정부가 조용하고 단호한 외교 기조를 유지하는 동안 민간은 적극적·공세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평가되는 정부의 행위와 달리 민간의 행위는 여지가 많다. 독도 문제는 민간이 나서야 하는 사안이다. 단 하나 민간의 활동도 하나의 기조 아래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자칫 일본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는 민족적 감정주의에 의해 경도될 가능성이 매우 큰 영역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 역시 민족적 감정주의에 치우쳐 있었다. 일본이 도발해 오면 격앙되었다가 수위가 약해지면 다시 수그러들기를 반복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대응은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현재 일본 내에서 혐한시위가 일어나고 재일동포에 대한 위협과 테러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이론적 확신을 가진 일본 위정자들에게는 독도수복이 지상과제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외교 협상이나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그들은 무력에 의한 해결방법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적절한 시기에 독도를 무력 침탈하는 것과 같은 시나리오이다.
   
   현대사회에서 무력에 의한 영토 수복이 가능할까라며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도의 포르투갈령 고아 침공(1961년), 포클랜드섬을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토 전쟁(1982년), 중국의 서사군도 침공(1974년) 등 또한 불과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이런 극단적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일본 위정자들의 이론적 확신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어떻게 해야 이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인가?   
   
   
1. 이론적인 무장을 위한 독도 영유권 교육
   
   독도 문제를 해결하려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은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일본 정부가 초등학생들에게 일본의 고유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점령하고 있다고 가르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정부도 독도영유권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맞섰고 시도교육감들 역시 독도 교육을 강화하겠다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독도가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대한민국 영토라는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어떠한 내용으로 교육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결론만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일본의 주장 근거가 무엇인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자세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부터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2. 독도 모의재판을 통해 논리를 개발하고 습득하자.
   
   논리는 진화 발전하는 것이다. 일본이 무주지선점론을 주장해 오다가 고유영토론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독도 영유권 논리 또한 진화 발전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더욱 설득력 있는 논리로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독도 영유권 논리를 습득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독도 모의재판을 제안해 오고 있다. 재판은 총력전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증거와 논리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독도 모의재판은 독도 문제를 보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모의재판은 혼자 할 수 없다. 재판부가 있어야 하고, 대한민국 측 소송팀과 일본 측 소송팀이 있어야 한다. 편을 나누어 공방전을 펼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양국의 논리를 습득할 수 있으며, 재판에 이기기 위해 새로운 논리가 개발될 수 있다.
   
   자라나는 우리 학생들이 독도 모의재판을 통해 한·일 양국의 주장들을 이해하고 반박 논리들을 습득하며 새로운 논리를 개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학교와 편을 갈라 모의재판을 해보는 것도 좋고 방송에서 독도 모의재판을 기획 진행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3. 끝장토론
   
   독도가 한·일 양국 간의 핵심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양국 간 독도에 대한 직접적 토론의 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독도 문제가 논의된 것은 1952년 이승만라인 선포 이후 1965년 한·일수교조약 체결 전까지 양국 정부 대표들에 의한 것이 전부였을 뿐 민간에서의 토론은 전혀 없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독도 전문가들과 한국의 독도 전문가들이 독도 영유권에 관한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논박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위정자들에게 논리를 제공하는 최고 전문가들의 입장이 변경된다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 전문가들은 학자로서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학자적 양심이란 진리 앞에 승복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가 일본 독도 전문가들을 이론으로 설복시킬 수 있다면 독도는 더 이상 한·일관계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일 양국 독도 전문가들이 각자 자국 내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봐야 감정만 격해질 뿐이다. 부딪쳐야 가타부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4. 대한변호사회와 일본변호사회 간의 독도 모의재판도 독도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민간 토론의 일환으로 대한변호사회와 일본변호사회가 독도 모의재판을 진행해 보는 것도 독도 문제를 종식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진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양국이 동수의 재판관을 추천하여 재판부를 구성한다.
   ② 재판부는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기만 하고 판결은 내리지 않는다.
   ③ 대한민국과 일본의 독도 전문가들이 소송팀을 구성하여 모의재판을 진행한다.
   ④ 모의재판 과정은 방송을 통해 양국 국민들이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독도 모의재판을 통해 한·일 양국 국민들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주장 근거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반론은 무엇인지,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일 양국 국민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분쟁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독도는 더 이상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 마지막 편으로 국제사법재판소와 조용한 외교 및 독도 문제의 해결 방법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필자가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테마로 7편의 글을 연재한 것은 어떤 논리에 의하더라도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결코 양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분명하게 피력하며 한·일어업협정을 개정하여 독도와 오키섬 사이에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해야 하고, 독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도를 개발하고 이용하여 국가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민간은 독도의 분쟁지역화를 막아야 하는 정부를 대신하여 일본의 독도 도발을 분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민간 활동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 위정자들의 잘못된 확신을 혁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일본의 논리적 근거를 붕괴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독도 영유권 논리를 개발하여 이론적으로 중무장하고 일본의 독도 전문가들을 설복시킬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독도 모의재판이 안팎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간 독도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하고 나아가 한·중·일 동북아공동체를 형성하여 전 인류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8. 한·미방위조약과 독도 -  독도 문제 원인 제공은 미국… 오바마는 누구 손 들까




 


▲ 지난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 미국 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이 모습을 오바마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지난 4월 24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센카쿠가 미·일안보조약의 적용대상임을 천명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방문 시 독도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대상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만일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동원할 경우 미국이 우리와 공동 대응할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4월 25일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이에 관한 질문이 없었던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No’라고 대답하거나 유보적인 답변을 할 경우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기자들은 왜 ‘Yes’라는 대답을 확신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독도 문제를 야기한 것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대한제국의 영토는 한민족에게 환원되어졌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연합군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독도를 한민족의 영토로 인정하며 이에 필요한 각종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군최고사령부 훈령 제677호가 발령된다. 이 훈령은 일본의 통치 대상에서 제외되는 섬으로 리앙쿠르락을 명시하고 있다. 리앙쿠르락이 바로 독도이다.
   
   
훈령 제677호

   
   ‘일본으로부터 특정외곽지역의 통치권적 행정적 분리’
   
   제3조
본 훈령의 목적을 위하여 일본은 일본의 4개 본도와 약 1000개의 작은 인접 섬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포함되는 것은 대마도 및 북위 30도 이북의 류큐제도이고, 제외되는 것은 (a)울릉도, 리앙쿠르락, 제주도 (b)북위 30도 이남의 류큐제도, 이즈, 남포, 보닌 및 화산군도와 다이토군도, 파레세 베라, 마르쿠스, 갠지스를 포함한 태평양 바깥쪽의 모든 섬들 (c)쿠릴열도, 하보마이군도, 시코탄섬이다.
   
   훈령 제677호에는 연합군최고사령부 관할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 군정 직접통치 방식에 의하여 하지 중장의 관할하에, 일본은 미 군정 간접통치 방식에 의하여 맥아더 장군의 관할하에 있었다.
   
   관할지도는 간접통치 대상이 되는 일본의 영토와 직접통치 대상이 되는 한국의 영토를 구분해 놓고 있었는데,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하지 중장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관할지도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입장은 1946년 6월 22일자 연합군최고사령부 훈령 제1033호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훈령 제1033호

   
   ‘일본 어업 및 포경업 승인지역’
   
   제3조
(b)일본 선박이나 선원들은 다케시마(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3분)에 12마일 이내로 접근하거나 동 도서에 접촉해서는 아니된다.
   
   다케시마가 바로 독도이다. 당시 미국은 리앙쿠르락의 한국 명칭이 독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훈령 제1033호는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전제하에 일본 선박과 선원들이 독도 12마일 이내로의 진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 중장이 관할하던 지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된다. 1948년 8월 11일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 미군 총사령관인 하지 중장 사이에 각서가 교환된다. ‘대한민국 정부와 아메리카합중국 정부 사이의 대한민국 정부에의 통치권 이양 및 미국 점령군대의 철수에 관한 협정’이다.
   
   이 교환각서에 의하여 독도를 포함한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가 대한민국에 이양되었고, 대한민국은 독도에 대해 국제법적으로도 완전한 실효 지배를 하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독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30분경에 있었던 미 공군의 독도폭격사건 때문이었다.
   
   ‘8일 오전 11시30분경 울릉도 동방 39해리에 국적 불명 비행기 수기가 출현하여 폭탄을 투하한 후 기관총 소사까지 행하고 사라졌는데, 그곳에 고기잡이와 미역을 따러 갔던 울릉도와 강원도의 20여척 어선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 급보를 받은 울릉도 당국에서는 구조선 2척을 9일 저녁 현장에 급파하였다.’
   
   당시 미 공군은 독도를 사격훈련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일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를 출발한 미 공군 제93 폭격대대 소속 B-29기 편대 21기가 독도 인근에 1000파운드짜리 AN-M-65 범용폭탄 76발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소사했던 것이다.
   
   아직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사건 조사와 수습은 모두 미군의 몫이었다. 그 결과 폭격을 한 B-29 편대의 승무원들이 어선들을 보지 못해 저지른 실수로 일단락되고 만다. 1950년 6월 8일 조재천 경북지사가 독도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를 건립한다.
   
   ‘단기 4281년 6월 8일 59명의 한국 어민이 18척의 배에 분승 출어하여 이 섬에서 조업하던 중 섬이 미군 폭격의 과녁이 되어 14명이 폭사하고 행방불명되었다. 우리는 해양 용사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한다.’
   
   이 일을 계기로 독도는 전 국민적 관심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독도는 새로운 위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 독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된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활용하여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일궈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경우에 대비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두기로 한다.
   
   마침 일본이 독도와 관련하여 강력한 로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미 국무장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J. 시볼드가 1949년 11월 14일 미 국무장관에게 전문을 보낸다.
   
   ‘리앙쿠르락(다케시마)에 대한 재고를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한 것으로 보임.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함.’
   
   5일 뒤에는 정식으로 의견서를 보낸다. 의견서는 일본 외무성이 1947년 6월 발간한 ‘일본 본토에 근접한 작은 섬들’ 제4권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한국 방향에서 이전에 일본이 속했던 섬들의 처리와 관련하여 리앙쿠르락(다케시마)은 초안 제3조에 일본에 속하는 것으로 처리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 섬을 한국 근해의 섬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다케시마의 두 섬은 일본해에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 거의 등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1905년 일본이 자신의 영토로 편입할 때 한국으로부터 아무런 항의도 받지 않고 시마네현 오키군청 관할하에 두었습니다. 이 섬은 강치의 서식지로 오랫동안 일본 어부들이 특정 계절에 그곳에 건너가 활동했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울릉도와 달리 다케시마에는 한국 이름도 없고 한국 영토로 주장된 적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섬은 점령기간 중 미 공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되어 왔고 기상 또는 레이더 기지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시볼드의 제안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1949년 12월 8일 강화조약 6차 초안에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로 명시되었다.
   
   ‘일본 영토는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4대 섬과 대마도, 다케시마…를 포함하는 모든 인접 군소 섬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동안 쭉 한국 영토로 명시되고 있던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에 포함된 것이었다. 하지만 6차 초안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연합군 소속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였고 7차 초안에는 다케시마가 다시 한국령으로 들어가게 된다.
   
   시볼드가 다시 전문을 보냈고, 1949년 12월 29일 8차 초안, 1950년 1월 3일 9차 초안에는 다케시마가 다시 일본 영토로 명시된다.
   
   논란은 계속되었고 1950년 8월 7일 10차 초안에는 아예 섬들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는 방법이 강구되기도 한다. 1950년 9월 11일 11차 초안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다케시마의 소속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이후 영국과 미국 사이에 7차에 걸친 협상이 이루어진다. 협상의 결론은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는 것이었다.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유사시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항에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유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미국이 독도분쟁을 야기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상당히 일본에 기울어 있었다. 1954년 밴 플리트 미국 대사의 귀국보고서의 내용이다.
   
   ‘독도는 일본해에 위치해 있고 대략 한국과 혼슈 중간에 있다. 이 섬은 사실 불모의 무인도로 바위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일본과의 평화조약 초안이 작성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미국은 이 섬이 일본의 주권하에 남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섬은 일본이 평화조약상 포기한 섬들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었지만 우리의 입장은 아직까지 공표되지 않았다. 미국은 이 섬을 일본 영토로 생각하지만 양국 간의 논쟁을 방해할 우려가 있다. 이 논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우리의 입장은 비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전달된 바 있다.’
   
   미국의 입장이 대한민국에 비밀리에 통보되고 아직 공표되지 않았다는 것은 1951년 8월 10일 대한민국에 극비리에 전달된 러스크서한을 가리키는 것이다.
   
   ‘귀하가 보내신 일본과의 평화조약의 초안에 관하여 미국 정부의 재고를 요청하는 1951년 7월 19일 및 8월 2일자 문서를 확실히 수령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유감스럽지만 미국 정부는 그 제안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독도 또는 다케시마 내지 리앙쿠르락으로 알려진 섬에 관해서는, 통상 무인인 이 바위섬은 우리들의 정보에 의하면 조선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결코 없으며, 1905년경부터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이 섬은 일찍이 조선에 의해 영유권 주장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일본이 제공한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에 상주하고 있던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은 오히려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러스크의 의견이 반대 증거에 의하여 변경될 수도 있다는 내부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미국은 독도와 관련하여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일본 어느 나라도 맹방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일본과 대한민국이 독도에 관하여 서로 자기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난처해진 미국은 독도문제 자체는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로서 제3자에 불과한 미국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며 발을 빼 버린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1977년 미국 지명위원회는 독도를 리앙쿠르락으로 고쳐 표기하였고, 2008년에는 독도의 소속국을 대한민국에서 미지정으로 개정하였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항의로 원상 복귀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이 독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다.
   
   최근 버지니아주에서 일본해와 동해를 병기하기로 하는 법안이 통과된 일이 있었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일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난 한·미 정상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우리 기자들이 독도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대상이 되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 손을 들어 주는 대답을 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도에 대해 중립적 입장이라는 것은 독도 수호가 온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미국조차도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고 홍보하여야 한다.
   
   나아가 일본이 독도에 대해 어떠한 도발을 하더라도 지킬 수 있는, 아니 도발 자체를 꿈꿀 수도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

[출처] : 강정민 변호사·‘독도반환청구소송’ 저자 :독도에 관한 불편한 진실 /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