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직종(職種)들 Ⅲ
책쾌, 경인((中房), 전인(專人),떼꾼,응사(鷹師),산척’(山尺),
금화군(禁火軍),가객(歌客),필공(筆工,筆匠),재담꾼(才談꾼)
21. 헌책 중개인 ‘책쾌’(冊쾌) -‘맹자’ 한질 현 시세로 40만∼100만원 거래
폭마다 책으로 가득 찬 3단 서가를 그린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합강(合綱)’과 같은 판본의 책이라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 잡기(雜記), 소설(小說)을 따지지 말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해오기만 해주시오.” (유만주·흠영·欽英·1784년 11월 9일)
이덕무(1741∼1793)는 생활이 궁핍해지자 ‘맹자’ 한 질을 200전에 팔아 처자식을 먹였다. 그 소식을 들은 유득공은 ‘춘추좌전’으로 술을 사서 이덕무와 함께 마시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책은 책쾌(冊쾌)를 통해 거래했다. 책쾌는 책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다. 서쾌나 책거간꾼으로도 불렸다. 가난하거나 권세를 잃어 망해 가는 집안에서 흘러나온 책을 시세의 반값에 사서 제값에 되팔았다.
종이가 귀해 편지도 빈 공간 없이 쓰던 시절이니 책의 귀하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단권으로 엮인 ‘대학’이나 ‘중용’도 품질이 아주 좋은 옷감인 상면포 3∼4필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이는 2∼3마지기 논의 1년 소출과 맞먹었다. 이덕무가 ‘맹자’ 한 질 값으로 받은 200전(2000푼)은 지금으로 치면 40만∼100만 원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책은 권력을 가진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먼저 차지했다. 조정에서 받은 책과 연행(燕行)을 통해 수입한 책, 책쾌를 통해 구입한 책들이 그들의 개인 서고에 쌓여 갔다.
책쾌는 고객이 원하는 책이라면 희귀본이나 금서(禁書)라도 구할 수 있는 정보력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있어야 했다.
유명한 당대의 책쾌 조신선(曺神仙)은 책의 이름만 대면 저자와 권수, 출간연도와 판본을 줄줄 읊었다. 내용도 모르는 게 없었으며, 어떤 책이 누구로부터 어디로 팔려 갔는지도 알았다고 한다. 조신선은 이름과 사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100세가 넘도록 늙지 않아 신선으로 불렸다고 하니, 아마도 그를 닮은 자손이 책쾌의 업을 이어갔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유만주는 조신선의 단골로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명청대 책을 샀다. ‘사변’은 200푼, ‘패문운부’는 8000푼에 샀으며, ‘정씨전사’와 ‘김씨전서’는 4만 푼에 달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도 1776년과 1800년 두 차례 책쾌 조신선을 만난 적이 있다.
최한기(1803∼1877)는 책쾌가 하도 드나들어 집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데 돈을 너무 써서 말년에는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있던 집을 팔고 성문 밖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18세기 이후 책이 활발하게 수입되고, 조선에서 인쇄된 방각본과 한글 소설도 유행하면서 책쾌의 영업은 크게 융성했다.
영조 때 일어난 명기집략(明紀輯略·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 조선 왕을 모독하는 내용이 실림) 회수 사건은 그에 휘말려 죽은 책쾌가 100여 명에 달했다. 얼마나 많은 책쾌가 활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장에는 책쾌의 노고가 있었다.
[출처] :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 <조선잡사> / 동아일보
22. 주인 집안일 도맡은 ‘겸인’ - 권세가 집사, 관청 서리로 ‘낙하산 취업’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임 관리의 행차(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모습.
말에 탄 이들 중 오른쪽 두 명이 ‘중방(中房)’인데 이는 겸인의 다른 명칭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비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면서 집안일을 맡아보는 자를 겸인(겸人)이라 한다.”(최신·崔愼, ‘화양문견록·華陽聞見錄’에서)
조선시대에는 집사를 ‘겸인’이라고 했다. 청지기(廳直), 소사(小史), 통인(通引)이라고도 불렀다. 그들은 주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집안일을 도맡았다. 중인 신분이었으므로 노비가 하는 허드렛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겸인은 사무 보조 및 문서 작성에 능숙해 주인의 업무를 대신했다. 집안 사정을 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부 정보 입수도 빨랐기에 역모가 발각되면 관련자들의 겸인부터 잡아들였다.
주인의 병간호도 겸인의 일이었다. 채제공(蔡濟恭) 집안의 겸인 장덕량은 병으로 앓아누운 채제공의 부친을 위해 낮에는 음식을 떠먹이고 밤이면 발을 1000번씩 주물렀다. 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 장덕량은 여러 해 변함없이 주인의 병 수발을 들었다. 채제공은 아들인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겸인에게 월급을 주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겸인이 충성을 다한 건 취직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중앙관청의 서리는 대부분 권세가에서 낙하산으로 내려보낸 겸인이었다. 중앙관청 서리의 권력은 웬만한 양반보다 나았다. 관청 실무는 거의 서리가 맡았기 때문에 사대부 관원도 이들의 눈치를 봤다.
호남 선비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사복시 관원으로 임명되자 하숙집 주인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사복시의 서리와 하인은 모두 대갓집 청지기입니다. 관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점검하는데, 나리의 경우는 더욱 자세히 살필 것입니다. 그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는 게 좋습니다.” 설마 했던 황윤석은 서리들의 농간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겸인은 주인에게 관청에서 입수한 정보를 귀띔해 주거나 이익을 상납했다. 수입도 쏠쏠했다. 홍봉한의 겸인 노동지는 서리 노릇 3년 만에 평생 놀고먹을 재산을 마련했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겸인은 관청의 거대한 좀벌레”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겸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보다 ‘의리’였다. 홍동석(洪東錫)은 노론 사대신의 한 사람인 조태채의 겸인 노릇을 하다가 관청의 서리가 됐다. 소론 측 관원들이 그를 불러 조태채를 탄핵하는 상소의 글씨를 쓰라고 했다. 홍동석은 거부했다. “주인과 겸인은 아버지와 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매질해도 굴하지 않아 결국 다른 사람이 글씨를 썼다.
탄핵을 당한 조태채는 제주로 유배 가서 사약을 받게 됐다. 홍동석은 조태채의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형 집행을 늦춰달라며 금부도사에게 사정했다. 금부도사가 거절하자 홍동석은 사약 그릇을 엎어버렸다.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했다.
결국 한양에서 다시 사약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조태채는 아들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사사로운 의리를 위해 국가의 행정을 농락한 행위는 잘못이겠다.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23. 우편배달부 ‘전인’(專人) - 발걸음 빠르고 지리 손바닥 보듯 꿰뚫어
… ‘품삯’ 만만치 않아
입에는 장죽을 물고, 한 손에 우산을 든 조선 말기의 우편배달부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다 뒤져보니 겨우 70푼이 있는데, 전인(專人) 이놈은 두 냥이 아니면 안 가겠다고 하는구나. 네 어머니에게도 돈이 없고, 네 형도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조병덕(1800∼1870)의 편지에서
조선시대 편지는 주로 인편(人便)으로 전했다. 인편이 닿지 않으면 편지를 써두고 기다렸고, 일정과 행선지가 맞는 사람을 찾으면 밀린 편지를 한꺼번에 써서 전했다. 충청도에 살았던 조병덕은 서울에 사는 아들과 편지를 1700여 통이나 주고받았다. 그 역시 인편을 찾으면 밀린 편지를 급히 썼다. 많은 편지를 몰아 밤늦도록 쓰느라 눈병이 악화돼 괴롭다고도 썼다. 그만큼 때맞춰 인편을 찾아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품삯을 받고 편지 배달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전문 배달꾼도 있었다. 이들은 전인, 전족(專足), 전팽(專K)이라고 불렸다. 전인은 그 나름대로의 전문성이 필요했다. 주소가 없던 시대에 사는 곳과 이름만 듣고 편지를 전달했기 때문에 수취인이 사는 곳 지리를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어야 했다. 물어물어 수취인을 찾아야 하니 말귀도 밝아야 했고, 먼 길을 일정에 맞춰 다녀갈 빠른 발걸음도 필요했다.
노잣돈과 품삯은 일정과 거리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먼 거리를 급하게 갈 전인의 품삯은 만만치 않았다.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 방자를 불러 “10냥을 주고 솜옷도 한 벌 해줄 테니 이몽룡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다. 방자를 전인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조선 후기 서울 임금노동자 하루 품삯이 25푼 남짓이었으니, 춘향이는 40일 치 임금과 옷 한 벌을 품삯으로 제시했던 셈이다.
원하는 지역을 원하는 일정에 갈 수 있는 전인을 딱 맞게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인을 주선하던 중개인도 있었다. 급히 보낼 편지가 있던 조병덕은 인편이 어려워지자 서업동이라는 중개인을 만났다. 서업동은 행선지, 날짜, 노잣돈에 맞춰 송금돌이라는 이름의 전인을 주선했다.
중개인 없이 전인을 직접 구하면 흥정이 쉽지 않았다. 전인이 높은 가격을 부르면 고리로 빚을 내기도 했다. 70푼밖에 없던 조병덕은 두 냥을 마련하려고 빚까지 얻었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비용 일부를 수신자가 착불로 부담했다.
민가에서 전인이 활약했다면 궁은 ‘글월비자’를 두었다. 글월비자는 색장나인(色掌內人·시중을 들던 궁녀) 밑에서 심부름을 담당했다. 그들은 전인이 드나들지 못하는 궁 안팎에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고, 허리에 검은 띠를 매어 글월비자임을 표시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 정조를 두고 “노모 마음을 헤아려 서울 성내 거둥이라도 궁을 떠나시면 안부를 묻는 편지가 끊이질 않으시더라”라고 썼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수시로 보낸 편지도 글월비자가 전달했을 것이다.
[출처] :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선잡사> / 동아일보
24. ‘떼꾼’ - 공물 목재 물길로 옮겨… 한번 작업에 군수월급 3배
1930년대 뗏목 형태로 압록강을 흘러 내려가는 목재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놓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정선 아리랑’에서
조선 초부터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목재를 공물로 바쳤다. 전국 각지의 나무가 서울로 모였다. 당시에는 물길이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고, 목재도 뗏목으로 엮어 물길을 따라 보냈다. ‘떼꾼’은 뗏목을 타고 나무를 옮기는 일을 했다. ‘세종실록’에는 강원도 백성들 중에 떼꾼으로 업을 삼은 이가 많다고 나온다.
가을에 베어놓고 눈 녹으면 옮겨… 일 위험한 만큼 보상도 커
그러나 강 연안에 사는 모리배들이 공갈로 나무를 빼앗거나 대금 지급을 미루고 헐값에 강매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탐관오리들은 강원도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 정도로 남벌을 일삼았고,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세금을 거두기도 했다. 세조와 성종 때는 나라에서 쓸 나무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적인 벌채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탐관오리는 이 명목으로 떼꾼들의 나무를 빼앗거나, 떼꾼을 가두어 매를 치고 속전(贖錢)까지 요구하며 괴롭혔다.
떼꾼의 작업은 가을에 나무를 12자(약 4m) 길이로 베어두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봄눈이 녹아 길이 미끄러워지면 이를 산 아래의 강어귀로 내려보냈다. 떼는 12∼15동가리로 엮어 기차와 같은 모양으로 연결했다. 보통 30m가 넘었는데 이것을 한 바닥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한 바닥의 떼를 운행했는데, 앞 사공은 물길을 잘 알아야 해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맡았고, 뒤쪽 사공은 키를 잡아야 하므로 힘 좋은 사람이 맡았다.
떼는 얼음이 녹는 4월경부터 내려보냈다. 출발할 때 떼꾼에게 얼마 분량의 나무가 내려간다는 도록을 적어주고, 나무를 분실하면 배상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일이 많아서 몇 동가리 정도의 손실은 눈감아 주었다.
물이 많을 때는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었지만 물이 적으면 한 달이 걸리기도 했다. 문제는 곳곳에 숨어 있는 돌부리와 여울이었다. 돌부리에 걸리면 떼를 묶었던 부분이 찢어져 나무를 잃어버리거나 물살이 센 여울에 휘말리면 떼꾼도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이었던 만큼 보상도 컸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동강에서 한강 일대는 떼꾼으로 넘쳐났다. 당시 군수 월급이 5원이었는데 한 번 떼를 타면 15원을 받았다. 많으면 1년에 7번 넘게 왕복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떼돈’을 벌 기회였다.
남한강 가에 즐비한 주막에서는 떼꾼이 지날 때마다 술과 노래로 유혹했다. 큰돈을 벌어 씀씀이가 헤퍼진 떼꾼들이 주색에 빠지거나 노름판에서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강에 다리가 놓이고 보가 설치되면서 떼꾼은 점점 줄었다. 1960년대 말 팔당댐이 건설돼 물길이 막히자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떼꾼이 즐겨 부르던 아리랑만 남아 있다.
[출처] :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조선잡사> / 동아일보
25. 매사냥꾼 ‘응사’ (鷹師)- 세금-부역 대신 왕실에 ‘꿩’상납… 숙종땐 1800명 등록
김홍도의 그림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
호탕한 귀인의 매사냥을 주제로 매가 꿩을 잡아온 모습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제공
“매사냥꾼은 팔뚝에 매를 얹고 산을 오르고, 몰이꾼은 개를 몰고 숲을 누비네. 꿩이 깍깍 울며 산모퉁이로 날아가니, 매가 회오리바람처럼 잽싸게 날아오네.” ―정약용, ‘和崔斯文游獵篇(최 선비가 사냥을 보고 지은 시에 답하다)’에서
옛날 매를 길들여 꿩을 잡는 이들을 매사냥꾼, 곧 응사(鷹師)라고 했다. 매사냥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구려 벽화에 매사냥 그림이 있고,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진평왕은 매사냥 마니아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충렬왕은 응방도감(鷹坊都監)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매사냥꾼을 육성했다. 하지만 폐단이 만만치 않았다. 매사냥꾼들은 매를 뒤쫓느라 논밭을 짓밟고, 달아난 매를 찾는다며 민가에 난입했다. 응방을 폐지하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응방은 폐지와 복구를 거듭하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태조와 태종도 매사냥을 즐겼다. 세종대왕조차 가끔 매사냥에 나섰다. 신하들이 그만두라고 건의하자 세종은 역정을 냈다. “신하들도 매를 많이 기르는데, 임금은 새 한 마리도 못 기르는가?” 왕실의 응방은 역시 매사냥에 탐닉했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서야 비로소 없어졌다.
매사냥꾼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매사냥꾼들은 응사계(鷹師契)라는 조합을 만들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왕실에 꿩고기를 바쳤다. 꿩을 길러서 바치기도 하고, 기른 것도 다 떨어지면 닭을 바쳤다. 숙종 때 나라에 등록된 매사냥꾼만 1800명이었다. 민간에서도 매사냥이 성행했다. 길들인 매는 비싸게 팔렸다.
고려시대 문인 이조년의 ‘응골방(鷹골方)’, 조선 안평대군의 ‘고본응골방(古本鷹골方)’ 등은 우리 매사냥 문화의 수준을 보여준다. 매 사육 및 훈련 방법을 설명한 책도 있다.
먼저 산 닭을 미끼로 매를 그물로 잡는다. 잡은 매를 어두운 방에 두고 수십 일 동안 천천히 길들인다. 손에 든 먹이를 받아먹게 하면서 부르면 오게 만든다. 매가 사람에게 친숙해지면 슬슬 사냥을 나간다. 날이 덥거나 따뜻해도 안 되고, 초목이 무성한 계절에도 안 된다. 봄에는 오전, 가을과 겨울에는 오후, 대체로 초저녁이 좋다.
굶주리면 사냥을 못 하고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리니, 체중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 병들면 약을 지어 먹이고, 추우면 고기를 따뜻하게 데워 먹여야 한다. 상전이 따로 없다. 이렇게 정성껏 길러도 오래 쓰지는 못한다. 길어야 3, 4년, 짧게는 1, 2년 안에 대부분 죽거나 달아난다.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매 기르는 사람 이야기(養鷹者說)에는 매 한 마리를 무려 35년이나 기른 사람이 나온다. 비결을 물었더니, 바람이 거세면 높이 날아가 버리고 날이 저물면 집 생각이 나서 달아나니 날리지 말라고 했다. 무엇보다 매가 지칠 만큼 자주 사냥을 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꿩 세 마리만 잡으면 만족했더니 매가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 조선잡사> / 동아일보
26. 조총 사냥꾼 ‘산척’(山尺) - 호랑이 가죽 원산서만 한 해 500장 거래
서울 외곽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조선 말기 호랑이 사냥꾼들.
영국인 허버트 폰팅이 촬영했다. 동아일보DB
“변방 백성 중에 조총을 잘 쏘는 자를 봤습니다. 호랑이가 3, 4간(1간은 약 1.8m 남짓 거리)쯤에 있을 때 비로소 총을 쏘는데 명중시키지 못하는 예가 없으니 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724년 10월 15일 기사에서)
조선에서 중요하게 여긴 두 가지 야생동물이 있다. 꿩과 호랑이다. 꿩고기는 종묘 제례에 빠질 수 없었다. 임금 생일이나 큰 명절에도 생치(生雉·살아있는 꿩)를 30마리씩 바쳤다. 호랑이는 퇴치의 대상이었다. 영조 30년(1754년) 실록에는 경기도에서만 한 달 동안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나온다.
꿩고기는 응사(鷹師)라는 매사냥꾼을 동원해 마련했고, 꿩을 산 채로 잡는 일은 망패(網牌)가 나섰다. 망패는 생포를 주로 하는 포획 전문 사냥꾼으로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 꿩이나 사슴을 상처 없이 잡았다.
민가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산척(山尺)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보급되면서 산척 대부분은 활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이들을 산행포수(山行砲手)라 불렀고 이후로 ‘사냥꾼’이라고 하면 으레 산행포수를 지칭했다.
평안도 강계의 산행포수가 유명했다. 호랑이 사냥꾼을 산척 중 으뜸으로 쳤는데, 강계 지역에 호랑이를 잡는 산행포수가 많았다. 개항 직후 함경도 원산항에서만 한 해 호랑이 가죽 500장이 거래되었다고 하니, 산행포수들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산척의 사격술은 외국인 눈에는 묘기로 비쳤다. 고종의 고문으로 일한 윌리엄 샌즈는 ‘조선비망록’에서 산척을 “탁월한 숲 속의 사람”이라며 “화승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구식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나 곰 가까이 다가가 단발로 급소를 저격했다”고 기록했다.
산간에 폭설이 내리면 짐승이나 산척이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때 산척은 설피(雪皮·덧신)를 신고 설마(雪馬·썰매)를 탔다. 설마는 스키와 똑같은 모양으로, 타면 짐승을 잽싸게 뒤쫓을 수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설마는 밑바닥에 기름을 칠해 속도를 높였으며 빠르기가 나는 듯했다고 적었다.
산척은 사냥 규율이 엄격했다. 산에 들어가기 전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한 집에 조문도 가지 않았다. 몸을 청결하게 한 뒤 입산해 짐승을 잡으면 반드시 혀나 귀 혹은 심장을 산신에게 바쳤다. 노루나 돼지를 잡으면 바로 귀와 혀를 잘라 잎에 싸 젓가락과 함께 높은 곳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1907년 9월 3일 ‘총포화약류단속법’이 시행됐다. 그해 11월까지 구식 무기인 화승총, 칼과 창이 9만9747점, 신식 소총이 3766정 압수됐다. 압수한 무기 가운데 화약과 탄약이 36만4366근이나 됐다. 총류 대부분이 산척의 것이었다.
총을 빼앗긴 산척은 다른 생업을 찾거나 간도로 이주했다. 국경을 넘은 산척 상당수가 무장독립군에 투신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 장군 역시 조선의 사냥꾼, 산척이었다.
[출처] :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조선잡사> / 동아일보
27. 금화도감 소속 소방수 ‘금화군’(禁火軍) - 불 끄러 왔다는 ‘신패’차고 현장 출동
1904년 경운궁 화재 모습. 중화전 주변 전각 대부분이 내려앉았고, 일본 군인들이 건물 잔해를 뒤지고 있다. ‘디 일러스트레이션(The Illustration)’에 실린 사진이다. N 프랜시스 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성 안에 금화(禁火)의 법을 담당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이 부주의로 화재를 일으키면 집이 타버려 재산이 탕진되오니 그들의 생명이 애석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1426년 2월 26일 기사 중)
1426년(세종 8년) 2월 15일 인순부(동궁에 딸려 있던 관아)에 살던 노비의 집에서 일어난 화재가 거센 바람을 타고 민가와 관아 2000여 채를 태웠다. 이 사고로 32명이 숨지고,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당시 한양에 있던 가옥 1만8000여 채 가운데 10분의 1이 넘게 불타버린 큰 화재였다.
나무로 지은 데다 지붕을 지푸라기로 엮어 덮은 초가(草家)가 대부분이었으니 불이 한번 붙으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불이야!’ 소리에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불을 끄는 데 정신을 쏟는 틈을 타 좀도둑이 일부러 불을 지르기도 했다. 오후 10시∼오전 4시 통행을 금지한 인정(人定) 제도는 밤에 방화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르자 세종은 조선 최초의 소방기구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한다. 여기에 금화군(禁火軍) 또는 멸화군(滅火軍)이라 불리는 전문 소방수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종루(鐘樓·종로네거리 일대)에서 화재를 감시했고, 방화벽을 설치하거나 각종 화재진압도구를 준비했다.
일정 구역마다 물을 담은 항아리를 비치하고 우물을 파도록 했으며,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도로를 넓히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는 등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애썼다.
화재가 일어나면 금화군은 불을 끄러 왔다는 신패(信牌)를 차고, 물을 떠오는 역할을 맡은 급수비자(汲水婢子)와 함께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출동했다. 화재 진압 중에는 계속 종을 울렸고 불이 난 곳 근처에 높은 깃발을 세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금화군은 밧줄과 긴 사다리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쇠갈고리로 지붕의 기와나 짚을 걷어냈다. 도끼로 기둥을 찍어 건물을 무너뜨렸다. 목조주택은 복구할 수가 없었기에 화재를 진압하기보다는 불이 난 건물을 무너뜨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오늘날처럼 물을 직접 뿌리는 수총기(水銃器)는 1723년(경종 3년)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금화도감은 성문의 관리 업무를 추가로 맡아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개편되지만 얼마 못 가 필요 없는 비용과 인원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혁파됐고 소방업무는 한성부에서 담당했다.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警務使)가 소방을 맡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소방서가 생겨났다.
[출처] :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 <조선잡사> / 동아일보
28. 전업 가수 ‘가객’ (歌客)- 거리 공연으로 쌀 한가마 값 벌기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 ‘상춘야흥(賞春野興)’. 간송미술관 제공
“눈을 찔러 장님 된 악사 사광이던가, 동방의 가곡 스물네 소리를 모두 통달했다네. 가득 모여 100전 되면 술에 취해서 가니, 어찌 반드시 서평군을 부러워하랴.”―조수삼의 ‘추재기이(秋齋紀異)’ 중 ‘손고사(孫고師·맹인 가수 손 씨)’ 일부
전통시대 가곡, 시조, 가사 따위를 노래로 부르는 전업 가수를 가객(歌客)이라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가비(歌婢)나 가동(歌童)을 두고 노래를 즐기기도 했다. 직업적인 가객은 17세기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8세기 전후로 전성기를 맞았다.
김천택의 시조집 ‘청구영언’에는 가객으로 명성이 높았던 여항육인(閭巷六人)이 등장한다. 장현 주의정 김삼현 김성기 김유기 김천택이다. ‘해동가요’에는 전문 가수들인 ‘고금 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 56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편시조 명창과 판소리 명창을 비롯해 40여 명의 기녀를 소개했다.
가객의 일상은 이옥이 지은 ‘가자송실솔전(歌者宋실솔傳)’에 자세히 나온다. 송실솔은 서울에 사는 가객이었다. 실솔곡(실솔曲)이라는 노래를 잘 불러서 ‘실솔’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폭포 아래, 산꼭대기를 찾아다니며 솜씨를 갈고닦은 그는 마침내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어쩌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모두 귀를 기울이고 공중을 바라보되 그가 누구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서평군 이요(李橈)는 음악을 담당하는 노비만 10여 명을 두고, 가무에 뛰어난 여성만 첩으로 삼았다.
성대중이 지은 ‘해총(海叢)’에는 서울의 3대 가객 중 한 사람으로 꼽힌 유송년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송년은 한량으로 지내면서 노래가 좋아 가산을 탕진했는데, 주로 평안북도 선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명 가객 계함장(桂含章)을 데리고 다니며 관서지방 일대를 유람했다.
가객의 노래는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이 주로 향유했다. 공연료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18세기 한양의 대표적인 ‘버스커(busker·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였던 손고사의 사례에서 생계형 가수의 수입을 추정할 뿐이다. 그
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면 사람들이 던지는 엽전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열 냥 정도가 모이면 곧 일어나 떠나곤 했다. 열 냥이면 당시 쌀 한 가마 값이다. 부잣집이나 왕실 행사의 공연료 역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객의 노래는 사치스러운 문화상품이었던 것이다.
[출처] : 강문종 제주대 교수 : <조선잡사> / 동아일보
29. 붓 만드는 ‘필공’(筆工,筆匠)
- 허균의 ‘황모필’ 써본 명나라 사신 “천하제일의 붓이로다”
필공이 붓을 만드는 모습을 담은 풍속화.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한 기산 김준근의 그림을 모사해 복원한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경상도에 붓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다. 몇 해 전 두세 자루를 얻어 썼는데, 국내에서 으뜸일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최고의 서예가 김정희는 경상도의 이름 없는 필공(筆工)이 만든 붓을 천하제일로 꼽았다. 필공은 붓 만드는 사람으로 필장(筆匠)이라고도 한다. 경상도 필장이 모처럼 서울에 올라오자 추사는 명필로 이름난 친구 심희순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서둘러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허균(1569∼1618)에게 중국제 붓 다섯 자루를 주었다. 허균이 써 보니 전부 엉망이었다. 토끼털 붓은 너무 뻣뻣하고 염소털 붓은 너무 물렀다. 허균이 자기가 쓰던 붓을 주자 주지번은 깜짝 놀랐다. “이것이 천하제일의 붓이다(是天下第一品也).” 주지번은 조선 붓 수천 자루를 사서 돌아갔다.
경상도 필장이 만든 붓도, 허균이 준 붓도 모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다. 붓은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청서필(靑鼠筆·다람쥐털 붓), 양호필(羊毫筆·염소털 붓), 토모필(토毛筆·토끼털 붓), 장액필(獐腋筆·노루 겨드랑이털 붓), 구모필(狗毛筆·개털 붓), 서수필(鼠鬚筆·쥐 수염 붓), 초미필(貂尾筆·담비 꼬리털 붓) 등이다.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황모필을 따라오지 못했다.
황모필은 명나라 조정의 백서 ‘명회전(明會典)’에 조선의 조공품으로 기록된 명품이다. 조선 특산품이지만 원재료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일종의 가공무역이다. 조선에서도 족제비가 잡히지만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실록에 따르면 1622년 조정에서 한 달에 필요한 황모필이 무려 3000자루였다. 조공품과 하사품을 모두 합친 수량일 것이다.
붓 제작은 공조(工曹)의 필공이 맡았다. ‘성호사설’에는 억센 털로 심지를 만들고 부드러운 털로 감싼 다음, 다시 조금 억센 털로 겉을 둘러싸야 좋은 붓이 된다고 나온다. 이러한 ‘털 블렌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공의 일은 고됐다. 할당량을 채우기도 만만치 않은데 아전들은 붓을 뇌물로 요구했고, 양반들은 필공을 제 종 부리듯 했다. 삯도 주지 않으면서 붓을 만들게 했다. 무리한 요구를 견디지 못한 필공이 목을 매거나 손가락을 잘랐을 뿐 아니라 대궐 안에서 제 목을 찌르는 사건도 일어났다. 기술이 있다고 대접받기는커녕 갈취의 표적이 됐던 것이다.
황모필은 개당 4, 5전(錢)이었는데, 납품가는 2, 3전에 불과했다. 필공은 살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개털을 속에 넣고 겉만 족제비털로 살짝 덮은 가짜 황모필이 판을 쳤다. 선조가 진상된 황모필을 해체했더니 속에 싸구려 털을 넣은 가짜였다. 노발대발한 선조는 필공을 처벌했다.
부역을 견디지 못한 필공은 민간으로 흩어져 조선 후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활동했다. 사람들은 붓 만들 재료를 준비해 놓고 필공을 집으로 데려와 붓을 만들게 했다. 필공은 떠돌이 신세였지만 비로소 기술자 대접을 받았다.
[출처] :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조선잡사> / 동아일보
30. <재담꾼(才談)> - 천의 얼굴로 풍자… 스탠딩 코미디언
조선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소리하는 모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함북간이라는 자가 있다. 피리도 제법 불고 이야기와 광대놀이를 잘했다. 남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기만 하면 바로 흉내 냈는데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입을 오므려 각종 피리 소리를 냈는데 소리가 웅장해 몇 리까지 퍼졌다.”―성현, ‘용재총화’에서
조선시대, 풍자를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연예술인 재담(才談)은 귀천을 떠나 큰 인기를 누렸다. 고담, 덕담, 신소리라고도 했다. 재담꾼은 무대 장치나 분장 없이 천의 얼굴을 연기했고, 그에 더해 구기(口技)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구기는 온갖 소리를 흉내 내는 기예다. 재담꾼은 조선의 스탠딩 코미디언인 셈이다.
재담꾼의 실력은 외국인도 놀라게 했다. 1883년 12월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고종의 소개로 화계사에서 재담꾼의 공연을 관람했다. 로웰은 “배우는 단번에 호랑이로 변했다. 으르렁대는 포효는 진짜 호랑이조차 따라가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고 회고했다.
조선 최고 재담꾼으로는 정조 때 활약했던 김중진이 꼽힌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가 몽땅 빠졌던 터라 늘 입을 오물거렸다. 그래서 ‘외무릅’ ‘오물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세 선비 소원담’을 잘했다. 재치가 남달라서 즉흥 재담으로 묘미를 살렸다고 한다.
‘청구야담’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란 이야기가 나온다. 구두쇠로 이름난 ‘종실(宗室·왕실의 인척) 노인’이 오물음(김중진)을 불렀다. 김중진은 그 앞에서 유명 자린고비 이동지가 ‘저승에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손을 관 밖으로 빼놓으라고 유언했던 이야기를 공연했다. 종실 노인은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줬다고 한다.
김중진은 관중의 면면, 공연 장소, 분위기에 맞춰 이야기를 펼치면서도 세상을 풍자했고 교훈과 감동을 줬다. 조선 후기 문인 김희령은 ‘소은고(素隱稿)’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했다”며 그의 이야기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재담은 일제강점기 박춘재 명창이 우리 전통 소리에 녹여내 ‘재담소리’로 거듭났다.
[출처] :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조선잡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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