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적도보』로 보는 조선 사찰(寺刹)의 옛 모습 Ⅱ[ㅅ~ㅇ]
순천 선암사 (順天 仙巖寺)
순천 선암사 (順天 仙巖寺) 전경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로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毘盧庵)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道詵)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개의 암사(巖寺)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仙巖)·운암(雲巖)·용암(龍巖)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丈)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088년(선종 5) 의천(義天)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석종(石鍾)·철불(鐵佛)·보탑(寶塔)·부도(浮屠)·문수전(文殊殿)·조계문(曹溪門)·청치(圊廁)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冥府殿)·약사전(藥師殿)·적연당(寂然堂)·명경당(明鏡堂)·대장전(大藏殿)·청운당(靑雲堂)·백운당(白雲堂)·배면당(背面堂)·독락당(獨樂堂)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天藏殿)·지장전(地藏殿)·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낙성료(落星寮)·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리고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심주각(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枕肱)이 많은 당우(堂宇)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除夕)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禁戒)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護岩)과 치현(致玄)이 있었다.
특히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塑像) 61구, 화상(畵像)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浩然)이 『선암사사적(仙巖寺事蹟)』을 썼다. 1819년(순조 19)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霜月)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海鵬)·눌암(訥庵)·월파(月波)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1911년 6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사찰령(寺刹令)」이 발표되고, 다시 같은 해 7월 8일 반포된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0본사가 정해질 때, 선암사 또한 30본사 중의 하나가 되어 승주군과 여수시·여천군의 말사를 통섭하였다.
당시의 주지는 방홍파(方洪坡)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장기림(張基林)·김청호(金淸昊) 등이 주지직을 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선암사에는 대웅전·지장전·불조전·팔상전·대장전·장경각(藏經閣)·원통전·응진당·각황전(覺皇殿)·벽안당·진영각·심검당·설선당·창파당(滄波堂)·소재전(消災殿)·산신각·천불전(千佛殿)·무우전(無憂殿)·독락당·만세루(萬歲樓)·응향각·도선암(道詵庵)·극락전·일주문·노전(爐殿)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부속암자로는 산내(山內)에 대각암(大覺庵)·대승암(大乘庵)·청련암(靑蓮庵)·운수암(雲水庵)·선조암(禪助庵)·향로암(香爐庵)·비로암(毘盧庵)이 있었고, 산외(山外)의 말사로는 여천군의 흥국사(興國寺), 순천군의 향림사(香林寺)·도선암(道詵庵)·정혜사(定慧寺)·대흥사(大興寺), 여수군의 한산사(寒山寺)·석천사(石泉寺)·용문암(龍門庵), 광양군의 백운암(白雲庵), 광주군의 증심사(證心寺)·원효암(元曉庵)·약사암(藥師庵)·규봉암(圭峯庵)·지장암(地藏庵) 등이 있었다.
6·25전쟁 이전에는 불각(佛閣) 9동, 당료(堂寮) 25동, 누문(樓門) 31동 등 모두 65동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으나, 전쟁 중에 불타고, 현재는 대웅전·원통전·팔상전·불조전(佛祖殿)·장경각·강선루(降仙樓) 등 크고 작은 20여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單層八作)지붕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대웅전의 기단(基壇)과 석계(石階)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계측(階側)의 조각은 볼만한 것이었으나 근세에 이르러 모두 고쳐 지었다.
건평 20평에 높이 12m인 다포식(多包式) 건물인 원통전은 경잠·경준·문정 등의 3대사가 중수할 당시의 건물로 알려지고 있다. 국사전이라고도 하는 진영당(眞影堂)은 도선·서산(西山)·무학(無學)·지공(指空)·나옹(懶翁) 등의 우리 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을 봉안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상으로는 고려시대의 석가모니불상과 1685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상·과거칠불상(過去七佛像)·아미타불상·53불상·석가삼존상·제자상·16나한상·사자상(使者像)·판관상(判官像)·철조약사불상(鐵造藥師佛像)·지장삼존상(地藏三尊像) 등의 많은 불상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1624년에 그려진 가로 7.5m, 세로 13.5m의 괘불(掛佛)과 화엄탱(華嚴幀) 등의 불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395호로 지정된 선암사삼층석탑 1기가 있고, 입구의 돌다리인 선암사승선교(仙巖寺昇仙橋)는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고,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0호인 금동향로(金銅香爐) 1기가 있다. 그 밖에 우수한 부도 2기가 경내에 있다. 특히 조선 후기의 특성을 간직한 사자탑(獅子塔)인 화산대사사리탑(華山大師舍利塔)은 주목된다.
그리고 ‘大福田(대복전)’이라는 편액과 천자(天字)와 인자(人字)를 결합시켜 천인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한 글자씩의 편액이 있다. 이들 편액에는 어필(御筆)이라고 씌어 있는데 순조의 친필이다.
정조가 태자의 출생을 석왕사와 선암사에서 기원한 결과 순조가 탄생하였으므로 정조는 석왕사에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고, 순조는 선암사가 큰 복의 밭이라 하여 대복전이라는 글을 금자(金字)로 썼다고 한다.
그 뒤 순조는 다시 천자와 인자의 한 자씩을 써주어 대복전 현판 양쪽에 걸어 ‘人天大福田(인천대복전)’이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인과 천 두 글자의 편액은 현재 대복전과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다.
입구의 강선루에는 안과 밖에 ‘강선루(降仙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안쪽은 윤용구(尹用求)의 필이고, 밖의 것은 김돈희(金敦熙)의 글씨이다. 절일원이 송광사와 더불어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순천 선암사 조계문 (順天 仙巖寺) 정면
순천 선암사 대웅전 (順天 仙巖寺 大雄殿) 정면
순천 선암사 대웅전 (順天 仙巖寺 大雄殿) 정면
선암사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법당으로 1824년에 중창되었다.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보물 제1311호.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타 없어져 1660년(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 등 3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현존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1766년(영조 42)에 불탄 것을 1824년(순조 24)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하였는데,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 : 창문 위에 두는 낮은 창)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하였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무고주 5량가이며 자연석 기단위에 놓인 초석은 주좌가 있는 초석과 덤벙주초가 혼용되었고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양측면의 남측 협칸에만 출입문을 달아 벽체로 마감하였고 후면 중앙에만 2분합의 세살문이 있고 나머지는 벽체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내부로는 모두 우물마루가 짜아졌으며 어칸의 후면으로 불단을 놓아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기둥위에 짜아진 포작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라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전후면에는 각 3조씩, 양측면에는 각 2조씩의 주간포를 배치하였으며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이지만 내외살미는 외부에서 앙서형을 이루고 내부에서는 화려한 연봉형장식으로 마감하였다. 포작은 외3출목(7포작) 내4출목(9포작)이며 조선 후기 건축에서 보이는 연봉장식 등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에 용머리 장식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부안의 내소사대웅보전(보물 제291호)·개암사 대웅전(보물 제292호)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의 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나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순천 선암사 대웅전 (順天 仙巖寺 大雄殿) 외부 두공
순천 선암사 대웅전 (順天 仙巖寺 大雄殿) 내부
순천 선암사 원통전 (順天 仙巖寺 圓通殿) 측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1660년(현종 1) 경잠(敬岑)·경준(敬俊)·문정(文正) 등이 초창하여 1698년(숙종 24)호암(護巖)이 중창하였고, 1824년(순조 24)해붕(海鵬)·눌암(訥菴)·익종(益宗) 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조가 후사가 없자 선암사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여 순조 임금을 얻게 되었는데, 후에 순조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人(인), 天(천)’, ‘大福田(대복전)’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다. 이 현판은 현재 건물의 내부에 걸려 있다.
원통전의 좌향(坐向)은 동남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丁자형 건물로,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活柱)를 내어 처마선을 길게 돌출시켰다. 내부는 내진(內陣)과 외진(外陣)으로 나뉘어 내진의 배면 한쪽을 막아 불상을 안치하는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내진간의 배면 이외에는 모두 문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나타난 사진을 보면, 외부 벽에는 배면에만 벽이 있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벽이 없이 개방되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설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단(基壇)은 장대석으로, 전면은 약 1m 되는 축대를 쌓아올렸고 양측 면과 후면은 외벌대로 되어 있다. 초석은 덤벙주초와 일부는 원형 다듬돌로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 화반(花盤)과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가 있다.
화반 위로는 장여·도리·서까래순으로 짜여져 있다. 내부는 보가 없는 구조로서,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같은 구조 형식에 속한다. 외진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짜여져 있으며, 내진의 천장은 출목을 연결시켜 천장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전면의 돌출로 합각이 3곳인 팔작지붕으로 겹처마로 되어 있다.
전면에 양쪽으로 쌍여닫이문과 중앙에 4분합문이 있고, 양측 면에는 쌍여닫이문이 하나씩 있다. 원통전은 평면 형태가 특이하게 되어 있어, 건물 정면의 공포는 모두 귀한대를 가지는 우주 공포의 모습을 띠고 있다.
순천 선암사 원통전 (順天 仙巖寺) 세부
순천 선암사 팔상전 (順天 仙巖寺 八相殿) 정면
정면 5칸, 측면 3칸인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건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 잘 다듬은 긴 댓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은 다음 민흘림 둥근기둥을 세웠다.
정면은 다포계이면서도 평방(平枋)은 쓰지 않고 창방(昌枋)만을 둘러 짜서 기본 가구(架構)를 구성하였으며, 측면은 대들보와 충량(衝樑)으로 2중량(二重樑)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보아, 원래는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지붕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정면의 공포만 다포작(多包作)으로 바꾼 것으로 판단된다.
선암사중수비명(仙巖寺重修碑銘)에 의하면, 선암사의 건물들은 대분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뒤 1698년(숙종 24)에 약휴대사(若休大師)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다시 불에 탄 것을 1824년(순조 24)에 해붕대사(海鵬大師)·눌암대사(訥庵大師) 등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팔상전도 이 때 지은 것이다.
순천 선암사 팔상전 (順天 仙巖寺) 외부 두공
순천 선암사 장경각 (順天 仙巖寺 藏經閣) 정면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기와집이다 대웅전 북서쪽에 위치하고 원래 선암사 장격악은 판전이라는 이름으로 팔상전 옆에 위차하였은며 장경각의 원래 명칭은 성수전으로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전각이었다.
질 디듬어진 장대석형 석재로 정면은 세별대, 측면은 외벌대로 긱단을 쌓았다. 특히 어칸 부분의 계단은 소맷돌 부분이 해태모양, 사자묘양을 하여 흥미롭다. 마래 지붕과 맞닿은 듯한 모습을 한 이 건물은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모시는 전각이고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순천 선암사 선조암 (順天 仙巖寺 禪助庵) 전면
고창 선운사(高敞 禪雲寺)
신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도솔산(兜率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707년(숙종 33)에 쓰여진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兜率山禪雲寺創修勝蹟記)」는 전자의 설을 취하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날밤에 좌변굴(左邊窟:진흥굴, 도솔암 밑에 있다.)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였으니 이것이 이 절의 시초라고 하였다.
이 창건설화는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고 하는 사실에 따라 형성되었겠지만, 당시에 이 지역이 신라땅에 속했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또 검단의 창건설을 보면 위덕왕 24년은 진흥왕이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해당한다. 그런데 검단과 해구(海口)에 있는 검단리(檢旦里)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즉, 옛날에 검단선사가 바닷가의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쳤기에 해안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하였다는 것이다.
두 설은 모두 설화이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그 뒤에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孝正)이 중수하였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년 동안 극유(克乳)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극유는 1472년에 이 절에 이르러 뜰에 구층석탑만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중창을 발원하였다.
그는 이듬해 2월 제자 종념(終念)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이 쓴 원문(願文)을 얻어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 해 여름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의 재목 1,000여 그루를 3척의 배에 싣고 왔으며, 1473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웠다.
그리하여 1474년에는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짓고, 1475년 봄에는 선왕선가(先王仙駕)를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이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동상실(東上室)·금당(金堂)·능인전(能仁殿) 등을 짓고, 또한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의 중창불사로 인하여 선암사는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건물이 189채나 되는 웅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에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1609년에 이르는 2년 동안 승려 수십 명이 선방(禪房) 한두 개 소를 먼저 지은 뒤 몇 년 동안에 법당 3칸을 지었다. 1613년(광해군 5) 봄에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에게 중창을 부탁하자 일관은 원준(元俊)과 더불어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았다.
그리고 어실을 빙자하여 고창 문수리에서 재목을 얻어 먼저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이때의 중창은 6년 만인 1619년에 끝을 맺었다.
그 뒤 1707년(숙종 33)에 이르기까지 일관·원준 등의 선사들이 서로 계승하여 거듭 건물을 세우고 화상을 조성하는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1698년에 김우항(金宇杭)이 쓴 「선운사중신기(禪雲寺重新記)」에는 중수에 참여하고 당시 선운사에 살고 있던 대중 260여 명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찰규모와 조직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1707년에는 현익(玄益)이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를 지었다.
1839년(헌종 5) 비로 인해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졌다. 이에 찬성(贊誠)·의홍(義弘)·성찬(誠贊) 등이 법당과 향운전(香雲殿)을 수리하고 정문(正門)의 기와를 갈았는데, 1840년 가을에 중수를 마쳤다.
이 때의 중수내역을 기정진(奇正鎭)이 「무장현선운사대법당사적기 茂長縣禪雲寺大法堂事蹟記」에 기록하여 남겼다. 1965년 팔상전을 중수하였고, 197년 성보전시관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운사 사적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殿閣寮舍創建年代芳名列目)」이라는 제목 아래 남아 있다. 그것은 이 시기의 선운사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법당:1614년 봄 창건, 화주(化主) 원준. 1618년 봄 기와 및 수장(修粧), 화주 일관. 1619년 가을 단청, 화주 심우(心佑). 1620년 봄 향운각(香雲閣) 창건. 1633년 봄 불상삼존 조성. 1634년 가을에 봉안, 화주 법정(法淨).
1648년 여름 불상 도금, 화주 담형(淡逈). 1661년 봄 개와(改瓦), 화주 의운(儀雲). 1688년 봄 단청, 화주 경탄(敬坦). 후불탱(後佛幀), 화주 일진(一眞), 별좌(別座) 법안(法眼). 1697년 봄 개와, 화주 극현(克玄), 별좌 삼정(三淨). 1839년 5월 큰 비에 법당 오른쪽 2칸 무너짐. 1840년 봄·여름 보수 및 단청, 화주 성찬.
② 천불전:1618년 봄 창건, 화주 영일(靈日). 1668년 봄 천불(千佛) 조상, 별좌 대해(大海). 도괘불탱(圖掛佛幀), 별좌 혜정(慧淨). 개와, 화주 사준(思俊). 1677년 봄 중창, 화주 쌍운(雙運). 1678년 가을 단청, 화주 덕기(德起). 1840년 8월 법당이 상하여 오래 보존을 기할 수 없어 석상화탱(石像畵幀)을 봉안.
③ 시왕전(十王殿):1675년 봄 창건, 화주 덕문(德文). 1676년 가을 개와, 화주 해준(海俊). 1669년 봄 수장, 화주 찬휘(贊輝). 1670년 봄 단청, 화주 사우(思佑). 1676년 5월 시왕상(十王像) 봉안, 화주 극호(克浩). 1680년 봄 중창, 화주 선열(禪悅).
④ 나한전(羅漢殿) 및 영자전(影子殿):1677년 봄 창건, 화주 유선(惟善), 별좌 천호. 1681년 봄 나한존상(羅漢尊像), 화주 명월(明月). 1681년 가을 단청, 화주 성해(性海). 1694년 봄 제공전(諸公殿) 개와, 화주 경탄.
⑤ 정문(正門):1620년 봄 창건, 화주 요의(了義). 단청, 화주 태연(太衍). 1680년 봄 중창, 화주 혜정(慧淨). 개와, 화주 사우(思佑). 1689년 봄 단청, 화주 경탄. 1690년 봄 좌우제석탱(左右帝釋幀), 화주 일진.
⑥ 천왕문(天王門):1624년 봄 창건, 화주 지정(智晶). 1674년 봄 수장, 화주 종민(宗敏). 단청, 화주 법안. 1669년 봄 개와, 화주 지휘(智輝). 1680년 봄 천왕등상(天王等像), 화주 사준.
⑦ 팔상전(八相殿):1706년 봄 창건, 화주 행성(幸性). 팔상탱(八相幀), 화주 심경(心鏡). 1707년 봄 수장·삼존등상(三尊等像)·단청, 화주 심경.
⑧ 향적전(香積殿):창건 화주 숭민(崇敏), 중창 화주 홍열(弘悅). 1690년 개와, 화주 계순(戒淳).
⑨ 진정당(眞淨堂):1658년 봄 중창, 화주 인종(印宗).
⑩ 약사전(藥師殿):1675년 봄 창건, 화주 사준.
⑪ 극락전(極樂殿):1678년 봄 창건, 화주 성혜(性惠).
⑫ 부도전(浮屠殿):1619년 봄 창건, 화주 탄혜(坦惠).
⑬ 부도암(浮屠庵):1620년 창건, 화주 계수(戒修).
⑭ 능인전:창건 화주 각현(覺玄).
⑮ 대승전(大乘殿):1691년 봄 창건, 화주 선우(善佑).
⑯ 해납료(海納寮)·삼선료(三仙寮):1659년 봄 창건, 화주 승초(勝楚).
⑰ 칠성료(七星寮)·청심료(淸心寮):1682년 봄 창건, 화주 해집(海輯).
⑱ 관음전(觀音殿):1705년 봄 창건, 화주 영택(靈擇).
⑲ 양계료(養鷄寮)·양봉료(養鳳寮):1705년 봄 창건, 화주 태초(太初)·법총(法聰).
⑳ 대종(大鐘)·중종(中鐘):1701년 봄 주성(鑄成), 화주 희원(希遠).
㉑ 상고(象鼓):1701년 봄 조성, 화주 설화(雪和)·경준(敬俊), 별좌 두성(斗性).
㉒ 승당(僧堂):1656년 봄 개건(改建), 화주 육수(陸修). 1666년 가을 개와, 화주 정행(淨行). 단청, 화주
명안(明眼).
㉓ 지장전:1618년 봄 창건, 화주 웅민(雄敏). 1666년 가을 개와, 화주 옥능(玉能)·삼각(三覺).
㉔ 동상실:1618년 봄 창건, 화주 견우(見佑). 1646년 가을 중창, 화주 정학(淨學). 1711년 봄 중창, 화주
겸 별좌 영각(靈覺).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영산전·관음전·팔상전·명부전·만세루(萬歲樓)·산신각·천왕문·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은 정면 5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금동보살좌상(禪雲寺金銅菩薩坐像), 보물 제280호인 선운사지장보살좌상(禪雲寺地藏菩薩坐像),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영산전목조삼존불상(靈山殿木造三尊佛像)을 비롯하여 약사불상(藥師佛像)·삼존불좌상·보살입상(菩薩立像)·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판관상(判官像)·녹사상(錄使像)·사자상(使者像)·십대왕상(十大王像)·동자상(童子像)·판관상·호법신장상(護法神將像, 仁王像)·팔상전석가불좌상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인 6층석탑, 제31호인 범종, 그리고 중종과 부도(浮屠)·탑비(塔碑) 등이 남아 있다. 이들 중에서도 금동보살좌상과 지장보살상 등은 미술사적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동불암(東佛庵)의 마애불상(磨崖佛像)은 높이 13m, 너비 3m이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와 탑비 중에는 김정희(金正喜)가 쓴 백파대사사적비(白坡大師事蹟碑)와 채제공(蔡濟恭)이 쓴 설파대사사적비(雪坡大師事蹟碑)가 있고, 절 아래 마을 입구의 오른쪽 밭 가운데 「선운사동구」라는 시를 새긴 서정주(徐廷柱)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이 밖에도 이 절 주변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당황하여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조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다.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이 절에 속한 산내(山內)의 암자가 무려 50여 곳이나 있었다. 곧,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상도솔(上兜率)·기출암(起出庵)·천리암(泉利庵)·수선암(修善庵)·연대암(蓮臺庵)·성대암(聖臺庵)·수다사(水多寺)·동암(東庵)·도성암(道成庵)·청풍암(淸風庵)·천등암(千燈庵)·광정암(廣井庵), 1618년에 인해(印海)가 창건한 내원암(內院庵), 1665년 학철(學哲)이 중창한 석상암(石床庵), 1666년에 학철이 창건한 청련암(靑蓮庵)이 있다.
또 1674년에 영조(靈照)가 창건한 백련암(白蓮庵), 1672년 사준이 창건한 상남암(上南庵), 1676년 처인(處忍)이 창건한 중남암(中南庵), 1693년 천성(天性)이 창건한 동운암(東雲庵), 1658년 한해인(韓海印)이 창건한 하도솔(下兜率), 1702년 거사(居士) 최태신(崔太信)이 창건한 북도솔(北兜率), 1699년 명우(明祐)가 창건한 미륵암(彌勒庵), 영조가 창건한 수도암(修道庵), 1596년 정도암(鄭道巖) 등이 창건한 고암굴(高巖窟), 1573년 상일(尙日)이 중창한 은선암(隱仙庵)이 있다.
또 1576년 상조(尙照)가 중창한 은적암(隱寂庵), 1582년 경신(敬信)이 중창한 상암(上庵), 1583년 성문(性文)이 중창한 월출암(月出庵), 1575년 철심(哲心)이 중창한 의경암(義敬庵), 1710년 해운(海雲)이 머물던 명심암(明深庵), 1709년 경문(敬文)이 창건한 한산전(寒山殿), 1707년 지휘(智輝)가 창건한 백운암(白雲庵), 1713년 태경(太敬)·응묵(應默)·봉흠(峯欽) 등이 창건한 성도암(成道庵) 등의 30여 암자와, 이름만이 보이는 20개 암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운암·석상암·참당암(懺堂庵)·도솔암 등 4개의 암자만이 남아 있다. 특히 도솔암의 내원궁(內院宮)에 봉안된 선운사지장보살좌상은 보물 제280호이고. 선운사참당암대웅전은 정사각형 맞배집으로 구포(九包)장식의 건축양식이 독특한데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창 선운사 만세루 (高敞 禪雲寺 萬歲樓) 측면
1974년 9월 27일 전북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선운사가 소유·관리한다. 정면 9칸(중앙칸 3.9m), 측면 2칸(왼쪽 2.7m 오른쪽 3.9m)이다. 사천왕문과 대웅전 사이에 있으며, 익공(翼工)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으로 마루가 깔린 단층 건물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
기단과 주초는 모두 자연석이다. 기둥은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이며, 좌우칸 기둥 끝에는 1쌍의 용머리가 조각되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기단 위에는 덤벙주초를 사용하였고, 천정은 연등천정,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삼고, 대들보 위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은 비규범적인 누(樓)의 구조와 불규칙적인 부재(部材) 사용으로 정제된 법식을 따르지 않았으며, 세련되지 못한 건물로, 다른 건물을 건립하고 남은 목재로 건립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길이 27.0m, 너비 11.8m인 석조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강당(講堂) 건물로 기둥높이는 3.9m이며, 귀기둥은 특히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안쪽 기둥들도 둥글게 다듬긴 하였으나 거의 자연목 그대로 이용하였다. 지상 높이 48m에 하방(下枋)을 지르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다.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을 끼우고 기둥머리를 얹은 다음 첨차를 끼워 장여[長舌]와 대들보를 동시에 받게 하였다.
대들보는 중앙 고주(高柱)와 양 평주(平柱) 사이에 각각 걸려 있으며 원목의 구부러진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기둥을 세우고 중도리와 종량을 받쳤으며, 종량에는 키가 큰 대공(臺工)을 세워 마루도리를 받쳤다.
한편, 종량 중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특이한 기법도 발휘되어 있어 주목된다. 앞면에는 판장문을 달고 양 옆면 1칸에 2쪽 판문을 달았으며, 대웅전쪽은 완전히 개방하였다. 전체적으로 원목을 다듬지 않은 채 사용하여 구조의 단순성과 형태의 장엄함을 얻고 있으나 내부공간의 처리는 조형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인상을 준다.
고창 선운사 영산전 및 명부전 (高敞 禪雲寺 靈山殿 冥府殿)
[영산전]
선운사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일생을 기리고 , 그 행적을 보여주는 전각이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본래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었다. 선운사 대웅전 왼쪽에 있다.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에 1471년(성종 5) 2층 전각으로 중건하였다가, 1713년(숙종 39)에 2층을 단층으로 개조하였다. 조선 후기에 다시 두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일자집 맞배지붕 건물이다. 익공 형식의 공포(栱包)는 쇠서를 내밀지 않고 초각으로 말아 올린 물익공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상단에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고 화각첨차를 사용하는 등 조선 후기의 경향을 보여준다. 건물 초석은 정면 중앙 칸에 조성된 두 개의 6각 초석을 제외하면, 좌우 4칸을 이루는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다.
천장은 선운사 대웅전과 유사하나, 차이점은 불상 상단을 닫집 처리하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옆의 대웅전보다 간략하며, 뒷면 쪽 고주는 중보까지 올라가는 기둥을 사용하였다. 뒷면 벽까지 넓혀진 중앙의 불단에 삼존불이 안치되어 있고, 좌우측 ‘ㄱ’자 형의 불단에 16나한상이 안치돼 있다. 불단 가운데에 석가여래상이 안치돼 있고, 좌우측에는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 연등불, 보광불, 정광불이라고도 함]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협시하고 있다.
이처럼 불단의 평면이 특이하게 구성된 이유는 선운사 영산전 건물에 있는 불상이 건물 규모에 비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조선 후기 회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24가지의 불교 설화를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 최근에 전각을 보수하면서 별도의 장소에 보관돼 있다.
선운사 영산전과 선운사 영산전에 안치된 목조삼존불상 모두는 1973년 6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선운사 영산전은 옆의 선운사 대웅전과 유사하게 계획되었지만, 격은 선운사 대웅전보다 떨어진다. 선운사 대웅전은 장엄하고 화려하지만, 선운사 영산전은 상대적으로 간결하다
[명부전]
원래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100일·소상(小祥)·대상(大祥)까지 열 번에 걸쳐 각 왕에게 살아 있을 때 지은 선악의 업을 심판받게 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의 명복을 위하여 절에서 재(齋)를 모시게 된다.
이 때 명부전에서 재를 모시게 되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빌려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벗어나 좋은 곳에서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데 있다. 명부전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탱화를 봉안하고 시왕 뒤편에는 명부시왕탱화를 봉안한다.
궁극적으로 이 명부전은 지장신앙과 명부시왕신앙이 결합되어 불교적으로 전개된 법당이다. 명부의 시왕은 일차적으로 불교의 수호신으로 신중신앙(神衆信仰)에 속해 있었지만, 나중에 시왕이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인 명부 심판관의 성격이 다시 강조됨에 따라 독립된 것이 명부전이다.
우리 나라 사찰에서는 매월 일정한 날에 명부전에서 지장제(地藏祭)를 지내고 있다. 명부전은 일반적으로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 편에 위치하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傳燈寺)의 명부전과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禪雲寺)의 명부전을 들 수 있다.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高敞 禪雲寺 大雄寶殿) 정면
보물 제290호. 선운산 자락에 위치한 선운사는 김제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은 “구름 속에서 참선 수도하여 큰 뜻을 깨친다”는 ‘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유래되었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계 단층 맞배집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좌우 협시불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선운사는 577년(백제 위덕왕 24) 백제의 고승 검단(檢旦 또는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진흥왕이 의운국사(義雲國師)에게 명하여 창건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 창건설은 당시 선운사가 위치한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와 신라의 외교관계를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선운사는 1318년(충숙왕 5)과 1354년(공민왕 3)에 중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사(廢寺)되었다. 1472년(성종 3) 행호선사(幸浩禪師)는 탑만 남아 있던 자리에 덕원군(德原君 : 성종의 숙부)의 후원을 받아 10여 년 동안 대규모 가람으로 중창하였다.
이때 선운사는 왕실 원당(願堂)의 기능을 갖게 되었으며 천불대광명전·관음전·금당·능인전·지장전·나한전·대장전·보현전·설법전·시왕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과 문, 요사 등의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덕원군별원당선운산선운사중창산세사적형지안(德源君別願堂禪雲山禪雲寺重創山勢事蹟形止案)」(1483년)에는 당시 선운사 건물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종열위영가(祖宗列位靈駕: 역대 왕실 조상들의 넋), 시주자 명단, 축원문(祝願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선운사는 정유재란 때 초토화되면서 성종의 어실(御室: 성종의 선왕·선후의 영가를 모신 곳)만 남게 되었고 1608년∼1609년 사이에 승려 수십 명이 모여 법당 3칸을 세웠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에는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재건 불사를 주도하여 법당을 5칸으로 증축하고, 건물의 방향도 지금과 같이 바꾸었다. 이때 증축된 건물이 지금의 선운사 대웅전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상은 1633년에는 조성을 시작하여 이듬해 봉안된 것이다.
그러나 대웅전은 1839년 장마로 인해 오른쪽 2칸이 붕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듬해 보수되었다. 1973년에는 부식된 부재를 교체하면서 단청을 다시 칠하고 기와도 교체하였으며 1992년에는 지붕을 수리하였다
선운사는 계곡을 따라 동서로 긴 평탄한 대지 위에 여러 동의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중심부에는 천왕문과 만세루, 대웅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과 만세루의 서쪽에는 영산전·팔상전·명부전 등이 자리하며, 동쪽에는 동상실·능인각·유물전시관 등이 있다.
대웅전은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야트막한 기단을 놓고 건물을 세웠다. 초석은 자연석인데, 측면 고주(高柱: 높은 기둥)와 활주(추녀를 받치는 기둥)를 받치는 초석은 원형의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원기둥이며 일부는 휘어진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느껴진다.
평면은 정면이 측면에 비해 2배 이상 되는 긴 장방형이지만 어칸을 협칸보다 3자 이상 길게 하고 기둥 높이도 적당하여 전체적으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창호는 정면 어칸에 4분합문을 설치하고 협칸에는 2짝 빗살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서쪽의 전면 협칸에만 출입문을 냈다. 동선을 고려하여 서쪽에 있는 요사와 연결하기 위한 것이지만 한쪽에만 문이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인데 귀공포에 사용된 첨차와 3출목 첨차 일부만 초각(草刻)이 있다. 초제공은 끝 부분이 하늘을 향해 뻗은 앙서형(仰舌形)이고, 2제공과 3제공은 끝부분이 아래로 뻗은 수서형(垂舌形)이다. 4제공은 익공(翼工)이며 5제공은 운공(雲工)을 사용하였다. 제공은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초각되어 보아지 역할을 한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고주가 직접 중도리를 받는 1고주 5량 형식이다. 대들보와 툇보는 4제공 위에 놓이고 고주와 결구되어 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놓고 간단한 포를 짜서 종보를 받쳤으며,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도록 했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특이하게 외목도리 하부에 활주를 세워 받쳤다. 천장은 가운데 1칸만 우물천장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널반자로 간단하게 처리하였는데 중도리와 내목도리 사이에는 빗천장으로 처리하였다. 간결하게 처리한 내부의 모습도 장중한 외형에 못지않게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은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약 2:1로 다른 불전에 비해 정면이 측면보다 훨씬 넓다. 정면은 화려하게 꾸민 반면에 배면은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한 조형적 특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면의 경우 제공을 길게 빼고 처마는 겹처마로 처리하였으나, 배면은 제공 쇠서를 거의 생략하여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처마도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정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봉안하고 좌우에 협시불을 모신다. 그러나 선운사 대웅전은 중앙에 비로나자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불상과 전각의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까지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대법당이라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선운사 대웅전은 1614년(광해군 6)에 중건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 이후 다포계 맞배집의 건축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외관은 비교적 화려하게 꾸민 반면에 내부는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섬세한 건축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高敞 禪雲寺 大雄寶殿) 내부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高敞 禪雲寺 大雄寶殿) 헌 및 두공
고창 선운사 참당암 (高敞 禪雲寺 懺堂庵)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산내암자이다. 이전에는 대참사(大懺寺)·참당사(懺堂寺) 등으로 불렸으며,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이 절은 627년(진평왕 49)에서 649년(진덕여왕 3) 사이에 의운조사(義雲祖師)가 창건하였고, 1329년(충숙왕 16)에 상량(上良)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1530년(중종 25)일헌(一軒)이 중수하였다. 1623년(인조 1)익순(益順)이 정문을 중수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불타자 1642년숭인(崇印)이 중건하였다.
1713년(숙종 39)회징(會澄)이 부속암자인 몽성암(夢醒庵)을 중창하였고, 1730년(영조 6)배극(倍極)이 안양암(安養庵)을 중창하였다. 1754년청원(淸元)과 삼익(三益)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삼익과 찬명(贊明)이 정문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03호인 대웅전과 약사전, 산신각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특이한 느낌을 주는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약사전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선운사약사여래불상(禪雲寺藥師如來佛像)이 있다.
이 약사여래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으며, 의왕불좌상(醫王佛坐像)이라고도 한다. 오른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대단히 희귀한 불상으로, 이 절의 창건 시 인도로부터 왔다는 전설이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정면
보물 제803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다포계(多包系) 양식을 한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이 세웠다는 설과 577년(위덕왕 24) 백제의 고승 검단선사가 지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탄 것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1619년(광해군 11)에 중건을 완료했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선운사에는 원래 많은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참당암을 포함하여 동운암, 석상암, 도솔암 등이 남아 있다.
전각 내에는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후불탱화로 1900년에 조성된 영산회상도가 있다. 의문화상이 신라 진평왕의 부탁으로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기록한 「참당사고사급법당기(懺堂寺故事及法堂記)」가 1794년(정조 18)에 간행된 점으로 보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으나 정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배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축물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외부 두공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大雄殿) 외부 뒷편 두공
고창 선운사 참당암 약사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藥師殿) 전면
참당암 자장 위쪽에 위치하고 현판은 지장전을 달고 있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지만 한 켠이 1.7m에 불과해 다른 절이라면 산신각정도로 쓰였을 작은 법당으로 서 지붕이 맞배 지붕임에도 불구하고 네면 모두에 다포계의 공포를 올린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4면 다포 맞배집은 그다지 예가 많지않아 희소가치가 높고 더욱이 이처럼 작은 법당에 다포구조를 채택한 예가 많지 않다. 그러나 포작의 생김새는 매우 졍교하고 살이 첨차의 모양도 유연하여 적어도 17세기 이전의 오래된 모습인데 포작들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정교해서 작은 건물 규모에 비해 과다한 느낌까지 든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약사전 (高敞 禪雲寺 懺堂庵 藥師殿)헌 및 두공
고창 선운사 도솔암 (高敞 禪雲寺 兜率庵)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도솔산(兜率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산내 암자이다. 본래는 상·하, 동·서·남·북의 여섯 도솔암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 상·하·북 세 도솔암만이 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도솔암이라 불리는 암자가 하도솔이며, 하도솔에서 365계단을 올라가서 있는 도솔암 내원궁(內院宮)이 상도솔암으로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도솔암은 진흥왕 때 창건한 뒤 1511년(중종 6)에 지은(智誾)이 중창하였고, 1694년(숙종 20)에 태헌(太憲)이 중수하였다. 1705년에는 보경(寶鏡)이 중종(中鍾)을 봉안하였고, 1829년(순조 29)에는 경문(敬聞)이 중수하였다.
그 뒤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한 듯하다. 당우로는 내원궁만이 있는데, 이곳에는 미륵이 아니라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이 선운사지장보살좌상은 턱 밑까지 내려온 귓밥과 이륜(耳輪), 가슴의 영락이 특이하고 의문(衣文)의 선이 부드러운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조선 초기의 5대걸작불상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하도솔암은 1658년(효종 9)에 해인(海印)이 창건한 뒤 1669년(현종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 상부 약 100m 지점에는 높이 25m, 너비 10m의 암각(巖刻) 석가여래좌상이 보물 제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동불암(東佛庵)이 있었으나 조선 말기 폭풍으로 도괴되었다고 한다. 이 동불암지는 1994년에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바 있다. 이 밖에 이 절의 입구에는 약수가 있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高敞 禪雲寺 兜率庵 內院宮) 정면
선운사는 도솔암을 비롯한 4곳의 암자를 포함한 사찰이다. 도솔암 안의 내원궁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종 6년(1511)과 숙종 20년(1694),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기단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잡아 원형 주춧돌만 두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亞자형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과 양 옆칸은 그 간격을 다르게 하여 예불 공간을 크게 하였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이며,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모시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안치한 불전으로 설화에 의하면, 수미산 꼭대기로부터 12유순(由旬) 되는 곳에 도솔천이라는 천계(天界)가 있고, 거기에 내원궁과 외원궁이 있다고 한다.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제도할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다고 전한다. 따라서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은 미륵보살이 안치된 전각이어야 한다
나한전 뒤의 가파르고 좁은 돌계단 위쪽 천인암(千仞岩)이라는 바위 위를 상도솔암이라고 한다. 이중 ‘두솔암내원궁(兜率庵內院宮)’이라 쓰인 현판이 있는 곳이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이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이 없는 원형 초석에 장초석(長礎石)이 함께 사용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아자형(亞字形) 이분합문(二分閤門)을 달았다. 천장의 구조는 우물천장이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겹처마에 팔작지붕이 올려 있어 화려하고 안정된 느낌이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이 안치되어 있다. 1986년 9월 9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순천 송광사 (順天 松廣寺)
순천 송광사 (順天 松廣寺) 전경
전북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조계산에 있는 승보사찰로 대한 불교조걔종 제 21교구 분사이다. 대길상사 (大吉祥寺),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니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松廣)’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구전(口傳)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十八(木)+公)’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또다른 전설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터를 잡을 때 나복산(羅逗山:현재의 母后山)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木鴟]를 날렸더니 국사전(國師殿)의 뒷등에 떨어져 앉았으므로 이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鴟落臺)라고 불렀다 한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최남선(崔南善)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鴟의 방언)라고 풀었다.
끝으로, 김영수(金映遂)는 이 산에 ‘솔갱이(松의 방언)’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지방사람들이 이 산을 예로부터 ‘솔메’라고 해 왔으며, 그래서 송광산이란 이름이 생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송광의 ‘광(廣)’은 원래 언덕을 의미하는 ‘강(崗)’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승려 임석진(林錫珍)도 『송광사사지』를 저술하면서, 김영수의 해석을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 및 『승평속지(昇平續誌)』 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釋照)가 중창하려는 원(願)을 세우고 역부(役夫)를 소집하고 임목(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 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와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수도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知己)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修禪社時代)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熙宗)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불(佛)·법(法)·승(僧)의 전당(殿堂)을 중건하였고, 1399년(정종 1) 왕은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도록 윤지(綸旨)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축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하였다. 이에 응선(應善)은 1601년(선조 34) 수각을 1604년과 1606년·1608년에 천자암과 보조암·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浮休)를 모셨다.
부휴는 1609년 제자 400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 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冬安居)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落霞堂)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佛宇) 5개 소, 승료(僧寮) 8옥(屋), 공사(公舍)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경판 및 외향각(外香閣)의 유조(柚槽:감탕나무로 만든 구유),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奇峰)과 용운(龍雲)은 대웅전·명부전·응향각(凝香閣)·법왕문(法王門)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그런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 1,290냥(兩)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栗庵)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3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장탄문(墻坦門)을 신축, 종각을 증축하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조계산 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절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다. 이에 공비들은 절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절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3년 사이에 취봉(翠峯)과 금당(錦堂)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九山)이 설법전·수선사·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으로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83년부터 1990년에 이르기까지 주지 현호(玄虎)가 대웅보전·지장전·승보전(僧寶殿)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 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고려 명종 때 이미 80여 동의 건물을 가진 대사찰이었고,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기 전만 하여도 건물 총수가 80여 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재는 약 50여 동의 대사찰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건물은 대개가 서향하여 있다.
6·25전쟁 전만 하여도 가람배치가 법계도(法界圖)의 도표처럼 배치되어 비를 맞지 않고 경내를 다닐 수 있었으며, 대방(大房)만도 6방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6방은 남쪽의 법성료(法性寮)·해청당(海淸堂)·행해당(行解堂)과 서쪽의 문수전(文殊殿)·임경당·도성당(道成堂)을 이른다. 동구(洞口)에서부터 현존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배치된 가람의 모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순천 송광사 조계문 (順天 松廣寺 曹溪門) 전면
송광사의 사세에 견주어보면 다소 규모가 작은 일주문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일주문 처마 밑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쓰인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한 돌사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① 청량각(淸凉閣)·일주문
청량각은 송광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의 계곡물이 동구에서 굽이치는 지점의 깊숙한 계곡에 홍교(虹橋)를 쌓아올려 그 다리 위에 조성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중건하였고, 1972년 승주군의 보조에 의하여 중수하였다. 청량각에서 500m 오르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 앞에는 송광사의 역대 고승 및 공덕주의 비석들이 있다. 다포(多包)로 형성된 일주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이 문의 현액이 보통 옆으로 한 줄로 쓰이는 데 대하여 종서로 씌어 있어 특이하다.
순천 송광사 육감정 및 우화각 (順天 松廣寺 六鑑亭.羽化閣 )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다리(삼청교)와 그 위에 지은 건물(우화각)이다.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고도 한다. 19개의 네모난 돌로 무지개 모양을 만든 후, 양 옆에 다듬은 돌을 쌓아 올려 무게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무지개 모양의 중심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돌이 나와 있다.
조선 숙종 33년(1707) 다리를 만들었고, 그 뒤 60여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에 보수를 거쳤다. 삼청교 위에 지어놓은 우화각은 사람들의 통행을 돕고자 만든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옆면에서 볼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을 올렸고, 나가는 쪽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는 것은 나가는 쪽의 지붕이 옆 건물과 가까이 닿아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본다. 비록 웅장한 모습은 아니나, 두 유물이 다리역할도 하면서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도 하는 2중효과를 보이고 있다.
육감정은 여섯 거울의 정자라는 뜻이니, 그 의미가 더욱 오묘하다.여기서 거울이란 수면에 대한 비유이므로, 육감은 정자(누각)에서 내려다 볼 때 물에 비치는 여섯 가지 형상을 의미한다. 육감에 대하여 전 송광사 주지 현봉스님은 “은사스님이셨던 구산선사께서 ‘육감’을 정자에서 내려다볼 때 수면거울을 통해 마음에 비치는 하늘, 해, 달, 별, 구름, 바람, 이 여섯 형상을 시에 담아 해석하셨다”고 설명하였다.
‘삼청각’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세 가지 맑음(하늘, 물, 마음)을 간직한 누각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삼청’도 ‘우화(각)’와 마찬가지로 도가에 그 어원이 있다. 도가에서 말하는 ‘삼청’은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또는 태청 중청 하청이라 하여 선인들이 머무는 곳(하늘에 있는 신선의 나라)을 의미 한다.
‘능허교’의 ‘凌’은 ‘능가하다’, ‘초월하다’, 이고 ‘虛’는 ‘비다’, ‘없다’이므로 곧, 빔(없음) 마저도 넘어 섰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능허교’ ‘무’와 ‘공’의 초월이라는 불교의 근본 사상을 상징적으로 담은 다리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삼청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화각’의 본래 이름은 ‘수각(水閣)’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년)으로 불탄 것을 1774년(영조50)년 다시 지어 이름도 ‘우화각’으로 바꾸었다. ‘우화’란 새의 깃털, 즉 날개라는 뜻이지만 ‘우화등선(羽化登仙)’에서 등선이 생략된 표현으로서 그 뜻은 몸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선계(하늘)로 올라간다는 도가의 용어이다.
사찰에서 불교의 근본사상이라 할 수 있는 ‘능허’라는 상징적인 이름의 다리 위에 세운 건물에 도가 용어인 ‘우화’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매우 이채롭다. 육감정과 우화각은 송광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연과 건축미의 조화가 빼어난 건물이다
② 척주각(滌珠閣)·세월각(洗月閣)·우화각(羽化閣)
일주문 뒤쪽에 4방 1칸씩의 몹시 작은 건물이 두 채 있는데, 현판에 척주각·세월각이라 하였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건물이다.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재식시(齋式時) 영가(靈駕)의 관욕처(灌浴處)가 된다고 한다. 즉, 망령도 남녀를 갈라서 척주각은 남자 영가를 위한 관욕소이고, 세월각은 여자 영가의 관욕소가 된다. 영가가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이 관욕소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관욕소 왼쪽에는 보조국사가 스스로의 불멸을 입증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고향수(枯香樹)가 있다. 높이 15m의 이 고목나무는 보조국사가 다시 송광사를 예방할 때 소생한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고향수를 지나면 계곡을 지나는 곳에 능허교(凌虛橋)가 있고, 이 위에 우화각이라는 일종의 문루가 4칸 길이로 서 있다. 이곳에는 예로부터 송광사를 거쳐간 시인·묵객들이 지은 한시가 걸려 있다. 건립연대는 1700∼1711년 사이이며,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였다.
순천 송광사 침계루 (順天 松廣寺 枕溪樓) 외면
순천 송광사 침계루 (順天 松廣寺 枕溪樓) 내면
침계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의 초대형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우화각 위 하천 가에 축대를 쌓아 2층으로 기둥을 세워 누각형태의 건물을 지어 침계루라 이름을 붙였는데 바깥에서 보면 중층으로 보이지만 안쪽에서 보면 누각이 아닌 대형 단층 건물로 보이며 사자루라는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1688년 중건하였다고 한다. '계곡을 베고 누웠다'는 이름 처럼 계곡을 따라 늘어선 육중한 나무 기둥들은 오늘날 승보 사찰로 불리는 송광사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둣하다
순천 송광사 천왕문 (順天 松廣寺 天王門) 전면
조선시대에 조성된 4구의 사천왕상으로, 2004년 복장(腹藏) 조사에서 각종 전적류와 인본다라니 등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에 쓰여진 명문과 복장유물 등의 분석을 통해 1628년(인조 6)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4월 28일 보물 제1467호로 지정되어, 송광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전체 앉은 높이는 403㎝이다. 우리나라의 사천왕상은 불·보살상의 존상과 달리 주로 대형의 소조(塑造)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한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으며, 화려한 채색까지 가하고 있어 복합적인 조각 분야로서 주목되고 있다.
도상적으로 보면, 천왕문 입구에서 바라 볼 때 우측 안쪽으로 비파를 든 북방다문천(北方多聞天), 그 옆 입구 쪽으로 칼을 든 동방지국천(東方持國天), 좌측 안쪽으로 탑을 든 서방광목천(西方廣目天), 그 옆 입구 쪽으로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증장천(南方增長天)을 배치하였다. 이 네 천왕은 모두 의자에 앉아 양 발로 악귀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중년의 건장한 남성을 모델로 한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큰 비례이지만, 천왕문 안에서 올려다보면 아래를 노려보는 큰 얼굴에서 더욱 위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화염보주와 오색구름 문양의 장식된 화려한 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갑옷과 그 위를 감싸고 있는 천의자락·혁대·장화 등은 갖가지 색과 문양으로 치장되어 당시의 복식에 있어서의 뛰어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마치 광배처럼 머리 뒤로 휘날리고 있는 피건자락 둘레에는 화염문이 솟아 있으며, 양 팔 상완(上腕)에서 힘차게 휘날리는 소맷자락 역시 역동적으로 처리되었다.
이 사천왕상은 북방다문천의 비파 뒷면에 쓰여진 묵서명을 통해, 조선 후기 불화에 나타난 사천왕 도상의 변화가 실제 조각상에도 적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탑을 든 천왕을 북방다문천으로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비파를 든 상이 북방다문천의 자리에 봉안되고, 탑은 든 천왕은 서방증장천의 자리에 봉안되는 변화를 보인다. 이를 원나라의 사천왕 도상에서 명나라의 사천왕 도상으로 전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최근의 연구 성과가 주목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천왕상인 16세기의 장흥 보림사(寶林寺) 사천왕상이 다소 중국적인 사천왕상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 데 반해, 17세기의 송광사 사천왕상은 조선의 사천왕상 양식을 이미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북방다문천의 비파 뒷면에는 ‘創造(창조)’라는 용어를 써서 이 사천왕상이 새로 만들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 『송광사지(松廣寺誌)』에는 이 시기에 사천왕상을 ‘重造(중조)’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어, 당시 이러한 조각상을 중수(重修), 혹은 수리(修理)할 때의 용어개념에 있어 참고할 만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순천 송광사 천왕문 (順天 松廣寺 天王門) 헌 및 두공
③ 천왕문·해탈문(解脫門)·대장전(大藏殿)·종고루(鐘鼓樓)·법왕문
이 건물들은 모두 대웅전을 향하여 일직선상에 나란히 위치하였다. 이들 가운데 천왕문을 제외하고는 1951년 공비들에 의하여 불타 버렸고, 현재 종고루만이 재건되었다. 천왕문은 1609년(광해군 1)에 초창하여 1718년(숙종 44)에 중수하였고 이듬해 봄에 내부의 천왕상을 중수하였으며, 또 100여년이 지난 1806년(순조 6)에 다시 사천왕상을 중수하고 채색하였다. 현 건물의 크기는 4방 3칸으로서 23평이며, 목조 사천왕상이 있다.
해탈문은 화재 전에 정면 3칸으로 지붕의 중앙에 낮은 규모로 1칸을 다시 올려 건물이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고 한다. 대장전 안에는 화재를 입기 전까지만 해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고, 사찰의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신문·잡지·도서 일체는 물론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현 박물관의 유물들은 화재 때 이곳에서 꺼내왔다고 한다. 당시 보조국사의 장삼은 유리장 속에 걸어 두었고, 가사(袈裟)는 비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이 낡아서 함 속에 펴두었는데 불타 버렸다.
종고루는 화재 이전에는 7칸 2면의 큰 건물이었고 지금처럼 아래쪽 중앙을 바로 통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962년에 중건되었다. 현재 2층에는 범종·운판·목어·홍고(弘鼓) 등 사물(四物:네 가지의 불교의식 도구)이 있다. 법왕문은 정면과 측면 각 3칸이었으나 역시 소실되고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이 문을 통과하면 법왕인 부처님을 봉안한 대웅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문을 법왕문이라고 한다.
순천 송광사 대웅전 (順天 松廣寺 大雄殿) 전면
순천 송광사 대웅전 (順天 松廣寺 大雄殿)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대웅전 (順天 松廣寺 大雄殿) 내부
순천 송광사 대웅전 (順天 松廣寺 大雄殿) 내부
순천 송광사 설법전 (順天 松廣寺) 전면
설법전은 대웅보전 뒤쪽의 석축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건물로서, 한때 팔만대장경을 봉안했던 장소이다. 1899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삼보사찰에 각기 하나씩 봉안케 하였는데, 통도사와 해인사의 대장경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것은 1951년 불타 없어졌다. 현재 건물는 1968년 재건된 것으로 법회를 위한 강당으로 쓰인다.
④ 대웅보전·설법전·수선사
대웅보전은 송광사의 중심건물이다. 1951년의 화재로 불탄 뒤 1961년에 주지 금당(金堂)이 중창하였다. 그 당시에는 내부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1구(軀) 봉안하였고, 건물은 전면과 측면 각 3칸이었다. 그 뒤 1988년의 중창 때, 평면 넓이 108평의 ‘아(亞)’자 형의 건물을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연등불·미륵불 등의 삼존불을 봉안하였다.
대웅전의 뒤쪽에는 대상(臺上)의 건물들로 설법전·수선사 등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 설법전이나 선방 등이 있는 예는 요즘의 다른 사찰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가람배치이다.
대웅전 뒤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설법전에 이른다.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두던 곳으로, 1899년 봄, 조정에서 인출한 해인사의 대장경 4부 가운데 1부를 봉안하였으나, 1951년 화재 때 설법전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재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수선사는 최초에 조계총림의 방장(方丈)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조사당(祖師堂)으로 이용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낙성된 정면 6칸·측면 4칸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있다. 이 건물은 수행하는 선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외국인 승려 여러 명이 함께 정진하고 있고,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순천 송광사 하사당 (順天 松廣寺 下舍堂) 전면
부도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지붕 위에 작은 지붕이 하나 더 솟아 있는 특이한 건물이 보인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된 하사당이다. 하사당은 현재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전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왼쪽 두 칸은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고, 오른쪽 한 칸은 부엌이다. 특이한 솟을지붕의 정체는 바로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이다.
하사당의 솟을지붕보조국사 부도 앞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인데 전라도 지방의 살림집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를 흔히 볼 수 있다
순천 송광사 하사당 (順天 松廣寺 下舍堂)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하사당 (順天 松廣寺 下舍堂)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백설당 (順天 松廣寺) 정면
순천 송광사 백설당 (順天 松廣寺)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청운당 (順天 松廣寺) 전면
순천 송광사 청운당 (順天 松廣寺)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응진전 (順天 松廣寺 應眞殿) 정면
⑤ 상사당(上舍堂)·하사당(下舍堂)·응진전(應眞殿)
송광사의 건물은 대웅전 뒤의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대상과 대하로 대별된다. 대상의 건물로는 상사당·하사당·향적전(香積殿)·응진전·성수전(聖壽殿)·산신각·진여문·청운당·백운당·설법전·차안당(遮眼堂)·조사당·국사전·진영당(眞影堂) 등이 있다.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병립해 있는데 제9대 국사 담당(湛堂)이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오도하였으므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수선사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곳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하사당은 특수한 건물로 건축양식이 국사전과 같으며 조선 초기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응진전은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한 1623년(인조 1)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중앙 동쪽 벽 후불탱화(後佛幀畵)는 1724년(경종 4) 화승 의겸(義謙)이 그린 것이며, 오른쪽의 탱화는 1725년, 왼쪽의 탱화는 같은 시기에 회안(回眼) 등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노전(爐殿)의 화목을 적재하여 두는 향적전이 있다.
순천 송광사 국사당 (順天 松廣寺 國師堂) 측면
국사전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공민왕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음에는 정면이 3칸인 건물로서 15분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나 고봉화상(高峯和尙: 1428년 입적)을 추가로 모시면서 1칸을 증축하였다. 1971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에는 1501년(연산군 7) 개창(開倉)하고 1558년(명종 13)에 중창(重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722년(경종 2)과 1807년(순조 7), 1918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926년에는 석축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 1990년에 수리가 있었다. 내부에 모신 초상화들은 1780년(정조 4)에 다시 그린 것이다.
송광사는 일주문을 지나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면 삼청교와 우화각(능허교)이 냇물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능허교를 건너 천왕문과 해탈문, 종고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높은 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선원과 승보사찰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전은 대웅전의 남동쪽에 있으며 담장으로 구획되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대웅전과 같이 서향하고 있다. 건물은 2단으로 조성된 축대 위에 세워져 있다. 하단의 축대는 크고 작은 자연석을 정교하게 그랭이를 떠서 서로 밀착되도록 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 덮개돌)을 올렸다. 상단 축대는 잘 다듬은 장대석을 가로방향과 세로방향으로 교차시켜 기하학적으로 쌓아 올렸다.
하단 축대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데 비해 상단 축대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면서 강하게 대비된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로 낮게 조성하였으며 바닥에 전돌을 깔았다. 초석은 자연석으로 일부는 주좌를 표현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出目) 구조의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머리에는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소로를 올려 첨차와 살미(山彌)를 결구하였는데 건물 내부에서 헛첨차와 살미는 보를 받치는 보아지 역할을 한다. 기둥 중심에 사용된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으로 장식이 없으나 출목첨차는 연화두형(蓮花頭形: 일명 쌍S자형 곡선)으로 초각하였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치고 그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는 5량 형식이다. 측면 가구는 우측면(남쪽)이 1고주 5량이고 좌측면(북쪽)은 2고주 5량으로 서로 다른데, 이것은 후대에 1칸을 증축하면서 바뀐 것이다.
창호는 전면에 4분합띠살문을 달고 좌측면의 전면 퇴칸에는 외짝 띠살문을 달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인데 정면은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로 구성한 반면에 배면은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로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꾸몄다. 조사들의 초상화는 불단과 함께 벽에 기대어 모셨는데 보조국사 지눌의 불단만 돌출시켜 위계를 보여주고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본래 3칸이었으나 4칸으로 증축되면서 좌측면과 우측면의 칸수와 구조가 서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공포는 외1출목 형식으로 고려 말~조선 초기에 건립된 주심포 건물과 마찬가지로 기둥머리에 헛첨차가 사용되었다.
살미(山彌)의 형태는 조선 초기의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제13호),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비슷하나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처럼 주심포가 익공으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한편, 주심포 건물은 일반적으로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개방하지만 송광사 국사전은 우물반자가 설치되어 있다. 우물반자 안에 있는 부재들이 조각되어 있음을 볼 때 천장은 후대에 바뀐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초기 주심포가 익공형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공포의 구성 등이 유사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순천 송광사 국사당 (順天 松廣寺 國師堂) 외부 두공
수선사 옆에 자리한 국사전이다.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국사전은 명실공히 승보사찰 송광사의 역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조국사를 비롯하여 왕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은 고려시대 국사 열다섯 분과, 그 공덕이 지난날의 국사와 같다 하여 국사의 칭호를 받은 조선 초기 고봉국사 등 16국사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위에 맞배지붕이 단정히 올라앉은 국사당은 전통 건물의 정면 칸수가 대부분 홀수인 것에 견주어 4칸으로 짝수인 것이 특이하다. 국사당은 기둥의 높이와 처마의 깊이에 큰 차이가 없어 건물이 낮아보인다. 앞쪽은 겹처마, 뒤편은 홑처마로 옆에서 보면 앞뒤 지붕의 크기도 다르다. 세종 2년(1420)에 중건되었다.16국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는 맞배지붕집이다. 대부분 우리 전통건축물의 정면 칸수가 홀수인 데 반해 국사전의 정면 칸수는 짝수인 4칸인 것이 특이하다
완주 송광사 국사당 ( 松廣寺 國師堂) 홍량 및 천장
완주 송광사 국사당 ( 松廣寺 國師堂) 천개
완주 송광사 국사당 (順天 松廣寺 國師堂) 내부
완주 송광사 국사당 (順天 松廣寺 國師堂) 천장 세부
⑥ 국사전·진영각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은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일종의 법당이다. 이곳은 일명 자음당(慈蔭堂)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참선을 하는 수선장으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낸 한국불교의 증인들이다.
진영각은 그 편액을 풍암영각(楓巖影閣)이라고 하였는데 그 까닭은 조선시대의 송광사 대덕들은 거의 다 풍암의 법손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52년에 건립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풍암의 문하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용화당 (順天 松廣寺 龍華堂) 전면
순천 송광사 용화당 (順天 松廣寺 龍華堂)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심검당 (順天 松廣寺 尋劍堂) 전면
순천 송광사 심검당 (順天 松廣寺 尋劍堂)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불조전 (順天 松廣寺 (佛祖殿) 정면
송광사 불조전(佛祖殿)에 봉안된 53불화는 9불탱 2폭, 13불탱 2폭, 5불탱 2폭 등으로 모두 6폭에 나누어 그려졌다. 1725년(영조 1년)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중앙의 7불탱화(七佛幀畫)를 중심으로 하여 53불도가 좌우 6폭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즉, 중앙 벽에 9불탱화 2폭(각 너비 세로 140㎝, 가로 225㎝), 좌우 벽에 대칭으로 13불탱화 2폭(각 너비 세로 140㎝, 가로 350㎝), 5불탱화 2폭(각 너비 세로 146㎝, 가로 115㎝) 등으로 나누어 그린 형식을 띠고 있다. 중앙의 7불탱화에는 주존불인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불과 사방불(四方佛)을 배치하였다.
좌우 6폭에는 제34불을 제외한 52불에 과거비파시불(過去毘波尸佛) 당래미륵존불(當來彌勒尊佛)을 덧붙여서 54불을 그리고 있다. 6폭은 모두 상·하단으로 나누어 여래(如來)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9불탱화는 좌우 벽 그림이 똑같은 구도로 상단에 5불, 하단에 4불을 배치하였다.
동서 벽 2칸 전면에 걸쳐 봉안되어 있는 13불탱화는 상단에 6불, 하단에 7불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5불탱화는 동서 벽과는 반대로 상단에 3불, 하단에 2불을 배치하였다. 결국 중앙의 7불탱화를 중심으로 우측 벽에는 홀수 불, 좌측 벽에는 짝수 불을 배치하여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벽(主壁)과 중벽(中壁)·후벽(後壁)이 대치, 상반되는 구도를 보여 전체적으로 균형 있는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부처의 모습은 대체로 풍만하고 원만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수인(手印)이라든가 법의(法衣)의 옷주름 표현과 배색, 법의의 하단이 여러 가지 형태로 늘어지는 표현과 채색, 의대(衣帶)를 중심으로 한 군의(裙衣)의 형태 등에서 약간씩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색조는 불상에 적선(赤線)을 주로 하고 청색과 감청색을 곁들여 농채(濃彩)가 선명하다.
얼굴에는 호분(胡粉 : 흰 가루)과 육색(肉色 : 살빛처럼 불그스름한 색)으로 밝게 채색하였다. 필선은 가는 선을 주로 하여 힘이 있고 활달하다. 그리고 형태의 부드러움과 상응하여 부드러운 필치를 보여 주고 있다.
화기(畫記)로는 화면 안에 각 여래명을 기입하고 6폭 각각에도 각기 명칭을 적고 있다. 그래서 각 여래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각 존상(尊像)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순천 송광사 불조전 (順天 松廣寺)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약사전 및 영산전 (順天 松廣寺 藥師殿 靈山殿)
순천 송광사 약사전 (順天 松廣寺 藥師殿) 두공 및 헌
순천 송광사 영산전 (順天 松廣寺 靈山殿) 외부 두공
순천 송광사 영산전 (順天 松廣寺 靈山殿 ) 내부 두공 및 천장
⑦ 약사전·영산전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순천 송광사 약사전은 송광사 안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며 내부에는 약사여래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순천 송광사 영산전은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여래의 소조상을 비롯하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석가여래의 일생을 묘사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영산회상도는 1725년에 만들어졌고, 화승(怜僧)은 의겸(義謙) 등이다. 팔상탱화 역시 같은 시대에 이룩되었으나, 각기 다른 15명의 화승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순천 송광사 화엄전 (順天 松廣寺 華嚴殿) 전면
송광사 화엄경변상도(順天松廣寺華嚴經變相圖) -송광사 화엄전에 있었던 탱화로,국보 제 314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으로, 송광사에 봉안되어 있다. 1770년(영조 46)에 화련 등 12명의 승려화가들이 광주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겼다. 내용은 크게 일곱 군데에서 행하는 9번의 법회(七處九會) 설법내용을 그린 것으로 칠처구회도 혹은 화엄경변상도라고 한다.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270㎝, 세로 294.5㎝이다.
이 그림은 크게 상부와 하부로 구성되는 화엄경변상도의 기본구성을 충실하게 따랐다. 하단에는 지상의 법당에서 행하는 5번의 법회 장면(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을 그렸다. 상부에는 천상에서 행하는 4번의 법회 장면(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을 그려 아래위를 대칭구조로 배치하였다.
화면의 색조는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瓔珞)에 문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고분법(高粉法)을 활용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 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 39품 중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의 내용을 그림으로 해설한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가 그려져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 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를 뿐 아니라 화엄경의 설법 내용을 매우 충실하고도 효과적으로 그린 대표작이다. 선암사 팔상전 화엄탱(1780), 통도사 화엄탱(1811, 보물 1352)과 함께 화엄탱의 근간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6호(송광사 화엄전 화엄탱)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4호로 변경되었다. 송광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두산백과]
순천 송광사 화엄전 (順天 松廣寺 華嚴殿) 외부 두공
⑧ 관음전·지장전·화엄전
관음전은 1903년에 건립되었으며,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는 보조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높이 250㎝의 탑은 고려 말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그 옆에는 ‘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이라고 쓴 오세창(吳世昌)의 글씨가 있다.
전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지장전은 유명계(幽冥界)의 시왕(十王)을 봉안하였으므로 일명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화엄전은 대웅전 서남방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1641년(인조 19) 건립된 화엄전에는 송광사의 장경판본들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전 주위에는 53불(佛)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이 있고, 삼성각·월조헌(月照軒)이 있다. 이 불조전은 1684년(숙종 10)에 건립되었고 1905년과 1946년에 중수하였다.
유물 및 사간장경
이 절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인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順天 松廣寺 木造三尊佛龕)을 비롯하여 국보 제43호인 혜심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 보물 제134호인 순천 송광사 경질(順天 松廣寺 經帙)과 보물 제175호인 순천 송광사 경패(順天 松廣寺 經牌), 보물 제176호인 순천 송광사 금동 요령(順天 松廣寺 金銅 搖鈴), 보물 제572호인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順天 松廣寺 高麗古文書) 2점, 보물 제1376호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 등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는 제18호인 자정국사 사리함(慈靜國師 舍利函), 제19호인 능견난사(能見難思), 제22호인 송광사 금강저(松廣寺 金剛杵), 제28호인 고봉국사 주자원불(高峰國師 廚子願佛) 등이 있다. 이 중 능견난사는 바루로서 풀리지 않는 신비성이 있다.
산내암자
기록에 의하면, 조계산에는 모두 16개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암자들은 폐허가 된 채 유지만 남아 있거나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상태에 있다. 수행승이 거처하고 있는 암자는 천자암·부도암·감로암·불일암·광원암·인월암·오도암뿐이다.
이 밖에도 유지만 밝혀진 암자로는 청진암·목우암(牧牛庵)·실상암(實相庵)·판와암(板瓦庵)·상선암(上禪庵)·자정암(慈淨庵) 등이 있고, 보조암·은적암(隱寂庵)·조계암·묘적암(妙寂庵) 등은 이름만이 전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절 일원이 선암사 일원과 더불어 명승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完州 松廣寺)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확장했고, 요즈음에는 조계종 포교원장을 지낸 도영스님에 의해 중창이 계속되고 있다.
송광사는 원래 '백련사(白蓮寺)'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명의 승려들이 살았다고 한다. 경내에는 16방사가 즐비하여 16명의 주지를 두어 '방주'라고 불렀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나 보다. 현재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은 보물 제1243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소조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보물 제127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완주 송광사 일주문 (完州 松廣寺 一柱門) 전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19.83㎡의 건평에 세워진 일주문으로 ‘終南山松廣寺(종남산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은 송광사의 첫 대문으로서 원래 대웅전으로부터 약 3㎞ 떨어진 ‘나드리’라고 하는 곳에 세워졌던 것인데 송광사 경역이 축소되어 감에 따라 1814년(순조 14)에 정후선사가 조계교(曹溪橋) 부근으로 이건하였으며, 1944년 극인선사가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이 일주문은 다포 맞배지붕의 기와집이며 원기둥의 뒤에 보조기둥이 받치고 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1953년에 주지 서암(瑞巖)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 심자각 (完州 松廣寺 十字閣) 전면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보물 제1244호인 이 종루는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이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육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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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244호. 완주 송광사 종루는 종을 달아 놓은 십자형의 2층 누각이다. 종루나 종각은 보통 사각형 평면인데 비하여 십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어 주목된다.현존하는 건물 중에서는 창덕궁 부용정과 수원 방화수류정이 십자형 평면을 기본으로 하나 다른 건물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구조이다.
십자형은 내부 공간구성이 어려울 뿐 아니라 지붕을 구성할 때도 회첨이 많이 생겨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광사 종루는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워 완전한 십자형 누각을 구성하였다. 누하주(樓下柱)는 굵은 나무를 민흘림을 주어 8각으로 치목하였고 그 위에 다시 원기둥을 세워 2층 누각을 지지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외벌대로 돌렸는데 부분적으로 유실된 상태이며 서측의 기단은 흙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2층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처리되었으며, 기둥 위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평방을 서로 반턱맞춤으로 결구하여 공포를 배치하였다.
평면은 중앙에 범종을 걸고 사방으로 돌출된 4칸에는 법고, 목어, 운판을 매달아 기본 불구(佛具)를 갖추었다. 나머지 한 칸은 승강계단이 설치된 입구이다. 주간은 모두 8.15자[尺]로 일정하며 마루 주위에는 계자난간을 돌렸다.
공포는 다포계 구조이다. 내외 3출목의 공포를 주상과 주간에 1구씩 짜올려 빈틈없이 공포가 처마 밑을 받치고 있다. 출목간의 순각판은 내·외부 모두 생략되고 오제공 상단에 도리와 직각방향으로 널을 깔아 처리했다.
내부의 초가지에는 연봉, 연화, 봉두가 조각되었으며 회첨귀한대 내부 제공은 모두 교두형으로 처리되었다. 특히 내부에서는 짜 올라간 공포로 별도의 천장 없이 천개식(天蓋式) 구성을 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붕은 평면형에 맞추어 십자형 팔작지붕을 구성하고 직교하는 용마루의 중앙 교차점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와는 신재로 교체되어있는 상태이며 용머리기와 및 망와는 일부가 옛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단청은 외부는 모로단청, 내부는 모로단청과 긋기단청이 혼용되었다. 벽이 없는 건물로 벽화는 없다.
이 건물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공포대가 크고, 중첩되는 살미선과 아름답게 치켜 올라간 추녀선 그리고 계자난간 등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가냘프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 살미와 양끝이 사절된 교두형 첨차 등으로 인해 섬약해 보인다. 대웅전 공포와 비교해 볼 때 장식적 수법은 덜하지만 쇠서의 앙각 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여 대웅전이 중건되던 시기에 같이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종루는 독특한 평면과 화려한 공포, 날아갈 듯한 추녀선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교한 공예품과 같은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松廣寺鍾樓]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완주 송광사 대웅전 (完州 松廣寺 大雄殿) 정면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 松廣寺 大雄殿)은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6년 5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송광사의 중심 법당으로 신라 말기에 보조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 이층 법당이었는데 조선 철종 8년(1857년]]에 재봉스님이 일층 건물로 다시 세웠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 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다른 사찰의 벽화와 달리 채색과 선이 완벽하게 살아 있으며, 한국민중예술과 불교 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천장 벽화이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完州 松廣寺 大雄殿)은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96년 5월 2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243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송광사의 중심 법당으로 신라 말기에 보조스님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원래 이층 법당이었는데 조선 철종 8년(1857년]]에 재봉스님이 일층 건물로 다시 세웠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 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다른 사찰의 벽화와 달리 채색과 선이 완벽하게 살아 있으며, 한국민중예술과 불교 미술이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천장 벽화이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여주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다층전탑이 있는데, 이 탑 전체를 벽돌[塼]로 쌓아 올린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入寂)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龍)이 호상(護喪: 초상 치르는 모든 일을 주장하여 보살피는 것)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 대전(大殿)·조당(祖堂)·승당(僧堂)·선당(禪堂)·종루(鐘樓)·동익당(東翼堂)·서익당(西翼堂)·남행랑(南行廊)·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신축되거나 중수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선각진당(禪覺眞堂)도 건립되었다.
또, 1382년에는 2층으로 된 대장각(大藏閣)이 건립되면서 간행한 대장경 1부를 봉안하였다. 대장경 불사(佛事)를 발원한 것은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이색이 그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간행하였다. 신륵사의 승려 무급(無及)과 수봉(琇峯)이 중심이 되고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시주를 모았는데, 200여 명이 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는 각운(覺雲)·신조(神照)·자초(自超) 등의 고승들과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최무선(崔茂宣)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1381년에 각주(覺珠)가 금자(金字)로 제목을 쓰고 각봉(覺峯)은 황복(黃複)을 만들었으며, 12월에 성공(性空)이 함을 만든 뒤 1382년 정월에 화엄종 소속 사찰인 영통사(靈通寺)에서 교열한 다음 4월에 배에 실어 신륵사에 봉안하였다.
또한,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영돈녕 김이소(金履素)와 예조판서 민종현(閔鍾顯) 등이 중수를 시작하여 이듬해 범중각(泛中閣)·식당을 지었으며, 가자첩(嘉資帖) 50여 장을 하사받았다. 1858년(철종 9)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하여 불전(佛殿)·선료(禪寮)·종루 등을 중수하였고, 1929년에는 주지 성인(性仁)이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신중탱화·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조사당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중앙에 나옹, 좌우에 지공(指空)과 무학(無學)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인 명부전 내부에는 목조지장삼존(木造地藏三尊)을 비롯하여 시왕상(十王像)과 판관(判官) 등 총 29구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묵당은 선원(禪院) 구실을 한 건물이고, 심검당은 강원(講院) 구실을 하는 정면 6칸의 ㄱ자형 건물로 선각당(禪覺堂)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심검당 바로 옆에는 극락보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3칸의 봉향각이 있고, 봉향각 뒤쪽에는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독성탱화가 봉안된 칠성각이 있다.
이 밖에도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고려 말기의 대표적 부도양식을 띤 보물 제228호의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비천(飛天)과 용이 새겨져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보물 제231호의 석등, 1379년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229호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보물 제230호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가 있다.
이 밖에도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고, 부도는 원래 조사당 뒤쪽에 있던 것을 1966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부도 중 둥근 탑신을 가진 부도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 탑신을 가진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형식에서 퇴화된 여말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이전할 때 사리함이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또한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驪州 神勒寺 極樂寶殿) 정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栱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긴 장대석을 3벌로 정연하게 쌓은 기단과 계단도 조선조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의 기법들이다. 길게 뻗어 나온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가느다란 활주(活柱)를 시설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의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한 불상들이다.
후불탱화와 우측의 신중탱·감로탱은 모두 1900년 작이고, 좌측의 지장탱은 1908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법당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지만,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륭 38년(영조 49년, 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驪州 神勒寺 極樂寶殿) 외부 두공 및 헌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驪州 神勒寺 極樂寶殿) 외부 두공 및 헌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驪州 神勒寺 極樂寶殿) 내부 두공
여주 신륵사 조사당 (驪州 神勒寺 祖師堂) 외부 두공 및 헝
보물 제180호.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처마는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이고,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으로 한벌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좌(柱坐)를 쇠시리(두 골이 나게 함)한 고격(古格)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놓았으며,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놓아 다포식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내2출목(內二出目)으로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초제공(初諸貢)이나 2제공(二諸貢) 모두에서 그 끝이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교두형(翹頭形: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다포식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창호를 달고,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체로 마감하였는데, 측면의 한칸만은 외짝의 정자살문을 달아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평면에서는 소규모의 건축물인만큼 앞뒷면을 각각 1칸식으로 처리하여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를 볼 수 없는 것이 이 건물의 특색이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 (驪州 神勒寺 祖師堂) 외부 두공 및 헝
여주 신륵사 7층석탑 (驪州 神勒寺 七層石塔) 정면
하동 쌍계사(河東 雙磎寺)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지리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관장하는 말사는 43개이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쌍계사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723년(성덕왕 23)에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의 머리를 취한 뒤 귀국하였다.
그리고 한라산·금강산 등을 두루 다녔으나 눈이 있고 꽃이 피는 땅을 찾지 못하다가, 지리산에 오자 호랑이가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자리에 이르렀다. 그곳이 꿈에 지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그 뒤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중국에서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대가람을 중창하였다.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벽암(碧巖)이 1632년(인조 10)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50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된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팔상전, 노전(爐殿),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로 지정된 적묵당(寂默堂),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3호로 지정된 설선원(說禪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된 나한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된 육조정상탑전과 청학루(靑鶴樓)가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된 금강문(金剛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일주문·대방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47호인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 보물 제380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925호인 팔상전영산회상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인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인 불경책판이 있다.
대공탑비는 885년(헌강왕 11) 헌강왕이 입적한 혜소(慧昭)에게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어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887년(진성여왕 1)에 완성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金石文) 가운데 첫째로 꼽힌다.
이밖에도 육조혜능의 초상화를 안치한 7층의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로 지정된 마애불(磨崖佛)과 아자방(亞字房)의 터가 있다.
절에서 500m 거리의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뜰에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았다는 천년이 넘은 느릅나무 사천왕수(四天王樹)가 있고, 신라의 원효(元曉)와 의상이 도를 닦았고 1205년(희종 1)보조국사(普照國師)가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그 시호를 딴 불일암(佛日庵)이 있다.
하동 쌍계사 장생목표 (河東 雙磎寺 長生木標)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어귀에 서 있었던 목장승 한 쌍.지금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 와 있는 쌍계사 목장승을 보노라면 지혜로운 솜씨가 엿보인다.그것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다 물구나무 세워 장승으로 다듬은 기발한 착상이다.도끼 목수의 솜씨는 아닌 듯 하다.절집과 인연이 닿은 어떤 도목수가 소박한 영감을 불어넣어 만든 신앙대상물일 것이다.
쌍계사 목장승은 나무 뿌리가 하늘을 향한 특이한 모습을 했다.아름드리 밤나무를 아예 뿌리가 달리게 뽑아다 뿌리를 머리삼아 장승 한 쌍을 깎고 다듬어 냈다.그래서 장승의 머리는 봉두난발한 꼴이 되었다.머리칼이 가닥 가닥 헝크러졌다기 보다는 한데 뭉쳐 사방 팔방으로 흩어졌다.이 때문에 귀신을 형상화 할 때 흔히 그려넣는 뿔처럼 보이기도 한다.머리칼이 아닌 뿔로 여겨도 사실상 무리가 없다.
그 이유는 사람을 닮은 인태신으로 제작 되었다는 점에 있다.쌍계사 목장승은 인태신으로 조각한 신장상인 것이다.높이는 자그마치 3백30㎝나 되어 그야말로 키가 장승이다.왕방울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낸 이들 장승은 신장상이 분명하지만,그리 무서운 귀신이 아니어서 공포분위기를 자아내지는 못했다.오히려 전통무늬로 도안화한 눈썹과 수염 등 얼굴 다른 부분들이 우스꽝스럽다.
눈알이 왕방울처럼 둥글게 튀어나온 것은 암수 장승이 서로 닮았다.콧방울은 말 그대로 방울인데,암장승은 콧마루를 사이에 두고 두 개가 붙어있다.수장승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고 왕방울 눈위에 당초문으로 눈썹을 새겼다.눈썹이 왜 당초문이가 했더니,웬걸 콧수염은 구름무늬(운형문)다.인중이 길어 바보스러울까봐 구름무늬를 새긴 모양이지만 본래 인상은 끝내 바꾸지 못했다.수염은 댕기머리 가꾸듯 총총 따 내렸다.
무섭기로 말하면 암장승이 더 하다.아랫니를 내놓은 입가에 송곳니를 위로 솟게 올려붙여 윗송곳니가 팔자로 아래를 향한 수장승과 대조를 이루었다.눈썹도 닭벼슬처럼 새겨올렸다.또 할망구 노파의 성난 얼굴을 표현할 요량으로 턱에다 톱니꼴 주름살을 길게 새겼다.그렇지만 험상궂은 얼굴이라고 가슴을 철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엉뚱하기 짝이 없는 익살스러운 얼굴로 다가 설 뿐이다.
이들 쌍계사 장승은 사실상 착한 신장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수장승은 가람선신이고 암장승은 외호선신이다.그러니까 쌍계사 장승은 절 안팎을 지키는 사찰장승기능을 지닌 것이다.또 풍수지리설에 따라 절 주변 사방산천가운데 헛점이 보이는 부분은 채운다는 이른바 비보기능도 공유했다.
사찰장승은 때로 절땅 경계표시물이 되어 바깥 세상과 절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었다.지금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쌍계사 목장승 한쌍은 1백30여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하동 쌍계사 일주문 (河東 雙磎寺 一柱門) 전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1641년(인조 19)벽암(碧巖)이 창건하고, 1977년 중수한 건물로, 쌍계사 경내로 진입하는 초입에 위치한다.
이 건물과 금강문·천왕문·팔영루·대웅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강한 진입 축을 형성한다. 건축양식은 다포식으로, 건물 좌우에 각각 1개의 주 기둥과 2개의 보조 기둥을 세워 높이에 비해 넓은 팔작지붕을 안전하게 지탱하고 있다.
보조기둥에는 연화문을 조각한 주두(柱頭)가 있으며,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이 결구되어 상부의 공포를 받는다. 공포는 내외 4출목으로 매우 화려하며, 공간포는 일정한 간격으로 정면에 3구, 측면에 2구를 배치했다. 주기둥 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차례로 결구하고, 그 위에 대접받침을 놓고 공포를 올려놓았다.
건물의 네 모서리에는 이방(耳枋) 대신 대접받침을 놓고 그 위에 귀포를 구성하였다. 평방 폭에 비해 창방과 대접받침의 폭이 작은 편이며, 첨차는 끝 부분을 수직으로 자르고, 하부를 곡선형으로 깍은 교두형(翹頭形)이다.
주심(柱心) 대첨차와 출목(出目) 대첨차, 그리고 주심 소첨차와 출목 대첨차의 길이는 같으며, 첨차 윗면에는 공안(栱眼 : 소로와 소로 사이의 윗면을 활모양으로 깎아낸 부분)을 두지 않았다. 내외 출목의 간격은 첨차폭의 1.5배 정도로 다소 넓은 편이다.
살미첨차는 가늘고 예리한 앙서형[仰舌形]으로 그 밑면에 연봉(蓮峯)이 조각되어 있다. 기둥과 공포대에는 아름다운 모로단청(毛老丹靑)을 베풀었다. 다포식 4출목의 화려한 포작, 내외 출목 간격이 넓고 살미첨차가 가늘고 섬세한 것이 다포계 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동 쌍계사 천왕문 (河東 雙磎寺 天王門) 전면
정면 3칸, 측면 2칸인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가운뎃칸은 개방하여 통로로 삼고 양 옆칸은 벽으로 막은 뒤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측면 벽 박공(牔栱 : 경사 지붕 옆면에 붙인 널)에는 풍판(風板 :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댄 널)을 달았다. 한편, 봉안된 사천왕상은 목조이며 뛰어난 조각 솜씨를 발휘하여 만든 것으로 주목된다.
연혁은 1704년(숙종 30)에 백봉이 창건, 1825년(순조 25)에 인정(印定)이 중수하였으며, 지금 건물은 1979년에 고산(杲山)이 중수한 것이다.
하동 쌍계사 금강문 (河東 雙磎寺 金剛門) 전면
높이 8m.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겹처마 맞배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정면 가운뎃칸은 개방하여 통로로 삼고, 양 옆칸은 벽으로 막아 금강역사(金剛力士)를 안치하였다.
측면 바깥벽에는 박공(牔栱 : 경사지붕 옆면에 붙인 널) 부분에 풍판(風板: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댄 널)을 막아놓았다. 금강문은 천왕문(天王門)과 함께 사찰의 진입공간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미있는 장소이며, 일반적으로 일주문 다음에 배치된다.
쌍계사의 금강문은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 인조 19년(1641)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重創)하였으며, 1979년에 고산(杲山)이 중수하였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河東 雙磎寺 大雄殿) 전면
보물 제500호.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3단의 자연석축으로 형성한 단축(段築)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세워져 있으며, 내외 3출목 7포작인 다포계 구조형식이다.
기둥은 배흘림 없이 높게 세워지고 활주(活柱 :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를 두고 있으며, 평방 위에 배치한 공간포(空間包)는 중앙의 3칸에는 2개씩이고 좌우협간에는 1개씩이다. 공포의 구성은 외부로 앙서[仰舌] 위에 수서[垂舌]와 같은 한대의 뺄목을 두고 있고, 앙서는 짧게 나왔으며, 내부의 살미끝은 교두형(翹頭形 :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서 비교적 우아하고 오래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보아지 역시 아름답게 조각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부에는 우물반자를 짜올렸고, 중앙 뒤측에는 불단을 꾸미고 있으며, 불단 위에는 포집으로 된 3칸닫집을 잘 짜서 그 밑에 용과 연화 등의 조각을 늘여뜨리고 있다. 단청은 화려한 금단청으로 되어 있다.
정면 중 중앙 3칸에는 각각 4분합의 빗살문이 달려 있고, 좌우 협간에는 井자살문의 문이 달렸는데, 중앙 3칸의 빗살문은 궁창판 위에 팔각형의 불발기살창을 가지고 있으며, 창 위 창방 밑에는 교창(交窓 : 낮은 창)을 설치하였다.
하하동 쌍계사 대웅전 (河東 雙磎寺 大雄殿) 외부 두공
하동 쌍계사 대웅전 (河東 雙磎寺 大雄殿) 내부
하동 쌍계사 대웅전 (河東 雙磎寺 大雄殿) 내부 두공 및 천장
하동 쌍계사 팔상전 (河東 雙磎寺 八相殿) 전면
하동 쌍계사 팔상전 (河東 雙磎寺 八相殿) 헌 및 두공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에 있는 고려 시대에 지어진 것을 중건한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쌍계사(雙磎寺) 경내의 옛 금당 앞에 위치한다. 쌍계사 팔상전(雙磎寺八相殿)은 고려 때인 1290년(충렬왕 16)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처음 창건하여 1466년(세조 12) 선비 대사가 중수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으로 여겨지는데, 1678년(숙종 4)에 천봉 선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이후 1806년(순조 6)에는 화악 선사가 중수하였으며, 다시 1978년에 승려 고산(杲山)이 중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으로 2구씩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건물 높이에 비해 처마의 길이는 짧다.
내부의 천장은 점차 높이 올라가는 층단형으로 높직하게 보이나 단순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세부에서 일부 장식적인 조각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공포는 밖으로 3출목(出目), 안으로 4출목을 두었는데, 외부제공(外部諸工)의 끝은 장식 조각이 없는 강직한 쇠서[牛舌]로 되었고, 내부는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었다. 내부에 불상 위로는 간단한 닫집을 두고 그 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2011년 현재 쌍계사 팔상전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쌍계사이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雙溪寺八相殿靈山會相圖)」[보물 제925호]와 「쌍계사 팔상전 팔상탱(雙磎寺八相殿八相幀)」[보물 제1365호]이 봉안되어 있다.
「쌍계사 팔상전 신중탱(雙磎寺八相殿神衆幀)」[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385호]은 원래 쌍계사 팔상전에 봉안되었으나, 현재는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불과 팔상탱화(八相幀畵)를 봉안하는 전각이다. 본래는 영산전이라고 하는데, 팔상탱화를 봉안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설법하였던 영산불국을 상징한다. 영축산은 석가모니불이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한 곳으로, 이 영산전을 통해 불교의 성지를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영산전을 참배하는 행위는 사바세계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게 되는 것이다. 쌍계사 팔상전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심을 일으키기 위해 조성된 건축물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시대에 들어와 『법화경』이 널리 간행, 보급되는 것을 살필 수 있는데, 쌍계사에서도 간행 배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쌍계사 팔상전의 조성은 석가모니불의 불국토에 참여하고자 하는 신앙이 담긴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동 쌍계사 국사전 및 칠성전 (河東 雙磎寺 國師殿. 七星殿)
하동 쌍계사 칠성전 (河東 雙磎寺 七星殿) 외부 두공
하동 쌍계사 청학루 (河東 雙磎寺 靑鶴樓) 전면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1930년 쌍계사 주지 손민선사가 건립한 맞배지붕의 2층 누각으로 1985년 지붕 기와를 한 차례 보수하였다.
초심자(初心者) 승려들의 수도 장소로 사용된 곳으로 이와 관련하여 백곡도인(白谷道人)의 청학루 수행기문이 있다. 또한 1902년 8월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남쪽을 여행할 때 이 지방의 사림 32명과 주지 1명과 함께 창수시(唱酬詩)를 짓고 음사(吟社)를 창립하여 청학루음사(靑鶴樓吟社)라 하였는데, 그 현판이 청학루에 게시되어 있다
화순 쌍봉사 (和順 雙峰寺)
화순 쌍봉사 (和順 雙峰寺) 전경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계당산(桂棠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의 땅을 면세해 주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에 중건하였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었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 및 극락전 (和順 雙峰寺 大雄殿 및 極樂殿)
화순 쌍봉사 대웅전(和順 雙峰寺 大雄殿) 남면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쌍봉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탑형 불전. 쌍봉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리산문(桐里山門)의 개산조 혜철(慧徹)이 839년(문성왕 1)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839년 이전에 쌍봉사가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855년에는 철감(澈鑒)선사가 이곳에서 선문을 개설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개산조가 되는데 이때 쌍봉사의 사세가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에는 혜조국사가 쌍봉사를 재건한 사실이 『쌍봉사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쌍봉사는 정유재란 때 대웅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불사가 소실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1628년(인조 6)에 중건되었고, 1690년, 1724년에 중창이 있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웅전은 1984년에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1986년에 복원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사각형 평면의 3층 전각으로 건물의 구조와 형태는 목조 탑파(塔婆)의 형식을 하고 있다.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다지 높지 않으며, 전체적 조형이 일반적인 석탑과 유사한 비례와 체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2층과 3층의 옥신은 매우 낮게 되어 있으며, 3층 지붕은 사모지붕의 형태이다. 이전에는 팔작지붕이었으나 1962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사모지붕이었음이 밝혀졌다.
1986년에 복원하면서 사모지붕으로 복원하고 그 위에 보주를 설치하였다. 공포는 다포식 구조로 1층은 내외 3출목, 2, 3층은 외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탑의 구조는 평면이 정사각형이며, 평면 중심에 심주(心柱)가 있다. 심주는 구조적 역할 뿐만 아니라 심초석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탑의 상징적 중심이다. 쌍봉사 대웅전의 심주는 공중에 떠 있다. 따라서 1층은 내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불단을 마련하여 화순쌍봉사대웅전목조삼존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을 모시고 불전의 역할을 수행한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그러나 2, 3층은 통층(通層)으로 되어 그 중심에 심주가 있다. 각 층 지붕의 추녀들은 모두 뒷뿌리가 상층 기둥에 관통되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심주는 출목 밖의 하중을 받는 추녀의 지렛대 역할에 의해 지탱되어 진다.
쌍봉사 대웅전은 목조탑파 형식의 3층 불전이다. 평면과 구조가 목조탑의 형식을 따르면서 중앙의 심주가 공중에 떠있는 방식을 취하여 내부에 불단을 조성하고 불상을 봉안함으로써 불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에 소실된 후 1986년에 원형대로 복원한 건물이다. 비록 문화재에서 해제되었지만 이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 탑파의 형식의 희귀한 건물로 목조 탑파 양식 연구에 있어 중요한 건축이다. 또한 내부는 불상을 모시고 불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 17세기 목탑의 내부공간의 활용과 그에 따른 구조의 변화를 볼 수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和順 雙峰寺 大雄殿) 동면
쌍봉사의 해탈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3층 건물이 바로 대웅전이다. 쌍봉사 대웅전은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희귀한 목탑 양식의 건축물이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 소실되어 현재는 보물에서 제외가 되었다. 화재의 와중에도 석가 삼존불과 현판은 살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소실된 대웅전은 1628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몇 가지 문헌을 통해 그 이전에도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 현존하는 기단의 편년이 통일 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기임이 확인되므로 철감 선사 도윤의 주석 이후에도 사세가 유지되었으며, 목탑 형식의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은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전소되어, 1628년에서야 삼층전을 중창하였다고 하였으니 분명히 조선 전기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웅전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3층 전각으로 1층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는데, 2층과 3층은 통층으로 중심에 심주가 하나 있다. 같은 목조탑인 법주사 팔상전의 전체 모습이 윗 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심한 것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각 층마다 완만한 비례를 가져 더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팔상전이 통간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 비하여 쌍봉사의 목탑은 적층식으로 되어 있어 중국이나 일본의 목탑 형식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 (和順 雙峰寺 大雄殿) 초층 외부 두공
화순 쌍봉사 대웅전 (和順 雙峰寺 大雄殿) 초층 외부 두공
화순 쌍봉사 대웅전 (和順 雙峰寺 大雄殿) 내부 두공
화순 쌍봉사 대웅전 (和順 雙峰寺 大雄殿) 내부 두공 및 천장 올려본 모습
화순 쌍봉사 호성전 (和順 雙峰寺 護聖殿) 정면
쌍봉사 호성전은 T 자형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 유일 무이한 전각이다. 원래는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짐작되나 현재는 쌍봉사창건주 철감 도윤선사와 중국 조주 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절 가운데 최초로 조주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까닭은 두 선사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철감선사는 신라 헌덕왕 17년 (825) 28세에 중국으로 유학응 떠나 남전, 보원 선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 조주선사를 만났던 것이다 조주선사는 철갑 선사보다 20년 연상의 사형으로서 이미 남천선사에게 '평상의 마음이 도다'는 말을 듣고 단박에 깨달음을 이룬 출중한 스님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주선사는 훗날 사람들이 도를 물으면 '차나 한잔 마시게' '바리때를 씻게나' 등 선을 생활현장과 다도로 끌어 들였던 바 오늘날 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생활선을 제창한 고불이라고 칭송받고 잇다.철감선사가 조주선사와 스승인 남전선사의 문하에서 함께 정진햇던 시기는 825년부터 834년까지 11년 정도였으나 두선사의 인연은 남달랐다.
철감선사 역시 중국으로 가기전에 이미 화엄학에 통달하여 남전선사와 조주선사의기대와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남전선사가 철감선사에데 '우리 종의 법인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하고 인가한 것이 그 중거이다. 이와 같이 남전선사의 가풍은 조주선사를 통해서 중국에 이어졌고, 철감선사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할수 있으므로 호성전에 법과 차의 인연이 깊은 두 분의 진영을 모시게 된 것이다.
조주선사의 진영은 조주선사가 40년동안 머물렀던 중국 하북성 백림선사를 찾아가 송나라 떄 판각한 조주선사 초상화 영인본을 참고하려제작 하였다
화순 쌍봉사 호성전 (和順 雙峰寺 護聖殿) 측면
화순 쌍봉사 호성전 (和順 雙峰寺 護聖殿) 외부 두공 및 천장
화순 쌍봉사 호성전 (和順 雙峰寺 護聖殿) 외부 두공
화순 쌍봉사 극락전 (和順 雙峰寺極樂殿) 전면
화순 쌍봉사 극락전 (和順 雙峰寺 極樂殿) 외부 두공
화순 쌍봉사 극락전 (和順 雙峰寺 極樂殿) 내부 두공
극락전은 대웅전의 뒤쪽에 위치하며, 전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다포계 건물이다. 커다란 덤벙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의 원형 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다. 특히 기둥은 건물에 비해 지름이 너무 커서 중층의 구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건물의 건립 연대에 관해서는 상량문이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봉안된 아미타여래 좌상이 1694년에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17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순 쌍봉사 오백전 (和順 雙峰寺 ) 전면
오백전을 호성전 자리에 명부전 이름으로 바꿔서 옮겨 지어 병부전이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1978년에 재건되었다, 본래 호성전(護聖殿)이라는 정자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명부전의 건물은 이 자리로 옮기기 전에 ‘오백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 나한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부전의 경우 비교적 최근에 재건된 건축물이지만, 이전하기 전에 나한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그 내력이 자못 기이하다.
화순 쌍봉사 오백전 (和順 雙峰寺) 외부 두공
화순 쌍봉사 오백전 (和順 雙峰寺) 내부 두공
정음 영은사지 (井邑 靈隱寺址) - 현재 내장사(內藏寺) -이칭 영은사(靈隱寺), 벽련사(碧蓮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6년(무왕 37)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 동이었다고 한다. 1098년(숙종 3)행안(幸安)이 전각과 당우를 새로 건립하고 중창하였다. 1468년(세조 14) 정혜루를 건립하였다.
1539년(중종 34)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장사와 영은사는 독립된 2개의 사찰이었다. 1557년(명종 12)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되었다.
1639년(인조 17)영관(靈觀)이 법당 등을 중수하고 불상을 개금(改金)하였으며, 1779년(정조 3)영운(映雲)이 대웅전과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고 요사채를 개축하였다. 1923년학명(鶴鳴)이 절을 벽련암(碧蓮庵)의 위치로 옮겨 짓고 벽련사라 하였으며, 옛 절터에는 영은암을 두었다. 1938년매곡(梅谷)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1951년 1월 12일 불탄 뒤 중건을 보지 못하다가, 1957년 요사인 해운당을 건립하였고, 1958년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1960∼1962년과 1974∼1977년에 중건하였고, 1992년 요사인 향적원(香積院)과 종각을 건립하였으며, 1997년 해운당을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선원(禪院)·정혜루(定慧樓)·사천왕문(四天王門)·일주문(一柱門)·요사채·종각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인 내장사 동종과 부도 등이 있다.
이 중 내장사 동종은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있던 것을 1890년(고종 27)에 영담(映曇)이 옮겨 온 것으로, 윤광형(尹光衡)과 조한보(趙漢寶)가 시주하여 1768년에 주조하였다는 명문이 있다. 높이 80㎝, 구경 50㎝의 중종이며, 용머리의 정교한 문양과 맑은 음향으로 조선시대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에 무기 제작을 위해 강제 징발되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한다.
부속 암자로는 벽련암·원적암(圓寂庵)·불출암(佛出庵)·정재암(淨齋庵)·영은암(靈隱庵)·월조암(月照庵)·삼청암(三淸庵)·금선암(金仙庵)·은선암(隱仙庵)·천진암(天眞庵)·남산암(南山庵)·용굴암(龍窟庵)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적암과 영은암만이 남아 있다. 절 주위에는 빼어난 경치의 명승지가 많으며, 내장산 안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 때 희묵이 제자 희천(希天)에게 쌓게 한 것이다.
전북 정읍군 내장면 영은사는 한국전쟁떄 소실되고 영은사자리에 신 내장사가 들어 서 있다 위의 문화재도 소실 되었다 1958년 건립된 신내장사의 대장전도 2012년에 소실되어 다시 복원되었다
내장산 불출암지(佛出庵址)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에 있는 옛 절터이다. 내장산국립공원의 원적암을 지나 불출봉(佛出峰, 619m)으로 올라가다 보면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 거대한 암벽이 있는데 이 암벽에 형성된 동굴에 작은 암자인 불출암(佛出庵)이 있었다. 동굴 규모는 높이 4.8m, 최대 폭 11.6m에 이른다.
불출암의 연혁은 분명하지 않으나 975년(고려 광종 26)에 하월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1922년 정명심화(鄭明心華)라는 이가 3칸 규모의 나한전을 짓고, 얼마 뒤 요사를 지었는데 한국전쟁으로 1951년 1월 소실되었다고 한다.
동굴 안쪽의 동쪽 벽에는 지상으로부터 2m 정도 높이에 약 10개의 좌대가 파여 있는데 이는 1922년 백학명 선사가 16나한상을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내장산 불출암(佛出庵) 원경
내장산 불출암 영산전 (佛出庵 靈山殿)
예천 용문사(醴泉 龍門寺)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용문산(龍門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절을 짓기 시작했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 하나를 캐어 그것으로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태조는 후삼국을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군사를 거느리고 머문 적이 있었는데, 두운의 옛일을 생각하고 뒷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 태조는 936년(태조 19)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83년(성종 2)에는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이 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英縺)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다.
조응은 이 절이 퇴락해 감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1165년(의종 19)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6년에는 의종의 칙명으로 중수를 시작하였고,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낮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1179년 중건이 마무리되자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禪僧) 효순(孝惇)은 『전등록(傳燈錄)』·『능엄경(楞嚴經)』·『인악집(仁岳集)』·『설두집(雪竇集)』·『염송(拈頌)』 등을 강하도록 하였다.
그 전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대법회를 개설하였다.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영치(穎緇)가 강을 맡았는데, 이 법회는 1180년에 시작하여 1182년까지 계속되었다. 1478년(성종 9)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절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1608년(광해군 41)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했고, 1636년(인조 14)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그 남쪽에 범종루를 지었다. 당시 그 밖에도 광명전(光明殿)이 세워졌다. 그뒤 1783년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공사를 끝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異蹟)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이 창건할 때 용이 영접한 것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의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舍利)를 봉안하는데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대장전(大藏殿)을 비롯하여 보광명전(普光明殿)·응향각(凝香閣)·진영각(眞影閣)·명부전(冥府殿)·응진전(應眞殿)·회전문(廻轉門)·범종루·강원·천불전(千佛殿)·두운암(杜雲庵)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輪藏臺)와 보물 제729호인 용문사교지, 보물 제989호로 지정된 1663년(현종 4)에 목각한 후불탱화(後佛幀畵) 등이 있다.
예천 용문사 (醴泉 龍門寺) 전경
예천 용문사 대장전 (醴泉 龍門寺 大藏殿) 전면
용문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선사가 세운 절이다.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되었다.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870년(신라 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창건, 뒤에 여러 번 중수·중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불타버린 것을 1835년(헌종 1)에 역파(櫟坡)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은 모두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각각 두짝 열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처마밑에는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栱包)를 배치하고 기둥 사이마다 두 개씩의 공간포(空間包)를 둔 보기 드문 형식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중앙 후면에 불단이 있으며, 그 좌우에 불경을 보관하는 희귀한 회륜식(廻輪式)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어 단아함과 화려함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 (醴泉 龍門寺 大藏殿 輪藏臺)
예천 용문사 윤장대(醴泉 龍門寺 輪藏臺)는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팔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팔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1개씩 총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팔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980.09.16. 보물 제 684호로 지정되었다
예천 용문사 대장전 (醴泉 龍門寺 大藏殿) 외부 두공
청도 운문사(淸道 雲門寺)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절로 560년(진흥왕 21)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였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귀산(貴山)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937년(태조 20)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으며, 이 때 왕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076년(문종 30)에 원응국사(圓應國師)학일(學一)이 중창했으며, 1105년(숙종 10)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운 뒤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중창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90년(숙종 16)에 설송(雪松)이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현재 대웅보전·작압전(鵲鴨殿)·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金法堂)·만세루(萬歲樓)·관음전·명부전·강원·요사채 등의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이다. 이 중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93호로 지정된 금당 앞 석등을 비롯하여 보물 제316호로 지정된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 보물 제67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보물 제208호로 지정된 동호(銅壺) 등이 있으며, 오백나한전 안의 나한상은 보기 드문 작품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2기의 3층석탑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행주형[行舟形: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이라 하여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서 양쪽에 탑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만세루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건물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입구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있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이 있다. 이 절은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도 유명하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淸道 雲門寺 大雄寶殿) 정면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淸道 雲門寺 大雄寶殿) 내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雲門面) 신원리(新院里) 운문사에 있는 정전(正殿)으로 조선 후기의 불전이다.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었다.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운문사는 신라 때인 560년(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하였으며 608년에는 원광국사(圓光國師), 신라 말기에는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였고 고려 숙종 때 원응국사가 중창하였다. 현재의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에 중건한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의 운문사는 네번째로 사찰을 중창한 조선시대인 1718년(숙종 44)에 지은 건물로 대웅보전도 이 무렵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막돌로 쌓고 상단석(上段石)은 긴댓돌[長臺石]로 된 갑석(甲石)을 놓아 정연하게 마무리하였으며, 정면 가운데에 잘 다듬질된 4단 계석(階石)을 놓았다.
주춧돌은 자연석으로 그 위에 민흘림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맞추어 하부 가구(架構)를 구성하였다. 공포(栱包)는 다포식으로, 주두(柱頭) 위에는 주심포(柱心包)를, 주간(柱間)에는 어간(御間 : 중앙간)에 4구, 옆칸에 3구씩 공포를 짜 놓았다.
대웅보전은 목조건물로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큰 규모이고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팔작지붕이다. 다포계의 공포를 구성하였고,또, 측면에서는 어간에 3구, 양 옆칸에 2구씩의 포작(包作)을 놓아 지붕의 무게를 받게 하였다. 공포의 주두는 굽을 비스듬히 깎았는데 포작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짜여졌다.
외부 살미첨차의 마구리는 메뚜기머리 모양으로 깎아서 제법 고식(古式)을 보이며, 내부에서도 연꽃봉오리나 복잡한 초각(草刻)을 쓰지 않고 메뚜기머리 모양으로 처리해서 안팎 모두 견실한 느낌을 준다.
내부에서 가구형식을 보면, 후불벽(後佛壁)을 설치한 2개의 고주(高柱)와 앞쪽 평주(平柱)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포대공(包臺工)을 얹어서 마루보를 받게 하였으며, 이 위쪽에는 귀틀을 짜서 우물천장을 마련하였다.
단청은 금단청(錦丹靑 : 부재의 양 끝에 주된 단청을 하고 중간에 여러 가지 비단 무늬를 그린 단청)으로 칠하였고,벽면에는 벽화를 그려넣었다. 처마는 겹처마로 둥근 서까래에 모난 덧서까래를 붙여서 처마의 곡선을 아름답게 잡았으며 추녀 끝부분에 활주(活柱)를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게 하였다.
가구(架構)의 양식은 1고주(高柱) 5량가(樑架)로 천장은 네 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건물의 앞면에는 꽃살무늬를 넣은 분합문(分閤門)을 달아 출입하였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간격이 넓어 5짝의 분합문이 달려 있다.맞은편 승방의 꽃살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축물이다.
오대산 월정사 (五臺山 月精寺)
오대산 월정사 ((五臺山 月精寺) 전경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자장율사는 임시로 초암(草庵)을 얽어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머물던 3일 동안 음산한 날씨가 계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이라고 전하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이곳에 머물렀고, 범일(梵日)의 제자였던 두타승(頭陀僧) 신의(信義)가 자장율사가 휴식하던 곳을 찾아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뒤 이 암자는 오랫동안 황폐해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 유연(有緣)이 암자를 다시 짓고 살면서 월정사의 사격(寺格)을 갖추었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일(而一)이 중창하였고, 1833년(순조 33)에 다시 화재로 전소된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정암(淨庵) 등이 중건하여 내려오다가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1964년 탄허(呑虛)가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을 중창한 뒤 만화(萬和)가 꾸준히 중건하여, 현재 삼성각(三聖閣)·대강당·심검당(尋劍堂)·승가학원(僧伽學院)·범종각·용금루(湧金樓)·일주문·요사채·창고 등이 있다.
이 중 적광전은 남향으로 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건물이다. 전내(殿內)에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대불이 봉안되어 있다.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또한, 본존불만 모시고 협시불을 모시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중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48호인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보물 제139호인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제292호인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平昌 上院寺 重創勸善文) 등이 있으며, 월정사 육수관음상(月精寺 六手觀音像)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부도 22기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이 밖에도 월정사의 보물 및 유물들을 모아놓은 전시실 보장각(寶藏閣)에는 팔각구층탑과 같은 모양의 축소판 목조탑이 있다.
그리고 대장경을 넣었던 경궤, 『금강경』 3권, 『범음집 梵音集』 2권, 『진언집 眞言集』 1권, 『보권문 普勸文』 1권, 『지장경 地藏經』 2권, 인도 불상, 인도 패엽경, 난초족자 2, 독성탱화 1폭, 관음보살변상도(觀音菩薩變相圖) 1폭, 신중탱화, 바라 1쌍, 조선시대 의상·기와, 고려시대 궤짝 13개, 구리거울인 무문경·파문경·쌍룡경·사룡경이 있고, 향낭·향합·수정사리병·진신사리병·은합·청동합, 청동갑옷을 쌌던 보자기, 목향 등이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 월정사 칠불보전 (五臺山 月精寺)七佛寶殿) 전면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아군에 의하여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오대산 월정사 칠불보전 (五臺山 月精寺)七佛寶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혜사(永川 銀海寺)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 제 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 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 (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을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거조암 영산전(국보14호), 백흥암 극락전수미단(보물 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514호), 백흥암 극락전(보물 790호)
영천 은헤사 (永川 銀海寺) 전경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전면
은해사 대웅전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주 불전인데, 1847년(헌종 13) 화재 이후에 건축한 건물이며, 지금의 현판은 ‘극락보전’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은 보화루 북쪽 끝 산 밑에 남행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구조는 다포계 팔작집이다.
평면 간살은 전·후면 어칸만 양 협칸보다 1척(尺)가량 넓게 잡았고, 양 측면은 등간격이다. 건물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 위에 자연석초석을 놓고 듬직한 두리기둥을 세운 뒤 벽체와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에 각 칸, 후면에 어칸 및 좌협칸, 양 측면에는 각 좌협칸에 각기 설치되어 있다. 전면 각 칸 창호는 어칸만 꽃살과 솟을살이 한 세트로 구성된 4분합들문, 양 협칸은 솟을살 3분합들문이다.
창호 형식은 분합들문형식이나 안쪽에 둔테를 달아 개폐방식도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안여닫이이다. 양 협칸 및 후면의 창호는 모두 외여닫이 굽널정자살문이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다포계 공포를 꾸며 처마 및 내부가구를 받도록 했다.
공포는 외 4출목, 내 5출목으로 화려하고, 주상포외 공간포는 전·후면 각 칸에 2조씩, 양 협칸에는 각 1조씩 배열했다. 공간포 배열에서 주목할 점은 전·후면 및 양 측면의 어칸을 제외한 각 협칸의 공간포는 해당 주간의 중앙에 배열된 것이 아니라 모두 귀포쪽으로 편재해 배열했다. 즉 귀포쪽의 과대한 지붕하중을 보다 견실히 보강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제공 형태는 외단이 1-4제공까지 앙서-하부초각-상부 연봉조각형이고, 5제공은 수서-하부 연꽃조각형, 6제공은 봉두 또는 양두로 꾸몄다. 한편 내단은 1제공은 연꽃조각 2제공은 연봉, 3제공은 연밥, 4제공은 연꽃, 5제공은 연봉, 6제공은 연밥, 7제공은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조선 후기 공포의 제공에 나타난 장식화 경향을 잘 반영한 모습이다.
내부 상부가구는 건실한 2고주 7량가이다. 대량은 후불벽 내고주에서 후퇴량과 합보로 처리하였고, 대량 위에는 양 측면에서 올라온 곡선형의 충량 2개를 눌러 얹었다. 앞쪽 충량 머리는 용두로 장식했고, 등 위에는 재차 외기중도리를 짠 뒤 주두-첨차-뜬장혀를 결구시켜 종량을 받았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고주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과 불단을 설치했다. 불단 상부에는 낙양각이 조각된 보개를 얹고 용과 운문, 극락조, 비천상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천장은 내목도리-외기중도리까지는 공포의 경사에 따라 빗반자로 처리하고, 외기중도리-종량간에는 우물반자, 내진중도리 사이에는 소란반자로 꾸몄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를 이은 팔작집이다.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헤사 대웅전(永川 銀海寺 大雄殿) 내부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전경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라 하여 신라 효성왕 2년 원참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고도 하고 경덕왕 때 건립되었다고도 한다. 근래에 와서 거조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고 있다. 거조암은 팔공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며,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전은 거조암의 본전이며,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원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다고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다.
형태 및 구성 기법에 있어서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고쳐 지으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 526분의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영산전(靈山殿)은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건물로 전체 모양은 불규칙하게 채석된 장대석과 잡석으로 축조된 높은 기단위에 선 길죽한 형태이다. 가구(架構)는 간결한 수법으로 되어 측면 중앙 칸을 형성하는 두 고주(高柱)와 그 앞뒤의 평주(平柱)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다.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어 평주 위의 공포에 의하여 퇴보 안 끝이 받쳐져 이것이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게 되고 출목(出目)으로 된 첨차는 퇴보 끝을 받으면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쳤다. 고주머리에는 뜬 창방(昌枋)을 돌리며 기둥 뒤에는 주두(柱頭)를 두고 포작으로 대들보 끝을 받고 끝은 중도리를 받쳤다.
대들보 중앙에는 키가 큰 제형(梯形)의 부재(不在)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을 올려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마루도리는 내반(內反)된 소슬합장으로 받쳐 지고 천장가구(天障架構)는 없이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이 건물의 세부를 보면 주두나 소누(小累)가 다포집과 같은 형태로 된 것 이외는 주심포 양식의 초기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가구이다. 평 주위에 놓인 공포 형태와 마루도리 위에 놓인 일종의 포대공(包臺工) 형태는 이 건물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첨차 밑에 겹쳐 헛초공으로 이 첨차를 받쳐 키가 큰 첨차처럼 되어 있는 것은 출목 첨차의 길이가 보통 보다 길게 나와 이를 보강하는 것으로 특이한 처리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 대들보 중앙에 놓여 일종의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은 높직한 제형주(梯形柱) 위에 2중으로 된 포작이 있다. 아래 포작의 첨차는 퇴보 끝 보머리를 거꾸로 한 것 같은 형태이고 위쪽 포작의 첨차는 역제형(逆梯形)의 판장(板狀)이다.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평면도
정면 7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집이다.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한국 건축사에서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전면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측면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우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외부 두공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내부
영천 은헤사 거조암 영산전(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상세도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永川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 전면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백흥암에 있는 조선 시대 불전. 은해사 백흥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백흥암의 주 불전으로 1546년(명종 1)에 건립되고 1685년(숙종 1)에 중건한 조선 전·후기 다포계의 대표적인 건축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백흥암은 은해사 서편에 위치한다. 은해사 뒷길로 900m 가량 올라가면 신일지가 나오고 여기에 세 갈래 길이 있다. 산길로 가면 태실봉·인종대왕태실, 신일지를 끼고 우측[서북쪽] 택골로 가면 운부암, 좌측[서쪽] 절골로는 백흥암·기기암·중암암으로 갈 수 있다. 백흥암은 신일지의 좌측 길인 태실봉 남쪽 기슭의 절골로 1.5㎞ 지점의 태실봉[해발 462.3m] 남사면 해발 330~345m 지점에 있다
통일 신라 시대 말에 국사 혜철(惠徹)이 건립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백지사(柏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인종의 태실을 팔공산에 경영하면서 이 암자를 수호 사찰로 삼고 크게 중수하고 백흥암으로 개칭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백흥암의 주 불전인 극락전은 1546년(명종 1)에 건립되고 1685년(숙종 1)에 중건한 다포계 팔작집이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이 영산전을 중수하였다. 이 절은 한때 수백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진영각(眞影閣)·영산전(靈山殿)·명부전(冥府殿)·문루인 보화루(寶華樓)·산신각(山神閣)·선실(禪室)·원주실(院主室)·요사채 등이 있다. 특히 백흥암 극락전 내 수미단은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태실봉 남사면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중심 영역의 건물 배치 구성은 전면에 문루인 보화루가 한 단 낮게 있고, 그 뒤 좁은 중정을 중심으로 진영각과 심검당이 마주한다. 중정 북쪽으로 한 단 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극락전이 남서향한다.
백흥암 중심 영역의 건물 배치 구성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4동 중정식(中庭式) 산지 가람을 취하고 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구조는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것이고, 초석은 자연석 초석이다. 극락전 전면 기단 중앙에는 소맷돌을 갖춘 석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구체부는 자연석 초석 위에 두리 기둥을 세우고 창호와 벽체로 마감했다.
창호는 전면에 각 칸, 양 측면은 좌측면 각 칸, 우측면 앞 협칸, 후면에는 양 협칸에 달았다. 전면 창호는 어칸만 상하 둔테에 정자살+솟을살을 세트로 조합한 4짝 안여닫이문이고, 양 협칸은 정자살의 3분합문이다. 좌측면 어칸에는 쌍여닫이 굽널세살문, 양 협칸 및 후면에는 각기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아 이용하고 있다. 특히 후면 어칸과 우측면 어칸, 후면 협칸의 벽은 인방과 띠장을 댄 판벽으로 마감된 것이 특징이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평방 위에 외3출목, 내3출목의 다포계 공포를 올렸다. 공간포는 전·후면에는 공히 2조씩, 양 측면에는 각 1조씩을 배열했다. 특히 공포에서 주목할 것은 내·외 출목수가 동일한 점 외에 제공 내·외단형태가 첨차와 동일한 간결한 교두형(翹頭形)이란 점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제공 형태는 앙서에 연꽃·연봉 조각이 첨가된 매우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양상이다.
내부 상부 가구는 1고주 후퇴 7량가이다. 대량은 전면 공포의 4제공 위에서 얹힌 뒤 내고주 상부에서 후퇴량과 합보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양 측면에서 만곡된 충량 2개가 대량과 직교해 등 위에 얹혀진다. 중대공은 대량 등 위에 주두+첨차+뜬창방 또는 원형화반+주두+뜬창방으로 받았고, 종대공은 각재의 동자대공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고, 어칸에 이주법(移柱法)의 내고주에 후불벽을 만들고 앞쪽에 화려한 조각 수법이 뛰어나 보물 제486호로 지정된 불단인 수미단이 배치되어 있다. 불단 위 천장에는 보개(寶蓋)가 설치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조각 수법이 뛰어난 용이 매달려 있다. 천장은 3단의 소란 반자로 화려하게 꾸몄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은해사 백흥암은 현재 극락전·진영각·심검당·보화루·명부전·산신각·영산전·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영역의 배치 구성은 조선 시대 전형적인 4동 중정식 산지 가람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1984년 7월 5일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었다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은 조선 시대 산지 가람의 배치 구성뿐만 아니라 공포 구성, 상부 가구 등에서 조선 시대 전·후기에 걸친 시기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공포 및 내부 가구에서 장식화 경향과 새로운 구조 기법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조선 후기와 달리 고졸한 형태 및 구조 기법이 잘 남아 있는 불전이다.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永川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 외부 두공 및 헌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永川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 불단
영천 은혜사 백흥암 극락전 (永川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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