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한의 세상를 바꾼 전략 Ⅱ
21. 베를린장벽 왜 무너졌나 - 파시즘방지벽이라던 철옹성, 내부 이탈에 와르르
글라스노스트 표방 고르바초프 때 - 수십만 명 헝가리 등 거쳐 우회 탈출
일부 서독 방문 곧 허용 발표하며 - “즉시 개방” 얼떨결에 말해 붕괴 시작
휴전선·북중 국경 둘러싸인 북한 - 완전 봉쇄 어렵다면 반대 전략을
1961년 8월 13일 동독 전차들이 서베를린과의 경계선에 도열하여 베를린장벽 축조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약 1000명의 동독인들 담 넘다가 숨져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두드림이 계속되었다. 1971년 동독에서 탈출한 미카엘 가르텐슐래거는 1976년 3월과 4월 동서독 경계선에 설치된 동독의 대인지뢰 SM-70을 탈취하여 세상에 공개했는데, 5월의 탈취 시도 때에는 동독 국경수비대 총격에 즉사하고 말았다. SM-70의 비인도적 잔혹성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당시 외환 부족을 겪던 동독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따라 SM-70을 동독 철조망에서 철거했다.

베를린장벽의 수명은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9년 5월 헝가리 정부는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한 소련 고르바초프 정부의 지원하에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했다. 9월 동독인 수십만 명이 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오스트리아·서독을 차례로 우회하여 탈출하기 시작됐다.
이런 어수선한 시절 동독 정권이 전혀 의도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일부 여행객에 한해 서독으로 바로 갈 수 있게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의 질문을 받은 동독 관리가 출국을 즉시 허용한다고 얼떨결에 말하게 되었고 이에 언론은 베를린장벽을 포함한 동서독 경계선이 모두에게 즉시 개방된다고 보도했다.
그렇게 넘기 어렵던 베를린장벽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던 동독 시민들이 무너뜨렸다. 담이 아무리 높더라도 내부 변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몇 곳에서만 길게 세워진 베를린장벽을 볼 수 있다. 슈프레강변 따라 가장 길게 보존된 1300m의 베를린장벽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그라피티로 유명하다. 분단 시절 베를린장벽 벽화는 서베를린 쪽에만 있었다. 동베를린 쪽 벽면은 접근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벽 붕괴 직후인 1990년 2월부터 세계 여러 나라 예술가들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장벽의 동쪽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4 베를린장벽 위치를 표시하고 있는 포츠담광장 바닥의 붉은 선. 통일 후 건축된 건물 등으로 중간중간 끊겨져 있다. [사진 김재한·위키미디어]
사실 담은 보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외부와 단절하는 담은 대체로 ‘우물 안 개구리’(내부의 지배 집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세운 담이 장기적으론 자신을 구속하여 패가망신에 이르게 만들기도 한다. 즉 담은 단기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만, 장기적으론 그렇지 못하다.
서독 정부는 베를린장벽이 세워져 있던 28년 동안 4만 명에 가까운 동독 정치범과 25만 명에 이르는 그들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약 2조원의 돈을 동독에 지불했다. 이른바 ‘프라이카우프’다. 동독에 돈을 줘도 서독을 위협할 동독 군사력 증강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3년의 치열한 전쟁과 수십 년의 각종 도발을 겪은 남북한 관계는 동서독과 다른 상황임은 물론이다. 남북한 간의 담은 살아서 넘기는커녕 죽어서도 넘지 못할 정도로 높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는 북한군 묘지가 있다. 6·25전쟁이나 이후 도발에서 사망한 북한군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무장공비 침투 사실을 부인하는 북한 정권은 유해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잠수함 등 결정적 증거가 있었던 1996년 강릉 무장공비의 유해만 인수해 갔을 뿐이다. 북한 정권은 잠수함 승조원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라 잠수함 고장으로 임시 상륙한 난파 선원이었고 남측이 이들을 무참히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북한군은 죽어서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와 달리 중공군 유해 437구는 2014년 3월 중국으로 송환됐다. 현재 남한 내에서 발굴·확인됐지만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한 중공군 유해는 없다. 발굴된 미군의 유해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과 평북 운산 지역에서 발굴된 225구의 미군 유해는 약 3만 달러의 돈이 북한에게 지급된 후 미국으로 송환된 바 있다.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대한민국 국군의 유해는 2012년 5월 처음으로 남한에 돌아왔다. 그러나 북한이 바로 남한으로 보내 준 것은 아니다. 미국·북한 간의 협약에 의해 미국이 북한에게 발굴 비용을 주고 미국이 전달받은 유해 가운데 국군의 것으로 판명된 유해가 남한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남북한 간에는 죽어서도 넘지 못하는 담이 존재하고 있다. 자유왕래, 이산가족 상봉, 유해 송환 등이 불가능한 이 높은 담은 무엇보다도 북한 정권이 쌓은 것이다.
북한의 담이 얼마나 견고할까가 오늘날의 주요 관심사다. 동독에 155km 베를린장벽과 1400km의 동서독 경계선이 병존했듯이, 북한에는 155마일의 남북 군사분계선과 1400km의 북중 국경선이 존재하고 있다. 동독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폐쇄와 개방에 주변국은 큰 영향을 미친다.
불완전한 대북 봉쇄는 북한 개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만일 완전한 봉쇄가 어렵다면 차라리 반대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베를린장벽을 포함한 모든 철옹성은 우회나 내부 이탈에 유난히 약했다. 어떤 체제든 쇄국 일변도로 오래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결정적 순간마다 다수 규합 - 경쟁자 제거하며 1인체제 구축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대 맞서 - 우파 부하린과 손잡고 다수 확보
좌파 주요 지도자들 제거 후엔 - 다시 좌파와 연대, 부하린 축출

맨 왼쪽 사진이 원본이다. 권력 투쟁에서 스탈린 옆의 인물이 하나씩 축출됨에 따라 사진에서도 하나씩 사라져갔다. [위키미디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11월(러시아가 1918년 초까지 채택한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에 발생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진화된 모습이 자기모순적이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 진화의 변곡점은 지금으로부터 꼭 90년 전인 1927년 11월 12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레프 트로츠키(본명 레프 브론슈타인)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을 공산당에서 제명한 사건이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1인 지배 체제의 출범이자, 공산주의가 1인 장기 지배 체제로 구현되는 좋지 않은 관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인 1982년 11월 12일, 유리 안드로포프가 새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됨으로써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순으로 55년 동안 이어지던 소련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막을 내렸다.
1인 장기 지배 체제의 와해는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구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스탈린의 1인 지배 체제 구축은 결정적 순간마다 다수를 규합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면서 이뤄졌다. 다수를 동원하더라도 그 출발은 늘 소수에서였다. ‘평화·땅·빵’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볼셰비키 혁명 자체가 그랬다.
레닌, 스탈린 해임 뜻 문서로 남겨
나치를 상징하는 용의 사체 위에서 악수하고 있는 소련군과 영국군.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한 1941년에 제작된 소련 포스터. [위키미디어]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대회 때 표결에서 이긴 레닌파는 자신을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로 부르고, 상대 파벌인 마르토프파를 소수파라는 의미의 멘셰비키로 불렀다. 사실 당시 볼셰비키는 다수파로 불릴 정도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지는 못했다.
스탈린이 직접 볼셰비키 근거지를 마련한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볼셰비키는 소수에 불과했다. 소수 정예의 직업적 혁명가 위주로 중앙집권적 당 구조를 중시한 볼셰비키는 명칭을 통해서 세를 더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2년 레닌은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위촉했다.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는 데에 조지아 출신의 스탈린이 도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볼셰비키 주간지 즈베즈다(별)를 일간지 프라우다(진실)로 전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스탈린은 본래 갖고 있던 이오시프 주가시빌리라는 이름 대신에 강철인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필명 ‘스탈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22년 레닌은 뇌졸중 후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스탈린의 국정운영 방식을 우려하여 스탈린을 당 서기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뜻을 문서로 남겼다. 1923년 레닌이 병석에 있는 동안 스탈린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3두 체제를 형성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좌파적 성향이라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이념적으로 유사했다. 하지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좌파야권을 분파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이에 트로츠키 역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의 과오를 지적했다. 1925년 트로츠키는 군사인민위원에서 결국 해임당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트로츠키를 당에서도 제명하려 시도했을 때 스탈린은 이에 반대했다.
트로츠키 세력이 약화한 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와 함께 반(反)스탈린 전선을 구축했다. 1926년 초 트로츠키의 좌파야권 그리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신야권이 야권연대를 결성했다. 이 연대에는 레닌의 미망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참가한 적도 있다. 야권연대는 당내 언론자유와 탈관료주의를 주장했다.
이에 중도적 위치의 스탈린은 부하린의 우파와 연대하여 다수 세력을 확보했고, 1927년 11월 12일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계속 항거한 반면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여 공산당에 다시 입당할 수 있었다. 주요 좌파 지도자들이 제거된 이후인 1929년 스탈린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좌파와 연대하여 부하린 등의 우파를 축출했다.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한 이후 스탈린은 개인숭배에 의한 장기 지배를 모색했다. 1929년 12월 생일을 맞은 스탈린은 출생연도를 1878년에서 1879년으로 바꾸어 탄생 50주년 축하 행사를 풍성하게 가졌다. 이를 시작으로 개인숭배 사업이 줄줄이 이어졌다.
또 스탈린은 공포 정치에 의한 장기 지배의 길로 들어섰다. 독재자일수록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의 상황을 의식하여 무리해서라도 더욱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스탈린은 경제정책 실패로 나빠진 민심이 권력 교체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대안이 될 만한 잠재적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다.
1936년 이른바 1차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16인의 볼셰비키 혁명 동지들이 숙청되었다. 1938년 이른바 3차 모스크바 공개 재판에서는 부하린 등 21인의 동지들도 숙청했다. 모스크바 재판의 증거는 대부분 조작된 것이었다. 심지어 망명 중인 트로츠키마저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50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복권됐다.
스탈린이 레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인 지배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자신이 다수 승리연합을 이끌 수 있도록 일련의 연대를 지속적으로 도모했기 때문이다. 승리 이후에는 자기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 승리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파트너의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연대를 쉽게 결성하고 쉽게 깨려면 이념적 입장을 유연하게 가져야 한다.
대외정책에서도 이념적 유연성 관철
1949년 12월 18일 중국 공산당원들이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며 행진하고 있다
스탈린의 이념적 유연성은 국내정치뿐 아니라 대외정책에서도 관찰된다. 영구혁명론 대신에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워 서유럽 사회주의 혁명세력을 지원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국가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이 소련을 공격하려는 위기 속에서는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맺어 공격의 우선 대상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또 중국 공산당에게는 반(反)일본제국 연합전선인 국공합작을 권고하기도 했다. 모두 이념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행보였다. 상황에 따라 적과도 연대할 정도로 스탈린의 이념적 위치는 유동적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 역시 당내 이념 분포에 있어 중간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연대 파트너의 선택에 제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당 서기장으로 무난히 선출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적이거나 유동적 위치라고 해서 늘 다수 승리연합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탈린과 안드로포프 모두 자신의 조직을 확실하게 관리했다. 사적 혜택을 제공하고 대신에 충성으로 돌려받는 관계가 지속되는 지배연합을 유지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은 모두 당대 발군의 이론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권모술수 행동에서 스탈린을 따라가지 못해 경쟁에서 패배한 후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스탈린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중국과 북한에도 모델이 되어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1인 장기 지배 체제를 가능케 하였다. 심지어 공산주의와 경쟁하는 체제에서도 1인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그런 예이다.
오늘날 1인 장기 지배 체제는 흔하지 않다. 개방된 체제에서 1인 지배 체제는 오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1인 장기 지배를 추구하는 지도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주변국에는 일당 독재에 기반을 둔 1인자들이 있다. 그런 1인자 등극 현상은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꼽혔던 쑨정차이를 부패 혐의로 낙마시킨 후 장기 지배의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한다. 지난 10월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자민당이 크게 승리한 데에는 분명히 북한 덕도 있다고 아소 다로 부총리가 발언한 바 있는데, 아마 중국까지 포함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중국·러시아·미국·일본 등의 강한 지도자 등장은 서로 궤를 함께하고 있다.
100주년을 맞은 볼셰비키 혁명은 오늘날 북한과 중국, 심지어 러시아에서조차 별로 기념되지 않는다. 볼셰비키 혁명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촛불집회조차 잘 보도되지 않는다. 대신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다시 기념되고 있을 뿐이다. 개인숭배가 집권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럽에 유령이 나타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1848년 공산당선언 첫 구절) 대신에 오늘날 동북아시아에는 스탈린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북아시아의 일부 권력자들이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1930년대 소련 사회와 전혀 다른 오늘날에 스탈린식 숙청 방식이 지속적으로 통하기는 어렵다.
물론 다수의 세력을 결집하려는 스탈린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수 승리연합을 주도하기 위해 여러 차원의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은 스탈린을 포함한 권력자가 보편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다만, 강한 패권 경쟁자의 연대뿐 아니라 약한 생존 경쟁자의 줄서기에서도 몇 수 내다보기가 필요하다.
23. 일본 근대화 원동력 ‘삿초 동맹’ 주인공
- ‘신뢰의 허브’ 료마, 앙숙 화해시켜 메이지유신 길 열다
막부의 개국 정책 지지 사쓰마번 - 존왕양이 내세운 조슈번과 대립
양쪽의 두터운 신뢰 받던 료마 - 왕정복고 위한 反막부 단결 촉구
공공 목적의 동맹, 체제변혁 추진 - 통합 연대 이끌 한국의 료마 나와야
사카모토 료마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전쟁의 작전지도. 이때 료마는 조슈를 지원하여 막부 세력과 싸웠고, 조슈가 실질적으로 승리했다. [위키미디어]
지금으로부터 꼭 150년 전인 1867년 12월 10일(음력 11월 15일)은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날이다. 32세를 맞는 생일(음력 기준)이기도 한 날에 자객의 습격으로 굵지만 짧은 생애를 마친 사카모토 료마(본명 나오나리) 이야기다.
그의 일대기는 오늘날 소설·드라마·영화·연극·뮤지컬·만화 등으로 일본 내에 널리 알려져 있다. 료마는 일본 체제가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서게 했고, 이는 훗날 한반도의 식민 지배, 분단, 전쟁, 냉전 등을 포함해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짧은 활동 기간에 큰 변화를 이룬 것은 그만큼 료마의 활동이 전략적이었다는 의미다.
도사번(土佐藩, 오늘날 고치현 지역) 출신 료마의 전략적 행동은 사쓰마번(薩摩藩, 오늘날 가고시마현 지역)과 조슈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 지역) 간의 이른바 삿초(薩長) 동맹의 주선에서 두드러졌다. 앙숙 간에 결성된 삿초 동맹으로 비로소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또 육군과 해군을 각각 축으로 한 조슈 파벌과 사쓰마 파벌이 한동안 일본 정치를 지배하기도 했다.
“막번 체제 폐지” 선각자 의견 접해
메이지 유신이 태동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비석. 1968년 메이지 유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슈 출신 사토 에이사쿠(아베 신조 총리의 작은 외조부) 일본 총리의 글씨를 새겨 쇼인 신사 내에 세웠다. [사진 김재한]
조슈와 사쓰마는 지정학적으로 서로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1860년대 전반 조슈의 주류는 ‘왕을 높이고 외세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웠다. 이는 당시 지배 세력인 막부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 사쓰마는 막부의 개국 노선을 지지했다. 이런 차이는 일련의 사건으로 철천지원수 관계로 전개됐다.
먼저, 이른바 ‘분큐의 정변’ 또는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863년(분큐 3년) 고메이 덴노(일왕)가 도쿠가와 막부에 외세 배격을 명하자 막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밝혔으나, 정작 조슈만이 계획된 날에 미국 상선을 포격했다.
이후 조슈는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교토 조정 역시 위기에 직면하여 존왕양이파 귀족들을 실각시키고 대신에 ‘조정(公)과 막부(武) 간의 합체’를 강조하는 공무합체(公武合體)파 귀족들을 등용했다.
8월 18일(이하 음력) 조정은 조슈번의 경쟁자인 사쓰마번과 아이즈번의 병사들에게 황궁 경호를 맡기고 조슈 번사들을 교토에서 쫓아냈다. 이 사건으로 일부 조슈 번사들이 ‘사쓰마는 도적이고 아이즈는 간사하다’는 뜻의 살적회간(薩賊會奸) 네 글자를 신에 쓰고 다닐 정도로 사쓰마에 대한 조슈의 원한은 컸다.
다음, ‘겐지의 변’ 또는 ‘금문(禁門)의 변’ 또는 ‘하마구리고몬(蛤御門)의 변’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1864년(겐지 원년) 조슈 세력은 교토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 세력을 배제하려 거병했다. 조슈 세력은 교토 황궁에 진입했으나 칸몬(乾門)을 지키던 사쓰마 병력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조슈와 사쓰마는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이 시절 료마는 당시 중형으로 처벌되던 탈(脫)번을 감수하면서 일본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1862년에는 조슈의 하기 지역을 방문하여 막번(막부와 여러 번) 체제를 폐지하고 하나로 결합해야 한다는 조슈 선각자들의 의견을 접했다.
요시다 쇼인이 내세운 일군만민(一君萬民) 즉 ‘오로지 덴노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동등하다’는 주장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같은 해 료마는 막부의 개국파 관료인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는데 외세 배격은 불가함을 깨달았다. 즉 막번 체제 대신에 ‘존왕’을 추진하되, ‘양이’ 대신에 개화로 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864년 가이슈가 외국 세력과 조슈 간 충돌의 중재자로 나가사키에 파견되었을 때 료마도 수행했다. 8월 료마는 가이슈의 사신으로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면담했다. 11월 가이슈가 파직당하자 료마는 사쓰마로 망명했고, 사쓰마의 지원을 받아 일본 최초의 상사(주식회사)로 일컫는 가메야마 조합을 나가사키에 설립했다. 료마는 반(反)막부 세력이 단결해야 왕정복고가 가능하다는 소신을 갖고, 사쓰마 지도자들에게 조슈와의 숙적 관계를 청산하라고 권고했다.
1865년 5월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로 추후 개명)를 면담했다. 6월 료마는 사쓰마의 이름으로 조슈에게 대신 무기를 구매해 주는 방식에 대해 사이고의 동의를 얻었다. 료마는 막부의 조치로 외국산 무기를 구할 수 없었던 조슈가 사쓰마 명의로 군함을 포함한 여러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주선했다. 대신 사쓰마는 조슈 지역에서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었다.
1866년 1월 사쓰마와 조슈의 만남은 서먹했다. 료마가 교토 고마쓰의 저택 모임에 합류한 후에야 협상은 진척되어 사쓰마의 사이고 그리고 조슈의 고고로가 6개 조항에 합의했다. 2월 5일 고고로의 요청에 따라 료마는 고고로의 편지 뒷면에 합의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 합의에 따라 사쓰마는 1866년 6월에 시작된 제2차 조슈 정벌에 불참했고, 료마는 조슈 측에 직접 참전했다. 조슈는 사쓰마의 도움으로 ‘조정의 적’에서 벗어났다. 1867년 11월 사쓰마 번주가 상경하여 조슈 세자와 출병 협정을 맺어 삿초 동맹을 공식화했다. 12월 교토를 장악한 삿초 동맹의 권고에 따라 메이지 왕정복고가 선포됐다. 료마는 완전한 왕정복고를 보지 못한 채 교토에서 숨을 거뒀다.
료마 암살은 막부 자객이 행한 것으로 대체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의견도 많다. 료마가 막부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막부의 완전 타도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를 껄끄럽게 여긴 사쓰마번이 암살 배후라는 설도 있고, 선박 충돌 사고로 료마의 무역상사에게 배상금을 물어 줘야 했던 기슈번이라는 설도 있으며, 도사번 내부에서 료마를 견제하여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료마는 누구와도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마가 앙숙 간의 동맹을 타결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료마는 국내외 여러 세력과 밀접한 네트워크를 갖추어 허브와 같은 연결고리였다. 특히 글로버 등 열강의 무역상과의 네트워크는 조슈의 무기 조달에 도움이 되었고, 이는 다시 사쓰마의 군량미 조달을 가능하게 했다. 료마는 사쓰마를 비롯한 몇몇 당사자의 에이전트라는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는데, 그만큼 료마가 여러 당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다.
삿초뿐 아니라 다른 번과의 통합도 추진
1866년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의 요청에 따라 료마가 이서한 삿초 동맹 합의서. [일본 궁내청 소장본
둘째, 료마는 연결고리에 그치지 않고 신뢰를 받았다. 삿초 동맹의 당사자가 합의 후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던 료마의 이서를 필요로 했던 것은 그만큼 료마가 모두의 신뢰를 받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배척 대신에 주로 통합이라는 가치 추구에서 나왔다.
셋째, 료마는 삿초뿐 아니라 여러 번까지 아우르는 통합을 추구했다. 사실 사쓰마와 조슈 간에는 다른 점이 많았다. 막부에 대한 태도만 해도 그렇다. 막부를 철저하게 타도하려던 조슈와 달리, 사쓰마의 타도 대상은 막부 제도라기보다 이른바 이치카이소(一会桑) 정권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군사력이 별로 없던 히토츠바시(一橋) 도쿠가와 당주보다는 아이즈(会津) 번주와 구와나(桑名) 번주였다.
반면에 료마는 막부와 여러 번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료마는 인물 척결보다 체제 변혁을 지향했다. 막부가 반(反)막부의 존왕양이파보다 개방을 지향했지만 위기 극복의 동력을 이미 상실했고 따라서 체제 변혁이 필요하다고 료마는 생각했다.
료마가 작성했다는 신정부강령팔책의 마지막 문단에 등장하는 “OOO 스스로 맹주로 나서서 이 안을 조정에 올려 천하 만민에게 공포하며”라는 대목의 OOO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거론될 정도로, 료마는 여러 당사자가 함께 할 여지가 있는 전략적 안을 마련했다.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일컫는 료마 부부의 방문을 기념하는 가고시마 시내의 동상. 삿초 동맹 합의 며칠 후 발생한 테러에서 다친 료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추천으로 가고시마 일대의 온천에서 휴양했다. [사진 김재한]
넷째, 료마는 자신의 세속적 이해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공공적 목적에서 삿초 동맹을 추진하고 신정부강령팔책을 기안했다. 료마는 주고받기식 사적 거래보다, 정책에 의한 공공재적 생산을 추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연대는 제3자에게 나쁠 때가 많다. 배제된 측의 시각에선 연대는 담합이나 악의 축에 불과하고 악평 받기 마련이다.
만일 특정 연대가 체제 경쟁력을 높여 연대 밖의 체제 구성원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연대에 끼지 못했지만 그 과실을 공유하는 연대 밖의 체제 구성원도 호평을 보낸다.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서게 한 삿초 동맹은 그런 점에서 일본 내에서 호평을 받는 것이다. 물론 식민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연대 이론에서는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급적 작은 연대 즉 최소승리연합을 추진한다고 본다. 이에 비해 위기 상황에서의 료마식 연대는 사심보다 공공성으로 동기를 부여하여, 분열적인 작은 연대보다 통합적인 큰 연대를 궁극적으로 모색하고, 인물 교체보다 체제 변혁에 목표를 두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 연대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앙숙끼리의 연대는 늘 어렵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협력도 마찬가지다. 정계 개편이든 국제질서 개편이든, 숙적 관계를 뛰어넘어 시스템을 바꿀 통합적 연대는 사심 없고 신뢰받는 주선자가 나설 때 더욱 가능하다. 21세기 한반도에서 료마를 찾을 수 있을까?
[출처] 김재한의 세상를 바꾼 전략 Ⅱ.|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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