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장이야기
▲ '남좌여우' 영릉 쌍릉. 원으로 조성된 뒤 후에 추존된 능이라 장명등과 석물이 왕릉에 비해 작다.
어느 쪽에 왕의 릉일까?
그러나 이 원칙은 살아 생전에 지키던 것이고 죽으면 반대로 오른편이 높아진다. 즉, 살아서는 왼편이 왕의 자리로 좌의정이 섰고, 오른편에는 왕비와 우의정, 또 문인은 왼편, 무인은 오른편에 서는 규칙을 지켰다. 그러나 죽으면 오른쪽이 왕, 왼쪽이 왕비 자리가 된다.
계급사회였던 조선왕조에서 서열과 남녀에 따른 자리는 생전과 사후가 정반대로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위치를 기준으로 할 것인가, 왕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므로 혼란스럽다. 쉽게 왕이 가진 권력을 생각하면 된다. 모든 것은 왕을 기준으로 한다. 왕이 앉은 자리에서 왕의 왼쪽(동편)이 좌가 되고, 신하들에겐 우가 된다. 신하의 위치에서 오른쪽(동편)이 왕의 자리고, 왼쪽(서편)이 왕비 자리가 된다.
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내려다보며 앉기에, 왕의 왼편이 동쪽이 되며 우편은 서쪽이 되므로 왕에게 절을 할 때는 무조건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북향사배를 하는 것이다. 문무백관의 조회를 받을 때 동쪽이 문관의 자리고 서쪽이 무관의 자리가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죽으면 반대로 오른쪽을 높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겐 왼편이 왕의 무덤, 오른편이 왕비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합장릉일 때도 이 규칙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향에 머리를 두고 발은 정자각 쪽에 두는 것도 정해진 원칙이다. 두 언덕에 왕과 왕비가 묻혀 있고 정자각 하나를 쓰는 동원이강릉 형식의 왕릉도 마찬가지다.
이 원칙은 지금도 내려온다. 예절 교육을 받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절을 하거나 두 손을 모아 서 있을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올린다. 그러나 상가에 갈 때는 정반대로 바뀐다.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포개 절을 하고 여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포개는 것은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서열에 따른 남녀차별이라고 분개할 일은 아니다. 원래의 의미는, 좌인 동편은 양이고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것이며 이는 남자의 위치이며, 우인 서편은 음이고 달이 서쪽에서 떠오른다는 여성의 위치를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임금님의 장례
왕의 장례식은 사대부나 사가와 달라도 엄청 다르다. 보통 사람이 죽으면 염을 할 때 삼베로 만든 수의를 입히지만, 왕과 왕비의 습(襲)에는 흰 비단 옷을 9겹으로 입힌다. 그리고 죽은 지 2∼3일 내에 하는 소렴에 대행(大行. 왕과 왕비가 죽은 후 시호가 붙기 전에 일컫는 말)에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4∼5일 후의 대렴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힌다.
왕의 장례인 국장은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많은 돈과 인력을 퍼부은 대단한 중대사였고, 새로 등극한 왕이 첫 번째 국사를 맡는 일이기도 했다.
왕의 병환이 위급해지면 대신을 불러 왕위를 전하는 유교를 작성하게 한다. 임종 무렵부터 솜을 얹어 흔들리는지 살피며 소렴과 대렴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내시가 맡는다. 왕비일 때는 나인(女官)이 한다.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왕세자와 대군 이하의 친자, 왕비와 내명부, 외명부의 공주 등은 모두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며 금, 옥, 비취, 노리개 등을 제거한다.
지금도 각국 대통령이나 수장이 죽으면 전국에 계엄령이 내리고 삼엄한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상이 선포되면 계령(戒令)이 내리고 병조에서는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겹겹이 에워싼다.
이어 예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도성과 지방의 관청으로 하여금 계령을 지키게 한다. 5일간 장이 열지 못하며 작은 골목에서 필수품만 매매하게 한다.
왕이 승하 후 3개월이 지난 뒤 졸곡(卒哭)을 하는데 졸곡 전까지 혼인이나 돼지나 소 등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이 때문에 국상 한 번 나면 백성들은 고기 구경도 못하고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장례위원회와 같은 임시 관청이 3개 설치된다. 이조판서는 의정부에 보고하여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하고 국장을 분담하게 한다. 자세히 알리자면 복잡하므로 간단하게 설명하려 한다.
빈전도감은 제조(감독·지휘하는 겸임관직)가 세 명이고 그 중 한 명은 예조판서가 맡는다. 빈전도감의 일은 세 관청 중 비교적 간단하여 소렴과 대렴에 입을 옷, 빈전(일반인은 빈소라 한다), 찬궁(관을 설치하는 일), 성복(상복을 입는 일) 등을 맡는다.
국장도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가 제조를 맡고 명기, 집기류, 악기류, 대여(관을 싣는 큰 가마), 지석, 제기, 책보 등을 만드는 일을 한다.
산릉도감은 가장 고된 일을 맡는 곳이다. 즉, 능을 조성하는 일을 총지휘하며 공조판서와 선공감정이 제조로 임명되고 당하관은 10명이다. 광중(무덤)을 파고 정자각과 현궁, 비각, 수복방, 재실 등을 짓는 일을 한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 판윤을 교도돈체사로 임명하여 장지까지 가는 다리나 길을 수리, 설치하는 일을 하게 한다.
3도감의 도제조는 의정부 좌의정으로 임명하여 3도감 총호사라 하고 장례의 모든 일을 총괄 처리한다.
국장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세 곳의 관청 조직을 지금까지 대충 봐도 의정부 좌의정, 이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공조판서, 한성 판윤이 참여한 중대한 국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영의정 이하 모든 고위관료가 능 택지에 서로의 목소리를 내려고 풍수의 지식을 동원했고, 지방의 관료들까지 국장에 참여하려고 잘 본다는 풍수를 뽑아 올리는 일이 허다했다.
명당에 국장을 잘 치른 뒤 풍수를 천거한 관료들이나 자기 의견이 채택된 대신들은 새 왕이 등극한 후 첫 인사 업무인 논공행상에서 벼슬이 올라가, 이후에 새로운 권력자의 눈에 들어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눈에 쌍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 인조의 장릉 뒤에 불쑥 솟은 잉은 명당을 증명하며 영조가 아들을 얻기 위해 정성들여 천장한 왕릉이다. 천장한 지 3년 후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얻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능의 택지 선택 과정에서 새 왕의 성향에 따라 관료들이 물갈이가 된다는 점이다. 왕심을 잘 읽어 왕의 내심에 맞는 능지를 선택하면 그대로 남아 승진하고, 잘 읽지 못하면 즉시 삭탈관직을 당하고 귀양을 가야 했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이라 해서 다 명당이 아닌 이유가 밝혀진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죽자, 10일 등극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계승이지, 효장세자(영릉. 사도세자의 이복형)의 계승이 아니다'는 첫 교지를 내리고, 영조 생전에 신후 지지로 잡아놓았던 왕비 정성왕후가 묻힌 서오릉의 홍릉을 쓰자는 황해도사 이현모를 삭탈관직한다.
또 3월 28일에 국장을 총지휘하는 3도감 총호사를 갈아치우는가 하면,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던 숙의 문씨를 삭탈관직하고 가족을 멸문했다. 권력의 판도가 달라지는 긴박한 순간이다.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정조의 복수는, 100여 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 하느라 비워진 파묘 자리에 할아버지 영조를 묻어버리기에 이른다.
제 아무리 천하의 권력을 가진 왕일지라도, 죽으면 새로운 왕 앞에선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권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정조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복수장면이다.
국장은 비록 왕의 장례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긴 풍수를 빌미 삼아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다'는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측근을 곁에 두고 선왕의 골 아픈 실세들을 정리하는 기간이 국장 기간이기도 했다.
지금도 대통령이 바뀌면 새로 각료를 인선하는 것과 같이 왕이 국장을 맞아 자신의 권력에 필요한 관료로 바꾸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장례를 치르기까지 5개월 동안 계령이 내려져 겉으로는 전 백성이 애도하는 기간으로 못박았으나, 실제로는 장례기간 동안은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왕권을 다진 시기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영욕의 시간을 보낸 왕과 왕비가 떠난 자리 위로 지나가는 자연은 무심하지만, 왕과 왕비였다는 이유로 후세에 무덤 앞에 선 인간들에게 회자되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
냉동 영안실 - 왕의 시신이 썩으면 어찌하오리까?
▲ 창녕 석빙고
조선시대 냉동 영안고, 설빙(設氷)
국장을 관장하는 3관청 중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무덤에 넣는 부장품을 만드는 일이다.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은 정해 있고 장례 맨 나중에 행하는 일이니 다음에 밝히기로 하고 왕과 왕비의 장례절차로 되돌아 가보자.
"5개월이나 되는 장례기간 동안 시신이 썩으면요?"
"흙에 닿을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됩니다."
▲ 창녕 석빙고 내부
그러면 냉동시설도 없는 조선시대에 어떻게 처리했는가? 왕과 왕비라고 해서 죽는 시간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도 아니고 더위에 헉헉대는 한 여름에 죽을 수도 있다. 풍수 때문에 왕과 왕비는 흙에 닿을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겨울이라면 문제가 없겠지요. 대나무로 평상을 만들어 대행(유해)을 놓고 얼음을 주위에 놓습니다. 동빙고에 저장한 얼음을 쓰지요."
왕의 시신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 공조에서 빙반(氷盤)을 만든다. 길이는 10자(3m), 넓이는 5자4촌(1.6m), 깊이는 3자(90cm)의 조선시대 냉동 영안실이다. 이 빙반을 바닥에 놓은 다음 그 위에 대로 만든 평상(잔상)을 빙반 위에 설치한다. 물론 빙반이 잔상보다 더 크다. 이것을 설빙이라 한다.
생각보다 유해를 위한 냉동고는 아주 완벽하다. 밑에 있는 빙반에만 얼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면에 대나무로 만든 잔방(棧防)을 둘러싸서 얼음을 쌓아 올린다.
▲ 2003년 1월 안동에서 열린 장빙제(藏氷祭) 행사 장면. 장빙제는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해 석빙고에 얼음을 채워 은어를 보관하던 절차를 재현한 행사다
시신이 누워 있는 평상인 잔상(棧牀)에는 사방에 대 그물까지 붙여 습기를 방지한다. 그리고 습기를 흡수하기 위해 마른 미역을 사방에 쌓아놓고 계속 갈아댄다. 이것을 '국장미역'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얼음 저장고는 석빙고인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다. 동빙고는 왕실 제사 전용 얼음 저장고이고 서빙고는 대장금이 활약했던 어주(왕실의 부엌)와 문무백관에게 여름에 내리던 얼음을 저장했던 곳이다.한강에서 채빙한 얼음은 두께가 12cm 이상이라야 했고 오염되지 않는 곳을 택해서 떴다. 한 정(丁)이 최대 사방 6자(1.8m)인 얼음을 뜨기도 했다 하니 얼음을 담당했던 백성들의 고초를 알 만하다.
조선시대 냉동고인 동빙고의 얼음 저장량은 서빙고보다 1/10 이하로 적었다. 국상이 한 번 나면 동빙고와 서빙고의 약 15만 정에 이르는 얼음이 고갈될 정도였다. 그래서 왕이나 왕비가 병이 나서 위태하거나, 연로할 때는 국상을 대비해서 평년 두 배 정도 얼음을 미리 비축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왕과 왕비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씨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능에도 사가와 마찬가지로 산신제를 지내는데 쓰는 산신석이 있다. 보통 산소에 가면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제사를 지내지만, 능에서는 왕과 왕비의 제사를 먼저 지내고 산신제를 지낸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고 조선 팔도에 거주하는 산신도 왕의 지배 밑에 있다는 의식인 셈이다.
현대에 태어난 것을 새삼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한다. 혹시 전생에 내시나 궁녀여서 5개월 동안이나 죽은 왕 옆에서 미역과 얼음이나 갈아대고 지냈다는 끔찍한 상상을 한다면? 현대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 장릉의 산신석
왕의 무덤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 순릉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부장품으로 무엇이 들었는가, 질문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사실 호기심을 자아낼 듯싶은 거대한 능상을 보면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저 커다란 무덤을 파면 도대체 속에 뭐가 들었을까?
카터가 발굴한 이집트 투탕카멘 피라미드에서 황금 관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보물이 쏟아져 나왔고,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 찬란한 금관이 나온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왕의 무덤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지 기대와 궁금증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 간과하는 것이 있다. 금빛 찬란한 왕관이나 보물이 든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무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고대 고분들이다.
조선시대는 중세도 아닌 근대사회다. 근대사회라는 건 고대와는 달리 살아 생전의 물건을 고스란히 집어넣고 심지어는 인간까지 순장하는 고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 장릉 참도와 정자각
근대사회는 현대에 못 미칠지언정 현대에 가까울 정도로 명분상 비슷한 사회제도를 만드는 시늉을 한 시대다. 중세사회인 고려가 귀족시대였다는 건 중학교 국사만 공부해도 누구다 다 아는 사실이다.
고려의 귀족사회는 제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없었고, 조상을 잘 두면 재산과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아 은수저 입에 물고 태어나서 죽는 것을 나라가 제도로 보장했다.
물론 조선도 신분 사회니까 문반과 무반을 일컬은 양반과 중인, 양인, 천민 제도가 있었다. 조선과 고려의 시대 구분의 확실한 차이는 과거제도에서 볼 수 있다. 귀족사회인 고려와 근대사회인 조선의 과거제도의 분명한 차이점은, 조상이 귀족이었느냐가 아니고 시험 성적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다.
귀족에게 온갖 특권을 주는 음서제도 때문에 인재일지라도 제도의 한계에 길이 막혔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목상으로 양인에게까지 과거를 볼 기회를 열어놓는다. 조선으로 오면 과거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는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나 준다는 얘기다. 실제로 양인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으나 원천봉쇄한 고려와는 다른 점이다.
제도는 근대사회답게 완벽했지만, 돈 없으면 고액과외나 사교육 받을 기회가 없고 고교등급제라는 최신 입시제도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일류대학 입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새천년 시대와 흡사한 면이 있긴 하다.
조선의 국장제도를 언급하다가 조선과 고려의 과거제도까지 가면 곁가지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그친다.
무덤 속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누구나 흥분한다. 도굴 당하지 않은 투탕카멘의 피라미드가 발굴되자 전 세계가 흥분했고, 1500년 전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과 찬란한 불꽃 모양 왕관을 보고 우리나라가 열광했다.
그렇지만 조선의 왕릉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대에 가득 찬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부장품까지 기록에 남아있고 왕과 왕비의 무덤에 무엇을 넣는다는 것도 정한 조선은 근대사회기 때문이다.
명당의 제1조건은 잘 썩는 것, 도굴꾼들이 열심히 파봤자...
▲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 순릉의 능상과 석물
능을 찾는 관람객이나 답사반들이 유의해야 할 일은 금지된 구역에 갈 때는 관리소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멋대로 올라가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하고, 멋대로 올라가다가 관람을 금지 당할 수도 있다.
▲ 순릉의 장명등과 석물
"조선왕릉은 명당이라고 하죠? 명당의 조건은 잘 썩어야 하는 거구요. 조선의 왕릉에 넣는 부장품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다 알죠. 부장품들도 명당이라 수백 년 지났으니 거의 썩어서 없을 거구요."
이 질문을 했던 사람만 아니라 연재를 읽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부장품일 것이고, 언제 밝히는지 기다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것을 밝히려고 한다.
국상이 나면 국장도감에서 명기를 만든다. 명기(明器)는 신명(神明)의 그릇이라 명기라고 하며 생전에 쓰던 물건들의 상징이라 일부러 거칠고 조잡하며 작게 만든다. 그러니 왕실에서 쓰던 훌륭한 명품 도자기라도 무덤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 존호를 올릴 때 쓰는 옥보와 존호를 새긴 금보(금도장)를 싣는 책보요여.
그밖에 의류, 집기류, 무기류(왕비일 때는 넣지 않는다), 악기류, 지석 등 종류와 가짓수는 많지만 기대하는 금은보화 보물은 넣지 않는다. 값이 나간다면 금으로 만든 도장 정도랄까? 이것도 왕이 생전에 쓰던 커다랗고 호화스러운 옥새가 아니고 무덤에 넣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작은 것이다. 국가의 상징이기도 했던 옥새는 왕이 죽으면 다음 왕에게 넘겨진다.
왕의 무덤에는 면류관을 넣지만 주재료는 비단인 증(繒)이고 오색 구슬을 매달아 늘어뜨린다. 그나마도 왕일 경우고 왕비일 때는 면류관을 넣지 않는다. 임진왜란 당시에 도굴 당한 왕릉은 더러 있었지만 애쓰고 파헤친 수고에 비하면 건진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 반우거
국장도감에서 하는 일은 발인해서 장지까지 가는 동안 명기를 싣고 가는 가마인 명기요와 의복과 완구를 싣는 복완요여, 형을 싣는 향정, 책보의 요여, 소여, 대여, 반우거 등 가마들과 재궁(관)을 싣는 대여를 만든다.
또 국장행렬에는 소개, 소선, 홍개, 청선, 용선, 작선, 봉선 등 부채를 들고, 한, 필, 가서봉, 은립과, 은횡과, 금등, 표골타자, 용골타자, 등등 들고 가는 것이 많다. 은관자나 은우(은으로 만든 물 긷는 주전자) 등은 은으로 만들지만 말등자에 꽂는 금등(金燈)도 구리쇠로 만들어 도금한다.
▲ 위로부터 용마기, 백학기, 백택기
대여를 비롯해 명기와 부장품을 실은 가마도 여럿이지만 깃발을 들고 가는 이도 엄청 많다. 홍문대기, 군왕청세기, 천하태평기, 주작기, 청룡기, 백호기, 황룡기, 정축기 등등 헤아릴 수 없다.
국장행렬에는 5천명에서 1만명까지 장지로 따라간다. 조선의 인구가 많아야 6백만명에서 5백만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고, 수많은 깃발(깃발과 은작자 은월부 등을 든 사람은 옷과 모자가 각각 다르다)과 대여를 비롯한 가마들과 장식한 말들, 방울을 쩔렁대며, 왕과 문무백관, 궁녀와 내시 등의 행렬을 상상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어두운 명계의 궁전이라 하여 광(무덤)을 현궁(玄宮)이라 한다. 산릉 부역에 동원된 백성은 군사라 하고 보름이나 한 달 치의 식량을 짊어지고 가서 일을 했다.
예종의 창릉 산릉부역에 동원된 군사가 7000명이었고, 세종의 천장에 부역꾼 5000명과 공장(工匠) 150명, 쌀 1323석 5되, 소금 41석 3두(斗)가 소요됐다고 기록은 전한다.
1674년 5월 28일 발인한 17대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장례에는 광나루에서 한강 수로를 이용해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까지 가는 도중 2박을 한다. 이때 쓰인 배가 150척이고 배를 모는 선군(船軍)이 3690명이었다.
6월4일 장사지냈는데 산역은 조선 팔도의 승을 징발해 3200명이 보름분 식량을 지참하고 일했다. 이때 산역 인원이 적은 것은 효종의 능이 이미 조성된 뒤라 정자각이나 비각, 재실 등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승을 산릉 부역에 동원하는 것은 농사짓는 철에 백성 동원을 하기 어려울 때이다.
▲ 장릉 병풍석과 밑의 박석(상석). 치마주름을 닮았다해서 상석이라 하며 화강암을 쓴다.
중종이 장경왕후와 함께 묻힌 것을 질투한 문정왕후 때문에 강남 삼성동으로 중종을 천장할 때, 백성들이 병풍석 등 석물 부역에 다치고 죽어 늦어지자 보우가 승을 5000명 동원해서 일을 마쳐 문정왕후의 환심을 샀다. 그렇게 천장한 중종의 정릉은 해마다 물난리로 쓸려 내려간 흙을 복토 하느라고 국고를 탕진해야 했고 질투 때문에 죽은 지아비를 옮긴 문정왕후는 그나마 중종의 곁에 묻히지도 못하고 태릉에 잠들어 있다.
거창한 국장이 끝나고 나면 재궁을 실었던 대여 등 가마들은 불사른다. 다만, 신하들이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불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국장이 날 때마다 국장도감에서 상여를 다시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조선의 국장제도는 태조 이성계가 죽자 처음 국장을 맞은 태종이 송나라의 제도를 도입해 확립한 것이다. 고려의 국장은 조선과는 달리 1개월 이내였고 2달을 넘긴 예가 드물었다. 정착하지 못한 신생왕국의 위엄과 기세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후 왕과 왕비는 5개월로 국장기간이 정해졌고 정4품 이상 사대부는 3개월, 그 밖의 사람은 1개월로 장례기간을 국법으로 정한 것이다. 대통령 중에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9일간 마지막으로 국장을 치렀다. 보통 3일이 현재 보편화 됐고 유명 인사들의 사회장도 5일을 넘기지 않으니 장례기간과 후손발복은 관계없는 일로 판명된 것이다.
무덤을 깊이 파면 왕위찬탈 ? - 왕릉 10자 깊이의 비밀
▲ 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조선의 국장은 밤중에 발인해서 대궐을 출발한 예가 많다. 또 관을 하관하는 시각도 한밤중이거나 새벽일 경우가 많다.
자시(23시-01시)에 하현궁(下玄宮·하관)한 왕은 태조고, 축시(01시-03시)는 세조, 문종, 숙종계비 인현왕후,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있고 인시(03-05시)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현종 비 명성왕후, 철종비 철인왕후가 있다. 또 새벽 5시에 예종이 하관했고 새벽 3시에 중종이 하관했다.
▲ 중국 풍수지리지에도 소개됐다는 명당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 묘에 이르는 200여m 구불구불한 언덕이 흡사 황룡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
밤중이나 저녁에 발인해서 국장행렬이 장지로 갈 때는 싸리 횃불 500개가 동원됐다. 백의와 백건을 두르고 흰 버선을 신은 상여꾼 800명이 대여를 드는데 4번 교대한다. 이 싸리 횃불은 조선시대의 국장행렬이나 하관을 할 때 쓸 뿐 아니라 결혼식에도 썼다.
싸리나무를 다발로 굵게 묶어서 쓴 것으로 추측하는(싸리 횃불 모양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싸리 횃불은 기름기가 많아서 불이 잘 붙고 나무가 단단하며 연기가 잘 나지 않는다.
조선의 결혼식은 저녁에 했다. 결혼의 혼(婚)자를 파자하면 女子가 어두운 저녁(昏)에 맺어진다는 의미다. 세종 11년(1429) 2월 5일, 결혼식장 초례청에 밝히는 싸리 횃불을 정2품 이상은 양쪽에 5자루씩 10자루를 쓰고, 3품 이하는 6자루를 쓰도록 정했다.
사대부 집안의 장례에 쓰는 싸리 횃불도, 세종 15년 8월 24일 정2품 이상은 20자루, 2품 이하는 12자루를 쓰게 정해서 국장과 꽤 차이가 났다. 싸리나무가 귀한 것도 아닌데 숫자를 정하기까지 했으니 왕과 일반인의 신분차이를 확실히 못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무덤 깊이와 천기누설
왕릉 자리를 정할 때 풍수로 명당을 선택하는데, 왕릉 길지를 살피고 점혈 하는 관리를 상지관(相地官)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현무, 남주작,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인 곳 끝머리 황룡(黃龍)이 있는 곳이 왕릉터가 된다. 양쪽에서 명당수가 흘러내리는 배산임류(背山臨流)의 이런 명당 자리를 길상지라 한다.
상지관이 왕릉 자리를 점혈(點穴)하면 다시 의정부 당상관이 주위 나무를 베어내고 산세를 살핀 뒤에 왕에게 보고한다. 왕은 직접 현지를 답사하거나 도면을 본 뒤 최종 확정한다.
요즘 수맥에 관심이 많은데다 과학으로도 수맥 현상이 증명돼 질병을 유발하는 수맥을 피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이 나온다. 풍수에서도 묘 자리를 잡을 때 수맥을 금기시한다. 그 수맥이란 것이 지하 70-80m에 있으니 육안으로 봐선 알 방법이 없다.
수맥 위에 잡은 묘는 시신의 뼈가 까맣게 변한다. 수맥에 쓴 묘는 후손에게 감응해 우환을 끼치는데 수맥이 머리를 지나가면 머리에 이상이 있는 후손이 나오고, 다리를 지나가면 다리를 다치거나 못쓰는 가족이 나온다고 <고려·조선릉지>의 저자 목을수씨는 말한다.
▲ 목을수씨에게서 받은 24방위표. 풍수를 공부하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목을수씨에 따르면 묘의 후손감응은 3대를 넘어서지 않기에 제사도 3대를 지내는 것이라 한다. 화장을 하면 후손에게 아무 해가 끼치지 않으니 겨우 3자(90cm)나 4자(120cm)를 파고 묻는 요즘 공원묘지 장의 풍습보다 차라리 화장이 더 낫다고 밝힌다.
▲ 소령원 숙빈 최씨 무덤 뒤에 불쑥 솟은 잉. 무덤 뒤에 작은 잔디 언덕이 명당에서 보인다는 잉(孕)이다.
흉당의 대표적인 사례는 벌레가 나오는 충렴, 수맥이 흐르는 수렴,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도시혈을 들 수 있다. 왕릉을 잡을 때 파서 오색토가 나와야 하는 조건도 포함돼 있다. 오색토란 명당의 조건으로 꼽히는 흙이다. 돌이 나와도 안되고 습기가 있는 진땅도 후손에게 우환이 생기므로 안된다.
그렇다면 왕의 무덤 깊이와 넓이는 얼마일까?
왕실풍수에서 왕기를 받는 깊이가 10자(3m)라고 이미 밝혔다. 당시 조선왕실은 일반 백성들이 무덤을 10자 깊이로 파서 왕기를 가로챌까봐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나아가 국법으로 일반 백성들의 묘를 얕게 파도록 정했다.
풍수에서 무덤은 최소한 6자 이상이 되야 후손 발복으로 인재가 나온다고 한다. 신하나 대신에게도 적용된 일반인 5자(1.5m) 깊이를 어기면 왕위찬탈 음모를 꾀한 중죄인으로 몰린다. 인재가 많이 나오면 왕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왕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왕기가 있을 만한 전국의 명당을 골라 절을 짓고, 탑과 당간지주를 세워 지기(地氣)를 눌러버렸다.
풍수에 대한 조선왕조의 신봉은 신경질적일 만큼 강했다.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은 원래 함주(咸州)였던 것을 왕이 일어났다 해서 함흥(咸興)으로 격상시켰고 고을 주(州)가 들어간 지명은 천(川)으로 낮춰버렸다. 과주가 과천이 되고, 묵주가 묵천, 진주가 진천으로 바뀐 것은 태종 15년(1415)인데 이것도 병적으로 과민한 왕실 풍수 때문이었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에 왕릉이 몰려 있는 것도 조상 묘를 한 능선에 집단으로 쓰면 땅의 지기를 집중적으로 얻는다는 풍수에서 연유한 것이다.
▲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어머니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수길원. 풍수에서 대가 끊기는 흉당이라 한다.
고려도 왕릉과 귀족을 제외하고 일반인은 2자(60cm)에서 3자(90cm)를 팠다고 기록에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무덤 깊이에 관한 풍수의 비밀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에는 모든 왕릉을 10자로 팠으나 중기부터 혈의 깊이가 신축적으로 변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손꼽히는 명당인 융릉으로 천장한 정조는 정말 풍수에 박식한 왕이다.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잡저(雜著)편 천원사실(遷園事實)에서 "혈(穴)의 싶이가 8-9자면 깊은 데 속하고 5-6자 이내는 낮은 데 속한다. 대체로 마땅히 얕게 파야 할 곳을 깊게 파면 지기가 광중 위로 스쳐지나가고 반대로 깊어야 하는 데 얕게 파면 지기가 광중 아래로 지나가니 깊고 얕음을 적절히 해야한다"고 썼다.
사도세자를 명당에 묻으려고 현재 경기 화성에 있던 수원부를 현재 수원 자리로 200여 호 마을을 모조리 옮기고, 수원부 객사(客舍) 뒤의 화산(花山)으로 천장을 단행한 정조는 이장에 길한 해를 택하려고 13년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사도세자의 융릉은 물론 정조가 직접 가서 보고 선택한 것이다.
정조의 풍수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조는 광중을 팔 때 10자를 파지 말고 7자를 파서 흙의 색깔이 좋은 진토가 나오면 중단하라고 명했다. 광중을 파내려 가자 정조의 예언은 맞아서 생기를 가진 흙이 나왔고 그 지점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것이다. 아마도 이 흙이 오색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정조가 왕이라 하나 당시에는 왕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능으로 추존할 수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융원(顯隆園)이라고 명명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를 백성도 꺼리는 파묘(다른 시신을 쓰고 파낸 묘) 자리에 파묻어 버려 복수를 하고, 최고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옮겨 한을 풀었다.
고종은 대원군의 왕실 권위 되찾기에 동조했는지 유난히 많은 조상무덤에 존호와 능호를 내려 추존한다. 현융원도 광무 3년(1899년) 11월 12일(양력) 장종(莊宗)으로, 12월에는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절차를 밟아 고종이 황제에 오른 뒤에는 융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된다.
고종이 사도세자까지 황제로 추존했으니 능도 만들지 못해 원으로 그쳤던 정조의 한은 풀리고도 풀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 이후 조선이 급속히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 정조가 원했던 아버지의 발복은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파묘자리 흉당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12월에도 낙엽 속에 보라색 가지버섯이 솟아오를 정도로 흙에는 왕성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게 조선조 왕들이 집착했던 왕릉풍수라는 것도, 자연 속에서 태어나 살다가 흙으로 되돌아가서 자연과 일체로 변하는 과정이라고나 할 무상함이 보인다.
▲ 예종 원비 장순왕후 공릉.
공릉, 순릉, 영릉 등은 왕과 왕비가 죽고 난 뒤에 내리는 능의 이름이다. 이것을 능호라 한다. 이 능호가 붙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아주 재미있다.
태조 이성계의 능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원(元)과 쉬지 않고 운행되는 하늘의 도라는 의미의 건(健)을 따서 건원릉(健元陵)이라 했고 그밖에는 모두 외자 이름이다.
정종의 후릉은 숙종 7년(1681) 여러 가지 신중한 생각이 틀림없다는 뜻에서 후릉(厚陵)이라 했고, 비운의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는 83세까지 살도록 남편을 그리워하고 생각했다 하여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폐출되자 중종을 그리워하며 인왕산에 치마를 펼쳐놓아 치마바위의 유래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단경왕후는 살아서는 왕비로 복위되지 못하고 명종 12년(1557) 71세로 세상을 떠나, 영조 15년(1739) 3월 28일 비로소 능호와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중종반정으로 사랑하는 지아비와 생이별을 한 단경왕후는 죽는 날까지 따스한 손길이 그립다 해서 온릉(溫陵)이 된 것이다.
능호는 무덤 주인공의 성격을 인간적이고 솔직한 눈길로 평한 것이 보인다. 능호를 보고 주인공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주인공의 삶에서 능호의 유래가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선조, 중종 등의 묘호가 의례적이고 형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반면, 능호를 보면 어쩐지 조선시대의 국장제도에서 따뜻한 인간미가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장과 부장품 ▲ 순릉 조선의 국장제도뿐 아니라 고려의 장의 풍습을 봐도 중국보다 훨씬 앞선 사회제도라는 것이 보인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검소하고 절약하라는 국가 정책에 의거해 13일에서 44일까지 장례기간을 정했고,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야 주자의 '주자가례'를 도입해 3개월 상을 고수했다.
부모가 늙으면 산에 먹을 것을 주고 내다버린다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야만적인 고려장은 실제 고려에는 없던 제도이다. 고려 성종9년(990)부터 인종4년(1126)까지 현종 즉위년(1009) 7월 신미일, 문종11년(1057) 7월 갑오일 등, 15회에 걸쳐 80세 이상 노인을 궁궐로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비단을 나눠줬다('高麗史'世家)는 경로잔치 기록이 있어 근거 없는 전설임을 증명하고 있다.
왕이 죽으면 사람이 따라죽는 순장제도는 고대사회에서 있던 풍습이고 우리나라는 신라 지증왕 때 순장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오래 전에 순장이 없어졌다. 순장대신 상징적인 토용을 만들어 무덤에 넣는 것이 발전된 사회형태이지만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까지 순장제도가 있었다.
명에서 조선에 요구했던 것 중 하나가 처녀를 바치라는 것이었다. 조선초기에 뽑혀 끌려간 공녀들의 신분을 보면 사대부 집의 딸이었고 명의 요구대로 용모가 아름다워야 했다.
세조의 정유재란 거사에 한명회와 함께 일등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른 한확의 누이는 둘 다 명에 끌려가는 비운을 맞는다.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인 한씨 처녀는 태종 17년(1417) 명에 끌려가자 기품있는 아름다운 미모와 영리함을 갖춰 영락제의 눈에 들어 비로 봉해진다. 그러나 세종6년(1424) 명의 황제 영락제가 죽자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해 죽게 된다. 이 비극의 여인이 공헌현비 한씨이다.
공헌현비 한씨와 궁인 30명을 뜰에 모두 모아놓고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밥을 먹인 후, 마루에 올라가라 하니 울음이 진동했다. 의자에 올라가 매달린 올가미에 목을 걸고 유모 김흑에게 "낭(娘)아, 나는 갑니다"는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환관이 의자를 빼내 죽었다(세종실록권26).
세종10년 10월4일, 미모로 소문났던 한영정의 막내딸이 처녀를 바치라는 사신의 집요한 요구에 또 가게 되자, 명으로 가는 한씨 처녀의 행차를 보던 사람들은 언니가 죽었는데 또 끌려간다고 한탄을 했다(세종실록권42).
생전의 물건과 가축, 사람을 고스란히 집어넣던 순장제도는 사회제도가 발전함에 따라 상징적인 물건으로 대체한다.
중국여행을 다녀와 거대한 황제릉을 보고 조선왕릉을 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하지만 원시적인 잔인성을 벗어나지 못한 순장을 최소한 15세기까지 고수하던 중국과 생명의 존엄성을 실천한 우리 조상이 과연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작고 거칠고 추악하게 만들어 살아 생전의 물건을 대신하는 조선왕릉의 명기는, 장례의 예는 지키되 정신세계에 더 비중을 두고 생명을 존중하고 있다. 조선왕릉의 부장품을 보면 악기류에 아쟁, 대쟁, 비파, 향필률, 대금, 가야금 등, 작게 만든 악기를 넣고 목가인(木歌人) 8명, 목공인(木工人) 33명을 함께 넣어 상징성으로 그친다.
또 순장 대신 넣는 목비(木婢) 50개, 목노(木奴) 50개, 목안마(木鞍馬) 2개, 목산마(木散馬) 2개를 봐도 알 수 있다. ▲ 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왕비의 무덤에는 화장품이 들어가는데 나무로 만든 목비녀, 대나무 빗, 나무빗, 지분통, 거울 등 넣어 생전의 물건을 대신했다.
잔, 술병, 향로, 그릇들은 자기로 만들지만 아주 작고 거칠며 보잘 것없다. 수저와 접시, 밥상 등도 나무로 만들어 검은 칠을 하거나 칠하지 않는 소박한 물건들이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도 발굴되는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중요한 유품이다. 조선왕릉의 지석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청옥산의 청석을 채취해 개석과 밑돌, 두 개를 만든다.
'미친 방상씨'가 앞장서는 국장 - 왕릉 무덤 속을 들여다보면
▲ 경기 고양시에 있는 중종 계비 장경왕후 희릉 문종의 부장품과 하현궁(하관)
수양대군은 문종이 일찍 죽을 거라는 가정 하에 왕위를 노렸을까? 그건 좀 의문이 생긴다. 세종의 맏아들이며 5대 임금인 문종은 28년 동안이나 제왕학을 공부하고 학습한 준비된 군주다.
문종은 8세에 왕세자로 책봉돼 36세에 왕위에 오른 제왕이다. 그리고 39세에 조선조의 많은 왕들처럼 종기를 앓다가 터져 죽었다. 조선왕조의 제왕 평균수명이 42세라는 걸 보면 그리 일찍 죽은 건 아니다.
문종은 이미 세종이 병환 중에 있을 때 대신 정사를 돌본 경험이 있다. 병환이 나도 옥체를 돌보지 않고 정사에 골몰하는 것을 걱정한 신하들은 하루 걸러 한 번씩 정사를 하기를 청했으나 "군주가 향락을 즐긴다면 천년을 살더라도 부족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1년이라도 만족할 것이다. 반드시 나라를 근심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며 스스로 안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랜 동안 갈고 닦은 제왕학을 채 펼치기도 전에 문종 3년(1452) 종기가 터져 5월14일 유시(17-19시)에 죽었고 8월28일 자정에 발인하여 오시에 도착한다.
이때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남동쪽 혈에 자리잡은 산릉을 답사하고 결정한 사람은 수양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과 풍수학랑관이다. 9월1일 축시(01-03시)에 장례 지내고 우의정이 흙 아홉 삽을 떠서 뿌리자, 산릉도감이 작공(作工)들을 거느려 삽질을 계속해 일을 마친 뒤 지석을 묻는 것으로 끝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문종의 무덤에 넣은 명기와 복완의 부장품 기록이다.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제왕의 무덤에 넣는 부장품을 기록에 남겼다.
대충 살펴본다면, 소 8개, 와조 2개, 와잔 3개, 와병 1개, 와궤 2개, 금 1개, 우 1개, 장고 1개, 대금 1개, 현금 1개, 동궁 1개, 착(窄) 1개, 갑옷 한 벌, 투구 1 개, 세숫대야 1 개, 젓가락 1 개, 식탁 1개, 기타 등등이다.
광중에 부장품으로 넣은 복완(服玩·의류와 완구)은 증백·청의·중단·폐슬·홍말·수건·거울·토등상(대나무 그릇)·주칠간자 3개 등이었다.
제왕의 염습과정을 보면 습에 흰 비단 수의 9벌을 입히고, 소렴에 19벌, 대렴에 90벌을 입힌다. 왕세자나 세자일 경우는 조금 적지만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 대렴에 70벌을 입혔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그 많은 옷을 과연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이것은 가능하고 정확한 기록이라 본다. 왕위에 오르는 해에 소나무 3치(9cm) 이상의 황장목으로 미리 내관을 준비해 둔다. 물론 국상이 나면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을 바르고 옻칠을 해서 관의 안팎을 장식한다.
예전에 '파평 윤씨 모자 미라'의 내관에서 나온 복식 류가 지금까지 나온 것 중 가장 많은 66점에 이르렀다. 당시 최상류층이던 미라였지만 첩실의 딸이며 여인이라는 걸 감안해도 많은 의류가 나왔는데 왕과 왕비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관을 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관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고 형편에 따라 약간씩 달라진다.
▲ 위로부터 빙반, 잔상, 잔방. ⓒ <고려·조선릉지>(목을수 저) 대렴 이후에 새로운 왕이 등극하고 국장을 주관하게 된다. 염습이 끝난 후 왕의 시신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한 빙반을 만든다. 잔상(대나무 평상)을 얼음을 담은 빙반 위에 올려놓고 빙반을 중심으로 사면에 얼음을 담은 잔방을 두게 된다.
이 빙반은 사면에 큰 고리쇠를 걸고 겹친 베를 고리에 꿰는데 얼음을 갈 때 들기 편하게 하려는 뜻에서 이렇게 한다. 날씨가 그리 덥지 않으면 전목반(全木槃)에 얼음을 담아서 평상 아래와 사면에 적당하게 두기도 한다.
▲ 인조와 인열왕후 합장릉인 장릉.
▲ 방상씨 ⓒ <고려·조선릉지> 합장릉일 때 광중 깊이는 10자, 너비는 29자(9m), 길이는 25자(7.6m)로 판다. 석곽을 쓰지 말라한 세조 이후 회곽을 쓰게 된다. 이 회곽의 재료는 석회 3/5, 황토와 세사(細沙)를 각각 1/5씩 배합해 느릅나무 삶은 물로 반죽한다. 광중은 왕과 왕비 두 개의 방으로 나뉘며 각 방이 길이 10자(3m), 너비 5자5촌(1.6m)이다.
남쪽으로 길을 임시로 내어 하관할 시각이 되면 방상씨(方相氏) 4명이 먼저 들어가 창으로 네 귀퉁이를 친다. 이 방상씨는 흉사를 막아주는 역할로 국장행렬에도 앞장서서 미친 척 하는 시늉을 하며 영구를 인도한다. 황금으로 눈을 4개 만든 가면을 쓰고 검정상의와 붉은 치마를 입고, 곰 가죽을 쓰며 창과 방패를 치켜들어 악귀가 두려워하게 한다.
광중 넓이는 겨우 관만 들어갈 정도라서 사람이 들어가서 일하기 힘들기 때문에 윤여(輪輿)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윤여는 재궁을 대여에 실을 때와 현궁(무덤)에 관을 넣을 때 사용한다. 윤전을 편리하게 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무를 끼운 구멍에 꿀을 탄 기름을 바른다. 대관(외관)에 재궁(관)을 넣고 윤여를 이용해 하관한다. ▲ 윤여 <고려·조선릉지> 하관하고 난 후에 명기와 복완 등 부장품을 넣는다. 부장품 넣는 일이 끝나면 왕과 종친, 문무백관은 그곳을 떠나고, 산릉도감 제조가 관원을 거느리고 현궁을 닫는데 영의정과 사헌부 집례가 닫는 것을 함께 감독한다.
▲ 재궁(관)을 윤여위로 밀어넣는 모습. <고려·조선릉지> 그리고 우의정이 흙 9삽을 떠서 덮으면 본격적으로 흙을 덮기 시작해 높이 10자(3m)에서 15자(4.5m)의 능상이 완료되는 것이다.
▲ 재궁(관)을 현궁(무덤)에 넣은 뒤 윤여를 물려내는 모습 ⓒ <고려·조선릉지> 마지막으로 지석을 묻고 난 후, 관상감 관원이 토지신에게 후토제(后土祭)를 지내고 대여 등을 불사르는 것으로 기나긴 국장이 끝난다. |
'☆우리의 역사☆ >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Ⅳ (0) | 2018.02.14 |
---|---|
조선의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관계[한중 5000년④] (0) | 2018.02.13 |
숨쉬는 조선왕릉 (0) | 2018.02.06 |
조선 시대 신하의 직언(直言)과 사관(史官) 이야기 (0) | 2018.02.01 |
신병주의『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Ⅲ (0) | 2018.02.01 |