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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직종(職種)들 Ⅰ

문수봉(李楨汕) 2018. 1. 25. 15:16
조선 시대직종(職種)들 Ⅰ



마경장(磨鏡匠),  세마꾼(貰馬),화장(花匠),조방(助房), 매품팔이,

예덕선생(穢德先生),전기수(傳奇수),매골승(埋骨僧),집주름(家쾌), 안화상(=貨商),




1. 거울 가는 사람 ‘마경장’(磨鏡匠)

- 녹 잘 스는 청동-백동거울, 갈고닦아 반짝반짝 새것으로 

《조선시대라고 ‘사농(士農)’, 선비와 농민만 살았으랴. 오늘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수많은 ‘공상(工商)’이 살았다. 조선의 진면목은 낮과 궁(宮)뿐 아니라 밤과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사료의 짧은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세계를,다양한 직업을 조명한다》 



경대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는 여인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서울대박물관 제공


“13일 마경장(磨鏡匠) 15명을 대령하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월 14일)

마경장이 뭐하는 사람이기에 연산군은 15명이나 찾았을까?

조선 후기까지 거울은 지금 흔히 보는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 거울이었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슬었다. 녹을 벗기고 갈고 닦아 맑고 선명한 빛을 다시 살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를 담당했던 사람이 거울 가는 전문가 마경장이다. 낡고 녹슨 거울은 마경장 손끝에서 새것으로 거듭났다.

훗날 작성된,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쓸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를 보면 마경장이 거울을 닦는 데 썼던 도구가 나온다. 강려석, 중려석, 연일려석과 법유이다. 강려석은 거친 숫돌, 중려석은 중간 거칠기 숫돌, 연일려석은 포항 연일 특산의 고운 숫돌을 말한다. 법유는 들기름이다. 

도구가 단출한 편이라 공정도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무조건 부지런히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숫돌 세 종류를 고루 잘 써야 한다. 또 청동, 백동 등 거울 재질에 맞춰 연마 강도도 조절해야 한다. 여기에 들기름 적당량을 발라야 광택도 얻고 녹스는 것을 막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작업 과정에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문성은 거울을 만드는 ‘경장(鏡匠)’에서 또 다른 직업인 마경장이 일찍이 갈려 나온 이유다.

연산군은 조바심 내며 마경장을 찾았다. 거울 수집가 연산군? 아니다. 마경장이 손본 거울은 연산군을 모시는 기녀들이 썼다. 기녀가 많은 만큼 치장에 쓰이는 거울도 많았고, 그만큼 마경장도 많아야 했다. 

그런데 마경장이 부족했다. 마경장이 부족해 거울이 불량했고, 기녀의 꾸밈 역시 불량했다. 흥이 깨진 연산군은 다음 날 불호령을 내렸다. ‘내가 마경장 15명을 대령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호색한 연산군은 거느린 기녀가 늘어날수록 마경장이 절실했다. 

윤두서가 애용한 백동거울 공재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울이 부착된 경대(위 사진). 거울은 일본 에도시대에 제작된 백동경(白銅鏡)으로 전남 해남 녹우당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거울 뒷면. 윤형식 씨 제공

마경장이 긴요했던 또 다른 이도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다. 윤두서 자화상은 여느 그림과 마찬가지로 붓, 물감, 종이로 그렸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하나 더 있다. 깨끗한 거울이다. 천재 화가는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찾았을 터. 윤두서의 거울을 갈고 닦던 마경장은 혼신의 힘을 다했을 법하다. 마경장 덕분인지, 윤두서 자화상은 잡티 하나, 수염 한 올도 놓치지 않았다.

고전소설 ‘최고운전’에서 최치원은 승상의 외동딸 나 소저를 보기 위해 남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마경장 행세를 한다. 거울 간다는 외침을 들은 나 소저는 유모를 통해 낡은 거울을 맡긴다. 마경장은 숫돌과 참기름을 지고 ‘최고운전’의 최치원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골목을 누비며 거울을 갈았을 것이다.

18세기에도 마경장은 조선의 골목을 누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면 거울 가는 법을 깨닫게 된단 말씀이야.”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이 ‘추재기이’에 기록한 절름발이 마경장의 말이다.

마경장과 비슷한 직업으로 마광장(磨光匠)이 있다. 마광장은 옥새부터 악기까지 온갖 물건을 빛나게 하는 광택 전문가였다. 경장, 마경장, 마광장은 다른 듯 닮았다. 세 직업은 조선을 누비며 방방곡곡을 오래도록 빛나게 했다. 

[출처] :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조선잡사> / 동아일보
 


2. 말 대여업자 ‘세마꾼’(貰馬)-따각따각 당대 렌터카

…高價에도 호황 누린 ‘양반의 발’




신윤복의 그림 ‘연소답청(年少踏靑)’ 간송미술관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세마(貰馬) 세 필을 내었으니 돈이 얼마나 들었겠니? 노자(路資)와 함께 열 냥이나 들되, 집에 돈이 턱없이 모자라 근이에게 빌렸단다.” (의성 김씨 김성일파 종택의 한글 간찰에서) 

학봉 김성일의 11세손인 김진화(1793∼1850)의 부인 여강 이씨(1792∼1862)가 1847년 5월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명문 종가에서도 말을 빌리는(세마) 데 돈이 모자라 ‘근이’라는 친척의 신세를 졌던 것이다.  

당시 말은 노비보다 더 비쌌다. 노비 한 명을 면포 150필 정도에 사고팔았는데, 말은 그 세 배에 달하는 400∼500필을 줘야 살 수 있었다. 말을 먹이고 관리하는 데 비용이 또 들기 때문에 말을 소유하는 것은 큰 비용을 치러야 했다. 이에 말이 필요한 이들에게 빌려주는 서비스가 생겨났다. 그들을 세마꾼 또는 세마부(夫)라고 불렀다. 지금의 렌터카나 택시, 택배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조선판 종합 운수사업가’라고 할 수 있다. 

왕실 기록에는 궁녀들이 궐 밖을 다니거나 물건을 옮기는 데 세마를 이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고전소설과 야담에서는 호탕하게 세마를 내어 오늘날 차를 렌트해 드라이브하듯 길을 떠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여강 이씨의 예에서 보이듯 양반가에서도 세마는 섣불리 쓰기 어려웠다. 이 씨는 비용 부담 탓에 “정신이 어지럽고 안정할 수 없어 괴롭다”고까지 적었다. 여강 이씨가 쓴 10냥은 얼마나 되는 돈일까? 당시 서울의 6칸짜리 초가가 20냥가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빌리려는 수요가 늘면서 작지 않은 규모로 말을 관리하고 빌려주는 가게인 ‘마계전(馬契廛)’이 호황을 누렸다. 여강 이씨의 또 다른 편지에는 3000냥이나 들여 서울에 마계전을 차리려는 동생을 뜯어말리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서울의 괜찮은 기와집이 300냥 안팎이었으니 마계전을 차리는 데 기와집 10채 값이 들었던 것이다. 

세마를 내면 견마잡이라는 말몰이꾼이 따라붙었다. 견마는 원래 관리에게만 허용되었으나 민간에서도 성행하여 견마잡이가 없으면 체면치레를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견마잡이는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고, 말을 세마꾼에게 돌려주는 일을 했다. 차를 빌리면 내비게이션과 운전사가 딸려 오는 격이다. 이들은 가야 할 곳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기에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견마잡이가 고삐를 잡고 걸었기 때문에 말도 그에 맞춰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말을 타고 급히 달리는 모습은 조정에 급한 보고를 올리는 파발마 외에는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는 손님은 견마잡이가 이끄는 말에 탄 채 주변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갔다.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이를 두고 ‘말의 속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고, 빨리 달릴수록 비싼 말이 상할 소지도 높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별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착불로 보내는 택배처럼 세마를 보낸 뒤 받는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다. 급한 환자는 세마에 태워 의원에게 보냈으니 구급차 역할까지 맡았다. 나라에서 사용하는 역마(驛馬)가 부족하거나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는 경우에도 세마꾼에게 말을 빌렸다. 세마는 백성의 발 노릇을 충실히 해 주었다.

[출처] :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조선잡사> / 동아일보




3. 조화 만드는 사람 ‘화장(花匠)’ - 밀랍으로 만든 매화, 감쪽같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나오는 준화(樽花·화분에 설치하는 대형 조화) 견본

높이가 9척 5촌(약 3m)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흰 밀랍과 푸른 종이로 매화와 대나무를 만들고, 그 사이에 비단을 오려 만든 붉은 복숭아꽃을 두었다.” (이황 ‘퇴계집·退溪集’)  

한순간 피었다가 스러지는 꽃을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오래 보기 위해 만드는 것이 조화(造花)다. 요즘은 조화를 하도 잘 만들어 생화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지만, 싸구려라는 편견 탓인지 생화를 선호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화로 만든 화환을 쌀 열 가마니 값을 들여 샀다면 선뜻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

옛날에 생화를 장식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왕비와 궁녀의 머리 장식인 잠화(簪花)도, 장원 급제자의 사모에 꽂는 어사화(御賜花)도, 각종 궁중 행사의 장식도 모두 조화였다. 지금처럼 사시사철 생화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예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조화의 종류도 국화, 모란, 장미, 복분자꽃, 연꽃 등 다양했으며 비단과 종이, 밀랍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행사에 쓰인 물품과 비용을 기록한 의궤를 보면 한 차례 연회에서 사용되는 조화의 수는 보통 수천 개에 달했으며, 화환의 크기가 9척 5촌(약 3m)인 것도 있었다. 당시 조화의 개당 가격은 종류에 따라 6전에서 20냥까지 갔다. 쌀 한 가마니가 두세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고가다.

전문 기술자인 ‘화장(花匠)’이 조화를 만들었다. 화장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있다. 국왕의 물품을 관리하는 중상서와 국왕의 의복을 전담하는 상의국 소속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관청 소속이었다. 상의원, 연회를 담당하는 예빈시, 내자시뿐 아니라 지방 관청에도 별도로 소속됐을 정도로 꼭 필요한 직무였다.

이들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소집돼 조화를 만들었다. 왕실 연회에 쓰이는 조화의 종류와 수량은 갈수록 늘어났고, 고종 때에 이르면 연회에서는 한 번에 수만 개의 조화가 사용됐다. 고종의 사치 탓이라고도 했지만,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기술자가 대개 그랬듯이 화장도 고된 노동을 했지만 대접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국가 소속이더라도 행사가 없으면 월급은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새로운 고객은 왕실 문화를 선망하는 사대부였다.

궁중을 드나들던 사대부들이 조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의 꽃다발이나 화환처럼 보편화시켰다. 퇴계 선생도 밀랍 매화, 종이 대나무, 비단 복숭아꽃을 보고 시를 짓기도 했다. 

급기야 선비들 사이에서 ‘조화 DIY(Do It Yourself)’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인기 있는 품목은 선비의 상징인 매화였다. 나무틀에 밀랍을 부어 꽃잎을 만들고, 초록 종이를 오려 꽃받침을 만든다. 노루털로 꽃술을 만들고 부들 가루를 발라 꽃가루 효과를 주었다.

이렇게 만든 꽃을 진짜 매화 가지에 붙이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매화가 완성된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렇게 만든 조화를 친구에게 팔기도 했다.

사대부는 화장을 ‘속장’(俗匠·속된 장인)이라며 무시했지만, 이처럼 정교한 작업은 전문가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된 노동, 부족한 자원, 낮춰 보는 시선 속에서도 화장은 조화를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로 만들었다.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4.‘연회 전문가’ 조방(助房)

- 기생과 고객을 연결해주고 스케줄과 수입까지 관리한 ‘연회 전문가’



악공들의 음악과 검무기(劍舞妓)들의 칼춤이 어우러진 연회를 묘사한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가장 유명하지? 소아라는 기생이네. 그 ‘조방(助房)’은 누구인가? 최박만이라네.” (박지원의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18세기 중반 연암 박지원이 지은 ‘광문자전’에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이 소개됐다. 당시 성행했던 사채업에 대한 내용도 있고, 검무로 유명했던 밀양 출신 기생 운심도 등장한다. 주인공인 광문 역시 거지생활을 하다가 의로움을 인정받아 약국에 점원으로 취직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전문 직업인으로서 ‘기생 매니저’라는 의미의 조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방은 기생의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세종 대에는 고을 풍습을 어지럽힌 노흥준과 김전이란 ‘기부(妓夫·기생서방)’가 등장한다. 연산군이 기부의 명단을 검토하던 중 세걸이라는 기부가 적선아라는 기생을 사사로이 데리고 살았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조선 전기부터 기생과 손님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던 조방의 흔적이 보인다.

또 기부가 연회의 전문가임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 역시 조선 전기부터 보인다. 성종은 1475년 11월 16일 대비를 위해 큰 연회를 개최한다. 장악원을 중심으로 광대와 기생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데 여기에 우의정 윤사흔이 기부가 도제조(都提調·연회의 총책임자)를 알현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꾸짖은 뒤에 이 연회에서 기생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윤사흔이 언급한 기부는 기생들을 관리하는 전문가임을 추정할 수 있다.

기생은 각종 국가 행사에 동원돼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 것이 본분이다. 이들은 나라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 남성을 접대하는 것은 원래 불법이다.


조선 후기 조수삼이 지은 ‘추재기이(秋齋紀異)’에 조방에 대한 일화 두 편이 실려 있다. 이중배라는 조방이 기생을 미끼로 한꺼번에 열 명의 손님을 속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소개한다. 그가 하룻밤에 벌어들인 돈은 1명당 1000전이라고 나온다. 1000전은 10냥에 해당하므로 이중배가 하룻밤에 벌어들인 돈은 100냥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당시 서울에서 괜찮은 집 두 채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준수한 외모에 말솜씨도 뛰어난 조방 최 씨가 기생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특히 철저한 비밀주의 영업 전략을 고수해 날마다 부유층 자제들을 모아 파티를 열었는데도 소문이 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손님의 비밀을 엄수하는 그를 ‘아방한(啞9閒)’, 즉 ‘벙어리 조방꾼’이라 불렀다.

조방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조방은 기생을 착취하는 포주나 기둥서방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국가가 기생을 관리하는 관기 제도는 폐지됐고 1917년 최초의 기생 조합인 다동조합(茶洞組合)이 창설됐다. 조방도 이름은 없어졌지만, 그 역할은 더욱 세분되고 조직화돼 이어졌다.

그에 따라 ‘말하는 꽃(解語花·기생)’은 철저하게 기업적으로 발굴, 양성, 관리됐다. 이는 기생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개인의 영역에서 기업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가수와 배우 상당수도 기생조합 출신이었다. 

[출처] :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5. 곤장 대신 맞아주는 ‘매품팔이’ - 곤장 100대 맷값이 고작 7냥

… 벼랑끝 서민의 ‘극한 알바’



김준근의 ‘형정풍속도’ 중 ‘곤장치고’.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 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 냥어치 양식 사고 닷 냥어치 반찬 사고 닷 냥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 하리라.’” (‘흥부전’에서) 

반년 치 생활비를 준다면 길이 1.7m의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백 대를 맞겠는가? 이 질문에 서슴없이 그러마고 한 사람이 있었다. ‘흥부전’의 주인공 흥부다.

흥부는 곤장을 대신 맞아주면 30냥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몇 대를 맞는 조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곤장의 최대한도가 백 대니 그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전까지 흥부가 하던 일은 말편자 박기(5푼), 분뇨 수거(2푼), 빗자루 만들기(1푼) 따위였다. 100푼이 1냥이니, 30냥을 벌려면 말편자 600개를 박거나 화장실 1500곳을 청소하거나 빗자루 3000개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 일용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20푼 정도였다. 30냥이면 150일 치 임금에 해당한다. 넉넉잡아 반년 치 생활비다. 흥부는 제안을 수락하지만 공교롭게도 김좌수에게 특별사면이 내려지는 바람에 거래는 무산되고 말았다.

돈을 받고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소설의 설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는다”는 기록이 더러 보이니 매품팔이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

처음부터 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들이 늙고 병든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겠다고 나섰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보인다. ‘미암일기’에도 아들이 아버지 대신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속이 존속 대신 곤장을 맞는 것은 일종의 효행으로 간주하여 암암리에 허용한 듯하다. 

 

주인이 맞아야 할 매를 노비가 대신 맞는 경우도 흔했다. 귀하신 양반은 맞으면 안 되지만 미천한 노비는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새 거래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 문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는 직업적 매품팔이가 등장한다. 그가 곤장 백 대를 맞고 받는 돈은 고작 7냥이다. 욕심쟁이 아내가 채근하는 바람에 하루 세 차례나 매품을 팔던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흥부는 30냥이나 받기로 했는데, 어째서 그는 7냥밖에 못 받은 것일까.

조선의 법전에 따르면 곤장 백 대는 7냥의 벌금으로 대납이 가능하다. 매품팔이의 품삯이 7냥을 넘으면 고용할 이유가 없다. 벌금을 내면 그만이다. 흥부가 30냥을 받기로 했다는 말은 과장이다. 


받은 돈을 다 갖는 것도 아니다. 곤장을 치는 형리(刑吏)와 나눠야 한다. ‘청성잡기’에는 매품팔이가 형리에게 줄 돈을 아끼다가 더욱 호되게 곤장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곤장을 치는 횟수는 정해져 있지만 강도는 치는 사람 마음이다.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살살 치게 했다는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뇌물을 주지 않아 불구가 된 사람도 있다. 매품팔이가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받고 곤장을 맞아주는 매품팔이는 사법 질서를 문란케 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 또한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편하게 큰돈을 벌었다면 모르거니와 푼돈에 목숨을 걸었던 그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6. 민간인 배설물 처리업자 ‘예덕선생’(穢德先生) - 더럽다고 얕보지마

… 똥장수 연수입, 한양 집 한채 값



분뇨를 나르는 기구인 똥장군을 진 사람. 인터넷 화면 캡처


“그 친구는 종본탑(宗本塔·현 서울 탑골공원 주변으로 추정) 동편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똥을 져 나르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서 바지게(거름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뒷간을 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 

18세기 후반 인물인 박지원 이덕무 윤기 이옥 등은 각자의 글에서 한양 가구 수를 8만 호라고 언급했다. 1790년대 가구당 인구가 5명 내외였으니 18, 19세기 초 한양은 인구가 4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추정된다. 전통시대 도시의 인프라 중 마실 물, 땔감 공급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배설물의 처리다. 조선은 초기부터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설화집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제149화에는 오염된 물을 맑게 만들기 위한 내용과 방법 등을 다룬 1444년의 실제 상소문 내용이 발췌돼 있다. 분뇨로 인한 한양의 수질오염과 개천에서 아무렇게나 대소변을 보는 문제로 고심한다는 내용이다.

또 18세기 후반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에 실린 ‘똥거름’이라는 글은 한양 성내 사람과 동물의 분뇨로 인한 악취와 길가에 덕지덕지 붙은 똥 문제를 기록했다. 이처럼 인분뇨와 축산폐수 처리는 녹록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정책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평한화골계전’은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을 모아 두는 통을 설치하고 이를 성 밖에 버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시행됐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공중화장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강희맹(1424∼1483)의 ‘요통설(溺桶說)’에 나온다. 큰 시장의 으슥한 곳에 오줌통을 설치했는데 양반들이 이를 이용하면 불결하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19세기 초 지어진 ‘진담록(陳談錄)’의 ‘방분(放糞)’이라는 글에도 길가 옆에 화장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민간인 배설물 처리업자의 활동이 보이기 시작한다. 박지원의 단편소설 ‘예덕선생전’은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처리가 직업인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엄행수는 마을의 온갖 똥을 져 나르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똥장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은 물론이고 말, 소, 개, 돼지, 토끼의 똥을 가리지 않고 쓸어 담는다. 그의 주요 고객은 왕십리 주변 무 농가, 서대문 밖 가지 오이 수박 농가, 연희동 고추 마늘 부추 농가, 청파동 미나리 농가, 이태원 토란 농가 등 채소를 재배하는 농가였다.

똥을 주워 담아 팔아 얼마나 수익을 올렸을까? 그의 연봉은 놀랍게도 6000전이었다. 100전이 1냥이니 연수입이 60냥이었다. 이는 18세기 후반 한양의 괜찮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사람들이 더럽고 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직업치고는 돈벌이가 꽤 좋았다. 

박지원은 천한 일을 하는 엄행수와 친하게 지낸다는 비난에 “선비는 가난이 얼굴에 묻어나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출세하여 온몸에 표가 나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18세기 조선의 분뇨처리업자 엄행수에게 더럽지만(穢·예) 덕이 있다 하여 ‘예덕선생’이라는 칭호를 바쳤다. 

[출처] :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7. 소설책 구연 ‘전기수’(傳奇수)- 저잣거리 ‘책 읽어주는 남자’ 중요대목선 꼭 침묵, 왜



단원 김홍도의 ‘담배썰기’.

 

그림 속 왼쪽 아래 부채를 든 채 책을 읽는 남자가 전기수인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종로 담뱃가게에서 소설 듣던 사람이 영웅이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로 소설책 읽어주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정조실록 정조 14년·1790년 8월 10일 기사에서)

18세기 조선은 소설에 빠졌다. 궁궐에서 촌구석까지 소설을 즐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이다. 당시 서울 도성 안에 15곳에 이르는 세책점(貰冊店·책 대여점)이 성업했다. 세책점은 장편소설을 여러 권으로 나눠 손님이 연거푸 빌리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한 나머지 빚을 내 세책점을 들락거리기에 이르렀다.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에서 “소설을 돈 주고 빌려보는데 깊이 빠져 집안이 기운 자도 있다”고 우려했다. 

세책점은 글을 알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이용했다. 일반 백성이 들락거리기는 쉽지 않았다. 책값도 비쌌고 문맹자도 많았던 탓이다. 이에 따라 소설책 읽어주는 일로 생업을 삼는 ‘전기수(傳奇수)’가 생겨났다. 

전기수는 낭독 전문가였다. 억양을 바꾸고 몸짓을 곁들여 청중이 소설책에 빠져들게 했다. 실감나는 낭독 탓에 전기수가 목숨을 잃는 일도 생겼다. 정조가 말한 종로 담뱃가게 살인사건은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낭독하다가 일어났다.

김자점이 누명을 씌워 임경업 장군을 죽이는 대목에 이르자, 듣던 사람이 칼로 전기수를 찔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칼을 휘두르며 전기수에게 소리쳤다. “네가 김자점이렷다!” 낭독이 어찌나 실감났던지 전기수를 ‘임경업전’ 속 김자점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전기수는 저잣거리에 좌판을 깔거나 담뱃가게 한쪽에서 목청 좋게 소설책을 낭독했다. 전기수가 소설책을 펼치면 누구나 원하는 시간만큼 들었다. 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지정 좌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멀찍이서 듣고 떠나도 그만이었다.
 


공짜면 양잿물도 큰 잔으로 먹는다고 했다. 공짜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서 전기수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秋齋紀異)’에 전기수가 돈 버는 방법을 적었다. 전기수는 요전법(邀錢法·돈 얻는 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했다. 

핵심은 침묵에 있었다. 심청과 심 봉사가 만날 때, 이몽룡이 춘향의 옷고름을 풀 때, 다음이 몹시 궁금한 대목에서 전기수는 침묵했다. 청중은 다음 장면이 알고 싶어 앞다투어 돈을 던졌다. 전기수는 돈이 웬만큼 쌓였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목청을 돋우었다. 

일정한 금액을 받으며 부유층을 상대했던 전기수도 있다. 고전소설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속 전기수 김호주는 부유한 집안에 드나들며 낭독했다. 맛깔난 낭독 솜씨 덕에 집을 살 만한 돈을 벌었다.

영조 때 무신 구수훈이 쓴 ‘이순록(二旬錄)’ 속 전기수는 용모가 고왔다. 한번 들으면 다시 찾지 않고서 못 배길 만큼 낭독 솜씨도 빼어났다. 이 전기수는 여장을 하고 양반집 안방을 들락거렸다. 안방마님 여럿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포도대장 장붕익에게 체포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소설책 한 권은 전기수를 통해 열 사람, 백 사람의 귀로 들어갔다. 조선의 저잣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전기수의 목소리에 즐거워했고 때로 분노했다. 전기수는 예능인이자 지식의 전달자였고, 공론장의 구심점이었다.
[출처] :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8. 버려진 백성 임종 도와준 ‘매골승’(埋骨僧)- 시신 수습 실적따라 관직 제수 받기도



매골승이 주인공인 한문소설 ‘강도몽유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선조 27년(1594년),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서로 잡아먹고 역병까지 겹쳐 죽은 자가 이어졌다. 수구문 밖에 그 시체를 쌓으니 성보다 높았다. 승려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매장하니 이듬해에 끝났다.”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조선시대에는 전쟁이나 기근으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바라보기조차 힘든 광경 속에서 죽은 백성들을 수습해 주는 역할을 매골승(埋骨僧)이 맡았다.

고려시대 승려는 종교인이자 의술 천문 풍수 등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이었다.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의술이 뛰어난 승려를 찾기도 했다. 속세와 떨어진 사찰은 병자의 치료와 요양에 적합한 곳이었다.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극락왕생을 빌며 임종할 수 있었다. 

매골승은 불교식 장례인 화장(火葬)을 주관했고, 풍수에 맞게 묏자리를 잡아주었다. 묘를 어떻게 쓰는가에 후손의 번성이 달려 있다고 믿었던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을 담당한 셈이다. 고려 말 요승(妖僧)으로 알려진 신돈도 원래는 매골승이었다. 

조선에서 매골승은 활인원(活人院) 소속의 관원이었다. 활인원은 동대문 밖과 서소문 밖 두 곳에 있었는데, 사람을 살린다는 취지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그중 매골승은 도성과 근방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시체를 수습했다. 매골승은 나라에서 매월 곡식과 소금 등을 받았고, 봄·가을에는 면포 한 필을 받았다. 또 실적에 따라 관직을 제수받는 기회를 얻었다. 


매골승의 업무는 기근과 역병, 전쟁이 일어날 때 급증했다. 이들은 십중팔구 병을 앓았으니, 역병도 창궐했던 것이다.


세종 9년(1427년) 기근으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늘자 10명이었던 매골승을 16명으로 늘렸다. 그럼에도 업무가 과중하여 이듬해 다시 4명을 더 두었다. 수십만 명에서 100만여 명이 희생됐다는 경신대기근(1670∼1671년) 때는 더욱 참혹했다.

가뭄, 냉해, 홍수, 역병이 잇달았다. 백성들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한 참상이 벌어졌다며 탄식했다. 그렇게 쌓여간 수많은 시체 역시 매골승을 비롯한 승려를 동원해 매장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승려 200명이 주인이 없는 시체 6969구를 매장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사람이 30구 이상을 수습했으니 노고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병자호란 뒤 나온 한문소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매골승 청허 선사가 주인공이다. 청허 선사가 청나라 군대가 죽인 강화도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했고, 꿈에서 귀신이 된 여인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걸 들었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의 장례를 향도계(香徒契)라는 조합이 맡게 된다. 하지만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경우라면 어김없이 승려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없기를 바라는 부처, 매골승은 그 현신(現身)이 아니었을까.
[출처] :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조선잡사> / 동아일보





9. 부동산중개인 ‘집주름’(家쾌) - “집 중개수수료로 매매가의 10% 챙겨”



조선 후기 한양의 상업 공간과 성 안의 생활 모습이 담긴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국립중앙박물관


“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큰 집인지 게딱지인지를 속으로 따진다.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신택권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중에서) 

조선시대에는 부동산중개업자를 ‘집주름(家쾌·가쾌)’이라 불렀다. 이들이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건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당대 양반들이 집주름에게 갖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1753년(영조 29년) 7월 5일 기사에는 부마도위(駙馬都尉·왕의 사위)의 후손 윤성동이 집주름으로 전락한 사실이 소개됐는데, 그를 무뢰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 역시 ‘마장전(馬(장,제)傳)’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말 거간꾼과 집주름을 들었으며,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는 사람 때리기를 좋아했던 표철주가 늙고 가난해져 하는 일 따위로 언급했다. 

그럼에도 18세기 후반 이들의 활동은 꽤 활발했다. 집주름은 한양의 부유층들이 몰려 있는 북촌(청계천 북쪽 일대)뿐 아니라 몰락한 양반들과 선비들이 모여 사는 남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종로 주변 외진 골목과 시장 주변의 집들을 주거래 대상으로 삼은 듯하다. 

심노숭의 ‘자저실기(自著實紀)’에서도 이익모가 179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집주름을 불러 상동(현재 북창동과 남창동이 걸쳐 있었던 지역)에 있는 홍선양의 고택을 7000냥에 구입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수수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택권은 ‘성시전도시’에서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라고 언급했다. 김형규의 일기 ‘청우일록(靑又日錄)’ 1880년 2월 14일 기록에도 350냥짜리 집에 대한 거래로 받은 수수료가 40냥이었다.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 집주름의 중개수수료는 거래가의 10%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소 많아 보이지만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점과 당시 고리대금의 연 이자가 보통 30%를 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수수료가 크게 적어졌다. 1922년 1월 2일 동아일보에는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집주름 600명 중 123명이 1921년에 새로 창설된 가옥중개인조합의 활동을 반대한다는 진정서를 종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경무국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새로운 조합이 수수료를 너무 많이 받도록 규정했다는 게 이유였다.

얼마나 받았을까? 집주름은 거래가의 0.8%를 조합에 내고,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에게 각각 거래가의 1.5%씩 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1만 원짜리 집의 거래를 성사시킨 집주름은 중개수수료로 300원을 받아 그중 80원을 조합비로 제출하고 나면 220원을 챙길 수 있었다. 오늘날보다는 여전히 약간 높은 편이다.
[출처]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10. 짝퉁 파는 ‘안화상’(=貨商) - 도라지를 아교로 붙인 뒤… “인삼 사세요

조선 말기 서소문(소의문)의 모습.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짝퉁 시장이 있었으나 1914년 철거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도라지를 인삼으로, 까마귀 고기를 꿩고기로, 말고기를 소고기라고 속이는 자도 있고, 누룩에 술지게미를 섞고 메주에 팥을 섞는 자도 있다.…요즘은 소금이 귀한데 간신히 사고 보면 메밀가루를 섞었다.” (윤기·尹<의 ‘무명자집·無名子集’ 중 ‘협리한화·峽裏閒話’에서) 

조선 후기 서울에는 세 군데 큰 시장이 섰다. 운종가(종로2가), 배오개(종로5가), 소의문(서소문동)이다. 그중에서도 난전(亂廛)이 난립한 서소문 시장은 짝퉁의 온상이었다. 짝퉁을 파는 상인이 바로 ‘안화상(=貨商)’이다.

조선시대 작가 이옥(李鈺·1760∼1815)의 ‘시장 사기꾼에 관한 기록(市奸記)’에 실상이 나온다. 서울내기 이생은 짝퉁 상인에게 속는 어수룩한 시골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는 절대 속지 않을 것이라 자부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시장에서 아이와 상인이 다투는 모습을 봤다. 상인은 아이가 가져온 물건을 열 푼에 넘기라 하고, 아이는 그 돈으로는 못 준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상인이 “훔친 물건이 아니냐”며 의심하자 아이는 상인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달아났다. 이생이 아이의 물건을 보니 진귀한 황대모(黃玳瑁·바다거북 등껍질)였다. 이생은 아이를 달래어 물건을 열두 푼에 샀다. 알고 보니 물건은 염소 뿔로 만든 가짜였고, 아이는 상인의 아들이었다. 부자(父子)의 연극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귀한 약재와 골동품에 짝퉁이 많았고, 가장 심한 것은 인삼이었다.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인삼의 납품은 공인(貢人)이 담당했다. 인삼의 수요는 갈수록 늘었지만 화전(火田) 개간으로 인삼 산지는 줄고 있었다. 가격을 맞출 수 없었던 공인들은 도라지나 더덕을 아교로 붙이거나 인삼 껍데기에 족두리풀 가루를 채워 넣어 가짜 인삼을 만들었다. 

쓰시마 번주가 조선 상인에게 사들인 가짜 인삼을 에도 막부에 바쳤다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짝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669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민정중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어필을 구해 왔다. ‘비례부동(非禮不動·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네 글자였다. 송시열은 이 어필을 받아보고 감격하며 바위에 글을 새겼다. 그러나 이 어필 역시 진짜라고 보기 어렵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비례부동’을 새긴 자리에는 만동묘(萬東廟)가 들어섰다. 송시열의 문인들은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만동묘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을 상징하는 노론의 성지가 됐다.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숭명배청은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이 모두 의종 어필이 한 계기가 돼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