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군 혼군 용군, 혼용무도
문란한 지도자의 종류도 한가지가 아니다. 폭군, 혼군(昏君 혹은 暗君), 용군(庸君)으로 나눈다.
율곡 이이는 ‘임금의 도리(君道)를 논’하면서 이렇게 구별했다. 즉 폭군이란 “욕심이 지나치고 바깥의 유혹에 빠져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아 충언을 물리치면서 자기만 성스러운체 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군(혹은 암군)은?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지만 총명하지 못해 현명한 자 대신 간사 무능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기용해서 패망하는 군주”라는 것이다. 용군은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 구태만 되풀이 하다가 나라를 망치는 지도자”다.(<율곡전서> ‘잡저·동호문답’)
임금의 도리를 분류한 율곡 이이의 시문집 <율곡전서>
■“고기죽 먹으면 되잖아”
이제 대입해 보자. 재능은 탁월했으나 여인(말희·달기)의 유혹에 빠져 충신(종고·기자 등)의 말을 듣지 않고 폭정을 휘두른 하 걸왕과 상 주왕이 폭군의 대명사이다.
혼군은 누구일까. 진(秦) 2세 호해(재위 기원전 210~207)가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아방궁 공사를 만류하는 대신들에게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황제가 됐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일축했다. 사마천은 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혀를 찼다. 진(晋)혜제(290~307)는 어떤가.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자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거냐(何不食肉미)”고 고개를 갸웃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영제(168~189)는 용군에 속할 것이다. ‘십상시’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영제는 유력한 환관이던 장양과 조충을 ‘나의 아버지 장상시, 나의 어머니 조상시’라 추켜세웠다.
조선의 연산군은 어떨까. 하필이면 호해를 롤모델로 삼아 ‘임금 마음대로 살겠다’고 했고, 간신 유자광과 임사홍을 믿었으니 굳이 분류하자면 혼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폭군의 오명을 써도 되겠다.
이이의 분류법에 따르면 3자 간 경계는 모호하지만 미묘한 차이도 감지할 수 있다. 혼군과 용군의 경우 지도자의 무능에 강조점을 둔다면, 폭군은 독선과 불통에 따른 폭정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에서는 셋다 도긴개긴이지만….
■격양가의 시대는 없지만…
그러니 맹자는 이런 무능하고 제 멋대로 임금의 정치는 곧 혁명을 부른다고 설파했다.
“못을 위하여 고기를 몰아 주는 것은 수달이다. 나무 숲을 위하여 참새를 몰아 주는 것은 새매다. 탕무를 위하여 백성을 몰아 준 자는 걸주이다.(爲淵驅魚者獺也 爲叢驅爵者鸇也 爲湯武驅民者 桀與紂也)” (<맹자> ‘이루 상’)
무슨 말이냐면 폭군들인 하 걸왕과 상 주왕의 실정은 곧 민심의 이반을 낳았고, 그 흩어진 민심은 새 주인인 상 탕왕과 주 무왕에게 옮겨갔다는 뜻이다. 상나라 탕왕이 혁명을 일으켜 하나라 걸왕을,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각각 정벌한 것을 지칭한다.
정치의 지향점은 물론 요순 시대일 것이다. 요순시대가 어떤 때인가.
“요임금 때 50살 된 이가 길에서 땅을 두드리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를 본 어떤 이가 ‘위대하도다. 요 임금의 덕이요.’라고 운을 떼자 노래를 부르던 이가 말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밥 먹을 뿐이다. 임금님의 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논형> ‘예증’)
이것이 ‘격양가’의 유래이다. 즉 임금이 누구인지 몰라도 잘먹고, 잘사는 이상사회가 바로 요순시대이며, 그런 정치를 한 이가 바로 성군(聖君)인 것이다. 그러나 요순의 정치를 따라가기는 언감생심이 아닌가. 역대 군주들은 요순과 같은 성군은 아니더라도 성군을 지향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컨대 이이는 문란한 정치를 분류법은 언급하면서, 한편으로는 ‘잘하는 정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잘하는 정치에도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임금의 재지(才智)가 출중해서 호걸을 잘 부리면 잘하는 정치가 되고, 재지는 좀 부족하더라도 어진 이에게 맡긴다 해도 잘하는 정치가 된다.” (<율곡전서> ‘동호문답’)
이이는 전자를 격양가가 울려퍼진 태평성대의 성군시대라 했다. 그렇다면 후자는? 이이는 상나라 태갑과 주나라 성왕을 후자의 대표주자로 꼽았다. 즉 두 사람은 군주의 자질은 모자랐지만 그야말로 현명한 신하를 발탁함으로써 성군에 버금가는 명군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태갑과 성왕은 부족했다. 만약 성스러운 신하(聖臣)의 보좌가 없었다면 나라가 전복됐을 것이다. 그런데 태갑은 이윤(伊尹)에게 정사를 맡기고, 성왕은 주공(周公)에게 정사를 맡겼다. 이로서 덕(德)을 기르고 학업을 닦아 대업(大業)을 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신하에게 정사를 맡겨 왕도를 행한 자이다.”
이이는 또 후자의 예로 춘추 5패 중 한사람인 진 문공과 제 환공, 한 고조, 그리고 당 태종, 송 태조 등을 예로 들었다. 그야말로 귀신의 경지인 성군은 못되더라도 ‘사람만 잘 쓰면’ 명군의 대열까지는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랬으니 순자는 “현명한 군주는 휼륭한 인재를 구하는 일을 서두르고, 우매한 군주(암군)는 세를 불리는 일을 서두른다(明主急得其人 而闇主急得其勢)” (<순자> ‘군도’)고 했다. 이 순간 되새겨봐야 할 구절이 아닌가.
■“황제는 야위지만 백성은 살찐다”
좋은 신하의 쓴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려주는 당나라 현종의 일화도 있다. 즉 당나라 현종은 처음엔 명군이었다가, 훗날 혼군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호화잔치가 열리면 현종은 늘 안절부절 못해 ‘이 일은 한휴(韓休·673~740)가 아느냐’고 물었다.
한휴의 사나운 간언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종이 ‘이 일을 한휴가 아느냐’고 묻는 그 순간, 이미 한휴의 매서운 상소문이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현종의 좌우 신하들이 한휴를 겨냥해서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휴가 정승이 된 이후에 폐하께서 전보다 사뭇 여위셨습니다.”
그러하 현종은 한탄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단다.
“나는 비록 여위었지만 천하 백성은 살쪘구나.’
이 한휴의 일화는 연산군 시절인 1495년(연산군 1년) 손순효가 다름아닌 연산군에게 감히 전해올린 상소문이다. 당시 판중추부사 손순효는 바른 말을 했던 대간들이 잡혀가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다른 사람들은 입을 모두 닫고 있는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연산군일기>는 “다른 재상들이 입을 닫고 있는 가운데 손순효의 상소가 올라오자 모두들 시원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손순효는 언로(言路)를 막으면 안된다고 감히 아뢰면서 “전하께서는 요순 같은 성군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 이하의 임금이 되겠습니까”라고 다그쳤다.
그러고보면 연산군에게는 그나마 이런 ‘목숨을 내놓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이 있기는 했다. 그 말을 임금이 잘 들었다면 혼군이니 폭군이니 하는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하기야 <주역>의 64괘 중에는 이런 괘가 있다. 명이(明夷)라는 괘인데, 이것은 암군(暗君)이 위에 있으면 밝은 신하가 해침을 당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하라도 임금을 잘못 만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불현듯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한비자> ‘관행(觀行)’이다. 명군과 암군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는 것으로 부족분을 채우고, 짧은 것은 긴 것으로 이어나가는 사람을 현명한 임금이라 한다.(以有餘補不足 以長續短之謂明君)”
이것이 어지러운 시대, 지도자의 역할이 아닐까 한다. 교수신문이 올 한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다. ‘혼군와 용군’을 뜻하는 ‘혼용’과 <논어>의 ‘천하무도’ 구절의 ‘무도(無道)’를 뽑아 만든 성어라 한다. 지금 이 순간 교수들이 뽑은 ‘혼군 용군’의 용어를 이이의 분류법에 대입해보라.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 여적>-폭군 혼군 용군, 혼용무도 / 경향신문
2. 연산군에게 직언한 신하도 있었다
율곡 이이는 <율곡전서>에서 폭군과 용군, 혼군의 차이를 설명했다
통칭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신하를 일컬어 ‘간신(姦臣)’이라 한다. 하지만 간신이라고 해서 다 같은 간신이 아니다. 전한의 대학자인 유향(기원전 77~6)은 간신 및 아첨꾼의 특징을 6가지로 일컬었다. 이것이 유향의 육사론(六邪論)이다.
“녹봉만 기다리고 사사로운 이익만 취하며 자리만 채우는 신하는 구신(具臣)이다.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말과 행동이 다 옳다고 하면서 영합하는 신하는 유신(諛臣)이다. 음흉하지만 겉으로 근면한 척 좋은 말과 표정을 지어 임금의 임용기준을 흐리게 만들고 신상필벌의 명령도 실행되지 않게 하는 자는 간신(姦臣)이다.
지혜와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안으로는 골육의 정을 이간질하고, 밖으로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는 참신(讒臣)이다. 권세를 갖고 당파를 지어 자기 세력을 더욱 쌓아 위세를 높이려는 자는 적신(賊臣)이다.”
그러면서 유향은 가장 간신·아첨배 가운데서 가장 악질을 ‘망국신(亡國臣)’이라 했다.
“사악한 도로 임금에 아첨해서 나쁜 길로 이끈다. 임금의 눈과 귀를 막아 듣기좋은 소리만 하고 임금의 없으면 말이 변한다. 흑백을 가릴 줄 모르고 시비가 분명치 않다. 국내외 백성들이 임금의 죄악을 모조리 파악하게 만드는 신하가 바로 망국신이다.”
■간신과 망국신
굳이 중국의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겠다. 고려말 학자인 이곡(1298~1351)은 신하를 6가지로 나누었다. 이곡은 일단 “임금노릇 하기 어렵고, 신하노릇도 하기 어렵다(爲君難 爲臣不易)”(논어 자로)를 인용했다.
“신하란 중신(重臣)과 권신(權臣)이 있고, 충신(忠臣)ㆍ직신(直臣)과 간신(姦臣)ㆍ사신(邪臣)이 있다.”
중신이 어떤 신하인가. 임금이 어리고 위태로운데 절조를 유지하고 대의를 주장한다. 자기 몸은 초개와 같이 버린다. 덕분에 나라가 안정을 찾아간다.
그러하면 권신은 누구인가. 세력에 기대 사리사욕을 채운다. 사람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지만 감히 말을 못한다.
충신은 나랏일만 생각한다. 자기 집안일은 잊으며, 공적인 일만 생각할 뿐 사적인 일은 잊는다. 임금이 우환을 당하면 자신은 오욕을 감수한다. 치욕을 당하면 자신은 목숨을 버린다. 자기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의리만을 따른다.
간신은 누구인가. 번지르르한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으로 흉계를 꾸민다. 속임수를 서서 임금을 기만하고 백성을 우롱한다. 이익은 자기가 차지하고 원망은 임금에게 돌린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임금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빠진다. 뒤에서 떠밀어 구덩이에 빠뜨리고는 돌을 또 굴려서 떨어뜨린다. 자기가 직접 칼을 들어 해치지는 않지만 남을 빌려 죽인다. 이런 자는 역사가의 평을 빠져 나오지 못한다.
직신은 어떤 사람인가. 임금의 과오를 극력 간쟁하고, 허물이 있으면 숨김없이 직언한다.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올곧은 발언을 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사신(邪臣)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묘하게 영합하고 불법으로 결탁한다. 종기의 고름을 빨고 치질을 핥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결국 망국의 화란이 일어난다. 아첨하여 총애를 구하고 탐욕을 부리며 부정을 일삼는 자는 모두 간사한 무리다.
■폭군과 혼군 사이
마찬가지로 문란한 지도자의 종류도 한가지가 아니다. 폭군, 혼군(昏君 혹은 暗君), 용군(庸君)으로 나눈다.
율곡 이이는 ‘임금의 도리(君道)를 논’하면서 이렇게 구별했다. 즉 폭군이란 “욕심이 지나치고 바깥의 유혹에 빠져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아 충언을 물리치면서 자기만 성스러운체 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군(혹은 암군)은 어떤 사람인가.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지만 총명하지 못해 현명한 자 대신 간사 무능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기용해서 패망하는 군주”라는 것이다. 용군은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 구태만 되풀이 하다가 나라를 망치는 지도자다.” (<율곡전서> ‘잡저·동호문답’)
대입해 보자. 재능은 탁월했으나 여인(말희·달기)의 유혹에 빠져 충신(종고·기자 등)의 말을 듣지 않고 폭정을 휘두른 하 걸왕과 상 주왕이 폭군의 대명사이다.
혼군은 누구일까. 진(秦) 2세 호해(재위 기원전 210~207)가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아방궁 공사를 만류하는 대신들에게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황제가 됐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일축했다.
사마천은 이를 두고 ‘인두축명(人頭畜鳴),’ 즉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고 혀를 찼다. 진(晋)혜제(290~307)는 어떤가. 큰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죽자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거냐(何不食肉미)”고 고개를 갸웃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조선의 연산군은 어떨까. 하필이면 호해를 롤모델로 삼아 ‘임금 마음대로 살겠다’고 했고, 간신 유자광과 임사홍을 믿었으니 굳이 분류하자면 혼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폭군의 오명을 써도 되겠다.
이이의 분류법에 따르면 3자 간 경계는 모호하지만 미묘한 차이도 감지할 수 있다. 혼군과 용군의 경우 지도자의 무능에 강조점을 둔다면, 폭군은 독선과 불통에 따른 폭정의 뉘앙스가 물씬 풍긴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에서는 셋다 도긴개긴이지만….
■“황제는 야위지만 백성은 살찐다”
좋은 신하의 쓴소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려주는 당나라 현종의 일화도 있다.
즉 당나라 현종은 처음엔 명군이었다가, 훗날 혼군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호화잔치가 열리면 현종은 늘 안절부절 못해 ‘이 일은 한휴(韓休·673~740)가 아느냐’고 물었다.
한휴의 사나운 간언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현종이 ‘이 일을 한휴가 아느냐’고 묻는 그 순간, 이미 한휴의 매서운 상소문이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현종의 좌우 신하들이 한휴를 겨냥해서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휴가 정승이 된 이후에 폐하께서 전보다 사뭇 여위셨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한탄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단다.
“나는 비록 여위었지만 천하 백성은 살쪘구나.’
■연산군 시대에도 직언은 있었다
이 한휴의 일화는 연산군 시절인 1495년(연산군 1년) 손순효가 다름아닌 연산군에게 감히 전해올린 상소문에 나와있다. 당시 판중추부사 손순효는 바른 말을 했던 대간들이 잡혀가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다른 사람들은 입을 모두 닫고 있는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연산군일기>는 “다른 재상들이 입을 닫고 있는 가운데 손순효의 상소가 올라오자 모두들 시원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손순효는 언로(言路)를 막으면 안된다고 감히 아뢰면서 “전하께서는 요순 같은 성군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 이하의 임금이 되겠습니까”라고 다그쳤다. 그러고보면 연산군에게는 그나마 이런 ‘목숨을 내놓고 바른 말을 했던’ 신하들이 있기는 했다.
그 말을 임금이 잘 들었다면 혼군이니 폭군이니 하는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하기야 <주역>의 64괘 중에는 이런 괘가 있다. 명이(明夷)라는 괘인데, 이것은 암군(暗君)이 위에 있으면 밝은 신하가 해침을 당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하라도 임금을 잘못 만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불현듯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한비자> ‘관행(觀行)’이다. 명군과 암군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3. 조선시대의 직언과 언로 -왕조시대를 욕보이지 마라
한치형, 성준, 이극균 등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이른바 시폐 10조목을 올린 <연산군일기> 내용. 이들은 ‘백성은 물이요, 군주는 배’라는 <순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의 실정을 조목조목 꾸짖었다
“‘백성을 물이고, 임금은 배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습니다.”
1502년(연산군 8년) 한치형과 성준, 이극균 등 3정승이 연산군에게 시폐(時弊) 10조목을 올렸다. 말하자면 임금의 잘못된 정치, 즉 실정(失政)을 10가지나 뽑아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다. 상대가 누군가. 이미 무오사화로 피바람을 일으킨(1498년) 폭군 연산군이 아닌가. 하지만 정승들의 말을 곱씹어보면 살벌하기만 하다.
‘백성을 물로, 임금을 배’로 비유한 대목은 <순자> ‘왕제(王制)’편에 나온다. 그러니까 정승들은 ‘임금 당신이 잘못하면 백성이 당신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에게 ‘당신 백성 손에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삼정승은 “전하께서 후원에서 내시들과 함께 장난이나 치고, 사사로운 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이게 옳은 일이냐”고 힐난했다. 그런데 연산군의 응답이 뜻밖이다. 치도곤을 내기는커녕 “경들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말이다.(<연산군일기>)
■직언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연산군이 그 정도였으니 다른 임금들은 어땠을까. 흔히들 임금 마음대로 철권을 휘두르고 백성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이 왕조시대 군주의 모습이라 비유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왕조시대의 ‘으뜸 덕목’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하의 ‘직언’과 임금의 ‘소통’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산 정약용의 말을 들어보라.
“아첨을 좋아하는 자는 충성하지 못하고 간쟁을 좋아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을 쓸 때는 반드시 이 점을 살피라고 주문한다. (<목민심서> ‘이전·吏典·용인’)
무슨 말인가. 최근 ‘배신의 정치’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다산은 되레 “할 말을 할 줄 아는 신하는 배신할 줄 모르고, 되레 아첨을 떠는 신하가 배신한다”고 한 것이다.다산은 “무릇 바른 말을 하는 신하라야 군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면서 “윗사람은 이런 이치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딱잘라 말했다.
다산 뿐인가. 이익은 “바른 말을 하고 극진하게 간언하는 신하야말로 국화(國華·나라의 권위와 위엄)”라고까지 했다.(<성호사설> ‘인사문·직언이국’)
“사람의 언론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자만 있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 자가 없다면 멸망이 임박한 것이다.” (<성호사설> ‘직언극간’)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권근은 “군주가 지나친 직언을 했다 해서 죄를 주면 다음부터는 두려워해서 할 말을 못하게 된다”면서 “이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 했다.
“신하의 말이 지나쳤다 해도 그 마음은 나라를 위한 충성입니다. 아부·아첨으로 제 몸만 도모하는 자와 같겠습니까. 되레 직언을 권장해야 합니다.” (<양촌선생문집> ‘상서류’)
■언로는 곧 인체의 혈맥
그런데 군주와 나라에게 직언은 왜 필요할까. 권근의 말마따나 언로를 뚫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언로를 뚫어야 했을까. 언로가 뚫리지 않는 나라는 곧 죽은 나라였으니까 그렇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헌부 장령 신숙주가 올린 상소를 보라.
“언로는 혈맥과 같습니다. 혈기가 조금이라도 통하지 않으면 온몸에 병이 발생합니다. 언로가 하루라도 통하지 않으면 사방에 병이 발생하여 군주가 편치 않게 됩니다.”
신숙주는 그러면서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직언과 극간(極諫)이며, 비록 귀에 거슬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더라도 꾹 참고 들어줘야 한다”고 진언한 것이다.(<문종실록>)
중국 주나라 여왕은 감시의 시스템을 작동시켜 백성의 입을 틀어 막았다. 백성이 입을 놀리면 죽였다. 백성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 여왕은 재상 소공에게 “내가 비방을 없애버리니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됐다”고 자랑했다. 소공은 이 때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심각하다”면서 “만약 막혔던 둑이 터지면 어찌 되겠느냐”고 충언했다.
“백성은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연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왕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3년 뒤인 기원전 841년 백성들이 연합해서 난을 일으켰고 여왕은 왕위를 빼앗겼다.(<사기> ‘주본기’)
■“폐하는 폭군입니다.”
사실 군주에게 바른 말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비자>는 유명한 ‘세난(說難)’에서 임금에게 직언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비린지위(批鱗之危)’ 라는 용어를 써가며 설명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다산은 “아첨하는 자야말로 불충하는 자이고, 직언을 하는 자만이 배신하지 않는다”면서 “이것을 윗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하는 군주의 총애를 받을 수 있지만, 즉 용(군주)의 등에 탈 수도 있지만, 만약 너무 지나치면, 즉 용의 턱 밑에 거꾸로 난 비늘(鱗)을 건드리면 군주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임금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직언을 ‘비린(批鱗)’이라 했다.
‘비린’으로 유명한 이가 한나라 창업공신이자 지독한 말더듬이라는 주창(周昌)을 들 수 있다. 주창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다. 하루는 유방이 “나는 어떤 군주냐”고 묻자 주창은 “폐하는 걸주와 같은 폭군입니다(桀紂之主)”라 외쳤다.
유방이 정부인인 여후의 맏아들을 제치고 애첩 척희의 아들을 태자로 삼겠다는 유방을 ‘폭군’이라 소리친 것이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주창은 황제 면전에서 “기, 기, 기어코 그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期期期知其不可)”라 고함쳤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지독한 직언은 아마도 시간(尸諫)일 것이다. 시체(尸)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한다(諫)는 뜻이니까 말이다. 시간의 주인공은 바로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였던 사추였다. 당시 위나라에는 거백옥이라는 충신이 있었고, 미자하라는 간신이 있었다.
위나라 군주 영공은 미자하를 무척 총애했다. 사추는 생전에 그토록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치라”고 임금에게 간했지만 소용없었다. 훗날 지병으로 죽음을 앞둔 사추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가뭄이나 홍수, 지진과 같은 재변이 일어나면 반드시 직언을 청하는 ‘구언교서’를 내렸다. 임금들은 교서에서 ‘모든 재변은 못난 임금 탓이며, 불쌍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서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직언을 해달라“고 자세를 낮췄다. 사진은 <해동연표>에 등장하는 태종 때 구언했다는 기사
“내가 결국 임금을 바로잡지 못했구나. 죽어서도 예(禮)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죽으면 시체를 창 아래에 두어라.”
사추가 죽자 조문하러 온 위령공이 자초지종을 듣자 크게 깨달았다. 위령공은 마침내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쳤다. 사추는 시체가 되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룬 것이다. 이보다 지독한 간언이 어디 있겠는가.
■직언의 끝판왕 열전
직언의 끝판왕으로 즐겨 인용되는 역사인물 가운데 주운(朱雲)과 신비(辛毗) 두 사람이 있다.
주운은 한나라 성제(재위 기원전 32~7) 때의 인물이다. 두려움없는 간언으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한나라 성제가 스승으로 존경하던 인물이 있었다. 안창후(작호) 장우였다.
주운은 그 장우가 황제 앞에서 바른 말을 하지 못한채 녹만 축내고 있다고 여겼다. 주운은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목숨을 건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폐하. 저에게 칼 한자루를 주소서. 무능한 자의 목을 베어 본보기로 만들까 합니다.” (주운)
“간신배라니 누구를 가리키는가.” (한 성제)
“안창후(장우의 작호)입니다.” (주운)
자신이 신임하는 정승을 목베겠다는 말이 아닌가. 성제는 “저 자를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호위병들이 주운을 끌어내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주운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전각 난간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안창후 장우의 목을 쳐야 합니다. 폐하!”
옥신각신하는 사이 난간이 뚝 부러졌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부러진 난간을 교체하려 했을 때 황제가 명을 내렸다. “저 부러진 난간을 바꾸지 말고 그냥 맞춰 놔라. 목숨을 걸고 직언한 신하의 충성을 기려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꺾을 절(折) 난간 함(檻)’의 ‘절함’의 고사이다.(<한서> ‘주운전’)
이것이 그 유명한 ‘꺾을 절(折) 난간 함(檻)’의 ‘절함’의 고사이다.(<한서> ‘주운전’)
신비(辛毗)는 삼국시대 위나라 문제(재위 220~226) 때의 인물이다. 문제(조비)가 기주(하북성) 지방의 가옥 10만호를 하남으로 옮기려 했다. 대신들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하는 자는 죽여버리겠다”고 입단속을 시켰다. 이때 신비만이 나서 조목조목 따졌다.
“폐하가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린 까닭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사사로운 일을 아뢰는 것입니까. 다 나라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찌 노여워만 하실 수 있읍니까.”
황제는 신비의 간언에 한마디 대꾸도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신비는 황제의 옷자락을 끌어 당겼다. 황제는 옷을 떨친채 신비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옷소매가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황제가 나와 신비에게 물었다.
대원군에 이해 철훼된 충북 괴산의 만동묘를 다시 세워달라며 충청도 유생 720명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문. 이 만동묘는 노론(老論)의 거점으로서 상소와 비판을 일삼고,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헐렸다
“왜 짐의 옷을 잡아 당겼느냐.”
“폐하는 민심을 잃고 백성은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떨어진 용포 자락의 반만 옮겼다. 이것이 바로 ‘견거(牽거·옷자락을 당겼다)’의 고사이다.(<삼국지> ‘위서’)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
다른 사람이 대놓고 나에게 싫은 말을 하면 기분 좋을 리 없다. 더구나 지존이라는 임금이나 황제가 쓴소리를 참고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군 혹은 성군이라면 쓴소리 듣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왕조시대 군주들이 즐겨 인용하는 이가 바로 한나라 문제(기원전 180~157)이다. 그는 과거의 한 과목으로 직언과 극간을 채택해서 바른 말을 잘하는 선비를 관리로 선발했다. 자그만치 2100년 전의 군주인데, 이 얼마나 선진적인 지도자인가.
이후 왕조시대 임금들은 줄기차게 직언을 구했다. 직언을 구하지 않는 자는 폭군이라 폄훼됐다.
북제-수-당나라 등 3왕조에서 벼슬을 한 배구(裴矩)를 보라. 북제가 망하자 수나라로 간 배구는 양제에게 아첨 해서 신임을 받고 우문술(宇文述·?~616) 등 5명과 국정을 농단했다. 그는 618년 우문술의 반란이 실패한 뒤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런데 당나라에서의 배구는 180도 달랐다. 배구는 당 태종에게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라”는 등 충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왕조와 임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냐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거나 포악한 군주라도 죽을 각오로 바른 말을 해야 충신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서> ‘배구열전’을 쓴 역사가는 흥미로운 평가를 가한다.
여말선초의 대학자 권근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탑본. 권근은 “직언을 막으면 언로가 막혀 나라가 위태로워진다”고 주장했다.
“군주가 직언을 싫어하면 충성이 아첨으로 변한다. 군주가 직언을 즐거워하면 아첨이 충성으로 변하는 것이다. 임금은 형체이고 신하는 그림자다. 따라서 형체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허물은 평소 직언을 좋아하지 않은 수 양제 탓이지, 배구의 탓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 태종이 화낸 까닭
그랬으니 옛 군주들은 미치도록 직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명군, 현군, 성군 소리를 역사서에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중국 진(晉)나라 황제는 새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대궐 안의 뜰에 백호준(白虎尊·뚜껑을 백호로 장식한 술그릇)을 설치해놓았다. 새해 첫 조회 때 직언을 서슴치않는 대신에게 술 한 잔 하사했다.
직언과 관련해서는 당태종의 일화가 자주 인용된다. 그만한 성군에는 그만한 신하가 있다는 소리다. 하루는 당 태종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조회를 일찍 파했다.
“내 저 자를 죽일거야.”
재상 위징(魏徵·580~643)이 심한 말로 황제를 욕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태종의 부인 문덕황후가 오히려 남편에게 “축하드립니다”라 하례했다.
당 태종이 그 이유를 묻자 문덕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그거 군주가 명철하고 신하가 정직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축하드려야죠.”
지난해 청와대 앞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열린 노인들의 도끼상소 퍼포먼스. 도끼 상소는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의미로 도끼를 둘러메고 왕에게 상소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태종은 그제서야 깨닫고 더불어 기뻐했다.(<정관정요>) 이 위징이라는 인물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위징은 황제가 매를 좋아해서 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나깨나 백성만을 생각해야 할 황제가 매나 키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차였다.
태종도 대쪽같은 위징을 늘 의식했다. 어느 날 매를 평소와 다름없이 매를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기던 태종은 위징이 오는 것을 보고는 그 매를 품 속에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위징은 일부러 오랫동안 나가지 않고 황제와 국사를 논했다. 황제의 애가 닳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품속에서 숨을 쉬지 못했던 매는 결국 죽고 말았다.(<자치통감> ‘당기·唐紀’)
■세종도 직언을 싫어했다
<실록>을 보면 우리 역사 속 임금과 신하들 가운데도 대단한 분들이 많았다. 예컨대 조선 역사상 가장 임금노릇을 하기 싫어했던 정종 임금조차 “경연 때마다 간관 1명은 반드시 입시해서 과인의 잘못을 직언으로 고하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1400년)
서슬퍼런 태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1403년(태종 3년) 태종이 사냥에 정신을 팔리자 대간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늘 두려워하고 삼가소서. 백성을 두려워 하소서.”
그것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제 아무리 성군이었다지만 세종 임금도 직언은 귀에 거슬리기 마련이었다.
1440년(세종 22년) 고약해(高若海)라는 인물이 아주 무례한 어조로 세종 임금에게 직언을 쏟아냈다. 그러자 세종은 해도해도 너무한다면서 “저 무례한 자를 탄핵하도록 하라”고 사헌부에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사간원 우헌납 김길통이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아니 신하가 가볍게 진언하는 것이 아닌데 만약 임금이 고약해를 죄로 다스린다면 어느 누가 감히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고약해는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술했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 일찍이 충직(忠直)하다고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좀 무례했더라도 죄를 묻지 마시고 언로를 넓히시옵소서.”
이에 세종은 “너희 말이 옳지만 과인은 직언을 미워한 게 아니라 그 무례함을 미워한 것일뿐”이라고 변명했다.
1440년(세종 22년) 사간원이 세종 임금을 맹비난한다. 임금이 도성 안의 사찰인 흥천사를 보수한 뒤 이를 경축하는 경찬회를 열려하자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다. 유교국가에서 웬 사찰중건이며, 무슨 경찬회냐는 것이었다.
“불씨(석가모니)를 존중하자는 겁니까. 게다가 여러 해 흉년이 들었고 농사도 여의치 않은데 어찌 홀로 무익한 일에 재물을 쓰고 뭘 축하한다는 겁니까. 급히 명령을 거두소서.”
세종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절이 중창되었으니 이를 축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면서 “그리고 당장 하자는 한 것도 아니고 하중에 하자는 것인데 뭐 그리 빡빡하게 구냐”고 맞섰다. 그렇지만 사간원은 “나중에 하든, 지금 하든 경찬회는 절대 안된다”면서 “전하의 성덕에 누를 끼칠 것”이라 경고했다.
■사과의 법칙
왕조시대 군주들은 기상이변이나 대형사고 등 갖가지 재변이 닥쳤을 때마다 이른바 ‘구언(救言·임금의 잘잘못에 비판의 말을 구하는 일)’을 내렸다.
그런데 구언, 즉 직언을 구하는 임금들의 태도도 음미해볼만 하다. 즉 재변의 시기에 임금이 내리는 교지의 형식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어김없이 ‘나같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나라를 맡아’ ‘보잘 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등등처럼 한결같이 겸손한 말로 시작된다.
그러면서 ‘모두 임금의 책임이며, 임금을 잘못 만난 백성을 생각하면 죽고싶은 심정’이라 한다. 그런 뒤 ‘모두 임금의 부덕에서 비롯된 소치이니 임금의 허물을 낱낱이 지적하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해서 가리지 말고 올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무리 심한 직언이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마무리 짓는다. 이 모두가 재난에 맞서는 왕조시대 임금의 자세이다. 예컨대 1656년(효종 7년) 서남부 지방에 기상이변이 일어나자 효종이 내린 ‘직언을 구하는 교서’를 보라.
“내가 나라를 다스림이 보잘것 없어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두려움과 걱정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직언을 구해서 이 어리석은 자질을 변화시켜라.”
기상이변이 일어난 것은 부덕한 임금 때문이며, 그래서 죽고싶은 심정이란다. 임금의 진심이 묻어나오는 <실록>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도 마찬가지였다. 1660년(현종 1년)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황충, 그리고 그에 따른 기근이 닥쳤다. 이삭이 나올 때인데 20일이 지나도록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종은 “이 모든 허물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고단하게 사는 백성들이 무슨 죄냐”고 한탄했다.
3년 뒤인 1663년(현종 4년)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현종은 “차라리 금방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괴로움을 토해냈다. 백성이 모조리 죽게 생겼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하겠느냐는 것이다.
■‘죽고만 싶다.’
1690년(숙종 16년) 가뭄이 극심하자 숙종 역시 ‘구언’을 내린다.
“하찮은 소자(小子)가 외람되게 어려운 사업을 받아…덕이 모자라 홍수·가뭄 등의 변이 거르는 날이 없구나.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가엾은 우리 백성은 장차 죽음이 가까왔다. 차라리 죽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구나. 직언(直言)을 구한다. 임금의 부덕과 잘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라. 어떤 말이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다. 재변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1723년(경종 3년) 가뭄이 극심하자 경종이 내린 교지도 숙종의 것과 판박이다
“아! 보잘것 없는 내가 즉위한 이래 비상(非常)한 재앙과 홍수·가뭄·바람·우박 등의 참혹함이 거의 달마다 곡식을 해쳤고…. 하늘이 두려움을 주고 잘못을 고쳐 주려는 것이다. 임금이 반성해야 한다. 직언을 구하라. 광망(狂妄)한 직언이라도 용납할 것이다. 지금 내린 재이(災異)는 모두 무덕(無德)한 나의 소치이니….”
1725년(영조 1년) 영조 임금이 구언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아!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 하지만 백성은 곤궁하고 역질마저 겹쳤으며, 탐관오리가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와 병역을 부과한다. 슬프다. 게다가 붕당을 만들어 아부하는 풍습이 요즘보다 심할 때가 없구나. 누구의 허물인가. 나의 허물이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밥맛도 없다.”
■‘대체 뭐하십니까’
그렇게까지 임금이 ‘내가 죽일 X이고,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전제했음에도 신하들의 직언은 폐부를 찌른다.
예컨대 1626년(인조 4년) 사헌부 대사헌 정경세 등이 인조 임금을 다그친다.
“(인조)반정 초기엔 백성을 지성으로 아끼셨는데…. 이젠 방백(관찰사)와 수령들이 백성들을 죽여도 머리카락 까닥하지 않고 가만 앉아계십니다.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직언을 포용하는 아량도 처음만 못합니다.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역린했다는 노여움만 삽니다. 이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통렬히 반성하시고….”
인조는 그저 “모두 나의 허물이 쌓인 탓”이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인조실록>의 기자는 그조차도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다.
“이 상소문은 임금을 조용하고 간곡하게 이끄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상(임금)은 이 상소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없다. 애석한 일이다.”
1635년(인조 13년) 이조참의 유백증은 ‘임금이 획기적으로 분발하라’고 주문한다.
“인심이 원망하여 이반하고 백성이 극도의 고생을 겪는 것은 전하가 안민에 뜻을 두지 않아서입니다. 또 언로는 국가의 혈맥입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고서 몸이 제대로 보존되겠습니까. 임금이 의심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을 술법으로 삼지 마소서.”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물러나’
1650년(효종 1년) 영의정 이경여가 막 즉위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어떤가. 시중의 여론을 들먹거리고 있다.
“전하께서 초심을 잃었다는 것이 제가 들은 여론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위란의 지경에 빠졌다는 겁니다. 아! 천명은 믿기 어렵고, 인심은 쉽게 떠납니다. 임금의 도량이 좁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겁니다.” 그러면서 이경여는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경여의 상소도 상소지만, 효종의 반응은 더 음미할만 하다.
“부끄럽고 두려움이 교차한다. 허물을 반성해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인들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내가 띠에 써놓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다.”
그러면서 효종은 “그런데 경(이경여)이 왜 물러나려고 하느냐”면서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임금이 하늘에 죄를 얻어서 내려진 재앙”이라 했다.
“날이 가물고 황충(메뚜기)이 발생한 것은 내가 어리석어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 책임인데 경이 왜 사직하려는가.”
효종의 마지막 말이 백미다.
“나와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날 버리지 마라. 날마다 숨김없이 직언을 올려라. 그래서 나로 하여금 선(善)한 정치를 하게 하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라.”
임금 앞에서 꼿꼿이 서서 잘잘못을 따진 뒤 물러나려는 신하에게 “모든 것은 내 잘못”이라 쿨하게 인정하고 “내 잘못인데 당신이 왜 그만 두냐”는 임금의 태도를 보라.
대단한 임금에, 대단한 신하가 아닌가.
■재변이 없으면 되레 망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정조실록>에 나와 있다.
“1784년(정조 8년) 임금이 직언을 구했다. ‘그대들도 유의하라. 그대들은 미리 유의하여 내 이 말이 또 실속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정조가 한마디 덧붙인다.
“<서경>을 보니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하면 묵형(墨刑)에 처한다고 했다. 너희들은 힘쓰라.”
임금이 직언을 널리 구하면서 “직언은 대신들의 의무이며, 직언하지 못하는 자는 죄를 받는다”고 독려한 것이다.
또 있다. 재변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1798년(정조 22년) 좌의정 채제공이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일 때문에 임금에게 ‘선정을 베풀라’고 청한다. 채제공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오히려 재변이 없는 나라는 위태로운 법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하늘이 그 나라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재변이 없다는 것은 속된 말로 하늘조차 포기한 나라라는 뜻이라는 거다. 왜냐면 싹수 있는 나라라야 하늘이 때때로 경계하라는 뜻으로 재변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의 공구수성을 권해 임금 스스로 깨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가. 이래도 왕조시대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을텐가.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4 '사관선배' 민인생 홍여강
민인생은 태종 앞에서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역사학계는 ‘사관 위엔 하늘이 있다’며 직필을 실천하고자 했던 선배들의 자랑스런 전통을 계승하고….”
지난 10월 30일 전국역사학대회에서 28개 역사 관련 학회가 발표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에서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대항한 선배들’을 언급했다. 궁금증이 든다. 과연 그 ‘자랑스런 선배들’은 누구인가.
■지독한 사관 선배들
학자들이 직접 언급한 바로 그 사관 선배들은 바로 조선조 태종 시대의 사관 ‘민인생(閔麟生)’과 ‘홍여강(洪汝剛)’이었다. 조선시대 전임사관의 직위는 기껏해야 7~9품의 하위직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도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 포탈 사이트의 ‘지식백과’나 인물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사관들이다.
태종이 누구인가. 세자이자 이복동생인 그 어린 방석과 방번 등을 죽이고(1차 왕자의 난), 형(방간)까지 쫓는 등(2차 왕자의 난)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에 오른 무시무시한 임금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형님이자 임금이었던 정종(방과)마저 동생(이방원)만 만나면 부들부들 떨었다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보다못한 부인 정안왕후가 절규했다.
“전하께서는 동생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까. 하루빨리 양위하시어 마음 편히 사세요.” (<연려실기술> ‘정종조고사본말’)
반강제로 형의 양위를 받아내고 즉위한 태종에게 감히 어느 누가 잡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관 민인생이 나섰다.
태종이 즉위한 지 4개월이 안된 1401년(태종 1년) 3월 18일이었다. 태종이 조준·이거이·하륜 등 고관대작과 10여 명의 무신들을 거느리고 하루종일 매사냥을 한 뒤 날이 저물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온종일 태종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었다. 임금의 곁을 끝까지 찰싹 달라붙어 ‘얼굴을 가린채’ 뭔가를 끄적대던 민인생이었다.
태종이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저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민인생이 대답했다.
“신은 사관인데 감히 직사(職事·직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 온 것입니다.”
심사가 뒤틀린 태종이 한마디 하려는데, 총제 이숙번이 막아섰다.
“전하. 사관의 직책은 매우 중하옵니다. 원컨대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사관은 제발 들어오지 마!
윤 3월이 지나고 맞이한 4월 하고도 29일 이번에는 사관 홍여강이 나섰다. 홍여강 역시 대단한 사관이었다. <태종실록> 1401년 2월 20일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사관 홍여강이 공신들의 잔치가 열리던 연청(宴廳)에 들어가려다 공신 심귀령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는 기록이다.
심귀령은 젊었을 때부터 태종 이방원을 따라다닌 호위무사로 1·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여강은 바로 기고만장한 공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하려다가 안하무인이었을 심귀령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홍여강이 속한 춘추관이 심귀령을 비난하는 문서를 보냈고, 사헌부가 탄핵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홍여강이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4월25일, 이번에는 임금의 일상을 기록하겠다고 편전(보평전)에 들어서려 했다. 그러나 태종은 홍여강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전의 뜰 아래까지 진입했다가 내시들이 홍여강의 팔짱을 끼어 부축한채 내보냈다. 태종의 입장불허 방침은 분명했다.
“무일전(無逸殿)이라면 물론 사관이 좌우에 있어야 해. 하지만 이곳(편전·보평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야. 승지(承旨)들이 모두 사관의 직책을 겸했잖아. 그러니 사관이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어.” (<태종실록>)
이 무슨 말인가. 태종은 즉위하자 마자 ‘무일전’과 ‘편전(보평전)’을 따로 조성했다. 태종은 정전이 너무 좁다고 해서 좀더 넓게 고쳐 짓고 무일전(無逸殿)이라 이름 붙였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글쓰는 사람 벽화. 사관일 가능성이 짙다.
그러면서 정사를 보는 곳을 무일전, 쉬는 곳을 편전(보평전)으로 구분지었다. 그러니 쉬는 곳까지 사관이 올 필요가 있겠는가. 게다가 사관직을 겸한 승지들이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데, 전임 사관까지 와서 귀찮게 할 필요가 있느냐. 뭐 이것이 태종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사를 어떻게 무 자르듯 전각에 따라 구분지어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이 편전에서 쉬다가도 대신들을 불러 정사를 논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경연장(경전을 논하고 논쟁하는 곳)을 베풀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일기 형식인 승정원일기와 임금·신하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평가하는 전임 사관들의 역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관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홍여강은 결국 쫓겨 나갔지만 이번에는 민인생이 나섰다. 사관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민인생이 다시 편전 문을 들어서려 하자 도승지(비서실장) 박석명이 제지했다.
“이봐. 홍여강도 왔다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주상의 명을 듣고 돌아갔어.”
민인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석명에게 “오히려 전지(傳旨·직접 명령)를 들은 바 없다”면서 편전의 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태종이 민인생을 보았다.
“사관은 어찌 들어왔는가.”(태종)
“전하께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라고 윤허하셨습니다. 그래서 들어왔습니다.” (민인생)
광주 이씨 가문의 사초
“편전에는 들어오지 마라.” (태종)
“편전이라 해도 대신들이 정사를 아뢰고, 경연이 열리는 곳인데 사관이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제대로 기록한단 말입니까.” (민인생)
“(웃으며)편전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야. 들어오지 않는 것이 옳아. 그리고 사필은 곧게 써야 하는 것인데 비록 편전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태종)
이때 민인생이 결연한 한마디를 던진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으면, 사관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곧아집니다
통일신라 시대 사초 목간. 원성왕 때 인재를 추천하는 내용을 신라 사관이 목간에 기록했다. 경주 인용사지에서 출토됐다
또 그로부터 며칠 뒤인 5월 8일 태종은 경연을 베풀어 정사를 논한 뒤 거나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기분좋은 자리였다. 그런데 이 때 민인생이 사관의 편전 입시문제를 거론했다.
“전하의 오늘 강론은 정말 정교했사옵니다. 원컨대 편전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도 사관이 입시해어 그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
이첨·박신·조용·김과 등의 신하들이 민인생의 주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경연에 사관이 입시하는 것은 가하지만 정사를 듣는 때에 들어오는 것은 좀…. 저희도 고려조 우·창왕 시절 사관이었는데 두렵고 위축되어 감히 임금을 뵙지 못했습니다.”
민인생은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은 것입니다. 어찌 감히 전조(고려조)를 오늘에 비교하려 하십니까.(主明則臣直 豈敢以前朝比今日乎)”
술자리 분위기를 깨뜨리는 민인생의 일갈에 ‘좀 더 논의해보고 결정하자’고 미뤘다.
■엿보는 자가 누구냐
태종은 결국 매달 6번씩 관원들이 모여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는 6아일(衙日)에 한해 사관의 입시를 허락했다. 나름대로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1401년 7월 8일, 편전에 앉아있던 태종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과연 누군가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태종이 “어떤 자가 편전을 엿보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내관들이 달려나가 보니 사관 민인생이었다.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까 몰래 훔쳐보며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태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도승지 박석명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사관은 매일같이 입궐하지 않도록 하라.”
결국 사관 민인생은 편전의 휘장까지 걷고 엿보는 등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죄목으로 유배형의 처벌을 받았다.
■아! 지긋지긋한 저 자들!
그러나 민인생·홍여강에 이어 사관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9년 뒤인 1410년(태종 10년) 4월28일 사관 최사유가 민인생·홍여강처럼 편전의 뜰에 들어왔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이 때 태종은 노발대발하면서 “지금부터 정전(正殿)에서 열리는 조계(朝啓·군신들이 모이는 정식회의)를 제외하고 경연청이나 광연루(廣延樓) 같은 곳에는 절대 사관을 들이지 마라”는 엄명을 내린다. 하지만 ‘사관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관들의 끈질긴 항거에 태종은 항복하고 만다.
2년 뒤인 1412년(태종 12년) 7월29일 <태종실록>에 태종과 지신사 김여지의 문답내용이 나온다.
“사관이 다시 편전이 들어온 것인 언제부터였지?” (태종)
“경인년(1410년)이옵니다. 사간원이 주청을 올려서 그때부터 들어오게 됐습니다.” (김여지)
“….” (태종)
이 대목에서 <태종실록>은 김여지의 심리상태를 흥미롭게 기록해놓았다.
“김여지는 왜 태종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으며, 또 대꾸 조차 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심하며 두려워 했다. 임금이 사관을 또 들이지 못하게 할까봐 그런 것이다.”
태종은 ‘최사유 사건’ 이후 사관의 편전 입시를 사실상 전면금지했지만 사간원의 맹렬한 반대로 철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관들이 뭔가 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꼬투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김여지를 불러 ‘사관의 입시를 다시 금하라’는 명을 내릴까 하다가 겨우 참았음을 <태종실록>은 암시하고 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당대 사관들의 지독한 직필정신을 일러주는 단적인 예가 하나 있다.
당시 태종은 시도 때도 없시 사냥을 나갔는데 이것은 나라의 안녕에는 큰일이었다. 대신들은 “임금이라 함은 옥좌에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면서 정사를 펼쳐야 하는데 사냥을 일삼는다”고 아우성쳤다. 사냥을 나갔다가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감당할 수 없는 변고였다.
그런데 1404년(태종 4년) 임금이 반대를 무릅쓰고 노루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 훌훌 털고 일어난 태종이 한다는 말이 걸작이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이 때의 사관은 필시 그 지긋지긋한 민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사관은 태종 임금이 ‘이 일을 모르게 하라’는 말까지 기록해서 결국 <태종실록>에 남긴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후세 사람들이 읽고 있는 것이고…. 결국 당대의 사관들은 천하의 지존인 임금이 쓰지 말라는 것 까지, 즉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오프더레코드’를 걸어놓은 것까지 쓴 것이다.
■역사는 백성을 가르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맞서는 역사학자들이 표상으로 여기며 거론한 ‘사관 선배들’이다.
그렇다면 사관 민인생·홍여강·최사유는 왜 그토록 임금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을까. 자그만치 1500여 년 전 진흥왕(재위 540~575)에게 신라의 역사서 국사(國史)의 편찬을 권하던 이찬 이사부의 말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국사는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후대의 엄정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국사가 편찬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삼국사기>)
이사부는 ‘역사는 백성의 잘잘못이 아니라 군신의 잘잘못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후대의 평가를 받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란 군주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대신)의 잘잘못을 가려 후대의 평가를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춘추>를 쓰며 견지했던 춘추필법이다. 공자는 ‘훗날 군주가 될 사람들의 참고용’으로 <춘추>를 썼다고 누누이 강조했다.(<사기> ‘공자세가’)
그랬으니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쓰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고 한 것이다.
위정자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역사를 기록했다는 대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니 위정자가 감히 역사를 백성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포폄을 거스르는 난신적자라 할 수 있다.
■보도자료로만 기사 쓸 것인가
그러니 제대로 된 학자들이라면 보수든 진보든 가릴 것 없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뉴라이트 계열이든, 진보 계열이든 상관없이 역사가가 아닌 위정자가 백성을 가르치려는 책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스스로 역사가임을 포기하는 자들이다. 비유하자면 언론사 기자 더러 정부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만 갖고 기사를 쓰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무리 보수·진보 언론의 기자라도 보도자료 만으로 기사를 쓰라면 가만 있겠는가. 기자도 일종의 사관이 아니던가. 역사가에게는 든든한 ‘백’이 있다. 민인생의 말대로 사관의 위에 있는 ‘하늘’이다. 여기에 붙이자면 ‘춘추필법’이 있다.
이 ‘춘추필법’에 따라 역사에 반하는 난신적자들은 1000년이 지나 썩은 해골이라도, 혹은 구족(九族)을 멸해서라도 반드시 주벌된다고 했다. 모두 역사서(<명종실록> <광해군일기> 등)에 일관되게 나오는 내용들이다.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5. 역사가의 자격, "욕먹는 자는 사필을 잡을 수 없다"
인조 무인년,즉 1638년의 정치상황을 기록한 사초. 당시 사관이었던 신면이나 허적의 기록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 않다.|규장각 소장
“역사를 쓰는 직책이란 한 시대의 사실을 서술하여 만대의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이 중대합니다. 반드시 관료 중에 가장 현명하면서도 삼장(三長)의 재주를 갖춘 사람을 선임해야 시비가 공정하게 되어 사람들이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1548년(명종 3년) 5월 29일 지중추부사 정사룡이 실록청 당상의 직책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명종이 <인종실록> 편찬작업의 책임자로 정사룡을 임명했지만 스스로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사직을 청한 것이다. 정사룡의 사퇴의 변을 읽어보자.
■“욕먹는 자가 역사를 쓸 수 없습니다.”
“신은 40년 가량 공직에 있으면서 걸핏하면 논박을 당했습니다. 한번 논박을 당하면 10일은 보통이고 한 달이나 계속 됐습니다. 이 모두가 일록(日錄·사초 같은 매일매일의 기록)에 모두 기록돼있습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녹이나 축내면서 남의 비방을 듣는 처지라면 죄를 얻는 것일 뿐 아니라 후세까지 그 견책을 남길 것”이라 사퇴의 변을 밝혔다. 명종은 “여러 해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탄핵을 받는 경우가 왜 없겠느냐”고 사표를 반려했다.
하지만 정사룡은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4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사표가 수리됐다. 정사룡의 상소건을 기록한 <명종실록> 사관의 평가 역시 혹독했다.
“정사룡은 글재주는 있었으나 본래 품행에 문제가 많아 여론의 비난을 받은 지 오래됐다. 그가 역사 편찬의 책임을 맡자 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직한 것이다.”
종합해보면 정사룡은 임금의 명에 따라 실록편찬의 책임을 맡았지만 사관의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곱지않은 주변의 여론도 감안했을 것이다. 당연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여러차례 비판 당한 사연들을 전임사관들이 빠짐없이 기록해놓았으니까…. 그러니 정사룡은 자신의 흠결을 기록한 사초를 정리해서 실록을 편찬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왜냐면 역사기록에 사(私)가 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유희춘의 <미암일기>.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1577년 5월 13일 사이의 기록이 남아있다. <미암일기>는 임진왜란 때 사초책이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선조실록을 편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삼장과 사장
무엇보다 정사룡은 스스로 사관의 덕목인 ‘삼장(三長)’을 갖추지 못했기에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요약했다. 그렇다면 정사룡이 언급한 ‘삼장’은 과연 무엇인가.
‘삼장’은 당나라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661~721)가 주장한 역사학자가 갖춰야 할 3가지 조건을 일컫는다. 유지기는 “사관은 재(才)와 학(學), 식(識)을 겸비해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유자현전’)
여기서 ‘재’는 문장력이고, ‘학’은 학문이며, ‘식’은 통찰력, 즉 사관(史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겸비하기가 어디 쉬운가. 유지기 역시 세가지 덕목을 겸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관이 드물다고 했다.
후대에는 삼장도 모자라 사장(四長)으로 사관의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었다.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는 삼장 외에 덕(德)을 추가하면서 맨 앞에 두었다. 즉 사덕(史德)-사학(史學)-사식(史識)-사재(史才)의 순으로 그 중요도를 설명했다.
그는 역사가는 역사를 도덕으로 바라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공정한 사서를 저술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자신이 저술한 역사가 예사(穢史·더러운 역사)나 방서(謗書·남을 비방하는 사서)라는 혹평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인척 처가의 흠결까지
중국의 계몽운동가 량치차오. 역사가의 덕목으로 ‘덕(德)’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렇다면 사관의 삼장(三長)을 어떻게 가릴 수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함은 매일매일 군주와 대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전임사관을 뜻한다.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신라 때부터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일컬었다. 직급에서 보듯 하급관리들이었다. 하지만 과거급제자 가운데 엄격한 선발절차를 거쳐야 했으니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젊은 패기로 무장해야 때묻지 않은 절개를 지키고, 직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417년(태종 17년) 이조가 사관을 천거하는 법을 임금에게 올렸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은 후세의 귀감이 되니 책임이 가볍지 않습니다. 이제 결원이 생기면 춘추관 당상관이 하급의 문관 가운데 직품이 합당한 자들을 모아 경사(유교경전과 역사서)에 막힘이 없고 제술(시와 글)에 능한 자를 시험으로 뽑아야 합니다. 여기에 친족과 처가, 외가에 모두 흠결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골라 한 자리에 3명의 후보를 선발해서 이조에 서류를 보내면 이것을 임금에게 아뢰어 임명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소서.”
참으로 엄격한 임용절차였음을 알 수 있다. 문장과 글, 그리고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친·인척 가운데 어떤 흠결도 없는 사람이라야 후보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3명의 후보자 가운데서 가려 뽑았다니….
■‘천벌을 받는다’ 다짐까지…
이같은 원칙 아래 사관 임명의 구체적인 제도를 갖춰갔다. <연려실기술>을 토대로 공석이 된 사관을 뽑는 단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현재의 전임사관 가운데 가장 늦게 사관이 된 막내(하번·下番)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막내 사관이 바로 고참 사관들과 진행하는 추천회의를 사실상 주관한다.
광주 이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사초
사관들끼리의 추천회의도 ‘문을 닫고 진행하는 비밀회의’였다. 이것을 비천(秘薦)이라 했다. 만약 여기서 추천할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공석으로 놔뒀다. 예를들어 성종 시대의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하번, 즉 막내사관으로 일한 5년동안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여창(1450~1504)을 보고는 적임자라 판단해서 비로소 추천했다. 제대로 된 사관을 뽑으려고 막내의 불편함을 5년이나 감수한 것이다.
그런데 사관들이 모여 추천 대상자 3명을 확정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임사관을 역임한 전직사관들과 홍문관·예문관의 당상에게 후보자 명단을 돌렸다. 거기서 하자가 없다는 승인을 받아야 겨우 통과됐다. 통과의례 또한 까다로웠다. 사관들은 예복을 갖춰 입고 추천자들의 이력서를 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향을 피우고 차례로 네 번 절한 뒤 축문을 읽었다.
“황천(皇天·하늘신)과 후토(后土·토지신)에게 고합니다. 사필을 잡는 임무는 가장 중요한 국정입니다. 추천된 사람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겁니다.”
하늘·땅에게 제사까지 지내고 ‘천벌’ 운운할 정도이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전 통과의례인가.
■피말리는 1대1 면집시험까지
임진왜란 때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전쟁통에 상당수 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선조 임금 곁을 따라다니며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 4명이 도망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그래도 역사는 기록해야 했기에 사관을 선발해야 했다. 하지만 적임자가 전무했다. 그 때 유일한 사관이었던 기자헌이 행재소(임금의 임시거처)에서 부족한 사관수를 채우려고 후보자를 한사람 추천했다.
문제는 추천 대상자가 사관의 자격을 갖췄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시험을 볼 여건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3명이어야 할 후보자가 단 1명에 불과했으니까…. 기자헌은 차마 축문을 읽지 못하고 고육책으로 그냥 말로 하늘에 고했다.
“난리로 인해 사람이 모자라 부득이 한사람만 후보로 올렸나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지봉유설>) 그렇지만 절대 웃을 일이 아니다. 전쟁통에 그렇게 어수선한 국면이었는데도 사관을 뽑았고, 임시방편이었지만 축문을 읽는 행사를 생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축문을 읽은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가장 어려운 단계가 남아 있었다. 바로 시험이었다. 시험관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 3정승은 물론 좌·우찬성과 좌·우 참찬관, 그리고 춘추·예문관 소속 3품 이상의 당상관 및 이조당상 등이 합석했다.
이들은 추천된 수험생 3명에게 <자치통감 강목>과 <좌전(左傳)>, <송감(宋鑑)>의 글을 정해 한사람씩 불러 1대1 면접으로 테스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된 후보자들의 순위는 시험관들의 도장을 일일이 받아 공문서인 입안(立案)으로 만들어 제출했다. 이로써 선발절차가 막을 내린 것이다.
■구악(舊惡)은 사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젊은 신진들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겼을까.
그렇지않아도 태종 때인 1417년 이런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반대의 의견이 개진됐다. 즉 “사관들이 멋대로 젖비린내나고 서법도 잘 알지 못하는 자를 천거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태종은 이에 “새롭게 진출하는 유생들의 능력과 가문을 윗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 그래서 사관 동료들끼리 선택하도록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태종은 “이렇게 사관을 뽑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됐다”고까지 했다. 사관들 스스로 후임자를 뽑는 전통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려실기술>은 또 조극선(1595~1658)의 문집인 ‘야곡삼관기’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젊은 신진에게 사관의 직무를 맡기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더니 어떤 사람이 말했다. ‘벼슬이 높은 사람은 너무 세상일에 익숙하게 되어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리기 쉬운 폐단이 많다. 그러니 젊고 의기가 날카로운 자들을 사관으로 선발하는 것이 더 공평한 역사를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젊은 사람들을 사관으로 뽑는 제도를 마련한 것이리라.”
한마디로 말해 오래 벼슬한 사람들은 시쳇말로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이른바 ‘구악(舊惡)’이 될 수 있으니 엄정한 사필을 휘둘러야 하는 사관의 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관 한 사람 뽑는 데도 이렇듯 철저하고 엄중하게, 또한 신중하게 뽑았던 것이다.
■“내 과실을 마음껏 쓰도록 하라”
그렇다면 임금은 그렇게 뽑힌 사관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1508년(중종 3년) 종종은 승정원과 예문관에 붓 40자루와 먹 20홀을 내리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이 붓과 먹으로 모든 나의 과실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도록 하라.(以是筆墨 凡吾過失 百書無隱)”
영조 임금은 또 어땠나. 1738년(영조 14년) 영조 임금은 친히 실록을 봉안한 ‘춘추관 사고(史庫)’를 방문해서 ‘대공사필(大公史筆)’이라는 휘호를 써서 처마 끝에 달도록 했다. …. ‘대공사필’이란 ‘사필을 크게 공정히 한다’는 뜻이다. 영조는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법은 과연 어렵다. 여러 대신들은 물론 사관들이 입시하지만 당파에 치우친 나머지 역사를 멋대로 첨삭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또 임금이 한번 제작된 역사책(실록)을 절대 볼 수 없으니 역사책이 공정하게 쓰였는지, 혹은 불공정하게 쓰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대공사필이라 써서 벽에 건 것이다. 역사를 아주 공정하게 서술하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은 과연 어떤가. 정녕 제대로 된 사관을 뽑고 있는 것인가. 또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중종이나 영조처럼 자신의 잘못을 숨김없이 마음껏 쓰게 하고, 역사를 공정하게 서술하라고 북돋아주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일이다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6. 선조수정실록의 비밀
<34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된 <선조수정실록>.
“류성룡은 좁고 굳세지 못해 이해가 닥치면 흔들림을 면치못했다.…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 (<선조실록>)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 (<선조수정실록>)
“윤두수는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비루한 사내다.”(<선조실록>) “사신이 허위로 날조해서 모함하느라 급급했다.” (<선조수정실록>)
“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되어…원망을 자초했다.…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선조실록>)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승 노릇을 1년 남짓 했고,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 (<선조수정실록>)
“정언 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 (<선조실록>)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러울 뿐이다.” (<선조수정실록>)
“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 (<선조실록>)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를 칭찬했으니 주벌(誅罰)을 가해도 모자라다.” (<선조수정실록>)
선조~광해군대를 풍미했던 이들의 인물평이다. 이토록 상반될 수 있단 말인가. <선조실록>은 류성룡과 윤두수, 정철을 부족하고 편협한 사람이라 폄훼했지만, <선조수정실록>은 “그것은 전적으로 <선조실록>을 쓴 사관들의 잘못된 서술”이라면서 긍정평가를 내렸다.
또 <선조실록>이 ‘좋은 사람들’이라 극구 칭찬했던 인물들을 두고 <선조수정실록>은 ‘스스로 역사를 포장하려 했던 파렴치한’이라 손가락질 하고 있다. 심지어 주벌을 가해도 시원치않다고까지 저주했다.
대체 왜 이런 상반된 평가가 일어나게 된 것일까. <선조실록>은 무엇이고, <선조수정실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선조실록>은 적신(賊臣)의 괴수(魁首)에 의해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합니다.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1623년(인조 1년) 지사 이정귀가 광해군대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수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대북파인 기자헌과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찬술한 <선조실록>이 객관성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년)부터 이항복과 이정구, 신흠 등이 편찬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됐다.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됐다. 이정구가 주장한 ‘적신의 괴수’란 바로 대북파 기자헌과 이이첨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수정작업에 나선 것이다.
사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대에 처음 편찬 작업에 나설 때부터 부실논란을 빚었다. 왜냐면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1609년(광해군 1년) 실록 편찬위원이던 신흠은 <상촌휘언>에서 ‘사초실종’의 내막을 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선조 즉위년(1567년)~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의 역사기록이 깜깜한 채 징험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관인 조존세·박정현·임취정·김선여 등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상촌휘언>)
신흠은 당시 실록청 총재관(편찬위원장) 이항복에게 “잃어버린 25년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될 수 없을 것”이라 하소연했다. 그러나 편찬위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명공거경(名公巨卿·고위관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알려져 있으니 이들의 행적을 ‘열전’처럼 기록하면 당시의 사적은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초를 잃어 임금의 행적에 따라 서술할 수 없지만 신하들의 <열전> 형식을 통해서라도 <실록>을 편찬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편법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의 사건이 벌어졌다. 앞서 밝힌대로 계축옥사로 이항복 등이 쫓겨나고 기자헌 등 대북파가 나서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아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실종’ 25년의 기사는 불과 26권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들도 변란 초기 기록이 부실할 뿐 아니라, 조잡하고 당파에 얽혀 불공정한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조실록>. 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몽진길에 올라있던 사관 4명이 사초를 몽땅 불태운 뒤 사라져버렸다. 이에따라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가장 허술한 실록이 되고 말았다
■“선조실록은 왜곡사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선조실록>은 인조반정에 따른 대북파의 몰락으로 수정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정권교체가 직접 원인이 됐지만, 사실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서술도 <수정실록> 편찬의 빌미가 됐다. 역사가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대북 정권의 입맛대로 자파는 자화자찬하고, 다른 파에 대해서는 비방을 일삼는 서술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이덕형·이현영 같은 인물들과, 류성룡·정구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이항복·윤두수·신흠·이정귀와 김상헌 등을 닥치는 대로 비방했다. 특히 이정귀의 경우 폐모론에 반대해서 관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광해군에 의해 재등용될 정도로 외교관으로서의 문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선조실록>은 “사부(辭賦·한시)에 식견이 없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기자헌·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으니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선조실록> 편찬은 계축옥사와 폐모론이 진행되는 무렵 지지기반이 좁아지던 대북 정권의 실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대북정권의 고립을 촉진시켰다. 그랬으니 정변(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수정의 논의가 다시 거세게 인 것이다.
<선조실록>은 인조반정 뒤 ‘사실을 왜곡시킨 역사’, 즉 무사(誣史)라는 혹평을 들었다.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하지만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치않은 작업이었다. 이정귀 등의 상소로 추진됐지만 이괄의 난(1624년)과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 병란이 겹치는 바람에 지지부진했다.
그 와중에 폐주의 역사라는 <광해군일기> 편찬이 더 급하다고 해서 <선조수정실록> 편찬은 뒷전으로 밀렸다. 광해군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사초가 이이첨 등의 영향을 받아 왜곡됐으니 이 또한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으로 꼽혔던 것이다. 반정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딜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정귀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년) 대제학 이식이 다시금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문제를 제기했다.
“잇달아 변란을 겪으면서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들이 거의 모두 인멸되었습니다. 또 옛 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 조정에 있는 자는 한 두 명도 안 됩니다. 만약 다시 수년을 지나고 보면 신들과 같은 무리들도 점차 죽게 될 것입니다.” (<인조실록>)
<선조 수정실록> 편찬은 이식의 상소로 급물살을 탔다. 처음에는 편찬의 방법론 상에 논쟁이 벌어졌다. 최명길 등은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했듯이 수정작업은 이식이 전담하게 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사마천의 <사기>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사관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면이나 비용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것이다.
경기 양평군에 있는 이식의 사당인 택풍당이다.
이식은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면서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역사는 반드시 의논해서 공론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사편찬을 사사로이 논의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최명길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그것과 조선의 실록은 다릅니다.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습니다.” (<인조실록> 1641년 4월6일)
이식은 “역사는 홀로 담당해서는 안될 일”이라면서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식은 역사서술이 개인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는 비난을 피하려 한 것이다. 수정작업이 공론의 지지를 받으려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통한 필삭, 즉 공적인 논의구조가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조 역시 신중한 견해를 밝혔다.
“오로지 태사(사관)에게 맡기면 편찬작업이 수월할 겁니다. 하지만 선왕의 역사를 한사람의 견해에 맡겨 개인 집(사가)에서 찬술하게 하면 후세의 공론에 맞더라도 당사자인 신하는 미안스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논란 끝에 이식의 주장이 가납되어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고을별로 수집하
여 올려 보내도록 했다.
이정귀의 간찰. 이정귀는 <선조실록>은 적신의 수괴가 만든 잘못된 역사서라 비난하면서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장했다
“춘추관이 아뢰었다. ‘이식이 감히 집에서 홀로 감당해 낼 수 없다고 하여 이렇게 사양하고 회피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한 군데 빈 관사에서 동료들과 회의하여 산정(刪定)한다 해도 비용이 더 들지는 않습니다. 그의 상소대로 가능한 한 편의를 제공해 속히 완수토록 하소서.’” (<인조실록> 1641년 5월7일)
수정작업을 맡은 이식은 검열 심세정과 함께 무주 적상산 사고에 있는 선조실록 가운데 잘못된 곳을 기록한 뒤 따로 <실록담초> 1책을 만들었다. 춘추관에서 수정실록을 찬술할 때 참고하려던 것이었다. 이식은 선조 시대의 역사 가운데 1596년까지의 개수작업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식의 파직 등 갖가지 사건이 터져 수정작업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1657년(효종 8년)이 되서야 마무리됐다. 인조 원년(1623년)에 시작된 편찬작업은 무려 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주묵사 정신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편찬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수정실록>을 제작하면서 잘못된 오욕의 역사라고 지목되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선조실록>을 폐기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이 대목에서 수정본을 제작한 이식과 채유후의 분명한 역사관을 평가할 수 있다.
<주묵사>의 교훈에 따라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언급한 채유후의 영정
이식이 염두에 둔 수정실록의 전범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묵사(朱墨史)> 였다. 주묵사란 무엇인가. 중국 송나라 때 사관 범충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썼던 기법을 일컫는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다. 이것을 세간에서는 수정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다.(<송사> ‘열전 범충전’)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주묵사를 따라하지 않고, 그 정신만은 되살렸다. 먼저 이식이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주장하면서 언급한 내용을 보라.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
또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의 말은 더 분명하다.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역사서(주묵사)가 그것입니다.…수찬한 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하여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5일조)
■그들은 선조실록을 폐기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가.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잘못된 역사서술을 고친다면서 수정서를 애써 만들어 놓고 예전의 ‘그 오욕의 역사서’를 폐기하지 않았던 정신….
이식과 채유휴의 언급대로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미심쩍고, 잘못된 내용이라도 사관의 기록은 삭제하지 않고 남겨야 한다는 조선시대의 역사관을 상징하고 있다.
후세인들은 이식과 채유후 같은 역사가가 함께 남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상반된 내용을 읽고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것이 진짜 역사이자, 진짜 역사가의 자세이다. 이 참에 이식과 채유후가 남긴 한마디를 전해본다.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이식)
“무고되고 모욕 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채유후)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출처] 조선 시대 신하의 직언(直言)과 사관(史官) 이야기|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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