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국호는 누가 정했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한국호는 김일성이 제정하지 않았다.
- 1940년대 말 북한 관리했던 소련 간부를 통해 본 北역사 왜곡 -
한반도 역사를 논할 때 당시 관리를 담당했던 외국인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을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특히 해방 후 한반도 북측 관리를 담당했던 소련 간부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시절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 중에 소련 자료 보다는 '김일성저작집'이나 '세기와더불어'와 같은 김일성 회고록을 사료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김일성저작집'은 오히려 '김일성 조작집'에 더 가깝다. 즉, 1967년 이후 김일성은 자신을 조선의 해방자로 선전하도록 왜곡된 역사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당시 북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의 북반부를 관리했던 소련 관리를 이해해야 한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일본을 공격해 11일부터 한반도에 전진하였다. 한반도에서 소련 제1극동전역의 제25군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제25군의 사령관은 이반 치스챠코프이었다.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챠코프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소련군 상장, 제25군 사령관 (1947년 4월까지)
명목상 북조선에서 제일 높은 간부였던 치스챠코프는 실제 통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내린 하나의 결정은 북한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치스챠코프는 제1극동전역사령관인 키릴메레츠코프 소련 원수의 부름을 받아 제25군의 사령부를 평양과 함경남도 함흥 중 어디에 세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하라고 했다. 치스챠코프가 평양을 선택해 평양이 추후에 수도로 세워지게 될 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그가 당시 함흥을 선택했다면, 함흥이 현대까지 북한 수도로 남고 북한은 '대동강문화' 대신 '성천강문화'를 한반도 역사의 기원이라고 선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데렌티이포미치 시트코프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소련군 상장, 제1극동전역 정치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언 후 주(駐)북한소련대사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북한에서 실권이 가장 많은 인물로 평가된다. 북조선에 온 시트코프는 정치, 경제, 교육 등의 분야에서 많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북한 헌법도 편집하였고, 북한 첫 내각의 구조에 대한 결정도 내렸다. 당시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 간부는 그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1949년부터 한반도의 무력통일에 대한 꿈이 있었던 김일성은 시트코프에게 계속 남조선을 공격하자고 했다. 시트코프는 김일성의 계획을 결국 지지하고 스탈린에게 알리게 된 것이다. 이후 스탈린의 허가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남한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시트코프와 김일성의 기대와 달리 북한군대는 전체 한반도를 점령하지 못해 국제연합군의 반격을 받게 됐고, 이후 시트코프는중장으로 강등, 소련으로 소환되었다. 시트코프는 소환된 이후 북한에 다시 가본 적이 없었다.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НиколайГеоргиевичЛебедев)
소련군 소장, 제25군 정치위원
레베데프는 김일성을 가르쳤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회의록에 따르면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이 처음 주민들 앞에 섰을 때, 그를 시민대회에 데리고 온 인물이 바로 레베데프 소장이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만든 사람도 레베데프였다. 당시 북한 체계를 '인민민주주의'이라고 불렀었는데 레베데프가 나라도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개최된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 대회’ 막간에 김일성(가운데)이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오른쪽)와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시민대회 직전 소련으로부터 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갑자기 대위에서 장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메클레르는 김일성이 수여받은 무공훈장을 만져보고 있다. 쏘련 극동군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메클레르는 1945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김일성을 대중성 있는 정치지도자 로 조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안드레이 알레크세예비피 로마넨코 (АндрейАлексеевичРоманенко)
소련군 소장, 소련민간관리부 부장
시트코프의 직속부하였던 로마넨코 소장은 소련민간관리부의 부장이었다. 1945년 10월 3일 설립된 소련민간관리부는 북한 임시 정부였다. 이름과는 달리 민간관리부의 직원들은 예외없이 군인로 채워져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설립 이후에도 소련민간관리부는 북한을 관리했고, 관리부의 국(局)마다 인민위원회에 명령을내렸다. 즉, 당시에 북한을 다스리는 것은 스탈린을 수반으로하는 소련최고사령부→제25군→소련민간관리부→김일성을 수반으로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북한토지개혁 등 중요한 결정은 소련민간관리부에서 결정, 실행되었다.
겐나디이페트로비치 코로트코프 (Геннадий ПетровичКоротков)
소련군 중장, 제25군 사령관 (1947년 4월부터 1948년 4월까지)
코로트코프 중장은 레베데프 후임자로 제25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선임자처럼 북한 관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시트코프보다 계급도 낮아 그의 통치기 당시에도 중요한 결정은 시트코프가 내렸다.
물론 현대 북한에서 위에 열거된 소련 간부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기와더불어'라는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시트코프, 치스챠코프, 레베데프에 대한 내용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을 왜곡하고 있다. 조선에 주둔한 일본제국 군대를 쳐부순 세력이 소련군보다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주장하고, 김일성이 시트코프, 레베데프와 메레츠코프 등 소련 간부와 동격으로 '조선해방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실체적인 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북한의 국호는 누가 정했나?|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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